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생
- 감독
- 권동원
- 제작년도
- 2021
- 출연
- 심려진, 권동원, 정연채
이와사키 아키라 환영회 중 문예봉(좌)과 한은진(우) 다시 만난 세계: 식민지 조선의 극장문화 이야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를 바탕으로 역사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와 행간 속에 숨겨진 욕망들을 재조명합니다. 영화의 발흥 이래 재현의 사실성에 대한 추구는 극장가의 화두로 떠올랐다. 카메라가 구현해 낸 재현의 정밀성은 실로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영화에 익숙해진 관객들이 늘어나면서 선행매체인 연극 역시 사실적 환영을 만들어내는 작업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연극과 영화가 하나의 공간을 함께 점유하며 관객을 나눠 가졌던 식민지 조선의 극장 속에서 그 영향관계는 훨씬 긴밀했을 것이다. 대체 불가능한 지위를 획득한 ‘여배우’는 재현의 사실성에 대한 식민지 조선 극장문화의 지향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존재였다. 재래의 관습이었던 여형배우는 여배우의 등장과 함께 전근대적 유습으로 낙인찍혔다. 이것은 배우와 배역의 생물학적 동일성이 여성성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데 있어 근원적인 조건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생겨난 변화였다. 무대와 스크린의 주역으로 급부상한 여배우의 일거수일투족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공공의 시선 속에 노출된 육체의 감각적 즉물성이야말로 여배우의 지위를 굳건한 지반 위에 올려놓은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든 시각적 쾌락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었으며, 여배우들의 육체는 관객의 관음증적 욕망 앞에서 품평의 대상으로 격하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더욱이 여배우들을 향한 응시는 극장 속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모든 이들은 직업적 영역에서의 공공적 삶뿐 아니라 일상을 영위하는 개인으로서 사적인 삶 또한 살아간다.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이라는 표현이 함의하듯 두 영역의 분계선을 명확히 하는 일은 누구라도 품을 법한 보편적 욕망이겠지만, 유독 여배우에게만큼은 직업과 일상의 분리가 허용되지 않았다. 우수진이 정확히 지적한 것처럼, 이것은 여배우가 문화적으로 ‘ 구성 ’된 존재였기 때문이다. *주1 육체를 통해 현시된 여배우의 존재감은 재현의 사실성을 담보했지만, 그로 인해 생겨난 강력한 동일시의 기제와 이에 기반한 극장 체험의 여파는 관객들로 하여금 허구적 배역과 실제 배우의 삶을 혼동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실제로 배우의 사생활은 ‘스캔들’의 형식으로 소비되는 일이 잦았다. 특히 여성의 사회활동을 억압했던 전통적 관념이 맞물린 결과, 여배우의 ‘사생활’은 단순한 관심거리의 수준을 넘어 도덕적 단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식민지 조선 사회에 여배우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던 이월화 또한 이러한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는데, 배우 활동만으로 생계를 이어나가기 어려웠던 그는 기생과 여급 일을 병행한 바 있다. 이월화에게 사치와 허영심이 강한 여성이라는 프레임을 덧씌워진 것은 이 때문이었다. 한편 토월회가 해산한 후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했던 복혜숙 은 ‘비너스’라는 카페를 직접 운영하면서 마찬가지로 비난의 시선을 견뎌내야 했다. (좌) 이월화 (사진: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우) 복혜숙 특히 성욕이 강한 여성이나 신여성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들의 경우, 사생활 또한 문란할 것이라는 의혹의 시선에 둘러싸였다. 이러한 시선은 비단 식민지 조선의 배우들뿐 아니라 할리우드의 영화 스타들에게도 투사되었는데, 그들의 사생활을 다룬 가십성 기사들이 신문 연예란의 단골 메뉴였던 것은 대중적 관심의 향배를 잘 보여준다. 여배우들은 수없이 애인을 갈아치우는 왕성한 남성 편력을 지닌 이들로 지목되었으며, 사소한 이유로 이혼을 일삼는 부도덕한 존재라 낙인찍혔다. 물론, 스타의 화려한 삶과 막대한 재력에 대해 찬탄하는 시선도 엿볼 수 있다. 전 세계적 인기를 구가하던 그들의 천문학적 주급이나 으리으리한 대저택은 물론이고 사치스러운 취미활동 등이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열악한 조선의 연예계에서 여배우는 헐리우드 스타와 같은 동경의 대상으로만 여겨지지 않았다. 