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영화기행
- 감독
- 조진
- 제작년도
- 2000
올 여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된 ‘해외 영화학자 초청 대중 특강’의 내용을 강연자의 시점에서 정리합니다. 영화와의 첫 만남과 학계 입문 과정에 얽힌 소소한 에피소드부터, 세계 속 한국영화의 위치, 최근 몰두하고 있는 연구 주제에 대한 학술적 분석까지. 한국영화를 향한 해외 영화학자 6인의 개성과 열정으로 꽉 채워졌던 2시간을 KOFA가 직접 기록한 특강노트 로 만나보세요. 정승훈 교수 는 영화의 매체적 특징과 더불어 작품에 영향을 미친 사회 구조나 철학에 관한 연구를 지속해왔다. 최근에는 세계화 시대에 발생하는 영화적 경향을 생명정치와 윤리, 철학의 관점에서 연구하며 ‘글로벌 시네마’ 이론을 구체화하고 있다. 저서로는 Cinematic Interfaces: Film Theory after New Media(2013), Biopolitical Ethics in Global Cinema(2023)가 있고, The Global Auteur: The Politics of Authorship in 21st Century Cinema(2016), The Mind-Game Film: Distributed Agency, Time Travel, and Productive Pathology(2021)를 공동 편집했으며, 《Studies in the Humanities》 특집호 내 “Global East Asian Cinema: Abjection and Agency(2019)”를 객원 편집했다. 뉴욕대 아부다비 캠퍼스와 컬럼비아대학교 영화학과에서 강의한 후, 현재는 캘리포니아 주립대 롱비치 캠퍼스 영화과의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영화가 문화가 된 시기, 평론가로서의 시작 1980~90년대 국내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 나 역시 <토요명화>나 <주말의 명화>, 그리고 주한미군방송(AFKN)과 같은 TV 매체에서 방영된 해외 극영화를 통해 영화에 친근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 블레이드 러너 >(리들리 스콧, 1982)의 등장인물 레이첼(숀 영)이 황혼의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모습에서 ‘이미지’로만 관객을 매료시키는 영화의 힘을 처음 실감했으며, 장 뤽 고다르의 < 네 멋대로 해라 >(1959)에 대한 할리우드식 리메이크작 < 브레드레스 >(짐 맥브라이드, 1983)의 클라이맥스에서 주인공 제시(리차드 기어)가 경찰에게 포위당한 채 춤을 추는 장면 역시, 서사의 개입 없이 인물의 움직임만으로 작품에 집중하는 체험을 하게 해줬다. 이렇게 영화 속 이미지의 고유한 특성을 지각하면서, 스스로 주목한 작품 목록을 짧게나마 작성해보며 영화에 가까워졌다. 1990년대에 진입하면, 새롭고 다양한 영화를 발견하려는 의지에서 발원한 국내 시네필 문화가 본격화된다. 월간지 《로드쇼》의 ‘도시에’란에 김홍준 감독이 ‘구회영’이라는 필명으로 1990년부터 1991년까지 실었던 글을 엮은 책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1991)이 고등학교 시절 발표되었다. 영화사에 대한 개괄부터 할리우드·홍콩·유럽 등지의 영화에 대한 지식을 살펴보면서 세계 영화의 면면을 흥미롭게 학습했다. 동시에 이 책에 포함되어있던 ‘영화사상 걸작선(1895년부터 1991년 사이 발표된 고전영화 91선),’ ‘우리세대의 걸작(1980년대 세계영화 100선)’과 같은 목록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영화 감상의 폭을 넓히기도 했다. 특히 ‘우리세대의 걸작’ 100선에 한국영화 몇 편이 포함된 점이 인상적이었다. 한국인이자 한국 영화학도 또는 영화인로서의 필자(김홍준 감독)가 아직은 국제무대에서 발견되지 못한 한국영화의 가치를 대중 독자에게 소개한 대목을 읽으며, 세계에서 한국영화가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탐구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좌2) <블레이드 러너>, <브레드레스> 중 (사진: "Sean Young", IMDb / "Breathless", IMDb ) (우1)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 때마침 한국영화가 산업적 측면에서도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씨네21》과 《키노》 등의 영화 전문지들이 창간되었고, 1년여가 지난 후에 두 매체 모두 영화평론상 공모로 ‘평론가’를 배출하기 시작한다. 앞에 이야기한 계기들을 거치며 영화를 좋아하게 되고 ‘비평’ 분야 전반에도 흥미를 느꼈던 나에게 영화평론가라는 진로는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때까지 영화를 전문적으로 공부한 적은 없었지만, 학부에서 불문학을 전공하며 배운 문학 이론을 영화비평에 적용하기를 즐기며 영화를 바라보는 나만의 시각을 확립하고 있던 터라, 이를 널리 공유하는 기회를 붙잡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러던 중, 운 좋게도 2003년에 《씨네21》 영화평론상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면서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공모 당시 이론비평을 통해 내가 다루고자 했던 내용이자, 한국영화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해준 주제를 소개하고 싶다. 바로 ‘작가’로서의 감독이 등장했음을 알리며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기를 주도한 대표적 인물, 이창동 과 홍상수 작품 간 비교이다. 이들이 활동하기 직전인 1980년~90년대 중반, 사회비판적이고 현실적인 태도를 견지한 젊은 영화로서 박광수 와 장선우 등이 선보인 ‘코리안 뉴웨이브’가 주목받는다. 하지만 1995~96년 즈음에 관심의 초점은 지금의 우리에게 익숙한 ‘작가’ 감독들의 데뷔로 옮겨간다. 이전 세대의 연장선을 밟는 한편 그보다 한층 더 높은 미학적 차원을 달성한 그들의 데뷔작은 한국영화의 질적 전환을 주도하며 많은 평론가들의 비평 욕구를 자극했다. 그 전환의 과정을 들여다보자면, 이 시기의 감독들은 과거사 중심의 리얼리즘을 추구했던 이전 세대와는 달리 동시대 공간을 탐구하려는 의지 를 작품에 투영했다. 특히 이창동과 홍상수는 당시 서울 변두리의 리얼리티를 작품 속 ‘공간’에 내재된 의미(혹은 무의미)나 각자의 재현의 체계(혹은 비체계)에 따라 제시했다. 나는 그들의 작품을 ‘ 집’ 과 ‘길’ 이라는 공간 개념을 중심으로 의미론적 차원에서 해석하는 한편, 리얼리티 재현 과정에서 각자가 추구한 미학과 스타일의 차이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창동이 유기적으로 지은 ‘집’, 홍상수가 소요하는 ‘길’ 이창동의 작품에서는 현대인이 돌아가야 할 원형적 공간으로 이해되는 ‘집’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 모두가 떠나온 이곳은 그들이 다시 회귀하고 싶어 하는 궁극적인 목적지이자 ‘ 탈시간적 유토피아 ’가 되지만, 이제는 도달할 수 없는 상실된 공간이다. < 초록 물고기 >(1997)의 주인공 막동( 한석규 )의 가족은 현대화와 도시화의 물결에 떠밀려 뿔뿔이 흩어진다. 막동은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원형적 욕망을 지니게 되지만 실현하지 못하고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같은 맥락으로 < 박하사탕 >(1999)의 유명한 대사 “나 다시 돌아갈래!”에서 돌아가고 싶어하는 마음의 대상이 되는 특정 시간은, 순정에 대한 주인공 영호( 설경구 )의 기억을 담은 채 이제는 잃어버린 집과 같은 시공간적 향수를 자아낸다. < 오아시스 >(2002)에서는 종두(설경구)와 공주( 문소리 )가 꽉 막힌 청계고가도로에서 갑자기 공주의 집으로 이동하는 판타지적 순간이 연출되는데, 제목과 같이 강렬한 욕망을 불러일으키지만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이자 유토피아와 같은 개념이 현실을 지배하고 있음이 여기서 나타난다. 이렇게 이창동은 갑자기 찾아온 현대사회가 개인을 폭력과 속도전에 연루시켰고, 이전에 간직했던 꿈과 순수, 사랑은 파괴해버렸음을 부각한다. 거스를 수 없는 변화와 상실 속에서, 잃어버린 ‘집’을 되찾고 싶다는 무력한 개인의 욕망이 자라날 뿐이다. (좌) <초록 물고기>, <오아시스>, <박하사탕>의 '집'에 관한 설명 (우) <오아시스> 중 공주의 집에서 일어난 판타지적 순간 반면, 위와 같은 특징을 홍상수의 작품에서는 절대 발견할 수 없다. 홍상수가 만든 인물들에게는 돌아가고 싶은 곳을 찾으려는 욕망이 없고, 그들이 잠시 머물거나 지나치는 모든 공간은 정착의 터전이 될 수 없는 ‘길’의 변주이다. ‘장소(place)’가 관계적이고 역사적인 개념으로서 누군가의 정체성이 담지 되게끔 하는 근거지를 의미한다면,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모텔, 술집, 식당, 정류장, 길거리 등은 이러한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 비장소 (non-place)라고 할 수 있다. 인물은 이중 어느 한 곳에 머물더라도 곧 다시 떠나 소요하면서 또 다른 비장소로의 여행을 계속한다. 일생의 한 순간을 떼어다 놓은 듯해 시작과 끝을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과정’ 자체이다. 인물이 향하거나 머무는 장소로서의 의미를 획득하지 않는 그의 공간은 한 마디로 ‘ 탈근대적 아토피아 (atopia)’와 같다. (좌)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중 여관 (우) <강원도의 힘> 중 기차역 이어서 두 감독의 작품 전반에서 리얼리티가 재현되는 방식을 미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이창동은 통합·정주의 아폴론적 편집증에 기반한 유기적이고 총체적인 리얼리즘 을, 홍상수는 생성·유동의 디오니소스적 분열증에서 비롯된 총체성 해체의 리얼리즘 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주1 이창동은 인물, 대사, 행동, 배경 등 작품 속 기호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기호들을 활용한 미장센을 롱테이크 마스터숏으로 노출시키며 관객이 이를 역사적 또는 의미론적 차원으로 독해하도록 유도한다. 