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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독
- 코지마 마사유키
- 제작년도
- 1998
- 출연
- 미나구치 유코, 오가타 메구미, 사쿠라이 토모, 나가이 이치로, 마츠모토 리카
사진: 정기성 맨몸으로 다가오는 것들이 좋다. 불필요한 수사도 허세도 없이 알몸으로 돌진해 오는 영화가 좋다. 그런 영화들은 대개 허망하지 않다. 표층과 심층의 분리도 없고 잔망스러운 기교도 없다. 잔꾀를 부린 요사스러운 이미지로 결국은 뻔한 메시지를 전하며 맥 빠지게 하지 않고, 메시지에만 복무하거나 고결한 영화인 척하며 시간과 공간에 관한 대단한 사유라도 하는 것처럼 누가 찍었는지도 분간하기 어려운 풍경을 지겹게 비추지도 않는다. 이는 물론 영화가 아니라 내가 영화에 다가서서 느끼는 감상에 가깝다. 그러나 실상 무엇이 무엇에게 다가선다고 분별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서로 만난다. 그렇게 말하고 나면 영화비평이란 영화와 내가 만난 후기와도 같아진다. 나름의 고된 노동으로 생산했으나 세상에 별 이로운 가치를 남기지 않는 생각들의 언어. 오래도록 불편했던 질문 중 하나는 ‘비평가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글쟁이 동료들과 대화 나눌 때면 비평가의 역할이 화두가 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무언가 대단한 사명감이라도 가져야 할 듯해 자리를 피하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고민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일말의 사명감이라도 생길까 싶어서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한다. 어떤 영화에 대해 느낀 바를 표현하고 싶어 날뛴 결과가 내 비평문이라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몇 가지 문제가 생긴다. 적든 많든 독자가 있는 지면에 자기 욕망에 못 이겨 쓴 글이 실릴 자격이 있을까? 원고료를 받을 가치가 있을까? 미리 밝히자면 나는 이 문제에 대해 길게 고민해 본 적이 없다. 어찌 되었든 노동력을 들이면 대가를 받는 게 당연하다 생각하고, 욕을 하든 공감하든 누군가 한 명은 내 글을 보며 반응하고 해당 영화에 대한 감상을 다시금 들여다보는 계기가 생기리라고 뻔뻔하게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복하자면 글에 반응하는 이가 꼭 한 명은 있어야 한다. 편집진이든 독자든 단 한 명이라도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지면을 얻을 자격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정말 제발 한 명은 있어라, 하는 마음이 든다. 일인칭으로 글을 써달라는 원고청탁서 내용이 반가워 평소 조심스럽게 쓰곤 하는 ‘나’란 말을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사용하고 있는데, 정작 내 이야기에 누구도 관심이 없다면 민폐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독자의 문제만은 간과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글을 조금, 아니 어쩌면 많이 꼬장꼬장하게 쓸 생각이다. 글은 쓰는 모든 사람은 읽을 사람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쓴다. 더군다나 고료를 받고 글을 쓰는 이에게 그건 의무 사항이다. 실상 독자를 고려하지 않고 원고를 작성하는 평론가는 없다. 만약 있다면 그이는 자격 상실이라고 본다. 적어도 고료를 받고 쓰는 이로서는 그렇다. 물론 많은 이들이 내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상 모든 것에 관한 견해는 각기 다르고, 달라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비평가의 역할은 거기까지다. 어떤 영화에 대한 견해가 한결같아지지 않도록 최대한 많이 떠드는 일이다. 다만 말로만 떠들면 흩어지고 마니까 정제된 언어로, 글로 남기는 거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지지 선언도 하고 공을 들여 비판도 하는 것이다. 고루한 이야기를 길게도 했다. 하지만 지루해질지라도 이야기의 과정이 필요할 듯했다. 결코 이 코너의 이름을 향해 하는 말은 아니지만, 비평의 안위에 대해 질문하거나 걱정하는 일을 기피한다. 간혹 ‘비평의 위기’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참을 수가 없다. 솔직히 위기가 아니었던 적은 있었던가, 단 한 번이라도 순조로웠던 적이 있었나 싶다. 새로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세상사에서나 예술계에서 자식들이 아버지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잔존의 싹을 제거하려 하거나 흔적을 지우려 드는 일은 지속되어 왔다. 새로운 아버지를 받들려고 하거나 자신이 새로운 아버지가 되려고 하는 시도도 언제나 있어 왔다. 이는 언제 어느 때고 저마다의 문제는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득권 세력이라고 여겨지는 이들이 보통 원인 제공자로 지목되어 공격받는다. 그런데 심한 개인주의자의 나쁜 전형인 나로서는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이 세상엔, 특히 영화계엔 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하고 제거하려는 이들이 왜 이리도 많을까. 당신은 당신이고 나는 나인데 왜 신경을 쓰는 걸까. 아니 애초에 진짜 혈육도 감당하기 힘든데 굳이 아버지와 같은 존재를 또 두려는 걸까. 물론 게으르고 무기력한 인간의 안이한 생각이라는 걸 인식하고 있다. 혁명적인 선언이 없이는 활동의 동력을 얻기 어렵다는 점도 안다. 그럼에도 생각을 멈출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싫어 할아버지의 유산을 이어받으려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국내에선 아니라 할지라도) 몇십 년 전에 유행했던 이론을 마치 새로이 발견하거나 정립한 이론이라도 되는 것처럼 비평문에 적용하거나 한참 전에 유행이 몰아쳤던 유형의 영화가 마치 이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것처럼 추앙하기도 하는데, 그런 상황을 지켜보자면 이건 발전이 아니라 도태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다른 이의 말을 빌자면 도태되었던 건 나였던 모양이다. 