놉
- 감독
- 조던 필
- 제작년도
- 2022
- 출연
- 대니얼 칼루야, 케케 팔머, 스티븐 연, 마이클 윈콧, 브랜든 페레아
<희생>(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1986) 중 1년간 관객을 찾은 영화들을 필자의 시선으로 돌아보며, 올 한 해 영화가 불러온 고민들을 정리합니다. 스크린 앞에 앉은 이들이 이미지 속에서 그들의 욕망을, 그들이 욕망하는 것을 찾는다는 말은 꽤 미심쩍은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앞에, 뒤에 그리고 곁에 앉은 이들이 보고 있는 이미지와 자신이 보고 있는 그것과의 차이를, 즉 간극을 향유하기 위해 영화관에 간다. 이 경우에, 그리고 오직 이 경우에만 영화관은 우정의 장소가 된다. 그런데 “뤼미에르에 대한 에디슨의 승리”(장-뤽 고다르)가 전면화된 곳에서, 관객들은 그저 “자신들이 찾은 것만을 욕망”(기 드보르)하게 될 것이다. - 유운성, 「우정의 이미지들」, 『인문예술잡지 F』 제10호 이 글은 2024년 12월 중순에 쓰이고 있다. 12월 3일의 계엄령 선포 이후라는 뜻이다. 연말의 나는 영화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렇듯, 그해의 영화들을 순위 매기거나 놓친 영화를 돌아보며 다가올 새해를 맞이했다. 지나간 이미지들을 되짚으며 한 해를 마무리하고는 했었던 것인데, 반대로 요즘의 나는 유튜브에 들어가 생중계되는 담화와 현안 질의 영상 같은 것을 들여다보고 있다. 이 와중에 마감 일자는 다가왔고 글을 써야 할 때가 되었는데, 청탁을 받았을 때와는 무언가 달라진 기분 같은 것을 느꼈고, 그것을 외면하기에는 원래 준비했던 글의 주제와 지금의 내 상태가 관련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닌 것 같고, 꽤나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 준비하던 글을 버릴 수는 없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 준비했던 대로만 쓰면 왠지 그건 평정심이라기보다는 뻔뻔함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불안 섞인 걱정을 하고, 그럼 준비했던 대로만 쓰는 건 뭔가 아니다 싶고, 굳이 올해에 한정하지 않더라도 관련지을 수 있을 만한 사례를 가져와도 괜찮겠다는 결론에 이르러, 그와 관련된 옛날 얘기로 글을 시작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한 편의 영화에 대한 단일한 감상이란 있을 수 없다. 비평이란 이름의 탈을 쓰고 유의미한 의견으로 정교히 언어화되어 세상에 나오지 않을지라도, 언제나 한 편의 영화를 본다는 것에는 각자의 개별적 경험이 스며들며 그 분리 불가능한 총합은 또 하나의 경험이 되어 각자의 마음에 남기 마련이다. 김대환 의 장편 데뷔작 < 초행 >(2017)이 내게 그런 영화 중 한 편이다. 2017년 겨울에 개봉한 이 영화는 당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였는데, 당시 이 영화를 본 친구들은 개봉하게 되면 꼭 보라는 말을 해주면서도, 어떤 내용인지 묻자 아무것도 모르고 보는 편이 좋고 결말이 참 인상적이라는 말을 더해 주어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포스터나 시놉시스를 보건대 장르적이거나 플롯 운영에 있어 반전을 꾀하는 영화는 아닌 것임이 확실할 텐데, 도대체 무엇이 있길래? <초행> 포스터와 스틸 <초행>이 막바지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결말부는 2016년 가을 무렵부터 2017년 중순까지 이어졌던 광화문 촛불 집회를 로케이션으로 삼는다. 양쪽 집안을 오가며 고군분투하던 7년 차 청년 커플을 따라가던 픽션의 세계에 돌연하게 쏟아지는 저 리얼리티의 막대함에 적잖이 혼란스러웠다. 개인적으로 이 선택이 단순히 허구와 현실의 구별이라는 영화의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린다는 개념적 차원 그 이상의 가치로 빛난다고 느꼈는데, 서둘러 말하자면 이 영화가 너무 빨리 도착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KOBIS에 따르면 이 영화는 내가 열심히 광화문 광장을 오가던 2016년 11월 26일부터 2016년 12월 20일까지 촬영되었다. 헌법재판소는 2017년 3월 10일 대통령 탄핵을 결정했고, 이 영화는 두 달이 지나지 않아 제18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프리미어 상영으로 공개된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당시 촛불 집회와 관련된 일련의 사태와 시간은 이 현실을 살아가는 한 명의 시민으로서 망각하기 어려운 적잖은 충격이었을 테다. 물론 나는 이 영화를 개봉하고 보았지만, 그 물리적 간극을 상쇄시킬 정도로 <초행>의 끝이 주는 감흥은 생생하면서도 생경했다. <초행>에 기입된 광화문 광장의 생생한 이미지가 한편으로 생경했던 이유는, 영화라는 것이 어느 정도 시차를 두고 만들어진다는 모종의 관습을 깨부수었기 때문이다. 거의 생중계에 가깝다고 느끼면서도, 약간의 거리감은 환기되는 이상야릇함에 가까웠다고 해야 할까? 사실 이 장면이 인상 깊은 건, 작품 내에서 세계를 뒤집어놓는 급속한 반전처럼 기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고민이 지난히 이어지던 이 커플이 광장으로 향하며 어디로 가야 할지 헤매는 상황은, 이야기와 멀어지기보다는 오히려 끈끈히 달라붙으며 세계를 입체화하기 때문이다. 