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국토대장정(나를 넘어 우리가 되기까지)
- 제작년도
- 2003
비장의 OST가 연재되고 거의 십년이 지나 시즌2를 앞둔 지금, 많은 것이 바뀌었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의례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코로나라는 팬데믹 상황으로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던 극장가와 더불어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OTT의 약진은 문화산업의 지형도를 크게 변화시켰다. 하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영화들은 제작되고 있고, 새로운 감독들과 스타들도 어김없이 탄생한다. 영화음악도 마찬가지. 돌아오는 비장의 OST 시즌2에선 이제 막 신인의 티를 벗고 활발히 활동하는 젊은 영화음악가들에게 눈을 돌려, 그들의 비장의 OST들을 소개해보려 한다. < 클로버필드 10번지 >의 독특한 점은 영화에 참여했던 그 어떤 누구도 이 영화가 8년 전 깜짝 히트한 파운드 푸티지 방식의 ‘클로버필드’ 프랜차이즈가 될 줄 몰랐다는 사실이다. 각본을 쓴 작가 조시 캠벨과 맷 스투큰, 연출을 맡은 댄 트라첸버그는 물론, 주연 배우들마저도. 할리우드에선 종종 전혀 상관없는 원작을 들고 와 속편으로 뜯어고치는 경우가 있긴 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월터 웨이저의 스탠드 얼론 소설 <58시간>은 < 다이하드 2 >가 되었고, 조너선 헨즐리가 쓴 ‘사이먼 세즈’란 각본은 < 다이하드 3 >로 탈바꿈되었다. 하지만 <클로버필드 10번지>는 영화가 제작되던 중간까지도 ‘the Cellar’라는 각본을 바탕으로 한 소규모 스릴러가 될 예정이었다. 최연소 오스카 감독상에 빛나는 데이미언 셔젤은 이 히트리스트에 올랐던 각본을 각색하며 연출까지 고려했는데, 그가 고친 부분이 바로 지상에 나온 후 펼쳐지는 뒷부분, 이른바 반전의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셔젤은 애초 계획대로 < 위플래시 >의 기회를 거머쥐었고, 댄 트라첸버그 감독에게 바톤이 넘어간 이 프로젝트는 제작자인 J. J. 에이브럼스가 클로버필드와의 연관성을 떠올리며 프로덕션 중에 세계관 확장(?)이라는 놀랄만한 방향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베어 맥크레리 이에 당황한 건 영화 촬영 전부터 참여해 후반을 앞두고 있던 영화음악가 베어 맥크레리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그는 TV쪽에서 꽤 잘 나가던 것과 달리 영화 쪽에선 호러나 스릴러, SF 등 b급 장르에서 행보를 이어온 신인에 가까웠는데, 모처럼 손 내민 파라마운트라는 메이저 스튜디오와 J. J. 에이브럼스라는 거물과의 협연은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대학 시절 할리우드 영화음악 레전드인 앨머 번스타인에게 사사 받고, 영화음악가 리처드 깁스 밑에서 견습 생활을 했는데, 리처드 깁스가 스케줄 충돌로 인해 TV시리즈 <배틀스타 갤럭티카>에서 물러나게 되자 그의 대타로 메인 음악가로 들어가게 되며 작곡가 인생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이후 <휴먼 타겟>과 < 터미네이터: 사라 코너 연대기 >, <유레카>, < 워킹 데드 >, <쉴드 오브 에이전트>, <아웃랜더> 등 손대는 작품마다 반향을 일으키며 TV시리즈 음악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과 행보를 이어왔는데, 이런 광폭적인 업자들의 인기에 대해 선수 중에 선수인 제작자 쌍제이 에이브럼스도 모를 리 없었다. 베어 맥크레리는 매주 반복되는 TV를 넘어 더 큰 스케일에 도전을 원했고, 갑작스런 클로버필드 세계관으로의 편입은 그래서 그에게 터닝 포인트가 될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 점에서 베어 맥크레리가 <클로버필드 10번지>에 온갖 정성과 야심을 갈아 넣은 건 당연했다. 자신이 좋아하던 제리 골드스미스와 버나드 허먼이라는 불세출의 영화음악가가 들려줘왔던 장르의 토대를 자양분 삼아 그는 고전 할리우드 장르 스코어가 가진 장기와 미덕이 <클로버필드 10번지>에서도 십분 발휘되길 원했다. 영화 후반이 프로덕션 과정에서 변경되긴 했어도 여전히 주된 무대가 되는 건 벙커였고, 그는 여기서 음악 색채에 대한 전체적인 모티브를 얻었다. 촬영이 진행되는 뉴올리언스의 벙커 세트장에 방문해 며칠을 보냈고, 어두운 통풍구, 답답한 콘크리트 감방, 비좁은 복도 등을 경험하며 그 공간 안에서 나올 소리들에 집중했다. 그리고 자신의 사운드 팀을 동원해 양철 쓰레기통, 환풍기소리, 전동기구 고주파, 벽돌, 유리, 톱, 체인, 징, 에어로졸 스프레이, 각종 기계 등 다양한 소리들을 채집해 샘플링하고 왜곡·변형하며 음악 전반에 효과로, 타악기로, 그리고 엠비언트로 상당수를 녹여냈다. 이 사운드 디자인이 가미된 스코어는 벙커 안에 벌어지는 세 주인공들의 불안한 심리 싸움은 물론, 벙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상황을 상상하게끔 만들며 들려주는 것보다 더 무시무시한 스코어의 확장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독특한 소리들이 <클로버필드 10번지> 스코어의 근간이 되었지만, 베어 맥크레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특별히 더 주안점을 둔 지점이 있었으니, 바로 벙커라는 공간 그 자체를 들려줄, 아니 바로 그 공간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블래스터 빔’이란 악기와 주인공 미셸의 캐릭터를 형상화하기 위해 동원된 터키의 민속악기 ‘야일리 탐부르 yaylı tambur’다. 제리 골드스미스가 <스타트렉: 극장판>에서 사용해 충격과 명성을 안긴 블래스터 빔은 페달 스틸기타를 큼지막이 확장시킨 것과 같은 대형악기(길이가 무려 3-5m에 이른다)로, 수많은 와이어가 연결된 본체를 손가락이나 막대, 활, 파이프 혹은 타피 같은 물체로 치거나 문지르거나 튕기며 연주한다. 이름만큼이나 어둡고 불길하며 환상적인 특유의 깊은 음색으로 SF나 호러 장르에서 사랑을 받았고, 제리 골드스미스의 뒤를 이어 제임스 호너가 <우주의 7인>에서, 존 배리가 <블랙홀>, 모리스 자르는 < 드림스케이프 >에서 사용하기도 했다. 그렇게 7-80년대 인기를 끌었지만 최근 20년간은 어느 영화에서도 사용된 적이 없다는 이 독특한 악기를 전면에 내세우며 새 생명을 부여했다. 그랜드 피아노나 업라이트 베이스, 콘트라 바순의 가장 낮은 음보다 훨씬 더 깊은 아래의 저음을 으르렁 울리며 저돌적으로 휘몰아치는 긴장감 넘치며 파워풀한 소리는 가히 이 스코어의 백미로, 지하라는 공간을 더 실감나게 표현하는 동시에 빠져나갈 수 없는 벙커 안에서 느껴지는 답답함과 무력감, 그리고 지상의 인류 전멸에 대한 공포심을 조장하는데 큰 일조를 한다. 반면 야일리 탐부르의 깊고 신비스러우며 풍부한 음색은 영화에서 가장 빈번하게 흐르는 ‘장조와 단조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섯 노트 주제부’와 결부되며 주인공 미셸의 미묘한 심리를 표출하는데 큰 공헌을 한다. 이 이질적이고 이국적인 소리는 모든 상황에서 도망만 다니던 피동적인 모습에서 점차 적극적으로 의지를 드러내며 위기를 극복하려는 진취적인 자세로 변해가는 성장형 캐릭터의 이중적인 면모를 담아내기에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앨머 번스타인은 영화가 시작될 때 비주얼도, 스토리도 진행되지 않을 찰라 음악만이 관객들의 모든 관심을 가질 수 있다며 영화를 대표하는 악기의 중요성을 언급했는데, 베어 맥크레리는 이 조언을 충실히 받아들여 배급사와 제작사 크레딧이 뜨는 동안 야일리 탐부르의 기묘한 소리로 연주되는 테마를 통해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성공한다. 물론 뒤로 갈수록 두텁고 큰 스케일의 관현악이 합류하고, 이른바 ‘미스터리 스트링’이라 이름 붙인 여덟 노트의 휘몰아치는 오스티나토(어떤 일정한 음형을, 악곡 전체에 걸쳐, 같은 성부에서 같은 음고로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것)가 덧입혀지며 벙커 안의 긴장감 넘치는 주도권 싸움과 탈출 과정의 빌드 업을 묘사해 가는데, 영화 내내 단 3명의 등장인물과 하나의 공간만이 나오는 단출한 구성임에도 다이내믹하며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마력을 선사한다. 오케스트레이션에도 다양한 시도와 고전적인 방식을 교차로 활용했는데, 영화 초반의 미묘한 신경전이 펼쳐지던 불안한 상황에선 현악 콰르텟 편성을 위주로 디테일한 지점 묘사에 신경 쓴다면, 중반부에 이르러선 벙커의 깊이감이나 풍부한 미스터리함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무력감을 묘사하기 위해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전혀 없는 30대의 첼로와 8대의 업라이트 베이스만 편성해 저음 위주의 공격적이고, 강력한 무게감으로 관객들을 압도한다. 그리고 지상으로 탈출을 시도하고 모든 비밀들이 밝혀지는 영화 후반에 이르러선 90인조 풀 관현악단을 활용해 전통적인 할리우드 스케일의 영화음악으로 대장정을 마친다. 새로운 시도를 펼쳤던 < 혹성탈출 >과 < 에이리언 >, <스타트렉>의 제리 골드스미스와 긴장감 넘치는 현악으로 대표되는 < 싸이코 >와 < 현기증 >의 버나드 허먼에게 경배를 바치는 이 놀라운 작업물은 베어 맥크레리를 단순한 TV시리즈에서 활약하던 일개 젊은 작곡가 유망주에서 단숨에 차세대 할리우드 영화음악을 이끌 다크호스로 평가받게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클로버필드 10번지>는 베어 맥크레리가 현재 위치까지 오게 된 초석이자 가장 야심 있고 강력한 비전을 발휘해냈던 승부수이자 비장의 OST였다. 그는 계속해서 <클로버필드 패러독스>와 < 해피 데스데이 > 시리즈, <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 > 등 메이저 영화 작업을 이어가는 동시에, <콜 오브 듀티: 뱅가드>나 <갓 오브 워: 라그나로크> 등 인기 게임은 물론, 코로나로 인해 OTT 세상이 도래한 현재 가장 비싼 드라마 중에 하나인 아마존의 <반지의 제왕: 힘의 반지>와 애플TV+의 <파운데이션>, 넷플릭스의 <위쳐: 블러드 오리진> 등 새 미드에서도 꾸준히 음악을 만들며 눈코 뜰 새 없는 활약을 보이고 있다. Track List 1. Michelle 2. The Concrete Cell 3. Howard 4. A Bright Red Flash 5. At The Door 6. Two Stories 7. Message From Megan 8. Hazmat Suit 9. A Happy Family 10. The Burn 11. Up Above 12. Valencia 13. The New Michelle 14. 10 Cloverfield Lane
#1. 1990년대에 영화의 매혹에 빠져들기 시작한 사람이라면, 정성일이라는 평론가를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내가 그를 인지하게 된 것은 잡지 「로드쇼」를 통해서였다. 잡지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편집자들의 짧은 글이 사진과 함께 실렸는데, 늘 사진 속에서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그리고 편집 후기에서는 영화보다는 음악 이야기를 더 많이 했던 거로 기억한다. 그 남자가 정성일이었다. 90년대 초, 내가 다니던 근처의 대학에서 정성일 평론가가 강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들과 몰려갔다. 강당에는 생각보다 사람들이 없었고, 객석의 반응도 그닥 열광적이지 않았다. 강연의 마지막 즈음 U2의 어떤 뮤직비디오를 보여주며 독특한 영상기법을 설명하는 대목에서조차 반응이 없었다. 그때 정성일 평론가는 치욕적인 한마디를 던졌다. 여기 오신 분들은 U2보다 김수희를 들으시나 봐요.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은 학생들은 그제야 쑥스럽게들 웃었다. 하지만 나에게 그날 밤은, 임권택 감독의 < 길소뜸 >(1985)에 나왔던 롱테이크, 신성일 이 누웠다가 일어나며 프레임에서 사라지다 들어오길 반복하는 그 장면을 충격적으로 목격한 날이기도 했다. 그 강연 이후, 몇몇 학생들은 정성일 평론가와의 뒤풀이 자리에 갔다고들 했는데 소심했던 난 그냥 기숙사로 돌아갔다. 그 후 ‘정은임의 영화음악실’이 있었고 「키노」가 있었다. 복사에 복사를 거듭해 화질이 엉망인 VHS를 보며 영화에 대한 갈증을 채우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 희생 >에 2만 5천 명의 관객이 들고, 영화 전문 잡지가 계속 쏟아져 나오던 그때로 시간은 마냥 흘러갔다. #2. KMDb 영화글의 편집자로서, ‘한국영화걸작선’에 정성일 평론가의 글을 받기 위해 수년간 연락했지만, 늘 불발되었다. 그는 거절하며 언젠가 한 감독의 작품에 대한 글 연재를 하고 싶다는 답을 해온 적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정성일 평론가는 임권택 감독의 전작 리뷰를 KMDb에서 하고 싶다는 제안을 해왔다. 