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쓴 편지
- 감독
- 더글라스 서크
- 제작년도
- 1956
- 출연
- 록 허드슨, 로렌 바콜, 로버트 스탁, 도로시 말론
태그 갤러거(Tag Gallagher)는 부산 영화의전당 초청으로 지난 9월 11일에 방한했다. 부산에서 영화의전당에서 12일에 강연회, 13일에 임재철, 김성욱, 허문영과의 좌담을 가졌다. 서울 아트시네마에서도 14일 강연회를 가졌다. 태그 갤러거는 「John Ford: The Man and His Films」(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6), 「The Adventure of Roberto Rossellini: His Life and Films」(DaCapo, 1998)라는 탁월한 두 권의 저서를 썼고, 조셉 폰 스턴버그, 막스 오퓔스, 킹 비더, 장 마리 스트라우브, 페드로 코스타 등에 관한 뛰어난 평론을 써왔다. 이 연재를 읽어온 독자라면 태그 갤러거라는 이름을 여러 번 만났을 것이다. 포드의 열광자인 그의 견해는 특정한 이론에 바탕을 두지 않으며 동시에 시네필적 수사학에만 의존하지도 않는다. 대신 포드의 개별 영화가 지닌 풍성한 영화적 자질을 개인사적 산업적 맥락 안에서 정교하고도 포괄적으로 제시한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의 견해를 참조하지 않고 존 포드의 영화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의 강연은 육성이 아니라 비디오에세이로 이루어졌다. 우리에게 아직 익숙지 않은 비디오에세이는 강연을 진행하며 필요할 때마다 영상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선택하고 재배열한 영상들과 그의 코멘트가 마치 대화하듯 진행되는, 새로운 비평 형식이다. 그의 존 포드 비디오에세이는 존 포드의 영화적 리듬과 공기를 재배열된 영상으로 체험케 했다는 점에서 관객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그는 “왜 다른 비평가들은 이 방식을 모방하지 않는가”라고 웃으며 말했다. 아래의 인터뷰는 부산에서의 좌담, 사적 대화, 그리고 이메일 등에서 주고받은 말들을 추린 것이다. 예상보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 만족할만한 인터뷰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한 사람의 시네필이자 뛰어난 평론가로서의 의미 있는 발언들이어서 여기 소개하려 한다.(로베르토 로셀리니에 관한 발언도 다수 포함된 갤러거-임재철의 대담은 『씨네21』972호에 실려있다. 참고하시길.) 1960년대에서 바로 건너온 듯한, 허름한 히피풍 차림의 이 노비평가는 작은 가방 두 개만을 들고 먼 길을 왔고, 두 도시의 시네필들에게 기억할만한 많은 말들을 들려준 뒤 9월 16일 보스턴으로 돌아갔다. 허문영_ 당신의 사적인 이력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개인 소개를 부탁한다. 태그 갤러거_ 나는 1943년에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했고 NYU에서 영화이론으로 석사학위를,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보스턴 대학교에서 조교수로 4년간 있었지만 학교와의 인연은 그게 끝이다. 20대에는 베트남 전쟁 징집을 피하기 위해 피아노 교사를 하기도 했고 이탈리아에서 2년 동안 살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의 생활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한 달 생활비가 300달러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다. 거기서 크리슈나무르티의 이탈리아인 제자를 만났다. 그가 내게 「역경 易經」을 소개해 읽었고 크리슈나무르티 강의에도 데리고 갔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정좌하고 앉아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말할 게 없다”고 하고선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 강의가 내가 들은 가장 훌륭한 강의의 하나로 남았다. 8번 정도 강의를 들었는데 다른 건 기억나지 않는다. 베스파(스쿠터)를 사서 이탈리아 일주를 하기도 했다. 1920년대에 조셉 폰 스턴버그도 스쿠터로 이탈리아 일주를 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한때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지만 12살부터 배우기 시작했기 때문에 너무 늦었다. 대신 내 아들이 피아니스트여서 세계를 돌아다니며 연주를 한다. 아들 이름이 킴벨인데 내가 가장 사랑하는 소설 「킴」(루디어드 키플링)의 주인공 이름에서 따왔다. 허문영_ 당신은 학계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독립적으로 비평과 저술 작업해온 것으로 알고 있다. 이같은 길을 택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무엇이며 어떤 좋은 점과 힘든 점이 있었는가. 태그 갤러거_ 내가 아카데미를 거부한 게 아니라 아카데미가 나를 거부한 거다(웃음). 보스턴대학교의 윌리엄 애로우스미스 교수가 나를 고용했다. 그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고 대통령의 친구였다. 그는 영화이론 전공을 도입하려고 나를 고용한 것이다. 그런데 그가 도중에 죽었다. 학교에서는 언론 전공학자를 그의 후임으로 고용했다. 그는 영화전공 도입을 원치 않아 내 자리가 사라져버렸다. 그렇지 않았다면 난 대학교에 있었을 것이다. 미국 대학교 시스템의 이상한 점은 박사 학위 취득하고 1, 2년 안에는 일자리를 구하기 쉽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6년 동안 한 사람의 교수 아래서 조교수 노릇을 해야 테뉴어가 되는데, 4년간 나를 돌봐주던 교수가 죽은 것이다. 더구나 나는 이미 존 포드에 관한 책을 써서, 이름이 약간 알려지는 바람에 더욱 고용되기 힘든 어중간한 사람이 되었다. 독립적인 작업을 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허문영_ 경제적으로는 힘들지 않았는가. 태그 갤러거_ 그렇지 않았다. 나는 돈이 많다.(웃음) 나는 16mm 필름 거래로 돈을 많이 벌었다. 필름 딜러들은 대부분 영화에 대해선 모른다. 그런 점에서 나는 강점이 있었다. 다른 이들은 포드의 < 굽이도는 증기선 >이 얼마나 귀한 필름인지 모르는 것이다. 나는 귀한 필름들을 사서 내 라이브러리도 만들고 장사도 했다. 필름 거래는 마약 거래와 비슷하다. 마약 중독자는 보통 마약 장사를 겸한다. 마약 장사로 번 돈으로 자기도 마약을 하는 것이다. 마진율이 높다는 점도 비슷하다. 보통 100% 정도다. 비싼 건 한편 팔아 200달러 정도 남겼다. 둘다 간단한 사업이다. 전화나 팩스로만 거래한다. 내게 필름 장사는 많은 걸 줬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16mm 프린트로 영화제를 여는 데가 많아서, 예컨대 런던에서 로셀리니 영화제를 한다고 하면 나는 내가 가진 프린트들을 짊어지고 가서 상영하고 끝나면 싸들고 돌아왔다. 필름장사를 하면서 나는 누구보다 큰 필름 라이브러리도 갖고, 돈도 벌고, 여행도 다녔다. 행운이었던 셈이다. 물론 초산화 때문에 집 안에 식초 냄새가 진동하긴 했지만. 아직 빌려줄 가치가 있어서 로셀리니 영화는 몇 편 가지고 있고 존 포드의 < 순례여행 >도 갖고 있다. 로빈 우드 Robin Wood, 조너선 로젠봄 Jonathan Rosenbaum 허문영_ 영화적 견해를 교류하는 가까운 동료 비평가가 있는가. 태그 갤러거_ 음, 미국에는 거의 없다. 오히려 외국에 조금씩 있다. 로빈 우드는 죽기 1년 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났다. 토론토에서 로셀리니 회고전을 할 때였다. 그와 와인 3병을 마셨고 그는 내 발과 사랑에 빠졌다(로빈 우드는 게이이며, 갤러거는 주로 맨발로 다닌다). 나는 논쟁을 즐기는 편이지만 로빈 우드와는 논쟁을 벌이지 않았다. 로빈은 포드의 최고작이 < 모호크족의 북소리 >라고 말했는데, 그 영화는 나의 존 포드 톱 30 정도에 겨우 넣을 수 있는 영화다. 보통의 경우라면 반박했을 텐데 그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아마도 그가 너무 쇠약해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너선 로젠봄과는 굉장히 친했는데, 2000년에 심하게 싸운 뒤로 보지 않는다. 이탈리아의 아드리아노 아프라와는 매우 친하다. 그는 나의 로셀리니 책을 꼼꼼히 읽고 코멘트해주었다. 허문영_ 조너선 로젠봄과는 왜 싸웠는가. 태그 갤러거_ 글쎄, 왜 싸웠는지 누가 알겠는가. 싸움이란 알 수 없는 거다... 싸움이 궁금하다면 다른 싸움 하나를 알려주겠다. 로셀리니에 관한 책을 준비하면서 생긴 일이다. 나는 로셀리니의 오랜 친구 프랭크로부터 로셀리니가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당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로셀리니의 아들 렌조를 만나 그 이야기를 했더니 처음엔 “프랭크 아저씨가 말했으면 사실일 것”이라고 순순히 수긍했다. 무솔리니 시절엔 당원증이 없으면 직업을 구할 수 없었다. 로셀리니가 2차대전 중에 군대에 관한 영화를 몇 편 만들었는데 당원증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하지만 무솔리니 시절에 당원증을 얻는 건 잡지 구독하는 것만큼 간단한 일이었다. 약간의 돈을 내면 1년짜리 당원증을 발급받을 수 있었고 다른 사람이 대신 신청해서 받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심지어 가입 날짜 조작까지 가능했다. 로젤리니가 당원이었다는 것은 사실 거의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내가 렌조를 만나고 나서 며칠 뒤에 팩스를 보내 결투 신청을 해왔다. 이유는 내가 ‘자신을 변호할 수 없는 죽은 이를 공격하는 겁쟁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렌조가 가족과 이야기하고 나서 가족의 방침이 그렇게 내려졌던 것 같다. 나는 “그 사실을 아는 건 지금 너와 나밖에 없고 중요하지도 않은 사실”이라며 설득하려 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나는 결투 신청을 받아들였는데, 무기 선택까지는 가지 않았다. 대신 그는 내게 “너를 평생 괴롭히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실제로 그는 그렇게 했다. 이탈리아는 정치적 힘을 가진 몇몇 사람들이 사회의 거의 모든 부문에 힘을 미치는 특별한 사회다. 나와 렌조와의 일이 있고 나서 나는 이탈리아서 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 로셀리니와 관련된 어떤 행사에서도 나는 금지된 사람이 되었다. 나의 로셀리니 책이 출간된 뒤로 이탈리아서 로셀리니 관련 책이 6, 7권 출간되었는데 내 이름은 어디에도 인용되지 않는다. 다만 ‘어떤 학자가 자신의 책에 이렇게 썼다’는 식으로만 내 견해가 인용될 뿐이다. 내 책은 불어로는 번역되었지만 정작 로젤리니의 조국인 이탈리아에선 번역될 수 없었다. 허문영_ 존 포드라는 영화감독에게 매혹된 최초의 순간이 있었을 것 같다. 그 순간의 경험에 대해서 듣고 싶다. 태그 갤러거_ 나는 사실 존 포드를 알기 전에 존 포드를 알게 되었다. 십 대 시절에 나는 텔레비전에서 많은 영화를 보았다. 사실 그때는 크레딧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심지어는 배우 이름조차도 관심 밖이었다. 감독에 대해서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굉장히 많은 영화를 보았고,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기도 했다. 대학에 갔을 때 영화 연출에 관심이 있는 친구를 만났다. 내가 좋아했던 그 영화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그 친구가 그 영화의 감독들에 대해서 얘기해줬다. 그때서야 내가 좋아했던 대부분의 영화들이 존 포드가 만든 영화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존 포드를 알기 전에 존 포드를 알게 됐다고 말할 수 있다. 젊은 날의 링컨 Young Mr.Lincoln 허문영_ 당신의 저서에서 < 젊은 날의 링컨 >을 언급하면서 50번을 넘게 봤지만 볼 때마다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장면이 있다고 했다. 이런 경험은 시네필에게는 즐거운 것이지만, 무언가를 써야 하는 비평가들에게는 좌절감을 안겨주는 면도 있다. 끝없이 고쳐 써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저서에서 스스로 불만족스럽다고 여기는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태그 갤러거_ 발견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물론 나의 포드 책도 3번째 개정판을 냈다. 포드의 경우, 나는 영화를 반복해서 보고 노트를 하고 다시 쓰는 일을 지속해왔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내가 쓴 「존 포드」 초판을 좋아하지 않는다. 형용사가 너무 많다. 5년 전 스페인어로 출간하자는 제안이 왔을 때, 나는 25% 정도를 다시 썼다. 올해는 프랑스의 한 출판사가 짧은 버전 출판을 제의해왔다. 그걸 위해 다시 내가 쓴 걸 봤을 때, 여전히 형용사가 너무 많다고 느꼈다. 형용사는 부정직해지거나 과장하기 쉽다. 지금으로선 단순하고 직설적인 표현을 쓰고 싶다. 내 책이 지닌 좋은 점도 있다. 나는 프레임 확대(frame enlargement)에 의한 스틸을 쓴 첫 연구자 중의 하나다. 16mm 프린트로 내가 일일이 작업을 한 것이다. 그때까지 대부분의 영화 책은 영화사가 제공한 프로덕션 스틸을 썼다. 이건 가짜다. 왜냐하면 감독은 그 스틸을 찍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건 영화연구에서 가장 중대한 부정직함 중의 하나다. 내가 이 문제를 제기했을 때, 아카데미 쪽 사람들은 나를 미친 사람 취급했다. 그들은 스틸 사진의 화질을 따지고 있었다. 과연 존 포드가 그 장면을 찍은 게 맞는지를 따지지 않고 말이다. 이젠 DVD가 있어서 훨씬 좋은 프레임을 얻을 수 있다. 어쨌거나 긴 버전을 줄이면 내 책이 훨씬 좋아질 것이다. 「John Ford, the Man His Films」 허문영_ 당신이 존 포드 연구에 몰두하고, 첫 저서(「John Ford, the Man His Films」)가 출간된 것은 1986년이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미국에서는 존 포드를 인종주의자, 극우파, 군국주의자로 보는 시선이 강하게 남아있던 상황이었다. 당신의 저서는 존 포드에 대한 그런 선입견, 오인 혹은 잘못된 평가를 불식시키는 데 크게 기여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태그 갤러거_ 그랬기를 바란다. 허문영_ 자신의 책이 존 포드에 대한 평가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는 느낌을 실감한 경험이 있나. 태그 갤러거_ 나로선 그 책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왜냐하면 독자들이 책을 읽고 나서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70년대, 80년대 당시에 존 포드가 이러한 오해를 받았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존 웨인과의 관계 때문이다. 존 웨인은 그 당시에 반공산주의 활동을 굉장히 활발히 하고 있었다. 내가 이 책을 쓴 것은 존 포드를 변론하고, 부당한 공격으로부터 존 포드를 보호하는 것에서 시작을 했다. 존 포드에 대한 이해는 새롭게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이 책은 그것을 위한 것이었다. 나로선 그 목적에 이 책이 도움이 되었기를 바랄 뿐이다. 허문영_ 존 포드와 로베르토 로셀리니에 대한 당신의 저서는 전기와 감독론이 결합되어 있다. 전기 작성은 매우 많은 자료 조사를 필요로 하는, 비평가들에게는 매우 힘들고 소모적인 작업일 수도 있다. 존 포드와 로셀리니에 관한 책을 쓰면서 전기적 사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다면 무엇인가? 태그 갤러거_ 존 포드의 책을 준비하면서 16mm 필름 반복해 보았다. 한 영화를 숏 별로 기록하면서 앵글과 숏의 크기, 카메라 움직임 등등을 적는다. 한 영화당 대략 4, 5일이 걸린다. 그러고 나서 다른 영화로 넘어간다. 각 영화별 기록을 마치면 영화들 간의 관계를 찾아본다. 이 과정에서 존 포드가 어떤 시기에는 좋은 영화들을 집중적으로 만들었는데, 어떤 시기에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예컨대, < 수색자 >(1956) 이후에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1962) 사이의 기간이 후자에 해당한다. 물론 < 투 로드 투게더 >나 < 기병대 > 등의 괜찮은 영화들이 있지만 좋았던 시기에 비하면 확실히 좀 떨어진다. 이 시기에 존 포드는 한쪽 눈의 시력과 그의 집을 잃을 정도로 개인적 어려움을 겪었다. 산업적으로도 스튜디오 붕괴하면서 그의 개인 프로덕션도 문을 닫았다. 이제 개인이 모든 걸 알아서 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예를 들어 스튜디오와의 계약서가 30년대에는 2쪽이었는데, 50년대에는 전화번호부 두께가 되었다. 이 모든 나쁜 일이 50년대 후반에 일어났다. 영화 외적인 요소가 영화에 영향을 미친다. 전기는 나의 우선 분야가 아니어서 자료가 불충분했다. 그래서 캘리포니아에 가서 10일 동안 인터뷰를 했다. 존 포드 지인들을 두루 만났는데, 그들 포드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어서 내가 알고 싶어하는 것을 정확히 말해주었다. 조셉 맥브라이드의 포드 전기는 훌륭하다. 나는 그 책으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았다. 영화는 무에서 오지 않는다. 삶의 여러 사실들이 영향을 미친다. 로셀리니도 그런 사례다. 그는 다른 영화인들과 직업적인 관계를 맺은 적 없고, 가까운 사람들과의 친밀한 혹은 적대적 관계 속에서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 제작의 커뮤니티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존 포드, 장 르누아르도 그런 사례다. 만드는 사람들의 공동체적 기운, 특별한 친밀함이 영화에 반영된다. 무엇보다 포드의 < 조용한 사나이 >가 그렇지 않은가. 나는 로베르 브레송의 전기를 여전히 기다린다. 그에 관해 알려진 게 거의 없기 때문이다. 고다르의 동반자였던 안느 비아젬스키가 < 당나귀 발타자르 >에서 같이 작업한 경험에 대해 쓰긴 했지만 사적인 부분은 별로 없다. 대신 그녀가 쓴 고다르에 관한 책은 정말 훌륭하다. 여하튼 궁금하다. 브레송의 삶은 영화 같았을까. 그의 영화 이를테면 <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 >의 주인공처럼 얀세니스트였을가. 그렇지 않다는 말도 있다. 돈도 좋아하고 여자도 좋아했다는. 나는 브레송의 전기 작가라는 영웅을 기다린다. 허문영_ 존 포드 영화(특히 < 젊은 날의 링컨 > < 마이 달링 클레멘타인 > < 분노의 포도 >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 등)에서 프로듀서 대릴 F. 자눅의 역할은 비평가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면이 있다. 포드는 종종 자눅에게 편집권을 넘겼고, < 황야의 결투 >의 마지막 장면은 직접 찍기도 했다. 그의 역할을 어떻게 평가해야 한다고 보는가. 태그 갤러거_ 물론 자눅은 포드가 인정한 위대한 편집자다. 하지만 자눅이 제작한 다른 감독들의 영화들을 생각해봐라. 대부분 끔찍하다. 비밀은 포드의 영화 만들기의 방식에 있다. 존 포드는 스토리보드 없이 이미 머릿속에 영화를 만들어 둔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포드는 촬영하는 과정에서 이미 편집을 해버렸다. 촬영이 끝나면, 더 이상 다르게 편집할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었다. 자눅이 포드의 영화들을 편집한 건 맞지만, 할 수 있는 게 많지는 않았다. 때로 자눅은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 황야의 결투 >를 30분 줄이고 자신이 마지막 장면을 찍은 것 같은 일 말이다. 물론 포드가 자신의 제작사(Argosy)에서 찍은 영화에서는 완전한 통제권을 발휘했다. 역마차 Stagecoach 허문영_ 당신의 베스트 존 포드 리스트가 궁금하다. 태그 갤러거_ 내가 늘 좋아하는 10편의 존 포드 영화가 있다. 먼저 < 역마차 >가 있고, < 젊은 링컨 >,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 < 미드웨이 전투 >, < 웨건 마스터 >, < 조용한 사나이 >, < 태양은 밝게 빛난다 >, < 도노반의 산호초 >,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 <7명의 여인>. 재작년에『사이트 앤 사운드 Sight and Sound』라는 잡지가 올타임 베스트 설문조사를 했는데, 존 포드 영화 중에 어떤 걸 고르느냐를 두고 고민했다. <역마차>와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사이에서 오래 고민하다가 결국엔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로 정했다. 하지만 아마 내일이라도 <역마차>로 마음을 바꿀 수도 있을 것 같다. 내 생각에는 존 포드가 방금 얘기했던 그 열 편 중에 한 편만 만들었다 할지라도 존 포드는 지금만큼이나 존경받는 감독으로 인식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허문영_ 내일 바뀔 수 있다 해도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를 최고로 꼽았다는 건 약간 놀라운 일일 수 있다. 이 영화는 주류 평단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많은 시네필들에게는 오랫동안 감상적인 멜로드라마로 간주되어왔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어떤 점을 그토록 좋아하는지 궁금하다. 태그 갤러거_ 히치콕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현기증>을 최고로 꼽는다. 존 포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각기 다른 자기만의 최고작을 꼽는다.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를 감상적인 멜로드라마라고 보는 건 주로 영국인들이다. 데이비드 톰슨 같은 사람이다. < 시민 케인 >과 같은 해에 나왔기 때문에 혁신적인 <시민 케인>과 비교해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를 관습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건 피상적인 생각일 뿐이다. 이 영화가 왜 좋으냐고?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모든 것이 좋다. 캐릭터, 숏, 촬영, 이야기, 감정 모두 좋다. 소년이라는 한 캐릭터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드문 존 포드 영화이다.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도 같은 방식이다. 단지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둘 다 거의 전체가 플래시백인 영화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를 반복해서 보면 제임스 스튜어트가 자기식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플래시백에서 베라 마일스가 존 웨인을 사랑한다는 걸 못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는 기억을 왜곡한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에도 기억의 왜곡이 있다. 포드의 영화는 의식과 전통에 관한 것이라는 통념이 있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의 흥미로운 점은 이런 의식과 전통이 사회를 유지하기도 하면서 파괴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아이는 이걸 결코 깨닫지 못한다. 아이가 가치 있게 생각하고 성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공동체를 파괴시킨다. 이 영화의 센티멘탈리티는 이중적이다. 사람들은 비극적 사건에만 주목하고 그 뒤에 감춰진 잔혹함을 보지 못한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How Green Was My Valley 허문영_ 나도 그런 관객이었다. 20년 전에 이 영화를 처음 보고 많이 울었다. 그리고 그저 비극적 멜로드라마라고만 생각했다. 몇 년 지나 다시 봤을 때, 이 영화가 매우 기괴하고 뒤틀려 있다고 느꼈다. 거의 무서웠다. 태그 갤러거_ 포드의 마법이 그런 것이다. 울게 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무섭게 한다(horrifying). < 아파치 요새 >도 그러하지 않은가. 백인 장교와 하사관들은 고귀한 사람들이지만 동시에 그들은 자신의 병사들을 그리고 인디언들을 몰살시키는 명령에 복종한다. 포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이중성을 못 본다. 포드가 그들의 행동을 찬미하는 것처럼 보는 것이다. < 나의 계곡 푸르렀다 >는 아이가 밸리를 50년이 지나 떠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그가 엄마의 숄로 싸는 책들은 자기가 어릴 때 읽었던 책들뿐이다. 새 책이 없다. 이 영화의 전체 이야기는 가족이 파괴되고 밸리가 망가지는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나이 든 주인공은 가족들 밸리 사람들이 죽지 않았고, 그들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여전히 어리다. 