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다 고고
- 참여 작품
- 꽁치의 맛 (1962), 고하야가와가의 가을 (1961), 가을햇살 (1960), 부초 (1959), 안녕하세요 (1959), 피안화 (1958), 동경의 황혼 (1957), 이른 봄 (1956), 동경 이야기 (1953), 오차즈케의 맛 (1952), 초여름 (1951), 늦봄 (1949), 청춘의 꿈은 어디에 (1932), 의붓딸 (1932), 동경합창 (1931)
시나리오 작가 송길한 인터뷰 첫 번째 이야기: “그때는 내가 쓰면 최고의 장면이 기다리고 있었지요.” 시나리오는 영화에서 애매한 위치에 멈춰 서 있다. 아무도 연극에서 희곡에 해당하는 지위를 영화에서 시나리오에 부여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영화에서는 <햄릿>이나 <벚꽃 동산>처럼 반복해서 (그것도 원작을 존중해가며 단지 해석만을 덧붙이면서) 만들어지는 시나리오란 없다. 시나리오는 오직 그 영화의 완성만을 위해서 쓰고 그 영화가 만들어지고 난 다음 거기서 더 이상의 활동을 멈춘다. 아주 예외적으로 리메이크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지기는 하지만 그건 이미 완성된 영화의 그림자 아래 놓이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단지 소재나 인물이 흥미로웠을 지도 모른다. 영화가 어디서 시작되는 지는 영화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그저 이미지라고 말했다. 다른 누군가는 사건이라고 대답했다. 약간 신중하게 누군가를 떠올리면서 사람에 대한 흥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설명을 시작할 때도 있다. 저마다 다른 시작. 영화에서 아이디어는 사유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나는 종종 영화에서 사유는 어디에 머무는가, 라고 물어보고 싶어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먼저 찾아내야 할 것이다. 시작이라는 장소. 서로 다른 곳에서 흘러 들어온 아이디어는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에서 가장 먼저 문자에서 멈춘다. 왜 영화는 문자를 필요로 하게 되었을까. 단지 기능적인 이유로? 그럴 지도 모른다. 이때 누군가는 이 과정이 영화를 산문적으로 만든다고 비판하듯이 말했다. 하지만 문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떠도는 아이디어를 멈출 수 있을까. 시나리오는 정확하게 그 자리에 있다. 나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쓰여진 시나리오를 보았다. 일부러 읽었다, 라고 하지 않고 보았다, 라고 썼다. 에이젠쉬테인의 < 이반 대제 >의 시나리오. 완전히 반대로 쓴 타르코프스키의 <향수>의 시나리오. 장 르누아르의 < 게임의 규칙 >의 시나리오, 누가 이걸 읽은 다음 영화를 떠올릴 수 있을까. 브레송의 <무쉐뜨>의 시나리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지문들. 누구라도 금방 쓸 것만 같은 오즈의 < 동경 이야기 >의 시나리오. 거의 메모(의 콜라주)에 가까운 고다르의 <수난; 노동과 사랑>의 시나리오. 차라리 책에 가까운 에릭 로메의 시나리오. 종종 비평가들은 여기서 잘못을 저지른다. 혹은 여기서 금방 영화에로 옮겨가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시나리오는 감독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일단 쓰면 배우들의 독해라는 문제가 뒤따라온다. 그(녀)들은 감독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읽어나가기 시작할 것이다. 말하자면 시나리오는 그들에게 주어진 세계이다. 여기에 수정이란 없다. 단지 그 안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문제와 만나야만 한다. 대사에 불어넣어야 할 인격. 배우는 하여튼 그 말을 해야 한다. 그런 다음 무엇보다도 그 말을 믿게 만들어야 한다. 삶의 조건이라는 시나리오의 상황. 주어진 운명. 그 틈새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똑같은 의미로 제작자는 이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돈의 문제와 만난다. 영화가 요구하는 자본. 자본이 요구하는 영화. 그 둘 사이에서 힘겨운 투쟁. 노동은 교환되어야 할 것이다. 가치의 이동. 그 안에서 예술적 가치란 어디에 있을까. 이때 시나리오는 자본의 도면도와도 같은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똑같은 시나리오를 읽어도 파올로 브랑코와 하비 와인스타인은 완전히 다른 전표를 만들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냉소적으로 대답할 것이다. 아마 그러기도 전에 두 사람 중 한 쪽이 완전히 매혹된 시나리오를 다른 한 쪽은 그냥 찢어버릴 것이에요. 그럴 것이다. 이때 영화는 어디에 살 것인가, 라는 질문과 만난다. 임권택 은 오래 전, 1983년에 (당시 영화진흥공사에서 발간되던) <월간 영화>에 ‘저질 시나리오와 좋은 영화’라는 글을 썼다. 그때는 < 만다라 >를 찍고 난 다음, 그리고 < 안개마을 >을 만들고 난 다음, < 불의 딸 >을 준비할 때이다. 다소 길게 인용할 생각이다. 여기에는 시나리오에 대한 임권택의 입장이랄까, 약간 과장한다면 기대의 지평이랄 만한 구체적인 설명이 있다. “(...) 흔히들 영화 예술은 감독의 것이라 한다. 그러나 좋은 시나리오를 감독이 망쳤다는 말은 자주 들었어도 저질 시나리오로 좋은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성공담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 영화를 생의 전부로 알고 살고 있던 영화인은 한둘이 아닐 것이다. 어려운 생계를 위해 부업을 갖는 이조차 드문 것을 보면 자명한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저질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방향 감각을 잃고 구원의 손길이 외부로 와 닿길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이런저런 구실에다 책임을 떠맡기고 저질연탄을 찍어내는 기능공정도에서 안주하고 있지나 않는지 모를 일이다. 내가 살고 있는 때와 장소에 대해서 전혀 방향감각을 알 수 없는 영화, 그런 영화를 만든다는 것도 싫거니와 그런 인생을 사는 건 더더욱 이나 싫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자신의 시나리오를 영화화함에 있어서 단 한 마디의 대사도 수정을 불허한다는 단서를 붙이고서야 작품을 내주셨던 분도 계셨다. 그까짓 단서를 붙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느 경망스러운 감독이 한 지문인들 고치려 덤볐겠는가. 그 분의 작품은 모두 진실인 것을...” (<월간 영화> 7/8월호) 이 글을 쓰고 있을 때 임권택 은 송길한 과 함께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한국영화사에서 송길한이 차지하는 위치는 임권택을 떼어놓고는 달리 생각할 수가 없다. 아마도 한국영화사에서 시나리오 작가가 가장 빛나던 시절은 1960년대 영화였을 것이다. 이상할 정도로 그 당시에는 연출과 시나리오가 분리되어 있었다. 물론 이해할 수는 있다. 처음에는 시나리오가 돌아다녔다. 제작자는 감독을 구하고 그런 다음 재빨리 배우를 정했다. 대부분의 감독들은 자신이 시나리오를 연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배우들은 너무 많은 영화에 동시 출연을 했기 때문에 하루에도 두 세 개의 현장을 가야만 했다. 그들이 시나리오를 읽을 시간은 서로 다른 현장을 이동하는 차 안에서 였겠지만 아마도 대부분 피로에 지친 그들은 그저 잠을 잤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한국영화는 동시녹음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그 대사를 성우가 녹음실에서 알아서 해결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제를 단순하게 비난하고 싶지 않다. 이것은 영화의 서로 다른 전통에 속하는 문제이다. 이를테면 네오리얼리즘 이후에도 이탈리아 영화들은 거의 동시녹음을 하지 않아서 그 소란스러운 오페라 아리아와도 같은 대사들의 목소리와 배우의 입은 거의 맞지 않는다. 반대로 프랑스영화들은 신경질적일 정도로 일치시키려고 애를 쓴다. 홍콩영화는 처음부터 북경 표준어와 광동어 사이에서 교체 가능하게 녹음한다. 말하자면 시스템의 체제 안에서의 역량의 통제에 관한 문제, 혹은 복잡한 인과관계 안의 중층적 결정으로서의 목소리의 위치. 자,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송길한은 (트뤼포가 공격적으로 정의내린 샤를 스파크와 앙리 장승, 자크 프레베르의 지문과 대사의 방법으로 이루어진) ‘좋은 시나리오’의 그 마지막 세대에 속하는 작가이다. 그는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에 < 흑조 (黑潮)>라는 작품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첫 번째 작품이 영화 제작을 목표로 한 시나리오가 아니라는 말은 송길한이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 한국 영화현장의 조건을 잘 알지 못했다는 뜻이다. 아마도 이 시나리오 원작은 1970년 한국영화와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이 시나리오를 높이 평가하여 당선작으로 결정되었지만 영화로 옮겨지기까지 3년이나 걸렸다. 송길한은 나쁜 시간에 도착했다. 그해 6월 김지하는 <오적>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었고 계간 사상계는 폐간되었다. 경부 고속도로가 7월에 개통되었지만 11월 13일 전태일이 청계천 6가 평화시장에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친 다음 분신자살했다. 그래도 이듬해 4월 박정희는 다시 제 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였다. 정치의 겨울이 시작되었다. 영화는 숨 죽였고,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었을 때 한국영화는 무자비한 검열과 무조건적인 항복 아래 정책홍보 수단으로 전락하거나 그저 시시한 구경꺼리가 되었다. 막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되었다. 송길한은 쓸 이야기가 많았지만 시간을 잘못 선택했다. 하지만 그는 충무로에 남았다. 어쩌면 그 자신이 물러날 데가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모른다. 여기에 관한 그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저 그 자신은 “그냥 그게 내 운명인 거요”라는 대답만을 되풀이했다. 그의 첫 시나리오인 <흑조>가 이상언 감독에 의해 원래의 작품과 다르게 다시 각색되어 영화화가 된 다음 1974년부터 충무로에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송길한은 거의 모든 장르의 시나리오를 썼다. 하이틴 영화인 < 여고 얄개 >, < 우리들의 고교시대 >, 애니메이션인 <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 > ( 민병권 과 공동 각본), 전쟁영화인 < 도솔산의 최후 >, < 제 3공작 >( 윤삼육 과 공동 각본), 에로물인 < 독신녀 >, 무국적 무술영화인 < 낭화비권 >, (그리고 좀 놀랍게도 성룡이 출연한) < 금강혈인 >. 이 목록은 다소 참혹한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1940년생 작가의 빛나는 30대에 보여줄 수 있는 재능의 시간을 어쩔 수 없는 세월 속에서 그렇게 낭비하듯이 보내버렸을 때 그건 그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역사를 기록하는 우리들에게도 고스란히 운명에 대해서, 운명의 책임에 대해서, 존재의 물음에 대한 책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영화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불러 일깨운다. < 짝코 >(1980) (작품 연보에 따르면) 송길한 은 15편을 쓰고 난 다음, 그러니까 첫 번째 시나리오를 쓰고 난 다음 11년이 지나던 해, 1980년에 처음 임권택 을 만났다. 그때 임권택은 < 족보 >를 막 끝내고 난 다음이지만 한편으로는 전쟁영화 < 낙동강은 흐르는가 >를 만들고 난 다음이다. 누가 누군가를 만난다는 문제. 말하자면 사건. 누군가는 너무 일찍 만났기 때문에 서로의 인연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며, 누군가는 너무 늦게 만났기 때문에 탄식을 할 지 모른다. 아마 임권택과 송길한은 몇 차례이고 충무로에서 스쳐지나갔을 것이다. 충무로라는 경기장. 벤허다방에서의 전설적인 일화들. 베어가든, 혹은 퇴계로에서 을지로에로 이어지는 생선구이 대포집들. 두 사람은 충무로라는 좁은 골목길에서 11년을 서로 모르는 체 지냈다. 어떻게 서로를 모를 수 있을까. 어쩌면 서로 각자의 방식으로 둘 사이를 묶어내는 인연을 기다렸을 지도 모른다. 그 둘을 처음 묶어준 영화는 < 짝코 >이다. 지리산 태백산맥 어귀에서 만난 두 남자. 그 사이에 끼어든 한국전쟁이라는 시간. 빨치산 공비 짝코는 도망치고 그를 붙잡았던 송기열 경사는 그를 놓치는 바람에 집안이 풍비박산 난다. 아마 그 자신도 짝코를 잡으려던 세월이 그렇게 오래 계속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짝코도 그렇게 오랫동안 자신이 밤 그림자 타고 도망 다니게 될 것이라곤 몰랐을 것이다. 하긴 누군들 알았겠는가. 이야기는 그 둘 사이를 오가면서 플래시백이 시시때때로 스며든다. 두 남자의 삶의 시간. 우리들의 역사. 거미줄처럼 이어진 시간. 그들을 칭칭 동여매기 시작했을 때 임권택과 송길한은 종종 좁디좁은 작은 방 안으로 삶을 수축시키기도 하고 때로 그 작은 사건을 역사 전체로 확장시키기도 한다. 끝없는 추락. 비탈에서 그렇게 떨어지는 짝코. 잘못된 미끄러짐. 그 앞에서 순간적인 송기열의 실수. 그런 다음 그들은 정반대의 이유이지만 동시에 같은 이유로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역사의 오류. 단 한 마디로 이 영화는 걸작이다. 그러나 그때 사람들은 이 영화를 알아보지 못했다. 21세기가 된 다음에 긴 세월의 먼지를 털고 이 영화는 임권택의 걸작의 반열에 올라서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도 <짝코>가 자신의 야심과 깊이를 충분히 대접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더 멀리 갈 것이다. < 만다라 >(1981) 그렇다고 해서 금방 임권택 과 송길한 이 함께 작업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영화사에서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 사이의 오랜 우정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 있다. 오즈 야스지로와 노다 고고, 노년의 루이스 부뉴엘과 장-클로드 카리에르, 데이빗 린과 로버트 볼트, (그리고) 수 없이 많은 예. 하지만 종종 두 사람의 대표작이라고 알려진 < 만다라 >의 첫 번째 각색자는 송길한이 아니라 이상현이었다. 송길한은 두 번째 각색을 했다. 물론 여기에는 영화사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조건들이 겹쳤을 것이다. 나는 이런 문제가 간단치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마도 영화 <만다라>는 두 번째 판본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송길한의 시나리오 판본을 읽어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미 임권택과 < 신궁 >에서 손발을 맞춰 본 정일성 촬영감독이 (잘 알려진 대로) 큰 수술을 받고 난 다음 “의사에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건 내가 찍다가 죽어도 후회가 없다는 심정으로” 촬영을 했다. <만다라>는 (아역배우를 하다 긴 공백을 끝내고 돌아온 다음) 주연 배우를 한 안성기 에게도 전환점이 되었다. <만다라>는 어떤 마술 같은 순간의 힘이 사방에서 빛나는 신기한 영화이다. 1980년대 한국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화음이 이루어진 순간이었을 것이다. 어떤 영화는 누군가의 힘, 때로는 감독, 혹은 배우, 가끔은 촬영이나 각본(의 대사)가 그 영화의 이것임을 드러내는 힘의 중심에서 형태를 만들어내고 존재를 증명하지만 또 어떤 영화는 그 모든 힘이 화음처럼 서로 조화의 기적을 만들어낸다. 나는 기적이라고 썼다. 왜냐하면 이런 순간을 영화에서 맛보는 것은 아주 드물기 때문이다. 영화의 힘은 한편으로 서로 다른 힘들 사이의 긴장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대부분은 이 긴장의 균형이 불화를 일으키고 종종 그 누군가의 힘으로 다른 힘들을 복종시킨다. 