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슨 독트린 프로그램 리뷰
- 제작년도
- 1969
뜨거운 태양 아래 빨간 무스탕이 아리조나 사막을 가로질러 달린다. 흙바람을 일으키며 질주하는 차 안 라디오에서 흐르는 곡은 페기 리의 ‘It’s a Good Day’. 경쾌하고 발랄한 스윙곡의 희망찬 가사와 달리 운전자의 상황은 그리 좋아보이질 않는다. 초조하게 담배를 물어 피우는 왼손에는 피 묻은 붕대가 감겨있고, 며칠째 잠을 못 잔 듯 운전하며 꾸벅꾸벅 졸기까지 한다. 각성제를 쏟아 붇고, 연신 라디오 채널을 돌려 록과 재즈, 성악까지 다양한 곡들로 근심과 피로를 지우려 하지만 역부족이다. 설상가상 펑! 소리와 함께 본네트에서 흰 연기가 가득 피어오른다. 고무 밸브가 더위를 참지 못하고 그만 터져버린 것이다.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남자는 사막 한 가운데 갈래 길에서 잠시 멈춰 서는데 그제야 불길한 듯, 음산한 듯 스코어가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더위를 상징하는 색소폰 연주에 짜증을 한 가득 품어 낸 하모니카 소리가 어우러진, 마치 어디선가 들어본 곡조 같다. 서부극의 한 자락에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이 음악은, 맞다. 엔니오 모리꼬네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스타일이다. 올리버 스톤은 이런 기시감을 위해 이 거장을 불러왔다. 스파게티 웨스턴 사운드의 선각자. 정통 서부극의 정의와 용기, 사랑과 프론티어 정신 따윈 개나 줘버리고 암투와 음모, 배신과 폭력 그리고 조소가 판을 치는 조잡스런 세계관에 잔인하면서도 위트 있는 음악을 부여한 그는 그야말로 < 유턴 >의 음악에 최적화된 작곡가였다. 엔니오 모리꼬네 엔니오 모리꼬네. 더 이상의 어떠한 설명도, 찬사도 필요치 않은 지구상의 유일무이한 영화음악가. 전설 중의 전설이자 아직도 현업에서 열심히 노익장을 과시하며 작업을 하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마에스트로다. 비발디와 로시니, 베르니와 푸치니 이후 이탈리아가 낳은 최고의 작곡가이자 히트상품으로 1961년 데뷔한 이래 지금까지 500편이 넘는 영화음악을 맡으며, 전 세계적으로 500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기록했다. 그는 국경을 초월해 수많은 나라에서 작업했고(심지어 막부 시대를 다룬 일본 NHK 대하서사극 <무사시>의 음악도 담당했다), 열렬한 관객들의 찬사와 감동, 전율을 이끌어냈다. 아카데미 음악상에 5번 후보로 올랐으나 번번이 고배를 마시며 수상하지 못했지만, 2007년 아카데미는 그에게 평생공로상을 안겨주며 그 공적을 인정했다. 그의 음악은 천상의 하모니와 아름다움을 가진 동시에 실험적이고 키치적이며, 어두운 이면을 드러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형식과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이념과 국가에 소속되지도 않는다. 드라마와 코미디, 시대극은 물론 갱스터와 SF, 공포, 웨스턴, 전쟁, 액션과 지알로나 성애영화에서도 그의 음악은 등장한다. 고전에 능숙하며 현대 음악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창의적인 유머와 과감성, 천부적인 멜로디 감각으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더욱 놀라운 건 그의 경이적인 작업 속도와 양이다. 53년간 530편에 육박하는 작품 수만 보더라도 산술적으로 한해 평균 10편씩 50년간 개근해왔다는 건데, 실력과 재능 못지않게 부단한 노력과 근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유턴>은 그의 필모 중에서 널리 알려진 작품은 아니지만, 아름다운 선율에서 벗어나 다양한 시도들을 보여준 그의 초기작과 유사한 비장의 OST다. < 닉슨 >의 실패 이후 올리버 스톤 감독은 가볍고 작은 소품으로 그 정치적인 무게감을 덜어내고자 했다. <유턴>은 그런 재기발랄함이 드러나는 영화로 숀 펜과 닉 놀테, 제니퍼 로페즈, 존 보이트, 빌리 밥 쏜튼, 파워스 부스, 클레어 데인즈, 조아퀸 피닉스 등 좋은 배우들의 앙상블과 존 리들리의 단단한 각본을 가지고 강렬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단 하루 동안에 작은 마을 안에서 벌어지는 이 영화는 마치 2시간분의 머피의 법칙을 보는 듯한데, 어떻게 이렇게 재수가 없을까를 되네일 만큼 지독하게 꼬여가는 점입가경의 상황이 재미를 부추긴다. 자동차 고장으로 인해 사막 한가운데 외딴 마을로 들어선 남자는 마을의 아름다운 여인과 만나며 이에 얽힌 욕망과 질투, 과거의 복잡한 사연까지 안게 되고, 이 잠재적인 폭탄의 심지가 점점 타들어가며 서스펜스와 부조리한 블랙 코미디를 발생시킨다. 거기에 사막이 주는 강렬한 더위까지 결합하며 불쾌지수를 극단으로 밀어붙이는데, 그 파멸과 비극이 그리 고통스럽진 않다. 오히려 씁쓸하고 텁텁한 뒷맛에 헛웃음을 짓게 만든다. 사랑과 돈, 그 두 가지로 인해 발생하는 어리석은 인간사가 얼마나 많았던가. 