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의 고심
- 감독
- 김도산
- 제작년도
- 1919
- 출연
- 김도산, 신극좌일행
조선극장 흥행광고 3호 중 일부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다시 만난 세계: 식민지 조선의 극장문화 이야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를 바탕으로 역사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와 행간 속에 숨겨진 욕망들을 재조명합니다. 조선극장 은 단성사 와 더불어 식민지기의 대표적인 조선인 극장으로 손꼽혔던 곳이다. 그러나 ‘경성의 일류 극장’이라는 명성이 무색할 만큼 조선극장은 유독 ‘스캔들’의 진원지로 호명될 때가 많았다. 객석에서 발생한 삐라 살포 사건이나 극장 주위에 진을 친 폭력단들의 범죄행위도 여러 차례 신문 지상에 오르내렸지만, 무엇보다 빈번했던 것은 극장 경영권을 둘러싼 내홍 에 얽힌 이야기들이었다. 실제로 조선극장의 운영 기록(1922~1936)을 살펴보면, 일시 휴관을 선언하고 극장 문을 닫는 일이 적지 않았는데 주된 원인은 경영권 분쟁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으며 극장이 재개관할 때는 대개 새로운 경영주의 취임 소식을 동반하곤 했다. [1] 이는 단성사가 경영주 박승필 의 수완과 카리스마에 힘입어 안정적인 경영 체계를 구축해 나갔던 것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사실 조선극장의 경영권 분쟁은 탄생 시점부터 어느 정도 예견되어 있던 사태였다. 동양생명보험회사 경성지부장으로 근무하던 일본인 시택근차랑(矢澤近次郞)은 얼마간의 자금을 모아 사업에 뛰어들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이때 지인을 통해 소개받은 사업 파트너가 바로 황원균이었다. 두 사람은 극장업을 시작해보기로 의기투합한 후 본격적인 절차에 착수했다. 시택근차랑이 자금을 대고, 황원균이 흥행장 건축허가를 비롯한 실무를 담당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니 실질적인 지배권은 시택근차랑에게 있었겠지만 문제는 서류상의 소유주가 황원균의 이름으로 명시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당연히 시택근차랑은 명의변경을 요구했고, 황원균은 영업 개시 전에 명의변경을 하면 신용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약속을 차일피일 미뤘다. 결국 두 사람의 갈등은 법정 공방으로 이어지기에 이른다. 이후 시택근차랑은 건물 소유권을 동경 건물회사에 판매한 후 조선극장에서 발을 뺐다. 다만 동경 건물회사는 조선극장의 흥행권, 즉 직접적인 운영에 관여하지는 않았고, 실질적인 운영 책임을 담당한 것은 ‘지배인’으로 취임한 조선인 흥행주들이었다. 점차 흥행권은 소유권과 별개의 권리처럼 유통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일정한 비용을 지불하고 조선극장의 흥행권을 양도했던 사례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2] 1926년에는 변사 김조성 이 새로운 흥행주로 취임하게 되었으나 극장 자금을 유용했다는 혐의를 받아 관원들과 갈등을 빚은 끝에 3개월 만에 물러나게 되었고, 차영호, 현철, 김영식, 이필우 , 이태진 등이 공동 혹은 개인 명의로 경영권을 승계했으나 대개는 1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만큼 1920년대 조선극장의 경영은 불안정했던 것이다. 심지어 1928년 8월에는 연이은 휴관사태 속에 위기의식을 느낀 관원들이 공동명의로 흥행주 역할을 맡아 1년간 경영을 이어나가기도 했을 정도였다. 조선극장의 경영이 비교적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안봉호와 신용희 가 이태진으로부터 경영권을 인수한 1929년부터의 일이었는데, 안봉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경영권을 넘기고 손을 뗐기에 실질적으로 조선극장의 흥행권을 행사했던 인물은 지배인으로 취임한 신용희였다고 볼 수 있다. (좌) 조선극장의 모습 (사진: “ 조선극장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 조선극장 개관 관련 신문 광고 (사진: “ 개장피노 ”, 《동아일보》, 1922. 11. 7.) 한편 조선극장의 경영구조는 1931년부터 기존과 사뭇 다른 방식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1931년 7월에 창립한 조선흥행주식회사 는 흥행업에 포함된 제반 사업들을 모두 아우르는 데 목표를 두고 있었다. 즉, 제작, 배급, 상영의 수직적 통합 을 통해 최대한의 이익을 확보하려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조선극장은 개인 경영 방식을 벗어나 조선흥행주식회사의 직영관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조선흥행주식회사의 사장은 평양에서 고무공장을 운영하던 사업가 정완규가 맡았으며, 안봉호로부터 경영권을 인수한 정현국은 전무취체역을 담당했다. 그리고 신용희는 조선극장 지배인과 조선흥행주식회사 상무취체역을 겸임하게 되었다. 조선흥행주식회사의 창립과 직영관 제안은 조선극장 입장에서도 충분히 매력을 느낄 만한 사안이었다. 발성영화로의 전환 과정에 직면한 식민지 조선의 극장들은 기로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무성영화보다 과중한 필름 대여료를 지불해야 했고, 장비 설비에도 목돈을 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전면적인 발성영화 전환을 천명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위험을 감수해야 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점차 관객들의 취향이 무성영화를 ‘재래의 저급 취향’으로 낙인찍는 경향이 현저해지고 있던 상황에서 무조건 무성영화의 재탕 상영을 반복하기도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금 8만원을 들여 출범한 조선흥행주식회사는 든든한 뒷배 역할을 해 줄 수 있었으며, 실제로 조선극장은 라이벌 관계에 놓여 있던 단성사보다 적극적으로 발성영화 전환을 시도 하며 시장의 트렌드를 주도해 나갔다. 재계 공황의 영향으로 말 못 된 흥행계는 예년에 비하야 참경에 빠진 셈인데 더구나 영화계는 조금도 새로운 면목을 보여주지 않고 다만 재삼 상영한 영화를 최염가의 관람료로써 상설관의 수명을 연장시켜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형편이었으나 기신양행(紀新洋行) 겸 조선극장의 지배인 신용희(申鎔熙) 씨가 일본에 갔다 오고 일본 동화상사(東和商事) 사장이 구라파에서 돌아오는 길에 동화상사 조선지점장인 고윤묵(高潤黙) 씨와의 회견으로 기신양행 측에서는 순전한 『토-키-』 배급 , 동화상사 측에서는 구라파 특작 무성영화 로써 영화배급전이 개시될 모양인데 무성영화 측에서는 이미 명작을 계약하야 수입 중이라 하며 기신양행 측에서는 조선극장에 불일간 『토-키-』영사기계를 장치하여 일반의 목을 놀래일 예상 인데 실패한 기왕에 일본제의 『토-키-』영사기계와는 달라서 이번의 것은 순미국제를 사드려 임이 『파라마운트』 회사의 『모로코』를 위시하야 『명작 토-키-』를 계약하였으므로 조선극장에서는 가을에는 얼마동안 『토-키-』 전문으로 흥행- 『단성사』에서는 무성구라파영화로써 영화전이 개시될 모양이라 한다. 