스카이
- 감독
- 최진주, 남다은
- 제작년도
- 2014
영화제에 출품된 작품들을 관람하다 보면 의식하지 않아도 그해의 경향이 눈에 들어오곤 한다. 특정 주제나 장르가 반복해서 등장하거나 서사를 풀어가는 방식이 유사한 경우, 그 경향성이 무엇에 대한 반응 혹은 징후인지 묻게 된다. 물론 그러한 문제의식이 구체적인 작품들을 오히려 경직된 틀로 포괄하는 결과를 낳을 때도 있고, 평론가의 자의식만 앞세운, 실은 별 의미가 없는 물음일 때도 있다. 그래서 심사평이나 선정의 변처럼 어쩔 수 없이 ‘올해의 경향’에 대해 언급해야 하는 순간에 이르기 전까지는 구체적인 작품을 어떤 경향성 안에서 재단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올해에도 여러 영화제에 응모한 장편들을 몰아서 볼 기회가 있었다. 영화들을 일련의 범주 안으로 불러들이는 일은 피하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이 예년과 다른 하나의 흐름이 자꾸 눈에 걸렸다. 그것은 흑백영화의 확연한 증가다. 흑백영화 편수의 증가를 변화나 경향으로 단정하긴 망설여지지만, 이 현상이 안긴 의아함은 무시하고 지나가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처음에 든 의문은 당연하게도 이런 것이다. 이들은 왜 흑백의 세계를 선택해야만 했을까. 관람자의 위치에서 그 영화가 흑백으로 재현되어야만 하는 서사적 맥락을 납득하기도, 미학적 효과를 체감하기도 어려웠다는 말이다. 짐작할 수 있는 의도들은 있다. 관습적으로 흑백화면은 현실보다는 꿈의 분위기를, 현재보다는 지나간 시간을 그리는 데 자주 사용되어왔으나 적어도 그간 보아온 독립영화들을 떠올려보자면, 그것은 세계의 사실주의적인 감각을 고양하고 부각하기 위해 동원되는 경우가 많았다. 세계에서 색을 제거해버리는 선택이 오히려 영화가 현실의 어둠을 그대로 마주하는 방식으로 여겨져 온 것이다. 롱테이크의 느린 호흡이나 허수아비 같은 형상으로 화면 안에 존재하는 표정 없는 인물은 흑백화면에 어김없이 따라오는 요소들이다. 올해 본 흑백영화들도 대체로 그랬다. 다만, 앞서도 말했듯, 이런 인상의 흑백영화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는 점이 새삼 이들의 의도에 의문을 더한다. 흑백으로 된 세계의 무엇이 그들을 매혹한 것일까. 그들은 흑백화면의 영화적 필연성을 어디에서 찾고 있을까. 문제는 이들 영화에서 아무리 그 의도와 효과를 다양한 맥락에서 이해하고 긍정해보려 해도, ‘희망 없는 현실의 암울함을 표현하기 위한 편의적 수단’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감독들이라면 세상이 어두우므로 세계의 색채도 어두울 수밖에 없다는 식의, 일차원적이고 구태의연한 대답 이상을 들려줄 수 있을까. 흑백영화를 선택했던 기성 감독들의 견해를 잠시 우회해보려 한다. 이준익 은 < 동주 >(2015)에 대해 우리의 기억 속 윤동주가 흑백사진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영화 또한 흑백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설명이 다소 단순하게 들리긴 해도 영화를 보고 나면, 우리는 그 짧은 말에 내포된 역사적인 층위와 한 예술가에 대한 기억의 맥락에 공감하게 된다. 홍상수 는 < 북촌방향 >(2011)을 편집단계에서 흑백으로 바꾼 이유에 대해 영화 속 풍경이 주는 느낌이 흑백에 더 어울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직관에 근거한 그의 설명은 언제나처럼 모호하게 다가오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는 그가 언급한,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그 세계의 정념에 깊게 동화될 수밖에 없다. 감독이라면 자신의 영화적 선택에 대해 관객을 이해시킬만한 명확한 의도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둘의 예를 든 건 아니다. 