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름은.
- 감독
- 신카이 마코토
- 제작년도
- 2016
- 출연
- 카미키 류노스케, 카미시라이시 모네, 나가사와 마사미, 이치하라 에츠코, 나리타 료, 지창욱, 김소현, 이레
태양계 궤도를 도는 에베레스트 크기만한 새로운 혜성을 발견한 천문학과 박사 과정의 케이트(제니퍼 로렌스). 다른 동료들의 열렬한 축하를 받는 가운데 지도교수인 민디 박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궤도 계산을 하다 거의 100%에 가까운 확률로 6개월 안에 지구와 충돌할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부딪치는 순간 종말이 펼쳐질 게 명백한 상황이기에 케이트와 민디 박사는 NASA에 보고하는데 이때 정부 관계자들이 극비리에 개입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익숙한 SF 재난 블록버스터를 떠올릴 법하지만, < 돈 룩 업 >은 그 쉽고 흔한 길을 걷지 않는다. 이 영화는 혜성 충돌의 고전적인 마스터피스 <세계가 충돌할 때>나 < 지구의 대참사 >도, 할리우드 스케일의 위력을 담은 < 아마겟돈 >이나 < 딥 임팩트 >도, 운명적인 < 너의 이름은 >이나 로맨틱 코미디의 < 세상 끝까지 21일 >도, 그리고 암울한 아트하우스의 < 멜랑콜리아 >도 보여주지 않았던 세태 풍자에 집중한다. 무능한 정부는 정치 스캔들에서 벗어나 중간 선거에 이기기 위해 혈안이 돼있고, 언론은 심각한 분위기를 피해 가십으로만 소비하려 한다. 여기에 이익에만 눈이 먼 기업과 전문가들의 경고를 외면하고 기만하는 대중들이 가세하며 환장의 대(大)콜라보를 이룬다. SNL 작가 출신으로 윌 페럴과 함께 많은 코미디를 작업한 아담 맥케이 감독은 기후 환경 문제와 막장의 끝을 달린 트럼프 정부 그리고 제작과정 중 실시간으로 터진 코로나 상황을 혜성에 빗대 마치 실제 인류의 대위기 앞에서 벌어질 법해 정말로 무서워(!)지는 블랙 코미디를 완성해냈다. 제니퍼 로렌스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메릴 스트립, 조나 힐, 마크 라일런스, 케이트 블란쳇, 타일러 페리, 티모시 살라메, 론 펄만, 아리아나 그란데, 키드 쿠디, 히메시 파텔 등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하며, <돈 룩 업>은 넷플릭스에서 성공의 지표로 뽑는 “공개된 지 28일 동안 가장 많이 본 영화” 중 < 레드 노티스 >에 이어 역대 2위를 차지했다. 비판의 대상이 다소 편향적이라는 지적과 반복적이고 단선적인 플롯과 고압적인 자세가 불편하다는 반응도 있는 등 호불호가 갈렸지만, 2021년 오스카를 비롯해 각종 연말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각본상 등 후보에 오르며 완성도에서 호평을 얻었으며, 현재 미국 사회가 가진 문제점과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는 극찬도 받았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한심한 작태를 풍자하는데 주력한 작품이지만, 이 극도로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웃음과 재미, 감동을 이끌어내는 건 바로 적당한 거리두기를 통해 나름 객관성을 유지하는 니콜라스 브리텔의 명민한 음악 덕분이다. 니콜라스 브리텔 배리 젠킨스의 < 문라이트 >와 < 빌 스트리트가 말할 수 있다면 >으로 오스카를 비롯한 각종 시상식 음악상 후보에 오르며 단숨에 주목을 받은 니콜라스 브리텔은 1980년대생 할리우드 영화음악가들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이력을 쌓고 있는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다. 뉴욕의 유대 가정에서 자란 브리텔은 피아노에서 발군의 실력을 드러내며 고교 시절 줄리어드 음대의 프리 칼리지 프로그램을 이수했으나, 왜 인간이 음악에 매료될까에 궁금증을 느껴 하버드 심리학과에 지원할 정도로 괴짜이자 수재였다. 학부 시절 내내 힙합 연주그룹에서 키보드 주자로 활동하며 다양한 장르의 음악에 심취했고, 자신의 하버드 심리학과 동기였던 배우 나탈리 포트만이 처음 연출한 단편 <EVE>에서 그의 소품 “Forgotten Waltz No.2”가 쓰이며 영화음악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이후 포트만이 참여한 < 뉴욕 아이 러브 유 >의 한 꼭지를 비롯해, 각종 다큐멘터리에 참여하며 음악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럼에도 브리텔은 본격적으로 음악을 업으로 삼지 않고 월스트리트에서 잘 나가는 해지펀드 매니저이자 외환 딜러로 활동했는데, 그가 결국 다시 음악으로 마음을 돌리게 된 계기가 된 건 < 노예 12년 >에 참여하면서부터다. 스티브 맥퀸 감독의 부탁으로 한스 짐머가 <노예 12년>의 스코어를 맡았지만 영화 전반에 삽입될 소스 음악들에 대해선 다소 부담을 느끼고 있던 터라 새로 외부 음악가를 수혈했는데, 그게 바로 니콜라스 브리텔이었다. 그는 전혀 녹음된 바 없고, 제대로 전승되지도 못한, 잃어버린 노예들의 음악을 위해 19세기 중반 미국에서 실제 유행하던 스타일에 맞춰 철저한 고증 끝에 새롭게 만들어 빌보드 매거진으로부터 “<노예 12년> 음악의 비밀병기”란 극찬을 받았다. 