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 감독
- 샘 레이미
- 제작년도
- 2022
- 출연
- 엘리자베스 올슨, 베네딕 컴버배치, 베네딕트 웡, 레이첼 맥아담스, 치웨텔 에지오포
지난해 12월 12일, 한국영상자료원(이하 ‘영자원’)은 “스크린 케미스트리: 스타로 보는 한국영화사”라는 제목으로 1950~1990년대 한국영화계 스타 커플의 관계성을 분석하는 시네포럼을 개최했다. 한국영화사 연구를 수행하는 아카이브로서, 영화연구자는 물론 관련 분야에 관심을 가진 참여자들이 한국영화사와 관련해 새롭게 논의될 만한 지점을 발견하며 대화하는 장을 마련하고자, 영자원은 매년 이와 같은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이번 행사는 학술적인 분석 중심의 발제나 토론이 아니라 발표자들이 청중의 질문을 받아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시네포럼의 방식으로 진행됐다. 국내 주요 스타 커플이 등장한 시기를 네 구간으로 구분하고, 각 구간별로 등장한 스타 커플과 당시 한국영화나 대중문화의 특성 간의 상관관계를 조명했다. 시기별로 논의될 만한 스타들을 미리 설정해놓기는 했지만, 이들의 활동이 갖는 의미는 발표자가 스스로 고민한 후 관객에게 제안하도록 열어뒀다. 1950~1990년대 급변한 한국사회의 분위기와 영화산업의 지형을 참고하면서, 시대를 ‘풍미’한 스타들이 대중에게 남긴 여운을 발표자와 참여자가 함께 추적할 수 있었던 포럼 현장을 요약한다. 1950~1960년대 스크린 속 스타 커플 영화평론가·영화사가 김종원 김종원 평론가는 1950~1960년대 한국영화에서 커플로 등장한 스타들 간 케미스트리를 발견했다. 1950년대 스타 커플의 역사는 < 출격명령 >(홍성기, 1954)에서 처음 호흡을 맞추고 실제 부부가 되어 < 춘향전 >(이규환, 1955)에서 향단과 방자를 연기한 전택이 와 노경희 부터 시작한다. 배우 노경희는 < 내가 넘은 삼팔선 >(손전, 1951)을 비롯해 < 피아골 >(이강천, 1955) 등에서 해방 이후 스크린을 통해 강렬한 카리스마를 분출하는 여성 배우로 거듭나고 있었으며, < 아리랑 3편 >(나운규, 1936)으로 데뷔한 전택이와 여러 작품에 동반 출연하며 20세기 중반 한국영화사에서 함께 활약했다. 이후 김승호 와 황정순 이 강대진 감독의 < 박서방 >(1960), < 마부 >(1961), 김수용 감독의 < 굴비 >(1963)에서 돋보이며 또 다른 스타 커플로 주목받았다. 그런데 < 새로운 맹서 >(신경균, 1947)로 데뷔한 배우 최은희 는, 커플을 구성하는 인물들 간 관계가 남성을 중심으로 형성된다는 당시 시대적 한계에서 벗어나, 케미스트리를 주도하는 여성 인물로 떠올랐다. 김진규 와 신영균 의 상대역으로 등장한 신상옥 감독의 < 동심초 >(1959), < 상록수 >(1961), < 산 >(1967)과 같은 작품들에서 이러한 측면이 두드러진다. 한편, 스타 커플의 일원으로 거론된 적은 드물었지만 멜로드라마 위주의 문예영화 영역 밖의 상업영화 작품들에도 다수 출연하며 입지를 다진 김지미 배우의 행보도 독특했고, 그의 활약은 < 골목안 풍경 >(박종호, 1962), < 불나비 >(조해원, 1965)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후 1960년대에 등장한 ‘트로이카’의 구성원으로, 김종원 영화사가는 배우 엄앵란 , 윤정희 , 문희 를 꼽았고, 그들과 배우 신성일 의 긴밀한 관계를 설명했다. 엄앵란은 < 청춘교실 >(김수용, 1963), < 맨발의 청춘 >(김기덕, 1964) 등에서 그와 함께 연기하며 ‘청춘영화’의 전성기를 불러왔으며, 두 배우의 호흡은 한국영화계에서 ‘스타’의 존재를 부각함과 동시에, 이전까지 외화에 치중됐던 국내 관객의 관심이 한국영화로 선회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윤정희는 데뷔작 < 청춘극장 >(강대진, 1966)부터 < 안개 >(김수용, 1967), < 장군의 수염 >(이성구, 1968) 등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며 1960년대 한국 예술영화의 주축을 구성하는 배우로 자리매김한다. 문희 역시 이만희 감독의 < 흑맥 >(1965)과 < 돌아오지 않는 해병 >(1963) 등에서 신성일의 상대역을 연기하면서 트로이카의 구성원으로서 영화계에 두각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러한 신성일 중심의 트로이카 구도로 대표되는 1960년대 한국영화의 스타 커플 구조는, < 결혼교실 >(정인엽, 1970) 속 신성일과 윤정희, 문희, 남정임 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린다. 윤정희 X 신성일: 1960~1970년대 개발독재시대의 ‘밀고 당기기’ 영화평론가·영화연구자 금동현 금동현 평론가는 1960~1970년대 대표 배우이자 청춘스타였던 신성일과 윤정희가 동반 출연작에서 연기한 인물들의 관계를 ‘밀고 당기기’라는 용어로 재해석했다. 극중 그들의 배역이 점하는 위치는 1966년부터 1980년까지 함께 출연한 87편에 달하는 작품들에서 거듭 역전되고, 둘 간의 케미스트리가 두드러진 <안개>와 < 야행 >(김수용, 1977)에서 이 점이 선명히 관찰된다. 배우 신성일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 아낌없이 주련다 >(유현목, 1962)로 데뷔한 이후 유수의 작품에서 줄곧 주연을 맡았고, 특유의 소년미로 ‘청춘의 영원한 아이콘’이자 현대사회에 완전히 정박하지 못한 무책임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줬다. 반면 도회적이고 지적인 여성 인물을 대표했던 배우 윤정희는 1972년 석사 논문 「영화사적 측면에서 본 한국여배우 연구: 1903~1946년을 중심으로」를 발표하면서, 배우이자 여성인 자신의 위치를 성찰하는 면모를 보이며 ‘멜랑콜리’한 정서를 중심으로 스타 이미지를 갱신했다. <안개>와 <야행> 중 신성일, 윤정희 / © ㈜태흥영화 일례로, <안개>에서만 해도, 윤정희는 주변 소품이나 인물들 사이에 갇혀있고 신성일과의 관계에서 주도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인물로 나타났다. 하지만 <야행>의 몇몇 장면에서 윤정희는 자신을 향한 관객의 시선을 의식하는 연기를 수행함으로써, 1970년대 한국영화가 관객의 시선을 활성화하는 성취를 이루는 데 기여한다. 