중요한 건, 흑백화면의 선택이 (어쩌면 감독의 의도와 무관하게라도) 세계를 대하는 고유한 태도로, 낯설게 다시 경험하게 만드는 특수한 통로로, 그리하여 영화의 중대한 형식적 결정으로서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는지의 문제일 것이다. 흑백으로의 전환은 단순히 색을 지우는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공기를 즉물적으로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시각화하는 문제다. 세계의 색채를 변환하는 일은 문장 수십 개를 쌓아 올려 묘사해도 도달하기 어려운 지평이지만, 영화 안에서는 즉각적으로 편리하게 구현 가능한 것이다. 올해 마주한 흑백영화들은 흑백의 효용성과 독창성에 대한 고민은 미흡한 채, 그 편리함만을 취한 결과가 아니었나 싶다. 이들이 아무리 서사구조에 복잡한 시도를 가해도 영화가 여전히 평면적으로 느껴졌던 점 역시 같은 맥락에 기인하는 문제인 것 같다. 그 평면적인 느낌과 관련해서 이 영화들이 공유하는 장면의 의아한 상태에 대해 마지막으로 짧게 덧붙이려 한다. 특별한 사건이 없는 이 영화들에서 롱테이크는 주로 인물들의 대화 장면을 바라보는 데 할애된다. 흑백의 화면 속, 한 자리에 고정된 카메라 앞에 인물들이 마주 보며 앉아 있다. 그들의 대화에서는 핵심도 중심도 긴장감도 유머도 감지되지 않는다. 짐짓 심각한 체 하지만 속이 비어 있거나 일상성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일상성을 오인하는 대사 내용만의 문제는 아니다. 카메라가 시간을 적극적으로 감각하는 대신, 한 자리에 서서 그 시간을 무책임하게 내버려 두며 그저 쳐다보고 있다는 인상을 종종 주는 것이다. 이런 대화 장면이 시나리오를 반영한 것이든, 배우들의 즉흥적인 대화로 이루어진 것이든 그것을 관장하는 리듬과 시선에서 입체적인 활기를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카메라 앞의 시간에 개입할 타이밍을 찾지 못하는 둔감함을 그 세계의 자연스러움과 사실성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착각하는 건 아닌지 반문이 들게 하는 장면들이었다.
영분( 정은경 )은 같이 살던 남자가 병으로 죽은 뒤, 고향 태백으로 돌아와 모텔에서 청소 일을 하며 지낸다. 필라테스 강사로 일하는 한희( 장선 )는 이 적막한 마을에서 수강생을 모으는 일에 어려움을 느낀다. 어느 날 밤, 한희는 강습소 앞에서 기웃거리는 영분과 마주하고 둘은 곧 강사와 수강생으로 만나는 사이가 된다. 혼자 사는 영분과 고아인 한희는 어쩐지 모녀 관계처럼 서로에게 애틋하고 다정해 보인다. 영화는 영분이 오래전 버린 딸이 한희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숨길 생각이 없다. 한희 또한 어느새 홀로 그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한희는 긴장감 때문인지 영분과의 강습시간에 숨이 차올라 꺽꺽대며 괴로워하는데, 그 모습에 충격을 받은 영분은 자리를 뜨고 만다. 이제 영분은 고향마저 떠나려 하고 한희는 그런 영분을 붙잡으려 한다. 그리고 둘은 영분이 한희를 위해 필라테스 학원 광고지를 잔뜩 붙여놓은 다리 위에서 엄마와 딸로 대면한다. 바로 이 한 장면의 힘에 이끌려 이 글을 쓴다. “네가 미워. 너 때문에 나는 훨훨 날아다니며 다 할 수 있었는데 못했어. 아, 끔찍해. 아, 갑갑해”라고 영분은 소리치고 “난 한 번도 안 미웠어. 어떻게 미워하는지도 모르겠어. 나 낳을 때 어렸잖아. 난 어른이야”라고 한희는 설득한다. 이 장면은 딸을 버린 엄마와 버려진 딸이 몇십 년 만에 진실을 대면하는 순간이지만, 여기에 우리가 떠올릴 법한 감정, 표정, 대사는 나오지 않는다. 용서를 비는 엄마와 원망하는 딸의 상투적인 형상은 여기 없다. 이 장면에서 영화의 목적은 단 하나처럼 보인다. 