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앙스
- 감독
- 김재원
- 제작년도
- 2022
- 출연
- 이창민
© 파이오니어픽쳐스필름(주) 뻥튀기 제조기가 돌아가는 방에서 한 쌍의 남녀가 섹스한다. “과자 만드는” 자동기계는 계속해서 뻥튀기를 내뿜고, 인물들은 날아오는 뻥튀기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심지어 수북이 쌓인 뻥튀기 위에 누워 관계에 몰두한다. 한번 보면 잊기 어려울 이 기괴한 장면은 김기영 감독의 <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1978) 전반부에 나온다. ‘죽음에 관한 몇 가지 에피소드’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는 이 영화에서, 일명 ‘뻥튀기 섹스신’은 작품 내적으로 그리 중요한 장면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중요했다. 영화를 열심히 보러 다니며 영화사의 이런저런 사소한 에피소드들(이를테면 훗날 누벨바그로 통칭된 무리 중에서도 자크 리베트의 비평적 안목이 특히 탁월해서 다 함께 신작을 보고 나면 다들 리베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든가 하는 별거 아닌 일화들. 하지만 정확하지 않다. 아니면 클로드 샤브롤이었던가?)을 줍기 좋아했던 시절에, 어디선가 ‘뻥튀기 섹스신’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런 미친 영화는 봐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영화를 처음 본 건 KMDb VOD를 통해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근래 이 작품은 4K로 복원되어 블루레이가 출시되었고, 지금은 국내 OTT를 통해 감상할 수 있다.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로 글을 시작한 건, 이 지면의 제목인 ‘비평, 안녕하십니까’의 기획이 내 오랜 고민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미친 영화를 찾고 싶다는 게 그것이다. 영화글을 쓰다 보니 원고 작성, 관객과의 대화 진행, 심사 참여, 영화제 프로그래머 재직 등 활동 반경이 넓어졌다. 필요에 따라 예전 영화도 종종 찾아보지만, 일의 특성상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수많은 장, 단편영화를 보는 일이 압도적으로 많다. 출품 공모를 열고 예심을 진행하는 영화제나 기획 프로그램 등의 선정의 변을 살펴보면 출품작이 매년 최다를 갱신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점점 더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모여 심사를 진행하는데도 다양한 선정의 변에서 비슷한 뉘앙스가 읽힐 때가 있다. 영화가 점점 더 잘 만들어지고 있다는 거다. 이야기는 모난 구석이 없고 만듦새도 안정적이다. 혹은 적어도 그런 결과물을 지향한다. 비단 심사 과정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여러 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이거나 지난한 과정을 통과해 극장 개봉의 문턱을 넘은 영화들은 기본적으로 균형의 감각을 가지고 있다. 돈과 시간을 투자해 극장에 가는 이들에게 최소한의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해야 한다는 압력이 내외부적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일까. 이는 물론 쉽게 간과해도 좋을 영역은 아닐 것이다. 그러한 재능을 발굴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영화들 틈에서 때로는 작게 읊조리게 된다. “미친 영화가 보고 싶다….” 근래 제작되는 영화들의 경향을 짚으며 비판하는 건 어쩌면 쉬운 일이다. 단편영화를 장편영화의 축소판처럼 생각한다든지, 개인의 내면에서 발굴한 이야기를 보편적인 서사에 안전하게 겹쳐두며 미궁에 빠지는 것을 회피한다든지, 상상된 소시민적 이미지에 기대며 다양한 갈등과 여러 가능성의 문을 닫아버린다든지. 단편영화에서 거대 자본이 들어간 상업영화에 이르기까지, 실망과 안타까움은 늘 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굳이 길게 늘어놓지는 않으려고 한다. “너는 왜 미치지 않았니?”라고 묻는 대신, 미친 영화가 보고 싶다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마음에 대해 좀 더 말하면 좋을 것 같다. © 파이오니어픽쳐스필름(주) 사실 미친 영화가 무엇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미쳤다!”라는 감탄사는 소위 웰메이드 영화를 보고서도 쓸 수 있다. 변태적일 정도로 탐미적이거나 철학적 질문을 깊이 탐구했거나 대사를 잘 썼을 때도 이 감탄사를 마구 남발할 수 있다. 