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이 김선달
- 감독
- 한홍열
- 제작년도
- 1957
- 출연
- 최남현, 변기종, 장훈, 최봉, 김승호, 이기홍, 남성남, 이예성, 김희갑, 남춘역, 최성호, 조항, 이경희, 박옥초, 고선애, 진상일, 고향미, 임동훈, 백송
박희준 감독은 문화영화, 특히 민간의 문화영화제작현장에서 40여년을 활동한 감독이다. 드물게 극장 흥행을 한 문화영화를 감독, 제작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생소한 용어인 ‘문화영화’ 1) 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화영화가 제작, 유통되던 시기를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정권은 영화법을 제정하여 영화를 산업화하고자 하였다. 당시 제정된 영화법을 살펴보면 문화영화를 ‘사회, 경제, 문화의 제현상중에서 교육적, 문화적 효과 또는 사회풍습 등을 묘사설명하기 위하여 사실기록을 위주로 제작된 영화를 말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2) 또한 영화법에서는 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하기에 앞서 문화영화를 상영할 것을 고지하고 있다. 3) 1961년 발족한 국립영화제작소는 정부의 정책을 홍보하기 위한 다양한 문화영화들을 제작하였으며 새마을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부터는 새마을 운동을 홍보하기 위한 영화들을 제작, 유통하였다. 박희준 감독이 문화영화제작 분야에 참여하게 된 것은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를 졸업하고 1961년 국립영화제작소에 입사하면서 부터이다. 박희준 감독은 1954년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에 입학하여 재학 중 군에 입대하였다. 육군사관학교 군악대에 배치, 군악병 생활을 하였던 박희준은 5.16 쿠데타가 일어나는 달에 제대를 하였다.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에 성공, 육군사관생도들이 서울 시내 중심가를 행진할 당시 앞에 있던 군악대에 있었으며 이 행진을 마지막으로 구술자는 군을 제대하였다. 제대 후에는 연기자가 되기 위해 김기영 프로덕션에 연구생으로 잠시 들어간 적도 있었지만 당시 공보원에서 실시한 ‘공보요원 모집’ 공고를 보고 연기자의 꿈을 접고 국립영화제작소에 입사를 결심하였다. 당시 문공부에서는 대대적인 모집을 하였는데 이는 병역기피자들을 단속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퇴사, 공석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100여명이 응시한 가운데 5명이 선발되었는데 입사 당시 직급은 ‘연예사’였다. 입사 동기로는 다보문화사 대표인 황왕수 씨와 김학수 감독, 박정근 감독 등이 있었는데 박희준 감독을 포함하여 5명이 최종 합격하였고 이중에서 4명이 감독의 보직을 받았다. 국립영화제작소 입사 당시 시라큐스에서 파견한 교육인원들이 아직 남아있었는데 박희준 감독은 이들로부터 연출 등의 강의를 들었다. 국립영화제작소 근무 당시 양종해 감독, 배석인 감독 등 선배 감독들의 조감독 생활을 3년 정도 한 뒤에 1967년 <삼천만의 불침번>부터 직접 감독을 하게 되었다. 박희준이 국립영화제작소 시절 감독한 작품인 <가요잔치>는 당시 유명 가수인 이미자, 김부자 등이 출연한 영화로 농촌 계몽영화의 순회상영 당시 활용되었는데 새마을 영화 등 문화영화 가 너무 경직되었다는 의견이 있어 오락성 있는 영화도 보여주자는 의도에서 만들어 졌다고 한다. 그림 1) 국립영화제작소 출신들의 모임인 문영회 회원들과 2007년 기념 촬영한 사진. 오른쪽부터 임학송, 양종해, 이은덕, 신병운, 최봉암, 이성철, 박희준, 봉상균, 박익, 윤기범.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시행과 함께 기업들이 성장하면서 기업들은 기업 홍보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기업홍보영화의 제작은 주로 문화영화 감독들에게 맡겨졌고 이러한 수요를 바탕으로 민간 문화영화 제작사들이 등장하였다. 대부분이 국립영화제작소 출신의 감독들이 설립하였다. 사진2) 탄광촌에서 촬영한 새마을운동 홍보 영화인 <정암골에 새봄이>(1984)의 촬영현장 사진. 영화는 공장 새마을의 성공사례를 담고 있다. 사진 오른편에 연출 지도를 하고 있는 박희준의 모습이 보인다. 박희준 감독 역시 1964년 국립영화제작소를 퇴사하여 민간문화영화제작자, 감독으로 활동하였다. 