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서답
- 감독
- 심우섭
- 제작년도
- 1968
- 출연
- 김희갑, 서영춘, 김순철, 백일섭, 양훈, 남미리, 박옥초, 오경아, 한유정, 김수연, 유하나, 한근봉, 이기동, 배수천, 경윤수, 박예숙, 석귀녀, 이정애, 지계순, 지방열
이형표는 1960~70년대에 활발한 작품 활동으로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수놓았던 흥행 감독이며,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최초’라는 수식이 붙어다닌다. 1922년 황해도 출생으로 서울 효재국민학교 입학(1930), 경성사범학교에 진학(1937)하여 서울대 사범대학 영문과를 졸업(1949)했다. 미술에 재능을 보여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1943)하고 김기림, 김순남, 이인성 등으로부터 문화, 예술 전반에 걸친 소양을 얻는다. 대학 졸업 후, 그는 USIS(주한 미공보원 영화과)의 영화 제작 보좌관으로 입사하여 미국 문화영화의 자막 번역을 맡으며 처음으로 영화계를 접하게 된다. 이윽고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서울에서 조선미술가동맹 일원으로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리며 인민군 점령 시기를 견뎠다. 그러나 이 사실이 문제가 되어 경찰서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미공보원을 떠나게 된다. 이후 유엔으로 자리를 옮겨 한국재건단(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UNKRA, 운크라)에서 뉴스를 비롯해, 홍보영화 <고집>(앨프리드 웨그(Alfred Wagg), 1952), <한국에서의 만남 Encounter in Korea>(리차드 배글리(Richard Baegley), 1952) 등의 제작에 참여한다. (사진1) <고집>(앨프리드 웨그(Alfred Wagg), 1952)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배글리, 이형표, 코넌트, 여자주인공 기순, 촬영조수였던 임병호 (사진2) <고집>(앨프리드 웨그(Alfred Wagg), 1952) 촬영 현장에서 이형표(맨 왼쪽), 카메라를 잡고 있는 임병호 <고집>에서 이형표는 통역 겸 연출 조수를 맡았는데, 녹음기사로 참여한 미국 영화인 테드 코넌트(Theodore Conant, 1926~2015)를 통해 처음으로 자기녹음기(마그네틱 레코더)를 접하는 기회가 되었다. 또한 이형표는 미국 파라마운트사가 제작한 3D 입체영화 <휴전 Cease Fire>(오원 크럼프(Owen Crump), 1953)의 통역 겸 조연출로 일하면서 남보다 먼저 할리우드 특수영상 제작 현장을 경험한다. 다큐멘터리 제작에 활발하게 참여하던 시기에, 이형표가 조력자의 입장에서 제작 주체로 거듭나는 데에는 동료였던 테드 코넌트의 영향이 컸다. 테드 코넌트 1) 는 1952년 유엔 한국재건단(UNKRA) 영화팀원으로 한국에 와서 1960년경까지 약 8년간 전쟁 및 전후 복구 중인 한국의 모습을 기록하는 한편 이형표와 돈독한 우정을 쌓으며 협업 창작 활동을 했다. 또한 코넌트는 한국영화계에 많은 기여를 했는데, 1956년 유네스코와 운크라가 한국 정부와 공동으로 설립한 신생활교육원에서 시청각 교육을 담당했고, 1958년에 미 국무부 산하 국제협조처가 한국 영화인 교육 및 영화제작소 설립을 지원하기 위해 시라큐스 대학과 맺은 ‘시라큐스 컨트랙트’에 참여하여 공보실 영화과의 사운드 분야 인력 교육을 담당했다. 이형표는 테드 코넌트와의 교류를 계기로 외교 파우치를 통해 들어온 서구 문화를 다양하게 흡수하고, 코스모폴리탄적인 문화 체험을 바탕으로 공동 다큐멘터리 작업을 시작한다. 이는 이후 이형표의 영화 창작 세계를 구축하는 데 단단한 초석이 된다. 1953년부터 그는 대한민국 공보처 영화과에서 대한뉴스를 비롯해 공보처에서 주관하는 기록영화 제작을 전담하게 된다. 영화 <한국의 시각 Korean Perspective>(1953)과 <낙원 제주>(1953) 등이 이형표가 감독한 기록 영화들이다. 이 두 작품들은 천연색 코닥크롬(Kodakchrome)으로 촬영한 컬러 영화이고, 한국의 자연경관과 명승고적을 소개하는 <한국의 시각>은 한형모 감독이 촬영을 맡았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단편영화 <한국에서의 만남>(1952)에서 조연출을 했던 이형표는 이 이야기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보이는 장편 시나리오 <불사조의 언덕>을 썼고 2) , 공보처에서 이를 영화화한다. <불사조의 언덕>(전창근, 1955)에는 감독 전창근, 조연출 김한일, 촬영 한형모, 조명 김흥만, 스크립터 홍은원 등의 영화인들이 참여했다. (사진3) <불사조의 언덕>(전창근, 1955) 제작진들, 둘째줄 왼쪽 두번째부터 이형표, 전창근, 홍은원, 배우 나애심 또한, 이형표는 테드 코난트와 함께 다큐멘터리 <한국의 환상 Korean Fantasy>(1955), <한국의 예술가(Korean Artist)>(1955), <위기의 아이들(Children in Crisis)>(1955)을 만든다. <한국의 환상>은 전후 한국의 폐허와 재건 및 전통문화 등을 다뤘고, 화가로서의 이형표 자신이 출연한 다큐멘터리 <한국의 예술가 Korean Artist>(1955)는 1956년 제1회 마닐라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위기의 아이들>은 한국전쟁 고아를 비롯한 전후 어린이들이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는 열악한 생활상을 담았다. 이 작품은 나레이션을 배제하고 녹음기를 사용하여 현장음만으로 상황을 전달하는 다이렉트 시네마(direct cinema) 형식의 새로운 시도를 선보인다. 이형표는 당시 전후 서울의 아이들을 보여주는 많은 장면을 직접 촬영했는데, 콘덴서 마이크로폰(condenser microphone)을 사용하여 레코더를 군용 트럭에 숨겨둔 채 거리 촬영을 진행했기 때문에 매우 생생한 거리의 소리들을 담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3) 작품 후반부에는 ‘북진통일’ 관제 데모와 전체주의적 교육에 동원되는 학생들 역시 ‘위기의 아이들’로 보여주면서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는 태도를 취한다. 4) 이 때문에 이형표는 한국전쟁 중 부역 전력으로 고초를 겪은 바 있는 자신의 신상을 염려하여 스스로 공동연출자로서의 크레디트를 포기했다. 