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즐링 주식회사
- 감독
- 웨스 앤더슨
- 제작년도
- 2007
- 출연
- 오웬 윌슨, 애드리엔 브로디, 제이슨 슈왈츠맨, 아마라 카렌, 월레스 우로다스키, 빌 머레이, 안젤리카 휴스턴
웨스 앤더슨의 스타일에 관하여 웨스 앤더슨(이후 앤더슨)의 영화에 관한 주된 불평은 강박적이고 화려한 이미지의 형식적 아름다움에 비해 내러티브의 밀도가 낮다는 것이다. 영화의 서사가 지닌 명확한 목표가 있음에도 주인공의 감정과 주된 갈등에 집중하기보다 산만하게 여러 인물과 주변 사건을 나열하듯 펼치며, 이야기 자체보다 이야기를 표현하는 시청각적 형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느끼기 때문이다. 또한, 영화 속 인물들은 그럴듯한 가상의 세계 안에 살아가는 실제 인간이라기보다 인형극 속 인형처럼 존재하며, 배경이 되는 공간도 로케이션과 세트장의 구분 없이 무대화된 허구적 공간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앤더슨 영화의 특성은 누군가에게는 불평을 넘어 시각적 스타일 외에는 말할 것 없는 텅 빈 영화라는 비판에 이르게 한다. 텅 비었다는 가치 판단을 제외하고, 강박적으로 통제된 시각적 이미지에 반해 내러티브가 온전히 제어되지 않고 산만하게 구성되어 형식과 내용 사이에 연결성이 떨어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이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바라보면, 강박적으로 통제된 이미지를 통해 영화의 허구성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것처럼 서사에서도 그럴듯한 극적 이야기에 이르는 고전적 구조가 아니라 산만한 구성을 통해 몰입을 방해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는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는 영화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예컨대 앤더슨 세계의 스타일이 완전히 자리 잡기 전인 데뷔작 < 바틀 로켓 >(1996)을 보자. 영화의 핵심 사건을 이끌어가는 인물인 디그넌(오언 윌슨)은 서점과 공장을 터는 행위를 범죄 영화의 한 장면을 모방하듯 실행한다. 하지만 그의 모든 작전은 장르 영화처럼 흘러가지 않고, 모방임이 드러난 방식으로 엉성하고 우스꽝스럽게 작전이 진행되거나 실패에 이른다. 그럼에도 디그넌의 계획들은 그가 추구했던 일상적인 삶 바깥의 일탈적 범죄에 도달하며 그 스스로도 만족한다. 법적 처벌을 받고 감옥에 갇혔다는 암울한 상황과 그 과정이 그럴듯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에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은 몽상가를 필요로 한다”라는 디그넌을 은유하는 영화의 핵심 대사 속에 꿈이란 고전적인 극적 구조로서의 환영이 아니라 그것을 모방함이 드러난 아마추어 같은, 어딘가 부족한 반쪽짜리 환영이다. 디그넌이 그랬던 것처럼, 앤더슨 세계의 꿈 혹은 영화적 꿈이란 두 가지 상반된 가치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꿈이 주는 일탈적 즐거움, 비현실적인 아름다움과 그것이 결국에는 허구일 뿐이라는 무력감, 애상적 감정이다. 그것을 계획하고 통제하는 방식에서 앤더슨은 기묘한 전략을 구사한다. 먼저 시각적으로는 강박적으로 계산된 이미지의 아름다움을 가시화한 프레임과 과도하게 장식적인 이미지로 인해 가짜임이 드러난 형식으로 보여준다. 환영적이면서 일면 자기 반영적(self-reflexivity)이기도 한 모순된 시각화 방식이다. 그것을 가장 직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만든 <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 >(2009)와 < 개들의 섬 >(2018)이라는 두 편의 애니메이션과 다른 영화 간의 비교이다. 이 두 편의 영화는, 완전한 가상인 그림이나 CG가 아니라 현실의 인형과 물질을 활용한 스톱모션으로 제작되어 애니메이션이라는 허구의 세계가 하나의 사실적 이미지이기도 함을 이중으로 드러낸다. 