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드 리벤지
- 감독
- 라울 루이즈
- 제작년도
- 2010
- 출연
- 다릴 한나, 톰 콘티, 미리암 마고리스, 사이먼 맥코킨데일, 윌리엄 엘리스 , 타이 글래저
올해는 13편을 골랐다. 리스트에 오르지 않은 영화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빈 폴 , 사마에게 인데, 이들은 모두 작년 영화라고 한다. 하지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빼면 내 리스트는 허망해질 것이고, 사마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지금 러시아에서 공장생산되는 것처럼 쏟아져 나오는 회고조의 제2차 세계대전 영화들이 걱정되는 관객들은 빈 폴이 이 상황에서 얼마나 강력한 치료제인지 알 것이다. 리스트에 오른 영화들을 보자. 남매의 여름밤 은 벌새 의 뒤를 잇는 올해의 한국 영화이다. 하지만 극장 바깥을 보면 난폭하고 정신없고, 충무로 내부에서는 절대로 만들어질 수 없는 보건교사 안은영 이 질주하고 있다. 인비저블 맨 은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대한 할리우드의 집착이 얼마나 허망한지, 이를 벗어나면 얼마나 다양한 가능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레디 오어 낫 은 호러 영화가 사회적 메시지를 담는다고 해서 뻔뻔스러운 장르적 즐거움을 포기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걸 보여준다. 소년시절의 너 는 동아시아 교육 시스템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이라면 공감과 공포를 모두 느낄 수밖에 없는 폭탄 같은 멜로드라마다. 월드 오브 투모로우 에피소드 3: 앱센트 데스티네이션스 오브 데이비드 프라임 을 만들면서 돈 허츠펠트는 21세기의 가장 훌륭한 SF 삼부작 영화를 완성했다. 작은 아씨들 을 빼먹고 오래된 고전의 새로운 재해석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없다. 딕 존슨 이즈 데드 에서 영화 만들기의 작업은 감독의 가족사와 아름답고 유쾌한 조화를 이룬다. 퀸스 갬빗 에 대해 말할 것 같으면, 이전엔 아카데미를 노리고 만들어졌던 훌륭한 드라마들이 넷플릭스로 옮겨가고 있는 것 같다. 반쪽의 이야기 를 해보자. 이 작품은 올해 본 영화들 중 가장 개인적인 작품이 될 텐데, 그건 내 어린 시절 덕질과 관련있다. 어렸을 때 나는 요새 중고등학생들이 아이돌을 파듯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를 팠다. 실존 인물을 판 게 아니라 에드몽 로스탕이 자신의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에서 재창조한 코쟁이 시인을 판 것이다. 왜냐고 묻는다면 길게 설명할 수 있지만 그건 좀 무의미한 일이다. 어린 시절은 아무 것에나 심장이 찔리기 마련이고 그 상흔은 꽤 오래간다. 그냥 그랬다고 할 수밖에. 반쪽의 이야기는 내가 본 시라노 각색물과 파생물 중 최고다. 그리고 나는 꽤 많은 작품들을 보았다. 장 폴 라프노가 감독하고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나오는 시라노 는 많이들 결정판으로 여기고 있지만 둔중하고 맥빠진 영화라 영 별로다. 호세 페러가 아카데미 상을 받은 마이클 고든의 할리우드 영화는 그보다 낫지만 좀 녹화된 연극 같다. 프레드 셰피시가 감독하고 스티브 마틴이 코쟁이 소방서장으로 나오는 록산느 가 오히려 괜찮다. 마이클 레만의 고양이와 개에 관한 진실 은 성별을 뒤집은 사랑스러운 영화이다. 시라노 연애조작단 은 잘 만든 로맨틱 코미디지만 편지 대필이라는 설정만 남고 캐릭터가 빠져 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오페라, 뮤지컬, 텔레비전 드라마, 라디오 각색물들이 있고 이들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여기서 멈추기로 하자. 훌륭한 시라노 영화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요약만 읽으면 도저히 납득이 안 가는 구식 설정을 영화의 현대적인 설정 속에서 이치에 맞아 보일 수 있도록 개조하고 그 안에서 세 주인공들을 바보스럽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시라노를 만들어야 한다. 원작은 큰 문제가 없다. 원작이 나왔을 무렵에도 과거였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무대극, 심지어 대사 대부분이 시인 운문극을 보면서 설정의 사실성을 따지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새 시리노 이야기의 배경이 21세기 미국 고등학교라면 사정이 다르다. 사실 반쪽의 이야기에서도 시라노의 설정은 아주 잘 맞지 않는다. 일단 지금은 아무도 종이 편지를 쓰지 않기 때문에. 심지어 이건 영화가 대사를 통해 직접 언급하고 넘어가는 내용이다. 하지만 21세기의 변화한 사회는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설득력 있는 시라노 이야기를 가능하게 한다. 