실제로 이 영화는 이승만 정권 측으로부터 ‘공산주의적’이라는 항의를 받기도 했지만 제5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이와 같이, 그는 당시로서는 드문 다수의 제작 경험을 통해 한국 영화제작기술의 열악함을 통감하고, 유엔 한국재건단(UNKRA)에서 원조를 받아내 공보처에 영화 기자재를 들여온다. 더불어 이를 기반으로 스튜디오를 지어 활용하도록 하는 등, 전후 한국영화의 제작 기반과 환경을 조성하는 데 큰 공헌을 한다. 1950년대 중반까지 다큐멘터리 활동을 하는 동시에, 화가로서의 정체성도 유지하며 그림을 그리던 이형표는 신상옥 감독과의 인연을 시작으로 극영화계에 본격 뛰어들게 된다. 신상옥은 이형표가 영화제작 과정과 기술 전반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갖춘 점을 간파하고 <젊은 그들>(신상옥, 1955), <무영탑>(신상옥, 1957)의 각색 및 <동심초>(신상옥, 1957) 등의 제작에 이형표를 참여하도록 한다. 이윽고 이형표는 신필름 기술부장으로 입사하여, 1961년 장안의 화제였던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에서 촬영을 맡는다. 그는 이 영화에서 컬러 영화 제작을 위한 기술 전반에 관여하며 직접 분장까지 맡는다. 이형표는 이미 천연색 다큐멘터리를 제작해본 경험이 있는 바, 이번엔 코닥 이스트만 필름을 사용하여 국내 최초로 컬러 시네마스코프 극영화를 촬영함으로써 한국 극영화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데 큰 몫을 해낸 것이다. 같은 해 그는 신상옥이 제작자로 나선 <서울의 지붕밑>(1961)으로 감독 데뷔한다. 이 작품은 조흔파의 소설 『골목 안 사람들』을 영화화한 것으로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김승호, 황정순, 김희갑, 허장강, 최은희, 도금봉, 김진규 등을 초호화 캐스팅한 도시 서민 코미디로 관객과 평단의 큰 호응을 얻으며 성공한다. “대표작이 될 것”이라는 신상옥의 예견이 적중한 것이다. 기성 세대 한의사인 김승호가 자녀의 결혼 문제를 계기로 젊은 세대를 대변하는 산부인과 의사 김진규와 각을 세우며 시의원 선거에도 나서보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자녀 세대와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낙천적으로 그려냈다. (사진4) <서울의 지붕밑>(이형표, 1961) 촬영 현장 빌리 와일더나 윌리엄 와일러의 작품 세계를 동경했다는 이형표의 바램대로, 미워할 수만은 없는 인간적인 결함을 가진 인물들의 애환을 가슴에 와닿는 코미디로 완성했다. 또한 <서울의 지붕밑>은 독특한 구도와 새로운 카메라 기법을 이용하여 서울의 다양한 풍경들을 담아낸다. 각각의 쇼트들에는 화가가 되고자 했던 이형표 감독의 미적 감각과 영화 테크니션으로서의 실력이 유감 없이 발휘되었다. (사진5) <대심청전>(이형표, 1962)의 용궁 장면 (사진6) <대심청전>(이형표, 1962)의 세트 촬영장에서 제작진들. 뒷줄 가운데가 이형표 이듬해, 그는 고전 심청전을 컬러 시네마스코프로 영화화한 <대심청전>(1962)을 연출한다. ‘미러 워크’라는 특수 효과를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시도하였고, 일본에서 촬영한 용궁 수중 장면 등의 특수 촬영이 압권이다. (사진7) <아름다운 수의>(이형표, 1962) 촬영 현장, 주연 배우 태현실 옆에 앉아있는 이형표 (사진8) <아름다운 수의>(이형표, 1962) 촬영 현장, 카메라에 손을 올리고 있는 이형표 1960년대 청춘영화의 시초격으로 불리는 영화 <아름다운 수의>(1962)는 주역을 신인 배우들만으로 구성하였고 배우 태현실, 최난경, 한문정, 트위스트 김 등의 영화 데뷔작이다. 이 작품은 “이형표 감독의 쾌적한 템포, 유려한 카메라 구사, 재치있는 커팅이 인상적” 4) 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후 그는 연달아 청춘물 <말띠 여대생>(1964), <연애졸업반>(1964), <백발백중>(1966) 등을 연출한다. (사진9) <말띠 여대생>(이형표, 1963)포스터 (사진10) <말띠 여대생>(이형표, 1963)의 한 장면 (사진11) <연애졸업반>(이형표, 1964) 제작진. 둘째줄 왼쪽 세 번째부터 조감독 김기풍, 배우 엄앵란, 이형표 감독, 배우 남미리 <말띠 여대생>(1963)은 개봉 후 대학 측으로부터 그런 학생이 어디 있느냐는 항의를 받는 등 영화의 리얼리즘 문제를 놓고 공방이 펼쳐지기도 했으나, 당시 외화만 보던 젊은 세대 관객들까지도 끌어들일만한 경쾌한 템포와 시원한 전개로 흥행에 성공한다. 이어 속편 <말띠 신부>(김기덕, 1966), <말띠 며느리>(이형표, 1979)가 제작되어 한국영화 최초의 시리즈물이 된다. 이형표는 1963년 무렵 신필름 전속을 그만두고 한양영화사, 극동흥업, 합동영화사 등을 오가며 청춘영화, 문예영화, 통속 멜로, 변장 코미디, 하이틴 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상업영화를 만들며 대중과 소통한다. (사진12) <아름다운 눈동자>(이형표, 1965)의 주연 배우 엄앵란과 김용연, 각각 청룡여우주연상과 청룡특별상(아역상)을 수상했다. <아름다운 눈동자>(1965)는 순박하지만 당찬 식모와 애정결핍인 주인집 아들이 훈훈한 정을 나누는 이야기로, 감독의 안정되고 세심한 연출력이 돋보인다. 웃음이 터지는 박자를 놓치지 않는 센스 있는 템포와 면밀한 씬 구성, 정확한 콘티뉴이티가 관객을 편안하고 즐겁게 몰입하도록 한다. 식모 역할을 맡은 배우 엄앵란은 출산 후 컴백하여 연기생활 11년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로 녹음하는 열의를 보였으며, 제 3회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형표의 다방면에 걸친 박식하고 해박한 소양은 영화 기술적인 성과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취하는 영화 소재나 그것을 이야기로 풀어가는 방식에도 묻어난다. <애하>(1967)에서는 인공수정이라는 당시에는 낯선 소재를 삼각관계가 얽힌 미스터리한 구성으로 대담하게 전개한다. 