임권택 과 송길한 , 그리고 정일성 은 때로 제한된 조건과 시간 속에서조차 빛나는 순간을 만들어냈다. < 안개마을 >은 한쪽에서 쓰고 다른 한쪽에서는 찍으면서 12일 만에 완성해낸 영화이다. 이 영화를 걸작이라고 부를 순 없지만 어떤 순간들은 두 번 다시 되풀이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서로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종종 대담한 힘의 결정. 그들은 그것을 때로 서로 믿었다. 서로 다른 힘들의 위상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구성. 갑자기 변형을 일으킨 시청각 기호들의 활용. 그들 자신은 별로 믿지 않았지만 그건 <안개마을>과 거의 동시에 찍은 < 나비 품에서 울었다 >의 알 수 없는 불균질에서 조차 그 힘을 가끔씩 거만하게 드러냈다. 무엇보다도 임권택과 송길한은 한국영화에서 거의 손대지 않은 영토를 차례로 건드려나갔다. < 불의 딸 >은 이미< 신궁 >에서 임권택이 다루었던 무속의 세계를 거의 환골탈태하다시피 하여 밀고 나아갔다. 여전히 숨어있는 이 걸작. 임권택과 송길한, 그들은 어떤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의 일상생활 안까지 들어가고 싶어 했다. 그 사람이 산사에서 불경을 외우면서 해탈을 꿈꾸는 승려라 할지라도(< 만다라 >), 혹은 사람들의 사주팔자를 들여다보면서 신 내린 무당일 지라도(<불의 딸>), 전쟁 통에 부모를 잃어버리고 강가에 빠져죽은 사람들 시체를 건져내서 살아가는 사내의 삶일지라도(< 길소뜸 >), 그저 삶의 비루한 곁에 다가가서 생활을 들여다보려고 했다. 생활 없이 인간이 어떻게 하루를 견딜 수 있을까. 아마도 <길소뜸>은 임권택과 송길한이 만들어낸 화음의 절정일 것이다. 그들은 거기서 모든 대사, 모든 씬에서 어떻게 영화가 자기의 순간을 만들어내는지를 이끌어낸다. 여기서 모든 장면들은 그 스스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그 안에서 자기를 보존하면서 단지 체험되는 것을 매번 넘어서서 그것을 바라보게 만든다. 여기서 방점은 바라본다, 는 말이다. <길소뜸>은 대부분 불안정한 감정의 관계에 내내 머물면서도 매번 어느 순간 마치 곡예를 하듯이 그 안에서 자기 개연성을 찾아 균형을 맞추고야 만다. 이 영화는 분명히 그 두 사람 누구에게나 이전에 보여주지 못했던 경지에 스스로 가 닿은 작품이다. 비구니회 제작중단 요구 현장 그런 다음 < 비구니 >가 있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한 여인의 비구니로서의 고행 길. 불가에서는 수행을 하기에 전쟁보다 더 좋은 시절은 없다, 라고 할 만큼 지옥의 수행의 나날들. 1984년 4월 7일 신흥사에서 주연배우 김지미 씨가 삭발의식을 하면서 첫 촬영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전국 비구니회에서 제작중단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유는 시나리오에서 다룬 비구니의 육보시 장면을 예로 들었다(고 한다). 나는 정확하게 어느 씬이 문제가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시나리오를 읽어보았지만 잘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추측으로) 아마도 씬 87, 한국전쟁 중에 피난중인 아이들을 떠안은 비구니 수경이 중공군을 피해서 추운 겨울날 남하하다가 타이어가 펑크 나서 수리중인 트럭에 아이들을 태워 고아원까지 내려가기를 부탁하자 운전수가 수경에게 담요를 내밀면서 “(은밀히) 마누라 잃은 지가 3년이우, 애들은 책임지고 태워줄 테니까 대신 내 사정도 좀 봐 주슈” 라는 대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나리오에는 그런 다음 별다른 장면이 없다. 아이들을 태우고 멀리서 포성이 울리고 나면 다음 씬으로 옮겨간다. 4월 16일 전국 비구니회는 법원에 제작중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그러자 영화인회의에서는 4월 31일에 창작자유 수호결의 대회를 열었다. 하지만 전국 비구니회는 5월 11일에 제작 중지를 요구하며 가두시위에 나섰다. 초파일이 그 무렵이었고 <비구니> 팀은 수몰 지구에서 일단 촬영을 시작했다. 하지만 항의는 점점 거세졌다. 태흥영화사는 6월 13일 제작중단을 선언했다. 분하지만 <비구니>는 거기서 끝났다. ( 임권택 감독 인터뷰에 따르면) “전쟁 장면은 내가 이제까지 찍은 것 중에 가장 힘 있게 찍혔는데...” 라고 대답했지만 그건 이미 회고담이다. 시나리오를 읽은 내 기분으로 <비구니>는 < 만다라 >와 < 길소뜸 >, 그리고 < 아제아제 바라아제 >의 중간 어디쯤에 자리 잡았을 것만 같다. 혹은 그 영화들이 한 자리에 모였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다음 임권택 과 송길한 , 정일성 은 다시 함께 작업하지 못했다. 임권택과 송길한의 다음 작품 < 티켓 >은 구중모 가 찍었다. 강원도 항구도시 구석 지하에 자리 잡은 다방을 무대로 티켓을 팔며 먹고 사는 네 명의 여자와 그녀들을 다시 뜯어먹는 다방 마담을 중심으로 바닥까지 떨어져 내린 삶의 안으로 들어갔다. 어쩌면 이 영화는 임권택과 송길한이 찾고 싶어 했던 리얼리즘의 한쪽 끝을 보여주고 있는지 모른다. 물론 리얼리즘은 임권택의 목표였던 적이 없다. 하지만 그는 일상생활의 디테일 안에서 살고 싶어 했다. 그는 오로지 그것만이 믿을만하다고 생각했으며, 그 안에서 성찰의 방법을 끌어내려고 했다. 그게 조선시대가 되었건 일제 강점하가 되었건, 혹은 해방 전후의 혼란 속으로 들어가건 새마을 운동을 하던 농촌 마을로 가건 거기엔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 하지만 그들은 거기서 소재를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송길한은 <티켓>을 위해서 강원도 항구도시에 머물면서 여관방에서 계속 티켓을 끊어가며 낯선 다방에 커피 배달을 시켰고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들었다(고 오래 전 인터뷰에서 내게 말했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켜켜이 쌓이면서 이 영화의 인물이 되어갔다. <티켓>에는 사람에 대한 어두운 실망과 삶에 대한 피로가 가득히 고여 있다. 임권택과 송길한은 단 한 번도 그들의 작업을 해피엔딩으로 끝내지 않았다. 물론 그것을 단순히 반대말인 비극으로 끝냈다고 말하기도 애매할 정도로 그저 열어놓기도 했지만 거기에는 언제나 파국을 맞이했으며 그 앞에서 결국 비관적인 비감이 감돌고 있었다. 비극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지라도 세상 앞에 선 슬픈 자들의 이야기. 그 이야기에 대한 연민. 어쩌면 여기서 더 밀고 나아갔다면 임권택과 송길한은 각자에게 새로운 구성의 방법에로 나아갈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공동 작업은 여기서 끝났다. < 씨받이 >를 작업하던 중 송길한은 미국에 가서 다음 영화 <아메리카 아메리카>의 취재를 했고 임권택은 그 시나리오를 부여잡고 세트에서 조선시대 양반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남자 아이를 낳으러 안채에 들여다 놓은 어린 소녀 옥녀의 이야기를 찍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 영화는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초대되었고 강수연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겨 주었다. 유럽의 (이른바) 3대 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가 수상한 공식적인 첫 번째 호명이었다. 그들은 그런 다음 각자의 영화를 만들어나갔다. 아마 긴 이야기가 거기 있을 지도 모른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 이야기가 별로 궁금하지 않다. 누군가는 만날 것이며, 또 누군가는 헤어질 것이다. 모든 예술가들은 그렇게 자기의 힘을 가다듬을 것이다. 물론 송길한은 여전히 시나리오만을 고집스럽게 썼다. 장길수의 두 편의 영화, <아메리카 아메리카>와 <불의 나라>를 썼고, 노세한 의 두 편의 영화 < 아낌없이 주련다 >와 < 대학촌의 달빛 >을 썼다. 그런 다음 이장호 의 < 명자 아끼꼬 소냐 >를 쓰고 나서 그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새로운 작품 소식을 듣지 못했다. 내가 안타까운 것은 그가 임권택과 왜 더 오래 작업하지 않았느냐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왜 더 많은 작업을 더 오랜 기간 동안 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만일 송길한이 이른바 1995년 세대와 함께 작업할 기회가 있었다면 한국영화는 지금 보다 훨씬 성숙한 영화의 명단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그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작업할 행운을 가질 수 있었던 젊은 감독들은 새로운 경지에 이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기회를 잃었다. 하지만 아직 시간이 남았다. 나는 다가올 시간을 기대하면서 송길한이라는 이 힘센 작가를 만나러 간다.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한다. 그리고... 정성일 평론가(이하 정성일)_ 영화를 하겠다고 결심을 하면 먼저 선택을 해야 합니다. 감독, 촬영, 편집, 배우, 이렇게 많은 결정 중에서 선생님은 시나리오를 선택했습니다. 1970년 동아일보에 <흑조>로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시나리오 작가로 입봉하였습니다. 많은 시나리오 작가들은 그런 다음 감독으로 다시 데뷔하기도 하지만 선생님은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작업만을 해오셨습니다. 송길한 작가(이하 송길한)_ 처음부터 영화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어. 영화를 좋아하고 그랬지만, 근데 나이 육십을 넘어서 어느 날 문득 생각해보니까 영화는 내게 적어도 운명이었구나, 그렇게 생각을 했어. 그전에는 늘 전전긍긍이었지. 여차하면 보따리 싸려고 하다 세월이 간 거지. 그때 한번 해볼 만하다, 하고 나를 붙들어 주신 게 임권택 감독님이었어. 서로 그런 것이 없었으면 떠났지, 그렇게 수많은 감독하고 한 건 아니지만. 나는 영화하고는 안 맞았거든. 생계형이었던 거지. 나는 생계형이 결코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엄밀히 말해 생계랑 상관없이 내가 모두 걸고 한번 써봐야지 하는 거랑은 다르거든. 생계형도 많이 썼지. 그건 서로 알아. 먹고 살아야지, 란 말이 안 나오고, 목숨까지는 아니어도 그 다음을 걸고 임 감독님이랑 같이 작업을 한 거여. < 피아골 > 정성일 _ 작가로서 영화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선생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영화는 어떤 작품들이었습니까? 송길한 _ 쥘리앙 뒤비비에부터 시작해야하는 얘기지. (고향) 전주라는 데가 군산 비행장이 바로 옆에 있어서 군인들에게 틀어줘야 하는 영화를 할리우드랑 프랑스 등지에서 많이 수급했어. 그걸 야매로 살짝 빼내가지고, 소위 ‘깡통극장’이라고 하는, 지붕이 깡통으로 되어 있고 낮은 나무의자가 있는 극장에서 봤었어.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뭔가 알만할 때가 고(등학교) 일, 이(학년)가 아닌가 싶어. 그때 한국영화 촬영장을 갔거든. 이강천 감독이 < 피아골 >, < 아리랑 >을 지리산, 전주에서 찍었다고. 참말로 그때만 해도 엉성스러웠고, (웃음) 그래도 소위 내로라, 하는 배우들이 6.25 전쟁 끝나고 오고갈 데가 없으니까, 한 무더기가 부산에 있었고 한 무더기가 전주에 있었거든. 그때 전주 극장에서 그들을 먹여 살렸어. 거기서 있던 것이 김진규 선생, 허장강 선생, 이예춘 선생, 그들을 다 거기서 만났던 거야. 아주 조그만 골목이 있는데, 그땐 배우인줄도 몰랐는데, 뭔가 분위기가 달랐어. 어느 날 이강천 감독이, 그러니까 원래 전주가 아니고 군산에 있던 양반이야. 이 양반이 군산에서 극장 간판 그렸는데 미술을 잘했어. 전주 백도 극장 홍보맨으로 와서 극장 간판을 그렸어. 그때 아직 잔류 공비가 있어가지고 민간 버스가 털리고 그랬었는데, 휴전이 53년도 7월 27일이었는데 그 이후에도 공비들이 산간에서 버스 스톱시키고 먹을 거 다 거둬가고 그럴 때였으니까. 도(道) 경찰국에서 반공의식을 길러야한다는 의도에서 영화제작을 한 거야. 그게 그 유명한 <피아골>이야. 요 며칠 전에도 국군방송에서 그걸 봤어. 그 시나리오를 나중에 영화인 되고나서 이강천 감독이 줘서 시나리오를 봤는데 지금 봐도 잘 쓴 시나리오야. 영화가 여건상 그걸 못 따라가서 그렇지 참 잘 쓴 시나리오야. 전라북도 경찰국 공보과장 김종환 씨가 썼는데, 그 양반이 소위 빨치산을 많이 다루고 현장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건 거짓말 없는 시나리오야. 그땐 몰랐어. 어느 땐가 돌아가신 노경희 씨가 김지미 씨를 붙잡고 <피아골>을 (다시 제작) 해볼 생각이 없냐, 했는데 나는 귀가 번쩍 뜨였지. 근데 그 양반이 돌아가셨어. 나는 그걸 좋게 생각하고 (제작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근데 그 무렵 패션에는 안 맞었어, 사실 (그때 제작을 하려고) 다루면 오히려 < 짝코 > 스타일이 되는 거였어. 빨치산이고, 적이다 공비다, 이런 반공 개념 말고. 그들이 거기서 싸우고 최후까지 버텨내고 그런 게 결국 인간이거든, 이게 나는 뭉클했던 거지. 영화로는 (크리스티앙-자크감독의) <싱고아라 Singoara>(1949) 그게 어려운 영화였어. 어릴 때부터 좋은 영화를 많이 접했었어. 아주 어렸을 때 본 채플린 영화 빼고는 고등학생 쯤 되어 본 것은 < 나의 청춘 마리안느 >였는데, 그 영화 땜에 잠도 잘 못자고 (웃음) 난 그때 왜 그렇게 조숙했나 몰라. 할리우드 영화보다는 프랑스 영화가 흥행성은 없어도 예술성이랄까 막연하나마 그게 월등히 차이난다는 것을 느꼈어. 이 차이가 중요한 거지. 영화판에 들어와서도 내게 암암리에 정신적 영향력을 줬을 거야. 내 감수성에 너무 맞았고 그때는 텔레비전도 없고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그때 꿈을 주고 판타지를 주고 했던 게 영화가 아니었을까. 정성일 _ 선생님 연배의 영화인들을 뵙고 같은 질문을 하면 대부분 할리우드 영화들, 특히 서부영화나 < 자전거 도둑 > 같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얘기하시는데 선생님은 프랑스 영화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게 참 인상적입니다. (웃음) 송길한 _ 난 프랑스 영화에 끌렸어. 물론 < 자전거 도둑 >이나 펠리니의 < 길 >이나 나도 다 재밌게 감동적으로 봤어. 여러 날 가슴 속에 생각하곤 했는데, 난 대사가 시끄럽고 그런지 이태리 영화보다 프랑스 영화가 훨씬 부드럽게 마음에 와 닿았어. 이태리 영화는 간단한 것도 왜 그렇게 시끄럽게 떠드는지, (웃음) 나는 조용하게 젖어 들어오는 것들이 훨씬 좋았어. 쥘리앙 뒤비비에는 시인이기도 하고.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본 채플린은 만화 개념이었고, 영화가 이런 것이었구나, 아, 죽이네, 그런 생각이 든 건 프랑스 영화였어. < 나의 청춘 마리안느 >는 나를 숙성시킨 영화였어. 소년단계에서 청년 단계까지, 상당한 영향력이야. 주인공 마리안느를 왜 그렇게 찾고 싶었던지.. (웃음) < 오발탄 > 정성일 _ 선생님이 영화 현장에 도착하기 전 한국영화는 1960년대 황금시대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세대마다 한국영화에 대한 전제랄까., 선입견이랄까, 그런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시나리오 작가가 되기 전 선생님에게 한국영화란 어떤 것이었습니까? 송길한 _ 유현목 감독의 < 오발탄 >을 보고 반했죠. 그게 이범선 의 소설도 좋았지만, 영상의 그 현실 감각이 너무 좋았다고. 아 이런 감독도 있었구나. 사실 유현목 감독을 흠모했어. 그때는 영화판에 들어 올라고 생각도 안했거든. 근데 그 뒤에 이 양반의 일련의 영화들은 그냥 그랬어. (잠시 생각) 한국영화 중에 특히 <오발탄>이 그렇게 좋았어. 그 리얼리즘도 좋았지만 그 속에 담긴 유현목 특유의 허무주의 같은 게 그때 감성에는 매우 맞았던 거 같아요. 정성일 _ 시나리오 작가가 되기 전에는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송길한 _ 학교를 다니다가 관두고, 거 참, 개인 사정이 거기 있었는데, 나는 청춘이나 이런 거랑 거리가 멀게 이십대를 보낸 거야, 그러다가 대한 석탄공사 시험에 합격을 해서 도계 광합소에서 한 삼년 석탄을 캤지, 근데 가만히 보니 아무래도 석탄을 캐기는 아까운지 소장이 나를 계장으로 앉히더라고. 그때 수입이 괜찮았어. 술 좋아하고 여자들 많고 거기가 아주 재미있는 데였어. 근데 거기 계속 있는 게 아닌 거 같아서 퇴직금 받아서 나와 버렸지. 서울에 다시 오니 힘들지. 중부시장가면 까대기라는 게 있었어. 쌀 한가마니를 어깨에 짊어지고 내리면 5원, 들어 올리면 10원. 그런 노동을 했어. 살아야 하니까. 짬이 생기면 시네마 코리아 알지? 조선일보 있는 데 있던. 동시 상영할 때 난 그때 거기서 정말 좋은 영화를 많이 봤어. 아침에 일찍 가. 그래서 하루 종일 앉아 있다가 저녁에 오고, 시원찮은 거 볼 때는 잠을 자기도 하고. 