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엣가시
- 감독
- 에릭 몬차우드
- 제작년도
- 2020
할리우드 기획물의 변화하는 한 축을 가늠하고 싶다면 배우 ‘멜리사’들의 행보를 관찰해 봐도 좋겠다. 먼저 멜리사 맥카시. < 내 여자 친구의 결혼식 >(2011)에서 친구 들러리로 활약할 때만 해도 플러스 사이즈 배우가 가진 익숙한 코믹이 적중한 정도라 생각했다. < 스파이 >(2015)에서 마치 본처럼 종횡무진 하는 CIA 요원이 되어 액션을 구가할 때는 그 위력이 점점 실감됐다. 급기야 < 고스트버스터즈 >(2016)에서 여성 헌터로 활약하는 모습에 이르면 이제 이 배우가 가지 못할 길은 어디일까 싶다. 맥카시를 보고 있노라면 플러스 사이즈라고 사이드로 밀려나는 법이 없다. 오히려 때로 귀엽고, 때로 도발적이며, 때로 과격한 맥카시 본연의 코드를 전면에 내세운 기획이 끊이질 않는다. 관객의 반응이 있는 이상, 배우의 영역은 지금보다 더 넓어질 게 확실하다. 멜리사 버글랜드는 그런 의미에서 앞선 멜리사의 전철을 밟는 호주 출신의 배우인데, < 렉시의 행복 레시피 >로 들어가자면, 먼저 버글랜드를 좀 알아가는 것도 좋겠다. 버글랜드는 2011년도부터 방영되어 인기를 얻고 있는 미드 <위너스&루저스>에서 플러스 사이즈의 귀여운 캐릭터 ‘제니 그로스’로 사랑받기 시작했다. 제니처럼 실제로도 플러스 사이즈인 그녀는 “스칼렛 요한슨처럼도, 샤를리즈 테론처럼도 생기지 않았지만, 작품을 통해 이상하고 웃긴 내 모습을 오히려 사랑스럽고 귀엽게 봐주는 이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더 이상 그녀가 배우 활동을 하며 날씬하지 않다는 이유로 이 업계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걸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버글랜드의 인기를 감지한 할리우드 에이전시 ‘언타이틀드 엔터테인먼트’가 발 빠르게 계약을 맺었는데, 이곳은 마돈나, 애쉬튼 커쳐, 힐러리 스웽크, 다니엘 데이 루이스, 나오미 왓츠, 자레드 레토, 페넬로페 크루즈 등이 소속된 전도유망한 곳이기도 하다. < 렉시의 행복 레시피 >는 앞서 말한 버글랜드의 사랑스럽고 귀여운 코드들을 적극 활용해 만든 로맨틱 코미디다. 이 영화는 캐나다 버전의 < 브리짓 존스의 일기 >라는 수식이 잘 어울린다. B&B를 운영하는 서른 살 렉시 아이비는 성격도 꽤 괜찮고, 요리도 수준급인데 연애가 잘 풀리지 않아 고민 중이다. 여동생 결혼 준비로 집안은 분주하고, 투숙객인 커플은 밤새 섹스를 하느라 삐걱거리는 탓에 외로운 렉시의 밤잠을 설치게 한다. 맞춘 결혼식 드레스는 작아서 수선을 해야 할 판이고, 결혼식에 같이 갈 파트너가 없어서 엄마한테 닦달을 당하는 것도 괴롭다. “백마 탄 왕자님은 그만 좀 기다려”라는 친구의 충고에 “자전거 탄 왕자님이야”라고 정정할 정도로 그녀의 이상형은 자전거 탄 훈남. 그러던 어느 날 기적처럼 자전거를 타고 온 미남자가 도착해 며칠 묵어갈 방을 구한다. 렉시가 사는 캐나다 노바스코샤의 아름다운 전원 풍경을 담으러 이곳에 온 자유로운 영혼의 사진작가 애드리안(조나단 소우사)이다. 물론 < 브리짓 존스의 일기 > 속 ‘마크 다아시’같은 완벽하고 친절한 남자가 나타난 판에, 그녀의 속을 사사건건 긁는 ‘다니엘 클레버’가 없으면 심심할 거다. 이 경우에는 물새는 B&B의 지붕을 고쳐주러 온 친구의 친구인 남자 조스(아론 폴, < 브레이킹 배드 >의 그 아론 폴이다)가 얄미운 클레버다. 