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잠
- 감독
- 박준석
- 제작년도
- 2003
- 출연
- 홍재범, 최진영
중국 태생의 조선족 감독 장률은 문화적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뤄왔다. < 경주 >(2014)와 < 춘몽 >(2016)의 경쾌한 비트에 이어 장률은 < 후쿠오카 >에서 다시 한번 이국의 풍경 속으로 들어간 타자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온다. <후쿠오카>의 주인공들은 다른 장률 영화의 인물들처럼 경계에 선 사람들이다. 서울에서 헌책방을 운영하는 제문(윤제문)은 헌책방의 거의 유일한 단골인 당돌한 괴짜 소녀 소담(박소담)의 제안으로 함께 후쿠오카로 떠난다. 사실 후쿠오카로 간 제문의 목적은 대학 시절 막역한 선후배 사이였지만 한 여자를 동시에 사랑했던 탓에 28년간 연락을 끊었던 선배 해효(권해효)를 만나기 위해서다. 후쿠오카에서 작은 술집을 경영하고 있는 해효와의 만남, 그리고 후쿠오카 시내를 배회하며 먹고 마시고, 대화를 나누는 세 사람을 둘러싼 이야기가 표면적인 줄거리이다. 그러나 영화에는 이러한 줄거리만으로 이해되지 않는 트릭들이 은밀하게 숨겨져 있다. 이러한 트릭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서사는 여러 갈래로 재해석이 가능하다. 분명한 것은 이 영화가 ‘사랑’이라는 주제 아래 놓여있으며, 사랑이라는 감정의 본질을 충실히 따라가고 있다는 점이다. ‘사랑의 시간’이라는 규칙을 따르는 이야기의 전개 구조와 캐릭터들은 때로 휘어지고 뒤틀리며, 합쳐졌다, 갈라진다. <후쿠오카>는 처음부터 끝까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법한 꿈의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영화이다. 도입부에서 제문은 헌책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 홀연히 나타난 소담은 그에게 뜬금없이 후쿠오카로 여행을 가자고 제안한다. 그녀의 제안에 어처구니없어하던 제문은 환청처럼 선배 해효의 타박하는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지인에게 전화해 해효가 후쿠오카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은 함께 지하의 어두컴컴한 책방을 나오고, 서사의 무대는 곧바로 후쿠오카의 거리로 건너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생뚱맞은 캐릭터 소담, 현실에서는 들릴 리 없는 해효의 목소리가 제문을 후쿠오카로 이끌었고, 이후 영화의 전개 속에서 세 사람 모두에게는 기이한 일들이 일어난다. 판타지와 현실, 혹은 꿈과 현실을 오가는 이야기의 속성은 후쿠오카에 두 사람이 도착하면서 더욱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후쿠오카는 어떤 곳인가? 영화감독 장률은 후쿠오카아시아영화제의 의뢰를 받아 이 도시를 무대로 한 영화를 연출하게 되었지만 후쿠오카는 이곳의 지역성과는 큰 상관성이 없다. 이성의 논리로 접수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는 공간으로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후쿠오카에서 세 사람, 특히 소담은 어찌된 영문인지 언어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하며, 그녀의 존재는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듯 보인다. 소담은 어느 순간 사라졌다 갑자기 나타나고, 후쿠오카에서 우연히 만난 일본인, 중국인과 각자의 언어를 쓰면서도 서로의 말을 알아듣는다. 그리고 이러한 이상한 상황을 제문과 해효는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소담은 적대감을 씻어내지 못하고 서먹서먹한 제문과 해효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면서, 두 사람을 어떤 방향으로 계속해서 이끄는 현실 세계 바깥의 초월적 존재처럼 보인다(제문은 소담을 한마디로 또라이라고 정의 내리면서도 신기가 있다고 말한다). 영화 속 한 에피소드에서 해효의 가게 단골손님인, 10년간 단한번도 말을 하지 않았던 남자가 곧 한국어로 말을 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 같은 말이 현실로 이루어지면서, 소담의 말은 두 사람에게 미래의 일을 예언하고 진실을 알려주는 힘을 지니게 된다. 