수현과 지영은 그 역할을 맡은 조현철 과 김새벽 으로 존재를 전환하지 않고, 광화문 광장은 이 영화의 주된 무대인 삼척, 인천과 특별한 위계서열을 형성하지 않는다. 나의 사적인 경험, 역사적 현실, 영화적 허구가 한 데 섞여 용광로처럼 들끓었던 이 기묘한 감각을 여전히 잊기 힘들다. <태풍클럽> 일본어 포스터(일부)와 국내 개봉 포스터 그 ‘너무 이른’ 경험으로부터 7년이 지나 2024년이 되었다. 올해는 정반대로 ‘너무 늦은’ 경험을 했다. 소마이 신지의 < 태풍클럽 >(1985)이 정식으로 개봉한 것이다. 처음 본 것이 중학생 때인지 고등학생 때인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둠의 경로를 통해 이 영화의 영상과 자막을 구했으며 이불에 들어가 스마트폰으로 보았던 기억, 예상치 못한 영화 속의 거친 면모에 받았던 충격만큼은 선명하다. <태풍클럽>은 1985년 작이니 거의 30년이 되어서야 한국에 정식으로 공개된 것이다. CGV 아트하우스관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보았는데, 객석이 의외로 꽉 차 있어 놀랐고, 영화가 끝난 뒤 당혹스러워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내가 너무 늙어버린 것 같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미 <태풍클럽>이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그려내는 아름다운 청춘물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일까? 아니면 이미 소마이 신지의 다른 영화들과 그의 연출 스타일을 경험해 보았다는 차이 때문일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시네필 꼰대처럼 우쭐대는 것은 아닐까? 상영관에 함께 있던 이들과 나는 동등한 입장에서 영화를 본 것이 맞는 걸까? 너무 늦게 도착한 영화를 보며 든 생각이다. 영화 감상은 반드시 시차의 문제를 동반한다. 스크린 속 세계가 내게 익숙한지 생소한지에 따라 감상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태풍클럽>은 개봉하기까지 30년에 가까운 시간을 통과하며 몇몇 평자들에 의해 걸작으로 이야기되어 왔던 작품이었고, 이미 대다수의 시네필들이 시네마테크와 어둠의 경로를 통해 그 감각을 수용한 상태에서 너무 늦게 도착했다. 물론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생각을 바꿀 수도 있고, 처음 본다 해도 기존의 맥락을 신경 쓰지 않고 감상할 수 있으니 이 모든 것은 쓸 데 없는 우려일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하나의 유물을 목격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2024 월별 독립예술영화 박스오피스 20위까지의 목록 중 재개봉 영화 목록 (출처: KOBIS / 회색 음영: 한국 최초 개봉 연도, 주황 음영: 당월 순위) 그 인상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올해 개봉한 수많은 재개봉작들 때문이다. KOBIS를 참고해 보면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재개봉작들이 많이 출현했던 해다. 심지어 몇몇은 동시대에 만들어지고 개봉하는 영화와 경쟁해 당당히 1위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나는 영화 산업에 종사하고 있지 않고, 어쨌거나 이 통계는 한국의 사례이기에 동일한 현상이 전지구적으로 일어나는지에 대해서까지 고려하며 이 흥행에 대한 인과론적 분석을 할 수는 없다. 그저 코로나바이러스 이후 영화 산업이 큰 타격을 입었고, 특히 독립예술영화를 배급하는 입장에서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을 테니, 새로운 영화를 가져오는 것보다는 이미 지나간 영화를 고르는 쪽이 경제적으로 나은 선택지였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보다 관심이 가는 것은 그 선택들이 일으키는 변화다. 영화 홍보에 있어 언제부터 ‘개봉’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지는 모르겠다. 모르긴 몰라도 “봉하여 두었던 것을 떼거나 엶”이라는 사전적 의미에서 그 선택의 이유를 추정해 볼 수 있겠다. 요컨대 영화가 개봉한다는 건 무언가 기대할 만한 것이 빵 하고 튀어나오는 그런 종류의 사건이었던 것이다. ‘개봉박두’ 나 ‘대개봉’ 같은 한때의 표현들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이제 우리네 관객이 마주하는 표현은 ‘개봉’ 대신 ‘공개’라는 심심한 표현이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지원 사격으로 부상한 OTT와 유튜브를 통과하며 우리는 이미지에 너무나도 익숙해졌고, 더 이상 이미지가 이전과 같은 환상성이나 신비로움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을 지독할 정도로 체감하다 못해 익숙해졌다. 내 손안의 영화관인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속 릴스와 쇼츠로 맥락이 탈구된 수많은 밈(meme) 이미지들을 나의 취향에 맞는 알고리즘의 설계 아래 부지런히 스크롤링하며 갱신하는 것이 일상화된 우리의 감상 환경에서, 미지의 세계를 마주하는 구속적 방식의 영화 감상은 그 자체로 만족을 주지 못하는 20세기의 시대착오적 산물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올해는 그것을 직접 몸으로 체감했던 해였다. 