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영화인 구술채록] 미술 - 노인택
- 제작년도
- 2004
1937년 8월 1일 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난 노인택은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여 학교 행사 일을 도맡다시피 했는데,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중학교 시절 교장선생님의 소개로 1953년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서울에서 도선장치기업사라는 장치, 이벤트 사업을 하던 이봉선의 집에 들어가 기거하면서 일을 하게 된다. 이봉선은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돌아와 백화점 미술부에서 이벤트 행사를 담당하고 해방 직후에는 조선산업미술가협회 소속으로 작품 발표전에 참가하는 등 산업미술가로 활동하던 인물로, 1947년 계몽문화협회가 제작한 두 편의 영화 <윤봉길 의사>(윤봉춘)와 <삼일혁명기>(이구영)로 영화 미술에 뛰어들었다. 또한 그는 전쟁기에 대구 키네마극장에서 국극과 악극의 무대 미술을 하기도 했으며 서울로 돌아온 후에는 미도파백화점, 신세계백화점 등의 인테리어 복구를 도맡아 했다고 한다. 이후 노인택은 이봉선을 도와 예그린합창단 발표회, 이승만 대통령 생일축하연 같은 행사에서 무대 미술 작업을 하는 동시에 <운명의 손>(한형모, 1954)을 시작으로 <막나니비사(망나니비사)>(김성민, 1955), <처녀별>(윤봉춘, 1956) 등의 영화 미술 작업을 병행했고, 1956년부터 2년 간 일본 유학파 무대 미술가 김정환이 강의하던 동숭동 소재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과에서 청강하면서 응용미술을 배우기도 했다. [사진 1] 영화 <막난이비사(망나니비사)>(김성민, 1955)의 한 장면 [사진 2] 영화 <처녀별>(윤봉춘, 1956)의 한 장면 노인택에 따르면, 1950~70년대 미술부의 주 업무는 세트 제작이었으며 로케이션이나 오픈 촬영의 경우엔 작품의 시대상이나 분위기에 맞게 세팅을 맞추는 작업을 주로 했다고 한다. 또한 세트 제작이 끝나고 본 촬영에 들어가면 현장엔 미술부원 한 명만이 상주하며 다른 스태프들의 도움을 받아 작업했다. 미술감독은 대개 감독이 직접 선택했고, 한형모나 유현목 정도를 제외한 당시 대부분의 감독들, 특히 김화랑 같은 연극을 하다 영화계로 들어온 감독들은 영화 미술에 대해선 거의 미술감독에게 일임했다. 1950년대 후반 영화 미술을 하던 사람이 턱없이 부족했을 뿐더러 연극이나 악극 같은 무대 작업을 하던 이들이 주로 했던 탓에 세트의 입체감 같은 것이 많이 결여되어 있었는데, 스승인 이봉선의 경우 장치, 이벤트 사업을 하던 분이라 영화 미술에 잘 맞았고 나름 일가견도 있어, 당시 영화 미술에 있어 독보적인 존재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한형모 감독과 영화 미술 이봉선의 조수 시절 노인택은 김성민, 윤봉춘, 신경균, 김화랑 등 여러 감독들의 작품에 참여했지만, 특히 한형모 감독과 관련된 작품을 주로 작업했다고 한다. <운명의 손>, <자유부인>(1956), <나 혼자만이>(1958), <여사장>(1959) 등 한형모가 감독한 작품은 물론 <불사조의 언덕>(전창근, 1955), <단종애사>(전창근, 1956) 같은 한형모가 촬영을 맡은 작품에도 참여했다. [사진 3] 영화 <불사조의 언덕>(전창근, 1955)의 한 장면 [사진 4] 영화 <단종애사>(전창근, 1956)의 한 장면 이는 이봉선과 한형모의 오랜 친분 때문이었는데, 두 사람은 일제강점기 만주 신경미술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사이였고 1947년 이봉선을 처음 영화계로 불러들인 사람도 바로 한형모였다. 이봉선은 이를 계기로 1956년 한형모가 관여하고 있던 삼성영화사의 미술부장을 맡게 되었고, 1957년 삼성 스튜디오를 만드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노인택이 이봉선의 미술 조수로 처음 참여한 <운명의 손>은 당시로선 흔치 않았던 세트 촬영을 감행한 작품이다. 창고를 개조한 간이 스튜디오도 없던 시절이라 시공관 앞 은행 건물 옥상에 미군 부대에서 파는 헌 건축자재를 구입해 광목천을 덧씌워 세트를 제작했는데, 극 중 마가렛(윤인자 분)의 서양식 아파트와 바(bar)는 한형모가 구해온 미국, 일본의 잡지에서 본 사진을 참조해 만들어낸 공간이며, 마지막 격투 신이 벌어지는 동굴 내부 역시 세트였다고 한다. 한형모는 미술을 전공한 사람답게 영화 미술에도 상당 부분 신경을 썼는데, 세트 디자인을 일일이 직접 스케치했으며 아파트 내부의 추상적인 문양의 커튼이나 형광등 스탠드, 부엉이 시계 같은 소품들 역시 한형모가 직접 일본에서 구입해온 것들이었다. [사진 5~8] 영화 <운명의 손>(한형모, 1954) 속 장면들 한형모 감독과 노인택 미술감독이 미국과 일본의 잡지들을 참고해서 만들어낸 세트 디자인과 소품들을 확인할 수 있다. <자유부인>에서 유명한 댄스홀, 요정 별장 같은 모든 세트는 당시 불에 타 지붕도 없던 150평의 용산 RTO(미군장병안내소) 건물을 임대해 지붕에 군용천막을 덮어씌워 만든 소위 ‘창고 스튜디오’에 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세트 촬영보다 양품점을 비롯해 장 교수(박암 분)의 연구실과 미스 박(양미희 분)의 사무실 등 오픈에서의 촬영이 많은데, 노인택은 그 이유가 바로 제작비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 양품점의 경우는 리얼리티 상으로 꼭 필요했던 거리의 엑스트라 수급을 원활히 하기 위해, 그리고 다른 공간들의 경우는 당시 서울대 문리대의 한 건물을 통째로 빌려 연구실로, 사무실로, 경찰서로 활용하면서 제작비를 줄였다는 것이다. [사진 9~12] 영화 <자유부인>(한형모, 1956) 속 장면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산 언덕 장면이나 장 교수의 집 마당, 대문 밖 같은 공간의 낮 장면은 로케이션 촬영을 하고서도 굳이 밤 장면은 어색해 보이는 세트에서 촬영한 것은 당시 전기도 부족하고 발전기도 없던 시절이라 밤거리를 밝힐 정도의 조명 동원이 힘들었고 단기간에 사계절을 모두 촬영하기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사진 13~16] <자유부인>에서 같은 장소의 낮 장면(로케이션 촬영)과 밤 장면(세트 촬영) 삼성 스튜디오와 <그대와 영원히> 1957년 미국의 아세아문화재단에서 원조받은 기재를 관리하기 위해 세워진 한국영화문화협회의 정릉 스튜디오를 필두로, <자유부인>의 제작사인 삼성영화사의 삼성 스튜디오, 그리고 수도영화사의 안양촬영소 등 3개의 스튜디오가 동시다발적으로 건설되었다. 한국 영화인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본격적인 촬영 스튜디오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 중 삼성 스튜디오는 한형모의 아이디어와 이봉선의 설계로 만들어졌는데, 이봉선은 이후 이곳에서 촬영된 <항구의 일야>(김화랑, 1957), <오해마세요>(권영순, 1957), <그대와 영원히>(유현목, 1958), <나 혼자만이>(한형모, 1958), <3인의 신부>(김수용, 1959) 등에 미술감독으로 이름을 올렸다. [사진 17] 영화 <나 혼자만이>(한형모, 1958)의 세트 촬영 현장 이들 작품 중 유일하게 필름이 남아있는 <그대와 영원히>는 당시 삼성 스튜디오의 위용과 유현목 감독의 정교한 미장센(mise-en-scène)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노인택은 유현목이 당시 다른 감독들과는 달리 세트를 제작할 때 많은 의견을 내놓았고 세트 도면을 보고 철두철미하게 콘티를 짜 세트 활용을 굉장히 잘했던 감독으로 기억한다. 실제로 ‘2층 구조’로 되어 있는 교도소 세트라든가 댄스홀, 병원 특실, 지하실 세트 등에서의 세트 활용은 매우 돋보인다. [사진 18~21] 영화 <그대와 영원히>(유현목, 1958) 에서 재현된 '2층 구조' 세트들 특히 이 영화의 세트들이 대부분 ‘2층 구조’로 되어 있는 것에 대해 물론 전체적인 미술 컨셉을 잡을 때부터 미리 계획된 것이었지만, <자유부인> 이후 크레인 같은 장비가 좋아지고 카메라의 움직임이 좋아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러한 세트도 가능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영화에 등장하는 ‘도리스 위스키’나 ‘크라운 맥주’ 같은 상표는 당시 이봉선이 이들 회사의 로고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댄스홀 장면 등에서 노출 시킬 수 있었던 것이며, 이를 통해 위스키와 맥주 등을 아마도 한국영화에서 최초로 협찬받았다고 한다. [사진 22, 23] <그대와 영원히>에 등장하는 '도리스 위스키' 상표(상)와 '크라운 맥주'의 상표(하) 미술감독 노인택과 김기덕 감독 노인택은 1961년 이봉선이 제작에 관여하기도 한 <언니는 말괄량이>(한형모)로 미술감독으로 데뷔했다. 이미 4~5년 전부터 이봉선이 담당한 영화의 미술 작업을 도맡아왔던 그에게 사실 좀 늦은 감이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때부터 노인택은 자신의 이름으로 당당히 작품을 수주받고 능력을 평가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이후에도 노인택은 여전히 이봉선의 도선장치기업사 소속으로 ‘미술 노인택’은 물론 ‘미술 이봉선’의 작품들까지 모두 자신이 진행했다고 한다. [사진 24, 25] 영화 <언니는 말괄량이>(한형모, 1961)의 세트 촬영 현장 미술감독으로 데뷔한 후 노인택은 <원효대사>(장일호, 1962), <언니는 좋겠네>(이형표, 1963), <밤안개>(정창화, 1964), <십년세도>(임권택, 1964), <협박자>(이만희, 1964) 등 이봉선의 그늘에서 벗어나 조수 시절 한 번도 같이 작업해보지 않은 감독들의 작품에 다수 참여했다. 그리고 <악인은 없다>(김기덕, 1962)부터 한형모의 조감독 출신인 김기덕 감독의 거의 모든 작품을 함께했다. 당시 극동흥업에서 전무이사 겸 전속 감독으로 활동 중이던 김기덕은 연간 5~6편의 작품을 연출했던 당대 ‘흥행 랭킹 넘버 원’ 감독이었으며, 멜로드라마, 사극영화, 전쟁영화, 스릴러 영화, 코미디 영화, 스포츠 영화, 심지어 SF 영화까지 다양한 장르 영화를 만든 최고의 스토리텔러였다. 그래서 김기덕과의 작업은 노인택에게 다양한 장르 영화의 미술을 섭렵할 수 있게 했다. 특히 신성일-엄앵란 콤비의 <가정교사>(1963), <맨발의 청춘>(1964) 등을 통해 1960년대 한국영화의 트렌드였던 청춘영화의 미술을 선도할 수 있었다. 김기덕에 따르면, <맨발의 청춘>에서 구현된 레슬링 경기장, 당구장, 댄스홀, 음악다방 같은 장소는 당시 젊은이들의 일상적인 공간이 아니었으며, “가보고 싶지만 못 가본 그런 장소, 외국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공간을 창조”한 것이었다고 한다. 요안나(엄앵란 분)의 서양식 침대 방이라든가 당시로선 획기적이었던 빌트인(built-in) 방식의 두수(신성일 분)의 방 세트 역시 노인택과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낸 것이었다. 김기덕: 두수 방에서 침대 나오는 거. 내가 다 하여간 그런 것들을, ‘아, 이런 게 있으면 재밌겠다’ 하는 그런 아이디어가 있으면 그거를 반영했는데. 그때 마침 그 미술 담당이 노인택 씨라고. 노인택 씨 조수 때부터 나도 조감독 할 때부터 같이 호흡을 맞췄거든. 그래서 굉장히 내 의도를 잘 알고 아주 나하고 호흡이 잘 맞았어요. 1 [사진 26~29] 영화 <맨발의 청춘>(김기덕, 1964) 속 장면들 노인택은 또한 한국 최초의 SF 영화인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에도 참여해 일본에서 온 특수미술감독 미카미 무츠오(三上陸男)로부터 미니어처 제작 기술을 전수받기도 했다. 이전에도 <그 여자의 일생>(김한일, 1957) 등에서 미니어처 촬영이 시도된 바 있지만 조잡하고 어설픈 수준이었는데, 미카미 무츠오가 알려준 축적법 등으로 정교한 미니어처 설계와 제작 기술을 터득했고 이후 <증언>(임권택, 1973) 등에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사진 30~32] 영화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의 미니어처 촬영 현장 다작의 시대, 다작 감독과 다작 미술감독 1960년대 후반 한국영화계는 다작의 시대였다. 1966년 공보부가 국산영화의 무분별한 제작을 막고 초과 공급을 줄이기 위한 일환으로 제작 쿼터제를 시행하고 1967년에는 등록기준을 강화해 25개의 영화사를 12개사로 정리하기까지 했지만, 오히려 1968년부터 한 해에 무려 200편이 넘는 영화가 제작되었다. 