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판 블리치 : 다이아몬드 더스트 리벨리온
- 감독
- 아베 노리유키
- 제작년도
- 2007
- 출연
- 박로미, 마츠타니 카야, 모리타 마사카즈, 오리카사 푸미코, 이토 켄타로
(사진: “ Häxan ”, IMDb) 세계영화사의 주목할 만한 사건과 개념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조명합니다. 반드시, 라고 단언하고 싶은데, 자신을 시네필이라고 자처하는 이라면 누구라도 일시적으로 이상한 영화를 찾아보느라고 시간을 보낸다. 누군가는 재빨리 빠져나오고 다른 누군가는 여기에 머문다. 그 영화들이 ‘불법적인’ 대상이 아니라면 (이를테면 스너프 필름, 아동성애 영화, 기타 등등) 각자의 취향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이 영화들을 ‘이상한 영화’의 수호성인 아모스 보겔은 ‘전복적인 예술영화(subversive art film)’라고 불렀다. 아모스 보겔을 이야기할 자리는 1974년까지 기다려주길 바란다. 여기서 질문은 영화사의 순간들에서 ‘이상한 영화’라고 부르는 영화가 언제 나타났느냐는 것이다. 물론 방점을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 다른 계보를 열거하게 될 것이다. 다른 예술들과 마찬가지로 영화도 사회적 위반, 법적 금지의 경계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했고, 할 수만 있다면 그 선을 넘고 싶어 했다. 누군가는 한계를 부수길 원했고, 다른 누군가는 돈을 원했다. 누군가는 예술적인 실험을 하고 싶어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거기서 쾌락을 향유했다. 여러 영화 제목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여기서 시작해보겠다고 결심했다. 세계영화사의 순간들은 그렇게 가끔 하나의 선처럼 느껴지는 앞과 뒤를 따라가다가 갑자기 옆으로 빠져나올 것이다. 내가 ‘이상한 영화’의 계보를 따라 올라가다가 가장 멀리서 마주친 영화는 벤야민 크리스텐센의 스웨덴 영화 < 헥산 >(1922)이다. “Häxan”은 번역하면 ‘마녀’라는 뜻이다. 벤야민 크리스텐센은 19세기인 1879년에 태어났다. 처음에는 배우가 되기를 원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어떤 경로를 거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18년부터 ‘흑마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고서점을 뒤지던 벤야민은 독일 베를린 서점에서 『마녀의 망치(Malleus Maleficarum)』 사본을 구하게 되었다. 이 책은 1486년 독일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하인리히 크라메르가 쓴 마녀 처단에 관한 책이다. 주술을 이단으로 규정하면서 마녀로 규정된 여자의 마법의 악을 ‘끝내기 위해서’ 자백을 끌어내는 고문 기술을 상세하게 기술했다. 이 책이 출간될 무렵에 유럽에서는 마녀로 내몰린 여자들이 산채로 화형당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하인리히 크라메르는 마녀의 존재를 신학적으로 증명된 것처럼 주장하고, 더 나아가 마녀사냥을 제도화하는 데 기여하고, 심지어 이 책은 마녀재판의 법전이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 소설에서 사용된 장면들, 마녀들은 악마와 계약을 맺어서 초자연적인 능력을 얻게 된다는 이야기들이 여기 실려 있다. 교회 내부에서도 이 책은 논쟁이 되었으며, 오히려 그래서 많은 독자를 얻게 되었다. 1519년에 야콥 스프렝게르가 이 책에 새로운 저자로 나서서 마치 개정 증보판처럼 추가해서 1533년에 출간하였다. 손에 손을 거쳐 이 책은 마녀를 자백시키는 안내서가 되었고, 잔인한 고문 기술자들은 상상으로 쓰인 이 책의 내용을 감옥에서 불행한 여자들에게 실행하였다. 『마녀의 망치』는 일시적으로 판금 되었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왕실 궁정에서 공공연하게 읽히는 금서가 되었으며, 16세기 이후에 마녀재판에서 더 잔인한 기술을 정당화시켜 주었다. 『마녀의 망치』 표지와 <헥산> 포스터 (사진: “ Häxan ”, IMDb) 벤야민 크리스텐센이 구한 사본 『마녀의 망치』는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여러 개의 판본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본이 15세기라는 것을 셈에 포함해주길 바란다. 1부에서는 먼저 마녀의 존재와 악행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2부에서는 마녀들이 저지른다고 여겨지는 다양한 범죄와 악마와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리고 3부에서 마녀재판의 실제 절차와 고문을 통한 자백 유도 방법을 자세하게 소개한다. 『마녀의 망치』에 만족하지 않고 벤야민은 1919년부터 거의 2년 동안 마녀사냥과 재판에 관한 상세한 규정들, 사례, 실제로 실행하는 집행과정을 담은 삽화들, 여기에 더해 각종 문건을 모았다.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벤야민은 1920년까지 발표된 마녀들에 관한 소설과 희곡도 모았다. 그런 다음 자료들을 바탕으로 영화제작을 결심하였다. 벤야민이 준비한 것은 단지 마녀에 관한 시나리오가 아니었다. 준비한 <헥산>은 유럽 중세로부터 400년에 걸친 마녀사냥과 재판에 관한 백과사전이었다. 