어쩌면 본인의 취향을 건드리는 모든 요소에 우리는 미쳤다며 나름의 찬사를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미치다”라는 말은 보통의 것과 다른, 상식에서 벗어난, 일상을 뒤집는 무언가를 묘사하는 단어로, 동사이면서 상태를 설명하는데 주로 쓰인다. 그렇다면 아주 넓은 의미에서, 이미 일반적인 수준에서 굳어진 영화의 관습을 탈피하는 (비)자발적인 선택에 ‘미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면 될까? 글쎄, 아직 충분하지도, 재밌지도 않다. ‘미친 영화’를 생각하는 마음은 꽤 모순적이다. 구체적인 순간들이 쌓여 만들어진 이 개인적인 욕망은 나름대로 그 용례를 정교화하고 싶은 충동과 닿아있다. 페미니즘 문학 비평의 주요한 길을 제시한 샌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의 저작 『다락방의 미친 여자』(2022)나, 최근 타계한 국내 1세대 여성 사진작가 박영숙의 ‘미친년 프로젝트’처럼 사회, 문화적 함의 속에서 ‘광기’를 재정의하고자 하는 작업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동시에 광기 역시 우리 시대의 굳어진 수식어나 레토릭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보다 세밀한 탐색 없이 광기라는 단어만 쥐고 모험하는 건 이제 무척이나 (안전하기 때문에 더) 위험한 일로 느껴진다. 다른 한편, ‘미친 영화’를 찾고 싶은 마음은 내게 지극히 개인사적인 맥락에서 작동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소문으로만 들었던 ‘그 장면’을 보고 싶은 마음이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에 대한 감상보다 훨씬 컸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름의 해답은 미친 영화를 찾는 게 아니라 그 마음을 다시 찾는 데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너무 감상적이기 때문에 한 가지 더 생각해 보려고 한다. 한때 내게 중요하게 와닿았던 비평적 시선 중 하나는 ‘정치적인 영화’를 정치영화가 아니라 영화 속의 정치적인 것과 함께 생각하자는 거였다. 나는 이 말을 정치라는 것을 (정치인, 정당, 선거 등으로 대표되는) 현실 정치에 가두지 않고 끊임없이 작동하는 역학이자 태도로 사고하면서, ‘영화’를 전방위적으로 둘러싼 각종 갈등과 조건을 응시하는, 작품의 선택을 봐야 한다는 취지로 이해했다. “존 포드야말로 가장 브레히트적인 감독”이라고 말했다던 장 마리 스트라우브의 일화와 더불어, 내게 이러한 말과 시선들은 ‘분명히 있지만 딱딱한 것은 아닌’ 어떤 기준, 항상 개별 작품들과의 밀접한 교통을 통해서만 감지되는 그 무언가를 찾아내는 작업 방식을 제시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중요했다. 정치적인 것이나 브레히트적인 것, 그리고 ‘미친 것’과 그 효과는 언제나 같은 형식을 통해 성취되지 않는다. 광인의 출현이나 해괴한 장면의 등장만으로 그것이 (내가 찾는) 미친 영화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찾아야 할까? 일단은 이 질문을 책상 위에 올려두는 것으로 마음의 짐을 던 뒤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로 돌아가 보려고 한다. © 파이오니어픽쳐스필름(주) 이 영화는 한국영화사의 괴인처럼 불리는 김기영의 작품 중에서도 파격적인 편에 속한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주인공 영걸( 김정철 )은 웬 여자가 건네는 오렌지 주스를 먹고 죽을 뻔한 위기에 처하지만 목숨을 부지한다. 이후 계속해서 죽음과 삶의 충동 사이에서 무기력하게 지내는 그의 앞에, 의지만 있으면 죽지 않을 수 있다고 외치는 책장수가 나타나 해골이 되어서까지 입을 나불거리는 한편, 2000년 전 신라 공명왕 시대에 동굴에 들어가 백골이 된 여성이 환생해 간을 먹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이 여성이 ‘뻥튀기 섹스신’의 주인공이다.) 뼈를 통해 인류학을 연구하는 이 박사( 남궁원 )의 조수가 된 영걸은 이 박사의 딸 경미( 김자옥 )와 기묘한 관계를 맺는 동시에 이 박사에게 배달되는 의문의 해골과 관련된 불미스러운 일에도 연루된다. 사실 이 영화의 거의 모든 장면은 이상하다기보다는 황당한 쪽이다. 신라 시대에 잠들었다가 깨어난 여성은 갑자기 동성동본 사이의 결혼에 대해 걱정하고, 목이 잘린 영걸이 책장수의 전언처럼 눈을 떠 “의지!”를 외치며, 사람은 복면을 뒤집어쓰고는 나비가 된다. 황당무계한 장면들이 계속되는 와중에 그 중심에 죽음이 있다는 점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원고를 쓰기 위해 다시 본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는 분명 독특했지만 동시에 처연한 영화이기도 했다.