즉, 여배우는 자신의 힘으로 직업적 성취를 이뤄낸 당당한 여성이 아닌, 생활난에 시달리는 가련한 존재이거나 끝내 ‘첩살이’ 신세를 피할 수 없는 비참한 운명을 지닌 이들로 인식될 따름이었다. 여배우의 전도, 남배우의 전도- 이것이야말로 한번 신중하게 생각할 문제이다. 오늘날 만사가 초창 혁신기에 잇는 조선에 잇서서 더 크게 더 탐탁하게 바랄 수는 업다고 치드라도 인생의 흥망을 기약하는 청춘기에 잇서서 다시 돌이키기 쉽지 않은 직업에 몸을 붙이게 되는 때 장래는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없을 수는 없다. 우선 여배우 여류 무용가가 되면 나중에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 대답은 극히 간단하다. 『아무래도 시집을 가야지』 여자로서는- 더욱히 경제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자립하기가 어려운 조선의 여성에게는 마지막 닥치는 문제는 반드시 이것이다. 그러면 어떠한 사람에게로 가게 될까. 『첩!』 그것이야 참으로 참으로 예술가를 극도로 모욕하는 말이다. 『재산가의 부인!』 그것은 좋기는 하나 졸연히 얻어 걸리기가 어려운 사정이 있으니 재산가치고 조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여배우니 무엇이니 하는 동안에 어느덧 이십이 넘고 나서 사면을 둘러보아야 모두가 기혼 남자들뿐이다. 『그러면 착실한 신사』 아직도 조선서는 소위 착실하다는 청년 쳐 놓고는 사리 잡힌 가정 쳐 놓고는 배우 안해이나 여배우 며느리 얻기를 즐겨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 머리 길게 기르고 누더기 가튼 양복을 입고 다니는 같은 경우 같은 식경에 도취되어 있는 예술가이나 그렇지 않으면 처음에는 펄펄 뛰다가도 나중에는 하는 수 업시 『하는 수 있나. 사랑만 해 주면 그만이지. 첩 노릇이라도 해야지!』 눈물겨운 탄식이나 나아올 것이다. 이미 여배우 노릇을 하든 사람이 그러하였으며 장차 나아올 여배우의 운명이 그러하다. 이것은 여배우 자신의 잘못도 아니요 그 단체 그 사회의 죄도 아니다. 오직 조선의 민도가 일반의 머리가 아즉도 예술- 더욱히 무대예술에 존경을 갖지 못한 탓이다. 그러함으로 적어도 배우 노릇을 하고자 나서는 분은 우선 이담에 크게 고려를 하야 사랑에서 사랑으로 자유스럽게 날아다니랴는 무거운 결심을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죽더라도 상당한 배우자가 나기까지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기막힌 결심을 갖든지. 『잘 놀면 그만이지』 여배우 노릇을 부자의 눈을 호리는 수단으로 알고 무대를 매음부의 전람회 같이 알든지 이 세 가지 길의 하나를 택해야 할 것이다. -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29 』, 1035쪽 이춘풍, “ 생활로 본 그들의 내막 - 배우, 레뷰껄, 딴써 등등 ”(5), 《중외일보》, 1929. 11. 12. 이춘풍이 연재한 글은 사뭇 직설적이면서도 신랄하다(‘이춘풍’은 이서구 의 필명으로 추정된다). 그는 여배우를 비롯하여 여류 무용가나 레뷰걸과 같은 여성 연예인들의 생활상을 자조섞인 어조로 소개했다. 그의 글 속에서 여성 연예인의 생활상은 사실상 성노동자의 삶과 유비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자립하기 어려운” 조선 여성의 처지에서 결혼은 피할 수 없는 문제였지만, “재산가의 부인”이 되자니 그들은 대부분 조혼을 해서 본부인이 있는 상태이고, “착실한 신사”에게 시집가자니 집안의 반대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나마 여배우들의 사정을 이해해 줄 법한 이들은 “가난한 예술가”들뿐이겠지만, 그게 싫다면 누군가의 “첩”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여배우들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이서구는 예술가에 대한 존경심이 부족한 식민지 조선 사회 에서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던 여배우의 처지를 동정한다. 그가 보기에 결국 여배우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뿐이었다. 방종한 여성이 되어 자유를 구가하거나, 결혼 자체를 포기하거나, 아예 대놓고 “부자의 눈”을 홀리기 위해 극장을 “매음부의 전람회”처럼 만드는 일이 그것이다. 영화 < 아리랑 >(나운규, 1926)을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오른 신일선 은 배우 활동을 오래 이어나가지 못하고 능주(전남 화순군) 지역 부호의 자제인 양승환과 결혼하게 된다. 이른바 ‘신일선당’이라고 불렸던 열성팬들은 그의 결혼 소식에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정성껏 행복을 빌어 주었다. 이는 신일선이 <아리랑>에서 쌓아올린 이미지와도 관련된 반응일 것이다. 