올해 나는 “무슨 무슨 영화가 재개봉한대” 라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는데, 그때마다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했다. “아니, 그게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재개봉이냐?” 가령 표의 4월부터 5월을 보면 < 남은 인생 10년 >(후지이 미치히토, 2022)이 1위를 차지했는데, 이 영화는 고작 1년 전에 개봉한 영화다. 차라리 재개봉 대신 재상영 내지 스크리닝이라는 심심하고 객관적인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까? 아니면 재개봉이라고 부를 정도로 세상이 돌아가는 속도는 너무 빨라서 그 사이 옛날 영화가 되어버린 것일까? 이 ‘재개봉’에 대해 느끼는 어색함은 그 자체로 동시대 영화가 놓인 위치를 설명해 주는 것만 같다. 사실 나는 10년이 넘기는 했지만 < 비긴 어게인 >(존 카니, 2013) 같은 경우에도 ‘옛날 영화’라고 감각하지 않는 쪽인데, 이 영화도 ‘재개봉’을 해서 9월 독립예술영화 박스오피스에서 1위를 기록했다. 심지어 20년이 넘었는데도 1등을 한다. 10월의 1등, 닉 카사베츠의 < 노트북 >(2004)이다. 이렇게 ‘재개봉’으로 소환되는 (너무 이른) 과거는 추억으로 기능한다. 그리고 다가오는 2025년에는 얼마 전 유명을 달리한 나카야마 미호의 출연작, 이와이 슌지의 < 러브 레터 >(1995)가 작품 탄생 30주년 기념으로 재개봉을 예정 중이라고 한다. 심지어 세로 자막 버전이라고 한다. 아! 그때 그 시절 …… 농담이다. 나는 극장에서 세로 자막으로 영화 본 기억이 없다. 좌우지간, 그런 점에서 올해의 극장은 추억의 공간이다. 다른 한편, 올해는 과거의 수많은 걸작들이 극장에 소환된 해다. 이들은 박스오피스권에는 들어오지 못하지만 시네필들에게는 축복과도 같은 사례다. 앞서 말한 소마이 신지의 <태풍클럽>, 오시마 나기사의 < 전장의 크리스마스 >(1983), 이마무라 쇼헤이의 < 복수는 나의 것 >(1979), < 우나기 >(1997), 다시 한 번 ‘재개봉’한 구로사와 기요시의 < 큐어 >(1997), 무엇보다 90년대 한국에 뒤늦게 개봉하여 10만 관객을 동원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 희생 >(1986) 4K 리마스터 재개봉까지 …… 물론 이들의 방문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이들이 ‘걸작’으로 소환되고 있는 것은 한편으로 영화가 더 이상 동시대를 살아가는 ‘나’의 문제와 결부되는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역사적 덩어리 내지 가치 있는 유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이들에 익숙한 시네필들은 기꺼이 극장에 갈 것이고, 그렇지 않은 관객들이라도 걸작이라는 은근한 압박에 둘러싸여 작품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 (상) <전장의 크리스마스>, <복수는 나의 것> / (하) <큐어>, <희생> 그런 감각을 더 강하게 느끼는 이유가 있다면, 이 영화들이 시네마테크의 기획과 같은 대안적인 방식으로 상영되지 않고, 정식 개봉 절차를 거치는 방식으로 CGV와 메가박스, 롯데시네마에서 상영되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몇 년 전만 해도, 최신 개봉작은 멀티플렉스에서 보고 독립영화와 과거의 영화들은 시네마테크에서 보는 이분법적 감상 환경이 일반적이었다. 나 역시 2016년에 처음으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고바야시 마사키의 < 할복 >(1962)을 보고, 노인이 된 나카다이 다츠야와 이준익 감독의 대담 상영을 경험하며 그 시간의 아득함을 체감한 바가 있다. (적고 보니 거의 10년이나 지난 일이다. 미안하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 예술영화 시장에는 큐레이팅이 보다 적극적으로 도입되었고 ‘홍길동 특별전,’ ‘임꺽정 배우전,’ ‘장길산 기획전’ 같은 문구는 굳이 대안적 상영 공간을 찾지 않더라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브랜딩 상품이 되었다. 알리체 로르바케르와 JR의 단편 < 알레고리 >(2024)와 레오 까락스의 단편 < 잇츠 낫 미 >(2024)가 동시대 영화 이미지의 존재론적 탐구라는 주제의식과 레오 까락스라는 공유점으로 매끄럽게 묶여 개봉하는 상황은 시네필을 위한 친절한 배려이자 선물이지만, 아무래도 이런 호의에 적응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잇츠 낫 미> 중 그러니 이와 같은 유물의 소환을 다른 말로 ‘교양’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올해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였던 또 하나의 사례가 떠오르는데, 다름 아닌 < 괴물 >(고레에다 히로카즈, 2023), < 추락의 해부 >(쥐스틴 트리에, 2023), < 존 오브 인터레스트 >(조나단 글레이저, 2023)와 같은 작품의 예상치 못한(?) 흥행이 그것이다. 