박희준 감독은 1965년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방송사인 동양방송 CM제작부로 자리를 옮겼는데 텔레비전 방송국들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면서 박희준 감독을 포함하여 많은 국립영화제작소의 인력들이 방송국으로 이직을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박희준은 극장상영용 문화영화 제작을 위해 동양방송을 그만두게 되는데 여기에는 광고영화를 낮게 평가하는 당시의 풍토도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하였다. 동양방송 퇴사 후 민간에서 문화영화 감독으로 활동한 박희준 감독은 극장상영용 장편문화영화 <역도산의 후계자 김일>(1966), <극동의 왕자 김일>(1966), <허리케인의 대혈투>(1967), <황금의 이마>(1967)을 제작, 감독하였다. 텔레비전의 보급이 시작되던 시기에 스포츠 중계는 텔레비전 콘텐츠의 중요한 부분이었고 레슬링의 인기가 매우 높은 편이었다. 일본에서 성공한 역도산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있었던 당시의 대중들에게 김일 선수의 활약상을 극장상영용으로 만들어 보여주면 인기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 4)5) 박희준 감독은 보다 박진감 넘치는 화면을 위해 실제 경기를 여러 대의 카메라로 촬영하고 인기 아나운서의 해설을 덧붙였다. 김일은 프로레슬러 1세대 선수로 1960년대 일명 ‘박치기 왕’으로 널리 알려진 스타였다. 박희준 감독은 김일 선수의 경기를 시리즈로 제작하여 극장에서 상영하였는데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 <역도산의 후계자 김일>(1966)이다. 박희준은 직접 실제 경기를 촬영하고 여기에 보태어 김일 후원회에서 촬영한 영상과 스포츠 전문 사진작가인 장점동 씨의 자료를 첨가하여 작품을 완성하였다. 박희준은 판권을 미리 팔지 못해 사비를 들여 영화를 제작하였고, 완성된 영화를 지방 흥행업자들에게 보여주고 판권을 팔아 대구의 국제극장에서 영화를 개봉하였다. 영화의 호응이 좋아 서울의 아세아 극장에서도 상영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다. 1편의 흥행으로 이후의 시리즈는 지방흥행업자들에게 판권을 팔아 제작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림3) <역도산의 후계자 김일>(1966)의 극장상영용 포스터 그림 4) <역도산의 후계자 김일>(1966)의 대본 표지. 하단에 대명제작사인 신영문화영화사의 이름이 보인다. 김일 시리즈의 2편에 해당하는 <극동의 왕자 김일>은 1편 <역도산의 후계자 김일>이 개봉한 해에 제작, 상영되었다. <극동의 왕자 김일>의 포스터를 보면 ‘일본현지촬영’, ‘시네마스코프’ 등의 문구가 보인다. 영화는 일본에서 치러진 김일 선수의 경기 모습을 담고 있지만 열악한 제작 여건 상 박희준이 직접 현지에서 촬영을 하지는 못한 채 김일 선수 측에서 촬영한 분량을 사용하였다. 좀 더 스펙터클한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영화는 시네마스코프로 촬영하였고 마치 실제 경기를 중계하는 듯한 실감나는 내레이션을 입혀 상영을 하였다고 한다. 그림 5) 김일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 <극동의 왕자>(1966)의 포스터 ‘시네마스코프’, ‘해설 이광재’, ‘일본현지촬영감행’, ‘2탄’ 등의 문구가 보인다. 김일 시리지의 마지막 편인 <황금의 이마>(1967)는 김일 선수의 세계헤비급 챔피언 쟁탈전을 담고 있다.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던 경기의 현장감을 최대한 담기 위해 4대의 카메라를 동원하여 촬영을 하였고 현장음도 마치 동시녹음을 하듯 녹음을 해 후반 작업에 사용하였다. 영화는 만원사례를 낳으며 흥행을 하였지만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다. 박희준 감독은 <황금의 이마>를 끝으로 김일 선수 영화 제작에 관련된 권리를 다른 문화영화제작업자에게 양도하고 이후 다시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복직하였다. 국립영화제작소에 복직한 그는 <가요잔치>를 감독하였다. 조금 딱딱한 계몽 영화를 틀어주기에 앞서 관객의 관심과 흥미를 끌기위해 오락적인 요소가 가미 된 영화의 제작이 요구되어 만들어진 영화인 <가요잔치>에는 이미자 등 당대의 유명가수 등이 출연하였다. 가수가 노래하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당시 국립영화제작소에서 구비하고 있던 동시녹음 카메라인 미첼 카메라를 사용하였다. 