벤야민은 제작자들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자신이 구한 도판들을 그 앞에서 전시하다시피 했고, 상상하기 힘든 끔찍한 재판기록과 집행을 낭송하기도 했다. 이 기괴하지만, 분명히 야심적인 프로젝트에 스웨덴 필름 인더스트리가 관심을 보였다. 벤야민과 촬영 감독 요한 안케르스트예르네는 덴마크에 오직 <헥산> 촬영을 위한 영화 스튜디오를 사들였다. 그런 다음 야외는 중세를 재연하였고, 실내는 모두 밀폐시킨 다음 어두운 그림자와 빛으로만 이루어진 세계를 만들어내기 위해 해가 떨어진 다음에만 촬영을 시작해서 새벽이 오면 멈추었다.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헥산>은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연장이라기보다는 중세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제단화를 스크린 위에 펼쳐놓은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가장 비싼 무성영화가 되었다. <헥산>은 1921년 2월에 촬영을 시작해서 그해 10월까지 이어졌다. 빛과 그림자 간 대조가 두드러지는 장면 / 우주를 둘러싼 천사 합창단의 모습 (사진: “Häxan( 1 , 2 )”, IMDb) 영화 <헥산>은 7개의 연대기로 나누어져서 진행된다. 첫 번째 시작은 마치 학술 발표를 위한 도판 설명처럼 이어진다.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있고, 주변에 공기와 불이 둘러싸고 별들이 주변을 떠돌면서 천사 합창단이 보인다. 그런 다음 악마와 마녀의 조각상, 목판화, 삽화를 차례로 소개한다. 이 화면자료들이 펼쳐지면 IMAX 스크린으로 벽화처럼 보고 싶을 것이다. 사탄이 나타나서 부부가 잠든 침대에서 아내를 유혹하고, 질식시키고, 살해하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사랑의 묘약을 구하는 여인, 성에 눈뜨는 여인, 그 여인이 몰래 먹이는 묘약에 흥분하는 승정(僧正), 게걸스러운 폭식, 들린 자들(the possessed)이 사탄의 북소리에 맞춰 한밤중에 불을 피우고 춤을 추는 축제, 벤야민 크리스텐센은 이 장면들을 종종 멜리에스 영화에서 본 특수효과를 이용해서 펼쳐 보인다. 하지만 이 장면들이 우스꽝스럽기는커녕 오싹해지는 것은 만들고 있는 쪽에서 지금 이걸 진심으로 믿고 있구나, 라는 설득을 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민담과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들처럼 보였지만 여기에 교회가 개입하면서 고문이 등장한다. 벤야민 크리스텐센은 그 과정의 세부를 묘사하는데 망설임이 없다. 여기서 이 영화가 그런 이야기들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시기에 만들어졌단 생각을 해야 한다. 게다가 신성모독 장면을 재연하는데 망설임이 없다. 그래서 <헥산>을 보고 있으면 이래도 괜찮은 것일까, 라는 장면들과 마주치게 된다. (상) 마녀와 악마에 관한 삽화 / (하) 사탄의 북소리에 맞춰 춤추는 들린 자들(the possessed) (사진: “Häxan( 1 , 2 )", IMDb) 벤야민 크리스텐센이 1921년에 이 영화를 만들면서 프로이트의 저술을 읽었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알지 못한다. 프로이트는 아직 살아있었고, 『쾌락원칙을 넘어서』를 발표한 직후이다. <헥산>의 마지막 연대기는 동시대에 이른다. 중산층 가정의 평범한 여성은 몽유병에 시달린다. 그리고 그녀는 몇 가지 과정을 거쳐서 정신병원으로 보내진다. 그 당시 정신병원이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미셀 푸코의 책에 잘 설명되어 있다. 고문 장면뿐만 아니라 성상 모독, 마녀에 관한 찬양, 중세 교회에 대한 적나라한 재판 장면과 함께 여성의 누드, 신체 훼손, 시체 손상에 이르는 장면들이 등장하면서 개봉 당시 스웨덴과 덴마크의 검열은 통과했지만, 독일과 프랑스, 특히 미국에서는 검열에서 문제가 되어 개봉을 위해 재편집이 불가피했고 상당 부분이 삭제되어 국가별로 여러 판본이 남아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여러 판본이 만들어졌다. (내가 보지 못했지만) 가장 흥미로운 판본은 1968년 메트로 픽쳐스 코퍼레이션이 <헥산; 옛날 옛적부터의 마녀들(Häxan; Witchcrafts through the ages)>이다. 이 판본에서는 『네이키드 런치』의 윌리엄 버로스가 영어 나레이션을 한다(고 한다). 이 무렵 윌리엄 버로스는 마약중독 상태에서 장 주네를 둘러싼 친구들과 친교를 맺던 시기였다. 어떻게 궁금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정작 이 판본의 복원 소식은 들리지 않고 1976년부터 1922년 판본을 원본에 가깝게 몇 차례에 걸쳐 복원하고 있다. 물론 원본을 복원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윌리엄 버로스의 판본이 궁금하다. 아마 언젠가는 될 것이다. 나는 기다릴 수 있다.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인터뷰 진행,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필사의 탐독』(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 카페 느와르 >(2009) 이후 < 천당의 밤과 안개 >(2015), < 녹차의 중력 >(2018), < 백두 번째 구름 >(2018) 연출.