그는 과거를 반복, 반복, 반복하는 방식으로 삶을 살아온 것이다. 그는 과거에 갇힌 사람이다. 포드는 이 인물의 슬픈 사연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이 인물의 어리석음, 의도하지 않은 파괴성이라는 이면을 동시에 보여준다. 위대한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를 묻는 것은 위대한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를 묻는 것과 같다. 하나의 이유는 나를 울게 하니까, 이다. 훌륭한 예술은 우리를 울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감정적으로 연루될 수 있게 해야 한다. 예술은 감정에 관한 것이니까. 예술의 또 다른 자질은 창의성(invention)이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는 한 순간도 경이롭지(marvelous) 않은 때가 없다. 구도는 아름답고 사람들의 움직임은 발레 같다. 너무나 우아하다. 오손 웰스가 이런 걸 하면 그게 도드라져 보인다. 사람들은 그걸 미학적이라고 알아차리게 된다. 근데 포드가 하면 그 솜씨를 눈치 못 채고 그저 울게 된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모차르트를 좋아한다. 자기 시대의 보통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었다. 물론 지적인 사람도. 포드의 영화도 영화를 모르는 사람들이 들어가서 봐도 충분히 즐기고 나올 수 있다. 그런데 나 같은 사람이 50번 넘게 봐도 새로운 걸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를 아직 두 번밖에 안 봤나? 계곡 봐라! 좋은 음악 몇 번 듣나? 좋아하는 시는 몇 번 읽나? 처음 읽을 때 얼마나 이해하나? 계속 보면서 심장으로 알 수 있게 된다. 리듬, 단어의 느낌 등등을 이해하고 좋아할 수 있게 된다. 어떤 영화들도 그러하다. 존 포드 영화가 그런 영화다. 스테핀 페칫 Stepin Fetchit 허문영_ 이번 특별전 동안 < 태양은 밝게 빛난다 >를 관객과 함께 다시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지만, 이 영화에서의 흑인 묘사가 불편하다고 말하는 관객도 있었다. 존 포드 영화의 가족이나 다름없는 스테핀 페칫(Stepin Fetchit)이 보여주는 바보스러운 언행을 말하는 것 같다. 태그 갤러거_ 스테핀 페칫의 문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복잡하다. 미국에서 인종적 편견은 단순히 피부색의 문제가 아니라 말하는 방식과 몸 동작의 문제이기도 하다. 50년 전이라면 당신이 통화하고 있는 사람이 흑인이라면 말투만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오늘에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관용의 증대인가, 아니면 다름에 대한 불관용의 승리인가. 어느 쪽의 주장도 가능하다. < 태양은 밝게 빛난다 >에서 스테핀 페칫처럼 행동하는 흑인이 그 당시에 존재했는가. 그렇게 말하고 걷는 사람이 그때 존재했는가. 그렇다. 프랜시스 포드와 같은 백인 주정뱅이, 혹은 메이듀 같은 백인 정치가가 존재했듯이 말이다. 페칫은 백인의 편견을 증대시키는 특질들의 패러다임인가. 물론 그렇다. 그는 이것이 의도적이라고까지 말했다. 영화가 좋은 롤모델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 같은 이유로 존 스탈의 < 슬픔은 그대 가슴에 Imitation of Life >(1934)가 더글라스 서크의 1959년 리메이크작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페칫은 최악의 이미지일 것이고, 그래서 TV에서 금지되었다. 하지만 정반대로, 포드는 페칫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관용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 복잡한 문제다. 허문영_ 존 포드 특별전을 준비하면서 재확인하게 된 사실이 있다. 기획전을 준비하면서 보도 자료에 이런 내용을 써서 돌렸다. ‘존 포드는 서부극의 거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서부극에 한정되지 않는 위대한 예술가이며, 영상시인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보도기사는 이렇게 돼 있습니다. ‘서부극의 거장이 찾아온다’, ‘고전 서부극의 맛을 다시 만끽하기를’. 이 기획전의 의도가 서부극의 감독으로 한정된 존 포드에 대한 이해를 넘어서고자 하는 점도 중요했는데, 이런 보도들을 보면 서부극 감독으로서의 존 포드의 이미지는 여전히 강고하다고 다시 느끼게 되었다.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은 서부극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뛰어난 에세이를 쓰기도 했다. 존 포드의 영화를 보고 말하는 데 있어서 서부극이라는 틀, 혹은 장르 어프로치가 유용성이 있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하는 것이다. 태그 갤러거_ 난 개인적으로는 존 포드를 서부극 감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존 포드를 늘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와 같은 영화와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포드는 1926년부터 1936년까지는 단 한 편의 서부 영화도 만든 적이 없다. 그가 해리 캐리와 유니버설 영화사에서 많은 서부영화를 만들었지만, 폭스사로 옮기고 난 이후, 자신의 이름을 잭에서 존으로 바꾸고 난 이후에는 서부영화를 더 이상 만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웨스턴이 아닌 일반 극영화들이 보다 존중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 밀고자 >, < 분노의 포도 >, < 롱 보이지 홈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같은 비서부극로 아카데미상을 받았기 때문에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도 포드를 서부영화 감독으로 특정화하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그가 영화계로 다시 돌아왔을 때, < 황야의 결투 >를 만들 생각이 별로 없었지만 폭스사와의 계약 때문에 의무적으로 만들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자기 제작사 아르고시(Argosy)에서 < 도망자 >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훌륭한 영화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 싫어했던 영화였다. 그런데 이 영화가 상업적으로 완전히 실패하면서 돈을 벌기 위해서 일련의 서부 영화들을 다시 만들게 된다. 그중에 하나가 < 아파치 요새 >다. 굉장히 많은 제작비가 투여된 영화였다. 하지만 이 영화들은 결국 < 조용한 사나이 >를 만들기 위한 전초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1940년대 이후에 그의 유일한 목적은 <조용한 사나이>를 만드는 것이었다. <조용한 사나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같은 배우들을 데리고 < 리오 그란데 >라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 필요했다. 사실상 그 이후의 유일한 서부극은 < 수색자 >이다. 그 뒤로는 영화를 만들기 어렵고 돈을 벌기 위해서 이따금씩 서부영화를 만드는 그런 처지에 놓이게 됐다. < 투 로드 투게더 > 같은 경우는 그가 그다지 만들고 싶지 않았던 영화다. 물론 나는 존 포드가 만든 서부극을 굉장히 좋아하지만 그를 서부영화 감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난 장르라는 틀 자체를 별로 믿지 않는 편이다. 허문영_ 1894년은 위대한 감독들이 많이 태어난 해다. 포드 뿐 아니라, 조셉 폰 스턴버그, 킹 비더(장 르누아르도 있지만) 등. 스턴버그나 킹 비더는 그들의 전성기에 재능에서는 포드를 능가한다고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포드만이 1950년대를 살아남았고, 70세가 넘어서 만든 마지막 작품(<일곱 여인> 1966)에서도 그의 재능을 입증시켰다. 포드의 예술가로서의 긴 수명을 가능케 한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태그 갤러거_ 오해가 있다. 킹 비더도 살아남았다. 1959년에 만든 <솔로몬과 시바>는 훌륭하다. 1956년에 만든 <전쟁과 평화>도 내가 좋아하는 영화다. 다만 제대로 된 평가를 못 받았을 뿐이다. 그 점에선 존 포드도 당대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작품 <일곱 여인>은 처참한 대우를 받았다. 재난 수준이었다. 나만 그 영화를 좋아했다. 필라델피아의 빈민지구에서 상영되었을 때, 나는 서너 번 정도 봤다. 다른 사람들의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면서. 포드의 예술가적 수명의 이유? 그것은 그가 그저 훌륭한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물론 예술가의 수명은 그의 재능과 의지만으로 결정되는 건 아니다. 다만 어떤 예술가는 병이나 사적 곤경을 넘어서는 재능을 발휘한다. 존 포드가 그런 사람이었다. 해리 캐리 Harry Carey 허문영_ 포드에 관한 비디오 에세이에서 당신은 “포드적 영웅은 도착하고, 바로잡고, 떠나간다. 이 모든 것은 해리 캐리를 모델로 삼았다”고 말했다. 질문은 이것이다. 이런 영웅상이 작가들이나 감독들이 아니라 해리 캐리라는 한 배우로부터 유래했다는 뜻인가. 또 이런 영웅상은 포드 영화에만 고유한 것인가. 보통의 영화 교과서는 그런 영웅상이 대부분의 서부극에 공통적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태그 갤러거_ 그 표현에서 해리 캐리는 배우 혹은 스크린 캐릭터를 의미한다. 우리가 아는 바에 따르면(포드 연출-캐리 주연작은 3편만 남아있다), 그는 같은 캐릭터를 연기했고, 존 웨인도 같은 방식으로 연기했다. 몇 가지로 나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모델로서이다. 이것은 우선 연기와 스크린 페르소나에 관계한다. 바로 그의 느긋함(Laid-back)이다. 그는 자신을 관객에게 들이밀지 않는다. 존 웨인도 이것을 복제했다. 다른 하나는 캐릭터로서이다. 바로 선한 악인(good badman)이다. 존 웨인도 < 역마차 >< 3인의 대부 > 등에서 같은 캐릭터를 연기했다. 마지막은 포드적 영웅으로서이다. 그는 가족을 재결합시키고 마지막엔 떠나간다.(<스트레이트 슈팅>의 원래 결말은 그가 마지막에 떠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그것을 해피엔딩으로 바꿨다.) ‘도착하고 / 바로잡고 / 떠나간다’는 물론 모든 포드 영화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며 많은 변주가 있다. < 프리스트 판사 >에서는 도착하지 않고 떠나가지 않는다. < 황색 리본 >에서도 도착하지 않는다. 떠나가지만 돌아온다. 그런 영웅상이 서부극에 공통적이지 않느냐고? 모르겠다. 나는 아마도 모든 서부극 중의 1% 정도만 보았을 것이다. 아마 더 적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서부극을 떠올릴 수 있을까. < 셰인 >? 혹은 세르지오 레오네 혹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서부극?(하지만 그들은 존 포드를 모방하지 않았는가). 하워드 혹스의 어떤 서부극이 이런 패턴일까? 혹은 프리츠 랑, 자크 투르뇌르, 새뮤얼 풀러? 어쩌면 < 하이 눈 >? 1970년대 이후 서부극의 공통 요소가 1910년대, 1920년대, 1930년대, 1940년대의 서부극에도 적용될까? 허문영_ 당신은 오늘의 영화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이유를 말해줄 수 있는가. 동시대 영화에 대한 지속적 관심이라는 것이 비평가들에게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가. 태그 갤러거_ 오늘의 영화에 대한 내 무관심이 내 잘못인지 영화의 잘못인지는 모르겠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오늘의 영화를 다루는 비평가나 프로그래머는 아니다. 나는 오늘의 영화에서 구도, 편집, 블로킹의 혁신성과 정교함을 찾지 못한다. 또한 내가 원하는 깊은 휴머니즘을 찾지 못한다. 193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의 영화들을 떠올려본다면, 오늘날에도 1년에 만들어지는 500편의 할리우드 영화 중에서 오직 2, 3편 정도만이 흥미로울 것이다. 거기에 얼마간의 외국영화를 보탤 수 있을 것이다.(물론 나는 월드 시네마의 아주 일부만을 봐왔을 뿐이다.). 나는 옛 영화의 99%도 좋아하지 않는 셈이다. 내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 TV 시리즈를 좋아한다는 점은 인정해야겠다. < 왕좌의 게임 >(Game of Thrones), < 다운튼 애비 >(Downton Abbey), <라크 라이즈에서 캔들포드까지>(Lark Rise to Candleford) 등. 물론 이들은 ‘작가’ 영화는 아니다. 프로듀서, 대본작가, 배우들이 ‘작가’들이다. 흥미로운 미장센이 많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캐릭터와 이야기가 흥미롭다. 반면 오늘의 영화들은 지루하고 흥미로운 점을 찾기 힘들다. 너무 많은 미국 영화들이 진부하고 가식적이다. 너무 많은 외국 영화들이 느리고 무겁다. 50년 전 나는 수천 편의 영화를 즐거워하며 죽치고 앉아 보았다. 오늘에는 10분 혹은 15분이 지나면 멈춘다. 내가 망가졌는지도 모르겠다. 내 잘못일까. 영화 잘못일까. 내 철학은 영화를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올바른(right)”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술의 보편적 핵심은 즐거움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도덕(morality) 또한 제공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말했듯이 도덕은 가장 큰 즐거움이다. 허문영_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장 마리 스트라우브와 페드로 코스타에는 깊은 관심을 보여왔고 그들에 관한 글을 썼다. 이런 예외적 관심의 이유가 궁금하다. 태그 갤러거_ 아벨 페라라도 포함시켜야 한다.(적어도 < 뉴 로즈 호텔 >(1998)까지는 그렇다.) 그들에게는 앞서 말한 내가 좋아하는 자질들이 있다. 다른 자리에서도 말했지만, 비평가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한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를 말하는 것이다. ‘아름답다’는 텅 빈 형용사 같은 것을 쓰지 않고서 말이다. 스타라우브와 코스타에 대해 쓸 때마다 나는 왜 그들을 좋아하는지 말하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그것을 25단어로 요약할 수는 없다. 당신은 그럴 수 있는가. 나는 스트라우브의 DVD와 자막을 만들어왔다.(비공식적인 작업이어서 그는 모른다. 판매용이 아니라 내 친구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의 작품을 여전히 좋아하지만 다니엘 위예와의 공동연출작보다는 덜 강렬하고 덜 정교하다. 얼굴들은 작고 표정은 그렇게 선명하지 않다. 이것이 스트라우브-위예의 작품들을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이유일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존 포드 영화의 두 쇼트가 내가 막스 오퓔스, 장 르누아르, 로베르토 로셀리니, 킹 비더, 무르나우, 조셉 폰 스턴버그, 칼 드레이어, 미조구치 겐지, 스트라우브 등의 영화에서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오늘의 영화에서 내가 찾지 못하는 것이고, 옛 영화의 1% 정도에서 내가 찾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한 쇼트는 < 조용한 사나이 >에서 모린 오하라가 존 웨인에게서 꽃을 건네받는 장면이다. 다른 쇼트는 < 아파치 요새 >에서 워드 본드가 성경을 읽고 있을 때 그의 아들이 들어오는 장면이다. 서울에서 인터뷰할 때, 한 영화잡지의 표지를 보았다. 한 젊은 한국 스타가 표지에 실렸는데, 그는 마치 자기를 죽이고 싶은 것처럼 쏘아보고 있었다. 내가 말한 두 쇼트에는 자신을 죽이고 싶어하는 눈빛을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스턴버그는 “예술은 한정된 공간에 무한한 정신의 힘을 압축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존 포드 John Ford
“주인공들이 너무 가여워요” 봉준호 , 임권택 을 생각하(면서 자기 영화들을 돌아보)다 이렇게 말을 꺼내들고 싶다. 봉준호 는 CJ가 아니다. 그와 똑같은 의미에서 봉준호는 홍상수 가 아니다. 어쩌면 이런 표현이 당신을 불편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게 읽었다면 당신은 내 의도를 오해한 것이다. 점점 CJ 영화를 보는 것은 마치 대중적 흥행을 염두에 두고 정교하게 (엉성하게?) 작성된 매뉴얼을 검토하는 일처럼 느껴진다. 홍상수 영화를 보는 일은 이야기를 만든 다음 그게 희미하게 보일 때까지 물러나서 남은 인상만을 가지고 엉성하게 (정교하게?) 그려낸 재빠른 스케치를 약간 아슬아슬하게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봉준호가 영화 제작에 돌입할 때 장르를 다루는 것인지, 매뉴얼을 작성하는 것인지 약간 모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종종 영화 앞에서 그가 만들어놓은 콘티가 영화를 보는 내게는 매뉴얼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일사불란한 영화적인 기계 기호들의 운동. (< 살인의 추억 >) 일단 시작되면 멈추지 않을 것만 같은 쇼트들의 접합과 그 안의 변화. (< 설국열차 >) 그러나 그 도표는 대중적 흥행과 아무 관계가 없다. (< 마더 >) 이때 그의 매뉴얼은 그 자신의 매우 사적인 영화(歷)사의 (그 자신에게만) 명장면에 관한 다소 기형적인, 어쩌면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변태적으로 구부러트린 집합처럼 보인다. (< 괴물 >) 그게 일정한 순열로 놓여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 무언가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배열된 것처럼 보이는 리듬 사이에서 삑사리의 순간들이 섬광처럼 나타날 때마다 이 영화를 하나의 집합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라고 질문하고 싶게 만든다. 이상할 정도로 봉준호의 영화는 매번 그 안에 완전히 소속되지 않는 (그래서 여전히 설명하기 까다로운) 분리된 또 하나의 집합이 공존하고 있다. 그것이 둘 사이에서 교집합을 이루고 있지만 그렇게 연쇄망을 이루는 그 고리를 따라 가다보면 어떤 집합들은 중심과 완전히 공집합을 이룬 채 영화 안에서 마치 독립변수처럼 활동하는 쇼트를 만날 때가 있다. 그리고 이 잉여의 공집합은 잘 눈에 띄지 않은 채 조금씩 늘어가고 있다. 이를테면 <마더>에서의 나무. 아마도 21세기 한국영화에서 가장 불길하고 아름다운 나무. 이제 막 살인을 저지른 ‘마더’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저 홀로 서서 마치 우주의 복판에 서 있는 것만 같은 나무. 그 나무를 하나의 점으로 하여 이미지가 회전을 시작할 때 거기서 만들어지는 것은 사건을 기다리는 사건이라는 간접화법의 (미처 닫히지 않은) 원을 그려내는 운동이다. < 마더 > 그 다음. 홍상수 와의 대차대조표. 먼저 순열에 대해서 말해야 할 것이다. 종종 홍상수를 말하기 위해서 시간을 말하지만 그건 차라리 등식으로 이루어진 순열과 집합의 게임이다. 숫자가 매겨진 영화들. < 오! 수정 >, < 생활의 발견 >. 그리고 < 옥희의 영화 >. 만일 그것을 시간이라고 부른다면 오로지 그것은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당신의 머릿속에서 순열의 조립 과정을 따라 벌어진 거짓 운동일 것이다. 그 안에서 이제 어떻게 접느냐의 문제가 남는다. 무엇이 무엇에 속하는가. 그런 다음 그 안에서 정렬될 수 없는 변수들은 어떻게 셈할 것인가. 이번에는 더할 수 없이 마치 조각조각 찢어버리듯이 변수를 나누(고 나서 뒤섞)었다. < 자유의 언덕 >. 13개로 이루어진 편지. 나는 여기서 뒤섞는다기보다는 무언가 매번 고통스럽게 씬 사이를, 그 사이 안의 쇼트를, 찢어버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다음 아마도 어떻게 셈하느냐에 따라 하나, 혹은 둘을 더하거나 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더) 그런 다음 거기서 잃어버린 편지 한 장을 셈해야 한다. 무엇이 무엇에 귀속되는가. 거기서 무엇이 무엇 앞에 있는가.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홍상수가 (그 스스로의 예술적 스승이라고 부른) 세잔에게서 배운 것은 그 순간의 균형 감각이다. 순열 사이의 균형. 집합의 균형. 그 안의 정지 감각(의 균형). 그 어느 그림보다도 나는 세잔이 1890년에 시작해서 이 년간 매달린 두 점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에서 그 배움을 본다. (이상할 정도로 홍상수가 사람을 세워놓을 때 이와 비슷해지는 것은 그저 우연일까) 그때 그것이 하나의 집합이 된다는 것 말고는 그 안의 대상들 사이의 운동을 분별하기 힘들어진다. 심지어 점점 그렇다. 그래서 희미해져가는 것을 누군가는 셈해보고 싶어 하지만 물론 그건 불가능하다. 그때 꿈은 유리한 알리바이이다. 반대로 봉준호 는 일단 시작하면 되돌아가는 법이 없다. 도미노처럼 처음 하나만 쓰러지면 갑자기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차례로 쓰러져간다. 마치 사연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처럼 시작하면 그저 앞으로만 나아간다. 하지만 이 운동이 괴상해지는 것은 그게 사방팔방으로 쓰러져나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걸 붙잡으러 뛰어가는 인물의 동선조차 자기가 쫓아가는 게 누구인지 몰라 여기저기를 뒤지기만 할 뿐이다. 잃어버린 동선. (< 살인의 추억 >) 그래서 이상할 정도로 산만하게 보인다. 영화가 시작한 지 55분 만에 풍비박산 나듯이 흩어지는 가족들이라는 점들. 그 점이 만들어내는 동선. (< 괴물 >) 혹은 찾아갈수록 점점 자기가 붙잡으려는 대상으로부터 멀어진다. (< 마더 >) 심지어 모두가 한 열차에 타서 한쪽 방향으로만 나아갈 때조차 그렇다. (< 설국열차 >) 이때 그는 직선을 온갖 방법을 써서 곡선처럼 보이게 만들고 싶어 한다. 봉준호의 영화에서 진행되는 운동에 대한 가장 명징한 이미지는 직선으로 달려가는 열차가 철로를 따라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할 때 거의 절반처럼 거의 접히다시피 하면서 맞은 편 열차 칸에서 형 프랑코가 절반의 이쪽 칸의 남궁민수를 향해 총을 쏘는 장면이다. 직선 속의 곡선. 선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유기체와도 같은 하나. 수많은 형태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결국 직선이다. 그런 다음 모든 것을 하나로 수렴하는 점. 개. 시체가 발견되었던 구멍, 괴물, ‘마더’. 엔진. 잠깐! < 설국열차 > 나는 빨리 임권택 에게로 돌아와야 한다. 원래의 자리. 처음 이 자리에 봉준호 를 초대했을 때 나는 둘 사이의 도표를 그리고 있었다. 물론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그릴 것이다. 모든 영화감독(들)은 동시에 그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의 영화(歷)사의 감독들이다. 그러므로 나는 두 개의 역사 사이의 교차로를 찾을 것이며, 그러는 동안 나를 따돌리고 그 사거리에서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시간이 매번 또 다른 교통의 질서를 만들어낼 것이다. 누군가는 거기서 옮겨 탈 것이며 또 누군가는 거기서 내릴 것이다. 영화는 그렇게 서로에게 이어질 것이다. 나는 여러 차례 임권택 감독님이 봉준호(의 서로 다른 영화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하지만 그건 사적인 자리에서 한 이야기들이다. 그러므로 그걸 구태여 여기서 이야기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이번에는 반대로 듣고 싶었다. 물론 내가 여기서 청해 들으려는 것은 (그 뻔한) 의례적인 존경과 찬사가 아니다. 그 둘은 어디서 서로를 지나쳐 간 것일까. 우발적인 만남. 아마도 그 사이에 얽혀들게 될 한국영화사. 물론 봉준호의 주변에서 어른거리는 이름은 김기영 이다. 그 자신도 그렇게 (자주) 말을 했고 구태여 그 말을 빌리지 않아도 나는 < 마더 >를 보는 내내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더 자주 떠올린 것은 < 붉은 살의 >의 이마무라 쇼헤이였다) 나는 여기서 무리를 해가면서 임권택과 봉준호를 묶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가능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이따금 임권택의 영화중의 무언가가 봉준호의 영화에서의 어떤 순간을 만져본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반대로 어디에선가 봉준호의 쇼트가 임권택의 어떤 영화의 장면에 대한 연인처럼 여겨질 때가 있었다. 이런 설명이 비평의 자리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길 사이 바깥으로 빠져나간 이탈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몹시 위험한 자리에 들어섰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가정을 더 밀고 나가고 싶다. 