그 ‘한 감독’이 임권택 감독이라는 것은 놀랍지 않았지만, 전작 리뷰 옵션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때부터 자료원 안에는 담당자들이 꾸려졌고, 정성일 평론가와 몇 번의 만남을 가지며 여러 가지 협의 및 사전 작업을 끝냈다. 현존하는 임권택 감독 영화의 리스트가 만들어졌고, 그 영화를 어떻게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도 강구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2012년 11월 5일, ‘서문’을 시작으로 이 연재는 시작되었다. 당시 칼럼 오픈 이벤트도 있었는데, 우리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 연재가 모두 끝나고 거나한 쫑파티를 하자, 그리고 이벤트에 당첨된 사람들을 그때도 초청하자는 이야기를 했었다. 당시에는 대략 4년 정도 후면 그 파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은 우리의 야심보다 빨랐다. 그 시간 속에서 처음 칼럼 제목이었던 ‘임권택x101’은 < 화장 >(2014)의 제작으로 ‘임권택x102’로 바뀌었고, 미보유 영화가 새로 발굴되어 써야 할 글이 늘어나기도 했다. 여러 인터뷰가 비평 글 사이사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바라보는 임권택 감독에 대한 이야기들이 기술되었다. 그러면서 작은 임권택의 우주는 스스로 생명을 가진 듯 점점 넓어졌다. 정성일 평론가는 매번 거대한 원고를 넘겼다. 도저히 한 호흡으로 읽히지 않아 퇴근길 전철 안에서 나머지 원고를 읽으며 때로는 탄식하고, 때로는 갸우뚱 하며, 때로는 다시 읽어야겠다며 가방 안에 원고를 주섬주섬 다시 넣었던 그 원고들을 편집하고 참조할 이미지를 준비해 온라인에 올렸다. 그리고 다음에 쓰일 영화를 인코딩했다. 그렇게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프로젝트가 어느덧 절반에 다다르고 있음을 문득 깨달았다. 이 인터뷰는 편집자인 내가 정성일 평론가에게 제안했다. 인터뷰를 통해 독자들에게 이 프로젝트를 환기시키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여전히 주요한 이유다. 독자는 인터뷰를 통해 절반이 지나간 이 프로젝트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첫 번째 장면 ‘#1’을 지나온 어떤 사람이 두 번째 장면 ‘#2’을 거치며 그저 정성일 평론가와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가, 실은 이 인터뷰 여기저기에 흩어져있음을 알아챌 독자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인터뷰이에게 말하지 않았던, 이 인터뷰의 두 번째 이유가 된다. 유성관_ 2012년 11월 5일, KMDb에서 ‘임권택x102; 정성일, 임권택 을 새로 쓰다’ 칼럼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모두 43개의 글을 연재했습니다. 그리고 그 글들은 34편의 임권택 감독 영화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지금은 35번째 영화 < 그 여자를 쫓아라 >가 업데이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칼럼을 시작했던 2012년 기준으로 현존하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는 모두 76편이었습니다만 지금은 2015년 연합영화공사 한규호 대표의 자료를 수집하면서 < 전장과 여교사 > 한 편이 더 늘어나 77편이 되었습니다. 연재를 시작하신 지 3년 5개월의 시간이 흐른 셈인데요, 이 프로젝트가 끝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그 정도의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습니다. 대략 대장정의 절반에 도달한 지금, 필자로서 간단한 소감을 듣는 것으로 인터뷰를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성일_ 무엇보다 먼저, 이건 내가 꼭 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을 가졌던 프로젝트이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하는 상충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맨 처음에 내가 제안을 했을 때도, 솔직히 이야기를 하면, 두려운 마음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유성관_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다는 그 자체의 두려움이었던 건가요? 정성일_ 그렇습니다. 시작을 한다면 끝을 봐야 한다는 것인데, 중간에 힘들다고 중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두려움이 있었죠. 일단 시작하면 나로선 많은 것들을 중단하지 않으면 계속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이 프로젝트는 영상자료원의 도움이 없이는 진행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한쪽 손으로는 (이미 진행 한) 임권택 감독의 전작 인터뷰를, 또 다른 손으로는 임권택 감독의 전작 평론을 갖고 싶다는 건, 한 사람의 비평가로서 떨치기 힘든 욕심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어떤 비평가도 한 사람에 대한 전작 비평을 쓴 적이 없었죠. 하지만 저는 이 일을 누군가 시작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이런 비평 프로젝트는, 존경해마지않는 하스미 시게히코 평론가조차도 하지 못했는데, 그도 오즈의 전작 비평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그걸 한국에서 해보고 싶었던 거였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내 배움을 검토하는 자리도 되기 때문에 내 자신에게도 매우 간절하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겁니다. 사실 맨 처음 생각으로는 3년 4개월이 지난 이 시기 즈음에는 연재가 거의 다 끝날 것으로 생각을 했죠. 하지만 진행하면서 이게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심지어는 그 과정을 통과하면서 어떤 영화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도 했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그걸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마치 하나의 생명인 것처럼, 임권택 감독의 영화 안에서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었고 이런 활동이 저로서는 이 글을 쓰는 가장 큰 힘이 된 것이죠. 그런 과정 속에서 사실상 앞으로 쓰일 글에서 나의 비평의 내면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흥미진진한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이 프로젝트가) 내 견해에 대해 고스란히 카피하는 과정이라면 지루했겠죠. 하지만 과정 안에서 비평의 내면이 새롭게 활동하는 힘을 느낄 때 나로선 이 글을 쓰는, 임권택 감독과의 인터뷰는 배움을 청하는 것이었다면, 이것은 나 자신으로부터 배움을 청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유성관_ 그렇다면 이 질문이 꼭 나올 수밖에 없겠습니다. 왜 임권택 감독인가요? 정성일_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가장 단순한 의미는... 이렇게 생각해보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과정을 통해 영화를 처음 사랑하고, 반복해서 보면서 배움을 청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것들을 이해하고, 생각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영화를 보며 얻는 배움은 잡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화에 관련된 책, 영화와 관련이 없더라도 그 책을 보조하는 철학, 사회학, 인문학, 역사 배경 등의 자료를 찾게 됩니다. 많은 비평가들은 영화를 보다가 책에 가까이 가는 순간, 이론과 불장난을 벌이게 되어있습니다. (그 이론과의 사투가) 영화에 대한 지식을 구하는 것처럼 전도되기 시작하고, 그다음부터는 이론들이 이 비평가의 영화에 대한 견해를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이건 굉장히 나쁜 상황이란 것을 시간이 한참 지난 다음에 알았습니다. 내가 너무 감사한 것은, 내 나이 20대 중반 시절, 그때가 80년대였다는 것을 고려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때는 구조주의, 기호학, 정신분석학, 마르크시즘 등이 거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였지만, 이것에 대해 나의 선배 중에서 그것들을 가르쳐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우리 세대들은 고스란히 그걸 책에서 배운 것이죠.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화의 모든 것들을 깨달은 것 같은 이론적 도구를 가지고 영화를 난자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런 느낌을 받게 됩니다. 수술은 성공했는데 환자가 죽었다는 것. 매번 그런 어떤 허망한 느낌이 들었었을 때에, 정말 운 좋게, 저로서는 세월이 훨씬 지난 후에야 운이 좋았음을 깨달은 거지만, 임권택 이라는 감독과 인터뷰를 하게 된 것입니다. 1987년. 이 임권택 이라는, 오로지 영화를 만들어 온 경험만으로 영화에 대한 배움을 청하고 자기를 끊임없이 새롭게 혁신시켜나간 감독. 하지만 이것에 대해 나를 만날 때까지 그 누구와도 이야기한 적이 없었죠. 이 어린 유치하기 짝이 없었던 애를 만날 때까지 말이죠. 아무도 그에게 물어본 적이 없었고, 본인도 아무에게도 이야기한 적이 없었던 그는 원시림 상태였습니다.(웃음) 만약에 그 당시 임권택 감독이 수많은 인터뷰로 굉장히 숙련된 상태였다면 난 많은 도움을 얻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겁니다. 나는 원시림을 완전히 헤쳐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고, 그 과정 속에서 영화라는 것이 말하자면, 너무나 간단한 진실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잊고 있었던 것, 즉, 창작이라는 과정의 예술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을 책으로는 틀림없이 읽었는데, 무슨 말인지 몰랐던 것들. 임권택 감독이 영화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 속에서 그 자신의 방법론에 대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나에게 영화와 이론이 뒤집혔던, 전도되었던 관계가 제자리를 찾게 된 겁니다. 나는 한 사람의 비평가로서 임권택 감독님을 만나기 전과 후가 있다고 해도 괜찮아요. 그 후에 완전히 다른 견해를 갖게 되었으니까요. 그러고 나서 영화감독을 만나는 것이 나의 임무가 되었던 것입니다. 임권택 감독을 만나 후, 왕가위, ‘키노’를 만들면서 만났던 홍상수와 김기덕, 그리고 부산에서 만났던 지아장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전주영화제를 하면서 처음 사람으로 만났던 후 샤오시엔, 그다음에 만나게 되는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그리고 왕 빙까지. 이 과정은 전적으로 임권택이라는 배움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좀 이상한 말이지만, 왕 빙 다큐멘터리, < 천당과 밤의 안개 >(2015)에 대한 고마운 마음은 임권택 감독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임권택이라는 한 영화감독의 세계로 들어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이 개인적인 이유라면, 또 하나의 공적인 이유가 있는데, 이 글을 써나가면서 한편으로 내 글의 목표 중 하나는, 1962년 후의 한국영화사, 혹은 1962년 이후의 한국 근대사를 다시 써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 글의 숨은 나의 욕심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연대기적으로 쓰지 않는다, 가 처음부터 원칙이었죠. 