닿을 수 없는 곳
- 감독
- 김재원
- 제작년도
- 2009
- 출연
- 최현, 이선주, 조덕제, 송예림, 정철식, 김준원, 배윤범, 류장하, 허정, 이미경, 홍교진, 김지욱, 이종필
<Fly To You> 중 '실사'에 드리운 한계를 넘으면 비로소 선명해지는, 영화가 낳은(을) 새로운 감각과 지형을 발견합니다. 영화관 좌석에 앉은 우리는 언제나 안전했다. 스크린에 투영된 타인의 삶을 바라보며 울고 웃었지만, 결코 그 세계에 직접 발을 디딜 필요는 없었다. 이 거리는 영화가 관객에게 선사한 가장 큰 선물이었다. 충분히 가깝지만 위험하지 않고, 몰입할 수 있으면서도 끝내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미묘한 간격. 그러나 VR(Virtual Reality)은 이 오래된 약속을 파기한다. 더 이상 관찰자로서 멀리 떨어져 세계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은 눈앞의 세계를 보다 근접한 위치에서 마주하고 움직이며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어두운 극장 좌석에 고정돼 있던 신체는 풀려나고, 그 자유도와 함께 물리적·심리적 거리도 좁혀진다. 관객은 적극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주체적으로 이야기에 참여한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진보가 아니라 영화 문법 자체의 근본적 재검토를 요구하는 전환이다. 몽타주는 어떻게 가능할까? 클로즈업의 의미는 무엇으로 대체될 수 있을까? 그리고 전통적인 영화적 연출 방식은 VR 공간에서 어떻게 재구성될 수 있을까? VR은 전통 영화가 구축해온 ‘거리’의 미학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게 만든다. 카메라와 피사체, 관객과 세계 사이의 간극은 단순한 물리적 배치가 아니라, 심리적·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장치로 다시 작동한다. 필자가 2020년에 연출한 < Rain Fruits >(2020)는 미얀마 출신 이주노동자 뚜라(Thura)의 글을 각색한 VR 영화다. 그는 엔지니어의 꿈을 품고 한국에 왔지만, 한국의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소외와 좌절을 겪는다. 영화는 그의 작은 방 안에서, 어릴 적 고향 땅의 비과일 [1] 을 떠올리며 한국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이 작업의 핵심은 단순한 이야기의 재현이 아니라, 이방인이라는 조건을 관객이 VR 공간에서 몸으로 체현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좁은 원룸, 단조로운 작업장, 빠르게 흘러가는 도시의 사물들은 포인트 클라우드(Point Cloud)라는 비주얼을 통해 VR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관객은 더 이상 스크린 뒤의 관찰자가 아니라, 인물의 곁에 있지만 결코 중심에 서지 못하는 위치에서 경험을 공유한다. <Rain Fruits> 중 연출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고민은 관객의 첫 위치와 시선을 어디에 둘 것인가였다. 위치와 간격의 설계는 곧 인물이 느낀 사회적 거리감과 맞닿는다. 전통적 영화라면 클로즈업이나 몽타주로 처리했을 장면들을, VR에서는 공간 자체를 재편하여 체험하게 했다. VR에서는 관객의 시선이 곧 컷이 되고 카메라가 되기 때문에, 촬영 단계부터 그 위치를 찾는 작업에 공을 들였다. 원룸 장면에서 인물의 공간을 인위적으로 좁게 분리하거나, 먼지처럼 사라지는 공간과 인물의 트랜지션은 단순한 공간의 재현을 넘어 주인공의 심리적 고립감을 시각화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이어서 파편화된 포인트 클라우드 공간과 흰 선으로 절단된 주인공의 신체는, 그가 한국 사회에서 겪는 소외와 이곳에 속하지 못한다는 감각을 드러낸다. 이와 같은 표현을 통해 관객은 자연스레 ‘나는 어디에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 뚜라는 결국 원룸에서 어린 시절 고향의 비과일 숲을 꿈꾼다. 