획기적인 참신함으로 주목 받았던 이 작품은 제6회 대종상 각본상(이형우)과 남우조연상(윤일봉)을 수상한다. 또한 성(性)을 주제로 한 다수의 섹슈얼한 문예영화들 <밤은 무서워>(1968), <너의 이름은 여자>(1969), <방의 불을 꺼주오>(1970) 등을 통해 젊은 남녀의 내밀한 심리 세계를 긴장감 있게 표현한다. (사진13) <회전의자>(이형표, 1966) 촬영 현장에서 카메라 옆에 이형표 (사진14) <밤은 무서워>(이형표, 1968) 포스터. 위에서부터 배우 남궁원, 윤정희, 박노식 일체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거추장스럽게 여긴 이형표 감독의 자유로운 사고 방식은 그의 주특기 장르인 코미디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언니는 좋겠네>(1963), <청색 아파트>(1963), <심술각하>(1966), <오대 복덕방>(1968), <산에 가야 범을 잡지>(1969), <내 것이 더 좋아>(1969), <염통에 털난 사나이>(1970), <방자와 향단이>(1972), <맹물로 가는 자동차>(1974) 등의 작품들에서 세태 풍자와 함께 권위를 조롱한다. 또한 웃음에 야박하고 저급하다고 폄하하는 기존의 시선을 가볍게 뛰어넘어 넌센스 코미디, 슬랩스틱 코미디까지 자유자재로 시도한다. 특히, 연기자 서영춘을 기용해 여러 작품을 만들었던 이형표는 당시 그의 뛰어난 희극 배우로서의 재능이 ‘저속 코미디언’으로 분류 되어, 높이 평가받지 못했던 점을 안타까워했다. (사진15) <청색아파트>(이형표, 1963) 오른쪽부터 배우 이대엽, 이형표 (사진16) <소문난 여자>(이형표, 1966) 촬영장에서 연기 연출 중인 이형표와 배우 고은아 (사진17) <내 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9) 주연 배우 구봉서와 서영춘(오른쪽) (사진18) <염통에 털난 사나이>(이형표, 1970) 왼쪽부터 배우 서영춘, 구봉서, 김희갑 1970년대 TV 보급시대에도 이형표는 누구보다 빨리 변화하는 관객의 감성에 적응해갔으며, 당대 인기 배우들을 기용한 그의 청춘영화들은 꾸준히 인기를 누렸다. “이형표 감독을 잡으면 돈을 번다”는 말이 당시 제작자들 사이에서 회자될 정도로, 이형표는 경제성 있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서 대중이나 제작자 모두가 요구하는 탁월한 상업영화 감각을 유지했다. 이는 그가 영화는 오락이고 유행이라고 생각하며, 그 유행에 맞춰 관객과 상호 작용하는 유연함을 스스로 즐길 줄 알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진19) <모범운전사 갑순이>(이형표, 1972) 포스터 (사진20) <리칭의 여선생>(이형표, 1972) 촬영장에서 이형표 감독과 중국 배우 리칭(오른쪽) 6) (사진21) <리칭의 여선생>(이형표, 1972) 포스터 (사진22) <너무 너무 좋은 거야>(이형표, 1976) 포스터. 주연 전영록, 임예진 1970년대 중반에는 하이틴 영화의 붐을 타고 <이런 마음 처음이야>(1976), <너무 너무 좋은 거야>(1976), <제7교실>(1976), <괴짜만세>(1977) 등을 연출했고, 1980년대 한국영화 침체기에도 이형표는 성룡의 <취권>(1978)을 패러디한 코미디물 <애권>(1980)을 흥행시키며, <여애권>(1982), <애권(신)>(1982), <소애권>(1983) 등의 속편을 연달아 연출한다. (사진23) <아가씨 참으세요>(이형표, 1981) 포스터 그는 1980년대에 계속되는 저예산 흥행영화 제작 와중에, 구로공단 노동자들의 삶의 애환을 담은 일상서민극 <젊은 시계탑>(1984)을 연출하기도 한다. 이형표는 1986년 작품 <먼 여행 긴 터널>을 끝으로 극영화 연출 활동을 마치고, 국내 최초의 360도 서클 비전 영화 <내사랑 금수강산(1990)>을 제작하여 전시 영상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한다. 이후 몇 년간 전시 영상 분야에서 새로운 영상에 대한 끊임없는 개척정신을 보이는 활동을 이어갔다. (사진24) <젊은 시계탑>(이형표, 1984) 촬영 현장. 오른쪽부터 배우 송승환, 이형표 감독, 배우 김현주 이형표의 영화 인생은 한국영화 제작 기술 발전사와 궤적을 같이 한다. 그는 전후 폐허에서 출발하는 1950년대 한국영화계를 위해 영화 기자재 도입에 앞장 섰고, 그 제작 기술을 안내하고 활용하는 데 있어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1960년대 한국영화 전성기뿐만 아니라 1970년대를 거쳐 80년대에 이르기까지 변모하는 세태에 뒤쳐지지 않고, 항상 새롭게 대중의 감수성을 포착해내고 섭취하는 감독이었다. 이렇듯 대중의 기호와 관심에 부응한 결과, 그의 영화 연출작들 대다수가 준수한 흥행 성적을 거두었다. 이형표는 예술가라는 자의식을 발현하기보다는,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을 이해하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유쾌하게 향유할 수 있는 영화 만들기를 추구했다. 그는 영화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예술이어야 한다는 엔터테인먼트 기능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특유의 낙천적인 개성으로, 가족 드라마 <서울의 지붕밑>(1961)부터 코믹 액션물 <아가씨 참으세요>(1981), 한국판 뱀파이어물 <관 속의 드라큐라>(1982) 등과 같은 기발한 재미와 웃음을 선사했다. "그림을 아는 스타일리스트" 7) 이형표는 다양한 장르에서 편협한 시각을 벗어내고, 규범을 해체하는 데서 생겨나는 통쾌한 오락으로 대중과 함께 하는 감독이었다. *이 글은 필자가 쓴「관객과 함께 웃는 영화 패셔니스타(Fashionista), 이형표 감독」, <서울의 지붕밑> DVD 소책자, 한국영상자료원, 2008을 참고해 재구성하였다. 1)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이방인이 기록한 전후 한국, 영화_시어도어 코넌트 컬렉션』, 한국영상자료원, 2015 참고. 2) 앞의 책, 297쪽 참고. 3) 앞의 책, 293쪽 인용. 4) 앞의 책, 292쪽 참고. 5) 「[신영화] 병든 청춘의 풍속도/ 이형표 감독 <아름다운 수의>」, 《한국일보》, 1962년 11월 18일. 6) “톱감독과 톱스타 계보 (제4회)/이형표 편”,《영화잡지》통권116호, 1973년 5월, 190쪽. 7) 「[새영화] ‘스케치북’ 넘기는 재미/ 이형표 감독 <연애졸업반>」, 《서울신문》, 1964년 6월 17일