금융권 출신답게 브리텔은 비즈니스적인 관점에서 제작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단편 영화에 제작으로 참여하기도 했으며(그게 바로 데이미언 셔젤의 < 위플래쉬 >였다!), 후에 이 영화가 장편화되며 음악에서 일부 도움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를 확고히 영화음악가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건 앞서 언급한 배리 젠킨스와 아담 맥케이와 함께 한 일련의 작품들이 성공한 덕분이 크다. < 빅쇼트 > 때 브리텔의 대본에 적힌 전문적인 금융(음악이 아니라!)업계 용어 메모에 놀라 아담 맥케이가 반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사실 그의 음악이 가진 매력은 대단히 놀랍다. 이미 <빅쇼트>와 < 바이스 >를 통해 복잡하고 민감한 경제와 정치 생태계를 깔끔하고 명료하게 음악적으로 정리한 바 있는 니콜라스 브리텔은 이번 <돈 룩 업>에서도 멸망을 앞둔 경박한 사회적 혼란과 진실이 잘못된 정보 앞에 덮이는 아이러니, 무능한 정부를 비꼬는 다양하고 세련된 스코어들을 들려준다. 신랄한 풍자와 날 선 묘사들로 불쾌해질 수 있는 영화의 공격성을 최대한 무마하고, 널뛰는 코미디와 진지한 드라마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그는 여러 고민 끝에 혼란이 절정에 달했던 2차 세계대전 시기 유행한 업 템포의 빅밴드 사운드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이를 메인 테마의 색채로 잡는다. 광기와 혼돈을 묘사하면서 멸망이라는 실존적인 문제 앞의 우울함과 슬픔을 내재해야 하고, 동시에 코미디 음악으로서 희극적인 면모도 갖춰야 하기에 복잡하고 미묘한 톤을 유지해야 하는데, 브리텔은 절규하듯 울부짖는 브라스섹션에서 절묘한 부조리의 묘미를 찾았다. 그래서 주인공들이 필사적으로 혜성 충돌을 경고할 때마다 빅밴드 사운드는 더 처절하게 조증 기조를 발하고, 격렬하고 활력 넘치는 사운드는 이들이 무기력하게 실패할 때마다 공허하게 울려 퍼지며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뒷받침해준다. 또한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 X’와 스티브 잡스의 ‘애플’, 그리고 마크 저커버그의 ‘페이스북’ 사이 어딘가에 위치할 영화 속 대기업 BASH의 다양한 징글(방송이나 광고, 벨소리에서 쓰이는 짧은 곡)을 배치해 공허한 낙관론과 가짜 희망주의를 조롱하며 음악적 효과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니콜라스 브리텔은 이를 위해 영화 속에 나오는 모든 핸드폰 벨소리와 기업 프레젠테이션 속 영상, 방송 시그널과 CF 음악들을 일일이 작업했다. 여기에 영웅적인 블록버스터 사운드(물론 이마저도 비웃기 위해 사용되었다!)나 휴머니즘에 입각한 정통적인 할리우드 스코어까지 활용하며 음악적 재미와 감동을 선사한다. 장르적인 방식뿐만 아니라 악기에서도 베이스, 드럼, 트럼펫 그리고 색소폰 트리오 등의 빅밴드나 전통적인 오케스트라는 물론, 밴조와 만돌린, 토이 피아노, 첼레스타, 파르피사 오르간, 차임벨, 힙합 비트를 포함한 각종 일렉트릭 효과까지 특이하고 독특한 종류를 혼합해 유희적이고 절충된 사운드스케이프를 펼쳐 보인다. 일견 스코어만 듣고 있으면 짧은 큐들에, 워낙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이 두서없이 펼쳐져 응집력이 떨어져 보일 수 있지만, 영화 내에서 각각 장면마다 강력하게 작용하며 존재감을 발휘한다. 또한 영화 내에선 니콜라스 브리텔이 공동으로 참여한 두 곡의 노래도 흘러나오는데, 극중 커플로 나오는 아리아나 그란데와 키드 쿠디가 영화 중반 소행성과 충돌을 경고하기 위해 콘서트장에서 부르는 “Just Look Up”과 동면에서 깨어나 새로운 세상에 진입하게 된 지구인들의 쿠키를 담은 엔드크레딧에 흐르는 “Second Nature”다. 아리아나 그란데와 키드 쿠디의 듀엣송으로 전통적인 사랑 노래처럼 시작하는 “Just Look Up”은 후반 2절에 이르러서 무지한 대중들의 계몽을 일깨우는 과격한 가사로 영화의 조롱 강도를 더한다. 아름다운 파워 발라드에 이질적인 가사가 던지는 격차야말로 이 노래의 백미로, 2021년 강력한 오스카 주제가상 후보였지만 아쉽게 탈락하고 말았다. “Second Nature”는 브리텔과 인디 밴드 본 이베어의 리더인 저스틴 버논이 함께 만든 곡으로, 혜성 충돌 후 모든 것이 사라진 세상에서 먹먹해진 감성과 풍자로 쓰린 속을 다스리기에 좋은 몽환적인 포크송이다. 권력과 재력으로 새로운 세상에 이주한 이들을 위한 노래가 아닌, 현시점에 지구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올바른 선택과 희망에 대해 화두를 던지는 응원가이자 송가라 할 수 있다. 