이는 현실의 인간들과 공간을 촬영한 영화를 정반대로 비현실적으로 연출하고 미니어처 애니메이션처럼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 이미지를 다루는 앤더슨의 의도를 짐작하게 한다. 가상의 것은 사실적으로, 사실인 것은 비현실적으로 그리며 ‘영화’라는 사실을 기록했지만, 이미지에 불과한 매체의 양면성이 빚는 감각을 극대화하여 활용하는 것이다. 앤더슨적인 스타일을 대표하는, 강박적 대칭 구도를 생각해보자. 오른쪽과 왼쪽이 데칼코마니처럼 같아 안정적 아름다움에서 오는 미적 즐거움과 그러한 구도가 극단적으로 반복되어 작위성이 드러나는 일종의 거리 두기 효과를 동시에 획득한다. 마찬가지로 수평과 수직 트래킹 쇼트는 인물에게 다가가는 몰입의 효과도 있지만, 주요인물에게서 멀어지거나 관객들이 몰입하고 있는 프레임을 벗어나 공간이 확장되는 효과를 주면서, 우리가 몰입하고 있는 이야기 바깥에도 다른 세계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다만 이러한 프레임 밖을 비추며 나타나는 효과가 다른 사실주의 영화들처럼 이야기 바깥에 존재하고 있는, 통제 불가능한 세계의 잠재성을 확인시키는 열린 프레임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앤더슨의 영화에서는 완전히 통제된 허구의 세계 바깥에도 통제된 다른 허구적 무대가 계속 이어져 있는 열려있지만 닫혀있기도 한 기이한 프레임의 성질을 나타내고 있다. 열려있지만 닫혀있고, 몰입시키면서 몰입을 저해하는, 이를테면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2023)에서 등장인물이 직접 소설 지문까지 읽는 형식처럼 앤더슨 영화의 내러티브에서도 환영성과 자기 반영성의 모순적 충돌이 일어난다. 그의 영화 대부분에서 중심인물에는 결핍이 있고 그 결핍은 어머니의 죽음(<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 >), 친구의 죽음(<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 생활 >), 아버지의 죽음(< 다즐링 주식회사 >), 부모님의 부재(< 문라이즈 킹덤 >), 아내의 죽음(< 애스터로이드 시티 >)과 같이 사적 전사(前史)를 이룬다. 보통 영화가 그러하듯 앤더슨의 영화에도 인물의 전사는 거대 서사를 만나 해결되는 고전적인 이야기 형태로 마무리된다. 다만 그 과정이 극적 구조로만 묘사되지 않으며 앞서 언급한 대로 산만하게 서브플롯을 다루거나, 시간 순서를 뒤섞거나, 막을 나누거나, 화면비와 색을 바꾸거나, 시각적 형식 자체가 서사의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서사를 이끌어가는 동력은 고전적이지만 과정이 그렇지 못하다. 이것이 앤더슨 영화의 내러티브가 밀도가 낮다고 느끼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하지만 디그넌이 엉성하고 우스꽝스럽게 범죄를 모방하는 것처럼, 극적 밀도가 낮은 상태 혹은 고전적인 것과 그렇지 못한 과정이 충돌하는 내러티브 방식이 앤더슨의 의도이다. 매혹 시키면서도 부자연스러운 작위성을 나타내는 이미지, 시각 형식의 모호한 감각을 즐기는 것이 앤더슨 영화의 핵심이듯 말이다. <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2014)에 이르면 앤더슨은 그러한 자신의 테마에 더 적절한 이야기 구조를 하나 덧붙인다. 수평 트래킹의 움직임을 따라 화면을 확장하여 우리가 보고 있는 허구적 세계 밖에도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통제된 움직임 아래 보여주었던 것처럼 액자식 구조를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그의 이전 영화처럼 주요인물의 결핍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이야기 속 이야기 안에 제로(토니 레볼로리)가 젊은 시절에 겪은 영화적인 모험이 있고 그 극적인 사건 끝나고 회상 밖으로 나왔을 때 비로소 결핍이 등장한다. 과거의 이야기, 허구적인 모험의 바깥에 전쟁이라는, 파시즘이라는, 독감이라는 재앙의 현실이 있고 더 바깥에는 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작가(주드 로/톰 윌킨슨)의 죽음이라는 시간이 있다. <애스터로이드 시티>(2023)에 시간은 약이 아니라 반창고는 될 수 있다는 대사처럼 제로가 작가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얻을 수 있는 것은, 상처의 회복이 아니라 슬픔과 약간의 위로뿐이다. 