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남자가 현실인지 꿈인지 모르는 일련의 일들을 겪다가 결국에는 죽지 않았으니 “귀찮지만 더 살아줘야겠다”라고 읊조리는 영화라니. 사실 주인공의 죽음이란 한 편의 영화에 드리운 종결의 감각을 형상화하는 가장 직설적인 사건일 것이다. 주인공이 죽으면 대개 영화 역시 끝나야 한다. 혹은 한 편의 영화는 언젠가는 끝나야 한다. 어쩌면 영화란 시작과 동시에 종결을 미루고 지연하다가 결국 끝을 마주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음악이나 연극처럼 시간을 조건으로 삼는 예술이 대개 그러하겠지만.) 그 지연의 방식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꽉 짜인 서사를 통해서, 인물의 사소한 행동을 통해서, 끊임없는 사건들의 도입을 통해서 영화가 끝나는 시간은 저 뒤로 밀려난다.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는 내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별안간 그 모든 것이 영걸의 망상이었던 것처럼 묘사하며 영화를 닫는다. 이 석연치 않은 순환 구조야말로 내게는 모종의 ‘미친 것’이 작동하는 순간처럼 느껴진다. 미치고 싶지만 미칠 수 없고, 미치지 못해서 미쳐버리는 어떤 무기력의 영화 만들기. 혹시 영화의 ‘미친 것’을 찾는다는 건 일종의 상처를 찾는 것과 비슷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미친 영화’의 특정한 외양이나 형식을 찾아 헤맬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어디에서 어떻게 무엇을 앓고 있습니까? 아마도 비평이란 그러한 질문과 함께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평, 안녕하십니까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손시내(영화평론가) l 영화웹진 《 REVERSE 》에 글을 쓰고,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로 활동한다. 팟캐스트 ‘영화카페, 카페 크리틱’에서 영화 이야기를 나눈다.
사진: " 도라지 불고기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도라지>에서 양지훈 은 대학교 축구 동아리에서 만난 ‘아는 형’을 보러 일본에 간다. 재일조선인인 ‘형’은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는 집에 양지훈을 초대하고, 양지훈은 그 여정을 브이로그 형식으로 촬영한다. 이후 <도라지>에 <불고기>를 덧붙여 장편 분량으로 편집된 < 도라지 불고기 >(2025)에는 <도라지>의 브이로그 영상을 시청하는 형의 모습을 촬영한 장면이 추가되어 있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드러낸다. 하나는 양지훈이 <도라지>를 제작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다시 일본에 방문해 촬영을 이어 나갔다는 점. 다른 하나는 그가 당사자를 대상으로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도 그 이미지를 당사자에게 다시 돌려주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특수하고 유일무이한 이미지가 아닌, 그저 범박한 모습으로 말이다. 양지훈의 영화에서 이들은 재일조선인 청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유키사다 이사오의 < GO(고) >(2001)나 최양일 의 <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 >(1993)처럼 미묘한 차별을 통과하는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이들은 여느 사람들처럼 조선학교에 다녔던 학창시절의 기억을 추억하고, 불고기를 먹고, 가라오케에 간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에서 ‘형’과 그의 친지들, 조선학교의 관계자들을 포함한 재일조선인들의 얼굴은 모두 블러 처리된 형상으로 등장한다. 얼굴을 탈각한 형상들은 평범함의 분신들인 것처럼 스펙터클 없음을 재차 강조해 드러낸다. 양지훈 감독은 한 토크 자리에서 출연진들의 얼굴을 가린 이유에 대해 “욕망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까 내 얼굴만을 드러내는 게 정당한 것 같다”라고 말한 적 있다. [1] 그의 말에 의하면 얼굴은 욕망하는 자의 언어다. 여기서 욕망이란 자신의 부분을 드러내는 노출증적인 욕망만이 아니라, 그 얼굴에서 욕망을 소거할 수 없다는 난감함을 수렴하는 최소한의 진실의 단위인 셈이다. 한편, 그날의 대화에서 좀 더 흥미로웠던 대목은 양지훈 감독이 이렇게 덧붙였을 때다. “제가 (말하면서) 자꾸 욕망이란 말을 써서 욕망이란 말을 안 써보겠습니다.” 