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얄개
- 감독
- 김응천
- 제작년도
- 1982
- 출연
- 이승현, 강주희, 이덕화, 전영록, 김보연, 손창호, 박재호, 권오현, 전진영, 김민규, 문미봉, 김태정, 박예숙, 라삐또리오 신부, 구창모, 배철수, 이봉한, 김정선, 김상복, 오승동
충무로는 1980년대로 넘어오면서 장르적 지형도의 변화를 겪는다. 크진 않았다. 하지만 몇 가지는 기록할 만하다. 먼저 여전한 장르는 멜로드라마와 액션이었다. < 미워도 다시 한번 >( 정소영 , 1968) 류의 신파 멜로는 꾸준히 만들어졌다. 합작(혹은 위장 합작)을 통한 무협 액션 영화도 왕성했다. 합작과는 무관하면서도 ‘중국식 제목’을 단 한국영화들, 그러니까 < 무림오걸 >( 김시현 , 1979) < 애권 >( 이형표 , 1980) < 소림사 주방장 >( 김정용 , 1981) 같은 영화들의 러시가 이뤄졌고, < 협객 시라소니 >( 이혁수 , 1980) 같은 전통적인 ‘따찌마리’ 액션도 이어졌다. 사라진 장르도 있었다. 호러가 대표적이다. 메이저 장르는 아니었지만 근근이 명맥을 이어오던 한국 공포 영화는 1980년대 중반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 부활을 목격하기 위해선 1998년 < 여고괴담 >( 박기형 )까지 10년 넘게 기다려야 했다. 새로 생긴 장르도 있었다. 아동용 SF 액션이다. 지금 보면 조잡하기 그지없는 특수효과로 점철된, ‘우뢰매’ 시리즈(1986~93)나 ‘별똥왕자’ 시리즈(1987~88)는 1980년대의 발명품이었다. 마지막으로, 변형된 장르가 있다. 일종의 진화라고 해도 좋을 거다. 1970년대 ‘얄개 영화’는 1980년대에 연령대를 조금 높여서 < 대학얄개 >( 김응천 , 1982)로 다시 태어났고, < 오성군 한음군 >( 박호태 , 1988) 같은 영화로 이어지기도 했으며, 1989년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 강우석 ) 이후엔 사회적 이슈와 결합되어 1990년대 초를 장식했다. 1. 토속 영화의 조짐이 보였던 < 심봤다 > 2. 1985년에 나온 < 뽕 >은 토속 영화의 분기점이 되는 작품으로, 이후 컬트로서 추앙받는다. 3-4. 정윤희 가 주연을 맡았던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왼쪽)와 <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오른쪽). 자연 속에서 파라다이스를 즐기던 순수한 남녀는 외부자에 의해 그곳을 침범 당하고, 결국 여자 주인공은 죽음을 맞이한다. 1980년대에 또 하나의 ‘변종’이 있다면 흔히 ‘토속물’ 혹은 ‘향토물’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연상케 하는 제목으로 지칭되던 그 영화들이다. 이 글에선 ‘토속 영화’라는 명칭으로 통일할 이 영화들은, 거칠게 정의 내리면 이른바 ‘문예영화’가 에로티시즘을 만난 결과다. 1970년대까지 검열의 수위 안에서 원작 소설을 표현했다면, 1980년대엔 과감해졌다. 과거 이미 만들어졌던 정비석 의 『성황당』, 이효석 의 『분녀』, 나도향의 『물레방아』 등은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 정진우 , 1981) < 산딸기 >( 김수형 , 1982) < 물레방아 >( 조명화 , 1986) 등으로 좀 더 에로틱하게 재등장했고, 김유정 의 『땡볕』 『떡』 등도 소환되었다. 그러면서 문예영화의 범주를 벗어난, 다소 유명하지 않은 작가의 소설을 각색하거나 창작 시나리오를 토대로 한 토속 영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영화들은 (주로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에로티시즘 사극과 구분되어야 한다. 