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은이의 사춘기
- 감독
- 장병옥
- 제작년도
- 2017
홍성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 < 혼자 사는 사람들 >의 제목과 영화 전반부를 보면서 나는 이 영화가 1인 가구가 많아진 시대의 외로움과 소통의 어려움을 다룬 영화라고 판단했다. 홍보에서도 ‘저마다 짊어진 1인분의 외로움’이라는 문구를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함께 하는 삶이나 진정한 소통을 강조하는 결론으로 향하게 될 것으로 어림짐작 했다. 그러나 나의 섣부른 추정은 들어맞지 않았다. 혼자 살기와 고독사가 주요 소재이긴 하나 이 영화가 보다 중점을 둔 질문과 답은 ‘우리는 어떻게 진실로 혼자 존재할 수 있는가’, ‘우리 사회는 각자의 실존을 감당할 환경을 조성하고 있는가’이다. 영화에서 주인공을 비롯한 거의 모든 인물이 혼자 살고, 혼자 일하고, 혼자 밥 먹고, 심지어는 혼자 죽는다. 그러나 영화는 혼자 무언가를 하는 것과 혼자 존재하는 것은 다르다고 말한다. 혼자가 편한 주인공 진아(공승연)는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타인과의 교류를 거부하며 벽을 친다. 그런 그에게 원치 않게 자꾸 말을 거는 이들이 생겨난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혼자가 된 아버지는 엄마 휴대폰으로 자꾸 전화를 걸어오고, 옆집 남자는 아파트 복도에서 담배를 피며 쓸데없이 말을 걸어온다. 게다가 1:1 교육을 맡게 된 신입사원 수진(정다은)은 사수인 진아에게 잘 보이기 위해 선물을 주고 밥까지 같이 먹으려 한다. 진아는 아이러니하게도 하루 종일 전혀 모르는 타인과 소통해야하는 카드회사 콜센터 직원이다. 그는 다양한 진상 고객들을 대응한다. 다짜고짜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는 사람들부터 사용내역을 하나하나 읽어달라는 사람, 시간여행에 필요한 카드 발급을 요청하는 사람까지. 매달 최고의 콜 수를 기록하는 우수사원 진아는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고 고객이 원하는 반응을 해주며 매뉴얼대로 고객의 요구를 ‘친절’하게 ‘처리’한다. 감정과 인격까지 모든 것이 평가되고 수치화되는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해선 감정을 가진 존재가 되어선 안 된다. 감정은 ‘나’로부터 분리되어있는 통제하고 관리해야할 대상이다. 그건 전화를 건 고객도 마찬가지다. 진아에게 전화기 너머의 상대방은 감정과 인격을 가진 존재라기보다는 처리해야할 ‘건수’에 불과하다. 존재는 상호적이다. 그들을 하나의 인간으로 여긴다면 진아 스스로의 존재도 지각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는 순간 고객들의 무례와 폭력이 진아를 상처 입힐 수 있다. 언어 또한 의미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무언가가 오고가고 소통을 하지만 그들은 서로의 말이 정말로 어떤 의미(혹은 의도)를 갖는지 관심을 갖거나 질문하지 않는다. 콜센터 직원들은 고객에게 수도 없이 ‘죄송하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으로부터도 거리를 두면서 진아는 아슬아슬하게 혼자의 일상을 버텨낸다. 그러나 옆집 남자가 집에서 혼자 죽은 지 일주일 만에 발견되면서 자기에게 말을 건 남자가 유령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엄마가 죽은 후에도 자기 삶을 누리며 살아가는 아버지에 화가 나고, 신입사원 수진이 그들의 노동에 질문을 던지며 진아의 일상에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특히 수진은 진아와 달리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도움을 적극적으로 요청하고,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죄송하다’고 해야 하는지 묻는다. 수진은 또한 매번 전화를 걸어 시간여행을 위한 카드를 발급받을 수 없냐고 묻는 고객에게 ‘어느 시점으로 그리고 왜 시간여행을 하려 하냐’는 질문을 던진다. 타자에 대한 호기심은 그 존재를 인정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나 자신과 타인의 존재를 상실하지 않은 수진은 고객 대응에 능숙해질 수 없다. 사수인 진아와 회사 모두에게서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한 수진은 결국 회사를 그만둔다. 진아는 혼자 있는 것이 편하고 그 상태를 극단적으로 선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진아가 혼자 있었던 적은 없다. 진아는 혼자 있으면서도 늘 다른 이들의 흔적을 옆에 둔다. 길을 걸으면서도 휴대폰 영상을 보고, 밥 먹을 때도 먹방을 틀어 놓고, 텔레비전 소리 없이는 잠들지도 못한다. 고독사한 옆집 남자가 남긴 재떨이 자국과 죽기 직전 CCTV에 기록된 엄마의 영상에도 계속 눈길을 준다. 이런 모습을 보면 진아는 오히려 혼자 있기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말로 어떤 소음도 없이 혼자 있게 되는 순간 자기의 감정과 상태를 대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진아는 수진이 그만둔 후 환영과 환청이 심해져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지만, 영화는 진아가 누군가의 도움을 받거나 사적인 특별한 관계를 맺는 대안으로 향하지 않는다. 