그렇게 지내다가 어느 날, 맨날 소비적으로 보기만 할 것인가 그래서 수첩에다 보기 좋았던 것, 인상적이었던 것, 대사가 쌈빡했던 것. 끄적 끄적 메모하면서 그걸 봤어 그게 나의 유일한 학교였어. 그러던 차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나리오 부문이 나오더라고. 근데 내가 무슨 텍스트가 있겠어, 탄광에서 서울 올라왔을 때 갈 데라고는 시네마 코리아뿐이 없는 거여. 한 씬에서 다음 씬으로 넘어가고, 거기서 디렉션이 움직이는 거고, 이 씬에는 뭔 얘기를 하는 것이고 가장 원시적인 거지. 그냥 무대뽀로 썼어. (웃음) 그때 돌아가신 오영진 선생님이 심사위원이셨어. 그런대로 심사평도 괜찮았어. 내용은 별 거 없고 프랑스 스타일의 러브 드라마였는데, 감각이나 그런 것이 씀씀이가 너무 아름답다고 뽑아주셨던 거죠. 그렇게 그 양반을 만나게 되고. 그 양반이 정치하느라고 무척 바빴는데, 시간 나면 토요일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당사(堂舍) 앞으로 와라, 그러면 거기 가서 얘기 듣고, 이 양반은 얘기해도 시나리오 가르쳐줄 정신은 없고. 그런데 사상계에 이 양반 작품이 실렸는데 아, 이거 장난 아니구나, 많이 배웠어. 당선작은 이상언 감독이 영화를 만들어서 당시 국도극장에 붙였는데 흥행은 부진했어요. 그때 당선작이 수준이 너무 높다고 한 단계만 낮춰서 신파로 만들어 달라는 거야, 그때 내가 학을 띠고 속으로 여기서 얼른 짐을 싸야겠다 했어. 정성일 _ 맨 처음 시나리오를 쓰실 때 영화를 본 것 말고는 배운 적이 없다고 하셨는데, 시나리오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양식이란 게 있지 않습니까, 이를테면 씬의 분류나 장면의 기술적 표기랄까, 그런 것들을 어떻게 배우셨습니까? 송길한 _ 영화보고 배웠지. 이달 말이 동아일보 마감이야. 그런데 문서화를 해야 하니까, 그래서 생각을 해본 거지, 씬은 도대체 어떻게 되고. 고등학교인가 중학교인가, 교과서에 시나리오 단편 공부한 게 생각나서. 헌책방을 더듬어 갖고 그걸 다시 찾아봤어. 그게 유일한 교재였어. 그리고 나서 시네마코리아에서 본 것을 그 이튿날 또 종일 보고, 며칠 또 종일 보고, 내가 쓴 걸 그거하고 씬이나 지문을 맞춰 보는 거여. 씬이 구분이 되잖아. 요즘과 같이 커트로 갈 때도 아니고. 내가 쓰고 싶은 데로 썼는데 됐어. 그런 것이 오히려 오영진 선생한테 더 좋아 보였나봐. 실험적이고, 불란서 감각이 있는 것처럼 보였나봐. 내가 속았는지 그 양반이 속았는지 모르지(웃음) 정성일 _ 그 당시 문학은 모든 예술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시나리오 작가는 결국 이야기꾼이기도 한 건데, 그때 선생님께 영향을 미쳤었던 소설가 혹은 소설이 있었다면 어떤 것이었습니까? 송길한 _ 당연히 최인훈의 <광장>이지. 딱 하나야. 두 개도 필요 없어. 나는 깜짝 놀랐어. 이런 작가가 우리나라에도 있는가. 그때 의식 있는 학생들에게는 센세이셔널 했지. 4.19 직후니까. 반짝 자유로울 때 그 찬스에 잡지에 실린 거야. 그러고 나서 바로 5.16으로 아작이 났지만. 그러니 참 우리 삶이 험준해. < 흑조 > 정성일 _ 죄송하게도 선생님의 당선작 < 흑조 >가 영화화 된 작품을 보지 못해서 그저 줄거리로 짐작을 해보면 줄거리는 불륜이지만 섬에 갇혀 벌어지는 이야기의 상황이랄까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느낌은 부조리극과 실존주의적 질문을 떠올리게 합니다만.... 송길한 _ 당연하지. 칼 마르크스, 이런 거 집어치우고 나면 가는 게 실존주의니까. 그리고 사르트르가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이 한마디에 우리는 완전히 갔어. 살아 실존하는 것이 우리가 만들어내는 문학이나 기타 등등 이런 거에 앞서서, 아니 그보다 훨씬 더 큰 윤리나 도덕보다도 더 앞에 서서 우선 살고, 살아 숨 쉬고 보자는 거지. 이건 뭐, 굉장히 대단했지. 그래서 내게 영향을 줬던 것은 오히려 카뮈의 <이방인>의 뫼르소였지. 근데 오랜 기간 동안 이런 걸 못하고 영화 하니까 재미도 없고, 그렇다고 한국영화가 그때 장사가 잘 된 것도 아니고, 긴 시간 힘들었던 거지. 정성일 _ < 흑조 >를 쓰면서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영화는 어떤 작품이었습니까? 송길한 _ 그 뒤에 본 것인데 클로드 를르슈의 < 남과 여 >를 볼 때, 아 이렇게 못 만드는가? 부러워했던 기억이 나요. 난 요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젊은 친구들의 창작과정이 불만이야. 그냥 머리만 써. 정말로 욕구하고 피나게 갈구하는 게 없으니까 안 되는 거다. 그게 뭔지 한번 찾아보고 생각해봐라, 그때는 그런 마음으로 시나리오를 쓴 것 같아. 정성일 _ 시나리오 작가의 운명 중의 하나는 누가 자기 작품을 연출하느냐는 문제가 있습니다. 어쩌면 처음 등단하신 무렵에는 임 감독님을 만나지 않는 쪽이 다행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때 감독님은 다찌마와리 액션영화, 만주 웨스턴 영화. 무국적 무협영화를 만들면서, 지금도 그때 시절 영화가 모두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늘 말씀하고 계시니까요. 송길한 _ 맞어. 감독님도 그런 소리했어. 기억 남는 것은 < 애꾸눈 박 >뿐이여. 그때에도 내가 볼 때 이 작품은 꽉 짜여있고 좋았다고 하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시더라구. (웃음) 정성일 _ 처음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을 때 당시에 한국영화에서 활동 중인 감독 중에서 선생님의 작품을 이 사람이 연출하면 참 좋겠다, 하고 염두에 둔 감독이 있었습니까? 송길한 _ 없었어. 그게 유일하게 그나마 눈에 띠었던 것이 유현목 감독이었지. 신상옥, 한형모, 이 분들은 흥행은 됐지만 내가 하고 싶은 세계와는 멀었고, 그나마 얘기를 하면 좀 소통을 할 수 있는 건, 그래서 내가 작가가 되고 나서 우연히 유현목 감독을 만났는데, 둘이서 술도 먹고 이러고, 지금은 알겠는데, 그때는 이 양반이 뭔 얘기를 하는지 몰랐어. 자기하고 하나 해볼 생각이 없냐 그러는데, 이게 판타지인지 뭔지 모를 소릴 하는 거야. 어느 날 불쑥 나를 만나더니 <삼일로 왕>이라는 시나리오를 딱 주고, 그때 삼일빌딩이 생길 때거든. 그게 삼일빌딩 건축주의 입지전을 쓴 시나리오야. 그게 도저히 마음에 안 맞는다고 내게 각색을 해달라는 얘기야. 그런 얘기는 쓴 사람한테 가서 얘기하시죠. 건축주를 하늘같이 모시자는 얘긴데 < 오발탄 > 정신은 다 어디 갔냐고 내가 막 항의하고 자리를 떴어. 철이 없었지.(웃음) 내가 그때 상당히 사나웠어. (웃음) < 만추 > 정성일 _ 그 당시 감독들 중에서 김기영 감독이나 이만희 감독은 어땠습니까? 이를테면 < 하녀 >나 < 만추 >는 어른이 된 다음에 본 세대이기도 하신데요. 송길한 _ 두 개는 다 좋았지. 난 이만희 감독 작품 중에 < 만추 >에 빡 갔지. (웃음) 이 소재가 이만희 감독한테 딱 맞은 거야. (< 7인의 여포로 > 때문에) 반공법에 걸려 감방에 들어갔다가 나왔는데 같은 감방에 있었던 사람이 휴가를 얻어 촬영현장에 있는 이만희를 만나러 온 거야. “너 언제 나왔냐” 그러니까 “석방이 아니라 휴가 나왔다.” 이게 포인트가 됐대요. 이게 정말 중요한 얘기여.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야. 이만희 감독이니까 그 생각을 한 거지. 이걸 여자로 바꾸면 어떨까 그림 나오잖아. 대단한 거여. 그 뒤에 < 삼포 가는 길 >도 처음은 괜찮았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힘이 빠져서 좀 그냥 그랬고. 정성일 _ 선생님이 등단했을 때 시기가 안 좋았습니다. 정확하게 그때부터 한국영화가 이중 검열과 외화수입을 위한 스크린 쿼터제로 긴 시간 동안 내리막이었습니다. 아마도 매일 매일이 선생님께 실망의 시기가 되었을 텐데, 그럼에도 임권택 감독님을 만나기 전 십년의 시간 동안 영화를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물러 계셨습니다. 영화의 어떤 매력이 선생님을 실망 속에서도 붙잡아두었나요? 송길한 _ 내가 떠난다고 해도 세상에서 내가 딱히 할 만한 일이 안 떠올랐어요. 게다가 그 시절에는 내 노동에 대한 가치가 있고 대가가 있고 해야 할 텐데 그런 게 너무 없었어. 그 무렵에 찬스만 있으면 떠나고 싶었어. 더 볼 것이 없다. 예술이고 지랄이고 아무것도 없다. 완전히 공황 상태에다가 일종의 절망. 그래도 하자고 찾아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때가 참말로 웃기는 시대로 가잖아. 저급한 멜로드라마 아니면 얄개시리즈까지. 또 여자 시리즈가 십 년 동안 판을 쳤어. 나도 여자 시리즈 많이 썼어. ‘여자’자 안 붙으면 간판을 못 걸 정도였으니까. < 순자야 > 정성일 _ (웃음) 작품 제목을 찾아보니 많이 쓰셨습니다. < 순자야 >랄까... 송길한 _ (정색을 하며) 그 중에 < 순자야 >는 괜찮았어요. 그건 하길종 , 최인호 가 보고 깜짝 놀란 작품이야. 원래 그 제목이 <순자야 문 열어라>야. 그게 전두환 부인한테 문열어라하니 시나리오 검열에서 가만있었겠어, ‘문 열어라’를 빼고 그냥 <순자야>로 간 거지. 그때 한진에서 하길종이 < 한네의 승천 >을 하려고 했던가, 그랬는데 최인호 작가랑 제목만 보고 킥킥 웃은 거야. 근데 읽어보니 그게 아닌 거야. 그걸 보고 최인호가 깜짝 놀랐지. 형을 달리 보게 되었다고. 나도 재밌게 썼고. 그 내용이 트랜지스터 라디오 월부장사를 신성일 이가 하고 정윤희 가 순자를 했으면 더 재밌었을 텐데 (신성일, 이영옥 주연) 미스캐스트에다 감독이 처음 보는 사람이었어. 영화 나온 거 보니까 부끄럽더라구. 감독이 운명이란 이야기를 했잖아. 아무리 잘 써도 최종집행은 감독이 하니까 감독이랑 소통이 안 되면 안 되잖아, 그때 짐 싸려고 하는데 삼영필림에서 (기획실장을 하라고) 나를 부른 거야. 그때 월급도 꽤 빵빵했지. 작품도 하고 싶은 거 쓰고 니가 해라. 이렇게 제의가 온 것이지. 거기서 제일 처음 하고 싶어 한 게 임권택 감독이야. 회사에서 전폭적인 기획권한을 내게 줬으니까. 그때 레퍼토리가 뭐냐. 맨 처음 만난 게 김원일의 <노을>이었어. <짝코>가 신(新) 빨치산 얘기라면 그것은 원조 빨치, 구(舊) 빨치산 얘기였어. 어떻게 해방직후 빨치가 태어났는가, 그걸 찍으려면 세트를 다 지어야 하는데, 몇 번이나 강대진 사장 옆구리 찔러봐도 대꾸가 없어.(웃음) 임 감독님한테 소설을 한번 읽어보라고 했어. 근데 읽고 오더니 이런 걸 영화하자는 사람이 다 있네, 이러는 거야. 긴 소리 짧은 소리 할 거 없고. 회사가 이 세트 지어줄 거 같아요? 나보고 그래. 그걸 맨 처음 하려고 했었어. 판이 무너지려고 했었는데 삼영필름 부속 영화사에서 임 감독님이랑 나를 부른 거야. 소위 탱크 부대 얘기였지. 탱크 부대를 찾아갔는데 안기부, 보안사 요원들이 따라붙는 거여. 탱크가 뒤집어져 폭파하는 얘긴데, 소대장이 부하들을 살려내고 탱크가 폭발하는 바람에 장렬하게 죽었다는 신문기사인데 이건 반공영화나 우수영화상감이지, 우린 재미가 없었어. 그래도 일단 전방에 가봤지. 이 이야기는 소대장과 탱크 부대원간의 병영 생활이 어떻게 얽혀있는가가 키를 갖고 있으니까. 그래서 내가 병영에서 머무르려고 했는데... 택도 없어. 완전 자포자기 하고 오다가 내가 < 짝코 > 얘기를 넌지시 했지. 여관방에 둘이 들어가서 소주를 한 잔씩 한 거여. 30년 동안 잡으러 댕기는 얘기인데 우리가 하자. 그렇게 시작된 거여. 정성일 _ 선생님께서 임권택 이라는 이름에 관심을 갖고 보기 시작한 첫 번째 영화는 무엇이었습니까? 송길한 _ < 잡초 >는 기억에서 좀 멀어지고 그렇게 와 닿지는 않더라고. 내가 깜짝 놀랐던 거는 그 < 족보 >. 아주 좋았어요. 주선태 로 상정되는 설씨 집안의 비극은 감독님의 직간접적인 체험이 없다면 그렇듯 생생하게 표현될 수 없다고 느꼈어요. 일제시대를 살아내면서 멸망하는 나라를 표현하는데 라스트의 만장행렬과 새파란 보리 싹이 돋아나는 황토 언덕을 보는데, 어휴 뭉클하게 하는 거요. 그리고 < 깃발 없는 기수 >, 해방 무렵에 전기부족으로 전봇대 불이 꺼졌다 들어왔다 하는 장면을 보면 정말 소품을 다루는 대가야. 그런 것들이 다 빈틈없고, 특히 선우휘의 원작 소설에서 간결하게 넘어간 대목들, 거기가 영화를 하면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 대목들이 있는데 거기서 추가한 부분들이 정말 빛나는 거야. 단순히 영화를 본 게 아니라 괄목할만한 발견이었죠. 임 감독님의 세심하고 사려 깊은 연출력에 대해... 정성일 _ 임권택 감독님을 사람으로서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은 어떠셨어요? 송길한 _ 뭐랄까. 눈이 빛나고, 순발력이 뛰어난 건 이미 소문이 나 있었지만, 안으로 많은 얘기를 간직한 분 같았어요. 내가 임 감독님을 굉장히 순수하게 본 거는, 언젠가 대포집에서 내게 그러더라고. 송 작가 나 그렇게 순진한 사람 아니요, (웃음) 그때 알아본 거지, 임권택 감독에게 사실 어느 시간이 제일 기가 막히게 좋았냐면 제도권의 시간이 아닐까 싶어요. 이 양반은 부담이 없잖아. 이때가 최고로 좋았던 때고 충만한 때인 거지. 우수영화만 찍으면 되니까 얼마나 좋아. 우선 상업성에서 벗어나는 것만 해도 살판나는 거지. 이거 아는 사람 별로 없어. 그때 이 양반이 정리하고 앞으로 가야하고 침잠되고 그러면서 자기 성찰의 시간이 딱 온 거야. 그거 낭비한 사람 무지 많거든. 난 그걸 굉장히 대단하게 봐. 좌충우돌하며 깨달은 것도 있지만 정돈해가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유용하게 가진 사람은 별로 없었어. 정성일 _ 그래서 그 시간에 임권택 감독님만 살아남은 거군요? 송길한 _ 다 좋았잖아. 작품이 나쁜 것 없었잖아. 박스오피스에서 벗어나올 수 있었다는 건 정말 행복한 거지. 거기서 자기 하고 싶은 걸 한다고 생각해봐. 그걸 또 백 프로 활용한 것도 무서운 거야. 유일하게 살아남았잖아. < 짝코 > 정성일 _ 선생님과 처음 만난 임권택 감독의 영화는 < 짝코 >입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짝코>는 어떤 영화입니까? 송길한 _ (잠시 생각) 일단은 획기적이었고, 그때 소위 흐름이란 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 짝코 >에 대한 시점을 사람을 위한 내면적인 측면(에 두고 보면), 영화상에는 그렇게 안 나타나 보인다고 하더라도 서브텍스트가 굉장히 좋은 영화야. 내면을 읽어나간 거요. 형식적으로 플래시백은 늘 있는 것이지만, 플래시백이 현재진행형에 들락날락하면서도 극을 추동할 수 있는 힘을 갖느냐, 안 갖느냐, 그게 문젠데 묘하게도 힘을 받는 거요. 처음에는 다들 이상하다 생각했지. 그때는 영화진흥공사에서 어떤 영화든지 영화인들을 모아놓고 시사를 했어. <짝코>가 상영되는 동안 임 감독님이랑 나랑 뒤에 서있었어. 완전히 사람들이 빨린 거야. 송길한 이 술만 마시고 하더니 다시 봤다고 하더라고. 임 감독님도 표정을 보니 흐뭇해하더라고. 그때 플래시백이 참 많았지만 딱 줄자로 잰 것처럼 절묘하게 들어갔어. 플래시백은 내면의 흐름 이런 걸 모르면 안 돼. 그것이 살아있다는 거지. 지난 일을 생각하게 함으로써 더 열 받게 하고 정서적으로 파란(波瀾)을 만들어내는 것. 거기서 서브텍스트가 들어가야 더 발전을 하거든. 그게 굉장한 생명력이야. 나도 그렇게 될 줄은 몰랐지. 영화를 보고서야 알았어. 임 감독님 말마따나 영화가 흐르는 방향, 영화가 가고자 하는 쪽으로 가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게 그 말이여. 겉보기에는 그저 소박해보이지만 그 양반의 철학이 제일 맞는 철학이여. 영화도 생물이죠. 가고 싶은 쪽이 있다고 그런데 우리가 작위적으로 만들어서 미끈하게 못 가잖아.. 굉장히 단순하고 철학적인 얘기야. 영화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 부단히 그 길만 천착해 온 게 임 감독님이 지금까지 작업을 이뤄낸 저력인거 같아. 크게 봐서. 정성일 _ < 짝코 >를 작업할 때가 등단한지 10년이 되었을 때입니다. 그 전까지 많은 감독들과 작업을 했습니다. 임권택 감독님은, 이 사람은 이 점은 좀 다르구나, 느꼈던 점은 무엇이었습니까? 송길한 _ 치밀한 준비성! < 짝코 >를 나하고 얘기하면서도, 앉았다 누웠다 뒹굴뒹굴하면서 얘기한 거 같아도 며칠 준비한 거여. 나한테 준비한 메시지가. 어떤 에피소드를 갖고 웃다가도 자기 절제, 흐트러질까봐서 우리 너무 웃는 거 아니여? 그럴 때 나는 매력을 느꼈어. 그때 작가인 나도 경계를 하게 되는 거야. 우리가 집필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에피소드 얘기하면서 웃는 건 당연한 건데, 거기까지 절제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 만만치 않네, 굉장하네. 무서움 같은 것이 느껴졌어. 정성일 _ 임권택 감독님이 < 짝코 >를 쓰기 전에 선생님에게 요구한 점이 있었습니까? 송길한 _ 없었어. 내가 초고를 썼지. 나는 다분히 그때 그 시절 검열을 솔찬히 의식했었어. 거기서 풀어지게 된 것, 내가 기뻤던 것이 뭐냐면,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는 인간으로 놔버리니까 그때부터 이야기가 재미있어지기 시작한 거야. 당신은 그 작품 준비하고, 나는 작품을 지속적으로 쓰고, 그리고 이삼일 만에 만나서 쓴 거 보여주면 군소리가 없었어. 그 양반 특징 중 하나가 아주 기분 좋고, 그 작품이 마음에 들면 아무 소리 없는 거여. 원고지를 낚아채듯이 확 갖고 없어져버려. 수고했고 그런 소리도 없어. 본인도 벅차서 그런 거겠지. 나는 그게 작가와 감독으로써 최고 희열이라고 생각해. 정성일 _ 처음 작업하셨을 때부터 표현이 그렇지만 서로 궁합이 잘 맞은 거군요. 송길한 _ 처음부터 잘 맞았지. 왜냐하면 살아온 배경이랄지 피차간에 개인적 편차가 있다고 해도, 지금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에서 맞아 떨어지고, 살아있는 에피소드들이 둘 다 있거든. 