코로나 시기 비장의 OST 중 하나였던 <돈 룩 업>으로 자신의 세 번째 오스카 음악상 후보에 지명된 니콜라스 브리텔은 아담 맥케이와 함께 HBO에서 4시즌까지 방영된 드라마 <섹세션>과 디즈니 플러스의 새로운 스타워즈 시리즈 < 안도르 >를 통해 안방 데뷔에도 성공했으며, 24년 배리 젠킨스와 새롭게 도전하는 라이온 킹의 실사화 속편이자 프리퀄인 <무파사: 더 라이언 킹>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Track List 1. "Just Look Up" by Ariana Grande & Kid Cudi 2. Discovery 3. Ephemeris 4. On Hold 5. The Call 6. C-5 Galaxy 7. Don't Look Up (Main Title Theme) 8. BASH Corporate Ident ("Liif") 9. Hyperobject Approaches 10. My Boyfriend Broke Up With Me 11. The Arrest 12. It's A Strange Glorious World 13. The Launch 14. The BASH Presentation 15. Kate Goes Home 16. FEMA-BASH Commercial 17. Arrival At The Hangar 18. There Is A Comet 19. The Comet Appears 20. The Prayer For Stuff 21. The BASH Launch 22. Twenty-Four Drones Is Enough 23. It All Comes Down To This 24. Thanksgiving (Overture To Logic And Knowledge) 25. The End? 26. Memento Mori 27. Don't Look Up (End Credits Suite) 28. Logic Waltz In B Major (Bonus Track) 29. Don't Look Up (Main Title Suite; Bonus Track) 30. Ode To Science (Bonus Track) 31. "Second Nature" by Bon Iver
이형표는 1960~70년대에 활발한 작품 활동으로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수놓았던 흥행 감독이며,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최초’라는 수식이 붙어다닌다. 1922년 황해도 출생으로 서울 효재국민학교 입학(1930), 경성사범학교에 진학(1937)하여 서울대 사범대학 영문과를 졸업(1949)했다. 미술에 재능을 보여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1943)하고 김기림, 김순남, 이인성 등으로부터 문화, 예술 전반에 걸친 소양을 얻는다. 대학 졸업 후, 그는 USIS(주한 미공보원 영화과)의 영화 제작 보좌관으로 입사하여 미국 문화영화의 자막 번역을 맡으며 처음으로 영화계를 접하게 된다. 이윽고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서울에서 조선미술가동맹 일원으로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리며 인민군 점령 시기를 견뎠다. 그러나 이 사실이 문제가 되어 경찰서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미공보원을 떠나게 된다. 이후 유엔으로 자리를 옮겨 한국재건단(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UNKRA, 운크라)에서 뉴스를 비롯해, 홍보영화 <고집>(앨프리드 웨그(Alfred Wagg), 1952), <한국에서의 만남 Encounter in Korea>(리차드 배글리(Richard Baegley), 1952) 등의 제작에 참여한다. (사진1) <고집>(앨프리드 웨그(Alfred Wagg), 1952)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배글리, 이형표, 코넌트, 여자주인공 기순, 촬영조수였던 임병호 (사진2) <고집>(앨프리드 웨그(Alfred Wagg), 1952) 촬영 현장에서 이형표(맨 왼쪽), 카메라를 잡고 있는 임병호 <고집>에서 이형표는 통역 겸 연출 조수를 맡았는데, 녹음기사로 참여한 미국 영화인 테드 코넌트(Theodore Conant, 1926~2015)를 통해 처음으로 자기녹음기(마그네틱 레코더)를 접하는 기회가 되었다. 또한 이형표는 미국 파라마운트사가 제작한 3D 입체영화 <휴전 Cease Fire>(오원 크럼프(Owen Crump), 1953)의 통역 겸 조연출로 일하면서 남보다 먼저 할리우드 특수영상 제작 현장을 경험한다. 다큐멘터리 제작에 활발하게 참여하던 시기에, 이형표가 조력자의 입장에서 제작 주체로 거듭나는 데에는 동료였던 테드 코넌트의 영향이 컸다. 테드 코넌트 1) 는 1952년 유엔 한국재건단(UNKRA) 영화팀원으로 한국에 와서 1960년경까지 약 8년간 전쟁 및 전후 복구 중인 한국의 모습을 기록하는 한편 이형표와 돈독한 우정을 쌓으며 협업 창작 활동을 했다. 또한 코넌트는 한국영화계에 많은 기여를 했는데, 1956년 유네스코와 운크라가 한국 정부와 공동으로 설립한 신생활교육원에서 시청각 교육을 담당했고, 1958년에 미 국무부 산하 국제협조처가 한국 영화인 교육 및 영화제작소 설립을 지원하기 위해 시라큐스 대학과 맺은 ‘시라큐스 컨트랙트’에 참여하여 공보실 영화과의 사운드 분야 인력 교육을 담당했다. 이형표는 테드 코넌트와의 교류를 계기로 외교 파우치를 통해 들어온 서구 문화를 다양하게 흡수하고, 코스모폴리탄적인 문화 체험을 바탕으로 공동 다큐멘터리 작업을 시작한다. 