계몽적인 성격이 강한 문화영화만 보아오던 관객들의 호응이 매우 높았다. 이러한 경험을 되살려 박희준은 관광과 콩트를 접목한 형식의 영화를 구상하였다. 국립영화제작소에서 제작한 문화재 관련 영화 촬영차 전국을 누볐던 그는 관광과 노래, 그리고 콩트가 결합된 문화영화를 만들면 흥미로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박희준은 국세청에서 의뢰한 국세청 홍보영화 <신영균 씨의 하루>를 마지막으로 본격적으로 극장상영용 문화영화 제작을 위해 1971년 국립영화제작소를 퇴사하였다. 퇴사 후 박희준 감독은 1972년 <강산에 노래 싣고 웃음 싣고>를 시작으로 1973년에는 <노래 실은 금수강산>과 <노래 실은 관광여행>을 1975년에는 <가요대행진>을 제작, 감독하였다. 1972년 <강산에 노래싣고 웃음싣고>는 국립영화제작소 입사 동기인 김학수 감독이 운영하던 문화영화제작사 삼진영화제작소에서 대명제작을 한 작품이다. <강산에 노래 싣고 웃음 싣고>는 흥행에 크게 성공하였다. 1970년대 텔레비전의 보급과 함께 가요프로그램도 인기가 높았다. 당대 최고의 가수는 남진, 나훈아, 이미자 등이었다. 박희준 감독은 이들 인기가수들을 조그만 텔레비전 화면이 아닌 커다란 시네마스코프 화면에서 볼 수 있다는 것에 관객들이 흥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여기에 보태어 좀 더 다양한 오락거리를 보여주기 위해 콩트를 삽입하였다. 백남봉과 남보원 콤비를 등장시켜 이들이 유명 관광지에서 콩트를 하고 가수가 등장해 노래를 하는 형식을 취했는데 <소양강 처녀>, <금산 아가씨> 등 노래에 등장하는 공간들이 영화에 배경으로 등장하였고 장소와 장소를 고속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두 명의 코미디언이 등장하여 콩트를 하였다. 그림 6) 김일 시리즈의 3편인 <황금의 이마>(1967)의 검열대본 대본의 크레디트에는 ‘신영영화사 작품’, ‘시네마스코프’, ‘기획 김윤모’, ‘녹음 이재웅’, ‘음악 정윤주’, ‘구성․ 편집 손익동’ 등이 적혀 있다. 그림 7) 국제극장에서 상영한 <황금의 이마>(1967)의 만원사례 봉투이다. 그림 8) 잠실체육관에서 열렸던 김일 선수의 챔피언 쟁탈전을 촬영한 <황금의 이마>(1967)의 극장상영용 포스터 을지극장에 개봉한 영화는 만원사례를 낳았다. 문화영화로는 드물게 극장에서 흥행을 하였지만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였던 남진이 등장하는 장면에 장발이 문제가 되어 검열에서 잘리는 바람에 아쉽게도 극장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일반인들에게 볼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았던 워커힐 쇼 장면 역시 노출이 심하다는 이유를 들어 삭제되는 일도 겪어야 했다. 그림 9) <강산에 노래 싣고 웃음 싣고>(1972)의 검열대본 대본을 보면 ‘삼진영화제작소 작품’, ‘칼라 시네마스코프’, ‘후원 한국연예협회, 한국경제일보사’ 등의 문구가 실려 있다. 그림 10) <강산에 노래 싣고 웃음 싣고>(1972)의 초대권 을지극장에서 상영을 하였는데 ‘파라마운트 SHOW'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이를 통해 영화 상영 전 쇼를 하였던 당시의 관행을 알 수 있다. 1972년 <강산에 노래싣고 웃음싣고>의 흥행으로 박희준 감독에게 극영화 연출의 기회가 찾아왔다. 유림흥업주식회사에서 대명제작한 극영화 <그녀>에는 남진, 하춘화, 신성일 등 당대의 스타들이 캐스팅되었다. 하지만 영화는 아쉽게도 완성되지 못했다. 대명제작에 대해 엄격해지는 영화계 분위기와 문화영화와는 다른 극영화의 제작과정에서 오는 어려움 때문에 촬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장편 극영화 <그녀>는 <강산에 노래 싣고 웃음 싣고> 시리즈 2편에 대한 제작과 함께 제작비를 투자 받은 것이었고 때문에 장편극영화의 중단에도 불구하고 그 남은 제작비로 <강산에 노래싣고 웃음싣고>의 후속편인 2편을 제작할 수 있었다. 그림 11) <노래실은 금수강산>(1973)의 촬영현장. 가수가 노래하는 장면을 촬영 중인데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973년 제작, 감독한 <노래 실은 관광여행>과 <노래 실은 금수강산>은 아쉽게도 전편의 흥행에 미치지 못하였다. 1편 격인 <강산에 노래싣고 웃음싣고>에 출였던 백남봉, 남보원 콤비의 섭외에 실패하여 서영춘, 남성남 콤비를 등장시켰지만 전편의 인기를 넘어서기는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영춘, 남성남 콤비의 인기에 힘입어 지방에서 꽤 흥행을 할 수 있었다. 이들 영화에는 한려수도, 부산, 경주, 제주도 등 전국의 유명 관광지가 등장한다. 