오기(제이슨 슈왈츠먼)가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돌아가신 아버지가 4.5광년 떨어진 별나라가 아니라 땅속에 있다고 말했듯, 앤더슨은 고전적 이야기 구조가 온전한 위로를 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대신 미니어처처럼 작게 보이는 인간과 세계를 액자식 구조를 통해 가까이서도 멀리서도 바라보며 영화가 할 수 있는 건, 우리의 삶과 비슷하면서 다른 허구의 아름다움에 이입하거나 거리를 두며 나의 현실을 비추는, 낯설고 기묘한 감흥을 줄 수 있을 뿐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말하자면, 앤더슨의 영화적 꿈이란 두 가지 상반된 가치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일탈적 즐거움, 비현실적인 아름다움과 그것이 결국에는 허구일 뿐이라는 크나큰 낙차에서 오는 무력감, 애상적 감정이다. 가상의 공간, 애스터로이드 시티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막 도착한 오기는 자식들에게 아내의 부고를 전하며, 과거 자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아버지는 별나라에 계신다고 위로했던 일화를 말한다. 그는 그것을 부정하며 시간은 약이 될 수 없고, 반창고 정도는 될 수 있다고 덧붙인다. 이처럼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처음부터 고전적인 이야기의 허구적 위로가 불가능함을 선언하듯 시작한다. 그럼에도 가상의 공간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결핍을 지녔거나 상처를 지닌 캐릭터들이 모여든다. 중심인물인 오기는 아내의 죽음을 겪었고, 밋지(스칼렛 요한슨)는 전 결혼생활에 문제가 있다. 이 두 사람은 1층이지만 전경만 보면 공중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물 창을 통해 이야기를 나눈다. 각자의 과거와 상처를 말하고, 사진을 찍고, 연기 연습을 도와주는 과정에서 창을 경계로 마주 보는 두 인물의 관계는 각각 카메라와 피사체이자 관객과 배우처럼 느껴진다. 창이라는 프레임을 경계로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두 인물의 구도와, 오기가 사진작가이고 밋지가 배우라는 직업적 위치가 그러한 생각을 강화한다. 여기에 왜 자신과 오기가 가까워졌는지 알겠다고 말하는 밋지의 말이 덧붙여진다. 둘은 비슷하므로 가까워졌다. 아픔을 가지고 있고 그 아픔을 숨기고 있다는 유사성 때문에 서로의 눈을 바라보기를 멈추지 못한다. 카메라와 피사체, 관객과 배우는 아픔, 결핍을 매개체로 이어져 있다. 물론 시선을 끌어당기는 볼거리라는 본질적인 이유도 있지만, 대개 관객들은 현실과 닮은 허구의 고통과 갈등에 이입한다. 때문에, 영화의 시작에서 해설자(브라이언 크랜스턴)가 완전한 픽션이라고 선언한 애스터로이드 시티에도 상처를 지닌 인물들이 모여든다. 그렇지만 앤더슨 영화가 늘 그러하듯,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인물들의 전사와 감정에 온전히 집중하기보다 액자식 구성을 오가며 여러 인물의 서브플롯들을 산만하게 비춘다. 외계인이 소행성을 훔쳐 가는 비일상적인 사건 또한, 보통의 고전적 이야기 구조라면 주인공의 결핍이나 상처를 거울처럼 비추는 은유가 되거나 갈등을 해소하는 거대 서사로 기능하지만 오기와 밋지에게는 그렇지 않다. 사건이 발생한 다음 날 밋지는 오기에게 느낌이 다르냐고 묻고 오기는 아무 느낌 없다고 답한다. 그러고 얼마 후 외계인이 나타나 훔쳐 갔던 소행성을 돌려놓는 사건이 발생한다. 외계인은 왜 소행성을 가져갔고 다시 돌려놓았을까? 우드로(제이크 라이언)는 외계인이 소행성을 가져간 후 오기에게 “이제 세상이 변했고, 모든 것이 불확실하며 외계인이 또 올지 오면 무슨 말을 할지 우리는 아는 것이 없고, 어쩌면 저 우주에 뭔가 우리 삶의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외계인이 소행성을 돌려놓고 변한 것은 우습게도 소행성에 적혀진 품목번호뿐이다. 