로버트 리차드슨의 과도하지만 감각적인 촬영과 < 도어즈 >와 < 올리버 스톤의 킬러 >를 찍었던 감독답게 올리버 스톤의 센스 넘치는 음악 선곡이 빛을 발하며 이 지독한 악몽과도 같은 영화에 구원의 빛을 비추고 있다. 유턴 엔니오 모리꼬네의 선율에는 작열하는 태양과 아리조나 사막의 숨 막힐 듯한 무더위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러면서도 스파게티 웨스턴과 지알로, 좌파 영화로 대표되던 그의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초기 스타일이 정확히 한 세대를 거슬러 되풀이 되고 있다. < 미션 >이나 < 시네마 천국 >처럼 인상적인 테마라 할 주된 선율이 관객들에게 각인되지 않지만, 우수 어린 하모니카나 구슬픈 여성의 허밍, 나른하면서도 신경질적으로 느껴지는 일렉 기타, 지역색이 묻어나는 벤조와 뇌쇄적인 색소폰, 차갑기 그지없는 피아노와 팬파이프 등 그가 즐겨 쓰는 모든 악기들이 총동원돼 저마다 음색을 뽐내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올리버 스톤은 특히나 사막이라는 공간의 작은 마을 ‘수피리어’를 세팅하며 마카로니 웨스턴 속 무법천지와 개성적인 캐릭터들을 떠올리게 하기 위해 과감히 엔니오의 색채를 빌렸는데, 이렇게 짜증스런 음악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불편하고 불유쾌한 농담으로 가득 차 있다. ‘U-turn’과 ‘Hallucination Walk’, ‘End of Sheriff’, ‘Fall and Rse’ 등이 대표적인 트랙으로 전위적이고 입체적인 사운드의 진수를 선보인다. 그의 아름다운 선율만 기억하고 있는 팬들에겐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고, 그의 초기 음악 스타일을 알고 있는 팬들에겐 이런 전복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면모가 반가울 수도 있을 것이다. 웨스턴과 스릴러, 멜로와 블랙 코미디를 아슬아슬하게 경유하는 <유턴>의 퓨전적인 미학은 또 다른 환희와 감동을 던져준다. 삽입곡에 있어서도 대단한 사치를 부렸다. 사운드트랙엔 그 중 10곡이 엄선돼 실려 있는데 모두 깨알같이 빛나는 명곡들이다. 그리고 그 곡들은 대체적으로 반어적으로 사용되었다. 앞서 잠깐 언급한 페기 리의 ‘It’s a Good Day’가 영화의 앞과 뒤를 멋지게 장식하며 아이러니한 즐거움을 주었다면 낭만적이고 평화로운 컨트리송이나 감미로운 블루스, 발라드와 흥겨운 홍키통크는 주인공의 재수 없는 일진을 더욱 도드라지게 나타낸다. 한적하고 평화로운 도시 속에 숨겨진 욕망과 잔악한 배반의 드라마를 극명하게 대비시키고 있는 셈이다. 새미 스미스와 패치 클라인이라는 걸출한 국보급 두 여성 컨트리 싱어를 비롯해 자니 캐쉬와 웹 피어스라는 쟁쟁한 남성 컨트리 스타까지 배치해 남서부의 정서를 기가 막히게 담아낸 ‘Help me Make it Through the Night’, ‘Your Cheatin’ Heart’, ‘Honky-Tonk Girl’, ‘Ring of Fire’, ‘More and More’ 등은 기이하게 비틀린 마을 분위기와 달리 달콤하고 편안하게 느껴진다. 영화 <돈 주앙>에 쓰였던 브라이언 아담스의 주제곡 ‘Have you ever really loved a women’을 라틴 버전으로 부른 ‘La Mujer Que Amas’를 비롯해 글로리아 린의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I wish you love’와 ‘Speaking of Happiness’ 등 감미로운 곡들이 삽입돼 영화를 중화시키거나 아이러니한 상황을 더욱 심화시키는 역할을 해냈다. 이를 모두 마무리 짓는 건 엔니오 모리꼬네의 처연한 ‘Grace’다. 흐느낌에 가까운 구음과 팬파이프, 신의 입장에서 내려다보듯 부유하는 일렉 기타의 선율이 모든 고통과 사건을 치유한다. 요즘 올리버 스톤이 다소 주춤한 길을 걷고 있는 것과 달리 한국나이로 구순이 거의 다 되어가는 엔니오 모리꼬네는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그의 영화적 동지 쥬세페 토르나토레의 신작 <커러스폰던스 The Correspondence>의 음악작업에 들어갔고, 자국의 TV시리즈나 TV영화음악도 꾸준히 담당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달(6월) 중순에는 미국에서 콘서트가 예정돼 있고, 내년에는 프랑스에 투어가 잡혀있는 등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몸소 실천 중에 있다. 부디 그가 오래 오래 몸 건강히 활동해서 공로상 받고도 아카데미 음악상을 거머쥐는 기염을 토했으면 좋겠다. Track List 1. It's a Good Day - Peggy Lee 2. Help me Make it Through the Night - Sammi Smith 3. More and More - Webb Pierce 4. La Mujer Que Amas - Pedro Fernandez 5. I Wish You Love - Gloria Lynne 6. Honky-Tonk Girl - Johnny Cash 7. Your Cheatin' Heart - Patsy Cline 8. Ring of Fire - Johnny Cash 9. Lonesome Town - Ricky Nelson 10. Speaking of Happiness - Gloria Lynne 11. Grace 12. U-Turn 13. Bobby 14. Hallucination Walk 15. Go On... Kill Grace 16. A Banjo in the Desert 17. Against 18. A Careless Sheriff 19. Dialogue with the Indian 20. Old Family Souvenirs 21. End of Sheriff 22. Fall And Rise 23. Grace (Reprise)
