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그러나 행복하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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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
2020년대의 ‘한국 독립영화’는 가능한 문제일까? 사사로운 기분으로 한 해를 돌아보는 지면에 어울리지 않는 난데없고 거창한 질문이다. 하지만 2020년대의 절반을 지나치는 이 시점에 짚어볼 만한, 그리고 한국 독립영화의 관객인 우리에게도 여전히 불투명한 질문이라고 느낀다. 대체 2020년대는 무엇일까? 2010년대를 여는 첫해에 낯설고도 특별한 다큐멘터리 < 보라 >(2010)를 공개한 이강현 감독은 2010년대의 마지막 해에 낯설고 특별한 극영화 < 얼굴들 >(2017)을 개봉한다. 개봉 당시엔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지만, 이 영화는 2023년 3월에 사망한 이강현의 마지막 작업이 되었다. 그는 <지도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제작하고 있었지만 미완의 기획으로 남았다. 공교롭게도 <얼굴들>이 개봉한 이듬해 세계는 대규모 전염병이 일으킨 코로나 팬데믹 시기를 통과하게 된다. 갑작스럽게 도래한 사회적 거리두기와 전면 봉쇄, 흰 마스크가 표상하는 대면의 불가능성과 접촉 금지는 우리를 불투명한 얼굴(들)과 비대면의 세계로 이끌었다. 텅 빈 영화관과 차단된 연결. 전염병의 유행은 수많은 얼굴을 차단하는 형태로 세계를 재구성했다. 한 영화감독의 때 이른 죽음과 전 세계를 뒤흔든 전염병 사태는 물론 서로 무관한 사건이다. 하지만 우연히 맞물린 두 사건을 겹쳐두는 데서 2020년대 한국 독립영화가 잃어버린 것과 되찾은 것의 틈새가 있다. 그것은 얼굴이다. 이강현이 포착한 ‘얼굴들’과 전염병이 봉쇄하고 차단한 ‘얼굴(들)’을 몽타주하는 것은, 영화 속의 얼굴이라는 공통의 기반이 무너진 시대의 표상에 대한 한 가지 단서를 마련할 수 있다는 가설을 소환한다. 세계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불투명하고 미스터리한 대상이 되었다. 영화가 여전히 얼굴과 또 다른 얼굴을 결합하는 것으로 의미를 생산하는 장치라면, 두 얼굴을 결합할 수 없는 시대의 영화는 무엇을 표상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한낮의 공원에서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지는 풍경의 변화를 묘사하는 손구용 의 < 공원에서 >는 인간의 얼굴을 중심에 두지 않는다. 그의 카메라는 마치 곤충학자 같은 시선으로 비인간적이고 비인칭적인 장소의 단면을 소묘한다. 한 여자가 벤치에 앉아서 시집을 읽고, 한 남자는 나무 근처에서 서성인다. 하지만 그들의 독서와 배회는 명확한 목적을 갖는 행위로 결정되지 않고 끝없이 지연된다. 그들은 계속해서 시집을 읽고 나무 근처를 움직인다. 공원에는 빛이 드리운 잔디밭과 나무, 물을 내뿜는 분수, 돌아다니는 고양이, 구름이 지나가는 하늘이 있다. 영화는 장면들 사이에 오규원의 시 「뜰의 호흡」의 텍스트를 삽입한다. 얼핏 일상적이고 평범한 장면들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공원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단면을 무작위적으로 이어 붙이는 듯 보인다. 영화의 카메라는 엇비슷한 몇몇 장면의 연쇄로 세계를 정밀하게 포착하는데, 미묘하게도 연속된 장면들이 영화에 도입하는 효과는 역설적이다. 그것은 눈에 비치는 세계의 불확실성을 덧씌운다. 카메라는 정밀하게 단면을 포착하지만 그럴수록 영화가 지각하는 세계의 총합은 모호해진다. 관객은 장면의 구체적인 세부를 하나씩 지켜볼수록 카메라 앞에 놓인 공원이 어떤 공간적 구조로 이루어진 것인지, 장면과 장면이 어떤 시간 관계로 접속하는 것인지 파악하기 까다로워진다.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숏은 그 자체로 투명하기 짝이 없으면서도 아이러니하게 다른 모든 숏과 관계 맺을 수 있는 모호한 비결정의 상태에 위치한다. 세계는 한없이 열린 미확정적인 상태로 팽창하는데, 팽창하는 시공간은 물리적으로 닫혀 있다. 모든 것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들려주는데 정작 어느 것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세계가 펼쳐진다. 