이는 이후 이형표의 영화 창작 세계를 구축하는 데 단단한 초석이 된다. 1953년부터 그는 대한민국 공보처 영화과에서 대한뉴스를 비롯해 공보처에서 주관하는 기록영화 제작을 전담하게 된다. 영화 <한국의 시각 Korean Perspective>(1953)과 <낙원 제주>(1953) 등이 이형표가 감독한 기록 영화들이다. 이 두 작품들은 천연색 코닥크롬(Kodakchrome)으로 촬영한 컬러 영화이고, 한국의 자연경관과 명승고적을 소개하는 <한국의 시각>은 한형모 감독이 촬영을 맡았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단편영화 <한국에서의 만남>(1952)에서 조연출을 했던 이형표는 이 이야기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보이는 장편 시나리오 <불사조의 언덕>을 썼고 2) , 공보처에서 이를 영화화한다. <불사조의 언덕>(전창근, 1955)에는 감독 전창근, 조연출 김한일, 촬영 한형모, 조명 김흥만, 스크립터 홍은원 등의 영화인들이 참여했다. (사진3) <불사조의 언덕>(전창근, 1955) 제작진들, 둘째줄 왼쪽 두번째부터 이형표, 전창근, 홍은원, 배우 나애심 또한, 이형표는 테드 코난트와 함께 다큐멘터리 <한국의 환상 Korean Fantasy>(1955), <한국의 예술가(Korean Artist)>(1955), <위기의 아이들(Children in Crisis)>(1955)을 만든다. <한국의 환상>은 전후 한국의 폐허와 재건 및 전통문화 등을 다뤘고, 화가로서의 이형표 자신이 출연한 다큐멘터리 <한국의 예술가 Korean Artist>(1955)는 1956년 제1회 마닐라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위기의 아이들>은 한국전쟁 고아를 비롯한 전후 어린이들이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는 열악한 생활상을 담았다. 이 작품은 나레이션을 배제하고 녹음기를 사용하여 현장음만으로 상황을 전달하는 다이렉트 시네마(direct cinema) 형식의 새로운 시도를 선보인다. 이형표는 당시 전후 서울의 아이들을 보여주는 많은 장면을 직접 촬영했는데, 콘덴서 마이크로폰(condenser microphone)을 사용하여 레코더를 군용 트럭에 숨겨둔 채 거리 촬영을 진행했기 때문에 매우 생생한 거리의 소리들을 담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3) 작품 후반부에는 ‘북진통일’ 관제 데모와 전체주의적 교육에 동원되는 학생들 역시 ‘위기의 아이들’로 보여주면서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는 태도를 취한다. 4) 이 때문에 이형표는 한국전쟁 중 부역 전력으로 고초를 겪은 바 있는 자신의 신상을 염려하여 스스로 공동연출자로서의 크레디트를 포기했다. 실제로 이 영화는 이승만 정권 측으로부터 ‘공산주의적’이라는 항의를 받기도 했지만 제5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이와 같이, 그는 당시로서는 드문 다수의 제작 경험을 통해 한국 영화제작기술의 열악함을 통감하고, 유엔 한국재건단(UNKRA)에서 원조를 받아내 공보처에 영화 기자재를 들여온다. 더불어 이를 기반으로 스튜디오를 지어 활용하도록 하는 등, 전후 한국영화의 제작 기반과 환경을 조성하는 데 큰 공헌을 한다. 1950년대 중반까지 다큐멘터리 활동을 하는 동시에, 화가로서의 정체성도 유지하며 그림을 그리던 이형표는 신상옥 감독과의 인연을 시작으로 극영화계에 본격 뛰어들게 된다. 신상옥은 이형표가 영화제작 과정과 기술 전반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갖춘 점을 간파하고 <젊은 그들>(신상옥, 1955), <무영탑>(신상옥, 1957)의 각색 및 <동심초>(신상옥, 1957) 등의 제작에 이형표를 참여하도록 한다. 이윽고 이형표는 신필름 기술부장으로 입사하여, 1961년 장안의 화제였던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에서 촬영을 맡는다. 그는 이 영화에서 컬러 영화 제작을 위한 기술 전반에 관여하며 직접 분장까지 맡는다. 이형표는 이미 천연색 다큐멘터리를 제작해본 경험이 있는 바, 이번엔 코닥 이스트만 필름을 사용하여 국내 최초로 컬러 시네마스코프 극영화를 촬영함으로써 한국 극영화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데 큰 몫을 해낸 것이다. 같은 해 그는 신상옥이 제작자로 나선 <서울의 지붕밑>(1961)으로 감독 데뷔한다. 이 작품은 조흔파의 소설 『골목 안 사람들』을 영화화한 것으로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김승호, 황정순, 김희갑, 허장강, 최은희, 도금봉, 김진규 등을 초호화 캐스팅한 도시 서민 코미디로 관객과 평단의 큰 호응을 얻으며 성공한다. “대표작이 될 것”이라는 신상옥의 예견이 적중한 것이다. 기성 세대 한의사인 김승호가 자녀의 결혼 문제를 계기로 젊은 세대를 대변하는 산부인과 의사 김진규와 각을 세우며 시의원 선거에도 나서보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자녀 세대와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낙천적으로 그려냈다. (사진4) <서울의 지붕밑>(이형표, 1961) 촬영 현장 빌리 와일더나 윌리엄 와일러의 작품 세계를 동경했다는 이형표의 바램대로, 미워할 수만은 없는 인간적인 결함을 가진 인물들의 애환을 가슴에 와닿는 코미디로 완성했다. 