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직캣] 노아의 프로포즈매직 강좌 1강-반지 꺼내기
- 제작년도
- 2008
사진: 출판사 무제 가끔은 혼자서 몰래 이와 같은 생각들을 해왔다. 영화 시나리오는 영화에게 마치 엄마 같은 존재라고. 영화 촬영장에서 자신만의 일을 해내고 있는 이런저런 자식들은 역시 엄마가 있었기에 거기 있게 된 거라고. 엄마가 자식을 어찌 낳아 길러내는 건지에 대해 일일이 거론할 수 없다고 느끼듯이, 한 편의 영화 시나리오가 쓰이는 과정은 실로 재현이 불가능한 작업이다. 영화 시나리오 작가는 자신이 대체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은 시나리오를 써낼 수 있었는지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스스로도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모든 언어적·비언어적 창작의 속성이 그렇기는 하겠지만, 그중 특히 영화 시나리오 작업은 비유하자면 마치 밤사이 꾸는 꿈 같다. 아니, 밤사이 지나간 꿈을 일상과 인생에 연결시켜 플롯화하려는 편집증적인 집착에 가깝다. 이 과정은 환한 조명 아래 카메라 앞에서 기록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거칠고 어두운 침묵의 방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러므로 대개 주목받지 못한 채 잊히거나 심지어 무시당하기도 한다. 마치 우리들의 엄마들이 그러하듯이. 언제부턴가 나는 이것이 영화 시나리오 작가가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불운이자 불행이라고 생각해왔다. 또한 이 모든 불리함과 아픔을 작가가 자기만의 것으로 기꺼이 끌어안을 때, 그때야 비로소 그에게는 더없는 보상이라 할 만한 삶의 아이러니와 예술의 신비로 가는 비밀스러운 문이 열린다고도. 좀 더 구성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해보자면, 영화 시나리오에는 어떤 의미에서건 작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고유한 인생의 단면뿐 아니라, 그를 스쳐 가는 여러 만남들, 인연들, 인연이 아닌 것들, 실제의 사건들과 환상 혹은 망상 속의 기미들이 모두 담기기 마련이고 담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허구의 영화를 최대한 진짜 삶 같이 보이게 하기 위하여, 영화 시나리오 작가는 매순간 여러 사람이 되어야 하며, 동시에 여러 사람을 보는 카메라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실로 집필 중인 영화 시나리오 작가는 매순간 자신을 부수고 또 부순다. 얼마나 부술 수 있을지에 승부가 달려있다. 혹자는 나에게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동안 작가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이 마치 정신분열증 환자가 겪는 일과 비슷하다는 말을 해주었는데, 나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의 말이 옳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마도 이와 같은 유체이탈의 무한반복과정을 포착해내거나 이해해내는 일은, AI 첨단 장비를 구비한 미래의 뇌신경과학자나 도스또예프스키 급의 작가에게 맡겨져야 할 법도 하다. 영화제작현장을 찍는 메이킹필름 정도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 정말로 이와 같은 일을 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이해하는 일에 한 획을 긋는, 꽤나 아름답고 감동적인 과학 일기가 될 수도 있겠다. 오랫동안 아주 은밀한 방식으로 이루어져 온 일이기에 더욱 그럴 것 같다. 나는 가끔은 혼자서 몰래 이와 같은 생각들을 해왔다. 영화계라는 곳, 보이는 게 너무도 중요한 세계에서 하필 영화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작되는 것이란 생각을 갖게 됐다. 애초에 영화는 작가의 고독한 삶에서, 그의 일상을 지나쳐가는 모든 유의미하고 무의미한 사물과 인연 속에서 절묘하게 잉태된다. 그것은 언어로 쓰여 책이 되고, 책을 읽는 사람들이 되며, 그 사람들이 붐비는 촬영장이 된다. 