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늪의 참개구리(인형영화)
- 감독
- 리인철, 손종권
- 제작년도
- 1999
<그래도, 사랑해.> 중 /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1년간 관객을 찾은 영화들을 필자의 시선으로 돌아보며, 올 한 해 영화가 불러온 고민들을 정리합니다. “흔히 문화의 역할이란 지하철역 구내에 보다 세련된 의미있는 장식물이나 걸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우리네 삶에서 문화란 그런 작은 디테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만,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보다 본질적인 것, 즉 사람과 사람 사이, 집단과 집단 사이의 소통의 형식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 그것이 곧 문화의 역할입니다.” - 이창동 , “처음 드리는 인사말”, 문화체육관광부 열린장관실, 2003년 3월 14일 영진위의 발표에 따르면 올해는 1,000만 관객을 기록한 영화가 단 한 편도 없으며, 2004년 이래 최초로 연간 관객 수 1억 명 시대가 붕괴한 해다. 그야말로 한국영화의 종말 ...... 물론 이건 시장 얘기다. 업계에 발을 담그지 않은 나로서는, 그저 인상적으로 보았던 작품들을 주루룩 고른 다음, 개별 작품들로부터 몇몇 자질을 선별해 자율적으로 테마화한 뒤, 안온하게 정리해도 그만일 것이다. 그렇지만 비행기 타본 기억이 까마득한 토종 한국인이자, 비평가 이전에 관객일 수밖에 없는 나는 OTT가 새롭지 않은 이 시기에도 어두운 극장에서 한국을 배경으로 한국인들이 한국어로 말하고 움직이며 살아가는 모양새를 자막 없이 보고 듣는 일상의 즐거움을 놓치고 싶지 않다(애국자 아닙니다). 통계를 근거로 한 종합적인 분석과 전망이라면 이미 숱한 기사와 글이 많으니, 엄격한 틀은 내려놓되 몇몇 영화 안팎으로 사적인 근심과 관심을 조금 얹고 싶다. 올해의 한국영화들을 보며 헛웃음이 나거나 화가 나는 경우는 있었지만, 아니 많았지만,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보았던 영화는 김준석 의 < 그래도, 사랑해. > 뿐이다. 이 영화는 키아로스타미의 향기를 풍기며 사랑스럽고 여유롭게 걷는다. 올해 한국영화들이 내게 신통치 않았던 것은, 대개 상업영화라면 지독할 정도의 장르적 콘셉트가 부여되어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부담스러웠기 때문이고, 한편으로 독립영화판에서는 형식적 장치에 과도하게 의존하거나 반대로 소재에 기대어 특정 환경에 놓인 인물의 처지를 강조하며 관객과 스크린 사이에 두툼한 방벽을 세웠기 때문이다. 최소한 내가 아는 선에서 <그래도, 사랑해.>는 2025년의 한국영화들 중 현실과 영화가 자연스레 길항할 수 있으며, 그 사진적 이미지에 기반한 20세기적 시청각 경험의 아름다움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한 거의 독보적인 사례다. 게다가 이 영화의 세계는 내가 쓰는 언어와 내가 갈 수 있는 장소와 내가 어쩌면 만날 수 있을 법한 사람들에 의해 전달되기에 친밀함마저 느끼게 된다. 지금 한국영화에 필요한 것은 난장과 자극이 아니라 이런 기복 없는 흐뭇함과 상쾌함이 아닐까? 물론 <이혼숙려캠프>(JTBC)가 인기 좋은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마찬가지로 부부가 주인공인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욕지거리와 패악질의 향연이 아니라 우리네 삶 여기저기에 놓인 일상적 규모의 상황과 마음들이다. 관객은 우리를 닮은 영화 속 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보며 미소 지을 권리가 있다. <그래도, 사랑해.> 중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 ...... 돌아보면 올해 세상은 그리 돌아가지 않았던 것 같다. 연초 우리네 봄날의 콘텐츠였던 ChatGPT 지브리풍 이미지 생성에서부터 10월 말 젠슨 황의 깐부치킨 회동에 이르기까지, 2025년을 지배한 키워드가 있다면 어딜 가도 들려오는 AI일 것이다. 영화계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영화제에서는 AI 관련 이벤트와 컨퍼런스가 열렸고, 극장가에도 적극적으로 AI를 활용한 시험작 < 중간계 >가 개봉하기도 했다. 하지만 창작 과정에서의 실제 사용 여부와 관계없이, 올해의 한국영화들을 통과하며 AI 프롬프트의 예제본처럼 뻣뻣한 인간형이 여기저기서 출몰했다고 느낀다. 그 대표 주자라고 한다면, 초기에는 대안적 움직임으로 출발했으나 오늘날 상업영화와 함께 또 다른 제도로 딱딱하게 굳어진 독립영화라는 포지션을 기회주의적으로 활용한 연상호의 < 얼굴 >이다(이 영화는 KOBIS 상에서 ‘일반영화’로 분류된다). 2억의 제작비로 만들어졌다는 이 가성비 좋은 저예산 영화 속 유명 배우들의 몸짓과 얼굴에서 유연함과 여유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데, 기실 생성형 AI 이미지에 가까운 그 1차원적 자질은 시장주의에 입각하여 경제적 효율성의 늪에 빠진 동시대 이미지의 사멸적 풍경을 저절로 돌아보게 만든다. < 좀비딸 >, < 야당 >, < 히트맨2 >, < 보스 >, < 승부 > ...... 성급히 땜질하듯 만들어진 올해의 몇몇 한국영화들은 창작자의 존재 유무 자체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이야기의 유기적인 흐름은 수시로 중단되고, 유튜브 숏츠 시대에 걸맞은 단발적 자극만이 연쇄적으로 나열되는 작중 내 세계에서 인물은 극단적으로 캐리커처화된다. 그들의 말과 행동은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자가 야단스럽게 선보이는 개인기 섹션의 한 토막처럼 위축되며 실재감을 완전히 상실한다. 이쯤 되면 실사는 그저 명목적 알리바이이며, 우리는 우연과 돌발의 가능성을 품은 사진적 이미지가 전면적으로 폐지된 AI 영화라는 미래를 이미 살고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올해의 수많은 애니메이션 작품들의 흥행권 진입은 그 무의식에 대한 반영일까? <중간계>, <얼굴>, <좀비딸>, <야당> 중 / 사진: 네이버 영화( 1 , 2 , 3 , 4 ) 그런가 하면 이제는 한국영화의 기성세대권으로 진입한 두 아버지, 봉준호 와 박찬욱 의 인물들은 중심을 잃고 허둥댄다는 느낌이다. < 미키 17 > 속 인물들에게는 슬랩스틱과 삑사리의 미학으로 불리던 봉준호의 미시적이고도 생활밀착적인 신체의 율동과 액션이 온데간데없으며, 메인 빌런은 느긋함을 갖추지 못한 채 무대에 오른 초보 스탠드업 코미디언처럼 독재자의 전형적 모델을 대문자적으로 모방하며 허우적거릴 뿐이다. 인물의 결심과 행동 전개로 극이 진행되는 < 어쩔수가없다 >는 서로 간섭을 일으키는 메인 플롯과 서브 플롯이 긴장의 끈을 풀어버리기 일쑤이며, 인물의 내면적 특질은 구체적으로 조성되기보다 외삽적으로 제시된다. 적어도 외연적으로는 리얼리즘을 표방했음에도 인물들의 욕망과 주관은 앙금처럼 애매하게 남겨지고, 다소 과장스럽게 발생하는 코미디와 요란한 촬영과 편집 너머로 연출자의 불안만이 느껴질 뿐이다. 두 편 모두 블랙코미디라는 장르를 내세우고 있지만, 웃지 못한 내가 감지한 것은 화면 너머에 있는 조급함이었다. 게다가 이례적이다 싶을 정도로 이들은 개봉 전후로 방송인에 가까운 일정을 소화하며, 온갖 유튜브 채널과 TV 프로그램에서 프로모션을 진행하지 않았던가. 개봉 이후 좋지 않은 평가로 인해 박찬욱 본인이 직접 자신의 영화를 해설하는 <알려줄 결심>이 제작된 것은 갈 데까지 가 버린 올해의 한국영화계를 요약하는 한 단면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 관객이 먼저 해야 할 일은 다른 무엇보다 이들을 ‘거장’으로 호명하는 일 아닐까? 