손구용은 다큐멘터리적인 상상의 세계라는 형용 모순의 가능성을 발명한 것 같다. <공원에서>는 오후의 공원이라는 일상적 시공간의 이미지를 포착하는 단순한 작업이면서 동시에 그 이미지들을 반복적이고 무작위적으로 배치해 방향감각을 상실한 영화적 시공간으로 재구성하는 추상적 실천이기도 하다. 정독도서관 전경이라는 구체적 현실은 영화가 새롭게 창출한 허구적 질서 속에서 픽션화된다. 영화는 현실의 정돈된 질서를 훼손하고 현실의 단면을 프레임 안에 집어삼킨다. <공원에서>의 허구적 프레임 속에는 아름다운 풍경과 흉한 구도가, 현실의 기록과 추상적 형상이, 빛의 움직임과 물의 흐름이, 문학의 문장과 영화의 화면이, 물리적으로 선행하는 시간과 감각적으로 멈춰 있는 시간이 공존한다. 장면이 하나씩 덧붙여질수록 <공원에서>의 고정된 지각은 거듭해서 위태로워진다. 화면에 담기는 풍경은 카메라에 포착된 장소의 이미지이지만, 물이 튀기는 수면을 가까이에서 찍은 장면처럼 구체성이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이미지의 한 단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영화가 창안하는 공간은 깊이감이 부여된 실제 공간이지만, 구름이 지나가는 흑백의 하늘을 찍은 장면처럼 깊이가 제거된 모노크롬의 평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일반적인 분류를 따르자면 이 영화는 세계를 기록한 다큐멘터리에 속하지만, 결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담아낸 작업은 아니다. 손구용은 반복된 숏의 조합 아래서 거의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처럼 행위를 지속하는 세계를 창조한다. <공원에서>는 일상적인 속도로 움직이는 장면을 조각내어 배열함으로써 한없이 느리게 지속되는, 마치 정지한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을 직면하게 한다. 영상 매체인 영화의 시간은 불가피하게 장면 위에서 진행되고 있지만, 인물의 행위와 공원 전경의 총합은 달라지지 않는다. 흐르는 물과 움직이는 빛처럼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지만 장면은 계속 같은 자리에 놓여 있다. 그리하여 질문은 영화의 근원적인 속성으로 향한다. 화면의 움직임에 기반한 영화는 정말 변화하는 시간을 포착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얼굴 없는 영화는 한 뼘 더 나아가 우리가 알고 있던 영화를 지우고 우리가 지각하지 못하던 또 다른 규칙의 영화를 창조하는 작업에 가까워진다. 무엇보다 <공원에서>의 매혹은 단지 구조적이고 개념적인 영화적 세계를 창조했다는 측면에만 달려 있지 않다. 이 영화는 영화적 프레임 안에서 재구성된 세계의 풍경을 눈으로 보게 만들고, 세계의 소음을 귀로 듣게 하는 지극히 쾌락적이고 감각적인 영화이기 때문이다. 관객은 여기서 이미지를 보고 사운드를 들으며 영화의 가장 기초적인 실천을 생경하게 다시 마주한다. 이 영화는 얼굴이라는 공동의 기반을 잃어버린 오늘날의 영화가 지탱할 수 있는 장소가 감각적 공동체의 장소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환기한다. 한국 독립영화의 2020년대가 얼굴의 투명한 결합을 상실한 비대면의 시간이라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얼굴이 아닌 다른 매개로 영화를 활성화하기 위한 몸짓을 발명할 수밖에 없다. <공원에서>는 인간 중심적 서사의 습관이 달라붙은 장면을 활용하는 동시에 공원 곳곳에서 생겨나는 비인간적인 얼굴들의 생경한 표정을 나란히 배열한다. 이로 인해 영화가 다루는 얼굴과 장소의 초점은 다수의 형상으로 분리되고 인간의 얼굴에 초점을 맞추는 세계의 질서는 무너진다. 숏이 창출하는 순열과 조합의 수학적이고 감각적인 질서가 그 자리를 대체한다. 손구용은 단 하나의 현실을 한없이 길게 늘어뜨리지도 않고, 극단적 감각으로 채워진 현실이 카메라 앞에 존재한다고 강변하지도 않으며 세계에 대한 지각적 반응을 매 순간 조정하고 갱신한다. <공원에서>는 비인격적이고 비인칭적인 시각을 매개로 인간의 얼굴을 다시 만나게 한다. 카메라와 풍경을 매개로 지켜본 시각에서 공원 속 인간의 표상은 마치 영화에 불시착한 외계인의 모습처럼 낯설어진다. <공원에서>는 한 편의 영화가 단독적인 얼굴과 얼굴의 결합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과 풍경의 시간과 영화의 시간을 허구적 공간 위에 배합하는 것으로 성립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혹은 다르게 말할 수도 있다. 