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 좀 들어줘
- 감독
- 카미유 안느, 루카 푸트리에, 마르탱 로랑, 카미유 르루아, 엘리자 토히스, 줄리 반덴베흐그
- 제작년도
- 2022
- 출연
- 베누아 알레망, 이사벨 트레헤, 장 풀레-셰이
<그래도, 사랑해.> 중 /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1년간 관객을 찾은 영화들을 필자의 시선으로 돌아보며, 올 한 해 영화가 불러온 고민들을 정리합니다. “흔히 문화의 역할이란 지하철역 구내에 보다 세련된 의미있는 장식물이나 걸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우리네 삶에서 문화란 그런 작은 디테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만,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보다 본질적인 것, 즉 사람과 사람 사이, 집단과 집단 사이의 소통의 형식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 그것이 곧 문화의 역할입니다.” - 이창동 , “처음 드리는 인사말”, 문화체육관광부 열린장관실, 2003년 3월 14일 영진위의 발표에 따르면 올해는 1,000만 관객을 기록한 영화가 단 한 편도 없으며, 2004년 이래 최초로 연간 관객 수 1억 명 시대가 붕괴한 해다. 그야말로 한국영화의 종말 ...... 물론 이건 시장 얘기다. 업계에 발을 담그지 않은 나로서는, 그저 인상적으로 보았던 작품들을 주루룩 고른 다음, 개별 작품들로부터 몇몇 자질을 선별해 자율적으로 테마화한 뒤, 안온하게 정리해도 그만일 것이다. 그렇지만 비행기 타본 기억이 까마득한 토종 한국인이자, 비평가 이전에 관객일 수밖에 없는 나는 OTT가 새롭지 않은 이 시기에도 어두운 극장에서 한국을 배경으로 한국인들이 한국어로 말하고 움직이며 살아가는 모양새를 자막 없이 보고 듣는 일상의 즐거움을 놓치고 싶지 않다(애국자 아닙니다). 통계를 근거로 한 종합적인 분석과 전망이라면 이미 숱한 기사와 글이 많으니, 엄격한 틀은 내려놓되 몇몇 영화 안팎으로 사적인 근심과 관심을 조금 얹고 싶다. 올해의 한국영화들을 보며 헛웃음이 나거나 화가 나는 경우는 있었지만, 아니 많았지만,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보았던 영화는 김준석 의 < 그래도, 사랑해. > 뿐이다. 이 영화는 키아로스타미의 향기를 풍기며 사랑스럽고 여유롭게 걷는다. 올해 한국영화들이 내게 신통치 않았던 것은, 대개 상업영화라면 지독할 정도의 장르적 콘셉트가 부여되어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부담스러웠기 때문이고, 한편으로 독립영화판에서는 형식적 장치에 과도하게 의존하거나 반대로 소재에 기대어 특정 환경에 놓인 인물의 처지를 강조하며 관객과 스크린 사이에 두툼한 방벽을 세웠기 때문이다. 최소한 내가 아는 선에서 <그래도, 사랑해.>는 2025년의 한국영화들 중 현실과 영화가 자연스레 길항할 수 있으며, 그 사진적 이미지에 기반한 20세기적 시청각 경험의 아름다움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한 거의 독보적인 사례다. 게다가 이 영화의 세계는 내가 쓰는 언어와 내가 갈 수 있는 장소와 내가 어쩌면 만날 수 있을 법한 사람들에 의해 전달되기에 친밀함마저 느끼게 된다. 지금 한국영화에 필요한 것은 난장과 자극이 아니라 이런 기복 없는 흐뭇함과 상쾌함이 아닐까? 물론 <이혼숙려캠프>(JTBC)가 인기 좋은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마찬가지로 부부가 주인공인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욕지거리와 패악질의 향연이 아니라 우리네 삶 여기저기에 놓인 일상적 규모의 상황과 마음들이다. 관객은 우리를 닮은 영화 속 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보며 미소 지을 권리가 있다. <그래도, 사랑해.> 중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 ...... 돌아보면 올해 세상은 그리 돌아가지 않았던 것 같다. 연초 우리네 봄날의 콘텐츠였던 ChatGPT 지브리풍 이미지 생성에서부터 10월 말 젠슨 황의 깐부치킨 회동에 이르기까지, 2025년을 지배한 키워드가 있다면 어딜 가도 들려오는 AI일 것이다. 영화계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영화제에서는 AI 관련 이벤트와 컨퍼런스가 열렸고, 극장가에도 적극적으로 AI를 활용한 시험작 < 중간계 >가 개봉하기도 했다. 