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의 풍차
- 감독
- 김수용
- 제작년도
- 1976
- 출연
- 민철, 전영록, 허림, 김진규, 사미자, 주증녀, 조학자, 임종매, 서정일, 한명환, 황해, 최인호
강근식 구술을 통해 보는 1970년대 한국영화의 새로운 흐름 주지하다시피 1970년대 한국영화에서 가장 주목받고 연구가 많이 이루어진 분야는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과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등으로 대표되는 영상시대의 영화들일 것이다. 이들의 영화는 시대를 반영하는 대표적인 영화들로 1970년대 한국의 정치‧사회적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스타일의 측면에서도 새로운 인력의 구성을 통해 기존의 한국영화와는 구별되는 다양한 형식을 시도하며 시대의 흐름과 변화를 보여주었다. (그림1)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 포스터 (그림2)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포스터 특히 이 영화들은 1970년대 각광받기 시작한 다양한 대중문화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1960년대와는 달라진 새로운 청년세대의 등장을 강조하였다. 한국영화에서 새로운 세대의 등장은 매 시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1950년대에는 <자유부인>(한형모, 1956)에서 이민이 연기한 춘호가 전쟁 직후 미국문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아프레게르’ 세대를 보여주었고, 1960년대에는 <맨발의 청춘>(김기덕, 1964)에서 신성일과 엄앵란이 연기한 두수와 요안나가 4.19 이후 새롭게 등장한 방황하는 ‘청춘’ 세대를 보여주었다. 이 영화들은 흥행 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며 한국영화산업의 변화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별들의 고향>에서 안인숙이 분한 경아와 <바보들의 행진>에서 신인 신분으로 파격적으로 기용된 윤문섭, 하재영과 아역배우 출신의 이영옥이 연기한 병태, 영철, 영자는 이들 세대와는 또 다르게 구별되는 새로운 세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바로 세계적인 청년문화의 중심에 놓여있던 히피 세대의 등장이었다. <별들의 고향>과 <바보들의 행진>의 음악을 담당했던 강근식이 “히피 감성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고, 서양의 그것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고 생각했다”고 해도 세계적인 유행은 다양한 대중문화의 흐름을 타고 한국의 콘텐츠에 녹아들었다. (그림3)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의 문오와 경아 (그림4)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의 병태와 영자 다양한 분야에서 새롭게 유입된 인력들은 1970년대를 대표하는 이 영화들의 이야기, 연출의 스타일 그리고 음악에서 대중문화를 향한 젊은이들의 열망에 부응하는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강근식은 이와 같은 한국영화의 새로운 흐름에 합류한 대표적인 음악인이었다. 그는 일본문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고, 미국영화와 미국음악에 오롯이 영향을 받은 전후 세대를 대표하는 대중문화예술인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재즈와 사이키델릭 사운드에 영향을 받은 음악적 취향은 이들 영화를 동시대 세계적으로 유행한 영화와 음악 등의 대중문화 콘텐츠와 연관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지점을 만들어놓았다. 