손구용은 인간중심적 감각에서 이탈한 낯선 얼굴들의 결합을 통해 불투명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영화의 몸짓을 갱신한다. <공원에서>는 쾌락적이고 감각적인 영화의 수단을 동원해 인간적인 얼굴의 특권을 무너뜨린다. 나는 작년에 공개된 한국영화 가운데 정재훈 의 < 에스퍼의 빛 >(2024)과 더불어 <공원에서>가 보고 듣는 감각의 경험을 낯설게 재배치하는 얼굴 없는 영화의 연대기를 작성했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어쩌면 이 영화들로부터 2020년대의 한국 독립영화를 다시 가늠해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김병규(영화평론가) l 2018년 《Filo》 신인평론가에 선정되고 《씨네21》 영화평론상을 수상하며 비평을 쓰기 시작했다. 만든 영화로 단편 < 늦은 산책 >(2023), < 오후 >(2023)가 있다.
<무소주>(2024) 중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금강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차이밍량은 2012년부터 <행자(行者)> 연작을 찍기 시작했다. 장소만 달려졌을 뿐 내용은 모두 동일하다. 리캉성이 붉은색 가사를 입고 약간 고개를 숙인 다음 한 손은 엄지와 검지로 원을 만들어 불가의 공(空)을 표시하고 다른 한 손은 내린 채 펼친 다음, 혹은 마찬가지로 원을 만들어서, 천천히 걷는다. 맥락과 배경, 그리고 거기에 대한 해설을 달 수 있겠지만 영화에서 보는 건 그게 전부이다. 차이밍량은 2013년 < 떠돌이 개 >를 찍은 다음 더 이상 극영화를 찍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언젠가부터 점점 차이밍량의 영화에서 극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부분들이 희박해져 갔다. 그는 < 안녕, 용문객잔 >(2003)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이미 모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행자> 연작을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무대에서 시작되었다. 2011년 타이베이 국립극장에서 300석 규모의 무대에서의 공연을 제안받았다. 세 명의 배우를 무대에 불러 각자의 모노드라마를 올릴 계획이었다. 세 명은 양구이메이, 루이징, 그리고 리캉성이었다. 리캉성에게는 일인삼역을 부탁했는데, 리캉성 본인과, 차이밍량의 아버지, 그리고 현장(玄奘)법사였다. 현장법사는 당나라 시대의 승려이다. 불교 교리를 연구하려고 했지만, 그때 중국에는 불교 경전이 없었다. 그래서 경전을 구하기 위해 천축국(지금의 인도)으로 길을 떠났다. 627년의 일이다. 둔황을 거쳐 천축국에서 불경을 얻은 다음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으로 돌아온 것은 645년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그 여정을 명나라 시대에 신괴소설(神怪小說)로 쓴 오승은 작가의 『서유기』이다. 삼장법사와 세 명의 제자,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과 함께 그들을 기다리는 온갖 요괴와 난관을 헤쳐 나가는 모험극. 하지만 무대에서 리캉성은 무얼 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사각형으로 된 무대 끝 선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차이밍량은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무대에서 한 번 공연한 다음에 사라져 버리는 게 너무 안타까워 그걸 기록하고 싶어졌다. 이 말을 다시 한 번 옮기겠다. <행자>는 영화로 만들어지기 위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기록하기 위해서 시작되었다. <모래>(2018) 중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 하지만 무대에서 이미 한 것을 카메라 앞에서 반복하지 않았다. 차이밍량은 리캉성에게 붉은 가사(袈裟)를 입히고 길거리로 데려 나갔다. <무색>(2012)이라는 제목의 첫 번째 <행자>는 2012년 타이베이의 야시장(夜市場)에서 걸었다. 아주 느리게 걸었다. 이 해에 세 편의 <행자>를 더 찍었다. 처음에는 상영시간이 짧았지만, 점점 더 길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덟 번째 <행자> 연작인 <모래>(2018)에서 처음으로 1시간 상영시간을 넘어섰다. 