존 포드에 관한 피터 보그다노비치의 다큐멘터리 < Directed by John Ford >(1971)의 한 장면. 연신 시가를 질겅이며 모뉴먼트 밸리를 배경으로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존 포드에게 젊은 보그다노비치가 조심스레 묻는다. -< 3인의 악인 >으로 대작 서부극의 길을 처음 닦았습니다. 이 영화를 어떻게 찍었습니까. “카메라로” -당신의 웨스턴은 뒤로 갈수록 비애감이 깊어집니다. 예를 들어 < 리버티 발란스를 쏜 사나이 >를 < 웨건 마스터 >에 비교하면 그런 느낌이 듭니다. 당신도 이 변화를 의식합니까. “아니” -이 문제에 대해 다른 할 말은 없나요. “무슨 얘기 하는지 모르겠소” -처음부터 서부극의 어떤 특별한 요소에 이끌렸나요. “모르겠소” -< 아파치 요새 >에 나타난 것처럼 개인보다 군의 전통이 더 중요하다는 데 동의합니까. “컷” 존 포드는 영화사상 인터뷰하기에 가장 어려운 감독 중의 하나였다. 그는 단답형의 대가였고, 그나마 대답을 피하거나 아니면 본심과 반대로 말하기 일쑤였다. 특히 지적인 질문, 미학적인 질문에 대해선 고의적으로 심술궂게 대답했다. 그의 영화를 더 많이 아는 인터뷰어일수록 그와의 인터뷰는 고통스러운 체험이 되기 십상이었다. “어떻게 할리우드로 오게 되었나요.”라고 질문하면 그는 “기차로”라고 대답했다(장 나르보니, 앙드레 라바라트와의 인터뷰, 1965년). 주목할만한 연구서 「John Ford」(1975)를 쓴 조셉 맥브라이드가 1970년에 그를 인터뷰할 때 포드는 악명 높은 단답 몇 마디를 내뱉은 뒤 이제 그만 하자면서 쏘아붙였다. “당신네들, 질문이 다 똑같아. 답하기 지쳤어. 난 답을 몰라. 난 못생기고(hard-nosed, ‘고집 센’의 뜻도 있음) 열심히 일하는... 전직 감독일 뿐이야. 그냥 우아하게 은퇴하고 싶을 뿐이야.” 존 웨인 John Wayne, 빅터 맥라글렌 Victor McLaglen 저널리스트나 평론가에게만 고약하게 군 것은 아니었다. 그와 함께 일한 배우들과 스태프들에게도 포드는 감당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존 웨인이나 < 밀고자 >(1935)를 비롯한 포드의 중기 걸작들의 주연을 맡은 빅터 맥라글렌도 예외는 아니었다. 연기가 마음에 안 들면 포드는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확성기로 소리쳤다. “어이, 맥라글렌, 당신, 내가 거리에서 당장 구한 아이도 더 잘할 수 있는 그런 연기로 일주일에 1,200달러나 받고 있는 거 알아?” 당대 최고의 배우이자 거구의 마초 아이콘인 웨인이나 맥라글렌도 포드의 가혹한 말 때문에 울음을 터뜨리는 일이 없지 않았다. < 3인의 대부 >(1948)를 찍을 때에는 해리 캐리 주니어가 연기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고 커다란 돌멩이를 던지기도 했다. 연극을 스크린에 옮긴 < 미스터 로버츠 >(1955)를 촬영할 때, 주연을 맡은 헨리 폰다와의 다툼도 유명하다. 걸작 < 젊은 날의 링컨 >(1939)을 비롯해 전성기 존 포드의 아홉 작품을 함께 했으며 동명 연극에서도 주연을 맡았던 헨리 폰다는 존 포드에게 ‘웃음의 타이밍을 모르는 연출’이라고 말했다가 주먹을 얻어맞고 나가떨어졌다. 한 시간 뒤에 포드가 사과하긴 했지만 두 사람의 우정은 다시 회복되지 않았고, 재개된 포드의 폭음 습관과 잠적, 담낭 파열 등으로 결국 중도에 감독이 머빈 르로이로 교체되기에 이른다. 포드에 관한 글들에 종종 등장하는, 그의 성격을 묘사하는 단어들에는 일관성이 있다. ruthless, sarcastic, gruff, cranky, curmudgeonly, crotchety, cantankerous, peevish, oddball, nutcase, eccentric .... 말하자면 그는 거칠고, 까다롭고, 심술궂고. 가학적이고 변덕스럽고, 괴팍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때로 예측할 수 없는 지혜와 선의와 배려의 사람이기도 했다.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1941)이나, < 조용한 사나이 >(아일랜드의 연풍, 1952) 등의 주요작품에서 포드의 여인으로 출연한 모린 오하라는 이렇게 말했다. “다정하고 품위있고 유머감각이 뛰어나지만 한편으론 악의적이고 야비해요. 존 포드의 이런 장단점을 다 받아들인다면 사랑하게 될 거예요” 존 포드 그의 예측 불가능한 성품을 알려주는 일화가 하나 있다. 공황기의 어느 날, 궁색한 차림의 노인이 포드의 사무실을 찾아왔다. 포드가 유니버설에서 일할 때 안면이 있던 배우였다. 딱한 노인이었다. 중태의 아내가 응급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병원에선 200달러의 선금이 없다고 받아주지 않았다. 노인에겐 동전 한 닢 없었다. 