기신과 조극 측에서는 과연 완전한 토-키-를 보여줄 것이며 동화상사 측에서는 과연 구라파의 명작을 가지고 『토-키-』의 새 진영을 돌파할지 일반 영화『팬』의 흥미를 자아내고 있다 한다. - 기사, “금추 흥행계는 발성 무성 영화전 - 기신 측엔 토-키- 상사 측엔 무성”, 《조선일보》, 1931. 8. 25. - 한국영상자료원 편,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1 』, 1,114쪽. 1931년 가을 흥행 시즌 당시 단성사와 조선극장이 보여준 노선은 명확하게 엇갈렸다. 단성사가 명작 무성영화 전문관을 표방하며 유럽산 특작 영화들을 전면에 배치하려 한 반면, 조선극장은 기신양행과 손을 잡고 “순전한 토키”들로 프로그램을 채우고자 한 것이다. 주목할 것은 조선극장이 기왕의 일본제 발성영사기보다 훨씬 우수한 미국제 장비(RCA)를 전격적으로 사들였다는 점이다. 구매 시기를 고려할 때, 조선극장이 이처럼 공격적인 설비 투자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조선흥행주식회사의 자본력에 힘입은 바 컸다고 볼 수 있다. 조선극장과 달리 유럽산 특작 무성영화를 전면에 내세운 단성사의 모습 (자료 출처: 『大京城都市大觀』(朝鮮新聞社, 1937), 映畫常設館ノ部 / 사진: “ 단성사 ”, 서울역사아카이브, 서울역사박물관) 단성사와 조선극장의 상반된 행보는 여러모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싸움의 승패는 곧 발성영화 전환 문제에 있어 향후의 행보를 결정지을 만한 바로미터가 될 것이라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승부는 발성영화 전환이라는 과제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임을 각인 시키는 결과로 낙착되었다. 이듬해인 1932년 4월에 단성사와 우미관은 발성영사기를 구매하고 토키의 상영 비중을 늘려나가며 뚜렷한 노선 변화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1932년 7월에 지난 1년간의 사업 융창을 자축하는 의미의 기념 상영회를 열었을 만큼 조선극장과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렇기에 1932년 10월에 조선극장 지배인 신용희가 일방적인 해고 통보를 받은 것 은 굉장히 갑작스러운 조치처럼 여겨질 만한 일이었다. 조선흥행주식회사 측은 신용희가 배임 행위를 저질렀다고 지목하면서 지배인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종용했는데, 신용희가 격렬하게 반발함에 따라 조선극장은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이나 일시 휴관 사태에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당시 신문기사를 통해 보도된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인생안내』 계약이 발단 / 정(鄭), 신(申) 양파로 대립 / 지배인은 건물 소유자와 악수 / 알력의 전말 내용 조선극장은 소화 四년 九월에 건물 소유자인 부내 황금정(黃金町) 二정목 五十九번지 동경건물주식회사(東京建物株式會社)와 임차계약(賃借契約)을 안봉호(安奉鎬) 씨가 체결하고 보증금(保證金) 六천 五백원을 내게 되었는데 그 후 소화 五년 七월에 정현국(鄭鉉國) 씨가 一만원을 내고 영업권리권(營業權利權)을 양수(讓受)하여 주식회사로 조직 후 조선흥행주식회사(朝鮮興行株式會社)를 조직한 나머지 정완규(鄭完圭) 씨가 사장(社長) 으로 취임하고 신용희(申鎔熙) 씨는 지배인(支配人) 으로 취임하여 정씨는 금전에 관한 일절 책임을 지고 신씨는 영업에 책임을 맡아 이래 경영을 하여 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날로 업적을 나타내어 작년에는 二, 三천원의 순이익까지 보게 되어 주주들 간에 상당한 배당까지 하게 되었다. 지난번에 인생안내(人生案內)라는 영화를 상영하려고 영화배급소와 계약 체결을 할 당시 조선극장 간부의 승낙 없이 자기 개인으로 약 四백원에 계약을 하여 가지고 극장 간부와는 五할 배당을 하자는 조건을 제출하였는바 이에 극장 간부 측에서는 동 극장에 지배인의 지위에 잇는 사람으로 당연히 극장을 대표하여 계약을 체결할 것인데 불구하고 개인의 계약이라는 것은 배신 행동이라 하야 지난달 중순경에 신씨에게 해임장을 발송 하게 되었다. 이에 분개한 신(申)씨는 극장 건물 계약관계자인 목미(木尾) 씨에게 그 사실을 말하게 되자 전기 목미 씨는 신씨를 지지(支持)하는 터이라 결국은 정씨 일파와 신씨 일파 사이에 분쟁을 일으키게 되어 페관의 운명에까지 이른 것 이라고 한다. 관객을 위하야 애석한 일 - 사장 정완규 씨 담(談) 금번 분규사건에 대하여 사장 정완규(鄭完圭)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조선에서 몇 개 안 되는 흥행계에 극장 간부들의 분쟁으로 휴관까지 하게 된 것은 조선흥행계를 위하야 일반 사회 각 방면 인사에게 진실로 미안하기 끝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 간부는 어떠한 일이 있든지 양보를 하고 원만 해결을 지으려 합니다. 극장세만 하야도 九월에 七백 五十원 하든 것을 十월에 八백원을 내라고 하야도 아모 이의도 업시 그대로 다 지불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회사 규정에 의하야 부정한 행동이 있는 지배인 하나를 처치하엿다고 극장 계약자가 흥행을 못하게 하는 것은 너무나 횡포한 일 이 아닌가 합니다. 지난번에 처분한 신 지배인에 대하여도 처분을 관대하게 하기 위하야 九백원이라는 퇴직금까지 보내었습니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목미(木尾) 씨가 극장을 사용치 못하게 한다는 것은 신씨와 어떠한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일반대중을 위하여 너무나 애석한 일입니다. 장래를 위하야 해결에 노력 - 지배인 신용희 씨 담(談) 일찍이 동 극장의 지배인으로 있던 신용희(申鎔熙) 씨는 말하되 금번에 소위 배임행동이라고 하는 것은 지난번 인생안내(人生案內)를 계약하였을 당시에 四백원을 내 돈을 내어 계약을 하였다는 것이나 그것은 당시 간부들이 너무나 사진값이 비싸다고 계약하기를 주저하므로 만약 다른 극장에서 계약이나 하여 사진값이나 오르면 더욱 극장에 손해가 될 듯하기에 내가 먼저 계약을 한 것 입니다. 여하간 사실에 잘잘못은 어찌 되었든지 조선극장의 장래를 위하여 원만히 해결을 짓는 것이 좋을 듯하기에 해임장을 받고서도 정씨(鄭氏)를 방문하고 무조건으로 잘못하였다고 사과까지 하고 앞으로 사업을 계속하자고 하였으나 끝끝내 거절을 하므로 나는 부득이 극장 계약관계자 목미(木尾) 씨에게 그 사유를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목미(木尾) 씨의 방침은 사리를 모르는 회사 당국과는 계약은 하고 싶지 않다고 하며 회사라는 명칭을 떠나 개인으로 계약을 하고 싶다고 하는 중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목미(木尾) 씨는 나를 신임하느니만큼 내가 빠지어 다른 사람과는 계약을 하고 싶지 않다고 하는 중인데 현 간부 측에서는 나를 배척하니 앞으로 어찌될지 조선흥행계의 장래를 위하여 적지 아니한 걱정입니다 운운. - 기사, “『토키』영화의 전당 조선극장의 분규 - 휴관한 지 일개월에 아모 해결 업서”, 《매일신보》, 1932. 11. 28. - 한국영상자료원 편,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2 』, 1,382-1,383면. 