(본문 속 사진을 클릭하시면 링크가 열립니다.)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 이 어두운 세계에서 희망 가득한 긍정의 말로 이 글을 시작하는 걸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국 영화의 현재는 참으로 좋지요! 이보다 좋을 수 없습니다! 최상이죠! 그런데 내 생각보다 더 좋다면 어떡한다. 하지만 호들갑 떨진 맙시다. 그것도 좋지만 누구도 심장 마비를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쇼크받을 만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 매체가 우리의 상황을 결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그 상황을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요즘 내가 LP를 자주 듣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브릿팝을 듣지는 않는다. 어떻게 보더라도 뉴오더는 전혀 브릿팝이라고 할 수 없다. 1993년에 나온 여섯 번째 스튜디오 앨범 [Republic]을 제외한다면, 아마도… 브릿팝은 90년대 영국에서 유행했던 다소 복고적인 기타 팝을 가리키는 다소 두루뭉술한 용어다. 전설적인 60년대에서 패션과 태도, 분위기와 멜로디를 빌려온 브릿팝은 그런지로 대표되던 미국의 얼터너티브 록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브리티시 인베이전 이후 20년 넘도록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며 차게 식은 차를 후후 불어 마시던 영국인들의 자존감을 채워주었다. 1997년 신노동당을 표방하며 18년 만의 정권교체를 이룬 토니 블레어 정부는 브릿팝의 흥행을 등에 업고 쿨 브리타니아라는 이름으로 음악과 영화, 패션과 축구를 아우르는 일종의 문화 캠페인을 벌인다. 실제로 아마추어 기타리스트이기도 했던 블레어는 하원 파티에 브릿팝 밴드들을 부르며 힙한 모습을 과시하기를 즐겼다. 하지만 훗날 펭귄북스에서 3권으로 출간된 대변인 알라스테어 캠벨의 일기에 따르면, 다우닝가에서 열린 총리 취임 기념 연회에 비비안 웨스트우드, 랄프 파인즈와 함께 오아시스의 노엘 갤러거가 참석할 거라는 소식을 전달받은 TB(토니 블레어)는 사색이 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누가 그를 초대한 건지 모르겠군. 그는 분명히 미친 록큰롤 같은 소동을 일으킬 거고 나는 전설적인 사건의 희생양이 되겠지. 앨런 맥기(*오아시스를 발굴한 크리에이션 레코즈의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야겠어. 노엘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거라는 다짐을 받아내야 해. 맥기는 떨고 있는 총리에게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다고, 노엘은 괜찮을 거라고, 오아시스의 다른 반쪽(리엄 갤러거)을 초대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말했다. 연회 당일, 아내를 대동한 노엘이 맥기와 맥기의 여자친구와 함께 총리 관저에 도착했다.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기타리스트를 마주한 블레어가의 아이들은 너무 놀란 나머지 하얗게 굳어버렸다. 노엘은 블레어의 성공을 축하했고, 블레어는 노엘의 성공을 축하했다. 그리고 둘은 결혼 생활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세한 내용은 알고 싶지 않다… 영상 1. 다우닝가에 도착하는 노엘 갤러거 그날 노엘은 술을 진탕 마셨고, 별다른 문제는 일으키지 않았으며, TB와 쿨 브리타니아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물론 영원한 적은 없고 영원한 친구도 없다. 아편전쟁 당시 영국 수상을 지낸 제3대 파머스턴 자작 헨리 존 템플의 말이다. 1997년은 브릿팝이 이미 프로파간다로서의 동력을 잃어가고 있던 해였다. 오아시스와 함께 브릿팝 전쟁의 당사자였던 블러가 브릿팝의 죽음을 선언하며 미국적인 향취로 가득한 다섯 번째 앨범 [블러]를 발표했고, 80퍼센트에 달했던 블레어의 지지율은 어느새 52퍼센트로 급락했다. 1999년 노엘은 대학을 갓 졸업하고 ‘옵저버’에 입사한 햇병아리 기자였던 닉 패튼 월시에게 신노동당은 변장한 토리에 지나지 않는다며 불평을 쏟아냈다. 아무 것도 바뀐 게 없어, 그렇잖아? 똑같은 똥들이 있는 다른 날들일 뿐이지. 그 뭐야, ‘우리는 이제 모두 중산층입니다We’re all middle-class now’? 그건 정말 모욕적이었어. 중산층이 된다는 건 좀 있으면 자살할 거라는 말이잖아.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지루한 일이 바로 중산층이 되는 거라고! 그럼 애초에 총리가 주최한 파티에는 왜 참석한 거냐는 신참 기자의 질문에 노엘은 조금 방어적으로 대답했다. 난 그냥 이렇게 생각했지. 영국 총리가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고? 젠장, 내가 빌어먹을 괴짜라도 된 것 같군. 나는 그날 밤에 기사 작위라도 받으려는 모양이라고 확신했어. 누구나 살아가고 그러면서 배우는 거잖아, 안 그래? -한 마디로 하면 이거죠.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학이시습지불역열호. -…정연씨, 하고 싶은 말이 뭐에요? -이 이야기를 들으니 뭔가 떠오르지 않나요, 지돈씨? 케이팝으로 시작해서 < 기생충 >과 < 오징어 게임 >으로 그리고 다시 BTS와 청와대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이랑 놀랍도록 유사하다는 걸 느끼지 못하겠어요? JD는 한동안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글쎄요, 그보다는 딸기와 퍼지로 코팅된 쇼트브레드가 들어간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떠오르는군요. 먹고 싶다 벤앤제리. -아니, 저기요. 과거에서 배운다는 말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전세계가 K-문화에 열광하는 지금… 음악 1 ‘Ice Cream as Main Course’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피아노 선율이 들려온다. 자비스 코커와 칠리 곤잘레스의 ‘Ice Cream as Main Course’ 전주다. 갑자기? 나는 주위를 둘러보고, 다시 JD를 바라본다. 