신성일과의 케미스트리를 일으킴과 동시에 한국영화사의 흐름을 따라가며 구축된 윤정희의 스타 이미지를 참고하면, 금동현 평론가는 그가 ‘보여지는(보이는) 여성’에서 ‘보여주고 보는’ 여성으로 변화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1960~1970년대 한국고전영화 중 빼놓을 수 없는 걸작인 두 작품의 영화사적 의미가 제대로 파악되기 위해서는, 당대 형성된 두 배우의 스타 이미지를 반드시 경유해야 한다는 관점도 공유했다. 더불어, 두 사람이 우울하지 않은 명랑한 얼굴로 콤비를 이룬 작품 < 아파트를 갖고 싶은 여자 >(정인엽, 1970), < 모범운전사 갑순이 >(이형표, 1972) 역시 언급하면서, 둘의 케미스트리를 다른 방식으로도 재조명하고 싶다는 소회를 밝히며 발표를 마쳤다. 장미희 X 안성기 1980년대 한국영화의 황금 커플 영화연구자 이윤종 이윤종 영화연구자는 1980년대를 대표하는 배우 장미희 와 안성기 를 다루면서, 당대 한국영화 주요작에 출연하며 강력한 케미스트리를 발휘한 이들을 ‘황금 커플’로 지칭했다. 안성기는 김기영 감독의 1957년작 < 황혼열차 >에서 아역 배우로 데뷔해 연기 활동을 지속하다가 < 애수의 언덕 >(김대희, 1969) 이후 10여 년간 휴식기를 보내고 < 병사와 아가씨들 >(김기, 1977)로 복귀했다. 이때부터 < 바람불어 좋은날 >(이장호, 1980), < 적도의 꽃 >(배창호, 1983), < 고래사냥 >(배창호, 1984), < 깊고 푸른 밤 >(배창호, 1985) 등 1980년대 화제작의 주연으로서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인물을 연기하며 ‘국민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같은 시기 장미희와의 동반 출연이 특히 빛났다. 장미희는 < 성춘향전 >(박태원, 1976)으로 데뷔하고 흥행작 < 겨울여자 >(김호선, 1977)에 출연한 이후, 1980년대에 접어들어 당대 여성 배우 트로이카에도 합류한다. 이후 <적도의 꽃>, <깊고 푸른 밤> 등에서는 안성기와 상대역으로 만나 열연함과 동시에 흥행까지 거두면서 두 배우 모두 영화계 입지를 굳히게 된다. <적도의 꽃>와 <깊고 푸른 밤> 중 장미희, 안성기 / © ㈜동아수출공사 그런데 이들이 동반 출연한 1980년대 작품들에서 각자가 욕망의 주체(안성기)와 대상(장미희)으로 설정되면서 둘 간의 케미스트리가 ‘파국’의 결말을 통해 발휘된 점이 인상적이다. 안성기는 순수함부터 비열함에 이르기까지 중·하층민 남성의 변화무쌍한 얼굴을, 장미희는 세련된 외관을 지닌 채 심리적 결핍을 겪는 부유한 여성 인물을 자주 연기했다. <적도의 꽃>에서는 중년 사업가에게 착취당하는 오선영(장미희)에게 반한 미스터 M(안성기)이 그를 구출하려 하지만 결국 화합에 실패한다. < 황진이 >(배창호, 1986)에서 황진이(장미희)에 대한 마음을 전하지 못한 갓바치(안성기)는 극단적 선택을 감행하고, <깊고 푸른 밤>에서는 미국 영주권과 돈벌이에 집착하는 백호빈(안성기)이 계약 결혼을 통해 제인(장미희)을 이용하며, 두 인물이 파멸로 치닫는 과정에서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이 드러난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두 배우는 이렇게 산업화와 군부 독재의 한가운데 드리운 감정 소외나 우울감의 그림자를, 불행의 케미스트리로 스크린에 옮겨왔다. 김혜수 X 한석규: 1990년대 소비문화와 트렌드 신화, 도시의 얼굴 영화평론가·성결대학교 교수 정민아 이전까지 언급된 배우들의 활동이 과거 한국사회의 시대별 흐름에 맞춰 전개됐다면, 정민아 평론가는 1990년대에 두각을 드러내 현재까지도 활발히 필모그래피를 갱신하고 있는 배우로서 배우 김혜수 와 한석규 를 조명했다. 시대를 대표하는 스타였지만 그들이 함께 출연한 작품은 사실 많지 않다. 로맨틱 코미디의 전성기였던 1990년대 < 닥터봉 >(이광훈, 1995)에서 처음 협업한 후 20년이 지난 시점에 < 이층의 악당 >(손재곤, 2010)으로 다시 만났다. 그래서 그들이 한 작품에서 발생시킨 케미스트리보다는, 1990년대를 배경으로 각자의 역량을 개발한 시간을 되돌아보며 오늘날까지도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는 두 배우의 존재감을 분석했다. (상) 영화 <쉬리>, 드라마 <신사장 프로젝트> 중 한석규 / (하) 영화 <첫사랑>, <내가 죽던 날> 중 김혜수 © ㈜필름쿡플러스, tvN 1990년대 국내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하기 전까지, 민주화와 세계화가 본격화되며 대중문화 산업의 규모 역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대중의 취향과 ‘트렌드’에 부합하는 다양한 콘텐츠나 인물이 주목받았던 때로, 이때 등장한 스타들은 대체로 산뜻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로 팬덤을 확보했다. 그중에서도 김혜수와 한석규는 외모와 목소리, 연기, 스타일 등 모든 면에서 당시 대중이 선망한 ‘세련됨’을 구현했고, 데뷔 이후부터 현재까지 작품 속에서 쉼 없이 대중과 호흡해왔다. 한석규는 지성과 인품을 겸비한 도시 남성의 이미지를 표방했지만, 드라마 <서울의 달>(1994)에서처럼 냉정한 현대사회에서 불운을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처연한 청년의 모습으로도 기억된다. 이는 최근까지 그가 TV 드라마에서 보여준 ‘소시민적’ 영웅의 리얼리티와도 맞닿아있다. 또한 감독에 의해 ‘선택받는’ 배우를 넘어 자발적인 비전에 따라 작품과 장르를 선택하고 신인 감독의 성장까지 견인하는 흥행보증수표 영화인의 시초 격이기도 하다. 한편, 김혜수는 활동 초기에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이나 영화 < 첫사랑 >(이명세, 1993)을 통해 젊고 발랄한 청춘스타의 면모와 특유의 건강미로 호응을 얻었다. 200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는 보다 다채로운 배역을 맡아 연기 스펙트럼을 확장했으며, 특히 2020년대 즈음에는 < 굿바이 싱글 >(김태곤, 2016)과 < 내가 죽던 날 >(박지완, 2019), < 밀수 >(류승완, 2023) 등을 통해 독립된 여성 자아가 돋보이는 씨네페미니즘의 상징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비디오 에세이 “기쁜 우리 젊은 날 그리고 안성기” 비디오 에세이스트 이무언,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 연구원 윤서연 비디오 에세이스트 이무언 과 영자원 학예연구팀 윤서연 연구원은, ‘비디오 에세이’라는 작업의 의미를 소개하며 포럼 주제에 맞는 작업 결과물 한 편을 직접 제작해 선보였다. 