구봉서는 1945년 악극단의 악사이자 배우로 연예계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반세기가 넘는 긴 시간 동안 라디오, 영화, 텔레비전에서 활약하면서 코미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삶 자체가 한국 코미디의 역사였던 우리 시대 최고의 코미디언이다. 구봉서는 1945년 태평양악극단에서 데뷔하는데, 임시 악사였던 구봉서는 김대봉의 대역으로 코미디 배우의 길에 들어선다. 훤칠한 외모와 능청스러운 말솜씨로 코미디와 쇼 무대에서 사랑을 받았던 구봉서는 악극단에서 눈에 띄는 스타로 성장하게 된다. 전쟁기 구봉서는 종군연예인으로 약 5년간 활동했으며 같은 시기 라디오 방송에도 진출하여 홀쭉이 양석천과 함께 <홀쭉이와 길쭉이> 등의 프로그램과 대북방송을 진행했다. 1956년 문화성 감독의 <애정파도>로 영화계에 데뷔할 때, 구봉서는 이미 포스터 한쪽에 코믹한 장면을 연기하는 모습이 들어갈 정도로 잘 알려진 스타였다. (사진2) <애정파도>(문하성, 1956) 포스터. 오른쪽 아래 코믹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구봉서와 박옥초 구봉서를 명실상부한 코미디 스타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권영순 감독의 <오부자>(1958)였다. 이 영화에서 그는 이종철과 복혜숙 부부의 아들 넷(양훈, 양석천, 김희갑, 구봉서) 중 막내로 출연, 연애담을 중심으로 하는 노래와 코미디를 선보였다. (사진3) <오부자>(권영순, 1958) 포스터. 왼쪽부터 구봉서, 양석천, 이종철, 양훈, 김희갑. 아버지 이종철과 네 형제 영웅호걸의 이야기 중 구봉서는 ‘막둥이’ ‘걸’ 역할을 맡았다. 포스터 상단에 '뮈직칼 코메듸' 라는 장르명칭이 부각되어 있다. 이 영화는 당시 개봉관인 국도극장의 입장수익만으로도 제작비를 다 충당할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으며, 이 영화의 성공은 코미디영화 제작의 활성화라는 산업적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리고 구봉서는 이 영화를 통해 '막둥이'라는, 평생을 따라다닌 애칭을 얻게 되었다. (사진 4) <오부자>(권영순, 1958)의 한 장면. 상사병으로 앓아누운 호(김희갑)를 진찰하러 온 의사와 그를 둘러싼 가족들. 왼쪽부터 어머니 역할의 복혜숙, 걸(구봉서), 웅(양석천), 아버지(이종철), 영(양훈) (사진 5) <오부자>(권영순, 1958)의 한 장면. 구봉서와 상대역 최지희 이후, 1970년대까지 다수의 영화에서 주조연으로 출연하면서 대표적인 코미디 배우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구봉서는 1970년대 초반까지 약 4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특히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이어지는 코미디영화 열풍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는 <백만장자가 되면>(정일택, 1959), <구봉서의 벼락부자>(김수용, 1961), <이거 됩니까 이거 안됩니다>(박종호, 1964), <단벌신사>(김기풍, 1968), <남자식모>(심우섭, 1968), <남자 미용사>(심우섭, 1968)와 같은 원톱 영화들에서 뿐 아니라 (사진 6) (사진 7) <단벌신사>(김기풍, 1968) 포스터(위)와 <단벌신사>(김기풍, 1968)의 한 장면(아래). 복권이 든 양복을 찾아 좌충우돌하던 구봉서와 서영춘이 우연히 쇼단체의 무대 위에 서게 되었다. <서울의 지붕밑>(이형표, 1961), <성춘향>(신상옥, 1961), <맹진사댁 경사>(이용민, 1962), <또순이>(박상호, 1963),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만희, 1963)과 같은 영화에서도 비중 있는 조연으로 확실히 존재감을 드러내는 배우였다. (사진 8) <성춘향>(신상옥, 1961)의 한 장면. 춘향을 잡으러 가는 포졸 역할의 김희갑(좌)과 구봉서 (사진 9)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만희, 1963)의 한 장면. 부대의 막걸리 회식 장면에서 좌중을 즐겁게 하는 구일병 역할의 구봉서 그런가하면, <수학여행>(유현목, 1969)처럼 코미디가 아닌 영화의 주연으로서도 훌륭한 연기를 선보였다. (사진 10) <수학여행>(유현목, 1969) 포스터. 구봉서와 문희. 구봉서는 낙도의 어린이들을 데리고 서울로 수학여행을 간 선생님의 역할을 맡았다. 이 영화는 제4회 테헤란국제아동영화제 그랑프리 및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했다. 양석천과 양훈이 1950년대 후반 가장 먼저 영화계를 석권했던 코미디 배우였다면, 구봉서는 가장 긴 시간, 가장 많은 코미디영화에서 주연을 도맡았던 경우라 할 수 있다. 양석천과 양훈이 1950년대 이후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나 김희갑이 더 많은 영화에 출연했으나 단독 주연을 맡았던 작품보다는 공동 주연이거나 비중 있는 주연급 조연을 맡은 경우가 더 많았다는 것과 비교해 볼 때, 구봉서는 비슷한 시기에 영화로 옮겨왔던 악극단 스타들 중에서도 10년 넘게 주연 배우로 활약한 드문 경우였다. 1950년대 후반은 구봉서가 악극단에서 영화계로 활동 범위를 넓혀가던 시기로, 이 시기에 제작된 코미디 영화에서 구봉서는 단독 주연보다, 공동주연 혹은 비중 있는 조연의 역할을 맡으면서 내러티브의 중심인물을 보조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실제로 구봉서 코미디의 특성을 더 잘 보여주는 것은 1960년대 후반 코미디라고 볼 수 있다. 1950년대로 유효시기가 다한 양석천, 양훈의 코미디와 달리 1960년대까지, 그리고 영화를 넘어 텔레비전으로 영향력을 확대했던 1970년대와 80년대까지 구봉서의 코미디는 일정한 경향을 띠고 지속되었다. 