박희준 감독은 당시 관광 책자에서 장소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그림 12) <가요대행진>(1975)의 촬영장면. 은방울 자매가 ‘삼천포 아가씨’를 노래하는 장면이다. 카메라 옆에서 연출을 지도하고 있는 박희준의 모습이 보인다. 1975년 박희준 감독은 당대의 청년문화의 스타들을 대거 등장시켜 <가요대행진>(1975)을 만들었다. 영화에는 조영남, 김세환, 송창식 등 통기타 가수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콩트가 빠진데다가 지방에서 통기타 가수들의 인기는 트로트 가수보다는 덜 대중적인 탓에 영화의 흥행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림 13) <가요대행진>(1975)의 촬영 현장. ‘안동 놋다리 밝기’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 박희준 감독은 스포츠와 쇼와 같은 오락, 흥행적 요소를 가진 문화영화를 제작한 문화영화의 흥행감독이다. 문화영화는 주로 계몽, 교육에 목적을 두고 있는데 박희준 감독은 스포츠와 가요, 콩트, 공연 등 당시의 관객들이 흔히 볼 수 없는 볼거리를 제공하는 문화영화를 제작하였다. 박희준 감독은 스스로 이들 영화들의 흥행이유에 <강산에 노래싣고 웃음싣고> 시리즈는 워커힐 쇼, 당대의 인기 가수, 전국 팔도의 경관 등의 볼거리가 재미의 요소였다고 설명을 하였다. 6) 극영화와 텔레비전에서 줄 수 없는 시각적인 스펙터클, 가요와 스포츠라는 대중문화,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새로운 레져로 떠오른 관광 등 이러한 시대적 요소들이 박희준 감독의 작품들이 흥행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1975년 <가요대행진>을 끝으로 박희준 감독은 극장상영용 문화영화의 제작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텔레비전의 보급으로 스포츠와 가요를 극장에서 즐기기 보다는 가정에 즐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박희준 감독은 이후 기업 홍보 영화와 전통문화를 담은 문화 영화의 연출에 주력하였다. 영화업이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뀌어 본인의 회사를 설립하기 전 까지 박희준은 12년 간 프리랜서 감독으로 활동하였다. 그림 14) 박희준 감독이 한일홍보에 근무하던 시절 사진. 감독 뒤로 마네킹들이 보이는데 한일홍보의 투자사가 마네킹 제조업체였기 때문이다. 이 당시 만들었던 영화들로는 부산시청 민원 창구 계몽영화인 <민원서류는 이렇게 처리됩니다>(1975), 새마을운동 홍보 영화인 <어떤 휴일>(1976), 전라북도 산업 및 관광홍보영화 <밝아오는 내 고장>(1977), 농촌새마을 홍보영화 <꿈이 열리는 땅>(1981), 리비아 수출 홍보 영화 <동아콘크리트>(1982), 대구시 홍보 영화 <대구의 향기>(1982) 등이 있다. 한국의 전통 문화를 소개하는 문화영화로는 <돌의 문화>(1984), <한국의 목조 건축>(1985)등이 있다. <한국의 목조 건축>은 제2회 금관상영화제 순수문화영화 부문에서 우수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하였다. 그림 15) 1983년 연출한 군정홍보영화 <풍요로운 남해>의 촬영현장 사진이다. 그림 16) 1983년 연출한 군정홍보영화 <풍요로운 남해>의 촬영현장 사진 그림 17) 1988년 <돌과 한민족>으로 제5회 금관상영화제 순수문화영화 부문 우수작품상을 수상할 당시의 사진 그림 18) 1985년 <한국의 목조 건축>으로 제2회 금관상영화제 순수문화영화 부문 우수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 한 뒤 영화진흥공사 직원과 환담을 나누는 모습 영화업이 등록제로 바뀌면서 박희준은 희보영상을 설립하여 2008년까지 운영하였다. 제6회 금관상영화제 홍보영화 부문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독립기념관>(1989)을 비롯해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와 함께 열린 세계청소년캠프의 기록영화도 제작하였다. 그림 19) 1988년 열린 서울올림픽 국제청소년 캠프의 기록영상을 촬영할 당시 박희준 그림 20) 1986년 아시안게임 주관 방송사인 KBS와 계약을 하고 아시안게임 기록영상을 제작할 당시 기념 촬영한 사진이다. 가운데가 박희준. 1970년대 활발하였던 문화영화제작사들은 1990년대 이후 서서히 사라졌다. 박희준 감독은 텔레비전이라는 거대한 미디어의 등장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필름이 사라지면서 필름을 기반으로 하였던 문화영화사들도 사라지게 되었다고 회고하였다. 