하지만 창작 과정에서의 실제 사용 여부와 관계없이, 올해의 한국영화들을 통과하며 AI 프롬프트의 예제본처럼 뻣뻣한 인간형이 여기저기서 출몰했다고 느낀다. 그 대표 주자라고 한다면, 초기에는 대안적 움직임으로 출발했으나 오늘날 상업영화와 함께 또 다른 제도로 딱딱하게 굳어진 독립영화라는 포지션을 기회주의적으로 활용한 연상호의 < 얼굴 >이다(이 영화는 KOBIS 상에서 ‘일반영화’로 분류된다). 2억의 제작비로 만들어졌다는 이 가성비 좋은 저예산 영화 속 유명 배우들의 몸짓과 얼굴에서 유연함과 여유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데, 기실 생성형 AI 이미지에 가까운 그 1차원적 자질은 시장주의에 입각하여 경제적 효율성의 늪에 빠진 동시대 이미지의 사멸적 풍경을 저절로 돌아보게 만든다. < 좀비딸 >, < 야당 >, < 히트맨2 >, < 보스 >, < 승부 > ...... 성급히 땜질하듯 만들어진 올해의 몇몇 한국영화들은 창작자의 존재 유무 자체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이야기의 유기적인 흐름은 수시로 중단되고, 유튜브 숏츠 시대에 걸맞은 단발적 자극만이 연쇄적으로 나열되는 작중 내 세계에서 인물은 극단적으로 캐리커처화된다. 그들의 말과 행동은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자가 야단스럽게 선보이는 개인기 섹션의 한 토막처럼 위축되며 실재감을 완전히 상실한다. 이쯤 되면 실사는 그저 명목적 알리바이이며, 우리는 우연과 돌발의 가능성을 품은 사진적 이미지가 전면적으로 폐지된 AI 영화라는 미래를 이미 살고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올해의 수많은 애니메이션 작품들의 흥행권 진입은 그 무의식에 대한 반영일까? <중간계>, <얼굴>, <좀비딸>, <야당> 중 / 사진: 네이버 영화( 1 , 2 , 3 , 4 ) 그런가 하면 이제는 한국영화의 기성세대권으로 진입한 두 아버지, 봉준호 와 박찬욱 의 인물들은 중심을 잃고 허둥댄다는 느낌이다. < 미키 17 > 속 인물들에게는 슬랩스틱과 삑사리의 미학으로 불리던 봉준호의 미시적이고도 생활밀착적인 신체의 율동과 액션이 온데간데없으며, 메인 빌런은 느긋함을 갖추지 못한 채 무대에 오른 초보 스탠드업 코미디언처럼 독재자의 전형적 모델을 대문자적으로 모방하며 허우적거릴 뿐이다. 인물의 결심과 행동 전개로 극이 진행되는 < 어쩔수가없다 >는 서로 간섭을 일으키는 메인 플롯과 서브 플롯이 긴장의 끈을 풀어버리기 일쑤이며, 인물의 내면적 특질은 구체적으로 조성되기보다 외삽적으로 제시된다. 적어도 외연적으로는 리얼리즘을 표방했음에도 인물들의 욕망과 주관은 앙금처럼 애매하게 남겨지고, 다소 과장스럽게 발생하는 코미디와 요란한 촬영과 편집 너머로 연출자의 불안만이 느껴질 뿐이다. 두 편 모두 블랙코미디라는 장르를 내세우고 있지만, 웃지 못한 내가 감지한 것은 화면 너머에 있는 조급함이었다. 게다가 이례적이다 싶을 정도로 이들은 개봉 전후로 방송인에 가까운 일정을 소화하며, 온갖 유튜브 채널과 TV 프로그램에서 프로모션을 진행하지 않았던가. 개봉 이후 좋지 않은 평가로 인해 박찬욱 본인이 직접 자신의 영화를 해설하는 <알려줄 결심>이 제작된 것은 갈 데까지 가 버린 올해의 한국영화계를 요약하는 한 단면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 관객이 먼저 해야 할 일은 다른 무엇보다 이들을 ‘거장’으로 호명하는 일 아닐까? 왠지 무한히 재생되어 죽지 않는 복제 인간과 AI에게 대체될 위기에 놓인 인물이 이들 영화의 중심으로 설정된 것은 OTT가 스크린을 대체해가는, AI가 실사를 대체해가는 이 시기에 그저 우연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올해의 한국영화들 중 시선, 거리, 말투 등 대화의 미시적인 결이 생생히 살아있는 이재원 의 < 두 시간 >, 서울의 달동네 풍경과 오래된 골목을 주름진 노인들의 육체와 함께 화면에 담은 < 사람과 고기 >가 사사롭게 다가온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인지 모르겠다. <미키 17>, <어쩔수가없다>, <두 시간>, <사람과 고기> 중 사진: MUBI , 네이버 영화 , 전주국제영화제 , 네이버 영화 기술이 발전하고 정서가 침잠함에 따라 신체도 변화해간다. 두 편의 미국 블록버스터를 보면서도 그 무의식적 징후가 스크린에 투영된다고 느꼈다. 무엇보다 <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블러드라인 >. 