이 글은 구봉서 코미디의 '일정한 경향'을 하나의 “'장르'로서의 구봉서 코미디”가 갖는 특성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이는 첫째, 내러티브적으로는 ‘취업’과 ‘결혼’이라는 지상과제를 해결하는 구성을 띤다는 점, 둘째, 내용적으로는 ‘명랑’하고 ‘건전’한 중산층의 윤리를 대변한다는 점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취업과 결혼이라는 지상과제 먼저, 1950년대 후반 출연작들에서 구봉서가 맡은 역할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해볼 수 있다. 첫째, <오부자>(권영순, 1958)나 <오형제>(김화랑, 1960), <구혼결사대>(김수용, 1959) 등 다중주연 영화에서 공동주연을 맡아 좌충우돌하다가 제 각기 연애에 성공하는 '막둥이' 캐릭터. 이때, 연애서사는 공동주연을 맡은 인물들 각자에게 가장 중요한, 그리고 유일한 내러티브가 된다. 영화의 엔딩은 합동결혼식이나 그에 준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둘째, <삼인의 신부>(김수용, 1959), <청춘배달>(김수용, 1959), <부전자전>(강대진, 1959), <복도 많지 뭐유>(백호빈, 1959) 등도 다중주연 영화에 속하지만, 주인공들은 시골에서 상경하여(혹은 실직 상태에서) 사랑과 취업 두 가지를 모두 추구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여기서는 연애서사와 취업을 위한 노력 두 가지가 주요 내러티브 사건이 되며, 첫 번째 경우와 마찬가지로 합동결혼이나 그에 준하는 장면이 엔딩으로 제시된다. 마지막으로 <공처가>(김수용, 1958)에서의 곰탕집 사위이자 아내에게 꼼짝 못하는 캐릭터처럼,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는 생활인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 이 유형에서 구봉서는 주연보다 조연에 가까운 역할을 맡았으며, 1950년대 코미디보다는 타 장르의 영화나 1960년대 이후의 코미디에서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유형이라 하겠다. (사진 11) <복도 많지 뭐유>(백호빈, 1959) 포스터. 좌측부터 김희갑, 주선태, 구봉서 이상의 분류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즉 구봉서가 주연배우로 등장하는 코미디영화로 대상을 한정해서 구봉서 코미디의 특징을 살펴보자. 양석천, 양훈 코미디가 뒤죽박죽 얽히고설킨 내러티브 속에서 그 혼돈과 해결 불가능성을 즐기는 것이라고 할 때, 구봉서가 등장하는 코미디들은 연애 혹은 연애와 취업이 주 해결과제로 주어지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그것(들)에 성공하는 내러티브 구성을 보여준다. 준수한 외모 덕에 구봉서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영화는 로맨틱한 요소들을 띠는 연애서사가 전면에 배치되었고, "건전하고 명랑한 소시민"이라는 페르소나에 힘입어 그의 캐릭터들은 '취업'과 '결혼'을 통해 주류 사회로 진입하는 지상과제에 집중했던 것이다. 보다 강렬하고 스펙터클한 코미디를 보여주던 양석천과 양훈이 빠른 속도로 소비되어 가는 동안, 1950년대 출연작들에서 구봉서는 거의 3인~5인의 주인공 중 한 사람 몫을 담당하는 정도에 머무르면서 꾸준히 필모그래피를 늘렸다. 이 시기부터 비교적 일관성을 가지고 다루었던 연애와 취업이라는 두 가지 모티프와 그것을 이루어가는 내러티브 구성은 1960년대까지 이어지면서 구봉서 코미디 내러티브의 핵심적인 구성요소가 되었다. 1960년대 초반, 양석천이 실연무대에 전력을 다하고 양훈이 사업 실패와 이혼 등의 개인적인 문제들로 영화출연이 뜸해진 동안, 구봉서와 김희갑은 최고의 주가를 올리는 코미디 배우로 입지를 굳혔다. 특히 구봉서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더욱 친숙한 대중스타가 되었는데, 그가 매일 아침 8시 고정으로 진행하던 동아방송의 라디오 프로그램 <안녕하십니까>는 '건전한 소시민'의 시각에서 사회를 풍자하는 것이었다. 영화 외의 대중매체들- 라디오와 텔레비전, 신문 등-을 통해 굳혀지고 다시 영화와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강화되었던 구봉서의 '건전하고 상식적인 생활인'으로서의 스타 페르소나는 구봉서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일조했으며, 1960년대 초반에는 "한국에서 가장 바쁜 사나이"(《동아일보》, 1963. 10. 15.)라는 타이틀을 얻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구봉서의 벼락부자>(김수용, 1961), <구봉서의 인생출발>, <이거 됩니까 이거 안 됩니다>(박종호, 1964)와 같이 아예 구봉서의 스타성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들을 비롯하여, <사장 딸은 올드미쓰>(김응천, 1963), <남자는 안 팔려>(임권택, 1963), <죽자니 청춘 살자니 고생>(권철휘, 1964) 등 흥행작의 성공을 이끌면서 구봉서는 1960년대 전반기 동안 단독 주연이 가능한 코미디 배우로서 가능성을 입증하게 하게 되었다. (사진12) <사장 딸은 올드미쓰>(김응천, 1963) 포스터. 구봉서와 상대역 방성자가 가장 크게 자리하고, 왼쪽은 곽규석과 남미리, 아래 좌측부터 양훈과 황정순, 주선태과 백금녀, 독고성과 주란지 (사진 13) <남자는 안 팔려>(임권택, 1963) 신문광고. 여장을 한 구봉서(우)와 이대엽(좌) <호랑이 꼬리를 밟은 사나이>(이강원, 1963)처럼 스릴러코미디를 표방한 영화, <구봉서의 벼락부자>나 <이거 됩니까 이거 안 됩니다>처럼 사회풍자의 성격이 가미된 영화 등 1960년대 초반에는 코미디형식의 다양한 변화를 꾀한 작품들도 시도되었다. (사진 14) <구봉서의 벼락부자>(김수용, 1961) 샐러리맨 구봉서와 직장 상사 양훈(우). 구봉서의 두 번째 주연작으로 구봉서는 이 영화에서 한국전쟁 때 목숨을 구해줬던 미국인의 유산을 받아 벼락부자가 된 샐러리맨으로 출연했다. (사진 15) <이거 됩니까 이거 안됩니다>(박종호, 1964)의 신문광고. 