왠지 무한히 재생되어 죽지 않는 복제 인간과 AI에게 대체될 위기에 놓인 인물이 이들 영화의 중심으로 설정된 것은 OTT가 스크린을 대체해가는, AI가 실사를 대체해가는 이 시기에 그저 우연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올해의 한국영화들 중 시선, 거리, 말투 등 대화의 미시적인 결이 생생히 살아있는 이재원 의 < 두 시간 >, 서울의 달동네 풍경과 오래된 골목을 주름진 노인들의 육체와 함께 화면에 담은 < 사람과 고기 >가 사사롭게 다가온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인지 모르겠다. <미키 17>, <어쩔수가없다>, <두 시간>, <사람과 고기> 중 사진: MUBI , 네이버 영화 , 전주국제영화제 , 네이버 영화 기술이 발전하고 정서가 침잠함에 따라 신체도 변화해간다. 두 편의 미국 블록버스터를 보면서도 그 무의식적 징후가 스크린에 투영된다고 느꼈다. 무엇보다 <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블러드라인 >. 서사적으로 두뇌의 작동을 철저히 둔화시킨 이 영화는 눈과 귀의 즐거움에 올인할 뿐, 가족영화라는 설정임에도 일말의 정서적 울림도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숏츠 시대에 걸맞은 무지성 블록버스터가 되었다. 이 영화를 함께 본 친구는 촌철살인으로 비평했다. “이 영화 속 사람들한테는 뼈가 없는 것 같다.” 그의 말마따나 일종의 지점토처럼 인체를 연성화하는 작업을 거쳐 리얼리티를 제거한 화면을 보며 관객은 스크린 속 사태와 전혀 연루되지 않은 채, 시원하게 깔깔댈 수 있다. 영화 속 인체는 연양갱이나 하리보 젤리보다도 말랑한 지방이인데, 이들은 거의 AI ASMR에서 엿볼 수 있는 액체괴물이나 필라델피아 크림치즈 비슷한 것이 되어 신나게 터지고 짓뭉개진다. 이에 반격하듯 아날로그 신체에 불굴의 책임의식을 강박적으로 수혈한 블록버스터 <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 >은 AI와 맞서는 에단 헌트, 아니 톰 크루즈의 눈물겨운 원 맨 쇼다. 여기서 그는 “세상을 구한다”라는 거창하지만 피상적 맥락 외의 사적인 욕망이나 목적이 제거되어 캐릭터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차력쇼의 단원이 된다. 이 영화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잠수함 신은 숏츠 시대에 훈시하듯 대사마저 소거한 채 느린 호흡을 가져가는데, 여기에는 에단이 대적해야 할 상대도 없으며, 그에 따른 액션영화의 장르적 쾌감도 불투명하다. 영화는 잠수복을 벗고 알몸으로 헤엄치는 톰 크루즈의 몸짓을 고요한 바다 배경과 조명으로 아름답게 치장하고, 팔다리를 태아의 형상처럼 구부려 ‘에단 헌트-톰 크루즈’라는 ‘인물-배우’를 거룩하게 비추지만, 어느 누구와도 합이 맞지 않는 듯한 이 영화 속 톰 크루즈는 마치 모든 것을 짊어지고 인간계를 떠나는 유령처럼 보인다. 시리즈 내내 “리얼한” 액션을 제 몸으로 수행해 온 그의 강박이 올해는 더욱 인상 깊게 다가왔다.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블러드라인> / 사진: IMDb , © 2025 Warner Bros. Entertainment Inc.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 중 / 사진: IMDb AI가 도래한 마당에 내가 떠올리는 리얼리즘은 이런 것이다. 그곳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얼마간의 심리적이고 물리적인 간격이 설정되는 세계이며, 실천적으로는 출퇴근길 과속과 욕설로 버스를 몰고 가는 어떤 중년 기사의 심통 맞은 얼굴을 떠올리며, 그의 깊게 팬 주름들 사이로 상상을 끼워보듯, 일상 속 적대와 부재, 거절을 맞대며 이해력과 상상력을 기르는 내면적 과정이 동반되는 장소다. 타자라는 낯섦과 불편함은 리얼리즘의 조건 중 하나였지만, 그것들이 편리함으로 제거되어가는 테크놀로지와 디스플레이의 시대에 리얼리즘은 이제 그 의미를 서서히 재정립해가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올해의 영화들 중 마이크 리의 < 내 말 좀 들어줘(Hard Truths) >가 딸려온다. 이 영화는 소통 불가와 심리적 불안이 일상화된 우리 시대의 수축된 시공을 에두르거나 외면하지 않고 길바닥과 노동자의 리얼리즘으로 정면 대결한다는 점에서 포스트 코로나 영화의 빛나는 사례가 되었다. 정답 없이 문제의 구체적인 양상만을 현미경처럼 충실히 제공하며 보는 이들의 마음을 감정적으로 내려치는 탓에, 마땅히 극장에 몸이 묶여 봐야 할 영화라는 고리타분한 생각이 들 정도다. 결말부 사각 프레임을 가득 채운 두 얼굴, 그들을 잇는 숏-역숏이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마음이 그렇게 된다. ...... 어쩌면 이건 다 옛날 얘기인지도 모르겠다. 일상 속 원격 만남과 딥페이크 범죄가 여전하고 이미지의 사실성이 의심받기 일쑤인 작금에, 인간의 얼굴이 신비와 기적을 발생시키는 특권적인 장소라던 벨라 발라즈의 말을 과연 언제까지 믿을 수 있을까? 그렇다. 지나치게 발전한 미래에서 한때의 리얼리즘은 환상이다. <내 말 좀 들어줘> 중 / 사진: IMDb 이광호(영화평론가) l 1996년생,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 주변을 오가고 싶다. 2018년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비평공모 당선. 반연간지 《크리틱b》, 월간 서비스 ‘ 비평의 편지 ’ 필진.
이야기는 현실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었던 엄청나게 많은 기억들 속에서 일부만 골라낸 이야기를 영화라고 한다면, 미처 이야기가 되지 못한 나머지 기억들은 기록영상 컬렉션 곳곳에 심드렁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되는대로 늘어놓아 보겠습니다. 지난 12월 24일에 공개된 ‘ 미국 NA II 소장 노획영상 컬렉션 ’ 준비 과정 중의 이모저모를 소개할까 한다. 이 컬렉션은 지난 2022년 한국영상자료원이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에 의뢰하여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문서고 2관(National Archives II, 이하 NA II)에서 수집과 동시에 연구까지 진행했던 1930~40년대 미군 노획필름 37편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미국 육군 G-2 정보참모부가 적국 정보 수집의 일환으로 제2차 세계대전 말과 6.25 전쟁 당시에 노획한 영상들이다. NA II에서는 ‘해외 노획 기록물’을 묶은 기록군 242(RG 242)에 ‘정보참모부 영화필름’ 시리즈(242-MID)와 ‘정보참모부 일본 관련 영화필름’ 시리즈(242-MID-J)로 분류, 관리되고 있다. 이 필름들은 대부분 선전선동을 위해 제작됐던 것으로서, 일본, 이탈리아, 소련, 북한이 어떤 논리와 방법으로 자신들의 체제를 정당화하고 비인도적인 침략 또는 경쟁국에 대한 흑색선전을 포장했는지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아무리 ‘격동의 현대사’라는 점잖은 표현을 쓰더라도 이 시대가 폭력과 착취의 시대였고 ‘줄을 잘못 서면’ 생존이 위협을 받을 수도 있었던 야만의 시대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런 혼란 속에서 파시스트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체제의 역량을 기울여 선전영상을 만들고 자신들의 세계관을 학습시키고자 했다. 