토속 영화는,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토속 에로티시즘 멜로드라마는 사극이 지니는 유교적 세계관에서 벗어나며, 시대 배경은 식민지 시기 농촌이나 어촌이다. 공통점도 있다. 1980년대 토속 영화와 사극은 한국영화에서 여성에게 가장 가혹했던 장르였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처참한 지경에 이르며 죽음에 이르는 여성들의 영화. 그들은 마치 세상의 모든 모순을 떠안아야 하는 것처럼 보였고, 당시 외국에서 한국영화 특별전이 열리면 서구 관객들은 “한국영화는 왜 그렇게 여자를 때리느냐”고 항의성 질문을 던질 정도였다. 1. < 산딸기 >의 한 장면. 물레방앗간은 토속 영화에서 반복되는 핵심적 공간이다. 주로 비밀스러운 정사가 이뤄지는 그곳에선 종종 여성의 운명이 결정된다. 2. < 산딸기 >의 엔딩. 명준과 분녀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명준은 말한다. “그래 저 학들처럼 천년만년 살자.” 토속 영화는 ‘새’의 상징을 자주 사용한다. 정진우 감독은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 <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를 만들었고(<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 >(1983)까지 묶어 ‘새 3부작’), < 여자의 성 >에서 별녀는 어릴 적 숲에서 죽어가는 새를 데리고 와 살리는데, 그 가련한 새는 이후 별녀의 삶을 상징한다. 그리고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 산딸기 2 > <여자의 성>은 모두 새 소리를 섹스의 신호로 사용한다. 3. < 숲속의 바보 >는 토속 장르에 ‘백치 여인’ 캐릭터를 끌어왔다. 4. 문예 영화는 1980년대에 토속 영화의 방식으로 변형되어 지속된다. 사진은 김동인 원작의 < 감자 > 그 시작을 살펴보면 1970년대 말에 조짐이 있었다. 선두 주자는 정진우 감독이었다. 이은성 작가의 시나리오를 토대로 한 < 심봤다 >(1979)는, 문예 영화의 톤이 짙긴 했지만 이후 등장할 토속 영화 트렌드를 예견케 했고,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가 이어졌다. 결정타는 김수형 감독의 1982년 작 < 산딸기 >였다. 안소영 - 선우일란 - 강혜지 - 소비아 로 주연 여배우의 변화를 겪으며 1994년 6편까지 이어진 이 토종 프랜차이즈는 토속 영화의 얼개를 만들었다. < 산딸기 > 1편을 보자. 화전민 마을에 분녀( 안소영 )가 산다. 한가위 마을 잔치 때 취바리 탈을 쓴 누군가에게 겁탈당한 분녀는, 그 주인공이 마을 청년 명준( 임동진 )이라는 걸 알게 된다. 노다지를 찾아 만주로 떠난 명준을 분녀는 기다린다(안소영과 임동진은 같은 해 < 애마부인 >( 정인엽 , 1982)에서도 공연했고, 여기서도 안소영은 (감옥에 간 남편) 임동진을 기다렸다). 마을 남자들은 호시탐탐 분녀를 노리고, 급기야 자기들끼리 싸우다 두 명이 죽는다. 이에 ‘남자 잡아먹는 X’라며 마을에서 쫓겨나게 된 분녀는 가마 주인(남궁원)을 따라 읍내로 가 술집 작부가 된다. < 산딸기 >는 토속 영화의 핵심 구조를 제시한다. 바로 이분법이다. ‘시골 vs. 도시’라는 구도 속에서 토속 영화는 여러 대립항들을 만들어낸다. 아직 물물교환이 익숙한 ‘촌’이 있다면, 그 반대편엔 ‘장터’라는 공간으로 상징되는 ‘돈’의 세계가 있다. 마치 서부극의 ‘자연 vs. 문명’ 구도처럼 토속 영화는 두 세계의 충돌 속에서 전자의 붕괴를 보여준다. 산속이나 섬에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농사를 짓거나 고기를 잡거나 약초를 캐며 살아간다면, 양복을 입은 외부인들(여기엔 종종 일본 순사가 가세한다)은 그 공동체를 위협하는 것이다. 