어느새 피아노 앞에 앉아 핀 조명을 받으며 건반을 두드리고 있던 JD가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주먹을 꼭 쥔 채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 길을 닦은 사람들입니다 ♪쓰레기로 가득한 오늘날의 거리 말예요 ♪타투 바와 스포츠 바들 ♪당신은 당신이 하는 생각을 들을 수 없죠 ♪그것들이 가라앉으며 내는 잘랑잘랑잘랑 소리뿐 ♪에너지 드링크를 섞은 보드카 한 잔 더 ♪그치만 옛날로 돌아가면 ♪우리도 쿨했었는데 ♪헐리우드의 Musso and Frank’s에서 ♪우리는 메인 코스로 아이스크림을 시켰죠 ♪실크로 된 터번을 쓰고 ♪초코 우유를 마시면서 ♪물론 럼주 한 잔은 옆에 두고서 ... ... ... 노래는 그 후로도 한참이나 이어졌다. 우리는 후렴을 함께 소리높여 합창했고, 아마 어느 부분에서는 눈까지 감았던 것 같다. < 어바웃 어 보이 >에서 휴 그랜트가 그랬던 것처럼. 영상 2 <어바웃 어 보이>의 한 장면 정말이지 나는 뮤지컬 영화를 이해할 수가 없다.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 같다. 하지만 슬프게도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나는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콜라를 본다, 라고 정지돈은 [영화와 시]에서 말했다. 마찬가지로 집에서 영화를 소비할 때는 배스킨라빈스나 벤앤제리스를 보는 거라나 뭐라나. 나는 다른 많은 이름들처럼 벤앤제리스라는 이름도 정지돈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벤앤제리스는 뉴욕주 롱아일랜드 출신의 두 친구 벤 코헨과 제리 그린필드가 1978년 설립한 회사다. 2000년 다국적 기업 유니레버에 매각되었지만 독립적인 운영 방침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벤과 제리는 민주당 대선 경선에 출마한 샌더스를 위해 2016년과 2020년 두 차례에 걸쳐 버니의 열망(Bernie’s Yearning)이라는 한정판 아이스크림을 출시했는데, 민트향 아이스크림을 덮고 있는 얇은 초콜릿 막을 숟가락으로 깨부수고 마구 뒤섞음으로써 상위 1퍼센트가 소유한 부를 99퍼센트에게 골고루 돌려준다는 의미가 있다고 할까요? 벤은 곧바로 이렇게 덧붙였다. 이 아이스크림의 맛을 표현하자면 참여(participatory)의 맛이 난다고 하고 싶군요. 참여하시겠습니까? 깔끔한 폰트와 배색이 돋보이는 벤엔제리스의 홈페이지에는 맛의 무덤이라는 섹션이 있다. 그곳에는 화석 연료(초콜릿 쿠키 조각, 공룡 퍼지 및 퍼지가 물결무늬로 스월된 스윗 크림 아이스크림), 거북이 수프(퍼지로 코팅한 캐러멜 캐슈넛과 물결무늬로 스월된 바닐라 아이스크림), 둔감한 신성(밀크 초콜릿 아이스크림과 화이트 퍼지 우유가 스월된 화이트 초콜릿 아이스크림 그리고 다크 퍼지 우유), 도시의 혼돈(코코넛 아몬드 퍼지 칩과 뉴욕의 슈퍼 퍼지 덩어리가 스월된 초콜릿 아이스크림의 만남 그리고 코코넛 아이스크림과 화이트 및 다크 초콜릿 덩어리, 피칸과 구운 아몬드의 조화), 악랄한 조합(피칸, 아몬드, 건포도와 초콜릿 칩이 들어간 초콜릿 아이스크림) 같은 은퇴한 아이스크림들의 묘비가 전시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쿨 브리타니아의 것도 있다. 그림 1 쿨 브리타니아 묘비 쿨 브리타니아 1995~1998 이 맛은 엄청난 강타자였지만 - & 파울로 아웃되었습니다. 딸기 앤 쇼트브레드 - 독실한 사랑의 조합 하지만 슬프게도 마땅히 누려야 할 명성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즐기기엔 너무 영국스러웠나 봅니다. 말라버린 강둑의 죽어가는 물고기처럼 블러의 베이시스트이자 ‘알렉스 제임스 제공Alex James Presents’, ‘좋은 웨일스 공녀 모드Good Queen Maude’, 그리고 뉴오더의 노래 제목을 딴 ‘블루 먼데이Blue Monday’ 등 빛나는 수상 경력을 자랑하는 다수의 치즈를 생산하는 농장을 경영하고 있는 성공적인 영농기업인 알렉스 제임스는 브릿팝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냐는 다큐멘터리 제작진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브릿팝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제 일부가 죽어요. 이런 식의 사카즘은 영국의 전통문화라고 할 수 있는데, 조너선 스위프트에서 로렌스 스턴, 토머스 드 퀸시, 오스카 와일드, 조지 버나드 쇼, G.K. 체스터턴 등으로 이어지는 두터운 계보(절반 이상이 아일랜드계로 이루어졌다는 게 특히 영국적이다)에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리씨는 자신이 이끌었던 전설적인 밴드 더 스미스의 재결합을 묻는 기자에게 이렇게 대꾸한 바 있다. 스미스라고? 그 이름은 내게 말라버린 강둑에서 죽어가는 물고기를 연상시킬 뿐인데? 브릿팝이요? 그건 그냥 똥처럼 들리는 소리죠. 펄프와 프로젝트 밴드 JARV IS...의 리더이자 최근 웨스 앤더슨의 영화 < 프렌치 디스패치 >와 함께 하는(companion) 샹송 커버 앨범을 발표하며 뜨뜻미지근한 솔로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는 또 한 명의 영국 전통 사카즘 전수자 자비스 코커는 2017년 피치포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런 민족주의적인 아이디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건 깃발을 흔드는 음악 같은 게 아니었어요. 브릿팝이라고 불렸을 때는 정말로 불쾌했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 어떤 대안적인 문화를 전용해서 거기에 유니온잭을 꽂고 크레딧을 모두 가져가려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심지어 다섯 번째 회고록을 출간한 유명인들이 득실득실한 영국의 문화에서는 보기 드물게도 코커의 첫 번째 회고록은 2022년에야 출간된 예정으로, 책소개에 따르면 이것은 자비스의 독특한 삶, 펄프, 20세기 대중문화, 좋았던 시절과 그가 차라리 잊고 싶은 실수라고 말하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다. 일생 동안 축적된 파편들은 글쓰기와 뮤지션십, 퍼포먼스와 야망, 스타일과 연출 기법 등 그의 창작 과정을 보여준다. 이건 인생 이야기(life story)가 아니다. 다락방 이야기(loft story)다. 회고록의 제목은 [좋은 팝, 나쁜 팝Good Pop, Bad Pop]이라고 한다, 세상에. 혼톨로지, 혹은 지나간 미래/도래할 과거의 유령 그림 2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의 한 장면 그러니까 문제는 책이고 음반이고 영화다. 