이 시기 노인택은 1968년 32편, 1969년 49편, 1970년 47편의 작품에 미술감독 크레딧을 올렸다. 해당 시기 한국영화 총 제작 편수가 1968년에 212편, 1969년 229편, 1970년 209편임을 생각해봤을 때, 노인택이 참여한 작품수는 당해 제작된 작품 중 거의 1/5에 해당하는 편수이다. 여기에 크레딧에는 이봉선의 이름으로 올라갔으나, 노인택이 참여했던 작품들의 수(1968년 12편, 1969년 7편, 1970년 7편)까지 더하면 1/4에 이른다. 물론 당시 스타 배우들과 감독, 촬영기사, 조명기사 등 메인 스태프들도 하루에 서너 작품씩 겹치기 촬영을 하던 시절이었다지만, 한 해 제작된 작품의 1/4을 혼자 감당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선뜻 믿기 힘들다. 사실 당시 노인택은 혼자가 아니었다. 여전히 이봉선의 도선장치기업사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삼성 스튜디오를 비롯해 정릉 스튜디오, 미아리 한국영화촬영소, 우이동 태창영화촬영소, 뚝섬 극동영화촬영소 등 여러 개의 촬영 스튜디오를 관리하며 40~50명의 직원들로 팀을 구성해 로테이션으로 작업했고, 자신은 미술감독이라는 직책에 걸맞게 감리만 맡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에 옷 갈아입으러 가는 것도 어려울 정도로, 한 달에 두세 번 집에 들어가서 잘 만큼 바쁜 나날이었다. 또한 이 시기 노인택이 다작 미술감독이 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우선 늘 함께해오던 김기덕이 다작 감독이었던 데다 1967년부터 또 다른 다작 감독들이었던 고영남, 최인현 등의 작품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고영남과 최인현은 연간 8~10편씩 양산해내던 유명한 다작 감독들이었는데, 노인택은 매년 이들의 작품들 중 한두 편을 제외한 거의 모든 작품에서 미술을 담당했다. 특히 ‘사극의 대인(大人)’, ‘생각하는 황소’ 등으로 불렸던 최인현 감독과의 작업은 그를 다시금 일취월장(日就月將)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부터 사극영화의 미술도 꾸준히 작업해오긴 했지만, <풍운삼국지>(1967), <총각원님>(1967), <천도화>(1967), <칠부열녀>(1967), <나그네 임금>(1967), <자주댕기>(1968), <방랑대군>(1968), <만고강산>(1969) 등 일련의 최인현과의 사극영화 작업은 그에게 고증과 관련된 더 깊고 폭넓은 공부를 하게 했고 사극 미술에 대한 실력과 노하우를 쌓을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사진 33] 영화 <풍운삼국지>(최인현, 1967)의 포스터 [사진 34] 영화 <총각원님>(최인현, 1967)의 포스터 [사진 35] 영화 <천도화>(최인현, 1967)의 포스터 또한 노인택은 1968년 최인현의 <이상의 날개>, <로맨스마마>, <백야>, <5월생> 같은 현대물의 미술을 담당하기도 했는데, 그 중 이상의 삶을 소재로 한 <이상의 날개>는 일반적인 전기영화처럼 이상의 생애를 따라가기보다 그의 실존적 고뇌에 초점을 맞춘 작품으로, 이상의 내면을 연극 무대나 설치미술과 같은 초현실주의적 세트로 구현해내 주목을 받기도 했다. 노인택: 나 도저히 이해가 안 가니까 이거 모르겠다, 세트를 어떻게 지어야 될는지 그랬더니, 마음 내키는 대로, 이해 안 가면 안 가는 대로 세트를 구상해라 이거야. 그러면 자기가 거기에 맞추겠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의자면 발이 네 개 있어야 되잖아. 발 세 개 가지고 의자를 만들라 이거야. 사람이 다리 하나 없다고 못 서 있는 거 아니다 이거야. 걷지를 못할 뿐이다. 이렇게 이해를 하라는 거야. 2 [사진 36] 영화 <이상의 날개>(최인현, 1968)의 포스터 영화진흥공사 미술참사와 촬영 스튜디오 대표 1973년 노인택은 제4차 개정 영화법에 의해 설립된 영화진흥공사에 미술참사로 입사했다. 당시 영화진흥공사는 ‘국산영화의 표본이자 바람직한 제작방향을 제시한다’는 명분으로 <증언>, <아내들의 행진>(임권택, 1974), <들국화는 피었는데>(이만희, 1974), <태백산맥>(권영순, 1975) 같은 대작 국책영화를 직접 제작했는데, 노인택은 이들 작품에 이봉선의 도선장치기업사 팀을 투입시켜 영화 미술을 총괄 관장했다. [사진 37] 영화 <증언>(임권택, 1973)의 미니어처 촬영 현장 [사진 38] 영화 <아내들의 행진>(임권택, 1974)의 한 장면 [사진 39] 영화 <들국화는 피었는데>(이만희, 1974)의 한 장면 이후 노인택은 1975년부터 그동안 이봉선이 대표로 있던 우이동 태창영화촬영소의 대표직을 이어받는다. 1979년에는 세경흥업촬영소의 대표직도 갖게 되지만, 이때부터 노인택의 필모그래피는 우성사의 <왕십리>(임권택, 1976)를 제외하고 <춘자의 사랑이야기>(이유섭, 1975), <국제경찰>(고영남, 1976), <산불>(김수용, 1977), <꽃순이를 아시나요>(정인엽, 1978), <밤의 찬가>(김호선, 1979), <애권>(이형표, 1980) 등 모두 태창흥업의 작품들로만 채워져 있다. 더욱이 1975년 5편, 1976년 4편, 1977년 9편, 1978년 12편, 1979년 5편, 1980년 7편 등 참여 작품이 그리 많지 않은데, 당시 한국영화계는 장기 불황에 빠져있었고 제작 편수가 급격하게 줄어든 상황이었다. 1980년대 초반 방송과 영화가 컬러로 바뀌면서 진행된 한국 표준색상 선정 작업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한 노인택은 1985년부터 남아진흥촬영소 대표로 재직하며 영화보다는 광고영상(CF) 미술을 주로 작업했다. 이 시기 영화 미술 작업은 <마카리안 고>(김완기, 1987) 단 한 편뿐이다. 1992년 남양주의 한국종합촬영소 건립 자문위원으로 참여했으며, 1993년 남아미술센터(개명) 대표이사, 고문 등을 역임하며 <도둑과 시인>(진유영, 1995)의 미술감독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사진 40] 영화 <마카리안 고>(김완기, 1987)의 한 장면 [사진 41] 영화 <도둑과 시인>(진유영, 1995)의 한 장면 1) 공영민⋅김기덕, 『2016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1960~1970년대 한국영화산업의 변화 1권-김기덕⋅김수동⋅김종래 편』, 한국영상자료원, 2016, 13쪽. 2) 박진호⋅노인택, 『2004년 원로영화인 구술채록 자료집 노인택 편』, 한국영상자료원, 2004, 82쪽.
“이 以上 더 재미있는 劍客映畵는 없다!” < 뢰검, 번개칼 >의 포스터 맨 윗줄에 자리 잡은 단 한 줄의 영화 소개. 검객영화라는 자기 지시. 약간의 유머. 나는 이 포스터를 보자마자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가 떠올랐다. 무언가 여기에는 우리를 낭패스럽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다. 둘 사이의 서로 피할 수 없는 관계. 검객영화라는 말. 검객영화로서의 <뢰검, 번개칼>. 두 말이 서로 딱 맞게 겹쳐지지 않을 때 나는 맞지 않는 그 모서리를 생각하는 중이다. 영화를 보여주기와 설명하기. 영화를 둘러싼 이미지와 문장. 이때 저 문장이 호금전의 < 용문의 결투 >를 설명할 때와 지금 임권택 의 <뢰검, 번개칼>에 가서 달라붙었을 때의 차이를 생각하고 있다. 나는 단지 이쪽과 저쪽의 우열을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생각했다면 당신은 나의 인용을 오해한 것이다. 왜 여기서는 저 말이 자연스럽지 않은 것일까. 말하자면 저 문장의 세계를 이 영화가 담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여기 따라올 때 영화는 저 세계에 관한 만족할 만한 주석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불만족스러운 두 개의 텍스트. 검객영화라는 지시. 검객영화라는 (만드는 쪽과 보는 쪽 사이의) 약속. 영화에서 약속의 세계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무엇일까. 하나는 문법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영화는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 이때 나는 크리스티앙 메츠가 아니라 파졸리니의 영화 언어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파졸리니는 이미지란 글쓰기라고 생각했다. 그런 다음 영화는 랑그이고 영화들은 파롤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리얼리티와 영화 사이의 관계에 대한 긴 논의가 시작된다. 파졸리니는 운이 나쁘게 이탈리안 네오리얼리즘의 순간에 도착했고, 그는 자신의 이론을 경유하여 자기 자신을 자기의 시대로부터 소외시켰다. 그는 롯셀리니의 난처한 영화와 마주쳐야만 했다. 말하자면 < 이탈리아 여행 >이라는 수수께끼. 나는 이 문제를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 생각이다. 리얼리티와 영화라는 랑그. 임권택 의 기묘한 리얼리티. 이상하리만큼 잘 다루어지지 않은 < 티켓 >. 역사(들). 무엇보다도 < 길소뜸 >. 파롤로서의 영화 안에 상주하고 있는 랑그의 억압적 제도들. 다른 하나는 장르의 세상을 방문하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건드리려는 것은 이 두 번째 방문이다. 장르는 영화에서 환경에 대해서 논의를 하려는 것이다. 환경? 그렇다. 어떤 장르 안으로 들어오면 갑자기 영화가 그 장르의 약속에 따라서 자기의 기호들의 질료가 각자의 구실과 관계의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우리는 코미디 영화에서 망치로 사람의 머리를 치는 것과 공포영화에서 톱으로 머리를 자르는 것 사이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된다. 둘은 거의 동일한 행위이지만 그 둘은 완전히 다른 반응을 끌어낸다. 채플린이 절벽에 매달리는 것은 운명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지만(< 황금광 시대 >) 릴리안 기쉬가 얼음 조각 위에 쓰러진 채 강물 위로 떠내려가는 것은(<동쪽으로 가는 길>) 절망적인 사건이 된다. 말하자면 영화적 환경. 이때 이 환경 속에서 지질학적 운동은 각자의 장르 안에서 서로 다른 세계의 속도와 질량을 갖게 될 것이다. 무엇이 무엇과 더불어 기능하는가. 주인공이 무엇과 연결되어 활동하기 시작하는가. 이를테면 라이플. 마니 파버는 서부극이란 결국 라이플의 운동이라고 말했다. 하워드 혹스의 < 리오 브라보 >. 악당이 무엇과 접속하여 자기의 힘을 누리기 시작하는가. 프릿츠 랑의 <빅 히트>. 뜨거운 커피. 사건들 사이에서 무엇을 통과시키고 어떻게 가로막는가. 두기봉의 < 익사일 >의 첫 시퀀스를 떠올려보라. 이층으로 이루어진 집. 둘로 나누어진 등장인물들. 그들의 손에 들린 총. 그들이 따라 올라가는 계단. 아무도 없는 것만 같은 거리. 순찰중인 경찰들은 정확히 그 순간 잘못된 장소에 도착했다. 새로운 배치. 그때 무엇이 어떻게 귀속되느냐라는 문제와 만나게 된다. 종종 영화는 세계의 이미지라고 말한다. 나는 영화가 세계보다 크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영화는 세계의 가능성을 거기에 덧붙이면서 그렇게 그 자신을 증식해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부극. 영화가 발명한 세계. 그런 다음 차례로 이 세계는 확장되어 나아갔다. 코미디(들). 멜로드라마. 갱스터 영화. 필름느와르. 사극들. 뮤지컬, SF영화. 공포영화(들). 그리고 수많은 변종들. 세상의 표면 아래 있었을 가능성들. 이때 영화는 세계와 새로운 약속을 맺어나가는 것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영화와 세계 사이의 약속을 종종 이중분절 시켜나갔다. 첫 번째 분절. 환경의 내재성. 두 번째 분절. 기호의 약속. 그때마다 새로운 방법의 약속이 나타났고, 그 안에서 새로운 분자들이 활동을 개시하였다. 분자들? 그렇다. 기호들 사이에 스며들어간 새로운 힘. 끊임없이 안정된 구조는 다시 정의되었고, 그런 다음 새로운 환경이 만들어졌다. 일단 이 환경 안으로 들어오기로 했으면 이 세계의 약속을 먼저 배워야 한다. 이때 이 배움은 셋이 함께 배워나가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먼저 주인공. 그에게 요구되는 이 안에서 살아가는 방법. 