아무 사건도 없고, 아무 이야기도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 대사도 없다. 리캉성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언제나처럼 붉은 가사를 입고 한 손으로 엄지와 검지로 원을 만들고 다른 손을 내린 채 맨발로 몹시 천천히, 아주 느리게, 마치 멈춘 것 같은 속도로 걷는다. 하지만 길거리로 나가자 구체적인 문제와 만나야만 했다. 기후의 가혹한 조건. 환경이 요구하는 한계. 한여름 뜨거운 햇빛으로 달궈지다시피 한 말레이시아 쿠칭의 아스팔트 위를 맨발로 걸었고(다섯 번째 <행자>인 <물 위 걷기>) 추운 한겨울 밤에도 도쿄의 길거리도 맨발로 걸었다(여섯 번째 <행자>인 < 무무면(無無眠, No No Sleep) >). 그래서 차이밍량은 모든 테이크를 단 한 번만 찍었고, 리캉성은 같은 장소에서 두 번 걷지 않았다. <행자>는 정신적인 여정이지만 육체적인 기록이다. < 곳 >(2022), < 무소주 > 중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열 번째 <행자>인 < 무소주(無所住, Abiding Nowhere) >(2024)에서 리캉성은 미국 워싱턴 DC를 걷는다. 아홉 번째 <행자>인 <곳(何處, Where)>(2022)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아농 홍앙시가 등장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만나지 못하고 각자의 일을 각자 한다. 부사(副詞)로서의 각자(各自). 서로 따로따로. 어떤 일? 리캉성은 쉬지 않고 걷고, 아농은 외출하고 돌아와서 면을 끓인 다음 먹는다. 그 둘은 무슨 사이일까. 전주에서 만난 차이밍량은 내게 비밀을 알려주었다. (올해 전주영화제에서 차이밍량 <행자> 전작 회고전을 했고, 차이밍량은 전주에 방문했다. 이때 긴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었다. “언지무(言之無)―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 나는 이를 추구한다”, 《필로》 38호, 2024 May_June.) “<행자> 연작 일부분은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 예를 들면 내가 어릴 적에 읽은 『서유기』에 나오는 요괴 같은 개념들을 몰래 넣기도 합니다. 당신에게 알려줄 수는 있지만, 관객들에게 내 생각을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습니다. 확실한 건 <행자> 연작을 찍을 때는 어떤 방법을 통해 표현할지 생각을 많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파리에서 찍은 <곳> 속의 아농은 거미 요괴를 닮았습니다. 그가 리캉성, 그러니까 행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요괴를 닮았습니다. 내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들이 들어있습니다.” 하지만 차이밍량은 거기까지만 비밀을 알려주었다. <무소주>에서 아농이 요괴인지 그렇다면 어떤 요괴인지, 거기까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무소주> 중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 <무소주>의 마지막 장면에서 석양이 저물어가는 물가를 리캉성이 걷는다. 그때 해가 저물어가면서 물 위로 반사광이 피어오른다. 구태여 비유를 빌리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사바세계(娑婆世界)를 건너서 극락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그때 노래가 흐른다. ‘了悟心性究竟之上師祈請文’. 문자 그대로 옮기면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위한 스승들의 기도’이다. 이 노래가 들릴 때 리캉성은 마치 긴 여정을 마치는 것만 같다. 차이밍량은 베를린 영화제에서 이 열 번째 <행자>가 연작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고 했다. 추신 _ 전주영화제에서 차이밍량에게 열한 번째 <행자>를 제안했고, 차이밍량은 다음 <행자>를 전주에서 찍을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다. 이것이 새로운 <행자> 연작의 첫 번째 영화가 될지, 아니면 열한 번째 <행자>일지, 그도 아니면 번외편이 될지, 또는 에필로그가 될지, 아무것도 정해진 바 없다고 했다. 나는 두근거리면서 기다리는 중이다.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인터뷰 진행,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필사의 탐독』(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 카페 느와르 >(2009) 이후 < 천당의 밤과 안개 >(2015), < 녹차의 중력 >(2018), < 백두 번째 구름 >(2018) 연출.