신일선은 주인공 영진( 나운규 )의 여동생 영희 역을 맡았는데, 호색한의 위협을 받는 순진무구하고 어린 여동생의 모습이 관객들의 동정심을 유발했기에 그러한 이미지가 배우 신일선에게도 겹쳐졌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다만, 양승환에게는 본처가 있었기에 결국 신일선도 ‘첩살이’의 운명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다. 게다가 신일선이 가난한 집안살림을 돕기 위해 친오빠의 강권으로 양승환과 결혼하게 된 것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동정 여론이 빠르게 확산되기도 했다. 결혼과 함께 영화계를 떠났지만 신일선의 근황, 특히 그가 불행한 결혼생활을 견뎌내고 있다는 소식이 지속적으로 전해졌던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신일선 이야기는 여배우의 박복한 운명을 압축적으로 보여 준 사례로 거론되었던 것이다. 신일선 반대로 사랑을 쟁취하려 하는 여배우의 적극성은 어디까지나 남성 편력에 불과하다고 치부되는 데 그쳤다. 잔인하게도 여배우의 사랑이 진실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정사 사건’과 연관되었을 때, 즉 죽음을 담보로 사랑의 진정성을 증명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했다. 조선의 유명 성악가이자, 토월회에서 배우로 잠시 활동하기도 했던 윤심덕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는 다수의 연애 스캔들에 휩싸여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지나, 극작가이자 연극운동가인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서 실종된 이후 ‘낭만적 사랑’의 화신으로 재규정되기에 이른다. 영화 < 아리랑 후편 >(이구영, 1930)에서 신일선의 뒤를 이어 ‘영희’ 역으로 출연했던 임송서 역시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음독자살을 택한 바 있다. 미수 사건에 그치진 했지만 이애리수 의 ‘정사 사건’도 세간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유행가 가수이자 배우로 인기가 높았던 이애리수는 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배동필과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약속했으나, 배동필의 부모는 여배우와 결혼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며 극력 반대했고, 결국 그들은 다음 생에서라도 못 다한 사랑을 이루고자 동반 자살을 시도하게 된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그들의 소식은 신문 지상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결국 배동필의 부모가 이애리수의 연예계 은퇴를 조건으로 결혼을 허락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된다. 그러나 훗날 배동필의 본처가 찾아오게 되자 위협을 느낀 이애리수는 재차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으며, 작고할 때까지 자신의 연예계 활동 이력에 대해 철저히 함구했다고 전해진다. (좌) 윤심덕 (우) 이애리수 이처럼 여배우를 둘러싼 시각은 냉랭했으며, 때로는 음험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배우들은 대상화된 육체의 지위에 머물기보다 예술의 주체 로 거듭나기 원했으며, 서서히 자신의 목소리를 담론장에 기입하기 시작한다. 변화의 전조는 1930년대에 접어들며 점차 가시화되었다. 1931년에는 ‘Y.Y생’이라는 필명을 내세운 필자가 《동아일보》를 통해 “여배우 언 파레이드”라는 제목으로 식민지 조선의 여배우들을 소개하는 장문의 글을 연재한 바 있다. *주2 비슷한 시기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던 “무대 스타- 순방기”는 매 회차마다 남성 배우와 여성 배우를 한 쌍으로 묶어 주요 활동이력과 연기의 고유한 스타일에 대해 소개하기도 했다. 또한 1934년에 서광제 는 《조선중앙일보》 지면을 빌려 헐리우드의 여배우들을 다룬 “세계영화계 행각”을 연재했는데, 이 글들은 여배우를 가십의 대상으로 다루기보다 예술의 완성을 위해 정진하는 직업적 전문인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시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춘풍이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던 여배우는 이제 공공적 담론장에서 ‘예술가’로 조명받게 된 것이다. 