이무언은 관객이나 연구자로 하여금, 각자가 작품에서 발견한 특별한 지점을 중심으로 연출과 편집을 주도하면서 영화와 한층 더 친밀해지는 기회로 비디오 에세이를 인식했다. 윤서연 연구원 역시 비디오 에세이가 주제가 되는 대상(물)과 이를 둘러싼 세계를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통찰”한 결과이자 “매혹적인 또 하나의 작품으로 기능”한다는 논의 [1] 를 인용하며, ‘오디오 비주얼 크리틱’으로서 비디오 에세이의 영역이 지닌 비평적이면서도 창의적인 측면을 소개했다. 이날 소개한 작업은 영자원이 올해 ‘우수영상물 다국어자막 DVD 제작 및 배포 사업’을 수행하던 도중 두 사람이 기획하게 됐다. 우수영상물 다국어자막 DVD는 영화사적·예술적 가치를 지닌 한국영화 몇 편의 공통 소재를 제목으로 하여, 작품별 본편 영상과 각국의 언어로 번역된 자막, 그리고 코멘터리 영상 등을 수록한다. 영화를 통해 한국의 역사와 문화 전반을 해외에 소개할 목적으로 매년 해외 공관이나 문화원 등에 비영리적으로 배포되고 있다. 작년에는 “영화와 남성: 영화로 보는 스타 페르소나”라는 제목의 DVD에, 한국사회의 일면과 시대의 감성을 머금고 있는 남성 인물들이 인상적인 한국영화 6편을 수록했다. 그리고 감상자들이 한국에 대해 간략히 소개받을 수 있는 짧은 콘텐츠를 기획해 부가 자료로 함께 수록하고자, DVD에서 다루고 있는 남성 배우 6인 중 한 명에 대한 비디오 에세이를 기획했다. 내부 논의 끝에 최종 선정하게 된 에세이의 주인공은, 순정과 헌신, 소시민의 나약함, 일그러진 욕망 등 다채로운 감정을 표현한 국민 배우이자 고전과 동시대를 아우르는 스타로 기억되는 한국영화의 얼굴, 안성기였다. 실제 연령대로 비춰볼 때, 안성기는 에세이를 제작한 이무언의 아버지 세대이면서 작품 촬영 당시에는 그(이무언)와 같은 또래였다. 또한 안성기가 극중 인물을 형상화하며 선보인 특유의 ‘얼굴’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한국사회의 각기 다른 국면을 관통함에 따라, 1980년대의 시절이 하나로 통합되는 듯한 느낌 역시 받았다고 이무언은 전했다. “이미지들의 느슨하고 싱거운 연결”을 통해 이러한 인상이 에세이를 감상하는 이들에게도 전달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반면 윤서연 연구원은 안성기가 각기 다른 영화에서 선보인 대사들 중 인상 깊은 부분들을 모아 1980년대 시대정신과 같은 특정 의미를 강조하여, 작품과 쇼트들의 의미를 비교적 명료하게 전달하고자 했다. 이 두 가지 입장은 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 2017년 시네마테크KOFA에서 그에 관한 특별전을 개최했을 때 제작된 영상 “한국영화의 페르소나, 안성기전”을 참고하고, 구술채록 사업 진행 중 그의 구술 내용이 녹음된 파일들을 다시 들어봤으며, 그가 출연한 수많은 작품 중 10편을 골라 실제로 삽입할 쇼트를 신중히 선택했다. 쇼트마다 배어있는 정서를 자막과 음악으로 배치하기도 했다. 특히 서로 다른 작품에 속한 장면을 소품이나 장소 등을 매개로 연결하며 안성기가 작품과 작품 사이를 유기적이면서도 자유롭게 오가는 듯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연출 중 하나는, < 기쁜 우리 젊은 날 >(배창호, 1987) 중 덕수궁의 벤치에서 각각 아내( 황신혜 )와 딸에게 자상함을 베풀지만 냉대를 받고 마는 두 장면을 한 화면에 나란히 배치해 동시에 재생한 대목이다. 같은 장소를 배경으로 아내와 딸을 향한 그의 행동이 중첩되는 순간들이 보이는데, 이는 필름이 아닌 디지털 영상이 보편화된 시대에 두 개의 영상을 2채널로 나란히 배치하며 가능해진 실험이라고 윤서연 연구원은 덧붙였다. 한국고전영화 에세이 - ‘기쁜 우리 젊은 날 그리고 안성기’ (이미지 클릭 후 재생) 관객과의 대화 (질문1) 1980년대까지 한국영화의 ‘스타’들에게는, 할리우드 스타들로부터 충족되지 못한 국내 관객의 욕망이 투사되는 측면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인적인 관점에서 1990년대부터는 이들만의 영역이 독립적으로 구축됐다는 느낌을 받는데, 한국영화의 각 시기가 할리우드 스타 시스템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에 대해 발표자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 (답변_이윤종 영화연구자) 고전 할리우드 시기 영화산업은 몇몇 주류 영화 스튜디오가 제작과 배급, 상영을 전담하는 방식으로 운영됐고, 배우들 역시 각 스튜디오에 소속된 채로 활동했다. (하지만 1948년 미국 대법원에서 이러한 영업 활동이 ‘독점’에 해당한다고 판결하면서 여러 스튜디오가 해체됐고, 여기에 소속됐던 배우들이 개별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같은 시기 한국에서는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불가능했던 측면도 있지만 이러한 스튜디오 중심의 스타 시스템 자체가 확립되지 못한 상태였고, 할리우드의 방식을 모방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해방 이후 신상옥 감독이 이끄는 신필름이 당시 국내 영화산업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면서 스튜디오 시스템에 근접한 운영 양태를 보였는데, 1970년대부터는 이마저도 쇠퇴했다. 그리고 이전과 같이 감독과 배우, 영화 스태프들 모두가 독립된 개인으로서 활동하게 된다. 1980년대까지는 1990년대 이후에 비해, 영화를 비롯해 여기에 출연한 배우들 역시 대중에게 큰 파급력을 얻지는 못했던 시점인데, 와중에 안성기와 같은 ‘국민 배우’가 탄생했다는 점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질문2) 20대 관객의 입장에서는 < 라디오스타 >(이준익, 2006)나 < 실미도 >(강우석, 2003) 등의 2000년대 이후 작품을 중심으로 안성기 배우를 기억하게 되는데, 과거의 다양한 출연작들을 통해 그의 활동을 한국영화사의 맥락에서 돌이켜볼 수 있어 뜻깊은 시간이었다. 