우리의 새 시라노는 편지를 대신 쓰기도 하지만 모바일 문자를 이용하기도 한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새 시라노를 만들어야 한다. 로스탕의 시라노는 코가 지나치게 컸다. (실존 인물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고 한다). 우린 외모지상주의 사회를 살고 있으니 외모의 핸디캡은 여전히 먹힌다. 하지만 원작이 백년 넘게 써온 소재 안에서 경쟁하기는 쉽지 않다. 반쪽의 이야기가 택한 것은 인종과 성별이다. 이 영화의 시라노는 중국계 동성애자 여성이다. 조금 뒤에 역시 넷플릭스에서 풀린 블라이 저택의 유령과 비교할 만 하다. 모두가 아는 고전 이야기의 주인공을 현대 또는 가까운 과거로 데려와 새로운 핸드캡을 주기 위해 퀴어 설정이 도입된 것이다. 단지 여기서 ‘선택’이라는 단어는 잘못 쓰였다. 이 영화를 쓰고 감독한 앨리스 우는 새로운 시라노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인종과 성별을 선택한 게 아니라 인종과 성별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시라노를 선택한 것이다. 미국에 사는 중국계 퀴어 여성인 감독은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알마나 쉽게 시라노가 되는지 알고 있다. 반쪽의 이야기는 아무도 믿지 못할 어처구니 없는 설정이 자연스러울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개조된 상황을 보자. 엘리 추는 사교성 없는 중국계 학생이다. 동양인은 자신과 아버지밖에 없는 작은 시골 마을에 살고 있다. 모범생인 엘리에게 학교 미식축구 선수인 폴 먼스키가 접근해 온다. 폴은 엘리가 자기 대신 짝사랑하는 애스터 플로레스에게 편지를 써주길 바란다. 엘리는 이전부터 돈을 받고 다른 학생들의 숙제를 대신 해주고 있으니 이건 또다른 아르바이트에 불과하다: 폴이 모르는 건 엘리 역시 애스터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설정을 수정하면서 반쪽의 이야기는 원작에서 몇 걸음 더 나아간다. 시라노는 자신의 아바타로 잘생긴 크리스티앙을 내세웠다. 둘은 모두 백인 남자로 그들의 차이는 당시 생각했던 것만큼 크지 않다. 시라노의 정신과 크리스티앙의 외모의 결합이라는 비유도 자연스러워졌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 엘리는 시라노처럼 ‘자신과 같은 부류지만 더 잘생긴 누군가’를 내세우지 못한다. 반쪽의 이야기는 자신 또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자판으로 ‘나’라고 칠 때 그 ‘나’가 고의적으로 실제 자신을 비껴가는 사람들. 자신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전시하지 못하고 아바타를 빌리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 대신 아바타로 등장하는 건 이성애자 백인남자다. 자신이 아닌 것의 총집합. 이건 굉징히 잔인하고 날카로운 코미디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반쪽의 이야기는 그런 영화가 아니고,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길을 간다. 영화는 나오는 거의 모든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이 이야기에는 어리석은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다. 글도 못쓰고 말도 못하며 생각이 단순한 폴도 어리석지는 않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의 좁은 생각 안에 갇혀 있다. 하지만 폴은 늘 자기 바깥으로 나간다. 처음엔 그냥 대필작가로 머리를 빌리려 했던 엘리와 친구가 되고 결국엔 엘리의 입장을 이해한다. 사기의 희생자로 그려지기 쉬운 록산느 역할의 애스터도 마찬가지다. 후반 설정을 잘 짜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엘리와 애스터의 대화에는 진짜 소울메이트를 만난 사람들의 흥분이 느껴진다. 디지털 시대가 일방적인 시라노의 편지 공격을 완전히 다른 형태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로스탕의 시라노는 백인 남자 예술가의 자뻑 이야기다. 아무리 오랜 덕질 대상이라고 해도 그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시라노의 이야기는 비극적인 예술가자 자의로 감추고 있던 비밀이 죽음 직전에 밝혀지면서, 그 자뻑이 하늘을 찌를 때 끝이 난다. 하지만 남자 예술가의 일방적인 편지가 아닌 세 청소년의 열린 대화를 다룬 반쪽의 이야기는 더 성숙하다. 시라노와는 달리 이들에겐 미래가 열려있다. 그들은 이 소동이 끝난 뒤에도 계속 성장하면서 아직 어디로 흐를 지 알 수 없는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 것이다. 그리고 엘리 추는 ‘나’가 자기자신인 글을 쓸 것이다.