지금까지 은밀하게 다져놓은 것들이 서로에게서 막 나오기 시작했으니까. 정성일 _ < 짝코 >는 플래시백이 몹시 복잡하게 진행됩니다. 시간을 압축시킬 수도 있지만 자칫하면 이야기 안의 긴 시간 때문에 리듬이 흐트러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구성을 결정했을 때 어떤 위기감도 느꼈을 것 같습니다. 송길한 _ 당연하죠. 그런데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삼십 년이라는 긴 세월을 어떻게 제한된 시간에 구겨 넣겠어. 정성일 _ 한편으로는 이전에 해 오셨던 작법에서 시행착오와 함께 훈련을 해 온 방법이 아니라 < 짝코 >에서 거의 처음 쓰다시피 한 작법이 아닙니까? 송길한 _ 그건 둘이 다 마찬가지야. 그래서 어느 정도 모험성도 있었다고 봐. 구성상도 그렇고 이야기도. 여기엔 그때의 냉혹한 검열에 대해 모험이 있었어. 그런데 검열에서 딱 핵심만 잘라냈어. 그들이 한수 위지. 그런 다음에 반공영화상도 두 번이나 타고. 우리가 그리고자 하는 대상은 반공영화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여. 가만 두면 그럭저럭 살 사람들을, 이 많은 햇수 내내 둘이 도망가고 잡게 만들었냐는 거지. 이 두 사람의 긴 기간의 삶을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궁극적으로 무화(無化)가 되어버리는 이 허망한 삶, 이것을 안 그릴 수 없죠. 정성일 _ 시나리오를 쓰시면서 선생님만의 원칙이 있습니까? 이를테면 구로사와 아키라의 경우 무조건 엔딩을 먼저 쓴다고 합니다. 그래야만 영화가 어떻게 흘러가도 엔딩을 향해 달려가서 길을 잃지 않으니까. 선생님만이 갖고 있는 그런 습관이랄까, 원칙이 있습니까? 송길한 _ 나는 엔딩을 설정하지만 절대적이지 않아. 변화 가능하다. 가변성을 두고. 엔딩을 정해두면 목적성이 있어서 좀 스피디하게 갈 수 있어도 이게 휘어지면 엉뚱하게 휘어진단 말이야. 언제든지 가변성이 있되 일차적으로는 엔딩이 있지. 그게 < 길소뜸 >같은 경우지. 이게 말하자면 글을 꾸리기 위한 나름의 계산이지. 이야기를 어떤 구조로 가느냐. 우리는 그냥 가보자, 엔딩을 설정하지 말자. 일단 글이 흘러가고자 하는 방향대로 따르되 많은 고민을 했어. 완성을 하고도. 우리 조선 사람으로서는 에미들이 갖고 있는 멜로드라마적인 속성이 있잖아. 어떻게 자식을 버려. 그래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하이라이트지. 그렇게 통일을 본거지. 정성일 _ 선생님은 시나리오를 쓰기 전에 어느 정도 쓰고자하는 얘기의 배경을 취재하시는 지요? 이를테면 < 짝코 >에서 두 사람의 삶에 대해 배경이 되는 갱생원이란 장소는 범인들은 쉽게 알기 힘든 세계이지 않습니까? < 만다라 >의 산사 안의 스님들의 세계도 잘 모르는 세계고. 또 < 티켓 >에서 살아가는 여자들의 일상생활도 그렇고... 송길한 _ 그렇지. 나는 시나리오 쓸 때 절대 머리로 쓰지 마라 이거지. 발로 써라 가슴으로 써라. 가보지도 않고 비슷한 삶을 산 사람을 만나보지도 않고. 니 멋대로 규정화하고 작위적인 것을 쓰지 마라. 정성일 _ 배경이 되는 것을 늘 취재하세요? 송길한 _ 그건 필연적으로 하는 거지. < 짝코 >의 갱생원도 원래 갱생원이 아니여. 그냥 행려병자 병원이야. 이것을 회사에 얘기해서 서울시에 질문하니까 그런 사람들을 모아둔 데가 있어. 거기를 감독님이랑 나랑 갔어. 가보니까 완전 깡패 소굴이야. 대장은 고가의 외제 오토바이도 갖고 있고. 실제로 가보니까. 그리고 집도 절도 없고 이판 사판으로 사는 사람들은 다루기가 힘들잖아. 실장 이런 놈들은 주먹도 세고. 그리고 아마 갱생원 원장하고 커넥션 같은 다른 것도 있는 거 같아. 우리 작품이 그걸 얘기하려는 게 아니어서 관심을 껐는데 실제는 그런 상황이었지. 근데 그런 것은 다르지. <짝코>에서 군 내무반 같은 실내는 우리가 설정해야지. 왜냐면 갱생원 거기는 다 온돌방이거든. 카메라 워킹도 안 되고. 노숙자들이 밥만 기다리고 앉아있는데 극을 어떻게 진행하겠어. 일단 메인 세팅이 될 수 있는 곳은 다 가서 헌팅 해야지. 그걸 그러려니 하고 머리로만 하려고 하면 안 되지. 인물들의 삶의 터전이고 생활 현장인데. < 짝코 >의 최윤석 < 짝코 >의 김희라 정성일 _ < 짝코 >를 보고 있으면 두 인물이 연기를 통해 영화에서 구현되는 것도 그렇지만 시나리오에서도 두 인물이 주는 느낌이 너무 생생해서 실제 모델이 있는 게 아닌가 할 정도였습니다. 생생한 생기를 불어넣은 인물들을 만들어내기 위한 특별한 작법이 있는 건지요? 송길한 _ 특별한 작법이 있는 건 아니고, 한국전쟁을 통과하면서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나도 많이 봤고, 임 감독님도 많이 봤어. 하나는 음흉하고 교활하지. 짝코 같은 경우에. 이 사람이 원래 그런 사람은 아니지. 엄마 만나려고 고향집에 가는 거 보면 소년인데, 험한 세상 살다보니 그렇게 음흉해지고 교활해진 거여. 또 송기열 같은 경우는 오히려 심플하면서도 올곧았거든. 그러니까 편집증이 생긴 거야. 자기가 안했는데 했다고 하니까. 그건 평생을 갈 수밖에 없어. 도망 다니는 놈과 잡으러 다니는 놈은 톰과 제리가 되는 거고 이들이 갖고 있는 갈등이 정서적인 원한과 회한의 앙금이고 그러니 상당히 긴장이 살 수밖에 없지. 인물들이 뭘 해도 다 의미가 있는 것이고. 헛소리를 할 짬이 없지. 그러니 캐릭터가 살아나지. 정성일 _ 시나리오에서 어떤 인물을 만들어내기는 하지만 영화에서 그걸 연기하는 것은 뼈와 살을 가진 배우이기 때문에 실제 누가 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느낌을 만들어냅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구체적인 배우를 염두에 둘 때가 있습니까? 송길한 _ 나는 천지차이라고 봐. 제일 처음에 짝코 는 김희라 를 찍어놨어. 송기열을 하려고 보니, 곽지균 이가 젊은 시절의 백윤식 을 데리고 왔어. 감독님이 나를 이렇게 보더라고. (웃음) 이게 소위 섹스어필한 데가 없어. 근데 최윤석 은 섹시한 데가 있어. 그때 텔레비전에선 알랭 들롱으로 막 떴을 때거든. 이놈을 짝코랑 비교하면 집요한 성격이 확 보이지. (잠시 생각) 시나리오를 쓸 때 미리 생각할 수도 있지. 하지만 대부분 주인공은 상정이 돼. 감독님도 갖고 있고 나도 비슷하고. 뭐 누구라고 딱 지칭하고 거기에 맞출 수는 없는 거고. 시나리오 쓸 때랑 영화 캐릭터랑 편차가 많이 컸지. 김지미 랑 < 길소뜸 > 할 때도, 우리가 이 캐릭터를 밟아버리자. 아예 아작 내는 방향으로 가자했어. 김지미 씨가 쌓아온 기성 이미지가 있잖아. 이거 그대로 가져갔다가는 우리 셋 다 죽는 거지. 감독도 죽고 나도 죽고 배우도 죽고 영화도 죽고. 그러니까 그 얘기를 임 감독님이 나한테 가끔 해. < 잡초 > 때 김지미 보고 이기적인 에미의 모습을 한번 하라는데 죽어도 못하겠다고 했대. 그런데 결국에 이기적인 에미의 모습을 <길소뜸>의 화영에서 결국 한 거지. 그걸 임 감독이 굉장히 깊이 생각하고 고맙게 생각하더라고. <잡초>때는 그것까지는 못하겠다고 했는데 김지미가 <길소뜸>에서는 했거든. 정성일 _ 디테일에 관한 질문입니다. < 짝코 >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의 하나가 짝코가 지리산 토벌대에서 쫓기다가 점순이 손을 잡고 언덕에서 뛰어내릴 때 슬로우 모션으로 화면이 바뀌면서 김영동 의 음악이 깔리는 대목입니다. 제 질문은, 이 장면을 시나리오에서 찾아보니 슬로우 모션을 지문으로 써놓은 것입니다. ( S#_39. 지리산 계곡. 포화 속에 도망쳐 오는 짝코와 점순. 공비들도 뿔뿔이 도망쳐간다. 사방에 터지는 포탄과 총소리. 계속 달리고 있는 짝코와 점순. 앞서 도망치던 공비 하나가 총을 맞고 나뒹군다. 쫙 깔려 포위하고 있던 전경대원들이 일제히 사격한다. 너울거리듯 도망치고 도망치는 짝코와 점순의 모습이 슬로우 모션으로 계속되다가 멎어서면 더벅머리의 공비 하나가 두 사람 앞에 다가와 선다) 이건 연출의 권리라는 게 제 생각인데, 임권택 감독님과의 작업에서 이런 대목들은 미리 이야기를 나누신 것인가요? 송길한 _ 그것은 내가 썼을 수도 있어. 왜 그러냐면 이건 절박한 상황이라고. 슬로우 모션 효과가 뭐여, 발이 땅에서 안 떨어지는 거잖아. 사랑한 여자가 임신해서 데리고 도망가야 하는데 그게 우리에게도 안타까움이 있어야 되잖아. 막 쏘아대고 있는데. 모든 빨치산이 다 그랬을 거야. 급박할 때일수록 몸은 마음을 따라가 주지 않는 게 사람 아닌가? 아마 나는 그런 감정으로 썼을 거야. 하지만 나는 그런 (촬영) 부분에 일체 개입을 안 해. 그건 시나리오 작가가 할 일이 아니야. 감독이 할일이지. 그리고 임 감독은 절대 나에게 콘티에 대해 귀뜸 안 해. 나는 촬영현장을 거의 안 빠지고 갔거든. 그 장면을 슬로우 모션으로 한다고 하더라고. 당연히 난 좋았지. 말을 나누거나 그러진 않았어. 그래도 서로 아니까. 그리고 감독님이 검열관이었어. 며칠 만에 와서 보고 기분 좋으면 휙 나가고. < 짝코 >같은 경우는 시나리오 손 한번 안대고 그냥 찍었다고. 그건 이게 유일한 시나리오야. 그만큼 집필 전 사전협의가 충분했던 거죠. 정성일 _ 방에서 끝나지 않고 촬영 현장까지 쫓아갔다고 하셨는데, < 짝코 > 이전에도 그러셨나요? 송길한 _ 안 그랬어요. 어떻게 찍고 있나 우선 그것도 궁금했고, 어느 날은 현장에 갔는데, 임 감독이 나보고 넌지시 그러는 거여 “어이, 자기 감독 하려고 그러지” 대답을 했지. “걱정하지 마세요. 감독 안 해요. 이것, 시나리오 하나만으로도 가랑이가 찢어지려는데” 임 감독님 입장에서는 자기를 알고 그렇게 쉽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작가가 어디 쉽냐고. 그리고 작가가 현장에 있나 없나, 는 실제적으로 큰 차이가 있어. 유명한 얘기인데 가령 < 만다라 >때 후시 작업할 때 녹음실에 보니까 찍힌 게 녹음이 나온 거여. 지산이 “나 같은 짐승도 제도를 해주고”하는 장면이 있는데 ‘짐승’은 아닌 거여. ‘짐승’을 영어 번역하면 ‘애니멀’인데 여기서는 중생(衆生)이지. 근데 당시 시나리오를 인쇄하던 <영문사>에서 타자를 잘못 친 거야. 아무리 자기를 낮춘다고 해도 짐승은 아닌 거지. 그런데 그러려면 녹음을 새로 해야 하는데 녹음실에서 누가 좋아 하겠냐고. 그래도 바르게 가야지. 단어 하나지만 엄청 큰 차이가 있어. 그리고 안성기 와 함께 수학했던 도반 수관이 손가락을 불사를 때 인상만 쓰고 있는 거여. “감독님 지가 도통한 놈이 아닌데, 손가락에 불이 닿았는데 이마빡에 땀도 안나요?” “맞어. 땀 나야해…” (웃음) 작가는 그런 조그만 한 것들도 구체적으로 알고 있으니까, 애정을 갖고 또 정확하게 봐주니까. 임권택 감독하고 작업할 때는 거진 현장에 있었어. 정성일 _ 임권택 감독님과 < 짝코 >를 처음 작업할 때 가장 좋았던 점은 무엇입니까? 송길한 _ 둘이 죽이 맞는 것. 시대적 배경이나 얘기하는 것들이 착착 앵기니까. (웃음) 감독님이 고등학교 삼학년이면 내 나이는 초등학교 졸업할 때거든, 여섯 살 차이니까. 지금 청소년시절에서 청년단계로 갈 때가 감독님이었다면 난 소년이었으니까. 그때가 전쟁이라는 시국이어서 감독님도 나도 굉장히 민감했거든. 그런 과거의 시절이 분출이 되는 지점이 공유되니까 굉장히 좋았지. 하여튼 둘이 많이 웃었어. 정성일 _ 그러면 첫 번째 작업을 하면서 특별히 힘들었던 점은 무엇입니까? 송길한 _ 특별히 힘들었던 점은 없었어. 해야 할 얘기를 하고 있고, 해야 할 감독과 같이 하고 있다는 게 더 이상 좋을 수 없었기 때문에, 무슨 얘기도 두 번 얘기할 필요 없이 한 번에 거두절미하고 통하니까 얼마나 해피한 거겠어. 정성일 _ 제가 임권택 감독님을 1987년에 인터뷰하면서 외람된 질문이지만 “감독님, 이제까지 찍은 모든 영화중 한 번 더 다시 찍으라고 한다면 어떤 영화입니까”라고 질문 드리니 “< 짝코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어떤 점이 두 분에게 제일 아쉬웠습니까? 송길한 _ 많이 아쉽지. 우선 필름도 싼 이스트만 컬러인데 게다가 불량품이었고, 근자에 다시 한 번 보니까 내가 손대고 싶은 부분도 있고, 아마 감독님도 더 찍을 수 있는 부분도 있고, 보완해야할 부분이 꽤 있었어요. 정성일 _ 기술적인 부분들 말고 작품 내적인 부분이 있다면 무엇이 아쉬웠습니까? 송길한 _ 내적인 부분을 보면, (잠시 생각) 본인이 리메이크하려고 했다가 부질없다고 생각했다고 하는 거는 지금 내용에서 크게 상황이 바뀔 수는 없다는 거지. 외면을 매끈하게 더 근사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원천적인 소스를 바꿀 수 없는 거지. 그때가 작품이 없어서 궁핍할 때가 아니었거든. 어느 날, 동숭로라고 생각되는데, 거기서 술을 먹는데 < 짝코 >를 다시 만들어보자는 그 얘기를 하는 거야. ''''''''좋지요'''''''' 나도 그 생각을 했거든. 한참 시간이 지났는데 소리가 없어. 그리고 서로 해야 하는 작품이 있었고... 임권택 감독님은 본인이 프로로써 견지하고 살아왔고, 부단히 준비하고 노력하면서 살아온 것이 충무로 판에서 살아남은 비결이기도 했지만, 내가 보기에 감독님은 그래. 뒤늦었지만, 내 결론은 천재였어. 적어도 스토리텔링에 대해서는 천재였어. 존재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미스터리를 심도 있게 그려내는 스토리텔링의 달인이기도 하고, 나는 그 양반을 얘기하라면 이제 그것밖에 안남아. 작가로써 상당한 시간을 같이 겪었고, 떨어져서 쳐다보기도 했지만, 예찬이 아니라 임권택 감독님에 대해 냉정하게 말하더라도 달인이고 천재였어. 생각해봐. 아니면 백편 넘는 작품을 할 수 있겠어요. 그것도 서로 다른 소재를 소화해 내다니 놀라울 따름이죠. < 우상의 눈물 > 정성일 _ 다음 작품은 < 우상의 눈물 >입니다. 전상국 작가의 원작에 먼저 끌린 것은 두 분 중 누구입니까? 송길한 _ 감독님은 다음 작품이 준비되어 있어야 안심이 되는 분 같아요. 아까 언급했던 준비성! 하루는 나한테 < 우상의 눈물 >이라고 읽어봤어, 그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 단편을 전상국씨 만나서 판권을 사왔어. <우상의 눈물>과 <돼지새끼들의 울음> 단편 두 개를 합쳤어. 주인공(기표)는 낙제해 꿇었지만 동(同)학년으로 여대생이 된 애인을 설정하자. 너무 남자 애들만 나오니까. 그렇게 하고 간 거여. 정성일 _ < 우상의 눈물 >에서부터 임권택 감독님과 정일성 촬영감독님, 그리고 선생님, 어쩌면 1980년대 한국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팀워크가 갖춰졌습니다. 정일성 촬영감독에게 가장 높이 산 것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송길한 _ 임 감독하고는 < 신궁 >에서 둘이 이미 만났어. 일단은 풍광이었지. < 만다라 >에서 이게 특히 중요했는데 이 영화는 풍광이 없으면 안 되는 영화니까. 너무 관념적인 게 많으니까. 사토 다다오 평론가한테 <만다라> 알겠냐? 물어보니 안다는 거야. 표정이나 언어 리듬이나 풍광이나 백그라운드에 가진 영상들을 통해 감은 잡혔겠지. 관념 투성이의 그 언어들을 어떻게 알겠어? 어쨌든 <만다라>에선 풍광이 인물들의 심상을 많이 반영했지요. 정성일 _ 잠시만 < 우상의 눈물 >을 좀 더 질문 드리겠습니다. 그때 한국영화에서 하이틴 청춘물이 유행이긴 했지만 이 영화는 십대들이 주인공이긴 해도 하이틴들이 볼 수 없는 정치적인 알레고리의 영화입니다. 말하자면 관객이 없는 이상한 영화라고 할까요. 송길한 _ 이것은 군사정권에 대한 어떤 은유지. 전상국 의 단편소설이 갖고 있는 은유야. 권위 있는 담임선생이 아이들을 동원해 주인공의 순수한 야성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얘기지. 개성이 있어야 하는데 개인의 개성을 밟아 일사불란 통솔하는 얘기잖아. 전상국 씨도 보통 맹랑한 사람이 아니거든. 하지만 너무 짧은 단편인 거야. 그래서 전상국 씨의 다른 단편도 합쳐서 각색한 거죠. 나는 주제가 선명해서 오히려 그게 좋았어요. 전상국 씨가 그때 대학교 교수가 아니라 고등학교 선생이었거든. 그래서 애들을 잘 알아. 그걸 정치적인 시각으로 봤기 때문에 생생하게 끌어낸 거지, 하지만 이 영화는 어른 영화지. 그런데 이걸 제작한 영화사는 얄개 시리즈인 줄 안거야. (웃음) 그래서 (시나리오) 잔금 받을 때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얄개>시리즈인줄 알았는데 작품이 이게 뭐냐고, 나한테 그러는 거야. 그래서 눈 똑똑히 뜨고 소설 다시 봐. 그게 어디 얄개냐? 감독한테는 못 그러고 나를 만만하게 보고 막 그러는 거야. 내가 만만한가. 입금 안하면 회사 불질러버리겠다고 했지(웃음) (첫 번째 이야기 끝, 두 번째 이야기 계속) 인터뷰_ 11월 10일, 날씨 화창했지만 바람이 몹시 차가웠음. 정리, 진행, 사진_ 이지영