그것이 허구든 실존하는 것이든, 진실이든 거짓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대중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불안정한 시대의 힘 없는 개인에게, ‘믿음’은 합리성보다 중요한 덕목이었다. 그래서 노획영상은 태생이 복잡하다. < 황도일본 >(아오키 타이스케, 1940)은 명분 없는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천년 전의 신화집 『일본서기』와 『고사기』를 대전제로 하여 허구 위에 허구를 중첩한다. ‘신의 자손이 신의 명령을 이행한다’라는 신화적 명제를 사실로 포장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창조해낸 개념들의 쓰나미로 보는 이를 압도하고자 했다. 파시즘 우방국 이탈리아는 자신들만의 세계관으로 일제의 침략, 아니 ‘문명의 회복을 위한 전진’에 찬사를 보냈다. 소련은 이러한 ‘제국주의, 파시즘으로부터 인민을 해방시킨 구원자 스탈린’의 이미지를 구축하면서 러시아 공산당 중심의 새로운 착취구조를 유토피아적 현실로 포장했다. 북한은 스탈린의 권위를 김일성 권력의 정당성의 근거로 덧씌웠고, 소련의 ‘만들어진 유토피아’가 담긴 영상을 수입하여 한국어 웅변을 곁들여 북한 각 지역에 ‘영사 폭격’했다. ‘통일’, ‘해방’, ‘자유민주주의’, ‘평화애호’ 등의 인도적 개념어들은 ‘선의의 친구’ 이미지를 만드는 도구로 의도적으로 수없이 사용됐고,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인플레이션의 늪에 빠졌다. 이와 같이 선전영상들이 대중 대상의 최면효과를 위해 사용한 전략, 그리고 제작 주체가 의도하지 않았던 맥락까지 포함하여 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모든 기록영상이 그렇듯이 당장은 쓸모없어 보이는 정보까지도 샅샅이 훑고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한 작업의 결과를 컬렉션 페이지의 자료집 에 수록했다. 기록영상 컬렉션에서 TMI는 ‘Too Much Information’이 아니라 덕목이다. 특히 이번 컬렉션은 잡다하게 아는 것은 많지만 제대로 아는 것은 많지 않은 AI 들과 함께 준비했다. 이들은 STT(sound to text - 채록), OCR(광학문자인식), 이미지 분류(유사이미지 검색), 번역, 레퍼런스 찾기, 자유로운 대화상대 역할로 투입됐다. 필자는 미국 드라마 <하우스>에서 하우스가 화이트보드 앞에 부하 의사들을 앉혀 놓고 희귀병 추리의 단서를 모으듯, 수개월 동안 허당 AI들로부터 힌트를 뽑아내고 경쟁시켰다. *주1 기만의 전문가들이 만든 영상을 착각의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분석한 셈이다. 이렇게 채굴한 TMI 몇 가지를 부록으로 덧붙인다. 부록 1. <동양의 전투>( Battaglia D'Oriente ): 사상이 맞춤법을 지배한다. 이 영상 은 중일전쟁기 중 1938년 10월에 있었던 일본의 중국 광저우 진격 과정을 이탈리아 영화사(ISTITUTO NAZIONALE L.U.C.E)가 이탈리아어 해설을 곁들여 제작한 것이다. NA II 카탈로그에는 ‘1939년에 송출됐다(...was broadcast)’라고 적혀 있다. 이때는 추축국들이 삼국동맹을 체결한 1940년 9월 이전 시점이다. 하지만 1937년에 이미 이탈리아는 독일-일본의 대 소련 방어를 위한 ‘방공협정’에 참가한 상태였다. 그러니,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일본의 천황제 파시즘을 옹호하여 간접적으로 자국민들에게 파시즘의 정당성을 설파할 목적으로 이런 영상을 제작하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무솔리니의 관영선전영화제작소였던 ‘L.U.C.E(루체)’가 영상에 ‘L.V.C.E.’로 표기되고 있는 것은 많이 이상하다. (좌) 도입부 #1 / (우) 도입부 #2 이에 대해 AI 하나가 오랜만에 실속 있는 의견을 주었다. 이탈리아 통일 이전부터 ‘로마’는 국민적 숭배의 대상이었다. 이탈리아 통일운동을 뜻하는 ‘리소르지멘토’는 ‘부흥, 부활’이라는 뜻이고, 그 지향점은 ‘위대한 로마’였다. 무솔리니는 로마의 이미지에 더욱 천착하여, ‘이전 시기의 부패한 로마’를 청산하고 고대 로마의 덕목과 정신을 이어받은 파시스트의 국가를 건설하는 ‘문명화 사명’론을 내세웠다. 그래서 이탈리아 파시즘은 철저하게 고대 로마의 신화적 상징을 사용하여 대중적 이미지를 조각했는데, *주2 이 영상 도입부의 독수리상, 고대 로마 묘비에 각인됐을 것만 같은 고전적 글씨체 같은 것들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 집착의 끝은 U 대신에 V를 사용한 것이다. 에트루리아 알파벳에서 유래한 고대 라틴어는 중세에 이르러 V가 U, V, W로 분화하기 전까지는 V만 존재했다. *주3 그래서 고대의 진정한 로마를 계승한 이탈리아 파시즘의 선봉, 국립영화제작소는 L.U.C.E.가 아니라 고귀한 L.V.C.E.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현대 세계의 문명과 질서를 대표하는 일본’에게 ‘기아와 혼란의 시대가 끝났다는 확신으로’ 중국인들이 환대하고 있다는 내레이션 내용은 도입부의 독수리상에 이어지는 도리이(とりい, 일본 신사 등의 관문)와 총칼의 도상으로 이미 예고됐다. 이탈리아인들은 파시즘의 사명을 잇는 일제의 ‘정의로운 전쟁’을 지지하고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는 메시지이다. 그런데, 내레이션 초반에 일본군 지휘관으로 언급되는 ‘왕의 동생 [치치부]’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발음은 [치치부]로 들리고, 다수의 AI가 동일하게 ‘principe(왕족) CCV’라고 채록했다. AI는 위와 같이 대답하면서 1번일 확률이 가장 높다고 했다. *주4 조사해 본 결과, 모두 틀렸지만, 이를 단서로 [치치부]가 쇼와 일왕의 동생 치치부노미야 야스히토임이 밝혀졌다. 그는 당시 현장 지휘관이 아니라 대본영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를 굳이 언급한 것은, 그가 난징대학살과 관련한 군 기강 문제를 지적했다든지, *주5 훗날 삼국동맹을 지지했던 점 *주6 등을 미뤄볼 때, 이탈리아 파시즘의 세계관에 부합하는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부록 2. <니혼뉴스 제7호>(日本ニュース 第7号): 초조함을 숨길 수 없었던 승전보 속 위치는? 기록영상에서 ‘지명’은 늘 골칫거리다. 근현대 지도에 적힌 지명은 지도마다 제각각이고, 서양에서 통용되던 지명, 타국에서 발음 들리는 대로 표기한 지명, 자국민들이 부르던 지명, 옛날 지명과 이명, (특히 공산주의 국가에서) 정치적 선전과 기념의 목적으로 툭하면 바꾸는 지명까지 모든 것이 뒤엉켜 있는 경우가 많다. < 니혼뉴스 제7호 >(1940)에서 지명 정보는 특히 중요하다. 이 영상은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일본의 관심이 온통 중국 국민당 정부의 보급선을 끊는 데에 집중됐던 1940년 여름의 뉴스릴이다.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중국 북부, 동부의 주요 도시와 기간시설들을 확보했던 개전 초기에는 전황을 낙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제스와 국민당이 내륙으로 이동하여 충칭정부를 세운 후부터 이 전쟁은 보급선을 확보하여 더 오래 버티는 쪽이 승리하는 구도로 전환됐다. 특히 일본군은 비현실적으로 전선이 길게 늘어선 데다가 철도, 도로망이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않은 내륙 지방까지의 보급에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 난처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후 1944년에 감행했던 대륙타통작전(1호 작전) 또한 이런 어려움 속에서 중국 내륙 및 남부까지의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둔 무리수였다. 