1991년 4월, 강경대가 사망했다. 등록금 인상 반대 시위에 참여했던 그는 사복경찰에 쫓겨 학교 담을 오르다 붙들렸고 무자비한 매질을 당했다. 이제 막 대학 생활을 시작한 고작 1학년 학생이었다. 너무 이른 죽음이었고 사무치는 죽음이었다. 강경대의 죽음은 전국적인 학생 시위가 일어나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렇게 이어진 5월, 자본과 국가권력의 거대한 폭력에 압도당한 불가항력의 상황 속에 어린 노동자와 청년들이 자신의 몸에 불을 사르고 투신했다. 이른바 분신정국이라 불리던 시기였다. 이러한 와중에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가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됐고, 그의 시신마저 공권력이 병원 영안실 벽을 뚫고 들어와 탈취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리고 또다시, 시위에 참여했던 성균관대 김귀정이 거리에서 주검으로 발견된다. 그렇게 5월, 국가권력의 폭력 속에, 그해 한 달 동안에만 무려 열 한 명의 청춘이 목숨을 잃었다. 정국과 여론이 심상치 않자 권력은 묘수를 찾아낸다. 서강대 박홍 총장은 죽음을 부추기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선동했고, 한때 민주주의를 노래하던 시인 김지하는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죽음의 굿판을 집어치우라’며 권력을 비호했다. 그리고 예의 사건이 벌어진다. 유서를 남기고 분신한 전민련 김기설 씨의 죽음이 함께 일했던 동지들에 의해 방조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김기설 유서 대필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당시 이십 대 중반의 청년, 강기훈이 유서 대필자로 지목되어 수감된다. 폭력적인 권력과 그 하수들이 만들어낸 상상을 뛰어넘는 조작극이었다. 그로부터 이십육 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갔다. 저항보다는 순응을, 연대와 공동체보다는 경쟁과 생존을 강요받은 지금의 청춘들과 대학가의 풍경은 91년 청년들이 투쟁하고 부대끼던 시대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변하였다. 그렇다면 이제는 누가 오월의 열사들을, 그리고 그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있을 것인가. 영화 < 국가에 대한 예의 >는 91년 4월 강경대 열사의 죽음으로 촉발된 저항 운동과 그 역사적 격랑에 희생된 무수한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서대필자로 처벌받았던 강기훈 씨의 현재를 기록한다. 시대에 저항했던 죽음을 한낱 ‘강요되고 대필 되는’ 죽음의 프레임으로 매도했던 이들이 여전히 권력의 중심에 서 있는 동안, 동료들의 죽음을 목격하고 그들을 잃어야만 했던 이들은 강요된 죄의식과 트마우마 속에서 숨죽여야만 했다. 이십 대 청년이었던 강기훈은 당시 3년의 수감생활을 해야만 했으며, 출소 후 오랜 진상규명과 법적 투쟁 끝에, 24년이 지난 2015년 대법원으로부터 무죄판결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즈음 그는 간암 판정을 받았고 두 차례의 수술을 받았으나 몸은 사위었다. 주변 사람들이 그의 병세를 알아챌 무렵 그는 뜻밖에도 기타를 들고 그들 앞에 서게 된다. 속내를 알 수 없고 무심하던 그가 그의 곁을 지켜준 이들에게 할 수 있는 감사의 표시이자, 자신의 오랜 음악적 열정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이 영화는 거대한 시대적 폭력이 앗아간 청춘의 꿈과 상처에 대한 회한과 기억을 상기시킨다. 이제는 잊힌 열사들의 이름들. 