진아는 수진에게 좀 더 신경써줬어야 했다고 타박하는 팀장(김해나)에게 팀장이 사수일 때 자신에게 대했던 태도를 그대로 수진에게 돌려줬을 뿐이라고 한다. 상처받고 손해 보는 일이 싫어 타인의 접근을 꺼리는 것은 진아만이 아니다. 그 조직의 체제와 감정노동의 속성이다. 진아는 의미 없는 공감과 반응을 그만두어야 할 때가 왔음을 깨닫는다. 진아는 사람들이 자신을 엄연한 한 존재로 인정하고 잘못한 일에 대해 진실로 사과하기를 바란다. 바림이 나 가족을 버렸다가 나이 들어서 집에 돌아온 무책임한 아버지와 감정을 배제해야한다고 몸소 가르친 팀장에게 감정과 인격을 가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진정한 응답을 요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과를 받아내는 것은 그녀가 거기 단독자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지각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진아는 역으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선 타자의 감정과 인격을 인정하는 것이 수반되어야함을 깨닫는다. 나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선 타인의 존재를 받아들여야 한다. 진아는 수진에게 전화를 걸어 사수로서, 같은 인간으로서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그리고 자신 역시 외로움을 타는 약한 존재이며 혼자 밥 먹고 혼자 지내는 것을 잘하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전화기 너머 목소리로만 들리던 수진이 그제야 화면에 역쇼트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 존재의 역쇼트야말로 이 영화가 목표했던 것이다. 서로가 감정과 인격을 가진 인간임을 인정하고 그들은 모두 당연히 상처받고 약할 수 있음을 수용하고 그럼으로써 각자의 존재를 대면하게 된다. 약함은 존재를 위한 조건이다. 홀로 존재하기 위해선 타인의 존재를 받아들여한다. 나만 이 세계에 존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진아는 자신의 존재와 끊임없이 거리두기하고 분리해 내면서 스스로가 외로움을 타는 유령처럼 되어버렸다. 그래서 옆집 남자의 유령과 대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상처받은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수진을 한 독립된 존재로 지각하며 그에게 사과한 후 진아는 처음으로 텔레비전이나 온라인 스트리밍 영상을 틀어놓지 않고 잠에 든다. 진아는 드디어 홀로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관련글) 1. 소진과 이상한 기운 - <아워 바디>(2018), 2021.04.23. 2. 의심의 씨앗과 취약한 영웅들 - <도희야>(2013), 2021.05.21. 3. 여름밤 초록색 전구불빛이 가만히 당신을 응시할 때 - <남매의 여름밤>(2019), 2021.06.18. 4. 당신의 안녕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 <내가 죽던 날>(2019), 2021.07.16. 5. 피해와 가해의 알레고리 - <소리도 없이>(2019), 2021.08.13. 6. 돌봄의 정동 - <우리집>(2019), 2021.09.10. 7. 유년과 재난 - <벌새>(2018), 2021.10.22. 8. 목격의 시간 - <휴가>(2020), 2021.11.19. 9. 한평생 이야깃거리가 된 삶을 찢고 나온 웃음소리 -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2019), 2021.12.17. 10. 이름을 불러 닿는 시간 - <윤희에게>(2019), 2022.01.14. 11. '혼자'의 정동 - <혼자 사는 사람들>(2021), 2022.03.15. 12. 억압의 체제와 닫혀있는 여자들의 세계 - <궁녀>(2007), 2022.04.13. 13. 소원성취, 환상, 실재 사이의 어딘가에서 - <팬지와 담쟁이>(2000), 2022.05.18. 14. 몫과 값 그리고 경계물 - <82년생 김지영>(2019), 2022.06.24. 15. 실종의 감각과 징크스의 미학 - <오마주>(2022), 2022.07.21. 16. 레즈비언 편집술, 혹은 시계가 된 여자 - <연애소설>(2002), 2022.08.19. 17. 탐정-엄마의 각성하는 모성 - <비밀은 없다>(2016), 2022.09.16. 18. 시간과 정념의 지층을 찾아서 - <누에치던 방>(2018), 2022.11.04. 19. More or Less - <모어>(2021), 2022.12.09. 20. 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 <안나-감독판>(2022), 2023.01.09. 21. 우리에겐 따뜻한 국물과 유머가 필요하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2023.02.07. 22. 아직 끝나지 않은 - <미망인>(1955), 2023.03.10.