영화 너머의 포스트-시네마를 가늠하면서, 여전히 남아있는 영화의 흔적도 제시합니다. 필름이 유령처럼 배회하다 떠난 자리를 상속받은 것은 극장이다. 영화가 디지털화되는 과정에서 필름의 쇠퇴는 곧 영화의 죽음이라는 담론이 있었고, 그 서사의 효력이 다하자 극장의 위기론이 부상했다. 오늘날 극장은 베일을 두른 채로 우리 앞에 나타나 지난날의 영광을 추억하면서, 그와 동시에 DVD, 불법 다운로드, 스트리밍 플랫폼에 밀려나고 있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하소연하는 유령과 같다. 어떤 이들은 극장에서의 유일무이한 영화 관람 경험이 사라지면 그때의 영화는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을 거라고 경고한다. 그들은 극장이 영화의 위기와 죽음을 방어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라고 굳게 믿는 듯하다. 하지만 극장의 경험을 포함하는 과거의 영화 경험을 상속하지 않으려는 이들도 있다. 동시대 영화 관람 경험은 모순적이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 이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연속적인 것과 단절적인 것 사이에서 팽팽한 줄다리기가 벌어지는 모양새가 나타나고 있다. 극장에 앉아 스크린에 투사된 이미지를 바라보던 과거의 관람 방식은, 오늘날 노트북, 태블릿 PC, 핸드폰과 같이 이동과 휴대가 편리한 디지털 기기를 활용하여 관객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모니터에 출력된 이미지를 바라보는 관람 방식으로 바뀌었다. 프란체스코 카세티(Francesco Casetti)는 자신의 책 『뤼미에르 은하계 : 도래하는 영화를 위한 일곱 개의 핵심어(The Lumière Galaxy: Seven Key Words for the Cinema to Come)』(2015)에서 이런 변화를 영화의 재배치 (relocation)라고 부른다. 그는 영화가 새로운 환경 속에서 그리고 새로운 기기를 통해서 재활성화 또는 재목적화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 영화를-넘어서는-영화의 경험 ’과 ‘ 영화로-회귀하는-경험 ’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다. 영화는 여전히 영화적인 것으로 회귀하는 동시에 전혀 영화적이지 않은 것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재배치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미디어 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대응하는 관객의 실천 에 있다. 단순히 영화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상태가 아니라 영화가 우리에 의해 구성되는 방식과 그 결과가 중요한 것이다. 영화의 위치가 달라져도 영화에 대한 관객의 감각과 기억이 남아 있고, 이전과는 분명하게 달라진 영화를 기존의 영화처럼 바꾸어 놓기 위한 관객의 실천이 있다면, 여전히 영화는 영화적인 어떤 것으로 존속할 수 있다. 극장에서의 영화 관람 경험도 마찬가지이다. 관객은 극장이 아닌 장소에서도 극장의 경험을 복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디지털 기기로 영화를 관람하면서 모니터의 밝기를 조정하거나 스피커의 볼륨을 조정하여 최대한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와 유사한 관람 환경을 구축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오늘날 관객은 디지털 기기를 활용하여 극장과 같은 곳에서 보장되는 몰입의 환경, 즉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관객을 지킬 수 있는 실존적인 버블(existential bubble)을 스스로 구축할 수 있다. 이처럼 관객은 영화를 둘러싼 달라진 환경을 수리함으로써 본래의 영화적 경험을 복원한다. 카세티에 따르면, “영화는 새로운 환경에 직면했고 새로운 조건을 마주하고 있지만, 그것은 우리를 포기 하지 않았다. 