오랜만에 완벽한 이상형을 두고 핑크빛 멜로를 꿈꾸는 렉시에게 더러운 신발을 신고 마룻바닥을 저벅저벅 밟아 다니고, 땀내 나는 데다 능글맞은 조스는 지붕만 수리만 끝내면 사라져 줘야 할 눈엣가시다. 하지만 영화는 조스가 ‘처한’ 위치를 완벽하게 활용하는데, 연일 계속되는 지붕 수리 도중, 본의 아니게 조스가 렉시의 실수들을 유독 많이 보게 되고, 그녀의 귀여움에 눈을 뜨게 만든다는 것이다. 가령 렉시가 혼자 흥에 겨워 막춤을 추는 것 같은 장면들이나, 애드리안과 겪는 온갖 민망한 순간들을 모두 지켜보는 순간들. 한창 판타지에 빠져든 렉시의 연애가 엉망진창 산산조각이 나는 사건이 전개되는데, 결혼을 앞둔 동생과 푹 빠져버린 애드리안이 눈이 맞았다는 청천벽력이 그 시작이라고 할까. 블루베리 케?이나 크림 뷜레 같이 렉시가 만든 수준급의 요리들이 사건의 사이사이를 연결하는 윤활유가 되지만 이 영화에 ‘음식=힐링’이라는 공식을 적용하긴 힘들다. 그러니 트렌디한 음식 영화 같은 제목 대신, 이 영화의 원제인 ‘상대적인 행복’이란 뜻을 가진 ‘Relative Happiness’를 끄집어 내보는 게 더 어울리지 싶다. 마치 이영자 와 신동엽 , 컬트멤버들이 나란히 앉아 일반인들의 고민을 상담해주는 토크쇼 <안녕하세요>에나 나올법한 사연처럼, 고상한 엄마, 우아한 언니, 아름다운 동생에게 주눅 들어 살았던 렉시는 모든 게 무너지는 순간, 자신이 이상적으로 바라보던 그 ‘아름다운’ 관계들이 그리 완벽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 렉시의 행복 레시피 >는 전작 <비트 다운>(2012)을 비롯해 코믹 영화를 꾸준히 만들고 있는 여성감독 딘느 폴리의 영화로 뭐 그리 별스럽지도 않거니와 다소 뻔해 보이기까지 한 소소한 로맨틱 코미디지만, 앞서 말한 버글랜드의 능청맞고 귀여운 면모가 주는 재미가 크다. 극의 초반, 동생 결혼식용 피로연 드레스 생각에 그래도 살을 좀 빼볼까 TV를 보며 요가를 따라 하던 렉시가, 금새 포기하고 TV를 끄고 먹을 걸 먹는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다. 시작은 플러스 사이즈의 미운 오리로 하되 끝은 각고의 노력으로 체중감량을 해 백조가 되는 판타지는 이 영화에는 없다. 렉시가 날씬한 집안 누구와도 다르게 혼자 플러스 사이즈인 것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도 애초 없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렉시의 몸무게는 그대로 유지되며, 그러니 렉시는 가장 코믹한 순간에도, 가장 로맨틱한 순간에도 ‘그녀인 채’로 승부를 볼 뿐이다. 뭣보다 < 브리짓 존스의 일기 >의 르네 젤위거가 브리짓을 연기하기 위해 엄청나게 체중을 불렸다가, 연이어 < 시카고 >(2002)를 찍기 위해 트레이너의 훈련 아래 혹독하게 체중감량을 해야 했던 그 고통을 <렉시의 행복 레시피>의 주연배우는 겪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건 2001년에 시작된 <브리짓 존스의 일기>가 시리즈를 거듭해 < 브리짓 존스의 베이비 >(2016)로 나오기까지 지난 십 수년간 일어난 이 업계의 괄목할 만한 변화다. 그녀가 맥카시와 견주어 얼마나 성장할지 모르겠지만, 트레이드마크인 빨간 머리와 예쁜 프린트가 가미된 귀여운 스타일의 패션을 소화하는 렉시처럼, 버글랜드 역시 그 자체로 의미 있는 배우로 영역을 만들어 나가길 바란다.