닉 혼비의 소설(책)을 각색한 <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High-Fidelity>(영화)에서 챔피언십 바이닐이라는 이름의 레코드점(음반)을 운영하는 존 쿠색은 말한다. 정말 중요한 건 당신이 어떤 사람이냐가 아니라 당신이 무엇을 좋아하느냐다. 책들, 음반들, 영화들—이런 것들이 중요하다. 날 얄팍하다고 해도 좋다, 하지만 이것이 빌어먹을 진실이다. 블라블라블라. (어디선가 자비스 코커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온다.) ♪나는 내가 깊다고 말한 적 없어, 나는 아주 깊게 얄팍하지 ♪내 지식의 부재는 광대하고, 내 지평은 좁다 ♪난 내가 크다고 말한 적 없어, 똑똑하다고 말한 적도 없지 ♪만약 네가 내 마음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찾기를 기다리고 있다면 영원히 기다려야 할 거야 ♪여어엉원히 말이야 -책들, 음반들, 영화들은 중요하죠.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좋아하는지의 여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JD가 이어 말했다. -음,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요. 책들, 음반들, 영화들이 중요한 건 우리가 그것들을 좋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요. -같은 말 아닌가요? -아니요. 존 쿠색의 말을 생각하세요. 같은 영화에서 쿠색은 화면을 바라보며 이렇게 묻죠. 불행하기 떄문에 음악을 듣는 걸까, 음악을 듣기 때문에 불행한 걸까? 그 둘은 전혀 같지 않습니다. 정지돈에 따르면 그것들이 우리를 매혹하는 이유는 죽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매체는 늘 심령 현상을 전달해왔다고 키틀러는 말했습니다. 라캉에 의하면, 실재계에서는 시체라는 단어조차도 완곡어법이기 때문입니다. 정지돈은 계속해서 키틀러를 인용했다. 1837년 모스 부호가 발명된 후, 영매 강령술자들의 ‘노크를 하는 영혼들’이 망자의 영역에서부터 각자의 메시지를 가지고 즉각 뒤이어 등장했습니다. 또한 사진 건판들이 영혼이나 유령의 모상들을 지체 없이 전달하기 시작했고요. 1878년 에디슨이 ‘북아메리카 리뷰North American Review’에 자신이 최근에 발명한 축음기가 어디에 사용될 수 있을지를 예견했을 때, 그 열 가지 목록 중 하나는 “죽어가는 자의 마지막 말”을 기록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루이 뤼미에르는 영화를 가리켜 죽은 이들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도구에 불과하며 미래 없는 발명품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책은 어떨까요?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 제논이 델포이 신전에서 무엇이 가장 훌륭한 삶인가에 대해 신탁을 청했을 때, 그가 받은 대답은 죽은 이들과 교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필로소피아라기보다는 네크로필리아에 더 가까운 신탁을 듣자마자 고대인의 글을 읽으라는 뜻이라고 이해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컴퓨터로 편집한 자료와 샘플을 구식 신시사이저 음색이나 어쿠스틱 악기와 뒤섞고, 라이브러리 음악과 영화음악에서 영감받아 만들거나 통째로 훔친 모티프를 인더스트리얼 드론과 추상적 노이즈에 엮으며 낭송이나 습득한 소리를 신비한 뮈지크 콩크레트/라디오 드라마풍으로 삽입해서 음악을 만드는 혼톨로지의 전략은 이미 고대에도 존재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편집과 전유, 샘플링과 빙의, 그리고 아카이빙은 최근에야 발명된 게 아니라 기록 그 자체에 이미 전제되어 있는 조건이라는 거죠. 물론 이렇게 말하는 건 사태를 명료하게 만드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지만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거예요. 우리의 영화에도 혼톨로지의 전략을 적극적으로 이용… 과거를 새롭게 상상하는 동시에 미래를 새롭게 기억… 다중적인 시간 축을 동시에 나열… 일종의 피드백 루프를 통해… 어째서일까? 그의 말은 마치 달콤한 자장가처럼 들렸고, 나는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꽤나 길게… 꿈에서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죽은 존재들의 무언의 호소에 민감해지는 게 아닐까,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미래가 과거의 미래, 곧 역사라는 것을 깨달아가는 게 아닐까, 하고 나는 가끔 생각한다. 이론적으로 순수한 선행 기억상실 모든 것은 시간 문제다. 요즘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원고를 마감하는 것도 시간 문제고, 밀린 책을 쓰는 것도 시간 문제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우리의 영화도 마찬가지다. 돈? 물론 중요하지. 그렇지만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그러니까 시간이 있기만 하다면. 시간과 관련된 가장 큰 문제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시간과 관련된 문제는 또 있다. 뭘 보고 듣고 읽고 생각하건 약간의 시간만 흘러도 까맣게 잊혀진다는 사실이다. 정지돈이 말하는 몇몇 고유명사들은 나도 익히 아는 것들이었다. 나는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축음기, 영화, 타자기]를 읽었을 뿐만 아니라 역자 유현주 선생을 모시고 출간 기념 북토크를 진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내용은 내개 전혀 새롭게 들렸다. 혼톨로지? 물론 알지. 사이먼 레이놀즈의 [레트로 마니아]와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물론 혼톨로지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책은 아니지만)을 두어 번은 읽었으니까.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도 읽었다. 반쯤. 나원영과 강덕구가 번역한 마크 피셔의 글들도 읽었고, 큰 상관은 없지만 베리얼의 첫 두 앨범을 최근 LP로 구입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것들은 내게 매번 새롭게만 느껴지는 걸까? 