세상 거의 모든 것은 유행을 탄다. 옷과 마찬가지로 이론에도 유행이 있고, 비평의 유형 역시 마찬가지다. 한때는 이론 비평이 일었으나 천편일률적이라며 텍스트 비평에 힘이 실렸고, 이후에는 또 텍스트 비평보다 테마 비평이나 이론 비평에 관심이 쏠린 지 한참 되었다. 그 사이, 가까이 지내는 후배 평론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가 속한 평론가협회 회원들은 도태되었단다. 거칠게 요약하면 텍스트 비평을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협회 평론가들 모두가 텍스트 비평만 하는 것은 아닐뿐더러, 작품마다 그에 어울리는 비평문을 쓴다. 그럼에도 그런 인식이 생기는 이유는 확실히 특정 이론을 접목하는 글보다 작품 분석을 기본으로 하는 비평문이 많이 나오는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도태된 평론가라는 후배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적잖이 충격받았다. 도태되었다는 말보다 그 말이 후배에게서 스스로 인정하듯이 나왔기 때문이다. 다른 이에게 그 말을 들었으면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이론을 인용하거나 정립하지 않는다고 해서 지성이 없는 글이라 할 수 없고, 이론에 대해 빽빽이 열거하거나 레퍼런스를 줄줄이 나열한 글이 지적이거나 비평에 맞는 글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간혹 비평해야 하는 영화 이야기보다 자신이 인용한 문구나 레퍼런스로 삼은 영화들에 더 몰두하는 글을 보면 혹은 그런 글들이 더 각광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난 기꺼이 도태되고 실패한 평론가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상 틀린 말도 아니다. 지면을 계속 확보하기 위해서는 독자들이 혹할 말한 주제로 기획을 잘해서 글을 써야 한다는 업계 선배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럴 능력도 없어서 결국 지면 싸움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엄청난 팬을 모은 몇 영화들에 어떠한 흥미도 비평 의지도 일지 않아 원고를 거절하면서 때를 놓쳐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순수하게 글을 너무 못 썼던 적도 많다. 말하자면 능력은 부족한데 오만했다고 할까. 그런데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 건 없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도 인용하려고 발췌해 놓은 문구들을 넣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쓰지 않기로 결심했는데, 완전히 확신이 있어 책임질 수 있지 않는 한 함부로 다른 이의 글을 인용해선 안 된다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고지식한 생각을 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참 여러모로 무능력한 인간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주절대는 이유는 모종의 오기가 생겨 이런 유형의 평론가도 있다는 점을 설득하고 싶어서이고 (반복할수록 화가 나 이 말을 한 후배들의 입을 가만두고 싶지 않고 선배였다면 더더욱 그러고 싶지만) 도태되었다고 여겨지는 평론가에게도 그만의 의지가 있어 그 길을 선택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다. 시네필이나 평론가들이 즐겨 사용하거나 좋아하거나 혹하는 단어들이 있다. 물질성, 물질적, 즉물적, 육체성, 신체, 유령, 운동성, 운동감, 생동감, 리듬 등등. 근간에 유행하는 단어를 노골적으로 밝힐 수는 없고, 어쨌든 이외에도 많다. 나는 한때 ‘유령’이라는 단어 혹은 ‘물질성’이라는 단어가 만능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저기 난무하는 것 같아 불편하게 여긴 적은 있으나, 평론가들이 자주 사용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체로 대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몸을 ‘신체’로 쓰느냐 ‘육체’로 쓰느냐에 따라 글을 조금 이론적으로 발전시킬지 감각과 감정에 몰두해 쓸지에 관한 방향성이 달라지기에, 모든 글은 저마다의 근거와 존재 이유가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종종 유형 혹은 계파를 나누는 행위를 즐기지만 세부에서 파생되는 힘을 넘어서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전술한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어떤 유형의 비평문을 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잘 쓰는 게 중요하다. 물론 그 해답을 알고 있으면 매번 끙끙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이 글을 쓰면서 어떻게 하면 잘 실패할 수 있을지 고민했더니 결코 좋은 글은 나오지 못했어도 가슴은 시원하다. 이 글의 독자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난 이렇게 제멋대로 글을 써본 적이 없다. 원고청탁서에는 이런 요청이 있었다. “국내 영화 비평계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면서 한국(고전)영화 1~2편에 대한 비평을 곁들”이라는 (정확히는 코너 설명이지만) 요청이었고, 밑줄까지 그어 강조했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어떤 구체적인 영화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 코너를 즐겨보는 이라면 왜 아직도 영화 이야기를 하지 않는지 의아했을 것이다. 이유는 서두에 있다. 알몸의 영화라고 부르고 싶은 작품들은 대체로 비평이 실패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혹은 나의 재능과 능력이 모자라서 뿐만 아니라 언어의 한계를 절감하게 만든다. 사진: 정기성 내게 그런 영화 중 한 편이 임권택 감독의 < 개벽 >(1991)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 영화에 대해 결코 길게 말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고, 말을 할수록 이 영화와 멀어질 것임을 예감했다. 