이 세계 안의 친족관계. 누가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는가, 라는 문제. 그런 다음 그 세계 안으로 들어온 감독. 차라리 여기서는 (작가가 아닌 말 그대로) 이 세계를 쓰고 있는 한 사람의 저자(un ecrivain, pas un auteur)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는 이 세계의 약속의 문법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아니, 차라리 얼마나 믿는가. 이때 절반은 자기 자신 속에 머물러 있다 할지라도 절반은 이 세계를 따라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고 있는 1969년의 영화관객들. 그들은 아직 호금전의 < 협녀 >, 장철의 < 복수 >, 1970년대 홍콩 골든 하베스트의 무술 영화들. 서극의 < 촉산 >, 왕가위의 < 동사서독 >, 리안의 < 와호장룡 >, 후 샤오시엔의 <섭은낭>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나는 당신이 < 뢰검, 번개칼 >을 지금 본다면 1969년 ‘이후’의 영화들의 경험을 먼저 중단시켜야 한다고 충고할 생각이다. 지금 우리는 시간의 마모를 초월하는 예술의 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대신 정반대로 왜 어떤 영화는 시간의 맥락 안에서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설명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동시대를 경유하는 상상의 공동체. 이때 그들은 서로에게서 서로를 배워야 한다. 세 개의 배움의 선. 이때 이 배움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이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부분적으로만 배우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모두 다 배운다 할지라도 그저 순순히 따르기만 한다면 금방 이 세계는 진부해질 것이다. 종종 이 과정은 환상을 부추길 수도 있지만 환멸을 안겨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때 이 세계는 자기를 구성하는 내부 환경과 이 환경을 떠받치고 있는 외부 환경 사이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종종 상대적인 경계를 형성하거나 예기치 않았던 원인 때문에 낯설고 불편한 약속에 따라 새롭게 세워지거나 종종 중심이 옮겨가기도 한다. <요검>(1971), <월하의 검>(1970) 누군가는 이 약속을 코드라고 지칭하고 싶을 것이다. 나는 의도적으로 그 단어를 피하고 있다. 코드라는 말에는 어딘지 모르게 더 이상의 활동이 중단된 인상을 포함하고 있다. 약속의 형식들. 형식의 약속들. 이 둘 사이의 끊임없는 교환, 이때 나는 먼저 < 뢰검, 번개칼 >이 무협(武俠)영화라고 자기를 호명하는 대신 검객영화라고 지시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다. 무협영화와 검객영화. 검(劍)이라는 말. 협객과 검객. 나는 차례대로 목록을 정리하다 말고 잠시 멈춰 서서 세 편의 영화제목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순서대로 <뢰검, 번개칼>과 < 비검 >, 그리고 < 요검 >. 검(劍)이라는 단어의 반복. 이 세 편은 마치 삼부작처럼 보이지만 (자료만으로는) 서로 아무 관계가 없다. 주연 배우도 전혀 다르며 세 편의 영화를 제작한 영화사도 다르다. <뢰검, 번개칼>과 <비검>은 극동필름에서 찍었지만 <요검>은 덕영필름에서 찍었다. 다만 유일한 공통점은 이 세 편의 영화가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제목으로만 따라간다면 <뢰검, 번개칼> 직후에 < 월하의 검 >이 한편 더 있다. 나는 이 영화를 셈에서 제외하였다. 이 영화는 조선시대가 무대이다. 같은 이유로 제외한 1967년의 영화 < 풍운의 검객 >. 문득 떠올린 이 공통점은 내게 이상한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임권택 은 사극, 혹은 시대극을 찍을 때 언제나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였다. 그런데 이 세 편은 모두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개에 따르면 <비검>과 <요검>은 백제를 무대로 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 세 편의 영화를 비교할 기회가 우리에게는 없다. 이 세 편 중 우리가 볼 수 있는 영화는 <뢰검, 번개칼>뿐이다. 한편 더. 제목으로부터는 떨어져 있지만 1967년에 만든 < 망향천리 >도 줄거리의 소개에 따르면 백제와 신라 사이의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도 지금은 우리가 볼 수 없다. 나는 여기서 이 세 편, 그 중에서도 <뢰검, 번개칼>만을 대상으로 할 생각이다. 서기 668년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의 낯선 환경. 역사의 인과관계로부터 희미해진 시간. 말하자면 검객영화가 성립될 수 있는 장소. 나는 먼저 무협영화를 생각해보고 싶다. 먼저 도착한 것은 무협영화가 아니라 무협소설이었다. 그때는 무협소설이라는 이름대신 무협지(武俠誌)라고 불렀다. 1961년 김광주가 대만의 무협지 <검해고홍>을 번역한 <정협지>가 경향신문에 처음 연재되었다. 그런 다음 1965년 대만작가인 와룡생의 <군협지>와 <무유지>가 번역되었다. 이 두 권의 소설은 무협소설 독자들에게 고전이 되었다. 하지만 무협지가 대중적으로 일종의 서브 컬처가 된 것은 1968년 만화대본소를 중심으로 대여방식을 통해 널리 퍼지면서 시작되었다. 문학비평은 무협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이 책들은 서점에서 구할 수가 없었다. 무협지가 지상으로 올라오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 김용의 <영웅문>이 서점에 판매의 유통구조로 등장하게 된 다음의 일이다. 무협지는 장안의 독자들의 소소한 소일거리이기는 했지만 아무도 이 책들을 사서 자신의 서가에 소장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사려면 전집으로 사야했다) 대부분 시멘트 종이라고 불리는 싸구려 제본을 했으며, 그 당시의 모든 무협지는 (상당수가 국내 출판사가 무명의 작가들을 고용해서 날림으로 쓴 다음) 거의 예외 없이 와룡생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면서 원본과 진본의 구별조차 애매해졌다. 1966년, 호금전의 무협영화 < 방랑의 결투 >가 개봉된 다음 < 용문의 결투 >와 장철의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부천영화제에서는 <독비도>라는 제목으로 상영되었다) 가 홍콩 무협영화의 커다란 성공을 가져왔다. 하지만 이 성공은 매우 제한적인 것이었다. 약간의 기이한 상황. 차라리 풍속이라고나 할까. 이때 당신이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이 있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무협영화를 ‘보는’ 영화관객과 ‘보지 않는’ 관객들 사이에서 어떤 경계선 같은 것이 세워졌다. 이 경계선은 제법 오래 이어졌다. 무협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내내 이 장르를 탐닉했고, 그렇지 않은 관객들은 이 장르 자체에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혐오하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황당무계하다는 것이었다. 당신은 반문하고 싶을 것이다. 버스터 키튼의 영화는 황당무계하지 않은가요. 서부극의 수많은 상황 속의 액션장면들. 또는 뮤지컬의 갑작스러운 안무들. 무엇보다도 힛치콕의 < 새 >. 하지만 1969년을 생각해야 한다. 관객들은 무협영화의 상상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지 않았다. 하늘을 날아다니고 손에서 장풍이 나오며 그저 칼을 한번 휘둘렀을 뿐인데 십 수명이 쓰러지는 장면을 보고 누군가는 피가 끓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워보였다. 이건 영화를 보는 쪽과 만드는 쪽 양쪽 모두에서 심지어 충무로에서도 많은 영화 스태프들은 이 장르를 ‘으악새 영화’라고 부르면서(등장인물들이 ‘으악’하고 죽은 장면들이 줄을 지어 등장한다고 해서 경멸조로 붙인 이름이다) 이 영화의 제작에 참여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이 황당무계한 거부 반응의 이면에는 무언가 무협영화가 대중과 영화가 맺은 약속을 저버렸다는 불쾌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때 무협영화는 십대 청소년들, 혹은 아직 미숙한 어른들, 그 중에서도 남자들의 문화라고 받아들여졌다. 반대로 그들은 어른들이 세워놓은 사회적 약속의 이면을 들여다보았다고 생각했다. 다소 소박한 사회심리학적인 의미에서 무협영화를 1969년에는 외설적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논점을 벗어나면 안 된다. 나는 지금 < 뢰검, 번개칼 >을 만든 임권택 의 상황을 생각하는 중이다. 도식적으로만 말하면 1969년은 영화가 환상의 자리에 (미처 배우지 못한 욕망에게) 양보한 어떤 지연 속에서 망쳐버린 채 살아있는 현실이라면 무협영화는 영화에 대한 도착적인 형상을 한 이면의 모습으로 분열되었다. 무협영화는 자신이 환상이라는 것을 영화보다 더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때 이 적나라한 노출에는 좀 우스꽝스럽지만 아직 기술적으로 미숙한 영화가 액션 속에서 영화 그 자체의 기계적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함께 떠올려야 한다. 배우들을 끌어당기는 피아노 줄, 손바닥에서 나가는 장풍 뒤에 숨겨진 환풍기, 아주 초보적인 특수촬영, 그대로 약점이 노출된 스크린 프로세스, 그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활동하는 배우들. 그리고 마찬가지로 마치 그런 것을 눈치조차 채지 못한 듯이 시침 뚝 떼고 보고 있는 관객들. 무협영화의 약속에는 기괴하지만 일종의 크리스마스와도 같은 상황이 존재한다. 누구나 산타 할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사실을 발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날을 망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도 무협영화의 화면에서 벌어지는 이미지가 진짜라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도 그걸 내세워 빈정거리지는 않는다. 응, 나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그래도 여기서는 할 수 없잖아, 그러니 해도 괜찮아, 그리고 해야만 해. 이건 무협영화잖아. 무협영화의 약속에는 어딘가 냉소적인 상상이 관객의 공동체를 지배하고 있다. 이때 이 냉소적인 상상은 만드는 쪽도 동시에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1969년, 이 약속의 세계를 경유하는 임권택. KMDb 에는 < 뢰검, 번개칼 >의 줄거리가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뢰검이라는 보검을 둘러싸고 검객들 사이에 치열한 칼싸움이 벌어진다. 그들 검객 중 안길원이 뢰검의 행방을 찾아 적진으로 혼자서 돌진한다. 그리하여 적장들을 섬멸하고 뢰검을 찾은 다음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떠난다” (http://www.kmdb.or.kr/movie/md_basic.asp?nation=K&p_dataid=01976) 먼저 이 소개를 빨리 잊을 것. 줄거리를 쓴 사람은 이 영화를 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자료도 찾아보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크게 웃을 수밖에 없는 지적. 아쉽게도 이 영화에는 ‘뢰검’이라는 보검이 나오지 않는다. 이 줄거리는 영화와 아무 상관이 없다. 