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소
- 감독
- 베르뜨랑 따베르니에
- 제작년도
- 1981
- 출연
- 필립 느와레, 이자벨 위페르, 장 피에르 마리엘, 스테파니 오드런, 에디 미첼, 가이 마찬드, 미첼 본, 장 샹피옹, 빅터 가리비에르
사진: " A Brighter Summer Day ", IMDb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과거에 만난 작품과 그로부터 얻은 영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 본 글에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일부 장면과 결말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 장손 >(2023)의 개봉 이후 인터뷰나 관객과의 대화를 통해 수많은 선배 감독의 영화를 참고하고 영향받았음을 솔직히 고백했다. 몇몇 필자들은 <장손>을 두고 존경받는 한국 감독들의 계보를 잇는 영화라 평하기도 했다. 감사하지만 과찬이라 민망할 따름이다. 지난 3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대담 에서 금동현 평론가는 나에게 내밀한 질문을 던져왔다. 그는 영화감독들이 공개적으로 영향받았다고 언급하는 영화들은 대개 거짓말이라 믿지 않는다며 나에게 숨기고 있는 진짜 영향받은 영화가 무엇이냐 물었다.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가장 소중한 것은 가장 깊이 숨기는 법이다. <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에드워드 양, 1991)을 처음 본 감각을 또렷이 기억한다. 무언가 대단한 걸 본 건 분명한데 이 영화가 왜 대단한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문득 다른 매체는 할 수 없는 무언가를 영화는 능히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 영화의 본질을 독자분들께 설명할 자신은 없다. 당시 대만 정치 상황과 에드워드 양의 영화 미학에 대한 뛰어난 평론은 많으니, 그것들을 참고해주기 바라며 나는 그저 ‘이 영화가 나를 스쳐 지나가며 남긴 흔적들’을 적어보려 한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1961년 6월 대만에서 최초로 발생한 미성년자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공교롭게도 감독 에드워드 양은 살인을 저지른 소년과 동갑으로, 이 사건은 그에게 잊지 못할 기억으로 각인되었을 것이다. 데뷔 이후 < 공포분자 >(1986)에 이르기까지 대만의 모더니티를 탐구하던 그는 돌연히 1960년 자신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샤오쓰가 감독 에드워드 양처럼 상해 출신의 외성인이라는 설정은 우연일 리가 없다. 비록 자전적인 이야기는 아닐지언정 자기 삶이 깊게 밴 친숙한 이야기임이 틀림없다. 사진: " A Brighter Summer Day ", IMDb 이 영화는 지루하거나 불친절하지 않다. 하지만 다 보고 나서 이 영화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인물들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떠올려 보면 쉽사리 답할 수가 없다. 에드워드 양은 의도적으로 영화의 모든 씬을 연결하지 않고 파편화한다. 영화는 샤오쓰를 따라가기도 하고 샤오밍을 따라가기도 하고 제3자를 따라가기도 한다. 타이베이의 한 마을이라는 제약 아래 카메라는 마을 곳곳을 반복적으로 비추며 그 변화를 보여준다. 예컨대 영화 초반에 217파와 학교에서 다투던 슬라이가 몰래 만나던 여성이 샤오추이인줄 알았으나, 3시간 30분이 지나서 사실은 샤오추이가 아니라 샤오밍임을 알게 되는 식이다. 영화는 수많은 복선으로 가득해서 단 한 장면이라도 놓치면 이후 등장하는 장면에서 의도하는 바를 알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모든 장면을 놓치지 않는다 한들 샤오쓰가 왜 샤오밍을 찌르는지, 에드워드 양이 이 영화를 통해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선명하지 않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완성될 수 없는 조각 그림 맞추기인 셈이다. 