특히 ‘여배우’가 타고난 외형이나 신체적 조건을 전시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기예’를 연마하기 위해 기울여 온 노력을 전경화 한다는 점에서 시각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여배우들의 목소리가 인터뷰나 대담을 통해 노출되는 사례도 빈번해졌다. 신카나리아 는 유명 여성인사들의 새해 포부를 밝히는 지면을 통해 장차 연극을 연구하며 일생을 배우로 살아가리라 다짐했으며, 새해에는 연극 이론서를 집중적으로 독파할 것이라 밝혔다. *주3 1933년에 《매일신보》가 개최한 신년 좌담회에 참석했던 이경설과 이애리수는 여배우의 사생활이 난잡할 것이란 세간의 추측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여배우가 오히려 남배우들보다 “책임 있게 일을 잘 한다”고 주장했다. *주4 최초의 조선어 발성영화 < 춘향전 >(이명우, 1935)의 주역이었던 문예봉 은 발성영화에 좀 더 “적합한 억양”을 연구하겠다고 밝혔으며, 극예술연구회의 대표적 여배우인 김복진 또한 “어린애 역부터 늙은이 역까지” 어떠한 역할이 주어지더라도 철저히 연구하여 제몫을 해낼 것이라 다짐했다. *주5 1937년에 《동아일보》를 통해 장기간 연재된 “스타의 기염” 시리즈에서도 여배우들의 포부를 엿볼 수 있다. 차홍녀 , 한은진 , 남궁선과 같은 연극배우는 물론이고, 문예봉, 김소영 을 비롯한 영화배우들까지 총망라된 이 시리즈에서 여배우들은 자신이 곧 예술의 주체라는 자의식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좌) “여배우 언 파레이드”에서 다뤄진 복혜숙 (사진: “ 여우언파레이드 영화편 (9) 인기도 한떄런가 복혜숙양 ”, 《동아일보》, 1931. 8. 9.) (우) "스타의 기염"에서 다뤄진 남궁선 (사진: “ 스타의 기염 (2) 그 보푸계획자랑야심 극은 일생사업연극인 남궁선 ”, 《동아일보》, 1937. 11. 25.) 같은 맥락에서 < 미몽(죽음의 자장가) >(양주남, 1936)의 한 장면에 주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발성영화로 알려진 이 작품의 주연배우는 당대의 최고 인기스타였던 문예봉이었다. <미몽>의 주인공 애순(문예봉)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나머지 가정까지 버렸던 인물로, 그의 일탈은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어찌보면 이른바 ‘신여성’에 대한 처벌 서사처럼 보이는 작품이지만, 실제로 <미몽(죽음의 자장가)>을 둘러싼 해석의 결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아래의 쇼트들은 내연남인 창건과 함께 무용 공연에 참석했던 애순이 박경림( 조택원 )의 독무를 바라보고 있는 장면을 구성한다. 흥미롭게도 이 장면은 <미몽(죽음의 자장가)>에서 온전한 형태의 시선 편집(eyeline match)이 거의 유일하게 드러나는 곳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시선의 주체와 시선의 대상을 연속적으로 배치하게 될 경우, 시각 주체의 욕망과 그것이 투사된 대상의 정체를 가리키게 된다. 그렇다면 <미몽(죽음의 자장가)>에서 이 장면만큼 주인공 애순의 욕망이 직설적으로 노출된 순간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미몽(죽음의 자장가)> 중 이 장면이 문제적인 것은 시선의 엇갈림을 통해 식민지기의 극장 속에 착종된 욕망 들을 압축적으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즉, 객석에 앉은 애순의 모습은 시선의 주체인 동시에 시선의 대상으로서 포착된다. 시선의 주체로서 애순은 무용가의 춤에 대한 애호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지만, 동시에 그는 주변 남성들의 시선 속에서 대상화된 존재로 재현되고 있다. 더욱이 그들의 응시는 창건이 자리를 비운 직후부터 보다 노골적으로 이어진다. 더욱이 객석에 앉은 애순을 향한 남성들의 응시는 부재하는 창건의 자리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식민지 조선에서 여성이 남성의 울타리를 벗어날 경우, 무제한적인 욕망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남성들의 왜곡된 시선은 애순의 주체성을 훼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순은 시각적 주체로서의 지위를 끝내 포기하지 않으며, 잡담을 주고받는 산만한 남성들과 달리 무용가의 춤에 집중하면서 극장의 본래 취지에 걸맞는 ‘이상적 관객’의 형상을 드러낸다. 이 장면이야말로 <미몽(죽음의 자장가)>이 지닌 미묘한 해석의 결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는데, <미몽>은 ‘신여성’을 부정적 표상으로 낙인찍고 대상화하려는 사회적 시각을 보여주면서도, 이러한 시각으로 결코 포합될 수 없는 여성의 주체성 또한 재현해 내기 때문이다. ‘애순’의 모습처럼 식민지 조선의 여배우들은 그들을 둘러싼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폭압적인 시선을 예술적 주체를 향한 주목으로 바꿔놓기 원했던 이들이었다. 