이 장면은 물리적 거리와 심리적 거리가 겹치는 지점에서, 그가 무대 위의 주인공인지 아니면 스쳐 가는 객체인지 스스로 되묻게 하는 장치다. 나아가 이러한 ‘거리’의 연출은 인물을 더욱 고립시키며, 관객 또한 그의 공간에 함께 있으면서도 무기력하게 머물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이 작업을 통해 VR에서 이야기를 단순화할 필요성을 깨달았다.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진 만큼 시각 정보가 압도적으로 다가왔고, 불필요한 청각 정보는 오히려 몰입을 방해했다. VR에서는 거리와 위치, 그리고 정보량의 균형이 새로운 연출의 핵심이라는 점을 실감했다. <Rain Fruits> 중 2024년에 연출한 <Fly To You>는 이산가족의 이야기를 VR 다큐멘터리로 풀어낸 작업이다. 제목처럼 ‘당신에게 날아가고 싶은’ 열망을 가상 공간 속에서 구현하며, 작품은 하나의 근본적인 질문에서 출발한다. VR에서 관객은 물리적 거리를 뛰어넘어 현존감을 경험하지만, 동시에 그 이상의 접촉을 허락하지 않는 매체의 한계와 마주한다. 결국, 당신에게 다가갈 수는 있지만 결코 만질 수 없는 존재로서, 주체성을 상실한 체험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이산가족이라는 소재는 물리적인 이동보다 개인적인 그리움과 연결에 대한 근본적 욕망을 의미한다. VR이라는 매체가 갖는 가장 큰 역설, 가상적 연결을 통해 오히려 현실의 고립감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을 탐구하고자 했다. 실제 이산가족 당사자인 ‘강송절(88세)’의 개인적 기억을 더듬으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지금은 결코 닿을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현실 속에서 박제된 듯 머물러 있는 자신의 현재가 대비된다. 이를 위해 입체감이 없는 360도 비디오로 그녀의 박제된 현 상황을 역설적으로 표현했다. 반면 그녀와 멀린 떨어진 고향 땅은 3D 오브젝트로 표현하여 보다 입체적이고 자유로운 존재로 묘사했다. <Fly To You> 중 관객은 두 물리적 공간, 즉 현실의 강송절 할머니가 있는 남한과 과거의 북쪽 고향 땅을 각각 체험하며 심리적인 거리감과 기억의 거리를 경험하게 된다. 관객은 자유로운 비행을 통해 공간적 제약을 극복하지만, 동시에 그 자유로움이 얼마나 허상인지를 깨닫게 된다. 아무리 빠르게, 아무리 멀리 날아가더라도 결국 도달하는 것은 또 다른 가상공간일 뿐이다. 이번 작업에서 특히 주목한 것은, 현실에서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남북의 철책선을 관객이 잠시나마 넘어보는 경험이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VR에서는 NeRF 기술을 통해 그 경계를 건너는 체험을 구현할 수 있었다. 철책선은 360도 카메라로 촬영하고, 그 너머의 보이지 않는 공간은 ‘NeRF Studio’의 AI 기술을 통해 재구성했다. 그 결과 관객은 실제로는 닿을 수 없는 강송절의 바람이 꽃잎으로 흩날리며 철책선을 넘어오는 순간을 함께 경험하게 된다. 이 체험은 ‘너에게 간다’라는 말이 단순히 물리적 경계를 넘는 행위가 아니라, 심리적 그리움의 장벽을 건너는 일이며, 오랜 시간에 걸쳐 쌓아 올려야 하는 마음의 길임을 깨닫게 한다. 관객이 허공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때, 역설적으로 VR 헤드셋에 갇혀 있는 자신의 몸을 의식하게 된다. 이러한 이중적 체험이야말로 VR 매체가 제공할 수 있는 독특한 미학적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철책선을 넘는 순간 관객은 기존의 스크린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고개를 다양한 방향으로 회전하게 된다. 그 순간 타자와의 연결이 더욱 부각되고 관객은 그리움을 체험하며 주인공이 느낀 심리적 소망을 간접적으로 경험한다. 이 역시 순간적이며 역설적이게도 먼지처럼 사라지고 말지만, 그 순간의 경험은 또 다른 마음의 거리를 체험하게 하는 장치로 존재한다. <Fly To You> 중 이 두 작업에서 탐구한 것은 VR이라는 매체에 내재한 ‘거리의 간극’이었다. 물리적으로는 몰입했지만 심리적으로는 멀리 떠 있는 상태, 혹은 그 반대의 순간들. 