작년에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 갔을 때 장 프랑소와 로제가 똑같이 지적해줘서 너무 기뻤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임권택 전작 회고전을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이 사람이 한국영화사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이만희라는 위대한 감독의 이름을 알고 있고, 유현목, 신상옥, 김기영이라는 위대한 이름도 알고 있지만, 그 감독들은 특정한 시기에 위대한 감독들이었다. 오직 임권택만이 완전히 다른 시대를 오로지 자신의 방법을 통해 그 시간을 경유하여 온, 말하자면 한국이 한국전쟁을 끝내고 근대화가 시작된 그 시점에서부터 21세기까지 건너온 유일한 이름이다. 그의 작품을 우리가 이해한다는 것은 동시에 한국 근대사를 이해하는 것이자 한국 영화사를 이해하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했을 때 나는 완전하게 동의했습니다. 이 글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말하자면 내가 임권택뿐만 아니라 한국영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고, 받아들이고 있으며, 한국영화사에 대한 나의 입장이 어떤 것이며, 한국영화에 대한 한 비평가의 태도가 어떤 것인지를 여기에 기록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유성관_ 연재의 서문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과거의 영화를 현재의 자리에서 미래에 개방하기’로 새로 쓰기에 대한 의미를 설명하셨습니다. 어쩌면 이곳의 글은 우리가 흔히 읽어 온 일반적인 비평 글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에 걸맞게 서문에는 또한 ‘비평의 변주’라는 대목도 있는데요, 한 마디로 필자 자신이 생각하는 이 연재 안의 ‘글’이란 무엇일까요. 정성일_ 명백하게 이 글들은 텍스트 비평이 아닙니다. 그건 내가 처음부터 피하고 싶었던 것이죠. 한 편의 영화를 미학적으로 평가하고, 영화 안에서 영화에 대한 네트워킹을 찾아내며, 그 영화에 한정 지어진 방법을 찾아내는 것으로는 임권택 감독 영화의 세계, 한국영화사 속에서 임권택 감독이 갖는 위치, 그리고 그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한국영화사의 지도를 배회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임권택 감독을 정의할 때 쓰는 방법 중 하나인데, 누군가 임권택 감독은 어떤 감독이냐 질문할 때, 난 “이 사람은 시행착오의 대가”라고 답변합니다. 이 점이 임권택 감독 영화의 가장 위대한 점 중 하나입니다. 모든 감독이 그렇다고 대답할 수도 있겠지만, 임권택 감독은 특히 만일, 자기를 혁신시키려는 노력이 자기의 예술의 방법론이 아니었다면 60년대의 수많은 범작들 속에서 70년대로 넘어오지 못했을 것이고, 70년대의 국책영화로부터 80년대의 마스터로 올라오지 못했을 겁니다.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라고 임권택 감독은 스스로 말합니다. 60년대 영화의 많은 작품들은 형편없습니다. 나쁘죠. 하지만 하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다음 영화는 앞의 영화에서 못한 무언가 한 가지는 더 한 영화입니다. 이런 표현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임권택 감독의 모든 영화는 일종의 전 미래시제입니다. 이 자리에서 앞으로 그렇게 했어야 할 것인데, 라는 걸 포함하는 영화라는 의미입니다. 과거의 경험 없이는 이 영화는 없는 것이죠. 앞의 영화의 절대적인 반성 없이는 다음 영화는 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이 영화의 실패만이 이다음 영화에 대해 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쪽으로 열릴지는 앞 영화만으로는 알 수가 없죠. 어떤 영화에 5개의 실패가 있었다고 칩시다. 그중 무엇이 가장 뼈아픈지는 당장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쪽 방향으로 가리라 생각했지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을 해결하기 위해 다른 쪽으로 나갈 때가 있는 겁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보면, 같은 영화를 두 번 만드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내면적으로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렇다는 말이죠. 앞에서 못 한 걸 뒤에서 반드시 합니다. 여기에서 잘 안 된 게 저쪽에서 반드시 나타나게 됩니다. 그게 바로 다음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담아 두었다가 세 번, 네 번 건너뛴 다음에 다섯 번째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보죠. 1981년 임권택 감독은 < 만다라 >를 찍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은 건 하나였겠죠. 원작은 소승불교를 가던 법운이 대승불교를 가는 지산을 닮아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들여다보던 임권택 감독은 마지막에 원작 소설을 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가는 사람은 절대로 대승불교로 못 간다는 것이죠. 이건 그냥 소승불교를 가는 사람의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대승불교란 무엇인가. 소승불교의 길을 남성적인 길이라 이해하고, 대승불교의 삶을 여성적인 세계로 이해한 후, 이걸 < 아제아제 바라아제 >(1989)로 옮겨오게 됩니다. 또 다른 예. 모든 사람들이 성공작이라 생각하는 < 서편제 >(1993)를 임권택 감독은 스스로 실패작으로 생각합니다. 그는 그걸 < 천년학 >(2006)으로 다시 찍습니다. 임권택 감독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서편제>는 다시 보기가 두렵다. 이유는, <서편제>는 그 영화를 찍을 때 내가 판소리를 너무 몰랐다. 그래서 온통 내가 몰랐다는 것만 보인다.” 하지만 < 춘향뎐 >(2000)을 찍은 후에는 <천년학>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이기 때문에 그의 모든 영화는 전 미래시제라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는 한편으로는 지나간 시간을 영화가 끌어안는 한편, 미래를 향해 자신의 영화를 열어놓고 있는 것이죠. 나는 그 방법론을 어떻게 해서든지 비평 안에서 정식화시키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정식화의 과정이 이론적 방식이 아니라 비평의 방식으로 제시하고 싶은 비평가의 소망이 있는 겁니다. 유성관_ 이 칼럼의 글을 읽다 보면 혹은 평론가님의 특정 영화에 대한 강연을 듣다 보면 영화에 대한 견해, 글 자체가 또 하나의 창작물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정성일_ 고마운 표현이죠.(웃음) 혹은 과분한 표현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독자들이 어떻게 수용하는가에 대한 문제라고 봅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있겠죠. 나는 비평의 방법론이 멈춰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나의 방법론도 영화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수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영화에 대한 평가의 수정뿐 아니라 방법론에 대한 수정이란 뜻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다지 눈여겨볼 이유는 없겠지만, 내가 썼던 비평 글은 예전 글과 비교해보면 그간 많이 바뀌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가장 소망하는 바는, 나의 비평이 그 영화와 닮은 느낌이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게 가당키나 한 소망이지는 모르겠습니다.(웃음) 유성관_ 영화와 닮은 비평이란 무엇일까요? 정성일_ 그걸 정식화시켜놓으면 바로 그곳으로 떠나야겠죠. 개념화하거나 도구화한다면... 그건 이론이 해야 할 일이지 비평이 할 일은 아닐 겁니다. 유성관_ 이론가와 비평가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정성일_ 발터 벤야민이 한 말을 빌리자면, 한 편의 작품이 타오르는 장작과 같은 것이라면 이론가들은 장작과 타고 남은 재만이 관심이겠지만 비평가들은 타오르는 불꽃의 신비로움 그 자체만이 관심인 것입니다. 유성관_ 연재를 하면서 지금까지 좋았던 것, 혹은 아쉬웠던 것, 뜻밖의 보람 같은 것, 이를테면 굉장히 의외의 사람에게 잘 읽고 있다는 고백을 받았다거나 하는 것들이 있을 것 같은데요. 정성일_ 의외의 고백이라면, 이 비평을 잘 읽었다는 중국 영화 비평가나 일본 영화 비평가를 만났을 때입니다. 그럴 때는 이 사람이 어떻게 한글을 읽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한국말을 못하는 사람인데 말이죠.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에, 생각보다 넓게 읽히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고맙죠. 하지만 나의 좀 더 큰 소망은 넓게 읽히기보다 오래 읽히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서 연재가 끝난 다음에도, 혹은 내가 세상에 있지 않은 시간 후에도 임권택 감독을 연구하는 비평가, 이론가들, 혹은 맛보기 시작하는 시네필들이 참고할 수 있는 좋은 기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이 글이 시간을 견딜 수 있는가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니까 좀 더 두고 봐야겠습니다만.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 좋았던 점은... 견해가 바뀔 때입니다. 어떤 영화를 다시 보고, 그 영화를 다시 생각하면서... 이를테면 이런 거죠. 예전에 영화를 봤었을 때는 인터뷰를 위해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비평을 쓰기 위해서 볼 때는 그 목적이 달라지는 겁니다. 이 영화를 보는 나의 자리가 옮겨가면서 이 영화를 다시 바라보게 될 때 그 영화에 대해 새로운 것을 발견할뿐더러 견해 자체가 바뀌는 순간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럴 때, 한 편으로는 신나다?(웃음) 그와 동시에 지금 연재의 절반이 지나왔는데, 벌써 다시 쓰고 싶은 글이 있다는 것은 아쉬움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걸 어쩌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연재가 거의 끝나갈 즈음, 문득 이 글로 바꿔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유성관_ 그런 영화에 대한 글은 바꾸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같이 두는 게 좋을까요? 정성일_ 얼터너티브 버전?(웃음) 그건 그때 가서 결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유성관_ 편집자로서는 같이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처음 올라갔던 글이 언제 올라갔다는 것과 그리고 새로 쓴 글이 몇 년 후 언제 올라갔다는 것까지 모두 기록에 남는 것이니까요. 그 자체가 평론의 아카이브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으로선 모두 살아남는 것은 어떨까 하게 되네요. 이미 현재도 그런 글들이 있다는 거지요? 정성일_ 물론 있지요. 유성관_ 어떤 영화인지 알려줄 수 있을까요? 정성일_ 아직은 비밀입니다.(웃음) 현재 읽은 독자들에게 예의가 아니기 때문에. 이번에 낭트와 파리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 가서 그런 영화들을 스크린으로 다시 보게 된 겁니다. 그때 갑자기 아, 이 영화에 대해서는 생각을 바꾸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유성관_ 잘 알겠습니다. 그 영화에 대한 새로운 글은 다시 기다리는 거로 하고, 연재 기간은 더 길어질 수밖에 없는 거로 알고 있겠습니다.(웃음) 평론가님이 늘 아쉬워했던 것 중 하나는 글 안에서 참조되는 영화 캡처 이미지가 동영상이었으면 하는 것이었는데요. 정성일_ 그렇죠. 나는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 스틸사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동영상 참조가 가능하다면 너무 좋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기술적인 이유, 저작권의 이유, 제작비의 이유... 