사건의 발단은 한 편의 수입영화 계약을 둘러싼 이견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소비에트 영화 <인생안내>(니콜라이 에크, 1931)의 흥행가치에 주목한 신용희는 간부들이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개인 명의로 필름을 선구매했으며, 회사에는 추후에 수익금을 배분하리라고 통고했다. 그는 다른 극장과 경쟁이 붙어 필름 대여료가 폭등할까 우려했기에 불가피한 조치를 한 것이라 항변했지만,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이것이 엄연한 배임 행위라고 보았던 것이다. 다만 <인생안내>가 신용희의 기대처럼 수익 창출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회 부랑자 청소년들이 철도 노동자로 재탄생하여 사회주의 건설에 기여한다는 이야기를 담아낸 <인생안내>는 ‘노력영웅’의 숭고한 희생을 조명하는 데 초점을 맞췄을 뿐, 계급투쟁을 전면적으로 다룬 작품이라 하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신용희는 <인생안내>가 무난하게 검열을 통과할 것이라 보았고, 상영을 앞두고 주요 일간지에 특별광고를 커다랗게 게재했을 만큼 자신감을 보였다. [3] 그러나 <인생안내>는 개봉 다음 날 “사정에 의하야 중지”하게 되었다는 공지만을 남긴 채 사라져 버린다. [4] 필름 검열은 통과했지만, 조선극장에서 자체 제작한 선전문이 문제시되어 압수됨에 따라 상영 불허 처분이 사후적으로 내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5] (좌) 조극 흥행광고 3호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우) <인생안내> 포스터 및 스틸 (사진: “Putyovka v zhizn( 1 , 2 )”, IMDb) 그러나 상영이 중지되었다고 해도 <인생안내>는 신용희가 개인 명의로 구입한 필름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조선극장 측의 손해가 아주 컸다고는 보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도 조선흥행주식회사는 굳이 이 문제를 끄집어내어 신용희를 몰아내고자 했다. 아마도 이는 신용희의 개인 행동을 용인하게 된다면 장차 무척이나 불리한 선례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흥행주식회사는 극장업뿐 아니라 배급업에도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었기에, 신용희가 정상적인 배급 절차를 건너뛴 채 임의로 이익을 분배하게 되면 회사 측의 이익을 결정적으로 침해할 우려가 있었다. 그러므로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위험의 싹을 미연에 잘라 버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조선흥행주식회사가 신용희를 쉽게 몰아낼 수 없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조선극장에 대해 완전한 장악력을 갖고 있다고 보기 어려웠다. 조선극장의 흥행권에 대해서는 일정한 처분 권한이 있었을지 몰라도, 최종적인 결정권은 어디까지나 건물 소유주인 동경 건물회사 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해임장을 받은 신용희는 동경 건물회사 측 대리인을 맡았던 일본인 목미호지조(木尾虎之助)를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했고, 평소 신용희의 사업 수완을 신뢰했던 동경 건물회사는 즉각 극장 문을 닫으며 조선흥행주식회사를 압박했다. 동경 건물회사는 양자 간에 원만한 합의를 이루도록 종용했지만 신용희와 정완규의 협상은 끝내 결렬되었고, 조선극장은 조선흥행주식회사와 결별하는 길을 택한다. 조선흥행주식회사의 투자가 주로 발성영화 상영 환경을 마련하는 데 집중되었으므로, 새롭게 설비된 장비들의 소유권 또한 조선흥행주식회사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2년 12월에 조선흥행주식회사는 단성사와 새로운 계약을 맺고 조선극장에 설비되어 있던 발성영사 상영 장비를 철거해 단성사로 옮겼다 . 단성사는 1932년 4월에 일제 발성영사기를 도입했지만, 음향이 희미하고 잡음이 많았기에 장비 개선에 관심을 갖고 있던 중이었다. 계약 체결 직후 단성사는 최신의 미제 RCA 상영기를 장만했다는 점을 대대적으로 광고하며 모리스 슈발리에 주연의 발성영화 < 오늘 밤에는 사랑해 주세요(Love Me Tonight) >(로우벤 마물리안, 1932)를 상영하게 되었다. <오늘 밤에는 사랑해 주세요> 포스터 및 스틸 (사진: “Love Me Tonight( 좌 , 우 )”, IMDb) 창졸간에 장비를 잃은 상황에서 신용희는 새롭게 영사기를 장만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때 시간을 벌어 주었던 것이 바로 극장 대관업 이었다. 1932년 12월에는 새롭게 창단한 명일극장과 문외극단이 조선극장에서 연달아 연극을 올리게 되는데, 이는 극장을 마냥 닫아둘 수만은 없었던 흥행주의 입장과, 명망 있는 큰 무대에 서기 원했던 신생극단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신용희는 1929년에 지배인으로 취임한 직후부터 자체 레뷰단을 조직하여 공연을 올리고, 극단들에 무대를 대여해 주며 조선극장의 운영난을 타개해 나갔던 전력이 있었다. 영화 상영에 위기가 닥쳤을 때, 대관업을 적절히 병행하며 융통성을 발휘하는 데 능했던 그의 경영 노하우가 또 한 번 발휘된 순간이었다. 조선흥행주식회사와 신용희의 갈등은 연예사업 종사자 간에 일어난 단순한 알력관계를 넘어 여러 흥미로운 논점들을 수면 위로 밀어 올린 사건이었다.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영화의 제작, 배급뿐만 아니라 상영까지 포괄 가능한 회사를 목표로 삼았으며, 이는 영화산업의 수직적 통합 을 염두에 둔 행보였다. 그러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던 신용희 해고사태가 함의하듯 경영권 (조선인) 과 소유권 (일본인) 이 분리된 식민지 극장의 특수성 은 이러한 통합을 불가능하게 한 구조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신용희를 비롯한 조선인 극장의 경영자들이 발성영화 전환에 따른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방안으로서 대관업을 십분 활용 해 왔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즉, 1930년대 초반의 발성영화 전환기에 연극 흥행은 프로그램 운영의 윤활유 역할을 담당했으며, 극장업자들이 최소한의 자율성이나마 확보할 수 있도록 통로를 열어 주었던 것이다. *** [1] 이승희, 「조선극장의 스캔들과 극장의 정치경제학」, 『대동문화연구』 72,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0. [2] 1929년에는 안봉호가 이태진으로부터 6,500원에 경영권을 인수했으며, 1930년에는 정현국이 안봉호로부터 1만원에 경영권을 인수하였다. [3] 조선극장 특별광고, 《동아일보》, 1932. 9. 1., 2면. [4] 조선극장 광고, 《동아일보》, 1932. 9. 