내게 아주 많은 시간이 있다면 책상 앞에 앉아 이것들을 찬찬히 다시 읽어볼텐데. 하지만 나는 시간이 없다 그리고 나는 마감을 해야 한다. 마치 나는 입이 없고 그리고 비명을 질러야 하는 것처럼! 그럴 때면 늘 그렇게 하는 것처럼 몇 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구글링을 하던 나는 시간에 쫓기는 흔들리는 눈으로 검색 결과들을 빠르게 훑어보다가, 내가 찾는 줄도 모르고 절박하게 찾고 있던 것을 발견한다. 유레카. 나는 정지돈에게 전화를 걸어 소식을 전한다. -자, 들어보세요 지돈씨. 혼톨로지 음악 경향의 창작 방식에는 작곡, 연주, 녹음 과정이 생략되어 있고 타인의 음반을 샘플링한 후 이를 편집하고 아날로그 음반의 노이즈를 증폭 혹은 삼입시키는 식으로 창작이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창작 과정은 작곡은 쓰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을 빙의되게끔 허용하는 것의 문제라는 트리키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실제로 [Maxinquaye]는 정해진 구조 없이 트리키 본인의 맘에 든 몇몇 단편적 소리들을 토대로 만들어졌고… 생략… 또 생략… 이음매에서 어긋난 시간 속에 마구잡이로 뒤섞인다… 어때요, 제가 여기서 어떤 아이디어를 차용했는지 알겠어요? -빙의라도 하시려는 건가요? 홍상수에? -아니요, 근데 좋은 아이디어이긴 하네요. 그건 일단 키핑 해둘게요. 제가 꽂힌 구절은 이거에요. ‘정해진 구조 없이’ ‘본인의 맘에 든 몇몇 단편적 소리들을 토대로’ ‘이음매에서 어긋난 시간 속에 마구잡이로 뒤섞인다’… 저는 이게 이번 원고뿐만 아니라 우리 영화의 방법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고, 구태여 매끈하게 만들려고 애쓰지도 않고, 우리가 좋아하는 단편들로만 채우는 거죠. 장면들, 인물들, 대사들, 장소들, 소리들, 작은 이야기들. 그러니까 고다르가 언젠가 자신의 영화에서 한 인물이 단순히 여기에서 저기에서 이동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길을 걷는 장면을 찍고 싶지는 않다고 말한 것처럼요. 대신 우리는 그걸 다른 사람들의 작업에서 가져오는 거고요. -그게 뭐지? 어떤 건지 잘 와닿지 않는데요. -그러니까 이렇게 하는 거예요. -어떻게요? -이렇게 하는 거라니까요. -??? -바로 이렇게요! (다음 회에 계속) *이 글은 다음 글들의 크고 작은 부분들을 조합해서 만들어졌다.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감기도령, 문피아, 2021) [참을 수 없는 가우초](‘크툴루 신화’)(로베르토 볼라뇨, 이경민 옮김, 열린책들, 2013) [영화, 축음기, 타자기](프리드리히 키틀러, 유현주.김남시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9) 'Ice Cream as Main Course'(Jarvis Cocker and Chilly Gonzales) [영화와 시](정지돈, 시간의흐름, 2020) ''민주적 사회주의자'의 아이스크림, 무슨 맛?'(오마이뉴스) 'Tony Blair was worried Oasis would trash Downing Street'(NME) 'Noel looks back in anger at drinks party with Blair'(The Observer) <디스 이즈 팝>(S01XE05)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The 50 Best Britpop Albums'(Pitchfork)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스티븐 프라이스, 2000) <레트로마니아>(사이먼 레이놀즈, 최성민 옮김, 워크룸프레스, 2017) <영화는 무엇이 될 것인가? 영화의 미래를 상상하는 62인의 생각들>(전주국제영화제 엮음, 프로파간다, 2021) <역사, 끝에서 두 번째 세계>(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2012) '크래클의 형이상학- 아프로퓨처리즘과 혼톨로지'(마크 피셔, 420 옮김, 네이버블로그 '좋습니다') '레이브 이후의 런던'(마크 피셔, gkd 옮김, 네이버블로그 'K-atacccombb') '트릭놀로지의 유령들'(이엔씨, 포스타입 '알 수 없는 평론가들') <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할란 앨리슨, 신해경.이수현 옮김, 아작, 2017)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저항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우리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엄청난 수의 영화들을 소비하며 살고 있었다. 그 정점은 2019년이었다. 2019년 한국 영화 및 해외영화 제작/수입 편수는 총 2,207편, 이 중 1,740편이 개봉했고, 다시 이 중에서 647편이 실제 극장에 걸렸다. 대략 하루에 5편의 영화가 어떤 식으로든 새롭게 공개되고 매일 1.8편의 영화가 실제로 극장에서 개봉한 셈이다. 여기에 프리미어 상영 원칙을 가지고 있는 국고 지원 7대 국제영화제에서 2019년 한 해 동안 상영한 영화는 장편, 단편 합쳐 총 1,432편. 이외의 상당수의 작은 영화제들과 다양한 상영회들도 프리미어 영화나 국내 미개봉작들을 상영하곤 하니 이런 식으로 공개된 새로운 영화까지 다 합하면 이미 셀 수 없을 지경이다. 더구나 넷플릭스, 와챠 등의 OTT 플랫폼을 통해 공개되는 오리지널 영화들과 독점 공개작까지 더하면 우리는 이미 평생을 봐도 다 볼 수 없는 영화 더미 속에서 살고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그런데 올해 2월부터 갑자기 상황이 달라졌다. 코로나19는 영화산업과 극장, 극장과 관객이 만나는 길목을 틀어막고 누구도 쉽게 오갈 수 없게 만들었다. 관객은 극장에 가는 걸 꺼리고, 관객이 없으니 개봉하지 못하는 영화들이 점점 많아지고, 개봉 영화가 없어서 관객이 극장을 찾질 않은 악순환은 수개월째 반복되고 있다. 영화제 역시 대부분 축소 또는 온라인으로 운영되면서 상영작 수도, 참여 관객 수도 확연히 줄었다. 산업 구석구석에 이익을 분배하며 순환하던 영화산업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둔해졌고, 겨울과 함께 3번째 대유행이 시작되자 산업은 거의 멈출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던 고통 섞인 신음소리는 더 커졌다. 그러나 IT 기술과 자본을 기반으로 전통의 극장산업과 경쟁하던 OTT 플랫폼만은 이 와중에도 홀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여주고 있다. 