노인이 사정 이야기를 하는 동안 사무실 사람들은 점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존 포드는 겁먹은 듯이 뒤로 물러나 노인을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뛰쳐나와 노인을 때려눕혔다. 그는 소리쳤다. “당신이 누군데 감히 이렇게 와서 나한테 그따위로 말해?” 그리곤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노인은 벌벌 떨면서 기어나갔고, 사무실 사람들은 존 포드의 돌발 행위에 충격을 받고 들끓었다. 배우 프랭크 베이커도 분노해 사무실을 나갔다. 사무실 밖에서 서성이던 베이커는 포드의 비서 프레드 토트먼이 그 노인에게 1,000달러 수표를 주고, 포드의 운전사가 노인을 태워 집으로 데려가는 것을 우연히 목격했다. 거기엔 앰뷸런스가 기다리고 있었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수술을 하러 온 의사도 곧 도착했다. 얼마 뒤, 포드는 노인 부부를 위해 집을 사주었고, 평생 생활비를 보냈다. 존 포드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고 특히 역사서를 탐독했으며 놀라운 기억력의 소유자였다.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일본어, 하와이어, 아일랜드, 유대어에다 나바호족의 언어까지 구사할 줄 알았다. 그는 자신의 부를 허름한 작업복 안에 감췄고, 자신의 예민함을 검은 선글라스 안에 감췄으며, 자신의 박식함을 거친 말과 행동 뒤에 감췄다. 이 인물에 대해 정확히 말한다는 게 가능할까. 태그 갤러거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아마도 존 포드에 관한 만족할만한 전기는 불가능하며, 정확한 인물 묘사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를 아는 사람만큼이나 많은 포드가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가련한 노인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존 포드의 형 프랜시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잭(존 포드의 애칭)이 태어났을 때부터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왔지만,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존 포드의 어린 시절 존 포드는 1894년 2월 1일, 메인 주 케이프 엘리자베스에서 아일랜드 이민자 부부 존 오거스틴 피니(John Augustine Feeney)와 바바라 애비 큐란(Barbara “Abby” Curran)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숀 알로이셔스 오피니(Sean Aloysius 0’Feeney)였고 영화계에 진입한 뒤 한동안 잭 포드라는 예명을 쓰다가 1923년부터 존 포드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술집과 농장 일을 했던 포드의 집안은 중산층과 중하층을 오르내렸으며, 포드는 학창 시절에도 배달부, 농장일 보조, 식당 종업원 등의 일을 멈추지 않았다. 고등학생 시절 독서광이며 미술과 어학에 재능이 있었지만 수학은 낙제했던 포드는 해군사관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진다. 메인 대학교에 들어가지만 몇 주 만에 그만두고 허드렛일을 전전하다 1914년 7월 17일 무일푼으로 그의 형 프랭크가 활동 중인 할리우드에 도착한다. 존 포드보다 13살이 많은 프랭크는 16세에 결혼하고 곧 이혼한 뒤 서커스단에 합류한 뒤 종적을 감췄다가 10여 년 만에 멜리에스의 영화에 배우로 등장해 극장에 갔던 가족 모두를 놀라게 했다. 존 포드가 할리우드에 도착할 무렵 프랭크는 프랜시스 포드라는 이름의 감독-배우-작가로 유니버설에 제작사를 갖고 있는 스타 영화인이었다. 존 포드는 형의 도움으로 유니버설의 소품 담당 자리를 얻고 이후 스턴트맨, 단역, 조감독으로 일의 범위를 넓혀갔으며, 1917년 첫 장편 <스트레이트 슈팅>을 연출한다. 1921년 폭스사로 이전했고, 1924년 전국적인 히트를 기록한 < 철마 > 이후 존 포드의 명성은 국제적으로도 알려지며 성공적인 감독의 길을 걷게 된다. 프랜시스 포드 Francis Ford 형 프랜시스의 이력은 존 포드의 이력과 반대로 20년대부터 몰락해가지만, 동생에게 미친 영향은 작지 않았던 것 같다. 돈 벌기에는 완전히 무관심한 실험가이자 모험가였던 프랜시스는 당대 최고의 연출가 중 하나로 꼽혔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소실되었지만, 존 포드 영화에 대한 논평을 연상시키는 당시 언론의 프랜시스 영화에 관한 논평들은(‘무심함 뒤에 감춰진 진지함’, ‘냉소 뒤에 감춰진 따뜻함’ 따위) 13살 어린 동생에게 드리운 형의 거대한 그림자를 짐작게 한다. 프랜시스의 영화 동료이자 인류학자였으며 존 포드의 배우이기도 했던 프랭크 베이커는 존 포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를 오랫동안 지켜보고 나서 깨달은 건 존 포드가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라는 것이다. 