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
- 감독
- 윤성근
- 제작년도
- 2009
- 출연
- 류강국, 서창수, 최원준, 김동찬
< 춘천, 춘천 >은 겹쳐진 표제어의 꼴이 말해주는 것처럼 두 개의 춘천에 관한 이중구조의 영화이다. 장우진이 묘사한 미시 우주는 과거를 그리워하는 사람과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의 교차를 매개하여 우연과 시간의 관계를 묵상하면서 인간 상호작용의 저류(低流)를 지도 그린다. 플롯은 세상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으려는 사람들에 관한 두 갈래 내러티브를 따라 평행하게 진행한다. 느릿한 페이드(fade)로 화면이 열리면 기차 안에서 한 청년(우지현)이 옆에 앉은 중년의 남녀(양흥주, 이세랑)가 나누는 대화를 엿듣고 있다. 그들의 목적지는 서울 동쪽에 있는 도시 춘천이다. 여행자의 행색이 완연한 중년 커플에 비해 청년의 차림새는 어딘지 헐거워 보인다. 비좁은 의자를 나눠 앉은 청년과 중년 커플 사이를 쇠기둥이 단호하게 가르고 서 있다. 프레임을 양분하는 쇠기둥이 접는 면을 이루듯 플롯의 전반부는 지현, 후반부는 흥주의 세랑을 따라 두 개의 여로를 제시한다. 나란한 서사 라인을 연결하는 이박삼일 동안의 두 조각 모음은 캐릭터의 병렬 경험을 따라서 흘러간다. 그렇다면 이 둘은 어느 지점에서 서로 엮이는가? <춘천, 춘천>의 시각 스타일은 미니멀리스트의 방식이다.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고 간헐적으로만 패닝하며 움직이는 캐릭터들을 따라 트래킹하지 않는다. 단순한 구도의 1인 또는 2인 쇼트에 의존하는 이러한 스타일은 디테일에 집중하게 하고 캐릭터 행위의 미세한 변화를 새기게 하며 이런 진부한 스토리를 보고 있는 이유에 대해 계속 사고하게 한다. 서사적으로는 두 개의 시간 층위를 겹치면서 이야기의 주름을 만든다.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한 지현이 불안에 대처하기 위해 방랑하는 행장기 다음에 흥주와 세랑의 여정이 포개진다. 두 경로는 모두 고요한 휴양 도시의 지형도 위에서 펼쳐지는데 단지 그것만이 공통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저들의 우주는 근거리의 좌표 상에 그려진다. 일자리를 얻어 서울로 향하는 동향(同鄕) 친구와 춘천역 에스컬레이터에서 교차한 지현은 그날 밤 구직 면접에서 탈락했다는 통보을 받고 크게 낙담한다. 다음 날 이 도시를 대표하는 마라톤 경기의 출발선에 서 비틀거리던 지현은 페리를 타고 호수를 건너 청평사에서 기원을 추정하기 힘든 기도를 올린다. 정처 없이 떠돌던 청년의 발걸음은 친구 어머니가 운영하는 식당 평상에서의 넋두리를 지나 다음 날 아침 페리호 위에서 종료된다. 흥주와 세랑의 이동 경로는 지현의 꼬리를 밟는다. 저렴한 모텔 방이 모두 소진되어 비싼 숙소에 든 두 사람은 한 방에 묵게 된다. 다음 날 아침, 이번에는 마라톤 경기의 결승점에서 북적대는 인파들 사이를 빠져나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식당의 야외 테이블에서 식사를 한다. 어색하고 썰렁한 식사를 마친 세랑은 23년 전에도 이곳에 들러 산채비빔밤을 먹었는데 그때도 맛은 별로였다고 회고한다. 페리를 타고 청평사에 들어가 세랑은 절을 하고 흥주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늦은 오후 절에서 나온 두 사람은 소박한 식당에 앉아 낮술을 마신다. 다음 날 아침 안개 낀 호수 기슭의 잿빛 풍경을 보고 상념에 빠진 그들은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점진적으로 분리된다. 캐릭터의 묘사는 섬세하고 상황의 전개는 느슨한 <춘천, 춘천>은 진정한 삶이 어떻게 경험되는지 보여줌으로써 그것이 항상 사이에 끼인 과정임을 깨닫도록 한다. 이 일상의 휴먼 드라마는 모든 영화적 감각이 시간의 흐름과 사소한 제스처, 빛의 변화에 맞춰져 있다. 