이러한 간극은 VR의 한계가 아니라 새로운 감정의 가능성이다. 의도적으로 관객의 상호작용을 제한해 역설적으로 자유로워진 VR 공간에서 ‘할 수 없음’이라는 무력감을 드러내고자 했다. 관객은 자유롭다고 느끼지만 결국 정해진 위치와 시선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 제약 속에서 주인공의 소외와 단절을 공감하게 된다. 영화가 스크린을 통해 관객과 세계 사이에 거리를 만들었다면, VR은 그 거리를 해체한다. 하지만 모든 경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른 형태의 경계가 만들어진다. 관객은 자유롭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몸으로, 그리움과 소외의 거리를 체험한다. VR 연출의 모험은 이 새로운 경계들을 창조적으로 활용하는 데 있다. 현실을 모사하는 대신, VR만의 거리와 리듬을 통해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영화는 언제나 기술과 더불어 진화해왔다. VR 역시 그 연속선 위에 있다. 그러나 이번 변화는 단순히 도구가 바뀌는 차원을 넘어, 우리가 ‘영화적’이라 불러왔던 모든 것의 근본적 재검토를 요구한다. 앞으로 더 많은 실험을 통해, VR에서만 피어날 수 있는 고유한 언어를 발견해야 한다. 그 언어는 아마도 ‘거리’를 전혀 새롭게 정의하는 것에서 시작될 것이다. *** [1] 비가 온 뒤 과일 위에 내려앉은 빗방울을 그린 시적 표현으로, 과거 한국문화정책연구원 월간지 《월간 너울》에 뚜라가 게재한 글 「북쪽 섬에서 나를 찾는다」에 나타난다. 송영윤(영화감독) l 이해되지 않는 마음을 붙들며 하루를 살아가는 영상 작업자. 장편 다큐멘터리 < 사막을 건너 호수를 지나 >(2019) 공동 연출, VR 영화 < Rain Fruits >(2020), VR 다큐멘터리 <Fly To You>(2024) 연출.
< 윤희에게 >는 서간체 형식의 영화다. 오타루에 사는 수의사 쥰(나카무라 요코)의 고모 마사코(키노 하나)는 조카가 부치지 못하고 책상에 놓아둔 편지를 몰래 우체통에 넣어준다. 아마도 그 편지는 오래 그 책상 위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고모는 ‘Yun Hee’라는 수신자의 이름을 쥰을 대신해 불러준다. 그리고 그 편지는 윤희(김희애)의 딸 새봄(김소혜)이 제일 먼저 발견하게 된다. 쥰과 윤희의 호명과 응답은 각자의 자리에서 반복해 불리고 쓰였지만 오랫동안 상대방에게 가닿을 수 없는 환경에 있었다. 마사코와 새봄은 하염없이 눈이 내리는 오타루의 겨울에 20년 넘게 만나지 못하던 쥰과 윤희가 재회할 수 있는 세계의 조건을 만들어 간다. <윤희에게>의 눈 내리는 하얀 오타루, 가닿지 못한 안부 묻기, 부치지 못하거나 잘못 도착한 편지, 필름사진, 상실의 감각, 오래 간직한 사랑은 어쩔 수 없이 < 러브 레터 >(이와이 슌지, 1999)의 노스텔지어를 떠올리게 한다. 상실한 것으로 회귀하려는 운동은 과거에의 고착과 언뜻 구분되지 않을 수 있다. <윤희에게>는 분명 오래 전에 떠나보내야 했지만 그럴 수 없었던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그린다. 그러나 <윤희에게>는 비록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서로의 편지에 응답하면서 쥰과 윤희 모두가 과거에 머물지 않고 성장의 한 걸음을 내딛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보내고 받는 것에 시차가 발생하거나 어긋날 확률이 높은 편지, 촬영 속도가 늦고 인화의 과정이 필요한 오래된 필름 카메라, 오해가 발생하거나 이해가 늦을 수 있는 일본어와 한국어의 번역과정은 단순히 아날로그적인 노스텔지어의 감성을 부추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쥰과 윤희는 어린 시절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가족에 의해 강제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가족의 폭력은 사랑의 실패를 넘어서 자신의 욕망과 정체성을 부인당하는 삶을 살게 했다. 윤희는 가족에게 ‘쥰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한 이후 정신병원에 갇히고 이른 나이에 오빠 친구와 반강제로 결혼한다. 