등등이 있을 테니까요. 유성관_ 저희도 저작권만 해결된다면, 물론 힘은 들겠지만 충분히 할 수는 있습니다. 정성일_ 그런데 이렇게 짧은 동영상에 대해서도 꼭 저작권 협의가 필요한 걸까요? 비상업적이고 학술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부분은 허문영 평론가의 ‘존 포드 이야기’ 쪽에서도 아쉬워할 것 같은데 말이죠. 유성관_ 평론가님도 지금은 숏바이숏 글을 잠시 멈추신 상태이지만, 허문영 평론가의 ‘존 포드 이야기’에서도 한 장면에 대해 길게 언급하는 장면은 많지 않습니다. 아무튼 평론가님이 다시 숏바이숏을 분석하는 글이 올 것을 대비해 저희 쪽에서도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평론가님이 아까 인터뷰 중에 말씀하시길, 하스미 시게히코도 오즈 영화의 전작 리뷰를 하지 않았다 하셨는데, 혹시 다른 평론가의 전작 리뷰 사례가 있는지요? 정성일_ 이론가들은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데이비드 보드웰이 오즈의 전작을 리뷰했죠. 작품별로. 보드웰은 에이젠슈타인도 그렇게 설명했고요. 유성관_ 트뤼포는 히치콕과의 인터뷰 말고 리뷰를 쓴 적은 없었나요? 정성일_ 인터뷰만이죠. 인터뷰라면 나도 진즉에.(웃음) 유성관_ 그러고 보니 요즘 사놓고만 있다가 미뤄두고 있었던 책, 「트뤼포」를 평론가님이 ‘영화천국 48호’ 시네필 특집 글 ‘10권의 책’에서 가장 첫 책으로 언급해주신 김에 이제야 꺼내서 읽고 있습니다. 정성일_ 앙투안 드 베크와 세르주 투비아나가 쓴 그 책, 굉장히 빨리 읽히지 않나요? 정보량도 만만치 않고. 그 책을 읽다 보면 그 당시 영화 컬처 전체를 알게 됩니다. 전기는 그렇게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기의 대상이 되는 사람만 아는 게 아니라, 씨네 클럽부터 시작해서 ‘까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진들 그 후의 고다르, 리베트, 샤브롤, 바쟁이 어떤 사람이었으며, 비평의 흐름, 영화의 흐름, 누벨바그의 전체적인 흐름까지도 딱 잡히는 책입니다. 굉장히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성관_ 그 책을 읽으면서 눈에 뜨인 것이 있었는데, 트뤼포가 작가정책을 가져가면서, 그 작가에 대해 이야기해야지 개별적인 작품에 대해 혹평한다든가 하는 것은 지양한다는, 이를테면 아벨 강스의 <악의 탑>에 대해서는 굉장히 실망했지만, 그 당시 트뤼포는 ‘아르’지를 통해 <악의 탑>을 옹호하면서 아벨 강스에 대해 작가적으로 접근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평론가님이 이 칼럼을 진행하는 것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성일_ 감사합니다.(웃음) 유성관_ 어떤 작품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정말 없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전작 비평’이기 때문에 그런 영화에 대해서도 글을 쓸 수밖에 없죠. 그런 영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정성일_ 정직하게 말해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중에 할 이야기가 없는 영화는 없습니다. 60년대 영화를 볼 때 느끼는 점이죠. 허문영 평론가와의 인터뷰에서도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는 “하지만 임권택 감독의 영화 중 60년대 영화도 나쁜 영화는 나쁜 영화다.”라고 이야기했고, 나의 대답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나쁜 영화입니다. 하지만 나쁜 영화이기 때문에 할 이야기가 있는 영화인 거죠. 즉, 이 사람의 영화에서 이런 나쁜 점들이 이 사람의 어떤 서명일 수 있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 나쁜 측면이 임권택이 남겨 논 한국영화사의 서명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나쁜 것에 대해 내가 정확히 설명할 수 있다면, 그건 임권택의 나쁜 습관 혹은 한국영화사가 임권택 영화에 침입하여 남겨놓은 나쁜 상처, 그리고 그런 것들이 영화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잘 설명할 수 있다면 그렇게 나빴던 60년대 한국영화를 설명할 수 있는 비평의 방법론을 내가 여기서 제시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여기에 어울리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큰 배움이 하나 있는데, 브레히트가 했던 말 중, “좋은 옛날에서 시작하지 말고, 나쁜 현재에서 시작하라.”라는 게 있습니다. 이 말이 정확히 적용되는 건 아니겠지만, 변주해서, 나쁜 임권택을 잘 설명할 수 있을 때만, 훌륭한 임권택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난 임권택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왜. 좋은 임권택의 영화 속에 나쁜 임권택이 동거하고 있음을 지금 나는 이제 명백히 알 것 같습니다. < 취화선 >에는 60년대 임권택이 있습니다. 혹은 < 서편제 >와 < 하류인생 >에도 나쁜 임권택이 있어요. 굉장히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걸 감추고, 한편으로는 변형시키고, 좋은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서 임권택 감독은 여러 가지 훌륭한 테크닉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젠 뭐가 있는지 보이고 있어요. 그게 보이지 않았던 유일한 영화는 오직 < 춘향뎐 > 뿐이었습니다. 그건 완전히 과거로부터 끊어내고 다시 찍은 영화에요. 그래서 <춘향뎐>은 임권택 영화 중 예외 중 예외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는 자신의 최고 걸작을 완전히 예외의 영화로 찍은 겁니다. 그래야만 최고의 걸작을 찍을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의 그러한 영화적인 경험을 통해 영화 전체를 통과하고 있는 하나의 어떤... 딱히 개념어로는 제시할 수 없지만, ‘그 무언가’가 거기 있습니다. 그 불길한 무언가를 설명하는 것이 저의 지금, 이 글을 쓰는 나에게 넘겨진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결론을 갖고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그 무언가’를 해명하는 것이 한 사람의 비평가로서 해야 할 일 중 하나라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유성관_ 임권택 감독이 어떤 감독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시행착오를 거친 감독이라고 소개한다 하셨는데, 가장 걸작은 과거와 모든 것을 끊어 낸 단 한편이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집니다. 정성일_ 그런 점이 흥미롭죠. 그래서 < 춘향뎐 >을 처음 봤을 때는 쇼크였습니다. 완전히 다른 영화를 들고 왔을 때,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심지어 <춘향뎐>을 맨 처음 봤을 때 비평가로서 이 영화를 무시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었어요. 이건 예외. 임권택 에는 두 개의 영화가 있다는 거죠. 그의 모든 영화와 <춘향뎐>. (웃음) 유성관_ 이 연재를 통해 평론가님은 임권택 감독, 안성기 배우, 영상자료원의 장광헌 당시 자료서비스부장, 송길한 작가, 허문영 평론가, 봉준호 감독으로 인터뷰를 이어왔습니다. 작년, 2015년에는 아쉽게도 유일하게 인터뷰가 진행되지 않은 해였습니다. 현재 예정 중인 인터뷰이가 있다면 소개해주시기 바랍니다. 정성일_ (이미 이야기가 된) 강수연 배우를 만나야 하는데, 부산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이라 지금은 진행할 상황이 아니죠. 김홍준 감독 역시 인터뷰할 계획인데 < 서편제 > 즈음에 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아직 <서편제>는 다룰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그래서 좀 더 뒤로 미뤄두고 있습니다. 그다음...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임권택 감독에게 배움을 청했던 한국영화 감독을 한 명 더 했으면 합니다. 유성관_ 예전에 봉준호 감독과 인터뷰 했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말씀이시죠? 정성일_ 그렇죠. 그다음에... 허문영 비평가와 마찬가지로 임권택 감독에게 배움을 청했던 영화 평론가 중에서 누군가와 대화했으면 합니다. 유성관_ 염두에 둔 사람이 있는지요? 정성일_ 현재로써는 없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사실 안타까운 점은, 이청준 작가가 곁에 있었다면 인터뷰를 했을 텐데 하는 생각. 기회를 놓친 것이 너무 안타깝죠. 또 잘 성사될는지는 모르겠지만, < 개벽 >을 쓸 즈음에, 도올 김용옥 선생을 인터뷰하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그분을 뵙는 건 무척 중요한 일이라 생각하며, 임권택 감독이 한 기간 동안 이 철학자를 일종의 멘토로 여겼고, 많은 철학자의 사유 방식을 배워왔기 때문에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중요할 거로 생각해요. 만년필을 가지고 가야 하나?(웃음) 유성관_ 전혀 생각하지 못했지만 김용옥 선생과 인터뷰하면 좋고 재미있겠습니다. 하지만 담당자로서 녹취가 걱정되긴 합니다.(웃음) 정성일_ 그 외 떠오르는 사람이 있나요? 유성관_ 저도 딱히 없지만, 이 전에 이야기 나왔던 임권택 감독에 대해 관심이 많은 젊은 비평가들과의 대화에 관심이 있습니다. 정성일_ 누가 있을까요? 유성관_ 그게 누군가라는 게 여전히 잘 잡히지 않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임권택 이라는 감독에 대해 관심이 있는 평론가를 찾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를 생각해보면 참 희한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정성일_ 임권택 감독을 어려워하는 것도 있을 겁니다. 유성관_ 편집자로서, 허문영 평론가와의 대화, 그리고 ‘영화천국’ 대담을 통한 김홍준 감독과의 대화가 대단히 인상적이어서 그런 대화를 또 듣고 싶은 게 사실입니다. 앞으로 그런 대화가 또 있길 바라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 대화 중에 < 춘향뎐 > 이야기도 나왔고, < 만다라 > 이야기도 나왔지만, 이와 같이 우리가 흔히 임권택 감독의 영화 중 걸작이라는 영화, 혹은 널리 알려진 영화들 대부분이 아직 이 연재를 통해 쓰이지 않았습니다. 정성일_ 일부러 뒤로 배치해 놓은 상태입니다. 이 영화들이 이어지는 선을 쳐다볼 생각입니다. 이를테면 이런 거죠. < 만다라 >를 쓴 다음에는 반드시 그다음에는 < 아제아제 바라아제 >를 쓸 겁니다. 그다음 < 개벽 >은 어떤 순간에 딱 끊어내면서 쓰게 될 것이고, 그리고는 < 취화선 >을 쓰게 될 겁니다. 이런 식으로 짝패를 이루게 되는 겁니다. 혹은 이제까지 없었던 방식의 글 중 이런 방식도 있을 겁니다. 한 편의 영화를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1부, 2부, 혹은 3부로 나눠 쓰는 영화가 나올 것입니다. <취화선>의 경우는 그 영화 자체에 대해 설명하는 글이 있을 것이고, 또 하나는 그 영화에 164회 차 촬영 중 90여 회 차를 참여했기 때문에 현장에 있었던 임권택 감독의 인상에 대한 설명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있을 겁니다. 세 번째 글은, <취화선> 이 영화는 절대적으로 임권택 감독 자신에 대한 자서전입니다. 그래서 그 영화 속의 대사를 통해 예술가에 대한 태도를 재구성해서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취화선>을 그러한 방식으로 재구성해서 임권택이라고 하는 한 예술가가, 장승업이라고 하는 한 예술가를 반추시키면서 자신의 예술관을 어떻게 설명했는가에 대한 글 역시 진행될 겁니다. 유성관_ < 취화선 > 외에도 이렇게 몇 가지 다른 버전의 글이 올라올 가능성이 있을까요? 정성일_ < 춘향뎐 >도 그럴 것입니다. 그 영화도 한 번에 설명하기엔 중층적인 영화라, 두 개의 글이 짝패를 이루면서 서로가 서로를 보충하는 방식으로 쓰일 것 같습니다. 이 칼럼이 인터넷으로만 남을지, 책으로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만약 책이 만들어진다면 <춘향뎐>에 대한 글은 두 개의 버전을 쓰고, 하나의 버전은 오른쪽에, 또 하나의 버전은 왼쪽에 배치하는 편집을 했으면 합니다. 유성관_ 안 그래도 이 칼럼에 대해 책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나옵니다. 