소담은 제문과 해효에게 할 것과 갈 곳을 제안하고, 두 사람에게 그녀의 제안이 어떤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임을 암시하며 그들의 여정을 앞서 인도한다. 그리고 소담은 그 여정 속에서 제문과 해효가 처음부터 매우 닮은 한 쌍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주지시킨다. 소담은 두 사람이 끊임없이 서로에게 다가서게 만들며, 종래는 한 쌍의 데칼코마니처럼 닮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 두 사람은 이토록 서로 닮아있는 것일까. 처음에는 한 여인을 사이에 둔 연적으로, 사랑의 아픔 탓에 무려 28년간 서로 왕래 없이 지내는 선후배로 묘사되지만, 영화가 전개될수록 두 사람은 영원한 진공상태에 놓인 사랑의 시간에 갇힌 동일한 영혼처럼 보인다. 무려 28년이 지났음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동시에 사귀었다가 홀연히 사라져버린 순이라는 여인에게 몰입해있다. 두 사람이 각각 머물고 있는 헌책방과 후쿠오카는 모두 한때 순이가 머물던 공간이었고, 두 사람은 30년 가까운 물리적 시간에 아랑곳없이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윤동주의 시 두 편 ‘자화상’과 ‘사랑의 전당’은 그런 의미에서 의미심장하다. ‘자화상’에서 제 3자로 묘사한 그 사나이가 자신의 모습이었던 것처럼, 제문과 해효는 마치 거울처럼 서로의 모습을 비추고 있으며, 엄혹한 세상 속에서 윤동주 시인이 떠올렸던, 찰나이자 영겁처럼 느껴지는 사랑의 시간 속에 머물러 있다. 사랑의 시간 속에서 두 사람은 현실의 시공간으로 나오기를 거부하는 어린아이 같은 상태로 후쿠오카를 배회한다. 두 사람, 어쩌면 한 사람의 의식 속에 존재할 사랑의 전당은 앞과 뒤가 이어진 띠처럼 모든 것이 되돌아오고, 사라졌던 것이 홀연히 다시 나타나는 그런 꿈과 같은 곳이다. 현실의 시간과 공간이 의미를 잃고, 모든 것이 하나의 감정으로 수렴되는 곳. 영화의 전개에 따라 후쿠오카는 현실의 지리적 공간이 아닌 모두의 의식 속에 데자뷔처럼 존재하는 공간이 된다. <후쿠오카>는 인물 중심의 긴 테이크에 집중하는 표류하는 내러티브와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과거에 대한 느린 폭로라는 점에서 장률의 전작들과 유사하다. 장률의 모든 영화는 장소가 주는 영감, 인상에 기초하고 있고 장소의 성질에 새로운 맥락을 부여하는 그의 접근방식을 구체화한 인물이 소담이다. 소담은 자신이 다국어를 구사하지 못한다고 아쉬워하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중국의 고전 소설 ‘금병매’를 들먹인다. 후쿠오카의 거의 모든 곳에서 볼 수 있는 에펠탑을 닮은 소담의 가방을 비롯해 곳곳에서 상징적인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낯선 장소의 맥락 속에서 인물들의 자연스러운 상호작용과 기승전결을 통해 과거에 대한 실마리가 서서히 드러난다. 보이지 않지만 우리 곁에 있는 존재들, 기원과 역사를 추정하기 힘든 저 존재들의 현신인 소담은 유령이다. 유령적 존재들의 만남을 서사화한 영화의 마지막 신은 다시 헌책방으로 돌아온다. 홀로 낮잠을 자던 제문에게 소담이 말을 걸었던 그 어둑한 책방은 영화의 시작을 열었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후쿠오카에서 소담이 건 전화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는 책방에는 제문과 해효가 각기 따로 떨어져 구석 자리에 앉아있다. 이제 그 책방에서 소담은 사라지고, 남겨진 사람은 제문과 해효다. 두 사람이자 한 사람인 이 어리석은 사랑의 포로는 인간의 뇌를 닮은 듯 구불구불하고 미로 같은 책방, 마치 달처럼 보이는 둥근 조명 불빛 속에 어슴프레 남겨져 있다. <후쿠오카>는 장률 감독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종종 드러났던 꿈의 시공간을 본격적으로 유영하는 작품이며, 어쩔 수 없이 과거 지향적인, 관념 속에 존재하는 ‘사랑’이라는 주제가 왜 수많은 예술 작품에서 끊임없이 재생되는지 탐색한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기루처럼, 돌아갈 수 없지만 결코 벗어날 수도 없는 ‘사랑’ 이야기는 인간사의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이자 예술 작품의 영혼이라는 사실을 <후쿠오카>는 순수하게 돌아보고 있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7.