그 이후부터 그가 정말 ‘욕망’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 이 말이 그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에 맺혀 있는 소거법과 무척이나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왜 욕망이라는 말을 덜어내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그는 감독으로서 무대에 서 있는 상황이 이미 충분히 자의식을 드러내고 있다고 여겼기에 ‘욕망’이라는 말을 거듭 입에 올리는 것을 경계했을 수도 있다. 혹은 ‘욕망’이라는 단어가 대상과 촬영자 사이의 관계를 손쉽게 일축해 버린다는 편리함에서 일종의 죄책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그의 강직한 성정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건 그가 ‘욕망’을 다른 언어로 대체하려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욕망’이라는 말의 자리가 여기저기로 산재하게 된다는 점에 있다. 양지훈에게 있어 무언가를 하지 않겠다는 소거법은 있는 것을 그대로 도려내는 것이 아니라, 거기 있어야 하는 것처럼 당연시되는 것들의 제자리를 흐트러뜨리는 일에 가까운 것이다. 사진: " 도라지 불고기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이는 <도라지 불고기>에서 촬영 대상의 얼굴을 모두 가리고 자신의 얼굴만을 드러내기로 한 결단과도 무관하지 않을 테다. <도라지 불고기>에는 다시 학생 때로 돌아가더라도 조선학교를 다닐 거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는 ‘형’의 얼굴이 없다. 주민등록을 할 수 없어서 신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지 못한 ‘형’의 얼굴도 없다. 운동회에서 찬가를 부르고 아이치 새교사 준공식에서 축하공연을 하는 아이들의 얼굴은 집단화된 이미지를 거쳐 이중으로 익명화된다. 하지만 이것이 곧 그 얼굴을 모두 삭제하고 감독 자신의 얼굴을 대체한 것이라고 말해야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임유빈은 <도라지>에 이어 <불고기>를 보았을 때 윤리의 측면에서 언어화하기 어려운 어긋남을 감지했다고 말하며 “얼굴은 삭제된다고 하더라도 얼굴이었다”라고 쓴다. [2] 얼굴이 블러 처리되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의 시선은 그 얼굴의 빈자리들과 관계 맺는다. 어쩌면 그 흐릿한 형상은 우리가 그 얼굴을 마주하더라도 그 얼굴로부터 필연적으로 미끄러질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한계를 포착한 미래 시제의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을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스펙터클이 아니라 스펙터클을 기대하는 시선이 반사되어 맺힌 표면이다. 무언가가 사라진 자리에 자꾸만 부재하는 것의 의미를 대입하려는 관객의 관성은 의심스러운 것이 된다. 이처럼 자꾸만 한발 앞서나가 기대되는 것을 지우는 영화의 전략은 한편으로 영화를 보는 관객의 반응을 과도하게 결정화한 결단으로 보일 수도 있다. 허나 궁극적으로는 그 소거된 자리에 다큐멘터리의 본성을 드러내기 위함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불고기>에서 인터뷰를 하러 온 ‘형’은 준비된 조명을 보고 “그렇게 본격적으로 하는 거야?”라고 물으며 당황해한다. 그러자 카메라 뒷편에 있던 양지훈 감독은 “폭력적으로?”라고 되묻는다. ‘형’은 감독의 말을 정정하지 않은 채 “어”라고 답한다. 언뜻 사소해 보이는 차이지만 ‘본격적으로’와 ‘폭력적으로’ 사이에는 어떤 간극이 있다. 물론 형이 ‘본격적으로’라고 말했을 때 은연중에 ‘폭력적으로’라는 뉘앙스가 내포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아직 ‘잠재적으로 발화되지 않은 말’이다. 양지훈은 그 잠재성을 기어코 수면 위로 드러내며 다큐멘터리의 폭력성을 상기시킨다. 이 장면을 두고 < 포수 >(2022)에서 인터뷰 자리에 준비된 조명을 보고 자신을 주인공처럼 만들어 준다면서 기뻐하는 할아버지의 반응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양지훈은 다큐멘터리에 전제된 폭력성을, 할아버지를 기쁘게 한 몫으로 상쇄하는 듯한 은밀하고도 발칙한 교환의 현장을 목격하게끔 한다. 그 현장을 더 이상 암묵적인 것으로 남겨두지 않고 영화에 전면화했다는 점에서 <포수>는 기이한 전복적 쾌를 충족시키기도 하는 것이었다. 한편, <불고기>에서도 양지훈은 대상의 현실에 필연적으로 개입하고 재구성할 수밖에 없는 카메라의 폭력성을 숨기는 대신 선취하여 보여준다. 카메라와 대상 사이의 권력관계를 ‘대화’로 재구성함으로써 카메라를 든 순간 영화적 현실이 이미 물리적 현실에 개입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진: " 도라지 불고기 (좌)", " 포수 (우)",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도라지 불고기>는 트린 T. 