비디오 에세이를 제작하면서, 여러 출연작 중에서도 중요하다고 인식되는 장면들을 구분해내고 이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작업이 쉽지만은 않았으리라고 예상된다. 작업 도중 겪게 되신 고충 이 있다면 듣고 싶다. (답변_이무언 비디오 에세이스트) 감상을 공유해주셔서 감사드린다. 인상 깊은 장면을 선정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장면을 확인할 때마다 영상의 일부를 이미지로 캡처해두고, 작품 안에서의 타임코드와 함께 그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를 메모했다. 에세이에서 다룰 모든 작품에 대해 이 작업이 완료되면, 캡처된 이미지들을 훑어보며 관련 장면을 어떻게 연결할지를 고민했던 것 같다. 각 이미지를 연결하는 과정에서는, 안성기의 연기를 통해 전달되는 여러 가지 인상들(‘아버지’, ‘남성’ 등)이 쇼트들의 유기적인 연결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지각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안성기 개인의 삶이 연상되거나 관객 스스로가 처한 ‘현실’ [2] 과 작품 속의 ‘허구’가 연결되는 것처럼 느껴져서 흥미로웠던 장면들도, 어렵지만 제시하고 싶었다. 또한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는 안성기의 ‘얼굴’ 외에 다른 요소들도 활용하려고 노력했다. 잔을 부딪치며 건배하는 이미지, 수면 위에 반사된 이미지, 극중 시계를 비춘 이미지 등이, 매 장면 돋보이는 그의 다채로운 ‘얼굴’들을 연결해줬다. 한국고전영화 에세이 - ‘기쁜 우리 젊은 날 그리고 안성기’ 중 시계와 잔이 등장하는 쇼트 (질문3) 1960년대 한국영화의 멜랑콜리적 지식인 주체성에 대해 연구한 바가 있는데, 금동현 평론가의 발표에서 <장군의 수염>과 <안개>가 다뤄져서 반가웠다. 1960년대 한국영화에서 배우들이 담지하고 있는 멜랑콜리적 주체성 이 무엇일지에 대해 여쭙고 싶다. (답변_금동현 영화평론가) 오늘 분석한 작품들에서는 멜랑콜리를 자아내지 않고 ‘체현한’ 인물들이 등장했다. 물론 1960년대에는 멜랑콜리를 재현하는 몇 가지 요소가 발견될 뿐 멜랑콜리라는 감수성 자체가 이 시기에만 두드러졌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멜랑콜리의 흔적이 관찰되는 1960년대 한국영화의 한 대목을 꼽자면, ‘코미디’라는 장르라고 생각한다. 1960년대 한국 코미디영화에서 웃음은 모종의 이유로 ‘경직되어버린’ 무언가를 조롱할 때 자주 발생했던 것 같은데, 이렇게 웃어야 하는 데 웃지 못하는 순간( 이봉래 감독의 영화에서의 몇 가지 장면이 예가 될 수 있다)이 어떻게 보면 멜랑콜리한 상태에서 받는 느낌과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질문4) 오늘 언급된 배우 중, 배우 김혜수가 유독 눈에 띈다. 1990년대 당시 그는 확고한 ‘무비스타’로 자리매김한 상태가 아니었고, 광고나 드라마를 통해서도 아직 다른 스타들만큼의 파급효과를 일으키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199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로 김혜수 가 자연스레 떠오른다는 것이 독특한 지점이다. 이 시기 스타로서 김혜수의 부상을 분석하실 때 다른 배우들과 비교하여 어떤 접근법을 적용하셨는지가 궁금하다. (질문5) 2000년대 이후부터 최근까지 배우 김혜수와 한석규가 선보인 연기 스타일이, 그들이 1990년대에 수행하던 방식과는 달라졌다고 말씀해주셨다. 배우들이 선보이는 연기의 방향성이 재정립되는 데는, 영화에 대한 관객의 욕망이 변화하는 현상이 상당 부분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시대별로 이념이나 정치성, 관객의 욕망 등의 변화가 배우들의 연기 스타일 변모에 어떻게 작용할 수 있을지 를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면 좋겠다. (답변_정민아 영화평론가) 두 질문에 대해 한 번에 답변 드리고 싶다. 말씀하신 대로 김혜수 배우가 영화계 스타로서 두각을 나타낸 시점은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다른 배우들에 비해 다소 늦다. 하지만 1990년대 화보와 예능, TV를 포함해 대중매체 전반에서 그가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하며 성장한 여정을 고려하면, 그리고 이 시기 관련 콘텐츠를 향유했던 경험을 되새겨보면, 199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가 김혜수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이는 오늘날 스타가 탄생하는 과정과도 유사하다. ‘영화’와 그밖의 영역(방송 등)이 명확히 구분됐던 과거와 다르게, 2000년대 이후부터 현재까지는 ‘배우’의 활동 분야가 대폭 확장됐고 분야 간 경계도 거의 사라졌다. 영화, 드라마, 뮤지컬 등 분야에서 연기 활동을 이어가는 이들은 모두 ‘배우’로 호명되며, 그들이 연기를 선보이는 분야 역시 한 가지로 국한되지 않는다. 따라서 스크린을 통해서만 스타로 거듭나기보다, 1990년대 본격적으로 파급된 각기 다른 매체에서 강렬한 영향력을 발휘해 자신만의 스타 이미지를 구축한 김혜수가, ‘멀티 플레이어’로 활약하는 복합적 차원의 배우상을 1990년대부터 선구자적으로 확립한 이로 평가될 수도 있을 것 같다. * 현장 BEHIND CUT * *** [1] 박진희, “ 복혜숙과 석금성을 헷갈려하다 ”, KMDb 영화글, 2023. 7. 27. [2] < 개그맨 >(이명세, 1988) 중 이발사가 이종세(안성기)에게 “어렸을 때부터 그 방면에 재능이 많으셨죠?”라고 물어 아역 배우 시절 안성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거나, < 칠수와 만수 >(박광수, 1988) 중 “우리 쳐다보는 거 아니에요?”라는 대사 이후 배우 박중훈과 함께 카메라를 응시하는 장면 등이 있다.