여기서 위협의 대상은, 그 마을에서 가장 아리따운 젊은 여성이다. 그러나 그녀는 진실한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수많은 남자들에게 음험한 욕정의 대상이 되고, 결국 도시로 끌려가 어울리지 않는 짙은 화장을 한 채 술과 몸을 팔게 된다. 이 구도는 < 여자의 성 >( 문여송 , 1985) < 산딸기 3 >( 김수형 , 1987) < 옹기골 뽕녀 >(김수형, 1987) 등에서도 정확히 반복되는, 토속 영화의 전형적인 스토리라인이다. 여기서 같은 해에 나온 또 한 편의 영화를 주목해야 한다. 장미희의 연기가 빛을 발하는 < 숲속의 바보 >( 박용준 , 1982) 다. 이 영화는 토속 영화의 여성 캐릭터를 완성한다. 바로 ‘백치 여성’의 등장이다. 복희( 장미희 )는 다소 지능이 떨어지는, 영화 제목 그대로 ‘숲속의 바보’인데, 이후 수많은 토속 영화들은 핸디캡을 지닌 여성 캐릭터를 통해 이 장르가 지닌 ‘원시성’ ‘본능성’ ‘순수성’ 등을 드러낸다(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하진 않지만, 그런 점에서 말 못 하는 수련( 정윤희 )이 등장하는 <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 정진우 , 1981)도 토속 영화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 캐릭터의 계보는 < 불새의 늪 >( 고응호 , 1984)의 봉은( 원미경 ), < 여자의 성 >의 별녀( 최선아 ), < 소금장수 >( 김대진 , 1988)의 냉이(천은경) 등으로 이어지며, 그들은 섹스에 대한 ‘원초적 본능’의 소유자로 등장한다(< 불새의 늪 >에서 화가 종훈( 마흥식 )은 봉은에게 ‘수성’(獸性), 즉 ‘짐승 냄새’가 난다고 이야기할 정도이며, <여자의 성>의 뭍에서 온 침입자 억수( 독고영재 )는 “잠자리가 뛰어난 여자거든!”이라며 별녀에게 집착한다). 1-2. < 산딸기 2 >(왼쪽)와 < 물레방아 >(오른쪽)의 선우일란 과 마흥식 . 두 배우는 토속 영화의 간판스타였다. 3. 문여송 감독의 히로인이었던 < 여자의 성 >의 최선아 . 4. < 산딸기 >의 김애경. 무당 캐릭터는 토속 영화의 핵심적 조연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테마는 바로 ‘근친적 설정’이다. 문명 이전의 상태에 대한 메타포일까? 심의 때문에 진짜 혈연적 근친 관계를 내세우진 못하고 유사 근친 관계를 설정하긴 하지만, 많은 토속 영화들이 근친적 관계를 내세운다. < 숲속의 바보 >의 복희는 남매처럼 함께 사는 머슴 만복( 김동현 )과 관계를 맺고 아이를 낳는다. <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에서 최 영감( 황해 )은 고아인 수련과 문영( 최윤석 )을 키우는데, 혈연은 아니지만 남매처럼 자란 그들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 여자의 성 >의 별녀는 데릴사위로 온 거무( 이구순 )와 남매처럼 지내다가 결혼한다. < 소금장수 >의 덕만( 김추련 )도 엉겁결에 맡아 딸처럼 데리고 다니는 냉이와 부부적 관계를 맺게 된다. < 화녀촌 >( 김기 , 1985)는 이 분야에서 독보적이다. 종섭( 이영하 )은 상처한 후 산에서 어머니( 김지영 ), 처제 정분( 최현미 ) 그리고 딸과 살아간다. 그는 형제나 마찬가지인 옆집 친구 덕만( 나기수 )의 아내( 이상숙 )와 관계를 맺어 아이를 낳는데, 덕만 내외가 갓난아이를 남긴 채 마을을 떠나자 처제를 아내처럼 받아들여 그 아이를 키우며 산다. 근친적 관계 이외에도 토속 영화는, 도시와 문명이 반대편에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본능적인 모습들을 클리셰로 드러낸다. 