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단지
- 감독
- 이시다 히로야스
- 제작년도
- 2022
- 출연
- 타무라 무츠미, 세토 아사미, 야마시타 다이키, 코바야시 유미코, 미나세 이노리, 하나자와 카나, 시마다 빈, 미즈키 나나, 무라세 아유무
사진: 출판사 무제 가끔은 혼자서 몰래 이와 같은 생각들을 해왔다. 영화 시나리오는 영화에게 마치 엄마 같은 존재라고. 영화 촬영장에서 자신만의 일을 해내고 있는 이런저런 자식들은 역시 엄마가 있었기에 거기 있게 된 거라고. 엄마가 자식을 어찌 낳아 길러내는 건지에 대해 일일이 거론할 수 없다고 느끼듯이, 한 편의 영화 시나리오가 쓰이는 과정은 실로 재현이 불가능한 작업이다. 영화 시나리오 작가는 자신이 대체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은 시나리오를 써낼 수 있었는지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스스로도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모든 언어적·비언어적 창작의 속성이 그렇기는 하겠지만, 그중 특히 영화 시나리오 작업은 비유하자면 마치 밤사이 꾸는 꿈 같다. 아니, 밤사이 지나간 꿈을 일상과 인생에 연결시켜 플롯화하려는 편집증적인 집착에 가깝다. 이 과정은 환한 조명 아래 카메라 앞에서 기록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거칠고 어두운 침묵의 방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러므로 대개 주목받지 못한 채 잊히거나 심지어 무시당하기도 한다. 마치 우리들의 엄마들이 그러하듯이. 언제부턴가 나는 이것이 영화 시나리오 작가가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불운이자 불행이라고 생각해왔다. 또한 이 모든 불리함과 아픔을 작가가 자기만의 것으로 기꺼이 끌어안을 때, 그때야 비로소 그에게는 더없는 보상이라 할 만한 삶의 아이러니와 예술의 신비로 가는 비밀스러운 문이 열린다고도. 좀 더 구성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해보자면, 영화 시나리오에는 어떤 의미에서건 작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고유한 인생의 단면뿐 아니라, 그를 스쳐 가는 여러 만남들, 인연들, 인연이 아닌 것들, 실제의 사건들과 환상 혹은 망상 속의 기미들이 모두 담기기 마련이고 담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허구의 영화를 최대한 진짜 삶 같이 보이게 하기 위하여, 영화 시나리오 작가는 매순간 여러 사람이 되어야 하며, 동시에 여러 사람을 보는 카메라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실로 집필 중인 영화 시나리오 작가는 매순간 자신을 부수고 또 부순다. 얼마나 부술 수 있을지에 승부가 달려있다. 혹자는 나에게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동안 작가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이 마치 정신분열증 환자가 겪는 일과 비슷하다는 말을 해주었는데, 나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의 말이 옳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마도 이와 같은 유체이탈의 무한반복과정을 포착해내거나 이해해내는 일은, AI 첨단 장비를 구비한 미래의 뇌신경과학자나 도스또예프스키 급의 작가에게 맡겨져야 할 법도 하다. 영화제작현장을 찍는 메이킹필름 정도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 정말로 이와 같은 일을 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이해하는 일에 한 획을 긋는, 꽤나 아름답고 감동적인 과학 일기가 될 수도 있겠다. 오랫동안 아주 은밀한 방식으로 이루어져 온 일이기에 더욱 그럴 것 같다. 나는 가끔은 혼자서 몰래 이와 같은 생각들을 해왔다. 영화계라는 곳, 보이는 게 너무도 중요한 세계에서 하필 영화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작되는 것이란 생각을 갖게 됐다. 애초에 영화는 작가의 고독한 삶에서, 그의 일상을 지나쳐가는 모든 유의미하고 무의미한 사물과 인연 속에서 절묘하게 잉태된다. 그것은 언어로 쓰여 책이 되고, 책을 읽는 사람들이 되며, 그 사람들이 붐비는 촬영장이 된다. 그곳에서 카메라를 통해 결코 만질 수 없으나 만져질 듯 생생한 영상으로 기록된다. 이 영상은 마침내 무수한 디지털 입자가 되어 하얀 화면 위로 투사되고, 화면 앞에 앉은 익명의 인간들의 망막을 뚫고서 그들의 몸과 삶 속으로, 어쩌면 영혼 속으로 침투한다. 그러므로 나는 영화가 최종적으로 만들어지는 곳은 결국 우리들 각자의 인생 속에서 라는 생각을 갖게 됐는데, 이것은 점점 하나의 견해라기보다 신념에 가까운 것이 되어갔다. 