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루다
- 감독
- 파블로 라라인
- 제작년도
- 2016
- 출연
-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알프레도 카스트로, 메르세데스 모란
흑곰아, 내 쉴 곳은 어디메뇨? 박세종 의 < 버스데이 보이(Birthday Boy) >는 2004년 프랑스 안시애니메이션페스티벌(Annecy International Animated Film Festival)에서 첫 상영을 하였다. 당시 단편 경쟁 작품을 보면서 익숙한 캐릭터와 배경 때문에 드디어 한국에도 제대로 된 작가가 나왔구나, 이렇게 잘 짜인 작품을 누가 만들었을까, 하고 카탈로그에서 작품정보를 찾았던 적이 있다. 하지만 작품은 호주 국립영상학교 것이었다. 나는 분명 주요 상을 받을 거로 생각했다. 그만큼 애니메이션의 동작과 구성이 탄탄하고 뛰어났으며 영화적 장치와 주제가 돋보였다. 작품은 2004년 안시(Annecy)의 신인상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서 34개의 상을 받았고 아카데미 단편부분 후보작으로도 올랐다. 그때 박세종 감독과 나는 안시에 같이 있었다. 그러나 만난 건 박 감독이 아닌 그의 호주인 아내와 어린아들 그리고 시누이였다. 그때 나는 스위스에 갔다 오려고 버스터미널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벽안의 여자가 우리말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어린 아이는 이리저리 장난을 치며 엄마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그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남편의 작품에 대해 강한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었던 거로 기억한다. < 버스데이 보이 >는 1951년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고 애니메이션에서 실제 전투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기찻길이 있는 어느 마을, 사람들이라곤 보이지 않는 폐허를 보여준다. 내리쬐는 햇살 아래 마을은 고적하지만 따뜻해 보이기까지 한다. 기와지붕의 추녀마루에 앉은 잠자리가 쇠 부딪는 날카로운 소리에 놀라 날아가고 카메라의 시선이 지상으로 내려오면 집을 뚫고 추락한 전투기의 잔해 안에서 “흑곰아, 내 쉴 곳은 어디냐”는 노랫소리와 볼트와 너트를 주워 모으는 어린 주인공이 보인다. 이렇게 첫 시퀀스(sequence)를 통해 영화의 배경과 스토리 세계, 주인공 소개와 주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첫 시퀀스를 통해 전쟁을 통해 파괴된 가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두 번째 시퀀스에서 주인공 만욱은 전투기 부품인 볼트를 철로 위에 올려놓는다. 이윽고 기적소리와 함께 기차가 빠르게 지나고 지켜보던 만욱의 눈앞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만욱이 만들려던 장난감 탱크보다 어마어마하게 큰 탱크가 기차에는 실려 있다. 만욱의 눈빛은 환하게 빛난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기차의 굉음이 압도적이다. 이에 비해 정적 속의 마을에서 혼자 상상의 전쟁놀이를 하는 주인공, 그의 상상은 아빠와 함께 전쟁을 하는 것이다. 폐허의 마을에서 혼자 전쟁놀이를 하는 어린 소년 만욱의 가슴 리본에는 한자로 ‘祝生日’이라 쓰여 있다. 오늘이 만욱의 생일인가 보다. 만욱이 돌아온 집 마루에는 군사우편으로 온 소포가 놓여있다. 만욱은 그것이 아버지가 보내온 자신의 생일 선물이라 여긴다. 소포는 아버지의 유품인 지갑, 군번줄과 군화다. 소포의 의미를 모르는 만욱은 자신의 발보다 큰 군화를 신고 군번줄을 목에 걸고 군인 흉내를 낸다. 햇살이 들이치는 방안에는 만욱이 볼트로 만든 탱크와 무기들이 즐비하다. 