그것은 사과와 화해, 혹은 자기변명과 자기연민의 극적인 재현이 아니라, ‘나’를 부정하지 않는 두 얼굴의 교차, 두 얼굴의 서로에 대한 리액션 뿐이다. 영화는 다른 장치 없이 오직 영분과 한희의 얼굴 클로즈업만을 투박하고 간결하게 오가면서 이들의 지난 세월이 꾹꾹 눌러 담긴 목소리와 눈빛을 통해 둘의 과거와 현재, 심지어 불투명한 미래까지 한 장면에 응축시킨다. “나도 살고 싶다”는 엄마와 “나는 잘 살아왔다”는 딸. 통념적인 모성 서사의 구도를 뼈대로 삼으면서도 이 영화가 그 틀 안에서 보존하려는 건 엄마와 딸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아니다. 엄마와 딸의 관계에 앞선 한 인간의 개별성을 이 장면은 주시하고 존중한다. 박석영 의 전작인 < 들꽃 >(2014), < 스틸 플라워 >(2015), < 재꽃 >(2016)은 버려진 소녀들에게 천착한 세계였다. <들꽃>에서 세 친구는 위태롭게 길 위를 방황하다 모텔에 감금됐고, <스틸 플라워>에서 이들 중 한 소녀는 친구마저 사라진 낯선 곳에서 남들이 버린 음식물을 주워 담으며 연명했으며, <재꽃>에서 그 소녀는 살아남지만, 이번에는 부모를 찾아온 어린아이가 소녀 주변을 맴돌았다. 박석영은 3부작을 통해 생존과 자립의 과정을 거친 소녀를 위로하고 싶었다고 말했고 <재꽃>은 확실히 앞의 두 영화와는 차별화된 세계로 보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3부작이 가족으로부터, 사회로부터 고립된 어린 여자들을 매번 가혹한 궁지로 밀어 넣어 이들의 생존력을 시험하며 이들의 버려진 상태를 얼마간 대상화하고 있다는 인상 또한 지우긴 어려웠다. 하지만 마침내 <바람의 언덕>에서 박석영은 버려짐의 상태를 전시하는 대신 그것을 남겨짐의 서사로, 남겨진 자의 시선으로 전환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제 버려지고 방치된 소녀의 상황이 아니라 떠난 여인의 심정 또한 헤아린다. 무사히 어른이 되어야만 하는, 안전한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세계가 아니라, 이미 어른인 세계. 그 세계는 여전히 험난하지만 적어도 솔직하고 성숙하다. <바람의 언덕>은 그렇게 다가온다. 다리 위에서 영분은 울먹이는 딸을 내버려 두고 떠난다. 그러나 영분이 딸에게 쏟아낸 거친 말들과 캐리어를 끌고 돌아서는 뒷모습이 위악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앞서 영화가 영분에게 선사한 한 장면에 대한 기억이 우리에게 남아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영분은 우연히 알게 된 택시기사 윤식( 김준배 )과 막걸리를 마시는 장면에서 술에 취해 자신의 인생을 되돌리고 싶다는 고백을 한다. 남자는 그런 영분을 바라보다 담담하게 말한다.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그 나이 때에도 다 진실이 있어요.” 허름한 주점의 고요함은 이내 영분이 부르는 노래로 깨어나고 카메라는 그 모습을 영분의 뒤에 서서 가만히 지켜본다. 이 장면의 깊이를 경험한 우리로서는 딸을 또다시 버려두고 “나도 살고 싶다”며 떠나는 영분의 발걸음을 무책임하다고 탓하지도, 멈춰 세우지도 못한다. 그러니 영분과 한희가 재회하는 에필로그가 이들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확신하기는 어렵다. 바람 부는 황량한 겨울의 자연 속에서 마침내 둘이 나란히 앉은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바라보며 두려움을 고백하는 목소리는 이들의 해결되지 않은, 모순과 갈등이 진행 중인 내면의 상태인지 모른다. 이 영화의 포스터에는 겨울의 흔적이 사라진 따스한 풍경을 배경으로 영분과 환희가 꼭 끌어안은 모습이 담겨있다. 그 풍경의 평화로운 온기는 ‘바람의 언덕’에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 같다.