진짜 존 포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거칠고 무례하고 냉소적인 존 포드와는 너무 다르다. 진짜 존 포드는 매우 상냥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그걸 두려워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설의 존 포드는, 다정하고 감상적이고 부드러운 또 다른 존 포드를 보호하기 위해 포드 스스로 만들어낸 존재다. 존 포드는 엄청난 열등감으로 심각하게 고통받았고 그 열등감의 밑바닥에 그의 형이 있다.” 존 포드라는 인물을 말하는 데, 그가 평생 군인을 동경했고 해군 장교를 꿈꿨다는 사실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했다 낙방했을 뿐 아니라, 1차 세계대전 때는 입대를 지원했다가 지독한 근시 때문에 거부당했다. 하지만 그는 태평양 함대에 소속된 친구들 도움으로 1934년에 예비역 해군 소령 계급을 얻게 되고, 정보 제공 활동을 자처한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포드는 동료 영화인들을 모아 야전 촬영단을 조직한다. 성원들이 나이가 많고 야전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이 촬영단은 해군에 의해 거부당하지만 곧 OSS(CIA의 전신) 소속 부대가 되고 존 포드는 촬영단의 지휘관이 되어 하와이와 북아프리카 등의 전투 현장에 투입된다. <미드웨이 해전 The Battle of Midway>(1942) 촬영 당시 (아래 중앙이 존 포드) 1941년부터 종전까지 4년간 이 부대는 여러 편의 전쟁 다큐멘터리를 만들었고, 그중에는 존 포드가 16mm 카메라로 직접 찍은 장면들이 담긴 걸작 < 미드웨이 해전 >(1942)이 포함되어 있다. 명예 해군 준장으로 제대한 포드는 죽기 5개월 전인 1973년 3월 31일, 그의 AFI 평생 공로상 수상식에 참여한 닉슨 대통령으로부터 명예 제독 진급이라는 선물을 받는다. 전국에 방영된 이 수상식에서 포드는 “리처드 닉슨에게 신의 축복을”이라는, 미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극우적 망언으로 각인되었을 소감을 남긴다. 호전적 애국주의로 비칠 수도 있는 이런 행적의 내면적 이유를 정확히 알기는 힘들다. 다만 포드는 한 인터뷰에서 이례적으로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정말 겁쟁이다. 내가 그렇다는 걸 안다. 그게 내가 바보 같은 짓들을 한 이유다. 내가 겁쟁이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여덟 번이고 아홉 번이고 치장을 하지만, 그게 끝나면 나는 여전히 겁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앞장서 뭔가를 하지만 끝나고 나면 무릎이 후들거리기 시작한다.” 포드의 가장 뛰어난 해석자인 태그 갤러거의 논평을 덧붙이는 게 좋겠다. “그는 전쟁에 뛰어들었다. 철저한 몰두와 완전한 초연함이라는 예의 그 모순적 태도로 말이다. 이것은 항상 그의 비극이었고 천재성이었다. 어떤 열정도 그를 소진시키지 못했다. 그의 일부는 여전히 그것의 외부에 외롭게 그리고 불만족스럽게 남아있다. 전쟁기의 그의 사진은 종종 숨 막힐 정도로 낭만적이다. 그의 눈은 검은 안경 밑에 숨어 있고, 그는 가죽 재킷을 걸치고 있으며, 파이프를 과시하듯 피운다. 그의 포즈는 항상 과장되어 있다. 포드는 군인의 장식을 좋아했지만 동시에 그들의 멍청한 살육을 혐오했다. 아마도 그는 소년 시절의 판타지를 실현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총이 아니라 카메라를 들고 전장에 뛰어들었다. 총탄의 샷을 필름의 샷으로 대체한 것이다.” <조용한 사나이>(1952) 촬영 당시. 왼쪽부터 프랜시스 포드, 존 웨인, 빅터 맥라글렌, 존 포드 이런 몇 가지 전기적 사실들이 존 포드의 영화를 더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직접적인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는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영화 세계를 조화로운 전체로 구성하려는 시도는 성공하기 힘들 것이다. 거기엔 적어도 둘 이상의, 여러 명의 포드들, 서로 모순된 포드들이 있을 것이다. 혹은 그의 작품들이야말로 포드의 진짜 얼굴(들)일지도 모른다.(계속)
존 포드에 관해 말하게 될 이 연재의 제목을 ‘존 포드 이야기’로 정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내가 아직 존 포드 감독론을 쓸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해외에 이미 많은 존 포드론이 출간되어 있고, 이 위대한 예술가의 세계에 접근하는 또 다른 길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또 하나의 존 포드론을 쓰기보다는 차라리 훌륭한 책을 번역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나는 아직 그 길을 찾고 있는 중일 따름이다.