이렇듯 강근식을 비롯하여 당대 청년 세대에게 호응을 받은 소설가 최인호, 음악인 이장희, 송창식 등의 대중문화예술인들이 이장호, 하길종 감독 등과 협업으로 만들어낸 이 영화들은 특정 개인에 의한 예술작품이 아니라 1970년대 대중의 열망을 가장 적확한 방식으로 보여준 대중문화의 결과물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강근식의 프로필은 시대를 읽어내는 데 매우 유용하고도 흥미로운 지점을 제시한다. 청소년 시절, 역사의 큰 분기점인 4.19와 5.16을 겪고, 1960년대 중후반에는 미국음악에 심취해 학내 밴드로 음악활동을 시작하고, 1970년대에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 음악살롱에서 프로 음악인으로 성장하며 상업영화와 상업광고음악계까지 진출한 그의 음악 프로필은 1960~1970년대 변화하는 대중음악뿐만 아니라 대중문화 전반의 흐름까지 살펴보는 데 일조한다. 특히 1970년대 TV산업의 확장과 성장으로 동반 성장한 광고산업과 이에 따른 하위문화의 번성이 기존의 한국영화산업에 직‧간접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 가늠해보는 데 유용한 구술이기도 하다. 강근식의 구술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1970년대 대중문화의 또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은 ‘매체의 넘나듦’이다. 이 시기 영화와 TV 그리고 공연이 서로 영향을 받으면서 기존의 무대와 영화의 영향관계 내에서 활동한 기성세대와는 또 다른, 새로운 유형의 멀티 엔터테이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소설가 최인호의 영화작업이 그러하며 (최인호는 자신의 원작이나 각색 영화에 항상 카메오 출연을 하기도 했으며 <걷지말고 뛰어라>(1976)를 직접 감독하기도 했다), 강근식을 비롯한 이장희, 송창식 등의 음악인들 또한 본업인 음악작업 외에도 영화음악과 광고음악을 넘나들면서 음악적 영향력을 확장했다. 이것은 영화사적으로는 TV 산업의 성장으로 기존의 한국영화산업이 급격히 쇠퇴한 단점으로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매체의 경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새로운 세대들이 등장함으로써 매체 간의 영향이 다각화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따라서 밴드음악과 영화음악 그리고 광고음악이 모두 포괄되어 있는 강근식의 구술은 1970년대의 대중문화를 이해하는 데 하나의 길잡이가 될 수 있다. (그림5)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최인호 출연 장면(아래 왼쪽) ‘평생 음악인’ 강근식의 음악이야기 이 부분은 『영화천국』Vol. 60에 실린 「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청춘의 음악 만들어낸 영원한 청년 음악인」을 수정·보완했다. 강근식은 1946년 평양 출생으로 한국전쟁 때 월남해 탄광촌인 강원도 상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오락거리라고는 아무 것도 없던 환경에서 기타를 치던 형님들과 나무에 그린 피아노 건반으로 연습하는 누이를 보며 음악을 배웠다. 가수 활동을 하던 삼촌 손인호는 때때로 악극단 활동에 얽힌 무대 이야기를 해주었다. 변변한 악기 하나, 제대로 된 음반 한 장 없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둘러싸여 생활한 덕에 그는 평생 음악을 업으로 하는 예술가가 되었다. (그림6) 홍대강당에서 이루어진 5인조 밴드 홍익캄보의 첫 공연. 왼쪽에서 두번째 기타연주자가 강근식. (그림7) 밴드 홍익깜보 시절 신입생 환영회. 가운데 기타연주자가 강근식 홍익대학교 도예과 재학 시절 학내 밴드인 홍익 캄보의 기타리스트로 음악 활동을 시작한 강근식은 ‘TBC 전국 남녀 대학생 재즈페스티벌’에서 수상하며 본격적인 음악인의 길로 들어섰다. 수상 후에는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음악프로그램 <TBC 쇼쇼쇼>에도 출연할 만큼 유명인사가 되었다. 