그곳에서 카메라를 통해 결코 만질 수 없으나 만져질 듯 생생한 영상으로 기록된다. 이 영상은 마침내 무수한 디지털 입자가 되어 하얀 화면 위로 투사되고, 화면 앞에 앉은 익명의 인간들의 망막을 뚫고서 그들의 몸과 삶 속으로, 어쩌면 영혼 속으로 침투한다. 그러므로 나는 영화가 최종적으로 만들어지는 곳은 결국 우리들 각자의 인생 속에서 라는 생각을 갖게 됐는데, 이것은 점점 하나의 견해라기보다 신념에 가까운 것이 되어갔다. 나는 어느새 영화는 잔상이라는 믿음을 갖게 됐고, 어느 날부턴가는 우리 안에서 영화의 잔상이 우리 각자의 삶과 섞이고 섞여 뒤죽박죽인 상태가 될 때, 그때야 비로소 영화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의미가 생겨나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싶어졌다. 책 『내 모든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생각의 바탕에서 생겨났다. 이 책의 집필 과정에 관한 이야기 중 가장 아카이빙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 바탕이라고 본다. 『내 모든 것』 중 인물들이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언급한 작품들 (상) <걸어도 걸어도>, <애정의 조건> (사진: IMDb , Photo by Archive Photos/Getty Images, © 2012 Getty Images) (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코요테 어글리> (사진: IMDb , © 2000 Buena Vista Home Entertainment) 좀 더 용기를 내서 첨언하자면, 영화 시나리오 작업에 대한 본질적 이해와 현실적 지지 없이 영화 및 기타 영상산업의 인간다운 도약을 기대할 수는 없다고 본다. 개인적으로는 이미 AI가 다 할 수 있겠구나, 싶은 방향으로 퇴행 중이라고도 본다. 그러나 영화라는 것이 단지 영상 오락물 내지 서비스 업종이 아니라 예술일 수 있다고 믿는 어떤 인간이 있는 한, 그는 기필코 자신만의 고유한 인생을 스쳐 갔던 기억과 상상을 통하여서 스스로에게 운명 같은 영화 시나리오를 써내고자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는 지금과 같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는 꽤 뼈아픈 전투가, 아마도 산업적으로 패배할 확률이 높은 무모한 도전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하여 나는 이 시대의 자본과 시스템에게 굳이 이 말을 전하고 싶다. 만약 인간만이 이룰 수 있는 예술에 투자하고 싶다면? 골방에 처박힌 가난한 작가를 더 자주, 더 집중해서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마치 <삼체>(2024)에서 인류의 미래를 미리 사냥해 둔 외계인이 등장하기 전에 면벽수행을 할 현자들을 골라 침묵의 인류구조 시나리오를 비축해달라고 강제하듯이. 그러나 유튜브 쇼츠로부터 도파민을 공급받기 위하여 어둠 속 이부자리에서 녹내장의 위험을 무릅쓰는 현대의 인간들이 과연 그와 같은 투자를 감행할 투지를 품을 수 있을런지? 내 판단으로는, 영상예술의 미래는 당분간 AI에 삼켜졌다고 본다. 한편 이후 AI의 인격적 고민이 가시화될 세계에 대해서는, 내 능력 밖의 일이란 낙관론을 남겨두겠다. 그러므로 책 『내 모든 것』이라는 한 영화 시나리오 작가의 취재일기, 이런저런 사람들의 삶과 영화에 대한 고백들을 담아낸 우연하면서도 필연적인 순간들의 기록, 그들 각자의 이야기를 각각의 의미 있는 단편으로 구성해보고자 애를 쓴 창작노트, 그 창작의 과정 속에서 작자 스스로의 삶을 거울로써 이용하고 들여다보고자 한 고군분투기는 그저 티끌 같은 기록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이 기록은 아주 개인적이면서도 유일한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영화 시나리오 작업이란 본래 이처럼 개인적이고 유일한 것일 수밖에 없음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쓰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그저 평범한 에세이나 인터뷰집이 아닌 단편소설집 같다고 느끼곤 한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본래 영화 시나리오 작가가 하는 일이라는 것이, 작가 자신과 작가 주변의 삶을 바탕으로 허구의 주인공을 찾아내고 그의 삶을 진짜처럼 그려내는 것이니까. 