솔직히 이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에는 자신이 없지만, 일개 관객으로서의 경험을 떠올려볼 수는 있겠다. 개인적으로 이 세 작품의 흥행은 작품들이 그 자체로 특별한 자질을 품고 있다는 항구적인 특징 때문이 아니라, 어떤 시대적인 요구에 의한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저 세 편의 영화를 보고 사회적이든 미학적이든 정치적이든, 영화를 통해 상당히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접했지만, 그 수많은 말들 속에는 왜인지 ‘나’의 시선이나 감상보다는 대체로 객관과 분석의 언어로 가득했다. 차이밍량은 “상업영화는 세상의 내일을 걱정하는 영화이고, 예술영화는 나의 내일을 걱정하는 영화”라고 했는데, 이상하게 이 ‘예술영화’들을 보고 나는 세상의 내일을 걱정했던 것 같다. <괴물>, <추락의 해부> 중 이제 영화관은 문자 그대로 영화를 상영하는 공간이라는 무맥락적인 성격이 아니라, 지나간 걸작을 만날 수 있는 시네마테크, 혹은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시네마천국이 되어버린 것일까? 그 속에서 오래된 영화들은 박물관의 유물처럼 ‘나’와 무관한 역사로 간주되거나, 반대로 ‘나’의 그때 그 시절 향수에 젖어드는 정서적 힐링 콘텐츠가 되어버린 것일까? ‘재개봉’이라는 말로 너무 이르게, 혹은 ‘걸작’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늦게 찾아온 과거의 영화들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사례를 더 이야기해 보고 싶다. 비단 올해만 그렇지는 않지만, 영화관에는 전통적 의미의 영화 대신 다른 영상물이 걸린 경우가 많았다. 구체적으로 제목을 짚지 않더라도, 가령 다큐멘터리로 분류되는 아이돌 콘서트 실황 영상이나 스포츠 중계 등은 코로나 이후 극장 수입에 있어 효자 상품이었다. 그런데 누가 보러 가는가? 당연히 해당 작품이 다루는 대상의 팬들이 보러 간다. 그러니 팬들이 아니면 보지 않는다. 나를 비롯한 주변의 지인들 중에서 같은 종류의 영화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팬덤 문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이 타겟팅 기획물 중 올해 가장 성과가 좋았던 작품은 김덕영 의 < 건국전쟁 >(2023)이다. KOBIS에 따르면 <건국전쟁>은 117만 관객을 동원하며 2024년 한국에서 상영된 독립예술영화 분류 작품 중 관객 수 1위를 기록했다. 이승만이라는 아이돌과 태극기 부대를 중심으로 한 팬덤 문화가 만들어낸 기념비적 성과라고 불러야 하겠다. 불현듯 “태극기 부대 속에 들어가서 <건국전쟁> 보기”라는 기획으로 유튜브 콘텐츠를 만들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바로 그런 생각을 하게 할 정도로 이러한 종류의 작품들은 볼 사람과 보지 않을 사람이 명확히 정해져 있는 상품이다. 말하자면 죽음의 이지선다! 바이로이트 극장의 내부를 그린 삽화,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 19세기에 활동한 독일의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는 기존의 오페라를 상연하던 극장을 완전히 탈바꿈하며 바이로이트라는 이름의 극장을 설계했다고 한다. 그는 호화로운 장식이나 발코니석 같은 부수적 기물을 전부 떼어버리고, 바닥을 깊게 파서 오케스트라를 안쪽으로 은폐하여 관객들이 오로지 작품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했다. 그곳에서 관객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바그너의 이 미학적 파시즘의 설계는 이후 영화관의 메인 모델로 채택되었고, 그를 총애했던 히틀러의 정치적 파시즘과 짝꿍을 이루며 < 의지의 승리 >(레니 리펜슈탈, 1934)와 같은 걸작으로 당시 독일 인민들의 정신을 통합해냈다. 우리는 여전히 그 자장 속에서, 쉽게 ‘우리’라는 말을 꺼내고 싶게 하는 환경 속에서 영화를 보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 OTT 플랫폼에 둘러싸인 우리는 각자가 각자의 작품을 보는 식이었던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식 관람 환경 안에 살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옆 사람이 무얼 보든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2024년을 돌아보면서 불현듯 영화관 모델의 역사를 떠올린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영화의 죽음, 극장의 죽음, 무엇보다 우리와 각자의 문제. 혼란스러운 연말 시국 속에서 그 말들이 피부로 느껴지고 있다. 그렇다. 이것은 결산이 아니라 진행이다. 이광호(영화평론가) l 1996년생,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 주변을 오가고 싶다. 2018년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비평공모 당선. 반연간지 《크리틱b》, 월간 서비스 '비평의 편지' 필진.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토끼가 부러워. 고민이 없거든. 자기라는 것이 없고 그저 토끼라는 것밖에 몰라.” - < 바보사냥 >(김기영, 1984) 중 토끼를 부러워하는 세 남녀가 토끼섬을 찾아 떠나고 있다. 