(사적인 경험을 말하자면, 나는 1997년 토론토에서 비디오로 포드의 < 도망자 The Fugitive >(1947)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 전부터 < 수색자 >와 < 역마차 >를 좋아해오고 있었지만, 이 영화는 내가 아는 포드의 서부극과는 전혀 다른, 괴기스럽지만 신비롭고 매혹적인 표현주의 영화였기 때문이다. 올해는 오랫동안 보고 싶었던 < 태양은 밝게 빛난다 The Sun Shines Bright >(1953)를 드디어 35mm 프린트를 보고 그 예기치 않은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다. 포드가 어디까지 간 것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그를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도망자 The Fugitive>(1947) 다른 하나는 한국의 시네필들과 영화애호가들의 존 포드에 대한, 나아가 고전기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과 연관되어 있다. 199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꽃피기 시작한 한국의 시네필 문화는 유럽 시네아스트들에 대한 편애를 벗어나지 못했고, 미국 고전기 작가들은 오슨 웰즈와 알프레드 히치콕을 제외하면 여전히 무지와 무관심의 사이 어디쯤인가에 방치되어 있는 것 같다(최근 들어서는 유럽의 혹은 유럽 출신의 옛 거장들조차 점점 잊혀져가는 듯한 불길한 징후가 보이긴 하지만). 단적으로 한국에는 존 포드에 관한 단 한권의 역서도 저서도 출간되어 있지 않다. 내가 역자로 참여한 「할리우드 장르의 구조」(한나래)의 한 챕터의 절반가량이, 장르적 시야에 한정되어 있긴 하지만, 그나마 존 포드를 주의 깊게 다룬 유일한 한글본이다. 이런 상황은 시네마테크 프로그램과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부산에서 시네마테크 프로그래밍을 8년째 해오고 있는 내 경험으로는, 고전기 할리우드 영화 기획전은 객석이 텅텅 비는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감행하기 힘들다. 상대적으로 더 많고 다양한 취향의 시네마테크 관객들이 모여 있는 서울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대다수의 프로그램이 유럽과 일본의 시네아스트들에 집중되어 있다. 장 르느와르, 에릭 로메르, 오즈 야스지로 등의 이름은 빈번히 오르내리지만, 존 포드, 하워드 혹스, 라울 월시 등의 이름은 찾기 힘들다. 어떤 시네마테크도 수익 혹은 점유율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 상황이 바뀌기를 바라지만, 아직 우리에게 존 포드는 새롭게 해석되기보다 먼저 소개되어야 할 시네아스트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존 포드 이야기’라는 간판을 단 이 곳에서 나는 한 사람의 해석자가 아니라 소개자로서 존 포드를 말하려 한다. 그래서 이 글을 본 몇몇 사람이라도 존 포드의 영화를 보고 좋아하게 되기를 바란다. 존 포드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한 거장의 세계와 만난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모든 음악의 흐름은 바하로 되돌아간다”는 쇤베르크의 말을 모방해 나는 ‘모든 영화의 흐름은 포드로 되돌아간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만일 이 말을 포드가 직접 듣는다면 그는 화를 내며(그는 다혈질이었고 예술 운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건 그리피스나 무르나우에게나 어울려”라고 말했을지 모르겠다. 또한 다른 만신전의 명부를 가진 많은 영화전문가들의 비웃음을 살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표현은 과장이다. 존 포드만큼 우뚝 솟은 많은 감독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영화들을 어떤 영화들보다 원형적이라고 느낀다. 고요한 대지, 말없는 사나이, 떠나는 자의 뒷모습, 발설되지 않은 신음과 폭발하는 광기, 축제와 난장의 활력과 도취, 경건한 제의, 안식으로서의 유머, 추하고 사랑스런 얼굴들, 숭고한 배려와 보살핌, 악인의 예의 혹은 성인(聖人)의 비행(非行), 빛과 어둠이 빚어내는 매혹과 불안과 피로의 풍경, 소멸해가는 공동체의 향기, 그들의 배열이 빚어내는 리듬과 화음과 아름다움 등등 내가 영화를 보고 경탄하는 거의 모든 것들이 한 사람의 영화에 담길 수 있을까. 나는 존 포드의 영화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거기엔 우리가 영화에 빠지게 만든 대부분의 것들이 있다. 한 사람의 포드가 아니라 여러명의 포드가 있을 것이다. 피터 보그다노비치가 오슨 웰즈에게 좋아하는 감독들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웰즈는 “존 포드, 존 포드, 그리고 존 포드”라고 답했다. 웰즈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나는 그의 대답을 존 포드의 다면적 원형성에 대한 찬사라고 느낀다. 존 포드의 영화를 보는 것은 장르와 사조를 넘어 시네마틱한 것들의 난장으로 입회하는 것이다. 