사회의 무지함에 대해 항변하는 대신 그들은 스스로의 부족함을 겸허히 채우고자 했으며, 극장문화의 공진화적 발전을 목표로 삼았다. 일찍이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을 통해 영화가 현대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논한 바 있다. 기계장치의 냉혹한 메커니즘 속에 짓눌린 현대인들은 스스로의 인간성을 포기하도록 강요받지만 영화를 통해 해방의 서사를 발견한다. 즉, 배우는 카메라라는 기계장치 앞에서 끊임없이 시험받게 되지만, 그 가혹한 테스트를 의연하게 버텨낼 뿐 아니라 적극적 상호침투를 통해 가장 인간다운 형상을 제시하는 데 성공한다는 것이다. 대상화된 육체의 지위를 넘어 예술적 주체로 발돋움하기 원했던 식민지 조선 여배우들의 인정투쟁이야말로, 영화를 현대사회의 냉혹한 논리에 ‘복수’를 가하는 장치라고 보았던 발터 벤야민의 생각과 상통하는 대목이 아닐까? *** 주1. 우수진, 「여배우의 사회문화적 구성과 이월화」, 『현대문학의 연구』 82, 한국문학연구학회, 2024. 주2. ‘Y.Y생’은 김유영의 필명으로 추정된다. 주3. 기사, “직업여성의 가두에서 맛는 1931년 - 신산한 그들의 생활에서 새해의 출발을 보자!”, 《조선일보》, 1932. 1. 2. 주4. 기사, “직업여성의 좌담회”, 《매일신보》, 1933. 1. 3. 주5. 기사, “백화요란한 음악, 미술, 극, 영화, 무용 각계의 성관 - 예원에 활약하는 여성들”, 《동아일보》, 1936. 1. 1. 이광욱(극장문화사 연구자) l 읽고 생각하며, 말하고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과거의 기록을 뒤적이고 오늘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함께 미래를 고민한다.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조교수(동화 한국어문화학과), 한국영상자료원 객원연구원(『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 『드라마, 일상성의 미학』(2024) 공저, 「카프 연극대중화론의 전개와 송영 풍자극의 매체미학」(2018), 「도달한 임계점과 보존된 미래 – 발성영화의 정착과 경성 소재 조선인 극장의 연쇄 반응」(2021), 「표류하는 조선영화 : <임자 업는 나루배>에서 <정춘삼>으로 – 최초의 영화 판권 소송과 식민지 조선영화 시장의 추이」(2022) 집필.
‘성장영화’라고 하면 머릿속에 저절로 그려지는 보편적인 스토리 진행 방식이 있다. 고난과 역경을 겪는 등장인물이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한 후에, 무사히 다음 생애 주기로 진입하여 비로소 예전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성장영화의 한 기준점으로 자리 잡은 이 독립영화는 어떨까. 어느새 개봉 10주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영화 < 파수꾼 >( 윤성현 , 2011)에 대한 비평과 담론은 꾸준히 생성되고 있다. 특히 청소년의 성장을 다루는 영화가 등장하면 <파수꾼>과 비교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절차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어느덧 우리나라 청소년 성장영화의 대표작이 되어버린 이 영화가 사실 우리가 익히 알던 성장영화와는 결이 다르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누군가를 구타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파수꾼>은 곧이어 삭막한 아파트가 늘어선 전경을 비추며 영화의 진행이 밝지만은 않을 것을 암시한다. 아들 기태의 갑작스러운 자살에 대한 진실을 알고자 하는 아버지의 시점에서 희준, 동윤의 시점으로 이어지는 플래시백 구조를 통해 영화는 등장인물 각각의 미세한 심리 변화에 주목한다. 지금은 충무로를 대표하는 젊은 피들이지만 당시에는 풋풋한 신인이었던 배우들의 날 것 그대로의 연기는 모두가 거쳐왔으나 망각하고 있었던 그때 그 시절로 우리를 데려다준다. 그러나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라는 기존 성장영화의 철칙과 달리, <파수꾼>의 아이들은 상처는 단지 상처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며 온몸으로 역설한다. 한 소년의 죽음에 대한 원인을 추적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지만, 영화는 결국 명쾌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한 채로 끝이 난다. 세 소년이 어긋난 소통으로 인해 서로에게 상처 입고, 또 상처 입힌 자국들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다. 나의 성장기는 본의 아니게 <파수꾼>과 함께였다. 기태, 동윤, 희준 세 친구보다 어렸던 중학교 3학년, 그들과 같은 나이였던 고등학교 2학년,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을 거쳐 비로소 성인이 된 지금. 