어쩌면 에드워드 양의 목표는, 애초에 정답이 없는 조각 그림 맞추기를 관객들이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맞추려고 노력하도록 하는 데 있지 않을까. 관객들이 서사에 함몰되지 않고 씬과 씬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유추하고 지연된 정보를 종합하는 사유의 과정에서 1960년의 장제스 치하의 타이베이 공기를 느껴보기를 에드워드 양은 바랄 것이다. 제목 그대로 영화 말미에 주인공 샤오쓰는 자신이 사랑하는 샤오밍을 칼로 찌른다. 사건을 저지른 직후 샤오쓰의 행동을 보면 마치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헛소리를 해대고 발작을 일으킨다. 마치 우리가 이제껏 보아온 샤오쓰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샤오쓰가 왜 샤오밍을 칼로 찌르게 됐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선 먼저 샤오밍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샤오밍은 마성의 매력을 가진 여학생으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녀를 좋아한다. 현재 그녀는 소공원파의 보스인 허니의 애인으로, 허니는 그녀 때문에 산동파의 보스를 죽이고 타이베이를 떠나 잠적한 상태다. 자연이 진공을 허락하지 않듯 허니가 사라지자 동네 수많은 남학생은 샤오밍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샤오밍 또한 남자들을 뿌리치지 않고 다음 짝을 고르듯 만난다. 하지만 이를 샤오밍의 남성 편력으로 오해해서는 곤란하다. 슬프게도 샤오밍에게 남자란 생존 전략의 수단에 가깝다. 샤오밍과 그녀의 엄마는 외성인으로 타이베이에 마땅한 기반이 없다.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하던 그녀는 엄마의 지병인 천식이 도지자 남의 집을 전전한다. 핑 아주머니에게 쫓겨난 그들은 야박한 친척 집을 들렀다가 소공원파의 경쟁조직인 217파에게까지 의지한다. 의아해 보이지만 사실 그녀가 217파 보스와 연인관계였던 것을 떠올려보면 자신의 친정집으로 돌아간 셈이다. 그러다 사라졌던 허니가 다시 돌아오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허니에게 의지한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허니와 샤오밍이 연인이라고 하지만 그 어떤 장면에서도 두 사람의 스킨십 장면이 없다. 그 흔한 손잡는 장면이나 포옹 장면도 없다. 그저 허니의 첫 등장에서 두 사람이 함께 서 있는 장면이 유일하게 함께 담긴 장면이다. 그리고 허니는 샤오쓰에게 “샤오밍이 널 많이 좋아한다고 그러더라”라고 말한다. 이게 어디 남자친구가 할 법한 말인가. 허니는 애인이 아니라 오히려 샤오밍에게 부재한 오빠나 아버지에 가깝다. 허니는 샤오밍의 유사 가족인 셈이다. 비극적인 사고로 허니가 죽자 다시 샤오밍은 떠돌아다닌다. 자신에게 환심을 보이는 의사 선생님에게 의지했다가 그에게 약혼녀가 생기자 다시 샤오마의 집에 식모살이로 들어간다. 그리고 아무런 능력이 없는 샤오쓰는 이 모든 과정을 무기력하게 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샤오밍과 허니 (사진: "A Brighter Summer Day"_ 1 , 2 , IMDb) 그러면 반대로 남자들은 왜 이렇게 샤오밍에게 열광하는가. 동네 불량배 남학생들은 허니가 사라지자 샤오밍에게 접근한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슬라이, 타이거, 샤오쓰 외에도 더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동네의 강력한 1인자 허니가 등장하자 꼬리를 감췄다가, 허니가 죽자 다시 샤오밍에게 접근한다. 샤오밍을 욕망하는 남자들은 샤오밍에게 경쟁적으로 구애하지 않고 서로 싸우기에 바쁘다. 그들에게 진정 원하는 것은 ‘샤오밍의 마음’이 아니라 샤오밍을 욕망할 수 있는 위치인 ‘허니의 위치’에 오르는 것이다. 