또한 <서울의 지붕밑>은 독특한 구도와 새로운 카메라 기법을 이용하여 서울의 다양한 풍경들을 담아낸다. 각각의 쇼트들에는 화가가 되고자 했던 이형표 감독의 미적 감각과 영화 테크니션으로서의 실력이 유감 없이 발휘되었다. (사진5) <대심청전>(이형표, 1962)의 용궁 장면 (사진6) <대심청전>(이형표, 1962)의 세트 촬영장에서 제작진들. 뒷줄 가운데가 이형표 이듬해, 그는 고전 심청전을 컬러 시네마스코프로 영화화한 <대심청전>(1962)을 연출한다. ‘미러 워크’라는 특수 효과를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시도하였고, 일본에서 촬영한 용궁 수중 장면 등의 특수 촬영이 압권이다. (사진7) <아름다운 수의>(이형표, 1962) 촬영 현장, 주연 배우 태현실 옆에 앉아있는 이형표 (사진8) <아름다운 수의>(이형표, 1962) 촬영 현장, 카메라에 손을 올리고 있는 이형표 1960년대 청춘영화의 시초격으로 불리는 영화 <아름다운 수의>(1962)는 주역을 신인 배우들만으로 구성하였고 배우 태현실, 최난경, 한문정, 트위스트 김 등의 영화 데뷔작이다. 이 작품은 “이형표 감독의 쾌적한 템포, 유려한 카메라 구사, 재치있는 커팅이 인상적” 4) 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후 그는 연달아 청춘물 <말띠 여대생>(1964), <연애졸업반>(1964), <백발백중>(1966) 등을 연출한다. (사진9) <말띠 여대생>(이형표, 1963)포스터 (사진10) <말띠 여대생>(이형표, 1963)의 한 장면 (사진11) <연애졸업반>(이형표, 1964) 제작진. 둘째줄 왼쪽 세 번째부터 조감독 김기풍, 배우 엄앵란, 이형표 감독, 배우 남미리 <말띠 여대생>(1963)은 개봉 후 대학 측으로부터 그런 학생이 어디 있느냐는 항의를 받는 등 영화의 리얼리즘 문제를 놓고 공방이 펼쳐지기도 했으나, 당시 외화만 보던 젊은 세대 관객들까지도 끌어들일만한 경쾌한 템포와 시원한 전개로 흥행에 성공한다. 이어 속편 <말띠 신부>(김기덕, 1966), <말띠 며느리>(이형표, 1979)가 제작되어 한국영화 최초의 시리즈물이 된다. 이형표는 1963년 무렵 신필름 전속을 그만두고 한양영화사, 극동흥업, 합동영화사 등을 오가며 청춘영화, 문예영화, 통속 멜로, 변장 코미디, 하이틴 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상업영화를 만들며 대중과 소통한다. (사진12) <아름다운 눈동자>(이형표, 1965)의 주연 배우 엄앵란과 김용연, 각각 청룡여우주연상과 청룡특별상(아역상)을 수상했다. <아름다운 눈동자>(1965)는 순박하지만 당찬 식모와 애정결핍인 주인집 아들이 훈훈한 정을 나누는 이야기로, 감독의 안정되고 세심한 연출력이 돋보인다. 웃음이 터지는 박자를 놓치지 않는 센스 있는 템포와 면밀한 씬 구성, 정확한 콘티뉴이티가 관객을 편안하고 즐겁게 몰입하도록 한다. 식모 역할을 맡은 배우 엄앵란은 출산 후 컴백하여 연기생활 11년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로 녹음하는 열의를 보였으며, 제 3회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형표의 다방면에 걸친 박식하고 해박한 소양은 영화 기술적인 성과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취하는 영화 소재나 그것을 이야기로 풀어가는 방식에도 묻어난다. <애하>(1967)에서는 인공수정이라는 당시에는 낯선 소재를 삼각관계가 얽힌 미스터리한 구성으로 대담하게 전개한다. 획기적인 참신함으로 주목 받았던 이 작품은 제6회 대종상 각본상(이형우)과 남우조연상(윤일봉)을 수상한다. 또한 성(性)을 주제로 한 다수의 섹슈얼한 문예영화들 <밤은 무서워>(1968), <너의 이름은 여자>(1969), <방의 불을 꺼주오>(1970) 등을 통해 젊은 남녀의 내밀한 심리 세계를 긴장감 있게 표현한다. (사진13) <회전의자>(이형표, 1966) 촬영 현장에서 카메라 옆에 이형표 (사진14) <밤은 무서워>(이형표, 1968) 포스터. 위에서부터 배우 남궁원, 윤정희, 박노식 일체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거추장스럽게 여긴 이형표 감독의 자유로운 사고 방식은 그의 주특기 장르인 코미디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언니는 좋겠네>(1963), <청색 아파트>(1963), <심술각하>(1966), <오대 복덕방>(1968), <산에 가야 범을 잡지>(1969), <내 것이 더 좋아>(1969), <염통에 털난 사나이>(1970), <방자와 향단이>(1972), <맹물로 가는 자동차>(1974) 등의 작품들에서 세태 풍자와 함께 권위를 조롱한다. 또한 웃음에 야박하고 저급하다고 폄하하는 기존의 시선을 가볍게 뛰어넘어 넌센스 코미디, 슬랩스틱 코미디까지 자유자재로 시도한다. 