... (네 번째 이야기) 영화 안에 영화가 들어오는 순간이 있다. 그걸 지젝은 외설적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이 순간이 그렇게 단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등장인물 중의 누군가가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가는 순간과 마주하는 장면은 영화사 속에 수 없이 등장한다. 아마 누군가는 이 말을 듣는 순간 버스터 키튼의 < 셜록 주니어 >를 떠 올릴지 모르겠다. 정반대의 방법이기는 하지만 지가 베르토프의 < 카메라를 든 사나이 >로 이야기를 시작할 수도 있다. 나는 그냥 별다른 검색을 하지 않고도 이 자리에서 백편 이상의 제목을 열거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하려는 것은 영화 안의 영화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먼저 여기서 내가 다루려는 영화 안의 영화는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먼저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영화 안의 영화는 두 가지 영화가 있다. 하나는 버스터 키튼이나 지가 베르토프처럼 영화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영화 안의 영화를 (말 그대로) 만들어내야 하는 경우이다. 다른 하나는 영화가 진행되고 있는 중에 갑자기 영화 속의 등장인물 중의 한 사람이 영화를 보러가는 바람에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게 되는 경우이다. 이때 이 영화는 여기서 다시 둘로 나뉜다. 하나는 영화의 필요에 의해 그 영화를 만들어내는 경우이다. 금방 떠오르는 예. 우디 앨런의 < 카이로의 진홍빛 장미 >. (하지만 어쩌면 이 영화는 첫 번째 설명의 예가 될 수도 있다) 다른 하나는 그저 무턱대고 다른 영화가 지금 진행되고 있는 영화 안에 끼어드는 경우이다. 물론 오로지 다른 누군가의 영화를 보러 가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차이밍량의 < 안녕, 용문객잔 >은 내내 호금전의 < 용문객잔 >이 상영되는 극장에서 배회하면서 그 영화를 보다말다 하기를 반복한다. 그런 다음 이 사이에 수많은 변주가 있다. 영화가 영화 안으로 들어갈 때 즉각적으로 여기에는 위험이 따른다. 왜냐하면 영화 안의 영화는 그 영화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일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영화는 한편으로 서로에게 의지하지만 동시에 모든 영화는 각자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영화 안의 영화는 자기를 표명하는 대신 자기의 존재 방식을 실천하기 시작한다. 어떤 영화는 대화를 나누지만 어떤 영화는 침묵을 지키기도 한다. 가장 이상한 경우는 독백을 하기 시작할 때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그 둘은 고스란히 겹쳐지지 않는다. 같은 말이지만 (반대의 방향에서 즉각적으로 저항하자면) 그 위에 덧씌워지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영화 각자의 고유한 존재의 권리 행사. 이때 영화 안에 영화가 들어오는 순간이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것만큼 항상 아방가르드한 것은 아니며 대중들은 아무런 거부감 없이 이 영화에서 저 영화에로 넘어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이상한 말이기는 하지만 영화 안에 영화를 감금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반대로 영화 안에 영화가 들어올 때 영화의 환대란 순환이라기보다는 서로에 대한 어떤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영화 안의 영화는 그 영화가 꾸는 꿈이 아니다. 차라리 영화 안의 영화는 영화의 안에 들어온 바깥이다. 영화 안의 영화는 가까스로 하나로 모아놓은 영화의 서로 다른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면서 영화 안의 모든 기호들을 분산시키려들 것이다. 그런 다음 지금 보고 있는 영화의 경험에 대한 한계를 일깨우고 갑자기 그 바깥으로 나가려 들 것이다. 영화 안의 영화는 단지 +1이 아니다. 블랑쇼의 말처럼 바깥이란 보이던 것을 보이지 않게 만들면서 동시에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만든다. 이때 영화 안에서 영화를 잡아당길 때, 끌어들일 때, 감싸 안을 때, 잠시 한눈을 팔 때, 원컨 원치 않건 그 안으로 단지 다른 영화가 들어서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다른 역사가 끼어든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단지 구조 안에서의 대화에 머물지 않고 여기에서 저기로, 그런 다음 다시 저기서 여기로 이행할 때 그 과정 중에 전혀 다른 두 개의 리듬이 공존한다는 것은 서로의 다른 존재가 역사 안에서 견뎌가는 자기의 근거를 내세우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근거의 지평. 근거의 각자의 전술. < 외아들 一人息子 > (오즈 야스지로, 1936) 나는 곧장 임권택 의 두 편의 < 장군의 아들 > 안에 머무는 두 편의 영화 안의 영화로 달려가기 전에 두 편의 경험을 먼저 말하고 싶다. (좀 수상한 표현이긴 하지만) 영화를 보다 말고 영화 안의 영화를 보게 된 적이 그렇게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오즈 야스지로의 < 외아들 >을 보다 말고 갑자기 빌리 포르스트의 <미완성 교향악>을 보게 되었을 때 어떤 쇼크를 느꼈다. 이 영화는 오즈의 첫 번째 토키이다. 언제나처럼 일정한 리듬으로 진행하던 영화가 35분 19초에 이르렀을 때 어머니와 아들은 제국극장에 영화를 보러 간다.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두 세 개의 텅 빈 방안 장면을 보여준 다음 보는 쪽은 아무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게도) 느닷없이 <미완성 교향악>의 한 장면이 마치 다음 쇼트처럼 이어진다. 물론 오즈는 언제나 그런 것처럼 영화를 보기 위해서 극장까지 가는 장면을 찍지 않았으며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어머니와 아들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빌리 포르스트가 1934년에 연출한 첫 번째 영화 <미완성 교향악>의 쇼트가 아무렇지도 않게 갑자기 이어질 때 누구라도 멈칫 거기 서버릴 것이다. 마치 영화가 중단된 듯한 기분. 프란츠 슈벨트와 소프라노 가수 카롤린의 사랑을 담은 이 영화의 원제는 연가곡 ‘백조의 노래’ 중의 한곡인 ‘세레나네’의 첫 구절 “Leise flehen meine Lieder (나의 노래를 나지막이 노래하네)”이지만 일본에서 <미완성교향악>으로 개봉하였다. 이 영화는 일본에서 크게 성공했고 비평가들로부터도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오즈가 이 영화를 좋아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1936년에는 매년 써 오던 일기를 단 한 줄도 쓰지 않았다. 오즈는 슈벨트와 카롤린을 보여준 다음에야 비로소 객석에 앉아 영화를 보는 어머니와 아들을 보여준다. 어머니는 그런데 자꾸만 몰려오는 졸음을 참아가며 그만 고개를 떨군다. 아들은 약간 부끄럽지만 금방 그런 어머니를 미소를 머금으며 쳐다본다. 두 개의 영화는 서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오가기 시작한다. 오즈의 카메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멈춰 서 있지만 빌리 홀스트는 화면의 크기를 바꿔 가면서 두 연인을 보여주다가 밀밭 사이를 걸어가는 카롤린을 따라 수평으로 바람결처럼 쫓아간다. (horizontal_tracking) 두 영화는 서로 다른 체계, 다른 리듬, 다른 원칙, 다른 배우, 다른 국적, 단지 이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게 멀리 있다. 여기서는 어느 쪽도 어느 쪽에 안주하지 않는다. 여기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오즈는 <미완성 교향악>의 장면을 그대로 가져오긴 했지만 <외아들>의 진행 리듬에 맞추어 잘랐기 때문에(decoupage) 기괴하게도 원래 영화의 장면은 알겠는데 빌리 포르스트의 리듬을 가늠할 수가 없다. 뭐랄까, 여기엔 잘 설명하기 힘든 불화 속의 무효가 있다. 오즈는 <미완성 교향악>으로부터 아무 것도 이용하지 않는다. 두 영화 사이의 침묵.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와 영화 속의 영화에서 분할의 관계는 일단 구조 안에 들어오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대립적이고, 더 적대적이며, 더 주관적이고, 더 분명하게 서로의 주권을 놓고 다투게 된다. 말하자면 여기서 (그것이 원래의 의도인지 아닌지를 주장하긴 어렵지만) 결국 쇼트가 연결된다는 것은 서로를 잡아당기면서(attraction) 다시 한 번 에이젠쉬테인 프로그램 안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에이젠쉬테인이 종종 인용한 윌리엄 브레이크의 말. “내가 체계를 세우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체계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 비브르 사 비 Vivre sa vie: Film en douze tableaux > (장 뤽 고다르, 1962) 두 번째 예. 물론 가장 잘 알려진 예는 고다르의 < 비브르 사 비 >이다. 12개의 장으로 나뉘어진 이 영화 세 번째 장 <아파트 관리인, 폴, 잔 다르크의 수난, 저널리스트>에서 안나는 극장에서 칼 드레이어의 < 잔 다르크의 수난 >을 본다. 하지만 오즈처럼 느닷없는 것은 아니다. 극장에서 이 영화를 상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insert_shot)이 먼저 나온다. 고다르는 그걸 약간 카메라를 비스듬히 누여서 한밤중에 극장에 매달려 있는 두 개의 네온사인으로 시작한다. 하나는 여기가 극장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왼쪽에 매달린 사인인데 CINE만 보이고 MA는 꺼져있다. 이 극장이 별 인기없는 변두리 극장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며, 아마도 그런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라면 지금 하는 영화는 철지난 영화라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오른쪽 아래 비스듬히 < JEANNE D’ARC >라고 제목이 걸려있는 네온사인이다. 잘 알려진 잔 다르크에 관한 영화는 세 편인데 하나는 칼 드레이어의 < 잔 다르크의 수난 (La Passion de Jeanne d’Arc) >이고 다른 하나는 잉그리드 버그만이 주연으로 나온 (빅터 플레밍 연출의) < 잔 다르크 (Joan of Arc) >, 그리고 로베르 브레송의 < 잔 다르크 재판 (Le proces de Jeanne d’Arc) >이다. 그런 다음 한참 뒤에 자크 리베트는 <잔느 성처녀>라는 제목 아래 <전쟁터>와 <감옥>을 찍었다. (나는 여기서 구태여 뤽 베송의 잔 다르크는 셈에 넣지 않았다. 물론 몇 편의 잔 다르크 영화가 더 있다) 다만 브레송은 고다르가 <비브르 사 비>를 찍고 있을 때 그 영화를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미처 고다르(의 주인공들)은 보러갈 틈이 없었을 것이다. 내가 구태여 한글 제목 옆에 원제를 병기한 것은 아래 비스듬히 보이는 제목 < JEANNE D’ARC >라는 네온사인은 아무래도 <비브르 사 비>를 위해서 제작한 것 같기 때문이다. 드레이어의 영화 앞에는 < La passion... >이 붙어있고 빅터 플레밍은 영어식으로 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세 번째 장을 시작하면서 ‘...잔 다르크의 수난...’이라고 표기했지만 이것이 영화 제목이라는 별도의 표시를 하지 않았다. 극장 간판이 보이고 난 다음 나나는 극장에 들어간다. 화면을 향해서 바라보는 관객을 오른쪽에서 수평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우리는 화면에서 무슨 영화를 상영중인지 알 수가 없다. 불이 꺼져있기 때문에 영화를 상영중이라는 건 알겠는데 아무 소리도 없기 때문에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는 무슨 영화를 상영중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영화가 무성영화라는 것이다. 뒤에 앉은 남자는 따분하게 바라보고 있고, 앞에 앉은 남자는 옆에 앉은 여자의 어깨에 팔을 올려놓는다. 나나는 그들을 지나 더 뒤에 가서 앉는다. 고다르는 나나가 자리에 앉는 것을 보여주는 대신 그 다음 장면에서 갑자기 잔 다르크를 연기하는 팔코네티의 커다란 클로즈업을 보여준다. (잔혹연극으로 알려진) 앙토넹 아르토가 연기하는 사제가 잔 다르크에게 화형이 구형되었음을 알려주러 온 그 유명한 대목이다. 사제는 약간 비웃는 듯도 하고 또 그만큼 가련하다는 듯한 얼굴로 그 소식을 전한다. “사형이 결정되었습니다” 잔 다르크가 묻는다. “무슨 형인가요?” “화형입니다” (물론 이 대사는 자막으로 진행된다) 그때 아무런 분장도 하지 않은 채 머리를 짧게 깎은 팔코네티가 연기하는 잔 다르크는 가볍게 경련을 일으키는 눈꺼풀을 참아가면서 극심한 두려움을 참아낸다. 그저 단지 이 얼굴을 클로즈업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피로에 지친 피부. 자기도 모르게 감기는 것만 같은 눈. 생명이 거기서 증발하고 있다. 그때 그 얼굴은 누구도 바라보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만 같은 시선. 드레이어는 그 장면에서 기적에 가까운 쇼트를 만들어낸다. 그녀는 눈을 뜨고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마치 자기의 시선을 거두는 것만 같은 표정. 영화에서 불가능의 성립. 그때 고다르는 재빨리 이 클로즈업에 나나가 마치 넋을 잃어버린 것처럼 바라보는 클로즈업을 이어 붙인다. (reverse_shot) 물론 잔 다르크의 시선 없는 표정은 나나의 얼굴이 바라보는 시선과 (노엘 버치의 표현을 빌리자면) 접합되지 않는다. 그때 이 접합의 핵심은 나나를 (앞의 쇼트인) 잔 다르크에서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 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나를 (다음 쇼트인) 사제가 바라보는 것처럼 연결시키고 있다. 시네마데크에서 머물러 살다시피 한 고다르는 이 쇼트를 잊지 않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고다르는 나나가 영화(속의 잔 다르크)를 바라보는 모습을 마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상상선을 따라가면서 찍었다. 영화 이론은 이 장면을 고다르가 브레히트를 따라 이화작용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마치 누군가 훔쳐보고 있는 것처럼 찍었다고 다소 따분하게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설명한다. 누가? 바로 우리가. 그래서 이 장면을 우리에게 영화란 훔쳐보는 예술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도덕적인 쇼트라고 불렀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나나의 쇼트를 잔 다르크를 바라보는 시선의 이미지라고 설명하는 대신 사제가 바라보는 쇼트라고 설명하게 되면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판본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사제는 두 사람을 겹쳐놓고 바라보는 것이다. 이때 한 명은 물론 잔 다르크지만 다른 한 명은 나나가 된다. 물론 이 두 개의 쇼트는 단순하게 교환되지 않는다. 고다르의 믿음. “씬을 어디까지 지속해야할 지를 아는 것은 이미 몽타주이다” (<나의 멋진 근심, 몽타주>) 지속의 문제는 동시에 중단의 문제이다. 이때 무엇을 무엇과 연결시킬 것이라는 결정은 본다는 동사가 주어와 목적어 사이에서 어떻게 활동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우리는 고다르가 영화를 종종 (구조주의자들과 아무 연관 없이) 언어처럼 다룬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두 개의 주어. 하나의 목적어. 그 사이에서 고다르는 동사를 구부러뜨린다. 영화 안의 영화를 영화의 안과 바깥으로 나누는 대신 영화 바깥을 영화 안으로 밀고 들어간 다음 두 명의 주인공을 영화 안에서 바라보게 만들 때 나나는 잔 다르크의 자리로 간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나나의 눈물을 정말 브레히트적인 방법으로 쳐다볼 수 있게 된다. 벤야민은 브레히트를 설명하면서 중단을 끌어들인 다음 거기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에도 비유할만한 감정이입의 전도를 본다. 고다르는 그 방법을 영화적인 판본으로 조금 더 밀고 나아간다. 나나는 잔 다르크처럼 자본주의적인 방법으로 화형을 당하게 될 자신의 운명을 거기서 말 그대로 자기 눈으로 자신의 미래를 본다. 마지막 장면. 총에서 불을 뿜으면서 추운 겨울날 대낮 거리에서 버림받은 개처럼 죽게 될 신세. 임권택 은 조금 다른 경로를 따라간다. < 장군의 아들 >에 갑자기 다른 영화가 침입하는 순간이 두 번 있다. 한 번은 첫 번째 편이고, 다른 한 번은 두 번째 편이다. 그리고 세 번째 편에는 영화 속의 영화 장면이 없다. 두 번 모두 물론 오즈처럼 느닷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고다르처럼 감정교육의 프로그램에 따라 구성한 것도 아니다. 임권택은 우리에게 충분히 준비를 하게 만든다. 우선 세 편의 <장군의 아들> 중 첫 번째 영화 속의 영화 장면을 둘러싼 줄거리에 관한 약간의 설명. 이제 막 수표교 굴레방 다리 거지패을 떠돌던 김두한은 극장표를 얻었다가 그것 때문에 종로패 ‘똘마니’들과 시비가 붙고 거기서 보여준 주먹 솜씨 때문에 쌍칼의 눈에 든다. 하지만 김두한은 극장에서 일하기를 원하고 쌍칼은 그런 김두한을 우미관의 주먹패 우두머리인 김기환에게 데려간다. 아직 김두한의 솜씨를 모르는 김기환은 그에게 극장 안에서 상영 전에 좌판을 메고 객석 사이를 돌아다니며 군것질 거리를 파는 일을 맡긴다. 임권택은 여기서 삶을 불어넣기 위해 김두한의 생활을 묘사하는 디테일을 살려 놓는다. 