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K정연과 알고 지낸지 거의 10년이 됐지만 함께 영화를 본 건 손에 꼽는다. 그와 많은 것을 했다.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 술을 마시고 택시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도쿄에 가서 목욕탕에 가고 한 침대에서 자고 파리에서 햄버거를 먹고 전동 킥보드를 타고 전시를 보고 런던의 클럽에서 아마추어 밴드의 저주에 가까운 음악을 듣고… 그러나 영화를 같이 봤냐고 물으면 기억나는 건 단 한번 뿐이다. 임재철 평론가의 클래스에서 본 장 피에르 고랭의 <루틴 플레져 Routine Pleasures>(1986). 지난 글에서 말한 바 있는 이 영화를 서너명의 사람들과 어느 출판사 건물에 딸려 있는 강의실에서 봤다. 밤이었고 출판사에는 사람이 없었고 왜인지 우리가 허락도 받지 않고 몰래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아무도 상영하지 않고 보지 않는 영화를 보기 위해 도시를 떠돌며 빈 건물을 일시적으로 점유하는 씨네-프레카리아트. <The Cinema of the Precariat>의 서두에 톰 자니엘로는 이렇게 쓴다. “프레카리아트는 미미한 존재감 때문에 언제든 끝장날 수 있음에도 계속 (영화에 관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 때문에.” 1) <루틴 플레져>는 장 피에르 고랭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두 남자가 작은 역의 벤치에 앉아 기차가 들어오길 기다린다. 한쪽이 자기 인생사를 들려준다. 난 언제나 그런 이야기를 좋아했다. 로저가 이야기를 끝내면 내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다.”(장면: 살찌고 머리가 벗겨진 중년 남자와 그를 바라보는 장 피에르 고랭 미디엄 투샷) <루틴 플레져>의 오프닝 씬을 나와 K정연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쪽이 이야기를 끝내면 다른 쪽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느 쪽이 살찐 아저씨인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중요한 건 결국 둘 다 말하고 둘 다 듣게 될 거라는 사실이다. 이 과정은 일반적인 대화와는 약간 다르다. 영화와 관객의 관계와 유사하다고 할까? 영향을 주고받지만 실시간적으로 일어나는 교류나 상호작용은 아니다. 한쪽이 끝날 때까지 다른 한쪽은 기다려야 한다. 영화는 인터랙티브 아트가 아니다. 영화가 마주해야하는 건 즉각적인 응답, 반응, 참여가 아니라 어둠과 침묵 속에서 이어지는 불안정한 기다림이고 불현듯 잉태되고 사라지는 잠재성이다. 조르조 아감벤은 <내용 없는 인간>에서 예술 작품을 바라보는 행위를 시간의 지속성이 단절되고 차단된 느낌, 정신의 바깥, 근원적인 차원에 체류하는 사태로 묘사한다. 이러한 유보를 그리스어로 에포케epoche라고 한다. “즉 리듬의 에포케라는 바깥으로 떨어져 나오는 행위를 통해 예술가와 관람자는 그들의 본질적인 동맹 관계와 공동의 지반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2) 이것이 영화라는 매체가 우정을 형성하는 방법이다. 영화는 우정의 한 형식이다. 정성일과 유운성 평론가의 평론집 첫 챕터 제목은 각각 다음과 같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영화 친구를 사귀는 방법에 관한 작은 가이드”. 3 ) “우정의 이미지들”. 4) 유운성은 세르주 다네를 인용한다. “유대 그리고 우정이라는 말은 아주 아름다운 말이다. 나는 한번도 우정이라는 관계 이외에 사람들과 다른 어떤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정말이지 영화만큼 우정을 사랑하고 의미화하는 예술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지돈씨와 제가 10년 동안 같이 본 영화가 한편이라는 사실이 우리 관계를 증명해주는 같네요. K정연이 말했다. 뭘 증명하는데요? 우리가 친구가 아니라는 사실. 영화와 우정에 대한 K정연의 철학에 따르면 만약 우리가 친구였다면 더 많은 영화를 함께 봤을 거란다. 