영화의 진가는 시각적 표현, 소리, 우연한 마주침에 있으므로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훼손될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인간들이 상호작용하는 장소로서 공간을 새롭게 인식하는 두 개의 롱테이크 신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먼저 취업에 실패하여 한껏 울적해진 지현이 에스컬레이터에서 스친 고향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노래를 불러 달라고 조르는 밤의 정경을 묘사한 신이다. 후회와 자책, 망연함이 뒤섞이는 10분의 지속 시간 동안 우리는 천천히 무너지는 청년을 지켜본다. 음악을 그만두고 서울에 취직자리를 얻은 친구가 불러주는 애절한 노래의 마지막 음이 밤공기를 가르고 떠오를 때까지 지현은 숨을 참는 것 같다. 두 번째 롱테이크 신은 아마도 지현이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식당에서 막걸리와 파전, 전골을 놓고 나누는 흥주와 세랑의 대화이다. 카메라가 거의 움직이지 않는 까닭에 우리는 머뭇거리는 저들의 대화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이 진부해 보이는 시간의 길고 유동적인 흐름은 얇은 비닐 가림막 뒤에서의 조용한 대화를 보여줄 뿐이다. 비닐 가림막 너머에 있는 태양이 구름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오기를 반복하는 동안 카메라는 두 사람의 과거를 회고하고 서로에게 마음을 여는, 서툴고 더듬거리는 말들을 수록한다. 주변에 떨어지는 빛의 명암은 그들의 변화하는 감정에 따라 황금빛에서 어두운 그늘로 수시로 바뀐다. 변화하는 빛과 서늘한 바람 소리, 시간의 흔적이 그대로 기록된 이 신의 도입부에는 사마귀도 등장한다. 흥주는 사마귀와 방아깨비의 차이를 설명하고, 가을이 더 깊어지면 사마귀도 색깔이 낙엽 색깔처럼 변해 천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고 이야기한다.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듯, 세랑은 어린 시절 몸에 사마귀가 났을 때 사마귀가 그걸 먹어주면 없어진다고 했던 속설이 진짜인지를 흥주에게 묻는다. 흥주는 사마귀는 몰라도 잠자리를 사마귀에 갖다 대면 그걸 물어뜯기는 했었노라고 경험의 차이를 이야기한다. 이런 식의 한담과 그들 각자가 과거에 다른 연인과 춘천을 방문했던 기억을 나누는 동안 사마귀는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던 흥주는 세랑이 앉은 쪽으로 자리를 옮겨 그녀의 옷에 붙어있던 사마귀를 쫓고, 어색한 두 사람을 한 자리에 나란히 앉도록 한 사마귀는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진다. 이 기우뚱한 구도 안에 세랑-흥주-사마귀가 나란히 놓인 형상은 춘천행 기차 안에서 쇠기둥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았던 세 여행자를 떠올리게 한다. 무려 12분이 넘는 시간 동안 인물들이 자신을 발견하는 무성한 풍경들을 천천히 축적하는 과정은 시간에 대한 감각과 미물(微物)에 투영된 복잡한 감정의 흐름을 전달한다. 평행 우주의 다른 좌표에서 지현은 청평사를 내려오는 길바닥 위에 죽어 있는 사마귀를 본 적이 있다. 사마귀는 어떻게 거기에 나타날 수 있었을까? 영화를 보는 사람들 모두가 장면의 비밀에 대해 알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속 시간의 무게를 탑재한 이 장면들은 빛의 소멸, 미묘하게 반향하는 두 쌍, 투명함의 감각을 위해 시간의 드라마를 변환한다. 과거의 유령, 잃어버린 연결과 놓친 기회가 두 부분을 맴돌며 애잔한 사슬로 청년과 중년을 엮는다. <춘천, 춘천>은 일상적인 장소와 날씨, 빛의 기록이자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그 시간을 통과한 인간과 자연에 관한 유려한 미니어처이다. 장우진은 풍부한 특성화와 미적 감성을 통해 세계의 복잡성을 추론하게 한다. 우리의 삶이 곧게 뻗은 직선이 아니라 구불구불한 곡선이며 때로는 이미 지나갔던 길의 되밟기라는 것을 이 영화는 이야기한다. 내러티브를 형성하는 반복된 말과 사물, 우연한 만남, 이상한 재조합, 전화 통화, 절, 마라톤, 사마귀는 내러티브의 체계 위에서 진동한다. 형식적으로 흥미로운 장우진의 기하학적 플롯은 이중구조와 심리적 묵시라는 수단을 흡수하여 스토리텔링을 해석하는 관객들에게 복합적인 층위를 상상하도록 한다. 