특히, 연기자 서영춘을 기용해 여러 작품을 만들었던 이형표는 당시 그의 뛰어난 희극 배우로서의 재능이 ‘저속 코미디언’으로 분류 되어, 높이 평가받지 못했던 점을 안타까워했다. (사진15) <청색아파트>(이형표, 1963) 오른쪽부터 배우 이대엽, 이형표 (사진16) <소문난 여자>(이형표, 1966) 촬영장에서 연기 연출 중인 이형표와 배우 고은아 (사진17) <내 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9) 주연 배우 구봉서와 서영춘(오른쪽) (사진18) <염통에 털난 사나이>(이형표, 1970) 왼쪽부터 배우 서영춘, 구봉서, 김희갑 1970년대 TV 보급시대에도 이형표는 누구보다 빨리 변화하는 관객의 감성에 적응해갔으며, 당대 인기 배우들을 기용한 그의 청춘영화들은 꾸준히 인기를 누렸다. “이형표 감독을 잡으면 돈을 번다”는 말이 당시 제작자들 사이에서 회자될 정도로, 이형표는 경제성 있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서 대중이나 제작자 모두가 요구하는 탁월한 상업영화 감각을 유지했다. 이는 그가 영화는 오락이고 유행이라고 생각하며, 그 유행에 맞춰 관객과 상호 작용하는 유연함을 스스로 즐길 줄 알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진19) <모범운전사 갑순이>(이형표, 1972) 포스터 (사진20) <리칭의 여선생>(이형표, 1972) 촬영장에서 이형표 감독과 중국 배우 리칭(오른쪽) 6) (사진21) <리칭의 여선생>(이형표, 1972) 포스터 (사진22) <너무 너무 좋은 거야>(이형표, 1976) 포스터. 주연 전영록, 임예진 1970년대 중반에는 하이틴 영화의 붐을 타고 <이런 마음 처음이야>(1976), <너무 너무 좋은 거야>(1976), <제7교실>(1976), <괴짜만세>(1977) 등을 연출했고, 1980년대 한국영화 침체기에도 이형표는 성룡의 <취권>(1978)을 패러디한 코미디물 <애권>(1980)을 흥행시키며, <여애권>(1982), <애권(신)>(1982), <소애권>(1983) 등의 속편을 연달아 연출한다. (사진23) <아가씨 참으세요>(이형표, 1981) 포스터 그는 1980년대에 계속되는 저예산 흥행영화 제작 와중에, 구로공단 노동자들의 삶의 애환을 담은 일상서민극 <젊은 시계탑>(1984)을 연출하기도 한다. 이형표는 1986년 작품 <먼 여행 긴 터널>을 끝으로 극영화 연출 활동을 마치고, 국내 최초의 360도 서클 비전 영화 <내사랑 금수강산(1990)>을 제작하여 전시 영상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한다. 이후 몇 년간 전시 영상 분야에서 새로운 영상에 대한 끊임없는 개척정신을 보이는 활동을 이어갔다. (사진24) <젊은 시계탑>(이형표, 1984) 촬영 현장. 오른쪽부터 배우 송승환, 이형표 감독, 배우 김현주 이형표의 영화 인생은 한국영화 제작 기술 발전사와 궤적을 같이 한다. 그는 전후 폐허에서 출발하는 1950년대 한국영화계를 위해 영화 기자재 도입에 앞장 섰고, 그 제작 기술을 안내하고 활용하는 데 있어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1960년대 한국영화 전성기뿐만 아니라 1970년대를 거쳐 80년대에 이르기까지 변모하는 세태에 뒤쳐지지 않고, 항상 새롭게 대중의 감수성을 포착해내고 섭취하는 감독이었다. 이렇듯 대중의 기호와 관심에 부응한 결과, 그의 영화 연출작들 대다수가 준수한 흥행 성적을 거두었다. 이형표는 예술가라는 자의식을 발현하기보다는,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을 이해하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유쾌하게 향유할 수 있는 영화 만들기를 추구했다. 그는 영화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예술이어야 한다는 엔터테인먼트 기능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특유의 낙천적인 개성으로, 가족 드라마 <서울의 지붕밑>(1961)부터 코믹 액션물 <아가씨 참으세요>(1981), 한국판 뱀파이어물 <관 속의 드라큐라>(1982) 등과 같은 기발한 재미와 웃음을 선사했다. "그림을 아는 스타일리스트" 7) 이형표는 다양한 장르에서 편협한 시각을 벗어내고, 규범을 해체하는 데서 생겨나는 통쾌한 오락으로 대중과 함께 하는 감독이었다. *이 글은 필자가 쓴「관객과 함께 웃는 영화 패셔니스타(Fashionista), 이형표 감독」, <서울의 지붕밑> DVD 소책자, 한국영상자료원, 2008을 참고해 재구성하였다. 1)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이방인이 기록한 전후 한국, 영화_시어도어 코넌트 컬렉션』, 한국영상자료원, 2015 참고. 2) 앞의 책, 297쪽 참고. 3) 앞의 책, 293쪽 인용. 4) 앞의 책, 292쪽 참고. 5) 「[신영화] 병든 청춘의 풍속도/ 이형표 감독 <아름다운 수의>」, 《한국일보》, 1962년 11월 18일. 6) “톱감독과 톱스타 계보 (제4회)/이형표 편”,《영화잡지》통권116호, 1973년 5월, 190쪽. 7) 「[새영화] ‘스케치북’ 넘기는 재미/ 이형표 감독 <연애졸업반>」, 《서울신문》, 1964년 6월 17일