서사적으로 두뇌의 작동을 철저히 둔화시킨 이 영화는 눈과 귀의 즐거움에 올인할 뿐, 가족영화라는 설정임에도 일말의 정서적 울림도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숏츠 시대에 걸맞은 무지성 블록버스터가 되었다. 이 영화를 함께 본 친구는 촌철살인으로 비평했다. “이 영화 속 사람들한테는 뼈가 없는 것 같다.” 그의 말마따나 일종의 지점토처럼 인체를 연성화하는 작업을 거쳐 리얼리티를 제거한 화면을 보며 관객은 스크린 속 사태와 전혀 연루되지 않은 채, 시원하게 깔깔댈 수 있다. 영화 속 인체는 연양갱이나 하리보 젤리보다도 말랑한 지방이인데, 이들은 거의 AI ASMR에서 엿볼 수 있는 액체괴물이나 필라델피아 크림치즈 비슷한 것이 되어 신나게 터지고 짓뭉개진다. 이에 반격하듯 아날로그 신체에 불굴의 책임의식을 강박적으로 수혈한 블록버스터 <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 >은 AI와 맞서는 에단 헌트, 아니 톰 크루즈의 눈물겨운 원 맨 쇼다. 여기서 그는 “세상을 구한다”라는 거창하지만 피상적 맥락 외의 사적인 욕망이나 목적이 제거되어 캐릭터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차력쇼의 단원이 된다. 이 영화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잠수함 신은 숏츠 시대에 훈시하듯 대사마저 소거한 채 느린 호흡을 가져가는데, 여기에는 에단이 대적해야 할 상대도 없으며, 그에 따른 액션영화의 장르적 쾌감도 불투명하다. 영화는 잠수복을 벗고 알몸으로 헤엄치는 톰 크루즈의 몸짓을 고요한 바다 배경과 조명으로 아름답게 치장하고, 팔다리를 태아의 형상처럼 구부려 ‘에단 헌트-톰 크루즈’라는 ‘인물-배우’를 거룩하게 비추지만, 어느 누구와도 합이 맞지 않는 듯한 이 영화 속 톰 크루즈는 마치 모든 것을 짊어지고 인간계를 떠나는 유령처럼 보인다. 시리즈 내내 “리얼한” 액션을 제 몸으로 수행해 온 그의 강박이 올해는 더욱 인상 깊게 다가왔다.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블러드라인> / 사진: IMDb , © 2025 Warner Bros. Entertainment Inc.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 중 / 사진: IMDb AI가 도래한 마당에 내가 떠올리는 리얼리즘은 이런 것이다. 그곳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얼마간의 심리적이고 물리적인 간격이 설정되는 세계이며, 실천적으로는 출퇴근길 과속과 욕설로 버스를 몰고 가는 어떤 중년 기사의 심통 맞은 얼굴을 떠올리며, 그의 깊게 팬 주름들 사이로 상상을 끼워보듯, 일상 속 적대와 부재, 거절을 맞대며 이해력과 상상력을 기르는 내면적 과정이 동반되는 장소다. 타자라는 낯섦과 불편함은 리얼리즘의 조건 중 하나였지만, 그것들이 편리함으로 제거되어가는 테크놀로지와 디스플레이의 시대에 리얼리즘은 이제 그 의미를 서서히 재정립해가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올해의 영화들 중 마이크 리의 < 내 말 좀 들어줘(Hard Truths) >가 딸려온다. 이 영화는 소통 불가와 심리적 불안이 일상화된 우리 시대의 수축된 시공을 에두르거나 외면하지 않고 길바닥과 노동자의 리얼리즘으로 정면 대결한다는 점에서 포스트 코로나 영화의 빛나는 사례가 되었다. 정답 없이 문제의 구체적인 양상만을 현미경처럼 충실히 제공하며 보는 이들의 마음을 감정적으로 내려치는 탓에, 마땅히 극장에 몸이 묶여 봐야 할 영화라는 고리타분한 생각이 들 정도다. 결말부 사각 프레임을 가득 채운 두 얼굴, 그들을 잇는 숏-역숏이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마음이 그렇게 된다. ...... 어쩌면 이건 다 옛날 얘기인지도 모르겠다. 일상 속 원격 만남과 딥페이크 범죄가 여전하고 이미지의 사실성이 의심받기 일쑤인 작금에, 인간의 얼굴이 신비와 기적을 발생시키는 특권적인 장소라던 벨라 발라즈의 말을 과연 언제까지 믿을 수 있을까? 그렇다. 지나치게 발전한 미래에서 한때의 리얼리즘은 환상이다. <내 말 좀 들어줘> 중 / 사진: IMDb 이광호(영화평론가) l 1996년생,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 주변을 오가고 싶다. 2018년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비평공모 당선. 반연간지 《크리틱b》, 월간 서비스 ‘ 비평의 편지 ’ 필진.