책 『내 모든 것』의 맨 처음 가제는 “삶을 이기는 영화”였다. 실은 그 시절 나 자신에게 던지고픈 질문이었다. 영화라는 게 과연 삶을 이기나? 혹은 영화라는 게 과연 삶의 고통을 이기게 해주나? 영화라는 게 내가 이렇게 기를 쓰고 진을 빼며 만들어야 할 만큼 가치가 있는 건가? 그럴 만큼 영화라는 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필요하긴 한 건가?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서 늘 이러한 질문들을 품고 살아가다보니, 집필 중에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 취재를 하다보면 자연스레 영화 이야기를 하게 됐고 묻게 됐다. “살면서 영향을 받은 영화가 있나요? 그게 영화의 이야기든 영화 속 한 장면이든, 인생에 남아있는 어떤 영화가 있나요?” (사실 이 책에 ‘사람들의 진짜 인생영화에 대한 이야기’라는 이름표를 달아준 이는 작가가 아닌 이 책을 펴낸 무제출판사였음을 여기서 밝혀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삶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책의 소재가 되기에는 너무 보잘것없거나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고, 또 그런 만큼 자유로웠다. 그들이 더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익명의 장치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책 속 ‘노아’와 ‘세라’라는 가명으로 등장하는 두 여성과의 잇단 만남이었다. 둘 다 집필 초반에 우연한 기회로 처음 만난 사람들이었다. 왠지 들어볼 만한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 예감에 인터뷰를 청했는데, 각각 성폭력 피해 경험과 자살 중독을 앓은 경험을 털어놓으며 내 작은 머릿속에서는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이야기를 가져다줬다. 이곳에는 노아의 이야기를 남겨두려 한다. <릴리슈슈의 모든 것> 중 / 사진: IMDb( 1 , 2 ) 노아는 조기유학시절 덜 신중했던 성관계로부터 비롯된 집단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로서, 이후 성(性)적으로 문란하고 예민하고 특수한 각종 시도와 방황을 통해 생존해가고 있었다. 나에게 그것은 그녀 안에서 필연적인 서사로 느껴졌다. 좀 더 과감히 말하면, 고통으로 각인된 자기 몸의 한계를 부수려는 존엄한 투쟁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영화 < 릴리슈슈의 모든 것 >(이와이 슈운지, 2001)에서 집단 성폭력의 피해를 입은 후 자살을 하는 여고생, 아오이 유우와 친구가 되는 상상에 빠져들곤 했는데, 단지 그 영화 속으로 들어가 그녀 곁에 있고 싶을 뿐이라고 했다. “그냥 피해자가 한 명 느는 거죠. 그렇지만 덜 외롭잖아.” 나는 노아의 초현실적인 연대의식에 충격을 받았으며, 그녀가 혼자였던 그 긴 시간 동안 얼마나 애타게 누군가를 기다렸을지에 대해 단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실제로 몸이 조이는 것 같은 감각을 느껴 원고를 만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을 헤맸다. 내 글의 처음 엔딩은 노아가 아오이 유우와 함께 무해한 동네 청년들 속에 섞여 마음껏 수영을 하는 장면이었다. 그때는 그저 그녀의 몸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물살 속에 잠겨 있기만을 바랐던 것 같다. 그러나 글쓰기를 마친 후 거듭해서 읽어볼수록, 이와 같은 결말은 용맹했던 노아의 고백에 비해 너무나도 유치한 것 같았다. 어느 나른했던 저녁에, 나는 친구에게 원고를 보여주며 이렇게 고백했다. “사실 노아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는 영화 속에서 연이 날던 그 언덕이 더 무서워졌어. 