이게 웬 깜찍한 발상인가 싶은데 실상은 꽤 심오하다. 세 주인공 중 두 남자 강식( 배규빈 )과 홍익( 김병학 )은 정신병동에서 이제 막 탈출한 사람들이고, 한 여자 석호( 엄심정 ) 역시 만만찮게 특이하여 통상적 대화가 잘 안 통하는 인간이다. 여하튼 세 사람이 왜 토끼섬을 찾느냐 하면 그곳이 이들의 이상적인 대안 세계인 탓이다. 강식은 공해 공포증으로 인해 인간의 손이 닿은 모든 음식을 거부하고 완연한 원시의 자연 사회를 원한다. 그 방법이라 하니 무인도에 벌과 토끼만 풀어 놓고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생태계를 자생시킨단 것이다. 사회에 살면서 자살 강박에 시달리던 홍익은 강식을 따라 토끼섬을 쫓고, 탄광 마을에서 아버지를 잃은 석호도 둘을 따라나선다. 이 괴기한 여정과 인물들의 특이함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영화평론가란 사람들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영화기자로서 영화평론가란 분들을 자주 만난다. 아마 대한민국의 모든 직업 중에 영화평론가들과 가장 자주 이야기하고 만나는 직무이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그래서 ‘비평, 안녕하십니까’에 연재를 청탁받았나 싶기도 하다. 청탁을 덥석 물어버리고 “영화비평가의 일상과 생각을 공유”하고 싶다는 ‘비평, 안녕하십니까’의 기획 의도를 들은 뒤엔 꽤 놀라버렸다. 지난해 12월 무렵인가에 영화평론가들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기획해 본 적 있는 탓이다. 평소 자주 만나는 영화평론가께 이 다큐멘터리의 시놉시스를 얘기하자마자 “그런 걸 왜 만들어요···”라며 아주 작은 반발을 듣긴 했으나 지금도 그 꿈엔 변함이 없다. 그들의 일상이 개인적으로 너무 궁금하다거나 그들에게 기막힌 사연이 있어 보여서는 아니다. 자고로 영화는 재밌어야 하는데 그들의 일상을 찍는다면 분명히 재밌는 무언가가 나올 것 같단 확신이 있었을 뿐이다. 영화평론가들이라 하여 모두가 항시 재밌는 사람이라는 등 완전한 공통점을 갖고 있진 않다. 모든 편의점 점주님이 똑같은 사람은 아니듯 모든 영화평론가를 하나로 묶기는 다소 어렵다. 굳이 공통점을 도출해 보자면 대개 자차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는 정도일까. 그들이 <바보사냥>의 강식처럼 극심한 공해 공포증에 시달려서는 아닐 것이고, ‘비평, 안녕하십니까’에서 박예지 , 이광호 평론가가 먼저 밝혔듯 다소간의 현실적인 생활상에 결부한 문제일 순 있겠다. 또 굳이 찾아보자면 수상할 정도로 카톡 답장이 느리고 전화를 안 받는단 정도일까. 특히 원고 마감에 관한 연락이라면 더욱더···. 또 영화평론가들은 각자의 의견이나 취향에 꽤 강고한 편이다. 겉으론 조용조용, 다소 유순해 보이며 실제로 아주 친절하신 평론가조차도 맘속의 칼을 갈아 글 쓸 때가 많다. 놀랄 때가 잦다. 이 강고함에서 평론가 개인 간의 지극한 차이가 나타나고, 이것이 바로 진정 재밌는 지점이다. 이를테면 치킨집에서 간단한 술자리를 가졌다고 칠 때 평론가 A는 절대 닭고기를 먹지 않는다며 양배추샐러드만 우걱우걱 먹고 평론가 B는 무조건 바삭한 게 좋다며 치킨의 껍질만 뜯어 먹는다. 당황한 영화기자 한 명은 결국 닭의 맨살만 먹게 된다. 눈치를 보던 B가 “기자님 이거 맛있으니까 드셔보세요”라며 치킨 껍질을 주섬주섬 건네준다. 그래서 잘 받아먹고 맛있다고 대답하면 막상 상대가 실망해 버리는, 그런 신묘한 일을 종종 겪어본 적이 있다. “그런 걸 왜 만들어요···”라니.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어질 수밖에 없지 않겠나. 물론 실화를 바탕으로 퍽 과장한 우화이지만 이 우의의 골자야말로 영화평론가란 업의 중요 조건을 설명하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왼쪽부터 강식(배규빈), 석호(엄심정), 홍익(김병학) 1970~80년대를 거쳐온 유명 시네필 한 분(평론가 C)의 주위로 젊은 영화평론가 몇몇이 모인 자리에 있던 적이 있다. C 선생님은 영화평론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강고한 ‘베팅’임을 역설하셨다. 특정 영화에 대한 지지와 비판을 확고히 해야만 한다는 의미다. 자신이 틀렸다면 판돈을 모두 잃을 결사의 각오로 임해야 한다. 한번 닭고기를 안 먹기로 했다면 아무리 입에 집어넣어도 안 먹어야 한다. 살면서 처음 듣는 의견이 아닌 데다가, 독립 영화잡지를 출판했을 때 영화 저널리즘의 본질은 비판과 발굴 두 개뿐이라고 말하고 다닌 전적도 있기에 아주 신선한 논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평소 존경하던 선생님의 말씀으로 들었을 땐 감상이 남달랐다. 원래 알고도 안 하는 것이 가장 나쁜 법이다. 혼자 반성하던 때와 직접 혼났을 때의 차이가 극명했고, 이 ‘베팅론’의 현재적 가능성을 속으로 남몰래 타진해 보기도 했다. 이 가능성의 타진이 혼자만의 고민은 아닌 듯싶다. 송경원 씨네21 편집장은 팟캐스트 ‘ 조용한 생활 ’을 통해 말했다. “스크린에 펼쳐지는 것의 완성도에 주목하는 시네마의 시대는 지났고, 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 사이의 해석 과정이 가장 중요”해졌단 것이다. 강덕구 평론가를 필두로 모인 팟캐스트 ‘ 회랑 ’에서도 엇비슷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제는 어떤 영화나 예술을 대하는 원본성의 경험이 자기 자신에게만 남아있다. 