사진: " 플로우 ", IMDb 한국영화로는 두 편을 골랐다. 이란희 의 < 3학년 2학기 >(2024)는 < 다음 소희 >(정주리, 2022)와 겹치는 영역을 다루지만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르다. 멜로드라마는 최소화되었고 아마도 지속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차분한 일상성이 들어온다. 무엇보다 이처럼 일상의 노동과 그 환경에 이만큼 깊은 관심을 가지는 영화는 오래간만이다. 윤가은 의 < 세계의 주인 >(2025)을 통해 자주 다뤄진 특정 소재와 주제를 다루는 단호하고 명쾌한 방식은 놀랍고 새로우며 아름답다. < 씨너스: 죄인들 >(라이언 쿠글러, 2025)과 <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폴 토마스 앤더슨, 2025)는 올해의 할리우드 영화들이다. 지금 이 시대에 고전적인 할리우드의 재료와 스타일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고 할까. < 내 말 좀 들어줘 >(마이크 리, 2024)는 마이크 리의 방법론이 아직도 새롭고 강렬한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올해는 프랑스 영화가 두 편인데 < 여름의 랑데부 >(발렌틴 카디크, 2025)에서 우린 에릭 로메르에서 시작된 전통이 로메르의 영역을 넘어 발전하고 확장되는 과정을 보게 된다. < 미세리코르디아 >(알랭 기로디, 2024)는 아마도 올해의 코미디인 것 같다. 사악하게 어처구니없지만 그러면서도 연민과 사랑에 대해 깊이 탐구하는. 그리고 <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파얄 카파디아, 2024)이 그려보이는 뭄바이는 영화가 도시를 그리는 가장 완벽한 도구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증명해 보인다. 애니메이션을 두 개 골랐다. 너무 처참해서 오히려 우스꽝스럽고, 너무 작정하고 못생겨서 오히려 사랑스러운 < 달팽이의 회고록 >(아담 엘리어트, 2024)과 바로 오늘 다룰 < 플로우 >(긴츠 질발로디스, 2024)다. 사진: " 플로우 ", 네이버 영화 <플로우>를 고른 데에는 개인적 이유가 있다. 작년에 나는 같이 살던 고양이 한 마리를 떠나보냈다. 사적인 이야기는 될 수 있는 한 하지 않으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내 고양이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한다. 그 때문에 <플로우>를 처음 보았을 때 내 개인적인 경험은 영화의 감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 영화가 드림웍스의 < 장화 신은 고양이 >(크리스 밀러, 2011)처럼 의인화된 고양이를 다룬 작품이라면 그만큼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만든 긴츠 질발로디스는 그 길을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큐멘터리처럼 사실적인 고양이를 그렸느냐. 그러지도 않았다. 이 영화의 이름 없는 고양이는 그사이의 가느다란 길을 걷는다. 담벼락 위를 산책하는 진짜 고양이처럼. 질발로디스가 창조한 세계는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곳이다. 인간들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들이 만든 것들은 크게 부서지지 않은 채 남아있다. 고양이가 사는 집에는 그곳에 살았던 인간들이 만든 것 같은 고양이 조각상과 스케치가 있다. 마치 마리 셀레스트호의 사라진 선원들처럼 인간들은 그냥 이유도 없이 갑자기 존재하기를 멈춘 것 같다. 등장하는 동물들도 이상하다. 고양이와 래브라도 리트리버가 같이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캐피바라, 여우원숭이, 뱀잡이수리가 같은 공간에 있다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곳을 우리가 사는 지구와 비슷하지만 다른 곳이라고 퉁 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세계의 물리적 실제성을 계속 의심하게 된다. 이곳은 실재하는 공간보다는 애묘가의 몽상처럼 보인다. 아마도 이곳은 인터넷 사람들이 고양이별이라고 부르는 곳인지도 모른다. 이 정도면 감독의 개인 경험을 의심하게 되는데, 정작 감독은 개를 기른다. 하지만 고양이와 살았던 경험이 있고 그 경험이 영화의 정서적 흐름에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 사진: " 플로우 ", 네이버 영화 이야기는 단순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 영화엔 대사가 없기 때문에. 