영화에서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아이들이 빨간 연을 날리고 있잖아. 너무 착해 보이고 너무 잘 웃고 너무 평범해 보이는 남자아이들이, 딱 일본사람들 같잖아. 태양 같은 욱일기를 휘날리면서 해맑게 사람을 죽였던 그 사람들 말이야. 내 말은 일본인이라서 그렇다는 게 아니고, 일본이든 어디든 어느 곳에나 있을 수 있는 사람 같다는 거야……. 그런데 있잖아, 나한테는 그게 마치 영화 같기도 하거든. 영화라는 게 원래 너무 예쁘고 너무 멋지고 그래서, 그냥 그것 자체로 충분해보일 때가 많잖아. 심지어 영화 속 어떤 장면이나 인물이 내 영혼을 병들게 해도, 그게 나보다 근사해보인단 이유로 내가 거기에 그냥 머무르고 싶을 때가 있잖아. 주저앉아버리기도 하잖아. 혹시 노아에게 <릴리슈슈의 모든 것>이 그런 거 아닐까? 자꾸 그런 걱정이 들어서 그랬는지, 나는 이 이야기를 쓰는 게 너무 힘들었어. 사실 나는 노아가 그냥 또 한 명의 피해자로 그 영화 속에 들어가는 게 싫어. 나는 노아가 이제 그만 그 영화에서 나왔으면 좋겠거든. 아오이 유우의 손을 잡고서 같이 탈출했으면 좋겠거든. 내가 영화인이랍시고 영화에 대해 이런 책을 쓰고는 있지만, 영화 같은 게 뭐 그리 중요하겠어? 노아가 사는 게 중요하지!” 그래서 나는 노아와 아오이 유우를 그 영화로부터 탈출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사람들의 진짜 인생영화에 대한 이야기, 책 『내 모든 것』은 그렇게 시작됐다. 2026년 4월, 오정미. <릴리슈슈의 모든 것> 중 (사진: IMDb ) Behind the Book : 저자에게 아직 남아있는 이야기 한 사람의 질문이 늘어나고 깊어진 끝에 수백 쪽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마침내 책 한 권으로 독자에게 닿은 저자가, 치열하고도 가치 있던 여정을 들려줍니다. 오정미(영화 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 l 영화 < 버닝 >(2018), < 심장소리 >(2022), <가능한 사랑>의 각본을 썼다. 책 『내 모든 것』을 썼다.
사진: “ Sinners ”, IMDb 뱀파이어물과 좀비물을 좋아한다. 전염과 변형이라는 설정은 때로 경계와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날카롭게 벼리는 은유가 된다. 그 속에서 공동체의 무의식이나 내가 지닌 두려움의 근원을 마주하는 일은 늘 일말의 고통을 동반한 쾌감을 준다. 2025년 봄 개봉한 라이언 쿠글러 연출의 < 씨너스: 죄인들 >은 이러한 장르적 가능성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갱신한 작품이었다. 이 영화를 하나의 단어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클리셰를 충실히 따르는 뱀파이어물이면서 동시에 음악영화이고, 인종차별을 다루는 정치적 블랙 호러이자 한편으로는 종교와 구원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성장영화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1932년 미국 남부 미시시피 델타를 배경으로 한다. 노예 해방 이후에도 수많은 흑인이 소작농으로 농장에 묶인 채 가난과 차별 속에 살아갔다. 일부는 사소한 죄목으로 체포되어 강제노역에 내몰렸다. 박해받는 삶 속에서 기타와 하모니카를 들고 길 위에 나선 흑인 음악가들이 델타 블루스를 탄생시킨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사진: “ Sinners ”, IMDb 쌍둥이 형제 스모크와 스택은 시카고에서 갱스터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 델타로 돌아온다. 낡은 제재소를 개조해 클럽을 열고, 블루스 뮤지션을 꿈꾸는 사촌 새미와 함께 개업 첫날 밤을 준비하며 새 삶을 그린다. 이들이 꿈꾸는 것은 흑인들만의 진정한 문화 공동체다. 그러나 새미의 블루스 선율이 울려 퍼지자 어둠의 불청객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클럽 문 앞에 선 세 명의 백인 뱀파이어는 입장을 허락해 달라고 청한다. 자신들도 뮤지션이라며 “불쌍한 울새의 살을 깨끗이 발라먹었지(Pick Poor Robin Clean)”라는 가사의 다소 섬뜩한 노래를 아일랜드 포크 풍으로 연주한다. 