내가 느낀 경험만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이고 이러한 배경에서 모든 비평가의 글은 점차 에세이로 변할 것”이란 맥락이다. 요컨대 이광호 평론가의 말처럼 “취향은 이제 가능성의 벡터를 상실”했다. 타인에게 자신의 영화적 취향을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이 취향을 글과 이론으로 견고하게 정제해 특정 영화를 정전으로 수출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워진 시대다. 그러나 위와 같은 한계를 거꾸로 매달아 바라볼 수도 있겠다. 영화평론가들의 자아란 C 선생님의 말씀처럼 여전히, 심지어 더욱더 비대해질 필요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객관적으로 남을 설득하기가 아주 무용한 상황일 때, 본인의 생각과 세상의 여론이 서로를 너그러이 흡수할 수 없을 때야말로, 모호한 타협을 요구하기보단 외려 세상을 매질하는 비평적 태도를 견지해야 할 수도 있겠단 뜻이다. 누군가를 크게 해치는 일만 아니라면야 지나치게 그리고 그럴듯하게 자기 말만 하는 강식과 홍익과 석호들의 비평적 에세이가 읽고 싶달까. 천국과 지옥이 한꺼번에 있는 곳 이쯤에서 <바보사냥>의 두 남자를 재론할 수 있을 법한데, 두 남자의 기행이 전술한 비평적 태도와 매우 비슷해 보이기 때문이다. 강식과 홍익은 토끼섬에 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돈벌이에 매진한다. 한 번은 포장마차를 열었는데 식자재 거래처가 병아리를 참새라고 속이며 납품한 일을 알게 된다. 거래처 사장이 “요즘 시대에 어떻게 참새를 잡냐?”라며 다들 이렇게 장사한다고 넌지시 설득하지만, 삐약거리는 병아리의 목을 차마 비틀 수 없던 둘은 “병아리를 죽일 바엔 병원에 다시 들어가자!”라며 포장마차를 부수고 만다. 이 상황이 머릿속에서 변주돼 반가운 모습으로 재생된다. 요즘은 이런 게 영화라며 속삭이는 남들의 목소리가 들려 왔을 때, 버럭 화내며 극장에나 다시 들어가자고 외치는 불통 영화평론가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이다. 두 남자의 돈벌이는 더 비극적인 상황을 마주하기도 한다. 소에게 억지로 물을 가득 먹인 뒤 한껏 매질하여 소의 살이 불게 만들어야 한다. 도축할 때 고깃값을 더 받기 위해서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둘의 질문에 작업 현장의 선배가 “이게 기술이고 예술이야!”라며 일갈하고, 소의 눈망울을 보며 부모님을 떠올린 홍익은 ‘어머니 죄송합니다. 당장 저녁 먹을 돈이 없어 두들깁니다.’라며 속으로 한탄한다. 어디에선가 본 상황 같다. 영화란 늘 기술과 예술의 경계에서 몸체를 불려야 하는 매체이며 필연적으로 양쪽의 미움을 살 수밖에 없다. 그 간극 속의 영화평론가들은 저녁 먹을 돈을 위해서 타자를 흠씬 두들겨 성미에 맞지 않는 글을 써야 할 상황에 들어서기도 한다. 그러면서 고해하듯이 뇌까리지 않을까. ‘시네마여 죄송합니다. 전 오늘 몇만 원의 고료를 위해 싫어하는 영화를 무난하다고 썼습니다···’ 포장마차를 부수고 매질해야 하는 송아지를 바라보다가, 탄광에 다다른 강식과 홍익 강식과 홍익은 병아리의 경우와 비슷하게 결국 소의 매질을 그만둔다. 대신 소를 때리라고 시킨 사람들을 흠씬 두들겨 팬 뒤에 탄광 마을에 가서 광부 일을 시작한다. 그들이 들어간 어두운 무저갱은 흡사 극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탄광 마을의 한 아저씨가 이곳을 “천국과 지옥이 한꺼번에 있는 신비”의 공간이라 말하는데 이 선언이 신묘할 정도로 극장의 비유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비단 물리적 극장이 아닐지라도 영화광 각자가 뿌리내린 영화의 공간, 그곳이 독립예술영화관이든 골방의 컴퓨터 앞이든 멀티플렉스든 시네마테크든 비밀스러운 그들만의 온라인 커뮤니티이든 간에 그 어둠의 장소는 영화평론가들에겐 천국이자 지옥이 되기 마련이다. 이곳은 자신의 영화적 취향을 만끽하며 그것을 글로 재생산할 수 있는 유토피아이자, 자신이 좋아하는 바를 끊임없이 세상에 설명하며 끊임없이 거부당해야 하는 디스토피아이기도 한 것이다. “토끼가 부러워. 고민이 없거든. 자기라는 것이 없고 그저 토끼라는 것밖에 몰라”라는 석호의 귀여운 싫증엔 다음과 같은 홍익의 맞장구가 이어졌다. “그에 반해 사람은 자기의식이 있고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아니까 한없이 불행하군.” 그렇다. 영화를 향한 자기의식이 너무도 뚜렷하여 되려 불행을 마주하는 족속, 다시 비유하자면 억지로라도 닭의 살이 아니라 껍질만을 원해야 하는 사람들, 하여 자유로운 토끼를 은근히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이 속성이 바로 영화평론가들의 주요 조건이자 가장 뚜렷한 공통점일 듯하다. 이 모순 속의 긴장에서 번지는 찌릿함을 다들 끊기 어려워한단 것 역시 비슷할 테다. <바보사냥>의 결말, 잦은 고초에도 홍익은 결국 토끼섬을 찾아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선다. 이 항해는 과연 타의 없이 자아와 자생만이 존재하는 곳을 향해 간 구원의 발로일까, 혹은 그저 타의에 떠밀려 도망치는 자의 흔들흔들 피난길일까. 둘 중 무엇이 됐든 우리도 결국은 섬으로 가야 하는 것일까. 토끼가 부럽다. 이우빈(영화기자) l 친구가 없어서 영화 보러 다닌 1997년생. 《 씨네21 》 기자. 2023년 《 쿨투라 》 영화평론 신인상. 독립 영화잡지 《 섭씨 233 》 편집장. 비평 웹진 《 코아르 》 필진 등.