이제 뻔한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늘어놓는 일은 그만하고, 진짜 본격적으로 애니메이션 속 먹방 장면이나 감상해보자. 사실 애니메이션 속 먹방은 그 가짓수가 일만 오천육십 개까지나 되니(세어 보진 않았지만 하여튼 엄청 많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밀가루’에 관련된 먹방만 감상해보겠다. 첫 번째 이야기해 볼 애니메이션은 바로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들이다. 나는 사석에서 지브리 스튜디오를 ‘셰프 지브리’라고 부르곤 한다. 마치 감각 있는 셰프가 그날 날씨와 제철재료들을 고려하여 선보이는 ‘오늘의 추천 요리’ 메뉴처럼, 지브리 애니메이션 속의 먹방에서는 작 중 분위기와 상황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요리 메뉴를 선보인다. 먼저, 밀가루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애니메이션인 < 마녀배달부 키키 >를 감상해보자. <마녀배달부 키키>는 꼬마 마녀 키키가 빵 택배 일을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소소한 소동을 담은 따뜻하고 귀여운 성장 드라마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키키가 화덕에서 파이를 굽는 부분인데, 그 파이의 모양이 적잖이 낯설었다. 생선 모양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청어 파이’였기 때문이다. 이 청어 파이는 모두에게 몹시 충격적인 비주얼이었는지, 지금도 청어파이, 즉 생선 파이는 영국의 괴랄한 미식 문화를 조롱하는 의미로 통한다. 이 애니메이션에서도 셰프 지브리의 탁월한 센스를 엿볼 수가 있다. 생선 파이는 사실 역사가 오래된 영국 전통 요리다. 신선한 생선을 구하기 어려운 영국의 서민층들이 조리해먹은 데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여하튼 영국 서민들의 전통 홈 푸드인데, 현재는 여기저기서 푸대접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마녀배달부 키키>의 청어 파이 역시 마찬가지 신세다. 손녀의 파티에 따뜻한 파이를 보내주고자 했던 할머니가 오븐이 고장 난 상황에서, 오래된 화덕을 수리하는 고생(물론 고생은 키키가 다 하기는 하였지만 어쨌든 키키에게 넉넉한 금전적 보상을 해주었지 않은가?)을 마다하지 않고 정성껏 구워낸 것이지만, 신세대 손녀에게는 문전박대를 당한다. 셰프 지브리의 특기인 ‘상징’이 빛나는 대목이다. 키키의 눈빛을 보면 맛있게 먹겠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지만… 움직이는 성안, 하울의 식사는 어떨까? 베이컨은 미국 서부개척시대에 개척자들의 필수아이템이었다. 여행 작가이자, 개척자인 랜스포드 헤이스팅스는 1845년, 오리건을 향하는 이민자들에게 150파운드(약 68kg)의 베이컨을 필수적으로 챙겨가라고 조언했다. 개척자들은 매일 아침으로 커피와 베이컨을 먹고, 저녁엔 베이컨 기름을 빵이나 비스킷에다 발라 먹었다. 1) 그 유명한 베이컨&달걀의 유행은 사실 하울이 원조가 아니다. 그 역사는 192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다이어트가 필수덕목인 이 시대에야 고열량인 이 조합은 사실 죄책감까지 불러일으키지만, 1920년대에 ‘베이컨&달걀’은 아주 ‘건강하고 가성비 좋은’ 아침식사였다. 그야말로 피로와 긴장에 찌든 여행자들에게 걸맞은 고영양 메뉴인 것이다. 게다가 셰프 지브리는 베이컨 기름으로 모든 조리를 해결한다. 올리브유나 향료같은 많은 부재료들을 챙겨 다니기 어려운 여행자들에게 아주 요긴한 재료다. 다만 계란 후라이를 저렇게 예쁜 ‘써니 사이드 업’으로 만들려면 약불로 인내심있게 구어야 하는데, 저렇게 화력이 센 불에 조리하니 타지는 않을지 걱정되었다. 뭐, 보기 좋기는 했다. 이 부분에서 서론에서 말했던 애니메이션 속 먹방 장면의 장점이 빛을 발한다. 왜 밀가루 이야기를 하다말고, 고지방 고단백 메뉴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하겠지만, 사실 내가 정말로 주목하고 싶었던 것은 베이컨과 달걀과 함께 식탁 위에 나란히 놓여있던 빵, 깜빠뉴다. 절대 사심으로 베이컨&에그를 끼워 맞춘 것이 아닙니다. 사실 약간 그래요. 뭐 어쨌든… 이 고열량, 고단백의 조합의 목 멜 듯한 기분은 탄수화물이 녹여준다. 깜빠뉴는 오래 보관하기 쉽고, 재료가 단순하고 맛이 담백하여 어느 메뉴와도 잘 어울린다. 식사빵이라는 카테고리답게 묵직하고 든든하다. 여러모로 먼 길을 떠날 때 아주 적합한 메뉴다. 사실 ‘베이컨과 에그 게다가 단순 탄수화물인 빵’은 비만 인구 상승에 힘을 실어줄 조합이기는 하지만,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고 막강한 적과 싸워야하는 하울 무리에게는 더없이 걸맞은 메뉴였다. 이번엔 일본을 벗어나, 영국의 훌륭한 스튜디오로 넘어가 보자. 아드만 애니메이션은 <월레스와 그로밋> < 치킨 런 > < 플러쉬 > < 아더 크리스마스 > < 허당 해적단 > < 숀더쉽 > 등 정말 재미있는 클레이 애니메이션을 대거 제작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다. 아드만의 애니메이션들은 진짜로 웃기고, 재밌다. 그리고 먹음직스럽다. 클레이 애니메이션이다 보니, 먹방으로써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의 장점들을 고루 갖출 수 있다. 