이때 발견된 의미는 화면에서 그와 유사한 특성을 지닌 기호와 결합하고, 이러한 은유가 반복되면서 기호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의미의 집’을 건축하게 된다. 이렇게 작품 곳곳에 녹아든 세부적 의미가 결합해 상위 의미 체계로 통합되는 리얼리즘을 추구한 이창동의 재현 방식은 아폴론적 편집증을 연상하게 한다. 이와 달리 홍상수의 롱숏에서는 특정한 의미가 독해되지 않고, 내면이 표백된 일상적 표층 현실만이 채집되곤 한다. 인물에게서 나타나는 행위와 몸짓, 습관, 말들이 그의 여행 여정에 흩뿌려져 장면 곳곳에서 출몰하는 광경을, 관객은 그저 관찰할 수밖에 없다. 기호들이 ‘의미의 집’을 이탈해 일상의 순간들을 따라 ‘길 가기’만을 지속하며 총체성을 해체하는 것이다. 유의미한 정보를 주지 않는 화면에서 관객은 가시적·비가시적 세계, 그리고 전지적·관찰자적 시점 간 구분이 무용해짐을 느끼기도 한다. 이러한 홍상수의 리얼리티는 이창동과 달리 생성·유동의 디오니소스적 분열증과 닮아 있다. 일상에서 발견되는 기호들이 의미와의 결합 없이 인물의 여정을 따라 자유롭게 유희하도록 놓아두기 때문이다. 두 감독의 미학이 이러한 이론과 완벽히 일치한다기보다, 극단적 위치에 있는 두 개념을 빌려 둘 간의 차이를 설명한 것으로 이해해주길 바란다. (좌) <초록 물고기> 중. 막동의 집, 도로, 아파트는 차례로 전근대, 근대화 및 그 산물을 의미한다. (우) <오!수정> 중. 마스터숏 없이 반복되는 술자리 장면과 일상적으로 오가는 말들. 논의를 전개하다보니, 다른 한국영화 감독들의 작품 세계 역시 위 관점에서 해석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 시점에서 그간 한국영화사를 돌이켜보았을 때, 대부분의 감독은 이창동의 방식을 택했다. 그들 각자가 한국사회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가지고 있고, 이에 기초한 염원과 욕망을 작품에 투영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 와중에 홍상수는 당대의 포스트 모더니즘적 경향을 영화 안에서 실험하며 별개의 노선을 택한, 상당히 독특한 작가이다. 오늘날까지도 홍상수의 실험은 그의 필모그래피에 한해서만 실행되지만, 대다수의 주류 한국영화는 이창동식 의미의 집짓기에 익숙한 모습을 보이며 이 경향을 확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해외에서 연구한 세계 속의 영화 위 주제로 이론비평을 작성하고 등단한 이후, 1년간 열띤 평론 활동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시의적 게재가 중요한 현장 비평의 특성상, 개봉작을 특정 기한까지 감상하고 글을 써야 할 의무가 매번 주어지면서 비평에 대한 압박감이 갈수록 커졌다. 더군다나 당시 평론 활동과 불문학 박사 과정을 병행하고 있었기에 부담이 더욱 가중되었다. 기민한 현장 비평계가 주는 자극이 매력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 작업이 반복된다면 투입을 초과하는 산출로 인해 내적 에너지가 소진되어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평론가로서의 한계에 도달했을 뿐 영화에 대한 관심은 여전했고 마음도 영화로 향해 있었기에, 당시 내가 내린 결심은 영화를 ‘공부’ 하는 것이었다. 이때 한국영화에 대한 국제적 관심은 한국사회의 ‘거울’로서의 기능에만 치우쳐 있었던 듯하다. 한국영화가 한국의 역사와 사회를 충실하게 ‘재현’하는 수단으로만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한계가 지속되다보니 존재론, 매체론, 현상학적 의미 등 영화의 본질에 관해 세계적으로 공유되고 있는 학술 개념이 국내에 적용되는 시점이 늦어졌다. 비슷한 시기에 불문학 도서를 번역하며 현대 문학 및 사상의 흐름을 인지함과 동시에 해외 학자들의 현대 영화 이론이 국내로 유입되는 과정을 목격한 나로서는, 유학을 떠나 한국영화에 보편적 영화 이론을 적용하는 법을 배우고 싶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해외 유학 중 작성한 박사 논문 Cinematic Interfaces 를 통해 영화 속 모호하고 잠재적인 세계로의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인터페이스’가 서사와 이론 측면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연구했다. 그리고 지도교수 중 한 명이었던 영화학자 토마스 앨세서(Thomas Elsaesser, 1943~2019)가 2019년에 갑작스럽게 작고한 후, 그가 집필 중이던 저서 The Mind-Game Film 에서 미처 완성되지 못한 부분을 동료 연구자들과 함께 보충해 공동 편집하기도 했다. 본 도서는 당시 화제가 된 “퍼즐 영화” *주2 가 사회적 패러다임과 맞물려 있는 측면을 정치, 경제, 사회, 정신분석, 철학 등에서의 이론을 활용해 조명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 롱비치 캠퍼스로 오기 전 뉴욕대 아부다비 캠퍼스에서 강의했을 때는, 활발한 세계화의 중심지로서 그 명암을 모두 반영하고 있는 아부다비라는 공간을 체험했다. 또한 앞의 편서의 주제에서도 나타나듯이 당시 영화 연구에 대한 관심사도 미학 이론 너머로 확장되고 있었기에, 이들을 계기로 ‘글로벌 시네마’라는 주제를 조금 더 면밀히 살펴보게 되었다. 글로벌 시네마라는 용어가 차츰 언급되기 시작했지만 용어의 정의는 쉽사리 내려지지 않았던 때이다. 먼저 공동편서 The Global Auteur (2016)에서는 당시 막연히 떠올린 글로벌 프레임에 맞게 세계 각지 영화의 작가들이 내세운 영화의 정치성 *주3 을 매핑했다. 이를 발판 삼아, 2019년에는 잡지 《Studies in the Humanities》 특집호의 객원 편집자로서 ‘동아시아’ 영화를 중심으로 글로벌 시네마를 설명하는 글들을 모아 “ Global East Asian Cinema: Abjection and Agency ”라는 제목으로 공개했다. 이러한 편집 작업에 반영되었던 관점을 발전시킨 연구가 Biopolitical Ethics in Global Cinem a 에 담겨있다. (좌1) 번역서 『문학의 행위』 (자크 데리다, 2013), 저서 Cinematic Interfaces , 공동편서 The Mind-Game Film . (우2) 공동편서 The Global Auteur , 저서 Biopolitical Ethics in Global Cinema 위 저서에 설명된 글로벌 시네마의 개념을 살펴보기 전에, 한국영화의 세계적 위상이 강화된 계기 에 대해 생각한 바를 먼저 공유하려고 한다. 이창동, 홍상수, 봉준호, 박찬욱 등의 작가가 등장하고 작품의 장르 자체가 다양화되며, 작품의 ‘만듦새’ 역시 개선되어 산업이 진화 했다는 것이 하나의 계기이다. 한류의 인기 에 영향을 받음과 동시에 OTT 등을 통해 전 세계의 접근성이 향상되었다는 점도 있다. 그리고 한국영화 관련 학술 행사와 출판물이 기획되는 경우가 많아짐을 고려할 때 한국영화에 대한 학계의 관심 도 크게 증가했다고 본다.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한국영상자료원처럼, 앞으로는 영화를 다루는 국내 연구 조직이나 문화 거점을 해외와 연결하는 매개자가 더욱 늘어나리라고 기대해도 좋을 만큼, 한국영화를 주제로 한 다양한 갈래의 연구가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최근 글로벌 시네마로서의 한국영화에게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성은 ‘ 탈오리엔탈리즘 ’이다. 세계 진출을 위해 전통문화의 효과적 재현을 중시한 1990년대와 달리, 최근의 한국콘텐츠는 우리 역사를 우리의 관점에서 해석하되 서구적 모티프나 장르의 보편성을 녹여냄으로써 해외에 비춰진 ‘한국적’ 이미지에 더는 구애받지 않고 있다. 국지적 문화에서 비롯되었지만 글로벌리티를 동반하는, 말하자면 탈오리엔탈리즘적 글로컬리티를 지닌 것인데, 이는 뒤에서 이야기할 ‘글로벌’ 프레임으로 본 세계화 시대의 한국영화가 갖는 고유성이 되기도 한다. ‘글로벌’ 체제의 생명 정치, 그리고 이중 윤리 먼저 오늘날의 글로벌 시네마 개념에 도착하기까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영화가 거론된 방식을 돌이켜보자. ‘세계영화’라는 용어의 의미는 실제로는 존재할지 몰라도 담론적으로는 오로지 그 용어를 바라보는 ‘관점,’ 즉 프레임만이 존재한다. 이 프레임은 보통 세 가지로 나뉘는데, 내셔널, 트랜스내셔널, 그리고 내가 연구하고 있는 글로벌 프레임이 있다. 먼저 내셔널 프레임에서는 민족국가(nation-state)의 역사와 사회현실, 문화 등을 반영하는 영화들을 배치하며 ‘세계영화’의 지도를 그린다. 하지만 지난 30년간 트랜스내셔널 프레임을 통해 이는 상당 부분 해체되었다. ‘ 영토화 ’에 기반한 내셔널 프레임이 민족국가 기반의 영화에게 동질성, 환원성, 폭력성을 요구하는 측면을 비판적으로 바라본 트랜스내셔널 프레임은, ‘ 탈영토화 ’ 개념에 근거해 다양하고 이질적이며 혼종적인 영화로서 세계영화를 정의한다. 이에 따라 서로 다른 문화권에 속한 인력의 공동 제작과 더불어, 특정 작품이 다른 국가나 문화권에서 어떻게 수용되는지에 대한 연구가 늘어났다. 또 다른 프레임으로서 내가 설명하고 싶은 관점은 ' 글로벌 ' 프레임이다. 이는 세계가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함께 ‘ 재영토화 ’된 시점에서부터 정치, 사회, 윤리의 패러다임이 변화한 데서 기인한다. 냉전 체제가 해체되면서, 양분되어있던 두 이데올로기적 세계가 1990년대 들어 자본주의에 따른 새 시장질서 속의 민주주의적 세계로 통합되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세계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포괄되어 일컬어지는 ‘포괄적 체제’가 긍정되며 세계화가 시작됐고, 여기에는 관용과 환대, 다양성에 대한 존중을 내세운 ‘ 연성 윤리 (soft ethics)’가 시대정신으로서 동반된다. 서로 다른 체제나 이념을 타도하기 위한 정치적 투쟁 및 대립의 중요성이 사라졌으며, ‘타자’ 역시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주체로 받아들여진다. 정치적으로 추구되었던 자유와 평등이 이제는 타자와의 공존 속에서 대두된 ‘윤리’로 자리 잡은 것인데, 이를 가리켜 탈정치적인 윤리적 전환이 발생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탈정치적 세계화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은 윤리적 경향의 이중성을 암시한다. 