외계인(제프 골드블룸)을 연기하던 배우 또한 외계인 탈을 벗고 자신은 외계인을 하나의 메타포로 이해한다고 말했을 때 오기가 무엇에 관한 메타포냐고 되묻자 대답하지 못하고 모든 것이 모호하다고 답한다. 즉 이 코스믹 한 해프닝은 그저 픽션에 필수 불가결한 비일상적인 사건으로서만 기능적으로 존재한다. 때문에, 오기 역할을 연기하던 존스는 혼자 중얼거린다. “이 연극이 이해가 안 돼” 그는 이 말을 내뱉고 무대 뒤로 연결된 문을 열고 연극 연출자에게 향한다. 허구의 이야기가 상연되는 무대 밖을 벗어나 횡적으로 이어진 여러 공간을 지나쳐 오기는 연출자를 호출한다. 자신이 제대로 연기하고 있는 것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계속 연기를 해야 하는지, 저 우주엔 뭔가 답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물으며 이 연극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호소하는 주연 배우에게 연출자 슈버트(에이드리언 브로디)는 “상관없어 그냥 계속 연기해(Doesn't matter, Just keep telling the story)”라고 말한다. 외계인의 말대로 모든 것이 모호하고, 해설자의 말처럼 현대 연극으로 정의되는 이 이야기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창작과정의 고통을 묘사하는 한 장면처럼 보이지만 아무런 답을 내리지 않는 이 둘의 대화에는 이상한 감동이 있다. 내가 아닌 캐릭터의 상처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는 오기이자 존스의 고민에 연극이라는 하나의 작은 우주를 통제하는 연출자가 삶의 고통 속에서도 그저 계속 연기를 할 수밖에 없다,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전하는 말이 현실 세계를 향한 코스믹(Cosmic) 한 시선의 조언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밖에서 안으로 히켄루퍼 박사(틸다 스윈튼)는 우드로를 위로하며 자신의 어머니도 46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공통점으로 서로의 마음에 공감하지만 아주 오래전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어른의 마음과 얼마 전에 일을 겪은 아이의 마음은 같을 수 없다. 다만 46년이라는 시간이 아이를 어른으로 만든다면 그때는 우드로가 박사의 마음을 이해할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외계인이 등장하는 코스믹 한 사건에도 어른들은 시큰둥하고 격리된 상황에 불평만 늘어놓지만, 아이들은 외계인을 향한 끊임없는 호기심을 보이며 통제된 상황을 타개할 작전을 세운다. 이 맹랑한 아이들도, 죽은 딸이 과거에는 손녀들 같았다고 말하는 스탠리(톰 행크스)의 대사처럼, 언젠가 어른이 될 것이다. 당연히 히켄루퍼의 말대로 몇조 킬로미터 떨어진 별의 빛이 우리에게 닿은 시간만큼은 아니겠지만 끝없이 흐르는 우주적 흐름대로 말이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액자식 구조의 여러 겹의 세계 속 현실과 허구를 오가며, 스토리텔링 하는 연기자들처럼 우리의 삶도 일면 가상적이라고 말한다.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처럼 가까운 이의 죽음이, 삶의 고통이, 우주인의 등장과 같은 허무맹랑한 사건이 등장하더라도 결국, 이야기의 처음에 보여주었던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황량한 일상으로 돌아오는 우주의 순환적 시간 아래 그러하다. 대신 이러한 무기력함, 허무함 속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잠을 자는 것이라 덧붙인다. 언젠가 죽음의 시간이 찾아오면 오기의 말대로 땅으로 돌아가 영원한 잠을 자게 되겠지만, 살아가는 동안 자는 잠에는 꿈이 존재한다. 연기 학교의 선생님 솔츠버그(윌렘 데포)가 말한 것처럼 말이다. “자는 건 죽는 것이 아니다. 숨 쉬고 심장이 뛰고 생각도 한다. 죽은 엄마를 만날 수 있고, 전처나 전남편과 잘 수도 있고, 마테호른에 오를 수도 있다. 그게 스토리가 될까? 