같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관람 시기에 따라 <파수꾼>은 변해왔던 내 나이만큼이나 다른 느낌을 안겨주었다. 열여섯 살의 나는 교실 내부의 보이지 않는 서열화를 매우 싫어하였기 때문에 반 친구들 위에서 군림하려 드는 아이들을 기피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당시의 내가 기태를 이해하지 못하고 희준에게 이입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열여덟의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갈등이 발생하면 ‘중재자’ 역할을 하던 아이였다. 그러므로 기태와 희준의 갈등으로 걱정하는 동윤에게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희준 같은 중학생이자 동윤 같은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그 두 인물처럼 당시에는 기태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어쩌면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인이 된 이후 다시 본 <파수꾼>의 소년들은 학창 시절의 내가 기억하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생각보다 희준은 강인했고, 동윤은 위태로웠으며, 기태는 여렸다. 그들과 같은 옷을 입고 있었기에 누군가에게 이입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나와 달리, ‘어른’의 문턱을 넘은 현재의 나는 비교적 넓은 시선으로 아이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어지러운 핸드헬드의 화면 속에서 기태와 희준, 희준과 동윤, 그리고 동윤과 기태는 야구공을 통해 이미 색이 바래버린 서로의 마음을 뒤늦게 전하고 있었다. 영화 초반에 관객들은 자살한 인물이 당연히 물리적 폭력의 피해자인 희준일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러나 영화는 가해자인 기태를 자살의 주체로 제시하며 관객을 혼돈에 빠뜨린다. 소위 ‘일진’으로 불리는 서열의 최상위권 기태에 비해 희준은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기태의 눈빛은 흔들리는 반면 희준의 눈빛에는 강단이 서려 있다. 뺨을 맞고 머리채가 잡히는 인물은 희준이지만 어째서인지 기태가 아파 보이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희준은 자신의 ‘자존심’을 알음알음 건드리는 기태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고, 소통을 일방적으로 단절함으로써 기태에게도 마음의 상처를 입힌다. 그러나 기태는 희준이 자신에게 상처를 준 이유도, 그 상처를 치유할 방법도 몰랐기 때문에 결국 신체적 폭행을 통해 희준에게 겉으로 드러나는 상처를 입힌다. 서로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였던 그들의 관계는 각자의 방식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어그러져버렸다. 기태는 모든 것을 되돌리고 싶어 했지만 사과에 미숙했고, 희준은 이미 지나간 인연에 대해서는 미련을 갖지 않는 아이였다. 완고한 희준에게 기태가 자신의 ‘진심’을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소중한 자신의 야구공을 던져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기태의 자살 이후, 희준은 ‘무슨 일인지 나한테 얘기 안 해도 돼. 그래도 네가 기태 아버님은 만났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며 동윤에게 기태의 야구공을 건넨다. 기태가 자살한 것은 자신과 관련 없는 일이라고 여기며, 기태 아버지께 사건의 전말을 말씀드리는 책임을 동윤에게 전가함으로써 희준은 기태의 진심을 결국 외면한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미리 마음을 닫아버리는 방식은 희준이 아픔으로부터 본인을 보호하는 행위이기에, 우리는 동윤에게 야구공을 내미는 희준을 함부로 비난하지 못한다. 기태나 동윤과 달리, 희준은 적어도 자기 자신은 지킬 줄 알았던 파수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동윤은 기태와 이야기를 나눴던 식탁에서 희준이 ‘회피’한 기태의 진심을 집어 들게 된다. 동윤과 기태 사이의 틈이 점점 더 벌어지게 된 이유에는 그들의 대화 방식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두 소년은 마치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처럼 말을 주고받는다. ‘야, 네가 뭘 아냐?/ 모르니까 물어보잖아.’, ‘그냥 좀 넘어가. 설명 못 하는 일도 있잖아.’와 같은 모호하고 불완전한 문장을 남발하며 그들은 소통 없는 대화를 반복한다. 