존중과 관용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는 연성 윤리는 어떤 경우에도 ‘관용될 수 없는’ 행위 역시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 ‘관용될 수 없는 행위’가 연성 윤리의 지지를 받는 포괄적 체제를 해칠 때, 그를 사회에서 제거하기 위한 ‘배제’의 메커니즘이 어쩔 수 없이 작동한다. 배제의 징후가 차별, 혐오, 추방과 같이 폭력적인 양상을 띠더라도 이를 정당화하는 ‘ 경성 윤리 (hard ethics)’가 연성 윤리의 이면으로 노출된다. 배제된 타자들은 이 체제로 다시 통합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재차 폭력으로 맞서면서 두 세력 간의 ‘새로운 적대’ 관계가 형성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통합되었던 세계에 또 다른 장벽을 세운 9.11 테러와 이후에도 줄곧 이어져 온 대테러 전쟁들이 대표적 사례이다. (좌) 베를린 장벽 붕괴 (사진: "The Fall of the Berlin Wall", German-American Heritage Museum ) (우) 세계영화를 바라보는 세 가지 프레임, 그중 '글로벌' 프레임의 '새로운 적대' 관계 에 관한 설명. 글로벌 프레임으로 본 세계화 시대는 정치로부터 벗어났다고 하지만, 윤리적 체제를 둘러싼 이 적대 관계는 오히려 ‘ 생명정치 (biopolitics)’의 영향력을 극대화한다. 인간 생명의 탈취 또는 구제 여부를 결정하는 힘으로서 가장 근원적인 권력이라고 할 수 있는 생체권력(biopower)이 정치의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사회가 주권과 안보 수호를 명목으로 자신의 체제를 무한 정의의 편에 세우고 타자를 향해 생명정치를 초법적으로 자행하는 과정에서 피해를 입는 존재들이 발생한다. 체제에 속하지 못하거나 체제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생명정치에 의해 주체(subject)로 살아갈 법적 권리를 박탈당한 비체 (abject)들이다. 글로벌 체제를 유지하는 데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이 폭력적 메커니즘을 생명정치적 비체화(abjection)라고도 부른다. 글로벌 시네마: 비체의 이중 죽음과 대안 윤리 정치·윤리적 패러다임 변화가 비체화를 일으킨다는 글로벌 프레임을 영화에 적용하여, 오늘날 글로벌 시네마의 주제를 두 가지로 나눠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는 정치적 변화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 재난 또는 재앙 영화 ’이다. 개인적으로는 ‘재난이나 재앙’이 우리 시대 주류 상업영화에 가장 굳건히 자리 잡은 주제라고 생각한다. 이들 작품의 특징은 극중 위기 극복에 기여할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고 해결책도 던지지 않는 대신, 그 빈자리를 디스토피아적 스펙터클이 불러일으키는 파괴적 즐거움으로 채운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양상이 부정적이라고는 절대 단정할 수는 없으며, 우리 사회가 처한 현실 자체의 반영이라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내러티브의 경향은 대체로 ‘ 이중 죽음 ’이라는 키워드로 정리된다. 작품 초반에 발생하는 특정 사건이나 트라우마로 인해 주인공은 온전한 주체로 기능하지 못하고 ‘비체화’되며, 사회적으로 소생하지 못하는 상징적 죽음의 상태에 이른다. 다만 비체화된 주인공은 희생자로만 남아있지 않고, 각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 에이전시 (agency; 미션 수행을 위해 행동하게 만드는 동인을 의미하는 철학 용어)’를 발휘한다. 그들의 에이전시 발현을 촉진하는 목적으로는 재주체화(잃어버린 세계 또는 자신을 버린 공동체로 돌아가 다시 통합됨), 복수(자신을 비체화한 어떤 존재에 대한 복수), 테러(자신이 비체가 될 수밖에 없는 세상을 테러), 자살(어떠한 목적도 선택할 수 없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음) 등이 있다. 에이전시가 발현된 결과 이 목적들이 달성되는지를 결말에 확인할 수 있고, 달성에 실패할 시 주인공의 물리적 죽음이 따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비체들의 에이전시가 꼭 위와 같은 목적에 의해서만 발현되는 것은 아니다. ‘ 잠재적 대안 윤리 ,’ 즉 연성 윤리와 경성 윤리가 충돌하는 글로벌 체제로 환원되지 않고, 오직 비체들 사이에서 서로를 위한 긍정적 잠재성을 실험하며 형성되는 윤리를 제시하는 작품도 있다. 에이전시를 발휘하고 있는 비체들이 공존하다가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실존적 선물이 되어줄 때, 그리고 이렇게 선물이 되어주며 서로 간 네트워킹이 실현될 때, 대안 윤리는 모습을 드러낸다. 물론 여기서 말한 비체들 간 네트워킹은 유토피아적이지 않은 ‘아토피아적 네트워킹’이다. 그들이 만나고 흩어지면서 산발적으로 발생하는 선물되기 경험은 영원할 수 없고 어느 하나의 이상적 방식으로 고정되어있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그 경험의 소중한 잠재성만은 여전한 채로 과정으로서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작품에서의 주체를 ‘비체적 에이전시’로, 공동체를 ‘선물적 아토피아’로 재해석하여 글로벌 시네마 분석을 이어가고 있다.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2000년대 이후 활동한 글로벌 시네마 작가의 작업을 관련 사례로 연구해왔다. 2000년대 글로벌 시네마 작가들 에 대한 간략한 매핑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 미완성 근대 국가 프로젝트와 그 변주 그렇다면 이러한 글로벌 시네마의 특징이 한국영화에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을까? 내가 비평 활동을 시작했던 2003년, 공교롭게도 한국영화 르네상스가 시작되며 역작들이 연달아 발표되었다. 작품들 대부분은 ‘포스트-뉴 웨이브’라고 불리는 386 세대가 연출했다. 이 세대 감독들은 시기를 고려할 때 문화적으로는 세계화를 경험했지만 각자 한국 근현대 역사를 목도하며 모종의 정치성을 탑재 했다(대체로 1980년대 불법적 국가 폭력이 남긴 상흔이 모티프가 된다). < 올드보이 >(박찬욱, 2003) 속 사적 감옥에서의 감금과 폭행, 공상과학 영화의 외양을 한 < 지구를 지켜라! >(장준환, 2003)에서 비체화가 이뤄진 배경, < 살인의 추억 >(봉준호, 2003)이 비춘 당시 사회 및 경찰 수사의 폭력적 측면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감독 각자가 격동의 한국 사회 속에서 확립한 정치적 감각이 비체화 내러티브와 에이전시의 방향성에 징후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한편으로는, 관련 작품들이 거의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과 유사한 구도, 즉 아버지-어머니-아들로 구성된 가족 삼각형의 구도를 지니고 있다. 부정적인 법이나 권력, 제도 등을 상징하는 ‘아버지’는 ‘아들’을 비체화하고, ‘아들’은 ‘아버지’에 저항하며 복수를 꿈꾸지만 영화에서는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삼각 구도는 작품이 암시하는 권력과 욕망에 정신분석적으로 접근하려는 관객의 욕구를 자극한다. <올드보이> , <살인의 추억> 중 이후 대중적 인기를 몰며 한국영화계에 등장한 ‘천만 영화’들은 앞에서 세계화 시대 한국영화의 특징이라고 잠시 언급했던 글로컬리티를 짙게 반영한다. 생명정치로 비체화된 작품 속 인물들이 에이전시를 발휘하는 동기에 힌트가 있다. ‘나쁜 아버지(가족, 국가 등)’로서의 전근대적 주권자는 초법적인 생체권력을 동원해 주인공인 ‘아들(백성, 시민 등)’을 비체화한다. 비체들은 역시 에이전시를 발휘하지만 그 결과로 달성하려는 목적이 사적 복수가 아니라 공적 정의 실현 에 가깝다는 점이 한국 천만 영화의 특징이다. 자신들을 비체화한 ‘나쁜 아버지’를 ‘좋은 아버지’로 대체하고자 하는 한국사회의 염원이 담긴 내러티브에 많은 관객들이 공감하고 호응해왔다. 생명정치로 발생한 비체들이 대안 윤리를 모색하는 글로벌 프레임에 한국사회의 정치적 실패라는 역사적 국지성이 결합한 결과이다. 한국의 거의 모든 천만 영화는 이렇게 ‘나쁜 아버지’로 표상되는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폭력적인 국가권력을 계속해서 소환하고 그것을 환상적 또는 역사적인 방식으로 재현하는데, 이를 ‘ 미완성 근대 국가 프로젝트 ’라고 표현하고 싶다. 시민들은 자신들을 비체화한 무능하고 폭력적인 국가가 유토피아적 공동체로서의 민족국가 또는 법치국가가 되기를 욕망하며 연대해 역사 또는 재앙 판타지를 조성한다. 더불어, 이 프로젝트를 전개하는 비체들은 함께 연대하는 와중에 서로에게 선물이 되어 ‘선물의 윤리’를 체험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안 가족을 형성하기도 한다. 딸을 잃은 주인공이 재앙 도중 구한 아이와 밥을 먹는 < 괴물 >(봉준호, 2006)의 한 장면에서처럼, 가족에 가까운 관계로의 발전을 돕는 과정으로 한국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음식 공유’를 통해 ‘식구’가 되는 것이 대표적 방식이다. (예시) 미완성 근대 국가 프로젝트 로서의 천만 영화 그런데 흥미롭게도 2010년대 중반부터, 한국영화에서 비체화를 초래하는 근원이 정치권력에서 점차 경제권력 으로 전환됨을 관찰할 수 있다. 자본 경쟁에서 승리한 기업이나 경제인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을 비체화하는,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양극화 사회의 단면이 반영되기 시작한 것이다. < 기생충 >(봉준호, 2019)은 그 변화의 결정판이다. 글로벌 IT 자본가와 불안정한 노동 무산계급(precariat) 가족이라는 양극화된 인물 설정, 그리고 경제적 계약 관계에 내재된 이중 윤리도 인상적이다. 