새로 만들어온 볼트로 탱크를 만들다 잠든 아이, 그리고 벽에는 가족사진이 보이고 암전되며 아들을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죽은 아버지의 유품을 생일 선물로 생각하는 어린 소년은 전쟁놀이하다 잠든다. 전쟁영화에서는 전쟁의 가혹함을 드러내기 위해 어린 소년 소녀들이 종종 캐스팅된다. 그만큼 흔한 주제여서 전쟁을 다루기는 여간 까다롭지 않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뻔한 결말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 소년은 전쟁의 의미를 잘 몰라야 하고 그것을 통해 삶의 아이러니와 전쟁의 참혹함을 드러내는 것이 이런 영화의 전략이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에서 주제를 증폭시키는 방법에 주목했다. < 버스데이 보이 >의 스토리는 위에 보여주었다시피 아주 간단하다. 만욱이 전쟁의 폭력, 즉 자신에게 다가온 폭력의 실체를 모른 채 아이러니하게 전쟁 기계들을 끊임없이 복제한다는 것이다. 첫 시퀀스에 집을 관통하여 추락한 전투기는 가정을 파괴한 전쟁의 상징이다. 그리고 친구와 어울려야 할 만욱은 전투기의 부품으로 혼자 전쟁놀이를 한다. 세상을 모르는 순수함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전쟁의 폭력과 상처는 미래 세대에게 대물림되고 있다. 그럼에도 작품은 감정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그냥 만욱의 상황만을 보여줄 뿐이다. 나머지는 관객의 몫이다. 애니메이션이 이렇게만 끝났다면 어딘가 싱겁다. 하지만 이 작품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한 디테일을 담고 있다. 바로 햇살에 대한 표현이다. 영화의 전반에 충만하게 차 있는 것이 햇살이다. 첫 장면부터 끝 장면까지 영화 속에는 너무도 밝은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린다. 어린 ‘만욱’이 혼자 전쟁놀이하는 폐허의 골목길은 물론 집에 돌아와 아버지의 유품을 자신의 선물로 오해하는 장면에도 어머니를 기다리다 잠이 든 방안에도 햇살은 애니메이션이 주는 무거움에도 역설적으로 밝게 빛나고 있다. 감독은 생일 선물의 아이러니를 통해 전쟁의 폭력을 배치하고 햇살이라는 하나의 장치를 가지고 주제를 무한 증폭시킨다. 어쩌면 애니메이션은 햇살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작품의 무거운 주제와 상반되게 표현된 햇살에 관객은 따스한 마음을 얻는다. 따라서 아버지의 죽음조차 모르는 천진난만한 만욱과 아버지의 유품을 자신의 생일선물로 착각하는 만욱의 고통은 햇살에 의해 무한 증폭된다. 제목은 아버지의 죽음과 중첩하여 축복받지 못하는 탄생이라는 아이러니를 강조한다. 엔딩은 전쟁놀이에 지쳐 잠든 만욱의 모습에서 페이드 아웃되지만 정적을 깨며 들려오는 어머니의 밝은 목소리 하나로, 집으로 돌아오는 가족이라는 상징을 완성한다. 어쨌든 돌아올 사람이 있어서 그의 생일은 축복받을 수 있지 않을까. 다만 가슴에 ‘祝生日’이라는 리본을 굳이 붙이지 않아도 되었을 터인데 그건 사족으로 보인다. 제목만으로도 충분하다. 오늘 대한민국은 60년 전 시작된 전쟁이 끝나려 하고 있다. 그때 시작된 전쟁으로 현재까지도 850만 명의 이산가족이 아픔을 겪고 있다. 더 이상 전쟁은 없어야 한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 「나는 살리라」(1949)를 변용하여 결론을 대신한다. 일촉즉발의 공포 가득한 오늘 / 난 민중을 향해, 삶을 향해 떠난다, / 총잡이들이 옆구리에 미국문화를 / 끼고 어슬렁거리는 오늘, / 나 여기 굳은 결의 되새긴다. / 중동에서 살육을 자행하는 손들 / 민주주의가 흔들리는 교수대 / 한국을 지배하는 치욕 / 나 여기서 이야기를 멈추리라 / 나 여기에 머물리라. / 또다시 나를 기다릴, 별처럼 빛나는 / 손으로 나의 문을 두드릴 / 말과 민중, 그리고 길과 더불어.