르네 지라르를 빌려 이야기하면 자신 내부의 자발적 욕망이 아니라 중개자에 의해 만들어진 허상의 욕망인 셈이다. 남자들은 스스로 ‘샤오밍’을 욕망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거짓이며 욕망 중개자인 ‘허니’를 모방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정작 중요한 것인 ‘샤오밍의 마음’을 얻어 다른 남자들의 우위에 서는 ‘허니의 위치’에 오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샤오밍을 욕망하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샤오밍이 허니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질투하기는커녕 중요하게 생각한다. 샤오밍의 마음을 얻지 못한 남자들, 다시 말해 허니의 위치에 오르지 못한 자들은 모두 무너진다. 슬라이는 권력을 잃고 타이거 또한 말을 잃는다. 주인공 샤오쓰도 샤오밍을 평생 지켜주겠다며 고백하지만 거절당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른 여학생과 만남을 가지고 키스를 한다. 그리고 다음날 샤오쓰는 자신을 지켜준다는 약속을 지킬 거냐는 샤오밍에게 자신의 부정을 숨기고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샤오밍과 교제를 시작한 샤오쓰는 잠시 행복할 뿐 그녀가 떠나 버릴까 봐 불안하다. 샤오쓰는 샤오밍이 주위 남자들을 정리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널 깔볼 거야”라고 말하는데, 이는 실상 다른 사람들이 아닌 샤오쓰의 본심이다. 불미스러운 일로 퇴학을 당한 샤오쓰는 점점 샤오밍과 멀어진다. 큰 나무 아래서 샤오쓰는 주간부에 들어가기 전까지 샤오밍을 보러 가지 않겠다고 말하자 샤오밍은 “허니가 타이난으로 떠났을 때랑 비슷하네”라고 대답한다. 이는 마치 앞으로 벌어질 일의 불길한 복선처럼 느껴진다. 두 사람의 가장 빛나던 순간인 나무 아래 장면 다음 샤오마의 집으로 연결된다. 샤오마의 아버지는 고위 장군으로 그의 집에는 커다란 일본 장도와 총이 가득하다. 캣과 비행기는 전쟁놀이를 하고 있고 총을 가지고 장난을 치던 샤오밍은 실수로 샤오쓰를 향해 총을 쏴버린다. 샤오쓰는 그대로 얼어버리고 놀란 샤오마는 샤오밍의 손에 들린 총을 빼앗고는 뺨을 때린다. 모두의 선망 대상이자 친구 샤오쓰의 애인이지만 샤오마에게는 샤오밍은 그저 입버릇처럼 말하는 ‘여자 따위’에 불가하다. 여기서 결코 좁힐 수 없는 권력의 차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영화 속 남자들, 총을 겨눈 샤오밍 퇴학을 당한 샤오쓰는 주간부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에 매진하지만 계속 샤오밍을 그리워한다. 캣의 집에 놀러 간 샤오쓰는 캣에게 샤오밍의 안부를 묻는데 이때 샤오쓰가 은장도의 주인이자 정절를 중요시한 일본 여자의 사진을 보고 샤오밍을 언급한다는 사실은 꽤 의미심장하다. 이후 샤오밍을 볼 수 없는 샤오쓰는 일본 여자의 사진을 통해 샤오밍을 생각한다. 불안한 샤오쓰는 샤오밍이 자신만을 생각하고 정절을 지키길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슬라이를 통해 샤오밍이 샤오마의 집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샤오쓰는 샤오마와 갈등한다. 캣이 중재해 보려 하지만 샤오마가 칼을 들고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샤오쓰는 촬영장에서 종이에 글을 쓰더니 손전등을 두고 사라진다. 눈이 나쁜 샤오쓰가 항상 밤마다 들고 다니던 손전등을 버린다는 것은 더 이상 세상을 볼 필요가 없다는 뜻이며, 그가 쓰던 글은 나중에 밝혀지지만 둘째 누나에게 남기는 유서였다. 샤오쓰는 죽기를 각오한 것이다. 캣의 은장도를 들고 학교로 찾아간 샤오쓰는 샤오마 대신에 샤오밍을 우연히 마주치고는 이렇게 말한다. 사진: " A Brighter Summer Day ", IMDb “이제 네게 남은 희망은 나밖에 없어. 과거에 허니가 그랬지. 네가 왜 허니를 못 잊는지 알아? 그건 네가 날 허니처럼 생각해서 그래.” 