나는 어느새 영화는 잔상이라는 믿음을 갖게 됐고, 어느 날부턴가는 우리 안에서 영화의 잔상이 우리 각자의 삶과 섞이고 섞여 뒤죽박죽인 상태가 될 때, 그때야 비로소 영화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의미가 생겨나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싶어졌다. 책 『내 모든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생각의 바탕에서 생겨났다. 이 책의 집필 과정에 관한 이야기 중 가장 아카이빙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 바탕이라고 본다. 『내 모든 것』 중 인물들이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언급한 작품들 (상) <걸어도 걸어도>, <애정의 조건> (사진: IMDb , Photo by Archive Photos/Getty Images, © 2012 Getty Images) (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코요테 어글리> (사진: IMDb , © 2000 Buena Vista Home Entertainment) 좀 더 용기를 내서 첨언하자면, 영화 시나리오 작업에 대한 본질적 이해와 현실적 지지 없이 영화 및 기타 영상산업의 인간다운 도약을 기대할 수는 없다고 본다. 개인적으로는 이미 AI가 다 할 수 있겠구나, 싶은 방향으로 퇴행 중이라고도 본다. 그러나 영화라는 것이 단지 영상 오락물 내지 서비스 업종이 아니라 예술일 수 있다고 믿는 어떤 인간이 있는 한, 그는 기필코 자신만의 고유한 인생을 스쳐 갔던 기억과 상상을 통하여서 스스로에게 운명 같은 영화 시나리오를 써내고자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는 지금과 같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는 꽤 뼈아픈 전투가, 아마도 산업적으로 패배할 확률이 높은 무모한 도전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하여 나는 이 시대의 자본과 시스템에게 굳이 이 말을 전하고 싶다. 만약 인간만이 이룰 수 있는 예술에 투자하고 싶다면? 골방에 처박힌 가난한 작가를 더 자주, 더 집중해서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마치 <삼체>(2024)에서 인류의 미래를 미리 사냥해 둔 외계인이 등장하기 전에 면벽수행을 할 현자들을 골라 침묵의 인류구조 시나리오를 비축해달라고 강제하듯이. 그러나 유튜브 쇼츠로부터 도파민을 공급받기 위하여 어둠 속 이부자리에서 녹내장의 위험을 무릅쓰는 현대의 인간들이 과연 그와 같은 투자를 감행할 투지를 품을 수 있을런지? 내 판단으로는, 영상예술의 미래는 당분간 AI에 삼켜졌다고 본다. 한편 이후 AI의 인격적 고민이 가시화될 세계에 대해서는, 내 능력 밖의 일이란 낙관론을 남겨두겠다. 그러므로 책 『내 모든 것』이라는 한 영화 시나리오 작가의 취재일기, 이런저런 사람들의 삶과 영화에 대한 고백들을 담아낸 우연하면서도 필연적인 순간들의 기록, 그들 각자의 이야기를 각각의 의미 있는 단편으로 구성해보고자 애를 쓴 창작노트, 그 창작의 과정 속에서 작자 스스로의 삶을 거울로써 이용하고 들여다보고자 한 고군분투기는 그저 티끌 같은 기록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이 기록은 아주 개인적이면서도 유일한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영화 시나리오 작업이란 본래 이처럼 개인적이고 유일한 것일 수밖에 없음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쓰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그저 평범한 에세이나 인터뷰집이 아닌 단편소설집 같다고 느끼곤 한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본래 영화 시나리오 작가가 하는 일이라는 것이, 작가 자신과 작가 주변의 삶을 바탕으로 허구의 주인공을 찾아내고 그의 삶을 진짜처럼 그려내는 것이니까. 책 『내 모든 것』의 맨 처음 가제는 “삶을 이기는 영화”였다. 실은 그 시절 나 자신에게 던지고픈 질문이었다. 영화라는 게 과연 삶을 이기나? 혹은 영화라는 게 과연 삶의 고통을 이기게 해주나? 영화라는 게 내가 이렇게 기를 쓰고 진을 빼며 만들어야 할 만큼 가치가 있는 건가? 그럴 만큼 영화라는 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필요하긴 한 건가?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서 늘 이러한 질문들을 품고 살아가다보니, 집필 중에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 취재를 하다보면 자연스레 영화 이야기를 하게 됐고 묻게 됐다. “살면서 영향을 받은 영화가 있나요? 