이 장면을 둘러싸고 겹겹이 종로의 시장통 일상생활이 담기고(insert_shot) 여기서 쇼트는 종종 초상화와 장르화 사이를 오가는 것처럼 그 사이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드는 순간들이 있다. 이 장면들은 단지 활기를 불어넣거나 혹은 화면에 대한 믿음을 불러 일으키려든다기보다 그 이상으로 종로 거리 자체를 하나의 고유한 시간 질서를 지닌 세계로 이끌어 올린다. 말하자면 여기서 이 일상의 디테일들은 다른 시간의 세계 안으로 들어간 다음 그 질서의 리듬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그 사이에서 인물과 일상 사이의 친화성이라는 관계 안으로 우리를 밀어 넣는다. 임권택이 영화 안에 영화를 끌어들이는 이유는 시간의 질서라는 리듬 안에서 찾아야 한다. < 국경 > ( 최인규 , 1939) 김두한이 우미관에서 일하게 되자 자연스럽게 영화의 무대는 종로 2가 89번지에 자리한 극장 앞으로 옮겨온다. 한국영화사 속에서 수많은 영화 이야기가 여기서 모이고 흩어지곤 했던 전설적인 우미관은 1912년 12월 9일 개관을 한 1,000석 규모의 대형극장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큰 규모의 극장이었다는 뜻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미관은 한국전쟁 중에 전관 소실되었고, 휴전 이후 다시 문을 열었지만 1959년 화재로 전소한 후 재개봉관으로 바뀌었고 그 이후 쇼 무대와 영화를 번갈아하면서 역사 속에서 슬그머니 사라졌다. 하지만 아직은 1939년이다. 단성사와 함께 경성에서 가장 인기 있는 극장. 오늘 오후 신마적 엄동욱과 구마적이 우미관 앞에서 종로 상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로 벼르던 대결을 벌일 것이다. 그 하루를 시작하면서 종로 빵집 유리창 너머로 우미관에서 상영하는 영화의 간판이 슬쩍 보인다. 간판에는 < 國境 >이라는 제목과 함께 그 아래 감독 崔寅奎 , 그리고 주연에 金素英 , 李錦龍 , 崔雲峰 , 이라고 써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국경>은 한국영화사에 두 편이 있다. 한편은 1923년 1월 24일 단성사에서 단 하루 개봉하고 (기술상의 이유로) 간판을 내린 김도산 의 연출 작품이고, 다른 한편은 1939년 5월 20일에 개봉한 최인규의 연출작품이다. 나는 < 장군의 아들 2 >와 < 일대종사 >의 상상의 연표를 재구성하면서 이 두 편의 영화 사이에서 1940년에 서로 우연히 스쳐지나가듯 이어진 서로 다른 계절의 각자의 대결에 대해서 셈했다. 그 셈에 따르면 < 장군의 아들 > 일편은 그 전해인 1939년의 이야기일 것이며 여기서 상영중인 <國境>이 최인규의 영화인 것은 연대기적으로 당연하다. 하지만 <국경>은 한국영화사 속에서 사라진 영화중의 한편이기 때문에 <장군의 아들>에서 사용된 장면은 임권택 이 연출한 영화(found_footage)이다. 하지만 여기에 약간 복잡한 문제가 있다. 이때 임권택 은 간판에 최인규 의 < 國境 >를 내걸고 있지만 그걸 장면에 담으면서 이 영화를 참고한 것 같지 않다. KMDb의 줄거리 소개에 따르면 “K국경지대의 밀수단 두목 이금용 에게는 애첩 김소영 이 있었다. 애첩 김소영은 기회만 있으면 도망치려 한다. 한편 이금용의 부하 전택이 는 김소영을 짝사랑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전택이는 김소영을 도와 밀수단 소굴에서 탈출한다. 이금용 일당이 그들을 추격한다. 격투가 벌어졌다. 피투성이가 된 전택이는 사력을 다해 이금용 일당을 때려눕히고 김소영과 함께 국경을 넘어간다”라고 되어있지만 아마도 이 줄거리는 1923년에 만든 김도산 의 < 국경 >의 줄거리인 것 같다. 같은 KMDb의 줄거리 소개에 따르면 “국경지대의 밀수단 두목의 애첩과 그 부하간의 사랑을 위한 도피행각을 그린 영화”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최인규의 <국경>은 김도산 영화의 리메이크가 아니다. 좀 더 믿을만한 최인규의 <국경>의 줄거리 소개는 다소 장황하지만 이렇게 이어진다. “압록강 상류 어느 벽촌에 사는 빈농에 사는 김용태에게는 외딸 영자와 그의 약혼자 이세림이 있었다. 세림은 어렸을 때부터 용태가 키워온 고아였다. 늙은 용태에게는 그들의 성장과 혼례가 전부였다. 그러나 그들을 키우기 위하여 생긴 채금(債金)이 항상 붙어 다녔다. 어여쁜 영자에게 딴 마음을 두고 있는 박동일도 그 채권자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용태에 대한 그의 수단을 볼 때 양자로써의 세림의 눈에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급기야 세림은 동일에게 얼마만한 기한을 약속하고 영자나 용태에게 아무 말 없이 마을을 떠나 신의주 밀수자들의 무리에 몸을 던지게 되었다. 그러나 모처럼 꿈꾼 일확천금의 꿈은 흩어지고 몸까지 상하여 가지고 그는 뜻에 없는 귀향을 하게 된다. 세림이가 돌아온 그날 밤 세림과 동일 사이에는 영자를 중심으로 대소동이 일어났다. 그 결과를 두려워하여 사랑하는 양인(兩人)이 아무 미련 없이 마을을 떠날 수 있게 하려는 마음으로 용태는 늪에 몸을 던지나 한편 세림도 또한 그릇하여 칠성이란 백치의 사내를 죽이게 된다. 이리하여 고향은 그들에게 안주(安住)를 허락지 않고 세림은 치사죄로 팔년의 징역을 간다. 영자는 감형운동으로 평양에 공소(控訴)하기 위하여 최후의 수단으로 몸을 팔았으나 결국 무죄는 안 되고 삼년의 감형이 되었을 뿐이다. 그 대신 영자는 몸값 삼백 원 때문에 상술집 계집으로 창녀라는 윤락의 길을 밟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림에 대한 사모의 염(念)은 영자로 하여금 여급으로까지 구하여낼 수 있었다. 마을의 비극 이래 동일은 양심의 가책을 못 이겨 행방불명이 되나 삼년이 지난 어떤 날 안동에서 영자와 기이한 해후를 한다. 영자는 그가 너무나 양심적 인간으로 변한 것에 고민하나 그러나 압제(壓制)할 수 없는 복수지념(之念)에 이끌려서 품었던 비수로 동일을 찌를 때 도리어 실수하여 절벽에 다리를 떨어져 다리를 상한다. 일 년 후 절름발이가 된 영자는 동일의 호의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애처로운 여자였다. 어떤 날 밤 은(銀)밀수를 밀고한 이가 밀수자에게 붙들렸을 때 영자는 비로소 동일을 떠나서 살 수 없이 된 자신을 발견한다. 운명의 장난! 영자는 그저 동일의 품에 안겨서 흐느껴울 뿐이었다. 그리하여 또 한 해가 지나갔다. 아름다운 생활을 꿈꾸면서 평양의 감옥을 나온 세림이가 본 영자는 이미 동일의 아내였다. 그런 두 사람 사이에는 사랑스런 어린 것까지 있었다. (끝)” (동아일보 1937년 5월 7일자, 이 소개 중 한자를 한글로 표기했으며, 지금과 다른 맞춤법 일부를 수정한 이외에 그대로 옮겼다) 그러나 < 장군의 아들 > 속의 <國境>을 보고 있으면 임권택은 김도산의 판본과 최인규의 판본 어느 쪽도 따르지 않고 있(는 것 같)다. 게다가 간판에 따라 최인규의 <국경>을 염두에 두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 것은 이 영화가 무성영화라는 점이다. 최인규의 판본은 토키영화이며 개봉 당시에 이 영화는 “빼어난” 녹음으로 당시 신문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최인규 자신도 “보기 좋은 영화의 첫째 조건으로 나는 화면과 음향이 깨끗해야한다고 믿습니다. 영화의 내용이 철학적인 것보다도 그 형식이 미려한 것을 취하고자 합니다. (...) 내가 <국경>을 연출하는 데 취한 첫 의도는 그렇게 화창한 것이었습니다” (동아일보 1938년 11월 16일자)라고 대답했다. 임권택은 (꼭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도) 한국영화사 안에 존재하는 <국경>을 영화 안으로 가져온 다음 최인규의 영화와 상관없는 <國境>을 만들 때 이 디테일은 단지 시대적인 고증과 상관없이 (혹은 심지어 그것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미 영화 안의 영화로부터 영화의 일부에로 옮겨간 것이다. 그런데 <국경>은 너무 유명한 영화이기 때문에 만일 누군가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한다면 다소 까다로운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나는 임권택이 영화 안에서 얼마나 디테일의 세부 안으로 들어가서 그 자체로 하나의 증언이 되는지를 잘 알고 있다. 여기서 <國境>이 <장군의 아들> 서사 안에 개입하기 때문에 이야기의 일부를 연결하거나 혹은 어떤 계기, 전환의 순간, 희미하지만 둘 사이의 경계를 넘어서 설명을 시작하는 사건(이나 인물 사이)의 환유, 아니면 결정적인 궤도의 이탈, 때로 전혀 상이한 맥락에서 마주치게 되는 두 개의 상황 사이의 텔레파시, 그런 것도 없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國境>은 내게 단지 일부가 잘못된 지식이 아니라 잘 알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무언가 다른 것을 지칭하면서 거기 그렇게 머물고 있는 측면 원근법적 장치의 일부가 아닐까, 라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S# 1 S# 2 S# 3 S# 4 S# 5 S# 6 S# 7 S# 8 S# 9 S# 10 S# 11 S# 12 S# 13 S# 14 S# 15 S# 16 나는 먼저 영화와 영화 안의 영화 사이의 수직적 관계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우미관에서 상영하는 < 國境 >의 간판을 보여준 다음 영화가 상영하는 극장 안까지 들어오기 위해서 임권택 은 거의 굽이굽이 안을 돌아가듯이 한참을 극장 건물 안 여기저기를 돌아본 다음에야 비로소 객석으로 들어온다. 표를 사지 않고 창문을 넘어 몰래 화장실 변기통 밑에 숨어 있다가 영화를 보려는 아이들을 따라가는 것은 단지 한 시대의 풍속이라기보다는 (물론 그런 이유도 있지만) 서사의 경제성에서 나온 것처럼 보인다. 이 아이들은 김두한의 어린 시절을 압축하면서 동시에 그렇게 보낸 어린 시절에 대한 (김두한을 상상하는 우리들의) 감정적인 진동판을 건드린다. 그런 다음 붙잡힌 아이 중의 하나를 끌고 가서 대걸레로 씻겨주고 함께 영화를 보기 위해 객석에 들어설 때 (그게 다소 상투적이라 할지라도) 인격의 일부로서의 행동을 보여주는 절차가 된다. 하지만 임권택은 영화 <國境>을 시작하기 전에 갑자기 김두한의 동선을 끊어낸다. 누구라도 여기서는 멈칫 할 수밖에 없다. 그런 다음 마치 줄거리 바깥으로 나온 것처럼 슬그머니 극장 무대 커튼을 걷고 (관객이 얼마나 찼는지를 보기 위해) 객석을 몰래 쳐다보는 변사의 얼굴이 보인다. ( S#_1) 나는 여기까지 보면서 단 한 번도 변사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어떤 소개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갑자기 시선의 방향이 옮겨갔다. 마치 여기서부터 극장이라는 건축이 자기의 시선을 갖고 활동하듯이 슬그머니 시선의 주도권을 가져간다. 임권택의 연출이 종종 보여주는 무시무시한 내기의 순간, 슬그머니, 라는 보이지 않는 단락(短絡). 마치 그걸 우리에게 확인이라도 시켜주듯이 순간적으로 마치 암전된 것처럼(fade_out) 검은 화면을 그 사이에 넣기라도 한 듯 카메라 앞을 완전히 가로 막았다가 지나쳐서 변사가 무대 위로 올라온다. 마치 막이 다시 열리는 듯 한(wipe_out) 검은 화면의 순간적인 이동. 변사가 의자가 앉으려는 순간 저 멀리 왼쪽 화면 끝에서 거의 같은 동작으로 극장 맨 끝자리보다 더 뒤에 자리한 입검석(立檢席)에 일본 경사 두 명이 앉는 것이 보인다. 그러면 극장 불이 꺼지고 변사가 대사를 낭독하기 위해 책상 위의 전등을 켠다. 저 멀리 영사실에서 영사기의 불빛이 한줄기 쏟아져 나온다. 말하자면 영화가 시작된다. ( S#_2) 갑작스러운, 차라리 이제까지 < 장군의 아들 >을 보던 관객들에겐 난데없는 흑백화면에 그려진 그림. 그때 변사의 목소리가 들린다. “국경, 아 살얼음 치는 국경!” (voice_over) 나는 여기서 멈칫 설 수밖에 없었다. 무성영화 시대에는 1.85 사이즈의 영화가 없다. 그런데도 <國境>은 태연자약하게 이 화면 사이즈로 시작한다. 물론 위아래를 잘라낸 것도 아니다. 이유는 단 하나일 것이다. 1.33 화면은 무조건 양 옆을 검게 만들 것이다. (black_masking) 그러면 <國境>과 <장군의 아들>은 서로 완전하게 떨어져나가게 될 것이다. 임권택은 두 영화 사이를 흑백과 칼라로 나누는 정도에서 멈춘다. 그런 다음 그 둘을 변사의 목소리로 이어 붙인다. ( S#_3) 이어지는 변사의 목소리. “조선과 만주를 가르는 국경을 사이에 두고 한 많은 강물은 흘러 흘러 어디로 가느냐. 서해로 가느냐, 태평양으로 가느냐,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 이때 화면은 이미 영화가 시작한 극장 안으로 김두한과 소년이 들어오는 것을 보여준다. ( S#_4) 즉각적인 질문. 그렇다면 <國境>의 첫 장면을 김두한은 보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때 우리는 약간 까다로운 논제와 마주치게 된다. 만일 우리가 김두한을 경유하지 않고 영화 안의 영화를 보게 된다면 우리의 시선(sight)이 머무는 자리(site)는 어디인가? 나는 뒤늦게 극장 안에 도착한 김두한이 만들어낸 균열이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좀 이상한 표현이지만 나는 여기서 김두한이 <國境>을 본다기보다는 <國境>을 보는 김두한을 본다고 밖에 달리 생각할 수 없었다. 이때 뒤이은 <國境>의 장면은 김두한이 그 장면을 보기 때문에 되돌아왔다기보다는 마치 잠시 김두한에게 한눈을 팔았기 때문에 원래의 화면에로 되돌아오는 것처럼 여겨진다. ( S#_5) “한편 여기는 국경도시 의주, 쫓기는 사나이들이 있었으니 앞선 사나이는 김영철이오, 또 한 사나이는 박동일이었다” (변사) 당연한 말이지만 임권택은 무성영화를 찍은 적이 없다. 단지 흑백으로 찍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장군의 아들>을 따라온 우리에게) 이 첫 화면의 구도와 질감은 이상하게 보인다. 전체 구도가 모두 초점 거리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deep_focus) 약간 과도할 정도로 밝게 찍혔다. (이 영화를 만들었을 때 한국영화는 아직 디지털 색 보정이 도입되기 전이라는 사실을 계산에 넣어두기 바란다) 하지만 더 이상한 것은 인물로부터 카메라가 너무 멀리 있다는 것이다. 이 장면이 전체를 보여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master_shot) 경사진 이 동네의 지붕들과 저 멀리 하늘이 조금이나마 보여야 하기 때문이라 할지라도 너무 멀리 있다. 물론 회화를 염두에 두고 무대와 같은 구도(tableau)를 만든 초기 무성영화에 관한 카메라와 피사체의 거리(와 운동)의 이론이 있다. (David Bordwell, Ben Brewster, Noel Burch, Richard Abel, Charles Musser, Thomas Elsessar, Tom Gunnung, AND...) 하지만 그걸 염두에 두어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이다. 인물의 동선을 화면 아래쪽에 배치한 다음 왼쪽 골목에서 나와서 오른쪽 담벼락에 몸을 숨긴다. 이때 김영철과 박동일은 단지 아래서 찍었기 때문이 아니라(low_angle) 너무 멀리 있기 때문에 코트자락에 감춰지기는 했지만 거의 무릎까지 보인다. (knee_shot) 그들을 추적하기 위해서 나타난 인물들도 화면 아래 부분에서만 오갈 뿐이다. 만일 이 장면을 보기 위해서 귀로 듣는 대신 자막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면 당신은 김영철과 박동일을 추적하기 위해 나타난 사람의 모습을 자막에 가려 거의 보지 못할 것이다. 추적자를 다른 길로 따돌린 것을 보면서 김영철이 박동일에게 (변사) “동일아, 우리 하루삔에서 만나자” 라는 대사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하자면 오로지 그 이유 때문에, 마치 그 장면에서 대사를 클로즈업 하듯이 다가가서 다시 찍은 것(bust_shot)은 쇼트 분할의 낭비이다. ( S#_6) 임권택이 그걸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그렇게 했다. 나는 처음 볼 때 다시 영화 안의 영화에서 빠져나와 김두한에게 돌아오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틀렸다. ( S#_7) 다음 장면은 내리막길에서 서로 재회를 기약하며 손을 흔들면서 각자의 길을 떠나는 두 사람을 할 수 있는 한 멀리서 찍었다. 그들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듯 변사는 목소리를 높인다. (변사) “이들은 왜 쫓기는 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는가” 마치 김두한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혹은 이 세 개의 쇼트는 한 씬이기 때문에 서로 절대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듯, 서로 이어 붙어있다. 그런 다음 마치 대꾸를 하듯이 영화 안의 영화를 보는 영화 장면의 쇼트가 연이어 세 개 이어진다. ( S#_8) 변사는 영화에 빠져든 표정으로 마치 웅변이라도 할 것처럼 낭독한다. (변사) “아! 드디어 때는 바야흐로 시베리아에서 휘몰아쳐오는 북풍한설이 매운 기세로 휘몰아쳐오는 엄동시절에...” ( S#_9) 재빨리 이어 붙은 입검석에 앉아있는 두 명의 일본 순사. 한 명은 <國境>에는 별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다가 객석을 쳐다보기를 반복하고 다른 한 명은 대본을 들여다보면서 변사의 낭독을 감시한다. (변사) “.... 