1960년대와 70년대 영화가 국가 및 기업의 주요 흥보 미디어로서 기능하던 시기에 민간의 문화영화는 성장하였다. 자연히 문화영화는 국가와 기업의 요구에 맞춰 만들어졌고 극장상영용으로 만들어지기 어려웠다. 박희준 감독은 이러한 환경에서 드물게 극장상영용 문화영화를 만들어 흥행을 하였다. 스포츠, 관광, 쇼 등의 요소를 활용한 볼거리들은 당시 관객들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후 텔레비전이라는 강력한 미디어의 등장이 이러한 볼거리에 대한 관객들의 욕망을 담아가기 전까지 이는 한국영화사에서 보기 드문 시도였다. 박희준 감독은 문화영화의 조금 경직된 경계를 허물고 관객에게 다가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참고문헌) 1) ‘문화영화’란 일반적으로 극장에서 흥행을 목적으로 공개하는 극영화의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논픽션 필름(nonfiction film), 다큐멘터리 필름(documentary film), 기록영화와 유사한 개념으로 사용된다. ” 이하나, 「정부수립기~1950년대 문화영화와국가정체성」, 역사와 현실제74호, 한국역사연구회, 2009. 12, 521쪽. 2) 1962년도에 제정 시행된 영화법 제2조에서는 문화영화와 극영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④본법에서 극영화라 함은 배우를 출연시켜 연극화한 영화로서 문화영화 및 뉴우스 영화이외의 영화를 말한다. ⑤본법에서 문화영화라 함은 사회, 경제, 문화의 제현상중에서 교육적, 문화적 효과 또는 사회풍습 등을 묘사설명하기 위하여 사실기록을 위주로 제작된 영화를 말한다. 이와 같은 법령상의 정의는 문화영화를 설명하는 또 다른 용어인 비극영화((非劇映畫, Non-theatrical film)의 정의와 같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비극영화(非劇映畫, Non-theatrical film)를 국어사전에는 ‘극영화가 아닌 영화를 통틀어 이르는 말. 학술영화, 교육영화, 기록영화 따위가 있다.’고 정의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이영일의 글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단편영화로 픽션을 곁들인 극영화와 대립되는 의미를 지닌다. 독일어 Kultur film을 직역한 말에서 왔으며 대체로 다큐멘터리영화의 총칭으로 사용되어 왔으며 극영화・뉴스영화를 제외한 모든 비극영화(非劇映畫)의 총칭으로 쓰여 왔다. 그러나 교육영화・계몽영화 등 그 제작 목적에 따라 명칭이 세분화되기 시작한 뒤부터는 점차 문화영화라는 말이 소멸된 감이 있고, 기록영화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역사적으로 문화영화의 효시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이 만든 위생영화(衛生映畫)이며, 독일은 그 뒤 UFA사가 Kultur Film이라는 이름으로 단편의 과학영화를 잇따라 제작하여 문화영화의 전통을 세웠다.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기록영화는 1919년 당시의 서울 시가지 풍경을 수록한 <경성 전시(全市)의 경(景)>이다. 문화영화와 기록영화라는 용어는 서로 혼동되어 사용되어 왔는데, 문화영화가 우리나라에서 공용어로 정착하게 된 것은 1973년 전면개정된 영화법에 보면 “문화영화라 함은 사회・경제・문화 등 제 분야에 있어서 교육적・문화적인 효과 또는 사회풍습을 묘사, 설명하기 위하여 제작한 영화를 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 따라서 문화영화의 범주에 광고와 만화영화가 포함된 배경에는 이러한 극영화와 비극영화의 구분과 정의가 있다고 보여진다. 3) 1962년 제정 시행된 영화법 제11조 (문화영화동시상영)에는 “공연자가 영화를 상영하고자 할 때에는 문화영화를 동시에 상영하여야 한다.”고 고지되어있다. 4) 1965년 3월 9일《경향신문》4면의「연예메모」에 단성사에서 개봉하는 일본 수입 영화인 <역도산>에 대한 안내 기사가 실려 있다. 5) 박희준 감독이 제작 ,감독한 김일에 관련된 영화는 다음과 같다. <역도산의 후계자 김일>(박희준, 1966, 신영문화영화제작사), <극동의 왕자, 김일>(박희준, 1966, 민양프로덕션 제작), <허리케인의 대혈투>(박희준, 1967), <황금의 이마>(박희준, 1967, 신영문화영화제작사). 6) 이정아,「박희준·김청기·한호기」,『2010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한국영상자료원, 2012, 114~152쪽 참고.