영화제에 출품된 작품들을 관람하다 보면 의식하지 않아도 그해의 경향이 눈에 들어오곤 한다. 특정 주제나 장르가 반복해서 등장하거나 서사를 풀어가는 방식이 유사한 경우, 그 경향성이 무엇에 대한 반응 혹은 징후인지 묻게 된다. 물론 그러한 문제의식이 구체적인 작품들을 오히려 경직된 틀로 포괄하는 결과를 낳을 때도 있고, 평론가의 자의식만 앞세운, 실은 별 의미가 없는 물음일 때도 있다. 그래서 심사평이나 선정의 변처럼 어쩔 수 없이 ‘올해의 경향’에 대해 언급해야 하는 순간에 이르기 전까지는 구체적인 작품을 어떤 경향성 안에서 재단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올해에도 여러 영화제에 응모한 장편들을 몰아서 볼 기회가 있었다. 영화들을 일련의 범주 안으로 불러들이는 일은 피하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이 예년과 다른 하나의 흐름이 자꾸 눈에 걸렸다. 그것은 흑백영화의 확연한 증가다. 흑백영화 편수의 증가를 변화나 경향으로 단정하긴 망설여지지만, 이 현상이 안긴 의아함은 무시하고 지나가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처음에 든 의문은 당연하게도 이런 것이다. 이들은 왜 흑백의 세계를 선택해야만 했을까. 관람자의 위치에서 그 영화가 흑백으로 재현되어야만 하는 서사적 맥락을 납득하기도, 미학적 효과를 체감하기도 어려웠다는 말이다. 짐작할 수 있는 의도들은 있다. 관습적으로 흑백화면은 현실보다는 꿈의 분위기를, 현재보다는 지나간 시간을 그리는 데 자주 사용되어왔으나 적어도 그간 보아온 독립영화들을 떠올려보자면, 그것은 세계의 사실주의적인 감각을 고양하고 부각하기 위해 동원되는 경우가 많았다. 세계에서 색을 제거해버리는 선택이 오히려 영화가 현실의 어둠을 그대로 마주하는 방식으로 여겨져 온 것이다. 롱테이크의 느린 호흡이나 허수아비 같은 형상으로 화면 안에 존재하는 표정 없는 인물은 흑백화면에 어김없이 따라오는 요소들이다. 올해 본 흑백영화들도 대체로 그랬다. 다만, 앞서도 말했듯, 이런 인상의 흑백영화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는 점이 새삼 이들의 의도에 의문을 더한다. 흑백으로 된 세계의 무엇이 그들을 매혹한 것일까. 그들은 흑백화면의 영화적 필연성을 어디에서 찾고 있을까. 문제는 이들 영화에서 아무리 그 의도와 효과를 다양한 맥락에서 이해하고 긍정해보려 해도, ‘희망 없는 현실의 암울함을 표현하기 위한 편의적 수단’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감독들이라면 세상이 어두우므로 세계의 색채도 어두울 수밖에 없다는 식의, 일차원적이고 구태의연한 대답 이상을 들려줄 수 있을까. 흑백영화를 선택했던 기성 감독들의 견해를 잠시 우회해보려 한다. 이준익 은 < 동주 >(2015)에 대해 우리의 기억 속 윤동주가 흑백사진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영화 또한 흑백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설명이 다소 단순하게 들리긴 해도 영화를 보고 나면, 우리는 그 짧은 말에 내포된 역사적인 층위와 한 예술가에 대한 기억의 맥락에 공감하게 된다. 홍상수 는 < 북촌방향 >(2011)을 편집단계에서 흑백으로 바꾼 이유에 대해 영화 속 풍경이 주는 느낌이 흑백에 더 어울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직관에 근거한 그의 설명은 언제나처럼 모호하게 다가오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는 그가 언급한,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그 세계의 정념에 깊게 동화될 수밖에 없다. 감독이라면 자신의 영화적 선택에 대해 관객을 이해시킬만한 명확한 의도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둘의 예를 든 건 아니다. 