되지, 밖에서 안으로 씬을 구성해보자고” 밖에서 안으로 씬을 구성한다. 이는 꿈에서 이야기로, 이야기에서 현실로 삶을 구성한다는 말로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안에서 도저히 이 연극을, 이 삶을 이해할 수 없던 오기는 밖으로 나간다. 그 밖이란 무대를 넘어 연극이 상연 중인 건물 외부까지 향한다. 이때 그는 연극에서 잘린 배우를 만나게 된다. 오기의 아내 역할을 했던 배우(마고 로비)와 삭제된 장면의 대사를 나누는 이 장면은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동적이고 아름답다. 은유적인 의미에서 오기의 죽은 아내와 대화를 나누는 씬이지만,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극적 상황이 아닌 일상적 위치에서, 두 인물이 배우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고, 삭제된 대본을 아내 역할의 배우가 혼자 상대의 대사와 지문까지 읊고 있는 자기 반영적 상태이기 때문이다. 두 배우에게 이 대본 리딩은 감정적인 몰입의 순간이 아니라 쉬는 시간에 겪은 작은 대화처럼 지나가며, 좋은 회상인데 왜 잘랐는지 서로 의문을 표하며 가볍게 헤어진다. 정작, 이 장면 속에서 별나라에 있는 오기의 엄마를 만난 것처럼, 죽은 아내와 조우하게 되는 것은 스크린 밖 우리 관객들이다. 측면에서 두 인물을 약간 멀리서 비추는 쇼트들이 지나가고, 대사의 감정이 극에 달했을 때 정면 바스트 쇼트에서 클로즈업 쇼트로 인물을 비추면, 그 쇼트들이 만드는 환영적 효과는 관객들에게 약은 아니지만, 반창고와 같은 작은 위로의 감동을 선사한다. 또한, 우리가 오기의 죽은 아내를 보지 못했지만 본 것처럼 느끼듯, 배우인 존스가 대본에서 삭제된 부분을 상대역을 통해 듣는 것일 뿐 오기라는 연극 속 캐릭터가 겪은 경험이 아님에도, 오기가 꾸는 꿈처럼 느끼게 한다. 이는 밋지와 창을 통해 나누었던 장면의 구성과도 공명하면서 이해할 수 없던 연극의 의미를 부여하며, 무대의 안과 밖, 스크린의 안과 밖의 경계를 어지럽게 뒤섞으며 환영성과 자기 반영성의 충돌이 만들어내는 소용돌이 속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리고 “난 돌아올 수 없어 오기”라는 아내의 슬픈 대사와 함께 존재의 부재증명이라 할 수 있는 그녀의 사진을 냉정하지만 일면 따뜻하게 마주하게 한다. 결국,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오기가 무대를 탈주하며 이어지는 이 장면들을 통해 꿈이, 허구가, 이야기가 주는 일탈적 즐거움, 비현실적인 아름다움과 그것이 결국에는 허구일 뿐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무력감, 애상적 감정이 뒤섞인 앤더슨 세계의 모호한 매혹을 잘 드러내는 최상의 것으로 남는다. 잠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다 이 탁월한 시퀀스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연극의 극작가 콘래드(에드워드 노튼)의 죽음을 알리며 모든 연기자가 다 같이 “잠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다”라는 대사를 외치는 씬으로 이어진다. 콘래드가 연극의 주제가 무엇이냐는 배우의 질문에 “무한함? 나머지는 잘 모르겠어”라고 말한 것처럼, 앞과 뒤를 알 수 없이 순환하고 있는 이 문장은 앤더슨식 세계를 더없이 적절히 요약한다. 이제 영화의 엔딩에서 우리는 잠에서 깬 오기의 모습을 보며 지금까지 나왔던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극작가가 신비한 우주적 체험을 공유한 모든 등장인물이 몽환적인 잠 속으로 제각기 빠져드는 씬을 구상 중이라고 했던 것을 떠올리면, 여전히 연극 속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이것이 안인지 밖인지 헷갈릴 때쯤, 영화는 죽은 엄마를 향해 기도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무신론자의 시선으로 끝을 맺는다. “나는 돌아올 수 없다”라는 삭제된 꿈 장면의 슬프지만 차갑기도 한 대사처럼, 신을, 꿈을, 허구를 믿지 않지만, 반창고 같은 위로를 기대하며 그렇게 영화라는 잠에 빠지고 꿈에서 깨어난다.