3., 6면. [5] 이 선전문은 전량 압수당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오늘날 전해지는 “조극 흥행광고 3호”가 <인생안내> 특별편으로 구성되었으며, 9월 1일자로 발간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것이 바로 문제가 된 선전문일 것이라 추정해 볼 수 있다.(대한민국역사박물관, 『자료로 보는 일제강점기 극장문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20, 196쪽.) “조극 흥행광고 3호”는 <인생안내>의 예술성과 제작진의 우수성을 상찬하는 내용으로 서두를 꾸몄는데, 불온성을 지적할 만한 내용이 크게 눈에 띄지는 않는다. 영화 줄거리에 대한 소개 역시 신문에 게재된 개요보다 약간 더 상세할 뿐 큰 차이가 없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인생안내>에 삽입된 노래들의 가사를 옮겨놓았던 부분이다. <인생안내>를 “젊은 노서아”의 太息이자 熱로 소개하면서 ‘권로가’, ‘유랑의 노래’, ‘철도사역’의 가사가 나열되고 있는데, “무로가 영원히 매장되도록” “진흙 속에 영원히 무너버리고저 한다”라는 선언이나, “ᄯᅡᆼ을 긁지만 말고 / 정말로 파 업흐라”라는 구호, “낡은 세계를 ᄲᅮ리채 / 단연히 잘나낼 것은 이 손이다” 등의 구절은 시각에 따라 직접적인 선동으로 해석될 만한 내용들이었다. 이광욱(극장문화사 연구자) l 읽고 생각하며, 말하고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과거의 기록을 뒤적이고 오늘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함께 미래를 고민한다.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조교수(동화 한국어문화학과), 한국영상자료원 객원연구원(『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 『드라마, 일상성의 미학』(2024) 공저, 「카프 연극대중화론의 전개와 송영 풍자극의 매체미학」(2018), 「도달한 임계점과 보존된 미래 – 발성영화의 정착과 경성 소재 조선인 극장의 연쇄 반응」(2021), 「표류하는 조선영화 : <임자 업는 나루배>에서 <정춘삼>으로 – 최초의 영화 판권 소송과 식민지 조선영화 시장의 추이」(2022) 집필.
" 발성영화 ", 《조선일보》, 1930. 1. 28., 5면. (조선극장 <네날개> 상영 홍보) 다시 만난 세계: 식민지 조선의 극장문화 이야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를 바탕으로 역사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와 행간 속에 숨겨진 욕망들을 재조명합니다. 세계영화사에서 발성영화(talkie)의 탄생은 중요한 변곡점으로 손꼽힌다. ‘무성의 양식’으로 출발했던 영화는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1927년에야 비로소 사운드를 내장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다만 발성영화의 발생론적 조건인 사운드 기술은 그 자체로 혁신적인 ‘신기술’이라 보기엔 어려움이 있다. 이미 영화가 탄생하기 이전에 축음기가 개발되었고, 녹음과 재생 기술 또한 상용화 단계에 접어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외려 문제는 넓은 공간을 충만하게 채울 만한 사운드 증폭 기술이 부족했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 문제도 진공관이 개발된 1910년대부터는 해결될 수 있었지만, 소리 없이도 산업적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던 영화계가 굳이 새로운 기술을 접맥해 가며 모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판다고 했던가? 연이은 흥행 실패로 고초를 겪고 있던 워너브라더스는 이 새로운 양식에 회사의 명운을 걸어 보기로 결정한다. 축음기 회사인 바이타그라프를 인수한 것은 그 첫걸음이었다. 이후 워너브라더스는 영화에 소리를 입히기 위해 부단히 애썼고, 몇 번의 실패를 맛본 끝에 오늘날 최초의 발성영화로 손꼽히는 < 재즈 싱어 >(앨런 크로슬랜드, 1927)를 내놓았다. 결과적으로 워너브라더스의 승부수는 맞아떨어졌고, 할리우드는 본격적으로 발성영화 생산에 돌입하며 영화의 기술적 표준을 바꿔 나가기 시작했다. <재즈 싱어> 중 한 장면과 촬영 현장 (사진: “The Jazz Singer( 1 , 2 )”, IMDb / © 1927 - Warner Bros) 시각적 양식으로만 인식되어 왔던 영화에 새로운 감각(청각)이 더해진다는 점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변화였지만, 발성영화가 영화산업 전반에 미친 영향은 훨씬 지대했다. 무성영화에 비해 배 이상의 제작비가 필요했던 발성영화는 필연적으로 영화산업의 자본집중적 성격을 강화시켰다.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군소 영화사들의 몰락이 가속화되었고, 적극적인 인수 합병을 통해 활로를 모색하려는 영화사들도 생겨났다. 유럽 영화계와 양분해 왔던 전 세계 영화산업의 패권을 할리우드가 확실하게 장악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이러한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영화 종사자들 역시 변화의 물결에 휩쓸렸다. 미셸 하자나비시우스 감독의 < 아티스트 >(2011)는 그 전환기의 풍경들을 세밀하게 포착해 내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남성 주인공 ‘조지 발렌타인’은 무성영화의 대스타였지만 발성영화의 등장과 함께 몰락하게 되며, 반대로 여성 주인공 ‘패피 밀러’는 새로운 시대의 스타로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조지’가 대사 연기에 극도로 부담을 느끼고 있었던 것처럼 적지 않은 무성영화의 스타들이 “말하는 영화(더 정확히 말해 ‘들리는 영화’)”에 연착륙하지 못했다. 한편, 대사의 비중이 비약적으로 늘어난 발성영화기에 접어들면서 시나리오는 문학의 주요 하위 갈래 중 하나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는데, <아티스트>는 시나리오 작가의 위상 변화 또한 ‘깨알같이’ 묘사해 놓았다. 무성영화 촬영 현장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시나리오 라이터’의 의자가 발성영화 촬영장에서는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티스트> 중 (사진: “The Artist( 1 , 2 )”, IMDb / © 2011 - The Weinstein Co.) 한편, 발성영화가 불러일으킨 변화의 파고는 대양 너머에 자리한 식민지 조선의 극장에서도 직감할 수 있을 만큼 거대했다. 더군다나 서양발 수입영화가 극장 프로그램에서 차지하던 비중이 압도적이었음을 고려한다면, 발성영화로의 전환 문제는 단순히 먼 나라의 신기한 이야기로 치부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그것은 실질적인 위협을 환기할 만큼 중대한 변수로 인식되었다. 즉각적으로 야기된 문제는 신작영화의 수입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는 점이었다. 서양발 수입영화의 대부분이 발성영화로 제작되기 시작하자 조선인 극장들의 선택지는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필름 대여료가 크게 인상되었던 점은 일차적인 난관이었다. 