중요한 건, 흑백화면의 선택이 (어쩌면 감독의 의도와 무관하게라도) 세계를 대하는 고유한 태도로, 낯설게 다시 경험하게 만드는 특수한 통로로, 그리하여 영화의 중대한 형식적 결정으로서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는지의 문제일 것이다. 흑백으로의 전환은 단순히 색을 지우는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공기를 즉물적으로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시각화하는 문제다. 세계의 색채를 변환하는 일은 문장 수십 개를 쌓아 올려 묘사해도 도달하기 어려운 지평이지만, 영화 안에서는 즉각적으로 편리하게 구현 가능한 것이다. 올해 마주한 흑백영화들은 흑백의 효용성과 독창성에 대한 고민은 미흡한 채, 그 편리함만을 취한 결과가 아니었나 싶다. 이들이 아무리 서사구조에 복잡한 시도를 가해도 영화가 여전히 평면적으로 느껴졌던 점 역시 같은 맥락에 기인하는 문제인 것 같다. 그 평면적인 느낌과 관련해서 이 영화들이 공유하는 장면의 의아한 상태에 대해 마지막으로 짧게 덧붙이려 한다. 특별한 사건이 없는 이 영화들에서 롱테이크는 주로 인물들의 대화 장면을 바라보는 데 할애된다. 흑백의 화면 속, 한 자리에 고정된 카메라 앞에 인물들이 마주 보며 앉아 있다. 그들의 대화에서는 핵심도 중심도 긴장감도 유머도 감지되지 않는다. 짐짓 심각한 체 하지만 속이 비어 있거나 일상성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일상성을 오인하는 대사 내용만의 문제는 아니다. 카메라가 시간을 적극적으로 감각하는 대신, 한 자리에 서서 그 시간을 무책임하게 내버려 두며 그저 쳐다보고 있다는 인상을 종종 주는 것이다. 이런 대화 장면이 시나리오를 반영한 것이든, 배우들의 즉흥적인 대화로 이루어진 것이든 그것을 관장하는 리듬과 시선에서 입체적인 활기를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카메라 앞의 시간에 개입할 타이밍을 찾지 못하는 둔감함을 그 세계의 자연스러움과 사실성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착각하는 건 아닌지 반문이 들게 하는 장면들이었다.
영분( 정은경 )은 같이 살던 남자가 병으로 죽은 뒤, 고향 태백으로 돌아와 모텔에서 청소 일을 하며 지낸다. 필라테스 강사로 일하는 한희( 장선 )는 이 적막한 마을에서 수강생을 모으는 일에 어려움을 느낀다. 어느 날 밤, 한희는 강습소 앞에서 기웃거리는 영분과 마주하고 둘은 곧 강사와 수강생으로 만나는 사이가 된다. 혼자 사는 영분과 고아인 한희는 어쩐지 모녀 관계처럼 서로에게 애틋하고 다정해 보인다. 영화는 영분이 오래전 버린 딸이 한희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숨길 생각이 없다. 한희 또한 어느새 홀로 그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한희는 긴장감 때문인지 영분과의 강습시간에 숨이 차올라 꺽꺽대며 괴로워하는데, 그 모습에 충격을 받은 영분은 자리를 뜨고 만다. 이제 영분은 고향마저 떠나려 하고 한희는 그런 영분을 붙잡으려 한다. 그리고 둘은 영분이 한희를 위해 필라테스 학원 광고지를 잔뜩 붙여놓은 다리 위에서 엄마와 딸로 대면한다. 바로 이 한 장면의 힘에 이끌려 이 글을 쓴다. “네가 미워. 너 때문에 나는 훨훨 날아다니며 다 할 수 있었는데 못했어. 아, 끔찍해. 아, 갑갑해”라고 영분은 소리치고 “난 한 번도 안 미웠어. 어떻게 미워하는지도 모르겠어. 나 낳을 때 어렸잖아. 난 어른이야”라고 한희는 설득한다. 이 장면은 딸을 버린 엄마와 버려진 딸이 몇십 년 만에 진실을 대면하는 순간이지만, 여기에 우리가 떠올릴 법한 감정, 표정, 대사는 나오지 않는다. 용서를 비는 엄마와 원망하는 딸의 상투적인 형상은 여기 없다. 이 장면에서 영화의 목적은 단 하나처럼 보인다. 