반면, 중국은 동남부 해상으로부터의 보급로, 버마와 베트남으로부터의 육상 및 공중 보급로를 계속 뚫어내면서 장기 태세에 돌입했으니, 시간은 중국 편이었던 것이다. 그런 배경에서 이 뉴스릴은 줄곧 이러한 장제스 지원 루트, 즉 원장(援蔣)루트를 차단하기 위해 일본군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첫 번째 소식은 진해(鎮海)를 공격하여 해상 보급로를 차단했다는 내용을, ‘문제의 원장루트, 인도차이나 국경을 공격하다’라는 제목의 두 번째 소식은 베트남에서 출발하는 두 갈래의 원장루트에 관한 내용을, 마지막 소식은 어려움에 처한 일본이 이후 본격적으로 군국주의 체제로 돌입하고 군사적으로 폭주하는 도화선이 된 고노에 내각 출범 소식을 담고 있다. 그런데, 첫 번째 소식의 ‘진해’라는 곳은 어디였을까? 그 단서는 내레이션 중 [셋칸 루트]라고 발음되는 것의 정체를 찾는 데서 출발했다. 가동할 수 있는 모든 AI들은 이를 ‘석관 루트(石管ルート)’라고 채록했다. 그러나, 그런 보급로는 어떤 기록에서도 언급되지 않았고, AI는 그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변명을 늘어놓았다. 권위 있는 기관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AI의 억지 변명이 분명했다. 어처구니없게도 실마리는 현재 니혼뉴스의 일부를 소유하고 있는 ‘NHK 전쟁증언아카이브’ 중 <니혼뉴스 51호>의 스크립트 정보 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서 ‘셋칸 루트’는 ‘敵浙 루트’였다. AI는 ‘敵浙’을 ‘절강’으로 번역했고, 지도 검색 결과도 절강성 인근으로 나왔지만, 우리가 아는 절강성(浙江省)의 한자는 다르다. 그래도 이 과정에서 저장성과 장시성 지역을 잇는 철도인 저간선(浙赣铁路)이 이 시기에 이미 있었다는 것과, 저장성과 장시성의 약칭으로 쓰이는 글자가 저(浙), 간(贛)이라는 점을 발견했다. 그리고 지도에서 현재의 저간선 경로로부터 해안 쪽으로 탐색해 나가다가 ‘진해(鎮海)’의 현재 표기일 가능성이 높은 ‘전하이 구(镇海区)’를 발견했다. 이렇게 돌고 돌아, 저간 루트로 이어지는 저장성-푸젠성 해안의 보급 거점 위치가 확인됐다. 그런데, 앞선 전쟁증언아카이브의 <니혼뉴스 제7호> 스크립트에는 왜 이 정보가 없었을까? 해당 아카이브를 포함해 이 영상에 대해 현재 알려져 있는 모든 정보 에서 첫 번째 소식은 충칭으로 진격하던 일본군의 ‘사스(沙市) 공략 입성’ 내용이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 소식은 < 니혼뉴스 제3호 >의 세 번째 소식을 다시 한번 수록한 것이다. 3호 영상으로 공개했던 내용을 그대로 7호에 다시 수록했던 이유는 무엇인지 현재로서 알 길은 없다. 어쨌든 7호 영상으로 공개된 모든 판본 중에서 NA II 판본만이 유일하게 ‘진해 공격’ 소식을 담고 있고, 알 수 없는 이유로 ‘사스 입성’ 소식으로 교체됐다는 것은 분명하다. 부록 3. 일본인 여행 기록, 언제 촬영했을까? 왜 다른 선전영상들과 함께 노획됐는지 알 수 없는 영상이 있다. 이 영상 은 한 일본인 가족이 도쿄, 카마쿠라, 에노시마까지 여행한 하루 일정의 기록이 담겼고 음향은 없다. 유용한 정보가 아니라고 생각되더라도 미리 판단할 수는 없다. 이 가족이 여행한 시점이 언제인지 밝히고자 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NA II 카탈로그에는 ‘1937 ?’이라고 기재되어 있고, 근거는 밝히지 않고 있다. 화면의 내용을 근거로 좁혀 갈 수밖에 없다. 우선, 부채질을 하고 있으니 여름 즈음이다. 여행 전에 베티 미용실(ベティ美容室)에서 머리를 하는데, 간판 정보로 보아 매월 정기휴일인 17일, 27일은 아니다. 영업시간 정보를 보니 아침 8시 이후이다. 이어 도쿄 메이지신궁 외원의 성덕기념회화관(聖徳記念絵画館)을 방문하는데, 관동 대지진 이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면 1937년부터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사이 기간인 듯하다. 센소지(淺草寺) 본당 계단을 내려와 바나나 파는 곳을 지나친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바나나의 일본 수입이 중지됐다는 일본어 위키의 정보를 신뢰한다면 1939년 9월 이전이지만, 참고로만 받아들이기로 한다. 아사쿠사 마츠야 백화점(1931년 건립) 옥상에 있는 유원지를 가로지르는 케이블카가 보이고, 그 앞 스미다(隅田)강에 수상버스가 지나간다. AI는 이런 것들이 1930~1940년대 유행했다고 하면서도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좀 더 결정적인 근거는 우에노 동물원 장면이었는데, 수컷임이 분명한 기린 한 마리가 서성이고 있다. 우에노 동물원이 1982년에 발간한 『 우에노 동물원 100년사 』에는 암수 두 마리의 기린을 1933년 8월 21일부터 사육하기 시작했고, 1937년 7월 11일에 첫 새끼가 태어났다고 적혀 있다. 만일, 이 장면에서 수컷만 있는 이유가 암컷의 출산 때문이라면, 이 영상이 대략 1937년 여름의 것이라고 추정할 수도 있다. 이 책에 따르면 기린들의 이름이 ‘기린’과 ‘지라프’였는데, 이 책의 사진에는 ‘지라프’라고 적힌 팻말만 보이지만 ‘라벨에 기린과 지라프가 함께 적혀 있다’라는 설명이 달렸다. 영상 속에는 ‘기린’이라고 적힌 팻말이 걸려 있는 것을 보니 수컷의 이름이었던 것 같다. (좌) 영상 속 장면 / (우) 책 속 사진 결국 이런저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영상의 촬영 시점은 1937년 이후부터 1940년대 초 사이의 여름 정도의 범위로 좁히는 것이 최선이었다. 내심, 귀여운 기린 새끼가 태어난 날이었길 바라지만 말이다. 이미 글이 길어졌으므로 다른 TMI들이 궁금하다면 컬렉션 페이지 에서 자료집을 다운로드 받아 훑어보기 바란다. 사실상 국가가 정한 ‘전연령 관람 불가 등급’이라고 할 수 있는 공산권 국가 제작 영상(‘특수자료’)들에 대해서는 정보만 안내하고 VOD로 공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공산주의자의 영상에도 TMI는 있게 마련이고, 이런 정보들을 최대한 안내하고자 노력했다. 못 미덥지만 함께 수고했던 AI들에게도 감사를 전하고 싶다. *주7 *** 주1. 물론 필자가 하우스 같은 천재는 아니기에 다소 고통스런 공부가 수반되어야 했지만 말이다. 주2. 최병진, 짐바르도 마르타, 「이탈리아 파시즘 시기 선전물의 쟁점과 어법: 무솔리니의 도상을 중심으로」. 『유럽문화예술학논집』 11호(2), 21~39쪽. 문준영, 「파시즘의 로마 이미지와 로마관, 로마성(Romanità)―그 기원과 변천」. 『역사비평』 139호, 366~400쪽. Coluzzi, Paolo, “The significance of typography in the linguistic landscape during the Fascist period in Italy (1922–1943)”, Forum for Linguistic Studies 5(3):1885, 2023. 주3. “ Latin alphabet ”,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주 4. prompt engineering 효율 측면에서 ‘천황’이라고 언급했다. 명칭은 명칭일 뿐이다. 주5. “ 【独自】秩父宮、軍紀の乱れ懸念…日中戦争初期の書簡見つかる ”, 《요미우리신문》, 2020. 11. 15. 주6. “ 秩父宮雍仁親王 ”, 일본어 위키피디아 주7. 글에는 어쩌다 보니 claude의 프롬프트 화면만 나왔지만, 다양한 AI들과 그 기술이 적용된 툴들이 함께 했다.