텅 빈 집에 살던 고양이가 갑자기 홍수와 마주친다. 고양이는 물을 피해 달아나고 그러다가 빈 보트 위에 올라탄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다른 동물들이 한 마리씩 보트 위에 오른다. 그들은 말이 통하지 않고 타고난 습성도 다르다. 하지만 살아남으려면 같이 어울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동물들이 나오는 고전적인 틀의 동화이다. 영화는 동물을 의인화한 수많은 동화에서 논리와 구조를 가져오고 있다. 이 영화에 나오는 동물들은 모두 지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 키를 잡고 보트를 조종하고 윤리적 딜레마를 경험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먹이사슬이 교묘하게 탈색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잡아먹히는 동물들은 물고기밖에 없고 그들에겐 포유류나 조류의 생기가 제거되어 있다. 이 영화가 그리는 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다. 이 정도면 너무 쉽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정작 영화의 묘사는 거기에 맞추어져 있지 않다. 여전히 영화에 나오는 동물들은 수상쩍을 정도로 사실적이다. 자연 상태에서 캐피바라나 뱀잡이수리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고양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럴싸하다. 동작이나 행동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표정이 그렇다. 이렇게 정교하게 고양이 표정을 살린 애니메이션 영화를 전에 본 적이 있나 싶다. 스크린 위에서 이런 이야기와 이런 묘사와 결합되면 관객들은 아주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사진: "Peullou( 좌 , 우 )", IMDb 홍수 이야기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노아의 방주를 다룬 성서 이야기, 지구 온난화에 대한 경고. 하지만 이 두 주제는 이 영화와 완전히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구약의 홍수는 인간에 대한 신의 처벌이다. 하지만 홍수가 시작되었을 때 이미 인간은 사라지고 없다. 지구 온난화에 대한 경고로 보더라도 아귀가 맞지 않는데, 이 세계는 온난화를 촉진했을 기계 문명이 그리 많이 보이지 않는다. 이 목가적 폐허와 환경 문제를 연결해 해석을 시도하면 여러모로 무리수를 두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 세계에서 그냥 일상일까? 이 홍수가 첫 번째가 아니라는 암시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영화 속 동물들은 주기적인 홍수를 경험하며 살아온 것 같지도 않다. 이 영화의 월드 빌딩을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는 어느 단계에서 이상해진다. 결국 모든 게 애묘가의 꿈이라는 게 가장 그럴싸한 답이다. 영화를 연달아 보다 보면 이 세상을 해석하고 의미를 찾으려는 모든 시도가 그리 큰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우선 이 세계는 온전히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어떻게 우리가 아름다움에 시비를 걸 수 있겠는가. 둘째로, 이 영화를 이루는 다른 존재들에 대한 연민, 동정, 이해 그리고 이에 바탕을 둔 친절함과 연대는 세상의 이해와 무관하게 존재한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에게 친절하기 위해 굳이 세계의 숨은 의미를 찾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주의 명령 없이 선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 사진: " Peullou ", IMDb 듀나(영화평론가) l SF 작가이고 영화 컬럼니스트다. 영화 관련 저서로는 『가능한 꿈의 공간들』(2015), 『옛날 영화,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2022), 『여자 주인공만 모른다』(2019), 『남자 주인공에겐 없다』(2020) 등이 있다.