그게 영화의 이야기든 영화 속 한 장면이든, 인생에 남아있는 어떤 영화가 있나요?” (사실 이 책에 ‘사람들의 진짜 인생영화에 대한 이야기’라는 이름표를 달아준 이는 작가가 아닌 이 책을 펴낸 무제출판사였음을 여기서 밝혀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삶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책의 소재가 되기에는 너무 보잘것없거나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고, 또 그런 만큼 자유로웠다. 그들이 더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익명의 장치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책 속 ‘노아’와 ‘세라’라는 가명으로 등장하는 두 여성과의 잇단 만남이었다. 둘 다 집필 초반에 우연한 기회로 처음 만난 사람들이었다. 왠지 들어볼 만한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 예감에 인터뷰를 청했는데, 각각 성폭력 피해 경험과 자살 중독을 앓은 경험을 털어놓으며 내 작은 머릿속에서는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이야기를 가져다줬다. 이곳에는 노아의 이야기를 남겨두려 한다. <릴리슈슈의 모든 것> 중 / 사진: IMDb( 1 , 2 ) 노아는 조기유학시절 덜 신중했던 성관계로부터 비롯된 집단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로서, 이후 성(性)적으로 문란하고 예민하고 특수한 각종 시도와 방황을 통해 생존해가고 있었다. 나에게 그것은 그녀 안에서 필연적인 서사로 느껴졌다. 좀 더 과감히 말하면, 고통으로 각인된 자기 몸의 한계를 부수려는 존엄한 투쟁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영화 < 릴리슈슈의 모든 것 >(이와이 슈운지, 2001)에서 집단 성폭력의 피해를 입은 후 자살을 하는 여고생, 아오이 유우와 친구가 되는 상상에 빠져들곤 했는데, 단지 그 영화 속으로 들어가 그녀 곁에 있고 싶을 뿐이라고 했다. “그냥 피해자가 한 명 느는 거죠. 그렇지만 덜 외롭잖아.” 나는 노아의 초현실적인 연대의식에 충격을 받았으며, 그녀가 혼자였던 그 긴 시간 동안 얼마나 애타게 누군가를 기다렸을지에 대해 단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실제로 몸이 조이는 것 같은 감각을 느껴 원고를 만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을 헤맸다. 내 글의 처음 엔딩은 노아가 아오이 유우와 함께 무해한 동네 청년들 속에 섞여 마음껏 수영을 하는 장면이었다. 그때는 그저 그녀의 몸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물살 속에 잠겨 있기만을 바랐던 것 같다. 그러나 글쓰기를 마친 후 거듭해서 읽어볼수록, 이와 같은 결말은 용맹했던 노아의 고백에 비해 너무나도 유치한 것 같았다. 어느 나른했던 저녁에, 나는 친구에게 원고를 보여주며 이렇게 고백했다. “사실 노아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는 영화 속에서 연이 날던 그 언덕이 더 무서워졌어. 영화에서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아이들이 빨간 연을 날리고 있잖아. 너무 착해 보이고 너무 잘 웃고 너무 평범해 보이는 남자아이들이, 딱 일본사람들 같잖아. 태양 같은 욱일기를 휘날리면서 해맑게 사람을 죽였던 그 사람들 말이야. 내 말은 일본인이라서 그렇다는 게 아니고, 일본이든 어디든 어느 곳에나 있을 수 있는 사람 같다는 거야……. 그런데 있잖아, 나한테는 그게 마치 영화 같기도 하거든. 영화라는 게 원래 너무 예쁘고 너무 멋지고 그래서, 그냥 그것 자체로 충분해보일 때가 많잖아. 심지어 영화 속 어떤 장면이나 인물이 내 영혼을 병들게 해도, 그게 나보다 근사해보인단 이유로 내가 거기에 그냥 머무르고 싶을 때가 있잖아. 주저앉아버리기도 하잖아. 혹시 노아에게 <릴리슈슈의 모든 것>이 그런 거 아닐까? 자꾸 그런 걱정이 들어서 그랬는지, 나는 이 이야기를 쓰는 게 너무 힘들었어. 사실 나는 노아가 그냥 또 한 명의 피해자로 그 영화 속에 들어가는 게 싫어. 나는 노아가 이제 그만 그 영화에서 나왔으면 좋겠거든. 아오이 유우의 손을 잡고서 같이 탈출했으면 좋겠거든. 내가 영화인이랍시고 영화에 대해 이런 책을 쓰고는 있지만, 영화 같은 게 뭐 그리 중요하겠어? 노아가 사는 게 중요하지!” 그래서 나는 노아와 아오이 유우를 그 영화로부터 탈출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사람들의 진짜 인생영화에 대한 이야기, 책 『내 모든 것』은 그렇게 시작됐다. 2026년 4월, 오정미. <릴리슈슈의 모든 것> 중 (사진: IMDb ) Behind the Book : 저자에게 아직 남아있는 이야기 한 사람의 질문이 늘어나고 깊어진 끝에 수백 쪽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마침내 책 한 권으로 독자에게 닿은 저자가, 치열하고도 가치 있던 여정을 들려줍니다. 오정미(영화 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 l 영화 < 버닝 >(2018), < 심장소리 >(2022), <가능한 사랑>의 각본을 썼다. 책 『내 모든 것』을 썼다.