처음엔 동학 2세 교조 해월 최시형( 이덕화 )의 긴 이야기를 거의 도주의 형태로 보여주는 영화의 군더더기 없고 강력한 형식에 홀딱 반했다. 그런데 그보다 영화를 볼수록 사무치는 감정을 무어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라 더욱 끌렸고, 그 앞에서 나의 언어는 실패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직감했다. 영화를 보고 있자면 해월의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는데도 해월의 육체성이 강하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그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슬픔이라고만 하기에는 더 깊은 곳에서 오는 감정, 그러나 결코 눅눅하거나 무겁지 않은 감정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사무치는 감정 혹은 그 감정에 진동을 주는 무언가가 해월이 있는 풍경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 지점을 풀어야 글을 제대로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가망이 없어 보였다. 이미 오래전 이야기다. 그리고 한참 후 KMDb에서 임권택 감독에 관한 자료를 찾다 정성일 평론가와 허문영 평론가의 대담을 보았고 그 대담 속에서 영화가 주는 인상에 가장 근접한 표현을 찾았다. 허문영 평론가는 <개벽>을 두 번째 보며 “이 영화가 인물을 찍은 게 아니구나, 인물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이유를 찍었구나, 라는 느낌”을 받았고 “인물이 서사 안에서 주인공이 되기에 실패한 영화구나, 그 실패가 어디서부터 온 건지 영화가 대답해 주지는 않지만, 그 패배의 불가피성에 대해 풍경이 대답을 해야 하는데, 풍경은 침묵하고 있다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고 덧붙인다. 나는 이 이상 <개벽>이 안기는 느낌에 관해 정확히 표현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이 말은 임권택 감독 영화의 풍경에 조금 더 다가갈 모종의 영감을 준다. 사진: 정기성 이는 대담의 일부이긴 하지만 포괄해 말하면 좋은 비평문은 글을 쓰는 데 영감을 준다. 그러나 이 맥락에서 나 혹은 우리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지 굳이 묻지는 않을 테다. 허무한 자문자답도 역량에 어울리지도 않는 반성 또한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혹시나 기회가 되어 임권택 감독의 작품에 관해 길게 글을 써야 할 일이 생기면 또 머리 쥐어뜯으며 말들을 쥐어짤 것이다. 그게 나의 비평이 조금이나마 안녕해지는 길이다. 홍은미(영화평론가) l 2018년 《씨네21》 영화평론상 당선. 《필로》, 《씨네21》 등 여러 지면에 글을 써왔고 현재 부산영화평론가협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히어> 중 '실사'에 드리운 한계를 넘으면 비로소 선명해지는, 영화가 낳은(을) 새로운 감각과 지형을 발견합니다. 애니메이션은 만화영화인가? 엄밀히 따지자면,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누군가는 이런 우유부단한 답변이 엄밀한 것이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만화’와 ‘영화’라는 여타의 매체들과 복합적으로 엮여 있는 것이 애니메이션의 분명한 현실이니 말이다. ‘만화영화’란 말이 애니메이션의 고유성 내지 자율성을 해칠 수 있다는 반론도 있을 것이다. (요즈음에 만화영화라는 호칭이 잘 쓰이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리라) 그러나 고유성 내지 자율성이 위협받는 지점에서 그 매체의 성질이 잘 드러나기도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런 반론은 오히려 애니메이션이 겪는 고유한 문제를 묵과한 결과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런 거친 단언들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 매체사적 관점에서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서둘러 훑어봐야만 하겠다. 그런데 애니메이션이 무엇인가? 여기서는 저 위대한 애니메이터 노먼 맥라렌의 (1950년대 조지 시피아노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쓰인) 정의를 일단 따르기로 하자. “애니메이션은 움직이는 그림의 예술이 아니라 그려진 움직임의 예술이다. 각 프레임 사이에 무엇이 발생했는가는 각각의 프레임상에 무엇이 존재하느냐보다 중요하다. 그러므로 애니메이션은 프레임들 사이의 속임수로 눈에 보이지 않는 틈새를 교묘하게 조작하는 예술이다.” 즉 우리네 세계에 존재하는 물질들의 운동성을 (기록하는 대신) 만들어내고 나아가 시간의 흐름을 생성하기 위한 프레임 바이 프레임의 작업이 요구되는 미적 결과물 일체를 맥라렌은 애니메이션으로 정의한 것이다. 애니메이션의 특성을 기초적이면서도 광범위하게 짚는 이 정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아니 오늘날이라서 더욱 탁월하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어째서 만화와 영화의 조합어가 특정 매체를 표현하는 말이 된 걸까? 아무래도 ‘만화’는 그려진 가상의 세계를 표현한다는 점, 그리고 이를 과장하여 초현실적인 묘사를 왕왕 보여준다는 점이 같기 때문에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시간(의 흐름)과 운동(성)으로써 작용한다는 점, 그리고 이 작용의 주 형식이 프레임과 숏이라는 점 때문에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물론 동아시아에서의 번역된 명칭만으로 너무 많은 걸 해석하려는 건 아닌가 싶을 수도 있을 테다. 하나 만화영화라는 명칭은 사실 동아시아만의 것이 아닌데, 만화를 이르는 말 중 하나인 카툰(Cartoon)은 미국에서 만화영화와 비슷한 용법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당장 대표적인 애니메이션 전문 TV 방영사인 카툰 네트워크를 떠올려 보시라. 