발성영화가 제작비 폭등을 불러오자 필름 판매비용 인상은 필연적 귀결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필름 대여료야 어찌어찌 마련할 수 있다 해도, 발성영화를 상영하려면 영사기 자체를 교체해야 했다. 비단 영사기뿐만이 아니다. 원활한 발성영화 상영을 위해서는 ‘입력-제어-녹음-재생-증폭’의 전 과정, 즉 ‘시그널 플로우’가 확립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극장은 발성영사기의 교체뿐 아니라 콘솔과 앰프, 라우드스피커에 이르는 사운드 장비 일체를 새로 장만해야 했던 바, 막대한 초기비용을 감수하는 것은 굉장히 부담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결국 1929년을 즈음하여 조선인 극장들은 과거 상영된 무성영화를 염가에 재상영하며 대응했다. 조선극장 의 경우에는 자체 레뷰단을 조직하여 공연 프로그램의 비중을 늘리기도 했다. 그러나 관객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재상영 정책은 ‘저열한 흥행수단’이라는 비난에 직면했고, 레뷰는 반나체로 등장한 여성 무용수의 육체적 스펙타클을 내세워 관객들을 끌어모으기도 했지만 그 인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극장 프로그램에서 ‘신작영화’를 제외한 채 미봉책으로만 버틸 수 있는 데드라인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었던 셈이다. 조선극장 레뷰단(15세 이상의 여자) 모집 공고 (《조극주보》, 1929. 9. 17., 2면) 조선인 극장들이 공격적인 투자에 망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때마침 닥쳐온 경영난 때문이기도 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식민지 조선 극장업은 호황기에 접어든다. 그러나 물 들어올 때 노를 너무 열심히 저어서였을까? 대표적인 조선인 극장으로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던 단성사 와 조선극장은 서양 대작 영화 유치를 위해 출혈경쟁을 마다하지 않았고, 결국 자금난을 겪게 된다. 이와는 정반대로 질이 낮은 필름을 들여와 ‘저가 정책’을 펼친 우미관은 경쟁에서 한발 물러서 있던 극장이었지만, 나중에는 이익금을 종업원에게 분배할 정도로 여유를 누릴 수 있었다. 1929년 9월에 열린 조선박람회는 위기에 봉착한 단성사와 조선극장에게 한줄기 빛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박람회를 구경하기 위해 지방의 관광객들이 대거 경성에 모여들었고, 극장가도 덩달아 활기를 되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문화적 인프라가 열악했던 지방에서 올라온 관객들은 경성 관객들과 달리 재탕 상영에도 큰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다만 조선박람회로 인한 호황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이었기에, 잠시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던 조선인 극장들은 즉각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박람회 기간 동안 얼마간의 종잣돈을 모으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낙후된 극장 시설을 전면적으로 개축하기엔 무리인 상황이었다. 서양발 발성영화 신작이 연일 발표되던 시점에서 대작 무성영화를 다시 수입하는 것도 별반 실효성이 없는 방안이었다. 결국 단성사와 조선극장은 발성영화를 수입하기로 결정하게 되었으며, ‘조선 최초’의 발성영화 상영 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기에 이른다. 1930년 1월의 일이었다. 사실 식민지 조선에 영화의 신기술을 소개하겠다는 명목으로 진행된 발성영화 시사회의 사례는 1920년대에도 간혹 찾아볼 수 있다. 스크린의 영상에 축음기의 소리를 끼워맞추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발성영화의 상영 자체가 완전히 새로운 사건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30년 1월에 진행된 수입 발성영화 상영은 기사를 통해 예고되고 정규 프로그램 광고를 거쳐 본격적 선전이 진행되었던 만큼 실험적 시사회와는 엄연히 다른 위상을 가진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관객들은 식민지 조선에 당도한 ‘발성영화’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었을까? ㉮ 말하는 사진! 이것만으로도 어떠한 충동을 느끼었다. 서양에서 떠들고 일본에서 떠든다고 조선에서도 떠들어야 할 이유는 없겠지만 움직이는 사진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우리에게는 한번 보아두어야 할 필요로 첫날 단성사에서 토키를 보았다. 제일 재미있는 것은 서양의 선화(線畵)의 예술적 감흥이다. 이것은 발성을 빼어놓고 그대로 보고라도 누구든지 웃지 않을 수 업다. 그리고 “도란몬드” 대위는 발성영화로 감상하는 것보다 그대로 무성영화의 재미있는 “스토리”를 감상하는 편이 낫겠다. 다만 싸운드로써 발성영화의 원리를 뵈어줄 뿐이다. 순회극단의 맨 끝막에서 비로소 발견하고 광희하였다. 군중의 떠드는 소리, 분노에 타는 “세리프” 요염한 여자의 음성 참으로 신기한 생각을 아니 느낄 수 없었다. 어서 우리 조선말로 된 “토-키”가 나오기를 바란다. - 어의동 K생, “ 순회극단을 보고 ”, 《동아일보》, 1930. 1. 30. -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사연구소 편,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0 』, 한국영상자료원, 2019, 193쪽. ㉯ 발성영화 야구시대를 조선극장에서 보았다. 완연히 실연을 보는 것 같다. 영화의 스토리는 무성영화에서 흔히 보던 것과 방사하지만 다만 신기한 것이 “간쓰메” 통을 떼는 소리까지 완연히 들린다. 영어를 잘 모르는 나로서도 가끔 가다가 한마디 두마디 주워 듣는 것이 “타이틀” 읽은 그것보다는 새로운 흥치를 느끼었다. 영어를 충분히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그러나 성음과 표정을 종합하여 귀와 눈을 한꺼번에 활동시키는 것은 연극 볼 때나 다름없다. - 어의동 K생, “야구시대를 보고”, 《동아일보》, 1930. 1. 30. -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사연구소 편,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0』, 한국영상자료원, 2019, 193쪽. ㉰ 조선에 발성영화가 수입된 것은 기쁜 일이라 하겠으나 첫 시험으로 지난번에 상영한 발성영화로서는 그렇게 크게 기대한 보람이 있었느냐 하는 데 의문이었다. 우리가 보고자 한 발성영화는 과학적 안목으로 보아서이었고 영화에 나타나는 미국이면 미국인의 생활이라든가를 본다는 것은 둘째 문제이었다. 왜 그러냐 하면 첫째로 그들의 말에 통할 수 없는 우리로서(만약 조선의 발성영화라면 모르되) 이해하기 어려운 데다가 우리들이 배운 영어와 다른 사투리라든가 곁말 같은 것을 알 수 업는고로 다만 사진에서 음향이 나오고 그 음향이 실물체에서 울려오는 그 음향과 근사함에 여기에 호기심을 갖게 됨에 있다. 