영화 <뢰검, 번개칼>은 동명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이다. 아마도 영화는 소설이 출간되자마자 제작되었을 것이다. 나는 이 과정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소설의 출간 시기와 영화의 제작년도가 같은 1969년인 것으로 단지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고향하와 성걸 두 작가가 함께 집필한 <뢰검(雷劍)>은 다섯 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권마다 서로 다른 부제가 달려있다. 당시의 소개를 보면 대만 무협지가 번역되던 시기에 ‘한국 작가가 쓴 최초의 무협소설’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아마도) 창작 무협소설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두들겼던 것 같다. 이 다섯 권의 소설은 지금도 (짝을 모두 갖추지 못한 채) 고서희귀본 호사가들 사이에서 고가로 거래되고 있다. 이 다섯 권의 소설은 서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영화 <뢰검, 번개칼>은 이 소설의 첫 번째 권인 ‘풍운의 제국’만을 영화로 각색하였다. 나는 이 소설이 연작으로 기획되었는지, 아니면 어떤 연유에서 첫 번째 권만이 영화화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또한 원작 소설을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소설과 영화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영화에 한정해서만 이야기 할 수밖에 없다. 우선 낯선 환경. <뢰검>은 중국의 중원을 무대로 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니 당연히 무협지에서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소림사. 무당파, 화산파, 곤륜파, 아미파, 점창파, 청성파, 공동파, 종남파, 그리고 거지패들로 이루어진 개방이 모두 이야기의 장치에서 제외되었다. 혹은 약속의 바깥에서 진행된다. 무협이란 그 자체로 하나의 국가 안의 국가이다. 이 말을 유심히 보아주기 바란다. 두 개의 국가 사이의 연합과 분리. 선택받은 자들만이 이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국가 바깥의 국가에 머물러야만 한다. 국가 안의 보이지 않는 국가. 무협의 기호를 배운 자들만이 이 국가 안에 들어올 수 있다. 물론 이 기호를 아는 자들이 외부에서 찾아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 나라를 찾아오는 다른 나라의 문화는 이질적이거나 종종 외부적인 존재들로 취급당한다. 이를테면 서역인들. 낯선 상인들. 적대적인 조정의 관료들. <뢰검>은 이 국가 바깥의 이야기이다. 아니, 차라리 변방의 이야기라고나 할까. 중원의 그림자가 거기 부분적으로 머물러 있는 것을 본다. < 뢰검, 번개칼 >의 등장인물들은 장풍, 검법. 경공술, 때로는 은신술을 어디서 배운 것일까. 이렇게도 물어볼 수 있다. 왜 마찬가지로 삼국시대라는 같은 시대, 같은 나라에서 사는 다른 장르의 다른 주인공들은 이 방법을 익히지 못한 것일까. 다시 한 번 말하자면 무협이라는 환경. 그러나 <뢰검, 번개칼> 속에서는 너무 희미해서 거의 보이지 않거나 무언가 다른 것과 서로 겹치고 더해졌다. 나는 둘 사이에 어떤 위계를 설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뢰검>의 두 작가 자신에 따르면 대만 무협지를 옮기는 대신 일본의 닌자(忍者) 무협과 중국의 무협기담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왔으며 의도적으로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했다고 밝히고 있다. 나는 이들이 참고한 소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 대신 나는 여기서 다소 곡예를 부리듯이 두세 가지 추론을 하고 싶다. 임권택 은 < 뢰검, 번개칼 >을 각색하면서 홍콩 쇼브라더즈 무협영화를 빌려오는 대신 그 자신이 어린 시절 고향에서 천막치고 보았던 일본 시대활극 영화들을 떠올렸음에 틀림없다. 임권택은 호금전의 < 방랑의 결투 >와 장철의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를 보았다. 내가 질문을 하자 그 두 편의 영화를 “매우 흥미진진하게 보았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 “하지만 그 이후에 나온 영화들은 황당무계해서 금방 관심을 잃었다”고 덧붙였다. 이 활극영화의 시대 ‘이후’ 임권택은 사무라이들의 활극 장면을 1990년에 한 번 더 찍었다. 그 장면은 < 장군의 아들 >에서 김두한이 극장에 들어가서 영화를 보는 장면에 슬그머니 등장한다. 이 액션장면은 다른 영화에서 빌려온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장군의 아들>의 한 장면을 위해서 그 자신이 연출한 씬이다. 이 장면과 <뢰검, 번개칼>의 검술 액션장면을 연결시켜 보면 이상할 정도로 둘 사이에서 시간의 차이를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유사하게 느껴진다. 이를테면 <뢰검, 번개칼>에서 닌자 복장을 한 신라의 검객들이 도풍으로부터 버림받고 혼자 남겨진 채 성녀를 둘러싸고 벌이는 활극장면. 이때 인물들을 펼치고 좁히면서 옮겨가는 공간적인 이동의 동선. 나는 임권택이 검술 활극장면에 대해서 하나의 모델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 본 영화가 무슨 영화인지 몇 차례를 물어보았지만 유감스럽게 그 제목을 들을 수 없었다. 틀림없이 마키노 쇼조(와 마사히로)와 이토 다이스케로 시작한 (일본 영화사의) ‘피의 살진(殺陣)’ 1925년으로 시작된 다음 1930년대에 절정에 이르렀던 활극중의 한편일 텐데, 서울에서 내가 볼 수 있는 이 시기의 일본 시대극은 너무 제한적이어서 거의 추론할 수가 없다. 아마도, 아마도 내 추론이 틀리지 않다면 임권택은 홍콩 쇼 브라더즈 무협영화를 거의 참고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69년은 그 영화들을 충분히 볼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다. 두 편의 영화 <방랑의 결투>와 < 용문의 결투 >가 개봉된 다음 한동안 호금전의 영화는 국내에서 볼 수 없었다. (한참 뒤에 < 충열도 >가 개봉하였고, < 산중전기 >는 절반 이상이 재편집되어 개봉하였다) 장철은 < 돌아온 외팔이 > 혹은 < 심야의 결투 >에서부터 그의 무술 동작지도가 완전히 바뀌기 시작했다. 임권택 스스로 종종 언급하는 영화적 ‘스승’ 정창화가 홍콩에서 만든 무술영화들이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세 편의 ‘검’에 관한 제목을 단 영화들이 만들어진 ‘이후’의 일이다. 그리고 그 영화들은 임권택과 아무 관계가 없다. 아마도 임권택은 그 영화들에 어떤 호기심도, 어떤 호의도, 어떤 배움도 가지지 않은 것 같다. 한 가지 더. 임권택은 무협소설에 익숙한 세대가 아니다. 1961년 경향신문에 첫 번째 무협소설 <정협지>가 연재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첫 번째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내 경험으로 어른들은 그때 만화 대여점에 오지 않았다. 이곳 문턱을 들락날락 거리던 독자들은 대부분 중고등학교 청소년 사내아이들이거나 아니면 백수처럼 보이는 남자 어른들이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만화대여점들은 낮에 운영되었고 해가 지면 대부분 일찍 문을 닫았다. 어두컴컴한 실내는 책을 읽기에 적절치 않았고, 그때는 형광등의 수명이 매우 짧았다. 물론 빌려 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다섯 권이 한 질로 이루어진 무협지는 들고 다니면서 읽을 수 있는 소설이 아니다. 게다가 이 소설은 하루, 혹은 길어야 이틀 단위로만 대여하였다. 지방촬영을 다니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무협지를 빌려 읽을 수 있는 시간은 아마도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때 임권택은 너무 많은 영화를 찍었고, 게다가 그가 이제까지 찍은 영화들은 무협소설의 세계와 아무 관계가 없었다. 다시 한 번 환기하지만 지금은 1969년이다. 검객들의 세계. 새로운 약속의 문법. < 뢰검, 번개칼 >은 이제 막 삼국통일의 기운이 감돌고 있는 서기 642년 전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연개소문이 영류왕과 그를 뒤따르는 온건파 중앙귀족들을 참하고 권력을 장악하기 직전, 혹은 진행 중인 시대. 이때 연개소문이 세운 또 다른 계획 중의 하나는 삼국통일을 막기 위해 신라의 김유신을 암살하려는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말이 안 된다. 그 당시의 삼국시대는 당나라와 한반도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힘의 관계이며, 이 이야기는 사후적으로 신라가 당나라에 협력하여 삼국을 통일할 것이라는 역사적 결과를 귀납적으로 재구성한 다음 설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이야기에서 즉각적으로 이상하게 여긴 것은 이 설정의 역사적 당위성에 대해서 <뢰검, 번개칼>은 단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임권택 은 <뢰검, 번개칼> 이전에 만들어진 조선시대를 무대로 한 사극영화에서 이런 설정을 한 적이 없다. 이를테면 사도세자와 22대 정조에 관한 궁중사극인 네 번째 영화, 1963년에 만든 < 망부석 >을 떠올려보라. 그는 역사적 배경을 지닌 사건을 끌어들이고 그 안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나갔다. 혹은 1973년, 그러니까 < 잡초 >이후에 만들어진 사극영화들에서 임권택은 과도할 정도로 역사적인 연표에 대해서 정확함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그런 문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왜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한 것일까. 나는 이상하게도 임권택이 <뢰검, 번개칼>을 환상문학의 일부 같은 방식으로 취급한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물론 나는 이 말을 그저 느슨하게 인상에 한정지어서만 할 생각이다. 여기서 임권택이 환상의 진짜다움을 끌어낸 다음 과장의 경이와 수수께끼와 같은 괴기에 대해서 시적인 마법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히 여기에는 세상의 내용과 표현 사이의 구분이 거의 사라진 것 같은 어떤 붕괴의 순간이 차례로 찾아온다. 범주가 사라진 채, 여기서 저기로, 혹은 다시 저기서 여기로 넘어오는 과정에 어떤 문턱도 없는 것 같은 카오스. 스승 도풍과 주룡 성녀와 도풍 버들녀와 주룡 고구려의 무술을 전수하고 있는 고명한 스승은 두 제자를 부른다. 그런 다음 자신의 딸 성녀와 약혼한 제자 도풍에게 연개소문의 명이라는 말을 전하며 신라에 가서 김유신을 암살하고 돌아온 다음 결혼을 하라고 명한다. 두 개의 명. 국가와 스승의 명. 그러나 도풍은 신라에 간 다음 국가와 스승을 배신하고 신라에 투항한다. 스승은 두 번째 제자 주룡을 다시 보낸다. 한편 성녀는 자신과 스승, 국가를 배신한 약혼자 도풍을 죽이기 위해 아버지 몰래 길을 떠나지만 도풍을 만나서 차마 죽이지 못한다. 신라에 잠입하던 주룡은 우연히 주막에서 무술이 뛰어난 버들녀를 만나게 되고 그녀는 주룡을 돕는다. 마침내 주룡은 김유신의 처소에까지 잠입하지만 김유신이 함께 천하를 통일해보자는 제안을 하자 그를 죽이는 대신 그를 배신한 신라의 상인 최현을 고발하고 그 자리를 떠난다. 떠나기 전 주룡은 도풍과 마지막 대결을 한다. 자, 이 마지막 대목을 잠시 멈춘 다음 읽을 것. 도풍은 갑자기 나타난 약혼녀 성녀의 손에 죽고, 이제까지 딸과 제자의 뒤를 쫓으며 음으로 양으로 돕던 스승은 자기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그녀의 죽음 앞에서 그냥 떠난다. 주룡은 버들녀와 함께 떠난다. 어디로? 그건 알 수 없다. 그가 심산유곡으로 은퇴를 하는지, 아니면 이제 남은 유일한 나라 백제로 가는지 그건 영화 ‘이후’의 일이다. 