그런 다음 그 가운데서 무언가가 서로를 밀쳐낼 때 그 둘 사이에는 그것을, 말 그대로 그것을, 잠재운다는 인상이 남는다. 저기서 깨어있는 것이 여기서는 잠들고 있다. (내게 조금만 관용을 베풀어준다면) 나는 그걸 공존의 경제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쪽에서 초과해버린 부분이 저쪽에서 부족하면서 겨우 균형을 맞춘 기묘한 교환. 마치 저쪽에서 그래버렸기 때문에 내 쪽에서는 이래도 괜찮아, 라고 그냥 긍(정해버렸다고 가)정된 거래. 하지만 이 비유적인 느낌을 내게 탓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 둘 사이에서 내가 느끼는 거리는 딱 그 정도에서 멈춰 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그것이 아직 서툴긴 하지만) 용기를 내어 21세기에 들어선 한국영화 안에서 선물의 경제학이라는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모델을 제시해보고 싶다. 우리가 희망의 원리를 비평 담론에서 망설여야 할 어떤 이유가 있단 말인가. < 살인의 추억 > < 악의 손길 > 약간의 잡담. 봉준호 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내게 누군가 말하기를 봉준호의 영화에는 그걸 의도한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어떤 장면에서 영화사의 한 순간에 대한 향수를 느껴보게 만들 때가 있어요, 라고 건드렸을 때 잠시 돌아본 적이 있었다. 영화 안에 있는 영화에 대한 기억. 그것이 이야기 안에서 아무런 기능을 하지 않으면서도 그 자체로 영화를 기묘하게 앞뒤로 오가게 만드는 장치가 된다.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봉준호를 설명하면서 왜 어떤 비평가도, 어떤 시네필들도 그런 희한한 운동에 대해서 건드리지 않는 것일까. 여기서 받는 감동은 마치 암호와도 같은 것이다. 하나의 예. 박두만 형사가 시체가 발견된 현장에서 범인의 흔적을 찾기 위해 논두렁 위아래를 오르내릴 때, 그 뒤를 따라 카메라가 뒤따라가는 긴 롱 테이크의 운동에서, 논둑길을 뛰어 올라와 발자국을 밟지 말라고 저 멀리 오는 경운기를 향해 사선으로 달려가는 장면에서(< 살인의 추억 >), 문득, 말 그대로 문득, 마크와 이제 막 결혼식을 끝내고 신혼여행을 온 수잔을 따라 카메라가 뉴멕시코의 작은 마을의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함께 만나고 헤어지면서 또 하나의 동선을 만들어내는 다이너마이트를 실은 캐딜락 오픈카를 어처구니없게도 떠올리면서(< 악의 손길 >), 롱 테이크에 감탄하는 대신 그 ‘럭셔리한’ 캐딜락이 ‘촌스럽기 짝이 없는’ 경운기로 바뀐 모습에서 깔깔 대고 웃는 극장 안의 그 누군가에게, 나도 지금 함께 극장에서 당신과 영화를 보고 있다는 공감을 가져보고 싶어진다. 우리들 사이의 웃음이라는 인사. 말하자면 그런 의미에서의 기록을 찾아보았다. 봉준호는 2012년 영국 영화잡지 사이트 앤 사운드(Sight & Sound)에서 앙케이트 한 ‘영화사상 탑 10 영화’에 응답했다. 이 잡지는 1952년부터 10년 단위로 앙케이트를 했고, 2002년부터는 비평가(와 학자, 문화이론가, 영화제 프로그래머)와 영화감독을 분리하였다. 그런 다음 2012년 9월호에 결과를 발표했다. 사이트 앤 사운드 편집진에 따르면 지구상에 활동하는 358명의 감독이 앙케이트에 응했으며, 그 중 100명을 잡지에 게재했고 전체 명단은 온 라인으로 발표했다. 봉준호의 명단은 알파벳 순서에 따라 63페이지에 실렸다. 별다른 설명은 없고 그저 짧게 “Ten films that the biggest impact on my own personal view of cinema”라고 명단 앞에 덧붙였다. 그런 다음 10편의 제목은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 비정성시 >(후 샤오시엔), < 큐어 >(구로사와 기요시), < 하녀 >(김기영), < 파고 >(코엔 형제), < 싸이코 >(알프레드 힛치콕), < 성난 황소 >(마틴 스콜세지), < 악의 손길 >(오손 웰즈), < 복수는 우리가 한다 >(이마무라 쇼헤이), < 공포의 보수 >(앙리-조르주 클로조), < 조디악 >(데이빗 핀처). (물론 알파벳 순서이다) < 플란다스의 개 > < 괴물 > < 설국열차 > 이 명단에 기대어 봉준호 는 홀수의 영화가 있고 짝수의 영화가 있다고 다소 익살스럽게 말하고 싶어진다. 먼저 홀수의 영화. < 플란다스의 개 >와 < 괴물 >. 두 영화는 외양으로 볼 때 완전히 다른 것처럼 보인다. 그냥 간단하게 규모가 다르다. 누군가는 둘 사이의 차이를 먼저 지적하고 싶을지 모른다. 하지만 두 영화는 당신의 상상보다 훨씬 가깝게 있다. 무엇보다 개와 괴물. 그 둘은 어떻게 대상에 주인공들이 애절하게 가닿으려고 애를 쓰는지를 보여준 다음 거의, 아마도 거의, 그 근처에 다가갔을 때 비로소 그것이 실패한 목표라는 것을 깨닫는지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상실감을 안겨준다. 그들 사이의 기기묘묘한 교환. 종종 봉준호의 슬로 모션에서 운동의 쾌감을 맛보는 대신 허우적거린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부정적인 운동의 고통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많은 영화들이 증후에 시달리는 동안 봉준호는 충동의 계략을 꾸미는 중이다. 나는 < 설국열차 >를 보았을 때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열차는 어딘가를 향해서 가는 중이 아니다. 모두들 열차 맨 앞 칸에서 벌어진 일에 매달렸다. 그런 다음 뫼비우스의 순환에로 빠져들었다. 그때 봉준호는 아니오, 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목표는 열차의 맨 앞 칸이 아니라 열차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충동의 순환궤도를 멈추지 않고 빙빙 도는 것이 핵심이다. 빙빙 돈다는 것. 앞은 끝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끝은 앞의 힘으로 달아나는 중이다. 그러므로 <설국열차>의 마지막 장면에서 봉준호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환상을 붕괴시키는 순간 현실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패러독스의 세계. 여기서 봉준호는 마침내 영화와 만화가 하나가 되는 일체감을 맛보았을까. 물론 그걸 내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설국열차>보다 <괴물>이, <괴물>보다 <플란다스의 개>가 훨씬 만화에 가깝게 보인다. 만화라는 캐리커처의 예술. 여러 자리에서 봉준호는 자기가 얼마나 만화를 사랑하는지 공공연하게 선언하다시피 했다. 물론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는다. 차라리 이 말은 봉준호의 예술적 야심이 때로 영화가 가 닿을 수 없는 어떤 지점을 목표로 한 표현이 아닐까, 라는 의심을 품게 만든다. 영화의 블랙홀은 어디일까. 그때 만화는 어디에 있을까. 봉준호는 종종 영화만이 가능한 순간에 과도하게 집착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로는 불가능한 지점이 어디인지를 탐색한다. 이 암흑지점의 이미지를 만날 때 영화 안에서 비-영화를 엿보는 괴상한 순간과 만나게 된다. 그 순간 영화의 감각이 일시적으로 멈추고 때로 어떤 구조가 붕괴되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여기서 봉준호는 현실을 고립시킨 다음 그 속에 불가능한 존재를 집어던졌을 때 사실들이 어떻게 견디고 부서져나가는지, 라는 사건을 만들고 싶어 한다. 아마도, 역시 아마도, (잠시 머뭇거린 다음 소리 내어 읽어주기 바란다) 그래서 봉준호의 웃음은 불길하다. 오고 가며 봉준호 를 여러 번 마주치기는 했지만 앉아서 작정을 하고 이야기를 나눈 것은 < 마더 >를 찍고 난 다음, 혹은 < 설국열차 >를 준비하고 있을 때 였다. (“봉준호는 지금 다시 시작 한다” _씨네21_800호_20110419/0426) 그때 (함께 씨네 산책을 진행하던) 허문영에게 봉준호에게서 결정적으로 우리가 질문해서 얻어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라고 그 자리가 시작되기 전에 묻자 슬그머니 웃으면서, 물론 (영화 속에서 날뛰는) 리비도의 비밀이지요, 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이 오랫동안 남았다. 그때 우리의 이야기는 <설국열차>에 모아졌고 영화는 그의 두뇌 속에서 이미 만들어진 상태였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다소 이상하게 진행됐다. 우리는 미처 보지 못한 영화에 대해서 하듯이 질문했고 봉준호는 마치 이미 만들어진 영화에 대해서 설명하듯이 대답했다. 이 신기한 불균형. 나는 이 대답 속에 가려져있는 정념의 신호들을 읽는다. 물론 만들어진 영화는 말하여진 영화와 차이가 있었다. 누군가는 그것만으로도 뇌의 영화와 퍼포먼스로서의 영화 사이에 놓인 간극에 관한 흥미로운 논의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문제에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 둘을 하나로 합치는 대신 그 둘을 각자 존재하는 두 편의 영화라고 가정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좀 더 느슨하게 말해도 괜찮다면 두 대의 기차가 한 궤도 위에서 달리고 있다. 물론 지금 한 대는 눈 밭 위에 쓰러져있고 다른 한 대는 아직도 달리는 중이다. 그런 다음 좀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봉준호는 제작의 자리로 물러 난 다음 (< 살인의 추억 >에서 연출부를 한) 심성보 를 연출자로 내세운 < 해무 >를 제작했다. 물론 지금 많은 감독들이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설국열차>는 박찬욱 이 제작한 영화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봉준호의 공백이라고 부르기에는 어딘지 적절치 않은 회색의 베일이 그 앞에 드리워져 있다. 어떤 터치라는 문제. 봉준호의 터치. 나는 봉준호의 연출에 대해서 설명해야 할 때마다 이상하게 (어디선가, 텔레비전에서 했던) 이 대답이 떠오른다. 그 자신이 막 영화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난 다음 한동안 (그의 표현을 빌리면) ‘지리멸렬’하게 지낼 때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죠, 제가 찍은 결혼식 테이프를 갖고 계신 분도 계실 거예요, 근데 아마 모르실 거예요, 제가 찍고 편집한 지는, 잘 찍었어요, 게다가, 신부 엄마 울 때는 딱, 클로즈 업 들어가고, 절대 안 놓치죠, 그런 순간은, 주례사도 끊기면 안 되고, 또 우는 하객들 찍고, 신랑의 과거 여자친구 같아 보이는 사람 또 괜히 막 가까이 찍고(...)” 처음에는 그냥 시작했다. 그러면서 눈을 돌려 신부의 엄마가 흘리는 ‘눈물’을 “절대 안 놓칠”뿐만 아니라 클로즈업으로 다가가서 바라본다. 물론 주례사도 끊기면 안 된다. “우는 하객들” 그런데 여기는 장례식장이 아니다. 하객들이 왜 우는 것일까. 너무 기뻐서? 이건 두 사람의 몰락이니까? 슬퍼서? 무엇이 슬퍼서? 신부의 남자 친구도 여기에 와 있는 것은 아닐까? “신랑의 여자친구 같아 보이는 사람”을 그냥 찍는 게 아니라 “괜히 막 가까이 찍”을 때 봉준호는 이미 이 결혼식장에 관한 또 다른 시각적인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중이다. 거기에 보이는 풍경. 풍경 속의 이면의 풍경. 이 결혼식장은 봉준호의 친구 혹은 선배의 결혼식장이 아니다. 심지어 지금 이건 이 비디오테이프를 봉준호가 찍었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위한 아르바이트였다(고 한다). 그날 온 하객들은 봉준호가 그날 처음 본 사람들이다. 아니, 그날 결혼식을 올리는 신랑 신부를 처음 보았을 것이다. 이때 봉준호는 두 가지를 따라간다. 하나는 결혼식 장면의 법칙이고, 다른 하나는 그 법칙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음란한 외설적 이면의 얼룩이다. 그때 여기에는 봉준호의 원근법이 잘 설명되고 있다. 나는 진심으로 이 비디오테이프들이 보고 싶다.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그의 필모그래피에 포함시키고 싶다. 말하자면 그런 의미에서 <해무>를 나는 비스듬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베일을 열어보는 것은 이 자리에서 할 일이 아니다. 물론 이 영화를 셈에 포함시키기는 했지만 나는 미스터리를 그냥 내버려두기로 하였다. 여기서는 방점을 옮겼다. 오늘 만나서 진행한 이 대화는 지난 대화의 속편이 아니다. 우리 둘 사이에서 나누고 싶었던 것은 임권택 이라는 영화를 어떻게 통과해갈 것인가, 라는 질문의 세션이다. 여기서는 질문을 서정적으로 만들 생각이 없다. 마찬가지로 나는 낭만적인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단지 그 안에서 영화가 던진 체험을 어떻게 견디는지, 어떻게 즐기는지, 그 안에서의 참을성에 대해서 들어보고 싶었다. 참을성? 진정한 참을성. 그것은 매혹에 사로잡힌 우리들이 그 안에서 몸부림친 대가로 얻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영화는 결국 매혹당한 시선이 바라보게 되는 진실이 될 것이다. 물론 알고 있다. 니체는 예술에서 진실에 속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므로 나는 의도적으로 산만하게 질문했다. 매번 봉준호 는 질문 안에서 자신이 놓인 부재의 조건을 차례로 열거했다. 우리들의 임권택이라는 체험 속의 움직임. 그것이 움직이는 장소. 이때 봉준호는 대답을 하면서 몇 차례이고 영화 속의 인물을 향해서 가엽다, 라는 말을 썼다. 임권택의 영화를 보면서도 그런 말을 썼고 자기 자신의 영화를 향해서도 그 말을 썼다. 나는 자꾸만 이 말 앞에 멈춰 서게 된다.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는 그 말의 원래 뜻 안에 머물면서도 그 말을 다르게 쓰는 경우가 있었다. 한번만 더 내게 비교를 허락해준다면, 이를테면 그건 마치 (잘 알려진 대로) 홍상수 가 예쁘다, 라는 말을 쓰는 것과 같은 어법처럼 들렸다. 물론 홍상수는 언제나 자기의 주인공들을 예쁘게 바라본다. 그러나 가끔 그 주인공에게 지나치게 가깝게 다가갈 때 무시무시할 정도로 잔인해진다. 똑같은 의미로 봉준호가 가여운 주인공에게 지나치게 가깝게 다가갈 때 변태스러울 정도로 기괴해진다. 그들은 그런 의미에서 거리 조절의 시네아스트들이다. 여기서 나는 봉준호에 대해서만 생각할 참이다. 그러므로 질문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정성일 _ 설명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 자리는 한국영화에서 지금 활동 중인 감독들을 차례로 만나면서 2014년이라는 시간에, 자기의 자리에서 어떻게 임권택 감독님을 바라보는지, 언제 (영화적으로) 만났는지, 거기서 어떻게 헤어지는지, 말하자면 지도를 그려보고 싶은 바람에서 이야기를 듣고 싶어 마련한 자리입니다. 초대에 응해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저는 한편으로는 임권택 감독님의 전작을 차례로 써나가면서 수직선을 그어나가면서 다른 한 편으로 차례로 이야기를 청해 들으면서 수평선을 그어보면 한국영화의 씨줄과 날줄에 관한 하나의 기록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습니다. 작년 부산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님의 전작 회고전을 하면서 한국영화 감독들에게 백지수표를 나눠주었습니다. 봉준호 감독께서는 < 아제아제 바라아제 >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그 자리의 관객석에 앉아 첫 사랑과 이 영화를 본 사연을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웃음) 오늘은 임권택 감독님에 대한 봉준호 감독의 생각뿐만 아니라 동시에 21세기 평행으로 진행된 봉준호 감독님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질문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두 영화가 공존할 때 어떻게 서로 다른 성질의 영화가 함께 한국영화라는 구도의 집을 세우는지 보고 싶습니다. 봉준호 _ 지금 임권택 감독님 102편 중 몇 편을 볼 수 있는 상황인가요? 정성일 _ (현재 다시 보고 쓸 수 있는 편수는) 75편입니다. 봉준호 _ 생각보다 많네요. 반 정도인 줄 알았는데 꽤 많네요. < 인플루엔자 > 정성일 _ 제 소망은 이런 것입니다. 임권택 전작을 놓고 진행한 이 연재가 끝나면 누군가는 봉준호 감독의 전작을 쓰겠다고 그러겠죠.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저는 뒤늦게 (전주영화제 삼인삼색 중의 하나로 만들어진) 중편 < 인플루엔자 >를 봤어요. 그 영화가 정말 좋았어요. 그냥 이건 걸작이었어요. 그런데 왜 아무도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쓰지 않는지 의아할 따름이었어요. 말하자면 모든 영화는 친구를 가지고 있어야만 외롭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모든 영화에 대해서 하나 이상의 글이 쓰여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어떤 영화는 친구가 많지만 어떤 영화는 그저 외롭게 영화 혼자서만 시간을 기다리는 영화들도 있으니까요. 오늘 드릴 질문에는 약간 불편한 이야기도 있고,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궁금한 질문도 있습니다. 재미없는 질문도 있고, 미루어둔 질문도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결심은 하고 있습니다. 일단 봉준호 감독과 이야기를 하려면 내가 주도권을 빼앗기면 안 된다! (웃음) 그렇게 되면 봉준호 감독이 자기 페이스로 진행하게 되니까 정신을 차려야 한다, 그런 결심, 왜냐하면 제가 이미 3년 전에 ( 허문영 씨와 함께) 긴 인터뷰를 해본 실전 경험이 있으니까요 (웃음) 그래서 몹시 정신 사납고 산만하게 진행할 생각입니다. 봉준호 _ 제가 정서가 산만해서(웃음) 정성일 _ 무조건 산만하게 얘기를 진행해야겠다, 는 결심 (웃음) 봉준호 _ 국정원에 끌려온 느낌입니다. (일동 웃음) 정성일 _ 우리들의 지난 번 이야기는 < 설국열차 >로 끝났으니까 이번에는 <설국열차>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모든 면에서 작년 여름 <설국열차>의 소용돌이로부터 정확히 일 년이 지났고 지금은 그 사이 제작을 한 < 해무 >가 있습니다. 제가 임권택 감독님과 인터뷰를 할 때에도 그 영화를 막 마쳤을 때와 그로부터 어느 정도의 거리를 지니게 된 다음 일 년이 지나고 나면 같은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을 경험하곤 했습니다. 혹은 적어도 방점이 달라진다고 할까요. 게다가 그 영화가 큰 영화일수록 감독들은 마케팅의 전략 안에 놓여진 전술이 되어 수 없는 자리에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다보면 인터뷰 자체를 반복하는 학습의 과정을 겪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개봉 당시에는 같은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정말 지겨운 상태에 놓인 달까요. 봉준호 _ 저도 개봉시기가 항상 제일 싫습니다. 이상한 이슈에 끌려 다녀야 하고, 참, 정성일 _ < 설국열차 > 프로젝트를 처음 들은 것은 < 괴물 > 직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괴물> 직후에 <설국열차>를 만들 줄 알았는데 그 사이에 < 마더 >가 끼어든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봉준호 _ 저는 < 살인의 추억 > 직후에 김혜자 선생님과 약속을 해놨던 상태였어요. 정성일 _ 영화의 규모나 이야기의 태도, 게다가 열차라는 폐쇄공간으로 시종일관 진행하는 사실상 450억 원 실험영화 < 설국열차 >를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봉준호 감독의 숙원의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개봉하고 이제 1년이 지났는데 돌아보니 <설국열차>는 자신에게 어떤 영화였나요? 봉준호 _ 아직 완전히 과거형은 아닙니다. 미국과 핀란드에서 개봉중이고, 그래서 지금 극장에 걸려있고, 또 개봉 준비 중입니다. 지금 8월인데, (잠시 생각) 지난 6월 말에서 7월 초에 북미 프로모션을 하다 온 거여서, 미국 프로모션 할 때 정말 지겨웠죠. 거의 인터뷰가 500개, 무대인사 100개, 관객과의 Q&A 50개를 넘어가니까 사람의 멘탈이 이제 너덜너덜해졌어요. 그렇게 하고 온 직후라서 아직도 완전히 객관적으로 보이지는 않아요, 얼마 전 작년에 영상자료원에서 < 살인의 추억 > 10주년 행사를 해주셔서 옛날 배우들이 모여 큰 프린트로 봤는데, 그건 정말 그 영화를 지나왔구나, 라는 기분이 있는데, < 설국열차 >는 그 정도의 느낌은 당연히 아니구요, 지금은 <설국열차>는 철도 레일에서 이제 막 벗어나서 뛰어내리려는 그런 상황이고, 요즘 < 해무 >도 개봉했고, 다음 작품 시나리오도 열심히 쓰고 있지만. (잠시 생각) 아직도 완전히 마무리된 느낌은 안 들어요. 미국판 DVD가 나와서 진열장에 꽂으면 그때 딱 마무리가 되는. (웃음) 제가 소유욕이 강해서, 손에 만져지는 물건화 돼서 나와 책장에 꽂으면 끝날 거 같아요. 아마 다음 그 다음 달에 미국 DVD가 나오면 (마음속에서) 종료될 거 같아요. 미국이 제게 별 의미가 있는 거 아니지만 가장 늦게 개봉한 나라고, 어쨌든 영어 영화였으니까요. 질문은 <설국열차>가 제게 어떤 의미인가였는데 일단 영화 외적으로 너무 과열된 상태로 개봉이 돼서... (망설이다가) 그렇게 흥분할 영화가 아닌데 그게 좀 부담스러웠고, 그리고 제게는 SF 장르를 본격적으로 했다는. 물론 그 전에 < 괴물 >이 있었지만 사실 그 영화는 괴생물체 존재만 제외하면 소시민적인 세팅이었고 여기서는 하나의 세계 전체를 창조하는 거잖아요. 여기서는 기차라는 세계였는데, 그런 것이 SF의 매력인 거잖아요. 골수 SF 팬은 아니지만 정면으로 SF 장르를 다뤄봤다는 것이 제게는 보람이었다. (<설국열차>는) 다섯 번째 영화인데 지금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영화를 함께 준비하고 있지만 그 영화가 저에게 어떤 전환점이 되거나 분기점이 되었는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그건 좀 더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을 거 같고, 지금 여섯 번째 영화로 쓰고 있는 시나리오도 <설국열차> 전에 2010년에 구상했어요. 그러니까 영화들이 서로 계속 디졸브 되면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SF 장르를 도전해서 해봤고, 그런데 거기서는 한국적인 좌표에서 벗어나 보았죠. (그 전에는) 한국적인 로컬리티가 있거나 시공간적인 좌표를 갖고 항상 영화를 해왔는데, 한강에 괴물이 나오고, 80년대 화성이 등장하고, 이것은(<설국열차>) 거기서 완전 벗어난 영화입니다. 다국적 사람들이 기차라는 공간에 있고, 그야말로 ‘사이-파이(Sci-Fi)’ 영화죠. 맥락들은 다른 것 같은데 미국에서 ‘사이-파이’영화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게 제일 보람 있는 부분이에요. 거의 손익분기점에 도달하고 있다는 게, IP_TV에서 연말까지 수금을 하면, 그런데 러시아 배급사 애들이 아직 돈을 안준다는데(웃음) 그렇게 <설국열차>는 전 세계 배급의 험난한 길을 걷고 있는 거 같아요. 프랑스나 일본처럼 점잖게 제때 돈을 주는 나라만 있는 게 아닙니다. 남미 및 러시아 배급사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직원 분들께 응원의 한마디를 보내고 싶습니다. (웃음) 정성일 _ 나라마다 영화 문화가 서로 다르지 않습니까? 그렇게 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인터뷰하고 또 관객들과 만나보면서 감각적으로 느껴보기에 < 설국열차 >를 봉준호 감독이 원래 시도하려했던 연출의 뜻에 가장 가깝게 잘 받아들이고 있는 나라는 어디였습니까? 그저 극장에서 느껴보기에는 한국에서 이 영화는 흥행의 결과와 또 달리, 뭐랄까,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상할 정도의 저항에 부딪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봉준호 _ (잠시 생각) 만든 입장에서 얼마나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지 모르겠구요. 각 나라마다 다른 정체성이 있는 거 같아요. 한국에서는 여름철 개봉하는 제일 대작 블록버스터야, 그렇게 먼저 전제를 하니까, 봉준호 의 울트라 초 블록버스터 대작이 되어야 하고, 제가 원하든 원치 않든 그런 십자가가 지워져 있잖아요. 근데 막상 보니 마이클 베이 영화 같지 않고, 변태적이고 잔인한 부분이 있기도 하고 초등학생을 데려갔더니 애가 경기를 일으키기도 하고(웃음). 기대한 것과 다른 부분이 있는 것 같고. 그런데 미국에서는 < 트랜스포머 4 >와 같은 날 개봉을 하면서 오히려 훨씬 더 이상하고 유니크한 영화로 받아들여졌어요. 이 영화를 보면 왠지 젊은 애들 틈에서 좀 더 쿨한 사람인 것처럼 잡지에서 나오기도 하고, 그쪽에서 평가는 훨씬 더 유니크하고 이상할수록 더 점수가 높아지는 상황이었어요. 트랜스포머와 반대말일수록 더 좋아하는 거죠. 로튼 토마토 점수가 상상이상으로 95점, 97점 높이 치솟은 것도 한국에서와 이 영화를 받아들이는 기준이 다르구나, 라고 생각했어요. (인터뷰를 정리하고 있는 2014년 9월 6일자 rottentomatoes.com 의 신선도는 95퍼센트이다) 정성일 _ 한국에서 진행된 인터뷰를 읽으면서 왜 아무도 이 질문을 하지 않을까 궁금했습니다. 마음속에 품고 있는 최고의 열차 영화가 무엇입니까? < 설국열차 >를 찍는다고 했을 때 사실 저에게 즉각적으로 든 생각은 그 열차에 어디에선가 영화사 속의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와 만날 것이라는 제 멋대로의 상상이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영화가 거기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열차를 보면 마음이 두근거리지 않습니까? 