이는 동윤의 회상 장면에서 볼 수 있는 동윤과 기태의 대화와 상당히 대조적이다. ‘없어질 것에 목매지 마라’라는 충고를 해주는 동윤에게 기태는 ‘다시 사람들 사이에서 비참해져도, 너만 알아주면 돼’라는 신뢰의 말을 건넨다. 서로가 진실한 말로써 소통할 수 있는 사이였다는 것을 동윤은 조금 늦게 깨닫는다. 세 아이들의 행복한 모습이 담긴 유일한 공간이었던 기찻길에서 동윤은 기태를 회상(어쩌면 상상)하며 ‘누가 최고야?’라고 묻는 기태에게 ‘그래. 네가 최고다, 친구야.’라는 늦은 대답을 전한다. 희준이 애써 회피한 기태의 진심을 간직하고 있던 동윤은, 그것을 다시 기태에게 건네주며 이미 지나가 버린 일들을 ‘후회’한다. 영화는 아이들이 성장의 다음 단계로 무사히 진입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그렇게 끝을 맺는다. 한 아이는 죽었고, 한 아이는 회피하고, 한 아이는 후회하는 모습만을 남겨둔 채로 엔딩 크레딧은 무심히 올라간다. 한 인터뷰에서 기태가 죽은 결정적인 이유에 관한 질문에 기태 역의 이제훈 배우, 동윤 역의 서준영 배우, 희준 역의 박정민 배우 모두 ‘나 때문에’라고 대답했다. 전부 충분히 이해되는 대답이다. 기태는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가정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잘못된 방식으로 관심과 애정을 갈구한 죄가 있고, 동윤은 ‘너만 없었으면 돼’라는 말로 기태를 무너뜨린 죄가 있으며, 희준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너무 일찍 마음을 닫아버린 죄가 있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라는 기태의 질문은 애초에 정답이 없는 질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소년들보다 더 성숙하고 완전한 존재라고 자부했던 성인 관객들은 기태의 물음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 유일한 어른이자 진실을 알고 싶어했던 기태의 아버지가 결국 진실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존재로 남은 것처럼, 아이들이 파국에 이를 때까지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관객에게 <파수꾼>은 ‘어른’과 ‘성장’은 동의어가 아니라고 말하며 우리의 가슴을 후벼판다. 고통과 성장이 필수 불가결한 관계가 아님을 역설(力說)하는 이 영화는 역설(逆說)적이게도 한국 성장영화의 분수령이 되었다. 그동안 여러 매체에 등장한 청소년들은 대부분 ‘어른이 되기 전 단계’로서의 어리숙한 이미지로 소비되었지만, <파수꾼>은 ‘청소년기’를 아동기에서 성인기 사이의 순간적인 이행기로 보지 않고 하나의 독립된 시기로서 세밀하게 다룬다. 이 영화가 전하고자 했던 것은 성인으로 무사히 자라기 위해 도약을 꿈꾸는 미성년의 이야기가 아니다. <파수꾼>은 모두가 충분히 아팠지만 세월 앞에서 잠시 잊어버린 그 시절을 생생히 돌이켜보는 경험을 제공함과 동시에, 상처는 그저 상처일 뿐이라며 아프고도 성장하지 못했던 희준, 동윤, 혹은 기태였을 우리를 덤덤히 위로해준다.
2017년 2월, 나는 < 다시 태어나도 우리 Becoming who I was >가 아직 ‘앙뚜’라는 제목일 때 처음 만났다. 당시 난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Kplus 부문의 심사를 위해 열흘간 베를린에 머물던 중이었고, ‘앙뚜’는 심사를 해야 할 경쟁부문 진출작 중 하나였다. 사실 처음 심사 제의를 받았을 땐 무척 혼란스러웠다. 나 같은 초심자가, 그것도 나처럼 분석과 비평에 약한 주관적 감상의 소유자가 심사라니. 더욱이 그땐 당장 내 시나리오조차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라 허둥대고 있던 터라, 과연 내가 감히 다른 작품을 보고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할 자격이 될까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결국 집행위원장 마리안의 설득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녀는 심사라는 건 절대 일방적으로 평가하고 판단하는 작업이 아니라고, 진심으로 지지하고 싶은 작품의 손을 들어 진짜 친구를 만드는 멋진 자리라고 나를 북돋웠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날아온 어린이와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멋진 영화들을 잔뜩 보고 이야기 나누는 일이야말로 지금의 내게 가장 필요한 경험이 아니겠냐고, 그래야 다음 작품에 필요한 더 큰 자극과 자양분을 얻어갈 수 있지 않겠냐고 말했다. 도무지 넘어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마리안의 말만 믿고 베를린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서른 편이 넘는 영화들 가운데, 정말 기적처럼 이 영화 < 다시 태어나도 우리 >를 만났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다음 작품의 영감을 얻은 것은 물론이고, 오래오래 기억하고 두고두고 다시 볼 좋은 작품을 만난 뿌듯함에 오랜만에 많이 행복해졌다. 