대한극장 이 영화 상영관으로서는 문을 닫는다는 소식에 아쉬움 가득한 회고가 쏟아진다. 과거의 화려했던 극장 건물이 허물어지고 고층 빌딩으로 변신한 지 20년이 넘었건만, 안녕을 고하는 이야기들을 살펴보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여전히 20세기 대한극장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1958년 4월 4일과 1998년 4월 4일 1998년 4월 4일 국내 최초의 멀티플렉스인 CGV 강변 이 정식 개관하기 전까지 극장의 규모나 흥행수입에서 국내 최고 수준을 자랑하던 곳이 서울 중구 충무로의 대한극장이었다. 우연인지 한국 극장역사의 필연인지, 대한극장은 최초의 멀티플렉스 개관으로부터 40년 전인 1958년 4월 4일 개관했다. 개관작은 1994년 리메이크해 국내에서도 사랑받았던 < 러브 어페어(Love Affair) >(글렌 고든 카론, 1994)의 원작인 < 잊지 못할 사랑(An Affair to Remember) >(레오 맥캐리, 1958)이었다. 극장 측은 대지 660평, 연건평 1,432평의 무창(無窓) 5층 건물에 냉난방 장치와 고급 좌석, 최신식 상영 설비 등을 갖춰 외국 극장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다고 자랑했다. 그러면서 “국민의 건전한 오락과 영화문화를 위하여 많은 기여가 있기를 바란다”라는 위풍당당한 출정 소감을 밝혔다. *주1 하지만 1년도 채 못돼 운영난을 겪게 되면서 1959년 2월 극장의 운영권은 영화 수입으로 사세를 확장하고 있던 세기상사로 넘어갔다. 세기상사는 폴 뉴먼의 대표작 중 하나인 < 상처뿐인 영광(Somebody Up There Likes Me) >(로버트 와이즈, 1956)을 ‘신발족(新發足)’이라는 야심찬 문구를 곁들여 광고하며 대한극장 인수를 알렸다. 한편으로는 입장객에게 피아노와 고급상품을 증정하는 이벤트를 마련하고, 이탈리아 오페라단의 내한공연을 올리는 등 새롭게 출발하는 대한극장의 다양한 면모를 알리기도 했다. (좌) <잊지 못할 사랑> 전단 (우) <상처뿐인 영광> 전단 대형극장의 위용을 갖추다 여러 가지 시도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 말까지는 국도 , 명보 , 단성사 등을 잇는 후발주자의 느낌이 강했던 대한극장이 본격적으로 대형극장, 흥행극장으로서의 명성을 얻게 된 것은 국내 최초로 70밀리 초대형 영화를 상영하면서부터였다. 1961년 9월 21일 대한극장에서 개봉한 < 남태평양(South Pacific) >(조슈아 로간, 1958)은 영화의 내용과 평가를 넘어 영화기술의 현재와 미래를 진단케 하고, 당해 연예계의 주요 뉴스에 꼽히는 등 영화 매체의 큰 변화로서 관람객의 시선을 끌었다. <남태평양> 이후 대한극장이 국내 제일의 대형극장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한 영화는 < 벤허(Ben-Hur) >(윌리엄 와일러, 1959)였다. <벤허>는 1962년 2월 1일 대한극장에서 개봉해 10월 8일까지 무려 8개월 동안 장기 상영했고, 10월 9일부터는 세기상사가 소유한 또 다른 개봉관인 세기극장으로 이동해 상영을 이어갈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이때의 기록적 흥행과 초대형 영화관람의 경험은 여러 차례에 걸쳐 <벤허>가 재상영될 때마다, 세월의 흐름과 관계없이 대중을 극장으로 이끄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벤허>가 대한극장에 관한 회고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할 터이다. (좌) <벤허> 국내 포스터 (우) 1986년 대한극장의 모습 <벤허>와 더불어 < 오클라호마(Oklahoma!) >(프레드 진네만, 1955), < 캉캉(Can-Can) >(월터 랭, 1960), < 왕중왕(King of Kings) >(니콜라스 레이, 1961) 등 70밀리 영화들의 연이은 상영은 대한극장의 이미지가 대중에게 각인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대형 스크린과 좌석 수 2천이라는 규모, 그 위용에 걸맞은 초대형 영화, 그리고 극장 앞 인산인해를 이룬 관람객의 모습을 삽입한 광고는 1990년대까지 대한극장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다시피 했다. 이와 같은 대형극장으로서의 위용과 이미지는 1990년대까지 단관극장으로 버티는 힘이 되었다. 1990년대 말 대한극장의 상영⋅배급을 담당했던 임철호 의 구술처럼 영화 한 편이 “터졌다 하면 하루에 만 명인데, 열흘 만에 십만 명이 되” *주2 는 규모를 여전히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대가 변화하며 극장 지형과 극장 문화 또한 변화를 겪었지만, 단관극장의 매력과 흥행의 묘미가 남아있었던 20세기 말 충무로의 풍경에 대한극장이 여전히 자리하고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70밀리 대형영화와 마무리한 단관극장의 여정 멀티플렉스의 성공적인 안착과 함께 단관극장으로서의 대한극장 또한 마무리에 들어가면서 들고 온 프로그램들은 역시나 70밀리 초대형 영화들이었다. 또다시 재탕이라는 소리도 들었겠지만, 대한극장다운 프로그램 선정이었다. 1998년과 1999년 상영한 < 아라비아의 로렌스(Lawrence of Arabia) >(데이빗 린, 1962), < 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 >(데이빗 린, 1966) 등은 여전히 단관극장과 초대형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에게 호응을 얻었다. 국내에서 단관극장의 마무리가 어땠는지를 둘러보면 비교적 아름다운 행보였다고 할 수 있으려나. 여전히 기억에 남아있던 단관극장으로서의 대한극장 21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대한극장도 멀티플렉스로 전환하면서 충무로의 풍경 또한 변했다. 