사진: " Oldboy ", IMDb 올 여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된 ‘해외 영화학자 초청 대중 특강’의 내용을 강연자의 시점에서 정리합니다. 영화와의 첫 만남과 학계 입문 과정에 얽힌 소소한 에피소드부터, 세계 속 한국영화의 위치, 최근 몰두하고 있는 연구 주제에 대한 학술적 분석까지. 한국영화를 향한 해외 영화학자 6인의 개성과 열정으로 꽉 채워졌던 2시간을 KOFA가 직접 기록한 특강노트 로 만나보세요. 김규현 교수 는 근•현대 일본과 한국의 역사를 중심으로 연구하며, 일본 대중문화(특히 만화)와 한국영화에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왔다. 한국영화 리뷰 사이트 “Koreanfilm.org”에 20여 년이 넘게 한국영화에 대한 리뷰를 기고할 만큼, 그는 열렬한 영화 팬이자 장르영화 ‘덕후’라고 할 수 있다. 저서로는 The Age of Visions and Arguments: Parliamentarianism and the National Public Sphere in Early Meiji Japan(2008)이 있고, “The politics of national language and wartime mobilisation of everyday life in late colonial Korea, 1937-1945”(2016), “Pak Chan-wook’s Thirst: Body, Guilt and Exsanguination”(2013) 등의 논문을 집필했다. 현재 박찬욱 감독의 작품에 대한 연구서 출판을 기획 중이며, UC 데이비스대학교에서 역사학과 일본-한국 전공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의 숨은 주역, 대중문화의 소매상과 중개인 ‘한국영화’에서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로의 변화라는 중심 주제를 상기하면서 강연을 시작하고 싶다. 근대화가 시작된 이후 한국영화는 계속 발표되어왔고, 이때부터 한국인들은 단 한 번도 한국영화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 일제강점기 영화사 관련 문헌 자료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다만 이제는 한국영화를 인식하는 지역의 범위가 전 세계로 확대되었고, 이에 걸맞게 세계 영화 팬들은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라는 새로운 영역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한국인에게도 익숙지 않은 이 영역은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작품의 텍스트를 직접 분석하거나, 작품을 문화산업의 측면에서 정치•경제적으로 고찰하고 문화•사회사 이론을 적용해 해석하는 등 각기 다른 방법으로 구해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영화학을 전공하지 않았고 엄밀히 말하면 영화를 꾸준히 사랑해온 한 명의 ‘영화 팬’에 더욱 가깝기에, 이번 시간에는 이러한 학술적인 관점을 가지고 답을 찾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일본만화 덕후이자 컬트영화 팬이었던 내가 대학 입학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고, 지금까지 동아시아 역사 연구자로 살아오면서 한국 대중문화, 그중에서도 한국영화의 재발견을 거듭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하고 싶다. 타인의 부추김이 동반되곤 하는 ‘공부’와 다르게, 소위 말하는 ‘덕질’은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에 스스로 열중하게 만든다. 그 에너지는 실로 강력해서 덕질을 이어가다보면 자연스럽게 그 소재를 ‘공부’하게 된다. 공부의 의의나 성취를 타인이 인정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1960~70년대 한국에서 유년기를 보내면서 만화 덕후로 지냈다. TV에서 <마징가 Z>를 본 후 명동으로 가서 원작 만화를 찾아 읽으며 나가이 고라는 작가를 알게 되고, 『바벨 2세』(1970)를 보고 요코야마 미츠테루가 60여 권이 넘는 방대한 『삼국지』 시리즈를 그리기도 했다는 사실에 놀라는 등의 흥미진진한 추억이 가득하다. 그렇게 일본문화에 익숙해지고 흥미를 붙인 끝에 일본 역사를 전공해 박사 학위까지 취득하는 데 이르렀다. 또한 역사 연구자인 내가 수많은 영화에 대한 학술 논문을 내놓고, 바야흐로 박찬욱 감독 작품의 연구서를 집필하려는 의지를 다지게 된 데 역시, 타인의 인정을 애써 요구하지 않는 애호의 마음이 작용했다. 한국영화가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로 불리기까지 실질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학술적 논의를 통해서는 상대적으로 주목 받지 못한 요인이 있다. 바로 ‘덕후’로서 그 애호의 마음을 발휘해온 ‘대중문화의 소매상들과 중개인들(retailers and brokers of popular culture)’이다. 이는 정식 학술 용어는 아니며, 일명 ‘컬트영화 팬’을 지칭하기 위해 내가 사용하기 시작한 단어이다. 그리고 나 자신도 여기에 속한다. 특정 장르의 만화나 영화에 열광해 자발적으로 펼쳐온 활동이, 한국영화의 세계화에 기여하는 대중문화 중개인으로서의 역할에 부합하고 있었다. ‘한국영화 르네상스’와 그레이 마켓, 그리고 광학 매체 2023년, < 올드보이 >(박찬욱, 2003)가 개봉 20주년을 맞아 미국에서 재개봉되었다. 나도 캘리포니아주 에머리빌의 한 극장에서 관람했다. 놀랍게도 흥행 성적이 훌륭했다. 재개봉 첫날 전미 박스오피스 9위를 기록했고, 2005년 북미 극장 개봉 당시에는 약 70만 7천 달러였던 수익이 이때는 약 170만 달러로 2배가 되었다. 개봉 직후에는 대중이 충분히 호응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몇몇 작품은 세월이 지나며 결국 그 가치를 인정받음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이런 한국영화들이 탄생하는 배경이 된, 즉 1990년대부터 한국영화의 발전이 본격화되는 데 기여한 몇몇 조건들이 있다. 먼저, 민주화 운동이 진행되고 검열이 완화되며 영화가 다룰 수 있는 정치적 이슈나 성적 묘사 등을 포함한 소재와 그에 대한 표현 방식이 다양해졌다. 그리고 영화를 공부한 ‘영화학도’들이 현장에 참여하면서, 각자의 관점에서 모범으로 삼는 영화를 참고해 작품세계를 구상하는 활동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한편, 인터넷 등이 발달해 정보의 송수신이 용이해져 전문가의 비평 언어가 널리 공유되었고, 특수 메이크업 효과와 프로덕션 디자인 등 작품의 완성도를 한층 끌어올릴 수 있는 기술도 (특히 호러나 필름 누아르와 같은 장르에서) 발전했다. 2000년대 초 제작된 <장화, 홍련>(호러), <지구를 지켜라!>(SF) 개인적으로는 한국 근•현대사의 성격이 1987년을 기점으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민주화와 경제 발전, 세계화, 정보통신기술의 사회문화적 영향력이 복합적으로 발현된 1987년 이후의 한국사회는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특히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영화에 관한 담론이 보다 넓은 계층에게까지 공유될 수 있었고, 이는 한국을 대표하는 ‘국민영화’를 제작해 해외에 선보이고 싶다는 국내 영화계의 오랜 과제가 수행되는 데 추진력을 더했다. 여기에 불법 비디오의 유통으로 ‘영화 덕후’들의 감상 스펙트럼이 확장되는 한편, 1990년대 시네필 문화를 바탕으로 영화평론은 학구적 색채를 띠기 시작해, 두 가지 경향 사이에서 진동하는 영화 글쓰기가 가능해지는 특별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 여쭤보고 싶다. 한국영화가 세계적으로 ‘떴음’이 분명해진 것은 언제부터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정답은 없고, 나 역시 주관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만, 아마 <올드보이>, < 살인의 추억 >(봉준호, 2003), < 장화, 홍련 >(김지운, 2003), < 지구를 지켜라! >(장준환, 2003) 등이 개봉한 2003년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2003년에 한국영화에 열광한 이들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관객이, 그 이후부터 등장한다. 준-불법 비디오 시장인 이른바 ‘ 그레이 마켓 ’이 융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는 비디오 유통 체인점이 잘 다루지 않는 블록버스터 등을 접할 수 있었고,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영화제와 어느 정도는 연계된 유통망을 구축해놓기도 했다. 또한 DVD 라는 매체가 출시되며 영화문화에 혁명적 변화가 일어난다. VHS는 매체 특성상 좋은 화질과 음질로 감상되기 어려웠지만, DVD는 ‘복원된’ 영상과 음성 소스를 수록할 수 있기에 같은 작품이더라도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차원의 감상 경험을 제공했다. 