극중 동익( 이선균 )과 연교( 조여정 )는 기택( 송강호 ) 가족을 상냥한 태도로 존중하는 동시에 피고용인으로서 넘지 말아야할 ‘선’을 암묵적으로, 하지만 명확히 전제한다. 계약에 근거해 서비스를 제공받는 고용인으로서 선의를 베풀지만, 피고용인이 그 이상을 요구하거나 불필요하게 간섭하는 등 그들이 전제한 ‘선’을 넘는다면 이들을 ‘혐오(비체화)’한다. 자신들이 혐오 받고 있음을 지각한 피고용인들의 분노는 결국 테러를 유발한다. 역시나 정치의 개입 없이 부자와 빈자 간 격돌만 존재하는 탈정치적 생명정치 프레임이 적용된다. 다만 비체 간 매개나 연대 없이 작품 후반으로 갈수록 ‘을’들 간의 권력 투쟁만 이어진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 사회 속 비체의 특성을 반영하는 듯 내러티브가 한층 더 비관적으로 변주되었다는 점이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후 < 오징어게임 >(황동혁, 2021)은 서바이벌 게임이라는 설정을 통해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이 정당화되는 체제를 상정해서 자본주의가 자연화된 세계관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경제권력이 낳는 비체화가 최근 주류 한국영화 및 한국 콘텐츠에서 자주 나타나면서 기존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의 전형에 변형을 가하는 모습이 포착된다.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길항: 수행적 자기 모순 <기생충> 중 이 시점에서 한 가지 지적하고자 하는 현상이 있는데, 바로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의 수행적 자기 모순 이다. 작품들 자체는 자본주의 체제와 신자유주의적 경쟁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고 비체 간 대안 윤리를 모색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자신들이 비판한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를 살찌우는 방식으로 소비 된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이 거둔 기록적인 성과는 영화에 상품성을 불어넣어 글로벌 체제로 빠르게 흡수되도록 만들었다. 봉준호 감독이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가장 비관적인 사회상을 그리게 되기까지 동시대에는 어떠한 문제가 고질적으로 누적되어왔는지를 진지하게 성찰하려는 노력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중은 화제의 작품을 찬양하고 소모하면서 그 안에 담겨있던 의미심장한 메시지는 수신하지 않는다. 다양한 해석과 전유의 가능성을 지닌 작품일수록 이를 즐기는 관객을 통해 수입이 증대되지만, 이렇게 화제성을 얻어 글로벌 미디어 현상으로 번진 작품은 시뮬라크라(simulacra)로서의 바이럴 밈에 지나지 않게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적 네트워크가 ‘바깥’을 지시하는 어떠한 시도도 허용하지 않음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자본주의는 체제의 바깥을 상정하는 비판적 텍스트마저도 무섭도록 강력한 포섭력으로 다시 흡수함으로써 태연하게도 비대화된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적 기조에서 발생한 콘텍스트와 여기에 저항하는 텍스트 간의 이 길항적 공생 관계를 어떻게 바라봐야할지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내게 숙제로 남아있을 것 같다. 오늘 특강에 찾아와준 여러분들도 함께 고민해주시면 좋겠다. * 질문과 답변 * (질문 1)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영화는 ‘유사-할리우드’를 흥행 전략으로 삼았다. < 쉬리 >(강제규, 1999)와 같이 할리우드 스타일이 주를 이루되 한국적 요소를 가미해 대중성을 확보한 것이다. 그런데 <올드보이>가 2004년 칸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이후부터 ‘한국영화’가 전 세계에 하나의 장르와 같이 인식되기 시작한 것 같다. 한국영화가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장르로 거듭나며 국제적으로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었던 이유 는 무엇일까? (영화저널리스트 김형석) (답변) 오늘 강연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2000년대 한국영화가 ‘질적으로 성장’하면서, 한국적 특성을 지닌 작품들이 글로벌 시장에 자리 잡는 과정에 대해 질문 해주신 듯하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상황이 영향을 미쳤겠지만, 근본적이고 추상적인 요인을 한국영화에 대한 당시 영화인들의 열정과 애정 에서 찾고 싶다. 1980년대 서울대 얄라셩영화연구회 회원을 중심으로 결성된 ‘서울영화집단’의 선집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2000)에 장선우 감독이 기고한 「새로운 삶. 새로운 영화」나 「열려진 영화를 위하여」와 같은 글들을 보면, 당시 시네필 문화를 견인한 인물들이 서구 영화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와중에도 어떻게 자신들만의 주체성을 담지할 것인지 에 대해 끊임없이 각성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해외 영화의 수준에 근접하고자 하는 욕망의 근저에는 어떻게든 우리만의 영화를 스스로 만들어보려는 열망도 있었고, 이 기세가 2000년대 이후 등장한 일군의 감독들에게도 여전히 남아있었던 것 같다. 과거 한국사회에 만연했던 폭력의 가해자로서의 정부나 제도 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지만 한국사회 자체에 대한 애정은 충만한 것이다. 이는 애국주의나 민족주의로 환원될 수 없는 한국 근현대사의 비판적 측면을 영화화하고자 하는 집단적 지성이자 욕망 과 같다고 본다. (좌)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 (우) <괴물> 중. 재난 상황을 해결하려는 인물은 거의 ' 일반 시민 '이다. 한국영화에서의 ‘장르’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저서에서 다룬 ‘재난 영화’는 한국에서 2000년대 들어서야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초반에는 할리우드 스타일을 복사해 적용했다. 화재, 건물 붕괴, 비행기 추락 등 할리우드 재난 영화가 사용한 도상을 추출해 한국적 맥락에서 토착화하려는 시도만 한 것이다. 그러다가 작품 자체의 질적 완성도를 높임과 동시에 한국적 특성을 더 정교하게 반영함으로써 걸출한 한국형 재난 영화를 선보일 수 있게 되었는데, <괴물>(2006) 정도가 그 시작이었다고 생각한다. 할리우드 재난 영화에서는 사건을 해결하는 엘리트 집단으로서의 영웅적 인물이 등장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괴물>에서도 나타나듯이 한국형 재난 영화에서 재난에 대처하는 인물들은 거의 일반 시민이며, 이들은 비체가 되어 고난을 겪기는 하지만 어떻게든 스스로 사건을 해결한다. ‘유사-할리우드’ 전략으로부터의 탈피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변화가 빠르면서도 완성도 높게 이뤄질 수 있었던 데는, 앞서 이야기한 대로 독창적 한국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영화인들의 각별한 애정이 한몫을 했다고 본다. (질문 2) 강연에서 언급된 것처럼, 한국영화는 유독 한 작품 안에서 최대한 다양한 장르를 경험하도록 하려는 욕구를 강하게 내비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경향은 인위적인 연출의 느낌을 주거나 메시지의 일관성을 해친다는 점에서 국내 관객에게는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는데, 언젠가부터 해외에서 먼저 이 장르적 혼종성 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한국영화에서 엿보이는 장르 혼종적 특징이 결국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향후에도 이 특징이 작품에 지속적으로 반영될 수 있을지 가 의문이다. (답변) 장르 혼종에 대한 한국영화의 집착이 계속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확실하지 않으며,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다만 워낙 여러 감독에 의해 반복되다 보니 이후 세대 감독들 역시 의식적으로 유사한 경향을 도입하되 자신만의 방식으로 혼종을 시도해 작품에 개성을 더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최근 할리우드에서도 마찬가지로 장르적 혼종의 경향이 두드러지는데, 그와중에 ‘새로운 스타일’에 대한 수요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강연에서 이야기한 마인드게임(mind-game) 영화와 같이 병리학적 증상을 보이는 주인공이 자신이 맞닥뜨린 게임 상황을 관객과 함께 헤쳐 나가는 스타일은 할리우드의 여러 작품에서 ‘장르를 불문하고’ 나타나는 중이다. 이처럼 유사한 영화적 스타일이 전 세계에 걸쳐 긍정되는 현상 은, 어떻게 보면 동시대 문화와 미디어 전반에 형성된 광범위한 네트워크의 영향력 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모든 것이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그 ‘바깥’을 떠올리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그 안의 세계를 비판하는 사람들조차 영화와 같은 ‘텍스트’에서는 비판적 태도를 취하더라도 이를 둘러싼 삶의 현장으로서의 ‘콘텍스트’ 측면에서는 ‘핵인싸’가 되고 싶어한다. 