남.기.남 앞으로 해도 뒤로 해도 마찬가지인 이 이름은 마땅히 이 코너에서 다뤄져야 할 것이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던 사람이라면 그의 등장을 기다려 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막상 무언가를 쓰려 하면 곤란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다. 그는 남철 도, 남성남 도 아닌 남기남 이기 때문이다. 그는 임권택 보다 늦게 데뷔했지만 더 많은 수의 작품을 연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김청기 처럼 아동영화에 영화 인생을 걸지도 않았지만 현재까지 깨지지 않는 아동영화의 최고 흥행작품 감독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영구와 땡칠이 >는 애초에 정식 극장 개봉도 못 하고 어린이회관을 전전하였으나 폭발적인 인기에 뒤늦게 극장으로 확대 개봉한 최초이자 최후의 사례다. 영화인들은 180~250만 사이를 최종스코어로 짐작하는데, 이는 어린이회관 상영에 대한 집계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뿐이면 쉬울 것이다. 그의 현장은 전설이 만들어지는 곳이기도 했다. 그는 중화권을 돌며 짝퉁 이소룡인 ‘여소룡’과 권격영화를 찍을 당시, 허가도 받지 않고 대만의 한 사찰에서 촬영을 감행했다. 해당 사찰의 관련자들이 저지했음은 당연지사. 연출부와 제작부가 사정을 설명하고 옥신각신하다가 도저히 허가를 받을 수 없어 남 감독에게 더 이상 촬영이 어렵겠다고 전하자 그는 말했다고 한다. “찍긴 뭘 더 찍어. 다 찍었어. 철수!” 이뿐만이 아니다, 임하룡 , 이성미 와 함께 한 < 철부지 >의 촬영 현장은 한국 영화사상 가장 짧은 촬영 기간으로 알려져 있는데, 촬영 6일 차가 되던 날 점심시간이 되어 연출부 한 명이 “감독님 식사하시고 찍으시죠.”라고 말하니 “뭘 더해. 다 찍었는데. 밥 먹고 철수!”라고 응수했다고 전해진다. 제작 스태프조차 알 수 없었던 남기남 연출의 마술. < 갈갈이 패밀리와 드라큘라 >에 출연했던 개그맨 정종철 은 본인의 경험을 이렇게 회고하기도 했다. “대체 내가 뭘 하는지 몰랐어요. 그런데 편집본을 보니 영화가 되어 있는 거예요.” 띠요옹~ 남기남 감독과 작품들 남기남 의 영화는 그런 것이었다. 70년대 유신정권하에서 대충 빨리 찍어 스크린쿼터를 해결하고 외화를 수입하려는 목적에만 눈이 벌개있던 제작사들에게 남기남은 소중한 존재였다. 적은 제작비로 휘몰아치듯 영화를 찍어 눈 깜짝할 새 개봉까지 해치워버리는 남기남은 일종의 해결사였고, 가끔씩 흥행에도 대박까지 터트리기도 하는 영화 제작자들의 로또이기도 했다.(실제로 남기남은 고 이주일 과 함께한 < 평양맨발 >의 흥행으로 정부가 선출한 우수감독에 뽑혀 할리우드에 가기도 했다. 정부가 우수감독도 뽑아 할리우드도 보내주고 참 좋았던 시절이었나 보다.) 그중에서도 < 태권소년 어니와 마스터 킴 >은 가장 재미있는 사례다. 이 영화는 1986년 미국 ABC에서 방송된 <태권소년 어니>라는 드라마로 인기가 높아진 ‘어니 리예스 주니어’를 기용해 만들어진 영화다.(그는 스턴트맨을 거쳐 액션배우로 현재까지 활동 중이다.) 이 드라마는 한국에도 방송되어 큰 인기를 모았다. 1989년 12월에 개봉한 <태권소년 어니와 마스터 킴>의 광고 카피는 “겨울방학 특선! 태권소년 어니가 영화에 나왔대! 잘났어 정말! 태권소년 어니!”였다. 그러나 영화의 주인공은 어니가 아니라 마스터 킴이어서 과연 남기남 감독이라는 감탄을 자아낸다. 내용이 무슨 의미냐 하는 생각도 들지만 간단히 설명하자면, 어느날 미국 워싱턴에 살고 있는 재미교포 ‘하바드 박’이 살해당한다. 