사진: 영화진흥위원회 (© 학교법인 동국대학교) 근·현대 한국사회를 관통한 균열과 진통의 시간을 영화에 남은 흔적으로 기억합니다. 장길수 감독의 < 은마는 오지 않는다 >(1991)는 안정효 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 개봉 이후 국내외적으로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당시 “국내 백상예술제에서 작품상 등 5개 부문 상을 받은” 이 영화는 제15회 몬트리올국제영화제 본선에 진출하여 언례 역을 맡았던 이혜숙 배우가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연출한 장길수 감독이 각본상을 받는 쾌거를 이뤘다. [1] 장길수 감독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의 제작 동기로 한국과 미국 문화의 갈등 속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그려 보려 애썼다는 점을 밝힌 바 있다. [2] 이에 따르면 영화는 미국과 한국의 문화 충돌과 갈등 문제를 유엔군 병사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겪은 후 ‘양공주’로 전락해 가는 순박한 시골 여인의 삶을 통해 조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순박한 시골 여인이 양공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 즉 ‘한국전쟁’과 ‘유엔군 참전’이라는 조건은 이 영화를 문화와 역사라는 두 차원에서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필요성을 제기한다. 한국전쟁이 낳은 뼈아픈 존재, ‘양공주’라는 타자의 출현 소설 『은마는 오지 않는다』의 작가 안정효는 작품에 형상화된 언례(이혜숙)가 사실은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으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겪지 않기 위해 도망 다니던 평범한 자신의 어머니들 중 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한국전쟁 당시 수없이 희생되었던 여성 중에서 발견된 존재이자 이름이었다. “언례 씨를 처음 만난 것은 51년 여름, 지금은 부천이라고 이름(조)차 바뀌어버린 소사읍 심곡리에서였습니다. (중략) 내가 언례씨를 발견한 것은 우리를 해방시키러 왔다는 유엔군 병사들에게 강간을 당하지 않으려고 (날)마다 도망을 다니던 내 어머니와 (다)른 많은 여자들 한가운데서였습니다. [3] ” (괄호 표기 필자) 한국전쟁이 남긴 가장 아픈 부분은 사회적으로 취약한 상황에 내몰린 여성들에게 다양한 희생이 요구되었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외국군 주둔과 전쟁으로 인한 생활난은 여성으로 하여금 몸을 팔아서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유지하게끔 강요”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수많은 부녀자들이 생활난으로 일반 ‘양공주’나 매춘 행위자로 전락”했다는 사실은 이를 잘 말해 준다. [4] 이러한 당대 상황과 위의 인용문 내용을 겹쳐 읽어 보면 언례는 전쟁이 낳은 뼈아픈 존재들을 호명하는 대표적인 이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통에 남편도 없이 홀로 자식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여성들, 그리고 굶주림에 시달리다 못해 먹고 살기 위해 양공주의 삶으로 뛰어들어야 했던 여성들의 삶은, 그녀들의 목소리로 직접 증언되어야 했으나 지난 몇십 년 동안 사회적 배척과 배제 속에 잠들어 있었다. “전쟁미망인, 이산가족 여성, 불구가 된 남편, 그리고 ‘양공주’라고 불린 기지촌 여성들은 1950년대 결여된 가부장성을 홀로 지탱하며 곱지 않은 사회적 시선까지 견뎌야 했던 불안한 섹슈얼리티의 상징이었다” [5] 라는 지적은 1950년대 전후 여성들이 마주해야 했던 상황을 잘 보여 준다. 그러나 이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따라서 언례와 양공주의 삶은, 잊힌 채 침묵 당해 왔던 타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찾으며 역사의 뒤안길에서 귀환하는 궤적을 보여 주는 사례이자, 한국전쟁과 문화 식민의 공간이 어떻게 한국의 영토와 신체, 그리고 문화를 급격하게 변화시키면서 현재에 이르도록 했는지에 대한 기원을 되짚어 보는 문화적 계기로 작용한다. 이를 잘 말해 주듯 소설과 영화는 한국전쟁에서 출현한 양공주가 어떻게 전쟁을 통해 생산되고 문화적 타자로 호명되어 갔는가에 관심을 둔다. 