카툰 네트워크 스튜디오 그 태동기인 1910년대에 (< 리틀 네모 >의) 윈저 맥케이나 (< 고양이 펠릭스 >의) 오토 메스머 같은 위대한 만화가들의 세례를 받으면서 (셀-)애니메이션과 카툰은 창작에 있어서든 산업에 있어서든 깊이 뒤섞이고 혼용되기 시작했으며, 이 때문에 애니메이션학자 찰스 솔로몬이 『마법의 드로잉: 애니메이션의 역사(Enchanted Drawings: The History of Animation)』에서 말했듯 “애니메이션은 역사의 대부분에 걸쳐서 그려진 카툰의 동의어”가 되었다. 다시 한 번 “그려진 가상의 세계를 표현한다는 점, 그리고 이를 과장하여 초현실적인 묘사를 왕왕 보여준다는 점”을 곱씹어 보자. 하지만 당연하게도, 21세기의 우리들은 애니메이션의 세부적이고 다양한 갈래를 ‘만화’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노먼 맥라렌의 추상 애니메이션, 이리 트른카의 퍼핏 애니메이션, 그리고 < 터미네이터 2 >(제임스 카메론, 1991)와 < 쥬라기 공원 >(스티븐 스필버그, 1993) 이후 컴퓨터 그래픽스의 영화적 활용을 순전히 만화와의 상관만으로 논할 수 있을까? 혹은 스탠 브래키지, 존 휘트니, 바술카 부부 등의 작업들처럼 분명 애니메이션의 성립 요건을 충족하는 것으로 보이나 (후대에 나온 3D 애니메이션과 달리) 애니메이션사 서술에서 주로 누락되고 실험영화사나 영상미술사에만 등장하는 경우는 또 어떤가? 이렇듯 오늘날 광대해진 애니메이션에 있어 ‘만화’의 특권성이란 어딘가 불충분한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영화’는 어떨까. 영화학자 톰 거닝이 「순간을 애니메이션화하기: 애니메이션과 사진의 은밀한 대칭성(Animating the Instant: The Secret Symmetry between Animation and Photography)」을 비롯한 여러 연구에서 말했듯, 실사 영화의 역사와 전통적 애니메이션의 역사는 (단지 애니메이션이 좁은 의미에서 영화사의 일부인 것을 넘어) 서로 깊이 얽혀 있을뿐더러 순전히 기술의 계보로만 따지면 애니메이션이 실사 영화에 앞서서 우리네 세계에 출몰했다. 더군다나 요즈음 대부분의 대중적 실사 영화는 실사 이미지와 그래픽 이미지 사이의 디지털 합성으로 이루어진, 사실상의 부분적/비가시적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애니메이션학자 수잰 부캔은 이를 ‘편재하는 애니메이션(pervasive animation)’이란 용어로 표현한 바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디지털 이후 영화는 근본적으로 애니메이션의 특수한 일종이 되었다’라는, 미디어학자 션 커빗과 레프 마노비치의 따로 또 같은 주장은 그 도발성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논리적인 결론이라 할 만한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영화(사 서술)에 있어 렌즈 기반의 사진적 이미지가 지닌 특권성은 애니메이션을 주변화하거나 보조화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은폐된 기원이자 기둥으로서 애니메이션. (상) 원작 『여기서』(리처드 맥과이어, 2014) 중 / (하) 실사 영화 <히어> 중 (사진: " Here, 2014 ", Richard McGuire) 요컨대 애니메이션이란 범주는 ‘만화영화’로서의 요소를 강하게 지닌 동시에 이를 완전히 초과하는, 근원적인 ‘혼동과 분산(발터 벤야민)’에 처해있는 것이다. 애니메이션은 만화영화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흥미롭게 볼 만한 작품이 있다면, 아무래도 로버트 저메키스의 근작 < 히어 >(2024)이지 않을까? 리처드 맥과이어의 급진적인 반(反)만화 『여기서』를 영화화한다는 난제를 수행하면서, 저메키스는 원작의 (드라마적 서사와 정돈된 타임라인 없이 펼쳐지는) 초월적 고정 시점과 다중 프레임 구조에 적당한 인간적 중력을 부여하려 애쓴다. 그런데 어떻게? (마구 혼재된 타임라인을 관통하기 위한) 모션 캡처와 3D 애니메이션 기술을 적극 활용해 작품을 부분적인 가족 드라마로 변형시킴으로써. 그럼에도, 혹은 그렇기에, 영화는 불안정하고 과포화된 시각적 구도와 지나치게 매끈한 사물 이미지 등 그 외양에 있어 동시대 연극 같기도 하고, 제프 월이나 그레고리 크루드슨의 사진 같기도 하며, (저메키스 자신이 지난 2000년대에 천착했던) 모션 캡처 CG 애니메이션 같기도 한, 지극히 비(非)영화적인 형태를 띠게 된다. 달리 말해 반만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비영화 <히어>에는 애니메이션이 활용된다는 것을 숨기거나 완화하려는 노력의 흔적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를 그저 작품의 실패라고 쉽게 치부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저메키스에게는 ‘애니메이션다움’을 부상시키는 것 자체가 목표는 아니었을까? 우리가 지식으론 알고 있는 ‘편재하는 애니메이션’의 비가시적인 사실을 과도하리만큼 가시화하는 것 말이다. 고정된 위치에서 인간사와 자연사를 번잡하게 조망할 수 있는 초월적 시선이란 (적어도 영화 내적으로는) 애니메이션 기술을 통해서만 구현 가능하다. 이런 당연한 사실을, 저메키스는 그러한 시선으로 보는 세계는 인간적 지각(의 기준)과 닮기보다는 퍽 애니메이션적일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믿음으로 치환하여 밀어 붙여본 것이다. 이는 반만화적인 구상과 비영화적인 구성을 지탱하고 구축하는 것이 애니메이션 기술이란 사실과도 겹치며, 우리를 마지막 장면으로 끌고 간다. 기억을 더듬는 노년의 부부를 무심히 바라보다 마침내 거대하고 유려하게 움직이는 ‘영화적’ 시선. 그것의 감동은 애니메이션적인 것과 영화적인 것 사이의 내재적인 혼융이 양자의 전환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근사하게 제시한다는 데에서 온다. 다시 한 번, 이 무모한 작품은 애니메이션이 만화영화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함을, 그리고 애니메이션이 이 이중구속 속에서 제 역량을 탁월하게 발휘하기도 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렇기에 이 근원적인 ‘혼동과 분산’은 은총에 가깝다. 윤아랑(비평가) l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을 주로 다루며, 주체성과 현실감각을 문제시하는 문화 비평에 관심이 있다. 지은 책으로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2022),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공저, 2023), 『악인의 서사』(공저, 2023), 『라임 앤 리즌 2호: 오컬트』(공저, 2025) 등이 있다.