그는 헤로인 밀수 조직과 연관이 되어 있었던 것으로 의심을 받는다. 그와 절친이었던 재미한인회 회장 신성일(끝까지 극 중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다.)은 하바드 박을 친딸처럼 여기며 보살피는 와중, 유학을 위해 무작정 미국에 온 마스터 킴을 만나게 된다. 집도 절도 없는 마스터 킴은 비슷한 처지의 고아 마이클(어니 리예스 주니어의 극 중 이름은 마이클이다. 고로, 극 중에 ‘어니’라는 존재는 없다.) 만나게 된다. 고아원에서 배운 태권도를 수준급으로 구사하는 마이클과 마스터 킴은 친구가 되고, 그 둘을 의기투합하여 폭력과 마약, 섹스의 위험에 노출된 미국 청소년들을 계도하기 위해 태권도 도장을 차리게 된다. 그리고 하바드 박을 쫓던 헤로인 밀매상들은 마스터 킴이 연관되어 있음을 알고 도장에 쳐들어오게 되고 한판 승부를 벌이는데... (좌)마스터 킴과 마이클의 첫 대련 '허허, 이 녀석이!' (우)'어때 우리 이제 친구 되는게.' '난 너 같은 부랑아와 친구가 되고 싶지 않아.' 어설픈 연기, 계속 헛갈리는 내용, ‘ 남기남 ’이라는 이름 아래 정당화되는 유치한 촬영 등을 조금만 참을 수 있다면 영화는 나름대로 즐길 만하다. 무술 유단자 바비 J 킴 과 어니의 무술 연기는 상당한 수준이며(남기남 감독은 한 때 무협영화의 흥행사였음을 떠올리자) 유해한 환경에 노출된 미국 청년들을 태권도로 교화하자는 애국적 스토리가 심금을 울릴랑말랑 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전설이 된 이유는 영화 밖에 있다. 이 영화는 1989년 12월에 개봉을 했다. 89년 7월에 남기남 감독이 연출한 또 한 편의 영화가 개봉했는데 그게 < 영구와 땡칠이 >다. 한 해에 그가 감독한 영화가 복수로 개봉하는 일이 드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 태권소년 어니와 마스터 킴 >이 <영구와 땡칠이>가 촬영되는 중간에 찍혀졌다면 얘기가 조금 다르다. 남기남 감독은 <영구와 땡칠이>의 촬영 도중 세트 제작을 위해 1주일의 시간이 비었다. 미리 스케쥴을 통보받은 남 감독은 제작자 몰래 비는 시간 동안 미국에서 다른 영화 한 편을 더 감독하기로 계약하고, 스태프 6명을 데리고 출국해버렸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이유는 이렇지만, 항간엔 심형래 의 콧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 있는 상태여서 남기남 감독이 화가 나 그랬다는 설도 있다. 실제로 89년 개봉한 김청기 감독의 우뢰매 시리즈 5편 < 뉴머신 우뢰매 >는 그런 심형래를 빼고 ‘ 한정호 ’라는 배우가 에스퍼맨을 연기했다. 이 역시 심형래의 폭거(?)로 인한 일이었으나, 그가 우뢰매에서 빠지자 우뢰매와 심형래의 인기가 동반하락, 6편에서 에스퍼맨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곳에서 <태권소년 어니와 마스터 킴>을 뚝딱 촬영하고 돌아와 <영구와 땡칠이>의 남은 부분 촬영을 3일 만에 완료한 것이다. 게다가 이 영화의 주인공인 마스터 킴을 맡은 ‘ 바비 J 킴 ’을 왕년의 액션스타 ‘바비 킴’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다른 사람이다. 바비 킴을 따라한 콧수염 때문에 멀리서 보면 얼추 비슷해 보이긴 하는데 가까이서 보면 그냥 한눈에 봐도 다른 사람이다. 바비 J 킴은 바비 킴처럼 마초의 기운이 희번덕거리지 않는다. 맘씨 좋은 아저씨 같달까. ‘폭력과 마약, 섹스에 노출되어 있는 미국 청소년들을 태권도로 교화시켜보겠습니다.’라고 진지하게 말하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아저씨가요?’