조선의 백성들은 추위와 허기에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 S#_10)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영화에 완전히 빠져든 김두한과 그가 데리고 들어와 옆에 앉힌 (몰래 화장실을 통해 공짜로 영화 구경을 하려다 붙잡힌) 소년(과 그 곁의 몇몇 관객)을 보여준다. 그때 변사의 낭독은 절정에 달하고 있다. (변사) “아! 조선의 백성들아, 백성들아!” 이 세 개의 쇼트에 대한 세 가지 질문. 첫째, 영화 안의 영화로부터 나와서 <國境>을 바라보면서 진행 되자 변사의 낭독에는 대사가 없고 지문만 있다. 단지 영화가 영화 안의 영화를 바라보는 순간에는 <國境>의 대사 안으로 침입할 수 없다는 듯이 갑자기 이야기 바깥으로 나온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두 번째, (앞의 질문에 이어서) 게다가 이 지문은 줄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이건 일제 식민지 강점하 조선의 상황에 대한 심정의 비분강개에 가까운 웅변이지 지금 진행 중인 <國境>을 위해서는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세 번째. 낭독하는 변사와 입검석의 두 명의 일본 순사, 그리고 김두한과 소년, 이 세 개의 쇼트는 각자 영화 안의 영화와 다른 방식으로 접합되어 있다. 변사는 <國境>의 목소리라는 방식으로 영화 안의 영화 바깥에서 활동하는 기계장치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이 쇼트는 ( S#_8) 영화 안의 영화의 외부적 확장이다. 혹은 이 쇼트를 보는 것은 <國境>의 장면을 청각적으로 ‘보는’ 것이다. (두 번의 ‘본다’라는 설명이 서로 다르게 활용되고 있음을 유심히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반대로 입검석에 앉아있는 두 명의 일본 순사는 ( S#_9) 영화 안의 영화를 쳐다보고 있지만 동시에 <장군의 아들>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역사적 기호 이외의 어떤 기능도 하지 않는다. 이 쇼트는 양쪽 모두에 기생한다. 그 당시의 모든 영화는 그렇게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에도 다시 검열 받았다. 입검석에 앉아있는 두 명의 일본순사는 1939년 영화의 일부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모든 개봉관에는 입검석이 반드시 맨 뒤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자리는 영화 검열을 위한 자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 대한 감시의 체제이기도 하다. 역사 속에서 극장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고 언제나 그런 장소는 의견의 광장이자 일순간에 흩어진 힘을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했다. 권력은 언제나 공개적인 장소를 감시했다. 내가 아니라 푸코가 한 말이다. 입검석은 1939년 극장의 일부이다. 그런 다음에야 영화 안의 영화를 보는 김두한의 쇼트가 등장한다. ( S#_10) 김두한(과 소년)은 약간 지나칠 정도로 영화에 빠져들어서 바라본다. <國境>은 <장군의 아들>과 직접적으로 접합되지 못한 채 우회의 경로를 택한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다시 <國境> 안으로 되돌아간다. ( S#_11) 옥순의 집 안 방문 앞에서 문을 열고 옥순이 나와 김영철과 포옹을 한다. (변사) “옥순아! 하루삔으로 가자, 어서! 어서!” 영화 안의 영화로 돌아가자 변사는 재빨리 다시 복화술사처럼 영철의 목소리를 대신 한다. 두 가지 지적. 첫 번째, 신기할 정도로 정교하게 영화 화면과 목소리를 연결한 때 두 번 모두 영철의 목소리만이 일치한다. 두 번째. 이 화면은 몇 번을 다시 보아도 이상하다. 이 구도는 의도적으로 방문을 중심에 놓은 다음 양 옆에 어떤 장식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왼쪽은 조명이 닿지 않아 그림자마저 생겼다. 나는 전체 화면을(master_shot)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 집의 구조를 알지 못한다. 이때 방문을 중심으로 이 화면은 기묘하게도 1.33 사이즈의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내게 좀 이상하게 여겨지는 것은 정면으로 찍은 구도이다. 임권택의 영화를 보면서 나는 정면 쇼트와 마주해본 경험이 거의 없다. <장군의 아들>에서 두 사람을 세워 놓은 다음(two_shot) 정면으로 찍는 경우는 없다. 구태여 그렇게 앉은 장면은 하야시 구미(組)가 다다미 실내에 앉아있는 일부 쇼트들뿐이다. 정면으로 인물을 찍으면 영화는 다음 장면의 진행에서 심각한 문제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런데도 그렇게 찍었다. 그때 이 장면은 두 사람을 장면 분할 없이 진행하겠다는 선언이다. 그런데 영철의 대사가 끝나자마자 바로 장면을 변사로 옮겨갔다. ( S#_12) 변사는 두 손을 가슴에 모아가면서 옥순의 대사를 낭독한다. (변사) “못가요, 못가요! 부모 형제를 놔두고 어찌 만리타국으로 가야 한단 말이에요” 그런 다음 목소리를 바꾸어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영철의 대사를 한다. (변사) “옥순아, 우리는 가야 한다” 이 정면쇼트는 오랜 시간 동안 내게 머물러 있었다. 뭐랄까, 여기서 만들어진 이상한 디테일의 사실감이 <장군의 아들> 전체의 어느 장면보다도 1939년이라는 인상을 만들어냈다. 나는 구태여 여기서 느꼈다, 는 말 대신 만들어졌다, 고 설명했다. 그런데 그 디테일이 만들어낸 것은 정확하게 무엇일까. 그런 다음 화면은 ( S#_13) 영철이 옥순의 손을 잡고 문을 나서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변사) “부모냐 사랑이냐, 망설이던 옥순은 애인을 따라 나서고 말았으니 이들의 앞날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장면은 <國境>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온 것처럼 현대적인 방법으로 찍혔다. 카메라는 집을 나서는 옥순과 그녀를 잡아 이끄는 영철을 재빠르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따라가면서(pan_shot) 동시에 눈에 보이게 이동하고 있다. 멀리 사라져가는 두 연인은 <國境>의 두 번째 장면, 김영철과 박동일이 쫓기던 그 골목으로 사라져간다. 나는 마지막 순간에 이 장면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國境>이 한창 상영되고 있을 때 김두한(과 소년)이 앉아있는 뒤편 입구, 그러니까 입검석 바로 옆에 난 문으로 종로패 사내가 두리번거리면서 들어온다. ( S#_14) 그가 김두한에게 귓속말로 이르자 김두한은 잠시 생각하다가 영화를 보다 말고 나간다. 물론 변사는 아랑곳없이 더 열을 올리며 낭독을 한다. (변사) “여기는 압록강, 김영철과 옥순은 인정 많은 어부를 만나 쪽배를 구할 수 있었으나, 아 그러나 아뿔싸, 그 자가 경찰의 끄나플일 줄이야, 그 누가 꿈엔들 알았으랴” 김두한이 우미관 앞마당에 나왔을 때 막 신마적 엄동욱과 구마적이 대결을 벌이기 위해 마주보고 있었다. 그리고 구경꾼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 S#_15_16) 영화 속의 영화 <國境>은 여기까지이다. 그런 다음 김두한도, 임권택도, 영화도 <國境>을 잊어버린 채 진행된다. 두 번째 편으로 넘어가기 전에 한 가지 사실의 환기. < 國境 >을 보는 내내 이상한 것은 자막이 없다는 점이다. 나는 당시의 관객들 상당수가 문맹이었기 때문에 변사가 필요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자막은 당시 영화의 일부였다. 무성영화에서 무자막 형식이 시도된 것은 1924년 프리드리히 W. 무르나우의 (종종 <최후의 인간> 혹은 미국 개봉제목인 < 마지막 웃음 >으로 알려진) <밑바닥 인간(Der Letzte Mann)>에 이르러서다. 물론 지금 <國境>을 보는 건 1939년의 일이다. 그러나 나는 한국영화사에서 무자막 형식의 무성영화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무자막 무성영화의 역사는 매우 짧다. 왜냐하면 첫 번째 토키영화 <재즈 싱어>가 1927년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잠시 후에 다시 이 질문에로 돌아올 것이다. 두 번째 영화 안의 영화는 < 장군의 아들 > 두 번째 이야기에 나온다. 약간의 설명. 김두한이 구치소에서 나오자 혼마치깡 하야시 구미(組)가 기다렸다는 듯이 새벽에 기습을 한다. 어이없이 패배한 다음 김두한은 종로 한복판에서 종로 상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야시 앞에 무릎을 꿇는 치욕을 당한다. 뒤이어 구치소에서 종로패의 두목인 김기환이 출소한다. 상황을 파악한 김기환은 김두한과 함께 혼마치깡의 사쿠라(櫻) 카페에 가서 하야시와 굴욕적인 평화협정을 맺는다. 여기서 그만 술에 취한 김두한은 모자를 두고 온다. 그래서 사쿠라 카페의 여주인 세츠코는 김두한에게 모자를 돌려주기 위해 종로를 찾아온다. 둘은 종로 빵집에 마주 앉지만 김두한은 일본어를 모르기 때문에 그녀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래서 종로패 중에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워싱톤을 부른다. 옆에 쪼그리고 앉아 워싱톤이 그녀에게 묻는다. “무슨 말이었습니까?” 세츠코는 약간 수줍게 대답한다. “영화도 구경할 겸해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워싱톤이 김두한에게 “영화를 보러 왔대요”라고 전해주자 김두한이 호기롭게 대답한다. “내가 보여주겠다고 그래” S# 1 S# 2 S# 3 S# 4 S# 5 S# 6 S# 7 S# 8 S# 9 바로 그 다음 장면에서 상영중인 영화 간판을 보여준다. ( S#_1) 영화 제목은 <最後の復?>. 내게 1940년 일본영화 연감이 없기 때문에 이 영화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하지만 감독 이름이 나를 미심쩍게 만든다. 감독 池田忠雄(이케다 다다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이 시기에 활동한 일본 영화인 이케다 다다오는 시나리오 작가이다. 그는 오즈 야스지로의 1930년 영화 <아가씨>를 시작으로 1947년 <세입자 인명록>까지 각본을 썼다. 그런 다음 노다 고고와 함께 오즈는 < 만춘 >을 쓰고 그의 유명한 가족의 순환이라는 우주로 들어선다. 어쩌면 내가 알지 못하는 동명이인의 영화감독이 있을지 모른다. 또한 <最後の復?>라는 영화가 정말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경국립근대미술관 내 국립영화박물관에서 <最後の復?>는 검색되지 않으며 이케다 다다오는 각본작가의 이름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하필이면 (누구라도 떠올렸겠지만) 김두한을 찾아온 카페 여주인의 이름은 <만춘> 이후 오즈 영화의 영원한 노처녀 하라 세츠코(原節子)와 동명이인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오즈로부터의 연상을 멈출 생각이다. 김두한은 호기롭게 세츠코를 대동하고 우미관 극장문으로 들어선다. ( S#_2) 우미관 안쪽에서 들어서는 김두한을 바라보면서 서 있는 것이 전부인 장면. 입구에 기도가 서 있지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표도 끊지 않고 극장 안으로 들어선다. 이제 더 이상 첫 번째 이야기, 그러니까 작년의 김두한이 아니다. 앞에 서있던 기도도 김두한에게 구십 도로 허리를 숙여 어서 옵쇼, 라고 목청 높여 인사를 한다. 그는 여기에 늘 이런 식으로 드나들 것이다. 뒤를 따라오던 세츠코는 기도를 보고 멈칫 서서 망설인다. 김두한은 들어서다 말고 돌아서서 그냥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자 그녀는 기쁜 기색으로 따라 들어간다. 그 뒤를 따라오던 종로패 부하들은 멀리 서서 그 모습을 보면서 “개판이다, 개판이야”라고 빈정거린다. 아마도 돌아온 김기환은 하야시 구미(組)에게 세금까지 바쳐 가면서 종로 우두머리 노릇을 하고 있고 김두한은 그런 상황에서 일본 여자와 데이트를 하는 모습을 보고 하는 말일 것이다. 이 장면은 우미관 간판과 영화 안의 영화 <最後の復?> 사이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임권택 은 다시 한 번 우미관 극장 안의 디테일을 소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다소 우스꽝스러운 설명이긴 하지만 김두한은 세츠코에게 우미관을 소개할 이유가 없다. 여기서 장면 진행은 다소 교묘해 보인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자. 영화 안의 영화 < 國境 >을 시작하면서 첫 번째 장면으로 타이틀 자막이 있는 화면을 보여주었다. 이번에는 타이틀 자막을 보여주는 대신 우미관에 매달려있는 간판 <最後の復?>를 정면으로 보여주면서 제목과 감독, 주연배우, 여기에 더해 이 영화의 장르가 찬바라(チャバラ,칼과 칼이 ‘찬찬찬’ 부딪치는 시대 활극물(時代 活劇物)) 라는 것을 간단하게 소개한다. 장르에 성차(性差)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1940년 경성 종로에 있는 유명한 극장 우미관에서 하는 찬바라 영화를 보러 세츠코가 찾아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한 설정이다. 경성에 영화관이 단 하나 뿐은 아니었으며, 그 시대에 찬바라 영화는 남자들의 장르이며 나미나(淚, 멜로) 영화는 여자들의 장르라는 식으로 멋대로 구분해버린 다음 찬바라를 여자가 보는 것은 흉한 광경이라고 생각하는 시절이었다. 당신은 모던 걸의 시대이기도 했다고 반박하고 싶을지 모른다. 세츠코는 혼마치깡에서 종로까지 김두한을 찾아오면서 기모노를 입고 온 여자이다. 그런 다음 영화에서 단 한 번도 신식의상을 입은 적이 없다. 게다가 그녀는 하야시 오야붕이 종로패 김기환과 화해(를 빙자한 협상)의 술자리를 가질 때 찾아갈 만큼 고급 요정의 마담이다. 그러므로 세츠코는 ‘가오(顔)’를 중요시여길 것이다. 그런데도 김두한을 만나서 영화를 보겠다고 한 다음 우미관에 <最後の復?>를 보러왔다. 당신을 환기시키기 위해서 반대로 말하면 모자를 돌려주기 위해 종로까지 찾아온 세츠코에게 고맙다고 김두한이 영화를 보여주겠다고 한 다음 상대방의 처지를 고려치 않고 자기가 보고 싶은 영화를 보기 위해서 데려온 것이 아니다. 게다가 김두한은 이미 이 영화를 여덟 번이나 보았다. 그렇다면 왜 <最後の復?>를 보러 온 것일까. 좀 이상하게 들리긴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싶어 온 사람은 임권택이다. 몇 가지 가설. 첫 번째, 세츠코를 따라서 (일본 영화사전의 분류에 따라) ‘인정(人情)’ 영화나 ‘연애(戀愛)’영화를 보러 간다면 원래의 영화인 < 장군의 아들 >이 만들어놓은 ‘다찌마와리’로 돌아오는데 (임권택의 표현을 빌리면) “애를 먹거나” 아니면 “한참 다시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두 번째 가설에 더 기대고 싶다. 임권택은 <장군의 아들>을 통해서 자신이 1970년대에 보낸 ‘다찌마와리’의 시절로부터 얼마나 멀리 벗어나 있는지 보고 싶었다고 몇 차례고 대답했다. 아마도 그 대답을 <장군의 아들> 일편에서 만족스럽게 얻었을 것이다. 1990년의 관객들은 기꺼이 이 영화를 환영했고 비평적으로도 환대를 받았다. 여기에는 두 가지를 셈에 포함시켜야 한다. 임권택은 <씨받이>로 베니스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이후 ‘살아남은 거장’의 대접을 받기 시작했지만 <장군의 아들> 이전에 흥행의 시장에서 성공한 적이 없다. 다른 한 가지. 1980년대 비디오의 백화제방을 통과하면서 성장한 (아마도 박찬욱으로 대표되는) 완전히 새로운 시네필 세대는 B급영화와 컬트영화들을 새로운 고전의 반열에 올리면서 비평의 엄숙주의와 전투를 벌였고 영화와 미학 사이에서 새로운 접속 방식을 찾아낸 다음 그 사이에서 이루어진 긴장을 때로 통과하고 때로 가로 막으려는 도그마와 전투를 벌이면서 새로운 바깥의 출구를 찾고 있었다. <장군의 아들>은 제 시간을 찾아서 도착했다. 그런 다음 임권택은 두 번째 <장군의 아들>을 만들면서 영화 안의 영화로 자신이 1970년대에 만들었던 ‘다찌마와리’ 영화들보다 더 천대받았던 ‘으악새’ 영화를 끌어안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칼을 한 번 휘두르면 엑스트라들이 일제히 ‘으악’ 소리를 내면서 죽는다고 충무로 내에서조차 조롱의 대상이 되었던 장르. 물론 그 마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무언가 여기에는 대면의 느낌이 있다. 물론 여기서 더 밀고 나아가면 안 된다. 여기가 비평의 임계점이다. 나는 재빨리 우미관으로 돌아올 생각이다. 아니, <最後の復?>로 들어갈 생각이다. ( S#_3)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김두한이 세츠코와 함께 우미관에 들어서자 다음 쇼트는 <最後の復?>의 장면이다. <國境>과 같은 점. 두 영화 모두 흑백으로 찍었다. 