" 발성영화 ", 《조선일보》, 1930. 1. 28., 5면. (조선극장 <네날개> 상영 홍보) 다시 만난 세계: 식민지 조선의 극장문화 이야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를 바탕으로 역사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와 행간 속에 숨겨진 욕망들을 재조명합니다. 세계영화사에서 발성영화(talkie)의 탄생은 중요한 변곡점으로 손꼽힌다. ‘무성의 양식’으로 출발했던 영화는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1927년에야 비로소 사운드를 내장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다만 발성영화의 발생론적 조건인 사운드 기술은 그 자체로 혁신적인 ‘신기술’이라 보기엔 어려움이 있다. 이미 영화가 탄생하기 이전에 축음기가 개발되었고, 녹음과 재생 기술 또한 상용화 단계에 접어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외려 문제는 넓은 공간을 충만하게 채울 만한 사운드 증폭 기술이 부족했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 문제도 진공관이 개발된 1910년대부터는 해결될 수 있었지만, 소리 없이도 산업적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던 영화계가 굳이 새로운 기술을 접맥해 가며 모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판다고 했던가? 연이은 흥행 실패로 고초를 겪고 있던 워너브라더스는 이 새로운 양식에 회사의 명운을 걸어 보기로 결정한다. 축음기 회사인 바이타그라프를 인수한 것은 그 첫걸음이었다. 이후 워너브라더스는 영화에 소리를 입히기 위해 부단히 애썼고, 몇 번의 실패를 맛본 끝에 오늘날 최초의 발성영화로 손꼽히는 < 재즈 싱어 >(앨런 크로슬랜드, 1927)를 내놓았다. 결과적으로 워너브라더스의 승부수는 맞아떨어졌고, 할리우드는 본격적으로 발성영화 생산에 돌입하며 영화의 기술적 표준을 바꿔 나가기 시작했다. <재즈 싱어> 중 한 장면과 촬영 현장 (사진: “The Jazz Singer( 1 , 2 )”, IMDb / © 1927 - Warner Bros) 시각적 양식으로만 인식되어 왔던 영화에 새로운 감각(청각)이 더해진다는 점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변화였지만, 발성영화가 영화산업 전반에 미친 영향은 훨씬 지대했다. 무성영화에 비해 배 이상의 제작비가 필요했던 발성영화는 필연적으로 영화산업의 자본집중적 성격을 강화시켰다.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군소 영화사들의 몰락이 가속화되었고, 적극적인 인수 합병을 통해 활로를 모색하려는 영화사들도 생겨났다. 유럽 영화계와 양분해 왔던 전 세계 영화산업의 패권을 할리우드가 확실하게 장악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이러한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영화 종사자들 역시 변화의 물결에 휩쓸렸다. 미셸 하자나비시우스 감독의 < 아티스트 >(2011)는 그 전환기의 풍경들을 세밀하게 포착해 내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남성 주인공 ‘조지 발렌타인’은 무성영화의 대스타였지만 발성영화의 등장과 함께 몰락하게 되며, 반대로 여성 주인공 ‘패피 밀러’는 새로운 시대의 스타로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조지’가 대사 연기에 극도로 부담을 느끼고 있었던 것처럼 적지 않은 무성영화의 스타들이 “말하는 영화(더 정확히 말해 ‘들리는 영화’)”에 연착륙하지 못했다. 한편, 대사의 비중이 비약적으로 늘어난 발성영화기에 접어들면서 시나리오는 문학의 주요 하위 갈래 중 하나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는데, <아티스트>는 시나리오 작가의 위상 변화 또한 ‘깨알같이’ 묘사해 놓았다. 무성영화 촬영 현장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시나리오 라이터’의 의자가 발성영화 촬영장에서는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티스트> 중 (사진: “The Artist( 1 , 2 )”, IMDb / © 2011 - The Weinstein Co.) 한편, 발성영화가 불러일으킨 변화의 파고는 대양 너머에 자리한 식민지 조선의 극장에서도 직감할 수 있을 만큼 거대했다. 더군다나 서양발 수입영화가 극장 프로그램에서 차지하던 비중이 압도적이었음을 고려한다면, 발성영화로의 전환 문제는 단순히 먼 나라의 신기한 이야기로 치부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그것은 실질적인 위협을 환기할 만큼 중대한 변수로 인식되었다. 즉각적으로 야기된 문제는 신작영화의 수입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는 점이었다. 서양발 수입영화의 대부분이 발성영화로 제작되기 시작하자 조선인 극장들의 선택지는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필름 대여료가 크게 인상되었던 점은 일차적인 난관이었다. 발성영화가 제작비 폭등을 불러오자 필름 판매비용 인상은 필연적 귀결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필름 대여료야 어찌어찌 마련할 수 있다 해도, 발성영화를 상영하려면 영사기 자체를 교체해야 했다. 비단 영사기뿐만이 아니다. 