1. (... 그리고 계속) 이렇게 시작할 수밖에 없다. 전혀 의도했던 것은 아닌데 작년에 나는 이 지면에서 장-피에르 레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아마 영화에 관심이 있다면 누구라도 자기의 방식으로 장-피에르 레오의 영화를 본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첫 번째 영화에 14살의 나이에 출연한 소년. 앙뜨완 드와넬이 마지막 장면에서 바다를 달려가다 말고 문득 멈춰 서서 우리를 바라볼 때 그 하나의 쇼트는 영화사의 사건이 되었다. 다섯 편의 앙트완 드와넬. 그 곁에는 장-뤽 고다르와 함께 68년 5월을 기다리면서 파리를 서성거리는 청년 장-피에르 레오가 있다. 혁명에의 예감. 그러나 장 외스타슈의 영화에서 레오는 실패한 혁명의 멜랑코리에 관해 카페에서 장황하게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그 사이에 12시간 30분 동안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자크 리베트의 장-피에르 레오가 있다.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영화에서 레오는 여전히 철들지 않는다. 베르날도 베르톨루치는 누벨바그에 적대적인 감정을 안고 말론 브란도의 맞은편에 세워 놓았다.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와 글라우베 로샤를 빼놓고 싶지는 않다. 장-피에르 레오는 종종 영화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누벨바그가 완전히 끝난 다음에도 장-피에르 레오는 살아남았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장-피에르 레오를 브레송 영화의 모델처럼 찍었다. 그리고 난 다음 전혀 예상하지 않은 순간 차이밍량의 영화에서 레오를, 나이 든 레오를, 거의 낙엽이 된 것만 같은 레오를 만났다. 청춘은 저물고 있었다. 나는 작년에 슬픈 마음으로 알베르 세라의 영화에서 내내 침대에 누워있는 장-피에르 레오를 보았다. 그러면서 중얼거렸다. 이 소년을 볼 날이 많지 않겠구나. 그런데 갑자기 가을에 전화를 받았다. “장-피에르 레오를 만날 볼 생각이 있으세요?” 나는 처음에는 무언가 잘못 들었는 줄 알았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두 편의 영화. 장-뤽 고다르의 1985년 작품 < 작은 독립영화사의 흥망성쇠 >와 스와 노부히로의 새 영화 <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 >을 상영하면서 두 편의 영화의 주연인 장-피에르 레오를 초대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곁들여 알려주었다. 장-피에르 레오라니! 나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아니, 너무 감사한 나머지 내 쪽에서 고맙습니다, 라고 말해버렸다. 해운대의 호텔에서 장-피에르 레오를 만난 것은 10월 13일 오후 5시 30분이었다. 날씨는 맑았고 바람이 몹시 불었으며 창문 바깥의 구름은 저녁을 기다리며 한가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 앞에 나타난 장-피에르 레오는 < 400번의 구타 >의 소년이 아니라 < 루이 14세의 죽음 >의 저물어가는 태양왕이었다. 그는 거동이 몹시 불편했고, 의자에 앉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그 의자는 최고급이었으며, 마치 침대처럼 푹신한 것이었다. 나는 세세한 디테일을 쓸 수 있지만 지면이 허락하지 않는다. 장-피에르 레오는 남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앉자마자 내가 질문하지도 않았는데 고다르와 함께 작업한 이야기부터 꺼내 들었다. 아아, 고다르라니! 장-피에르 레오는 내가 만난 고다르 영화에 출연한 두 번째 배우이다. 첫 번째는 태안반도에서 만난 (< 다른 나라에서 >를 찍으러 방문한) 이자벨 위페르였다. 그런 다음 장-피에르 레오는 주머니 속의 구슬을 꺼내듯이 차례로 이름을 호명했다. 