능숙하고 경쾌한 연주는 순식간에 좌중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본래 이 곡은 1927년 블루스 뮤지션 루크 조던이 발표한 노래다. 흑인 문화가 백인 사회에서 전유되고 소비되어 온 기나긴 역사가 압축적으로 포착되는 장면이다. 사진: “Sinners( 1 , 2 )”, IMDb 세 백인은 뱀파이어가 되어 뭉쳤지만 다른 백인성의 층위를 드러낸다. 아일랜드인으로 설정된 레믹은 대기근과 식민 지배, 종교적 억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이주민의 후손이다. 그는 수백 년 전 침략자에게 동화된 피해자이자 문화적 흡혈을 욕망하는 새로운 침탈자다. KKK단원 조안과 버트 부부는 도덕적 타락을 멸시하며 타자를 배제해 온 미국 사회 내부의 폭력성을 상징한다. 그들은 금화를 탐내다 레믹에게 물려 뱀파이어가 되었다. 흑백 대립 바깥에 위치한 인물들에게도 각자의 역사가 있다. 스택과 사랑하는 사이였던 메리는 백인의 얼굴을 가졌지만 흑인 가족 사이에서 자라 흑인처럼 말한다. 피부색과 문화적 정체성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마을에서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는 중국계 미국인 부부 보와 그레이스는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백인과 흑인에게 따로 물건을 팔며 생계를 유지한다.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경계 위에 머무는 아시아인의 위치를 드러낸다. 땅의 ‘원주민’으로서 침탈과 학살을 가장 오래 겪어온 촉토인들은 이 모든 갈등 이전에 이미 추방된 공동체가 있었음을 환기하는 존재다. <씨너스: 죄인들>이 그리는 인종 갈등에는 이렇듯 서로 다른 상처의 시간이 혼재돼 있다. 영화 바깥에도 이 구조를 암시하는 시각적 장치가 있다. 개봉과 함께 공개된 십여 종의 인물 포스터다. 주연과 조연을 가리지 않고 등장인물 모두의 얼굴을 개별 이미지로 제작한 방식은, 단 하나의 영웅 서사가 아니라 경계인들의 초상을 나란히 놓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사진: “Sinners”, IMDb 선악의 구도 역시 단순하지만은 않다. 쌍둥이 형제는 시카고에서 이탈리아 마피아의 와인과 아일랜드 갱단의 맥주를 훔쳐 왔다. 클럽을 여는 데 사용한 자본 또한 폭력과 약탈의 결과다. 젊은 시절 그들이 인종차별만큼이나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으리라는 점도 짐작할 수 있다. (친부 살해 소문으로 형제는 이미 고향에서 악명을 얻은 인물들이다. ‘죄인들’이라는 제목은 일차적으로 이들을 가리키는 듯 보인다.) 라이언 쿠글러는 흑인이 겪어온 고통의 역사를 조명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모든 존재가 서로 얽힌 폭력의 계보 위에 서 있음을 끊임없이 암시한다. 영화는 묻는다. 죄인은 누구인가. 하지만 포스터에 찍힌 문구(We Are All Sinners)가 일러주듯, 죄를 귀속시킬 대상은 쉽게 단정되지 않는다. 이 질문을 가장 노골적으로 입에 올리는 인물이 뱀파이어의 수장인 레믹이다. 레믹은 평등과 하나 됨을 외치며 흡혈을 통한 영생의 길을 약속한다. 처음에는 “강요된 종교”였던 기독교를 향한 농담처럼 들리지만, 곱씹을수록 입맛이 쓰다. 인간이 차별과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은 살아생전에는 불가능하며, 죽어서야 비로소 모두가 동등해질 수 있다는 역설이기 때문이다. 인간 무리와 뱀파이어 무리의 대결은 러닝타임 한 시간을 훌쩍 넘긴 뒤에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파국으로 치닫는 이 격투는 분명 < 황혼에서 새벽까지 >(로버트 로드리게즈, 1996)를 연상시키는 폭발적인 액션이지만, 어쩌면 이 영화에서 가장 덜 중요한 대목일지도 모른다. 장르적 환상은 언제나 현실에 실재했던 고통을 조금 더 견딜 만한 이야기로 바꿔 보여주는 방식이다. 이튿날 아침 무장한 채 트럭을 몰고 클럽 앞에 나타난 KKK단의 모습에서 우리는 한 편의 극영화가 연출한 클라이맥스의 뒷면을 슬쩍 엿볼 수 있다. 뱀파이어와 치고받고 싸우다 죽는 이야기는 두건을 뒤집어쓴 인간들에게 무차별 총살을 당하는 이야기보다 훨씬 받아들이기 쉽다. 모든 초현실적 서사가 그렇듯, 흡혈귀와 인간의 하룻밤 소동 역시 잔혹한 현실을 뒤집어 각색한 이야기일 따름인 것이다. 