정보를 많이 제공하지 않으면서 한 번의 몸짓이나 이미지에 평생의 후회를 담는 이 캐릭터들은 과거를 몇 번이나 회상해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완전히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생생한 계절의 톤에서 안개 낀 회색으로 반복적으로 흔들리는 이야기는 화장실 앞에서 초조하게 서성대는 카메라로 모호한 이중 결말을 이룬다. 표면적으로는 겸손하면서도 은근하게 야심에 찬 장우진의 연출은 세부 사항, 반복 및 후속 보기를 의미 있게 만드는 내적 운율을 통제하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작지만 결정적인 순간을 제시한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덜어냄으로써 남아있는 것들 안에 뉘앙스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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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 풍경과 친절한 예의 한낮의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길가 한편의 나무 그늘 아래 귀가 잘 안 들리는 할머니가 농작물을 작은 소쿠리에 담아 팔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는 길목에서 할머니는 맹목적일 정도로 성실하게 자리를 지킨다. 매일 늦은 오후 퇴근해 자전거를 타고 동생이 있는 집에 돌아가는 계란장수 청년은 말도 없이 비닐봉투에 계란 다섯 개를 담아 할머니에게 주고 떠난다. 눈이 부시도록 쨍한 연두 빛 논밭을 가르며 달려가는 자전거 위로 분홍과 연보라가 섞인 노을이 하늘에 스며든다. 홍의정 감독의 첫 장편영화 < 소리도 없이 >는 인스타그램의 여행 포스팅에 등장할 법한 무해하고 환상적인 풍경을 오프닝의 시체 처리 장면 바로 다음에 붙인다. 시골 장터의 평범한 계란 장수처럼 보였던 창복(유재명)과 태인(유아인)은 조직 폭력배들에게 고문과 살인을 위한 장소를 제공하고 깔끔하게 시체처리까지 해주는 사업장을 운영 중이다. 이들의 일은 공유오피스 대여사업처럼 일상적이고 체계화되어 있다. 꼼꼼하게 우비, 고무장갑, 위생모자를 착용하던 창복은 자신이 입은 노란색 우비가 태인이 어린 시절 입던 것이라며 회상에 젖기까지 한다. 때리는 사람의 신장에 맞춰 사람을 매달고, 피가 묻지 않게 겉옷을 보관해주고, 바닥에 넓게 비닐을 깔아주는 작업과정은 전문적이고 분업화되어있다. 이들은 서비스 정신이 투철한 업계의 프로다. 하지만 창복과 태인은 왜 그 사람이 납치되어 살해당하는지 절대 묻지도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잠시 그 사람의 처지를 동정하고 안타까워할 수는 있어도 거기까지이다. 곧 살해당할 그는 조립라인 위의 처리해야할 일거리에 불과하다. 선과 악,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은 그들의 몫이 아니다. 폭력과 살인의 끄트머리에서 포장과 폐기를 담당하는 창복과 태인은 스스로를 악인이라 생각지 않는다. 특히 창복은 죄를 사해줄 것이라 믿는 다종다양한 종교에 기대 죄책감을 가볍게 털어 버리고, 근면성실과 겸손을 강조하며 지루한 충고를 쏟아내고, 소소한 배려와 선행을 베풀며 자신을 일상을 살아가는 소시민이라 믿는다. 창복은 ‘다 너를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이 모든 것은 기복신앙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한 행동이다. 태인은 불만이 있어 보이지만 창복의 명령을 거스르지 않는다. 태인은 과거 어느 한 시점에서 누구도 그의 의견을 원하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는 마지막 ‘판단’을 내린 후 생각을 멈춰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는 더 이상 소통하기를 거부한다. 창복과 태인은 가능한 다른 이들의 삶에 얽히지 않으며 그들의 세계를 최대한 축소하고 경량화한다. 그들의 삶에 타인은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교류하고 돈 벌며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바로 친절과 예의이다. 