민하가 선언했던 것처럼 현실을 투명하게 재현하는 다큐멘터리의 불가능성을 역설하는 반(反)다큐멘터리다. 우리는 영화가 객관성의 허구를 폭로하는 방식으로만, 영화적 현실과 재현된 현실이 뒤섞이는 방식으로만 현실을 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맞닥뜨려야 한다. <도라지 불고기>는 “숭고하지도 비참하지도 않은” 보편의 개인들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연출자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노출해야 한다고 말하는, 진정 과시적인 자의 겸손한 영화다. 이처럼 다큐멘터리의 신화에 열성적인 구멍을 내는 영화를 보고 있자면, < 에스퍼의 빛 >(2024)을 두고 정재훈 감독이 “이 작품이 다큐멘터리가 아니라고 말할 이유가 없다” [3] 라고 말(해야만)했던 것이 떠오른다. 한편으로 이 말은 “<에스퍼의 빛>이 다큐멘터리인가?”라는 고루한 반문을 상대하는 것이다. <도라지 불고기>와 <에스퍼의 빛>은 다큐멘터리라는 역사의 사장된 빈틈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다큐멘터리로 당연시 여겨지게끔 만드는 요소들을 지워냄으로써 재현의 관성으로부터 누락된 반(反)역사에 다가가려 한다. 스스로를 위태롭게 만드는 불온함을 통해 다큐멘터리는 다시 한 번 갱신된다. *** [1] 해당 발언은 제17회 DMZ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의 “클럽시네마”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던 토크 “‘자기’가 되는 방법 : 카메라, 몽타주, 나”에서 발췌했다. 도미니크 카브레라의 <환송대 다섯 번째 샷>을 상영한 뒤 양지훈, 이예진, 황예지 작가와 함께 대화를 나눴다. [2] 임유빈, 「얼굴≠얼굴」, 『도라지불고기』, 2025, 59쪽. [3] 정재현, “ 온라인도 물리적 공간이다, <에스퍼의 빛> 정재훈 감독 ”, 《씨네21》, 2025. 11. 6. 김예솔비(영화평론가) l 영화를 중심으로 시각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이따금 영화 비슷한 것을 만든다.
<폭설> 중 '실사'에 드리운 한계를 넘으면 비로소 선명해지는, 영화가 낳은(을) 새로운 감각과 지형을 발견합니다. 영화는 태생적으로 기술 발전에 조응하며 미학적, 산업적 변화를 거듭해 온 매체이다. 무성에서 유성으로, 흑백에서 컬러로, 아날로그 필름에서 디지털로 이행하는 기술사적 변곡점마다 영화 창작자들은 새로운 표현 가능성과 방법론적 도전에 직면해왔다. 최근 부상하는 인공지능(AI) 기술 역시 이러한 영화 기술사의 연장선상에서 주목해야 할 중요한 변수로 부상하고 있으며, 이는 영화 제작 방식과 미학 전반에 걸친 또 다른 전환을 예고한다. 최근 필자가 제작한 단편 < 폭설 >(2024)은 AI를 기반으로 전체 제작 과정이 이루어진 코즈믹 호러 영화이다. 전통적인 촬영과 후반 작업 대신 인공지능 생성 기술을 전면적으로 활용함으로써, 기존 영화 제작 방식으로는 구현이 불가능했던 시각 요소들을 구현할 수 있었다. AI 기반 제작 방식은 물리적 세트나 대규모 시각효과팀이 없이도 연출자의 순수한 상상력을 직접적으로 시각화할 수 있는 혁신적 가능성을 열었다. <폭설>은 종말을 앞둔 2009년 겨울, 설국(雪國)을 배경으로 구축된 디지털 세계이다. 주인공 소요는 어릴 적 친구인 유코를 기다린다. 작은 섬마을에서 벌어진 초자연적 현상은 종말로 확대되고, 소요가 유코가 남긴 수취인 없는 유서를 떠올리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는 특히 ‘몬사로(漢字道)’라 불리는 초월체. 형이상학적 존재를 시각화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비물질적이고 초월적 존재의 표현은 전통적 시각효과로는 구현하기 어려웠으나, 생성형 AI 파이프라인을 통해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시각적 표현을 달성할 수 있었다. <폭설> 제작에서는 프리 프로덕션부터 포스트 프로덕션까지 AI 기술을 다층적으로 활용했다. 특히 시나리오에서 묘사된 ‘몬사로’라고 하는, 형체가 정확히 드러나지 않는 형이상학적 존재의 시각화 작업은 정교한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을 통해 점진적으로 구체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작업을 안정화하기 위해 대규모 언어 모델인 Claude API를 활용하여 엔지니어링 프로그램을 개발하였고,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AI 프로덕션을 진행할 수 있는 구조화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는 시나리오의 핵심 시각 요소와 정서적 톤을 분석하고 이를 이미지 생성 명령어로 변환하는 중간 매개체로 기능했다. 