필자로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정성일_ 이거 전집 수준이 아닌가요(웃음). 보낸 원고 중 100매가 넘는 원고가 꽤 있는 거로 압니다. 유성관_ 맞습니다. 분량이 적다고 해도 80매, 90매인데, 텍스트의 절대적인 양보다도 글에 첨부된 이미지들도 어떤 식으로 편집되는 게 맞는가 하는 게 의문입니다. 평론가님은 책이 나온다고 하면 동의하는 건가요? 사실 처음에는 전적으로 온라인 프로젝트였습니다. 정성일_ 맞습니다. 그래서 매수와 관계없이 쓴다는 거였죠. 하지만 이건 내가 절대적으로 종이 세대이기 때문에, 종이에 대한 욕망이 있습니다. 종이로 옮겨 졌으면 좋겠어요. 이는 절대적으로 자료원의 동의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니, 자료원의 입장도 포함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유성관_ 연재의 마지막 영화는 뭐가 될까요? 정성일_ < 화장 >입니다. 실은 <화장> 직전의 영화도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 짝코 >. 임권택 감독의 많은 지지자들이 뽑는 영화들의 최고 걸작은 < 만다라 >와 < 서편제 >이잖아요. 다음 세대의 임권택 감독의 최고 걸작은 <짝코>가 되리라 확신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다음 세대에게 보내는 저의 러브레터?(웃음) 유성관_ < 짝코 >는 5년 후에나 그 글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웃음) 정성일_ 그 영화는 명백히, 임권택 의 모든 영화 중에서 가장 임권택 감독다운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어떤 정수가 담겨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임권택 영화의 상처와 모순, 문제와 힘과 가능성, 그 모든 어떤 복잡한 것들이 한 편으로 모여있는 것을 들자면, 그게 < 짝코 >이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와 낭트에서 개막작은 <짝코>였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씀드렸고, 결국 두 행사 모두 <짝코>로 시작했습니다. 유성관_ 이 칼럼에 국한된 질문은 아니지만, 꼭 듣고 싶은 답변이 있습니다. 평론가님의 글에 대해 변치 않는 질문이 있는데, 어렵다. 혹은 읽기 힘들다, 왜 독자들이 읽기 편하게 써주지 않느냐, 는 말을 오랜 시간 합니다. 이에 대해 평론가님은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요? 정성일_ 그분들은 실망스럽겠지만, 그런 지적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내 글이 잘 읽히고, 잘 전달되고 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글이라는 건 그 사람의 의식, 생각의, 좀 멋있게 말하자면 사유를 기록하는 흔적이라 생각합니다. 흔적을 읽어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글은 그 사유를 카피하는 것이고, 카피의 과정을 통해 이 사람의 뇌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흐름을 읽어 나가는 것이지, 이 글 자체가 사유와 동떨어져서 문법 자체와 수사학의 번들거림에 종속되는 것은 일종의 분장이라 생각하는 쪽입니다. 그것보다 어떤 대목들은 명백하게 나 자신의 글이 비문이란 걸 아는 대목도 있습니다. 물론 주어가 두 개, 이런 문장들은 고치지만, 애매하게 비문인 그런 문장들이 있어요. 이런 문장들이 문제가 되는 거로 생각하는데, 어디서 끊어 읽는가에 따라 비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나의 판단은 하나입니다. 이게 내가 이 영화에 대해 생각했었던 그 사고에 대한 기록인가, 그 문장 구조 자체가 그렇다고 판단되면 내버려두는 쪽입니다. 나중에 나의 글을 읽어볼 기회가 있을 때, 내가 왜 이렇게 썼지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이런 문장을 통해 아, 이래서 내가 이렇게 썼구나, 하는 환기하는 순간이 있어요. 그런 울퉁불퉁한 모퉁이들을 글에 남겨둬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고, 독자들이 이런 글을 읽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독자는, 그걸 읽는 게 목표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가장 실망스러운 독자는, 글을 통해 정보를 갖고자 하는 독자들입니다. 그보다는 낫지만 여전히 실망스러운 독자는 지식을 갖고자 하는 독자들입니다. 한편으로는 내 마음속에 그런 독자들로부터 내 글을 방어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그 정보를 갖고 가고자 하는 독자들을 실망시키고, 지식을 갖고 가고자 하는 독자들을 좌절시키고 싶은, 대신 내가 사고하고 있는 것을 쫓아와서 아, 이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하는 독서의 방법론을 가져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언제든지 열어주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걸 공유하고 싶은 것이고 그 과정만이 나의 글 쓰는 방식, 그리고 그것이 나의 문체라고 생각합니다. 필자인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다음에도 나의 뇌의 구조를 알 수 있도록, 글이 카피해 놓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이유로 임권택 전작 리뷰 연재를 통해 어떤 글은 쓰는 데 보름 이상 걸리기도 합니다. 그런 과정이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유성관_ 몇 년간 KMDb에서 ‘영화글’이란 섹션을 유지하면서, 요즘 영화에 대한 글을 읽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얼마나 독자가 남아있는가, 혹은 영화에 대한 글을 생산하는 것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으며 또 얼마나 중요한 일일까, 라는 고민을 늘 합니다. 영화 글이라는 것이 그럼에도 지속되어야 하는 게 맞다면, 왜 그런 것인지를 묻고 싶습니다. 정성일_ 이 질문은 글에 대한 역사 쪽에서 보는 것이 훨씬 더 걸맞은 대답이 될 것입니다. 간단히 이렇게 생각해보죠. 영화에 대한 비평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모두들 말하고 있지만 그 표현과는 정반대로, 정확하게 표현하면, 영화 비평가의 글을 싣고 있는 지면이 줄고 있는 것이지 영화에 대한 글은 폭발하고 있습니다. 온갖 블로그, SNS에서 영화에 대해 쓰지 않는 사람이 없고, 영화를 보면 쓰고 싶어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쓰고 싶은 사람은 많은데 읽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겠죠. 즉 남의 글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줄어들고 있다는 문제의 핵심은 어쩌면 글 자체라기보다는 플랫폼의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플랫폼은 그 콘텐츠를 올바로 전달하는가, 네트워킹을 하는가, 그 플랫폼들이 그걸 읽고자 하는 사람들을 목표로 정확하게 도달하고 있는가. 그래서 나는 KMDb도 그걸 성실하게 운영하는 것만이 목표가 아니라, 이런 홈페이지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리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의외로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그래서 이렇게 플랫폼을 정성스럽게 운영하는 것뿐 아니라, 온라인 속에서 글을 원하는 사람들과 올바르게 접속하는 일에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핵심이 아닐까요? 반격이랄까?(웃음) 정말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영화아카데미 학생들도 KMDb를 몰라요. 영상자료원 홈페이지가 있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상영일정만 보고 나오는 게 다인 거죠. 영화학교 학생들도 홈페이지를 모를 정도라면, 홍보를 좀 더 잘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유성관_ 갑자기 제 쪽으로 이야기가 넘어온 것 같은데 플랫폼에 대해서는 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웃음) 그럼에도 여전히 궁금한 것, 말씀하신 것처럼 영화에 대한 남이 쓴 글을 읽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고, 또 영화에 대한 글이 폭발하고 있다고 해도 SNS에 쓰는 짧은 영화 인상 낙서들이 범람하는 것도 같습니다. 그러한 지금, 여전히 진지하고 긴 영화에 대한 글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성일_ 저는 SNS를 통한, 전적으로 인상에 의지한 메모도 훌륭한 영화평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그런 평이 섬광 같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 남들보다 먼저 시사를 보고 나와 으시대는 잡담을 셈에 포함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하지만 여전히 영화를 본다는 체험을 글로 옮긴다는 것은 전적으로 그 영화를 본 시간의 리듬을 어떻게 옮기느냐의 문제입니다. 저는 영화에 관한 훌륭한 글을 읽으면서 종종 위대한 비평가들이 그 리듬을 온전히 구현해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 비평이 때로는 영화에 완전히 안기거나 혹은 반대로 품어준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무엇보다도 영화평은 그 영화를 다시 보게 만들 때 정말 힘이 있는 것입니다. 혹은 보고 싶게 만들어야 합니다. 영화평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혹는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그건 영화에 다가가는 방법의 기술입니다. 차리리 이렇게 대답하면 어떻겠습니까. 한정 없이 글이 길어질 때 그건 영화가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 같은 것입니다. 유성관_ 마지막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또 다른 움직임 중 하나가 영화독립잡지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겁니다. ‘아노’는 이미 오래되었고, 유운성 평론가가 발행한 계간지 ‘오큘로’는 막 1호가 발간되었고, ‘캐스트’라는 독립영화 잡지가 크라우드 펀딩 중이며, 여성 영화를 주제로 하는 ‘세컨드’라는 독립잡지 또한 준비 중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영화에 대한 저널이, 독립잡지이지만 예전보다는 활발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정성일_ 종이 잡지를 만든다면, 웹도 서버가 돈이 들기도 하지만, 종이는 바로 종잇값, 인쇄비, 배포에 관련된 비용, 정기 구독자 관리 등, 첫 호를 만들 땐 잘 못 느끼는데, 그게 지나가면 반품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창고비 까지도 장난이 아니게 됩니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를 개인이 감당하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이죠. 진심으로 잡지는 많이 팔리는 게 목표가 아닌, 오래 팔리는 게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유성관_ 평론가님은 ‘키노’ 이후 종이 잡지에 대한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나요? 정성일_ 늘 하고 있죠. 지금 현재도. 유성관_ 어느덧 마지막 질문입니다. 오늘 인터뷰를 한다고 하니 누군가 궁금하다고 추가해 준 질문인데 저 역시도 궁금합니다. 비평가로서 영화를 볼 때, 오늘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제가 인사차 여쭤봤던 질문 “최근에 보신 영화 중 좋은 영화가 있었나요?”에 대해 한숨 쉬며 “없었죠” 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혹은 60~70년대의 부서진 한국영화들을 계속 봐야만 할 때, 혹 비평가로서 내상을 입지는 않으신지요? 정성일_ 물론 상처를 받습니다. 유성관_ 그럼 그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십니까? 정성일_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임권택 감독의 몇몇 영화를 봅니다. < 짝코 >랄지, < 춘향뎐 > 같은 영화를 또다시 보며 일종의 상처를 해독한 달까요.(웃음) 유성관_ 일종의 영화 해독제인 셈이군요. 정성일_ 정말 그렇습니다.(웃음) 2016년 3월 29일, 북촌