순환이 멈추고 산업과 극장이 위험에 처하자 사람들은 갑자기 그동안 별로 상상해본 적 없었던 극장의 죽음에 대해, 극장과 영화의 상관관계에 대해, 그리고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모두가 영화산업과 영화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 지금은 명백히 극장을 기반으로 하는 영화산업의 위기다. 그러나 지금이 영화의 위기인가? 지난 10년간 영화산업은 일정한 틀에 맞춘 비슷비슷한 영화들을 양산하고 있었고, 극장은 모든 영화를 똑같이 대한 적이 없었다. 독립예술영화는 스스로 순환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영화계 전반에 걸친 불평등의 문제는 사회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최근 몇 년간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난 2월 이후 코로나19로 초토화되어버린 극장을 지킨 태반의 영화는 산업과 자본이 만든 상업 영화들이 아니라 극장이 평소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독립예술영화들이었다. 코로나19가 촉발시킨 산업의 위기는 손해 보는 걸 견디지 못하는 산업이 자초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무렵 다시 떠오른 질문. 지금이 영화의 위기인가? 다큐멘터리 전문 계간 웹진 <DOCKING>의 2020년 겨울호에는 지난 11월 6일 세상을 떠난 아르헨티나의 영화감독 페르난도 솔라나스를 기억하는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씨의 글이 실렸다. (http://www.dockingmagazine.com/contents/21/177/) 이 글의 일부를 공유한다. 1970년 글라우버 로샤, 장 마리 스트라우브, 미클로스 얀초, 사이먼 하르톡이 로마에서 만나 정치 영화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이 자리에서 하르톡은 로셀리니가 '영화는 죽었다'는 말에 동의하는지를 물었고, 장 마리 스트라우브는 이렇게 대답한다. “산업이 사라지면 영화가 시작됩니다. 기다리고 있지만, 우리는 20년은 더 기다려야 할 겁니다.” 이어지는 글라우버 로샤의 대답: “내 생각에 위험한 것은 바로 산업의 원리인 것 같습니다. 영화는 생산과 소비의 시스템에 의존하는 유일한 예술 활동입니다. 왜냐하면 돈이 들기 때문에, 시나 소설을 인쇄하기 위해 편집자가 필요하더라도, 반면에, 각본은 출판될 수 없기 때문에, 회전하지 않으면 시장 가치가 없습니다. 오늘날 영화제작자가 겪는 어려움은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1970년 혈기 넘치던 최고의 청년 감독들이 통찰한 영화와 영화산업 사이의 모순은 20년 하고도 30년을 더 기다렸지만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코로나19는 지금 영화산업이 처한 위기의 결정적 요인이 분명하지만, 근본적인 요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 누군가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가 도래하면 상업 영화 만이 살아남지 않겠냐는 어두운 전망을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는 1895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후 지난 125년간 끊임없이 위기를 겪어왔다. 그 위기는 대부분 신기술과 자본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지만 창작자들은 매번 실패를 반복하며 그 위기를 극복했다. 지금의 이 위기 역시 누군가에겐 절망의 시간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기회의 시간일 것이다. 산업의 지형도가 달라질 순 있겠지만 영악한 지금의 산업이 쉽게 폐허가 될 리 없고,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어떤 영화든 예외 없이 산업일 뿐 아니라 창작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어떤 영화는 폐허 속에 묻히겠지만, 어떤 영화는 살아남아 계속될 것이다. 따라서 모두가 위기라고 생각하는 지금, 우리는 산업이 아니라 창작자들을 지켜내는 데에 더 집중해야 한다. 올해의 사사로운 리스트에는 일 년 내내 머리 속에 가득했던 이런 생각들과 함께 골라낸 영화들을 담았다. < 공포분자 >(1986), <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2020), < 라이트 하우스 >(2019), < 바쿠라우 >(2019), < 분화구의 두 사람 >(2019), < 애틀란틱스 >(2019), < 언컷 젬스 >(2019), < 트랜짓 >(2018), < 퍼스트 카우 >(2019), < 휴가 >(2020). 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영화들의 리스트이며, 산업의 징후 같은 영화이거나 산업이 없으면 만들어지지 못했을 영화이거나 산업 같은 거 없어도 얼마든지 생명력을 이어갈 영화의 이름들이다. 리스트를 만들다가 다른 분들이 소개하지 않을 것 같아 자세하게 소개하고 싶어진 영화가 두 편 있었다. 첫 영화는 아라이 하루히코의 <분화구의 두 사람>. 이상한 제목을 가진 이 영화는 인간의 육체와 사랑을 말랑말랑하고 끈적이게 담아내면서도 인간의 내면을 잘 들여다보고 있었다. 기묘하게 자유로웠고, 기묘하게 공허했으며, 기묘하게 시대의 공기를 담아내며 공감을 이끌어냈다. 언젠가 조금 더 자세하게 소개할 기회를 만들어볼 생각이다. 또 하나의 영화는 클레버 멘도사 필루와 줄리아노 도르넬레스가 공동으로 연출한 브라질 영화 <바쿠라우 Bacurau>다. 이 기묘한 영화에 처음 관심이 갔던 건 클레버 감독이 연출한 두 편의 전작 < 네이버링 사운즈 >(2012)와 < 아쿠아리우스 >(2016) 때문이었다. 사실 <바쿠라우>는 클레버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이자, 줄리아노 감독의 장편데뷔작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함께 일해온 영화적 동료로서의 두 감독의 관계(줄리아노는 클레버 감독의 전작들에서 프로덕션 디자인은 전담했다)와 클레버 감독의 전작들과 연결되는 영화의 세계관을 고려하면 <바쿠라우>는 실질적으론 클레버 감독의 영화라 해도 무방하다. 