대표적인 것만 간추려 보겠다. 1. 수시로 목욕을 한다 모든 토속 영화엔 꼭 이 장면이 있다. 여성 캐릭터들은 숲속의 계곡이든 강가든 폭포 아래든 수시로 목욕을 한다. 그리고 반드시 그들을 엿보는 남성의 시선이 있다. 많은 사건들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2. 언제 어디서든 정사를 한다 낮이든 밤이든, 집이든 물레방앗간이든 들판이든 숲이든 개울가든 옥수수밭이든, 그들은 정사를 한다. 그리고 이 광경 역시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들킨다. 3. 껄떡대는 건 죄가 아니다 욕정의 도덕률이 무너진 상태에서, 마을에게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가운데 놓고 많은 남정네들이 치근대는 건 토속 영화에서 전혀 비윤리적인 일이 아니다. 그들은 겁탈을 해서라도 여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유부남/유부녀 여부는 중요하지 않으며, 이것은 < 뽕 >( 이두용 , 1986)과 <떡>( 김수형 , 1988)의 세계관이기도 하다. 4. 무당을 조심하라 무당이든 박수든, 토속 영화에서 ‘무속인’은 빠지지 않는다(< 불새의 늪 >에서 봉은은 아예 무당의 딸로 그녀와 관계를 맺으면 급살 맞아 죽는다). 그들은 마을에서 가장 성적으로 문란한 존재이며, 권위를 내세워 음모를 꾸민다. 5. 여성은 거래된다 사극이 여성을 대 잇기의 수단으로 여기거나 정절을 강조하며 억압했다면, 토속 영화는 상품처럼 거래한다. 그 배경엔 남성의 어리석은 물욕이 도사리고 있는데, 서너 명 만 모이면 반드시 투전판을 벌이는 그들은 노름빚을 갚기 위해 딸을 팔아 먹고(< 산딸기 3 >), 여자는 몰래 몸을 판다(< 물레방아 >). 여기서 자연 속에서 사는 여성 캐릭터들은 장터를 통해 문명을 접하고, 동동 구리무와 박하 분과 손거울의 유혹 앞에 종종 마음을 연다.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에서 김 주사( 최봉 )도 그렇게 순이( 정윤희 )에게 접근했다. 그렇게 유혹에 넘어간 여자들은 결국 유린당한다. 1 . < 화녀촌 >의 근친적 결말. 2. 토속 에로에선 그 어떤 곳에서도 정사가 벌어진다. 사진은 < 소금장수 >의 옥수수밭 3. 남자들이 셋 이상 모이면 투전판이 벌어진다. 사진은 < 산딸기 2 > 4. 여성은 결국 술집 작부가 되며, 그곳에서 번 돈은 남자의 노름 밑천이 된다. 사진은 < 산딸기 2 > 토속 영화는 1980년대 중반을 넘어가며 서서히 변주되고 확장된다. 하명중 감독의 리얼리즘적 접근이 두드러지는 < 땡볕 >(1985)과 < 태 >(1986)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며, 변장호 감독의 < 감자 >(1988)나 임권택 감독의 < 아다다 >(1988)는 문예 영화에 좀 더 가까운 케이스일 것이다. 여기서 이두용 감독의 < 뽕 >(1986)은 토속 영화를 새로운 국면으로 이끈다. 원작이 나도향의 소설이라는 점에서 문예 영화의 전통을 잇고 있으면서, <뽕>은 기존 토속 영화가 지녔던 신파적이며 비극적이고 운명적인 멜로드라마의 톤을 걷어낸다. 베테랑 이두용 감독은 능수능란하게 영화를 조절하며 끌고 가는데, 심각하거나 진지하지 않은 톤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다. 에로티시즘을 표현할 때도, 절박하거나 경직되지 않은, 여유 있는 태도를 보여준다. 유머로 포장되어 있긴 하지만, 사실 < 뽕 >의 꽤 논쟁 지점이 있는 영화다. 안협네( 이미숙 )는 마을의 매춘부이며, 그녀에 대한 동네 남정네들의 음험한 시선을 영화는 자연스레 합리화한다. 여기서 안협네라는 캐릭터가 다른 건 육체관계에서 일종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점이다. 