독백으로 전개되는 14분 분량의 이 작품은 대화 장면보다는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와 분위기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한다. 이러한 접근은 AI 영화 제작의 특성을 고려한 의도적 선택이었다. 당시 AI 기술로는 자연스러운 대화 장면과 입술 동기화를 구현하기 어렵기 때문에, 내면의 독백을 통한 서사 전개 방식을 선택하고 시각적 요소에 집중했다. <폭설, 暴雪> 중 전체 설국 시퀀스 제작을 위해 직접 촬영한 눈의 텍스처를 학습시켜 AI로 생성된 설산 배경 이미지를 기본 레이어로 사용하였고, 특히 사실적인 표현과 초현실적 요소 사이의 균형을 세심하게 조정했다. 여기에 ControlNet을 결합한 워크플로우를 구축했다. 기본 배경 이미지에 ComfyUI 노드 기반 워크플로우를 적용해 시네마틱한 로그 프로파일을 구현했다. 이후, 35mm 필름의 할레이션 효과를 재현하고, ControlNet으로 아나모픽 렌즈 플레어와, 얕은 피사계 심도와 대기 원근법을 구축했다. 이후 후반 작업에서는 Film Grain 노드로 Pro-Mist 필터 효과를 시뮬레이션 후, 시네마틱 톤매핑을 완성하여 애너모픽 스퀴즈와 쿨-웜 색상 대비를 정교하게 조절하며 실제 영화의 질감을 구현하기 위해, 본 단계들이 점진적으로 추가되었다. 특히 캐릭터의 일관성을 유지하면서도 환경이 서서히 변화하는 과정을 표현하기 위해 이미지 변환 기술을 여러 단계로 적용하며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현상은 AI가 때로 예측하지 못한 창발적 결과물 을 생성한다는 것이었다. 초기에는 이러한 ‘알고리즘적 우연성’을 오류로 인식했으나, 점차 이를 창의적 발견의 기회로 활용하는 방향으로 접근법을 전환했다. 특히 설산 시퀀스 작업 중 한 번의 생성 과정에서 AI가 만들어낸 모호한 형체가 의도했던 것보다 더 본질적인 불안감을 자아내는 효과를 발견했다. 눈보라 속에서 형체가 완전히 뚜렷하게 드러나는 대신, 눈의 패턴 자체가 미묘하게 얼굴이나 실루엣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왜곡되는 효과가 우연히 생성되었는데, 이는 결국 최종 장면에 반영되었다. 이 경험은 단순히 계획한 이미지를 기술적으로 재현하는 것을 넘어, AI와의 대화적 창작을 통해 새로운 시각적 가능성을 발견하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AI와의 협업을 통한 창발적 발견은 <폭설> 이후 진행되고 있는 새로운 프로젝트에서도 지속되고 있다. 현재 제작 중인 <어령(御靈)>은 <폭설>의 후속 이야기를 다루는 인터랙티브 영화로, 관객의 선택에 따라 서사가 달라지는 새로운 형태의 영상 작품이다. <폭설>에서 구축된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되, 인터랙티브 요소를 통해 관객이 직접 서사에 개입할 수 있는 구조를 설계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기존의 AI 영화 제작 기법에 더해 실시간 선택 분기와 동적 서사 생성이라는 새로운 기술적 도전이 추가되었다. 특히 관객의 선택에 따라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시각적 요소들을 AI를 통해 구현하는 것은 전통적인 영화 제작 방식으로는 불가능한 실험적 시도이다. <어령>은 AI 기술이 단순한 제작 도구를 넘어 새로운 형태의 영화적 경험을 창조할 가능성을 탐구하는 프로젝트로 기획되었다. <어령, 御靈> 중 <폭설>과 <어령>의 제작 과정에서 핵심 미학적 도전 중 하나는 등장인물의 얼굴 일관성을 유지하는 문제였다. 이를 위해 포스트 프로덕션 단계에서 ComfyUI 기반의 얼굴 일관성 파이프라인을 구축했다. 특히 AI 생성 영화에서는 동일한 인물이 장면마다 미묘하게 달라지는 현상이 발생하는데, 이는 AI가 매번 새롭게 이미지를 생성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본질적 특성이다. 이러한 일관성 부재는 서사적 몰입을 저해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얼굴 치환 기술을 활용했다. 이 기술은 영화 중반부의 주요 장면에서 특히 중요했다. 이 장면에서 인물의 대화와 표정은 서사적 긴장감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 미묘한 변화를 시각화하기 위해, ComfyUI의 얼굴 치환 기능과 함께 감정 표현 보존 알고리즘을 적용했다. 이는 이미지가 지닌 감정적 뉘앙스는 유지하면서도, 얼굴의 미세한 형태적 변형을 통해 내적 변화를 암시하는 효과를 창출했다. 특히 인물의 얼굴이 대화 중에 일관성을 유지하면서도 미묘한 감정 변화를 표현하는 것은 관객들이 인물의 심리적 상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장치로 기능했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해결책이 아닌, 몰입적 요소를 강화하는 서사적 장치로 작용했다. <폭설, 暴雪> 중 공간 구현에 있어서는 Blender와 SketchUp을 기반으로 한 3D 모델링 작업에 더해, NeRF(Neural Radiance Fields) 기반의 공간 캡처 파이프라인을 접목하였다. 