봉준호 _ 미국 프로모션 때는 미국 평론가나 기자는 그런 질문을 많이 하셨었어요. 한국에서는 영화 역사를 짚어가며 질문하는 분이 많이 없거나 없어지는 추세라서 안타깝기는 하지만... 당연히 (< 설국열차 >를 준비하면서) 구로사와 아키라 각본의 (<눈(雪)>을 영화로 옮긴 할리우드 영화) < 런어웨이 트레인 > 같은 거는 다시 꺼내서 봤죠. <폭주 기관차 Runaway Train> 정성일 _ (< 런어웨이 트레인 >을 연출한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의 영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봉준호 _ 그 분의 영화는 < 탱고와 캐쉬 >도 못 봤습니다. 별로 본 게 없습니다. ‘돌아온 탕자’와 같은 감독이다, 라고 누가 얘기 하시더라구요. 막상 본 거는 별로 없어요. < 런어웨이 트레인 >하고,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 마리아스 러버 >가 그 분 영화였나? 나스타샤 킨스키가 나온, 그런데 그거는 청소년기적인 관점에서 접근한 영화라, 시네필적인 관점하고 상관없이 흰 속옷 같은 걸 입고 나스타샤 킨스키가 잡지 광고에 아주 야하게 나왔던 게 기억이 나네요. 진짜 예뻤죠. (웃음) 원래 얘기로 돌아오면 <런어웨이 트레인>이라든가, (로버트 알드리치의) < 북극의 제왕 > 이라고, 어네스트 보그나인하고 리 마빈. 되게 남성적인 중년 마초들이 무식한 무기들을 들고 싸우죠. 제일 좋아하는 열차 영화를 꼭 하나만 꼽으라면 존 프랑켄하이머의 흑백영화 < 트레인 >이었던 거 같아요. 나치들이 프랑스 미술품을 빼돌리려고 하려는 데, (두 손을 치켜들고) 기차를 계속 끌고 가려는 나치들과 휴전 협정 전에 기차를 멈추려는 버트 랭커스타의 싸움이 되게 긴박하게 펼쳐지는데 손에 땀이 나게 재밌게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영화에서 보여지는 카메라 워크와 인물들의 우아한 동선에 매혹되었습니다. 거기서 1페니 짜리 동전으로 기차를 못 가게 하는 디테일도 나오는데, 그 영화는 정말 좋았습니다. 그런데 < 설국열차 >의 텍스트로 삼으려는 영화는 별로 없었습니다. 기차 자체에 사람들이 계급별로 나누어져 있고 그 안에 온 사회를 압축해서 쑤셔 넣은 것은 이 그래픽 노블밖에 없었어요. 오히려 (디즈니_픽사의) < 월-E >같은 애니메이션 후반부, 또는 거기서 우주선에서의 생활상이 <설국열차>와 비슷한 거 같아요. 우연히 아들 때문에 봤는데 거기 사람들이 비만상태가 되고 그러잖아요. 그리고 < 2001 오딧세이 >를 응용한 패러디 장면이 나와서. 아마 그런데서 더 영감 받았던 거 같아요. 기차로만 보면 구로사와 아키라의 < 천국과 지옥 >에서 딱 한 시퀀스지만 기차 시퀀스가 나와요. 구로사와 아키라는 기차를 잘 다루는 감독인거 같아요. 그리고 이마무라 쇼헤이의 < 붉은 살의 >를 보면 이 여자의 집이 기찻길 옆에 있고, 거기서 기차를 타고 남자가 가는데, 별로 힘주어 찍지 않아도 기차의 가장 강렬한 장면이 나와요. 보면서 제일 싫었던 기차 영화는 < 폴라 익스프레스 >(웃음) 거의 달디 단 제과점 음식을 삼시 세끼 계속 먹어야하는 기분. 눈이 오고 기차 나오니까 한번 보게 되는데 반면교사로 삼았달까요. 아, 저러면 안 되겠다. 싫다. (일동 웃음) 정성일 _ < 설국열차 >에 관해서 영화계 사람들에게 파다하게 퍼져나간 이야기의 공약수는 봉준호 감독의 악전고투였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이끌고 끝까지 갈 수 있게 만든 가장 매혹적인 힘이랄까, <설국열차>에서 가장 매혹되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봉준호 _ (단호하게) 기차였죠. 여기 말하는 기차는 하위 장르로써의 기차가 아니라 영화가 두 시간 내내 달리는 기차에서 펼쳐지고, 그 안에 사회와 모든 것이 압축되고, 인간군상이 고농도로 압축된 상태에서 그것을 물리적으로 봤을 때, 달리는 기차 안에서 두 시간 내내 모든 희로애락을 내가 연출한다, 내가 언제 이것을 또 할 수 있겠냐, 아마 다른 감독들도 안할 것이다, 어찌 보면 끔찍한 조건이니까, 잠수함 영화 이상으로, < 설국열차 >를 만든다는 건 그런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해외 나가면 사실 고생하는 건 다 마찬가진데 그게 (거기서) 한국에 들어오는 소문은 과장된 게 많습니다. 우여곡절은 많았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찍었습니다. 정해진 일정 안에서 다 찍었고, 촬영자체는 큰 어려움이 없었어요, 촬영에 들어가기까지 오래 걸렸지만 그건 역설적으로 그만큼 준비를 많이 했다는 얘기이고, 촬영기간은 굉장히 짧았어요. 다 찍는데 석 달도 안 되었어요. < 괴물 >의 절반도 안되는(셈을 하더니) 2개월과 4주, < 플란다스의 개 > 다음으로 제 영화 중 가장 짧게 찍었죠. 90퍼센트 이상이 스튜디오 촬영이니까 날씨도 상관없고, 최대한 효율적으로 다 스토리보드대로 찍은 거고 여기에 관여했던 미국 라인 프로듀서들은 역사상 제일 쉽게 찍은 영화라고 기억할 거예요. 저는 그런 것들을 지켜내면서 괴로움도 있었고, 통으로 다시 찍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일반화시키면 원래 늘 그러니까요. 준비기간이 무척 길었지만 촬영 프로덕션은 계획대로 순조롭게 잘 끝났습니다. 외국 배우들과 계약 조건도 그럴 수밖에 없었고 제가 제임스 카메론도 아니니까(웃음) 미국적 관점에서 보면 독특한 저예산 사이-파이 영화고, 크리스 에반스도 그렇게 얘기하고 다녔어요. 그는 마블 영화를 주로 하는 배우인데 < 어벤져스 >는 2억불이 넘는 영화잖아요. 그의 관점에서는 < Snowpiercer >라는 작지만 괜찮은 영화를 찍는다, 고 토크쇼에 나가서 얘기를 해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역대 최대 제작비니까 두 가지 정체성이 혼란스럽게 하는 면이 있었죠. 원래 질문으로 돌아가면 이건 정말 독특한 영화다. 기차 안에서 이렇게 모든 공간과 인물과 운동이 담긴, 저는 (영화에서) 운동이나 움직임을 몹시 좋아합니다. 기차도 움직이지만 그 안에 사람도 달린다. 그런 흥분이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 해무 > 정성일 _ 저는 지난 겨울에서 봄까지 임권택 감독님의 < 화장 >현장에서 다큐를 찍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 영화에 < 해무 >에서 넘어온 스태프들이 꽤 있었고, 게다가 영화 현장은 한 다리만 건너면 모두가 식구 아닙니까. 그때 <해무>에 대한 얘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웃음) 좋은 이야기도 있고 과장된 이야기도 있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해무>가 신인감독의 악전고투 신고식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궁금한 건 21세기 한국영화의 새로운 현상 중의 하나는, 홍상수 감독에서 박찬욱 감독에 이르기까지, 많은 감독들이 직접 제작사를 차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 설국열차 >도 박찬욱 감독이 제작한 것인데, 봉준호 감독이 제작사를 차린다는 것의 가장 큰 긍정적인 의미에서 목표, 욕심이 있었다면 무엇입니까? 봉준호 _ 강제규 감독님이나 강우석 감독님과 같은 분들은 비즈니스 모델, 사업을 하실 수 있는 성격과 스케일이 있다고 생각해요. 보스 기질도 있고. 하지만 저는 제일 반대지점에 있는 사람으로서 지속적으로 제가 제작사를 운영하면서 다른 감독의 작품을 제작할거라는 계획이 처음부터 있었던 건 아니고 일회성으로 그칠 거라고 예상도 했고, < 해무 > 작업하면서 실제 그렇게 마음을 먹었고요. <해무>가 제 마지막 제작 작품이 될 거 같다고 인터뷰 때도 이미 한번 얘기했습니다. 제작은 저와 안 맞고 남은 인생은 연출에만 집중하겠다고 이미 명확히 했어요. 과정이 좀 복잡하긴 한데, (잠시 허공을 쳐다보더니) <해무>를 기획했던 이유는 저를 제외한 공동 제작을 한 다른 두 명이 < 괴물 >때 같이 일했던 프로듀서들인데 < 설국열차 >를 같이 하기로 했다가 못하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설국열차>는 준비기간이 굉장히 길어졌죠. <설국열차> 다음 작품, 여섯 번째 영화를 같이 하기로 한 친구들인데 (그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한참 기다리고 있는 게 미안했습니다. 그런 미안함과, 그리고 <해무>라는 훌륭한 연극 원작을 2008년에 보고, < 마더 > 캐스팅 과정에서 (그 연극을 보고) 송새벽 씨를 발견했는데, 좋은 스토리라 저걸 누가 영화화 하겠구나 생각했는데 아무도 안 하더라구요. 그래서 기다리고 있는 프로듀서 후배들과 내가 기획자로 이 좋은 작품을 맺어주면 좋은 작품이 세상에 나오겠구나. 이왕이면 < 살인의 추억 >때 연출부였고 시나리오를 서포트했던 심성보 감독이라면 또 좋은 신인 감독이 입봉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기획의 이유입니다. 체코에서 <설국열차>를 준비할 때 화상회의로 투자사 분들과 <해무>를 얘기했습니다. <해무>라는 원작을 한국에서 재공연할 때 가서 보시게끔 제가 원격조정으로 어레인지한 거고 그래서 그 작품이 탄생하게 된 거고, 음, 체코에서 (<설국열차>를 다 찍고) 돌아왔을 때는 심성보 감독이 시나리오를 많이 썼고, 저는 <설국열차> 후반작업을 하면서 <해무>의 시나리오 마지막에 도움을 줬습니다. 제가 오야붕이고(웃음) 제작자인데 촬영 현장에 가면 얼마나 싫겠어요, 그래서 거의 한 달간 제가 촬영 현장에 안 갔는데 그때 많은 일이 있었어요. 그건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어쨌든 무사히 개봉하게 돼서 기쁘고 저도 거기에 책임을 져야할 입장이고 그것에 일조한데 만족하고 있습니다. <해무>가 마지막 제작 작품입니다. 더는 없습니다. 정성일 _ < 해무 >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면은 어디입니까? 봉준호 _ 오프닝 씬을 제일 좋아합니다. 모든 사건이 시작되기 전에 선원들의 일상이 나오는데 거기 모든 배우들의 느낌이 제일 좋고. 그리고 영화 뒷부분에 이희준 씨가 거의 발정난 수캐가 되어 사상초유의 전자발찌 캐릭터죠. (웃음) 우리끼리는 전자발찌라고 불렀는데 거기서 막 뛰어다닐 때 이희준 씨 장면 좋아하고, 그리고 김윤석 씨가 밀항을 제의받는 장면이 있어요. 사료에서 시계 꺼내고 그때 뱀장어가 왔다 갔다 하고, 그 씬에서 김윤석 선배님의 연기가 참 좋았습니다. 존경할 만한 배우라는 생각도 들고, 그런 순간들이 좋았습니다. < 마더 > (흑백버전) 정성일 _ 지난 겨울 서울 시네마테크에서 < 마더 >의 흑백버전을 상영했는데, 그 말은 <마더>의 감독 버전이 흑백버전이라는 뜻입니까? 저는 두 개가 별개의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봉준호 _ 2008년도에 그 영화를 처음 기획할 때 저나 홍경표 촬영감독이 < 마더 >는 흑백으로 하고 싶었는데, 그때 인더스트리적 조건으로 그게 좌절되면서 컬러로 바꿨다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냥 컬러로 만들었는데 <마더>를 개봉하고 어떤 시점에서 둘이 좋아하는 서로의 흑백영화 로망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코엔 형제의 <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도 컬러 네거티브로 찍은 거를 개봉은 흑백으로 했고 컬러, 흑백 버전 두 가지로 DVD가 나왔다는 얘기를 했었습니다. 그때 둘이서, 우리도 한번 해보자, 돈이 그렇게 많이 들지 않는다, 라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흑백에 대한 로망을 얘기하다가 나중에 흑백버전을 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그래서 디지털 상태에서 충분히 할 수 있고, 그걸 쇼트 단위로 다 조절한 거예요. 저희도 궁금한 거죠. 같은 사운드, 같은 편집, 같은 퍼포먼스인데 흑백으로 바꿀 때 뭐가 바뀔까, 저희도 흥미로워하면서 저랑 홍경표 촬영감독과 강성표 컬러리스트가 작업을 한 거죠. 재개봉은 안했지만 DVD도 나왔고 해외에서도 틀고 있고 올 가을에 부산에서도 틀 거 같은데. 김혜자 선생님도 모시고 봤죠. 다들 나름의 감상이 있어요. 정성일 _ 흑백 버전을 봤었을 때 저는 이쪽이 감독 버전이라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처음 < 마더 >를 보았을 때 몇몇 장면들에서 표현주의 영화의 느낌이 들었습니다. 밤이 되었을 때 그림자로 이어지는 골목 장면들이나, 혹은 의도적으로 벽을 찍은 정면으로 찍은 쇼트들 경우 의도적으로 화면을 만든 것 같은 장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영화는 프릿츠 랑 영화의 자장권 아래 있다는 인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분을 컬러가 약화시키고 있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첫 장면을 흑백으로 봤을 때 굉장히 압도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흑백버전을 영화를 처음 보면서 상상해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화 전체를 흑백으로 진행하다가 해가 저물가면서 햇살이 쏟아지는 고속버스 장면만을 칼라로 하면 어떨까, 라는 상상, 그런데 그 기대감이 충족되었을 때의 만족감이랄까, <마더>가 CJ에서 제작될 때, 그때 저는 시네마 디지털 서울 영화제에서 일하면서 가끔 CJ 사람들과 회의를 해야 했는데 휴식 시간에 제작중인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모두들 <마더>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하지만 그 기대는 대부분 산업적인 것이었고,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우리가 < 괴물 > 천만 기록을 깰 겁니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 CJ는 천만 영화가 없었다) 그래서 <마더>를 보았을 때 마지막 장면의 칼라를 위해서 결국 모든 장면을 칼라로 보아야하는 거야, 라는 의문이 들었고, 그런 다음에는 다시 흑백 버전을 보게 되었으니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가상적인 상상의 가정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실현되는 가는 것을 본 달까, 봉준호 _ CJ에서 제작할 때 < 마더 >에 대한 간섭은 전혀 없었습니다. 100퍼센트 다 제가 할 수 있도록 하게 해주셨습니다. 흑백으로 한 건 개봉 후에 떠오른 아이디어였고. (잠시 생각을 하다가) 만약 이상한 법이 생겨, 두 작품 중 하나만 남겨놓으라고 한다면 저는 흑백 버전을 남겨놓을 거 같아요. 마지막에만 햇볕이 퍼질 때 컬러가 폭발하는 그 버전을 남겨놓을 거 같아요. 영화란 것이 의도를 향해서만 돌진해야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들, 심지어 배우의 연기조차도 흑백으로 봤을 때 더 오롯하게 다가오는 부분이 있는 거 같아요. 그래서 역으로 돌아봤을 때 우리가 흑백 고전에서 느끼는 매혹들 있잖아요. 크라이테리온에서 다시 출시된 펠리니의 흑백 영화나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 같은 것을 봤을 때 느껴지는. 처음 그 영화가 흑백으로 개봉했을 때 아직 프린트가 손상 안 되었을 때 극장에서 보는 느낌. 반대로 그 영화들에 컬러를 넣어서 생각해본다면 뭔가 흐트러트리는 느낌이 있어요. 그래서 만약 영상자료원에서 한 작품만 남겨달라고 한다면 흑백만 남겨 주십사, 말할 거 같고 (그렇게) 선택하겠습니다. 같은 영화인데 다른 영화인 거 같아요. 김혜자 선생님 얼굴이나 눈빛도 흑백에서 더 좋았고. 정성일 _ 저는 봉준호 감독 인터뷰 중에서 21세기 첫 10년을 회고한 카이에 뒤 시네마 특집호(Cahiers du Cinema_652호_201001)에서 구로사와 기요시와 대담한 것이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구로사와 기요시도 미국영화광이기도 하지만. 두 사람이 만나서 미국영화를 예찬한 것이 감동적이었습니다. 물론 후반부에 < 아바타 >를 앞에 두고 제임스 카메론 영화를 보는 게 두려워 그런 말도 있었지만(웃음) 구로사와에게는 영화청년시절을, 그리고 당신에게는 영화소년시절을 통과하면서 70년대 3명의 할리우드 감독이 인상적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스필버그. 드 팔마. 존 카펜터. 봉준호 감독께 그런 의미에서 미국 영화란 어떤 겁니까? 이를테면 박찬욱 감독의 미국영화에 대한 애정은 상당히 유보적이죠. 계속 유럽영화와 밸런스를 갖고 싶어 한다고 할까요. 구태여 호명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어떤 감독은 명단을 보고 있노라면 시네필이라고 믿기 난처한 허풍도 있고(웃음), 봉준호 감독의 미국 영화에 대한 애정을 듣고 있으면 특별한 애정이라는 생각이 있어요. 물론 봉준호 감독 이전 세대의 감독 중에도 영화에 대한 시네필의 애정을 갖는 감독들이 있죠. 하지만 그런 감독들은 이상할 정도로 밸런스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측면이 있어요. 이런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런 의미에서 봉준호 감독은 한국영화에서 미국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세대라고 불러보고 싶어집니다. 저는 영화는 결국 미국 영화라는 생각이 있어요. 영화의 문법은 여기서 나왔고, 우리들이 질문하는 영화의 투명성이라는 것도 이 영화들을 보면서 배운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먼저 그리피스, 그 중에서도 존 포드와 하워드 혹스라는 이름, 얼마든지 불러 볼 수 있습니다. 킹 비더, 라울 월쉬, 니콜라스 레이, 더글라스 서크, 안소니 만, 어떤 의미에서 서로 다른 나라들은 미국 영화를 받아들이는 과정만으로 그 나라의 영화사를 다시 쓸 수도 있습니다. 이건 긍정의 의미입니다. 그게 프랑스 영화이건, 일본 영화이건,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시아 영화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하스미 시게히코와 아오야마 신지의 대담을 읽은 적이 있는데 거기서 하스미가 지나치듯이 말하면서 봉준호 감독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이 사람의 영화는 한국 영화 감독으로는 드물게 미국영화의 순혈(純血)을 받고 있다, 라는 구절을 읽으면서 멈춰 선 적이 있습니다. 봉준호 _ 저도 제 자신에 대해 얘기하는 거는 늘 민망한데(웃음) 나는 오늘날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됐나, 나는 뭘 봤나, 어릴 때 자라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죠. 아마도 여러 번 얘기했지만 저는 TV를 시네마테크로 삼았기 때문에 선배님들 세대처럼 프랑스, 독일 문화원을 출입한 세대는 아니었으니까, TV에서 한 영화는 70퍼센트는 미국 영화가 많았고, 저는 특히 AFKN 보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주한미군영상에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거기서 B급영화도 많이 방영했었구요. 존 포드, 하워드 혹스 얘기를 많이 하셨는데, 일본 영화를 얘기할 때 오즈를 말한다거나 프랑스 영화를 얘기할 때 르누아르를 얘기한다거나, 그런 맥락은 제게 없는 거 같아요. 미국 영화 중에서도 약간 반 발짝 사이드로 빠지거나 B급 영화를 더 좋아했던 거 같아요. 존 카펜터나, 그 사람이 윌리엄 와일러같은 대접을 받지 않잖아요. (웃음) 유럽의 이상한 애들이 더 좋아하고, 스필버그가 < 죠스 >로 블록버스터의 이름을 만들기는 했지만, 그가 이상한 영화를 많이 만들기도 했고, 느끼해지기 전, 여유가 생기기 전의 스필버그를 좋아하는 거고, 드 팔마도 사실, 프랑스에서도 저에게 좋아하는 감독은 클로드 샤브롤의 범죄 영화를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유럽에서도 미국 영화를 좋아하는 유럽 감독을 좋아하는 구나 생각했어요. 셀프 진단이라 정확하진 않겠지만(웃음). 클로드 샤브롤이 히치콕에 대해 쓴 책이나 트뤼포의 「히치콕과의 대화」도 재미있게 읽었고. 구로사와 기요시도 미국 영화를 좋아하는 일본 감독이고, 그래서 카이에와의 대담도 그렇게 성립될 수 있는 거 같고, (잠시 생각) 미국 영화란 제게 깔려있었던 거 같이요. 대학교 다닐 때, 거기서 학교 영화 동아리를 할 때 대만 뉴웨이브에 동조된 시기가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길게 가지 않더라구요. 다음 달 10월에 마침내 크라이테리온에서 (에드워드 양의) <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 >이 블루레이로 나온다고 해서 프리 오더로 예약해놓고 기다리고 있어요. (웃음) 너무나 그 영화를 좋은 화질로 다시 보고 싶고.. 대만 영화의 아름다움, 한국 영화가 저러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삶과 역사가 다 있고.. 그런 생각했다. 나는 영화 동아리니까, 시네필이니까 저런 영화 다 봐야해. 그런 생각을 했어요. 허우샤오시엔 영화를 다 볼 거야. < 비정성시 > 보면서 양조위가 참 안됐다, 왜 저렇게 어깨가 좁을까, (웃음) 그런 생각도 들고. 그 마음은 여전함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그게 제 본령은 아니었던 거 같아요. 저의 뼈와 살을 이룬 건 미국 영화라고 저 스스로도 생각이 들구요. 덧붙여 시네필이 된 후에 완전히 매혹된 김기영 감독이나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 스스로 제 멘토라고 믿고 싶어지는 감독님들은 미국이나 대만 뉴웨이브 사이 어디에 자리매김해야할지 모르겠지만. 그분들에 대한 광적인 마음은 굉장히 오래 지속되는 거 같아요. 대만 뉴웨이브에 대한 매혹이나 그 당시 처음 KINO 창간될 시 베스트 10을 꼽으면 그런 영화들이 들어가곤 했는데 그건 일시적이었던 어느 한 시기였던 거 같아요. 정성일 _ 2012년 사이트 앤 사운드에서 앙케이트에서 부탁한 10편의 영화를 뽑아서 보내면서, 전제는 나의 창조적인 생각에 가장 임팩트를 준 10편의 영화라고 단서를 달았고, 기억을 환기시켜 드리자면 알파벳 순서대로 허우샤오시엔의 < 비정성시 >, 구로자와 기요시의 < 큐어 >, 김기영 의 < 하녀 >, 코엔형제의 < 파고 >, 히치콕의 < 사이코 >, 마틴 스콜세지의 < 성난 황소 >, 오손 웰즈의 < 악의 손길 >, 이마무라 쇼헤이의 < 복수는 우리가 한다 >,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 공포의 보수 >, 데이비드 핀치의 < 조디악 >. 이렇게 열 편이었습니다. 봉준호 _ 저는 항상 연쇄 살인 특별 우대합니다. (웃음) 항상 서너 편이 들어가 있어요. 정성일 _ 어떤 영화를 선택하느냐는 그 사람의 취향이고 태도이기 때문에 저는 명단에 우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명단을 보면서 즉각적으로 드는 생각은 이른바 이야기하는 모더니즘 영화에 전혀 관심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명단에서 얘기하는 로베르 브레송이나 고다르, 브뉘엘, 이런 이름이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만 말하면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을 보면 후기 펠리니 영화가 있었을 거 같은데, 이를테면 < 카사노바 >나 < 사티리콘 >같은 영화가 있었을 것만 같은데, 아니면 베르히만의 과도한 바로크적인 영화, 이 영화가 취향이 아닐 수도 있지만 < 마더 >의 흑백버전을 보고 나면 왠지 <침묵>이나 <마술사>, < 처녀의 샘 > 같은 영화들, 그런 모더니즘 영화들. 열편 안에 들어오지 못할 만큼, 이 영화들은 20위권 바깥에 있어, 라고 한다면 그건 그런 영화들과 멀어, 라는 선언처럼 읽힙니다. 봉준호 _ 네, 먼 것 같습니다. 특별히 그런 질문을 해본 적 없지만, 고다르 영화를 본 건 영화 동아리 때가 전부였습니다. < 비브르 사 비 >는 라스트 씬이 굉장히 흥미로웠던 기억이 생생히 있지만 DVD를 사서 모은 이후에 고다르 영화의 DVD를 산 적이 없습니다. < 미치광이 피에로 > 블루레이를 산적은 있지만 사놓고 안 봤습니다. (웃음) 2년 됐는데, 패키지가 너무 예뻐서 샀는데 손이 안가요. 이미 본 < 피아니스트를 쏴라 > 이런 걸 한 번 더 본다거나 아니에스 바르다를 본다거나 그러기는 하지만 고다르 영화는 손이 안 가는 것 같습니다. 취향이 아닌 것 같습니다. 만드는 입장에서 그런 영화를 잘 할 수 있는 분들은 따로 있다는 생각을 하구요. 제 친구 중 그런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만 영화계를 떠났어요. 영화아카데미 11기 동기 중에 허재영이라는 친구가 그런 영화를 굉장히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청어람에서 데뷔를 할 뻔 하다가 못했어요. 그 친구의 < 모자 >라는 졸업 작품이 있는데 제가 촬영을 했어요. 그 친구가 한국의 고다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영화계를 떠났습니다. 그 친구와 저는 많이 다르다, 는 생각을 늘 했습니다. 취향이나 식성까지도(웃음). 고다르 영화를 보는 것보다 이마무라 쇼헤이나 끌로드 샤브롤 영화를 한 번 더 보는 쪽으로 항상 손이 더 가는 거 같습니다. 정성일 _ 좀 더 산만하게 진행해보겠습니다. (웃음) 임권택 감독님 영화로까지 다가가는데 좀 더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첫 번째 영화 < 플란다스의 개 >를 보기 전에 이른바 영화 커뮤니티 안에서는 이미 봉준호 라는 이름은 기대의 명단에 들어있었습니다. 아카데미 졸업 작품인 < 지리멸렬 >때문일 텐데 흥미롭다는 생각은 했지만 저는 이 영화를 연출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플란다스의 개>를 처음 보았을 때 봉준호 감독에 관해서 전혀 모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영화잡지 키노를 만들고 있었고, 창간 일 년 후에 <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첫 번째 영화를 다시 보기는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상대로 아류들이 쏟아져 나오거나 아니면 미처 이해하지 못한 채 여전히 고전적인 방식의 영화에 머물러 있거나 둘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다가 불현듯 <플란다스의 개>를 보게 되었을 때 살짝 쇼크에 빠졌습니다. 