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심청전
- 감독
- 노진아
사나이의 길이란 무엇인가? 어려운 물음이다. 일찍이 많은 남자들이 남도(男道)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마치 그것은 ‘남자의 로망’ 마냥 각기 다른 모양을 가지고 있어 보편타당성을 획득하기란 불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박노식 이라면 어떨까? 스스로를 ‘뻥까오리 백작’이라 부르며 때로는 주먹으로 때로는 눈물로 영화판을 종횡무진했던 은막의 무뢰배. 수많은 일화를 남겼지만 그것을 일일이 찾아보는 것 보다, 그가 감독한 영화를 보는 것이 ‘박노식’이라는 사람을 들여다보는 것이 훨씬 더 좋다. 평생을 배우의 자부심과 자의식으로 살아온 그는 점점 남의 작품에 답답함을 느끼게 되었고 본인만의 영화를 만들기로 결정한다. 감독 데뷔작의 제목이 < 나 >(1971)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영화는 서사, 틀, 클리셰 따위를 모두 다 박살 내고 오롯이 ‘박노식’의 생각만으로 빚어진 것들이었다. 나는 그의 영화에서 남자의 냄새를 맡는다. 근성... 뚝심... 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 오늘 소개할 영화 <왜?>는 그 중에서도 남다른 면이 있는 영화다. 영화가 시작되면, 용팔이( 박노식 )와 용칠이( 장혁 )은 봉선이와 함께 달린다. 남녀 한 쌍이 그들을 쫓는다. 엄청나게 다급한 상황! 용팔이는 어딘가의 문을 열고 황급히 들어간다. 그렇지! 숨어서 시간을 끄는구나! 아니다. 그는 배가 아파서 화장실을 찾고 있었다. 화장실을 찾는 긴박감. 이렇게 보니 화장실인 것 같은 표정. 이것이 첫 장면이다. 일찍이 영화평론가 정성일 선생은 ‘영화의 첫 5분을 보면 그 영화가 어떤 영화일지 알게 된다.’는 내용의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나는 이 말에 상당히 공감하는 편이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이후의 내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저 용팔이는 배가 아팠을 뿐이다. 그럼 그들을 쫓아온 남녀는? 모른다. 그럼 용칠이와 봉선이는 왜 그와 함께 뛰었을까? 모른다. 제목으로 사용된 < 왜? >라는 한 글자는 ‘내 마음대로 한다’는 뜻을 담은 ‘왜!?’일 수도 있고, 이런 식이어서 안 될 것이 뭐가 있냐는 뜻의 ‘왜?!’일 수도 있다. 정성일 선생의 말씀은 이 영화에도 정확히 적용된다. 남은 시간동안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황홀경들이 한여름 마른 강냉이 털 듯 우수수 쏟아지기 때문이다. 봉선은 일본에 계신 아버지를 만나러 왔다. 그녀와 어머니를 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사업가로 자수성가한 아버지 최광진은 삶을 얼마 남기지 않고 봉선을 불러 유산 상속에 대해 이야기하고, 자신의 부재를 사과하려 한 것이다. 용팔과 용칠은 봉선을 에스코트하기 위해 함께 일본에 당도한다. 하지만 이 여행은 조총련계 비밀 결사 조직의 계획에 의해 처음부터 어그러지고 만다. 그들은 유산 상속에 필요한 서류를 훔쳐 가짜 봉선이를 최강진에게 보내 유산을 가로채려고 한다. 그 돈으로 위대한 수령동지의 생일선물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한편, 최광진에겐 가정부와 정을 통해 낳은, 말하자면 서자쯤 되는 신따로라는 아들이 있다. 그는 인정받지 못한다는 엄청난 고통을 받으며 술과 폭력에 절어있는 망나니의 삶을 산다. 조총련 비밀조직의 두목( 박노식 )은 이 사실을 알고 신따로의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을 이용해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봉선이 납치된다. 내용을 압도하는 그림. 조총련 비밀조직의 비주얼. 내용을 간략히 설명하면 이렇다. 사실 내용도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대충 써놔서 저렇지 그 사이에 변태 바보 아들을 둔, 자식 사랑 지독한 악당 아버지가 봉선을 납치하기도 하고, 조직을 배신하고 봉선이를 돕는 노진아라는 캐릭터도 있다. 그러나 이런 내용을 압도하는 그림들이 영화를 수놓고 있다. 사실 여러분께서 이 영화를 이미 보셨다면, 이미 내용이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것이다. 이 영화는 당시 인기를 끌었던 영화의 분위기들을 다 때려 넣었다. 감독 본인이 창시하고 최고의 인기를 구했던 용팔이, 일본의 야쿠자 영화, 제임스 본드류의 첩보물, 게다가 일본 저예산 변태 영화의 기운까지 불어 넣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아마 당신은 평생 이 영화의 제목을 잊을 수가 없게 될 것이다. 보면서 ‘왜?’라는 단어를 계속 떠올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조총련 비밀조직이 왜 야쿠자와 저리도 흡사한 모습이라는 말인가? 신따로라는 놈은 이복누이를 죽이려다가 왜 갑자기 효자가 되는가? 봉선이는 왜 별 시답지 않은 이유로 노신사를 따라갔다가 변태같은 작자에게 수모를 당하는가? 용팔이는 왜 저리 바보인가? 왜?왜? 물론 답은 없다. 어설픈 이야기들이 얼기설기 얽히고 ‘재미있는 것’을 만들겠다는 욕심 하나로 영화가 진행되고 있다. 