요컨대, 우리로 인하여 영화는 재배치되고 있는 것이다.” 카세티(좌)와 앙드레 고드로, 필립 마리온(우)의 저서 (사진: “ The Lumière Galaxy ”, “ The End of Cinema? ”, Columbia University Press) 극장은 다른 자리에서 다른 경험과 함께 다시 태어나고 있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 앙드레 고드로(André Gaudreault)와 필립 마리온(Philippe Marion)이 『영화의 죽음?: 디지털 시대의 위기 속 매체(The End of Cinema?: A Medium in Crisis in the Digital Age)』(2015)에서 제시한 ‘영화의 이중 탄생 (cinema’s double birth)’이라는 개념을 참고하고자 한다. 이 개념에 따르면, 영화는 역사적으로 여러 위기를 거치면서 새롭게 태어나기를 반복했다. 영화의 이중 탄생은 영화가 기술적으로 한번 그리고 제도적으로도 다시 한번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의 탄생이 역사적으로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실제로 영화는 사운드의 도입, 텔레비전의 발명, 비디오 기기의 보급, 디지털화와 같은 기술적 발전 속에서 위기와 변화를 겪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영화의 탄생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넘어서 아직 영화의 탄생이 완료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는 영화의 탄생에 있어서 가장 최신 버전에 해당하는 것일 뿐이다. 극장의 이중 탄생, 즉 극장 문화의 제도적 안착은 영화사 초기 30년 동안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그 과정은 유랑, 정착, 성전의 세 단계로 세분화할 수 있다. 1) 유랑 의 단계: 19세기 말, 카메라와 영사기의 발명과 함께 등장한 영화는 카페, 놀이공원, 박람회, 보드빌, 장터와 같은 곳을 전전하면서 일시적으로 상영되는 문화적 이벤트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2) 정착 의 단계 : 1905년을 전후해서 미국을 중심으로 작은 상점을 개조하여 만든 극장인 니켈로디언(Nickelodeon)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비로소 영화만을 위한 공간이 생겼다. 상설영화관으로서의 니켈로디언은 30석 내외의 좌석을 갖추고, 5센트의 입장료를 책정했고, 주 고객은 노동 계급이었다. 3) 성전화 의 단계 : 1920년대를 기점으로 다양한 인종, 성별, 세대를 수용하기 위해 대규모의 좌석, 화려한 외관과 실내 장식, 주차장과 매점과 같은 편의시설을 갖춘 영화 궁전(movie palace)이 등장한다. 영화학자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Siegfried Kracauer)는 영화 궁전이 오락을 숭배하는 공간이면서 고단한 현실로부터 달아나려는 관객을 위해 마련된 일종의 도피처와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그는 영화 궁전이 정신적으로 거주할 곳을 잃은 자들을 포용하는 성격이 있음을 강조하면서 그곳을 ‘집 없는 자들을 위한 안식처’라고 불렀다. (좌) 1908년부터 1914년까지 5센트의 입장료를 받고 운영되었다고 기록된 캐나다의 “Comique movie theatre” (우) 미국 텍사스 샌 안토니오에 위치한 극장 “Majestic Theatre”. 스페인의 지중해풍 양식을 반영해 1929년에 지어졌다. (사진: “ Front of Comique movie theatre ”, City of Toronto Archives / “ The Venues ”, Majestic & Empire Theaters) 이런 역사적 사실은 크게 두 가지를 시사한다. 하나는 극장이 영화의 유일한 경험이 아니라 여러 가능한 경험 중 하나라는 것을,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극장의 경험은 영화의 역사와 대중의 기억 속 깊은 곳에서 단단한 지층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넌지시 지시한다. 디지털화 이후 영화는 더 이상 극장에 귀속되지 않는다. 