조금 다른 주제이기는 하지만, 견고한 네트워크를 통해 세계적으로 공유되는 영화적 경향이나 스타일이 동시다발적으로 긍정되는 현상도 이와 같은 측면에 기인하지 않을까 싶다. (질문 3) 한국 상업영화만의 특징 이라고 일컬어지는 전형적 인물상이나 신파성 등이 해외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답변) 한국영화 전체를 일반화해 답변드리기가 어려워, 하나의 사례를 바탕으로 말씀드리고 싶다. < 부산행 >(연상호, 2016)의 경우 개봉 당시 국내에서는 신파적 측면이 두드러진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해외에서는 신선한 좀비 영화로 긍정적으로 조명된 바 있다. 서구적 좀비물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징이 나타나서 그럴 수도 있는데, 예를 들어 해외 좀비 영화에서는 인간과 좀비의 구분이 명확해서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하더라도 좀비가 되면 즉시 처단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부산행>과 같은 한국의 좀비 영화는 좀비로 변했더라도 그 인물에 대한 다른 인물의 감정적 반응이 지속된다. 한국문화에서 엿보이는 ‘정’이나 ‘유대’의 개념이 투영된 것으로도 볼 수 있는 이러한 경향을 해외 관객들은 색다르다고 느낀 것 같다. (질문 4) 설명해주신 ‘글로벌 시네마’는 역사와 정치, 사회의 흐름을 반영해 주제의식과 내러티브를 설정한다. 반면 이렇게 거대한 프레임으로 동시대 사회를 조망하는 영화적 구도에 피로감을 느낀 창작자들은 개인의 삶이나 감정을 미시적으로 다룬 작품들 을 선보이기도 한다. 이와 같은 경향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전망하시는지 알고 싶다. (답변) 사실 현재 연구 중인 주제로서 오늘 강연한 ‘글로벌 패러다임’은 동시대를 따라 이미 흘러가고 있는 개념이다. 따라서 내가 제시한 글로벌 프레임을 넘어서 다가올 사회를, 그리고 그 속의 개인을 살펴보는 작품들이 더욱 많아졌으면 한다. 2010년대 이후에는 탈정치적 모순에 따른 이중 윤리 외에도 사회 안에서 여러 복합적인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를 각자의 방식으로 반영하는 작품들이 계속 발표되고 연구되리라고 예상하며, 나 역시 새로운 흐름을 지켜보고 싶다. (질문 5) 강연 초반 이창동과 홍상수의 작품에 대한 공간적 키워드로의 분석을 보면서, 두 감독 등장 이전 세대라고 언급하셨던 감독들의 작품 에서는 동일한 의미의 ‘집’과 ‘길’ 이 어떻게 나타났다고 볼 수 있을까? 특히 장선우 감독의 경우 홍상수 감독의 ‘길’과 같은 방식으로 공간을 보여주는 듯하면서도 이를 다소 모호하게 재현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장 정종화) <경마장 가는 길> , <너에게 나를 보낸다> 중 (답변) 두 감독 이후의 한국영화 감독들이 거의 이창동 감독의 방식 을 따랐다고 말씀드린 것처럼, 이전 세대 역시 유사 했으리라고 짐작한다. 이창동 감독의 이력을 고려할 때 그의 작품 세계의 바탕에 문학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 텐데, 한국문학계에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에 대한 논쟁이 꾸준히 이어지는 와중, 보다 주류에 가깝다고 논의된 사조는 리얼리즘이었다. 또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는 점에서, 이전 세대 감독들의 공간이 지닌 리얼리티 역시 이창동 감독의 방식에 가깝게 구현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장선우 감독의 < 경마장 가는 길 >(1991)과 < 너에게 나를 보낸다 >(1994)가 원작으로 하고 있는 소설은 포스트 모던적 경향을 보인다. 다만 장선우 감독의 이력을 참고할 때, 이러한 원작을 영화로 각색하는 작업이 그의 작품 세계가 지녔던 맥락과 조금 어긋난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앞에 이야기한 「열려진 영화를 위하여」와 같은 글에서 나타난 장선우 감독의 의지는, 포스트 모던을 대표하기보다 한국적 공연 및 서사 문화의 감각을 유기적인 체계로 조직하는 데 가까웠기 때문이다. 1995년 정도부터 영화계의 ‘코리안 뉴웨이브’에 대한 주목이 차츰 줄어든 배경에는 이러한 어긋남이 자리했던 것 같기도 하다. *** 주1. 니체가 『비극의 탄생』(1872)에서 비극(예술)의 정체를 설명하기 위해 그리스 신화 속 빛의 신 아폴론과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특성을 이용한 방식을 참고했다. 니체는 ‘아폴론적인 것’이 태양과 같은 밝음과 그 밝음 아래서 사물이 드러내는 균형 및 질서 등을 의미하고,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무질서한 혼돈과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생명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고 이야기한다. 주2. 복잡한 내러티브를 통해 관객을 게임으로 초대하는 2000년대 할리우드 영화의 한 경향으로, 크리스토퍼 놀란의 < 메멘토 >(2000)와 < 인셉션 >(2010) 등이 해당한다. 주3. 영화 작가주의 개념이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등장할 때 정치적 운동의 일환으로 소개된 바 있지만, 세상을 향한 21세기 영화 작가들의 태도에서 정치성은 훨씬 더 징후적으로 드러난다고 보고, 이를 다각도로 분석한 필자들의 글을 동료와 함께 취합했다.
1980년대 한국영화를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한 영화는 무엇일까? 관점에 따라 다를 것이다. ‘코리안 뉴 웨이브’를 중심에 둔다면 그 시작인 < 바람 불어 좋은 날 >(1980. 이장호)일 것이고, 작가주의 예술 영화라면 <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1989. 배용균)이 떠오를 것이다. 대중적 상업영화의 규범으로는 배창호의 < 고래사냥 >(1984)과 < 깊고 푸른 밤 >(1985)이 있을 것이며, < 길소뜸 >(1986. 임권택)이 보여준 리얼리즘의 시선도 빼놓을 수 없다. <애마부인>(1982년)부터 등장한 시그니처 포즈 하지만 영향력으로 본다면 단연 < 애마부인 >(1982. 정인엽)이다. 이 영화 이후 충무로는 ‘에로티시즘’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고, 이어지는 ‘애마 프랜차이즈’는 1980년대는 물론 현재까지도 한국영화의 ‘에로 패러다임’을 규정한다. <애마부인>은 이전까지 한국영화가 애써 눈 감아 온 ‘여자의 욕망’에 대해 적나라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방향이 정치적으로 올바르거나, 그 표현이 미학적이거나, 그 서사가 논리적으로 수긍할 만하다는 건 아니다. <애마부인>은 거대한 시작이었고 수많은 에로 영화들은 이 영화를 모방하거나 변주했다. ‘애마’라는 캐릭터가 30년 넘게 그려온 연대기는 한국영화의 웬만한 에로틱 아이템은 모두 품고 있었고, 그 흐름은 이후 < 젖소부인 바람났네 >(1995. 김인수)로 만개한 에로 비디오 시장과도 직결된다. 1대 애마 안소영. <애마부인>은 애마의 뒷모습으로 시작한다. 이때 애마는 고개를 돌려 관객을 응시한다. 애마의 각성. 이 테마는 30년 넘게 지속되어 온 ‘애마 프랜차이즈’의 핵심이다. 1982년은 분기점이었다. 이 해 안소영 과 임동진 이 부부/연인으로 등장하는 두 편의 영화가 개봉된다. <애마부인>과 < 산딸기 >(1982. 김수형)였다. 동시대를 배경으로 한 에로틱 멜로드라마와 일제 강점기를 다룬 토속 영화. 만약 <산딸기>가 더 인기를 끌었다면, 1980년대 에로 트렌드는 후자 쪽으로 기울었을 것이지만, 결과는 전자의 압도적 승리였고 이후 ‘애마의 세계’가 열린다. 1979년 박정희의 죽음 이후 신군부 쿠데타와 1980년 광주 민주화 항쟁을 겪은 남한 사회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여전한 공포 정치였지만, 그 표면은 훨씬 화려해졌다. 섹스와 스포츠와 스크린을 동원한 이른바 ‘3S 정책’의 시대였고, 통금 해제와 함께 ‘심야 상영’이라는 게 가능해졌으며, 그 첫 수혜자는 바로 <애마부인>이었다. 그 해 한국영화(당시엔 ‘방화’라고 불렀던) 흥행 1위였던 <애마부인>은,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극장 유리창이 깨질 정도로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던 화제작이었다. 감독은 정인엽 . 1960년대에 데뷔해 반공 영화부터 청소년 영화까지 이런저런 장르를 섭렵하다가 호스티스 영화 < 꽃순이를 아시나요 >(1979)로 빅 히트를 기록한 정인엽 감독은 1970년대 말 미국으로 연수를 떠난다. 이때 아트하우스에서 접한 유럽과 미국의 에로티시즘 영화들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귀국 후 당대 베스트셀러였던 조수비의 『애마부인』(1981)을 영화화한 것이다. <애마부인>은 달랐다. 여성이 가부장제로부터 벗어나 자유 연애를 추구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면서도 여성의 육체를 눈요깃감으로 전시한다는 점에서 꽤나 모순적인 영화였지만, 당대 관객들은 이 영화에서 1980년대식 욕망을 읽었다. 혼자 아파트에 살며, 직접 자동차를 운전하고, 패셔너블하면서, 나이트 클럽이나 바에서 즐기는 여자. 여기엔 1960년대 멜로드라마의 모성에 대한 강박이나, 1970년대 호스티스 영화가 지닌 비극적 운명의 흔적은 없었다. 유명무실한 가부장제(애마의 남편은 감옥에 있다), 육아의 의무에서 해방된 솔로의 삶(시댁에서 아이를 빼앗아갔다), 경제적 풍족함(애마에겐 생계에 대한 고민이 없다),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육체적 매력(남자뿐만 아니라 동성 친구도 눈독 들인다)…. 애마는 새로운 여성 캐릭터였으며, 한편으론 남한 사회에서 남성 중심의 일부일처제가 붕괴중임을 몸으로 선언하는 인물이었다. <애마부인> 시리즈에서 ‘애마’는 ‘말’과 함께 ‘자동차’를 의미한다. 호스티스 영화가 가난 때문에 몸을 팔아야 했던 여성들의 사연이라면, <애마부인>의 애마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다. 오너 드라이버인 그녀는 직접 차를 몰고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다. 사진은 <애마부인 6>. 모델인 애마(다희아)는 자동차 CF를 찍고 있는데, 이 영화엔 현대자동차가 공식 협찬을 했다. 