양공주의 탄생을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조건과 문화적 침식의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자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사회적 비극으로 조명하는 방식은 허버트 미트갱(Herbert Mitgang)이 미국에서 출판한 안정효의 소설을 두고 “반미 소설이 아닌 반전 소설”이라고 평가한 맥락과도 맞닿아 있다. [6] 전쟁은 물질적 파괴뿐만 아니라 문화적·정신적 파괴 또한 초래함으로써 휴머니즘에 대한 깊은 비판과 성찰을 유도한다. 소설과 영화 속에서 양공주로 호명되는 언례의 변화 과정은, 이를 둘러싼 전쟁과 휴머니즘의 문제를 부각하면서 ‘반전 소설’이자 ‘반전 영화’로서의 새로운 지점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특히 장길수 감독의 영화는 한국영화사에서 비로소 양공주의 삶이 형성되는 과정을 따라가며 적극적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되살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특별하다. 극중 언례 (사진: 영화진흥위원회, 한진 / © 학교법인 동국대학교) 양공주의 삶을 통해 만나는 한국전쟁과 ‘아메리카니즘’의 그늘 개봉 당시 이 작품은 “한국 속의 아메리카니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사회성 영화”로 소개됐다. [7] ‘아메리카니즘’이라는 문화적 현상은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미군 주둔이 본격화되면서 1950년대 사회적 문제로 부상했다. 그런데 영화는 양공주와 ‘양키 문화’를 시각적 흥밋거리로 재현하기보다는 한국전쟁과 함께 나타난 아메리카니즘을 전쟁과 휴머니즘, 그리고 문화 침범이라는 무게 있는 주제와 함께 드러낸다. 금산리에서 평범한 시골 촌부로 두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언례의 삶이 급격하게 훼손되는 데는 유엔군의 참전과 전쟁에 휘말린 금산리 사람들의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 태도가 크게 작용한다. 언례가 유엔군에 의해 성폭력 피해를 입은 뒤 그녀는 황훈장( 전무송 )의 말을 통해 드러나듯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마땅한’ 더러운 존재가 된다. 그녀를 배척하는 금산리 사람들의 태도 이면에는 순결한 신체와 영토가 훼손당한 데 대한 문화적 충격과 유교적인 심리가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언례의 집과 신체는 전쟁으로 초래된 영토적 파괴를 연상시킨다. 게다가 영화 속에서 언례가 양공주로 변화하는 과정은, 전쟁이라는 역사적 급변 속에 끼어있는 존재, 즉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사이’와 ‘경계’의 존재가 놓인 문화적 곤경을 집약해서 보여 준다. 이는 그녀가 경계 공간에 놓여 있다는 점과도 관련된다. 금산리의 집과 양공주의 집은 전통 공간과 ‘양키 공간’으로 구분된다. 언례는 이 두 영역을 오감으로써 전쟁 전-전쟁 후, 전통-근대, 순수-오염, 선-악, 유교 문화-양키 문화 사이에 놓인 상징적 존재로 변모한다. 금산리의 집과 양공주의 집에서의 언례 (사진: 한진 / © 학교법인 동국대학교) 흥미로운 것은 이렇듯 문화 침범의 경계에 놓여 있는 언례에게 목소리가 주어진다는 점이다. 물론, 아들 만식과 황훈장, 그리고 찬돌 등의 남성적 시선이 영화 곳곳에서 규율 권력으로 출현하지만 언례와 용녀( 김보연 ), 순덕( 방은희 )은 삶에 대한 발언권을 가진 존재들로 생동감을 지닌다. 게다가 이는 양공주들을 문화 침범의 ‘쓰레기들’로 분류하려는 폭력적인 권력자들의 비윤리적 태도를 백일하에 드러내는 문화적 저항이 된다. 영화에서는 미군의 쓰레기를 뒤지거나 구걸하고 쓰레기 더미를 차지하기 위해 패싸움을 벌이는 아이들의 모습이 여러 차례 재현되는데, 이는 한국전쟁이 초래한 아메리카니즘’이 한국인의 삶에 가져온 문화적 오염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들이다. 이로써 양공주의 삶과 한국인의 삶은 문화적 ‘오염’이라는 측면에서 동일선상에 놓이게 된다. 그렇다면 양공주의 삶을 비판할 만한 자격이 과연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영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전쟁과 아메리카니즘을 경유하면서 ‘전쟁’과 ‘휴머니즘’이라는 보편의 주제로 접근한다. 미군의 주둔과 함께 시작된 ‘양공주의 삶’과 ‘쓰레기를 줍는 삶’은 한국전쟁이라는 급격한 변화 속에 내몰린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이 마주한 시대의 현실이자 곤경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대동소이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자신들을 배척하는 마을 사람들과 갈등하는 언례와 용녀, 순덕의 목소리와 저항이 영화 속에서 생생하게 울려 퍼질 때 이는 전쟁과 휴머니즘을 둘러싼 확장된 문화적 보편성과 현실성을 획득하는 길을 열게 된다. 