사진: “ Sinners ”, IMDb 이 영화에서 블루스는 소재나 배경음악이 아니라 영화의 시공간을 흔드는 힘으로 작동한다. 뮤지션의 업보를 짊어진 사람은 생과 사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과거와 미래의 영혼을 불러내는 중재자로 묘사된다. 그 정점은 개업 무대에서 새미의 블루스 선율에 맞춰 클럽 안의 모든 사람이 몸을 들썩이기 시작하는 롱테이크 시퀀스다. 블루스와 힙합, 중국 경극과 발레, 로큰롤과 디제잉이 하나의 공간에 포개지고, 서로 다른 시대의 몸들이 같은 박동 위에 놓인다. <씨너스: 죄인들>은 두 가지 화면비로 촬영되었다. 가로로 긴 2.76:1 비율로 상영되다가 특정 구간에서 1.43:1 아이맥스 GT 화면으로 확장된다. 클럽 롱테이크 시퀀스에서 이 전환은 특별히 압도적인 몰입감을 준다. 그것은 시각적 스펙터클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 눈앞의 스크린은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시간 속에서 구축해 온 문화와 역사의 총합처럼 느껴진다. 프레임은 이미 지나간 것과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을 포함하는 장소가 된다. 영화가 타인들과 함께 꾸는 집단적 꿈이며, 역사라는 무의식의 망막에 잠시 맺혔다가 사라지는 잔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언 쿠글러 감독은 “극장에서의 공동체적 경험을 여전히 믿는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의 말은 빈말로 들리지 않는다. <씨너스: 죄인들>은 나의 신체가 극장이라는 어둠 속에 타자들과 함께 놓일 때 비로소 완성되는 감각을 오랜만에 경험하게 해주었다. 이 짜릿한 영화적 경험이 소수의 극장에서만 가능하다는 아이러니를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사진: “Sinners( 1 , 2 )”, IMDb 이 이야기가 흑인의 삶에 대한 헌사로서 만들어졌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영화는 피바람 부는 밤이 시작되기 전의 ‘좋았던 시간’에 타임라인을 할애하지 않는다. 개업을 준비하는 마을 사람들이 클럽 내부를 고치고 음식을 만들며 웃고 떠들던 낮의 시간은 의도적으로 생략된다. 결말에 이르러 스모크의 회상 속에서 몽타주처럼 스쳐 지나갈 뿐이다. 중요하게 남겨지는 것은 선택의 순간들이다. 기타를 내려놓고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요구 앞에서 새미는 음악의 길을 택한다.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된 새미 앞에 뱀파이어가 나타나 영생을 제안할 때도 그는 거절한다. 영원히 노래하는 저주 대신 삶이라는 박해를 끝낼 자유를 택한다. 영화는 다시 묻는다. 블루스는, 나아가 예술은, 죄인가. 아니면 구원인가. 음악은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평등도 해방도, 영원한 평화도. 다만 이 폭력적이고 상처투성이인 세계에서 잠시 다른 삶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며 불온하고도 마법 같은 순간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을 뿐이다. 스크린이 이따금 그러는 것처럼. 김영글(미술작가) l 텍스트와 이미지, 영상과 출판을 아우르며 활동한다. 『아무튼, 야구』(2025), 『남의 노래』(2024), 『사로잡힌 돌』(2024), 『노아와 슈바르츠와 쿠로와 현』(2021) 등의 책을 썼고, 주요 영상 작업으로 < 파란 나라 >(2019), <해마 찾기>(2016)가 있다.
사진: " 플로우 ", IMDb 한국영화로는 두 편을 골랐다. 이란희 의 < 3학년 2학기 >(2024)는 < 다음 소희 >(정주리, 2022)와 겹치는 영역을 다루지만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르다. 멜로드라마는 최소화되었고 아마도 지속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차분한 일상성이 들어온다. 무엇보다 이처럼 일상의 노동과 그 환경에 이만큼 깊은 관심을 가지는 영화는 오래간만이다. 