“우리가 왜 이 판자 쪼가리에 미치는지 알아요?” “fuck shit!”을 입에 달고 살아 그것이 별명이 되어버린 한 소년(영화 안에서 그의 별명은 ‘존나네’라고 번역되어 나온다.)이 스케이트보드를 응시하며 말한다. 공터에는 그와 같은 소년들이 스케이트보드를 타거나 잡담을 나누고 있고, 노숙자로 보이는 이들이 무료하게 햇볕을 쬐며 그 광경에 어우러진다. 나른한 오후의 장면이지만, 이곳은 법원 앞, 그러니까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일이 금지된 제도와 규율의 장소다. 경찰들이 들이닥쳐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평화는 이내 깨진다. 소년들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뿔뿔이 흩어지는데, 더러는 달아나는 데 성공하고 더러는 붙잡힌다. 신기한 건 이 대목이 불러일으키는 감흥이다. 강제적이고 다급한 도주의 순간이 어쩐지 유희의 리듬으로 충만하다.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소년들에게는 경찰에게 쫓기는 한바탕의 소동도 스릴 넘치는 놀이와 다름없기 때문이겠지만, 무엇보다도 영화가 이 순간을 그렇게 찍었다. 영화는 내화면의 소란스러운 노이즈를 외화면의 경쾌한 음악으로 침묵시키고 아수라장이 된 공간 속 충돌들을 부드러운 운동으로 다시 표면화한다. < 미드 90 >(조나 힐, 2018)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장면들과 자주 마주한다. 이를테면 ‘땡볕’이라 불리는 스티비(서니 설직)가 가족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낙담한 장면에서 그가 줄곧 동경해온 레이(나 켈 스미스)는 자신과 친구들의 만만치 않은 가정사를 언급하며 위로를 건넨다. 그리고 둘은 스케이트보드를 탄다. 양쪽으로 차들이 달리는 도로 중앙의 경계선 위를 스케이트보드에 올라선 두 소년이 화면 후경으로부터 전경 쪽으로 유영하듯 점차 가까워지다가 곧 프레임 밖으로 사라진다. 달리는 차들 사이에서 감행하는 위태로운 행동이지만, 차들의 소음 대신 음악의 활기로 채워진 장면 안에서 두 소년의 움직임은 공간의 한계를 자체적인 리듬으로 유연하게 돌파한다. 그들이 도심의 텅 빈 공원에서 오직 스케이트보드 하나와 자신의 육체만으로 곳곳을 오르내리며 묘기를 부릴 때, 그것이 쇠락한 공간을 독창적으로 다시 감각하며 그곳에 숨을 불어넣는 행위라고 말하지 않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런 장면들이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스케이트보드 위에 오른 소년들의 운동은 물론이고 <미드 90>이 그 순간을 ‘영화적으로’ 가공하는 방식은 섬세하게 아름답다. 도시의 보잘 것 없는 풍경들과 그곳에서 근근이 버티는 청춘들의 빈곤한 시간이 이 매끈한 움직임들로 인해 잠시나마 다른 차원으로 이행하는 데 성공하며 빛날 기회를 갖게 된다. 물론 이 순간이 자아낸 감상이 실은 환상에 빚진다는 점을 인정한다. 우리의 시선을 빼앗는 이 장면들은 현실의 시간을 중지시키고 풍경의 얼룩과 충돌을 미학화한 결과물일 것이다. 대다수의 하위문화가 결국 체제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그저 체제 안에서의 또 다른 소비양식에 불과하다는 사실 또한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가 스케이트보드의 운동성으로 유려하게 구축한 장면들은 적어도 ‘존나네’와 같은 청춘들이 “판자 쪼가리”에 거는 마음의 풍경을 대변해주는 것 같다. 그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소년들이 법원 앞 공터에서 만난 어느 노숙자의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나는 이 거리에서 탈출하려고 노력 중이야. 이 거리가 나를 먹어버리기 전에.” 그는 거리로 내몰린 자신이 거리의 죽은 사물이 되어 더 이상 어떤 가능성도 없이 붙박인 채, 그곳의 가난과 폭력과 체념에 ‘먹히는’ 상태를 염려하고 있다. 그는 거리를 사는 주체가 아니라 그 거리에 잡아먹히는 대상이 될 위험을 감지한다. 그와 같은 맨몸의 노숙자들에게 이 거리는 오직 생존의 문제와 결부된다. 그러나 적어도 스케이트보드를 가진 소년들에게 이곳은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절실한 문화와 취향의 공간이다. 그들의 지식이 아니라 육체가 (아마도 그 거리를 설비한 자들보다 더) 거리의 구조와 생리와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자연스레 터득하고 이해한다. 그들에게 그 거리는 가정, 학교, 사회 등과 같은 ‘중심’ 혹은 ‘내부’의 균열을 고스란히 외면화한 바깥이지만, 그들의 열악한 현실을 상기하는 동시에 그 현실에 대응할 수 있는 육체의 활력을 키우는 유동적이고 모험적인 바깥이기도 하다. 레이는 갈비뼈가 부러져 병원에 입원 중인 스티비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처럼 세게 부딪치는 놈은 처음 봐. 그럴 필요 없어.” 