이 영화에서는 언뜻 악인과 선인의 경계가 모호해 보인다. 드러난 행위만 보면 모두가 성실하게 자기 일 잘 하고 예의 바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기분을 거스르지 않는 예의바른 태도가 도덕과 윤리를 대치한다. 그들은 꼬박꼬박 ‘선생님’ ‘실장님’ ‘부장님’이라 부르며 서로를 높이는 호칭을 붙이고 존대를 한다. 일이 끝나면 ‘수고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같은 말도 잊지 않는다. 조직 폭력배 실장은 태인이 말을 안(못) 한다고 하자 입을 크게 벌리고 천천히 말하며 입술을 읽게 하는 ‘배려’를 베푼다. 유괴 아동을 인계한 범죄자들은 아이들이 잠시라도 편하게 머물도록 알록달록한 가구와 장난감이 있는 놀이방을 갖춰둔다. 하지만 이 모든 친절과 예의범절, 상대방을 배려하는 ‘선한’ 행위에 실제로 타인의 의향과 행위의 맥락은 빠져있다. 그들이 공들여 제공하는 태도와 형식은 자기 목적과 이익을 위한 것이다. <소리도 없이>는 오프닝에서 상세한 시체처리 과정과 목가적인 농촌풍경을 붙여, 형식과 내용의 뒤틀어짐, 순간적인 기분과 지속적인 정동의 불일치, 사건의 맥락과 단발적 행동의 모순이 팽배한 동시대성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앞서 언급한 창복의 ‘노란색 우비’ 대사는 둘이 오래 함께 일한 사이좋은 직장 선후배나 유사 부자관계인 것처럼 들리지만, 곱씹어보면 창복이 태인을 어릴 때부터 착취해왔다는 사실을 가늠해볼 수 있다. 혹은 창복이 태인을 납치한 걸 수도 있다. 창복과 태인의 관계에서 태인은 분명 피해자다. 토끼의 기지와 별주부의 어리숙함 홍의정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 때 <별주부전>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힌 바 있다. <별주부전>에서 별주부는 용왕의 병 치료에 쓸 약으로 토끼의 간을 구하기 위해 뭍으로 올라온다. 별주부는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겠다며 수궁으로 토끼를 유인하지만, 토끼는 육지에 간을 두고 왔다는 기지를 발휘해 목숨을 구한다. <소리도 없이>에서 태인은 별주부이고 유괴 아동 초희(문승아)가 토끼다. 납치된 초희는 토끼 가면까지 쓰고 있다. 창복과 태인은 유괴조차 자기들의 의지로 행하지 않는다. 영화는 ‘의도치 않게’, ‘엉겁결에’를 강조한다. 수동성의 강조는 가해자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현실에서 ‘어쩔 수 없었다, 의도하지 않았다, 피치 못했다’는 모두 가해자들의 반복되는 전형적인 대사가 아닌가? 처음에는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진행되는 사건 속에서 선택의 계기는 늘 존재했다. 분명 피해가 발생했고 돈을 받아내기 위한 인질이 된 초희는 그 피해자이다. 그런데 가해자가 분명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질적인 세계의 초희가 태인의 삶의 반경에 들어오게 되면서 태인은 처음으로 스스로 생각하게 된다. 피해자인 초희가 역으로 자신과 동생을 도와주는 행동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초희는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눈치를 보고 창복과 태인의 기분을 거스르려 하지 않는다. 난장판인 집안을 치우고 태인의 동생 문주를 씻기고 식사예절을 가르친다. 방치되어있던 문주는 교육을 잘 받은 중산층 가족의 초희를 만나 다른 세계를 경험한다. 태인조차도 이러한 초희에게 마음을 연다. 마음의 동요는 타인을 인지하게 하고 그것은 생각과 판단을 요청한다. 별주부 역시 창복과 태인처럼 자기 의지보다는 용왕에 대한 충심과 자기 관직의 수호를 위해 움직인다. 이 우화에서 토끼는 낯선 세계에서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상황을 판단한다. 뭍에서도 토끼는 약자이기 때문에 늘 포식자들의 눈치를 보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기위해선 머리가 좋아야 한다. 