어디까지는 대중 무협지의 약속을 따르는 척 하면서 어디서부터는 완전히 벗어나기도 하는 이 줄거리 앞에서 나는 어디서부터가 각색이며 어디까지가 원작에 따른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를테면 마지막 대결의 순간, 주룡이 도풍을 처형하는 대신 그의 약혼녀인 성녀가 그를 칼로 찔러 벌하는 것은 감정의 과도하리만큼 기형적인 행동처럼 보인다. 게다가 도풍이 자신의 임무가 무가치하다고 성녀에게 말하면서 신라를 떠나 아무도 살지 않는 곳에 가서 함께 살자고 말한 다음 그걸 실행에 옮길 때 이미 도풍과 주룡의 대결은 무의미해진 다음이다. 이미 사회적으로 상징적 네트워크 안에서 자살을 선택한 도풍을 구태여 죽일 어떤 필요가 있었던 것일까. 좀 더 결정적인 사회적 등록의 취소. 딸 성녀를 만나서 아버지는 변장을 벗은 다음 자신이 연개소문의 거짓말에 속아서 배신당했음을 알릴 때 주룡과 도풍의 임무 자체가 무효가 되는 것이다. 임권택 은 이 줄거리를 문제 삼지도 않을뿐더러 등장인물들의 관계 속에서 이 아이러니를 신중하게 다루지도 않는다. 그 어느 장면보다도 김유신을 대면하는 결정적인 순간, 그러니까 이 가상의 이야기가 역사의 중심에 들어서서 마치 실재를 베일 듯한 순간과 마주했을 때조차 임권택은 더 밀고 나아갈 생각이 없다. 역사의 저 멀리서 온 이야기가 마침내 역사 안에 들어선 순간, 어쩌면 누군가는 장이모우의 < 영웅 >에서 무영이 우여곡절 끝에 진시황을 눈앞에 두고 칼을 거두고 포기해버리는 결정을 떠올리면서, 두 이야기의 유사성을 지적하고 싶을 지도 모른다. 장이모우는, 거기에 동의의 여부와 상관없이, 역사를 느껴본다.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거기서 시간을 끈다. 음미의 시간. 교차점. 현재로 소환된 과거. 물론 역사는 집행될 것이다. 그러나 잠시만, 아주 잠시만이라도, 할 수 있는 한 잠시라도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볼 때, 우리는 역사가 택한 입장 앞에 선 우리를 생각하게 된다. 두 개의 우리. 임권택은 여기서 역사가 미처 자기를 눈치 채기를 두려워하기라도 하듯이 잠시 동안 마주본 다음 재빨리 빠져나온다. 주룡은 김유신을 내리칠 수 있었고, 또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하지 않는다. 이때 그가 하지 않는 이유는 쇼트의 질서 안에서 잘 설명되지 않는다. 마치 영화 바깥의 그 무언가에 대한 복종처럼, 마치 사후적으로 김유신이 역사 안에서 여전히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오래된 타임머신의 이론처럼, 시간의 질서를 건드리는 순간 현재가 카오스가 될 것을 두려워하기라도 하듯이, 그는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려 그 자리를 떠난다. 이야기(histoire)가 역사(Histoire) 앞에 서서 느끼는 자기의 왜소함. < 뢰검, 번개칼 >의, 어쩌면 가장 의미심장한, 이 장면에서 나는 역사가 어떻게 임권택을 바라보는지를 쳐다본다. 반복. 역사가 어떻게 임권택을 바라보는지를 쳐다본다. 나는 역사와 임권택을 반대로 쓴 것이 아니다. 한밤중. 유령들이 출몰하는 시간. 그때 영화는 주룡을 따라 김유신을 찾아간다. 거의 마주보는 듯한 느낌이 없는 시선의 쇼트 사이의 교환. 주룡이 자신을 죽이러 온 자객 앞에서 두려움이 없는가, 라고 묻자 김유신은 인명은 하늘에 달렸다고 말한 다음 오히려 등을 내보인다. 이때 김유신과의 절대적인 비대칭성 앞에 세워진 불균형 앞에서 임권택은 재빨리 뒷걸음질 쳐서 연기처럼 사라진다. 나는 지금 주룡의 자리에 임권택이라고 썼다. 여기서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은 김유신이 아니라 그를 죽이러 온 주룡의 자리에 선 임권택이다. 이때 임권택이 물러선 세계는 역사의 그림자가 거의 희미하게 진 채 기계적으로 약속이 작동하는 검객영화의 (상상적) 국가이다. 나는 이 두려움을 임권택의 영화에서 형식을 달리하여, 매번 다른 심급으로, 수십 겹으로 쌓이고 또 다시 쌓이는 지층의 결을 따라가며, 거의 문자 그대로의 역사 앞에 다가가거나, 반대로 역사 안에서 종종 교란당한 것만 같은 사건들의 와중에서, 때로 인물을 따라갈 때조차, 내내 느껴본다. <뢰검, 번개칼>은 임권택의 영화중에서 어떤 자리에서 질문을 던져도 자기가 서 있는 자리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채 거의 어떤 상호작용도 멈춰버린 영화이다. 그때 내게 신기하게 보이는 것은 임권택의 모든 영화들 중에서 영화 안의 모든 기호들의 능력과 사용의 역할과 방법의 감각들이 가장 덜 조직적으로 활동한다는 사실이다. 삶의 강도와 영화의 기호들 사이의 힘의 관계. 나는 <뢰검, 번개칼>을 보면서 임권택의 영화가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세상 안의 서로 다른 삶의 기호들과 얽혀들고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반대로 이 영화가 완전히 자기의 세계로 돌아와 액션 활극장면을 펼칠 때 나는 임권택 이 무언가 자기의 향수의 환상을 즐기고 있다는 기분을 멈출 수 없다. 이 영화에는 두 개의 극단이 있다. 하나는 역사의 실재에 다가가는 척 했다가 재빨리 빠져나온 다음 할 수 있는 한 그 가까이 다가가지 않기 위해서 영화 사방에 만들어놓은 블랙홀 안으로 뛰어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만들어진 약속 안에서 그 약속 자체를 종종 기괴하게 보일 정도로 소박하게 쳐다보는 것이다. 어떤 각도에서 다가가도 < 뢰검, 번개칼 >은 진지한 구석을 찾을 수 없는 영화이다. 나는 이 장르 자체가 진지한 이야기를 할 수 없다고 믿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호금전의 < 협녀 >. 하지만 <뢰검, 번개칼>에서 아이러니나 유머를 맛보려는 의도도 없다. 반대로 이 영화는 자기가 다루려는 이야기를 무언가 신비롭게 믿으려는 태도가 어슴푸레 감돈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이야기를 믿으려 한다기보다는 자기가 이미 본 장면에 대한 믿음이 있다. 이미 그 장면은 존재했고, 그러므로 그 장면을 다시 재현한다는 기분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향수가 거기서 배어나온다. 당신이 이것을 기분의 비평이라고 불러도 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 기분을 좀 더 섬세하게 다루고 싶다. <뢰검, 번개칼>이 기술적으로는 유치하지만 반대로 그 소박함을 하나의 원장면(Urszene)으로 설정하면 마치 영화가 자기의 장치를 꺼내들었을 때 그것 자체를 믿을 수 있다는 향수의 시선을 확보할 수 있다. 이를테면 가장 아름다운 예. 마노엘 데 올리베이라의 <안젤리카의 이상한 경우>에서의 그 놀라운 상공비행의 장면. 이때 물론 이 성립의 바탕에는 멜리에스가 있다. <뢰검, 번개칼>의 바탕에는 1930년대 일본 시대극의 활극장면이 있다. 이 영화는 기술적으로만 본다면 마치 무성영화 시대의 관객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것만 같은 장면들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장소의 재빠른 이동을 보여주기 위한 점프 컷. 아니, 차라리 그냥 흐르는 공간 안의 시간의 장면들을 잘라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하나의 쇼트 안의 가시적인 데쿠파주. 마치 가위로 오려낸 것만 같은 인물을 배경 위에 올려놓고 진행되는 스크린 프로세스라는 경공술. 나는 이 장면들을 오마주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어떤 존경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자기가 본 대중영화들의 감흥을 개인적인 세계 안의 새로운 예술품으로 끌어올리려는 그 어떤 시도도 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아예 그런 시도 자체를 믿지 않는다. 좀 더 가혹하게 말할 수도 있다. 임권택은 자기가 다루는 대상을 그런 소멸 속에서 다시 부활시켜 찬미하고 그것을 새로운 단계의 감흥으로 고양시킬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곤 조금도 믿지 않는다. 그 대신 여기에는 이미 자기가 본 것에로 자기가 되돌아 갈 수 없다는 체념의 전망이 향수 속에서 끝나지 않을 것처럼 지속된다. 무엇이 무엇을 전제하는가. 그때 전제는 무엇을 허락하는가. 나는 도풍과 주룡의 대결 장면의 기괴한 반복을 보았을 때 정말 이상해서 처음에는 내가 무얼 본거지, 라는 일시적인 중단의 자리에 머무는 것 같은 착시에 빠졌다. 이 대결은 두 번 되풀이 된다. 두 번 되풀이 된다는 자체가 이상한 것은 아니다. 처음 도풍과 주룡이 서로 대결을 했을 때 나는 전체의 균형 속에서 좀 이르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아직 영화는 40분이 남았고, 이 약속 안에서 도풍의 패배는 예정된 것이며, 도풍이 죽고 나면 사실상 더 할 이야기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따분하게 이 순간을 해결하는 것은 일시적으로 도풍이 승리한 다음 다시 두 사람의 대결을 준비하는 것이다. 약속의 게으른 관습. 그런데 < 뢰검, 번개칼 >에서 이 첫 번째 대결은 이상한 방식으로 중단된다. 도풍의 편에서 주룡을 생포하기 위해 대결의 장소를 습격한 신라 닌자 입운과 그의 부하들이 주룡의 부하들을 몰살한 다음 홀홀단신의 주룡을 거의 포위 했음에도 불구하고 도풍은 별다른 이유 없이, 마치 주룡의 편에서 그의 사정을 위해서 행동하기라도 하듯, 그저 간단하게, 오늘은 여기서 멈추지, 라고 한 다음 그냥 그 자리를 떠난다. 주룡도 더 이상 대결할 의사가 없다는 듯 도풍이 떠나는 것을 수수방관한다. 둘 중 누가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니며, 그 두 사람이 대결을 중단해야 할 어떤 이유가 생겨난 것도 아니다. 나는 어리둥절하게 이 장면을 지나쳤다. 그런 다음 더 이상하게도 도풍은 이제 더 이상 신라를 위해 충성을 바칠 이유가 없다는 듯 그의 약혼녀(이자 스승의 딸인) 성녀와 이곳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약간의 우여곡절. 혼자 남겨진 성녀 앞에 나타난 스승은 연개소문이 자기를 속였다고 탄식한다. 이제 주룡과 도풍이 대결해야 할 어떤 이유도 없어진 셈이다. 그런데 떠나가는 도풍 앞에 주룡이 나타나서 마지막 대결을 청한다. 이때 이 두 번째 대결은 마치 첫 번째 대결이 다시 반복되기라도 하듯이 거의 비슷한 풍경을 지닌 장소에서 반복된다. (그러나 정확하게 같은 장소는 아니다) 이때 이 반복은 마치 이 두 번의 대결 사이의 이야기를 무효화 시키는 것처럼, 말하자면 두 개의 씬 사이의 수많웰오潔薩綬?간단하게 접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혹은 좀 더 인상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앞의 장면이 그대로 다시 한 번 반복되는 기묘한 기시감을 안겨준다. 물론 결정적으로 이 두 개의 장면에서 주룡과 도풍이 입은 의상은 정반대로 첫 번째는 둘 다 검은 흑색 옷을 입었고, 두 번째에서 고용은 흰색 백의를 주룡은 노란색 황의를 입었다. 여기서 즉각적으로 먼저 이상하게 여긴 것. 왜 도풍과 주룡 이 두 사람의 옷을 매번 서로 반대의 색을 선택하는 대신 서로 동일하거나 유사한 의상을 입혔냐는 것이다. 첫 번째 의문. 장르의 아이코노그래피. 말하자면 이상할 정도로 여기에는 선악의 구분이 없다. 게다가 악의 편에 선 도풍이 마지막에 흰 색 옷을 입은 것은 더 이상한 선택이다. 두 번째 의문. 미장센의 경제학. 이 의상은 검술이라는 액션 장면의 연출에서도 매우 비경제적인 선택이다. 왜냐하면 서로 검술을 교환하면서 오갈 때 종종 카메라는 이 두 사람의 액션을 더 잘 보여주거나 혹은 전문적인 대역 무술감독이 그들 대신 연기하기 위해서 카메라가 부감으로 수직 상승하거나 아주 멀리 떨어질 때 두 사람을 구별할 수 없다는 문제와 부딪치기 때문이다. 이건 임권택 도 잘 알고 있는 문제이다. 이를테면 거의 동시에 만들어진 < 황야의 독수리 > 혹은 <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 >를 생각해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그렇게 했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를 생각해본다. 임권택은 여기서 이미 드라마에 관심을 잃은 지 오래이다. 그 대신 반복할 수 없는 것을 눈앞에서 다시 재현할 때 거기서 불러 일으켜진 시뮬라크라에 다소 당황한 것 같은 태도를 취한다. 