이후 1970년대 청년문화를 대표하는 다양한 음악의 산실이라 부를 수 있는 오리엔트프로덕션 소속 뮤지션으로 활동하며 <이장희와 동방의 빛>, <조동진>, <현경과 영애>를 비롯한 다수의 음반 작업에 참여했다. <이장희와 동방의 빛>의 기타리스트로 이화여자대학교 강당에서 공연을 할 때는 디자이너 앙드레김이 직접 무대의상을 제작해줄 정도의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그림8) TBC 전국 남녀 대학생 재즈페스티벌 공연 사진. 2회 연속 그랑프리를 수상하였다. 당시에는 무대 모니터 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아 밴드 공연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림9) <쇼쇼쇼> 출연 사진. 왼쪽부터 이장희, 진행자 곽규석, 강근식 (그림10) <동방의 빛> 공연 사진. 앙드레 김 선생이 맞춰준 옷을 맞춰입고 공연하였다. 이후 강근식은 1970년대 변화하는 대중문화의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기 시작했다. 1970년대 새롭게 등장한 음악인으로서, 새롭게 등장한 영화인들 그리고 광고인들과 협업하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을 것이다. 특히 음악과 영화에서 청년문화를 대표하는 오리엔트프로덕션과 화천공사의 만남으로 탄생한 <별들의 고향>과 <바보들의 행진>은 영화뿐만 아니라 음악적인 면에서도 신선한 충격과 파장을 끼쳤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은 이 영화들이 현재까지 회자되는 데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림11)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 OST (그림12) <바보들의 행진> OST 영화음악과 더불어 그가 작업한 광고음악은 음악인 강근식을 소개하는 데 중요한 프로필이 되었다. 김세환이 부른 “부드러운 껌”(<해태껌>)과 정훈희, 윤석화 등이 부른 “열두 시에 만나요”(<부라보콘>), 지금까지도 패러디되는 “멋진 남자 멋진 여자”(<트라이>) 등은 CM송을 넘어 시대를 소환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30여 년 동안 광고음악을 창작하며 경험한 대중문화와 사회변화의 관계는 그의 구술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된다. 1970년대 충무로가 영화의 거리에서 광고의 거리로 변화하는 모습, 영화가 아닌 광고를 통해 새로운 스타가 탄생하는 모습, 광고의 종류가 식료품 위주에서 전자기기로 변화하는 모습 등은 광고를 통한 한국사회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그림13) <부라보콘> 광고 (그림14) <부라보콘> 광고 (정윤희와 신일룡이 출연한 부라보콘 광고는 시리즈로 만들어졌다) 1970년대 화천공사와 오리엔트프로덕션의 시도로 탄생한 새로운 청년영화 강근식이 작업한 영화음악은 총 13편으로 데뷔작 <별들의 고향>을 필두로 1970년대 작업한 영화가 6편(<바보들의 행진>, <너 또한 별이 되어>(이장호, 1975), <미스 영의 행방>(박남수, 1975) <걷지말고 뛰어라>(최인호, 1976)(편곡), <내마음의 풍차>(김수용, 1976)), 영화음악으로는 마지막 작품인 1986년 작 <가슴을 펴라>(최원영)를 포함해 1980년대 작업한 영화가 8편(<하얀미소>(김수용, 1980), <강변부인>(최동준, 1980), <겨울로 가는 마차>(정소영, 1981), <도시로 간 처녀>(김수용, 1981), <별들의 고향 3>(이경태, 1981), <이별없는 아침>(이경태, 1985))이다. 그중 1970년대 작업한 6편은 한국 대중문화의 시대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들 수 있다. 특히 <별들의 고향>과 <바보들의 행진>에서는 상기한 것처럼 1970년대 한국영화의 트렌드를 이끈 화천공사와 대중음악의 새로운 흐름을 선도한 오리엔트프로덕션의 협업을 주목해보아야 한다. 한국영화의 제작 시스템이 국가의 제도로 제약을 받고 있던 1970년대, 화천공사는 젊은 층을 공략하는 영화들을 통해 새로운 메이저 제작사로 등극했다. 