그런데 이번 조선극장에서 상영 중인 이 『례뷰-시대』라는 것은 미국의 환락경 『브로드웨이』를 배경으로 하고 초기 발성영화에 있어서의 일반 『팬』들이 알기 쉽도록 음악 같은 것을 많이 넣어 외국 발성영화로서도 흥미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 외에 그 스토리를 말한다면 우리와 거리가 먼 『브로드웨이』의 방종한 남녀들의 애욕 투쟁 이외에는 다른 것이 없는고로 우리들은 이것을 힘써 알려고 할 필요는 없다. - KO生, “ 인상기 - 레뷰-시대를 보고서 ”, 《조선일보》, 1930. 2. 9. -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사연구소 편,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0』, 한국영상자료원, 2019, 268~269쪽. ㉮ 는 단성사에서 상영되었던 발성영화들(<순회극단>, <도라몬드 대위>), ㉯ 는 같은 날 조선극장에서 상영되었던 발성영화 <야구시대>에 대한 감상기이다. 그리고 ㉰ 는 열흘 뒤인 1930년 2월 7일부터 조선극장에서 상영된 <레뷰-시대>에 대한 촌평이다. 무엇보다 관객들이 가장 관심을 보인 것은 발성영화의 기술적 신기성 이었다. 즉, 당대의 관객들은 화면 속에서 소리가 들린다는 점 자체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소요하는 군중의 소리, 분노의 감정을 전달하는 육성, 요염한 목소리의 매력은 “신기한 생각”을 느끼게 해 주었으며, 통조림통을 따는 음향효과 또한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발성영화만의 특징이라 여겨졌다. 이처럼 발성영화의 소구력은 무엇보다도 “실물체에서 울려오는 그 음향”이 영화 속에서 근사치로 재현된다는 점 자체에 있었다. 그러나 스토리의 차원에서 본다면 무성영화와의 차이점을 찾아볼 수 없다는 의견도 제기되었으며, 브로드웨이가 배경인 <레뷰-시대>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과는 거리가 먼 “방종한 남녀들의 애욕 투쟁”을 다루었을 뿐이라 비판받기도 했다. <레뷰-시대(원제 “브로드웨이 베이비스”)>(1929) 중 (사진: “Broadway Babies( 1 , 2 )”, IMDb) 더 나아가 수입 발성영화가 언어장벽 문제 를 본격화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무성영화의 경우에는 외국어로 작성된 간자막의 분량이 상대적으로 적고, 변사 해설이 동반되었기에 수입영화 감상에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외국어 발화의 비중이 크게 늘어난 발성영화는 원활하게 감상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심지어 지식계층에 속한 관객이라 해도 발성영화의 외국어 발화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학교에서 영어를 배웠다 해도 모국어 화자가 아닌 이상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사투리’나 ‘곁말(은어)’도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음성연기로 전달된 감정의 생동감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영어를 충분히 못하는 것”에 유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무성영화기의 상영관습인 변사 연행은 발성영화에 내장된 사운드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지만, 언어장벽 문제를 해소하려면 불가피하게 공존해야 했다. 결국 변사들은 발성영화의 볼륨을 낮춘 상태에서 해설을 이어나갔는데, 당대의 영화비평가 서광제 는 이러한 사운드의 충돌이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콩버무리’를 만들어 놓았으며, 관객들에게 ‘두통’을 야기할 뿐이라 조소하기도 했다. [1] 그래서일까? ‘조선 최초’를 부르짖던 야심 찬 포부와는 달리 단성사와 조선극장 모두 본격적인 발성영화 전환에 대해서는 굉장히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발성영화 상영은 1930년 1월에 시작되었지만, 결과적으로 1930년에 식민지 조선에서 상영된 발성영화의 수는 손에 꼽힐 정도에 불과했다. 앞서 이야기한 언어장벽 문제도 있었거니와 초창기 발성영화들은 사운드의 녹음과 재생에 있어 “발성이 명조치 못한” 기술적 결함도 안고 있었다. [2] 아마도 극장업자들은 발성영화의 시장가치를 확신하기도 전에 전면적인 프로그램 전환에 나서기엔 무리라고 생각했을 공산이 크다. 그런 의미에서 극장업자들은 본격적인 초기비용을 투자하기 전에 먼저 일종의 ‘간보기’ 절차에 돌입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토-키! 토-키! 영화팬들 사이에 한참 떠들던 토-키가 경성에서 그 첫소리를 지르게 되었다. 동시에 단성사, 조선극장 사이에는 피차간 하로라도 몬저 상영을 하야 영화팬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으려고 갖은 고심을 다하여 왔던 것도 사실이다. 동양영화사에서 토-키를 가지러 가던 이튿날 아침 파라마운트 지사에서도 뒤를 이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토-키를 가저오려면 사진뿐만으로는 되지를 않는다. 기계가 두 대나 잇서야 하며 책임 있는 기사가 따로 두 사람이 있어야 한다. 동양영화사와 파라마운트 두 배급소에서는 단성사, 조선극장 두 상설관을 배경하고 어쨌든 가슴을 졸이고 한시라도 먼저 가저오기를 도모하게 된 것이다. 동양영화사에는 이십륙일 아침에 기사 두 명 기계 두 대 사진까지 아울러 단성사에 도착이 되었다. 조선극장에도 반드시 뒤를 이어 토-키 일습이 도착할 것은 명백한 사실, 단지 시간문제에 걸려있을 뿐이다. - 관악산인, “토-키 만담”, 《중외일보》, 1930. 1. 27. -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사연구소 편,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0』, 한국영상자료원, 2019, 193쪽. 관악산인( 이서구 )의 글은 1930년 1월에 단성사와 조선극장이 어떻게 발성영화 상영을 준비했는지 추정해 볼 수 있게 해 준다. 실제적인 실무를 담당한 것은 배급업자들이었는데, 단성사는 동양영화사와, 조선극장은 파라마운트 지사와 팀을 이루어 ‘조선 최초’라는 타이틀을 놓고 2 대 2 태그매치를 벌인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에 건너간 배급업자들이 영화 필름만이 아니라 기계(상영기)와 영사기사까지 함께 묶어 대여해 왔다는 점이다. 이는 1930년 1월의 발성영화 상영이 발성영사기를 구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시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시사한다. 즉, 단성사와 조선극장은 발성영사기 구입을 차후 과제로 미뤄둔 상태에서 몇 차례의 테스트를 통해 시장의 추이를 면밀히 관찰하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로 경성의 주요 조선인 극장(단성사, 조선극장, 우미관)들이 발성영사기를 전격적으로 장비하게 되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더 소요되었다. 발성영화 전환에 조금 더 적극적이었던 것은 조선극장이었다. 