나는 두 번째 대결 장면이 정말 이상해 보인다. 도풍과 주룡의 대결의 액션 설계는 두 사람의 상반신을 중심으로 한 투 쇼트와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먼 롱 쇼트를 반복해서 교차시킨다. 하나의 쇼트는 두 사람의 액션을 고스란히 노출시키고, 반대로 다른 하나의 쇼트는 너무 멀리 떨어져서 누가 누구인지를 알아보기 쉽지 않을 정도로 물러난다. 그 두 개의 쇼트 사이의 불편하기 짝이 없는 교환은 거의 영화의 배열 장치를 중단시키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지금 나는 임권택이 여기서 실험적인 시도를 한다거나 반대로 유물론적 교차 편집을 하고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이 두 개의 쇼트는 보는 우리들을 두 사람의 대결에 몰두시키는 대신 하나는 줄거리의 중심에서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대결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이 진행의 또 다른 쇼트는 이 대결이 세상이라는 풍경 안에서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를 보여주려는 시도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우리가 둘 중 어느 쪽도 따를 수 없는 까닭은 하나의 씬 안에서 어느 쪽에도 주도권을 주지 않고 반복적으로 두 개의 서로 다른 계열의 두 개의 동일한 내용의 쇼트가 교환되면서 둘 사이에 어떤 공백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론 채워져야 할 이 공백은 임권택의 향수이다. 어린 시절 천막 앞에서 느껴보았던 영화라는 체험의 경이. 이미지들의 기쁨. 생각지 않았던 감각들의 향연. 잠들었던 기억의 시간. 물론 나는 여기서 멈춰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글은 금방 소설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하고 싶다. 임권택은 여기서 자기의 향수를 그냥 공백인 채로 남겨놓는다. 그는 그 시간 안으로 들어가기를 망설인다. 그래서 < 뢰검, 번개칼 >은 명백히 자기의 영화적 계보를 드러내면서도 그 장면들에 어떤 오마주의 존경이나 되찾은 시간의 기쁨이 없다. 임권택 의 영화를 보면서 나는 단 한 번도 그에게서 영화가 영화 그 자신에게 기꺼이 바치는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다. 망설임. 언제나 망설임. 그때 그가 망설이는 것은 아마도, 아마도 영화가 아니라 그 영화를 느껴보았던 시간일 지도 모른다. 그 시간의 뿌리. 종종 그래도 괜찮을 법한 자기의 기억에 베풀어도 상관없을 우월한 관점이 여기에는 없다. 나는 가끔 영화가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임권택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그는 세상이 영화를 볼 때 영화가 그걸 견디지 못하면 부서질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 세계와 저 세계. 나는 지금 그 사이의 틈새, 간격, 거리. 무엇보다도 그 둘 사이 어딘가에 있을 지도 모르는 비밀 통로를 찾고 있는 중이다. 아직은 찾고 있는 중이다. (계속) 1969년 87분 칼라 2.35 감독 임권택 제작 주식회사 극동필림 각본 서윤성 , 강조원 촬영 구문석 음악 황문평 미술 노인택 편집 김희수 안길원 주룡 이훈 도풍 김청자 성녀 오경아 버들녀 안일력 입운
“그때는 최고로 안 팔리는 감독이었어요, 그 무렵은 영화가 불황이었고, 하여튼 없었어요, 영화 하자는 사람도 별로 없고, 나도 그 시기에 크게 열을 내서 하고자 하는 의욕도 잃었고, 그래서 영화가 걸리면 그냥 적당히 하고,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그러던 때였어요. 심리적으로도 힘들었고, 그 전에는 영화를 만들면서 다른 데서 안 해본 것도 해보고 했는데, 전혀 그럴 생각도 없고, 그 무렵에야 비로소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내 삶을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거예요. 아마 내 삶을 자각하면서 그래서 만든 첫 번째 영화가 < 잡초 >(1973)일 거예요, 그래서 이 영화가 이전에 만든 영화들 사이에 처음으로 어떤 공백 같은 것이 생겼어요. 그건 내게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에요. 단지 영화를 준비한다기보다는 심리적인 시간이라고 할까” 없었다는 말. 그 말에 감도는 차가운 감정. 거의 희미해진 기억. 마치 의도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종종 외면하려는 듯한 제스처, 혹은 그로부터 취하려는 일정한 거리. 할 수만 있다면 더 멀리. 그렇게 그 이전 영화들에 대해서 시종일관 무뚝뚝하게 대답하다가 <잡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마치 맑은 정신이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하나씩 마치 어제 일처럼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반문하듯이 질문했다. “그렇다면 50편의 습작을 만들었다고 표현해도 되겠습니까?”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단연코 습작이었어요” 1973년 그해 임권택 은 50번째 영화 < 잡초 >를 만들었다. 여기서 만들었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 모두이다. 하나는 그 자신이 연출했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그 자신이 제작했다는 뜻이다. 이 영화는 그 자신이 제작한 첫 번째 영화이다. (그때) 나는 질문을 하다 말고 여기서 잠시 멈추었다. 그런 다음 그 결정을 느껴보고 싶어졌다. 이미 49편을 만든 영화감독. 1962년에 첫 영화를 만든 다음 12년이 되던 해. 자신의 삶, 그 삶의 진동, 감독으로서의 자신이 세상과 맺고 있는 관계를 성찰해보기 시작한 순간과의 대면. 말 그대로 창조의 새로운 도약. 모든 예술가들이 그 자신이 예술가임을 자각하는 필연적인 시간. 말하자면 절대적인 요구. 그런 다음 자기가 만들어낸 창조의 세계가 홀로 서게 만드는 일.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잡초>를 볼 수 없다. 임권택 감독님 그 자신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싶다는 말씀을 하신다. 이 영화의 스틸을 볼 때마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어디선가, 이를테면 다른 영화를 보기 위해서 동시상영을 보던 중에, <잡초>를 본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 대신 나는 몇 차례이고 이 영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거의 절망적인 상황. 비참한 지경. 그때 임권택 은 놀랍게도 자기에게서 가장 멀리 있는 힘을 끌어당겼다. 영화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 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대결. 나는 그것이 단번에 성공적이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영화는 비로소 영화가 되는가, 라는 질문. 임권택은 (그 자신이 스스로에게) 가장 바닥에 내려앉았다고 판결문을 내린 다음 그 질문을 끌어안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으면 안 된다. 그는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이 질문을 꺼내든 것이 아니다. 반대로 지금 자기의 자리를 부정하기 위해서 이 질문을 끌어당긴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공격하기로 결심하였다. 공격?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그때 그가 공격하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제까지의 모든 습관. 습관? 우리는 영화를 만드는 일이 종종 집을 세우는 일에 비유된다는 자크 리베뜨의 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프레임이라는 사각형. 그것 앞에 세워진 네 개의 면. 그 안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는 동선. 그때 어디서 어디를 보느냐의 문제. 방향. 그 안에 세워진 수많은 문들. 어느 문이 열릴 것인가. 어느 문으로 들어올 것인가. 그러나 이때 집이 세워지면 그 집은 동시에 연출의 감옥이 된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여기에 일단 갇히면 그때부터 이 집에서 맴돌기 시작한다. 예술에서 가장 두려운 말, 안주. 우리는 위대한 예술가들이 종종 자기 집을 불태우고 낯선 땅에서 새로운 집을 끊임없이 세웠다는 이야기를 떠올려야 한다. 말하자면 모험. 그러나 대부분 그냥 집에 머물 것이다. 가까스로 세운 집. 자기가 세운 집. 하나의 집이 세워질 때 그 안에 들어서는 순간을 상상해보자. 이때 영화는 그 집에서 사는 법을 배우는 과정의 반복이다. 그리고 반복은 곧 습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예술에서 좋은 습관이란 무엇일까. 그런 건 없다. 오로지 나쁜 습관만이 있을 뿐이다. 나쁜 습관과 더 나쁜 습관. 그때 더 나쁜 습관이란 무엇일까. 그건 자기 집에 살면서 남처럼 살고자 흉내 내면서 자기 집을 남의 집의 모습으로 끊임없이 고치고 부수고 그런 다음 자기의 집 위에 다시 남의 집을 세우면서 그 안에서 남의 집에 사는 시늉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순간 작동하기 시작하는 예속성. 그 무시무시한 힘. 두뇌와 의지 사이의 선을 잘라낸 다음 의지를 복종시키기기 시작하는 구조들. 이미 결정된 방. 임권택은 자기 집에 살면서, 그 집에서 48번, 혹은 49번이나 살면서, 점점 더 지쳐가면서, 이 집에서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고 그 자신에게 말했다. 살 수 없다는 말. 그때 그 말은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다는 뜻이다. 다시 한 번 1973년 그 해. < 잡초 >를 만들기로 결심하기 직전. <잡초>앞에 놓여있는, 하지만 같은 해에 만들어진 두 편의 영화. < 대추격 >, 혹은 < 장안명기 오백화 >. 나는 둘 중 어느 쪽이 먼저 인지 알 수 없다. 그건 아무래도 좋다. 나는 임권택이 48번, 혹은 49번째 살았던 그 집에 가보고 싶어졌다. 그가 정말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만큼 괴로워진 영화, 단지 실패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거기서 더 나아가 그 집이 자기를 잡아먹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하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어쩔 수 없이 만든 영화, 하지만 그런 다음 더 이상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영화. 어떤 기쁨도 없이, 심지어 고통조차 느낄 수 없을 만큼, 그렇게 그 어디서도 힘을 끌어낼 수 없을 때, 그런 다음 삶이 무언가에 복종되어버린 자리. 나는 <장안명기 오백화>를 선택했다. 왜냐하면 <대추격>은 지금 우리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사라진 임권택의 24편의 영화중의 하나. 영화의 줄거리는 일제 강점하 경성의 유명한 요정 명월관에서 시작한다. 이 말은 1973년 한국영화들 사이에서 아무데서나 시작한다는 뜻이다. 아무 영화에서나 등장하는 이름 명월관. 1909년 경성 종로구 세종로에 세워진 다음 1918년 5월 24일 화재로 소실된 이후 돈의동 139번지에 다시 세워진 요정. 1919년 기미독립선언 이후 종종 독립운동 지사들의 연락처로도 사용되었다고 알려진 장소. 하지만 사실상 영화 안에서 의미가 없는 지표. 다소 지루할 지라도 나는 약간의 첨언을 더해서 이 영화의 줄거리를 먼저 소개하고 싶다. 