이 영화들이 원작의 인기에 크게 힘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각 분야에 새로운 인력을 영입해 활용한 것 또한 주효했다. (그림15)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 신문광고 (그림16)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신문광고 특히 음악은 기존의 영화들에 비해 현격하게 비중을 높임으로써 스타일적인 측면에서 차별화를 꾀했다. 화천공사는 도시 중심의 청년 세대에게는 절대적인 호응을 받았지만 대중 전체에게 어필했다 볼 수 없는, 밴드와 통기타를 기반으로 ‘젊은 음악’을 선보이는 오리엔트프로덕션과 협업했다. 이와 같은 시도는 이장호, 하길종, 최인호 등을 중심으로 한 인맥 기반의 우연한 기획이 아니라 영화와 음악의 협업을 통해 특정한 관객층을 공략하기 위해 세밀하게 계획된 작업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기획의 결과물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강근식이 구술에서 언급하는 <별들의 고향>의 음악살롱 장면이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가 연주되는 장면에서 관객석에 앉아있는 이들은 당시 강근식, 이장호, 최인호가 드나들었던 음악살롱 등의 아지트에 항상 자리하고 있던 대중문화예술인들이다. 이들 앞에서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부르는 이는 원곡의 가수인 이장희도, OST를 부른 김세환도 아닌 가수 백호빈이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한 곡을 부르는 장면에서 여러 명의 가창자가 동시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장면은 실제 존재하는 대중문화 그룹에 가상의 가수와 극 중 인물들을 동시에 투입시킴으로써 허구와 현실을 함께 녹여내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관객은 허구의 인물들과 함께 그들의 아지트로 들어가 당대 새롭게 등장한 대중문화예술인 그룹을 직면하게 된다. (그림17)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 음악쌀롱 장면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부르는 백호빈) (그림18)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 음악쌀롱 장면 <바보들의 행진> 또한 비슷한 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실제 대학생 신분인 배우들의 학교명을 광고에 활용하여 마치 이들의 실제 이야기인 것 같은 효과를 노린다. 경찰의 장발 단속을 피해 열심히 도망치는 병태와 영철의 모습이 송창식의 <왜 불러> 가사와 박자에 맞춰 편집된 장면은 이러한 효과를 배가시킨다. 이 장면은 인파 속에서 도망치는 병태와 영철과 시민들의 모습을 다양한 앵글과 교차 편집을 통해 현실감을 높인다. (그림19)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왜 불러> 장면 (장발단속 중인 경찰에게 붙잡힌 장면) (그림20)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왜 불러> 장면 (경찰을 피해 도망가는 장면) (그림21)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왜 불러> 장면 (경찰을 피해 도망가다 육교에 매달린 장면) 이처럼 영화의 대표적인 장면들에서 음악은 단지 배경이 아니라 영화와 관객의 거리감을 조절하는 주요 소재로 활용된다. 화천공사와 오리엔트프로덕션의 협업의 관계처럼 이 영화들의 장면 장면들은 이야기와 음악이 공동작업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두 편의 영화는 명확한 관객층을 대상으로 새로운 대중문화 콘텐츠를 시도해 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음악인 강근식 구술의 의의 강근식의 구술은 1970년대 <별들의 고향>, <바보들의 행진> 등 화천공사가 제작한 청년영화의 음악작업 배경을 확인할 수 있는 구술인 동시에 당시 청년문화를 직접 겪은 문화예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구술이다. 