용왕이 간을 원할 때 발휘한 기지는 갑자기 생겨난 능력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아들만 귀하게 여기는 집안에서 차별을 받으며 자랐을 초희는 부모의 맘에 들기 위해 늘 가면을 쓰고 자신의 속내를 숨기며 살아왔을 것이다. 태인의 집에서 초희가 한 행동은 토끼의 기지와 유사하다. 그렇다고 태인과 문주, 부모를 향한 초희의 마음이 완전히 가짜인 것은 아니다. 그들 사이의 감정의 교류는 순간적으로 진짜일 수 있다. 태인이 초희를 장기밀매업자에게 보냈지만 마음을 바꿔 구한 것, 초희가 무서울까봐 화장실 밖에서 손뼉을 쳐준 것, 유괴와 몸값 요구에 참여했지만 가족들에게 돌려보낸 것도 진짜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개별적 선행이 애초의 가해를 뒤집을 순 없다. 반복해 말하지만 태인은 유괴범이고 가해자이며, 초희는 유괴된 아동이며 피해자이다. 영화는 이 메시지를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태인을 약자이자 피해자로 만드는 창복을 제거한다. 태인의 선택을 대리하는 창복이 사라지면서 태인은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게 된다. 그 순간에 태인은 조직폭력배 실장이 죽으면서 남기고 간 양복을 입는다. 양복은 좁디좁은 자신의 세계 밖의 다른 삶을 상징한다. 그러나 선악을 판단하고 도덕과 가치를 사유하는 주체적 삶은 그리 쉽지 않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태인은 자신의 선택으로 가장 선한 일을 했다고 판단한 바로 그 순간, 자신이 유괴범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다. 홍의정 감독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피해 생존자이자 머리를 잘 쓰는 주체적인 토끼보다는 어리숙하고 용왕의 말에 복종하는 수동적인 별주부에 감정이입을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별주부는 용왕만큼은 아니지만 토끼를 납치한 가해자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초희는 가해자를 정확하게 지목하고 호명한다. 태인은 그 지명이 힘에 겨운 듯 도망치며 동경했던 ‘사유하는 주체’의 양복을 벗어 던진다. 도덕이 사라진 시대의 알레고리 발터 벤야민은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낭만주의 예술에서 상징에 비해 폄하 당하던 수사인 알레고리를 재개념화하고 조명한다. 벤야민에 따르면 상징은 고대 그리스 조각처럼 순간적으로 총체성을 이루며 명징하고 스스로 완결성을 갖는 아름다운 기호이다. 반면 알레고리는 우연적이고 무정형적이며 여러 시간적 계기 속에서 다의적으로 해석되고 역사적 번역과 파편적 몽타주의 작동을 요구한다. 알레고리에서 의미는 은폐되어있음으로 해서 소통의 (불)가능성과 다의성이라는 의미작용 그 자체를 노출시킨다. <소리도 없이>는 <별주부전>처럼 피해와 가해, 즉 도덕의 알레고리이다. 벤야민이 재개념화한 알레고리처럼 현대 사회에서 피해와 개해의 문제는 명징하지 않으며 복잡하다. 피해자성과 가해자성이라는 통일된 정형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 위치도 다중적이고 뒤집어질 수 있다. 피해자는 주체적이고 똑똑할 수 있다. 가해자는 소소한 선행을 베풀고 예의바르거나 어리숙할 수 있다. 또한 한 사건에서 가해자인 이가 다른 사건에서는 피해자일 수 있다. 게다가 현대의 소비주의 사회에서 가치와 형식은 쉽게 뒤집어진다. 무해한 아름다운 풍경, 선행, 예의 이런 것들은 도덕적 판단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모두가 고객이고 모든 행위가 ‘손해 보지 않으려는’ 거래일뿐인 시대에 단순히 서비스의 형식일 뿐이다. ‘착한 가격’, ‘착한 소비’처럼 말이다. 역으로 사람은 손쉽게 상품이 된다. 유괴범과 장기밀매업자들의 대화에서 아이들은 고객 만족을 위해 품질을 유지해야 하는 거래 품목일 뿐이다. 도덕이 사라진 시대, 피해자와 가해자의 정형화된 모습도 부재하고 그 위치성도 복합적인 시대에, 알레고리의 서사는 그 불일치와 혼란을 드러낸다. 