원활한 발성영화 상영을 위해서는 ‘입력-제어-녹음-재생-증폭’의 전 과정, 즉 ‘시그널 플로우’가 확립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극장은 발성영사기의 교체뿐 아니라 콘솔과 앰프, 라우드스피커에 이르는 사운드 장비 일체를 새로 장만해야 했던 바, 막대한 초기비용을 감수하는 것은 굉장히 부담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결국 1929년을 즈음하여 조선인 극장들은 과거 상영된 무성영화를 염가에 재상영하며 대응했다. 조선극장 의 경우에는 자체 레뷰단을 조직하여 공연 프로그램의 비중을 늘리기도 했다. 그러나 관객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재상영 정책은 ‘저열한 흥행수단’이라는 비난에 직면했고, 레뷰는 반나체로 등장한 여성 무용수의 육체적 스펙타클을 내세워 관객들을 끌어모으기도 했지만 그 인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극장 프로그램에서 ‘신작영화’를 제외한 채 미봉책으로만 버틸 수 있는 데드라인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었던 셈이다. 조선극장 레뷰단(15세 이상의 여자) 모집 공고 (《조극주보》, 1929. 9. 17., 2면) 조선인 극장들이 공격적인 투자에 망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때마침 닥쳐온 경영난 때문이기도 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식민지 조선 극장업은 호황기에 접어든다. 그러나 물 들어올 때 노를 너무 열심히 저어서였을까? 대표적인 조선인 극장으로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던 단성사 와 조선극장은 서양 대작 영화 유치를 위해 출혈경쟁을 마다하지 않았고, 결국 자금난을 겪게 된다. 이와는 정반대로 질이 낮은 필름을 들여와 ‘저가 정책’을 펼친 우미관은 경쟁에서 한발 물러서 있던 극장이었지만, 나중에는 이익금을 종업원에게 분배할 정도로 여유를 누릴 수 있었다. 1929년 9월에 열린 조선박람회는 위기에 봉착한 단성사와 조선극장에게 한줄기 빛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박람회를 구경하기 위해 지방의 관광객들이 대거 경성에 모여들었고, 극장가도 덩달아 활기를 되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문화적 인프라가 열악했던 지방에서 올라온 관객들은 경성 관객들과 달리 재탕 상영에도 큰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다만 조선박람회로 인한 호황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이었기에, 잠시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던 조선인 극장들은 즉각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박람회 기간 동안 얼마간의 종잣돈을 모으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낙후된 극장 시설을 전면적으로 개축하기엔 무리인 상황이었다. 서양발 발성영화 신작이 연일 발표되던 시점에서 대작 무성영화를 다시 수입하는 것도 별반 실효성이 없는 방안이었다. 결국 단성사와 조선극장은 발성영화를 수입하기로 결정하게 되었으며, ‘조선 최초’의 발성영화 상영 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기에 이른다. 1930년 1월의 일이었다. 사실 식민지 조선에 영화의 신기술을 소개하겠다는 명목으로 진행된 발성영화 시사회의 사례는 1920년대에도 간혹 찾아볼 수 있다. 스크린의 영상에 축음기의 소리를 끼워맞추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발성영화의 상영 자체가 완전히 새로운 사건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30년 1월에 진행된 수입 발성영화 상영은 기사를 통해 예고되고 정규 프로그램 광고를 거쳐 본격적 선전이 진행되었던 만큼 실험적 시사회와는 엄연히 다른 위상을 가진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관객들은 식민지 조선에 당도한 ‘발성영화’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었을까? ㉮ 말하는 사진! 이것만으로도 어떠한 충동을 느끼었다. 서양에서 떠들고 일본에서 떠든다고 조선에서도 떠들어야 할 이유는 없겠지만 움직이는 사진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우리에게는 한번 보아두어야 할 필요로 첫날 단성사에서 토키를 보았다. 제일 재미있는 것은 서양의 선화(線畵)의 예술적 감흥이다. 이것은 발성을 빼어놓고 그대로 보고라도 누구든지 웃지 않을 수 업다. 그리고 “도란몬드” 대위는 발성영화로 감상하는 것보다 그대로 무성영화의 재미있는 “스토리”를 감상하는 편이 낫겠다. 다만 싸운드로써 발성영화의 원리를 뵈어줄 뿐이다. 순회극단의 맨 끝막에서 비로소 발견하고 광희하였다. 군중의 떠드는 소리, 분노에 타는 “세리프” 요염한 여자의 음성 참으로 신기한 생각을 아니 느낄 수 없었다. 어서 우리 조선말로 된 “토-키”가 나오기를 바란다. - 어의동 K생, “ 순회극단을 보고 ”, 《동아일보》, 1930. 1. 30. -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사연구소 편,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0 』, 한국영상자료원, 2019, 193쪽. ㉯ 발성영화 야구시대를 조선극장에서 보았다. 