구봉서가 진행했던 라디오프로그램의 유행어 ‘이거 됩니까 이거 안됩니다’를 제명으로 한 풍자 영화 그러나 무엇보다 구봉서가 코미디영화의 전성기를 이끌기 시작했던 것은 심우섭 감독과 만나 본격적인 '구봉서식 코미디'를 꽃피우기 시작한 1960년대 후반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남자 시리즈와 팔푼이 시리즈 등 인기 출연작들에서 구봉서는 1950년대 코미디에서 본인이 가지고 있던 캐릭터와 서사를 유지한다. 즉, 이 영화 속에서 구봉서는 여전히 시골에서 갓 상경하거나 실직을 함으로써 직업을 구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으며, 그 과정에서 진정한 사랑을 만나게 되는 내러티브 사건을 겪는다. 그리고 여러 가지 소동에 휘말리거나 스스로 소동을 벌이면서, 그 속에서 홀로 중심을 잡고 여타 등장인물들에게 훈계를 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예컨대, <남자와 기생>(심우섭, 1969)에서 그(태호)는 여성스러운 성격 탓에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여동생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기생 산월이로 변장하는데, 산월이는 요릿집에서 만난 기생 정미를 보호하며 자신에게 반한 옛 상사 허사장을 골탕 먹인다. 태호는 정미에게는 '희망을 가지고 살 것'과 허사장에게는 '가정에 충실할 것', 허사장의 부인에게는 '남편에게 서비스를 잘 해서 기생집에 가지 않도록 할 것'을 주문한다. 그리고 정미와 로맨스를 이루면서 자신의 남성성을 회복한다. (사진 16) <남자 식모>(심우섭, 1968) 포스터. 구봉서의 ‘남자 시리즈’ 중 첫 번째 영화. 이 영화의 성공으로 남자 시리즈가 연달아 두 편 더 제작되었다. (사진17) <남자와 기생>(심우섭, 1969)포스터. 원제는 <남자기생>이었으나 경박하다는 검열관의 지적에 의해 ‘남자와 기생’으로 제명이 변경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필름에는 변경된 제명이 반영되어 있으나 포스터는 원제 그대로 남아있다. (사진 18) <남자 미용사>(심우섭, 1968) 신문광고. ‘블란서’ 유학을 마친 유명 미용사 ‘앙드레’로 변장한 구봉서가 주연을 맡았다. 실직 이후 "장난"으로 시작했던 기생 일을 하며 허사장을 비롯한 남성들의 허위의식과 바람기를 꼬집고,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자신의 남성성을 회복하게 된 태호는 로맨스의 완성과 취업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게 된다. 엔딩 신에서 태호의 여동생 태숙은 허사장의 아들과 결혼을 하게 되고, 태호는 허사장의 회사에 과장으로 진급하여 재취업하게 되며 정미와의 사랑도 이루게 된 것이다. 한편, <팔푼이 사위>(심우섭, 1968)에서 구봉서(구만복)는 시골에서 올라와 직장을 구하던 중, 부잣집 사위로 '취직'하게 된다. 연애결혼을 했으나 '잘난' 첫째 사위의 외도로 부부간 불화가 잦을 날 없던 첫째 딸 내외 때문에 다소 바보스럽더라도 진실한 사위를 구하겠다고 결심한 장인 덕에, 구만복은 부잣집 둘째 딸과 결혼하게 된다. 서울의 근대적이고 서구화된 생활방식에 적응하지 못한 그가 벌이는 소동을 코믹하게 그려내던 영화는, 오히려 그가 기지를 발휘하여 난봉꾼-악처인 큰 딸 내외를 '고치고', 마지막으로 허영심 많고 남편을 깔보던 둘째 딸의 '버릇을 고침'으로써, 화목한 가정을 만들어낸다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사진 19) <팔푼이 사위>(심우섭, 1968)의 한 장면. 우연히 부잣집 사위로 ‘취직’하게 된 구봉서의 ‘팔푼이’ 웃음 이렇게 볼 때, 1960년대 후반 구봉서의 코미디영화들은 1950년대 구봉서 주연 코미디 서사의 확대, 재생산이라는 관점에서 논의될 수 있다. 즉, 1950년대 후반에 30대 초중반의 나이였던 구봉서는 근대화의 물결과 이촌향도 현상으로 서울에 떠밀려 와 하숙집을 전전하며 직업을 구해야 하거나(<삼인의 형제>, <청춘배달>), 혹은 이미 직업이 있더라도 황당무계한 직장(<오형제>에서 잠자리 날개 기름과 달팽이 이빨 가루로 만든 미래 우주식품을 연구하는 무역상사)을 가진 주인공이었다. 이 영화들 속에서 구봉서(와 친구/형제들)는 꿈에도 그리던 여성을 만나거나(<구혼결사대>), 이미 있었던 애인과 결혼에 성공하거나(<오형제>), 새로운 애인을 만드는(<삼인의 신부>, <청춘배달>, <부전자전>) 등 '연애와 결혼'의 서사 중심에 놓인다. 연애와 결혼을 통해 그(들)은 부모님의 소원을 이뤄드리기도 하고(<삼인의 신부>, <오형제>), 진실한 사랑을 깨닫고 새 출발을 다짐(<청춘배달>, <부전자전>, <구혼결사대>)하기도 하면서, 합동결혼식 혹은 결혼약속을 통해 중산층-가부장제 사회로 진입하게 됨을 시사한다. (사진 20) <부전자전>(강대진, 1959) 포스터. 아버지 역의 김희갑과 구봉서(위), 걸인 친구 역할의 양석천과 양훈(아래) 10년의 시차를 두고 제작된 1960년대 후반, 이제는 40대 초중반이 된 구봉서의 코미디영화들은 여전히 도시로 밀려왔거나 실직을 당함으로써, 다시 구직을 해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 이번에는 여동생의 뒷바라지(<남자기생>), 남동생의 실험비용 마련(<남자식모>), 고향 개간(<남자 미용사>) 등 가족을 위해서 취직을 해야 하는 좀 더 절체절명의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 이들은 변장을 하거나(남자 시리즈) 결혼을 함(<팔푼이 사위>, <팔푼이 부부>)으로써 이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시 진실한 사랑을 발견하게 되고, 자신의 능력과 남성성을 발전시켜 "번듯한" 직장을 구하게 됨으로써 중산층-가부장제 사회에 성공적으로 안착한다. 1950년대 코미디 속 구봉서가 시골에서 올라온 주인공(혹은 '덜' 근대화된 인물)을 맡아 구직과 연애 활동을 통해 근대 사회와 가부장제에 다가간다면, 1960년대 후반 코미디에서 구봉서는 이미 시작부터 가부장이었으며, 여러 가지 위기 속에서 가부장으로서의 면모를 더욱 굳건히 하게 되면서 위기에 놓인 이들을 통합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는 점에서 주제의식이 강화된 버전이라고 볼 수 있다. (사진21) <팔푼이 부부>(심우섭, 1969)의 한 장면. 