그동안 충무로와 종로, 을지로에서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극장들을 계속해서 목격했다. 사라진 극장들과 20세기의 대한극장을 기억하면서 꽤 오래전 광화문 네거리의 동화면세점을 국제극장 이라 지칭하시던 택시 기사님이 불현듯 떠올랐다. 구술채록을 하면서 대한극장에서 원로영화인을 뵐 일이 많았는데, 그들과 나는 항상 최첨단의 시설을 갖춘 대한극장에서 만났지만, 그 기사님처럼 우리는 늘 20세기의 대한극장을 떠올리며 약속을 정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이제야 해 본다. 어쩌면 나는 대한극장의 입구에 들어설 때마다 상영 전 대기할 변변한 장소도 없어 극장 밖 거리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입장 순서를 기다리던 20세기 후반으로 돌아가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천 명이 함께 < 미저리(MISERY) >(롭 라이너, 1990)의 공포를 느끼고, < 라밤바(LA BAMBA) >(루이스 발데스, 1987)의 OST를 소리 없이 따라부르던 그 시절로 말이다. *** 주1. “새영화-잊지 못할 사랑”, 《경향신문》, 1958. 4. 5., 4면. 주2. 채록연구 공영민, 「임철호」, 『2020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1960~1990년대 수입외화의 변화 3』, 한국영상자료원, 2020, 153쪽. 공영민(영화사 연구자) l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인 구술사의 채록연구를 담당하고 있다.
나의 마음을 당신께 줄게요. 올해는 코로나19 탓에 보고 싶었던 영화, 봐야 할 영화들을 충분히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편으론 그 탓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선 평년보다 조금 더 많은 영화들을 만났다. 코로나19 인해 씨네21 데일리가 발행되지 않고 대부분 일정을 홀로 소화해야 했던 탓이다. 올해 부산에서 만난 영화들을 곱씹어본다. 가장 심금을 울린 영화는 디즈니·픽사의 <소울>이었다. 식상한 이야기를 가지고도 가슴에 불을 지피는 건 모든 서사 영화들이 바라는 꿈일지도 모른다. < 인사이드 아웃 >에 이어 피트 닥터는 그 비밀의 열쇠를 발견한 것 같다. 영화가 끝난 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작품은 크리스티안 펫졸드 감독의 < 운디네 >였다. 전설의 틀을 빌린 멜로드라마라는 빤한 단어들의 조합으론 이 영화의 신비를 미처 다 전할 수 없다. 바흐 협주곡 D단조 2악장 아다지오의 선율 사이사이 아직도 귓가를 간질이는 물의 소리가 들려온다. 깔끔한 만족감을 안긴 건 리 아이작 정 감독의 < 미나리 >였다. 높은 확률로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연이 되리라 확신한다. 한국 영화들은 대체로 고르게 만족스러웠는데 그중 유독 오랜 앙금처럼 가라앉아 남은 건 이란희 감독의 < 휴가 >였다. 아마도 이 영화에 대해선 앞으로도 여러 차례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사사로운 리스트에 꼽은 구로사와 기요시의 < 스파이의 아내 > 이런 식의 리스트를 꼽아본다면 각각의 기준에서 모두 조금씩 모자랐다. 감동으로 휘몰아치는 종류의 영화도 아니고 치밀한 상징과 해석으로 독해가 필요해 보이지도 않았다. 대중, 상업적인 면모가 있지만 공식처럼 깔끔하게 떨어지진 않고, 그렇다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에 감싸여 내내 들썩이지도 않는다. 물론 <스파이의 아내>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한 작품이란 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아는 영화에 대한 온갖 잣대를 들이대도 조금씩 아주 미묘하게 비껴나가는, 실로 곤란한 영화였다. 나는 나를 곤란하게 하는 것들을 사랑한다. 나의 짧은 안목과 한 뼘도 채 안 될 어휘의 촉수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종의 음모들을 사랑한다. 자동필기처럼 의무감에 리뷰하는 반복되는 루틴에서 해방시켜줄 어긋남을 사랑한다. 그게 지금 <스파이의 아내>를 붙잡고, 되지도 않게 매달리는 이유다. 이 글은 분석도 비평도 해설도 아니다. 그저 내가 겪은 흥분되는 순간에 대한 거친 고백이다. <스파이의 아내>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판에 박힌 설명도 가능할 것이다. 시대를 경유하는 멜로드라마이고, 2차 대전 말기 일본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도 읽힌다. 의심과 집착, 불안과 갈망으로 얽힌 캐릭터의 관계도는 서스펜스 멜로의 정석이라고 할 수도 있다. 1950년대 일본 고전 영화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정제된 화면들은 한 폭의 유려한 그림처럼 만족감을 안긴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가장 대중적인 영화”라는 설명도 일정 부분 납득 간다. 진흙처럼 진득한 감정의 덩어리로 뭉쳐진 전작들과 달리 보는 이를 의식하는 혹은 배려하는 조심스러움이 곳곳에 묻어난다. 그럼에도 이 모든 수식어의 총합이 <스파이의 아내>라고 말하진 못하겠다. 이런 부스러기 같은 단어들을 모아봤자 껍데기만 훑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차라리 이 글에선 사소해 보이지만 범상치 않은 몇 가지 장면들을 놓고 마음을 풀어보겠다. 이 영화에는 자로 잰 듯 반듯하게 다듬어져 있는 가운데 지워지지 않는 얼룩들이 있다. (서사적으로는) 의미가 지정되지 않은, 공백 같은 장면이라고 해도 좋겠다. 화면을 초과하여 영화에 대한 모든 설명을 무력화시키는 균열의 지렛대 같은 장면. 