날아다니는 수트를 입고, 시공간을 이동하고, 온 우주를 누비는 히어로들이 벌써 한 트럭이다. 너무 많아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히어로 패들이 도시를 무차별하게 깨부수는 우주 악당들로부터 우리 행성을 지켜내는 사이 대한민국엔 가르마조차 자신이 결정할 수 없는 ‘하찮은’ 취준생이 재난을 마주한다. 동네 놀이터라는 작은 무대에서 현란한 철봉기술과 뽀얀 근육을 뽐내며 등장하는 주인공 용남(조정석)은 구경꾼 할머니의 엄지척에도 입꼬리가 비식 올라갈 만큼 인정에 목말라 있다. 부모님과 누나, 어린 조카에게까지 용남은 창피하고 손 많이 가는 가족일 뿐이다. 반듯하게 옷 차려입고 번듯한 직장에 나가 일을 좀 했으면 좋겠는데, 용남은 어디 하나 쓸 구석 없어 보이는 산악 용품만 주렁주렁 옷장 안 깊숙하게 가지런히 걸어두었다. 가족들이 아무리 무시해도 용남은 가족을 사랑한다. 돈이라곤 벌어본 지 오래지만, 조카의 초딩 친구 무리에게 음료 수라도 꼭 사주고 싶고, 괜히 시키지도 않은 짓 하지 말라고 타박받아도 꼬박꼬박 설거지를 한다. 취준생 용남은 가족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엔 없다. 어머니의 칠순 잔칫날이 되고, 용남 일가족은 2시간이나 떨어진 신도시의 예식장으로 간다. 분명 기분 좋은 잔칫날인데, 용남에게는 수많은 실패를 안겨다 줬던 면접장과 다를 바가 없다. 사돈의 8촌까지 다 온 것 같은 칠순 잔치는 용남에게 너무 가혹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들이 불순한 호기심으로 질문해오면 나를 대변하는 건조하고 슬픈 사실들만 내내 줄줄 늘어놓아야 한다. “먹고 자고 싸고.” 그것 말고도 할 줄 아는 게 많으면서 자조적으로 그렇게 지낸다고 대답할 뿐이다. 와중에 용남은 예식장 부점장이자 산악동아리 후배였던 의주(윤아)를 마주치게 된다. 의주와 멋지게 재회하는 장면을 상상하며 일부러 멀리 있는 구름정원 예식장에 왔건만. ‘최종면접에 불합격하셨습니다.’라는 가혹한 문자 하나에 계획이 틀어진 용남은 의주에게 초라함을 들키고 싶지 않아 벤처회사 과장이라고 거짓말을 해버린다. 실패의 마일리지만 차곡차곡 적립하고 있는 용남에게는 사실 의주도 아픈 실패의 기억이다.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거야.”라는 말을 수백 번은 족히 들었는데. 인생은 바라지도 않았던 보너스 마일리지를 주듯 이제까지 만나보지 못했던 큰 재난을 선사한다. 가스 테러로 온통 자욱해진 도시에서 용남은 가족을 지키려는 본능으로, 의주는 눈부신 책임감과 직업의식으로 모든 능력을 총동원해 사람들을 탈출시키려 한다. 아무짝에 쓸모없다고 그렇게 욕먹었던 동아리 활동이 모두의 앞에서 빛나는 순간이다. 쓸쓸하고 고요하게 그러나 매일 갈고 닦아 꿋꿋이 지켜온 클라이밍 기술은 세상에 쓸모없는 배움은 없다는 걸 증명해준다. 대학 시절엔 자주 실수했던 돌출 형태의 구조물이 하필 용남 앞에 놓여있다. JUST DO IT! 화면에 클로즈업된 나이키 운동화는 어서 뛰어오르라고 부추긴다. “다른 거 안 바랄 테니까 이번 한 번만 도와주세요!” 누가 되었든 들어주길 바라며 용남은 절박하고 짧은 기도를 내뱉는다. 