또한 1960년대 후반 대학생 밴드 활동과 이장희, 송창식, 조동진 등의 음악을 작업한 오리엔트프로덕션(사장 나현구)의 작업 방식과 회사의 분위기, 대중문화예술인과의 관계도 살펴볼 수 있는 구술이다. 말하자면 강근식 선생의 구술은 일본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고 미국문화의 영향을 받아 새롭게 등장한 1960~1970년대 젊은 대중문화예술인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술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 그의 이력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광고음악의 역사를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는 구술이기도 하다. (그림22) 쎄시봉의 현장. 왼쪽 아래에 안경낀 사람이 이백천. 이백천은 쎄시봉에서 '대학생의 밤'을 기획하였다. 더불어 음악활동에 영향을 준 대중문화의 경험과 초기 문선대의 공연 모습도 주목해보아야 할 부분이다. 1975년 첫 번째 대마초파동에 얽힌 뒷이야기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강근식은 이 사건에 엮여 고초를 받은 당사자로서 당시 대마초가 불법으로 지정되기 전후의 과정과 어느 날 갑자기 연행되어 물고문을 받고 정신병원에 수감된 상황을 상세히 묘사하고, 이 일로 인생의 목표 설정이 많이 변해버린 것을 담담하게 소회하기도 한다. 그리고 밴드음악부터 영화음악, 광고음악까지, 평생을 음악 ‘일’을 해온 백발의 노신사는 현업에서 은퇴한 후 다시 기타를 잡았다. 평생 음악과 함께한 음악인 강근식의 모습은 이제 무대 위 ‘기타리스트 강근식’으로 만나볼 수 있다. (그림23) 강근식
내가 주증녀 를 처음 만난 것은 해방되던해 가을이 었다. 우리 고향 안성읍에는 논바닥을 메꾸고 건축된 애원극장이 유일한 문화시설이었으며 건물 주인 피아니스트 애원은 대지주의 아들이면서 좌익운동의 멤버 였고 그래서 극장에는 소위 프로레타리아 연극이 늘 공연되고 있었다. 그무렵 지금은 극단이름도 연극의 제목도 잊었지만 서울에서 지방공연을 온 일행중에 정득순 , 주증녀의 이름이 끼어있었다. 우리학교에서는 극장을 빌려 음악회와 연극공연을 하게 되었고 나는 김세중(작고한 조각가)이 쓴 <해방전야>란 연극 연출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남학교이기 때문에 부득이 남자가 여자로 분해야 했으며 도대체 여배우란 어떤 사람들인가 관찰하고 싶어서 무작정 그들이 투숙하고있는 여관으로 찾아 간 것이다. 가을 바람이 부는데 썰렁한 여름옷을 입고 배우들은 얼굴이 피곤해 보였지만 마지못해 우리를 만나주었다. 그때 '주증녀'는 젖먹이를 업고있었고 주로 '정득순'이 설명을 해주었다.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지금은 생각도 나지않지만 우수에 젖은 '주증녀'의 얼굴이 퍽 예뻤었다고 생각되었다. 그후 18년 우리는 감독과 여배우로 재회하게 되었고 주증녀 는 그때 그이야기를 송두리채 잊어버리고 있었다. 먼저 주증녀가 내 작품에 출연한 영화를 열거해 본다. < 일편단심 >, < 월급봉투 > ,< 저하늘에도 슬픔이 >, < 고발 >, < 만선 >, < 사격장의 아이들 >, < 산불 >, < 애인 >, < 동경특파원 >, < 춘향 >, < 피해자 >, < 작은 꿈이 꽃필 때 >, < 극락조 >, < 본능 >, < 내마음의 풍차 >, < 황토 >, < 발가락이 닮았다 >, < 야행 > 등 18편이다. 편지 주증녀 선생! 당신이 이승을 떠난 지도 20여년이 지났습니다. 그사이 당신의 철부지였던 세아이는 훌륭하게 자라 잘살고 있습니다. 촬영장에 졸졸 따라다니던 막내는 사업가가 되어 큰 회사를 운영하고 있고 혜성이는 좋은 대학에서 물리과를 졸업하고 과학자 신랑을 맞았습니다. 결혼식이 아름다웠습니다. 