이전 토속 영화들이 ‘겁탈당하는 여성’을 보여준다면, <뽕>의 안협네는 철저히 거래하는 여성이며 원치 않는 남자는 거절한다. 같은 해에 나온 < 변강쇠 >( 엄종선 , 1986)의 ‘옹녀’( 원미경 )가 강한 성적 능력으로 위협적 존재가 된다면, 안협네는 유혹적이면서도 주체적이며 현실적이다. < 뽕 > 이후 토속 영화는 약간 변화를 겪는다. < 옹기골 뽕녀 > 같은 유사 제목 영화가 나왔고, 나도향을 비롯해 김유정 , 계용묵, 김동인 등 토속 영화의 재료로 삼기 좋은 작가들의 소설이 대거 각색되었다. 흥미로운 건 김수형 감독의 < 떡 >이다. 김유정 의 원작을 옮긴 이 영화는 <뽕> 이후 토속 영화(와 사극)의 트렌드가 변했음을 보여준다. 간단히 말하면 <떡>은 ‘<뽕>+< 변강쇠 >’이다. 마을 남자들은 (그녀가 유부녀임에도 불구하고!) 점례( 선우일란 )를 넘본다. <뽕>의 안협네 같은 존재인 셈. 그런데 점례와 관계를 맺는 남자들은 에너지를 완전히 빨려 버린다. ‘옹녀’인 셈이다. 흥미로운 건 결말인데, <뽕>에서 안협네의 남편 삼보(이무정)를 통해 암시만 되었던 독립운동가 콘셉트가 <떡>에선 명확하게 제시된다. < 산딸기 >나 < 뽕 >은 이후 프랜차이즈를 이루며 1990년대까지 이어졌지만(<뽕>은 최근 < 뽕 2014 >( 공자관 )까지 이어지고 있지만), 토속 에로는 대체적으로 1980년대 말에 수명을 다하고 만다. 이것은 에로 영화가 1988년 올림픽 이후 수그러들었던 것과 궤를 같이하며, 이 시기 한국의 에로틱한 영상 콘텐츠는 극장에서 비디오 시장으로 급속하게 중심 이동을 했다. 짧지만 강렬했던 토속 에로의 흐름. 하지만 로맨틱 코미디와 기획영화가 등장했던 1990년대에 살아남기엔, 그 정서의 우울함과 여성관의 한계는 너무 치명적이었다. 그 한계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뽕>이 최근까지도 명맥을 잇고 있는 건, 어쩌면 그 반증일지도 모르겠다.
김응천 (金應天)하면 떠오르는 게 있다. 영원한 청춘 감독의 이미지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는 전혀 늙은 티를 내지 않고 젊음을 유지한 몇 안되는 감독 중의 한 사람이었다. 김응천은 32년생이다. 그러니까 올해 70 고희인 셈이다. 그 유명한 경기(京畿)출신이다. 요즘은 경기중고등학교가 한 지역의 평준화된 일개 학교에 불과하지만 당시에는 수재들만 모이는 대한민국 최고 수준의 학교였다. 그러니까 경기를 엄격이 따지자면 평준화 전(前)의 경기냐 아니냐가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대학은 서울대 철학과를 중퇴했다. 그는 다방면에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결고 아는 척 떠벌이는 인간이 아니었다. 김응천은 그러고 보니 작품수에 있어서도 84개 작품을 감독했는데 우리나라에서 1위가 김수용 감독, 2위가 고영남 감독, 3위가 임권택 4위가 김응천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의 작품 경향을 보면 중고생들을 그리는 하이틴 영화들이 주류를 이룬다. 주로 명랑하고 유쾌한 얘기들을 다루고 있다. 음악을 곁들인 빠르고 진취적인 주제가 그가 즐겨 다루는 세계이다. 아마 40대 이상의 나이든 사람들이 김 감독이 영화 팬들이 되겠다.김 감독은 감독 데뷔를 28세에 했다. ' 영광의 침실 '이 데뷔작 타이틀이다. 당시로서는 굉장히 빠른 출세였다. 김 감독의 손에 들어가면 어떤 우울한 영화도 미래지향적이고 밝은 세계로 둔갑한다. 그것은 김 감독의 천성이 그렇기에 그런 영화들이 생산되지 않았나 싶다. 김 감독이 함께 일한 배우들을 얼른 생각나는 대로 이름을 떠올리자면 우선 이덕화 가 으뜸으로 떠오른다. 전영록 , 임예진 , 이상아 들이 아니었던가 싶다. 