그 태도가 너무 단호해 나는 섭섭함과 함께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뭔가 반전이 있겠거니 했다. 예를 들면 우정은 친구 이상의 것, 자신 안에서 타자를 발견하는 탈주체화의 지각이자 게니우스genius적인 것과 스페키에스species적인 것과의 관계 맺음이며 극장과 카메라가 사라지거나 감춰진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의 변화한 상호주관적인 행위다, 등등. 그러나 K정연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2살 많잖아요. 헉. 앞으로 형이라고 하세요. K정연…!! 나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시간을 보니 오후 여섯시였고 나는 원고를 쓰다 지쳐 컴퓨터 앞에서 깜빡 낮잠이 든 거였다. 메일이 와 있었다. 영자원 담당자에게 온 메일로 마감 시한을 고지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K정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꿈 얘기는 하지 않았고 우리가 써야할 원고에 대해서, 우리가 만들 에세이 필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정연씨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쓸 테니 어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21세기 한국영화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고견을 들려주세요! K정연이 말했다. < 고양이를 부탁해 >(2001)는 계급과 주거, 프레카리아트에 대한 영화다, K시네마를 주거와 부동산의 역사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주택자의 영화, 다주택자의 영화, 전세사기꾼의 영화, 메타버스 가상부동산 업자의 영화… 홍상수와 김기덕은 홈리스 영화의 대표적인 두 형상이다, 한쪽은 돈이 많아서 집 없이 전국을 떠도는 모텔-호텔 생활자, 다른 한쪽은 돈이 없어서 강바닥과 절을 떠도는 (검열)… 등등. K정연은 이사를 한뒤 부동산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고 했다. 나는 동료 소설가인 오한기도 부쩍 부동산에 관심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왜 사람들은 집에 관심이 많은 거예요? 지돈씨도 결혼하고 애 낳으면 알 거예요. K정연……. 네? 아니에요. 모든 한국의 연극영화과가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다녔던 학교에는 이상한 문화가 있었다. 선배를 무조건 형이나 누나, 언니 또는 오빠라고 불러야 했다. 선배를 선배라고 하면 하극상으로 끌려가서 얼차려를 받았다(대체 왜?). 자신보다 어린 선배를 선배라고 하면 기강이 해이해진다는 이유였다. 형, 누나야말로 윗사람을 대하는 진정한 호칭이란다(설명을 들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당신은 정상…). 이것 말고도 학교에는 이상한 문화가 많았지만 이 자리에서 다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는 선배들을 피해다녔다. 형, 누나 호칭이 입에 붙지 않아서였다. 외동으로 자란 탓일까? 사람들은 왜 형이나 누나, 오빠, 언니라는 호칭을 좋아할까. 나는 생각했다. 내가 영화를 찍지 않는다면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유사 가족 문화권에서는 진정한 시네마가 태어날 수 없다고. 가족은 우정이 아니라 혈연이고 K시네마의 혈연은 가부장제와 연결되며 가부장제는 남성연대와 여성혐오로 이어지고 결국 신자유주의적 가치 체계를 내면화한 청년 남성으로 과대표화된 담론과 정치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가 지금, 바로, 이 순간에 고양이를 부탁해를 다시 보자고 한 거예요. K정연이 말했다. 영화야말로 젠더를 생산하고 그 성격을 결정짓는 “젠더 테크놀로지”입니다. 5)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고양이를 부탁해>를 보지 않았다. 영화 개봉 당시 생물학적 여성인 친구들이 너무 좋다고 말하며 등장 인물들의 대화와 행동을 흉내내고 논평했던 게 기억나지만, 나는 보지 않았다. 