일단 감독이 클락 그레그다. 누구냐고? < 어벤져스 >에서 장렬히 전사했지만 TV시리즈 <에이전트 오브 쉴드>를 통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지키고 있는 필 콜슨 요원이다. 수십편의 영화에서 맹활약을 펼친 바 있는 이 배우가 사실은 작가이기도 하고 또한 감독이기도 하다. 작가로는 딱 한 편의 시나리오를 썼는데 그게 바로 < 왓 라이즈 비니스 >, 로버트 제멕키스의 히트 스릴러였다. 지금까지 감독으로는 두 작품을 남겼다. 그중 첫 번째 작품, 말하자면 감독 데뷔작이 오늘 소개하는 < 초크 >다. 영화를 보기 전에 선입견 팍팍 들어가게 사전 정보를 주입하자면 일단 원작자가 어마어마하다. < 파이트 클럽 >의 원작 소설가인 척 팔라닉이다. 저널리스트 출신인 이 작가의 작품 중 우리나라에 「질식」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된 소설이 이 영화의 원작인데, ‘초크Choke’는 한마디로 이종격투기에 나오는 기술 초크, 그 단어다. 조르기 정도로 해석할 수도 있는데, 영화의 중요한 설정을 가리키는 말로, ‘질식’이 더 내용에는 맞는 번역인 셈이다. 사실 감독 클락 그레그는 2008년 < 아이언 맨 >에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닥 많은 관객들이 알아보는 배우가 아니었는데, <초크>도 같은 해인 2008년에 나온 작품이다. 위대한 배우와 끝내주는 배우, 그리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배우가 나온다. 순서대로 안젤리카 휴스턴, 샘 록웰, 그리고 켈리 맥도날드. 영화가 시작되면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다. 교실 같은 곳에 둥그렇게 앉아 있는 미국인들. < 파이트 클럽 >의 고환암 환자 모임이 반사적으로 기억 날 것이다. 같은 원작자의 영향이 느껴지는 순간, 모여 있는 사람들의 면면이 ‘섹스 중독자’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면 ‘혹시 이 영화는 섹스 중독자 판 파이트 클럽?’이라는 엉뚱한 기대가 버섯처럼 솟아오르게 되는데, 그건 아니다. 아니, 맞을 수도 있다. 어쨌든 샘 록웰이 맡은 주인공 빅터는 성중독자다. 세상의 ‘거의’ 모든 여자들을 자신의 성적 접촉의 상대로 생각하며 그들이 벗은 몸을 항상 상상한다. 이 모임은 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곳이지 성중독자들끼리 정보와 기회를 교환하는 곳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빅터는 폭발적으로 섹시한 여성, 이름마저 섹시한 니코와 모임 중간중간 빠져나가 화장실에서 정사를 벌이기도 한다. 사실 빅터는 자신의 증세를 치료할 생각조차 별로 없다. 그저 니코와 만나기 위해서 이 모임을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아, 니코로 말할 것 같으면 파스 데 라 우에르타가 분했다. 이 배우가 헤픈 여자를 연기하는 것처럼 설득력 강한 캐스팅은 드물다. 샘 록웰 그렇다면 주인공 빅터는 뭘 해서 먹고 사느냐? 미국의 개척시대를 재현해 놓은 테마파크에서 개척시대 사람인 척 연기하는 일종의 투어 가이드로 살고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민속촌의 거지, 이장님, 처녀귀신, 광년이 등의 알바가 떠오르는데 그거 맞다. 빅터는 자신의 직업적 커뮤니티 안에서도 수많은 여성들과 성관계를 갖고 있다. 이 파트에 감독인 클락 그레그가 직접 출연한다. 빅터와 그 절친 데니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동료 투어 가이드인 찰리 역이다. 주로 대학생들이 알바를 하는 우리나라의 민속촌과는 달리 영화 속 테마파크엔 배우가 되고 싶었지만 실패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 같은데, 빅터가 딱 그런 케이스다. 수입도 별로 좋지 않고, 삶의 태도도 매우 불성실하며 오로지 머리 속에는 섹스밖에 없는 주인공 빅터는 가끔씩 몫돈이 필요할 때 하나의 쇼를 벌이는데 그건 바로 식당에서 ‘음식물이 기도를 막아 질식하는 척’을 하는 거다. 그러고는 식당을 협박해 돈을 뜯어낸다? 아니다. 그렇게 질식한 것처럼 목을 잡고 주위 손님들을 둘러보다가 ‘딱 맞는’ 사람 앞에서 쓰러져 그 사람으로부터 구해지는 퍼포먼스다.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냐고? 그 사람은 영웅이 된다. 