잊은 줄 알았는데 망막 안쪽에 새겨져 눈을 감으면 자꾸만 떠오르는 꿈같은 장면. <스파이의 아내>는 2020년 6월 NHK에서 방영된 스페셜 드라마를 화면 비율과 색상 등 극장용에 맞게 재구성한 영화다. 구로사와 기요시가 시대극을 찍어보고 싶어 시작했다는 이 영화는 그리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진 않는다. 태평양전쟁 직전인 1940년 고베를 배경으로 격변의 시기를 살았던 한 쌍의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데, 현대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 보고 싶긴 했지만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중력을 벗어나진 않길 바란 결과라고 한다. 전쟁 막바지 전쟁의 기운이 일반 국민들에게도 실감으로 번져가던 시기까지 구로사와 기요시의 수비 범위 안쪽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고베의 무역상 유사쿠(타카하시 잇세이)는 국가를 신봉하는 대신 코스모폴리탄을 자처하는 남자다. 유사쿠는 사업차 만주에 갔다가 일본군 부대가 저지른 끔찍한 만행을 목격하고 이를 세상에 알리고자 한다. 유사쿠의 아내 사토코(아오이 유우)는 남편의 비밀이 행복한 가정을 파탄 내고 말 것이라 여기고 결사적으로 그를 말려보지만 소용이 없다. 하지만 사토코 역시 어떤 계기로 결국 남편의 뜻을 따라 ‘스파이의 아내’로 살 것을 결심한다. 한편 사토코의 어릴 적 지인이자 헌병대 대장 야스하루(히가시데 마사히로)는 유사쿠를 의심하고 주변을 감시한다. 방영된 드라마를 직접 보지 못해서 확신할 순 없지만 아마도 내용 자체는 대동소이할 것이다. 보기 드물게 8K 카메라로 촬영된 화면을 영화에 맞춰 프레임과 색감 정도를 조정했을 거라 짐작되는데, 한편으론 그게 이 영화의 본질이기도 하다. 영화적인 프레임. 스크린에 착색된 듯 고운 색감. 그만큼 매 장면은 꽉 차있고, 리듬은 빈틈이 없다. 빈틈이 없다는 것이 꼭 칭찬만은 아니다. 쉽게 가는 장면이나 완급 조절 없이 정해진 속도로 뚜벅뚜벅 걷는 쪽에 가깝다는 의미다. 제목 그대로 이 영화는 스파이의 아내의 시점에서 사건을 따라간다. 벌어지는 상황의 전모나 상대방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기본적인 틀은 서스펜스물이라 볼 수 있다. 다음 장면이 궁금하게 만드는 것, 서스펜스는 사실 장르라기보다는 모든 영화의 동력이다. <스파이의 아내>는 서스펜스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 색은 매우 옅은 편이다. 바로 이 점이 ‘구로사와 기요시의 대중적인 면모’가 아닐까 싶다. 빗대자면 장르에 대한 인지 부조화가 일어난다고 할까. 사실 이 영화는 전혀 대중적이지 못하다. 감독은 “전쟁을 배경으로 했지만 멜로드라마와 서스펜스라는 장르가 중요하다”고 항변하기도 했지만 정확히는 대중적이라고 믿어지는 어떤 틀이나 평균치를 끌고 와도 기요시는 기어코 자신의 호흡 안으로 끌어 당겨와 자기 색깔로 덧씌워 버린다. 서사적으로 볼 때 이 영화의 긴장감은 느슨한 고무줄 수준이다. 스파이 혹은 스파이의 아내가 일본 군부의 비윤리적인 만행을 알게 되고, 그것을 해외에 알리려는 과정은 심심하다 싶을 정도로 편편하고 단조로우며 투명하게 진행된다. 반면 관객의 심장을 팽팽히 잡아당기는 건 감정, 멜로드라마의 기운이다. 유사쿠가 만주에서 무엇을 목격하고 왔는지, 야스하루는 유사쿠를 어떻게 의심하는지, 유사쿠와 사토코가 어떤 방식으로 일본군의 만행이 담긴 테입과 기록을 해외로 반출하려고 하는지 따위의 과정은 트릭도, 대단한 정보의 지연도 없다. 대신 인물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심리적 정황은 대부분 불투명하게 가려져 있다. 투명한 전개와 불투명한 마음. 두 요소의 방향이 어긋나거나 충돌할 때마다 영화는 사건 안쪽에서 불꽃을 튀기며 강력한 흡입력을 발휘한다. 비유하자면 인물의 내면에 불꽃이 튀고, 영화는 그것을 구태여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타카하시 잇세이와 아오이 유우의 저 곱고 반듯한 얼굴 가죽 뒤에서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고.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내 마음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데 상대방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 영화에서 ‘스파이’는 거짓말이란 행위를 위한 하나의 방편 내지는 표상에 불과하다. 유사쿠가 어떤 방식으로 첩보활동을 벌이는지는 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건 <미션 임파서블>이 아니니까. 중요한 건 그런 행동을 벌이는 속내를 알 수 없다는 거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스파이의 ‘아내’의 시점에서 전개된다는 건 핵심이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사토코가 일본 내부의 시선을 대표한다고 밝혔다. “그녀는 일본 사회 안에 머물면서 행동한다. 사회의 압력을 마주했을 때 남성들의 행동은 둘 중 하나다. 패배하여 굴복하거나 튕겨져 나가거나. 하지만 사토코로 대표되는 여성들은 그 안에서 길을 모색한다. 사회 안에 머무르면서도 자신을 굽히지 않는 강인한 면모를 부각시키고 싶었다.” 요컨대 <스파이의 아내>는 사토코가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남편을 불안한 가운데에도 믿고, 믿는 가운데에도 불안에 떨며 마음의 형태를 그려가는 과정으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진정 매혹적인 부분은 일련의 불안이 어떤 형태로도 쉽사리 표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요시는 인물이 감정을 토해내거나 어떤 이미지로든 요동치게 하는 대신 화면 안 쪽에 단단히 가둔 채 기다린다. 