청춘영화들을 간단히 훑어보면 ' 푸른 교실 ', ' 모모는 철부지 ', ' 꽃밭에 나비 ', ' 이 다음에 우리는 ', ' 고교 우량아 ', ' 여고 졸업반 ', ' 시집가는 날 ', ' 우리들의 고교시대 ', ' 청춘대학 ', ' 달려라 풍선 ', ' 내 이름은 마야 ', ' 대학얄개 ', ' 송골매 모두 다 사랑하리 ', ' 스물하나의 비망록 ', ' 춤추는 청춘대학 ', ' 말괄량이 대행진 ', ' 87맨발의 청춘 ', ' 얄숙이의 전성시대 '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렇다고 김 감독이 청춘영화만 죽어라하고 만든 감독은 아니다. 성인영화도 수두룩하다. ' 지미는 슬프지 않다 ', ' 여인의 종착역 ', ' 진아의 편지 ', ' 목마위의 여자 ', ' 모르는 여인의 종착역 ', ' 낯선 곳에서의 하룻밤 ', ' 애처일기 ' 등등이 있다. 김 감독의 특징은 이른바 제작자를 배려하는 빨리찍기, 필름 아껴쓰기, 초스피드의 촬영 진행은 그로 하여금 제작자들의 관심을 모으게 하면서 흥행감독으로의 위치를 언제나 지키고 있었다. 그의 감독 친구는 본인 조문진 , 문여송 , 석래명 , 황학봉 , 김기 등이 아니었을까. 그중에서도 본인과는 무슨 얘기든 흉금을 떨어놓고 상의를 하곤 했다. 그는 외로운 사나이였다. 조실부모를 하고 형제도 없이 충무로 영화판에서는 비교적 외토리로 지냈다. 안동 김씨인 김 감독은 어릴 적에 부유한 집안에서 넉넉하게 자라온 걸로 안다. 그가 집안의 내력을 얘기할 때 보면 양반 집안에서 꽤나 잘 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어느 시기에 집안이 망하고 떠돌이처럼 지낸 건 그의 성격 자체를 변경시켰다. 그가 가족이 없으므로 해서 하숙집을 전전했는데 오랜 총각시절을 하숙집을 전전한 기억이 지금도 나의 뇌리에 새롭다. 김응천 이코르 하숙집 식으로 . 그러다가 마흔 가까운 나이에 부인 김정수 여사와 결혼, 총각의 딱지를 뗄 수 있었다. 그 당시 김 감독의 결혼은 명동 YMCA에서 올렸는데 이 착하고 점잖은 늦깍기 신랑의 결혼식에는 모든 영화인들이 참석 대성황을 이루었다. 부인 김 여사께서 김 감독의 영화 활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한 것도 아는 사람은 안다. 그만큼 김 여사는 남편의 사업을 돕고 이해했다. 김응천 이 부인의 지원금을 행여 까먹을까봐 전전긍긍했던 걸 나는 기억한다. 좀 손해를 끼친 경우는 응천이 나와 밤새도록 술마시면서 속상해 했다. 그만큼 애처가였던 그였다. 무슨 고민이 있다 하면 나를 불러내 둘이는 맥주를 마셨는데 과묵한 그도 술로만 호소하기엔 역부족이었던지 하로는 날 부르더니 문진아, 이게 마지막 술일세 하고 선언하지 않는가.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생활을 정리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한때 그만큼 폭주를 했던 그였다. 그날 그와 진탕 마셨다. 그후로 그는 단호하게 술을 끊었다. 술을 끊으니 자연 친구들과의 교류도 끊겼다. 그후로 그는 쭉 금주생활을 지켰는데 타계할 때까지 그 신념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김응천 그 신사 같은 사람도 한번 되게 화내는 걸 볼 수 있었다. 하길종 감독이라고 나하고도 친한 후배 감독 사이의 일이었다. 김 감독이 만든 ' 고교 우량아 '영화를 '뿌리깊은 나무' 잡지에 하길종이 비평을 했는데 그 비평 내용은 '고교 우량아' 영화가 웃긴다고 혹평을 했던 것이다. '애들 돈을 빨아 먹기 위해 알캉달캉 얍삽하게 만들었는데 어쩌구.......' 이 글을 김 감독이 어떻게 읽은 모양이었다. 인내심 많고 화를 안내는 김 감독이 분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하길종 이 묵고 있는 충무로 경화장 여관을 쳐들어 갔다. 