방성자와 구봉서. <팔푼이 사위>의 성공에 힘입어 제작되었던 ‘팔푼이 시리즈’ 중 한 편인 ‘팔푼이 부부’ 따라서 구봉서 코미디의 가장 큰 특징은 취업과 결혼이라는 지상과제를 수행하고, 성공하는 주인공을 보여줌으로써 '질서'를 잡고 '통합'하는 내러티브를 제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구봉서의 페르소나와 외형적 특징(준수한 외모, 정확한 표준어를 구사하는 저급하지 않은 화법, 그와 어울리지 않는 가느다란 목소리 등)은 이러한 내러티브에 적합한 캐릭터를 구현하였으며, 이는 영화 외의 매체를 통해 구성된 구봉서의 스타성과 상호작용한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건전한 중산층의 "명랑한 윤리" 1962년 10월 9일 《경향신문》에 '공처가 클럽'이 '홈 서비스 데이'를 맞이하여 야유회에 나섰다는 기사가 실렸다. "우리 집은 걱정 없어요"라고 말하는 영화인 가정의 대표로, 공처가 클럽의 회원인 황해, 구봉서, 곽규석, 신영균이 부인, 자녀와 함께 동반 나들이한 것을 기사화한 것이다. "가정에서는 아이들에게 자신이 출연한 코메디를 못 보게 하는 엄한 아버지"이자 "아내에게는 자상한" 구봉서의 면면은 "건전하고 명랑한 가정생활"을 하는 평범한 가장의 이미지로 신문지상에 종종 소개되곤 했다. 당시 인기 배우들의 스캔들이 신문에 적나라하게 소개되고 이에 대한 각 사회 인사들과 신문독자, 관객들의 논평이 이어지는 가운데, 구봉서를 '명랑가정'을 이루고 있는 대표적인 스타로 거론한 이 기사는 "명랑하고 건전한 소시민"이라는 그의 스타 페르소나에 잘 들어맞는 기획이었다. 이런 페르소나에 알맞게 취업과 결혼이라는 지상과제를 성공적으로 완수해 내는 결말로 수렴되어 가는 구봉서 코미디는 '질서'와 '통합'을 이뤄낸다. 구봉서의 캐릭터들은 전도된 남녀관계를 회복하고, 파탄에 이른 가족관계를 복구하며, 허영심에 들뜬 여성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1950년대 코미디에서 이러한 경향이 암시적으로 드러나거나 내재해 있었다면, 1960년대 코미디에서는 훨씬 노골적인 대사들로 전달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구봉서 코미디가 추구하는 건전한 중산층의 "명랑한 윤리"라는 주제를 설파한다는 점에서는 일관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진 22) <남자미용사>(심우섭, 1968)의 한 장면. 유학파 미용사 ‘앙드레’로 변장한 구봉서와 사장 최지희 (사진23) <남자미용사>(심우섭, 1968)의 한 장면. ‘블란서’식 계란 마사지를 시술하는 구봉서 (사진 24) <남자미용사>(심우섭, 1968)의 한 장면. ‘최신 유행하는 머리 스타일’을 만들고 있는 구봉서 이러한 내러티브와 주제 위에서 구봉서의 캐릭터는 무능력한 사회부적응자의 모습에서 과장된 남성의 능력과 우월함을 전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이 과정에서 자신의 우스꽝스러움을 극복하고 지배력을 회복하여 용기 있는 자아상을 구성하게 된다(Henry Jenkins, 구봉서 코미디의 장점은 무능력함을 드러내는 코믹한 장면들과 '취업'과 '연애'에서의 성공을 이끌어내는 이상적 자아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탁월함에 있다. 예를 들어 <남자와 기생>에서 구봉서(태호)는 지나친 여성성이 문제가 되어 직장에서 쫓겨나게 된다. 근무 시간에 용돈 벌이로 바느질이나 빨래를 대신 해 주다가 허사장에게 발각되어 실직을 하게 된 그는 우연히 여장을 하게 되고 기생으로 오해를 받게 된다. 그런데 오히려 기생 산월 노릇을 하면서 태호는 뭇 남성들을 훈계하고 남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게 되는 과정을 겪는다. #73 그 일실(밤) 많은 손님들이 교자상 앞에 길에 앉아 저마다 기생들을 끌어 안은 채 술을 마신다. (중략) 태호 가야금을 엉터리로 켜며 목청을 돋군다. 태호: 에헤야 에헤야 디야 어허랑 어허랑.. 모두들 내 노래가락 귀담아 들어라. 이 노래가락은 요즘 새로 유행되는 금주의 인기 베스트 원이다. 어허랑 어허랑 네놈들 돈 많다고 자랑하러 여기 왔다. 집에 가면 쌀도 없고 연탄도 없는 것들이 이런 곳에 와서는 돈을 물쓰듯 쓰는구나. 어허랑 어허랑 이 녀석들아. 냉수먹고 속 차려라. 여기서 쓸 돈이 있으면 자식 새끼들 운동화나 사 주고 고생하는 만누라의 속옷이나 사 입혀라. 어허랑 어허랑 급기야 춤을 춘다 태호: 한심하다 한심해. 네 놈들 때문에 우리들이 밥을 먹고 살지만 그러나 너희들은 정신을 차려 국가를 위해 무언가 일을 할 생각이나 해라. 어허랑 어허랑. 이처럼 '건전하고 상식적'이면서 '명랑한' 페르소나를 갖는 구봉서라는 스타 코미디언은 코믹한 무능력함을 전시하는 영화 초반부에서 이상적 자아로 향하는 후반부로 가면서 항상 성공적으로 그 경계를 넘어섬으로써, 관객들의 응원 속에서 근대적 중산층 가부장제 사회의 주류로 편입하게 된다. 구봉서가 그려낸 세계는, '상식'과 '능력', 그리고 '건전한 정신'으로 신분의 사다리를 '수직상승'할 수 있는 이상화된 세계였던 셈이다. 1962년 영화법 개정과 코미디영화에 대한 검열 및 제반 장르영화의 정착, 1960년대 초반에 유행했던 홈드라마의 영향, 그리고 '아버지의 법'을 등에 업은 채 진행되었던 사회적 억압의 기제는 대중영화의 주제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쳐, 196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반대급부로서의 '이상화된 세계'에 대한 열망은 커져갔다. 변장이나 가장을 통해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생존해 내고자 했던 구봉서의 캐릭터들은, 그들의 '가부장'성과 그에 대한 열망으로 인해 '정상적'인 방식인 취업과 결혼을 통해 신분상승의 기회를 얻게 된다. 묘령의 여인이나 회사의 직원, 하숙집 딸과 같은 중산층 서민과 연애를 했던 1950년대의 구봉서는 1960년대에는 회사 사장의 딸과 연애를 하거나 사장의 사돈이 됨으로써, 명실상부한 '중산층'의 윤리를 획득하게 된다. '정상성'과 '비정상성'이 구분되고 연애하는 상대의 사회적 계층을 인식하게 되며 '통합'이라는 주제가 강화되는 1960년대 코미디 속 구봉서는 1950년대 코미디 속 구봉서와 같은 내러티브 목표를 추구하지만, 좀 더 속악해지고, 좀 더 ‘질서 잡힌’, 억압적 세계 속의 '구봉서'가 된 것이다. 1960년대 후반, 구봉서코미디를 비롯한 코미디영화가 다수 제작되었던 시기는 어쩌면 스크린코미디 전성기를 마감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한국영화 검열이 한층 강화되던 흐름과 맞물려, 1969년에는 MBC TV 방송국이 개국했고, 텔레비전 수상기 보급이 활성화되면서 텔레비전은 급격히 영화의 자리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사진 25) <당나귀무법자>(안일남, 1970) 포스터. <셰인>을 비롯한 서부영화를 패러디한 영화 (사진 26) <삼인의 검은 표범>(김응천, 1971) 포스터. 