뭐랄까, 이 영화는 갑자기 나타난 UFO 같았습니다. 우리가 만나기 전, 그러니까 며칠 전 이 영화가 막 나왔을 때 키노를 다시 펼쳐서 인터뷰를 읽어보았습니다. 사실 모든 감독들은 첫 번째 영화를 찍고 나서의 인터뷰가 가장 솔직합니다. (웃음) 무언가 이해받고 싶어 한달까요. 봉준호 감독은 여기서 여러 차례 만화적 프레임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모델의 위기에 대한 영화였습니다. 이 위기가 영화 안에서 한번 작동을 시작하자 멈추지 않고 달려간다, 는 그 느낌이 신나는 영화입니다. 비탈을 달리는 그 아슬아슬한 느낌.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플란다스의 개>는 시장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 살인의 추억 >은 무언가 후퇴한 느낌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우아하긴 하지만 고전적인 모델로 되돌아가버렸을 때 저는 이 영화에 대해서 어떤 적개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웃음) 뭐랄까, <플란다스의 개>와 <살인의 추억> 사이에는 어떤 블랙홀이 있는 느낌입니다. 이제는 그 둘 사이에 놓인 블랙홀을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된 게 아닐까요? 봉준호 _ 네, 강을 건넜습니다. < 플란다스의 개 >가 좀 모던해보일 수 있는 건, (잠시 생각) 그것을 만들었을 당시 제가 가졌던 불안한 상태가 있고 편집이 순탄치 않았습니다. (편집기사였던) 이은수 씨와 계속 불협화음이 있었습니다. 음악으로 보면 텐션노트 상태로 편집에 반영되는 것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구요. <플란다스의 개>를 제가 부끄럽게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만 제가 그 당시 할 수 있는 건 다 했고, (제작자였던) 차승재 대표가 전혀 터치를 하지 않았어요. 완성한 편집본을 들고 차승재 대표 집에 갔던 게 생각납니다. 같이 편집본을 보자고 해서 마음속에 준비를 하면서 갔어요. 이 씬을 빼자고 하면 이렇게 반박해야지, 저 씬을 빼자고 하면 저렇게 반박을 해야지 하고, 온갖 경우의 수를 준비해서 갔는데 딱 보고 아, 고생했다 이제 술 먹자, 해서 아무 관심 없구나, 결국 역시 이건 버리는 영화군, 하고 상처를 받았죠. (웃음) 한편으로는 행복했죠. 그대로 개봉할 수 있겠다. 한번 엎어졌다가 다시 살아나면서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죠. 우노 필름이라는 (예전) 싸이더스의 한구석에서 적은 예산으로 아무 간섭 받지 않고 영화를 찍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기도 했었는데, 그런데 그 영화를 찍고 흥행뿐 아니라 비평에도 미지근하게 별 반응이 없었고, 개봉하고 일 년 반이 지나면서 홍콩이나 뮌헨 영화제에서 상을 수집하면서 씨네21에서 다시 새롭게 쓰는 리뷰가 나오고 그랬지만 개봉하고 1년은 굉장히 쓸쓸했습니다. 나에게 질문을 했죠. 이 영화를 내가 어떻게 생각해야하나. <플란다스의 개>의 이성재 심리와 굉장히 비슷해져 버렸어요. 거기서 성인들의 세계, 룸살롱에서 비즈니스를 하고. 많이 마신 술로 구토를 하는 그런 세계로 들어갈락 말락 하고 있잖아요. 이성재가 어떤 경계선에 서서. 내가 충무로 감독인가? 그때는 그런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인디 장편을 찍어야하나? 아니면 단편을 계속 할까? 당시 말하는 충무로 35미리 상업영화 감독이 될 수 있을까, 또 되는 게 옳을 것일까 질문을 하면서 갈팡질팡하고 있었고 그런 것이 주인공 이성재가 케이크에 돈다발을 넣어갖고 교수에게 먹이러 가잖아요. 그것도 지하철을 타고. 그 심리와 비슷한 상태였어요. 거기서 막 요동을 치면서. 또 싸이더스라는 굉장히 큰 회사에 일하고 있었던 거잖아요. 아무도 나에게 강요하진 않았지만, 내 나름의 순결주의가 있었습니다. 이게 4번째 영화여야 한다는 강박. 단편 3개를 찍었는데 비록 길이가 1시간 30분이 되었지만 내 독립적으로 단편을 찍던 때와 똑같아야만 해. 누가 충무로 영화와 같지 않다. 단편을 늘린 거 같다는 건 내게 찬사야. 현장 스태프들은 되게 이상하게 생각했죠. 그 영화를 보면 행인이 없어요. 왜 저 감독 영화에는 엑스트라가 없나, 협회 엑스트라가 싫었어요. 다 빼! 주인공만 걸아가! 길에 행인이 없을 수도 있잖아! 이건 나의 네 번째 영화여야하고 첫 충무로 상업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야. 시나리오 써서 주변 선배들에게 보여주면, 너 정말 이 영화로 데뷔하려고 하냐, 차승재 제정신이냐, 이야기가 왜 이렇게 조잡 하냐,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더 오기가 생겨서 무말랭이 하나로도 드라마에 반전을 끌고 올 수 있다는 걸 보여주마. 더 세세하고 작고 쪼잔한 것에 더 집착하게 된 게 <플란다스의 개>였습니다. < 살인의 추억 >은 그 결과에 대한 나 스스로의 반작용이 있었습니다. 역시 누군가 강요하지 않았지만. 반대로 이번에는 굉장히 큰 사건으로 정면대결하고 싶어졌습니다. 사건의 바다로 내가 다이빙 하고 싶다. 그게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이었죠. 그때는 인터넷이 없었기 때문에 국회도서관에 출근하다시피 했었어요. 국회도서관의 거대한 자료들. 거기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 취향은 접어놓고 그 당시 중앙일보, 경향신문, 다 보면서. 나는 아주 조그맣고 이 사건은 이렇게 거대한데, 그 사건에 80년대라는 더 거대한 것까지 포함되어 있고, 아주 작은 내가 거기에 다이빙한다, 사건 자체를 존중한다, 사건에 대한 내 입장을 정하고 그것을 영화로 표현하자. 나는 어차피 충무로 감독이 됐다. 쫄딱 망했지만 그런 경계선의 갈등도 없어졌고. 이게 세 번째 네 번째 상관없이 나는 직업감독이 됐다. 안도감 플러스 실망감이 믹스된 거죠. 그렇게 되니까 마음이 편해지면서, 그 사건에 되게 심하게 몰입을 했어요. 나중에는 진짜 제가 범인을 잡을 줄 알았다니까요. 관련 주민들을 만나고 심성보 감독이랑 하도 많이 돌아다녔죠. 나중에는 범인의 생각을 알 거 같은 거예요. 그 사람 생각을 하도 많이 해서. 그렇게 접근한 결과물이 <살인의 추억> 이었던 거 같아요. 처음 얘기하지만 그런 마음도 있었어요. (잠시 생각) 이런 심정도 있었죠. <플란다스의 개>를 만들었을 때 다들 나를 무시했었지 이런 이상한 앙심도 있었습니다. 촬영 김형구, 조명 이강산 감독님처럼 당대 최고의 아티스트. 약간 중년남자가 찍는 압도적인 완성도의 영화? 왠지 대종상에서도 환영받을 것 같은 향취의 영화를 찍어서 너희 모두를 압도해주마 이런 앙심도 있었습니다. (웃음) <플란다스의 개>는 재기발랄하고 영화 동아리를 갓 졸업한 애의 영화라면, 이번에는 이런 복수심도 있었어요. 내가 이런 영화도 찍을 수 있다는 것도 보여주마. 좌 형구, 우 강산으로 모시고 송강호란 배우가 정면에 있는 상태에서 그런 삐뚤어진 마음도 있었던 거 같아요. 정성일 _ 봉준호 감독에게 프로페셔널이라는 게 특별한 의미였던 거 같아요. 봉준호 _ 충무로 직업감독이 된다, 직업감독이 된다는 데 동경도 있었지만 공포도 있었어요. 내 성격에 될 수 있을까. 그걸 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병신이 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도 있었어요. 그런 사람들을 보면 잘났고 기가 세고, 무시무시한 사람이 너무 많은 거예요. 차승재 대표님도 그렇고, 소위 영화를 하신다는 사람들에게 경외심과 두려움이 있었어요. 내가 과연 저걸 할 수 있을까. 연기영화과를 지원했다가 포기할 때도 그런 생각했습니다. 참가번호를 달고 와서 면접관 앞에서 오열도 할 수 있고 탭댄스도 할 수 있는 애가 오십 몇 대 일로 올 텐데, 나는 변태 샌님인데 교수님 앞에서 춤추고 그럴 수 있을까. 그런 공포감이 항상 있었고, 그래서 연영과를 포기하고 영화 동아리를 했는데 그런 어정쩡함이 계속 남아 있었습니다. 나는 영화판에 적응할 수 있을까. 조감독을 할 때도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십 년 베테랑인 사람에게 나는 매일 깨질 거야. 조감독인 저 사람이 보면 나는 되게 병신 쪼다일거야. 임권택 감독님이 소품 일부터 시작하셨나요? 현장에서의 모든 걸 짊어지고 출발해서 감독의 자리에 오르시거나. 예를 들면 임권택 감독님의 조감독 출신인 김영빈 감독님처럼 남성적이고 카리스마적인, 감독은 그래야만 할 거 같고, 근데 관심 있는 건 영화밖에 없고, 또 만화를 좋아하니까 장면을 그려서 찍고 싶고 충무로 직업 감독으로서 형상은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많이 다르고 그게 계속 지속되었어요. 근데 < 살인의 추억 >을 하면서 좌 형구 우 강산을 모셔놓고 그런 것을 극복했었던 거 같아요. 강호 형님과 새벽 4시까지 나도 술 마실 수 있다. 그러면서 많이 편해졌던 거 같아요. (웃음) 정성일 _ 영화 아카데미를 입학할 때 롤 모델이었던 한국영화 감독은 그 당시 누구였나요? 이제 이 학교를 들어온 건 고민은 끝났고 한국에서 영화감독이 되느냐, 마느냐만 남는다는 자기 선언 같은 것이니까요. 그때 내가 열심히 하면 저기까진 할 수 있어, 라는 꿈같은 것이라고 할까. 봉준호 _ 나는 유영길 촬영감독님과 일하는 감독이 되고 싶었어요. 故 유영길 촬영감독 정성일 _ 유영길 촬영감독님의 어떤 영화가 마음을 끌었나요? 봉준호 _ 많습니다. 극장에서 본 ( 박광수 의) < 그들도 우리처럼 >. 장선우 감독님의 < 너에게 나를 보낸다 >. 제가 아카데미에 입학한 게 94년도인데, (박광수의)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 ( 허진호 의) < 8월의 크리스마스 >는 훨씬 뒤였고. ( 정지영 의) < 남부군 >. 김유진 감독의 <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도 유영길 감독님이죠. 유영길 감독님이 나를 감독으로 인정해주고, 같이 쇼트에 대해서 얘기할 수도 있고 그러면 나도 충무로 감독인 게 아닌가. 유영길 감독님은 성품도 점잖으시고, 게다가 젊은 감독들이나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감독에게 잘해주신다, 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곤조도 안 심하시고. (웃음) 당시 아카데미 동기였던 조형기 촬영감독이 유영길 감독님의 조수생활도 잠시 했었고. 유영길 촬영감독님에 대한 동경이 있었죠. 그런데 제가 입봉하기 3-4년 전에 98년에 돌아가셨죠. 그리고 90년대 장선우 감독님 영화를 되게 좋아했어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도 참 아름다운 영화고 <그들도 우리처럼>도 아름다운 영화라고 생각했었는데, 마음적으로 더 끌렸던 건 장선우 감독님 영화였어요. <너에게 나를 보낸다>나 < 경마장 가는 길 >은 정말 좋아했었고. < 우묵배미의 사랑 >은 거의 대사를 외우다시피 했었죠. 집에 비디오를 아직도 갖고 있는데, 아, 그 영화는 블루레이가 나와야되는데. 그때 삐삐 시절에 인사말에 <우묵배미의 사랑>의 대사를 입력하고 다녔어요.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지만 (음성을 흉내 내면서) “혹시 백일도 선생 아니십니까?” 이대근 씨와 박중훈 씨가 논에서 만났을 때 그 대사. (웃음) 박중훈 선배님과 별로 친하지 않았는데 작년 부산에서 만나서 새벽까지 술 마시면서 <우묵배미의 사랑> 시절을 직접 들었어요. 거의 포장마차의 Q&A같은. <그들도 우리처럼>도 하셨잖아요. 박중훈 선배님께 직접 듣는 두 영화에 관한, 그 두 작품은 똑같이 90년도에 나왔지만 전혀 다른 영화잖아요. 장선우 감독님이 <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으로 인해서 그렇게 되신 건 굉장히 안타까운 일인 거 같아요. 더 많이 작품을 하시면 좋았을 텐데. < 우묵배미의 사랑 > 정성일 _ 약간 우회를 하고 싶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따라가면서 영화 안에서 차례차례 한국을 지워간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시작할 때는 동시대 한국을 찍었고, 그런데 두 번째 영화에서 동시대 한국을 버려두고 뒤로 물러나서 86년에서 91년 화성으로 옮겨갔습니다. 게다가 여기서 화성은 시간의 지표가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아니라면 잘 잡히지도 않습니다. 다시 한강으로 돌아왔다고 하지만 괴물이 나타나면서 한국의 풍경 자체를, 말하자면 불길하게 만드는 거죠. 거기 있을 수 없는 어떤 잉여가 나타나면서. 그리고 나서 이상한 < 마더 >가 있습니다. 아주 이상한 영화. 이 영화는 한국의 불가능한 지리학에 관한 영화입니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거기가 어딘지 알 수 없는. 그 동네 사는 사람도 저 골목이 우리 동네가 아닌데. 우리 동네는 저렇게 이어지지 않는데, 라면서 가상의 동네가 성립하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 설국열차 >까지 오면 자기 영화 안에서 한국 자체를 블랙홀 안으로 계속 밀어 넣어버린다고 할까, 여기서 구체적인 한국 자체가 사라져간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이 종종 구멍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 부분이 미학적이거나 정치적 구멍이라는 블랙홀이라는 느낌에 멈추지 않고 무언가 다른 표현을 쓰고 싶어집니다. 저는 아직 그것을 표현할 개념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자기 영화 속에서 사라져가는 한국에 대해 어떤 생각이 있는 지 궁금합니다. 약간 과도하게 단순하고 과격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한국을 부숴버리고 싶다는 생각. 봉준호 _ (잠시 생각) < 플란다스의 개 >는 심지어 제가 살던 아파트에서 찍었습니다. 신혼 생활을 했던 아파트와 제가 결혼 전에 살던 아파트 지하에서 찍고. 그 영화는 세트가 없었어요. < 살인의 추억 >은 아주 명확한 시공간 좌표가 있어요. 86년 화성에서 시작하는. < 괴물 >은 한강이 나오고. 글쎄, 어렸을 때 한국이나 한국 로컬리티와 아무 상관이 없을 수 있지만, 사진에 관한 아주 단순한 책에서, 바르트의 「밝은 방」 이런 책이 아니고, 사진 잘 찍는 법 이런 책이었는데 어린 제게 마음에 남은 것은 사진 잘 찍는 사람은 어떤 사람을 찍을 때 그 사람에게 점점 다가간다. 그 사람의 눈과 얼굴을 향해서. 점점 하나씩 빼면서. 못 찍는 애는 점점 뒤로 물러난다. 나무도 넣어야지, 저런 것도 넣어야지, 이렇게. 어린 마음에 그게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괴물>을 만든 후에 제가 초등학생 때 읽었던 그 문구가 떠올랐어요. <괴물>은 한강에 괴물이 나오지만 한 발 물러서면 못난 가족이 있고, 더 한 발 물러서면 한국 사회가 있고, 더 빠져 나오면 미국이 있다. 그런 식으로 물러났던 게 아닌가. 물론, 더 버라이어티하고 풍자의 전시장을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왠지 그런 작업은 한 번으로 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점점 사람을 향해 다가간다. 그게 김혜자 선생님의 얼굴이었던 거 같아요. 다 지우고 싶은 거예요, 다른 것들은. 그때 < 마더 >를 준비할 때 그런 충동이 있었어요. 김혜자의 눈을 찍는 영화다. 다가가자, 더 다가가자. 영화에 핸드폰이 나오긴 하지만 시대가 뭔지 애매하게. 핸드폰이 나오지만 로케이션은 80년대인 거 같기도 하고, 도시인거 같기도 하고, 시골 같기도 하고, 또 그 언저리인거 같기도 하고. 그렇게 하나씩 지울수록 김혜자 선생님의 얼굴에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서 <마더>의 흑백 버전에서는 컬러마저 지워버린 거죠.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애초의 의도가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버전만 남겨야 한다면 흑백을 남기겠다고 말한 겁니다. 어쨌든 <괴물> 이후 <마더> 때 한국을 블랙홀에 밀어 넣는다, 이전에 그런 단순한 충동이 있었던 거 같아요. 사진을 찍을 때 점점 그 사람의 눈을 향해 다가간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처럼요. 그렇게 <마더>를 찍었다고 자평했었거든요. 그래서 < 설국열차 >에 맘 편하게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온갖 나라 사람을 모아놓고 기차라는 용광로에 쑤셔 넣어서. 무대 자체가 이동하는 거잖아요. 단순 추상화된 기차라는 섹션, 이 섹션에 좌표가 없는 거죠. 송강호 , 고아성 한국 캐릭터가 나옴에도 불구하고. 사실 지금 개봉하는 핀란드 관객들은 그 사람이 한국어를 안 하면 그들이 한국 사람인지도 모를 거예요. 우리가 노르웨이어와 스웨덴어를 구별 못하는 것처럼 한국어와 중국어를 구별 못하는 북유럽 사람들이 보면 송강호, 고아성이 한국말을 하는지 한국배우인지 모를 거란 말이에요. 그런 느낌을 원했거든요. 일부러 송강호 씨가 김치 얘기를 한다거나 태권도 얘기를 하지 않게 했어요. 한국이 아니라 동양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봤습니다. <살인의 추억>이나 제가 살았던 아파트에서 찍었던 <플란다스의 개>를 보면 정말 멀리 돌아온 거죠. 정성일 _ 산만하게 질문한다고 했으니 다시 산만하게 돌아오겠습니다. (웃음) 봉준호 감독에게 한국영화는 김기영 입니다. 여러 차례 김기영 감독님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셨습니다. 이를테면 다른 자리에서 다른 감독들로부터 자주 호명되는 유현목 , 이만희 , 하길종 , 이장호 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봉준호 감독에게 임권택 은 무엇입니까? 봉준호 _ 김기영 감독님을 한국 영화다, 한국 영화는 김기영이다 라고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이마무라 쇼헤이나 신도 가네토나 (아르튀르) 립스타인 같은 분들 중 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김기영 감독님이 한국적이다, 한국 영화. (잠시 생각) 이를테면 일본 영화는 오즈다, 라는 식의 접근으로 김기영 감독님을 선택한 적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냥 너무 재밌는 거예요. 나를 미치게 하는 요소가 있어요. 이장호 감독님의 영화들, < 바람 불어 좋은 날 > < 바보선언 >이나 < 과부춤 > 이런 것도 엄청나게 좋아합니다. 김기영 감독님의 영화 팬으로서, 팬심 이런 거는 압도적으로 큰 거는 사실입니다. 그분에 관해서 많이 수집했고 책이건 비디오이건. 하지만 김기영 감독님이 한국 영화고 충무로다. 일본 영화의 오즈다, 라고는 한 번도 생각 못했어요. 임권택 감독님은 뭐랄까, 동경하는 부분, 존경과 또 다르죠. 물론 존경하지만 내가 정말 할 수 없는 것들만 다 하실 수 있는 분. (잠시 생각) 그 분이 갖고 계신 스타일이나 경지 같은 거는 제가 이해하거나 손에 안 잡히는 부분들이 많아요. 그리고 임권택 감독님은 몇 편 안되지만 제 영화를 어떻게 보셨을까 이런 게 항상 두려운 마음으로 궁금하죠. 저는 임권택 감독님 영화에서 훔쳐다 쓴다, 존경의 의미에서의, 그런 게 저에게는 불가능 한 거 같아요. 스타일이나 스케일이나 하시는 방식이 아름답고 동경의 대상이지 제가 어떻게 할 수 없어요. 새끼발가락 하나라도 걸치거나 오마주하거나 응용하거나 그런 건 아닌 거 같아요. 제가 가장 최근에 본 건 (작년) 부산영화제에서 < 아제아제 바라아제 >와 오늘 아침에 < 짝코 >를 봤어요, 영상자료원의 DVD로. 그게 되게 좋아했던 임 감독님 영화인데 아주 옛날에 방송에서 해줬던 거라 제대로 된 프레임으로 본 건 오늘 처음 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느끼는 거지만, 모르겠어요,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보고 항상 느끼는 감정은, (한참 생각) 관객으로서가 아니라 새까만 후배로서 영화를 찍는 거리라고 해야 하나, 사건이나 인물이나 어떤 감정이나 되게 시니컬하고 냉소적이고 차가운 거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감정을 강요하는 관객을 특정 위치로 몰아넣는 것도 아니고 특유의 선선한 느낌? 선선한 바람을 쐬는, 분명 아무것도 어떤 방향으로 몰고 가거나 관객을 푸시(push)하지 않는데 감독님이 세팅한 대로 두 시간을 따라가다 보면 가랑비에 옷 젖듯이 감정에 푹 젖게 되는, 그런 게 재밌잖아요. 객관적이고 냉소적인 거리 또는 주관적이고 감정을 저킹(jerking, 갑자기 낚아채버리기도)하는, 그 양쪽 다 아닌 거 같아요. 그 느낌이 어떻게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아무리 상상을 해도. 예를 들어 관객을 되게 몰입되게 몰고 가다가 쇼트를 바꿔서 어떤 의도된 디스탠스(distance)를 주면서 관객들을 긴장하게 만드는 그런. 삑사리의 장난을 저는 칠 수 있지만 임권택 감독님께서 축적되고 쌓는 느낌을 저는 모르겠어요. 어떻게 가능하고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는지. 작품마다 상대적인 차이가 있겠죠. < 길소뜸 >의 언덕배기에서 마지막 걸어가는 장면에서 상대적으로 더 서늘한 장면이 있겠고, < 서편제 >에서 오정해가 울면서 김수철 씨의 음악이 확 덮어버릴 때처럼 상대적으로 덜 들어가는 것 같은 것도 있겠지만. 임 감독님의 선선한 거리가 있는 거 같아요. 요즘 저녁의 선선한 날씨처럼. 선선하면서도 그 친구가 참 안됐어. 그 사건이 참 슬퍼. 그러면서도 전혀 울고 짜고 하는 건 아닌데, 묘한 거리가 분명히 있는 거 같구요. 두 번째로 놀랍고 신비로운 것은 오늘 <짝코>를 보면서 다시 느꼈지만,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보면서 또 느꼈지만 세월의 두께. 두 시간의 러닝타임 안에서 늘 영화라는 게 시간이 비약하거나 점핑하기도 하고 시간이 확장되기도 하고. 그걸 다루는 게 감독의 일이지만 영화 전체의 스케일에서 시간이 흘렀다, 세월이 흘렀다, 개인이 세월을 감당한다는 느낌을 임권택 감독님처럼 표현할 수 있는 분은 유일무이한 거 같아요. 예를 들어 < 시네마천국 >에서 영화 초반 보여주다 말았던 키스 씬들을 라스트에서 다 보여주고 엔니오 모리꼬네 음악이 엄청 높은 볼륨으로 막 커지면서 관객들 다 울고, 물론 좋죠. 그것도 세월의 거리가 있고 알프레도는 지금 없고 그 사람이 모아둔 키스 씬 자투리만 남았지만 거기서 표현되는 영화의 시대, 광장에서 영화를 보던 시대, 알프레도의 시대는 갔고 극장은 허물어지고 온갖 것을 열나게 박아놨지만 거기서 느껴지는 세월의 거리와는 게임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훨씬 작은 단위의 시퀀스에서도 임 감독님은 놀랍게 그것을 표현하시던데 그 비밀이 뭔지 모르겠어요. 미국식 에픽, 소위 서사. 오늘 <짝코>를 보니까 베르톨루치의 < 1900 >도 생각이 나더라구요. (로버트) 드니로와 (제랄) 드파르디유가 애기 때부터 십년에 걸친 얘기잖아요, 지주와 소작농의. 최근 디스크 두 개짜리의 확장버전도 봤지만, 거기서도 드니로가 머리 허옇게 바르고 나오지만, 임권택 감독님만큼 세월의 두께를 표현하지 못하는 거 같아요. 나이든 분장을 잘하고 못하고가 아닌 거 같아요. 영화 전체 리듬을 어떻게든 본능적으로 컨트롤하시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있는 거 같아요. < 취화선 >에서 최민식 아저씨랑 안성기 선배님이 재회하는 장면, 눈발이 날리면서 갯벌에서 멀리서 찍잖아요. 그때 울컥하고 올라오는 감정은 최민식 분장했네. 안성기 선배 머리 분칠했네. 롱 쇼트에서 서로 껴안네, 이런 게 아니라 저는 거기서 되게 실제 세월의 감정이 느껴져요 <아제아제 바라아제>에서 강수연 선배가 먼 길을 돌아서 원래 멘토인 스님 앞에서 돌아왔을 때의 느낌들. 그 모든 일들을 섬에서부터 탄광에서 부터해서 그런 두께의 느낌이 전해오거든요. 유인촌 , 한지일 , 그리고 안병경 님을 거쳐 거쳐 오거든요. 그 모든 세월을 겪고 돌아오는 느낌. 그 느낌의 비밀을 저는 잘 모르겠어요. <서편제>에서도 과거와 현재의 플래시백. 오늘 다시 본 <짝코>에서도 김희라 선배와 최윤석 씨가 다 늙어서 갱생원 옷을 입은 채 서울시내로 나오잖아요. 학생 때는 못 느꼈는데 되게 이상한 카메라 워크가 있더라구요. 요즘 젊은 사람이 아무도 시도하지 않는. 두 인물 노인네가 얽혀서 싸우는데, 이 말도 웃긴데, 이 사람은 망실공비요!!, 그러면서 소리쳐도 경찰들은 “후 캐어즈(who cares)?” 라며 무심하게 지나가잖아요.(웃음) 노인네 둘이 엉켜 싸우는데 두 주인공이 카메라 밖으로 나가버려요. 도시를 지나가는 차를 잡고 있다가 카메라가 가만히 있으면 이 두 사람이 알아서 프레임 안으로 (다시) 들어와요. 두 노인이 엉키고 있는 모습이 묘한 세월의 두께가 느껴지거든요. 금가락지를 발에서 빼고 임신한 여자를 데리고 산에서 김희라가 뛰어내리고 그 시간들과 단순히 노인분장이 아니라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다른 평론가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예전부터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했었어요. 유난히 세월의 긴 폭을 다룬 영화도 많이 하셨잖아요. < 씨받이 >처럼 집중된 스팟(spot)의 영화도 했지만 저는 세월의 폭이 되게 넓은 임 감독님 영화를 좋아하는데요. <취화선>도 그랬고, <아제아제 바라아제>도 그랬고, <짝코>도 그랬고. <서편제>도 포함이 되나요? 데이빗 보드웰의 개론서를 보면 스크린 듀레이션(duration), 플롯 듀레이션, 스토리 듀레이션으로 이렇게 기계적으로 3가지 듀레이션을 나눠놓고 서양 애들 식의 분석의 세계를 임 감독님은 이미 넘어서 있으신 거 같고, <짝코>나 <서편제>처럼 시간대가 막 왔다 갔다 하고 <짝코>는 플래시백에 또 플래시백이 있고 그렇잖아요, 그걸 벽돌을 쌓듯 축조하는 듯한. 세월의 몇 십 년, 두 사람이 걸어온 것. 베르톨루치의 <1900>보다 훨씬 더 세월의 두께가 깊게 느껴지는 거 같아요. 그 마술을 저는 잘 모르겠어요. 만나면 물어보고 싶은데 싫어하실 거 같아요. (웃음) 정성일 _ 임권택 감독님은 봉준호 감독이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영화를 찍어 오신 분이니까 당연히 영화를 보면서, 그러니까 봉준호 감독께서 영화를 하겠다고 결심하기 훨씬 이전부터 만들어왔으니까, 계속해서 무심하게 지나가다가 어느 순간 만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일까, 라고 임권택이라는 이름을 유심히 보기 시작한 영화는 언제부터입니까? < 씨받이 > 봉준호 _ < 씨받이 >. 