그리고 영화 안의 영화 장면을 보여줄 때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극장 풍경의 중계 없이 곧장 영화 안의 영화를 보여준다. 다른 점. <最後の復?>는 토키영화이다. 그러므로 <國境>에서 볼 수 있었던 변사가 없다. 물론 상당한 기간 동안 토키와 무성영화는 공존하였으며, 일본영화에서 토키는 1931년에 만든 <이웃집 부인과 나의 아내>에서 시작되었다. 오즈도 한참을 망설인 다음 1936년에야 첫 번째 토키영화 < 외아들 >을 만들었다. 내 관심을 끈 것은 두 번째 다른 점이다. 여기서 <最後の復?>는 1.33 사이즈로 상영된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제까지 1.85로 진행되던 화면에서 양옆을 어둡게 한 다음 첫 장면을 볼 수 있다. 임권택은 이 화면 사이즈를 만들면서 단지 양 옆만을 어둡게 잘라내는 대신(masking) 위아래도 지워내면서 화면 전체를 영화 안의 영화라기보다는 영화관에서 바라보는 기분을 내면서 두 편의 영화, 영화 안의 영화와 그 영화를 바라보는 영화를 공존시키고 있다. 그때 이 장면에서 바로 앞 장면, 그러니까 김두한이 세츠코와 함께 우미관에 들어서던 장면의 구도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장군의 아들>은 좁은 세트를 넓게 보이게 만들기 위해서 필요 이상으로 양옆을 펼쳐놓거나 수평으로 만든 쇼트들의 구도로 진행된다. 그건 세 편 모두 그렇다. 다만 대결 장면을 벌일 때에만 종종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거나 혹은 실내로 들어간다. 그런데 우미관이 야외에 지어진 세트인데도 불구하고 김두한이 세츠코와 우미관에 들어설 때 극장 안에서 두 사람이 들어서는 것을 수직의 구도로 찍었다. 출입구이기 때문에 양 옆은 유리문으로 닫혀 있고 오로지 앞과 뒤로만 인물의 동선이 연결될 수밖에 없다. 이 쇼트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지만 김두한이 들어선 다음 나가려다 말고 뒤 돌아서서 세츠코에게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고 그래서 우미관으로 두 사람이 들어간 다음 그 뒤를 따라오던 종로패들이 “개판이다, 개판이야” 대사까지 모두 하는 장면을 고정된(fixed) 카메라로 편집없이 모두 찍었기 때문에(long_take) 심리적으로 길게 느껴진다. 물론 이 쇼트를 불필요한 편집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제외하면 롱 테이크로 찍어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 이때 이 방법은 전형적인 학습의 쇼트이다. 무엇을 위한 학습? 1.85를 좁은 구도로 좁혀놓은 다음 어떤 개입도 없이 이어진 쇼트에서 1.33의 구도로 전개될 <最後の復?>를 준비하고 있다. ( S#_3) 숲속에서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달려가며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라고 외치고 화면 바깥에서, 아마도 그녀의 뒤에서, 그러니까 화면 오른쪽 바깥에서 그녀를 쫓아오면서 “거기 서”라는 소리가 일본어로 들린다. 이때 자막은 오로지 지금 영화를 보는 당신을 위해서만 제공된다. 만일 1940년 우미관에서 그날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위해서였다면 당연히 화면 왼쪽에 세로 쓰기로 씌여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역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1937년 내선일체를 강요한 일본은 이듬해 조선어 교육 금지를 명령하였으며 지금 영화를 보고 있는 1940년은 창씨개명이 요구된 해였다. 그날의 우미관 관객들은 일본어로 영화를 보아야 했을 것이다.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 달려가는 것과 거의 같은 속도로 숲속을 카메라가 수평으로 이동한다. 그러면 같은 속도와 같은 거리만큼 떨어진 카메라가 다시 한 번 그녀를 쫓는 검은 옷을 입은 자객들을 따라서 거의 동일한 방법으로 이동한다. ( S#_4) 교과서에서 금기시된 방법. 하지만 임권택은 여기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냥 반복한다. 그래도 괜찮은 것일까. ( S#_5) 왼쪽에 서 있는 세 그루의 나무. 더 멀찍이 물러나서 이동하던 카메라를 저 멀리 있는 세 그루의 나무가 멈춰 세우기라도 하듯이 거기 그렇게 문득 서 버린다. 나무 뒤에서 홀연히 등장하는 한 남자. 우리는 협객물의 약속을 잘 알고 있다. 여인이 자객들에게 쫓길 때 그 앞에 나타나는 남자는 언제나 구원자이다. 이 낯선 남자를 향해서 자객들은 저마다 “비켜라” “누구야”를 외치지만 모두들 흠칫 물러선다. 이 세 개의 쇼트는 모두 수평의 동선과 구도로 진행된다. 하지만 세 번째 쇼트 다음 장면은 낯선 남자와 자객들 사이의 ‘찬찬찬’ 검술 살진(殺陣)이 아니라 <最後の復?>를 보고 있는 김두한과 세츠코의 모습이다. 세츠코는 열심히 영화를 보고 있지만 김두한은 따분한 표정을 짓다가 하품마저 하고 만다. ( S#_6) 물론 내용이 재미없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화면에서는 칼을 빼든 자객들로부터 “죽여라”(voice_out_of_frame)는 외침이 터져나오면서 이제 막 결정적인 활극장면이 펼쳐질 순간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들은 영화 안의 영화 <最後の復?>를 (이론적으로만 설명하면) 김두한이 아니라 세츠코를 경유해서 보는 중이다. 서사의 차원에서 설명은 단순하다. 우미관은 김두한의 ‘나와바리’이고 게다가 <最後の復?>은 찬바라 영화이기 때문에 김두한은 시간이 날 때마다, 달리 할 일이 없을 때마다, 혹은 순전히 재미로 수없이 보았을 것이다. 그건 하나도 이상한 제스처가 아니다. 내 질문은 거기에 있지 않다. 김두한과 세츠코의 쇼트는 자유자재로 옮길 수 있는 장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 자리에 가야 하느냐는 것이다. 이 쇼트는 마치 <最後の復?>의 결정적 순간을 보려는 관객들, 그러니까 영화 안의 영화를 보려는 우리들을 불만족스럽게 만들려는 의도의 자리에서 몰입의 리듬을 방해하고 있는 중이다. 김두한과 세츠코의 감정적 관계는 아직 아무 관계도 아니며 이후에도 (함께 영화를 본 다음 데이트 장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다. 마치 우리들의 궁금한 기다림에 대답이라도 하듯 다음 쇼트는 다시 영화 안의 영화로 돌아간다. ( S#_7) 기모노 여자는 나무 뒤에 서서 바라보고 있고 낯선 남자는 자객들과 일대 사로 대결을 한다. 이때 이 장면의 구도는 기이하게도 남자와 자객들 사이의 일대 사의 대결이 막 시작되려는 광경을 눈 앞에 펼치는 대신 나무 뒤에 숨은 기모노 여인의 뒤에 (두 개의 뒤라는 말을 염두에 두어서 이 장면을 다시 보라) 서서 바라보고 있다. 칼 바람소리와 비명소리가 날 때 기모노 여인은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close_up) 쳐다보고 있다. ( S#_8) 낯선 남자는 자객 네 명을 모두 쓰러트린 다음 조금도 호흡이 거칠어지지 않은 채 칼을 절도있게 칼집에 넣는다. 나무 뒤에 숨어있던 여자가 나와 무릎을 꿇고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하지만 거들떠 보지도 않고 (카메라가 서 있는 맞은 편으로) 성큼성큼 걸어 떠나간다. ( S#_9) 김두한은 그걸 보다가 하품을 하면서 눈을 감고 잠이라도 잘 기세다. 그러자 영화에 빠져들었던 세츠코는 김두한을 보면서 “面白くないですか (재미없습니까?)”라고 물어본다. 그 말을 못알아듣자 손바닥을 가로 흔들며 “ゼミ(재미) ないですか” 라고 다시 물어본다. 일본말을 못하는 김두한은 변명이라도 하듯이 손가락 여덟개를 펴 들고 “나, 저 (영화) 여덟 번째야, 여덟 번”이라고 말한다. 세츠코는 그 모습을 보고 입을 가리며 웃는다. 그런 다음 장면은 없다. 그 낯선 남자가 누구인지, 기모노 여인은 왜 쫓겼는지, 그 여인의 운명은 어찌되었는지, 자객들의 복수는 이루어졌는지, 무엇보다도 최후의 복수는 성공했는지, 아무 관심도 없이 영화 속의 영화 <最後の復?>는 거기서 끝나고 화창한 초여름날 야외에서 데이트하는 김두한과 세츠코로 옮겨간다. 내 질문은 간단하다. 왜 영화 속의 영화를 거기서 끝내도 괜찮은 것일까. 얼핏 보면 거기서 <最後の復?>의 한 시퀀스가 끝났기 때문에 우미관 극장 안의 씬과 영화 속의 영화 <最後の復?>의 숲 속의 대결 씬을 맞춘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때 내 반론은 그렇게 되면 김두한과 세츠코의 이야기도 거기서 끝난 다음 재빨리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서사의 진행에서 차라리 방해라고 할만한 두 사람의 고궁에서의 데이트 장면에로 옮겨간다. 이 씬은 우미관 장면의 감정적인 연결이다. 여기서 핵심은 세츠코가 김두한의 손가락 여덟 개를 펼쳐든 모습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제스처에 있다. 입을 가리고 웃을 때 세츠코는 이미 기모노 여인의 운명에 관심이 없다. 그녀의 운명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최후의 복수가 어떻게 될 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그 제스처는 영화 안의 영화가 더 이상 영화 안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것에 대한 거절의 동작이다. 왜 거절의 제스처가 성립하는 것일까. 나는 영화 속의 영화 <最後の復?>의 타이틀이 미처 우미관에 들어가기도 전에 마치 영화 속에 삽입(indert_shot)되었다고 말했다.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이 영화는 김두한이 보고 싶어서 세츠코와 온 것이 아니라 세츠코가 보고 싶어서 김두한이 함께 온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 속의 영화에 이끌리는 시선은 김두한이 아니라 세츠코를 중심으로 이끌린 응시와 그 반응이다. 심지어 김두한은 영화를 거의 보지 않는다. 그는 하품을 하고 눈을 감고 금방이라도 잘 것만 같다. <最後の復?>에서 우리가 보는 첫 장면은 이 영화를 보는 세츠코와 일치를 시키기라도 하듯 숲 속을 달리는 기모노의 여인으로 시작한다. 나는 여기서 다소 기계적인 동일화의 도식을 따라가볼 생각이다. 물론 영화는 그렇게 단순하게 기제가 작동하지 않는다. 하지만 <장군의 아들>이 장르영화라는 것을 먼저 염두에 두고 여기서 시선의 네트워크가 불러 일으키는 문법적인 전이 효과만을 계산에 포함시킬 것이다. 그런 다음 문득 나타나 그녀를 구해준 낯선 남자가 등장하기까지의 장면( S#_3_4_5)은 단조롭긴 하지만 이상하지는 않다. 그러나 하품을 하는 김두한과 곁에서 온통 영화에 빠져든 세츠코가 화면을 바라보는 장면( S#_6) 이후는 마치 영화를 보는 쪽에서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영화와 영화 속의 영화를 분리해낼 수 있다면 기모노 여인을 구하러 나타난 낯선 남자가 자객들과 마주하는 장면( S#_5) 다음 쇼트는 ( S#_7) 나무 뒤에서 기모노 여인이 숨어서 대결을 바라보는 것을 그녀 뒤에서 찍은 장면이다. 두 개의 쇼트 사이에 김두한과 세츠코의 장면이 없었다면 이 두 개의 쇼트는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혹은 순간적으로 연결시킨다 할지라도 이상할 정도로 어색해보인다. 왜 그렇게 이상해진 것일까. 그건 대결을 나무 뒤에 숨어서 훔쳐보는 기모노 여인의 얼굴(close_up)을 보기 위해서이다. ( S#_8) 그렇지 않으면 대결이 중심에 있는 화면에서 그 바깥에 있는 여인의 얼굴을 잘라 들어가는 것은 완전히 흥을 깨는 일이다. 그때 이 여인의 얼굴은 세츠코가 이 씬을 바라보면서 감정을 몰입하는 주관적인 쇼트처럼 보인다. 혹은 영화를 바라보는 세츠코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영화 안의 영화 바깥으로 나갔다 되돌아올 필요없이 두 쇼트를 하나로 겹쳐놓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동일화 효과이다. 말하자면 쇼트의 경제성. 기모노 여인이 아니라면 이 순간 세츠코는 도대체 누구에 의지해서 <最後の復?>를 보고 있겠는가. 가장 이상한 쇼트는 낯선 남자가 자객들을 물리치고 나자 나무 뒤에 숲어있다가 나타나는 기모노 여인의 장면이다. ( S#_9) 그녀가 무릎을 꿇고 고맙습니다, 라고 인사를 하지만 낯선 남자는 돌아보지도 않고 떠난다. 나는 그녀가 나타난 방향 때문에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해졌다. 도대체 어떤 원칙으로 이 숲길에 상상선을 그은 것일까. 숨어서보던 그녀는( S#_7) 반대쪽 방향에서 나와서( S#_9) 인사를 한다. 두 가지 원칙. 첫째, 네 개의 쇼트는 카메라가 모두 정지해 있다. 그러기 위해서 액션 장면을 모두 담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하지만 장면의 성질로 볼때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서 찍었다. 둘째, 이 네 개의 쇼트는 180도를 기준으로 자리를 이동하기 시작한다. 왜 그렇게 찍은 것일까. 유일한 이유. 언제든지 진행을 중단할 수 있다. 네 개의 쇼트는 어떤 원심력도 갖지 못하고 모두 제각각 떨어져나간 것이다. 이때 이 쇼트의 진행을 멈출 수 있는 절단의 힘은 그저 세츠코가 관심을 잃으면 된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最後の復?>를 보는 까닭은 세츠코가 보고 싶어서이기 때문이다. 그때 세츠코가 영화 속의 영화로부터 눈을 거두고 감두한에게 눈을 돌리기만 하면 된다. 영화 안의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라도 한듯 세츠코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으면서 김두한을 보는 것은 하나의 중단이자 새로운 연결의 신호이다. 아쉽지만 <最後の復?>는 이 순간 이미 끝난 것이다. < 장군의 아들 3 > 엔딩 아쉽지만 < 장군의 아들 > 세 번째 편에는 영화 속의 영화 장면이 없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상한 기시감이 든다. 모든 이야기가 다 끝난 다음, 그러니까 김두한과 김동회가 힘을 합쳐 혼마치깡에 쳐들어가 하야시 구미(組)와 최후의 대결을 벌인다. 세 편의 <장군의 아들>에서 수없는 대결장면이 있었지만 이렇게 혈겁(血劫)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광경은 거의 유일하다. 그런 다음 김동회는 김두한을 부축하여 떠난다. 그런데 김두한은 종로를 떠나서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이 장면은 내게 두 가지 이미지로 다가온다. 하나는 이제 이 긴 연작이 끝났다는 작별인사처럼 보인다. 그러면서 힘겹게 비틀거리면서 떠나가는 두 남자. 여기에는 그 동안 김두한을 둘러싸고 등장했던 어떤 인물도 곁에 없다. 그들은 마치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것만 같다. 하나의 계열의 소멸. 더 이상 작동할 것이 남아있는 않은 장르 기계. 저물어가는 석양의 햇살. 여기에 남은 쓸쓸한 기호들. 물론 이것은 해석이 아니라 그저 덧붙여진 감상이다. 나는 여기에 하나의 감상을 더 할 생각이다. 이 장면을 보았을 때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장군의 아들> 일편에서 본 영화 속이 영화 < 國境 >에서 찍지 않은 쇼트를 본 것만 같았다. 갑자기 이 장면만을 마치 기억 속의 한 장면처럼 희미해보이게 찍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fog_filter) 나는 김두한과 김동회가 사랑도 잃고 조국도 잃고 오직 그 둘만이 서로를 의지하며 그들의 유일한 고향인 종로를 떠나는 뒷모습에서 김영철과 박동일의 마지막 모습, 아니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國境>의 마지막 장면을 본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화와 영화 속의 영화가 하나가 되어버리는 것만 같은 착각을 보았다. 물론 이 설명은 그저 부질없는 소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중얼거렸다. 영화와 영화 속의 영화 사이의 화해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영화에서 영화 속의 영화를 말하는 것은 죽음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세르주 다네가 말했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건 부활의 시간을 설득하려는 것이다. 나는 그 둘이 대립적인 시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재에서 과거에로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할 때 그와 동시에 이미 본 영화의 과거의 시간이 지금 보고 있는 영화의 현재의 시간 속에서 운동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 설명하고 싶다. 나는 영화 안의 시간을 무한정 팽창시키고 싶다. 그리고 이것이 나의 거의 유일한 임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이번 이야기 끝, 그리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