사자 굴에 던져지고도 살아남았다던 성서 속 다니엘처럼 용남은 절대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사자머리를 보란 듯이 넘어 오른다. 누가 용남이를 루저라고 했던가. 사자도 밟고 올라서는 용남이의 코털을 대체 누가 건드렸냔 말이다. 제목과 다르게 출구 없는 매력을 가진 <엑시트>는 재난과 코미디, 액션이라는 장르를 세련되게 넘나들며 관객의 혼을 쏙 빼놓는다. 불필요한 설명과 설정은 아예 접어두고 매일같이 보는 익숙한 현실을 여태껏 없었던 방식으로 신선하고 재치있게 빚어내 적재적소에 배치한다. 비장한 각오 없이 선택해도 될 법한 가벼운 코미디 영화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비범한 이 영화는 이상근 감독의 사려 깊은 연출과 현실을 꼬집는 관찰력이 돋보인다. 우리에겐 재난을 맞닥뜨린 학생들을 보면 떠올릴 수밖에 없는 국민적 트라우마가 있다. 학생들이 학원에 갇힌 장면에서 카메라는 과장된 앵글로 억지 긴장을 이끌어내지 않고 시점숏으로 멀리서 그들을 구조하는 과정을 담아낸다. 관객의 트라우마를 감정을 고조시키는 도구로 쉽게 소비하지 않겠다는 태도가 엿보인다. 또한 테러의 주체에게 불필요한 마이크를 주지 않거나 재난 영화임에도 시체를 자세히 묘사하지 않는 등 영리한 판단 덕에 관객은 주인공의 탈출기에만 집중할 수 있다. 선을 넘지 않는 유머로 무장한 이 무해한 재난 코미디는 우리가 실제로 쓸 수 있는 생존 방법이나 S.O.S 신호까지 알려주어 심지어 유익하기까지 하다. 공사장 안전망이나 미관을 해친다고 사라질 위기에 처한 시각장애인용 보도블록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짚어주기도 한다.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도 눈여겨볼 만한 점이다. 재난 영화에서 여성은 흔히 연약하게 그려져 절체절명의 순간에 민폐를 끼치거나 짐이 되곤 한다. 반면 의주는 클라이밍 동아리 에이스 출신으로 내내 힘차게 건물 위를 뛰어다니고, 특유의 빠른 상황 판단 능력과 센스를 발휘해 구조를 앞당기는 유능하고 주체적인 캐릭터로 표현된다. 장점 가득한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조금의 찝찝함이 남아있다면 그건 아마도 영화 탓보단 결코 웃어넘기기 힘든 청년들의 현실 때문일 것이다. <엑시트>는 쓰레기로 살아가야 하는 서글픈 청년의 자아를 여러 차례에 걸쳐 노골적으로 강조한다. 용남과 의주는 방호복 대신 쓰레기 봉투로 몸을 감싸고 후반부에선 아예 쓰레기장을 달리기도 한다. 우리가 자신을 쓰레기로 여기지 않고 줄 세움 당하지 않아도 되는 때는 언제가 될까. 용남은 인원 초과로 구조헬기에 타지 못하고 남아서 울먹이며 이야기한다. “내가 나가면 저렇게 높은 건물로 된 회사에만 원서 낼 거야. 무조건 층수만 보고.” 생사의 문제 앞에서도 끝없이 경쟁해야 하는 용남은 면접에서 떨어진 것도 서러운데 높은 빌딩 대기업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밀려 늦게 구조된다. 영화 초반 용남은 친구와 시원한 생맥주 한 잔에 미적지근한 현실을 지우려 호프에 간다. 호프(Hof)에 앉아 자기 자신을 ‘개쓰레기’라고 주저 없이 칭하는 용남의 뒤로 H.O.P.E.(희망)가 쓰여진 네온사인이 빛나고 있다. 