게다가 (당시 일본과는 다르게) 한국영화 DVD에는 대부분 영어자막이 탑재되어있어 해외 시장에서 유통되기도 쉬웠다. 이러한 시류에 힘입어, ‘고상하지 않지만 매우 재미있고 폭력적인’ 일본 시대극들처럼 그간 그레이 마켓에서 주로 관심 받던 작품들의 대열에 한국영화가 합류하면서, 한국영화가 각지의 로컬 컬트영화 팬들로부터 각광 받는 길이 열린다. 이때 한국영화의 세계적 유통에 컬트영화 팬들이 미치는 영향력을 체감하게 해준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유명했던 비디오점 “Le Video”에 가니, 당시 내가 온라인에 게시했던 <올드보이> 리뷰가 가게의 전시창에 붙어있었다. 할리우드나 기타 영화 전문업계에서 생산한 평론보다, 실제 ‘덕후’가 남긴 리뷰를 통해 또 다른 ‘덕후’들의 관심과 공감을 불러일으켜 비디오 유통을 촉진하는 것이 이 가게의 전략이었던 것 아닐까? DVD 시장에서 출발한 작품의 흥행이 ‘대중문화의 소매상들과 중개인’의 활동에 상당 부분 의지했음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 악령의 밤 2 >(마리오 바바, 1977), < 서스페리아 1977 >(다리오 아르젠토, 1977) 블루레이 (사진: Amazon) 사실, 역사적으로도 DVD와 블루레이 시장 자체가 대개 장르영화들에 의해 개척되었다. 북미 지역에서 높은 명성을 자랑하는 값비싼 복원판 디스크 제작의 트렌드가 마리오 바바나 다리오 아르젠토와 같은 감독들의 컬트 이탈리아 호러 영화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것처럼 말이다. 북미 영화 팬들은 그간 극장의 개봉작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해외 장르영화들에 대한 접근성이 광학매체의 유통과 함께 눈에 띄게 높아진 데 열광했다. 그리고 영상 복원 기술은 고전 호러, SF, 필름 누아르 등의 장르영화 디스크의 소스가, 제작자들이 의도한 느낌에 가까운 영상으로 팬들에게 전해지는 데 기여했다. DVD, 블루레이라는 매체에 의해 새로운 영화문화가 조성되는 첫 단계가 바로 장르영화를 바탕으로 진척된 것이다. 이들 특유의 감성과 스펙터클은 북미 주류 사회의 ‘정치적 공정함’과 ‘고상한 취향’에 도전한다고 여겨져 흥미를 불러일으켰고, 팬들의 관심은 홍콩과 일본, 동남아시아 등에 이어 한국영화로도 향했다. *주1 그러다가 2010년대 후반, 넷플릭스 등의 OTT 스트리밍 서비스가 VOD 시장을 지배하면서 위의 그레이 마켓을 무대로 번영한 비디오 가게들, 즉 ‘대중문화 소매상’들의 활동은 쇠퇴했다. *주2 하지만 2017~2018년부터 벌써 넷플릭스에 등록된 한국어 콘텐츠의 양이 상당했다는 데서 볼 수 있듯이, 한국 장르영화에 대한 관심은 식지 않아 여전히 여러 OTT 플랫폼의 주요 타깃이 되고 있다. 서구 장르영화를 닮은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이끈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박찬욱과 봉준호의 작품들은 왜 북미 영화계 종사자들에게 친근감을 주는 것일까? 박찬욱 감독에 집중해 설명하자면, 그의 작품이 전 세계 장르영화의 계보에서 점하고 있는 위치를 파악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올드보이>는 < 현기증 >(알프레드 히치콕, 1959), < 차이나타운 >(로만 폴란스키, 1974), < 강박관념 >(브라이언 드 팔마, 1976) 등 서구 장르영화 걸작의 기조를 이은 것으로 보인다. 금기시된 사랑, 공허한 허구에 대한 집착 등의 소재도 반복되지만, 무엇보다 ‘ 서스펜스 ’라는 요소의 활용이 돋보인다. 서스펜스(Suspense)는 ‘매달리다’라는 의미의 “Suspend”에서 비롯된 용어인 만큼, 영화에 쓰일 때는 떨어지기 직전의 존재가 무언가에 매달린, 즉 아직 불씨가 당겨지지 않은 감정이 터지기 일보 직전으로 응어리져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히치콕은 그 요소를 작품에 기막히게 배치하는 거장으로 불리고, 비슷한 경향이 박찬욱 감독의 작품에서도 엿보인다. 이렇게 추락하기 직전에 매달려있는 인물을 볼 때 관객이 느끼는 감정의 정체는 즉각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보다 복잡한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박찬욱은 서스펜스를 통한 감정의 이 복합성을 이전 세대 장르영화 감독들로부터 멋지게 계승했다. 인물의 선과 악이 뚜렷한 평면적인 스릴러에 나타난 윤리적 지형을 벗어나, 관객이 왠지 모를 불편함을 감지하면서도 여기서만 경험할 수 있는 복합적 감정 을 느끼러 영화를 다시 찾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 <파업주동자>와 <올드보이> 속 추락 직전의 인물 (사진: (좌) " 1000 Frames of Saboteur (1942) - frame 974 ", The Alfred Hitchcock Wiki / (우) " Oldboy ", IMDb) 일례로 히치콕의 < 파업주동자 >(알프레드 히치콕, 1942)에서 악당 프라이가 추락사하는 장면을 살펴보자. 추락 과정의 부감숏과 일그러진 얼굴의 클로즈업을 통해, 관객은 악당의 파멸을 지켜보고자 하는 가학적 욕망과 동시에 추락하고 있는 그와 동일시함으로써 발생하는 공포라는 두 가지 감정을 모두 체험한다. <올드보이>에서 수아( 윤진서 )의 추락사도 유사하다. 악당 이우진( 유지태 )의 시점에서 수아는 추락 직전의 상태로 비춰지고, 관객은 이우진이 악당임을 알면서도 누나의 추락 과정을 지켜보는 그의 죄책감을 공유하게 된다. 이는 인물이 뒤늦게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된 후에 벌어지는 아이러니를 다룬다는 필름 누아르 장르의 특성과도 연결되는데, 박찬욱은 그만의 현대적 언어로 이를 훌륭하게 재현해낸다. 극중 진실의 탐구자(Investigator of the truth)로 상정된 오대수( 최민식 )가 자신의 믿음은 거짓이고 진실은 따로 있음을 깨달았을 때, 그의 윤리적 세계와 작품의 서사적 자기 완결성은 모두 괴멸해버린다. 예기치 못한 이 괴멸을 지켜본 관객은 복합적인 감정의 늪에 빠지지만, 그로써 영화에 더욱 젖어든다. < 박쥐 >(2009)에서 송강호가 창문으로 향해 비상하는 장면에서 역시, 카메라의 시점에 따라 인물의 움직임이 추락으로도, 비상으로도 보이도록 연출해, 관습적 인식의 작동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영화적 순간을 어김없이 직조해냈다고 볼 수 있다. <올드보이>를 대표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장도리 액션씬’도 마찬가지이다. 이 장면을 보고 여러분은 어떤 느낌을 받으셨을지 궁금하다. (관객) “아프겠다” “웃기다” “너무 리얼하다” “처절하다” “주인공이 아무리 맞고 찔려도 쓰러지지 않자 악당들이 공포스러워하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진다” 맞다. 주인공의 멋진 모습이 부각되는 보통의 액션영화에서의 장면과는 확실히 다르다. *주3 데이비드 보드웰은 저서에서, 홍콩 무술영화의 매력은 ‘발레’처럼 ‘합이 맞는’ 액션이 설계된 데서 찾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올드보이>의 ‘장도리 액션씬’은 액션을 정교하게 설계하기를 거부하고, 논리적으로는 도저히 함께 발생하지 못하리라고 판단되는 감정들이 육감적이고 정서적으로 동시에 발생하도록 놓아둔다. 맞고 때리는 사람의 피곤함이 그대로 전해지는 ‘육체적’ 액션이자, 누구도 승리하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 싸움을 왜 하고 있는지에 대해 인물들이 실존적 질문을 던졌을 법하다는 추측도 하게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장면이 현실성을 부각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름의 미적 성취를 거둔 ‘멋있는’ 장면으로 기억된다는 점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오대수를 연기한 최민식과 다른 배우들의 육체에서 발산되는 피로감에 관객이 공감하는 과정이 그 성취의 결정적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배우의 육체가 작동하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관객이 관찰했기에 이런 공감이 가능해진다. 보통 예술영화에서는 장면이 시각적으로 정교해지는 데 기여하는 장치들을 일부러 노출해 영화의 작위성을 드러내며 관객으로 하여금 소격 효과를 체험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장도리 액션씬’에서는 정반대이다. 액션의 기술과 구성 모두 허술하지만, 관객은 그들의 싸움에 집중하며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깊이 연루된다. ‘내가 이 장면을 보고 왜 이렇게 반응했는지’를 신기하게 느낄 만큼. 최소한의 장치로 특정한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효율성의 시네마’를 지양하고, 감각적•감정적으로 다양한 반응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촬영된 장면이라는 것이 나의 해석이다. 또 다른 작가에 대한 질문으로 옮겨 가보자. 