그건 단지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컴퓨터 스크린으로 혼자 영화를 보는 것만을 유일한 낙으로 생각한 웹친화형 K-시네필이었기 때문일까. <고양이를 부탁해>를 검색했다가 잊고 있었던 단어를 발견했다. “와라나고”. 와라나고는 수작이지만 블록버스터에 밀려 극장에서 제대로 상영 못한 영화를 네티즌이 발굴해낸 영화 다시 보기 캠페인이었다. < 와이키키 브라더스 >(2001), < 라이방 >(2001), < 나비 >(2003), <고양이를 부탁해>. 문득 기억 속에 묻어두었던 영화들이 생각났지만, 다시 한번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와라나고 캠페인에 속한 어떤 영화도 보지 않았다. 이런 내가 21세기 한국영화에 대한 에세이필름을 만들 자격이 있을까. 이렇게 영화를 안 보는데? 학교 선배들이 왕가위와 이와이 슌지, 미야자키 하야오를 보지 않는다고 훈계를 했던 해묵은 일도 기억났다. 어떻게 <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를 안 볼 수가 있어? < 화양연화 >도 안 봤다고? 제정신이니? 넌 영화과라고 할 수가 없구나. 과거가 떠올라서일까, 아니면 단지 원고를 쓰고 에세이필름을 만드는 일의 어려움과 지속불가능성, 때때로 급습하는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회의와 공포 때문일까. 나는 K정연에게 다음 문장으로 끝나는 긴 메일을 보냈다. “…… 건강하고 밝은 사람으로 살고 싶은데 그건 무리겠죠? 격일로라도 밝게 살았으면 좋겠다.” 다음날, K정연에게 전화가 왔다. 지돈씨. 그가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왜 K정연인지 알았어요. 왜요? 키아누 리브스가 뉴욕타임즈 비평가 선정 21세기 가장 위대한 배우 4위인 거 아시죠? 키아누 리브스 생일이 9월 2일이거든요. 그리고 제 생일도 9월 2일. 지난 원고에 이 이야기를 쓴다는 걸 깜박했네요. 그걸 왜 써요…. 오늘은 오전에 나윤이(K정연과 박지은 사이에 태어난 딸을 뜻함) 문화센터에 데려다주고 작업실로 가는 버스를 탔거든요. 버스에서 상우씨가(이상우 소설가를 뜻함) 추천해준 젠하이저 이어폰을 끼고 넷플릭스로 <키드 디텍티브>를 보며 응암으로 가는데 문득 기분이 이상한 거예요. 세줄 뒤에 앉은 덩치 큰 중년 남자가 저를 쳐다보는 것 같더라구요. 그게 누군지 아세요? 키아누 리브스? 유운성 평론가. 헉. 그래서요? 그래서…. K정연이 말했다. 그래서… (다음 화에 계속) 1) <The Cinema of the Precariat: The Exploited, Underemployed, and Temp Workers of the World >(Thomas Zaniello, Bloomsbury Academic, 2020) *본문에서 괄호 안은 옮긴이가 추가한 내용이다. 2) <내용 없는 인간>(조르조 아감벤, 윤병언 옮김, 자음과모음, 2017) 3)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정성일, 바다출판사, 2010) 4) <유령과 파수꾼들>(유운성, 미디어버스, 2018) 5) “섹스리스 K-시네마: 한국영화 속 젠더 배치의 문제”, <21세기 한국 영화>(손희정, 앨피, 2020)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좋은 사람 곁에 많은 이들이 모이듯, 좋은 영화는 고요히 있어도 눈길을 끈다. 어느 장소에 카메라가 들어서 있는지 잊지 않으며 마주한 대상과 거칠 것 없이 한 호흡으로 숨을 쉰다. 아무렇지 않게 무언가를 하는 영화처럼 보기 드문 영화는 없다. 오래도록 창신동에서 옷을 만들어온 이들의 몸에 밴 시간을 응시하는 이나연 , 조민재 의 단편영화 < 실 >(2020)은, 보는 이의 감각을 깨워 그들의 시간과 접촉할 수 있도록 만드는 영화다. 두 감독은 영화에 극적인 장치 하나, 격렬한 대목 하나 심어두지 않고도, 창신동 골목 한 편에서 노동하며 살아온 이들의 역사를 슬며시 깨워낸다. 옷을 만드는 명선(김명선)의 작업실에는 많은 이들이 방문한다. 옷 제작을 의뢰하러 온 디자이너며, 함께 봉제공장에서 일했던 지기, 손수 만든 빵을 들고 찾아온 막내딸과 오래된 동료들이, 품이 넓은 그녀 곁에 머물다 간다. 명선는 꾸밈이 없고 동그란 몸처럼 부드러운 성정을 지닌 듯하다. 그녀는 맛깔나는 농담도 곧잘 던지는데, 일감이 줄자 제봉 일을 접고 대구로 가 새로운 일을 하려는 현(김현)에게는 재치를 뽐내는 말들을 한껏 쏟아낸다. 흥이 많은 현도 명선의 말을 잘 받아친다. 오고 가는 농담 안에서 그들은 헛헛한 마음을 나눈다. 옷을 만드는 일만으로는 생계를 꾸리기 어려워 이런저런 소일거리를 병행하는 명선도 언젠가는 이 골목을 떠날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들의 상실감에 젖어드는 게 아니라 삶의 일부로 여기며 마지막까지 그들의 지속되는 시간을 비춘다. 