언제나처럼 열편의 영화를 골랐다. 작년 말에서 올해 초에 개봉된 아카데미 영화나 영화제 수상작 상당수는 뺐는데,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필자들이 해줄 것이라 믿는다. 나는 그 중 < 우연과 상상 >과 < 나의 집은 어디인가 >를 골랐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작년 최고 히트작은 < 드라이브 마이 카 >였지만 스토리텔링의 도구로서 영화라는 매체가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보여주었던 영화는 <우연과 상상>이었다. 특히 마지막 에피소드인 ‘다시 한 번’는 내 머릿속에 아주 오래 남을 것 같다. <나의 집은 어디인가>는 애니메이션이면서 다큐멘터리이다. 이 기법을 이 영화가 처음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올바르고 정확하게 사용된 영화는 극히 드물다. <나의 집은 어디인가>는 올해 뽑은 네 편의 다큐멘터리 중 하나이다. 그 중 두 편인 < 미싱타는 여자들 >과 < 수프와 이데올로기 >는 한국사를 소재로 한 한국 영화이다. 그리고 지금이야 말로 한국 근대사를 <삼국지>스러운 관계성을 파는 양복입은 중년남자들 주인공의 유사조폭영화로만 그리는 것만큼 나태하고 부정직한 것은 없고 누군가는 이 따분함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외칠 때다. <미싱타는 여자들>과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그 지루함의 풍요로운 실제로 그런 영화들보다 몇 배는 더 재미있었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올해는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들이 충무로에서 나온 대부분의 극영화보다 더 재미있었다. 리스트엔 넣지 않았지만 < 성덕 >은 올해의 한국 코미디 영화 중 하나였고 < 작은새와 돼지씨 >는 올해의 한국 로맨스 영화 중 하나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 넬리와 나딘 >도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절절한 로맨스이다. 많이들 ‘허구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라고 할 텐데, 사실은 대체로 같은 시공간을 그린 허구보다 더 다채롭고, 허구의 이야기를 쓰는 작가들은 종종 이를 놓친다. 씨네필의 심금을 울리는 영화가 두 편 있었다. < 놉 >과 < 썸머 필름을 타고! >인데, 망설이다가 <썸머 필름을 타고!>를 골랐다. 영화쟁이의 광기를 보여주는 인물로 <놉>의 앤트러스 홀스트도 멋지지만 <썸머 필름을 타고!>의 맨발만한 캐릭터는 없다. 일본 청춘영화의 대단한 팬이었던 적은 없었지만 이 영화에서는 이 장르가 정말 완벽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제목을 제대로 적었는지?)>는 올해의 SF이다. < 애프터 양 > 사이에서 잠시 망설였는데, 인형눈을 이마에 붙인 양자경의 얼굴을 보는 순간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완벽한 영화’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완벽성’은 훌륭한 영화에게 필수조건이 아니다. ‘완벽성’과 상관없이 재미있고 좋은 것이 엄청나게 많은 영화들이 있고 <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도 이에 속한다. 이제 한국 극영화가 세 편 남았다. 모두 재미를 기준으로 골랐다. < 헤어질 결심 >을 제외하면 충무로 영화가 한 편도 없는데, 그건 올해 나온 기획 영화들 대부분이 더럽게 밋밋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 이들은 제대로 나쁘거나 지루하지도 못했다. 실패할 위험부담이 없는 도전이 어떻게 재미있을 수 있겠는가. 이런 영화들은 심지어 실패도 따분하다. < 성적표의 김민영 >은 올해의 코미디다. 사실이더라도 한국 독립영화스럽게 실없게 웃기는 영화가 아니냐고 따질 수 있을 텐데, 맞는 말이지만 그 실없고 의뭉스러운 웃음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곡을 찌르고 더 웃긴다. 어떤 관객은 이 영화 유머의 ‘충청도스러움’을 지적했는데, 이게 ‘요새 애들’의 유머 감각이라는 분석보다 더 정확한 것 같다. 그리고 훌륭한 코미디 대부분이 그렇듯 그 웃음은 결코 가볍지 않다. <헤어질 결심>은 좋은 고전 영화들이 가진 복잡하고 다층적인 매력을 잔뜩 가진 영화로, 정말로 로맨틱하고, 정말로 어이없고, 정말로 변태스럽고, 정말로 서스펜스 넘치고, 정말로 웃긴다. 하지만 이 불균질적인 매력이, 감독이 박찬욱이라는 대스타였기 때문에 ‘허락되었다’는 의심을 피할 수가 없다. <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도 만만치 않게 재미있는 영화이다. 폭력적인 모녀 관계를 다룬, 유명한 배우는 한 명도 안 나오는 2시간 20분짜리 한국독립영화를 도대체 왜 추천하냐고 묻는다면 나로서는 “재미있으니까.”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정말이다. 올해 나온 한국 극영화 중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만큼 자극적이고 생생한 재미를 가진 작품은 별로 없다. 