그러나 알레고리가 각 사건에 분명히 존재하는 피해와 가해 사실을 지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알레고리는 피해와 가해가 발생하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분명히 존재함에도, 피해자와 가해자의 양상이 기대한 바와 다르다며 혼란스러워하는 현실을 드러낸다. 고전 서사 <별주부전>이 토끼의 ‘간계’와 별주부의 ‘충심과 어리숙함’을 강조하며 순간적으로 감정이입을 뒤집지만 납치 사건에서 피해자는 토끼요 가해자는 별주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피해와 가해의 서사와 캐릭터는 복잡하고 기대를 벗어나 혼란스럽게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피해자와 가해자 혹은 피해와 가해 사실을 규정하고 밝혀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양복의 무게 태인은 양복을 입으면서 처음으로 생각하는 주체가 된다. 그의 삶에서 이 계기는 무엇을 만들 것인가. 그는 사유와 판단의 주체로서 가해자임을 받아들인 것인가, 아니면 사유 없는 행동을 수행하며 테이프에 녹음된 기도소리에 기대어 살아갈 것인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즉석 사진의 인화과정처럼 검은 무지 화면 이후 서서히 드러나는 ‘소리도 없이’라는 제목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영화는 태인처럼 뒤늦게 자신을 호명한다. 자신도 알지 못하게, 의도치 않게 ‘괴물’이 된 태인은 사유를 통해 대면한 자신의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이 영화의 처음 제목은 ‘소리도 없이 괴물이 된다’였다). 타이틀씬 이후 영화는 창복, 태인, 초희, 문주가 따뜻한 햇살 아래 즉석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멜랑콜리한 이 사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초희가 부모에게 보낼 사진을 만들기 위해 억지로 슬퍼 보이는 표정을 지었던 사진과 비교해 무엇이 더 진실인가. 둘 다 진실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다. 저 순간의 넷은 즐거웠지만 그렇다고 초희가 유괴된 아동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이미지는 상징처럼 순간적이다. 순간을 포착한 스냅 사진 이미지는 알레고리 속에서 총체화를 방해하는 역할을 할 때 비로소 의미작용이 가능해진다. 말하기를 멈췄던 태인은 그 스스로가 소통불가능성 시대 의미작용의 알레고리였다. 사유를 시작하고 가해자가 스스로 가해자임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소통의 시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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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은기 (獨銀麒, 1910 ~ ? )는 출연작의 수에 비하여 전기적인 사실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배우다. 일제의 영화인 등록 당시 본명은 ‘김영식(金永植)’으로 1941년 현재 31세라고 밝힌 일이 있으나, 중학 시절 한 방에서 뒹굴던 친구 김성칠(1913~1951)은 그의 본명이 ‘김춘득(金春得)’이라고 적고 있다.(?역사 앞에서?, 창작과비평사, 1993) 대구 출신인 독은기는 1930년대 전반기 대구를 거점으로 했던 이규환의 영화 제작을 돕다가 < 그 후의 이도령 >(1936)을 통해 연기자로 데뷔했다. 이규환 은 < 바다야 말하라 >(1935)를 기획할 때 사재를 털어 제작비를 댔던 ‘김영식 소년’에게 토지 문서를 다시 찾아주고자 <그 후의 이도령>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김영식 소년’이 독은기와 동일인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김영식 소년’이 독은기 든 아니든, 독은기의 영화 인생에서 이규환 은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독은기의 출세작 역시 이규환이 연출한 < 나그네 >다. 