완연히 실연을 보는 것 같다. 영화의 스토리는 무성영화에서 흔히 보던 것과 방사하지만 다만 신기한 것이 “간쓰메” 통을 떼는 소리까지 완연히 들린다. 영어를 잘 모르는 나로서도 가끔 가다가 한마디 두마디 주워 듣는 것이 “타이틀” 읽은 그것보다는 새로운 흥치를 느끼었다. 영어를 충분히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그러나 성음과 표정을 종합하여 귀와 눈을 한꺼번에 활동시키는 것은 연극 볼 때나 다름없다. - 어의동 K생, “야구시대를 보고”, 《동아일보》, 1930. 1. 30. -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사연구소 편,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0』, 한국영상자료원, 2019, 193쪽. ㉰ 조선에 발성영화가 수입된 것은 기쁜 일이라 하겠으나 첫 시험으로 지난번에 상영한 발성영화로서는 그렇게 크게 기대한 보람이 있었느냐 하는 데 의문이었다. 우리가 보고자 한 발성영화는 과학적 안목으로 보아서이었고 영화에 나타나는 미국이면 미국인의 생활이라든가를 본다는 것은 둘째 문제이었다. 왜 그러냐 하면 첫째로 그들의 말에 통할 수 없는 우리로서(만약 조선의 발성영화라면 모르되) 이해하기 어려운 데다가 우리들이 배운 영어와 다른 사투리라든가 곁말 같은 것을 알 수 업는고로 다만 사진에서 음향이 나오고 그 음향이 실물체에서 울려오는 그 음향과 근사함에 여기에 호기심을 갖게 됨에 있다. 그런데 이번 조선극장에서 상영 중인 이 『례뷰-시대』라는 것은 미국의 환락경 『브로드웨이』를 배경으로 하고 초기 발성영화에 있어서의 일반 『팬』들이 알기 쉽도록 음악 같은 것을 많이 넣어 외국 발성영화로서도 흥미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 외에 그 스토리를 말한다면 우리와 거리가 먼 『브로드웨이』의 방종한 남녀들의 애욕 투쟁 이외에는 다른 것이 없는고로 우리들은 이것을 힘써 알려고 할 필요는 없다. - KO生, “ 인상기 - 레뷰-시대를 보고서 ”, 《조선일보》, 1930. 2. 9. -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사연구소 편,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0』, 한국영상자료원, 2019, 268~269쪽. ㉮ 는 단성사에서 상영되었던 발성영화들(<순회극단>, <도라몬드 대위>), ㉯ 는 같은 날 조선극장에서 상영되었던 발성영화 <야구시대>에 대한 감상기이다. 그리고 ㉰ 는 열흘 뒤인 1930년 2월 7일부터 조선극장에서 상영된 <레뷰-시대>에 대한 촌평이다. 무엇보다 관객들이 가장 관심을 보인 것은 발성영화의 기술적 신기성 이었다. 즉, 당대의 관객들은 화면 속에서 소리가 들린다는 점 자체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소요하는 군중의 소리, 분노의 감정을 전달하는 육성, 요염한 목소리의 매력은 “신기한 생각”을 느끼게 해 주었으며, 통조림통을 따는 음향효과 또한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발성영화만의 특징이라 여겨졌다. 이처럼 발성영화의 소구력은 무엇보다도 “실물체에서 울려오는 그 음향”이 영화 속에서 근사치로 재현된다는 점 자체에 있었다. 그러나 스토리의 차원에서 본다면 무성영화와의 차이점을 찾아볼 수 없다는 의견도 제기되었으며, 브로드웨이가 배경인 <레뷰-시대>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과는 거리가 먼 “방종한 남녀들의 애욕 투쟁”을 다루었을 뿐이라 비판받기도 했다. <레뷰-시대(원제 “브로드웨이 베이비스”)>(1929) 중 (사진: “Broadway Babies( 1 , 2 )”, IMDb) 더 나아가 수입 발성영화가 언어장벽 문제 를 본격화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무성영화의 경우에는 외국어로 작성된 간자막의 분량이 상대적으로 적고, 변사 해설이 동반되었기에 수입영화 감상에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외국어 발화의 비중이 크게 늘어난 발성영화는 원활하게 감상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심지어 지식계층에 속한 관객이라 해도 발성영화의 외국어 발화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학교에서 영어를 배웠다 해도 모국어 화자가 아닌 이상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사투리’나 ‘곁말(은어)’도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음성연기로 전달된 감정의 생동감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영어를 충분히 못하는 것”에 유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무성영화기의 상영관습인 변사 연행은 발성영화에 내장된 사운드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지만, 언어장벽 문제를 해소하려면 불가피하게 공존해야 했다. 결국 변사들은 발성영화의 볼륨을 낮춘 상태에서 해설을 이어나갔는데, 당대의 영화비평가 서광제 는 이러한 사운드의 충돌이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콩버무리’를 만들어 놓았으며, 관객들에게 ‘두통’을 야기할 뿐이라 조소하기도 했다. [1] 그래서일까? ‘조선 최초’를 부르짖던 야심 찬 포부와는 달리 단성사와 조선극장 모두 본격적인 발성영화 전환에 대해서는 굉장히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발성영화 상영은 1930년 1월에 시작되었지만, 결과적으로 1930년에 식민지 조선에서 상영된 발성영화의 수는 손에 꼽힐 정도에 불과했다. 