그는 말할 때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정확하게 그 자세로) 커다란 제스처로 양팔을 치켜들고 웅변하듯이 흔들었다. 하지만 가엾게도 이미 목소리는 지쳐서 갈라졌고 종종 가까스로 힘을 내서 말했다. 게다가 발음은 불분명하게 뒤섞였고 내가 알고 있는 영화 제목들도 때로 놓쳤다. 하지만 몹시 산만하게 이야기를 하다말고 문득 내게 말했다. “내가 그들에게 배운 게 뭔지 알아요? 배우에게 연기는 철학하는 방법이라는 겁니다. 고다르가 내게 해준 말이에요. 영화는 그 방법을 쳐다보는 예술인 거죠” 나는 갑자기 누벨바그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서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중얼거렸다. 아아, 이것만으로 충분해. 이걸로 나는 충만해. 두 번의 토크, 나흘 동안 아주 많은 일이 있었다. 나는 당신이 누벨바그의 작은 영화사에 관해 절대 알 수 없는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장 외스타슈에 대해서도 들었다. 차이밍량의 연기 지도에 대해서도 들었다. 하지만 장-피에르 레오는 정말 공개적인 자리에서의 토크를 원치 않았다. 나는 당신의 이야기를 한국의 시네필들이 간절히 원한다고 애절할 정도로 간청했다. 한 가지는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다. 장-피에르 레오가 그렇게 당신들 앞에 의자에 오래 앉아있었던 건 내 간청에 대한 대답이었다. 장-피에르 레오와의 두 번의 토크가 끝났다. 두 번째 토크가 끝난 다음 그는 아내의 부축을 받으면서 엘리베이터를 타러 갔다. 그는 문이 닫히기 전에 내게 말해주었다. “당신도 트뤼포처럼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군요” 그리고 포옹을 해주었다. 나보다 키가 작았지만 약간 힘겹게 고개를 들고 내 뺨에 그의 뺨을 비벼주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고 그런 다음 순식간에 내 앞에서 사라졌다. 약간 멍한 기분으로 그 앞에 잠시 서 있었다. 문득 내가 평생 동안 꿈꾸었던 일 중의 하나가 이루어진 순간임을 깨달았다. 어떻게 달리 말할 수 있을까. 2. 올해 나의 영화는 망설일 필요 없이 데이빗 린치의 < 트윈 픽스: 더 리턴 >(시즌 3)이다. 그저 괴이하다고밖에 달리 설명할 수 없는 이 시리즈는 여전히 데이빗 린치가 우리 시대에 가장 멀리 나아간 예술가 중의 한 명이라는 걸 보여주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게다가 (역시)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올해 1월 3일 나의 첫 토크는 데이빗 린치의 < 블루 벨벳 >이었다. 그런 다음 데이빗 린치에 관한 다큐멘터리 < 아트 라이프 >를 진행했고, 가을에는 < 이레이저 헤드 > < 트윈 픽스: 불바다를 나와 함께 건너자 > < 로스트 하이웨이 > < 멀홀랜드 드라이브 >를 차례로 진행했다. 12월에는 데이빗 린치에 대해서 이야기할 자리가 기다리는 중이다. 말하자면 올 한 해는 내게 ‘다시 찾아온’ 데이빗 린치의 한 해였다. 왕빙의 두 편의 영화는 한 마디로 굉장했다. < 15시간 >은 15시간 40분 동안 진행된다. 쯔린성에 자리한 아동복 피복 공장 15,000개 중의 한 작업실을 막 일이 시작되는 아침 시간에 찾아간 다음 하루 종일 그 장소에 머물면서 그들이 퇴근하는 한밤중까지 하루 종일 버티고 있는 이 영화는 (좀 이상한 의미에서) 왕빙의 (앤디 워홀의) <엠파이어>이다. (아마 이 영화에 대해서는 길게 이야기할 다른 자리가 있을 것이다.) 다른 한 편 < 미세스 팡 >은 알츠하이머로 죽어가는 할머니 팡슈잉(方?英)을 찍었다. 여기서 찍은 것은 말 그대로 ‘죽어가는’ 시간이다. 왕빙은 죽음을 착취하지 않는다. 그저 무시무시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미세스 팡>은 죽음 앞에서 영화가 가져야 할 태도를 다시 한번 질문한다. 이 두 편의 영화는 한 편은 한 장소에 대해서, 다른 한 편은 한 사람에 대해서 찍는다. 왕빙은 점점 더 멀리 나아가고 있다. (부산에서 만난) 프랑스 프로듀서에 의하면 왕빙은 이미 다음 영화를 파리에서 편집하는 중이다. 