87년 개봉작인 <씨받이>입니다. 그 영화를 비디오로 출시했을 때 대여해서 봤습니다. 극장에서 못 봤어요. (그 영화가 개봉한) 87년은 고3 때였습니다. 제가 88학번이니까요. 하지만 임 감독님의 명성은 이미 신문에서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 만다라 >를 하셨으니까요. 사실 강수연 누나 때문에 보게 된 거죠. 동경해 마지않던. 중고등학교 발정기 때 보게 되었습니다. (웃음) 제 꿈과 로망이었던 강수연 선배를 이제는 실제 몇 번 뵙고 얘기도 나눠봐서 지금 이렇게 얘기하려니 되게 쑥스럽네요. 강수연 선배덕분에 임 감독님 영화를 보게 된 거죠. <씨받이>에는 분명 야한 장면이 있을 거야, 씨를 받으려면 분명 야할 거야. 야한 장면 없이 씨를 받지 않겠지, 라는 아주 고등학생인 마인드로.(웃음) 집에 아무도 없을 때 빌려봤는데 별로 야하지 않았고, 다른 의미에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는 아직 박광수 , 장선우 감독님이 등장하기 이전이었고, 제가 김기영 감독님에 빠지기도 훨씬 전이었고. 정성일 _ 저는 그 영화를 임권택 감독님과 인터뷰를 한 직후, 그때는 남산에 있던 영진공(영화진흥공사) 지하 시사실에서 박광수 감독과 함께 보았습니다. 남산에서 보고 나서, 그때 박광수 감독이 이장호 감독님의 조감독을 하던 시절이었는데 사무실이 종로 3가에 있어서 남산에서 보고 천천히 걸어갔습니다. 그때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무 말이 없이 그냥 걷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박광수 감독이 혼잣말처럼 말했습니다. 딴 감독들은 다 자신이 있는데, 아직도 이 감독하고는 아직 안되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이 사람 앞에서 여전히 아이로 남아있는 기분이 드는구나. 봉준호 _ 박광수 감독님은 영화를 격투기처럼 생각하시나 봐요. 대결 같은. (웃음) 정성일 _ 진짜 말없이 걸어가다가 갑자기 그 얘기를 했어요. 그리고 그 마음은 진심이었고 아마 평생을 담아두신 것 같아요. 결혼하면서 임 감독님을 주례로 모시고 지금도 매년 새해가 되면 세배를 하러 오시니까요. 봉준호 _ 저도 강수연 의 뭔가를 영접하는 마음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틀었다가 어, 하고 되게 놀랐어요. 첫째, 메시지가 그렇게 강렬할지 몰랐었어요. 조선시대 양반사회에 대한 얘기가 굉장히 직접적이지 않나요, 시작부터. 마당에서 강수연 언니가 뭘 하는데 안에서 사대부 양반들이 모두 모여 제사나 그런 걸 길게 논하고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살아가는 집이 시각적으로 강력하게 형상화되어서 보여질 때, 이 집의 기와집의 기하학적 패턴들, 생각나는 게, 그 장면에서 기와지붕들이 구중모 기사님의 렌즈로 포착되었을 때 아지랑이가 막 피어오르잖아요. 아마 렌즈 밑에서 버너 같은 걸로 뭘 피우셨던 거 같아요. 그런 비주얼도 처음 보는 거 였구요. 완전 다른 영화구나! < 씨받이 >를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강수연 님이 별로 야하게 안 나왔다는 실망감을 압도하는. (웃음) 그때부터 임권택 감독님 영화를 봐야한다. 그래서 < 아제아제 바라아제 >도 서울극장에서 개봉할 때 가서 봤던 거고, <씨받이>와 <아제아제 바라아제> 사이에 있던 < 아다다 >는 극장에서 놓쳤는데 대부분 극장에 가서 봤어요. < 개벽 >, < 서편제 >, < 태백산맥 >, < 장군의 아들 > 전부 다. 그리고 대학 때 제일 큰 취미가 황학동 가서 비디오 사는 거였는데, 동대문운동장 지나서 4호선 역에서 내려가서 개봉하는 영화들뿐만 아니라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죠. < 길소뜸 >, < 티켓 > 이런 작품들 비디오로 봤습니다. 거기 사인도 받았는데 플라스틱이 아니라 비닐 케이스 밑으로 커버를 빼는. < 천년학 > 행사 뒷풀이 때 거기 종이 케이스에 사인도 받았습니다. <티켓> 마지막 장면에서 김지미 여사가 품에서 달걀을 꺼내듯이 (임 감독님의 비디오 자켓을 꺼내들면서) 슬그머니 다가가서 저기 너무 실례지만, (하고 인사를 드리니 임 감독님이) 자네 < 괴물 > 신기해, (라고 하셨을 때 개의치 않고) 아, 저기 (여기에 사인을 좀) 이러니까 굉장히 좋아하시더라구요. (웃음) <길소뜸>, <티켓>, < 만다라 >는 테이프로 구했었죠. 영상자료원이나 회고전할 때 본 것도 있고, <씨받이>가 어쨌든 출발점이었던 거 같아요. < 장군의 아들 > 정성일 _ < 씨받이 >로 임권택 감독님 영화를 시작했다면 전혀 다르지만 뒤이어 만나게 된 < 장군의 아들 >을 보았을 때 느낌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봉준호 _ 이분이 어렴풋하게만 듣던(건데) 옛날에 장르 마스터였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액션 그런 걸 한 번도 못 봤었거든요. < 만다라 >, < 씨받이 >만 머릿속에 있고. 근데 이 분이 한때 일 년에 4편씩 다찌마와리를 찍었다니! 그러다가 < 장군의 아들 > 보니 너무 재밌는 거예요. 특히 박상민이 싸울 때 직부감(vertical_high_angle)으로 찍은 쇼트들. 벽을 밟(고 뛰어올라 걷어차)는 장면. 미국 영화나 홍공 무술영화와 너무 다르고, 너무 재밌고 흥분되는데 동시에 6, 70년대 이분 액션영화는 어땠을까 추측해봤죠. 그때 그 가닥을 보여주시는 거구나 생각했어요. 재밌었어요. 장르 마스터였을 때 어떠했을까 추측해보게 되더라구요. 류승완이랑 얘기도 많이 해봤습니다. 자기도 벽 밟는 거 흉내내봤다고 하더라구요. (웃음) 인상적이었어요. 그 분이 <길소뜸>이나 <짝코>나 < 아제아제 바라아제 >나 그분 특유의 롱 테이크라든가 아주 유연하고도 마술 같은 리프레이밍(reframing)이라 해야 하나, 관객이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에 프레임을 새로 잡는데 조잡한 트래킹이나 줌에 의지하지 않고. 표준렌즈나 단렌즈(wide-lens)를 끼운 상태에서 굉장히 절묘하게 리프레임 되면서 모든 미장센이 완벽하다고 느껴지는 그런 굉장히 마술적인 순간이 많았거든요. 근데 액션을 찍을 때는 이 분이 그런 걸 어떻게 하시려나. 빠른 편집으로 그걸 또 하시더라구요. 반대로 막 싸우는데 겹쳐진 상태에서 (인물들 사이의 동선이) 하나도 엉키지 않고, 액션을 저렇게 찍으실 수도 있는 거구나. 심지어 아주 옛날부터 저렇게 찍으셨나보다. 아직도 임 감독님이 6, 70년대 찍으신 액션 영화를 못 봤어요. 하나만 추천해주시면 보고 싶어요. 어떻게 그렇게 하셨고 뭐가 같고 다른지. 정성일 _ 그렇다면 역시 저라면 <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 >를 먼저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제게 부탁의 기회를 주신다면 저는 봉준호 감독의 사극을 한번 보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액션영화뿐만 아니라 임 감독님의 60년대 사극영화를 보신다면 몹시 흥미롭게 보실 수 있으실 거 같아요. 봉준호 _ 저는 임 감독님의 사극은 유인촌 , 김진아 의 < 연산일기 >만 보았을 뿐입니다. 60년대 사극영화도 보고 싶네요. < 망부석 > 정성일 _ 추천한다면 저는 세 번째로 찍은 < 망부석 >이라는 영화를 먼저 고르겠습니다. 약점도 동시에 있지만 이미 세 번째부터 이 사람은 완성된 영화를 만들고 있었구나, 라는 당혹감마저 불러일으킨다고 할까요. 31살에 만든 신상옥 규모의 영화라고 할까. 봉준호 _ 컬러인가요? 정성일 _ 흑백으로 찍었습니다. 임권택 감독님의 첫 번째 컬러 영화는 67년에 찍은 < 요화 장희빈 >입니다. 이 영화도 사극입니다. 봉준호 _ 말씀하시는 거에 제가 동의하는 것은 마술적인 순간들이 임 감독님 영화에, 이런 말은 외람되지만, 임 감독님의 별로라고 하는 영화에도 꼭 한두 번 씩 있는 거 같아요. 정성일 _ 심지어 저렇게 포기한 영화에서조차도 이런 장면에서는 이렇게!! 봉준호 _ 빈손으로 돌아가시진 않는구나(웃음) (2부에 계속) (註)_ 인터뷰 중의 대화는 가능하면 오가던 이야기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일부 어휘들이 영어 단어가 사용되는 경우에도 옮기지 않고 그냥 고스란히 남겨 놓았다. 그 까닭은 의미는 옮길 수 있으나 대화의 문맥에서 그 단어가 가지는 ‘뉘앙스’를 상실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대화중의 일부가 두 사람 사이에서 서로 충분히 다시 설명해야 할 필요가 없어서 마치 점프 컷처럼 진행될 때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괄호를 치고 보충설명을 덧붙였다. 일부독자들에게는 필요치 않을 수 있지만 이 점 이해를 바란다. 또한 서로에게 약간의 어색한 표현들도 대화의 ‘라이브’한 무드를 돕기 위해 수정하지 않았다.
지금 내가 난처한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 나는 < 몽녀 >를 보지 못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이 영화를 3D로 보지 못했다. 차라리 이 영화가 사라진 다른 영화들처럼 어딘가에 숨어있었다면 문제는 간단해진다. 나는 그걸 핑계 삼아 그냥 피해가면 된다. 하지만 이 영화가 세상에 다시 나타났다. 그런데 볼 수가 없다. 내가 먼저 할 일은 그에 관한 과정에 대해서 당신에게 보고를 하는 것이다. 내가 임권택 감독님과 첫 번째 인터뷰를 했을 때, 그러니까 1987년, <몽녀>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을 때, 갑자기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면서 대답을 한참을 미루었다. 나는 기억할 수 있다. 매 편마다 한편씩 이야기를 진행했기 때문에 그 순간에 느껴보는 공기를 나는 지금도 차례로 떠올릴 수 있다. <몽녀>는 우리의 대화를 잠시 멈추었다. 나는 영화를 보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저 감독님의 말씀을 기다려야만 했다. 대답은 매우 간결했고, 목소리는 무미건조했으며, 내용은 거의 텅 빈 채, 그저 기술적인 몇 가지 사실만을 열거한 다음 더 이상 그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피했다. 좀 더 질문을 했을 때, 그저 그건 내가 알지 못하는 기술적인 문제이며 촬영을 한 장석준 씨에게 물어보라, 는 대답이 돌아왔다. 유감스럽게 이미 그때 장석준 촬영감독은 세상에 없었다. 나는 더 이상 나갈 수 없었다. 멈춘 질문. 하지만 어떤 망설임. 내가 지금 추리소설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이상할 정도로 이 대답은 무언가를 망설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직도 그 말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말씀을 하시다 말고 그냥 문득, 나는 이 영화를 기술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시작한 것이에요, 그런데 거기서 내가 생리적으로 싫어하는 것을 만났어요, 그냥 억지로 그런 장면을 만드는 거 말이에요. 이 말을 한 사람은 임권택이다. 당신은 영화가 가져야 하는 미학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실존적인 질문이 아니라, 역사 앞에서 부서져 가는 몸에 대해서가 아니라, 한국전쟁에 대해서가 아니라, 조선 시대의 예에 대해서가 아니라, 영화라는 테크놀로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그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하는 임권택을 단 한 번이라도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나는 그때 무심코 지나갔다. 그 문제를 붙들고 늘어지기에는 내가 너무 어렸다. 아니,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영화에 대해서 충분히 질문을 던질 줄 몰랐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이 질문은 계속해서 내게 머물렀다. 어떤 표시. 나는 무언가 그 사이에서 갈피를 잡기 위해 말과 영화 사이의 지탱이라는 버팀목을 찾아야만 했다. 그런 다음 차례로 영화와 기술 사이의 문제에 대해서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의 영화에 대한 여정 중의 하나이다. 이를테면 롯셀리니와 ASA 500, 니콜라스 레이와 시네마스코프. 더글라스 서크와 테크니칼라. 누벨바그와 보렉스 카메라. 등등. 그리고 지금 디지털 카메라와 (누구보다도 먼저) 고다르, 마지막 베르이만, 데이빗 린치, 키아로스타미, 소쿠로프, 라스 폰 트리어, 지아장커, 페드로 코스타, 왕빙, 김기덕 과 홍상수 . 그리고 다시 임권택. (< 달빛 길어 올리기 >). 하지만 그런 다음 누구도 < 몽녀 >라는 영화 제목을 꺼내 들지 않았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영화 제목을 거의 잊었다. 아마 감독님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새로운 사건이 벌어졌다. 2010년에 제임스 캐머런의 < 아바타 >가 ‘출현’했을 때 모두들 각자의 방식으로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3D 영화가 21세기 영화를 새로이 열었다. 아니, 나는 이 말을 다소 수정하고 싶다. <아바타>가 새롭게 열어놓은 것은 21세기 영화 산업이었다. 종종 3D라는 문제를 미학의 자리로 끌고 가고 싶어 한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차라리 이 문제는 잉여가치의 이윤율의 문제이다. 제작 자본과 배급 자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상이한 이윤율 사이의 평균 이윤율에서 최대 이윤을 획득하기 위한 새로운 진동으로서의 자본 투하는 가치의 전환형태로서의 새로운 연장을 위하여 시장에서 실제로 구현되는 새로운 가격을 구현하도록 요구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기술도입의 증가. 하지만 잉여가치가 증가했다고 과연 항상 이윤이 증가할까. 이제 새로운 유기적 결합의 과정이 시작될 것이다. 필사적으로 막아야 하는 평균이윤율의 저하. 여기는 자본의 전쟁터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 한 편에 2억불이 걸려있는 게임이다. 나는 사태를 과장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 자리는 영화의 정치경제학을 전개하기에 적절한 장소가 아니다. 하지만 3D는 갑자기 한 나라의 국가적인 사업이 되었다. 그런 다음 갑자기 지나가 버린 한국영화사의 잊혀진 입체영화들의 계보가 호명되었다. <몽녀>는 갑자기 다시 불려 나왔다. 그리고 나는 이제 다시 이 영화를 말해야 한다. 여기서는 세계 영화사 안에서 3D 영화의 계보를 다시 반복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그 대신 < 몽녀 >의 자리에 대해서는 다시 그 위치를 찾은 다음 그 자리가 취하게 될 의미를 물어볼 것이다. 위치? 왜 그런 것이 필요해졌을까. 우리는 여기서 그만 3D라는 소란스러운 논제에 걸려들어서 논점을 벗어나면 안 된다. 나는 지금 가교를 떠올리고 있는 중이다. 임권택 의 영화 안에서 다른 것을 중단시킨 기술에 대한 호기심. 그런 다음 마주치게 된 생리적인 저항을 불러일으킨 그 무엇. < 심야의 별장 >(1959), 경향신문 광고(1960.7.30.) 한국 영화에 3D는 늦게 도착하였다. 1960년대 한국에서 입체영화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는 한 가지 예. 1960년 8월 25일 을지극장에서 개봉한 윌리엄 캐슬의 < 심야의 별장 (House on Haunted Hill) >이 “안경이 필요 없는 (眼鏡不要)” 입체영화라는 광고 카피를 달고 개봉하였다. 몇몇 자료는 이 영화가 한국에서 상영된 최초의 입체영화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그로부터 삼 주 후인 9월 14일 경향신문에는 “극장윤리 어디로?”라는 제목으로 이 영화가 “입체영화라고 관객을 속였”다면서 탄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3D 사기라는 사실은 이미 광고 카피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입체영화를 보기 위한 안경이 필요 없는 기술적 수준을 1960년에 이루었다면 2013년에 다시 안경을 끼고 3D 영화를 볼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게다가 <심야의 별장>은 입체영화 기술로 찍은 영화가 아니다. 그런데 그걸 무슨 재주로 수입을 해서 한국에서만 입체영화로 상영할 수 있을까. 한국영화사 안에서 첫 번째 ‘立體映畵’가 만들어진 것은 1968년 2월 8일 동아극장에서 개봉한 이규웅 의 < 천하장사 임꺽정 >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보다 먼저 1963년 9월 26일 동아일보에는 “입체영화 제작 상영 간편화, (카메라) 한 대로 촬영에 성공”이라는 제목 아래 이성휘 촬영감독이 (당시 제일기공사에서 근무하던) 이교학, 이내원과 함께 입체영화 제작에 성공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 방식은 피사체를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어서 반사하는 분상(分像)장치를 통해서 이미지를 둘로 나눈 다음 하나는 아나모픽 렌즈로, 다른 하나는 표준렌즈로 촬영해서 그 둘을 하나의 필름에 현상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방식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천하장사 임꺽정>에 사용된 촬영방법은 이 영화를 촬영한 장석준 촬영감독에 의해서 ‘발명’된 판스코프 방식이다. 임권택 감독님은 이 영화를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천하장사 임꺽정>은 개봉하고 큰 성공을 거두었고, < 몽녀 >는 두 번째 ‘입체’ 영화로 제작되었다. 이 두 편의 개봉 시기는 서로 매우 가깝다. <몽녀>는 그해 8월 1일에 개봉하였다. 이 말은 <천하장사 임꺽정>이 흥행에 성공하자 새로운 기술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사라지기 전에 <몽녀>는 뒤이어 바로 제작에 들어가게 되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두 편 모두 같은 영화 제작사인 제일영화사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촬영을 제외하고 스텝들이 그대로 넘어오지는 않았다) 나는 이 두 편 사이에서 두 가지 공통점과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두 가지 공통점. <천하장사 임꺽정>과 <몽녀> 두 편 모두 같은 촬영감독인 장석준이 찍었다. 기록에 따르면 두 편 모두 같은 방식의 판스코프로 찍었다. 내가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은 두 편 모두 동아극장에서 상영되었다는 점이다. 이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서울에서 동아극장만이 입체영화 상영이 가능한 극장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일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1960년대 극장 상영 시스템에 대한 자료는 전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이건 그저 추론일 수밖에 없다. 그런 다음 한 가지 사실. 한국에서 입체영화 기술을 주도한 것은 제작자나 감독이 아니라 촬영이었다는 점이다. 이건 단순한 사실이 아니다. 이때 입체영화는 산업이나 미학의 문제라기보다는 (어떤 의미에서는 부정적으로) 순수하게 기술적인 이미지의 기계적인 운동과 그 재현에 따른 질적 변화에 더 기울어질 수도 있다. 물론 나는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천하장사 임꺽정>에서 <몽녀>로 이어질 때 그 둘 사이에서 단지 두 편의 입체영화라고 말하는 대신 사극 액션영화에서 반공 액션영화로 옮겨오면서 입체 화면의 효과에 대한 데이터에 관한 수집의 선택적 이행처럼 보인다. < 악마와 미녀 >(1969) 세 번째 입체영화는 시간을 좀 기다려야 했다. 이용민 이 연출한 < 악마와 미녀 >는 1969년 4월 10일에 개봉하였다. 이용민은 한국영화사에서 부당하게 대접받은 공포영화의 시네아스트이다. 이용민이 만든 두 편의 영화, < 목 없는 미녀 >와 < 살인마 >는 종종 진행을 종잡을 수 없게 만드는 괴작이다. 그가 만든 입체영화 <악마와 미녀>를 볼 수 없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한국영화사에서 세 번째 입체영화로 기록하고 있는 이 영화도 장석준 촬영감독이 찍었다. 이 영화는 (제일영화사가 아니라) 안양필름에서 제작했고, 유감스럽게도 (그 당시에는 극장들이 ‘프리미어’ 개봉 여부를 놓고 서로의 위계질서가 있었는데) 개봉관에서 상영하지 못하고 6개의 재개봉관에서 첫 상영을 하였다. 대중들은 벌써 입체영화에 대해서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언제나 변덕스러운 대중들. 사극영화, 반공영화, 그리고 공포영화라는 데이터. 세 개의 효과. 그 중 어느 선택이 판스코프 방식의 촬영에서 가장 성공적인 기술적 효과를 얻을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런 의미에서 오로지 입체영화의 역사에 관해서만 말해야 한다면 1971년 4월 3일에 개봉한 < 지지하루의 흑태양 >이 가장 궁금하다. 이 영화는 장석준 촬영감독이 직접 연출하고 촬영을 한 영화이다. 장석준은 여기서 세 가지 모델 중의 하나를 선택하지 않고 또 다른 모델로서 만주 웨스턴 장르를 만들었다. 물론 이건 전적으로 장석준의 결정이라기보다는 <지지하루의 흑태양>이 만들어질 무렵 만주 웨스턴이 한국영화사에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 선택을 유행의 일부로 폄훼하는 것은 지나치게 상황 속에 맥락 짓는 것이다. 만주 웨스턴은 이미 1950년대 한국영화에서 하나의 장르가 되었고, 그런 다음 정창화를 거쳐서 < 무숙자 >( 신상옥 , 1968), < 황야의 독수리 >( 임권택 , 1969), < 황야의 외팔이 >( 김영효 , 1970), < 당나귀 무법자 >( 안일남 , 1970), < 쇠사슬을 끊어라 >( 이만희 , 1971)로 이어지고 있었다. (아마 나는 많은 중요한 영화 제목을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차라리 <지지하루의 흑태양>은 그 장르의 마지막 레퀴엠처럼 보인다. 입체영화 3D 만주 웨스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작별인사가 어디 있겠는가. 이 영화는 동양영화사에서 제작되었고, 다시 한 번 동아극장에서 개봉하였다. 하지만 장석준 의 이름은 거기까지이다. 그리고 그 이후의 한국 입체영화의 역사는 거의 끝났다. 그런 다음 1976년 두 편의 입체영화가 개봉하였다. 한 편은 7월 23일 국도극장에서 개봉한 < 킹콩의 대역습 >이고, 다른 한 편은 9월 8일 스카라 극장에서 개봉한 <홍길동>이다. 합작영화로 알려진 <킹콩의 대역습>은 (약간 놀랍긴 하지만) < Ape >란 제목으로 지역코드 1번으로 (미국에서) 2001년 10월 30일에 영어 더빙된 DVD로 출시되었으며 IMDb에서는 스텝과 배우들에 관해서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다. 자료원 KMDb에서는 촬영기사의 이름이 확인되지 않지만 IMDb에 따르면 토니 프랜시스와 다니엘 L 시머스가 공동 촬영한 것으로 되어있다. 당신은 이게 다소 의외라고 생각될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 DVD를 판매하고 있는 아마존.com 에 들어가서 유저들의 영화평을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그러면 당신도 이 영화가 보고 싶어질지 모른다. 이 영화는 킹콩이 나온 역대 영화 중 ‘최악의 영화’의 반열에 올랐으며, 수많은 영화광들 사이트에서 영화사상 ‘최악의 영화 100편’의 목록을 채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감상해야할’ 만신전의 자리에 올랐다. 말하자면 에드 우드의 계보. (이쯤 되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지만) 최영철 과 폴 레더의 공동연출로 KMDb에 기록되어있는 이 영화는 IMDB에서는 감독으로 폴 레더의 이름만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인 < 홍길동 >은 최인현 이 연출하고 최길선 이 촬영하였다. 예고편에 따르면 한국에서 개발된 분광식(分光式) 촬영에 따른 세계 최초의 입체영화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말은 <홍길동>이 판스코프와 또 다른 방식을 개발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장석준은 그해 그 영화들이 상영되고 있을 때 다른 다섯 편의 영화를 촬영하고 있었다. < 여자들만 사는 거리 >( 김호선 ), < 불 꺼진 창 >( 권영순 ), < 바다의 사자들 >( 이재웅 ), < 집념 >(최인현), < 마지막 밤의 탱고 >( 이성구 ). 원래의 자리로 다시 돌아오자. 결국 나는 < 몽녀 >를 3D로 본 사람을 만나야만 했다. 그것도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지워져 가는 상태가 아니라 어제 본 것처럼 너무나 생생해서 그 효과의 구석구석을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만 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그 효과의 기술적인 구현 과정과 발전 단계, 더 나아가 지금 진행되고 있는 3D 영화의 테크놀로지와 비교하면서, 거의 ‘사라져가는’ 한국영화 안의 입체영화들에 관한 계보를 설명해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잃어버린 한국영화사. 영화가 기억을 저장하고 그 안에서 시간을 참조하고 조립하고 창조하는 뇌의 스크린이라면 한국영화사는 종종 그 일부를 상실한 채 치매의 진술을 하는 중이다. 나는 단지 3D에 한정 지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너무 많은 영화들이 사라졌으며, 너무 많은 자료들이 사방에 흩어져있거나 말소되었으며, 지금 이 시간에도 지나가 버린 시간 속의 영화들이 사라지고 있다. 