사진 찍기를 좋아했지만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대학도 가지 못한 윤희에게 엄마는 카메라를 선물한다. 새봄은 그러한 엄마의 서사를 모른 채 엄마의 오래된 필름 카메라로 풍경과 사물 사진을 찍는다. 카메라는 뒤늦게 새봄에게서 제 정체성을 찾는다. 이렇게 뒤늦은 시차의 발생이야말로 한국의 퀴어한 시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윤희는 자신의 욕망을 부인당한 후 자신을 고립시키면서 주변 사람들도 외롭게 만든다. 그는 소통의 가능성을 닫는다. 쥰은 윤희에게 쓴 편지를 매번 부치지 못하기 때문에 편지의 시작을 동일한 내용으로 반복할 수밖에 없다. 윤희는 자신의 세계 내에 누구도 들이지 않으려는 고집스러움을 온 몸으로 외치고, 쥰은 성적 정체성과 한국·일본 혼혈이라는 국적 정체성을 가능한 숨기며 안으로 파고든다. 둘의 시간은 제자리에서 맴돈다. 부인당한 욕망과 정체성은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다. 윤희의 아버지와 오빠는 윤희의 삶에 폭력적으로 개입하고 통제하려 들고 쥰의 아버지는 냉담함으로 일관한다.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선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는 옛 말처럼 ‘두 사람이 만나려면 공동체의 지지와 포용적 환경이 필요하다.’ 로맨스는 개인적이거나 이자적인 것이 아니다. 윤희와 쥰은 가부장 남성들 때문에 헤어졌지만, 새봄과 마사코라는 또 다른 가족이 꾸며준 조건 속에서 재회한다. 윤희와 쥰은 가부장들과 결별을 선언하고 나서야 새로 시작할 기회를 얻는다. 폭력적 상황은 어긋나고 도달하지 못한 소통과 시차를 만든다. 하지만 마사코와 새봄이 만든 삐끗한 송수신과 시차가 또한 둘을 재회하게 만든다. 마사코는 쥰의 편지를 대신해 부치고 새봄은 그 편지를 받고 오타루로 엄마를 데리고 여행을 온다. 영화사적으로 보면 이 영화는 제작 및 개봉 기록이 남아있는 한국 최초의 레즈비언 영화라 알려진 < 질투 >(한형모, 1960)의 한참 늦은 응답 혹은 후일담처럼 여겨진다. 현재 <질투>는 필름 프린트는 소실되었고 시나리오만 확인 가능하다. <질투>에서 동성애자인 재순(문정숙)은 의붓 여동생 금이(전계현)를 좋아하고 둘은 실제로 연애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금이가 남자를 만난 후 재순의 욕망은 금이를 포함해 모두에게 부정 당한다. 재순의 욕망은 한국 전쟁 중 당한 성폭행으로 인한 남성혐오로 인한 부작용으로 취급되고 결국 정신병원에 갇혀 교정치료를 받는다. 당당하고 논리적으로 제 할 말 다하던 재순은 결말 장면에서 병원에서 나오며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꿈에서 깬 것 같다”고 말한다. 기이할 정도로 급작스럽고 밝게 묘사되는 이 장면에서 텅 빈 인형처럼 묘사되는 재순은 거의 공포영화의 주인공 같다. <윤희에게>에서 윤희는 재순처럼 정신병원에 가지만 살아남는다. 그리고 다른 가족들의 도움으로 쥰을 재회한다. 한편, 2000년대 < 연애소설 >(이한, 2002), < 주홍글씨 >(변혁, 2004). < 끝과 시작 >(민규동, 2009) 같은 영화들에서 여성 동성애 로맨스는 이성애 로맨스에 앞선, 10대의 원초적이고 순수했던 과거의 기억으로 고착화 된다. 그러나 결국 동성애 로맨스는 이성애 로맨스에 포획되고 봉합되며 과거의 것으로 영원히 남는다. <윤희에게>는 과거에서 맴도는 시간에서 벗어나 그 다음을 상상한다는 점에서 이전 영화들과 다르다. 이 영화 전체의 형식이기도 한 편지는 이름을 부르면서 시작한다. ‘윤희에게’ ‘쥰에게’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중요하다. 임대형 감독은 한 시상식에서 이 영화는 분명히 ‘퀴어영화’라고 호명하기도 했다. 하나의 단일하고 고정된 정체성을 가정하는 것도 문제지만, 이름 부르기를 두려워하고 뭉개는 것 또한 소수자들을 배제하는 방법이 될수 있다. 차별금지법의 제정조건으로 자꾸 ‘성소수자’라는 이름을 빼려는 시도들처럼 말이다. 늦었지만 이름을 부르고 그에 응답해야 한다. 새로운 퀴어 시간성을 만들어야 한다. 