자신이 곧 허니라고 말하는 샤오쓰는 자신이 샤오밍의 유일한 구원자라고 주장한다. 이에 샤오밍은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변하도록 도와주겠다는 거야? 너도 똑같아. 내가 사람을 잘못 봤네. 너도 다른 애들처럼 나한테 감정을 바라고 잘해 준 거였어. 그러면 안심이 될 테니까. 참 이기적이야. 네가 날 바꾸겠다고? 난 이 세상과 같아. 세상은 변할 수 없어.” 애석하게도 샤오밍은 샤오쓰를 ‘허니’가 아닌 허니가 되지 못한 ‘다른 애들’로 취급해 버린다. 순간 샤오쓰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셈이다. 허니가 되지 못한 공허한 존재, 샤오쓰는 반대로 자신이 지키려던 존재, 샤오밍을 부정해 버린다. 그건 샤오밍을 죽여버리는 것이다. 그는 정절을 지키지 못한 샤오밍을 비난하듯 은장도로 찌른다. “넌 희망이 없어. 뻔뻔한 계집 부끄러운 줄 알아.”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샤오쓰는 그대로 미쳐버리고 다시는 영화에서 그의 정상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샤오쓰가 샤오밍을 왜 죽였는지 묻는 영화가 아니라 샤오쓰가 샤오밍을 죽이기까지 어떻게 미쳐가는지 보여주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아쉽게도 내 능력의 부족과 마감 기한이 임박한 관계로 영화 속 학생들의 세계 중 일부만 다루는 반쪽짜리 글로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영화 속 어른의 세계를 다뤄보기를 바라며 마지막으로 독자분들과 나누고 싶은 인상적인 장면 세 가지와 영화를 보며 해소되지 않는 질문 세 가지만 공유해보고 싶다. 1) 체육 시간에 캣은 허니를 무시하는 타이거에게 공을 날린다. 공에 맞은 타이거는 이를 샤오쓰의 행동으로 오해한다. 하교하던 샤오쓰 일행은 어둠 속에서 웃음소리와 함께 날아온 농구공을 마주한다. 개인적으로 태풍 속에서 217파를 살육하는 장면보다 훨씬 무섭다. 타이거로 유추는 가능하지만 상대방이 누군지 몇 명인지 어떤 무기를 들고 있는지 우리는 도저히 알 수 없다. 에드워드 양은 이 장면에서 공포를 보여주는 대신 상상하게 만든다. 보여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지만 우리의 상상은 한계가 없다. 2) 샤오쓰의 아버지는 친한 친구 왕 선생과 연루되어 이적 혐의로 며칠 동안 비밀경찰의 심문을 받는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자신이 알고 모든 것을 진술하기를 강요받는다. 이 장면의 첫 컷에서 카메라는 아버지에게 천천히 다가간다. 발소리와 함께 진술을 그만해도 된다는 경찰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경찰의 시점 샷으로 유추된다. 아버지는 시간을 조금 더 달라고 부탁하는데 이때 먼 곳에서 다른 경찰의 목소리가 들린다. 놀란 아버지는 뒤를 돌아보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아버지는 환청을 들은 셈이다. 그런데 이때 샷 구성이 굉장히 흥미로운데, 두 번째 컷에서 아버지의 시점 샷 대신에 대신 경찰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위치에서 시점 샷으로 연결된다. 아버지가 경찰의 시선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독재국가의 폭력에 미쳐버린 아버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자기검열과 감시의 시선을 내면화한 죄수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그려낸다. 세 번째 컷에서 드디어 아버지의 시점 샷으로 문이 활짝 열린 모습이 나오는데 아버지는 왠지 열린 문으로 쉽사리 나가지는 못할 것 같다. 3) 샤오밍이 샤오마의 집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샤오쓰는 당장 샤오마의 집으로 찾아간다. 샤오쓰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지자, 샤오마는 샤오밍이 자신의 집에 찾아와 일자리를 달라고 부탁해서 받아준 것이라고 대답한다.