마을 사람들과 대립하는 용녀와 순덕, 쓰레기를 줍던 마을 아이들의 패싸움 (© 학교법인 동국대학교) 이러한 영화 재현 양상은 사실 보기 쉽지 않은 것이었다. 한국영화사에서 양공주의 모습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신상옥 감독의 영화 < 지옥화 >(1958)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인 양공주 쏘냐( 최은희 )는 육체적인 매력과 화려한 미제 사치품으로 무장한 채 남성들을 유혹하거나 미 군수품을 밀수하는 데 협력하는 ‘돈’과 ‘욕망’의 화신으로 이미지화된다. 영화 속에서 기지촌 양공주로 재현되는 줄리( 강선희 )에게 그나마 전쟁 전 순수했던 과거 이야기가 주어지기는 하지만 이마저도 순결한 동식( 조해원 )과의 결합을 위해 설정된 것이라고 할 만큼 주변적이고 작위적이다. 이는 영화 <지옥화>가 전통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당대 문화 이데올로기를 영화적으로 전유하기 위해 양공주를 동원했다는 점과도 관련된다. 따라서 영화 속 양공주의 삶은 현실성을 획득하지 못한 측면이 크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장길수 감독의 <은마는 오지 않는다>에 와서야 비로소 양공주의 삶이 현실성을 어느 정도 확보했다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초반 권위주의와 가부장제의 단단한 문화적 결합이 독재정권의 몰락과 함께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고 그동안 침묵했던 타자들의 출현을 알리면서 해방의 길을 모색하던 때 당도한 이 영화는, 한국전쟁과 아메리카니즘의 거친 파도 속에서 그동안 잠자고 있던 타자들의 삶을 증언하는 대표적 작품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그레이스 M. 조는 책 Haunting The Korean Diaspora (2008)에서 ‘양공주는 단지 죽거나 감상적으로 과거를 일깨우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현재에 생산적이고 강력한 힘을 제공하는 유령적 존재’라고 주장한다. [8] 실제로 양공주로 오랫동안 침묵 당한 삶을 산 어머니를 둔 그녀에게 양공주는 잊힌 과거를 현재로 다시 불러오는 주체적 존재들이다. 문화적 차원에서 양공주에게 다시 목소리와 생명을 부여하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고, 그레이스 M. 조의 연구와 저서들은 이를 위한 후속 세대의 끈질긴 노력과 열정을 대표적으로 잘 보여 준다. 그 과정에서, 잊힌 자들의 목소리는 조금씩 ‘증언’의 옷을 입고 우리 곁에 당도하고 있다. 그리고 <은마는 오지 않는다>야말로, 이러한 문화적 실천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사진: 영화진흥위원회 (© 학교법인 동국대학교) *** [1] “방화 <은마는 오지 않는다> 몬트리올 영화제 2부문 수상”, 《동아일보》, 1991. 9. 3. [2] “인터뷰 몬트리올 영화제 각본상 수상 영예 장길수 감독 ‘방화 문제의식 세계 수준’”, 《경향신문》, 1991. 9. 4. [3] “『은마는 오지 않는다』의 언례에게/안정효 전쟁과 폭력의 희생양이었던 한국 여인 모습 알리려 했소”, 《동아일보》, 1996. 4. 30. [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한국전쟁과 사회 구조의 변화』, 1999, 41쪽. [5] 김학재 외, 『한국현대 생활문화사 1950년대』, 창비, 2016, 71쪽. [6] “Books of The Times; Korean’s Novel Is Anti-War But Anti-American”, The New York Times , 1990. 2. 21. [7] “<개벽>, <은마는...>, <산산이부서진...>, 세계 영화 시장 ‘노크’”, 《조선일보》, 1991. 2. 22. [8] Grace M. Cho, Haunting The Korean Diaspora , University of Minesota Press, 2008, p. 18. 한영현(세명대학교 교수, 영화연구자) l 한국영화사에 관심을 가지고 주로 전후 영화 작품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한국영화학회 편집위원과 학술이사, 《현대영화연구》 편집위원, 영상문화지평연구소 편집위원장 등 역임. 『냉전의 시대, 유랑하는 타자들: 한국 영화에 나타난 타자성의 문화 정치』(2022), 「생명⋅기술⋅공간의 삼중주: 봉준호 감독 <미키17>(2025)을 중심으로」 등 집필. 『글로컬 시대의 한국영화와 도시공간』(2018) 등 공동 집필.