그건 단지 영화만이 아니다. 영화를 만드는 하부 토대들, 카메라와 영사기, 조명, 녹음, 더 나아가 그 영화를 상영했던 극장들의 시스템들이 사라져가고 있다. 그때 부서지는 것은 한국영화사이다. 나는 질문을 임권택 의 <몽녀>에 한정 짓지 않았다. 그보다 먼저 <몽녀>를 둘러싼 한국영화사 속의 입체영화의 계보에 관한 맥락을 알아야만 했다. 아마도 그 순간, 그러니까 1968년, 임권택 감독님도 이 맥락 안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영화라는 것은 종종 미학적 공동체라기보다는 기술적 공동체로 묶일 때가 더 많다. 우리는 그 이해 없이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런 질문에 대해서 내게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 나는 질문지를 들고 한국영상자료원 장광헌 부장에게 이야기를 청했다. 정성일 _ (깜짝 놀라 둘러보면서 감탄사와 함께) 이 카페는 누가 찾으신 거예요? 장소를 찾아낼 때마다 제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훌륭한 장소들을 내미셔 가지고, 이게 자료원이니까 가능한 거야,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웃음) 먼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 중인 < 몽녀 >의 3D 복원과정을 이야기해 주십시오. 2002년도에 임권택 감독님 인터뷰를 진행할 때, 벌써 십 년 전이군요, 저는 <몽녀>를 3D로 본 적이 없으니까 임권택 감독님께 질문 드릴 방법이 없어서 자료원에서 볼 수 있는지 문의를 했는데 필름 상태 자체가 볼 수가 없다는 대답을 들은 거예요. (인터뷰를 진행할 때 당시 스크리닝이 가능한 영화들은 자료원에서 모두 다시 볼 수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과거의 3D 영화들이 복원과정을 밟기 시작했고, 하지만 아직 저는 <몽녀>를 3D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그 과정이 어떤지 아는 게 순서 같습니다. 장광헌_ (아이폰을 꺼내 들면서) 제가 조금 따왔습니다. (그런 다음 몽녀의 포지 필름을 찍은 사진을 보면서) 실제로 이것은 영화가 보여지는 상태가 아니고 영화 필름을 찍은 거예요. 한 프레임에 딱 들어오는 영상인데, 테크니스코프처럼 두 개의 프레임이 있는 걸로 되어 있어요. 테크니스코프와 다른 점은, (한국에서 개발한) 판스코프(Panscope)라는 것이, 그러니까 할리우드의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든 3D 영화는 카메라 두 대를 가지고 두 개의 필름을 만들어내는 그런 형식인데 한국의 판스코프는 카메라 한 대를 가지고 두 개의 필름을 만들어내는 식이었어요, 그러니까 두 개의 렌즈가 한 카메라에 붙어있는 겁니다. 마가진도 두 개가 붙어있고. 이건 저도 상상을 해보니까, (잠시 생각) 당시 어렵게 만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어요.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하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원래 입체라는 건요, 사람들이 누구나 볼 때, 어 이건 굉장히 어지러워, 라고 이야기하는 분이 있는 반면에, 어 이건 괜찮다, 라고 얘기하는 분이 있어요. 그게 가장 효과적인 입체를 보려면 (양 눈의 두 개의) 동공의 수정체 사이에서 11센티의 간극을 가지고 만든 입체영화가 가장 효과가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렌즈 두 개를 어떻게든 딱 붙여서 그 거리 차이를 11센티로 만들어야 되는 거죠. 요새 나오는 카메라들이 점점 컴팩트해지는데, 이게 작아야지만 그만큼의 거리를 서로 붙일 수 있는 거지요. 렌즈가 예전의 ENG 카메라처럼 크면 절대로, 절대로, 이게 아무리 서로를 딱 붙여놔도 렌즈의 간격이 15센티에서 20센티 이상 나와 버리는 거죠. 그래서 컴팩트하게 만드는 요즘은 가능한 일일 텐데, 당시 1968년도의 카메라라면 굉장히 부피가 크고, 그래서 거기에 구멍을 내서 만든 다음 렌즈를 붙여서 만들지 않고서는 이 효과를 내기 어렵다는 거죠. 그래서 굉장히 어려운 일을 하셨다고 볼 수 있는 거예요. 현재 자료원이 보유하고 < 몽녀 >의 필름은 원래 프린트 필름 단벌 하나만 있었습니다. 80년대에 저희가 입수한 필름인데, 원로 영화인으로부터 기증받은 프린트입니다. 그분이 < 천하장사 임꺽정 >과 그 다음에 <몽녀> 프린트필름 단벌, 각 한 벌씩 80년대에 자료원에 맡기셨어요. 당시에는 누가 기증했는지 출처가 없다가 2000년대 초반에 저희가 확인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한테 확인을 하고, 다시 재정리를 해놨는데, 그러다보니까 처음엔 저희가 확인할 방법이 없었을 때는, 그냥 지금 이 프린트가 이 영화의 유일본 프린트였구나, 라고만 생각하다가 나중에 보니까 어, 이거는 테크니스코프 같아. 왜냐하면 보시는 바와 같이 테크니스코프처럼 (아이폰의 필름을 가리키면서) 4 포퍼레이션 안에 2 프레임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영상을 자세히 보면 위와 아래 두 개의 상이 서로 어긋나는 부분이 있거든요. 위에 있는 프레임과 아래에 있는 프레임이 영상이 동일한 이미지인데 그 크기가 서로 똑같지가 않아요. 필름검색기로 본 자료원 보유 < 몽녀 > 포지티브 필름 화면 정성일 _ 네, 지금 이 작은 프레임으로 보아도 그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나네요. 장광헌_ 그게 이제 차이가 나는 건데, 테크니스코프 필름은 4 퍼포레이션 안에 두 개의 프레임을 나눈 것은 필름의 제작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그렇게 일부러 만든 거고, 똑같은 두 개의 프레임이 4 퍼포레이션 안에 존재하는 것이죠, 그런데 < 천하장사 임꺽정 >과 < 몽녀 >는 두 개의 프레임이 서로 크기의 차이가 있는 같은 이미지인 거예요, 그래서... 정성일 _ 그럼 이걸 두 번 찍었다는 뜻이에요? 장광헌_ 두 번이 아니고요, 한 번을 찍을 때, (카메라에) 렌즈 두 개, (필름이 들어있는) 마가진 두 개가 달려 있는 거죠. 그렇게 한꺼번에 찍는 겁니다. (아이폰의 영상을 가리키면서) 그러니까 사람이 이렇게 상을 찍을 때, 카메라가 팬 하게 되면 (왼쪽에 있는 렌즈로) 이쪽에서 찍히는 영상과 (오른쪽에 있는 렌즈로 찍는) 다른 이쪽에서 찍히는 영상이 서로 다르겠죠. 지금 기술과 비교를 하자면 굉장히 어지럽거나, 좀 더 전문적으로 이야기한다면 광원이 들어가는 부분, 고스트(ghost) 현상이라고 해서 중간에 안개처럼 스모그 현상들이 생기는 현상이 있는데, 그런 현상들을 처리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완전한 입체라고 보기가 어렵다, 는 것이 오직 기술적인 측면에서만 보자면, 그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현상은 < 몽녀 >만이 아니고 다른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저희가 보유하고 있는 입체영화 필름이 다섯, 여섯 편 정도 되는데요.... < 천하장사 임꺽정 >(1968), 경향신문 광고(1968.2.5.) / 영화기재국산화 필름도 50% 절약, 경향신문(1968.7.27.) 정성일 _ ...< 천하장사 임꺽정 >을 포함해서. 장광헌_ 네, < 천하장사 임꺽정 >을 포함해서죠. 다 확인을 했어요. 일일이 다 확인을 하고 왔는데, 방식이 다른 게 딱 하나가 있어요. 2000년대에 만들어진 < 평화의 시대 >라는 필름은 지금 저희가 가지고 있는 필름과는 다른 방식, 다른 방식이란 게 조금 더 말씀드리면, 독일의 뮌헨 박물관장이 입체영화에 굉장히 전문가신데, 그분이 한 번 방문을 하셔서 우리나라에서 입체영화를 찍은 게 있으면 보여 달라 해서 샘플을 그때 보여 드렸어요. 그랬더니 이거는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반에 동유럽에서 찍었던 방식과 같다, 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그때만 해도 할리우드는 50년대에 한 해 60편씩 엄청나게 입체영화를 찍었어요, 그리곤 확 죽어버렸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 유행이 지나고 나서 들어오게 된 거죠. 지금 기록을 보면 59년에서 60년 사이에 우리나라에 처음 입체영화가 들어오기 시작하고, 제작을 1968년도에 하게 됐는데, 장석준 촬영 감독님이 4년 정도를 고민하시고 만드셨대요.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걸 보고 그때부터 효과에 굉장히 호기심이 많이 있으셨던 거죠. (다른 사람들, 감독들이나 특히 제작자들도 아무도 관심이 없는 상황에서) 그런 상태로 해서 (3D를 구현할 수 있는 카메라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사실은 저희가 굉장히 이 영화에 대해 확인하기가 어려웠던 것이, 원본 필름, 원본 네가 필름이 없으니까 어떤 형식인 줄을 몰랐던 거예요. 당시 기록들도 많지 않아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원로 영화인들을 통해서 확인했을 때는 당시에는 카메라 한 대에 렌즈 두 개, 마가진 두 개로 두 개의 필름을 만들었는데, 그래서 좌우완 네가 필름이 존재를 했겠죠. 그냥 구술만 있는 상태에요. 게다가 할리우드는 우리나라 방식하고 여기서 달라지는 것이, 1950년대 할리우드에서는, 그렇게 만든 것을 가지고 레프트(left) 필름과 라이트(right) 필름으로 나눈 다음에 그걸 각각 프린트 인화해서 영사기 두 대로 교차상영을 해서 그 효과를 냅니다. 그게 원래의 할리우드의 3D (표준) 방식이라고 볼 수가 있는 건데 우리나라는 그렇게 한 게 아니고 두 개의 네가 필름이 존재하면서 인화를 할 때 하나의 필름으로 합쳐버린 거예요. 그래서 아까 두 개의 상이 생긴 것, 아래에 하나 위에 하나가 (할리우드와 비교하자면) 위에 좌, 밑에 우, 이런 식으로 해서 입체 영상을 만들어내고 상영 시스템을 바꾼 겁니다. 상영 시스템, 영사기에, 제가 본 것은 영사기에 렌즈가 있으면 앞에 시네마스코프 렌즈 안을 반쪽으로 나누어 두 개의 상을 보여주는 식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아래 위 필름이 내려갈 때 두 개의 프레임을 다 잡아 내는 거죠. 그렇게 영사를 하는 그런 방식이었습니다. 여기서 왜 < 몽녀 >를 가지고 우리가 재현을 못 하느냐, 라는 것에 고민을 많이 했어요. 2007년에서 2008년까지 아날로그 방식으로 테스트를 많이 했고 당시 디지털로도 할 수 있다고 해서 디지털로도 5분 정도를 테스트 했죠. 두 가지 결과를 먼저 말씀 드리면, 아날로그는 너무 상태가 안 좋으니까 필름이 불안정해서 이걸 보존용 필름으로 만드는 것도 과연 잘 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결과였고 그리고 당시에는 원본 필름이 어떤 상태로 되어있는지 몰랐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실제로는 레프트 네가 필름과 라이트 네가 필름이 있어야지 정확한 복원이 되는 거잖습니까, 자료원은 원래의 원본을 복원하는 것이 목표이지 그걸 수정해서 상영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걸 모르니까 저희는 이 프린트에서 듀프 네가 필름을 그대로 밀착인화를 해서 찍어낸 거예요. 그게 가장 필름에 손상을 덜 가게 하는 거고 이 품질을 그대로 받아낼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저희가 그렇게 받아낸다고 결정을 내린 것은 그렇게 되면 이건 나중에 아날로그적으로 다시 재현하기는 어렵고, 디지털 방식으로서 나중에 이 프레임을 나눠서, (잠시 생각) 쉽게 말씀 드리면 번호를 매겨서 홀수 번호의 프레임과 짝수 번호의 프레임을 나눕니다. 나눠서 디지털로 볼 때는 홀수 번호의 프레임과 짝수 번호의 프레임을 두 개의 네가 필름 형태로 만드는 거죠. 저희가 로직을 그렇게 만들어서 이렇게 하는 게 가장 맞는 방법인데 그때 당시에는 또 이게 엄청난 비용이 들어갔어요. 정성일 _ 그렇죠. 두 편의 영화를 찍는 꼴이 되니까. 장광헌_ 그렇죠. 그래서 그건 일단 포기를 하고, 단지 이제 디지털 복원의 방법으로서 테스트를 한 것은 과연 그렇게 디지털로 했을 때 품질이 어느 정도 나올까, 이거였습니다. 그래서 포스트 프로덕션에 당시 참여했던 분들하고, 그때 그분들은 (다른) 디지털 입체 영화에 대해서 테스트를 하고 있었어요. 그 영화를 테스트할 때 저희가 이거 한 번 테스트해보자, 해서 샘플을 드리고 스캔 작업해서 했는데, 우스갯소리로 스크래치마저도 입체로 나와 버렸어요. (웃음) 정말로 기가 막히더라고요. 스크래치가 입체로 확 보여요. 정성일 _ 오히려 스크래치가 가장 효과적이었겠네요. (웃음) 장광헌_ 그러니까 저희는 있는 그대로 그렇게 해서 복원을 한다, 그러면 괜찮겠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스크래치라던가 (필름에 달라붙어 있는) 먼지를 제거해야만 하는 복원작업에 들어가야 하는 건데, 저거는 도저히 손을 못 대겠다, 라는 결론이었죠. 왜냐하면, 단순하게 말씀드리면, 저희가 디지털복원을 하면서 한 편을 복원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있는데 < 몽녀 >는 적어도 2.5배 내지는 3배 정도의 비용이 들어갈 거라는 계산이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세 편 정도를 하는 비용이 들어갈 것이라는, 안 그래도 두 편으로 나누면 계산상으로는 서로 다른 두 편인데 거기다 난이도에 있어서도 최고의 난이도인 영화인 거죠. 정성일 _ 복원 작업도 현재의 기술과 함께 항상 경제적인 문제군요. 장광헌_ 그런데 당시 이런 게 있었어요. 아시겠지만 < 아바타 >가 들어오면서 우리나라에 3D 영화에 대한 붐 아닌 붐이 일어나면서 저는 엄청난 압박을 받았어요. 당시에... 정성일 _ 아, 한국에는 왜 3D 영화의 역사가 없느냐는, (웃음) 사실 그때는 전 세계 모든 영화제가 갑자기 수준과 상관없이 3D 영화를 우대했었고, 시네마테크들은 3D 영화의 복원 사업에 매달리기도 했죠. 장광헌_ 한국에 있는 (입체) 고전영화를 디지털로 복원하는 프로젝트를 하자. 영진위에서도 저희 보고 하자고 했어요. 그런데 우리는 이미 이전에 아카이브로써 표준 영사 시스템을 갖추는 것과 복원의 방법을 결정하기 위해 항상 테스트를 하게 되는데 테스트를 한 결과를 놓고 복원을 여기서 이만큼 작업해 들어가는 건 우리가 지금 하기엔 현재의 기술과 역량으로서 힘들다, 라는 판단을 이야기해줬어요. 근데 계속 하자는 거예요. 계속 하는 것이 소모성으로 비친다 할지라도 꼭 해야 한다면 할 수는 있겠죠. 그런데 문제는 지금 이 필름을 몇 번이고 되 만져서 작업을 하면 이 필름은 나중에 정말 만질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니까, 그러면 나중에 정말 기술이 원하는 수준의 작업이 가능해졌을 때 만져볼 수 없는 지경이 돼버리니까, 그렇게 우리가 투자하기엔 이건 모험이다. 그래서 일단 미룬 거예요. 현재로서는 그렇게 미뤘지만 후회되진 않아요. 이 필름이 현재는 이렇게 있지만 지금 만약에 멋모르고 (작업을) 했다가 그러면 많은 부분에서 효과를 못 보고 낭비를 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 차원에서는 지금의 저희 자료원의 보존기술센터에서는 잠시 보류해둔 상태이지만, 앞으로 어찌 되었건 다시 만져야 할 때는 그런 데이터를 가지고 다시 판단해야 할 겁니다. 그러면 좀 더 손쉬운 방법들이 생겨날 거예요. 정성일 _ 그러면 지금 < 몽녀 >는 어떤 상태입니까? 장광헌_ 현재는 원본 프린트 필름이 있고요 거기서 듀프 네가 필름, 밀착 인화를 해서 동일하게 밀착 인화된 테크니스코프처럼 생긴 듀프 네가 필름이 존재합니다. 거기까지. 그래서 재현되는 필름은 없다고 할 수 있죠. 전에 보여드렸다시피 중간에 텔레시네 작업을 하면서 2D로 만든 영상만 있습니다. 일단 저희가 확인을 하기 위해서 만든 영상이죠. 지금 현재로서 볼 수 있는 미디어로는 그거 하나밖에 없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전에는 그게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볼 수 있는 방법도 없었으니까, 그것도 중요하니까, 2D 방송용 규격으로 만든 것도 그게 무슨 내용인지 나중에 기록으로서도 남겨야 하니까 지금 형태의 미디어를 만들어야겠다, 해서 중간 결과물을 만들게 된 겁니다. 정성일 _ < 몽녀 >의 현재 복원 상태와 판스코프의 원리에 대해서는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뿐만 아니라 매우 오랬동안 이 상영방식을 입체영화라고 불렀습니다. 3D 라는 말은 한참 뒤에 사용하기 시작했고, 한국에서 이 표현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디즈니랜드에서 마이클 잭슨의 <캡틴 EO>를 상영하기 시작하면서가 아닌가, 합니다. 단지 표현의 차이 이상으로 자료원의 입장에서 영화 기술사의 관점에서 입체영화와 3D 영화를 어떻게 분류하고 있습니까? 장광헌_ 저도 한참을 고민해 봤는데, 제가 정답이라 말씀은 못 드리겠고, 입체영화라는 것이, 공간 감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입체영화라는 개념이 나와서 기술적으로 구현이 되었고, 그러다 삼차원 영화, 3D라는 것이 삼차원이라는 것이잖습니까. 그런데 지금 보면 아이맥스 3D도 나왔고, 4D도 나왔고, 그리고 조금 더 발전적으로, 아직 이건 영화다, 라고 말은 하고 있지 않지만, 홀로그램 자체도 광고성 영상부터 해서 굉장히 많은 발전이 있는 분야 중 하나에요. 그렇다면 홀로그램도 나중에 영화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거든요. 그렇게 봤을 때는 삼차원 영화라고만 보는 것은 무리가 있는 거고, 우리는 예전에는 입체영화를 삼차원 영화라고 봐도 그 이상의 무엇이 없었으니까, 지금은 입체영화라는 것이, 그게 평면적인 영화보다는 입체감을 주는 영화의 통칭이다, 라고 말하고 싶고요, 그 종류 중에 여러 가지, 3D영화, 아이맥스 4D 이런 것들이 입체영화를 표현하는 표현방식으로, 용어를 설명하는 게 맞지 않나.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정성일 _ 그렇게 말한다면, 테크놀로지의 개념 분류에만 한정 지어서 말한다면 한국 최초의 3D 영화는 < 7광구 >라고 하는 편이 맞겠군요. 그 전까지는 입체영화고.... 장광헌_ 그렇죠. 좀 더 논의의 필요성이 있긴 하지만, 어찌 보면 그렇게 볼 수가 있는 거죠. 장석준 촬영감독 정성일 _ 장석준 촬영감독께서 직접 설명한 판스코프 방식에 관한 인터뷰나 기록이 혹시 남아있나요? 장광헌_ 장석준 촬영감독님께서 80년도에 돌아가셨어요. (1980년 8월 15일에 별세하셨다) 그런 기록이 제가 알기로는 없고 그 이후에 그분과 함께 작업했던 분들의 기록, 어떤 구술 기록이라든지, 그런 것들로만 그 분이 어떻게 작업을 했는지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 외에는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특별하게 어떤 영화를 모델로 삼았다던가, 하는 기록은 없고요. 입체영화라고 보여지는 것이 있었으면 국내든 해외든 어디든 가셨데요. 그런 기록은 있습니다. 정성일 _ 그 당시에요? 굉장하군요. 그때는 해외에 나가는 것 자체가 힘든 시기였는데요. 장광헌_ 그걸 4년간을 연구하셨다는 걸 보면, 어디든 가셔서 연구를 하셨다는 것이 충분히 공감이 되는 부분이죠. 정성일 _ 그럼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뮌헨 영화박물관장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때 유럽으로 흘러나온 동구 영화들을 보셨을 가능성이 크군요. 만일 할리우드 영화만을 참고했다면 사실 구태여 외국까지 나갈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요. 장광헌_ 가능성이 있다고도 볼 수 있죠. (잠시 생각) 그런데 그 부분은 정확하진 않아요. 기록상 할리우드 쪽으로 가신 기록은 있는데, 유럽 쪽에 가셔서 이게 맞다, 라고 하셨던, 이게 우리에게 적합할 거다, 라고 하셨던 기록은 현재 없거든요. 단지 테크니스코프가 만들어질 때 영화의 제작비 절감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처럼. 사실은 테크니스코프가 우리나라에서는 70년 그때 장석준 촬영감독이 만들어 나온 거지만, 61년에서 62년, 그 사이에 이탈리아에서 나온 거예요. 원래 있던 기술을 우리 식으로 맞춰서 만든 거니까. 장석준 촬영감독께서 이걸 최초로 만들었느냐. 몇몇 분들의 기록을 보면 최초로 만들어서 일본에 수출을 했다,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저것 찾아보다 보니까 이렇게 만든 형태는 이미 있었어요. 40년대 러시아에도 있었고, 50년대에도 동유럽에 있었어요. 그런데 그걸 한국형으로 실용적으로 만든 것에 대해서는 할리우드 쪽에서도 공감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참 잘 만들었다라고, 오히려 일본을 통해 수출을 하셨다는데, 당시 한국에서는 그런 기술을 밖으로 수출하는 것에 대한 많은 관심을 안 갖고, 일본 쪽은 그런 영화 기술에 대해서 많은 관심이 있으니까 일본을 통해 적극적으로 수출했다는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때 당시의 원로영화인분들은 당시 한국에서는 그런 쪽에 관심을 갖지 않은 점, 그게 아쉽다 그런 말씀들을 하시더라고요. 정성일 _ < 몽녀 > 프린트를 CGV에서 시사를 하셨다고요. 장광헌_ 네, 용산 CGV에서 했습니다. 정성일 _ 그때 보셨을 때 입체 효과는 어땠어요? 장광헌_ 효과는요, 정말 좋았어요. 정성일 _ 아, 그래요? 장광헌_ 디지털로 전환했을 때 아날로그로 보는 거와는 차이가 확실히 많이 났어요. 예상을 하긴 했는데, 저희가 < 몽녀 >를 보기 바로 직전에 뭘 봤냐면, 액션스쿨에서 제작한, 액션을 주로 취하는 영상이 효과가 많이 나니까 그걸 영상으로 찍은 다음 입체 영화로 만들어서 테스트를 했거든요. 그걸 보고 <몽녀>를 봤어요. 봤는데 못지않다는 생각이었어요. 당시에는 저는 그걸 몰랐죠. 입체를 의식하고 연출을 하느냐 마느냐 이것도 많이 좌우를 하는데,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해왔거든요. 만약 풀 3D라면 전체가 공간적인 입체를 표현하기 위해 연출을 했겠는데, 그렇지 않다면 그때에는 60년대에서 80년대까지 입체영화들의 대부분은, 이를테면 주먹이 날아온다거나 도끼가 날아온다든가 이런 쪽에만 표현을 3D로 한 거예요. 나머지는 2D로 한 거죠.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실제로. 지금도 그때 <몽녀>가 완전히 표현이 되진 않지만 3D처럼 표현이 되는 부분, 머리가 확 나온다든가 이런 부분들을 디지털로 전환했을 때 효과는 아날로그로 보던 것과는 많이 차이가 났죠.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스크래치가 3D로 쫙, 그러자 화면에 기둥 하나가 탁! (웃음) 정성일 _ (웃음) 먼지 속에서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장광헌_ 놀랐습니다. 저 기둥은 뭐냐. 딱 봤더니 스크래치에요. (웃음) 새벽 3시에 비몽사몽간에 보면서도.. 재미있는 경험이었죠. 당시 3D에 대해 국산화해야 하느냐, 마느냐에 대해 떠들썩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저희는 그런 쪽에 관심 있는 게 아니었고 고전영화에 입체영화가 있다는 데, 그걸 디지털로 전환했을 때 그게 되느냐. 그게 관심거리였어요. 효과는 있었어요. 그런데 너무 많은 비용이 드는 거죠. 이런 것들이 저희들에게 걸림돌이었죠. 기술적으로 이걸 다 할 수 있을까. 그냥 스크래치를 다 지우는 것이 완전히 복원이라고 하지는 않거든요. 그러면 영상을 다 뭉개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요. 최대한 그걸 가능한 많이 손대지 않는 쪽으로 하는 게 사실은 복원의 방법인데,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서 깨끗하고 선명하고 이런 것들을 좋아해서 외국, 유럽 쪽의 복원영화와 우리나라의 관람객들이 보는 복원영화의 눈높이는 그런 데서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 정성일 _ 제가 어렸을 때 입체영화들을 볼 때의 안경이 기억나는데요. 지금이랑 완전 딴판의 안경이었잖아요. 그 당시의 판스코프 비전을 보려면 그 당시의 안경이 필요한 건가요, 아니면 지금의 안경으로 봐도 효과가 같은 건가요? 장광헌_ 그 당시의 안경으로 봐야 해요. 정성일 _ 그럼 디지털 복원 테스트 시사에서는 그걸로 보셨어요? 장광헌_ 우리가 만들었죠. 그러니까 당시 기록에 따라 셀룰로이드를 사서 저희 직원이 그대로 만들었어요. 할 수 있는 한 그대로. 테스트를 하려고 안경을 두 개를 만들었어요. 진짜 되더라고요. 그건 아날로그 방식을 보려고 했던 거고요. 저희가 아날로그 테스트를 하려면 기존의 영사기 앞에 시네마스코프 렌즈식으로 생겼지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아래 보면 반이 쪼개져 있어요. 그 프레임을 (위 아래로 있는) 두 개(의 이미지)를 (동시에) 잡아내는 그런 렌즈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저희가 테스트할 때, 우리나라에 (그 렌즈가) 6개밖에 없었거든요. 그 중 3개를 어찌어찌 빌렸어요. 그 중 하나는 고장이 나서 또 안 됐고 두 개를 가지고 했는데, 저희가 가지고 있는 영화 중에 < 공포의 축제 >라고 86년도 영화가 있습니다. 그 프린트가 가장 온전한 상태로 있어서... 정성일 _ 그 영화도 판스코프 방식인가요? 장광헌_ 네, 그렇죠. 그걸 봤죠. 그걸 보면서 안경을 만들었고, 편광안경을 만드는데,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그런 편광방식을 패시브(passive) 방식이라고 하는데 리얼D, 돌비3D 이런 것들이 있는데, 처음에는 이 방식들이 같은 편광안경인 줄 알았는데 각자 다 다르더라고요. 리얼D면 리얼D 안경으로 만들어진 걸로 봐야 하는. 그리고 액티브 글래스(active glass) 방식이라는 것은 안경 자체가 입체를 구현해주는 방식이어서 안경이 비싸죠. 수신 장치가 따로 있고. 이런 건 프로젝터가 일반 디지털 프로젝트여도 보이는 거죠. 그런데 옛날 영사기는 장석준 촬영감독께서 예전에 < 몽녀 >를 만들어놓고 보니까 영사가 제대로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미러 박스를 만들어서 영사기에 장착해서 영사를 하셨다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지방을 다니며 영사를 할 때는 장석준 기사가 직접 다니면서 미러 박스를 설치하고 영사까지 했답니다. 