이윽고 얇은 살얼음 아래 흐르는 불안과 의심의 격류는 서서히 진동수를 올리며 표면 위로 스며 나오기 시작한다. 먼 길을 돌아왔다. 딱 세 장면만 이야기하겠다. 세 장면 모두 불안이라는 추상적이고 두루뭉술한 단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각기 다른 떨림 혹은 끝내 버티지 못하고 쩍쩍 갈려진 균열들이다. 우선 첫 번째는 유사쿠가 만주에서 찍어온 필름을 확인하는 사토코의 표정이다. <스파이의 아내>에는 두 개의 필름이 나온다. 하나는 유사쿠가 사토코를 주인공을 찍은 극영화, 다른 하나는 유사쿠가 만주에서 찍어온 731부대의 만행이 담긴 기록이다. 관객은 두 가지 필름을 볼 때 사토코의 표정에 떠오른 미세한 차이를 목격한다. 그건 차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아니 표정이라고 할 것도 없는 비어있는 얼굴이다. 그런데 그 비어있는 얼굴 안에서 형용하기 힘든 감정들이 피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관객의 머릿속에서 반응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토코의 마음을 한 순간에 돌려세운 건 유사쿠를 향한 믿음일까, 함께 하고 싶은 애정일까, 아니면 유사쿠가 찍어온 기록의 힘일까. 영화는 끝까지 답변하지 않는다. 여기서 답을 비워두는 것이 구로사와 기요시 스타일의 멜로드라마 서스펜스다. 여느 서스펜스가 정보를 지연시킨다면 구로사와는 ‘왜’를 아예 지워버리는 것이다. 결국 관객은 내내 결과와 현상만 목격하고 원인을 제공받지 못한다. 설명되지 않는 것을 마주하는 불안. 불투명한 진실이 영화 내내 안개처럼 깔려있다. 두 번째 장면은 도항에 성공한 유사쿠가 배에서 유쾌하게 손을 흔들고 있는 장면이다. 유사쿠는 각기 다른 항구에서 함께 도항하기로 했던 사토코를 배신해 밀고한 뒤 아내를 미끼로 본인은 무사히 도항에 성공한다. 유사쿠의 진심은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사코토를 온전히 믿지 못해 일부러 알리지 않은 걸까. 중반 자신의 조카를 밀고했던 사토코의 행위에 대해 복수를 가한 걸까. 아니면 아내를 아끼는 지극한 사랑으로 혼자 위험을 감수하고 해외로 떠난 걸까. 셋 중 하나 일수도 있고, 셋 다 아닐 수도 있고 세 가지 모두 일수도 있다. 답은 중요치 않다. 마찬가지로 관객은 눈앞에 주어진 결과만 목격할 뿐 인물의 속내 따윈 짐작할 수도 없다. 이 장면이 특히 흥미로운 건 두 가지 이유다. 하나는 유사쿠가 자신을 밀고하고 혼자 도항했다는 걸 깨달은 사코토가 헌병대 한 가운데에서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외치는 대사, “대단해!”라는 단발마다. 관객은 오직 이 리액션만으로 모든 정황과 심리를 추측해야 하는데, 공간을 찢고 나오는 듯한 이 한 마디를 어떻게 묘사해야 할지 모르겠다. 통쾌함, 놀라움, 분노, 수치심, 안도감. 모든 감정이 범벅이 된 듯 감히 해석할 수 없는 이 목소리는 실로 곤란하다. 곤란해서 (이런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너무 사랑스럽고 뇌리 한 구석에 각인될 것만 같다. 다른 하나는 유쾌하게 손을 흔들며 배를 타고 가는 유사쿠의 이미지다. 일련의 편집은 이 장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곤혹스럽게 만든다. 이것은 실제 유사쿠가 배를 타고 가는 장면의 재현인가, 아니면 끊임없이 불안해하며 악몽을 꾸던 사토코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상상에 불과한 것인가. 그도 아니면 그저 영화가 보여주는 환상 내지는 친절한 설명인가. 마찬가지로 알 길이 없다. 이것을 지정하는 건 오로지 관객의 판단이다. <스파이의 아내>는 사건과 정황을 나열한 뿐 매우 헐겁게 짜여있다. 매 장면은 서로 인과관계를 맺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 관객의 개입을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 덕분에 서사의 서스펜스로는 상당히 밋밋하고 단조로워 보이는 영화는 형용하기 힘든 불안들을 자아낸다. 이걸 두고 기분 좋은 불안, 행복한 유예라고 부른다면 과한 표현일까. 영화가 불투명해질수록 시야와 장면은 명료해지는 신기한 체험이 이어진다.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의 엔딩이다. 여기에 대해선 긴 설명을 붙이지 않겠다. 그럴 수 없다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공습으로 폐허가 된 도시, 건물 사이를 가로질러 해변으로 나아가는 사토코는 끝내 바닥에 엎드려 절규한다. 용서하시길. 내가 가진 역량으로는 이 장면의 비장하고 아름다운 공기를 ‘울부짖음’ 따위의 추상적인 언어로 밖에 묘사할 수 없다. 어쩌면 묘사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스파이의 아내>는 서스펜스 멜로드라마가 아니다. 그렇게 보고자 한다면 그럴 순 있겠지만 서스펜스 멜로드라마나 시대극, 역사물로 한정짓는 순간 범상한 무리 중 하나가 된다. 이 영화의 서사 행간이나 연결, 스토리는 그다지 중요하지도 흥미롭지도 않다. 다만 나를 뒤흔드는 건 엔딩에서 사토코가 울부짖는 순간의 형태, 사토코의 실루엣, 그 몸짓과 화면의 색, 파도의 소리 등 스크린 위에 덧씌워진 이미지 그 자체다. 그 조형적인 결과물이 눈꺼풀 안 쪽에 자리 잡아 좀처럼 지워지지 않은 채 사정없이 나를 쥐어짜고 흔든다. 이것은 당신의 목격으로만 성립하는 장면이다. 그 어떤 설명도 본질을 훼손할 뿐, 오직 보는 것으로만 전달되는 감정의 덩어리가 거기에 있다. 유사쿠의 필름을 목격했었던 사토코처럼, 스크린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종의 음모들이 끝내 당신의 심경을 변화시킬 것이라 믿는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