만져질 것처럼 생생하면서도 오버액션도 ok. 멋진 일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월레스와 그로밋>을 살펴보자. 월레스는 발명가이자 빵집사장이다. 그로밋은 그가 기르는 강아지. 하지만 이 강아지 그로밋이 월레스보다 약 두 배가량 현명하다. (하긴 역마살 붙은 것 마냥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동네를 휘젓는 이웃집 개도 집만 잘 찾던데, 10년 산 동네에서 한번 낯선 길로 가보자고 했다가 돌아오는 길을 한참 헤맸던 내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지만.) 어쨌든, 둘은 아무리 바빠도(사실 별로 바빠 보이지도 않지만) 늘 시간을 내어 치즈&크래커와 홍차를 즐긴다. ‘빵이냐 죽음이냐’ 편에서, 파이엘라는 늘 정시에 티타임을 즐기는 월레스의 습관을 이용하여 살인을 계획할 정도로 그들에게 티타임은 무척 중요한 의식이다. 사실 이런 문화는 영국인이라면 아주 익숙하다. 영국인들의 티타임 사랑은 하루 이틀이 아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도버해협을 건너는 기차 안에서도 전용 도기로 애프터 눈 티를 즐겼다고 하며, 영국의 유명한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환상의 세계에서도 티타임은 빠지지 않는다. 이런 영국인의 홍차사랑에 대한 결실은 현재 티타임에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찻잎들의 이름에서도 드러난다. 찰스 그레이 백작의 이름을 딴 ‘얼그레이’,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같이. 영국이 구움 과자 분야에서는 두각을 나타내는 것도 이 ‘차사랑’에 원인이 있다. 음식문화가 취약하다고 정평이 난 영국도 비스킷, 스콘 등 티타임에 곁들일 메뉴를 개발하는 데에는 꽤나 열정적이었던 모양이다. 역시 인류 최고의 발명가는 사랑이라고 했던가. 월레스와 그로밋이 여기에 곁들이는 비스킷 역시 지극히 영국적인 과자다. 비스킷은 1588년 스페인과 영국이 영불해협에서 맞붙었던 전투에서 영국을 승리로 이끈 숨은 주역이었다. 해전 시 배에 실을 수 있는 식량은 한계가 있어 칼로리가 높지만 가볍고 부피가 작아야 했는데, 비스킷이 그에 딱 걸 맞는 메뉴였다. 영국군은 최대한으로 수분을 없앤 딱딱한 비스킷을 있는 대로 보관해 둔 덕에 굶주릴 일없이 전쟁에 임할 수 있었고, 결국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쟁을 기점으로 세계최강이라 자부하던 스페인 함대는 몰락했고, 영국은 세계 주도권을 가지게 되었다. 2) 어쨌거나 월레스와 그로밋의 티타임은 달로 향하는 우주 비행선 안에서도 계속되었다. 이 용감한 개척자들은 출발하기 직전까지 티타임 도구들을 챙기기 바쁘다. 바삭하고 퍽퍽한 비스킷에 부드러운 치즈를 곁들인 티푸드에 맛있는 홍차, 그리고 오래된 친구와 즐기는 티타임이라니, 우주 한가운데 더없이 영국적인 풍경이다. 위 거론한 예시들 말고도 애니메이션 속 먹방에 대한 이야기는 밤새도록 나누어도 모자람이 없다. 언젠가 또 기회가 닿는다면 < 너의 이름은. >의 팬케이크 이야기나, < 검정고무신 >의 크림빵에는 생크림이 없다는 이야기로 시작되는 크림의 비밀 등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 싶다. 애니메이션 속에도 현실 세계 만큼이나 먹음직스러운 이야기들이 가득 숨어있다. 행복한 이야기다. 먹는 이야기 좋아하는 사람답게 나의 첫 데뷔작도 레진코믹스에서 연재했던 음식 만화(<삶은 토마토>)였다. 주로 음식을 먹으며 나누는 대화나 상황들이 스토리의 전부다. 심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사는 게 별건가 싶다. 우리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밥먹기’를 원하며, 대부분의 중요한 결정들이 ‘식사자리’에서 거론된다. 나는 애니메이션 속 등장인물들이 먹고 마시는 게 좋다. 등장인물들이 아무리 진중하고 긴박한 상황에서도 허기짐을 느껴, 혹은 기운이 달려 무언가를 먹고 마시는 순간 거리를 두고 감상하던 이야기들이 삶의 차원으로 넘어온다. 게다가 음식 만화를 연재하며 먹는 장면을 그리는 것이 즐겁지만, 번거로운 일임을 뼈저리게 경험했던 사람으로서 스토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빼버려도 상관없는 먹방 장면을 굳이 삽입한 애니메이션 감독에게는 인간적인 애정을 느끼기까지 한다.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들이 더 먹고 마셨으면 좋겠다. 더 많이, 더 맛있게, 더 오버액션으로 먹어주면 좋겠다. 언젠가 여러분, 제가 엄청나게 맛있게 먹는 애니메이션을 만들 거 거든요? 얼마나 맛있게 먹나 한번 보러와 주세요. 어설픈 글을 읽어줘서 고맙습니다. 어쨌든, 나도 난생처음 칼럼이라는 걸 써본 기념으로 오늘은 맛있는 걸 좀 먹어야겠다. 1)『아침식사의 문화사(Breakfast: A history-Heather)』 (헤더 안트 앤더슨 저, 니케북스, 2016) 참조 2)『양과자 세계사』(요시다 기쿠지로 저, 비앤씨월드, 2011)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