당신의 부군 Y씨는 힘껏 딸의 행복을 받쳐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신부는 세아이를 낳고 35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람들은 얼마나 딸이 보고싶으면 그렇게 황망히 데려가느냐고 했지만 당신은 정말 그리운 딸을 만나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지요. 문정숙 도 떠났고 남정임 도 세상을 버렸습니다. 지금은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한은진 , 황정순 도 병석에 누워있습니다. Y씨는 작년 동경영화제에서 만났는데 활기찬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당신과 함께 촬영하던 그많은 시간들을 회상하며 작은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정사씬 <山불>은 전남 월출산 빨치산의 실화를 극화한 차범석 의 희곡이다. 낮에는 태극기가 날리고 밤에는 인공기가 걸리는 산골짜기 대밭마을에 벌써 쓸만한 사내들은 없다. 모두 어느쪽인가 편이 되어 집을 떠났기 때문이며 그들의 아내는 고독과 굶주림을 참으며 혼자 살아가야 한다. 빨치산의 아내 도금봉 과 국군의 아내 주증녀 는 이웃하고 있으면서도 앙숙처럼 지내는 어느날 젊은 사내가 마을로 잠입해 들어와 '주증녀'의 구원을 청한다. 산에서 도망한 사내는 굶주림에 지쳐있었으나 여자를 보자 먼저 본능이 발동한다. 대밭에 굴을 파놓고 남과 여는 갈증을 풀게 되는데 이 광경을 도금봉이 보게된다. 결국 두여자는 협의 끝에 사내를 사육하며 번갈아 욕구를 채운다. 나는 당시 섹스의 심볼이었던 도금봉과 점잖은 안방마님 주증녀를 두여자로 캐스팅했다. 촬영은 광주근처 담양의 대밭촌에서 시작되었는데 서울에서는 여배우 30여명을 끌고간 현장은 구경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주증녀가 감독이 묶고 있는 토담집 사랑방으로 들어섰다. 나는 마을사람인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분장과 의상을 끝마친 여배우였다. 남루한 옷차림과 기름기 없는 머리, 파리한 얼굴에 거친손 어디서 구해입었느냐고 물었다. 주증녀는 마을 사람중에 가장 적합한 모습을 찾아 자기옷과 바꾸어 입었다고 한다. 조감독은 여배우들에게 마을 사람들과 옷을 바꾸어 입으라고 지시했고 다음날 카메라 앞에서 배우들은 이곳주민들과 흡사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주증녀의 의상 설정은 늘 현실감을 살리고 있었다. '도금봉'과 사내의 숨막히는 정사씬을 감독옆에서 보고있던 여배우는 물었다. 점잖은 캐릭터도 저 장면을 소극적으로 연기해야하느냐고, 그럴필요가 있겠나 싶어 비장의 무기가 있느냐고 했더니, 자신이 정사 할때의 얼굴이 궁금해서 거울을 보며 혼자 연구했다고 한다. 섹시한 것을 과시하는 여자나 점잔빼는 여자나 희열을 표현하는 것에 차이가 없어야한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 그후 나는 카메라앞에서 적어도 정사씬에 한에서는 주증녀에게 연기지도나 설명을 생략하게 되었다. 매맞는 연기 < 만선 >은 주증녀 의 대표작이지만 현재 필름이 실종된 상태다. 천승세 의 어촌 연극을 영화로 옮긴것인데 그무협 당국에서는 해외영화제 출품을 금지시켰다. 빈곤한 한국 어촌이 지나치게 사실적으로 그려졌고 노사갈등의 심각성과 무엇보다 어민들의 절망이 노골적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생각하지만 60년대의 한국영화는 거의 소재선택과 표현의 자유에서 절망적이 었다. 그때의 영화정책이 오늘처럼 관대했다면 세계도처에서 우리 영화는 이미 개가를 올렸을 것이다. 남해안 어느 갯마을, 모래밭에서는 남편( 김승호 )와 아내(주증녀)의 처절한 몸싸움이 벌어진다. 수평선을 향해 가물가물 떠내려가는 빈배에는 갓난아이가 실려있다. 장대같은 자식을 바다에 모두 잃은 어미는 막내아이 하나만이라도 뭍으로 떠나가 사람답게 살기를 기원했지만 애비는 한사코 그애를 어부로 만들어야 한다고 맞선다. 카메라앞에서는 처절한 부부싸움이 벌어졌는데 갑자기 남배우가 못하겠다고 연기를 멈춘다. 이럴 땐 사정없이 여편네를 두들겨 패야하는데 그러지 못하니까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때 주증녀'가 말했다. "선생님 괜찮으니까 막때리세요." 