이렇게 서문을 시작할 수밖에 없다. 나는 1986년 11월 둘째 주 화요일에 임권택 감독님을 처음 만났다. 나는 이 날을 정확하게 기억한다. 그 날은 화창했지만 바람이 차가웠다. 막 겨울이 시작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임권택 감독님에 관한 인터뷰로만 이루어진 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내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임권택 감독님은 그해 여름 < 티켓 >을 완성하였고, 남산에 자리한 영화진흥공사의 지하 이층에 세워놓은 세트장에서 < 씨받이 >를 촬영하고 있었다. 처음 만난 자리도 기억할 수 있다. 영화진흥공사 바로 옆에는 난다랑이라는 커피숍이 있었다. 남산에서 약속을 하면 대부분 거기서 만났다. 아침 열시에 처음 뵈었다. 내가 시간에 늦지는 않았지만 감독님이 먼저 나와 계셨다. 하지만 첫 인상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창가 옆자리에 앉아계셨다. 당신께서는 아직 내 나이가 스물일곱 살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시기 바란다. 나는 남산 길을 올라가면서 거의 암송하듯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외웠지만 정작 그 분 앞에 앉았을 때 횡설수설하듯이 말해버리고 말았다. 임권택 감독님은 말씀이 적지만 그때는 더 그러했다. 그냥 나를 쳐다보았다. 막 시작된 아침 겨울 햇살이 커피 잔에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이상하게도 그 빛이 언제나 어제 일처럼 기억난다.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들은 다음, 어쩌면 그저 내가 그렇게 느꼈을 지도 모르는 시간 동안 설명을 하고 난 다음, 임권택 감독님은 내게 그냥 던지듯이 물었다. “내게 무어 들을 이야기가 있소?” 나는 이 말 뜻을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알 수 있었다. 이미 83편의 영화를 찍은 한국 영화감독. 여기서 모든 것이 방점이다. 83편이라는 그 두께. 한국이라는 영화산업 안에서 1962년에 데뷔한 다음 그는 그 영화들을 찍으면서 살아남았다. 그와 함께 시작한 대부분의 감독들이 이미 현장을 떠난 지 한참인 다음에도 그는 영화를 만들고 또 만들었다. 그리고 만들고 있었다. 그는 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제작자가 되었고, 누군가는 학교로 갔으며, 누군가는 관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오로지 현장에서 영화를 연출하였다. 이십여 년에 걸친 한국영화산업의 역사. 황금시대와 1972년 이후의 몰락. 흥행의 시대가 끝나자 시작된 검열의 역사. 텔레비전과의 경쟁에서 밀려나기 시작한 대중오락. 그때 임권택 감독님은 어린 나를 바라보면서 당신이 이 영화들을, 이 영화들에 담긴 세월을, 이 세월 속의 삶을, 이 삶으로부터 나온 매 쇼트의 결단을, 정말 귀 기울여 들어볼 수 있겠냐, 는 질문을 내게 던졌다. 나는 약간 망설인 다음 대답했다. “배우고 싶습니다” 나에게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것만이 내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내 마음 속에 염두에 둔 책은 프랑소와 트뤼포가 1962년 6월 2일 첫 편지를 쓴 다음 그 해 8월 13일 월요일부터 6일간 유니버셜 스튜디오 146호 방갈로에 있는 사무실에서 계속된 알프레드 힛치콕과의 인터뷰를 담은 <알프레드 힛치콕(Le Salon Alfred Hitchcock)>이었다. 나는 이 책에서 영화에 관한 많은 것을 배웠다. 그 중에서도 두 가지 배움. 하나는 영화라는 비밀을 알기 위해서 동원된 인터뷰라는 방법이 사실상 최상의 비평이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영화를 본다는 문제란 결국 질문을 던진다, 라는 형식으로 나타나는 능력(들) 사이의 (말 그대로의) 표현이라는 사실이다. 설명하는 표현, 함축하는 표현. 그 둘 사이의 활동으로서의 영화. 우리는 그 둘 중 어느 것도 놓쳐서는 안 된다. 트뤼포는 힛치콕에게 단지 미학적이거나 기술적인 질문에서 멈추지 않았다. 종종 질문은 대답보다 흥미로웠고, 때로는 질문으로부터 영화를 보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혹은 질문이 때로 예상치 않은 대답을 끌어내기도 하였다. 많은 질문과 대답들은 차라리 행간을 읽어야만 했다. 그 둘 사이의 질문과 대답은 존경과 사랑으로 진행되었다. 어떤 질문은 궁금해서라기보다는 힛치콕에게 자기가 그의 영화에서 ‘발견’한 것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읽혔고, 어떤 질문은 마치 수줍은 사랑의 고백처럼 들렸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감탄하게 만든 것은 마치 영화를 손끝으로 건드리듯이 만져보는 듯, 정확하게 그렇게 설명할 때, 영화를 애무하듯이 느껴볼 때, 그 마음이 질문 속에 담겨서 전달될 때, 그건 내게 마치 마법처럼 보였다. 트뤼포는 힛치콕의 영화를 정면으로만 응시하지 않았다. 가끔은 프레임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린 다음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인공을 쳐다보느라 놓쳤을만한 흔적들을 끌어냈다. 혹은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클로즈업을 문득 끌어내기도 하였다. 명백하게 그는 수십 번을 맹목적으로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질문을 던졌다. 거의 불가사의할 정도의 관찰. (내 추측이 틀리지 않다면) 때로는 눈물을 흘리면서 보았기 때문에 찾아낼 수 있는 흐릿한 시선으로 바라본 화면들. 트뤼포는 정보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무엇보다도 배움의 기호를 찾고 있었다. 영화라는 고유한 세계 안에서 활동하는 법칙들. 어떻게 저 기호들은 다른 영화에서는 작동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힛치콕의 영화에서만 활동하기 시작한 것일까. 몇 번이고 다시 본 다음 매번 수수께끼 앞에서 난처하게 질문을 던지고 다시 던진 다음 마침내 그 마술을 만들어낸 사람 앞에 도착하여 참지 못하고 제발 그 비밀을 풀어주세요, 라는 간절한 하소연. (그의 스승이었던 바쟁의 표현을 빌리면) 누가 이 상형문자의 비밀을 풀어줄 수 있을까. 아마도 사랑에 빠져본 사람만이 느껴볼 수 있는 그 영화적 신호들에 대한 놀랄 만큼 예민한 반응. 트뤼포는 힛치콕의 영화를 안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저 보고 또 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일한 행위의 반복이 아니다. 영화를 두 번 볼 때 우리는 첫 번째 볼 때와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보게 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건 단지 음미의 차원이 아니다. 트뤼포의 질문이 내게 가장 큰 쇼크를 준 순간은 영화에 단 하나의 시선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일깨움을 주는 질문을 던질 때였다. 한 사람이 이것을 볼 때 다른 사람은 저것을 볼 수 있다. 누군가 여기서 멈출 때 다른 누군가는 존재하지도 않는 다음 쇼트를 그 안에서 찾아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트뤼포는 처음에는 내가 그 영화를 본다, 라고 시작한 다음 그 영화가 나를 본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 영화가 내가 보는 것을 안다고 느껴볼 때 거기서 무슨 일이 생길 것인가. 비평은 거기서 시작하였다. 트뤼포는 용기를 내서 한 걸음 더 밀고 나갔다. 트뤼포는 자기를 보는 영화를 다시 바라보았다. 사랑의 시선. 시선의 교환. 트뤼포의 질문은 거기서 시작하였다. 나는 그것을 배우고 싶었다. 이 책을 둘러싼 나의 아주 사적인 배움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당신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겠지만) 게다가 이 책의 일본판을 번역한 사람은 아아, ‘일본 제일의 영화광’이라고 불러 한 점 부끄럼 없는 두 사람, 하스미 시게히코와 야마다 고우이치였다. (이 책은 <힛치콕, 映畵術> 이라는 제목으로 ‘키네마 준보’에 일부 번역된 다음 1981년에 초판이 발행되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건 이 책의 초판본이다) 야마다 고우이치는 번역을 끝낸 다음 후기에서 “이 책은 영화의 백과사전이며, 입법전서이다. 매번의 질문은 영화란 무엇인가, 라고 불러도 좋다. 매번의 대답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라고 썼다. 나는 이 사람들에게 영화와 만나는 태도를 배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임권택 감독님을 처음 뵙고, 그 분에게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청했을 때. 대답을 듣고자 했을 때, 그건 나에게 배움의 실천이었다. 나는 이 배움 속에서 내 방식으로 영화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수백 번, 수천 번 던져보고 싶었다. 그리고 수백 번, 수천 번, 그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 대답. 여기에는 약간의 이야기를 더해야 할 것이다. 내가 처음 이 책을 준비할 때에는 임권택 감독님에 관한 영화 평을 거의 볼 수 없었으며, 그에 관한 작가론을 단 하나도 읽을 수 없었다. 세상의 무관심.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대중들로부터의 일정한 거리. 여전히 그의 대부분의 영화들은 개봉관에서 볼 수 없었다. 혹은 아주 짧은 시간만 영화관에 간판이 걸려있었다.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종종 시내 중심가로부터 외곽에 자리한 한적한 극장을 찾아가야만 했다. 심지어 어떤 영화는 재개봉관에서 개봉을 하기도 하였다. 나는 < 신궁 >을 보기 위해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그리고 그런 다음 그 ‘이후’ 다시는 가보지 못한) 극장을 찾아 내가 살던 동네로부터 멀리 떨어진 뚝섬까지 가야만 했다. 물론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내가 서울 지리의 감각을 익힌 것은 그때 영화를 찾아 처음 타보는 노선의 버스에 몸을 싣고 낯선 동네, 낯선 골목을 헤매면서 두리번거리던 경험의 결과이다. 어떤 네비게이션도 없었다. 그저 동네를 기웃거리고 낯선 사람들에게 수없이 물어보면서 극장을 찾아가야만 했다. 그때 제작사들은 야비하게도 외화 수입쿼터를 따내기 위해서 한국영화를 만들었으며, 그런 다음 그 영화를 버릴 때 그런 방식을 취했다. 비평의 차가운 외면. 그때 그 영화들을 아무도 방어하지 않았다.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들은 외롭게 만들어졌다. 이미 83편의 영화를 만들었지만 충무로에서는 그를 직업감독으로만 부르고 있었다. 물론 이미 < 만다라 >를 만들었고, 그런 다음 < 길소뜸 >과 < 티켓 >을 만들었지만 비평은 그에게 거의 관심이 없었다. 차라리 한국영화에 별 관심이 없었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때 한국영화는 세계영화사의 시간 바깥에 있었다. 다시 한 번 당신을 환기하지만 1986년의 일이다. 나는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많은 할리우드 영화를 열심히 보았다. 프랑스문화원에서 매달 프로그램으로 상영되는 영화들을 단 한 편도 놓치지 않고 보았다. 독일문화원에서 영화를 보았다. 일본문화원에서 영화를 보았다. 물론 나는 아직 많은 영화를 보아야 했다. 여기는 파리가 아니었다. 아직 시네마테크도 없었다. 어쩌면 영화보다도 영화에 관한 책을 더 많이 읽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나를 가로 막고 나선 것은 한국영화였다. 내가 영화에 대한 글을 쓴다는 문제에 대해서 자의식을 갖기 시작한 것은 대학교에 가서였다. 물론 그건 전적으로 나 혼자 읽는 글이었다. 매일 본 영화를 쓰고 또 보고 또 썼다. 그러기위해서 나는 참고문헌을 가져야 했다. 문학 비평을 처음 읽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논쟁이 중심에 있었다. 