최근 한국 애니메이션이 두 편이나 연달아 개봉을 했다. < 소중한 날의 꿈 >과 < 마당을 나온 암탉 >이 그 작품들. 한국 애니메이션의 제작 상황을 생각했을 때 웬만해선 일어나기 힘든 일이다. 그중 <마당을 나온 암탉>이 황선미 작가의 베스트셀러 동화가 원작이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걸 본 계기로 한국아동문학에 관심이 가고, 나아가 유명 애니메이션 작가들이 사랑해온 걸작 동화들이 새삼 궁금해졌다. 가장 먼저 로알드 달의 원작들이 떠오른다. 헨리 셀릭이 연출한 < 제임스와 거대한 복숭아 >와 웨스 앤더슨의 <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 >가 달에게 거대한 빚을 지고 있다. <제임스와 거대한 복숭아>에서 갈매기들에게 매달려 푸른 밤바다 위를 날아가는 거대한 복숭아의 모습이 얼마나 환상적인지. 한밤중 거대한 복숭아 위에서 듣는 지네 아저씨의 바이올린 연주는 또 얼마나 가슴 설레는지. < 스티브 지소와 해저생활 > < 다즐링 주식회사 >를 연출한 전방위 아티스트 웨스 앤더슨이 자신의 색깔을 한껏 살린 첫 애니메이션 <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 >도 나무랄 데 없다. 닭장을 털고 농장을 습격하는 미스터 폭스를 통해 보여준 로알드 달의 유머 감각이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에도 그대로 적용돼 황홀했던 기억이 있다. 달이 생각해낸 미스터 폭스의 캐릭터나 미스터 폭스 식구들, 그리고 악질 농장주 삼인방은 어느 영화에서도 보기 힘든 캐릭터. 나무 밑 여우굴의 이미지나 농장주들에게 쫓기던 미스터 폭스가 대반전을 꾀하는 결말도 유쾌하고 발랄한 여운을 남긴다. 어른들의 규범과 관습에 어긋날지라도 아이들이 원하는 반전을 그려냈던 로알드 달의 비틀린 유머 감각은 단연 최고다. 그의 원작으로 애니메이션이 나올 때마다 그의 동화가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 새삼 놀라곤 한다. 감독 스파이크 존즈가 모리스 샌닥의 동명 그림동화를 꿈같은 화면으로 되살려낸 < 괴물들이 사는 나라 >도 빼놓을 수 없다. 몇 페이지 안 되는 원작 속에 ‘괴물처럼 아우성치며 외로워하는 어린이’에 대한 철학을 담아놓은 샌닥의 심오한 상상력이 없었다면 절대 나올 수 없었던 작품이다. 스파이크 존즈도 그만큼 원작에 경의를 표하고 있다. 지브리 스튜디오가 건드린 동화들도 빼놓을 수 없다. 영국 작가 다이애나 윈 존스의 < 하울의 움직이는 성 >이나 어슐러 르 귄의 <게드 전기>이나 메리 워튼의 동화 <마루 밑 소인들>. 오리지널 스토리가 바탕이 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들보다는 파급력이 덜했지만, 지브리에 새로운 상상력을 수혈해준 동화들이었음은 사실이다. < 백설공주 >에서 < 라푼젤 >에 이르기까지 디즈니가 숱하게 작업해온 클래식 애니메이션을 통해서도 수많은 동화 원작을 입체적으로 만나왔고, 윌리엄 스테이그가 쓴 동화 <슈렉>이 애니메이션으로 4편까지 장수하는 것을 목격했다. 우리에게도 물론 정채봉의 <오세암>이나 권정생의 <강아지똥>이 있다. 판매부수 100만부가 넘은 한국아동문학의 베스트셀러 <마당을 나온 암탉>까지 애니메이션이 됐다. 그러나 개인적으론 여전히 충분치 않다고 생각한다. 애니메이션 < 마당을 나온 암탉 >의 완성도에도 이견이 있는 상황에서, 더 다양한 색깔의 한국 동화를 많이 발굴할 필요가 있다. 오리지널 스토리의 중요성도 크지만, 이미 이야기와 캐릭터의 완성도를 갖춘 동화 한 편이 주는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모르긴 몰라도 한국 아동문학을 샅샅이 뒤져본 애니메이션 관계자들이 적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 아동문학의 조류나 성향도 잘 모르고,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되기 적합한 이야기들이 어느 정도 되는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아동문학에 살을 붙이고 가지를 칠 수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 콘텐츠도 없을 듯하다. 개인적으로 골라보라면 요즘 한국 아동문학의 ‘핫 이슈’라 할 백희나 작가의 <달 샤베트>를 극장용 애니메이션으로 보고 싶다. 일면식도 없지만 작가가 직접 그리고 세트를 지어 사진 촬영한 입체 일러스트가 대형 아이맥스 화면에서 살아 움직이는 걸 보고 싶다. 그녀의 전작 <구름빵>이 이미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된 바 있다. 하지만 더운 여름밤 잠 못 이루는 아파트 주민들을 위해 반장인 여우 할머니가 달로 샤베트를 만들어준다는 <달 샤베트>의 그림과 이야기는 왠지 더 시네마틱하다. ‘한국의 웨스 앤더슨’ ‘한국의 헨리 셀릭’이 혜성같이 등장해 원작의 색감과 질감을 살려 스크린에 옮겨주길 괜히 기대해본다.