편집용 가위를 들고서였다. 방심하고 여관방에 있던 하길종은 불시에 문 열구 쳐들어 오는 김 감독을 피해 신발도 신지 못하고 여관을 뛰쳐 달아났다. 김 감독이 설마 찌르랴 했겠지만 김 감독의 분노를 나는 이해한다. 통상 영화감독끼리는 동업자임으로 해서 여간해서는 비평 안하는 게 예의이다. 그런데 하길종 그 녀석이(하길종이와 내가 친하니까 그 녀석이라고 표현한다)정신이 나갔지 남의 자존심을 그렇게 건드릴 수가 있는가. 하길종이 원래 비평적 독설가인건 사실이지만 영화계의 선배요, 더구나 고교 청춘물 같은 건 본격 비평에서 제외하는 게 상식인데 알캉달캉이라느니 얍삽하다느니 인격적인 모독을 주는 건 하길종이 백번 잘못한 것이었다. 김응천 감독이 무슨 비평을 예상하고 예술 작품입네 하고 거드럭거렸다면 비평의 잣대를 들여댈 수 있었겠지만 그냥 단순한 명랑물이잖은가. 그때 하길종은 그렇잖아도 충무로 영화계에서 마구 휘두르는 비평으로 인해 미운 털이 배긴 마당이었는데 이 사건으로 하길종과 친했던 나까지 왜 그런 녀석과 사귀느냐고 압력이 심하게 들어오곤 했다. 하길종 은 이후 그를 혼내준다는 감독들이 벼르고 있어 충무로를 걸어다닐 때 조심에 조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김 감독이 아프기 시작한 건 10여 년 쯤 전이다. 수서에 살던 그는 우리들과 드문드문 만나곤 했다. 어느날 갑자기 턱에 3개의 빨간 종기가 나서 무심코 낫겠지 했는데 그게 임파선 암, 그런 것이었던 모양이다, 그때부터 부인 김 여사으 극진한 간호가 시작되었다. 김 감독의 취미를 살려주기 위해서 김 여사는 컴퓨터 신종 기재에서부터 사진 스캐너니 뭐 아무튼 벼라별 기재를 아낌없이 뒷바라지했다. 남편을 즐겁게 해주기 위함이었다. 김 감독이 운명하기 전 우리 친구들이 그의 집에 문병가려 전화하면 그는 한사코 사양했다. 노쇄한 몰골을 보여 주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그만큼 그는 깨끗한, 어느 면에선 결벽증이랄까. 그러나 난 이해한다. 그의 성격이 그토록 갈끔한데 어쩌랴. 지저분하게 인생에 미련을 남기는 것보다 얼마나 깨끗한가. 2001년 6월 1일 오후 그는 타계했다. 부인 김 여사의 지극한 간호는 부인으로 하여금 이번 감독협회총회에서 아름다운 감독 부인상을 드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김응천 감독. 귀하는 깨끗이 인생을 살다간 우리들의 친구였오. 고맙소. 명복을 비오. 조문진 (영화평론가) / 2002년 <프로필> 1935. 3. 2 1959 < 영광의 침실 > 데뷔 작품명 1959 영광의 침실 1960 감나무골의 임서방 1962 사장딸은 올드 미스 1963 지미는 슬프지 않다 1964 밤에 걸려온 전화 / 눈물의 영도다리 1965 청춘을 변상하라 1966 귀신잡는 해병 / 청춘대학 1969 모르는 여인의 편지 1970 여인의 종착역 1971 3인의 검은 표범 1972 부부교대 1973 천사의 메아리 1974 진아의 편지 1975 애처일기 / 여고졸업반 1976 청춘을 이야기합시다 / 푸른 교실 1977 이 다음에 우리는 / 첫눈이 내리 때 / 고교우량아 / 시집가는 날 / 불타는 소녀 / 미스양의 모험 1978 우리들의 고교시대 / 개선문 / 고교명랑교실 / 제갈 맹순이 1979 목마위의 여자 / 너는 여자 나는 남자 / 꽃받에 나비 / 모모는 철부지 1980 낯선 곳에서 하룻밤 / 달려라 풍선 1981 내 이름은 마야 1982 갈채 / 깨소금과 옥떨매/ 대학얄개 1983 대학신입생 오달자의 봄 / 송골매 모두 다 사랑하리 / 스물하나의 비망록 / 대학들개 1984 불타는 신록 / 대학괴짜들 / 밤마다 천국 1985 춤추는 청춘대학 1986 말괄량이 대행진 / 87맨발의 청춘 1987 얄숙이들의 개성시대 1988 그녀와의 마지막 춤을 1993 밀월여행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