사진: “ Frankenstein ”, IMDb (촬영: Ken Woroner, Netflix / © 2025 Netflix, Inc.) “생물학, 북극의 얼음, 동물의 살점, 알프스의 풍광, 채식주의, 생과 사, 언데드. 당신은 메리 셸리의 소설이 이런 맛깔나는 주제들을 다루고 있기에, 이 작품에 대한 생태비평이 수백 편쯤 제출되었으리라 예상할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티모시 모턴은 2016년 “『프랑켄슈타인』과 생태비평”에서 이렇게 썼다. 그는 지난 20년간 발표된 약 2천 5백여 편에 달하는 관련 비평에서 생태학을 명시적으로 다루는 작업은 1%에 불과하고, 그나마도 주변적이라고 평가한다. 최근 ‘인류세’ 담론이 대중화되면서 이런 판도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지만, 이 위대한 고전에 대한 생태적 관심은 여전히 부족하다. 어쩌면 가장 흥미로운 생태비평은 지면이 아니라 스크린에서 구현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나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 프랑켄슈타인 >(2025)을 떠올리고 있다. 2025년 겨울,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최신작에서 델 토로는 셸리의 원작에 내재되어 있는 생태적 관점을 적극적으로 끌어내 자신의 방식으로 재해석했다. 여기서 생태적 관점이란 단순히 기후재난이나 생태위기 등의 문제를 다룬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건 문명과 자연,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비(非)생명적인 것 사이에 그어져 있는 허구적 경계를 질문하고 폭로함으로써 문명적인 것의 폭력성을 성찰한다는 의미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생명을 잃고 한낮 물질로 ‘전락’한 시체의 생기 없는 신체 조각들로부터 ‘피조물’을 창조했다. 누더기처럼 짜깁기한 피조물의 몸은 생명과 비생명 사이에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을 체현하는데, 사실 그 자체가 생명에 대한 사실이다. 생명과 비생명 사이에 명확한 경계란 것은 없다. 예컨대 바이러스는 동물의 생을 가능하게 하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한다. 바이러스는 생명인가 비생명인가? 모턴 식으로 말하자면 어떤 의미에서 모든 생명체는 이미 “좀비”다. 사진: “ Frankenstein ”, IMDb (촬영: Ken Woroner, Netflix / © 2025 Netflix, Inc.) 빅터가 피조물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피조물이 생명과 죽음의 경계를 드러내는 임계점, 즉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불쾌한 골짜기 역시 인간과 비인간, 정신과 물질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근대적 사유가 빚어낸 허상이다. 이런 이분법적 세계관이야말로 인간이 ‘자연’, 즉 ‘대상’으로 규정한 것들에 대한 무한한 착취를 가능하게 한다. 모턴은 불쾌한 골짜기가 확장되면 비로소 ‘유령적 평원(spectral plain)’이 열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생태적으로 각성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물론 이 주제는 델 토로보다는 셸리가 더 잘 다루고 있다. 피조물에 대한 빅터의 혐오를 매우 세밀하게, 기이한 열정을 담아, 반복적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델 토로는 피조물을 지나치게 아름답게 재창조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를 숭배하게 만든다. 피조물의 피부는 유약을 바른 것처럼 반짝이고, 봉합선은 괴물성이 드러나는 벌어진 틈새라기보다는 공들여 세공한 예술작품 같다. 그는 선하고 서글픈 눈매를 한 패셔니스타다. 델 토로의 피조물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고귀한 타자로서 우리에게 불쾌함의 작은 조각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화려한 미장센에 접붙여진 피조물의 아름다움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지만, 생태비평의 관점에선 가장 큰 약점이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여전히 생태비평의 관심을 견지하고 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자면 피조물은 단지 소외된 타자가 아니라, 인간이 인식과 통제의 대상으로 삼으려 했으나 끝내 실패한 어떤 생태적 실재에 대한 의인화로 읽히기도 한다. 