그리고 비로소, 좋은 작품을 세계에서 가장 처음 만나는 영광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심사의 진정한 기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창용 , 전진 감독의 < 다시 태어나도 우리 >는 전생을 기억하는 어린 린포체 ‘앙뚜’와 그를 돌보는 노승 ‘우르갼’ 두 사람의 이야기를 장장 9년에 걸쳐 정직하게 기록하는 다큐멘터리다. 영화가 시작하면 어느 무엇보다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꼬마 앙뚜의 티 없이 맑은 눈과 눈부신 미소다. 그토록 모든 것에 투명하게 반응하는 아이의 해사한 얼굴을 또 본 적이 있었나 되묻게 되는 놀라운 눈빛과 미소다. 그렇듯 온전하게 빛나는 앙뚜의 모습으로부터 눈을 떼기란, 그 자체로 완벽하게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마음을 주지 않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게 우리는 앙뚜가 웃으면 같이 웃고, 앙뚜가 찡그리면 같이 찡그리고, 앙뚜가 두려워하면 같이 움츠러들고 긴장하는 놀라운 감정이입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 아이가, 아니 이 영화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든 믿고 함께 가보겠다는 결심을 절로 하게 된다. 영화의 진짜 기적은 바로 그다음부터 시작된다. 카메라는 계속 동자승에서 린포체로 성장하는 앙뚜를 진솔하게 담아내는데, 어느덧 우리의 시선은 어린 앙뚜로부터 스승인 우르갼에게로 서서히 이동하게 된다. 우르갼은 늘 따뜻한 미소와 눈빛으로 앙뚜의 곁을 지키며 아이의 모든 여정에 ‘함께’ 한다. 그는 때론 부모처럼 살뜰히 앙뚜의 옷을 입히고 정성스레 밥을 지어 먹이는가 하면, 때론 친한 친구가 되어 앙뚜와 함께 공을 차고 눈밭을 구르기도 한다. 또한 그는 앙뚜가 더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젊은 승려를 불러 과외수업을 받게도 하고, 사원이 없는 앙뚜의 불안과 걱정을 자신의 일처럼 끌어안고 함께 티벳으로 향하기도 하는데, 그때 우리는 그가 그 누구보다 큰 스승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된다. 그 모든 과정에서 우리를 가장 놀라게 하는 것은,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든, 그 어떤 삶의 불확실성과 공포와 마주하든, 항상 사랑과 존중의 마음으로 앙뚜를 대하고 지켜주고자 노력하는 양육자 우르갼의 굳건한 태도와 확신이다. 그는 아이의 모든 호기심과 실수와 배움에 늘 다정하고 섬세하게 반응하고 동참한다. 그는 늘 아이 곁을 든든하게 지키며 무엇이든 나누려 하지만, 절대 함부로 간섭하거나 명령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 배경에야 당연히 린포체를 잘 모시고 섬기려는 승려로서의 종교적 사명감과 책임감이 전제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앙뚜를 대하는 그의 한결같은 태도를 가만히 지켜보다 보면, 그런 종교적 신념 이전에 이미 ‘우르갼’이라는 한 인간의 고귀하고 아름다운 영혼이 발현되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이 영화가 종교적 신비에 둘러싸인 린포체의 은밀한 성장담을 담아내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한 아이를 온 정성을 다해 돌보고, 가르치고, 이끄는 진정한 부모와 스승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을, 그리고 어른과 아이가 최선을 다해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사랑하고, 존중하는 삶이 얼마나 멋지고 행복한 배움의 과정인지 나누려 했음을 깨닫게 된다. 전생의 사원을 찾아 티베트로 향한 여정의 끝에서, 우르갼은 언젠가 앙뚜와 나란히 누워 도란도란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한다. 우르갼이 그동안 앙뚜를 린포체로 모실 수 있어 정말 행복했다고 말하자, 앙뚜는 공부를 다 마친 15년 후 반드시 돌아와 다시 스승님과 만날 거라고 약속한다. 우르갼은 그땐 자신은 너무 늙어서 아이처럼 되어있을 거라고 말한다. 그러자 앙뚜는 다시 약속한다. 그땐 자신이 스승님을 모실 거라고. 그때야말로 자기 인생의 가장 행복한 날들이 될 거라고. 어쩌면 < 다시 태어나도 우리 >라는 아름다운 제목 속에 숨겨진 문장은, “다시 태어나도 또다시 ‘우리’가 되고 싶어요.”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다음 생에 새롭게 태어난 앙뚜가 이번엔 어린 린포체 우르갼의 스승이 되어 또다시 기적 같은 ‘우리’의 삶을 함께 살아갈 모습을 조심스레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