1931년 7월에 설립된 조선흥행주식회사의 직영관으로 참여하게 된 조선극장은 보다 안정적인 자본 지원에 힘입어 발성영사기 구매에 나설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듬해인 1932년에는 단성사와 우미관도 발성영사기를 장만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추동한 원동력은 무성영화를 시대착오적인 구시대의 유물로 여기는 인식이 급속도로 퍼져나갔다는 점에 있었다. 요제프 폰 슈테른베르크 감독의 영화 < 모로코 >(1930)를 필두로 일본어 자막을 이용한 상영방식이 보편화되면서 보다 안정적인 상영환경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도 중요한 변화라 할 수 있다. 이왕 초기비용을 통 크게 투자한 이상 극장 프로그램에서 발성영화의 지분이 늘어나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식민지 조선에 흘러들었던 발성영화는 그렇게 서서히 극장가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 [1] 서광제, “최근의 조선영화계(4)”, 《동아일보》, 1932. 2. 3. [2] 김연수, “1930년 조선연예계(4)”, 《매일신보》, 1931. 1. 8. 이광욱(극장문화사 연구자) l 읽고 생각하며, 말하고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과거의 기록을 뒤적이고 오늘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함께 미래를 고민한다.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조교수(동화 한국어문화학과), 한국영상자료원 객원연구원(『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 『드라마, 일상성의 미학』(2024) 공저, 「카프 연극대중화론의 전개와 송영 풍자극의 매체미학」(2018), 「도달한 임계점과 보존된 미래 – 발성영화의 정착과 경성 소재 조선인 극장의 연쇄 반응」(2021), 「표류하는 조선영화 : <임자 업는 나루배>에서 <정춘삼>으로 – 최초의 영화 판권 소송과 식민지 조선영화 시장의 추이」(2022) 집필.
누군가의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습니다. 소소한 일상의 흔적과 기억이 담긴 사진첩 속에서 그 누군가는 영화 한 편의 주인공이 됩니다. 사진첩의 주인공은 자신만의 독특한 감성으로 재미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죠. 그렇다면 한국영상자료원이 소장한 ‘어느 영화인의 사진첩’에서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많은 영화인들이 소중하게 간직했던 그 사진첩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어쩐지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만 같은 현장. 물론 그 ‘중요한 일’이란 사진을 보는 순간 단번에 눈치챌 수 있다. 사진 속 장소가 어디인지, 언제 찍은 것인지 모른다손 치더라도, 사진 속의 인물만으로도 이곳은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이다. 1993년 7월 12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영화관 단성사 는 이날따라 매우 들뜬 분위기다. 역대 한국영화 최고 흥행 기록을 세울 것으로 기대되며 연일 만원사례를 기록하고 있는 < 서편제 >(임권택, 1993)가 상영 중이기도 했지만,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유독 특별한 손님이 방문했기 때문이다. 한껏 들뜬 분위기를 가득 안은 단성사를 찾은 특별한 손님은 이 사진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주인공, (당시) 야인/정치인 김대중이었다. 한편 사진에서 김대중의 오른팔을 가볍게 붙잡고 함께 계단을 오르고 있는 이는 영화 <서편제>에서 한국적 아름다움을 필름 위에 새긴, 사진의 원 소장자인 정일성 촬영감독이다. “ 촬영감독 정일성 컬렉션 ”에는 이 사진 외에도, 단성사 휴게실에서 김대중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정일성과 오정해 의 사진도 포함돼 있는데, 이들의 표정에는 거물 인사와 함께 자리한 데서 오는 긴장감이 역력하다. 이즈음의 김대중은 연일 화제의 중심에 있던 참이었다. 그는 1992년 12월 18일에 치러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에게 패배한 후, 정치 은퇴를 선언하고 돌연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산하 국제문제연구소의 객원교수로 떠났다. 그 사이에 여러 언론은 그와의 접촉을 수없이 시도했지만, 정계를 떠나 야인으로 돌아간 그는 외부와 거리를 두고 통일문제 연구에 집중했다. 그가 6개월가량의 영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1993년 7월 초, 언론은 또다시 그의 거취에 대한 보도를 연일 이어갔다. 그러던 차에 귀국 후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이뤄진 그의 <서편제> 관람은 사회의 모든 관심이 집중된 은퇴 정치인의 행보에서 꽤나 튀는, 돌출 이벤트였다. 그가 단성사에서 <서편제>를 관람한 것은 “제작사 측의 초청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1] 제작사 태흥영화사( 이태원 대표)가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연일 거취 문제로 주목받고 있는 ‘야인’ 김대중을 초청했고, 김대중 역시 이에 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태흥영화사는 왜 김대중을 단성사에 초청했을까? 김대중은 모든 외부와 거리를 두면서도 왜 태흥영화사의 <서편제> 관람 초청에 응했을까? 제작사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혹시 태흥영화사는 화제 속 인물의 <서편제> 관람이 영화 홍보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던 것일까? 하지만 <서편제>는 이미 1993년 5월, 문화체육부 중개로 청와대 시사회를 개최했고 김영삼 대통령을 위시한 정부 관계자들의 찬사를 받아 화제가 되었다.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던 종교인, 김수환 추기경이 <서편제>를 보러 단성사를 찾은 일도 있었다. 단성사를 방문한 김수환 추기경과 그를 맞이하는 <서편제> 제작팀(구체일 미상) 다시 말해, 정치계를 비롯해 종교계까지 <서편제>를 관람하면서, 영화의 우수성과 작품성, 화제성은 이미 충분히 입증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1993년 7월 12일의 이벤트는 단순히 영화 홍보를 위한 목적만은 아니지 않았을까? 