이는 델 토로의 작품 목록 안에서 견지되어 온 파시즘 비판의 연장선상에서 논해질 수 있다. <셰이프 오브 워터>,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 중 사진: “ The Shape of Water ”, “ Guillermo del Toro’s Pinocchio ”, IMDb (© 2017 Twentieth Century Fox Film Corporation / © 2022 Netflix, Inc.) 델 토로는 < 악마의 등뼈 >(2001)와 < 판의 미로 >(2006) 등의 인상적인 초기작에서부터 전쟁이 세계를 어떻게 파괴하는지, 특히 아이들의 생을 어떻게 박탈하는지 강변해 왔다. < 셰이프 오브 워터 >(2017)와 <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 >(2022)에서는 이 문제의식이 생태적인 것으로까지 확장된다. ‘물고기 인간’은 다른 어떤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말살당하고 있는 아마존의 생태적 타자성에 대한 은유로서 등장했고, ‘피노키오’는 숲의 정령의 생기를 나눠 받은 ‘기물(器物)’로서 인간의 얇고 가벼운 시간을 넘어 심원한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였다. 이제 <프랑켄슈타인>에 이르면, 세계에 대한 이해를 세계에 대한 지식으로, 세계에 대한 지식을 세계에 대한 정복으로 이해했던 북반구 근대주의자들의 탐욕과 광기가 어떻게 전쟁 및 자연에 대한 식민화와 분리 불가능하게 연루되어 있는지 노골적으로 비판한다. 이 관심사는 엘리자베스 캐릭터를 통해서 다루어진다. 그는 강인하고 우아한 사마귀처럼 스크린을 활보하면서, 원작과 이 작품이 가장 극적으로 달라지는 부분을 담당한다. 셸리는 엘리자베스를 빅터의 고귀한 사촌이자 지고지순한 연인으로 묘사했다. 델 토로는 엘리자베스에게서 순정을 지우고 일종의 매개자(medium)로서의 자질을 더했다. 이성과 과학, 정복의 언어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자연’과 만날 수 없는 빅터와 달리 엘리자베스는 세상의 “가장 작은 것들, 자연의 흐름에 따르는 존재들”의 다채로운 모양과 빛깔에 감응하는 자다. 그가 곤충학에 조예가 깊은 이유다. 피조물은 근대적 지식의 격자 속에서 탄생했으나, 그 격자로는 충분히 포착될 수 없는 존재다. 인간의 스케일을 초과하는 생태성을 그 뿌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는 근대적 이성과 비인간적 감응 사이에서 진동하는 자이기 때문에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그는 피조물의 동선을 따라 펼쳐지는 ‘유령적 평원’의 유일한 목격자다. <프랑켄슈타인> 중 엘리자베스 사진: “ Frankenstein ”, IMDb (촬영: Ken Woroner, Netflix / © 2025 Netflix, Inc.) 엘리자베스는 확신에 찬 반전평화주의자이기도 하다. 그는 생과 사를 정복하겠다는 꿈이 얼마나 탐욕스러운 것인지, 그것이 어떻게 세계를 파괴하는 전쟁과 연결되어 있는지 이해하고 있다. 빅터와의 첫 식사 자리에서 전쟁과 빅터의 야망을 비교하면서 “어리석은 자들이 이상을 품었을 때” 벌어지는 비극이며, “그 비극을 부추긴 자”들은 죽음 앞에서 “모르는 척한다”라고 분노하는 이유다. 델 토로의 피조물은 피노키오의 또 다른 판본이다. 인간(혹은 아버지)의 목적을 위해 조립되었지만, 그 총합은 인간의 의도로 환원되지 않는다. 다만 델 토로는 언제나 이 ‘기물’들에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선한 마음을 부여한다. 델 토로의 아름다운 판타지 월드의 또 하나의 한계는 어쩌면 이런 선량한 마음일 지도 모른다. 자연이란 그렇게 인간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제임스 러브록의 경고처럼 ‘가이아’는 자신의 시스템을 망치는 존재를 오작동으로 인식하는 냉정한 피드백 루프임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손희정(문화평론가) l 미디어 그룹 '프로젝트38' 멤버.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2024)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