윤가은 의 < 세계의 주인 >(2025)을 통해 자주 다뤄진 특정 소재와 주제를 다루는 단호하고 명쾌한 방식은 놀랍고 새로우며 아름답다. < 씨너스: 죄인들 >(라이언 쿠글러, 2025)과 <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폴 토마스 앤더슨, 2025)는 올해의 할리우드 영화들이다. 지금 이 시대에 고전적인 할리우드의 재료와 스타일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고 할까. < 내 말 좀 들어줘 >(마이크 리, 2024)는 마이크 리의 방법론이 아직도 새롭고 강렬한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올해는 프랑스 영화가 두 편인데 < 여름의 랑데부 >(발렌틴 카디크, 2025)에서 우린 에릭 로메르에서 시작된 전통이 로메르의 영역을 넘어 발전하고 확장되는 과정을 보게 된다. < 미세리코르디아 >(알랭 기로디, 2024)는 아마도 올해의 코미디인 것 같다. 사악하게 어처구니없지만 그러면서도 연민과 사랑에 대해 깊이 탐구하는. 그리고 <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파얄 카파디아, 2024)이 그려보이는 뭄바이는 영화가 도시를 그리는 가장 완벽한 도구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증명해 보인다. 애니메이션을 두 개 골랐다. 너무 처참해서 오히려 우스꽝스럽고, 너무 작정하고 못생겨서 오히려 사랑스러운 < 달팽이의 회고록 >(아담 엘리어트, 2024)과 바로 오늘 다룰 < 플로우 >(긴츠 질발로디스, 2024)다. 사진: " 플로우 ", 네이버 영화 <플로우>를 고른 데에는 개인적 이유가 있다. 작년에 나는 같이 살던 고양이 한 마리를 떠나보냈다. 사적인 이야기는 될 수 있는 한 하지 않으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내 고양이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한다. 그 때문에 <플로우>를 처음 보았을 때 내 개인적인 경험은 영화의 감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 영화가 드림웍스의 < 장화 신은 고양이 >(크리스 밀러, 2011)처럼 의인화된 고양이를 다룬 작품이라면 그만큼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만든 긴츠 질발로디스는 그 길을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큐멘터리처럼 사실적인 고양이를 그렸느냐. 그러지도 않았다. 이 영화의 이름 없는 고양이는 그사이의 가느다란 길을 걷는다. 담벼락 위를 산책하는 진짜 고양이처럼. 질발로디스가 창조한 세계는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곳이다. 인간들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들이 만든 것들은 크게 부서지지 않은 채 남아있다. 고양이가 사는 집에는 그곳에 살았던 인간들이 만든 것 같은 고양이 조각상과 스케치가 있다. 마치 마리 셀레스트호의 사라진 선원들처럼 인간들은 그냥 이유도 없이 갑자기 존재하기를 멈춘 것 같다. 등장하는 동물들도 이상하다. 고양이와 래브라도 리트리버가 같이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캐피바라, 여우원숭이, 뱀잡이수리가 같은 공간에 있다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곳을 우리가 사는 지구와 비슷하지만 다른 곳이라고 퉁 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세계의 물리적 실제성을 계속 의심하게 된다. 이곳은 실재하는 공간보다는 애묘가의 몽상처럼 보인다. 아마도 이곳은 인터넷 사람들이 고양이별이라고 부르는 곳인지도 모른다. 이 정도면 감독의 개인 경험을 의심하게 되는데, 정작 감독은 개를 기른다. 하지만 고양이와 살았던 경험이 있고 그 경험이 영화의 정서적 흐름에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 사진: " 플로우 ", 네이버 영화 이야기는 단순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 영화엔 대사가 없기 때문에. 텅 빈 집에 살던 고양이가 갑자기 홍수와 마주친다. 고양이는 물을 피해 달아나고 그러다가 빈 보트 위에 올라탄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다른 동물들이 한 마리씩 보트 위에 오른다. 