봉준호 감독의 < 기생충 >(2019)은 어떻게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고 북미 영화계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을까?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그의 소감에서 연유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말을 가슴에 새길 수 있게 해준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 미국에서 ‘봉준호’라는 작가에 대한 인지도가 매우 낮을 때였음에도 좋아하는 영화 리스트에 매번 그의 작품을 꼽아준 쿠엔틴 타란티노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특히 본인이 “학교에서 마티(마틴 스코세이지)의 영화를 보며 공부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며, 텍사스 전기톱으로 트로피를 5등분해 나눠 가지고 싶을 만큼 함께 후보에 오른 영미권 출신 감독들(마틴 스코세이지, 샘 멘데스, 쿠엔틴 타란티노, 토드 필립스)도 존경한다고 밝혔다. 자신을 장르적 개성에 완성도를 더한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계승자 중 하나로 인식하고, 이 계보를 함께 이어나가고 있는 동료와 기쁨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읽힌다. 재치있게 언급된 < 텍사스 전기톱 학살 >(토비 후퍼, 1974)이라는 작품 역시, 뉴욕현대미술관에 역사상 가장 훌륭한 미국영화 중 한 작품으로 영구보존되어있고, 영화 매거진 Sight and Sound 선정 2012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영화 250편 중 183위로 이름을 올린 바 있다. 일부 마니아층만 찾는 고전호러영화이자 장르영화라고 생각할 법한 작품도, 할리우드의 영화적 계보 상에서 영화사적 가치와 작품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이 흐름을 따라 현재까지 활동을 지속하는 영미권 영화감독들과 동료 관계를 형성했고, 그 역시 그러한 계보의 연장선에서 ‘뉴 코리안 시네마’의 적자로서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하며 서구를 포함한 전 세계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한국영화가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로 거듭날 수 있었던 이유는, 비주류의 영역에서 탄생했을지라도 그만의 매력으로 세상 밖으로 나온 (특히 북미 관객이 열광하는) ‘덕후들의 장르’의 경향에 수렴해서, 즉 ‘좋아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을 만들어서’가 아닐까? 과거의 한국사회가 천대한 문화가 지금은 당당히 한류의 주축이 된 것처럼, 걸작도 한때는 쓸모없고 천박한 영화로 치부되곤 했다. 소수에게만 환영 받는다고 해서 가능성을 함부로 판단해 작품의 존재를 숨기지 말자. 이전에도 그랬듯이, 누군가(가령 대중문화의 소매상과 중개인)는 계속 찾고 있을 그 작품을 영화 팬으로서 계속 지지하고 싶다. * 질문과 답변 * (질문1) 불법 비디오 중심의 그레이 마켓이 크게 위축된 오늘날의 OTT 시대 에는 말씀하신 ‘대중문화의 소매상과 중개인들’이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가? (답변) 넷플릭스를 보면, 전 세계 관객에게 접근할 수 있는 장르적 문법을 사용했는데도 여전히 대중의 관심 밖에 있는 작품들(예를 들어 동유럽이나 남미 등지에서 제작된 호러영화들)이 너무 많다. 이들은 단순 B급 호러영화로 오해될 수 있지만, 사실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거나 높은 장르적 완성도를 자랑하는 경우가 많다. OTT 플랫폼이 아니라면, 그리고 장르영화에 대한 관심으로 그 플랫폼에서 이들을 발견해내는 불특정 다수의 애호가들이 아니라면, 이런 작품들이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동시대 영화 제작의 기술적 수준은 빠른 속도로 평준화되고 있으므로, 앞으로는 영화 제작과 감상이 (국가나 문화권 단위가 아니라) 특정 취향을 매개로 뭉친 애호가들 (예를 들어, ‘오대수 그룹’과 같이!)에 의해 활성화되는 경향이 크게 두드러지리라고 예상한다. 이처럼 영화를 향한 ‘대중문화의 소매상과 중개인’의 열정은 OTT 시대에도 가려진 걸작들을 발견하는 데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당분간은 OTT 산업이 그들의 활동을 무력화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보다 먼 미래까지 추측하기는 어렵지만. (질문2)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이끈 박찬욱과 봉준호 감독이 널리 인정받게 된 계기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저만의 기우일수도 있지만, 이렇게 미국 장르영화의 계보를 잇는 작가들이 향후 한국영화계에서 다시 등장할 수 있을지 가 궁금하다. 혹시 교수님께서 이들의 뒤를 이을 감독으로 눈여겨보신 이가 있으신지, 혹은 유사한 인물이 더는 출현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보시는지를 여쭤보고 싶다. (영화저널리스트 김형석) (답변) 나도 그렇고, 많은 분들께서 이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박찬욱과 봉준호 감독은 1980~90년대 한국 현대사를 지나며 민주화, 정보통신기술의 발전, 영화학의 도입과 시네필 문화의 융성 등의 특수한 상황을 경험한 세대이다. 그래서 이후 세대의 감독들이 보여줄 작품의 형식과 내용도 그들의 작품에서와 같이 복합적일지에 대한 우려가 드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한 가지 의문점은 제기하고 싶다. 바로 한국영화 내 ‘작가주의’의 지속성 에 대해서이다. 작품의 예술성을 좌우하는 주체는 감독이라는 인식은 여전히 한국영화계에서 널리 공유되고 있고, 연출과 제작 과정의 상당 부분은 감독 개인의 결정에 맡겨진다. 이러한 작가주의적 경향이 지속될 수 있을지가 조금 궁금하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영화에 관한 지식이 편재하게 되면서 작품의 기술적 완성도가 평준화된 오늘날, 오히려 영화에 관심을 가진 이들로 구성된 다양한 집단(각기 다른 특징을 지닌 영화애호가 집단 등)이 영화 제작과 유통, 감상을 주도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영화를 다각도로 바라보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작가주의의 점진적 소멸이 그리 부정적인 현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 역시도 본 질문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있다. 20세기 후반 정치와 경제, 문화의 소용돌이 속 한국사회의 형성을 목도한 세대 이후의 감독들은 무엇을 어떻게 보여줘야 할까? 막막하게 느껴질 수 있다. 반면, 최근 국내 장르영화의 문법이 독창적으로 발전하려는 신호가 보인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박찬욱과 봉준호 감독과는 다른 종류의 작품을 레퍼런스로 삼은 연상호 감독의 행보, 한국사회의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난 < 오징어 게임 >(황동혁, 2021) 등의 작품은, 한국 영상 콘텐츠의 장르적 언어가 새로운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단계에 있음을 나타내는 듯하다. 전망이 그렇게 어둡지만은 않다. < 지옥 >(연상호, 2021)과 <오징어 게임>(황동혁, 2021) (질문3) 박찬욱과 봉준호 감독과 달리 할리우드의 계보 바깥에 위치하면서도 ‘한국적’ 특색을 선보임으로써 북미 관객으로부터 관심을 받는 감독 또는 작품이 존재할까? (답변) 두 사람도 한국 고유의 문화를 보여준다. 이들은 할리우드의 문법을 모사하지 않으면서 한국사회의 일면을 효과적으로 영화화한다. 할리우드마저도 이들의 연출 방식을 모방하는 현상을 보면, 둘의 작품세계가 지닌 독창성이 널리 인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영화 한 편으로 ‘한국 고유의 문화’를 보여주기는 어렵다. 문화에서 ‘고유’의 영역을 분리해낼 수는 없듯이, 한국문화는 곧 한국인들의 총체적인 삶의 모습 이다. 여기에는 미처 분석하기 어려운 갖가지 요소들이 뒤섞여있고, 상호 모순적으로 보였던 요소들이 정체 불명의 통일성을 띤 채 놀랍게도 공존함이 드러나면서 한국문화의 위대한 성취가 엿보인다. 한국인들의 삶에서 녹아있는 이 혼잡한 뒤섞임과 공존을 어떻게 영화 한 편으로 압축해 선보일 수 있겠는가? (질문4) 교수님께서는 영화인이 공유하는 공통 언어로서 ‘장르’를 인식하고 계신 것으로 이해했는데, 교수님께서 영화의 ‘장르’를 정의하시는 방법 을 여쭤보고자 한다. 한편, VHS와 DVD가 영화에 미친 영향의 차이를 설명해주셨던 것처럼, 영화의 텍스트는 매체로부터 영향을 받아 변화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스트리밍’ 매체가 영화에 대해 지닌 영향력 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하다. 