한국문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내게 한국영화란 무엇인가, 로 번역되었다. 나는 의식적으로 한국영화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김기영 의 < 이어도 >, 유현목 의 < 문 >, 하길종 의 < 한네의 승천 >, 이장호 의 < 어제내린 비 >, 김호선 의 < 영자의 전성시대 >. 나는 두서없이 때로는 막 개봉했을 때, 혹은 재개봉으로 상영되었을 때, 종종 동시상영으로 이 영화들을 대부분 프린트에 (스크래치로 인하여) ‘비가 내리는’ 상태에서 보았다. 그리고 어느 날 늦봄 이른 아침 학교 앞 극장에서 < 족보 >와 마주쳤다. 누구에게나 어떤 영화를 보기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순간과 마주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각성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쇼크 상태. 아마도 그 목록은 모든 시네필들에게 각자 개인의 ‘은밀한’ 명단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 영화를 언제 어떻게 만났느냐에 따라 완전하게 다르게 당신을 일깨워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그런 영화들의 명단이 있다. <족보>는 내게 그런 영화(중의 하나)이다. 나는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林權澤’(그때에는 포스터에도, 영화 자막에도 모두들 한자로 이름을 표기하였다) 이라는 이름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그 이전 영화들을 이미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쇼브라더즈 무협영화를 보면서 감독 이름을 외우기 시작했다) <족보>는 줄거리가 특별한 영화가 아니었다. 나는 이미 그와 비슷한 줄거리의 일제 강점하의 식민지 시대를 다룬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서 자란 세대이다. 그렇다고 특별한 주인공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어떤 순간부터 이 영화의 진행은 내가 이제까지 본 영화들과 완전히 다르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 영화의 씬들은 이제까지 내가 읽은 책의 일부분을 완전히 무효로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장면들, 그 쇼트들의 리듬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무엇보다도 우아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 안에 구석구석 자리 잡은 통일성과 이상할 정도로 균형을 잡은 감각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을 나는 설명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나는 지금 도대체 무엇을 본 것일까. 영화의 수수께끼. 트뤼포를 경유하여 바쟁의 말에 기댄다면 상형문자. 무엇이 나를 이렇게 민감하게 만들었을까. 대답을 해야 한다. 나는 초조하게 두리번거리면서 다음 영화를 기다렸다. 그때부터 나는 ‘林權澤’이라는 이름을 찾아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임권택 감독님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영화를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도대체 이 사람은 어떻게 이 영화들을 모두 만들 수 있는 것일까, 라고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어떤 영화는 훌륭했고(< 짝코 >), 어떤 영화는 나빴다(< 내일 또 내일 >). 유감스럽게 나는 < 만다라 >를 개봉했을 때 보지 못했다. 그때 나는 군대에 있었고. 대신 전쟁영화인 < 아벤고 공수군단 >을 보았다. 이 영화는 지루했다. 제대한 다음 다시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순서대로 쫓아갈 수 있었다. 그 어떤 영화보다도 < 길소뜸 >은 굉장하다, 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영화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싶었다. 만일 내가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 안에 담겨진 비밀을 알게 된다면 그건 한국영화라는 비밀을 알게 되는 순간이 될 것이라는 (앎에 대한) 은밀한 열망이 있었다. 물론 내가 임권택 감독님의 대답에서 기대한 것은 영화의 개념(들)이 아니었다. 그건 이미 책으로 충분히 ‘읽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개념들이 실제로 영화 속에서 어떻게 활동하고, 어떻게 이것이 저것과 접속하고, 그 안에서 반대로 개념들에 영화라는 시스템이 어떻게 의문을 제기하며, 그 과정에서 영화라는 개념이 만나는 불안의 조건이 무엇이며, 이 모든 각각의 요소들을 정의내리는 대신 그 용어 바깥에서 명령하는 날씨와, 세트와, 배우라는 몸과, 그 몸속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와, 그 몸의 제스처와, 활동과, 종종 순환을 중단시키는 카메라의 뒤편에서 벌어지는 결정 사이의 블랙홀, 말하자면 아무리 노력해도 항상 불연속성으로 귀결 지어지는 비평과 현장 사이의 절망적인 중단을 다시 매듭짓고 싶었다. 나는 반문하고 싶었다. 혹시 이 모든 것들이 오로지 현장에서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임의적으로 모인 것은 아닙니까? 어쩌면 나는 자신을 방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알라바이를 만들고 싶어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나는 기꺼이 개념(들)과 영화 사이의 비대칭의 대결 속에서 이념들로 이루어진 개념을 버리고 활동 중인 영화를 선택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영화에 관한 진정한 감각이란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 안에 놓여진 것이다, 라는 롯셀리니의 말. 그냥 단 한 마디로 이 개념들의 피와 살을 알고 싶었다. 트뤼포는 인터뷰를 위해서 벨기에 시네마테크에서 힛치콕의 영국시절 영화들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나는 트뤼포와 같은 행운을 누리지 못했다. 그 당시 한국영화들을 보관한 곳은 한국필름보관소였고, (1991년 9월 지금의 명칭으로 변경한 이후) 한국영상자료원이 된 2002년에서야 자료를 외부에 공개하기 시작했다. 나는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전적으로 내 기억에 의존해야만 했다. 대부분의 영화들은 기억 속에 희미하게만 남아있었다. 고백하자면 심지어 이 영화들 중의 일부는 필모그래피를 정리하는 과정 중에 아, 내가 그때 본 그 영화가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였구나, 라고 알게 된 제목들도 있었다. 인터넷은 아직 인류 문명에 도착하지 않았고, 모든 자료는 하나씩 국회도서관에 가서 찾아야 했으며, 일일이 필름으로 보관된 신문기사들을 뒤져야만 했다. 게다가 그때 나는 아직 1960년대에 만들어진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 대부분을 보지 못한 상태였다. 그건 전적으로 내 나이의 한계 때문이다. 내가 무슨 재주로 (아직) 국민학교(라고 불리던) 시절에 만들어진 그 영화들을 찾아볼 수 있었을까. 혹은 보았다 하더라도 그걸 인터뷰로 질문을 해낼 만큼 기억해낼 수 있을까. 질문을 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발견의 방법론을 경유하는 문제의식이다. 나는 질문이 내 안에 머물기를 원치 않았다. 질문이 다시 영화 안에 들어가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임권택 감독님과의 인터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이 인터뷰가 그렇게 전면적인 상황으로 펼쳐지게 될 것이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질문은 저 아래까지, 일제 식민지 강점하를 거쳐서 조선시대 말기 그 어딘가에 까지 내려가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전라남도 장성이라는 지리적 장소가 가져온 한국 근대사 안의 역사적 맥락. 한국전쟁은 그 장소를 찾아온 다음 한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그는 오로지 자기 육신 안에서 이 모든 시간을 견뎌내야만 했다. 그런 다음 그 시간이 끝나지 않고 그의 영화 속에 흔적을 남겨놓고 있었다. 그의 영화 속의 시간은 경험의 시간이자 역사의 시간이었다. 시간의 다발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들은 세상 속을 어슬렁거린다. 그는 종종 인터뷰 중에 탄식을 하면서 내게 말했다. 나는 많은 시간을 낭비했어요. 그저 어떤 삶의 목표도 없이 그렇게 세월을 보냈어요. 그러나 영화는 그 시간들을 차례로 쌓아나갔다. 그런 다음 우리를 되찾은 시간 앞으로 데려다 주었다. 나는 이 시간들 사이의 복잡한 기호들에 관해서 귀를 기울였다. 그 자신이 헛되이 시간을 보냈다고 말하는 그 시간 안에 있는 진실. 내가 비로소 알게 된 배움의 본질적인 성과. 나는 임권택 감독님에 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종종 어느 순간부터 한국근대사에 대해서 말하거나, 혹은 지난 50년간에 걸친 한국영화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문득 소스라쳐 놀라곤 한다. 그건 내 의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걸 설명하는 과정은 번번이 잃어버린 시간 안으로 들어와 길을 잃어버린 다음 이러 저리 그 선을 따라 나가면 그 시간을 되찾는 장소에로 나를 데려다 놓았다. 물론 첫 번째 인터뷰는 < 씨받이 >에서 끝났지만 그 ‘이후’ 임권택 감독님은 계속 영화를 만들었고 나도 계속 그 영화들을 쫓아갔다. 발걸음은 늦어졌지만 그 보폭은 점점 멀어지고 깊어졌다. 이를테면 < 아다다 >를 만들고 난 다음 갑자기 < 개벽 >으로 점핑했을 때의 아득함. 혹은 < 창, 노는계집 >을 찍고 난 다음 갑자기 < 춘향뎐 >으로 넘어왔을 때의 망연자실함. 종종 선이 끊어진 듯한 느낌을 받을 때조차 있었다. 혹은 내가 붙잡은 선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는지 자문해보게 되었다. 매번 영화 앞에서 이쪽인가, 저쪽인가를 망설여야만 했다. 임권택 감독님은 대답을 하는 대신 다음 영화를 만들었다. 항상 영화가 끝났을 때 새로운 영화가 시작되었다. 한 편의 영화 안에 놓여진 하나의 세계. 가능한 세계. 그 세계 안의 무한한 가능성. 그때 나는 무엇을 따라가야 할 것인가. 2002년에 진행된 두 번째 인터뷰는 거기서 시작하였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두 번째는 훨씬 좋은 환경에서 진행되었다. 영상자료원은 기꺼이 내가 놓친 영화들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많은 영화들이 (불완전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비디오로 출시되었고, 이제 막 DVD로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많은 영화들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나는 그 영화들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없었다. 임권택 감독님은 그저 차라리 잘 없어졌다, 는 말로 대답을 대신 했다.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그런 다음에도 세 편의 영화가 더 만들어졌다. < 하류인생 >과 < 천년학 >, 그리고 < 달빛 길어 올리기 >. 나는 이미 이 세 편의 영화에 대한 인터뷰를 모두 마친 상태이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는 계속해서 이 인터뷰의 정리를 미루고 있었다. 핑계는 금방 임권택 감독님이 102번째 영화 촬영을 시작하게 될 예정이니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오랜 시간 망설여왔던 결정을 할 때가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갔다. 나는 처음에는 내 질문을 잘 알지 못했다. 내 질문을 정식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모리스 블랑쇼로부터의 배움 덕분이다. 나는 이제까지 영화란 무엇인가, 라는 대답을 얻고 싶어 했다. 블랑쇼는 질문을 바꾸었다. 문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나는 그 말을 영화에로 끌어당겼다. 