명선의 작업실에 방문하는 마지막 손님은 명선만큼이나 나이 지긋해 보이는 중희(변중희)다. 콧노래를 부르며 길을 가던 중희는 명선의 작업실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보고서는 자연스레 문을 열고 들어간다. 명선은 중희에게 자신이 만든 블라우스를 보여주고 그 옷을 보며 중희는 “옷이 너 닮았다”라고 나긋이 말한다. 이 말은 이상하리만치 감동적이다. 오래도록 이 골목에서 시간을 함께 보낸 동료의 통찰력일까. 예쁘고도 품이 넓어 편안해 보이는 새하얀 블라우스는 정말 명선과 닮았다. 그리고 <실>은 명선이 만든 옷과 명선과도 닮은 것 같아, 이 영화를 특별하게 느끼도록 만든다. 영화는 처음부터 창신동 골목에서 오랜 노동을 해온 이들의 몸과 공간에 새겨진 역사를, 그들이 시간을 지낸 방식으로 담아야 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우리는 영화의 시작부에서부터, 날렵한 손길로 옷감을 착착 재단해 내고, 매끈하게 재봉해내는 명선의 손을 본다. 그 손에서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세월이 스쳐가는 듯하다. 그녀의 숙련된 기술은 젊은 적부터 재봉공장에서 무수한 밤을 지새우며 셀 수 없이 많은 옷들을 만들었기에 습득된 것일 테다. 조민재 감독은 “몸에 담긴 역사는 결코 따라 할 수가 없”어 실제 오랫동안 옷을 만들어 온 자신의 어머니를 출연시켰다고 얘기했는데, 어느 누구라도 그 말을 절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의 손길 하나가 지난한 시간을 말해준다. 또한 명선과 어울리는 그녀와 닮고도 다른 개별 인물들의 얼굴들과, 그들이 서로 어울리는 품새에 이 골목의 오랜 역사가 깃들어 있는 것도 같다. 거기에 골목 여기저기 엉켜 있는 전깃줄과 명선이 낮잠을 잘 동안에 더 크게 들려오는 다른 작업실의 재봉틀 소리가 어우러지면, 이나연, 조민재가 절실히 이해하고 어루만지려 한 이 공간의 시간과 리듬이 이 영화에 살며시 내려앉는다. 두 감독은, 그리고 <실>은 창신동의 골목을 이루는 많은 존재들에게 무척 깊은 마음을 둔 것 같다. 그대로 보고 존중하고 닮아가고 싶어 하는 건 사랑의 다른 표현이다. 그런 사랑은 아주 어렵다. 세세한 제스처와 표정을 기민하게 읽기도 하고, 다 알지 못해도 온 힘을 다해 상대의 살아온 세월을 가늠해 보려 애쓰게 된다. 이 영화의 골목길 장면들에 마음이 흔들리는 건 구도가 아름다워서나, 그 길을 지나는 사람들의 몸짓이 생생해 보여서만이 아니다. 그 구도에서만이 공간을 이루는 사람과 사물들과 그곳에 흐르는 공기와 그들이 어울려 만드는 리듬을 조금 더 느껴 볼 수 있으리라고 이 영화가 믿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모든 존재들의 몸짓과 표정들을 통과해 비로소 이곳의 역사와 소박하게 만난다. 명선이 블라우스 옷감을 재단할 때, 새하얀 천위로 비치는 옛 재봉공장 여성노동자들의 해사한 모습과 그들의 투쟁 현장에서, 그리고 명선이 현재 동료들과 함께 보내는 골목의 한 편에서 그들의 시간이 이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본다. 명선이 이 골목을 떠난 후에도, 이곳의 한 편에는 명선과 흐엉(당티 흐엉)처럼 어두운 밤에 작업실을 떠나고 이른 새벽에 작업실 불을 밝히는 노동자들이 있을 것이다. 영화 초반부에 세 대의 카메라가 마주하는 장면이 있다. 하나는, 골목 한쪽 벽에 자신이 만든 옷을 걸어놓고 사진을 찍는 명선의 핸드폰 카메라이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인 관광객의 손에 들려 있는 카메라며, 마지막은 <실>의 카메라다. 세 대의 카메라는 언뜻 닮은 듯하지만 대상을 대하는 태도도, 카메라 앞에 놓인 존재와 함께 한 시간도 다르다. 노동운동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나라에서 온 이방인은 창신동의 역사를 거시적으로 읽으며 개별 존재들을 세부 요소들로 묶어낸다. 그는 명선의 손과 그 육체에 배인 시간과 유머감각을 느껴보지 못했던 것 같다. <실>의 카메라는 명선과 그녀가 살아온 장소를 느껴보러 온 힘을 다하지만 명선이 자신이 만든 옷을 찍을 때의 마음을 다는 모를 것이다. 다만 느껴보려 한다. 그 하나하나의 마음이 영화의 숏 하나하나에 담겨 있다. 그 마음들이 현현하는 <실>은 놀랍고 아름다운 영화며, 무엇보다 ‘영화’인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