그들은 말이 통하지 않고 타고난 습성도 다르다. 하지만 살아남으려면 같이 어울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동물들이 나오는 고전적인 틀의 동화이다. 영화는 동물을 의인화한 수많은 동화에서 논리와 구조를 가져오고 있다. 이 영화에 나오는 동물들은 모두 지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 키를 잡고 보트를 조종하고 윤리적 딜레마를 경험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먹이사슬이 교묘하게 탈색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잡아먹히는 동물들은 물고기밖에 없고 그들에겐 포유류나 조류의 생기가 제거되어 있다. 이 영화가 그리는 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다. 이 정도면 너무 쉽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정작 영화의 묘사는 거기에 맞추어져 있지 않다. 여전히 영화에 나오는 동물들은 수상쩍을 정도로 사실적이다. 자연 상태에서 캐피바라나 뱀잡이수리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고양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럴싸하다. 동작이나 행동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표정이 그렇다. 이렇게 정교하게 고양이 표정을 살린 애니메이션 영화를 전에 본 적이 있나 싶다. 스크린 위에서 이런 이야기와 이런 묘사와 결합되면 관객들은 아주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사진: "Peullou( 좌 , 우 )", IMDb 홍수 이야기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노아의 방주를 다룬 성서 이야기, 지구 온난화에 대한 경고. 하지만 이 두 주제는 이 영화와 완전히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구약의 홍수는 인간에 대한 신의 처벌이다. 하지만 홍수가 시작되었을 때 이미 인간은 사라지고 없다. 지구 온난화에 대한 경고로 보더라도 아귀가 맞지 않는데, 이 세계는 온난화를 촉진했을 기계 문명이 그리 많이 보이지 않는다. 이 목가적 폐허와 환경 문제를 연결해 해석을 시도하면 여러모로 무리수를 두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 세계에서 그냥 일상일까? 이 홍수가 첫 번째가 아니라는 암시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영화 속 동물들은 주기적인 홍수를 경험하며 살아온 것 같지도 않다. 이 영화의 월드 빌딩을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는 어느 단계에서 이상해진다. 결국 모든 게 애묘가의 꿈이라는 게 가장 그럴싸한 답이다. 영화를 연달아 보다 보면 이 세상을 해석하고 의미를 찾으려는 모든 시도가 그리 큰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우선 이 세계는 온전히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어떻게 우리가 아름다움에 시비를 걸 수 있겠는가. 둘째로, 이 영화를 이루는 다른 존재들에 대한 연민, 동정, 이해 그리고 이에 바탕을 둔 친절함과 연대는 세상의 이해와 무관하게 존재한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에게 친절하기 위해 굳이 세계의 숨은 의미를 찾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주의 명령 없이 선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 사진: " Peullou ", IMDb 듀나(영화평론가) l SF 작가이고 영화 컬럼니스트다. 영화 관련 저서로는 『가능한 꿈의 공간들』(2015), 『옛날 영화,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2022), 『여자 주인공만 모른다』(2019), 『남자 주인공에겐 없다』(2020)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