앞서 이야기한 언어장벽 문제도 있었거니와 초창기 발성영화들은 사운드의 녹음과 재생에 있어 “발성이 명조치 못한” 기술적 결함도 안고 있었다. [2] 아마도 극장업자들은 발성영화의 시장가치를 확신하기도 전에 전면적인 프로그램 전환에 나서기엔 무리라고 생각했을 공산이 크다. 그런 의미에서 극장업자들은 본격적인 초기비용을 투자하기 전에 먼저 일종의 ‘간보기’ 절차에 돌입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토-키! 토-키! 영화팬들 사이에 한참 떠들던 토-키가 경성에서 그 첫소리를 지르게 되었다. 동시에 단성사, 조선극장 사이에는 피차간 하로라도 몬저 상영을 하야 영화팬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으려고 갖은 고심을 다하여 왔던 것도 사실이다. 동양영화사에서 토-키를 가지러 가던 이튿날 아침 파라마운트 지사에서도 뒤를 이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토-키를 가저오려면 사진뿐만으로는 되지를 않는다. 기계가 두 대나 잇서야 하며 책임 있는 기사가 따로 두 사람이 있어야 한다. 동양영화사와 파라마운트 두 배급소에서는 단성사, 조선극장 두 상설관을 배경하고 어쨌든 가슴을 졸이고 한시라도 먼저 가저오기를 도모하게 된 것이다. 동양영화사에는 이십륙일 아침에 기사 두 명 기계 두 대 사진까지 아울러 단성사에 도착이 되었다. 조선극장에도 반드시 뒤를 이어 토-키 일습이 도착할 것은 명백한 사실, 단지 시간문제에 걸려있을 뿐이다. - 관악산인, “토-키 만담”, 《중외일보》, 1930. 1. 27. -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사연구소 편,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0』, 한국영상자료원, 2019, 193쪽. 관악산인( 이서구 )의 글은 1930년 1월에 단성사와 조선극장이 어떻게 발성영화 상영을 준비했는지 추정해 볼 수 있게 해 준다. 실제적인 실무를 담당한 것은 배급업자들이었는데, 단성사는 동양영화사와, 조선극장은 파라마운트 지사와 팀을 이루어 ‘조선 최초’라는 타이틀을 놓고 2 대 2 태그매치를 벌인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에 건너간 배급업자들이 영화 필름만이 아니라 기계(상영기)와 영사기사까지 함께 묶어 대여해 왔다는 점이다. 이는 1930년 1월의 발성영화 상영이 발성영사기를 구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시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시사한다. 즉, 단성사와 조선극장은 발성영사기 구입을 차후 과제로 미뤄둔 상태에서 몇 차례의 테스트를 통해 시장의 추이를 면밀히 관찰하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로 경성의 주요 조선인 극장(단성사, 조선극장, 우미관)들이 발성영사기를 전격적으로 장비하게 되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더 소요되었다. 발성영화 전환에 조금 더 적극적이었던 것은 조선극장이었다. 1931년 7월에 설립된 조선흥행주식회사의 직영관으로 참여하게 된 조선극장은 보다 안정적인 자본 지원에 힘입어 발성영사기 구매에 나설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듬해인 1932년에는 단성사와 우미관도 발성영사기를 장만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추동한 원동력은 무성영화를 시대착오적인 구시대의 유물로 여기는 인식이 급속도로 퍼져나갔다는 점에 있었다. 요제프 폰 슈테른베르크 감독의 영화 < 모로코 >(1930)를 필두로 일본어 자막을 이용한 상영방식이 보편화되면서 보다 안정적인 상영환경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도 중요한 변화라 할 수 있다. 이왕 초기비용을 통 크게 투자한 이상 극장 프로그램에서 발성영화의 지분이 늘어나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식민지 조선에 흘러들었던 발성영화는 그렇게 서서히 극장가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 [1] 서광제, “최근의 조선영화계(4)”, 《동아일보》, 1932. 2. 3. [2] 김연수, “1930년 조선연예계(4)”, 《매일신보》, 1931. 1. 8. 이광욱(극장문화사 연구자) l 읽고 생각하며, 말하고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과거의 기록을 뒤적이고 오늘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함께 미래를 고민한다.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조교수(동화 한국어문화학과), 한국영상자료원 객원연구원(『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 『드라마, 일상성의 미학』(2024) 공저, 「카프 연극대중화론의 전개와 송영 풍자극의 매체미학」(2018), 「도달한 임계점과 보존된 미래 – 발성영화의 정착과 경성 소재 조선인 극장의 연쇄 반응」(2021), 「표류하는 조선영화 : <임자 업는 나루배>에서 <정춘삼>으로 – 최초의 영화 판권 소송과 식민지 조선영화 시장의 추이」(2022)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