마지막으로, 혹시 가능하시다면, 교수님의 VHS 경험에 대해 더 듣고 싶다. (답변) 첫 번째 질문에 대해 답하자면, 나는 사실 주류영화도, 예술영화도 아닌 영화들을 ‘장르영화’로 분류하고 있다. 그래서 딱히 ‘장르’라는 용어의 정의를 전제하고 있지는 않으며, 이에 대한 관점은 애호가 또는 연구자별로 다양하다. 그런데 사실 장르는 예술의 종류와 관계없이 오래 전부터 적용되어온, 많은 이들이 익숙해져있는 개념이다(에드가 앨런 포가 집필한 대부분의 소설이 호러 또는 미스터리로 여겨지는 것처럼). 작품의 종류를 상업적 필요에 따라 분류한다거나 그 개념을 둘러싼 관습이 서서히 누적되는 과정을 추적해 개념의 정의에 접근하는 일은 관련 분야 연구자들이 수행할 것으로 기대한다. 두 번째 질문과 관련해서는, 스트리밍 시스템이 영화 텍스트에의 접근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데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고 이야기하고 싶다. 만약 그 반대라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 오펜하이머 >(2023) 의 범세계적인 흥행이 설명될 수 없다. 스트리밍 맞춤형 콘텐츠만 환영 받는 환경이라면, 러닝타임 3시간 동안 인물들이 대사를 주고받는 장면으로만 대부분 구성된 이 작품이 어떻게 인기를 얻을 수 있겠는가? 극중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얼굴 근육이 움직이는 모습은 노트북이나 태블릿이 아니라 스크린으로 봐야 한다. 작품의 극장 상영의 가치가 충분하고 극장의 관객이 이 점을 공감했기에 가능한 흥행이었다. 이런 작품들의 인기가 스트리밍 시장에서 흥행하는 콘텐츠에 비해 밀릴 수는 있다. 하지만 절대 사라지지는 않는다. 마지막 질문에 답하자면, 나는 사실 VHS와 애증의 관계를 맺고 있다. 매체에 대한 접근성 은 아주 높기에 국외 작품일지라도 더빙판 등이 복사된 자료를 보며 감상의 스펙트럼을 넓힐 수 있었다. 하지만 DVD는 접근성에 더해 수록된 영상의 품질까지 담보해준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광학 매체의 발전이 4K UHD 블루레이까지 이어진 것을 보면, 여전히 누군가는 고품질 홈비디오를 찾고 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나 역시 < 죠스 >(스티븐 스필버그, 1975) 의 4K UHD 판본을 보면서, 1970년대에 극장에서 이 영화를 처음 감상하며 받은 느낌이 그대로 재현됨을 발견하고 무척 놀랐다. 이렇게 감상자 개인에게 높은 수준의 화질과 음질 경험 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지 않는 한 광학 매체 시장 역시 사라지지는 않으리라고 본다. 아직까지도 1930~40년대 필름 누아르 장르의 영화들을 수록한 DVD가 무수히 많이 발매되고 있다 (고전기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여성 영화감독 아이다 루피노의 작품 등). 스트리밍 시장에서 주목받기 어려운 이 같은 작품들은 계속 해서 홈비디오의 형태로 마니아들에게 찾아온다. 따라서 나는, 어릴 적 영화에 대한 접근성을 높여준 VHS라는 매체에게 감사하지만, 그립지는 않다. 그보다 뛰어난 영화적 경험을 제공하는 홈비디오의 가능성이 이미 전 세계에 열려있으므로. (질문4-1) 선생님께서 아직 버리시지 못한 VHS가 있는지 궁금하다.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장 정종화) (답변) 물론 있다. 한국영화이다. 박찬욱 감독의 < 3인조 >(1997). < 달은…해가 꾸는 꿈 >(1992)은 DVD로 발매되어 반갑게 구매했지만, <3인조> DVD는 아직 발매되지 않았다. (질문5) 영자원 역시 한국고전영화를 스트리밍할 수 있는 VOD 채널( 유튜브 , KMDb , 네이버TV )을 운영 중이고, 구독자 대부분은 해외 국가 출신이다. 본 채널에서의 서비스 품질 향상 방법을 고민하다가 기관이 직접 복원한 영상을 4K 해상도 로 게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회수 증가 속도가 이전보다 눈에 띄게 높아져, 광학 매체를 통해 대두된 ‘화질’의 중요성이 스트리밍 분야에서도 유효함을 깨달았다. 관련하여, 위에 말씀드린 영자원의 VOD 채널이 교수님께서 계신 미국 내 영화학자나 한국영화 팬들에게 얼마나 알려져있는지, 그들에게 본 채널이 주는 도움에 대해 체감하신 바가 있으신지 궁금하다. (한국영상자료원장 김홍준) 유튜브 채널 '한국고전영화' 중 4K 리마스터작 재생목록 (답변) 지금이라도 한국영화를 찾아보고 싶어하는 미국인들에게 화질과 음질의 수준은 매우 중요하다. DVD라는 광학 매체가 처음 발매된 지 20여 년이 지났고, 이에 대한 시청각적 경험이 그만큼 많은 미국인들에 의해 학습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전 한국영화는 촬영 기술, 사회적 통념, 미학적 스타일 등의 측면에서 시대적 한계를 지녔더라도 대중에게 매력적인 작품으로 수용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런데도 국내에서 고전영화는 물론 장르영화에 대해서도 밀도 높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점이 안타깝다. 기회만 있다면 이들도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데 말이다. 앞선 질문에 답변한 내용에서처럼, 실체가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한국의 ‘대표성’을 보여주려는 강박에서 벗어나, 고전영화는 물론이고 한국영화의 장르적 매력을 소개하려는 노력 이 필요하다. 따라서 고전영화를 고해상도로 경험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영자원의 작업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고, 어떤 상황에 있어서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싶다. (질문6) 오래 전부터 “ koreanfilm.org ”에 올리신 리뷰를 통해 교수님을 알게 되었고, 저 자신도 여기에 글을 남기며 교수님과 인연이 닿았다. 당시 ‘한국영화’에 대해 쓰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신 계기가 있나? (영화번역가 달시 파켓) (답변) 단순하다. 영화 팬으로서 멋있고, 아름답고, 가슴을 울리는 한국영화를 보고 감동해서 쓰기 시작했다. ‘한국’영화라서 좋아하게 된 것은 전혀 아니다. 영화 팬인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한국영화계가 갑자기 만들기 시작했다. 한국이 아닌 다른 국가에서 제작한 작품이더라도, 독특한 매력으로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면 얼마든지 ‘덕질’할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동시대 한국영화계가 발표하는 작품들의 완성도에서는 충분히 희망이 보인다. 중소 규모의 제작사에서 만든 한국영화들을 다른 문화권의 작품들과 비교해보아도 손색이 없다. 그러고보니 조금 역설적인 측면이 있다. 나는 역사 연구자임에도 영화를 사회적 사상이나 이념의 반영으로만 바라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오히려 영화 연구자분들께서 그와 같은 ‘사상적-이념적’ 관점으로 연구하시는 경우가 많다. 흥미로운 역설이다. (코멘트) 비디오 리터러시 또는 시네마 리터러시라는 용어가 있듯이, 만약 ‘ 장르 리터러시 ’라는 용어도 성립 가능하다면 영화산업과 아카이브 모두에게 유용한 개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영자원도 현재 같은 방면으로 노력하고 있기는 하지만, 필름 아카이브로서 장르적 가치를 발견하고, 그 가치가 세계 또는 한국영화사의 어떠한 맥락과 닿아있는지를 관객에게 더욱 열심히 알려 대중의 장르 리터리시 신장에 기여하고 싶다.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장 정종화) (답변) 맞다. 김기영 감독의 재발견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장르에 관심 있는 관객이라면 지역에 관계 없이 김기영 감독의 작품에 접근하고자 할 것이고, 이렇게 조성된 관문을 통해 관객의 시야가 넓어짐과 동시에 한국고전영화의 가치도 더욱 전파되리라 기대한다. *** 주1. 물론 이 과정에서 아시아 장르영화가 과도한 폭력과 성적 묘사를 강조한 “익스트림 시네마(Extreme Cinema)”라는 프레임으로만 인식되는 부작용이 생긴다는 비판도 있다. 주2. 그러나 넷플릭스도 실상 그 기원을 따라가면 광학 매체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그들은 초반에 ‘연체료를 내지 않아도 되는 DVD 렌탈 서비스’를 표방했고, 방대한 양의 소장자료를 자랑하며 그 어디에서도 감상할 수 없었던 작품들을 비디오 및 디스크 대여 서비스로 제공한다는 점으로 차별화를 시도했다. 주3. 기술 발전에 힘입어 세련되게 촬영된 액션영화들에서도 <올드보이>의 영향을 발견할 수는 있다. 넷플릭스 <데어데블> 시리즈 중 고정된 카메라 앞에서 인물들이 프레임 안팎을 오가며 싸우도록 한 인상적인 복도 액션씬이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