한국 영화사에서 퀴어영화라 불릴 수 있는 영화들은 많지 않다(물론 ‘퀴어영화’라는 범주는 여전히 많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한국영화에서 작품성과 대중성을 고루 갖춘 퀴어영화가 나오려면, 두 사람이 만나기 위해서 공동체가 노력하고 바뀌어야 했던 것처럼 수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차별금지법도 그러한 조건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 현실과 영화는 거리가 있지만 또한 서로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영화는 당장 가시적으로 현실에 보이는 것 이상을 표현할 수 있다. 영화는 잠재된 현실, 보이지 않고 가려진 현실, 환상성, 꿈을 그려낼 수 있다. 쥰과 윤희가 각자의 꿈에서 잊지 않고 만나왔던 것처럼 말이다. (관련글) 1. 소진과 이상한 기운 - <아워 바디>(2018), 2021.04.23. 2. 의심의 씨앗과 취약한 영웅들 - <도희야>(2013), 2021.05.21. 3. 여름밤 초록색 전구불빛이 가만히 당신을 응시할 때 - <남매의 여름밤>(2019), 2021.06.18. 4. 당신의 안녕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 <내가 죽던 날>(2019), 2021.07.16. 5. 피해와 가해의 알레고리 - <소리도 없이>(2019), 2021.08.13. 6. 돌봄의 정동 - <우리집>(2019), 2021.09.10. 7. 유년과 재난 - <벌새>(2018), 2021.10.22. 8. 목격의 시간 - <휴가>(2020), 2021.11.19. 9. 한평생 이야깃거리가 된 삶을 찢고 나온 웃음소리 -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2019), 2021.12.17. 10. 이름을 불러 닿는 시간 - <윤희에게>(2019), 2022.01.14. 11. '혼자'의 정동 - <혼자 사는 사람들>(2021), 2022.03.15. 12. 억압의 체제와 닫혀있는 여자들의 세계 - <궁녀>(2007), 2022.04.13. 13. 소원성취, 환상, 실재 사이의 어딘가에서 - <팬지와 담쟁이>(2000), 2022.05.18. 14. 몫과 값 그리고 경계물 - <82년생 김지영>(2019), 2022.06.24. 15. 실종의 감각과 징크스의 미학 - <오마주>(2022), 2022.07.21. 16. 레즈비언 편집술, 혹은 시계가 된 여자 - <연애소설>(2002), 2022.08.19. 17. 탐정-엄마의 각성하는 모성 - <비밀은 없다>(2016), 2022.09.16. 18. 시간과 정념의 지층을 찾아서 - <누에치던 방>(2018), 2022.11.04. 19. More or Less - <모어>(2021), 2022.12.09. 20. 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 <안나-감독판>(2022), 2023.01.09. 21. 우리에겐 따뜻한 국물과 유머가 필요하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2023.02.07. 22. 아직 끝나지 않은 - <미망인>(1955), 2023.03.10.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일하며 첫 번째 장편 영화를 만든 감독들의 영화를 보는 귀한 시간을 가졌다. ‘발견’이라는 단어의 뜻에 충실한 영화로 손모아, 안정연 감독의 데뷔작 < 가만한 >(2020)을 말하고 싶다. ‘움직이지 않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는 상태에 있다’라는 ‘가만하다’는 이 영화를 설명하는 오롯한 형용사이자 영화의 주인공 준서( 박수연 )의 상태이며 그것을 바라보는 이 영화의 핵심적인 태도의 말이기도 하다. 준서는 음악을 사랑하는 아이였다. 예고를 졸업하고 음악대학에 진학해 피아니스트가 되길 꿈꿨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유인지 알 수는 없지만 준서는 꽤 오랫동안 피아노를 칠 수 없는 상태다. 손가락은 굳어 쉬이 움직이지 않고, 그 가만한 손을 내려다보는 준서의 얼굴은 표정을 잃었다. 마음에 웅숭그린 발화되지 못한 말을 끄집어내기보다는 적요한 침묵 속에서 자신의 손을 바라보는 일이 잦은 준서다. 굳어버린 건 손가락이기보다는 준서의 마음일 것이다. 