존 포드 John Ford 존 포드는 1894년에 태어나 1973년에 죽었다. 1917년부터 1966년까지 무성영화, 단편, 다큐멘터리를 포함해 140여편의 영화를 감독했고(무성영화의 상당수는 소실되었다), 전무후무하게 4번의 오스카 최우수 감독상을 받았으며 < 철마 The Iron Horse >(1924)를 비롯한 많은 영화가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할리우드 주류에서 환대받았고 세속적 명예와 부를 얻은 가장 출세한 감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당대의 존 포드는, 고전기 할리우드의 다른 거장들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장인으로 존중받았으나 그 이상은 아니었다. 당대의 비평가들은 존 포드 영화의 미학적 가치에 대해선 무관심하거나 부정적이었다. 포드 스스로도 자신의 영화를 예술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자신을 예술가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영화를 ‘시’라고 부른 한 평자의 말을 ‘헛소리’(horseshit)라고 일축했다. 존 포드가 당시의 미국 특히 뉴욕 지식인 사회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에 대해선 꽤 알려진 두 가지 사례가 있다. 하나는 마틴 스콜세지의 경험담이다. 존 포드의 열렬한 팬인 스콜세지는 뉴욕대학교(NYU) 강사 시절이던 1969년 존 포드의 영화를 수업시간에 상영했다. 당시 강의를 들었던 한 학생은 이렇게 회고했다. “마티(마틴 스콜세지의 애칭)가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가짜 권총을 든 채 교실에 들어왔다. 원래 상영할 예정이던 < 이창 > 대신 존 웨인이 가증스런 인종주의자를 연기하는 서부극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이창>을 보려고 모여든 학생들은 모두 낙담해 ‘우’하고 소리를 질렀다. < 그린 베레 >가 공개중인 때로 존 웨인은 닉슨 다음으로 인기가 없는 인물이었다. ‘교실을 나가는 학생은 성적을 주지 않겠어’라며 가짜 권총을 든 채 스콜세지는 교실 문앞에 버티고 섰다. ‘영화의 제목은 < 수색자 >다. 이건 서부극 최고의 걸작이야’라고 말했다. 영사가 시작됐다...... 쓸쓸한 존 웨인의 모습이 황야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이 문을 통해 보여지는 마지막 장면이 끝났다. 나는 눈물이 흐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마틴 스콜세지: 영화로서의 삶>) 1960년대 진보적인 뉴욕 대학생들의 야유를 불러일으켰던 < 수색자 >는 2012년 영국의 영화지 「사이트 앤 사운드 Sight & Sound」가 전세계 846명의 영화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집계한 세계영화사 10베스트 명단의 7번째 자리를 차지했고 존 포드는 가장 위대한 감독 리스트에서 칼 드레이어와 함께 6번째 자리에 올라있다.(<수색자>가 10년마다 집계되는 이 명단에 처음 오른 것은 포드 사후 9년이 지난 1982년이었다.) <수색자 The Searchers>(1956) 또다른 사례는 장 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에와 연관되어 있다. 두 사람은 1975년초 자신들의 작품 <모세와 아론>이 상영되는 뉴욕영화제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한다. 마르크주의자인 브레히트의 정신적인 제자를 자임한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당대의 가장 전위적인 작가로 평가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뜻밖에 2년 전에 죽은 존 포드를 보고 싶다고 말해 영화제 프로그래머인 리처드 라우드를 당황케 했다. 당시 젊은 영화학도였던 태그 캘러거는 이렇게 회고한다. “스트라우브에 관한 최초의 책을 출간한 바 있는 리처드 라우드는 존 포드를 스트라우브의 안티테제로 통렬히 비난한 바 있다. 라우드의 태도는 일반적인 것이었다. 당시 많은 뉴욕 사람들은 포드의 영화가 인종 차별과 군국주의, 가부장제, 쇼비니즘, 감상적인 통속성, 진부한 상투성을 옹호한다고들 했으며, 따라서 그를 혐오하는 것을 일종의 도덕적 의무로 여기고 있었다.” 태그 갤러거는 두 사람을 집으로 초청해 거실 바닥에서 존 포드의 < 순례 여행 Pilgrimage >(1933)과 < 도노반의 산호초 Donovan’s Reef >(1963)을 16mm 프린트로 같이 보았다. 영화를 본 다음 장 마리는 얼굴을 붉히며 자신이 영화에서 시도하고 있는 것이 존 포드와 미조구치 겐지를 결합시키는 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경험담을 전한 태그 갤러거는 10여년 뒤 「JOHN FORD-The Man and His Films」(1986)를 썼고 이 책은 아직까지도 존 포드에 관한 최고의 연구서로 꼽힌다.) 많은 고전기 할리우드 거장들은 당대에는 비평적으로 경시되다가 영화 이력의 말기 혹은 사후에 주로 프랑스 누벨바그 세대에 의해 ‘작가’로 추앙되고 미국 평단이 이를 뒤따르는 경로를 밟았다. 