정성일 _ 순회공연이었네요. (웃음) 장광헌_ 직접 하셨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는 영화촬영을 못 했다, 그런 기록도 봤습니다. 어려운 일을 하신 거죠. 정성일 _ 그때의 배급 방식이었으니까 가능했던 일이네요. 지금처럼 동시 개봉하고 그러면.. 장광헌_ 지금과 같은 엄청난 스크린이 있었으면 못했죠. 정성일 _ 기록에 의하면 < 몽녀 >는 유영길 과 장석준 , 두 분이 찍은 걸로 되어 있습니다. 장광헌_ 아, 유영길 촬영감독은 그때 보조역할을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보조역할이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는데 제가 알기론 장석준 기사님께서 메인을 잡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정성일 _ 저는 < 천하장사 임꺽정 >과 < 몽녀 >를 모두 3D 스크린으로 구현된 것을 보지 못해서 궁금합니다. 두 영화 사이의 기술적 차이는 어떻습니까? 단지 경험적 차이인지요? 장광헌_ < 몽녀 >가 두 번째 작품이잖아요. 저는 기술적인 적용치는 동일하다고 보고요. 방식은, (잠시 생각) 입체영화를 찍으면서 실제로 이 장비로 찍어서 잘 찍힌다, 이런 것보다 엔지니어의 노하우로 많이 좌지우지 하거든요. 신문 기사라든가, 당시의 구술 기록을 보면 < 천하장사 임꺽정 >을 찍어서 효과는 확실히 보았다고 되어 있어요. 그리고 신문 인터뷰에 따르면 <몽녀>를 찍을 때 <천하장사 임꺽정>에서 잘못된 점을 개선하고 있다, 라고 하시고 계세요. 그래서 <몽녀>를 찍었을 때 카메라의 잘못 찍혔을 것에 대한 부분적이 보완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러한 경험치가 많이 업그레이드가 되었다고 보지, 방식이 바뀌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그 이후에 장석준 촬영감독이 직접 연출하신 영화까지도, 70년대 영화까지도, 동일한 방식이라고 알고 있어요. 정성일 _ 네, 그럼 하여튼 당시의 판스코프 방식을 보려면 지금의 관객들에게 옛날 방식의 편광안경을 만들어서 나눠줘야만 한다는 거군요. 장광헌_ 맞습니다. 그때 당시의 필름을 어찌어찌해서 복원을 해서 그 필름을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이라면 안경도 그렇게 만들어서 보여줘야겠죠. 정성일 _ 영사기의 문제도 또 있는 거죠? 장광헌_ 있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렇게 된 렌즈를 구해서 영사기에 장착을 해서 영사를 해야겠죠. 정성일 _ 한국영화사 안에서는 거의 저주받은 역사로군요. 6편의 역사라고나 할까? 장광헌_ 시도를 했다는 차원에서 많이 긍정적으로 봐주시죠. (웃음) 그런데 정말 손을 많이 타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제가 전반적으로 봤을 때 (양팔을 크게 벌리면서)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 손봐야 하는데, 이런 걸 장석준 촬영감독님은 하셨어요. 하신 걸 보니까, 정말 이렇게 손 많이 가는 일을, 그렇게 열정적이지 않으면.... < 다이얼 M을 돌려라 >(1954) 입체 영상 정성일 _ 지난 5월에 자료원에 자리한 시네마테크에서 알프레드 힛치콕의 < 다이알 M을 돌려라 >를 3D 방식으로 상영하였습니다. 이 판본은 일종의 복원으로 알고 있습니다. 장광헌_ 이번에 상영된 < 다이얼 M을 돌려라 >는 디지털 시네마 형태로 만들어진 3D 영화입니다. 1954년에 처음 개봉했을 때 어떤 시스템으로 상영되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당시 연간 60편의 입체영화를 제작한 할리우드 방식을 봤을 때, 영사기 두 대를 돌려서 상영하는 방식이었을 겁니다. 그게 가장 유력한 방식이죠. 지금 상영하는 디지털시네마는 영사기 두 대로 상영하는 것보다는 굉장히 간편해졌죠. 둘 사이에 동일한 거는 찍어서 원 소스가 되는 영상은 좌우 영상 두 개가 존재합니다. 근데 만들어서 일종의 프린트 역할을 하는 디지털 시네마 패키지라고 하는 DCP 형태의 데이터는 그 영상을 디지털 기술로 합쳐서 보여주는 거예요. 대신에 데이터가 합쳐진 것만으로 끝나는 건 아니고요, 관건이 되는 건 그렇게 합쳐진 데이터와 영사하는 시스템이 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아날로그 영사기에 렌즈를 장착하고 봐야 한다고 말씀드렸다시피, 아날로그식으로는 영사 시스템이 간편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디지털은 또 영사 시스템이 굉장히 복잡합니다. 지금 나와 있는 것이, 아까 잠깐 설명 드린 것처럼, 크게는 패시브 방식과 액티브 글래스 방식 두 가지가 있고요, 액티브 글래스 방식은 어떤 특허 기술을 내서 안경 자체가 입체를 구현해 주는 겁니다. 기존의 디지털 프로젝트가 있는데 일반 디지털 프로젝트로 그 데이터를 DCP 영상으로 상영하게 되면 그 앞에 분배기 같은 역할을 하는 장비를 그 앞에 놔둬요. 분배기와 같은 수신기가 있는데요, 일종의 수신기를 놓으면 관객석에 있는 사람이 끼고 있는 안경 가운데 수신 장치가 있거든요, 그 수신 장치로 찰칵찰칵, 실제로는 여러 번 프레임을 나눠주면서 양쪽에 영상을 수신하면서 받아주는 역할을 해요, 그렇게 보여주는 방식이 있는데, 이 방식은 안경이 굉장히 고가입니다. 하지만 기존의 디지털 일반 프로젝트를 써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런 장단점이 있고요, 반면에 패시브 방식은 디지털 프로젝터를 가공해야 해요. 뭔가 앞에 렌즈 두 개를 붙이거나, 리얼D 방식은 렌즈 두 개가 나와 있는 방식이고요. 지금 일반적으로 CGV에 소니의 장비가 많이 들어가 있는데, 소니 장비는 입체를 상영하기 위해서는 리얼D 방식으로 되어 있어서 앞에 렌즈가 두 개 달려 있어요. 그래서 프로젝트 하나에 렌즈 두 개가 붙어있는 방식인 거죠. 그 외 다른 건 우리나라에서 개발한 마스터 이미지란 것이 있고, 돌비3D란 것이 있는데, 이거는 그 기종에 해당되는 것만 되지, 다른 기기와는 호환이 되지 않는다는 거죠. 그렇게 3D가 아직은 그렇게 표준화가 되어있지 않아요. 디지털 3D 기술이 제작에 있어서는 간편해졌는데, 상영 시스템은 좀 복잡해요. 아날로그와 다른 점이 그런 겁니다. 정성일 _ < 라이프 오브 파이 >를 보면서 이안이 참 영리한 연출자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죠. 이 영화는 사실 3D 화면을 부분적으로 사용하면서 그걸 종종 여러 화면 사이즈로 다시 분할한 다음 시각적 효과라는 것을 구현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힛치콕의 < 다이얼 M을 돌려라 >에서도 부분적으로만 3D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의도적인 연출이라기보다는 기술적 한계라는 측면을 포함해서 < 몽녀 >의 입체 연출 장면은 영화 전체의 어느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지요? 장광헌_ 전체를 3D로 재현해서 보질 못했기 때문에 정확히 확인은 안 되지만 당시 기록을 봤을 때 풀 3D는 전혀 아니었어요. 연출자의 연출에 의해서 그런 장면만 3D 형태로 구현을 하는 방식이었고, 제 눈으로 확인한 것은, 이를테면 80년대에 만든 < 공포의 축제 >는 확실히 말씀하신 것처럼 2D 부분이 있고, 어느 부분은 갑자기 3D 부분이 있고 그런데, (잠시 생각) 3D 부분이 많지 않았어요. 대충 어림잡으면 많아 봐야 4분의 1 정도가 3D 정도일까, 그런 효과를 내는 장면을 만드는 거죠. 근래 영화들도 실사 영화들은 풀 3D로 만드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 않고요 애니메이션 같은 경우는 거의 풀 3D로 만들죠. 정성일 _ 당시 기사를 보면 < 몽녀 >는 이재웅 녹음기사가 입체음향으로 녹음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입체음향 녹음이란 게 정확히 뭘 말하는 건가요? 장광헌_ 아, 그건 입체음향 녹음이란 게 입체 영화니까 사운드도 입체감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게 있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확인해 보니까 당시 < 몽녀 >를 제작했을 때는 3트랙으로 만드는 녹음 방식을 취하셨어요. 지금으로 말하면 4트랙이 스테레오인데 스테레오와 비슷한 형태였던 거죠. 웃음이 나오는 부분은, 당시 그렇게 만들었는데 극장에서 상영할 때 구현할 방법이 없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장석준 촬영감독이 당시 동아극장, 그러니까 나중에 아세아 극장이죠. (아세아 극장은 지금의 세운상가에 자리했다가 2001년에 문을 닫았다) 아세아 극장에서 입체음향을 내기 위해서 영사기에다 3트랙을 읽어 들이는 영사장치를 또 개발해서 붙이셨어요. 그렇게 해서 상영을 했다고 합니다. 정성일 _ 트랙이야 필름에 들어가 있는 거니까, 실제로 테스트 영사를 했었을 때 현대의 극장에서 구현된 사운드의 느낌이 어땠어요? 장광헌_ 아, 그거를 말씀드리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원래 원본은 없고, 사운드 필름도 없었고, 프린트에서 듀프 네가를 만들었는데, 갖고 있는 원본 프린트는 모노입니다. 정성일 _ 기록으로만 남아있는 거군요. 장광헌_ 그렇죠. 그런데 80년대에 저희에게 들어온 프린트도 원래 당시의 사운드를 낼 수 있는 필름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어요. 저희가 생각 하건데 3트랙짜리 사운드가 아니고 이건 그 이후에 70년대 후반이나 8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프린트가 아닐까, 라고 추정하는 겁니다. 정성일 _ 만약에 추론컨대, 그 방식을 그 시스템으로, 실제로 들었으면 어떤 사운드가 들렸을 거라 생각하세요? 장광헌_ 지금으로 따지면요, (잠시 생각) 그냥 스테레오죠. 스테레오와 비슷하게, 라는 거죠. 완전한 스테레오는 아니지만 모노의, 단방향의 센터에서 보내는 음향이 들리는 것보다는 양쪽에서 들리는 부분은 굉장히 낫겠죠. 모노보다는. 레프트 라이트로 나눌 수 있었을 겁니다. 정성일 _ 그럼 복원을 하게 되면 음향도 복원 대상이라 생각하세요? 장광헌_ 사운드도 복원 대상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제까지 저희가 복원했던 작품들은 대체로 사운드가 모두 모노였어요. 모노였기 때문에 굳이 그 트랙을 나눠서 다시 맞춰가면서 하진 않았어요. 단지 포커스를 맞춘 부분은 노이즈 쪽이었죠. 노이즈가 많은, 여러 가지 불편한 음향들에 대해서 그런 것들을 제거하는 작업 쪽에 포커스를 맞췄지, 실제 마스터링을 다시 하는 쪽은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만들어진 5.1채널, 7채널 같은 거야 이후에 그걸 복원한다면 그렇게 다시 나눠야겠죠. 일본의 경우 음향과 대사를 분리해 고전영화 사운드를 리마스터링 하긴 하지만 한국은 아직 그럴 여건이 못 되는 게 현실입니다. 정성일 _ 문제는 < 몽녀 >같은 작품은 장석준 촬영감독님이나 이재웅 녹음기사, 모두 세상에 지금 계시지 않으니 복원을 할 때 가이드 라인을 해줄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군요. 장광헌_ 장석준 촬영감독은 1980년에 돌아가셨고, 이재웅 기사는 2010년까지 생존해 계신 걸로 확인했는데 그 이후는 지금 확인이 안 되고 있습니다. < 지지하루의 흑태양 >(1971), 경향신문 광고(1971.4.1.) 정성일 _ 장석준 촬영감독이 직접 연출한 < 지지하루의 흑태양 >도 보셨습니까? 장광헌_ 아뇨, 보지 못했습니다. 그 영화의 프린트는 현재 보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정성일 _ 그럼 그 이후의 입체영화로 자료원에는 어떤 영화가 있는지요? 장광헌_ < 홍길동 >입니다. 근데 이 <홍길동>이, 오늘 아침에 제가 확인했는데, 그게 현재까지도 네가 필름만 있는데 필름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지 이걸 프린트로 옮기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게 3D였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었어요. 오리지널 네거티브는 맞는데 2D 영상은 하나만 있으니까 그게 분명히 레프트, 라이트 중 하나만 저희가 갖고 있는 거고요, 하나의 영상이 없는 겁니다. 네가만 존재하고 기록이 없으니까 이제까지 저희 직원들은 모두 이게 3D 영화인지 모르고 있었어요. 지금은 3D 영화로 분류하되, 하지만 좌, 우중에 하나다, 라고 확인을 한 정도입니다. 정성일 _ 그럼 < 천하장사 임꺽정 >, < 몽녀 >, < 홍길동 > 이렇게 순서대로 보면서 장석준 촬영감독께서 모두 판스코프로 촬영했다 할지라도 무언가를 개선하려고 노력했던 부분이 있지 않았나요? 이 문제는 미학적인 측면이 아니라 촬영의 입장에서는 기술의 개선이라는 문제로 먼저 다가왔을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판스코프의 촬영방식에서 어떤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나요? 장광헌_ 그런데 이게, (잠시 생각) 제가 계속 말씀 드리는데, 그 전에 < 악마와 미녀 >도 있고, 전부다 똑같이 지금 3D로 재현한 필름이 없어요. 그러니까 본 사람이 없는 거고, 본 사람이라고 해봤자 80년대 초반, 그 이후에는 본 사람이 없는 거 같아요. 저희가 보기에는. 그래서 이게 어디가 어떻게 변천되면서, 뭐가 고쳐졌다, 라고 확인할 길이 없는 거죠. 저희가 봤을 때 방식은 같아요. 대체로 지금 디지털 3D 기술도 마찬가지지만 찍는 사람의 노하우가 많이 좌우를 하거든요. 얼마나 빨리 찍고 얼마나 잘 찍을 수 있는지, 고스트 현상을 없앨 수 있는지 촬영기사와 지금의 스테레오그래퍼 라는 특수한 직업의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양각과 음각, 들어간 것과 나오는 것을 연출하면서 촬영 감독과 같이 보고 모니터링을 함께 해요. 그래서 모니터를 할 때 예전에는 감독, CG슈퍼바이저 이렇게 보다가 입체영화는 감독, CG슈퍼바이저, 스테레오그래퍼 이렇게 같이 보는 거죠. 3D 기술은 그렇게 바뀌었는데, 물론 장비의 개선을 하시려고 했겠죠. (잠시 생각) 그런데 제 생각으로는, 렌즈가 크면요, 아무리 붙이려 해도 붙여지지가 않아요. 렌즈와 렌즈 사이의 간극이 11센티가 되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는데 옛날 방식의 카메라들은 분명히 다 크니까 렌즈가 그 간극을 허용하지 않을 만큼 모두 크잖아요, 아무리 둘 사이를 붙이려 해도 붙여지지가 않을 테니까 이걸 어떻게 하면 컴팩트하게 만들 수 있을까. 이런 것들에 관심이 집중되었겠죠, 이런 면에서 줌 렌즈를 쓰는 것이 또한 개선의 효과를 가져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정성일 _ 아, 줌 렌즈요... 만약 그 방식이라면 카메라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거의 동시에 발생하지 않습니까. 결국 카메라를 가능하면 세워 놓아야 한다는 문제와 만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3D 효과를 구현할 수 있는 장면을 만들어내는데 있어서 좀 더 까다로운 기술적 난점과 만나게 될 텐데... 장광헌_ 아 조금 더 말씀 드리면요. 왜 장석준 촬영감독이 카메라 한 대를 가지고 찍으려고 하셨을까, 를 한번 생각해 봤어요. 지금 3D 영화들은 트라이포트처럼 생긴 곳에 받침대 같은 게 있습니다. 그 받침대에 카메라 두 대를 장착해서 찍습니다. 근데 이게 수평이 정확하게 맞거나 간극도 정확하게 맞아야 해요. 근데 요 받침대가, 실제로 리그라고 합니다만, 이 리그를 어떻게 정밀하게 깎느냐가 기술이에요. 그런데 카메라가 한 쇼트만 찍는 게 아니고 계속 움직이면서도 찍기도 하고 돌아가기도 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이게 돌아가면,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의 상이 겹치는 상이 생길 수도 있어요. 그걸 고스트 현상이라고 해요. 또 광원이 들어갔는데 우완 영상에는 햇빛이 없는데, 좌완 영상에는 햇빛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이거는 아날로그로 찍으면 절대 고칠 수가 없거든요. 디지털로 찍게 되면 그건 디지털 소프트웨어로 고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솔루션화 해서 만들어진 게 요 근래 디지털 3D의 발전적인 기술인데, 생각을 해보면 그때 아날로그적인 기술로 봤을 때는 두 대의 카메라로 찍으면요, 왼쪽 렌즈와 오른 쪽 렌즈로는 상을 같이 맞출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추정하건데, 카메라 한 대로 만드신 게, 카메라 한 대에 렌즈가 붙어있으니까 (둘 사이의 서로 다른) 움직임은 적어도 없지 않았을까 라는 거죠. 생각해볼수록 카메라 한 대에 렌즈 두 개, 이거 정말 괜찮은 생각을 하신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저는 지금의 3D 기술에서 가장 난점이 되고 고도화 기술이 되는 부분이 그런 것들이기 때문에 카메라 한 대로 렌즈 두 개를 장착해서 찍었다. 그게 오, 저는 굉장히 일리 있는 기술적인 해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성일 _ < 몽녀 >와 주변의 입체 영화들을 복원하는 과정의 경험치가, 한편으로는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한국 3D 영화들에서 프린트 이외에 두 가지가 매우 중요하다는 교훈을 준 거네요. 안경과 영사기, 말하자면 관람방식의 기록과 보존이라는 문제. 장광헌_ 안경은 당시의 그 방식에 대한 기록만 있으면 만들 순 있어요. 데이터만 있으면 큰 문제는 없어요. 하지만 그 데이터가 없으면 정말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 수가 없는 거죠. 근데 저희가 알았던 것은 일본 쪽에서 그런 옛날 방식을 아직도 가지고 있으니까, 그걸로 하니 딱 맞는 거예요. 당시 장석준 촬영 감독이 그렇게 만든 카메라가 거꾸로 일본으로 가서 많이 쓰였다고 하니까, 60년대 괴수영화를 보면 일본 기술이 우리나라로 들어와서 많이 찍었다고 하는데, 근데 입체영화는 거꾸로 수출을 하게 된 거죠.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굉장히 큰 공을, 어려운 일을 하신 거죠. 정성일 _ 필모그래피를 보면 이상할 정도로 그 시기에 임권택 감독님이 미학적 관심보다는 기술적 관심에 대해 크다, 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 몽녀 >에서는 3D 촬영을, 그리고 <증언>에서는 미니어처 촬영을 하고 있습니다. 그걸 쫓아가고 있으면 마치 앞으로 자신의 연출이 가야할 하나의 방향이라는 느낌이 든달 까요, 장광헌_ < 천하장사 임꺽정 >이 68년 초에 만들어진 거고 이 < 몽녀 >가 그해 여름에 찍은 걸로 알고 있어요. 3D 영화로 두 번째 찍은 건데, 정말 저는 개인적으로 감독님께 궁금한 게 왜 갑자기 입체 영화를 찍으려고 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로 기술적인 관심이 있어서 한번 이거 해볼까 라고 생각하신 건지. 지금은 보조 역할을 하는 여러 사람이 있지만 당시에 완전 3D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연출하시는 분이 아, 여기는 입체감을 줘야겠다, 라고 연출을 하지 않고서는 되지 않거든요. 말하자면 당시의 3D 영화는 전적으로 연출자의 연출과 촬영하는 쪽의 기술의 경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거죠. 정성일 _ < 몽녀 >에서 3D 테스트 시사를 할 때 선택한 장면은 그걸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장광헌_ 아 테스트 장면이요. 자동차 신, 움직이는 신, 저도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가장 움직임이 많은 쪽을 하려고 했어요. 복원을 할 때도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 손상이 많이 간 부분과 덜 간 부분을 샘플로 골라서 작업을 하더라도 그렇게 하거든요. 그래서 이건 입체 영화니까, 입체 효과가 많이 나는 부분, 자동차가 확 앞으로 지나가는 신이었던가, 이 장면을 선정했어요. 사실 저희가 그 장면을 선택해서 이야기한 건 아니고 포스트 프로덕션에서 입체 작업을 할 때 가장 이 부분이 낫겠다, 라고 그쪽과 이야기해서 정한 거죠. 정성일 _ < 홍길동 >도 보셨나요? 장광헌_ 볼 수 있는 매체는 현재 없습니다. 정성일 _ 기록상으로 < 홍길동 >은 일본 제작진 기술의 도움을 받았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홍길동>은 이전 방식과 다른 빙식을 취한 건가요? 장광헌_ 기록상에 보면, 신상옥 감독이 일본 기술진과 (협력)해서 기술 개발을 했다, 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확인할 길은 근데 없어요. 제 생각으로 오히려 기술개발을 했다면 촬영기술 쪽에 기술개발을 한 게 맞지 않을까 추정을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판스코프 방식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희가 갖고 있는 게 포지티브가 있는 게 아니고 네거티브가 있는데, 그 네거티브 중에서 좌완, 우완이 있는 게 맞는 데 그 둘 중 하나만 있는 거니까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판스코프 방식은 좌완, 우완 네거티브가 있고 이걸 프린트 인화할 때 프린트 하나를 만드는 거예요. 이 기술인데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모르죠. 만약 그렇게 만들었다고 그러면 그것도 동일하게 판스코프 방식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거죠. 정성일 _ 만약에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졌다면 한국에는 두 가지 입체 시스템이 있었던 셈이군요, 추정컨대, 혹은 기록상으로 이것 말고 또 다른 방식이 있나요? 장광헌_ 지금 2000년대 들어서 만든 영화는 < 평화의 시대 >라고 해서 HOT 나오는 영화가 있었어요. HOT 팬들을 위해서 만든 29분 길이의 영화인데요, 이걸 만든 방식은 판스코프 방식이 아니고, 프린트가 레프트 프린트, 라이트 프린트가 따로 있어서 영사기 두 대로 상영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프린트만 특이하게 저희가 보유하고 있는 입체영화 중에 할리우드에서 촬영하고 영사하는 방식의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영화라고 할 수 있어요. < 홍길동 >은 확인이 안 되고요. 판스코프 카메라 정성일 _ 판스코프 방식의 촬영이 가능한 카메라가 현재 보존되어 있나요? 장광헌_ 카메라는 없고요. 당시에 장석준 촬영감독님께서 영화진흥공사 시절에 기증을 하셨어요. 그 카메라를 종합촬영소에 전시를 했었어요. 그게 90년대까지는 보셨대요. 그런데 현재는 어떤 과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분실되었습니다. 그 카메라가 있으면, 작은 카메라는 아니고요, 독특하게 생긴 카메라죠, 카메라 박스에 마가진 두 개. 달린. 정성일 _ 혹시 사진이 남아 있나요? 장광헌_ 사진은 지금 저희에겐 없고요. 인터넷으로 찾아보게 되면 러시아에서 나온 사진기 자체가, 그 원리를 알 수 있는 사진기는 (볼 수) 있어요. 저도 이게 어떻게 생긴 건진 본적이 없으니까. 영진위에는 찍어놓은 사진이 있겠죠. 분실돼서 없다고 공식적으로 확인됐는데, 이게 어디 가지는 않았을 텐데... 정성일 _ < 홍길동 >은 장석준 촬영감독이 관여하지 않은 3D 영화입니다. 기술 판권문제는 제가 잘 알지 못하지만 이 영화를 다른 촬영감독이 찍었을 때는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누차 이야기한 것처럼 3D 촬영에는 단지 기술만이 아니라 경험치가 필요하다면 더더구나 거의 유일한 촬영 전문가인 장석준 촬영감독의 도움이 필요했을 텐데 말입니다. 게다가 그 당시에 장석준 촬영감독은 현장에서 활동 중이었습니다. 장광헌_ 약간 까다로운 문제가 있어요. 실제로는 신상옥 감독이 < 홍길동 > 제작에 참여했다고 했잖아요. 우리 기록에는 그 필름 크레딧이 있는데 거기엔 삼영필름이에요. 정성일 _ 아 신필름이 아니고요? 장광헌_ 네, 그래서 저도 그게 의아해서 자료를 맞춰보았어요. 그때는 (다른 영화사 이름을 빌려서) 대명(代名)제작을 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이게 76년도 영화이고, 그럼 신필름이 폐업한 이후의 일이니까 혹시 신상옥 감독님이 제작을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셨을까, 라는 생각도 했어요. 대명제작을 하셨을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그럼 보통 대명제작을 하게 되면 제작은 아니더라도 기획에 대명제작을 한 사람의 이름이 들어가잖아요. 그런데 그것도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우리도 야, 이건 좀 이상하다. 확인을 해봐라, 이러는 중입니다. 이게 과연 신상옥 제작이냐, 현재 기록상으로는 삼영필름 강대진 제작으로 돼있어요. 그게 좀, 그리고 아까 말씀하신 개발 방식이 판스코프 방식이냐 아니냐, 그것도 반반인 거 같아요. 판스코프방식이 아닐 수도 있어요. 정성일 _ 그 사이에 일본 쪽에서도 계속 개발을 하고 있었을테니까, 장광헌_ 그런데 그 시간에, 공존하는 시간에 장석준 촬영감독님이 판스코프 방식을 계속 유지하고 계실 때였어요. 그러니까 만일 다른 촬영감독이 찍었다면 다른 방식으로 < 홍길동 >을 촬영할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정성일 _ 장석준 촬영감독께서 판권을 주장했을 수 있었겠네요, 이를테면 내가 찍지 않는 영화는 허용할 수 없다, 그 정도 열정을 갖고 3D 촬영에 임했다면 그 정도 자부심을 갖고 계실 수 있지 않을까요? 장광헌_ 그게 이번에 조사하면서, 우리도 데이터가 부족하니까, 이건 좀 의심해볼 여지가 있다, 라고 생각되는 게 바로 이 부분입니다. 정성일 _ 그렇군요. 처음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결국 전 < 몽녀 >를 3D로 볼 수 없는 상태로 보면서, 하여튼, 역설적인 상황 안에서 제 일을 수행해야겠군요. (1부 끝, 2부에서 계속) 인터뷰_ 2013년 6월 21일 날씨 가끔 흐리고 참 더웠음 대담_ 한국영상자료원 자료서비스부 부장 장광헌 진행, 정리, 사진_ 유성관 진행, 사진_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