그것은 사과와 화해, 혹은 자기변명과 자기연민의 극적인 재현이 아니라, ‘나’를 부정하지 않는 두 얼굴의 교차, 두 얼굴의 서로에 대한 리액션 뿐이다. 영화는 다른 장치 없이 오직 영분과 한희의 얼굴 클로즈업만을 투박하고 간결하게 오가면서 이들의 지난 세월이 꾹꾹 눌러 담긴 목소리와 눈빛을 통해 둘의 과거와 현재, 심지어 불투명한 미래까지 한 장면에 응축시킨다. “나도 살고 싶다”는 엄마와 “나는 잘 살아왔다”는 딸. 통념적인 모성 서사의 구도를 뼈대로 삼으면서도 이 영화가 그 틀 안에서 보존하려는 건 엄마와 딸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아니다. 엄마와 딸의 관계에 앞선 한 인간의 개별성을 이 장면은 주시하고 존중한다. 박석영 의 전작인 < 들꽃 >(2014), < 스틸 플라워 >(2015), < 재꽃 >(2016)은 버려진 소녀들에게 천착한 세계였다. <들꽃>에서 세 친구는 위태롭게 길 위를 방황하다 모텔에 감금됐고, <스틸 플라워>에서 이들 중 한 소녀는 친구마저 사라진 낯선 곳에서 남들이 버린 음식물을 주워 담으며 연명했으며, <재꽃>에서 그 소녀는 살아남지만, 이번에는 부모를 찾아온 어린아이가 소녀 주변을 맴돌았다. 박석영은 3부작을 통해 생존과 자립의 과정을 거친 소녀를 위로하고 싶었다고 말했고 <재꽃>은 확실히 앞의 두 영화와는 차별화된 세계로 보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3부작이 가족으로부터, 사회로부터 고립된 어린 여자들을 매번 가혹한 궁지로 밀어 넣어 이들의 생존력을 시험하며 이들의 버려진 상태를 얼마간 대상화하고 있다는 인상 또한 지우긴 어려웠다. 하지만 마침내 <바람의 언덕>에서 박석영은 버려짐의 상태를 전시하는 대신 그것을 남겨짐의 서사로, 남겨진 자의 시선으로 전환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제 버려지고 방치된 소녀의 상황이 아니라 떠난 여인의 심정 또한 헤아린다. 무사히 어른이 되어야만 하는, 안전한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세계가 아니라, 이미 어른인 세계. 그 세계는 여전히 험난하지만 적어도 솔직하고 성숙하다. <바람의 언덕>은 그렇게 다가온다. 다리 위에서 영분은 울먹이는 딸을 내버려 두고 떠난다. 그러나 영분이 딸에게 쏟아낸 거친 말들과 캐리어를 끌고 돌아서는 뒷모습이 위악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앞서 영화가 영분에게 선사한 한 장면에 대한 기억이 우리에게 남아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영분은 우연히 알게 된 택시기사 윤식( 김준배 )과 막걸리를 마시는 장면에서 술에 취해 자신의 인생을 되돌리고 싶다는 고백을 한다. 남자는 그런 영분을 바라보다 담담하게 말한다.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그 나이 때에도 다 진실이 있어요.” 허름한 주점의 고요함은 이내 영분이 부르는 노래로 깨어나고 카메라는 그 모습을 영분의 뒤에 서서 가만히 지켜본다. 이 장면의 깊이를 경험한 우리로서는 딸을 또다시 버려두고 “나도 살고 싶다”며 떠나는 영분의 발걸음을 무책임하다고 탓하지도, 멈춰 세우지도 못한다. 그러니 영분과 한희가 재회하는 에필로그가 이들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확신하기는 어렵다. 바람 부는 황량한 겨울의 자연 속에서 마침내 둘이 나란히 앉은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바라보며 두려움을 고백하는 목소리는 이들의 해결되지 않은, 모순과 갈등이 진행 중인 내면의 상태인지 모른다. 이 영화의 포스터에는 겨울의 흔적이 사라진 따스한 풍경을 배경으로 영분과 환희가 꼭 끌어안은 모습이 담겨있다. 그 풍경의 평화로운 온기는 ‘바람의 언덕’에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