이런 변화 속에서 극장은 영화의 경험을 위한 유일한 장소는 아니지만 영화적 경험의 회귀를 발생시킬 수 있는 근원적 장소이자 여러 영화적 경험이 참조하는 하나의 이념으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극장의 경험은 어떻게 이루어지며, 그것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이미 여러 비평가와 이론가들이 지적한 것처럼, 극장에서의 영화 관람은 건축적 공간, 각종 기계 장치, 그리고 관객이 결합해서 만들어낸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의 결과물이다. 구체적으로 그 경험은 극장이라는 건축적 공간이 외부의 자극을 차단함으로써 만들어내는 밀폐된 공간, 카메라, 영사기, 스크린으로 구성된 기계적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환영의 세계, 그리고 좌석에 기댄 채 스크린을 응시하는 관객의 욕망이 상호작용하면서 만들어낸 것이다. 프란체스코 카세티는 자신의 최근 저작인 『스크리닝 공포(Screening Fears)』(2023)에서 영화관 특유의 스크린 경험을 “ 투사/방어 복합체 (projection/protection complex)”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투사/방어 복합체는 기계적, 심리적, 사회적 장치들로 구성된 것으로, 물리적으로 폐쇄된 공간을 통해서 관객을 현실로부터 분리하는 동시에 스크린의 투명한 이미지를 통해서 관객을 다른 세계와 연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투사/방어가 하나의 짝을 이룬다는 것은 영화적인 경험이 현실과의 연결/분리의 모순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과 같다. 이 모순은 관객의 심리적 요구와도 무관하지 않다. 관객은 영화 속 세계와 연결되거나 그 세계에 몰입 하고 싶으면서도 그와 동시에 영화가 제시하는 환영을 거부 하고 자신이 실제 현실에 발을 딛고 있음에 안도감을 느낀다. 관객은 영화를 통해 꿈을 꾸면서 영화에서 깨어나기를 바라는 이중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 카세티는 계보학적인 관점에서 영화가 아닌 것에서도 투사/방어, 즉 관객인 우리를 스크린 속 세계와 연결하면서도 분리하는 이중의 경험이 나타난 역사적 사례가 있음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영화-이전(pre-cinema)의 시기에 해당하는 판타스마고리아는 숨겨진 영사기의 빛을 통해 죽은 자의 이미지를 안전하게 바라보는 경험을 제공한 경우이다. 그리고 영화-이후(post-cinema)의 시기에 해당하는 화상 채팅과 같은 오늘날의 디지털 버블은 타인과의 접촉 없이 실시간으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경험을 제공하는 경우이다. 각각의 매체적 경험은 극장과 스크린을 매개로 여기와 저기의 분리와 연결을 동시에 가능하게 만드는 영화적 경험과 친연성을 갖는다. 카세티는 이러한 계보학적 접근을 통해서 영화의 탄생과 발전이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안식처를 갖길 바라는 대중의 심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재차 강조한다. 그러한 영화적 경험 속에서 극장은 현실의 충격을 방어하기 위한 대피소로, 스크린은 현실에 대한 모의실험을 매개하는 장치로, 영화 이미지는 현실에 대한 예방주사로 존재한다. 만약, 카세티가 말하는 영화적 경험의 기원적, 본질적, 근원적 속성이 관객의 실천과 함께 역사적으로 회귀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오늘날 제기되는 극장의 위기론이 지나친 기우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설령 극장이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더라도 극장의 경험은 유령처럼 우리에게 상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극장이 없는 자리에서도 극장은 유령처럼 나타나 관객인 우리의 귀에 대고 다음과 같이 속삭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여전히 영화적이라고. 이도훈(영화평론가) l 대학에서 미디어, 대중문화, 영화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 느리게 보고, 느리게 쓰지만, 꾸준히 영화와 관련된 비평과 연구를 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단독 저서 『이방인들의 영화 : 한국 독립영화가 세상과 마주하는 방식』(2023) 집필, 독립영화, 에세이영화, 포스트-시네마 등과 관련된 학술 논문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