어쩌면 ‘김대중’ 그 자체가 태흥영화사에 그리고 영화 <서편제>에, 나아가 한국영화계에 특정 무언가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영화계와 김대중의 관계 내지는 영화계에서 ‘김대중’이라는 키워드가 가지는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이로부터 약 5년 전, 노태우 정권을 출범시킨 제13대 대통령 선거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87년 12월 16일에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1972년 10월 유신 이후의 첫 대통령 직접선거로, 민주화를 향한 국민의 열기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당시 대표적인 민주 인사 김영삼(통일민주당)과 김대중(평화민주당; 이하 평민당) 역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대중은 민주정권 수립을 위해 양김(김영삼, 김대중)의 후보 단일화를 요구했으나 결렬되었고, 이들은 각자 독자 후보로서 대선 레이스를 치렀다. 영화계 내에서도 국내 영화시장 보호 및 창작과 표현의 자유, 영화인 복지 향상 등 한국영화 발전을 위해 김영삼, 김대중에게 후보 단일화를 요구했지만, [2] 단일화가 결렬되자 평민당 김대중 후보를 공식적으로 지지하는 글을 발표했다. [3] 이에 평민당은 「평화민주당에서- 이 땅의 영화인에게 드리는 글」 [4] 로 영화인의 요구에 호응했다. 여기서 평민당이 제시한 한국영화 발전을 위한 기본 원칙의 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평민당에서- 이 땅의 영화인에게 드리는 글」, 1987. 12.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영화계 현안문제를 고루 다루는 가운데서도, 여기서 주목해 볼 것은 한국영화 보호 및 육성을 위해 평민당이 가장 먼저 제시한 극장 스크린쿼터 확대안이다. 1986년 12월에 개정되어 1987년 7월부터 시행된 제6차 개정영화법에는 외국인의 국내 영화업 허용 조항이 신설돼, 외국 영화사가 국내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사실 이는 1985년부터 시작된 미국 통상압력의 한 결과로, 이를 토대로 1988년부터 UIP를 시작으로 20세기 폭스, 워너 브라더스(1989년~), 콜럼비아 트라이스타(1990년~), 월트디즈니(1993년~) 등의 할리우드 영화사들이 국내에 영업 등록을 하고 자사의 영화를 직접 배급(직배)하기 시작했다. 할리우드 영화의 직배는 한국영화계에 위기로 다가왔다. 세계 영화시장에서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할리우드 영화가 국내에 직접 배급되면, 자본력이 상대적으로 영세한 한국영화가 설 자리는 좁아질 수밖에 없는 까닭이었다. 설 자리가 좁아진 한국영화를 보호해줄 장치는 스크린쿼터 제도뿐이었지만, 이 역시 미국의 레이더망에서 안전할 리는 만무했다. 이런 상황에서 스크린쿼터 일수를 확대하겠다는 평민당의 공약은 생존 위기에 놓인 영화인들의 희망이자 기대와도 같은 것이었다. 다시 사진 속 1993년 7월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1993년의 한국영화계는 스크린쿼터 문제, 나아가 영화 시장 개방 문제로 또다시 분주한 해를 보내는 중이었다. 미국의 압력으로 1988년에 시작된 ‘제2차 한미영화협상’에서 한국 정부는 1989년 1월부터 외국영화 프린트 벌 수 제한을 연차별로 완화해 1994년 1월부터 전면 폐지할 것에 합의했다. 이는 쉽게 말해 외국영화 상영 필름의 극장 공급량을 무제한 허용하는 것으로, 국내 영화시장 개방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1994년으로 예고된 영화시장 확대 개방을 목전에 둔 1993년의 영화계는 그해 1월, ‘스크린쿼터 감시단(위원장 정지영)’을 발족하고 전국 극장 상영 실적과 스크린쿼터 위반 실태를 조사, 감시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며 한국영화 보호의 마지막 보루인 스크린쿼터 사수에 매진했다. 이런 맥락에서 1993년 7월 12일, 단성사에서 <서편제>를 관람한 ‘야인’ 김대중은 한국영화 보호 및 육성을 공약으로 내세운 1987년의 ‘대선 후보’ 김대중과 교차한다. 미국 통상압력의 결과로 예고된 외국영화 프린트 벌 수 제한 전면 폐지의 위협에서 스크린쿼터 사수를 외치는 1993년 현재에, 미국 통상압력의 결과로 예고된 할리우드 거대 영화사들의 직배 위협에서 스크린쿼터 확대를 약속했던 1987년 정치인 김대중이 마치 소환되기나 한 듯이. 한국영화 흥행 신기록이 예고된 <서편제>를 야인 또는 정치인 ‘김대중’이 관람한다는 것은 이처럼, 그 자체로 한국영화를 위한 상징적인 이벤트였다. * 단성사에 김대중을 초청한 호스트,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대표는 그해 10월, 문체부의 스크린쿼터 20일 추가 감경 발표에 대응하고자 출범한 ‘스크린쿼터 사수를 위한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에서 시나리오 작가 최금동 , 감독 유현목 , 임권택 , 당시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유동석과 함께 공동위원장으로 추대되었고, 1993년 10월 27일에 예정된 영화의 날 기념행사 취소 및 제작 활동 중단 등의 공동 행동을 전개했다. 한편 정계 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은 1997년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해,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와 맞물려 한국 경제는 IMF 금융위기를 맞았고, 갓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미국에 한미투자협정(BIT) 체결을 제안했다. 그리고 스크린쿼터 문제가 협상 테이블에 올랐다. 영화인들은 ‘스크린쿼터 사수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약칭 비대위)’를 발족하고 본격적인 투쟁에 돌입했는데, 이때 역시 태흥영화사 이태원 대표는 배우 김지미 , 감독 임권택과 함께 비대위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영화계의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은 노무현 정부 시기까지 이어졌으나, 그들의 투쟁으로 지켜온 스크린쿼터 146일은 결국 2006년 7월, 연간 73일로 축소되었다(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 영화시장 개방과 스크린쿼터 컬렉션 ” 참조). *** [1] 《동아일보》, 1993. 7. 13., 5면. [2] 애국영화인 일동, 「 민주화를 갈망하는 애국영화인에게 드리는 글 II 」, 1987. 12. 11.,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시장 개방과 스크린쿼터 컬렉션』, 관리번호 DZZ0001349_01. [3] 이 땅의 영화인들, 「 이 땅의 민주화를 열망하는 애국시민에게 드리는 영화인의 글 」, 1987. 12. 14.,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시장 개방과 스크린쿼터 컬렉션』, 관리번호 DZZ0001350_01. [4] 한국영상자료원, 『 영화시장 개방과 스크린쿼터 컬렉션 』, 관리번호 DZZ0001351_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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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3가 트라이앵글 극장가: 단성사-피카디리-서울극장 | 56건 | 2026-02-02 | 2022-0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