안타깝지만 나는 다음 영화에 대해서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했다. 아마 2018년에 만나게 될 왕빙의 영화는 하나의 사건이 될 것이다. 그것만은 분명하다. 왕빙의 영화가 고통스럽다면 프레드릭 와이즈만은 잠시 동안 천국에 다녀온 기분을 안겨준다. <미세스 팡>에 올해 본 최고의 클로즈업 쇼트가 있다면 < 뉴욕 라이브러리에서 >에는 최고의 롱 쇼트가 기다리고 있다. 프레드릭 와이즈만은 내가 알고 있는 한 롱 쇼트를 가장 의미 있게 찍는 감독이다. 거의 천국처럼 진행되는 이 영화가 와이즈만도 미처 예기치 않게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에서 가장 정치적인 영화가 된 것은 동시에 이 영화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프레드릭 와이즈만의 21세기 영화가 항상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 영화는 걸작이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의 초상화를 그려낸 두 편의 기괴한 영화 <자네트>와 < 재키 >는 서로 다른 의미에서 굉장하다. 아마 <자네트>는 찬반이 갈릴 것이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브뤼노 뒤몽의 새로운 뮤지컬에 완전히 승복한다. 올해에는 두 편의 파블로 라라인의 영화를 볼 수 있었는데 (다른 한 편도 마찬가지로 전기영화인 < 네루다 >이다) 나는 이 사람의 영화를 더 많이 보고 싶다. 원작에 기대어 만든 두 편의 서사 에픽 < 잃어버린 도시 Z >와 <자마>는 영화와 ‘자연’이 만나는 방법에 대한 진지한 탐구이다. 점점 영화에서 자연을 그래픽으로 그려내는 동안 어떤 영화들은 ‘생생한’ 자연 안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영화라는 장치 자체가 경험하는 것을 기록하고 싶어 한다. 올해 가장 신선한 영화는 조쉬와 베니 사프디 형제의 < 굿 타임 >이다. 아마 사프디 형제는 점점 더 놀라워질 것이다. 이 선택은 지지의 표명이다. 물론 마지막에 선택한 스와 노부히로의 <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 >는 단지 장-피에르 레오를 만났기 때문에 일종의 기념으로 포함시킨 것이 아니다. 스와 노부히로는 여기서 매우 느슨하게 진행하면서 마치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를 다시 보는 것만 같은 기분을 가져온다. 물론 이 영화의 대부분에서 보여준 그의 연출방식, 즉 배우에게 영화를 그저 맡긴 채 그 리듬을 따라가는 흐름은 스와 노부히로만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제까지 항상 어떤 긴장을 품고 있었다면 여기서는 드물게도 기분 좋은 한여름의 휴가를 즐기러 온 것만 같다. 아마 이 영화 속의 아이들이 보여주는 그 자연스러움이 한몫했을 것이다. 한 가지 더. < 퍼펙트 커플 >이 로셀리니의 < 이탈리아 여행 >의 오마주라면 분명히 <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 >는 < 400번의 구타 >의 오마주이다. 특히 마지막 장면. 영화 속의 영화에서 잠든 연기를 하던 장-피에르 레오가 문득 눈을 뜨고 우리를 바라볼 때 거기서 어린 앙트완이 우리를 바라보던 그 장면이 어쩔 수 없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추신: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영화를 뽑지 않긴 했지만 올해의 연기에서 < 밤의 해변에서 혼자 >에서 김민희 는 정말 아름답고 애처롭다. 특히 어둠이 다가오는 커피숍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의 롱 테이크 씬은 홍상수의 모든 영화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슬픈 장면 중의 하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