혹은 ‘열사’라는 거대한 호명에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이십대 혹은 십대 어린 청춘들의 피지 못한 사적인 소망과 앳된 얼굴들. 이들과 비슷한 시기에 청춘을 보낸 이들이라면 더더욱 이 영화는 자신의 망각과 혹은 청춘의 기억을 자극한다. 동시대 시위현장에서 무수하게 외치고 부르짖었던 저들의 이름은 우리의 길고 지루한 삶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영화 속 영정 사진들을 통해 본 저들의 얼굴은 너무도 젊고 어렸음에 새삼 놀라게 된다. 시위 현장에서 사망한 김귀정은 일기장에 “십 년 후 나는 어떤 모습일까”라는 글귀를 남겼다. 그리고 동시대를 살아왔던 우리들, 십 년 후가 아니라 이십여 년의 시간을 보낸 우리에게 그들의 이름은 우리의 청춘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비로소 밀려오는 상념들. 나의 지난 삶은 어떠했는가. 2016-17년, 촛불의 승리가 주는 묘한 ‘환각’적 상태에서 불현듯 상기된 오랜 기억들. 이 영화는 이제는 잊힌 지난 시절, 격렬히 저항하고 부대끼며 살아왔던 선배들에 대한 기억이자 증언이며, 그들과 같은 시대를 보냈던 청춘들에게 자신의 지난날을 회고하고 상기시킨다. 그런데 그 기억은 묘하게 씁쓸하고 아련하며 허탈하다.
전자음으로 이뤄진 불안하고도 여린 선율 속에 무표정한 남자의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등장한다. 표정없던 남자의 얼굴에서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금세 미소가 번지며 말하기 시작한다. 뭐지? 혼잣말? 그런데 본인 얘기는 아닌 것 같고 일단 좀 더 기다릴 수밖에 없다. 아~! 40대 중반이지만 여전히 장난꾸러기 소년과 같은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을 지닌, 감독 스파이크 존즈의 작품을 접할 때면 매번 크고 작은 탄식이 잇따른다. 그의 넘치는 (장난기를 포함한) 끼와 상상력에 대한 시기와 놀라움이 섞인 탄식은 풋 하고 터져 나오는 웃음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정확하지 않은 어느 미래, 손편지 대필 회사에서 작가로 일하는 테오도르는 무심하게 스팸메일은 삭제하지만, 섹시 스타의 화보는 꼭 확인하는 이혼 예정남이다. 게임과 채팅룸으로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을 극복하려 해보지만, 돌아오는 건 고양이 사체에 흥분하는 여자뿐. 그마저도 거절 못 하고 응해주는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그에게 선물처럼 ‘그녀’가 등장한다. 그리고 첫 마디를 건넨다. “Hello? I’m here.” 베를린영화제에서 상영됐던 존즈의 2010년 단편 <아임 히어 I’m Here>의 여자 로봇 프란체스카가 남자 로봇 셸든과 세상에게 하고 싶은 말이 ‘I’m here’였고, 최인호 의 단편 < 타인의 방 >에서 남자가 자신의 집 문 앞에서 끝내 하지 못했던 말도 ‘I’m here’였다. 그토록 듣고 싶고, 말하고 싶었던 한 마디는 나의 존재를 일깨워 줄 단순한 인사였을 것이다. 이름을 불러주고 나서야 꽃이 됐듯 최초의 인공지능 운영체제 OS1, 사만다는 테오도르의 대화 상대가 되어 연신 질문하고, 대답하며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는다. 이혼서류의 서명만을 남겨둔 채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테오드르의 일상은 사만다의 등장으로 조금씩 변화해간다. 사랑은 사랑으로 잊혀지고, 항상 시작은 전보다 나은 사랑인 것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저 신기하기만 했던 대상이 감정을 지닌 인격체로 느껴지는 건, 테오도르의 기분에 맞춰 목소리의 톤까지 조절해가며 실감 나게 위로해주는 사만다, 스칼렛 요한슨의 탁월한 목소리 연기가 한몫한다. 