산업적으로도 <애마부인>은 전인미답의 경지로 들어갔다. 이른바 ‘애마 프랜차이즈’는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강한 생명력을 지닌 시리즈일 것이다. 1982년에 첫 선을 보인 후 최근 < 애마부인 2016 >(2016. 김미연)까지,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본 20대 초반의 관객이 어느덧 환갑에 가까워질 때까지, 애마의 역사는 세대를 가로질러 이어졌다. 연방영화에서 제작한 ‘정전’은 1996년까지 13편으로 이어지지만, 정전보다 많은 ‘외전’이 있었다. 극장용 영화에서 시작한 프랜차이즈는 비디오 시장과 모바일 시장을 거쳐 IPTV 시장까지 이어졌으니, <애마부인>과 그 후예들은 한국의 영상 콘텐츠에 대한 산 증인인 셈이다. 그리고 애마 시리즈는 스타 시스템에 정면 도전했다. 배우와 장르의 인기에 힘입어 시리즈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프랜차이즈 자체의 동력을 통해 ‘O대 애마’라는 식으로 편마다 신인(급) 여배우를 등장시켰고 그들을 스타덤에 올렸다. 1대 애마 안소영, 2대 애마 오수비, 3대 애마 김부선. <애마부인> 시리즈의 초창기를 장식한 강렬한 섹슈얼 카리스마 배우들. 흔히들 <애마부인> 1편만 보고 이 영화의 모든 것을 본 양 이야기하지만, 정인엽 감독이 연출한 1~3편을 모두 본 후에야 이 시리즈의 진수를 논할 수 있을 것이다. <애마부인>과 < 애마부인 2 >(1984. 정인엽)는, 배우는 안소영에서 오수비 로 바뀌지만, 마치 하나의 작품처럼 이어지는 스토리라인을 지닌다. 1편의 마지막에서 애마는 젊은 애인과 남편 사이에서 결국 남편을 선택하고, 그들의 가정은 회복된다. 하지만 남편은 변한 게 없다. 여전히 일에 바쁘다는 이유로 밤 늦도록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남편을 위해 단장했던 애마가 거울 앞에 앉아 화장을 지우면서 영화는 끝난다. 2편의 시작 역시 애마(오수비)가 화장을 지우는 장면이다. 하지만 상황은 바뀌었다. 1편을 통해 애마는 각성했고, 2편의 그녀는 이미 이혼했으며 외국 항공사에서 일하는 커리어 우먼이고 근사한 애인 성현( 신일룡 )이 있다. 1편이 애마가 불행한 이유로 ‘바쁜 남편으로 인한 외로움’을 제시한다면, 2편에선 단 한 줄의 대사로 그것은 모두 허울이며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는 걸 보여준다. “우린 함께 도달한 적이 없어요.” 그리고 < 애마부인 3 >(1985. 정인엽)에 오면 더욱 명확하게 진단한다. 의사( 진봉진 )는 말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대다수의 부인들은 남편이 무력하다는 이유로,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원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애마부인>의 엔딩(상단). 남편은 집에 들어오지 않고 애마는 화장을 지운다. <엠마누엘>(1974. 쥐스트 자켕)의 엔딩(하단). 엠마누엘(실비아 크리스텔)은 짙게 화장을 한다. 과거의 모습을 지우고 새롭게 변신한 모습이다. <애마부인 2>의 첫 장면에서 화장을 지우던 애마의 모습은 1편의 엔딩과 연결된다. 하지만 <애마부인 2>의 엔딩에서 활짝 웃는 애마는 헤어스타일을 단발로 바꾸고 빨간 립스틱을 바른 모습이다. 남편, 애인, 연하남 등 ‘남자’에서 벗어난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자존심을 죽이고 잠자리를 요구할 때마다 당신은 무참하게 날 거부했어요,”(애마) “난 당신이 그런 여자인 줄 몰랐어.”(남편) 이런 식의 대사로 변죽만 울렸던 게 <애마부인>이라면, <애마부인 2>는 한국영화에서 최초로 부부 사이의 ‘섹스’에 대해 본격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며 애마는 “난 이제 누구와도 사랑할 수 있어요”라며 선언한다. 그리고 3편에 오면 애마( 김부선 )는 남편을 집에 남겨두고 떠나 버린다. 종종 사람들이 <애마부인> 시리즈를 유부녀의 일탈과 불륜에 대한 이야기 정도로 여기는데, 이 시리즈는 시종일관 ‘부부 관계’에 대해 고찰한다(10년 후에 나온 < 결혼 이야기 >(1992. 김의석)는 <애마부인>에 로맨틱 코미디를 결합한 업그레이드다). 그런 점에서 <애마부인>은 20년 가까이 독재와 유신 체제로 억눌렸던 한국 사회가 폭발했던 1980년대의 ‘욕망의 사회학’이자 ‘부부의 심리학’이었다. <애마부인> 시리즈를 이야기할 때 애마 못지 않게 인상적인 캐릭터는 에리카이다. 1편과 2편에서 김애경 역할을 맡은(목소리는 박정자 의 더빙) 에리카는 “애마야, 제발 그 봉건적 사상 좀 버려. 사랑해주지 않는 그런 남자와는 같이 살 필요가 없는 거야”라고 말하는 계몽적 멘트를 날리면서, 한편으론 “네 몸은 언제 봐도 정말 예뻐”라며 섹슈얼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애마부인> 시리즈는 당시로선 과감하게 호모섹슈얼리티에 대해 가감 없이 표현했고, 이것은 억눌린 부부 관계의 반대편에서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으로 제시된다. ‘이국적 이름을 지닌 동성 친구’ 캐릭터는 3편의 세실리( 박원숙 )을 거쳐 < 파리 애마 >(1986. 정인엽)와 <애마부인> 4편과 5편엔 다시 에리카로 이어지고, 7편에선 루비아( 박혜란 )가 등장한다. 이후에도 이 시리즈엔 항상 예술계나 화류계에 종사하는, 개방적인 여성들이 등장해 애마의 곁에 머문다. 애마에겐 항상 자유로운 삶을 사는, 영어 이름으로 불리는 솔로 친구가 있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1편과 2편의 에리카(김애경), 3편의 세실리(박원숙), <파리 애마>의 에리카(민복기), 4편의 에리카(윤지원), 5편의 에리카(전혜성), 7편의 루비아(박혜란). <애마부인>에서 애마와 에리카의 얼굴을 교차해 보여주는 신. 에리카는 말한다. “애마야, 네 몸은 언제 봐도 정말 예뻐.” 두 여성의 에로틱한 관계는 8편 이후 두드러지며, 이전엔 ‘노골적 암시’ 수준이었다면 매우 직접적인 베드 신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나는 남자가 점점 싫어져. 남자보다 여자가 더 좋아”라는 애마의 대사가 드러내듯, 10편은 퀴어 영화에 가까운 양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가장 인상적인 섹스 신은 9편일 듯하다. 애마( 진주희 )는 여행 중 우연희 강희( 강선영 )라는 포토그래퍼를 만나 그녀의 모델이 되고 사랑을 나누는데, 그 베드 신은 아마도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가장 격렬한 수위일 듯. 이때 강희는 말한다. “나는 구속 당하는 건 질색이다. 그런 날, 사람들은 레즈비언이라 비웃더군.” 호모섹슈얼리티는 <애마부인> 시리즈의 중요한 테마였다. (상단 좌측부터 지그재그로) <애마부인 7>의 애마(강승미)와 루비아. <애마부인 10>의 애마(오노아)와 영주(유미희). <애마부인 9>의 애마와 강희. 한편 정인엽 감독은 <파리 애마>의 유혜리와 ‘엠마누엘’ 실비아 크리스텔과 함께 <성애의 침묵>(1992)를 찍는다. 이 영화는 <애마부인> 시리즈의 연장선상에 있다. <애마부인> 시리즈는 수많은 클리셰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장 유명한 건 말 타는 장면일 것이다. 애마의 충족되지 못하는 욕망은 말을 통해, 말을 어루만지는 행동과, 말을 타는 쾌감과, 말 위에서 느끼는 속도감 등을 통해 해소되는데, 종종 이 신은 판타지로 제시되며 일종의 마스터베이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전통은 최근작인 <애마부인 2016>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남편과 트러블이 있는 은혜(류현아)는 친구 유리( 백세리 )의 권유로 승마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세계로 접어든다. ‘말’로 상징되는 자연은, 도시에서 해소되지 못하는 욕구의 해방구이기도 한데, <애마부인> 시리즈는 바닷가나 숲 속 같은 공간을 종종 섹스의 공간으로 설정하며, 여기서 말은 어떤 매개체가 된다. 한편 이 시리즈엔 ‘도시 VS 자연’처럼 수많은 이항 대립이 존재하며, 이것은 영화 전체를 구성하는 어떤 공식이 된다. ‘결혼 VS 불륜’ ‘남편 VS 애인’ ‘애마 VS 에리카’ ‘이성애 VS 동성애’ ‘현실 VS 판타지’…. 여기서 애마는 그 경계에서 고뇌한다. 이외에도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홀로 엑스터시를 느끼거나(이때 애마는 종종 안대를 한다), 고독이 몸부림 칠 때 침대나 의자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모습 등도 시리즈에서 반복되는 ‘시그니처 포즈’들. 이 모든 것이 애마의 내면적 갈망을 표현한다. 훔쳐보기 신도 마찬가지다. 애마는 카페나 술집 같은 곳에 자주 가고, 그곳에서 우연히 낯선 커플의 애정 행각을 목격한다. 그 모습에 격정을 느낀 애마는 몸을 비틀며 스스로를 느끼는데, 이때 그런 애마의 모습을 역시 훔쳐보는 음험한 남성의 시선이 있다. 그 남자는 애마에게 접근해 섹스를 요구하고, 애마는 뿌리친다. 이런 구도는 종종 스토킹이나 강간의 모티프와 결합되어 <애마부인> 후기 시리즈에 자주 등장한다. 흥행력이 떨어지던 시기 자극적 요소로 관객을 끌려는 시도일 수도 있지만, 그 시기 창궐하던 에로 비디오의 성폭력적 요소를 받아들인 면도 있다. (계속) <애마부인>. 전설의 장면. 말이라는 상징적 존재와 무의식. 그리고 판타지. <애마부인 2>. 욕조에서 목욕을 하던 애마는 말의 판타지에 빠지고, 그 안에서 젊은 남자와 섹스를 한다. 현실로 돌아왔을 땐 침대에 마치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다. <애마부인>에서 애마는 바에서 어느 커플을 엿본다. 이때 그녀를 바라보는 낯선 남자가 있다. 격렬한 키스를 나누는 커플. 애마는 다리를 비틀며 은밀한 마스터베이션에 빠진다. 엿보기와 마스터베이션의 결합은 <애마부인> 시리즈에서 여러 번 반복된 공식이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애마부인> <애마부인 2> <애마부인 3> <애마부인 9>의 애마들. 그들이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히는 모습은 이 시리즈의 시그니처 숏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하길종은 신화화된 감독이라고.