아니, 차라리 한국영화사의 저편에서 불러내고 싶다고 말하고 싶다. 임권택 자신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야기. 사라진 기억. 죽어버린 기호들. 몇 차례이고 질문했을 때마다 심지어 내가 그런 영화를 찍었나요, 라고 반문했던 영화. 오로지 그 시간에만 활동했던 이미지들. 기억으로부터 과거로의 추락. 현재와 공존하기를 포기한 영화. 그러나 역설적인 의미로 이 영화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 잡초 >를 만들 수 있었을까. 나는 차라리 여기서 그 포기의 배후에 숨어있는 부정적인 힘을 알고 싶다. 그러므로 다시 이야기 안으로. 그저 이 영화가 요구하는 대로 볼 생각이다. 최칠용과 영국 최칠용과 현주 신운일과 정미 박노운과 기홍 명월관에는 그날 저녁 술시중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장안의 한량들에게 자랑거리가 된다는 명기 오백화가 주름잡고 있다. 일제 강점하. 요정, 장안의 다섯 명기. 고백화 기홍, 태백화 정미, 김백화 현주, 최백화, 유백화. 그녀들은 아무나 수청을 들지 않는데 심지어 조선총독부 총독의 부름도 거절했다고 한다. 그녀들은 그날, 그러니까 이 영화가 시작되는 첫 장면의 그날, 사이토 경무국장의 술자리 수청을 들기 위해 그 모습을 보인다. 그런 다음 위기의 시작. 첫 도미노. 김백화 현주의 오빠 영국은 상해에서 활동하는 독립군인데 경성에 잠입해 들어왔다가 그만 체포되어 한국인 고등계 형사 최칠용에게 고문을 받는다. 독립군과 조선인 형사. 신념을 따른 희생자들과 배신을 한 앞잡이. 역사로부터 장르에로의 이행. 그 사이에 개입하는 균열. 차라리 드라마의 복선. 그런데 최칠용은 원래 학생시절 경성제대 법대를 다니며 훗날 변호사가 되어 조선인을 위해 일하겠다고 맹세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자신의 말을 따르면) “일본인보다 더 악랄하게 조선인을 괴롭히는” 고등계 형사가 되었다. 그래서 김백화 현주는 최칠용의 후배이자 음으로 양으로 조선인의 편에서 오백화를 돕고 있는 청년 신운일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찾아간다. 하지만 최칠용은 명월관의 술자리에서 그의 양심에 호소하는 신운일의 청을 단호하게 거절한다. 이번에는 신운일의 딜레마. 신운일은 친일파인 중추원 원로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친일행적에 분노하며 부끄럽게 여긴다. 아버지와 아들의 분열. 각자의 자리에서 마치 한 쌍처럼 이루어진 대립적인 인물들. 과도하리만큼 민족주의적 열정에 가득 차 있는 인물들. 결국 대의적 관점 아래에서 아들은 아버지의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물론 아직은 아니다. 또한 그는 오백화 중의 한명인 태백화 정미와 연인 사이이며 그녀에게 결혼을 청하지만 정미는 자신이 기생의 신분이라 지금의 연인 관계에 만족한다면서 완곡하게 거절한다. 신분의 차이. 이제 막 조선시대가 끝났지만 아직 도착하지 않은 근대. 물론 그것만으로는 이야기가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이중의 곤란함이 여기에 개입하여 이 가련한 연인들의 결정을 재촉한다. 신운일은 아버지로부터 자신의 집안이 친일의 충성을 맹세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일본 여자와의 결혼을 강요당하고 있으며, 정미는 명월관에 드나드는 사이토 경무국장의 잠자리 수청을 종용받고 있다. 갑작스러운 새로운 인물. 이야기의 바깥으로부터, 그런 다음 바깥으로의 새로운 방향.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조선총독부 총독의 생일에 맞춰 창경궁에 모이는 중요인사들과 친일파를 암살하라는 임무를 띠고 박노훈이 경성에 잠입했다가 총상을 입고 고백화 기홍의 집에 숨어든다. 모든 인물들이 곤궁에 빠져서 거의 빠져나갈 길 없을 것만 같은 일제 강점하의 경성에서 열린 새로운 도주의 선으로서의 상해. 그러자 갑자기 이야기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들 모두에게 상해로 떠날 구실을 만들어주기 시작한다. 장황하고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우연들의 연속. 우여곡절 끝에 박노훈은 중국인으로부터 폭약을 구해서 신운일과 함께 창경궁에 잠입하고, 그 시간에 정미는 삼엄한 경계를 풀기 위해 책임자인 경무국장 사이토와 함께 온천 여행을 떠나 그곳에서 그를 총으로 사살하고 그녀 자신도 자살을 하고, 최칠용이 사실은 이제까지 그의 고등계 형사 노릇은 조선인의 편에서 돕기 위한 그 자신의 고육지책이었으며 게다가 이 모든 행동이 김백화 현주를 사모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되지만 그만 (최칠용 자신이 구해준, 그러나) 그 사실을 알지 못한 현주 오빠 영국의 손에 죽고 만다. 거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듯한 사건의 사슬들. 암살에 성공한 박노훈과 신운일은 죽은 정미를 제외한 오백화와 함께 상해로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아직 이야기가 끝난 것이 아니다. 일본군의 추격 끝에 이들을 따돌리기 위해 신운일이 이들 모두를 위해서 대신해서 죽고 박노훈과 남은 네 명의 오백화가 배를 타고 상해로 떠난다. 한 남자와 네 여자. 멀어져가는 배, 혹은 새벽 강물에 실려 사라져가는 배. 말 그대로 난처한 입문. 이 줄거리를 몇 번을 다시 읽고 반복해서 영화를 보아도 결국 남은 인상은 기이하리만큼 그 안에서 서로의 인과관계가 거의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이 영화의 전술적인 규칙들은 무엇일까. 거기서 무엇이 멈춘 것일까. 아니, 아무 것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여기서 저기로 옮겨가고 그런 다음 인물의 위상관계를 달리하여 저기서 여기로 옮겨올 때, 종종 느껴보는 하강과 상승, 추락과 도약 대신, 거의 모험담에 가까운 < 장안명기 오백화 >를 보는 내내 느끼는 거의 일관된 상태는 이 장면이 다음 장면들과의 관계 사이에서 자동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재빨리 이 영화를 내려놓는 대신 1969년에 < 황야의 독수리 >를, 그리고 이듬해 < 속눈썹이 긴 여자 >, 그런 다음 1971년 <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 >와 < 둘째 어머니 >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나는 즐거움을 생각한다. 이 영화들이 표준적 관점에서 좋은 영화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즐거운 영화들이다. (잠시만 기다리면, 나는 차례로 그 이유를 쓸 것이다) 말하자면 긍정의 힘. 바르뜨라면 누군가 말하기 전에 선수를 쳐서 어떤 변명도 하지 않으며, 지루하게 설명하지 않으면서, 종종 시선을 멈추게 만드는 장면들이 거기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나는 그 표현을 사랑한다. 이때 이 네 편의 영화는 서로 완전히 다른 장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만주) 웨스턴. 스릴러. 다찌마와리. 신파 멜로드라마. 네 개의 장르. 네 개의 꼭짓점. 그들 사이의 교차점. 그런데 그 자리에 서 있는 <장안명기 오백화>는 우리를 단조로운 위치에 데려다 놓는다. 여기에는 그 즐거움이 어느 순간 고갈되어 버렸다. 이때 가장 따분한 설명은 여기에 창작의 열정이 고갈되어버렸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위험을 무릅쓰고 반대로 말하고 싶다. 혹시 열정이 가져온 의심이 즐거움을 고갈시켜버린 것이 아닐까. 의심? 그렇다. 하지만 오해하면 안 된다. 나는 여기서 심리적인 분석의 기법을 빌려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 장안명기 오백화 >에서 본 것은 거의 모든 장면에서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는 의심이다. 무엇에 대한 의심? 설명에 대한 의심. 그것을 만들어내기 위한 영화적 효과들. 인물들의 대사. 그 대사를 둘러싼 표정. 표정을 만들어내기 위한 카메라와 연기 사이의 거리. 이때 내가 인물이라고 말하는 대신 연기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주기 바란다. 임권택 은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의 수많은 기호들을 연결하고 종종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다양한 개념들을 여러 가지의 경로를 빌려 결합시켜왔다. 말하자면 영화의 규칙 안에서의 활동. 이때 임권택은 문득 여기서 멈춘 다음 이 개념들이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처럼 영화를 다루기 시작했다. 갑자기 연결과 결합 사이의 영화적 효과들은 일시적으로 작동이 중단되었다. 나는 그것을 <장안명기 오백화> 안에서 기이한 감정을 안고 바라보았다. 도대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상한 상황. 그 안의 배치를 성립시키는 모든 요소들 사이의 조화 안에서 무엇을 어떻게 건드리면 어떤 효과가 생겨나는지를 너무나도 잘 아는 장인이 갑자기 자포자기 하듯이 그냥 내버려두고 있다는 사실을 느껴볼 때 나는 이 행위 자체가 보는 쪽에 고통을 가져오는 방식으로 사유를 시작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물론 이것은 <장안명기 오백화>를 위해서 설명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이 상황을 한편으로는 앞으로 돌아보고, 이를테면 1969년의 영화들, 반대로 저 멀리 1978년 < 족보 >까지 끌어당겨보고 싶다. 하지만 여기서는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기 시작했다. 관성적으로 오던 것은 여전히 빨리 가고 갑자기 어떤 것은 필요 이상으로 느리게 가기 시작했다. 임권택 은 서둘러 가는 것을 마치 남의 영화를 쳐다보듯이 내버려두고 있다. 반대로 그 안에서 무엇이 느리게 갈 수 있는 지를 건드려본다. 이제까지 접속되었던 방식을 바꾸려 하기 전에 무엇이 무엇과 더불어 기능하는지를 마치 의아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순간들. 이때 멈춘 것은 다소 불투명하긴 하지만 대부분 장르의 신호들이다. 혹은 그 신호들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신호들은 계속해서 지시를 내리지만 기이하게도 장르의 기호들은 반응하지 않는다. 아니, 차라리 반응을 멈추었다고 말하고 싶다. 좀 더 구체적인 설명. 이 중단은 단순하게 멈춘 것이 아니다. 자동적 반응의 중단이라는 문제. 나는 영화를 보기 전 제목만 슬쩍 본 다음 장안명기 오백화를 따라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다섯 명의 기생. 다섯 명의 여자. 다섯 개의 운명. 그녀들 사이에 던져진 사건, 혹은 인물. 던져진 돌. (그렇게 된다면) 원형으로 번져나가는 이야기의 선. 나는 틀렸다. 오백화는 이 영화의 중심에 있지도 않으며, 또한 오백화 사이에서 어떤 분열이 일어나지도 않는다. 게다가 오백화가 이 영화를 움직이기 시작하는 어떤 힘을 끌어내지도 않는다. 이 영화의 선은 도대체 어디로 이어지는 것일까. 영화를 보고 나면 줄거리가 어떤 법칙을 따른 것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영화를 보고 있는 동안에는 기이하게도 그 선이 자꾸만 제자리에로 돌아온 다음 어떤 새로운 차원에로의 이동도 없이 서로가 서로를 잡아당기기만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느 순간 끊어질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기서 어떤 긴장이 생겨나지도 않는다. 줄거리의 경제학으로만 본다면 다섯 명의 장안 명기 오백화는 서로 그녀들의 우정을 나누기는 하지만 사실상 줄거리를 위해서라면 고백화와 태백화, 그리고 김백화 세 명으로 충분하다. 게다가 임권택 은 최백화와 유백화를 위해서 거의 어떤 시간도 들이지 않는다. 