워낙 개성 있는 목소리를 가져 인지하기 쉬운 배우이기에 등장할 때부터 떠오르는 건 사실 실제 모습이다. 극 설정 자체에 빠져드는 데는 인지할 수 없는 일반 여성의 목소리가 나았겠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목소리이기 때문에 관객도 OS1을 여성으로 받아들이기 쉬웠을 테다. 게다가 감독의 위트가 엿보이는 ‘점’ 신을 보고 나면, 요한슨이 왜 필요한지 알게 된다. 둘의 관계는 ‘몸을 갖고 싶다’는 그래서 상대와 같아지고 싶다는 사만다의 욕심으로 인해 위기를 맞지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함으로써 극복한다. 운영체제와의 사랑이 주변 사람에게 자연스레 인정받는 설정은 무척 재미있다. 3명이 가는 커플 여행이라니! 매번 존즈가 창조한 세상에서는 이상한 환상은 당연하고 평범한 현실이 되고, 주인공은 더 인간적이어서 생각할 구석을 만들어내곤 한다. 바쁘게 돌아가는 도심 속의 개 인간의 귀갓길(뮤직비디오 <다 펑크 Da Funk>)이나 도서관에서 일하는 로봇 셸든(단편 <아임 히어>)의 출퇴근길에 인간과의 어색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불붙은 남자(뮤직비디오 <캘리포니아 California>)까지도 그저 어딘가로 급히 달려가는 남자일 뿐이다. 조금 다르다는 점 말고는 그들은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한다.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사랑은 그저 사랑 그 자체를 얘기하기 위한 설정으로서 기능한다. 불안하게 이어가던 그들의 사랑은 테오도르가 사만다를 혼자만 독점할 수 없다는 걸 아는 순간파경에 이른다. 자신은 사만다가 동시에 대화하는 8,316명 중 하나이며, 641명과 함께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상대에 대한 독점적 소유욕이 사랑의 한 속성이라면, 결국 그들은 양보할 수 없는 차이점이 문제였다. 물론 이런 이유가 아니라도 내 품으로 감당할 수 없는 단계로의 성장을 준비하는 상대방은 놔줄 수밖에 없다. 또 하나의 사랑을 보내며 한 단계 성숙해진 테오도르는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편지에 담아 전부인 캐서린에게 보낸다. 타인의 감정만을 대신하는 사이 정작 자신에게는 솔직하지 못했던 그는 신기루 같았던 사랑을 뒤로하고, 차분하게 또 다른 사랑을 기다린다. 스스로 솔직하며 짧은 인생, 즐겁게 살자.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치이고, 연신 사랑에 실패하는 현대인을 풍부한 감성으로 위로해주는 < 그녀 >를 통해 감독은 정작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그리고 게임에서가 아니라 진짜 세상에서 인간끼리 서로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서로 위로하며 즐겁게 그렇게 살자, 라고. 파스텔톤의 원색 가득, 황홀하고 아름다운 미술과 의상 속에 감성이 뚝뚝 묻어나지만, 그 안에서 자제하고 자제해도 어쩔 수 없이 표출되는 감독의 B급 취향이 사실 더 큰 재미였다.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웃음이 가득하다. 극 중 테오도르가 즐겨 하는 게임 속 욕쟁이 캐릭터, 외계인 소년의 목소리가 존즈라면? 존즈의 영원히 늙지 않을 것 같은 상상력과 괴짜스런 장난기는 어쩌면 아이 같은 코맹맹이 목소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실없는 생각을 해본다. 그에게는 오지 않았던 변성기처럼, 재미없는 어른으로 크기보다 지금 그대로 탄식과 웃음이 어우러지는 작품을 계속 만들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