먼 행복보다 지금 한 잔의 생맥주가 더 큰 위로로 나를 씻어주길 바라며 용남은 맥주를 들이킨다. 혼수 가구 전문점을 배경으로 침대 매트리스를 발판삼아 뛰어내리는 장면에서는 결혼조차 포기한 N포세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매트리스를 넘어 도착한 육교 위에 적힌 ‘수고했어, 잘버텨줘서 고마워’라는 메시지는 수많은 포기에 지친 젊은이들에게 작은 피로 회복제가 되어준다. 실패와 포기 속을 질주하는 청년들에게 영화는 이렇듯 곳곳에서 나름의 응원을 보낸다. 청춘들은 제각각 내 말 좀 들어달라고 외치는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 외침은 외면당하거나 조롱당하기 일쑤여서 청춘은 때론 차라리 입을 닫기도 한다. 하지만 <엑시트>의 주인공들은 계속 소리내기를 선택한다. 구원은 셀프니 노력하라며 옥상으로 내몰렸지만, 지지 않고 끝까지 그리고 끊임없이 외친다. “내 말 좀 들어줘요, 제발!” 재난 문자가 용남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해주기 전까지는 용남이 아무리 옥상으로 가자고 외쳐도 믿어주지 않는다. 가족들을 구하기 위해 구름정원 벽을 오르려는 용남에게 아버지는 되려 호통을 친다. “너 하지 마! 뭐가 됐든 간에 하지 마!” 그럼에도 용남은 가족을 위해 목숨 걸고 벽을 탄다. 어릴 땐 청춘이 불꽃처럼 화려하기만 할 것 같았는데, 둘은 완등 지점인 크레인에 다다라서도 눈에 확 띄는 조명탄이 아닌 작은 막대기 불꽃에 기대어야 한다. 용남과 의주는 소리치는 것밖에 방법이 없어 또 한 번 목이 찢어져라 외친다. “우리를 봐라!” 그리고 누구보다 구조되고 싶어 하는 청춘들이 출구를 간절히 바라며 외치는 S.O.S 신호에 942만 명이라는 놀라운 숫자의 관객이 응답했다. 영화 초반 클라이밍을 설명하는 장면에서 완등 지점까지 올라갈 때 필요한 길 찾기인 ’루트 파인딩’에 대해 나온다. 목적지를 설정했어도 가는 길이나 방법을 모르면 도착할 수 없다. 사회적으로 강요당한 목적지를 지도 없이 헤매느라 길 찾기가 어려웠던 용남. 용남에게 실재했던 재난은 안개에 싸인 듯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미래였다. 취업이라는 목적지로 가는 길은 절망으로 가득했지만, 차오르는 유독가스 속에서 자신이 정한 완등 지점으로 갈 때는 주저함 없이 완등해낸다. 영화는 이력서만으로는 멋대로 가늠할 수 없는 실패한 취준생의 진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엔딩크레딧에 흐르는 곡, 이승환의 ‘슈퍼히어로’ 속 가사처럼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기회가 있고 깊숙이 잠재된 무한한 능력들이 있다. 장래 희망은 못 이뤘어도 매일같이 스스로를 단련하는 용남, 자신을 알바와 다를 바 없는 부점장이라고 소개했지만 그 누구보다도 의연하고 책임감 있게 행동하는 의주. <엑시트>는 세상이 미처 알아봐 주지 못한 용과 여의주의 승천 이야기이다. 동시대 청년이라면 과몰입할 수밖에 없는 이 짠내·땀내·소금기 가득한 탈출기는 재난 같은 대한민국 2030의 매일에 바치는 숭고한 헌정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