이규환의 대표작이자 1930년대 후반 조선영화의 가작인 이 영화에서 그는 ‘복룡’(왕평 분) 가족을 비극으로 몰고 가는 ‘삼수’로 출연했다. 선 굵은 외모와 신인답지 않은 자연스러운 연기로 “성격적인 역에 꼭 맞는 타입”(남궁옥, ?조선영화의 최고봉 <나그네>를 보고?, ?매일신보?, 1937. 4. 25.)이라는 평을 들으며 토키 시대 주목할 만한 배우가 된 그는 성봉영화원의 두 번째 작품인 < 군용열차 >(1938)에도 출연한다. 독은기는 군용열차 기관사 ‘점용’(왕평 분)의 친구 ‘원진’을 맡았다. 기생인 애인의 몸값을 구하기 위해 스파이에게 군용열차의 정보를 누설하고, 그 죄책감 때문에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는 ‘원진’의 서사는 이 영화를 끌어가는 중요한 축이었다. 이후 성봉영화원을 흡수한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제작한 < 새 출발 >(1939)과 협동예술영화사가 제작한 < 창공(‘돌쇠’) >(1941)까지, 이규환과 독은기의 인연은 이어졌다. 그러나 1942년 민간영화사들을 통폐합한 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가 출범하면서 그들의 영화적 교유는 일단 중단된다. 법인 조영에 가입하지 않았던 이규환 은 만주영화협회에 조선영화부를 설립하려다 좌절하고 귀국 후 연극 단체에서 활동했으며, 전쟁 막바지에는 비행장에서 징용 생활을 했다. 반면, 법인 조영(朝映)의 연기부에 입사했던 독은기 는 < 젊은 모습 >(1943), < 조선해협 >(1943), < 병정님 >(1944), < 사랑과 맹세 >(1945) 등 여러 편의 선전영화에 출연하며 배우로서의 삶을 이어갔다. 그가 맡았던 <젊은 모습>의 ‘금의환향한 지원병’, <사랑과 맹세>의 ‘전사한 지원병’은 늠름한 자태로 식민지 조선의 ‘아우’들에게 전쟁에 나가라고 부추기는 역할이었다. 또 평범한 농촌 출신 지원병 야스모토 에이치(康本瑛一)로 분한 <병정님>에서는 가장 계몽적인 발화자로서 ‘병영은 군인의 가정’이니, 걱정 말고 입대하라고 권유했다. 법인 조영 시대 독은기는 배우로서 가장 활력적인 시기를 보냈지만, 그가 맡았던 배역들은 식민지 청년들이 왜 제국주의 전쟁에 동원되어야 하는지 추호의 의심도 허용하지 않는 ‘건강하고, 명랑한’, 평면적인 인물들이었다. 법인 조영에서의 활동은 해방 후 독은기 의 삶에 족쇄가 되었다. < 자유만세 >(1946)에서 민족을 배반하고 일제 경찰의 사찰주임이 된 ‘남부’로 출연했던 것처럼, 일제의 선전영화 속 긍정적인 인물은 한 순간에 ‘매국노’가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조선의 ‘아우’들이 우러르는 ‘형’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해방 후의 격동 속에서 그는 좌익 계열 영화인들의 조선영화동맹에 참여했다가 전향했지만, 남한에서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한국전쟁 중 월북하기까지 그는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가난과 병마에 시달린 것은 물론, 식민지 말기의 ‘친일’과 해방 직후 ‘좌익’ 경력으로 남한에서의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한편, 그를 영화로 이끌었던 이규환 은 해방 후 조선영화동맹에 대항해 조선영화감독구락부를 결성했고, < 민족의 새벽 >(1947), < 갈매기 >(1948) 등을 연출하면서 다음 세대 감독들을 길러냈다. 독은기는 그와 함께 할 수 없었다. 재기를 꿈꾸었던 <하얀 쪽배>가 전쟁으로 중단되고, 국군의 서울 수복을 앞두고 있었던 1950년 9월 26일 늦은 오후, 독은기 는 커다란 보따리를 짊어지고 역사학자 김성칠의 집을 마지막으로 찾았다. ‘친일’에서 ‘좌익’으로, ‘전향자’에서 ‘월북자’로, 불운한 시대 전향을 거듭해야 했던 배우 독은기의 뒷모습을 옛친구는 몇 줄의 일기로 남겼다. “나는 오늘 저녁 한 사람의 양심적인 예술가를 또 북으로 떠나보냄에 있어 그가 이 몇 해 동안 병고와 생활난과 고문의 위협에 허덕이었음을 생각하고 이 땅의 문화 정책이 너무 빈약함을 통탄하여 마지않는다.” / 글: 이화진 (한국영화사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