2D 애니메이션이 정지된 그림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싶은 욕망을 채워준다면,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생명을 얻은 무생물을 마주하는 쾌락을 선사한다. 이 쾌락은 ‘실제가 아니라서’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컴퓨터 기술 없이, 인형이 움직인다던지 사람이 날아다니는 등 존재할 수 없는 광경의 연출이 가능한 스톱모션은 실사와 확연하게 구분된다. 때문에 스톱모션에서 어느 정도의 부자연스러움과 조악함, 그러니까 ‘가짜 티’는 굳이 숨기지 않아도 좋다. 환상과 실재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스톱모션 세계의 묘미는 가짜가 용인되는 데 있으니까. 로알드 달의 동화 《멋진 여우씨》를 원작으로 한 웨스 앤더슨 감독의 애니메이션 < 판타스틱 Mr. 폭스 >는 그 쾌락의 지점을 영리하게 짚어낸 여우같은 영화다. 《 제임스와 거대한 복숭아 》, 《 찰리와 초콜릿 공장 》 등 판타스틱 영화의 단골 원작으로 쓰이는 로알드 달의 동화와 <로얄 테넌바움>, <다즐링 주식회사> 등의 영화에서 결핍된 인간 군상들을 그려온 웨스 앤더슨의 만남은 너무나 사람 같으면서 지극히 야생동물인 Mr. 폭스를 만들어냈다. 닭털이를 업으로 삼아오다가 처자식이 생기면서 신문 칼럼니스트로 전업해 고상하게 살고 있는 중년 여우다. 그는 번듯한 슈트 차림에 뻔뻔하게 이족 보행을 하고 신문을 본다. Mr. 폭스 역을 위해 태어난 듯한 조지 클루니의 목소리는 사람보다 여우가 젠틀하고 섹시할 수 있다는 믿음마저 준다. 반면, 식탁 위에 정숙하게 차려진 식사를 으르렁대며 뜯어먹고 굴착기보다 빠른 속도로 땅을 파는 모습은 영락없는 야생여우다. 의례 인간이 동물 캐릭터를 치장할 때 덧붙이는 귀여움도 그들의 외모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렇게 불완전한 의인화가 주는 기괴한 매력과 조악한 움직임은 가짜의 ‘환상’을 보여준다. 반면, 소품들은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동물들이 입고 있는 옷, 집 안의 가구, 건물 등의 재질과 디테일은 소장하고 싶을 정도로 섬세하다. < 판타스틱 Mr. 폭스 >는 스톱모션이라는 기법 안에서 ‘진짜’와 ‘가짜’ 사이의 간극을 장점으로 끌어안아 동화책과는 다른 매력을 갖게 됐다. 어설픈 교훈을 내세워 착한척하지 않는 쿨한 동화작가 로알드 달의 장기 ‘골탕 먹이기’는 애니메이션에도 잘 살아있다. 그 진가는 Mr. 폭스가 닭털이 여우로서의 본능에 충실한 삶을 택하면서 발산된다. 그는 농장주 3인방 보기스, 번스, 빈의 거대한 농장을 상대로 도둑질을 일삼고, 인간들은 자신의 소유물을 훔친 여우 한 마리를 잡기 위해 숲을 쑥대밭으로 만든다. Mr. 폭스와 동물들은 더 치밀하고 과감하게 농장으로 침투하지만 이야기가 조롱하는 대상은 Mr. 폭스가 아닌 사회의 권위가 만들어낸 정의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새 야생동물의 편에 서서 엄숙한 권위만 남은 인간들이 골탕 먹는 것을 관람하며 낄낄거리게 된다. 물론 우리가 거들고 싶은 부분은 동물들의 권익 같은 것이 아니다. 사회가 강요하는 반듯함을 거부하고 생긴 대로 사는 삶에 대한 응원이다. 그들의 자연스러운 도발이 불편하지 않다면 스톱모션의 다듬어지지 않은 영상도 매력 있게 느껴질 것이다. 오히려 스톱모션을 선택했기에 < 판타스틱 Mr. 폭스 >는 가장 판타스틱한 방법으로 동화책에서 나올 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