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하길종은 그의 영화만으로도 충분히 평가받을 만한 감독이기에 이 말은 틀렸고, (그의 영화가 아니라) 하길종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들이 양산되면서 신화화 되었다는 점에서 이 말은 맞다. 문제는 후자에 있다. 하길종은 신화화하기 ‘딱’ 좋은 인물이다. (‘딴따라’라며 영화계를 천시하던 시기에) 서울대라는 최고 학부를 졸업했고, (누구도 제대로 된 영화 공부를 하지 않던 그때) 미국으로 건너가 명문 UCLA에서 정식으로 영화를 공부했으며, (너무도 엄혹한 현대사의 중심에서) 그 어떤 영화인보다 치열하게 살아가다가, (참으로 안타깝게도) 지나치게 일찍 세상을 떠나 버렸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엄청난 인적 네트워크가 있었다. ‘4.19세대’의 내로라하는 이들이, 특히 문화 분야의 이름난 이들이 하길종의 친구들이었다. 하길종 사후에도 신화화가 멈추지 않은 것은 이러한 여러 요인이 복잡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문제는 하길종을 둘러싼 신화가 굳건히 유지되면서 정작 그의 영화에 대한 평가는 갈수록 드물어졌다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하길종에 대해서는 이야기하면서 정작 그의 영화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길종의 불행은 여기에 있다. 2013년 한국영상자료원이 발간한 『한국영화 100선』에서 영화학자와 평론가들에게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세 영화가 있었다. 김기영의 <하녀>(1960), 유현목의 <오발탄>(1961), 그리고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1975) 등이 그것인데, 놀라운 것은 언제나 표현주의의 최고작으로 꼽히는 <하녀>, ‘한국적 리얼리즘’의 정수로 여겨지는 <오발탄>과 함께 <바보들의 행진>이 공동 1위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분명 예상치 못한 결과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이런 질문을 해보자. 한국영화사에서 <바보들의 행진>만큼 한 시대를 온전히 담고 있거나 그 시대를 대변하는 영화가 또 있을까? 엔딩 신인 용산역에서의 키스 장면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장면이다. 현실적인 시간으로 1970년대를 살아갔던 이들에게 이 장면은 결코 잊히지 않는 장면(일 것)이다. 유신의 억압에 맞서 고뇌하고 좌절하던 청춘이 선택한 것은 자살과 군 입대였다. 낭만주의자로 살고 싶었던 병태는 친구 영철이 자살하자 역설적이게도 입대를 한다. 현실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입대라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 도피를 늦게 알게 된 영자가 달려와 기차에 매달린다. 둘의 그 슬픈 키스는 1970년대 청춘들의 슬픈 자화상이다. 이때 구슬프게 들려오는 “날이 갈수록”을 더 설명해 무엇하랴? 그들에게 “고래사냥”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이었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1970년대에 이 영화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암울했을까? 역으로 말해, 이 영화가 존재함으로써 1970년대에도 한국영화가 존재했다고 할 수 있고, 사회문화적으로도 그 시대를 평가하고 회고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 있게 말하지만, 하길종은 이 영화 한 편만으로도 충분히 평가 받아야 할 감독이다. (사진1)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엔딩 장면 ‘하길종 신화’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것이 김지하와의 인연이다. 중동고 졸업 앨범에는 하길종과 김지하가 나란히 등장한다. 훗날 함께 서울대 인문대에 합격해 ‘인문대 거지그룹’ 멤버가 되어 온갖 기행을 일삼은 두 사람은 그러나 가는 길이 달랐다. 4.19를 겪은 후 김지하는 민중 시인의 길을 걸었고 하길종은 본격적으로 영화를 공부했다. 가는 길이 달랐지만, 아니, 달랐기 때문에 둘은 꾸준히 교류할 수 있었다. 하길종이 귀국하자마자, 그리고 죽을 때까지 연출하려고 했던 영화가 <태인전쟁>이었던 것도 김지하와의 교류 덕분이다. 김지하가 공부하던 동학사상을 하길종은 영화로 만들어 세계 영화계에 한국영화를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미국에서 공부한 하길종이 오히려 한국적이면서 우주적인 소재를 발굴해 세계 영화계로 진출하려 노력한 것은 김지하와의 관계를 떼면 설명하기 쉽지 않다. (사진2) 중동고 졸업 앨범의 하길종 1964년, 하길종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샌프란시스코 예술아카데미에서 공부하던 시절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사진에는 젊고 자신만만한 그의 모습이 있다. 우리 나이로 스물넷의 이 청년은 금문교 앞에서 선글라스를 낀 채 잔뜩 멋을 부리고 앉아 있다.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것이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기에 그의 기대는 그만큼 컸을 것이다. 세계 최강국이면서 영화에 관한 한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미국 아닌가. 미국에 온 지 일 년만에 마침내 UCLA 영화과 대학원에 입학했고, 2년 반만에 다큐멘터리에 관한 석사 논문을 써 졸업을 했다. 그 사이 전혜린의 동생, 전채린과 결혼해 득남했다. 이 시기 하길종은 친구 곽광수에게 편지를 쓰면서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이야기를 꾸준히 했다. 결국 그가 설 곳은 한국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사진3) 유학 시절 금문교 앞에서 (사진4) 유학 시절 영화를 촬영하며 1969년, 하길종은 문제의 실험영화 <병사의 제전>(1969)을 만들었다. 영화사 MGM이 전미 영화과 학생 가운데 4명에게 지원하는 프로그램에 하길종이 선발되어 후원을 받은 것이다. 귀국 후 몇 번 상영되다가 필름이 분실된 것으로 알려진 이 영화는 오랜 세월이 지난 200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하길종 회고전을 준비하면서 발굴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사운드는 멸실되어 이미지로만 관람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얼마나 고뇌 깊은 영화인지 충분히 인지할 수 있다. 하길종은 1960년대 중후반의 혼란스런 미국에서 받은 영향을 고스란히 실험적인 영화 형식 안에 담아냈다. 타나토스적 욕망과 에로스적 욕망, 문명과 인간, 삶과 죽음 등이 치열하게 교차하는 장면을 알레고리화해 예술적 가능성을 실험했다. 당시 한국영화계에서는 감히 시도조차 하지 못할 강한 실험성을 이 영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이런 실험을 귀국 후 충무로에서 시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그의 순진함이 차라리 안타깝게 느껴질 정도이다. (사진5) <병사의 제전>(1969)의 한 장면 1970년 가을, 6년의 유학을 마친 하길종은 마침내 귀국했다. <태인전쟁>을 영화화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이효석의 원작 <화분>(1972)을 연출했다. 엘리트 코스를 밟은 하길종이 충무로에서 대중적인 영화를 제대로 만들 수 있을지 많은 이들이 걱정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숱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완성한 영화는 흥행에 실패하고 비평에서도 표절 논쟁에 휘말리고 말았다.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지나 서서히 긴 침체기로 접어드는 이 시기에 실험성이 강한 ‘정치적’ 영화를 당시 대중들은 수용하지 못했고, 보수적인 영화상과 비평계 역시 받아들이지 못했다. 1960년대 중후반에 등장한 모더니즘 계열의 영화, 가령 이만희의 <휴일>(1968), 김수용의 <안개>(1967), 이성구의 <장군의 수염>(1968) 등의 작품보다 더 강한 정치적 실험을 영화 속에 녹여내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파쇼적인 한국 사회에서, 당시 세계영화사적 흐름인 정치적 모더니즘으로 정면승부를 펼치려고 했으니 쉽지 않았을 것이다. 청와대로 상징되는 파란 집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추한 욕망을 전시하는 영화를 통해 하길종은 자신이 가야할 길을 적시했지만, 동시에 그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강하게 깨달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분>이 한국영화사상 가장 인상적인 데뷔작 가운데 한 편이라는 사실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사진6) <화분>(하길종, 1972)의 한 장면 차기작 <수절>(1974)은 화천공사에서 제작했다. 이 말을 다르게 하면, 하길종의 영화 가운데 처음으로 충무로 주류 영화사에서 제작했고, 화천공사에서 연출한 4편 가운데 흥행에 실패한 단 하나의 영화라는 말이다. 특이하게도 이 영화는 하길종의 연출작 7편 가운데 원작이 없는 유일한 영화이기도 하다. <화분>의 실패 이후 하길종은 현대의 푸른 집을 재현하는 대신 오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음에도 그가 하고자 한 이야기는 여전했다. 특정 마을에서 벌어지는 처참한 군부 독재의 폭정. 특이하게도 <수절>은 공포영화의 컨벤션을 빌려와 억울하게 죽은 아내와 딸의 한을 남편이 복수하는 내용이지만, 1970년대 중반이라는, 대사 하나, 장면 하나 검열하던 상황에서 온전히 통과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특히 강간 장면이 많이 잘려 나갔다. 