세 시기의 영웅들을 다룬 옴니버스 영화. 서영춘, 허장강, 구봉서가 각각 주연을 맡았다. (사진 27) <타잔 한국에 오다>(김화랑, 1971) 포스터. 악극단 레퍼토리 중 하나였던 ‘타잔’ 패러디극을 악극단 작가이자 연출자였던 김화랑 감독이 영화화했다. MBC 방송국의 개국 프로그램이었던 <웃으면 복이 와요>를 시작으로, 스크린의 코미디 스타들은 방송국으로 주요 활동무대를 옮겼다. 구봉서는 서영춘, 배삼룡, 곽규석 등 걸출한 코미디언들과 함께 각 방송사들의 개국 프로그램을 섭렵하면서 코미디 연기를 이어 나갔다. 그리고 이들은 스크린 코미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것처럼 TV코미디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1970년대 초까지 구봉서는 다양한 하위 장르의 코미디영화에 출연하며, 스크린과 브라운관의 코미디를 연결시켰다. 구봉서는 영화뿐 아니라 대중문화계전반에 걸쳐 코미디 장르의 형성과 전성에 지대한 역할을 담당하며 우리 시대의 웃음을 주조했다. (사진 28) <막동이 신혼 10개월>(심우섭, 1969)의 한 장면
임권택 감독의 스릴러 영화 < 속눈섭이 긴 여자 >(1970)의 한 장면. 옛 애인으로부터 남편에 대한 의혹을 들은 숙진은 빈 집에서 정적 속에 나타난 검은 고양이의 울음소리에 놀라고 곧이어 묘령의 여인의 방문을 받는다. 검은 정장에 선글라스를 한 그녀, 자기 이름을 전하면 남편이 알 것이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진다. 남편이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의혹에 시달리는 숙진의 불안한 심리는 정적을 깨는 두 검은 존재에 의해 편집증적으로 증폭한다. 이 검은 방문자, 도발적인 눈빛에 연갈색 피부를 한 그녀를 연기한 배우가 바로 남미리 (南美里)다. 남미리가 맡은 미아는 ‘방탕’한 생활과 범죄를 저지르고도 끝까지 반성적인 면모라고는 찾을 수 없는, 뼛속 깊이 ‘나쁜’ 여자다. 매사에 무관심하고 권태로운 듯이 도도한 남미리의 표정은 그런 캐릭터에 힘을 실어 넣는다. 이처럼 나쁜 여자이거나 ‘타락’한 여자, 혹은 남자의 통제 아래 머무르지 않는 여자로 등장하는 남미리 의 얼굴은 1960~70년대 영화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주연급으로 출연한 영화가 많지는 않아도 그녀의 독특한 인상과 연기는 그 대부분의 영화에서 짙은 잔영을 남기고 있다. ‘스타일’이 망가지는 것이 싫어서 피임도구를 사고 남편이 꺼리는 가족계획을 하는 한순(< 신식할머니 >), 약속에 늦은 상대를 바람맞히고 그의 경쟁자와 데이트에 나서는 클럽 댄서 유미(< 폭풍의 사나이 >), “사내한텐 아예 반하면 안되는” 세상의 원리를 잘 알아 남자에 냉소적인 터키탕 여성 순희(< 육체의 문 >), 그리고 게이샤로 변장을 하고 상대남에게 독이 든 술을 먹이는 “홍콩의 요화” 유미(< 홍콩에서 온 철인 박 >)는 모두 남미리였기에 가능한 캐릭터들이다. 그녀가 이렇게 인상적인 역할들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방탕과 순정의 양극에서 번민하는 여인상”을 연기하고 싶다는 배우 본인의 개성 있는 연기관 덕분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 외적으로 그녀가 지니고 있던 배경이 작용한 것으로도 보인다. 이화여대를 중퇴하고 외국 유학을 했다는 경력은 그녀에게 단지 ‘지적인 여배우’ 정도가 아니라 경계 바깥의 문물에 대해서도 이미 남성들보다 잘 알고 있는,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위험한’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부여한 것 같다. 더구나 그녀는 데뷔 초기부터 이미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의 전속 모델로 유명했으며, “아름다운 각선미” 등으로 (소위 ‘순수함’과는 반대편에 있는) 육체파 스타라는 평가도 받고 있었다. 후기작에서 암흑가의 마담이나 클럽 댄서 역할을 유독 많이 맡았던 것은 이렇게 쌓여온 ‘일탈’의 이미지가 그녀에게 각인된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케도 만든다. 아마도 도전적인 역할도 마다하지 않는 남미리 본인의 과감함과 그렇게 자신감 있는 그녀를 ‘경계 밖의 여자’로 한정지으려 했던 집단적인 무의식이 만난 결과할 것이다. 영화 데뷔 전 대만 동오대학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그녀는 영어와 중국어에 능통한 것으로 유명했고 실제로 제16회 아시아영화제에서 통역을 맡기도 했다. 중국어 실력과 대만 유학 경력이 그녀에게 ‘중국통’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었던 것인지 남미리 는 영화에서 중국인 역할을 종종 맡기도 했다. < 여마적 > < 홍콩에서 온 철인 박 > < 인간 사표를 써라 > 같은 영화에서 치파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고, 한·홍 합작영화 < 사랑의 스잔나 >에서는 홍콩 가수 진추하의 어머니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녀의 중국어 실력은 <인간 사표를 써라>에서 짧게나마 볼 수 있다. 영화배우 활동을 하는 도중에도 모델로서 신문·잡지에 ‘가을의 모드’, ‘직장여성 옷차림’ 같은 패션사진을 선보였으며, 1963년에는 ‘영화배우의 브라운관 화면 진출 제1호’로 KBS 일요연속극 <아내의 얼굴>에 출연했다. 최근 일반 슈퍼 판매 문제로 화제가 되었던 모 드링크 음료 광고모델로도 유명세를 얻었다. 영화계에서 은퇴 후 한동안 문화방송 근처에서 살롱을 경영했고 지금은 호주로 이민하여 살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