결국 그에게 누군가의 생명을 구했다는 뿌듯함을 선물함과 동시에 그로부터 동정심을 얻어내기 쉬운 상태가 된다. 자신의 생명을 구한 그 사람에게 자신의 가난함과 비참함을 털어놓고 금전적 지원을 얻어내는 것. 아주 오랫동안 해 온 빅터의 장기이며 삶의 변곡점들을 돌파하는 하나의 필살기이기도 하다. 안젤리카 휴스턴 첫 문단에서 안젤리카 휴스턴 이야기를 했는데 왜 아직도 안젤리카 휴스턴 이야기가 안 나오느냐 현기증 난다, 이런 독자들이 계실 텐데 이제부터다. 대배우 안젤리카 휴스턴은 빅터의 어머니 역할로 등장한다. 현재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 중증이다. 알츠하이머로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한다. 빅터가 병원을 자주 찾아가는데, 그 이유는 일단 어머니께 효도하는 캐릭터라기보다는 어머니의 영향을 아주 많이 받은 캐릭터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병원의 여러 직원들과 성적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빅터를 주로 자신의 변호사로 생각하고 대화를 나눈다. 어머니는 빅터를 끔찍하게 사랑하는데, 빅터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어머니와의 관계도 매우 중요한데, 빅터는 어린 시절 엄마와 떨어져 여러 양부모와 지냈다. 엄마는 치매가 오기 전부터 이미 뭔가 정신세계가 독특했는데, 양부모와 잘 살고 있는 빅터를 찾아와 함께 돌아다니다가 집에 보내고 그런 식으로 살았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절대로 말해주지 않았는데, 빅터는 이제 자신의 그 출생의 비밀이 알고 싶어졌다. 어머니가 이제 얼마 오래 살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새로 온 어머니의 담당 의사 페이지는 어머니의 병세가 지극히 악화됐음을 알린다. 이 영화의 매우 중요한 캐릭터가 이 의사 페이지다. 앞서 내가 개인적으로 너무나 좋아한다고 말했던 켈리 맥도날드가 맡고 있다. 켈리 맥도날드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많은 이들이 미드 < 보드워크 엠파이어 >의 마가렛 역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나에게는 < 트레인스포팅 >에서 이완 맥그리거를 클럽에서 만나자마자 집으로 데리고 간 여고생으로 각인 돼 있다. 목소리가 특히 신뢰감 가는 배우인데, < 메리다와 마법의 숲 >에서 메리다 역을 맡은 배우이기도 하다. 하여튼 의사 페이지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어머니를 치료할 것을 빅터에게 제안한다. 자신의 전공이라는 줄기세포와 관련된 이야기인데 내용누설을 피하기 위해 더 이상 묘사하지 않겠다. 빅터는 어머니의 일기장이 집에 보관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것을 찾아낸다. 드디어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는 순간인가 했더니 아니다. 어머니는 이탈리아 사람, 일기는 온통 이탈리아어로 적혀 있다. 이탈리아어를 할 줄 아는 의사 페이지에게 어머니의 일기를 맡겨 해석하게 하는데, 빅터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누군가의 보관된 체세포를 통해 탄생한 그의 클론이라는 사실을. 예측불가능한 스토리와 예측가능한 스토리가 새끼줄처럼 꼬여 있는 가운데 역시 < 파이트 클럽 > 원작자의 솜씨답게 적당히 재치있는 반전까지 도사리고 있다. 영화 < 초크 >는 300만 달러라는 비교적 저예산으로 만들어졌고 선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한 작품이다. 이 상은 누구에게 주어졌느냐 하면 샘 록웰, 안젤리카 휴스턴, 켈리 맥도날드, 그리고 대니 역을 맡았던 브래드 윌리엄 헨케. 영화의 주요 배역들이 열연을 인정받았다. 샘 록웰이 할리우드에서 왜 그렇게 중요한 배우로 평가받는지 모르는 관객들이라면 의외의 한방을 얻어맞을 수 있다. 노년의 안젤리카 휴스턴은 아직도 괴력을 지닌 대배우라는 사실을, 켈리 맥도날드의 차원을 가늠할 수 없는 예측 불허의 연기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이 바로 <초크>다. 한국에서는 극장 개봉을 한 적이 없고, 오로지 IPTV에서만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