라고 말하고 싶다. 만약 같은 대사를 원조 ‘바비 킴’이 했다면? ‘암요 그러믄요 미국 꼬맹이들은 혼 좀 나야지요.’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이소룡, 성룡을 패러디한 배우는 많았지만 한국 액션배우를 패러디한 배우는 바비 J 킴이 유일하지 않았을까? 누군가 속은 기분이 든다면 이름에 J가 분명히 들어가 있음을 다시 한 번 상기하기 바란다. (누군가는 ‘ 남충일 ’ 무술 감독 같다는 이야기도 하는데 확인된 바는 없다.) 마스터 킴의 사람 좋은 4종 세트 < 태권소년 어니와 마스터 킴 >은 인기 드라마의 주인공 ‘어니’ 이름을 빌어 졸속으로 제작된 겨울방학용 어린이 영화였다. 포스터를 봐도 그건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영화의 기둥줄거리가 헤로인 거래에 연루된 ‘하바드 박’의 죽음이고 여주인공이 납치되어 강간의 위험에 빠지질 않나(덩치가 산만한 외국 배우가 벨트를 푸는 시늉을 하는 장면이 있다) 급기야 태권소년 마이클이 별다른 힘도 못써 보고 총에 맞아 사망하는 아스트랄 한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게 펼쳐진다. 영화의 각본을 쓴 사람은 홍종원 이라는 설과 장현수 라는(< 게임의 법칙 >의 그 장현수 감독이다.) 설이 있는데, 네이버 검색에는 장현수, KMDb에는 홍종원이다. 남기남 과 꾸준히 작업을 한 사람이라는 점을 보면 홍종원이 맞는 것 같은데 구글 검색에는 아예 장현수와 남기남이 공동감독으로 올라가 있으니 참 어지러운 지경이다. 하여간 각본을 누가 썼든 ‘감독 남기남’이라는 크레디트 아래서는 크게 의미는 없을 것이다. 남기남이라는 브랜드는 강하다. 남기남 감독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한물간 직업 영화감독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다. 현재까지 현역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2010년 < 동자 대소동 >, 2011년 <달무리>를 연출했다. 마치 영화를 공장에서 뽑아내듯 해치웠던 그의 감독으로서의 태도에는 이런저런 이견이 있다. 하지만 그가 했던 작업들은 철저히 대중들의 눈높이에서 기획되고 만들어진 영화들이었다. ‘3류 감독’이라는 수식어가 별명처럼 따라붙으면서도 묵묵히 영화 한 길을 걸어온 이 노장은 죽기 전까지 “그럼 다 찍지, 남기남?”이라는 우스갯소리와 함께 영화 인생을 이어갈 것이다. 그는 한창 무협영화 감독으로 이름을 날릴 무렵인 70년대 언젠가 촬영차 고향 광주로 내려갔을 때, ‘환영. 천재감독 남기남’이라는 플래카드를 보고 영화에서 예술적인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생각을 아예 지워버렸다고 한다. 예술인으로서의 생존이 아닌, 인간으로서 생존하기 위한 직업으로 영화를 규정지은 것이다. ‘장인’이라고 부르긴 힘들겠지만, 자신의 직업과 주어진 사명에 철저하게 몰입했던 영화인으로서 존경받을 구석은 분명히 있다고 본다. 1년에 9편을 찍는 괴력은 그저 빨리 찍는데 통달했다고 되는 게 아니다. 해내겠다는 불굴의 의지가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천재 감독’에서부터 ‘저질’까지의 극단을 오갔던 남기남 감독에게 나는 ‘음지의 거장’이라는 칭호를 바치고 싶다. 바비 J 킴 ERNIE RAYES.JR 신성일 감독: 남기남 각본: 홍종원 개봉극장: 한가람 관람인원: 203(서울)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