영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때 영화적 경험의 공간이란 무엇인가? 모든 경험의 기억을 남겨둔 채 그것이 하나의 텍스트라는 윤곽만을 망각해버린다면 무슨 일이 생길 것인가. 거기에 온전히 남아있는 영화적인 경험의 순간들. 비평은 시선의 결단을 내려야한다. 어떤? 그것을 간신히 유지시키고 있는 윤곽을 지워버리기. 나는 완성에 대한 근심을 잊어버릴 생각이다. 그 대신 오로지 내가 경험한 영화적 공간 안에서 어떤 매개도 없이 찢겨져 나간 영화와 인터뷰 사이의 두 세계를 점핑할 것이다. 나의 기투(Entwurft)라는 모험. 나는 먼 길을 돌아서 다시 비평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 영화가 어떻게 완성되었느냐고 물어보는 대신 어떻게 출현하였느냐고 물어볼 것이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건 그 영화의 가능한 세계를 체험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만일 이때 의미를 찾는 일에 몰두한다면 우리는 매번 동일한 방식으로만 영화를 보게 될 것이다. 어떻게 우리들은 매번 새로워질 수 있을까. 나는 이제까지 대답을 찾았다. 지금부터는 다시 질문을 생각할 차례이다. 좋은 질문. 오류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실패를 겁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대답을 찾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나는 여기서 다시 시작한다. 마치 만난 적이 없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하나씩 다시 볼 것이다. 그런 다음 내가 볼 수 있는 모든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에 대한 글을 쓸 것이다. 이것은 전체의 긍정이다. 하나도 빠짐없이 그 모두를 긍정하기. 이때 나는 영화가 영화라는 것을 스스로 질문하는 장소에서 시작할 것이다. 자, 이제 구체적인 이야기를 할 차례이다. 나는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모든 영화를 다시 본 다음 다시 쓴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가능해진 것은 한국영상자료원의 도움 덕분이다. 어쩌면 이 글은 그들과 함께 쓰는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싶다) 나는 기억에 의존하지 않을 생각이다. 매번 마치 그 영화를 어제 본 것처럼 다시 본 다음 다시 쓸 것이다. 이미 이전에 그 영화에 대해서 쓴 글을 (가끔 참고는 하겠지만) 다시 끌어들이지 않을 것이다. 종종 과거의 영화들에 대해서 어떤 비평은 기억에 의존할 때가 있다. 나는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이런 경우 영화와 기억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 쓴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매번 그 영화를 내 앞에 다시 불러 세운 다음 다시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반대로 미래의 비평을 생각하고 있다. 과거의 영화를 현재의 자리에서 본 다음 그 영화를 생각할 때 그 사유는 미래의 종합이라는 방식으로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영화를 현재의 자리에서 미래에로 개방하기. 이때 세 개의 시간을 나는 하나의 자리에서 모으게 될 것이다. 이미 본 영화. 다시 보는 영화. 이미 경험한 영화, 다시 경험하는 시청각 기호들. 그 안에 담겨있을 매번의 새로운 발견의 가능성. 영화와 비평 사이의 선험적 경험주의. 나는 영화가 창조의 장소이며, 매번 새로운 가능성이 활동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보고 싶다. 나는 되돌아왔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 장소가 매번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영화에서 같은 장소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모든 예술에서 같은 장소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아쉽게도 나는 101편의 영화를 모두 쓸 수가 없다. 왜냐하면 현재 한국영상자료원에 보관되어 있는 영화는 모두 76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24편의 영화에 대해서 나는 아직도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 영화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 전쟁과 노인 >(1962), < 남자는 안 팔려 >(1963년), < 신문고 >(1963년), < 단장록 >, < 욕망의 결산 >, < 십자매 선생 >, < 단골지각생 >, < 영화마마 >, (모두 1964년) < 빗속에 지다 >, < 왕과 상노 > (1965년), < 닐니리 >(1966년), < 청사초롱 >, < 망향천리 >(모두 1967년), < 돌아온 왼손잡이 >(1968년), < 상해탈출 >, < 비 나리는 고모령 >(모두 1969년), < 이슬 맞은 백일홍 >, < 비 나리는 선창가 >, < 밤차로 온 사나이 >, < 비검 > (모두 1970년), <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마라 >, < 요검 > (모두 1971년), < 대추격 >, < 잡초 > (모두 1972년). 그 중에서도 가장 분한 것은 ( 임권택 감독 스스로 자신의 영화 경력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라고 말한) <잡초>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줄거리를 읽은 다음 이 영화를 처음부터 왠지 본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긴 하지만 기억이 분명치 않다. 두 번째, 나는 이 영화들을 연대기 순으로 써나가지는 않을 생각이다. 이건 전적으로 내 쪽에서의 이유이다. 나는 이 비평을 통해서 전기를 구성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트뤼포에게서 배운 것은 각 영화들을 그 자체로 존재케 하라, 는 것이었다. 차라리 전략이라고나 할까. 나는 영화들 사이의 관계를 과도하게 과장할 생각이 없다. 같은 해에 만들어진 영화들조차 서로 다른 영화사에서 서로 다른 이유로 서로 다른 스태프들과 함께 서로 다른 배우들로 만들어졌을 때 이 둘 사이의 관계는 쉽게 연결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종종 비평 담론들은 이들 영화 사이를 마치 친족관계처럼 설명하고 싶어 한다. 어쩌면 이건 비평의 관습일지도 모른다. 종종 하나의 이름 아래 규칙을 통일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969년은 1971년이 아니다. 혹은 1978년은 1980년이 아니다. 이 연도를 잘 생각해주기 바란다. 나는 그런 손쉬운 방법을 피하고 싶었다. 나는 연재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그런 방식으로 묶여있는 관계를 차례로 풀어낸 다음 나는 이들을 다시 배치시킬 모델을 찾아낼 생각이다. 서로 상이한 영역. 서로 다른 과정의 형성들. 나는 한 편의 영화가 매번 매우 복잡하고 상이하게 얽힌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단조로운 등질관계 아래 놓고 이야기될 수 있는 균형 잡힌 성질의 것이 아니다. 모든 영화는 각자의 창문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그 창문으로 각자의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이건 집합이 아니라 분산을 목표로 한 것이다. 그러니 제발 내게 어떤 영화가 임권택 영화 중의 최고냐고 물어보지 말길 바란다. 여기서는 어떤 영화가 어떤 영화보다 우월하거나 반대로 열등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각각의 영화들의 존재방식을 물어볼 것이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자신이 예술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일 때 거기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무조건적이자 절대적인 차이일 것이다. 자기 스스로 존재하고 그 존재에 대해 우리가 사유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각자의 힘. 각자의 아름다움. 다만 여기에 두 가지 원칙은 세웠다. 하나는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 올리기>를 맨 먼저 쓴 다음 두 번째 영화는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 를 쓴다는 것이다. 그건 일종의 고정점 역할을 해줄 것이다. 나는 임권택 감독님의 말을 믿기로 하였다. 자신의 101번째 영화를 가리켜 “나의 두 번째 데뷔작”이라고 불렀다. 나는 맨 먼저 두 편의 데뷔작을 다룰 생각이다. 다만 뒤의 것을 먼저 다룰 생각이다. 그런 다음 임권택이라는 별자리 안에서 어떻게 각각의 영화들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줄지를 생각할 것이다. 나는 아직 순서를 정하지 않았다. 아마 마지막 순간까지 순서를 정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내가 이 연재를 진행하는 도중 새로운 영화가 만들어지면 (아마도) 그 영화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세 번째. 그러나 이 모든 영화에 대한 비평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약간의 우회를 할 생각이다. 혹은 비평의 변주라고나 할까. (아직 아무 것도 결정하지는 않았지만) 필요하다면 그 영화에 대해서 누군가를 초대하여 토크를 하거나 혹은 라운드 테이블의 형식을 취할 생각이다. 나는 더 많은 친구들이 이 영화들을 환대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므로 나의 배움은 여러 가지 전술들을 동원하여 진행될 것이다. 어떻게 그 영화와 마주칠 것인가. 어떻게 그 영화를 껴안을 것인가. 어떻게 거기서 배움을 끌어낼 것인가.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노력 속에서 내가 끌어내고 싶은 것은 말 그대로 배움의 기쁨이다. 다소 길지만 이 말을 인용하고 싶다. “중국 옛말에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말이 있습니다. 옛날 화북지방에 북산우공(北山愚公)이라 불리는 노인이 살았습니다. 그의 집 대문이 남쪽으로 나 있었는데 태행산과 왕옥산이라는 두 큰 산이 그 출로에 버티고 있었습니다. 노인은 그의 아들들을 불러 괭이를 들리고 이 큰 산에 가 산을 파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지수(智?, 지혜로운 늙은이)라 불리는 다른 노인이 있었는데 그들을 보고 크게 웃으면서 당신들은 참으로 멍청하구려, 당신 부자 몇 사람이 큰 산 두 개를 옮기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요, 라고 말했습니다. 우공이 대답하길 내가 죽으면 아들이 있고, 아들이 죽으면 손자가 있고, 자자손손은 끝이 없습니다, 이 두 산이 아무리 높다한들 다시 더 높아지는 것은 아닐진대 조금씩, 조금씩 파헤치면 어찌 평평해지지 않겠습니까, 라고 대답했습니다. 옥황상제가 이에 감동하여 두 신선을 내려 보내 두 산을 지고 가게 했습니다” 나는 하나씩 써나갈 것이다. 내 결심. 하여튼 누군가 시작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긴 시간이 걸리겠지만 차례로 써나갈 것이다. 대장정. 물론 신선을 기다리지는 않을 생각이다. 다만 그러면 누군가는 또 다른 평을 쓰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씩 모이면 모든 한국영화들은 각자 자기 자신에 관한 각자의 영화평을 갖게 될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한국영화 편수와 동일한 숫자의 영화평을 갖게 될 것이다. 나는 둘 사이의 우정을 생각한다. 어떤 영화도 외로우면 안 된다. 어떤 영화는 운 좋게 두 편, 혹은 세 편, 어쩌면 열 편, 아니면 훨씬 그 이상의 친구를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때 어떤 영화들은 단 한 명의 친구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다시 그날처럼 11월 둘째 주 화요일이다. 임권택 감독님을 처음 만난 날. 나는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으로 시작한다. 두 번의 시작. 그리고 두 번째 시작!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