나는 영화가 끝난 다음 최백화와 유백화의 존재 자체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다섯 명의 스타의 얼굴의 순환. < 장안명기 오백화 >에서 이상한 것은 이 순환 자체가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영화를 본 다음 고백화 기홍을 연기하는 고은아 의 빛나는 아름다움을 잊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임권택은 고은아를 영화 안에서 거의 활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 첫 장면에서 중심에 있었던 고은아는 줄거리가 진행될수록 점점 더 외곽으로 밀려나기 시작한 다음 영화가 끝날 때 그녀는 시작할 때와 반대로 단지 오백화 중의 한명이 된다. 사라져가는 무게. 줄어드는 빈도. 스타는 줄거리의 장르이다. 그러나 <장안명기 오백화>에서 고은아는 마치 이 영화에서 사라져가는 메시지처럼 점점 뒤로 물러난 다음 화면의 중심에서 주변으로 자리를 옮겨간다. 그렇다고 해서 박노식과 신성일이 그 자리를 탈취하거나, 혹은 옮겨오지도 않는다. 그들은 제 역할을 한 다음 재빨리 물러난다. 여기에는 스타들 사이의 균형이 거의 무너져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인물들 사이의 민주주의적 배치에 따른 것도 아니다. 나는 다소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싶다. 이들은 마치 공장처럼 작동한다. 기능적으로 배치된 다음 자기가 잘 알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자기의 역할을 하고 잠시 멈춘 다음 다시 자기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인물들은 상황에 연결되어 있는 것만으로 자기의 존재를 증명할 뿐 그 어떤 다른 변수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상황이 그 존재에 변수를 부과하기 시작한다. 인물들에 대한 억압. 어떤 억압? 줄거리의 억압. 이때 이 억압을 무효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임권택 은 마치 이 억압에 순응하는 것이 정말 필요하고도 바람직한 일일까, 라고 반문하는 것만 같다. 나는 여기서 이제부터 시작될 임권택의 영화에 대한, 영화를 향한, 영화에 의한 그 자신의 인정투쟁의 시작을 본다. 그때 줄거리의 무한한 계속으로부터 바깥으로 나오면 거기서 무엇과 만날 수 있을까. 물론 그건 삶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고 살아온, 또 살아가야 하는 삶. 나는 < 장안명기 오백화 > 다음의 영화, 임권택 자신이 그 ‘이전’의 모든 영화를 ‘습작’이라고 부른 다음 비로소 만든 < 잡초 >가 한 여인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을 환기시키고 싶다. 신운일과 아키코 박노훈과 기홍 물론 < 장안명기 오백화 >를 좀 더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종종 인물들 사이의 자기 자리의 수행은 때때로 갈팡질팡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이때 이 영화의 이상한 점은 그 뻔한 줄거리에도 불구하고 그 어딘가에서 부터 이야기의 결말을 소급해서 올라가서 재구성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 기괴한 역설이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하게 만든다. 우리는 줄거리의 소급이 사실상 이미 예정된 전제 위에서 진행된 결말로부터 나온 자연스러운 연쇄망의 잠재적 가능성이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이 영화에서 느끼는 것은 시나리오와 영화 사이의 이상한 분리이다. 시나리오의 잠재적인 감정은 거의 진행되지 않고 그 줄거리의 행위들만이 차례로 나열된다. 시나리오는 세 명의 여자와 세 명의 남자, 그러니까 고백화와 박노훈, 태백화와 신운일, 김백화와 최칠용을 하나의 짝으로 묶은 다음 다시 이들 사이의 관계를 연결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임권택 은 거의 고의적으로 그들 사이의 끈을 느슨하게 만들어놓았다. 실제로 이 영화는 아무리 진행되어도 그것을 잡아당겨서 긴장을 만들어내려 하지만 그럴수록 점점 더 풀려나가서 느슨해진다. 이 영화는 중심이 없는 영화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이상한 몇 가지 단락의 순간들. 신운일은 아버지의 요구에 따라 기무라 총독의 여식인 아키코와 결혼을 강요받는다. 그런 다음 이어지는 약혼식. 여기서 이상한 방식으로 구부러지는 분배의 방식. 신운일은 아키코에게 둘 만의 데이트를 청한 다음 갑자기 자기의 처지를 고백하면서 진정 사랑하는 태백화 정미와 결국 결혼할 것이며 당신과는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동거는 하겠지만 기회가 주어지면 떠나가겠다고 말한다. 잠재적인 대립의 수행. 그런데 이때 아키코가 예상치 않게도 신운일을 이해하면서 당신이 나와 같은 일본 여자와 결혼하는 조선인 남자였다면 오히려 경멸했을 것이라는 대답을 할 때 여기서 진행되어야 할 어떤 긴장도 사라진다. 말하자면 무효. 그런 다음 아키코는 영화에서 어떤 설명도 없이 사라진다. 도대체 아키코라는 등장인물은 이 줄거리에 무엇을 봉사하기 위해서 등장한 것일까. 혹은 신운일의 이야기와 평행하면서 (영화가 시작도 하기 전에) 상해에서 보낸 독립 운동가들이 체포되고 (영화가 시작된 다음에) 조선총독부 총독 생일에 맞춰 전원 몰살하려 한 폭약을 구입하려던 군자금을 고등계 형사 최칠용에게 빼앗기기까지의 과정을 길게 서술하고 있다. 이제 어떻게 그 돈을 다시 구할 것인가. 이야기를 이끌고 가는 돈이라는 역할의 표면 등록. 역할의 수행에 관한 인물들에 대한 기대. 교활한 중국인은 돈을 먼저 내놓으라고 박노훈에게 말한다. 이때 박노훈의 방법은 이상할 정도로 단순하다. 고백화 기홍을 찾아가 민족에 대한 사랑에 관해 몇 마디 웅변을 한 다음 그 돈을 구해달라고 간청한다. 그 돈을 구하기 위한 고백화 기홍의 이야기. 생략된 장면. 그런 다음 (고백화가 아니라) 태백화가 경무국장에게 수청을 약속하면서 그 돈을 빌린다. 물론 돈의 순환과정의 아이러니. 총독을 지켜야 할 경무국장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를 암살할 비자금을 구해준다. 궁금한 질문. 그런데 왜 고백화 기홍은 민족이라는 이름 앞에서 자신이 빚을 청산하듯이 어떤 요구나 대가없이, 하다못해 박노훈에 대한 사랑의 감정조차 없이, 그 돈을 구해주려는 것일까. 그런 다음 왜 그 임무를 태백화에게 떠넘긴 것일까. 마치 이 행위는 신운일이 자기의 뜻과 관계없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일본 여자인 아키코와 약혼을 발표한 다음 그 축하연이 명월관에서, 그것도 태백화 눈앞에서 벌어진 다음 이어지기 때문에 마치 그녀를 완전히 자포자기시키는 요구처럼 보인다. 단지 부조화라고 말할 수조차 없는 인물들 사이의 네트워크. 이때 이들 사이의 관계는 오로지 이야기의 골격에 따라 장르를 유지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 사이의 교환은 어디선가 흩어진 다음 오로지 기능의 액션만을 남겨놓은 채 감정의 분배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에는 사라진 씬들이 에매하게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걸 모를 리가 없다. 이를테면 거의 설명과잉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의 1960년대 임권택 의 사극영화들을 생각해보라. 그때 단지 이것이 인물들 사이의 네트워크뿐만 아니라 장르의 욕망의 경제학에서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심층적 구조가 사라진 컨벤션들. 그러므로 어떤 불연속. 무엇을 주장하기 전에 먼저 없어진 것은 무엇일까. < 장안명기 오백화 >에서 거의 완전히 붕괴된 것은 이 영화의 경제성이다. 그렇다면 임권택 은 교환과 분배 없이 무엇으로 이 규칙을 다시 작동시킬 수 있다고 믿은 것일까. 임권택은 자기 영화 안에서 목표를 찾아가는 대신 목적을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장안명기 오백화>는 목표가 사라진 영화이다. 어떤 목표? 장르에 따라 줄거리가 거두어야 하는 최종 목적지. 이 영화는 그 목적지가 마치 도달할 수 없는 헛된 목표인 것처럼 거기에 갈 수 있는 영화적인 방법의 경제학을 거의 포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목표가 헛된 대상이 될 때 이 영화의 모든 쇼트들은 갑자기 장르의 규칙 안에서 자기의 사용가치를 상실할 것이다. 나는 이상할 정도로 마지막 장면에서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저 어울리지 않게 작은 배에 저 많은 사람들, 박노훈과 네 명의 백화가 새벽에 몸을 싣고 정말 그 머나먼 서해 바다를 가로 질로 저 멀리 상해까지 갈 수 있을까, 라는 의심이 생겨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이 영화의 어디서도 아니에요, 이건 영화에요, 그러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상상해주세요, 라는 요구를 하지 않고 있다. 그때 상해는 이 영화 전체의 헛된 최종 목적지에 대한 텅 빈 기표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시적으로 찍힌 유일한 장면. 그건 마치 어떤 작별인사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이건 지나치게 사후적으로 감상적인 기분에 사로 잡혀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선언했다. <장안명기 오백화>를 보면서 나는 이 영화를 알고 싶은 대신 < 잡초 >를 만들기 직전, 그러니까 이제까지의 영화가 모두 습작이라고 단언해야만 했던 그 상황의 심정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때 여기서 내가 보는 것은 새로운 도약을 향한 어떤 약속의 증거가 아니라 정반대로 그 모든 것의 조화가 어지럽혀진 채 너무 많은 장면들이 스스로 의미를 포기해버린 얼룩들의 거의 망쳐버린 듯한 카오스였다. 나는 < 장안명기 오백화 >의 이상한 마지막 장면을 다시 떠올리는 중이다. 일본군의 추적이 마지막까지 뒤따르고 네 명의 오백화와 박노훈, 신운일을 태운 병원 앰뷸런스 구급차는 그들을 태울 배가 있는 강변 가까이 도착한다. 신운일은 그들을 내리라고 한 다음 자신이 이들을 따돌리겠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자살의 제스처에 다름 아니다. 그들은 무사히 탈출을 하지만 마치 예정된 것처럼 신운일은 일본군의 추적 끝에 총에 맞아 죽는다. 그가 죽어가면서 보는 것은 마치 대지가 기울듯이 흔들리는 시선이다. 물론 그것은 신운일이 쓰러지면서 보는 세상의 마지막 풍경이다. 그런 다음 일본군들은 마치 자기들의 일을 다 했다는 듯이 돌아간다. 눈 덮인 언덕 아래에서 고백화는 물어본다. “아니, 어떻게 된 것일까요?” 박노훈은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이 대답한다. “녀석은 여자를 사랑하는 법을, 아니 인생을 사랑하는 법을 나에게 가르쳐주고 있군” 멀어져가는 일본군. 그때 앰뷸런스 차 안에서 총에 맞아 구멍 뚫리고 금이 간 창문을 통해서 그들을 바라본다. 이 난처한 두 개의 쇼트 사이의 반복적인 쇼트와 상대 쇼트. 말하자면 성립되지 않는 시선의 교차.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 과도하게 사후적인 설명이 동원되어야 할 지 모르지만 나는 여기서 멈출 생각이다. 마치 배를 타고 멈춰 서서 바라보는 박노훈처럼. 그때 눈물을 흘리는 박노훈의 얼굴. 눈물. 한 없이 이어지는 무심한 강물. 그들은 무사히 상해에 도착할 수 있을까. 그건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은 이 길을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대사. 인생을 사랑하는 법. 그건 임권택 그 자신이 습작들과 작별하면서 내게 설명한 말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 사랑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계속) 1973년 98분 칼라 2.35 감독 임권택 제작 우진필림 각본 신봉승 , 윤석훈 촬영 변인집 음악 전정근 미술 노인택 편집 현동춘 박노식 박노훈 신성일 신운일 고은아 고백화 기홍 태현실 태백화 정미 독고성 최칠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