이는 AI 생성 영화에서 공간 연속성과 시각적 정합성을 유지하기 위한 핵심적인 기술적 구현 방식이었다. 장면마다 공간의 형태와 구조가 미묘하게 변화할 경우 시청자의 몰입감이 저하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에, 이 부분은 특히 신경 써야 할 주요 과제로 설정되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먼저 3D 모델링을 통해 기본적인 공간 구조를 구성하고, 이후 NeRF 기반의 신경망 기술을 적용하여 실제 공간의 광학적 특성과 깊이 정보를 정밀하게 재구성하였다. 이렇게 구축된 3D 공간 데이터는 AI 이미지 생성을 위한 프롬프트의 기준점으로 활용되며, 결과적으로 전체 서사 내 공간의 일관성과 장면 간 구조적 연속성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어령, 御靈> 중 인물 표현에 있어서는 표정과 제스처의 자연스러운 구현이 중요한 도전이기도 했는데, AI가 생성하는 인물의 표정은 종종 부자연스럽거나 과장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OpenPose 모델을 활용하여 인물의 자세와 제스처를 정밀하게 제어했고, 이를 통해 감정 표현의 섬세함을 구현하였다. 특히 대화 장면에서 인물 간의 시선 처리와 반응 표현은 자연스러운 상호작용을 표현하기 위한 핵심 요소였다. 동적 장면 구현을 위해서는 Stable Video Diffusion(SVD)을 활용하는 방향으로 진행했다. 정적 이미지 사이의 자연스러운 전환과 움직임을 구현하기 위해 키프레임 기반 접근법을 적용했다. 주요 장면의 키프레임을 먼저 생성한 후, 중간 프레임을 보간(Frame interpolation)하는 방식으로 움직임의 연속성을 확보했다. 이는 특히 인물의 미묘한 표정 변화나 환경의 점진적 변형을 표현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AI와의 협업 과정은 ‘대화적 생성’이라는 새로운 창작 모델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초기 단계에서는 명확한 지시에도 불구하고 AI가 생성하는 결과물이 연출자의 세부적인 의도와 괴리되는 현상이 관찰되었다. 하지만 반복적인 프롬프트 엔지니어링과 생성된 결과물에 대한 비판적 피드백 과정을 통해, AI는 점진적으로 연출자가 설정한 시각적 목표치에 수렴하는 결과물을 도출하기 시작했다. 제작 과정에서 미학적으로 가장 도전적이었던 부분은 AI 생성 이미지의 ‘제어 가능성’과 ‘창발적 우연성’ 사이의 균형을 찾는 과정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AI와의 ‘ 대화적 창작 ’ 프로세스를 발전시켰다. 구체적으로는 초기에 다양한 방향성을 탐색하는 ‘발산적 프롬프팅’에서 시작해, 점진적으로 선택된 요소들을 정교화하는 ‘수렴적 프롬프팅’으로 이어지는 다단계 접근법을 적용했다. AI가 제시하는 예상치 못한 가능성에 열린 상태로 창작 방향을 조정해나가는 쌍방향적 협업으로 프로세스를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본 기획보다 흥미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는 AI 생성 요소들이 캐릭터의 심리적 상태를 더욱 효과적으로 시각화할 수 있다는 발견은 제작 과정 자체를 재해석하게 했다. 이 과정은 단순한 도구적 활용을 넘어, AI라는 비인간 행위자와 상호작용하며 결과물을 구축해나가는 독특한 협업 모델을 경험하게 했다. 이는 AI가 창작 과정 자체에 능동적으로 개입하는 변수로서 기능할 수 있음을 시사하며, 향후 영화 제작 패러다임의 변화 가능성을 내포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기술적 전환이 영화계 전반에서 보편적으로 수용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사를 고찰해보면, 새로운 기술의 등장은 늘 기대와 동시에 기존 질서에 대한 불안과 저항을 야기해왔다. 활동사진의 등장부터 유성영화, 컬러영화, 디지털 시네마에 이르기까지, 기술적 전환기에는 어김없이 미학적, 산업적 논쟁이 수반되었다. AI 기술 역시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핵심적인 논점은 기술 자체의 속성보다는, 이를 창작의 도구로서 어떻게 사유하고 활용하는가에 대한 창작 주체 의 문제로 귀결된다. 제작 환경의 제약으로 인해 창작의 기회를 충분히 얻지 못하는 사례는 영화계에서 지속적으로 관찰되어 왔다. AI 기술은 이러한 구조적 한계를 일정 부분 해소하고, 창작자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할 잠재력을 지닌다. 