형 이언(루카스 헤지스)이 일상적으로 가하는 폭력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온 이 작은 소년은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종종 일삼는 방식으로 현실을 견뎌왔다. 그러나 레이의 말대로 거리의 스케이트보드와 함께라면, 소년은 더 이상 갑갑한 집 안에서 세게 자학하지 않고도 삶을 버티는 법을 알게 될 것이다. 상처 입은 소년들은 총 대신 스케이트보드를 겨드랑이에 끼고 매일 거리로 나온다. 이 영화는 주인공 스티비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소년들의 암울한 집으로 카메라를 들이지 않는다. 대신 이들이 바깥의 폭력에 잠식되지 않고도 바깥의 리듬을 자기 식대로 체화해가는 순간들에서 분노나 좌절과는 다른 감정적 교류를 응시한다. 그러므로 이들이 술을 먹고 담배를 피우고 위험한 농담을 나누고 서로 치고받으며 치기어린 사고를 내고, 결국 죽음 문턱에까지 접근해도, 어찌되었든 이들이 이룬 공동체의 풍경은 쉽게 부서지지 않을 것 같다는 묘한 안도를 안긴다. 자동차 사고 후, 집에 돌아가지 않고 스티비가 입원한 병원 휴게실 의자에서 상처 난 얼굴로 널브러져 잠이 든 소년들의 모습이 그 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이 공동체의 일부가 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영화에서 퇴장하는 스티비의 형 이언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좀 다른 맥락이 필요할 것 같다. 그는 영화 속에서 상스러운 말과 행동들을 일삼으며 자신을 과시하는 그 어떤 소년들보다도 음산한 기운을 퍼뜨리며 스티비의 장면을 찢고 들어온다. 요컨대 영화의 첫 장면에서 이언은 좁고 긴 복도에서 스티비를 무차별적으로 구타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유는 제시되지 않는다. 이후에도 우리는 이언이 스티비를 무시하고 이용하며 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스티비가 몰래 훔쳐보는 이언의 방에는 최신 음악 씨디들과 옷, 모자 등 당대의 유행품들이 강박적으로 보일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이안이 그 문화를 향유하는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혼자다. 집에서 혼자만의 운동으로 다져진 그의 몸은 스케이트보드와 하나가 된 소년들의 육체와 확연히 달라 보인다. 그것은 거리와 호흡하며 끊임없이 놀이를 고안하는 생기로운 몸이 아니라, 자기방어를 위해 단련하고 공격을 준비하는 것만 같은, 우월감에 도취된, 실은 불안을 은폐하는 몸이다. 우리는 이안의 폭력성이 어린 시절의 상처에서 기인한다고 짐작하지만, 영화는 그에 대한 그 이상의 관심을 요청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가장 굴욕적인 순간은 동생을 그토록 때리던 이안이 ‘존나네’ 무리들과 맞닥뜨린 장면에서 어떤 대응도 하지 못하고 슬금슬금 자리를 피할 때인데, 이안과 관련된 일련의 장면들은 어쩔 수 없이 우리에게 미국사회가 낳은 특정 유형의 인물을 상기시킨다. 섣부른 일반화가 망설여지긴 하지만, 그는 공동체에 속하지 못한 채 스스로를 소외시켜 폭력을 내면화하며 결국 왜곡된 방식으로 분노를 폭발하고 마는 이들의 기운을 잠재한다. 더욱이 그가 빌 클린턴의 얼굴 캐리커처가 그려진 가면을 쓰고 혼자 밥을 먹거나 한밤 중 자고 있는 스티비를 급습해서 구타하는 대목에 이르면, 그 난데없는 풍경의 기괴함과 끔찍함은 그저 무의미한 장난으로 치부해버리기 어렵다. 이런 설정을 당대 정치사회에 대한 영화의 코멘트로 읽을 필요는 없겠지만, 이 장면들에서 우리는 그가 키워가고 있는 망상의 그림자를 예감할 수밖에 없다. 극우주의, 백인우월주의 등과 같은 혐오의 단어가 이 장면을 무섭게 스쳐간다. 영화의 후반, 이안이 온 몸에 깁스를 하고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스티비를 말없이 지켜보다 음료수 두 개 중 하나를 나눠주는 장면이 있다. 둘에게 주어진 짧은 휴전의 순간인지, 사과와 용서의 순간인지 알 수는 없다. 다만 이 장면은 별다른 대화나 감정의 해소 없이 금세 끝나버리고 이안이 사라진 자리는 어느새 거리의 친구들로 꽉 채워진다. 다정한 친구들의 왁자지껄함으로 가득한 장면은 이안의 부재를 개의치 않는다. 그들이 함께 보낸 날들이 비디오로 상영되는 동안, 이안은 그 화면 속 거리의 추억에도, 화면 밖 병실의 친구들 틈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이 영화에서 가장 폭력적으로 두드러진 인물이지만, 그 존재감이 가장 미약한 자다. <미드 90>은 그 시절, 거리의 유희와 청춘의 리듬을 탐색했던 사고뭉치 소년들의 유일무이한 시간과 함께, 그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켰던 어느 소년의 스산한 시간 또한 기억에 남겨 두려한다. 찬란하고 아련하지만 암울하고 섬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