영화는 준서가 한동안 떠나 있던 음악대학을 다시 찾아 그곳 학생이 아니라 임시 행정 조교 일을 하겠다고 결심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가만한>에서 우리는 준서의 존재보다도 더 크게 바흐와 쇼팽을 비롯한 클래식 피아노 선율의 존재감을 보고, 듣고, 느끼게 될 것이다. 음악은 준서를 떠나지 않는다. 준서가 학교에서 피아노과 학생들을 보조하며 그들의 연주회를 준비할 때든, 강박적으로 피아노 연주에 몰두하는 편입생 수미(이화원)를 지켜볼 때든, 어째서 피아노를 치지 않는 거냐며 속상해하는 엄마( 오민애 )의 공간에 있을 때든 음악은 필수 불가결한 공기처럼 화면을 채우고, 흘러들어오고, 스며든다. 때론 먼 곳에서 누군가의 연주인지로 모를 음악이, 때론 지근거리에서 준서의 마음을 울리는 음악이 준서와 그녀의 공간, 나아가 이 영화 전체를 감싸 안는다. <가만한>에서 음악은 서사를 보완하기 위한 장치도, 분위기를 만드는 요소도 아니다. 이곳의 음악은 이미 오래전부터 준서였고, 지금의 준서이기도 하고, 앞으로의 준서를 예견하는 준서의 세계 그 자체다. 다시 쓰면, 음악이 준서를 떠나지 않는 게 아니라 준서가 음악을 떠날 수 없고, 떠나지 않는다. <가만한>은 준서의 굳은 마음의 상태가 해빙의 과정을 거치는 시간을 따른다. 이때의 해빙이란 결코 어떤 결론이나 해결을 전제하고 진행되는 게 아님을 기억하자. 그저 다른 방식으로 음악을 받아들이고 음악 안에서 살며 음악을 계속해가기 위한 분투, 다르게 음악을 사랑하려는 준서의 상태의 변화를 말한다. 미묘한 점진을 구현하는 이 영화의 방식은 일관되고 그 자세 역시 의연하다. 우리는 <가만한>에서 준서의 얼굴보다 훨씬 더 많이 그녀의 등과 뒷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상대방의 액션에 따른 준서의 감정의 리액션 쇼트를, 스펙터클한 얼굴의 세계가 아닌 준서의 가만한 등의 액션과 리액션을 더 유심히 봐야 하고 그곳에서부터 감응은 시작된다. 뒷모습이 보이는 조용하고 은은한 떨림과 부동에서 얼마나 더 많은 이야기가 전해질 수 있는가를 영화는 설득해내고 싶어 하고 또 설득해낸다. 반대로 몇 안 되는 순간이지만 카메라가 오직 준서의 얼굴만을 미동도 없이 똑바로 응시할 때가 있다. 카메라 너머에는 준서가 더는 가닿을 수 없는 음악의 세계가 있거나 더는 함께할 수 없는 불화하는 세계가 있다. 준서의 세계 이쪽과 저쪽이 완벽히 분리되는 순간을 이토록 정확하게 목격하게끔 할 때 우리는 또 다른 의미에서 감정의 파고를 경험할 것이다. 한편 영화는 이것만은 차마 볼 수 없다고, 보지 않아도 충분하다고 단호하게 자신의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가만한>의 카메라는 대부분 고정돼 있지만 몇 차례 움직임을 보여줄 때가 있는데 그중 하나의 장면을 말하려 한다. 준서가 연습의 압박에 시달리다 손에 마비가 온 수미를 발견했을 때다. 카메라는 인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수미가 마비된 제 손을 주무르고 그 곁으로 준서가 다가가는 순간까지를 보여준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수미의 얼굴로는 이동하지 않기로 한다. 굳이 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고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이. 대신 <가만한>은 인물이 떠나고 난 공간을 더 오랫동안 바라보고 싶어 한다. 구체적인 그 장소는 조금 전까지 있었던 인물들의 움직임이 남긴 진동과 여진을 기억할 것이다. 사람은 가고 없어도 그들이 있었던 곳에는 여전히 음악이 흐르고 매미와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고 새들의 지저귐이 있고 빛과 그림자가 함께할 것이다. 그 소리와 빛은 마음 한구석을 아릿하게 할 만큼 애틋하다. 부동 속에서 감지되는 미약한 흐름과 정동이 빚어낸 감흥일 텐데 그것은 봐야만 하는 것과 볼 수 없지만 들리는 것 사이에서 음악이 계속되듯, 준서의 삶도 계속되리라는 귀한 긍정을 목격하며 오는 것이기도 하다. 과격한 사건과 극적인 반전 혹은 자극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한 감동이 있음에 새삼 안도한다. 각본을 쓴 안정연의 사려 깊은 시선과 촬영을 맡은 손모아의 미더운 앵글이 가져다준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