한 장면 한 장면이 그런 노력의 결과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는 잘 이어지지 않아 여기저기 후시녹음, 편집 등으로 대충 해결하려한 흔적들이 역력하다. 하지만 그러 인해 탄생한, 어디서도 보기 힘든 장면들이 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봉선이를 놓친 남녀 한 쌍의 조직원은 그에 대한 대가로 폭행을 당하는데, 이런 상황이라면 응당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밟고 그런 걸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알록달록한 원피스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인군단이 블링을 하며 발로 따귀를 때린다. 한 명이 덤블링을 해서 따귀를 때리면 반대편에서 다른 여인이 덤블링을 하며 다른 쪽 뺨을 때리는 그런 쌍 발따귀. 이것도 충분히 놀랍지만, 가히 충격에 가까운 발상이 그대로 구현된 장면이 있다. 발따귀 장면에서 조직 보스 박노식 은 잡혀온 여성 조직원에게 “그네를 탈테냐?”고 묻는다. 그러자 그 조직원은 “그...그네만은... 차라리 죽여주십시오!”라고 말한다. 이렇게 딱 한 번 언급되는 ‘그네’는 이후에 그 위엄을 드러낸다. 발따귀 조직에 의해 봉선이 잡혀오고, 용팔이와 용칠이도 포박당한 상황. 푸르름이 무성한 들판 가운데 대형 그네가 놓여져 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네가 맞다. 어린 시절 타고 놀던 그네. 단옷날과 춘향전하면 생각나는 바로 그것. 조직원들은 그네에 아래 부분에 칼을 장착하고 바닥에 봉선을 묶는다. 그리고 여성 조직원 둘이 올라가 타기 시작한다. 그네가 앞뒤로 움직이는 사이, 옆에서 줄을 잡고 있는 사내( 조춘 이다)가 그네의 높이를 점점 낮춘다. 봉선이 반쪽이 날 상황이 되어간다. 이 장면은 여러모로 굉장히 인상적인데, 이 끔찍하면서도 가내수공업적인 느낌 덕분에 웃음이 나는 걸 피할 길이 없다. ‘살인 그네’라니 누가 상상이나 해볼 수 있었을까? 용팔이는 묶여있고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는 위험한 상황에 아무런 이유없이 갑자기 정신을 차린 신따로 덕분에 봉선은 목숨을 구한다.(왜라고 묻는 것도 이쯤되면 지친다) 하지만 날아가버린 관객의 정신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게다가 이 시퀀스가 굉장히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어서 나로서는 이런 연결이 더욱 놀라운데, 이 ‘살인 그네’ 시퀀스가 시작되는 부분에 이런 장면이 있다. 포박당한 용팔이 앞에 조직의 보스가 나타난다. 이 둘은 똑같이 생겼다. 그러자 서로 크게 웃기 시작한다. 용팔이는 보스를 보고, 보스는 용팔이를 보고. 크게 웃은 이들 둘은 보며 주변에 포진해 있던 아군, 적군을 가리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크게 웃는다. 으하하하하. 이 장면에는 총 3명의 박노식 이 존재한다. 용팔이 박노식, 조직 보스 박노식, 그리고 카메라 뒤의 감독 박노식. 마치 감독 박노식이 다른 두 자아를 비웃고만 있는 것 같아 굉장히 흥미로운 장면이다. 그는 배우로서의 자신에게 박힌 ‘전라도 용팔이’와 ‘악역전문 배우’라는 스테레오 타입이 싫었던 것일까? 그래서 감독을 시작하고, 어려운 여건에서도 꾸역꾸역 영화를 만들어갔던 것일까? < 왜? >는 그런 본인의 캐릭터를 실컷 비웃고 그것에서 벗어나 본연의 자신으로 돌아가겠다는 선언이었을까? 이후의 행보가 그렇지는 않았지만 이 장면은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면이 있다. 그러나 감정을 수습할 새도 없이 곧바로 ‘살인 그네’가 빙빙 돌아가 주니 나로서도 계속 생각하며 버틸 수는 없었다. 살인그네 < 왜? >는 정말 괴상한 영화다. 잘 만들었다는 것과는 당연히 거리가 멀고, 그렇다고 어떤 장르로서의 명확함 따위도 던져버렸다는 느낌이다. ‘재미’. 그것이 가능하든 하지 않든, 성공하든 실패하든 상관하지 않고 감독이 생각하는 영화가 줄 수 있는 ‘재미’만을 생각하고 그것만을 위해 만든 영화 같다. <왜?>는 박노식 의 7번째 감독작이다. 총 14편의 감독작 중 중앙에 위치한 이 영화의 만듦새가 이런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메가폰을 잡은 박노식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뛰어난 걸작을 만드는 것보다 본인이 납득할 수 있고 스스로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창조할 수 있는 궁극의 ‘자유’였다고 생각한다. 배우였을 때는 어쩔 수 없이 감독의 지시에 따라야 했지만, 감독이 되어서는 다른 무엇과도 다른 ‘박노식 영화’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 했던 것이다. 아쉽게도 그 결과물이 일반적인 기준에서의 걸작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의 작업은 한국 영화사의 독특한 한 페이지로 충분히 기록 될 만 하다고 본다. 사내의 길이란 무릇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가는 것. 성공과 실패는 나중의 일. 시작한 것을 사력을 다해 완수하는 것. 세상에도, 은막에서도 사내의 향기를 맡을 수 없는 요즘 시대이기에 그의 이름은 더욱 그리운 것일지도. 박노식 김청자 장혁 감독: 박노식 각본: 유일수 개봉극장: 피카디리 관람인원: 22,192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