많은 사람들에게 꼭 즐거운 경험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겐 트리거 워닝이 필요하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부모와의 관계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니까. 하지만 그런 경고가 필요하다고 해서 그 관객들이 이 영화를 건너 뛰어야 한다는 말은 되지 않는다. 반대로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바로 그런 관객들에게 최적화되었다. 그리고 이들 상당수는 (전부일 수는 없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격렬한 카타르시스를 체험하며 극장문을 나설 것이다. 제목부터 폐소공포증을 일으키는 영화이다. 이정과 엄마 수경은 서로에게 진저리를 치면서도 같은 아파트에 살며 같은 속옷을 공유한다. 이정은 벌써 20대 후반이지만 어떻게 해야 이 지긋지긋한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아직도 모른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교통사고에서 시작된다. 언제나처럼 마트에서 치고받고 나왔는데, 그만 수경이 탄 차가 이정을 들이받은 것이다. 수경은 차가 급발진했다고 주장한다. 이정은 엄마가 자기를 일부터 치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오싹한 건 후자의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정은 그런 주장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이정이 견뎌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삶의 원인 대부분은 엄마다.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모성 서사와 여성 서사라는 용어를 끄집어 오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어권에서 이와 관련된 용어는 언급이 꺼려질 정도로 오염되었고 이상할 정도로 납작하게 사용되고 있어 나로서는 쓰고 싶지가 않다. 무엇보다 ‘지금까지의 모성 신화를 깨부순다’나 ‘모녀 서사의 완전히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같은 말을 들으면 ‘과연 그런가?’라는 생각이 먼저 들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익숙한 ‘모성 신화’를 깬 ‘모녀 서사’인 서사 예술은 원래부터 엄청나게 많았고 여성창작자들의 접근성이 높아진 영화 매체에서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중년여성으로서의 엄마를 내세운 영화는 올해만 해도 꽤 여러 편 나왔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도 같은 주제를 공유하며 자기 이야기를 하는 수많은 다양한 영화들 중 하나이지, ‘모성 신화 파괴’의 전위를 걷는 작품은 아니다. 그건 그렇게까지 중요한 건 아니다. 스코빌 지수를 따지는 매운닭발집도 아니고, 그렇게 보면 오히려 영화들이 납작해지는 것 같다. 영화가 세게 나가는 것은 사실이다. 울분을 참지 못하고 딸을 차로 둘이받았을 수도 있는 엄마가 등장하면 아무래도 관객들은 긴장하게 된다. 영화의 재미를 주는 것 대부분은 바로 그 강한 자극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 강한 감정과 자극의 연속 속에서 캐릭터를 다루는 고유의 방식에서 진짜로 완성된다. 김세인 감독은 종종 인터뷰에서 엄마인 수경이 비호감으로 보일까봐 걱정이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어느 정도 진심인지는 알 수 없다. 수경이 심각할 정도로 비호감인 사람인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수경은 영화 내내 사람들이 싫어할 수밖에 없는 온갖 다양한 행동을 한다. 이정에게는 당연히 끔찍하고 남자친구의 딸에게는 더욱 끔찍하다. 단지 이런 캐릭터를 만들 때 창작자는 딸 캐릭터에 100퍼센트 몰입해서 엄마를 공격하는 함정에 빠질 수도 있는데 (실제로 그게 김세인의 첫 의도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그 길로 안 간다. 영화는 이정도 수경 못지 않은 비호감으로 만든다. 특히 이정이 친구가 되고 싶어 접근하는 소희에게 이 사람이 어떻게 보일지를 생각하면 공감성 수치 때문에 질식할 것 같다. 여전히 나는 이정에게 치우친 채로 영화를 본다. (아니, 딸이 그 꼬라지가 된 건 엄마 잘못이 맞다니까!) 하지만 이정과 수경을 붙여 놓고 일정 거리에서 떨어져 보는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복잡하고 입체적인 캐릭터의 풍경이 부정할 수 없는 사회적 맥락 안에서 펼쳐진다. 영화를 보는 동안 두 사람이 특별히 좋아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불꽃처럼 강렬한 캐릭터들은 존재하기 위해 굳이 우리의 애정이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그렇기 때문에 자기 변명과 타협없이 어디로든 갈 수 있고 그 과정 중 관객들에게 엄청난 재미를 선사한다. 영화가 들쩍지근하고 익숙한 타협이나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완벽한 결말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도 김세인이 이 둘, 그리고 이들이 속한 세계를 그릴 수 있는 완벽한 관찰자 시점을 찾아냈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