최근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 국제경쟁 AI 영화 부문의 공식 선정작 감독들이 영화 관련 교육 배경을 가졌거나 현업에 종사하는 인력들이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AI 기술이 창작의 효율성을 높이는 유용한 도구임은 분명하지만, 영화적 서사를 구축하고 미학적 판단을 내리는 핵심적인 역량은 여전히 영화 매체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갖춘 인간 창작자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나아가, 기존에 기회를 얻지 못했던 창작자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줄 계기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따라서 AI는 단순한 기술적 진보를 넘어, 영화적 표현의 외연을 확장하는 새로운 매체적 조건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과거 네오리얼리즘이 동시대 현실을 포착하는 새로운 영화 언어를 제시했고, 누벨바그가 기존의 영화 문법에 도전하며 새로운 미학을 추구했듯이, 새로운 기술과 도구의 등장은 늘 새로운 영화 언어와 미학적 탐구의 가능성을 열어왔으니, 현재 우리는 AI 기술이 촉발하는 또 다른 영화사적 변화의 과정에 위치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을 터이다. <폭설, 暴雪> 중 <폭설>의 제작 과정은 AI와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진, 전통적 방식과는 구별되는 연출 실험이었다. 프리 프로덕션 단계의 시각화 작업부터 포스트 프로덕션의 특수효과 생성에 이르기까지, AI에게 연출 의도를 명확히 전달하고 생성된 결과물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며, 피드백을 통해 최종 결과물을 구축해나가는 과정은 새로운 형태의 협업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대화적 창작’ 모델은 감독에게 AI라는 새로운 기술적 도구를 효과적으로 운용하고 그 결과와 소통하는 능력을 요구한다. AI 기술의 발전 속도는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다. 단기간 내에 현재보다 훨씬 고도화된 기술이 등장할 것은 자명하다. 이러한 급격한 기술 변화 앞에서 창작자들이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영화의 역사는 본질적으로 이러한 기술적, 미학적 변화를 끊임없이 수용하고 내재화하며 발전해 온 과정이었다. 핵심은 기술의 발전이 영화가 다룰 수 있는 이야기의 폭과 깊이를 확장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표현할 새로운 방법론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AI는 창작 도구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것이지, 창작 행위의 본질 자체를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서사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질문하려는 욕구, 인간의 감정과 경험을 미학적으로 형상화하려는 의지, 스크린이라는 매개를 통해 관객과 소통하려는 영화 고유의 시도는 여전히 인간 창작자의 고유한 영역으로 남는다. <폭설>의 제작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AI가 감독의 창조적 비전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데 있어 강력하고 효율적인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도구를 사용하는 감독의 명확한 비전과 미학적 판단 능력이며, 이는 창작자의 경험, 감수성, 그리고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에서 비롯된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창작자는 상상하는 바를 더욱 효과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이 AI 시대 영화 창작이 마주한 새로운 가능성이며, 지속적인 탐구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궁극적으로, 매체 환경이 어떻게 변화하든 창작자는 늘 그랬듯이 동시대의 현실과 인간의 삶에 대해 발언하고 질문해야 한다. 사용하는 기술적 언어가 달라진다 해도, 영화를 통해 탐구하고자 하는 근원적인 문제의식과 주제는 지속될 것이다. 영화는 역사적으로 새로운 기술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창조적으로 활용하며 스스로의 미학적, 산업적 지평을 넓혀 온 예술 형태이다. AI 시대 역시 이러한 진화의 과정 속에 있을 것이다. 이야기하려는 우리들의 근원적 욕망이 존재하는 한, 영화는 시대와 기술의 변화에 조응하며 그 형태를 달리하며 지속될 것이다. 도구는 바뀌어도, 우리는 늘 그랬듯이 표현하고자 하니깐. 배준원(영화감독) l 표현자로서의 경계 없음을 안간힘을 다해 믿으며 표현합니다. <몬사로>(2025), < 폭설 >(2024), < 침묵 >(2023) 연출. 인간과 사회를 응시하며, 틈 사이로 비추는 균열들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