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 들어와서 샤오밍을 만나고 가라고 하지만 샤오쓰는 끝내 들어가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샤오마를 따라 오른쪽으로 이동한 다음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샷이 나누어지지 않은 채로 지속된다. 우리는 집 안에 있는 샤오마를 볼 수 있지만, 바깥에 있는 샤오쓰는 볼 수 없다. 오직 목소리로만 샤오쓰를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에드워드 양은 왜 컷을 나눠서 샤오쓰를 비추지 않았을까? 에드워드 양은 이 장면에서 샤오쓰가 차마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심정을 찍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샤오밍이 살고 있는 샤오마의 집에 한 발짝도 들이고 싶지 않은 샤오쓰의 내면을 샤오쓰가 등장하지 않는 장면으로 형상화해낸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모든 장면이 뛰어나지만 특히 이 장면이 가장 훌륭하다. 나에게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사유를 매번 하게 만드는 선생님 같은 장면이다. - - - 앞서 말했듯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완성될 수 없는 조각 그림 맞추기 같은 영화다. 몇 번을 봐도 해결할 수 없는 의문점이 생긴다. 첫 번째 질문. 의사 선생님은 왜 샤오밍에게 호의를 베풀었는가. 의사 선생님은 샤오밍과 그녀의 어머니까지 치료해 주고 지낼 곳을 마련해준다. 샤오밍의 말처럼 의사 선생님도 그녀를 좋아해서 무언가 대가를 바라고 한 행동인지 아니면 순수하게 의료인으로서의 호의를 베푼 것인지 알 수 없다. 샤오밍이 죽고 난 뒤 그녀와 어떤 관계였냐고 따져 묻는 기자의 말에 발끈하는 의사 선생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주저하게 된다. 다음 질문. 샤오추이는 어떤 인물인가. 샤오밍이 샤오마의 집에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샤오쓰는 샤오추이와 데이트를 한다. 이때 샤오추이는 슬라이가 학교에서 217파와 붙었을 때 옆에 있던 여자가 자신이 아닌 샤오밍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슬라이가 허니가 돌아오면 맞아 죽을까 봐 샤오밍이 아닌 자신이라고 소문을 냈다는 것이다. 사실 샤오쓰는 몰랐던 사실이지만 샤오추이는 이런 비밀을 지켜줘서 고맙다고 말한다. 그런데 샤오추이가 고마워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남자들이 샤오밍을 욕망하며 허니가 되고 싶었던 것처럼 샤오추이도 슬라이를 욕망하며 샤오밍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마지막 질문. 엔딩 장면의 의미는 무엇인가. 결국 15년형을 선고받은 샤오쓰가 떠나고 남은 가족들은 대청소를 하고 있다. 그러던 중 고장 났던 라디오가 다시 작동하더니 대학 합격 명단이 흘러나온다. 마당에서 옷을 정리하던 샤오쓰의 어머니는 샤오쓰의 교복을 발견하고는 생각에 잠긴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수많은 명단 중 샤오쓰의 본명인 ‘장첸’이라는 이름이 흘러나오는데, 현실적으로 중학생이자 감옥에 있는 샤오쓰는 대학에 들어갈 수 없다. ‘장첸’이라는 이름이 우연으로 들어갈 리도 없는데 에드워드 양은 왜 이런 장면을 엔딩으로 선택했을까. 이 정답 없는 질문들을 공유하며 언젠가 독자분들과 함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 대한 대화를 나누기를 고대한다. 마지막으로 내 마음의 북극성 같은 에드워드 양 감독님께 존경의 인사를 보내며, 나 또한 이렇게 끊임없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약속을 남긴다. 오정민(영화감독) l 영화로 먹고사는 방법을 열심히 찾고 있는 베짱이. < 장손 >(2023)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