검열에서 20분 정도 잘린 영화를 본 하길종은 “눈알과 입이 없고 팔다리가 하나씩 잘려나간 나의 모습”이라고 당시 심정을 적었다. 데뷔 후 연이어 흥행에 실패하고 검열에서도 상처를 받은 하길종. 미국에서 꿈꾸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상황이었다. (사진7) <수절>(하길종, 1974) 촬영 현장에서 영화는 산업이다. 이 말은 투자한 돈은 회수할 정도의 흥행을 기록해야 한다는 뜻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달은 하길종은 이번에는 흥행 영화를 만들었다. 당시 최고 인기를 누리던 소설가 최인호가 쓴 에피소드식 콩트 『바보들의 행진』을 하길종 식으로 각색해 완성한 것. 이후 최인호와 하길종은 깊은 인연을 맺어 <속 별들의 고향>(1978), <병태와 영자>(1979) 등을 함께 했는데, 이 영화들은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 하길종은 최인호와 작업할 때 자신만의 각인은 약해졌지만 흥행에서는 성공을 거두는 아이러니를 겪어야 했다. <바보들의 행진>에서 하길종은 원작에 없는 영철이라는 캐릭터를 만들고, 보수화된 당시 사회를 상징하는 캐릭터와 장면들을 넣었으며, 송창식과 강근식의 음악을 적절히 사용하면서 1970년대 한국영화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아주머니들인 ‘고무신’ 관객에서 대학생인 ‘하이힐’ 관객으로 관객층이 변화하는 흐름을 만들어내었고, 다시 이것은 청년문화를 상징하는 영화로 명명되었다. 단언컨대 1970년대의 영화가 탄생했다. (사진8)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을 개봉한 국도극장 풍경 <바보들의 행진>의 흥행 이후 하길종은 이장호, 김호선, 변인식 등과 함께 ‘영상시대’라는 동인을 만들었다. 이 동인을 통해 새로운 신인을 발굴하고 감독을 육성하면서 새로운 흐름, 즉 뉴 웨이브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영상시대 결성 이후 만든 <여자를 찾습니다>(1976)는 안타깝게도 다시 흥행에 실패하고 말았다. 냉정하게 말하면, 김주영의 원작은 재미있었지만 영화화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하숙집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남녀 갈등을 그린 원작은 영화보다는 TV 드라마로 각색되었을 때 그 묘미가 살아날 것 같았지만, 하길종은 하재영을 다시 한 번 주연으로 삼아 청춘의 질주를 그려냈다. 눈에 띄는 감각적인 영상은 곳곳에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영화가 살아날 수는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영화가 지향하는 지점이 시대와도 맞지 많았다. 도시의 타락과 대비되는 시골의 순수함으로 귀환한다는 내용은 뭔가 어색했고, <바보들의 행진>과도 한참이나 먼 거리에 있었다. (사진9) <여자를 찾습니다>(하길종, 1976)의 한 장면 <한네의 승천>(1977)은 여러모로 아쉬운 영화이다. 하길종이 가장 좋아하던 하명중 주연, 유영길 촬영의 마지막 영화였고, 영상시대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하길종과 영상시대는 침체하던 한국영화를 갱신해 세계영화계로 나아갈 방법을 모색했는데, 그 하나가 한국적이면서 우주적인 소재를 영화화하는 것이었다. 하길종의 말을 빌리면, “전생과 내세와 현세가 한 지평 속에서 공존하는 윤회사상을 2대에 걸친 부녀의 비극적인 사랑을 통하여 향토색 짙은 영상으로 그려 보려”고 한 것으로, 실제 설악산과 공주의 깊은 산에서 촬영한 영화에는 탈춤, 산신제, 남사당, 걸립 등이 등장한다. 윤회 사상을 그리기 위해 여배우 전영선이 1인 3역을 하고 흑백과 칼라가 교차되는 등 다양한 실험을 하기도 했다. 하길종의 의도대로, 한국의 비극이지만 한 여자를 두고 아버지와 아들이 대결하는 서구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에서 개봉도 하지 못한 채 영화는 묻히고 말았다. (사진10) <한네의 승천>(하길종, 1977)의 포스터 다시 하길종은 흥행 영화로 눈을 돌렸다. 대마초 파동으로 감독 자격이 정지되었던 이장호를 대신해 그는 <속 별들의 고향>(1978)을 연출했다. 하길종에게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장호의 뒤통수를 치는 행동이 될 수 있다. 게다가 만의 하나 흥행에 실패하면 그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진다. 배수지진. 이런 각오로 만든 <속 별들의 고향>은 1970년대에 만들어진 멜로드라마 가운데 손꼽을 만한 영화가 되었다. <별들의 고향>의 속편이지만 호스티스물이 아니라 낭만적이면서 병폐적인 사랑이야기를 아름답고 쓸쓸하게 재현한다. 어떻게 보면 아름다운 미장센으로 볼거리를 남겼고, 또 어떻게 보면 하길종이 좋아하던 서구 감독에게 오마주를 바치면서 지적 이야깃거리를 던졌으며, 한편으로는 병으로 죽어가는 낭만주의자를 형상화하는 방법으로 그의 자의식을 영화 속에 심어 놓았다. 어떻게 보더라도 주인공 문오는 감독 하길종과 겹친다. 잠깐 카메오로 등장해 한없이 초조해하던 하길종의 모습은 현실의 그가 아니었을까 생각될 정도이다. (사진11) <속 별들의 고향>(하길종, 1978) 촬영장에서 <병태와 영자>(1979)가 개봉해서 한창 흥행을 할 때 하길종은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유작이 되어버린 것. 하길종에게 <병태와 영자>가 유작인 것은 아마 치욕일 것이다. 이 작품은 <바보들의 행진>의 속편이다. 그러니까 하길종은 <속 별들의 고향>도 속편이었고 <병태와 영자>도 속편이었다. 자신을 ‘속편 감독’이라고 자위하면서, <병태와 영자>의 흥행을 보며 이제는 진정 하고 싶은 영화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그 순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니 하길종에게 <병태와 영자>는 참으로 할 말이 많은 영화일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병태와 영자>는 그리 좋은 영화는 아니다. 속편의 연결성도 떨어지고 극적 재미도 덜하다. 그럼에도 가난한 청년이 시대의 권위와 부에 맞서 싸워나가는 에너지는 어떤 영화보다도 강하게 살아있다. 마이크 니콜스의 <졸업>(1967)을 연상시키는 엔딩이 더욱 그렇다. 가진 자가 자동차로 거리를 달릴 때 병태는 뛰어서 간다. 이때 감독은 둘을 교차로 편집하는데 기묘하게도 강한 힘을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은 당연히 자동차를 타고 가는 이가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길종은 젊음의 싱그러움, 그 무한한 힘이 이기도록 설정해 놓았다. 미처 마흔도 되지 않은 하길종이 그 시절 젊었다는 것을 이 장면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다. (사진12) <병태와 영자>(하길종, 1979) 포스터 많은 이들이 오해를 한다. 하길종은 영화감독만 한 것이 아니다. 귀국해 국내에서 활동한 시간 내내 그는 감독생활을 하면서 평론가로도 활동했다. 감독이 평론을 겸한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지만, 하길종은 미국에서 배운 이론과 새로운 영화 사조를 국내에 빠르게 전파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엑소시소트』, 『스타워즈』,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등을 직접 번역하기도 했다. 중앙대, 서라벌예대 등에서 강의를 하다 서울예대에서 교수생활을 한 것도 인재를 양성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생전 하길종의 이 모든 활동은 한국영화계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목표 아래서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는 이 목표를 위해 없는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갰으며 무엇보다 타협하지 않았다. 하길종은 동료 감독의 영화를 매우 사실적이고 직설적으로 평하는 것으로 유명해 여러 에피소드를 남기기도 했다. 같은 감독의 입장에서 보면 신랄하게 평가하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하길종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진13) 유현목 감독과 (사진14) 서울예대 제자들과 한국영화사의 숱한 감독들은 시대와 싸워야만 했다. 나운규의 일제강점기, 유현목과 임권택의 반공영화 시기를 보면 시대가 영화를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하길종도 마찬가지이다. 하길종을 평가하면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은 그가 충무로에서 활동한 시기이다. 박정희의 유신이라는 폭압적인 정치 체제 시기에 하길종이 활동했다. 더 세밀히 말하면, 데뷔작 <화분>을 만든 1972년은 유신이 시작된 때이고, 하길종이 세상을 떠난 1979년은 유신이 종말을 고한 때이다. 그러니까 하길종은 가장 가혹한 시기에 바로 이 땅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영화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 8년 동안 하길종은 영화감독으로서, 영화평론가로서, 영화학과 교수로서, 번역가로서, 영화운동가로서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정말이지 최선을 다했다는 표현은 여기서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결국 그는 시대의 벽을 넘지 못한 채 쓰러지고 말았다. 서른여덟이라는, 너무도 아까운 나이에 저세상 사람이 되어 버린 그. 지금 그는 경기도 광주의 한 공원묘지에 잠들어 있다. 이 땅에서는 매우 드물게, 사각형의 돌로 된 그의 무덤에는 생전 그의 필체로 각인된 “河吉鐘”이라는 이름과 생몰연도만 기록되어 있다. (사진 15) 하길종의 무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