카메라는 다시돌아갔다. 그리고 무지막지한 주먹이 난무하고 발길질에 여배우는 휴지조각처럼 파도에 어풀어졌다. 그런데도 사내의 폭력은 이어진다. 어미는 사내의 다리에 매달려 필사적이다. 3분간이어진 한컷이 이작품을 살리고 있었다. 물론 여배우의 온몸에서는 피멍이 들었다. 눈물 < 만선 >은 통영에 숙소를 정하고 촬영지 외딴섬을 향해 2시간 정도의 뱃길을 어선을 빌려 스탭, 캐스트 50여명이 왕복했다. 가을해는 워낙 짧아 촬영을 끝내고 서둘러도 밤바다를 돌아와야 한다. 우리는 점심도 빵조각으로 때우고 온종일 중노동을 했기 때문에 갑판에 누워 별을 쳐다보며 돌아왔다. 그날 배가 절반쯤 왔을 때 갑자기 엔진소리가 멈췄다. 잠시후 당황한 기관사가 올라와 엔진고장인데 수리불능이라고 한다. 배위는 갑자기 술렁거리기 시작했지만 별수 없이 우리는 표류하는 신세가 되었다. 칠흑같은 밤바다에서 표류하는 배는 바위와 충돌하는 순간 난파를 면할 수가 없다. 언제 침몰할지도 모르는 공포속에서 우리들은 운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김승호 가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한다. '하느님 당신우리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러는거야, 우린 영화하는 죄밖에 없어, 정말 이러면 재미없어' 공갈인지 구원인지 그의 목소리가 파도에 섞인다. 변기종 선생의 기도소리가 이어졌다. 우리는 그 소리에 열중하며 숨을 죽이고 있는데 누군가 '흑'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허장강 씨가 울기시작했고 그 옆에서 주증녀 는 눈물을 펑펑흘리고 있었다. 두사람으 그때 가정이 깨진 충격속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아이들을 이웃에게 맡기고 촬영나온 상태였었다. 우정 우리집 근처에 문정숙 씨가 살고있었는데 이만희 감독과 나는 그녀의 생일잔치에 초대된 일이 있다. 그날밤은 눈이 내리고 있었는데 주증녀 는 먼저 와서 음식을 거들었다. 네사람이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지만 분위기는 쉽게 달아오르지 않는다. 왜나하면 문정숙과 주증녀는 늘 라이벌관계를 면치못했다. 물론 그것은 캐스팅을 놓고 제작사가 두여배우를 저울질 하다가 끝내는 한쪽으로 결정짓기 때문에 장본인들은 대책이 없는 일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들을 나쁜 사이로 단정 지었다. 그것은 감독인 우리 둘도 마찬가지였다. 신문기사는 이만희와 나를 이유없이 앙숙처럼 써놓고 있었다. 물론 내심 선의의 라이벌의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남들이 생각하는 수준은 아니다. 취기가 오르자 내가 먼저 실마리를 풀려고했다. 당신들 두 여배우는 얼굴 모양도 연기스타일도 전혀 다르지만 지금 똑같은 운명의 강을 건너고 있다. 뭐가 똑같으냐고 두사람이 달려들었다. 아들 하나씩을 데리고 서방한테 쫓겨난 처지부터 이북에서 가족버리고 남하한 신세가 같지 않느냐, 그따위 위인들과 살면서 어떻게 배우를 하냐, 누가 여배우아니랄까봐 신발 바꿔신느냐, 이 쬬다야. 스켄달 하나 없는게 감독이냐. 우리는 취중에 한꺼번에 스트레스를 토해냈다. 집주인이 전축을 틀었다. 부르스에 엉키고 맘보에 껑충거리며 빈양주병이 몇 개나 뒹굴었다. 나는 이 취객들이 끝내는 한방에서 쓰러져 잘것같은 예감이 들어 주증녀를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길은 미끄럽고 몸은 중심을 잃어 허우적거리며 걷고 있는데 문정숙이 뒤따라나왔다. 자기가 주증녀네 집까지 바래다 준다고 했다. 나는 찬스처럼 발길을 돌였는데 두사람은 금호동 신당동을 서로 바래다 주느라 밤을 새웠다는 말을 들었다. <프로필> 1925. 2. 10 함남 영흥군 덕기면 출생, 1980. 9. 18 사망 데 뷔 : 1949년 윤대룡 감독 < 조국의 어머니 > 수상경력 : 대종상영화제 여우 주연상 등 다수 주요작품 : < 여성일기 >, < 심판자 >, < 애인 >, < 고려장 >, < 산불 >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