잘 알려진 대로 1967년에 첫 출간된 프랑수아 트뤼포의 명저 「히치콕과의 대화」는 유능한 흥행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을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으로 재평가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데 존 포드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누벨바그 세대가 작성한 ‘작가’ 명단에서 빠지진 않았지만 그에 대한 그들의 비평은 히치콕이나 하워드 혹스, 니콜라스 레이 등에 대한 숭배에 비하면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편이었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이것이 누벨바그 세대의 대부인 앙드레 바쟁이 존 포드의 매력에 둔감한 데서 오는 ‘바쟁 바이러스’ 때문이라고 표현했다. 바쟁은 서부극에 관한 비평을 여러 번 썼고 < 수색자 >를 수작으로 언급하긴 했지만, 같은 해에 나온 버드 보에티처의 < 7인의 무뢰한 Seven Men From Now >(1956)을 더 높이 평가했다. 누벨바그 평론가들의 기지였던 「카이에 뒤 시네마 Cahiers du Cinema」 1958년 12월호에 실린 올 타임 베스트 명단의 24위 안에는 존 포드의 영화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1위는 무르나우의 < 선라이즈 >였다). 히치콕에 열광한 프랑수아 트뤼포도 존 포드에 대해선 냉소적이었다. 1975년에 쓴 에세이에서 트뤼포는 이렇게 고백했다. “비평가 시절에 나는 존 포드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고, 그에 대한 악평을 두세번 썼다. 하지만 TV에서 < 말없는 사나이 The Quiet Man >(1952)를 보고 내가 얼마나 장님이었는지 깨달았다. 그의 영화를 계속 다시 보게 되었고 지금은 장 지오노만큼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The Films in My Life」). 하지만 포드의 사후에도 이 정도 논평이라면 어쩐지 인색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1974년에 쓴 추도문에서도 트뤼포는 “포드의 영화에서 내가 사랑하는 것은 그가 항상 캐릭터에 우선권을 준다는 점이다.... 그는 모파상과 투르게네프에 비견될 수 있다.”고 썼다. 확실히 트뤼포에게 포드는 문학적인 감독으로 비쳤던 것 같다. 히치콕에게 트뤼포가 있었다면 존 포드에게는 린지 앤더슨 Lindsay Anderson(1924~ 1993)이 있었다고 말할 수는 있다. 영국 프리시네마의 기수이자 기념비적 작품 < 만약에... If... >(1968)를 만든 이 비평가/감독은 젊은 시절부터 자칭 ‘포드 중독자’였고, 「사이트 앤 사운드」 등을 통해 1951년부터 존 포드 영화에 관한 열렬한 찬사를 바쳤으며 다섯 차례 포드를 만나 인터뷰를 가졌다. 하지만 그의 비평은 종종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누벨바그 세대의 비평만한 영향력을 가지지 못했고, 그나마 그의 비평과 인터뷰를 모은 단행본 「About John Ford」는 1981년에야 첫 출간되었다.(하지만 < 황야의 결투 My Darling Clementine >(1946)를 포드의 최고작 가운데 하나로, < 수색자 >를 퇴조의 징후가 명백한 영화로 꼽는 그의 독특한 견해는 존중할만한 예민함을 갖추고 있다.) 요컨대 존 포드는 고전기의 거장 가운데서도 가장 늦게 발견된 시네아스트 가운데 한 사람이며 그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존 포드에 대한 비평의 지체에 대해 하스미 시게히코는 세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첫째는 국적을 불문하고 사람들이 자국 영화에 냉담해지기 쉽다는 것이다. 둘째는 진보적인 ‘전위 작가’, 보수반동의 ‘고전적인 작가’ 같은 이데올로기가 개입된 관념들이 영화를 볼 힘을 뺏기 쉽다는 것이다. 셋째는 1970년대까지도 영화사라는 개념의 성립에 필수적인 영화를 볼 기회가 매우 한정적이었다는 것이다. 2005년 5월25일 서울의 필름포럼에서 가진 강연회에서 하스미는 “그래서 존 포드에 대해선 우리(동양인)가 서양인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기세 좋게 주장했다. 하스미의 말이 맞다면 우리는 존 포드의 영화를 더 잘 보고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자리와 시기에 있는 셈이다. 이 연재는 포드의 전기적 사실들과 그의 작품을 함께 다루게 될 것이다. 다음 회에는 존 포드라는 사람에 대해 주로 소개하려 한다. 존 포드라는 사람과 그의 작품 모두 모순투성이인 복합체라고 말한 사람은 태그 갤러거다. 예술가의 인격과 작품은 완전히 독립적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기도 하다. 존 포드는 후자에 가까운 것 같다. 존 포드는 사람으로서도 매우 흥미로웠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