영화는 내 예상과 달랐지만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싶어진 건, 피칠갑을 한 이 영화가 지난 몇 년간 봤던 몇몇 중요한 장르 영화에서 발견한 징후와도 같은 특징-가장 파괴적이고 상징적인 형태로 정치적 사안에 대해 발언할 수 있는 장르 영화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쿠라우>는 <기생충>이 작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을 때, <레 미제라블>과 함께 공동으로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았다. 브라질의 정치적 이슈 때문에 칸영화제 기간 꽤 화제가 되었고, 쟁쟁한 경쟁작들을 제치고 결국 큰 상을 받았기 때문에 <기생충>과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작년과 올해 훨씬 더 화제를 되었을 영화였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올해의 베스트 영화 리스트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하는 요즘, <바쿠라우>는 각종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며 다시 회자되고 있다. <바쿠라우>를 연출한 클레버 멘돈사 필루는 최근 10년간 등장한 남미 출신의 가장 주목할만한 감독 리스트를 만들 때 가장 위쪽에 놓을 수 있는 몇 개의 이름 중 하나다. 남미 출신 감독으로는 2016년 이후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그것도 두 번이나. 1968년생. 올해로 53세다. 20대 중반부터 단편 작업을 하며 영화평론가와 영화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그의 모든 장편영화의 오프닝에서 볼 수 있는 CinemaScopio는 자신의 제작사 이름이지만 평론가 시절 만든 자신의 홈페이지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45세가 되던 2012년, 첫 장편데뷔작 <네이버링 사운즈>를 연출했다.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첫 공개된 이 영화는 국제영화평론가협회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 평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4년 후에 완성한 두 번째 장편영화 <아쿠아리우스>는 2016년 칸영화제 경쟁 부문으로 직행했다. 여우주연상의 강력한 후보였지만 수상의 기쁨을 누리진 못했다. 그러나 2016년 전 세계 거의 모든 베스트 영화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며 정식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지 4년 만에 전 세계 영화계와 평단에 자신의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그리고 다시 3년 후 세 번째 장편영화 <바쿠라우>를 완성했고, 다시 한번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대받았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바쿠라우’는 브라질의 오지에 있는 가상의 지명이자 마을의 이름이다. 이 마을에는 다양한 인종, 연령, 성향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작은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다. 이 공동체를 이끌던 고령의 흑인 여성 리더 카르멜리타가 세상을 떠나자 마을 사람들은 함께 장례식을 치른다. 식이 끝나자 마을 주변에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지역 정치인의 무능으로 진작에 수도가 끊긴 바쿠라우에 물을 나르던 물탱크 트럭이 총격을 받고, 통신 장애가 발생하고, 인터넷 지도에서 바쿠라우가 사라지더니, 느닷없이 낯선 외지인들과 함께 원반 형태의 드론이 목격된다. 이 모든 일은 지역 정치인의 사주를 받고 중무장한 미스터리한 백인 일당이 저지른 일이다. 이들은 마치 사파리에 가서 돈을 주고 사냥을 즐기는 관광객처럼 보인다. 차이가 있다면 이 사냥의 대상이 동물이 아니라 사람일 뿐이다. 선발대를 보내 마을을 살펴본 이들은 별 죄책감 없이 게임을 즐기듯 바쿠라우를 습격하여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려 한다. 위기를 감지한 바쿠라우 주민들은 도망자인 트랜스젠더 룽가를 중심으로 함께 힘을 모아 외부에서 온 잔인한 이방인들을 처단하고 결국 삶의 터전을 지켜내는 데 성공한다. 사실 ‘바쿠라우’는 노예제도가 존재했던 17세기 브라질, 농장에서 도주한 노예(시마론 Cimarron)들이 건설한 공동체 마을 ‘낄롱부 Quilombo’를 연상시킨다. 낄롱부를 건설한 시마론들은 생존을 위해 외부와 단절하고, 내부를 결속시켰다. 때때로 노예들의 도주를 돕거나 농장을 습격하기도 했다. 현재 브라질에는 2천 개가 넘는 낄롱부 형태의 공동체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영화 속의 ‘바쿠라우’는 ‘리믹스된 낄롱부 remixed quilombo’라고 할 수 있다. ‘바쿠라우’가 낄롱부에서 영감을 얻어 창조된 공간이라는 건 주민들이 밤에 모여 희생자를 추모하며 브라질의 전통 무예인 카포에이라를 추는 장면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백인, 원주민, 흑인, 트랜스젠더 등으로 이루어진 주민들은 이 의식을 통해 저항의 역사를 공유하고 새로운 싸움을 준비한다. 그렇게 ‘바쿠라우’는 가난하지만 존엄한 공동체, 저항의 역사적 공간으로 변모한다. 클레버 감독은 이 장면에서 <더 워드>(2010) 이후 음악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존 카펜터의 인더스트리얼 뮤직 ‘Night’를 그대로 활용한다. 그리고 이 음악의 뮤직비디오에서 백인 일당의 시각적 이미지를 차용한다. 공포 영화의 거장에 대한 이같은 오마주는 이 영화가 어떤 장르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바쿠라우>는 마치 민족지 영화처럼 가상의 역사적 공동체가 놓인 지리적 환경과 주민들의 일상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영화의 1/3지점부터 장르 영화의 조짐을 보이더니 중반에 접어들면서 SF, 스릴러, 호러, 웨스턴 등 온갖 장르가 뒤섞이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스파게티 웨스턴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적 배경(선인장, 말, 총, 인종차별적 악당) 속에서 마지막까지 긴장과 힘을 유지하며 정부의 무능과 부패, 식민주의의 모순 같은 정치적 주제까지 그 세계를 점차 확장해 나간다. 점점 피범벅으로 변해가는 이 영화에서, 잔혹한 폭력은 약자의 생존과 권리가 위협받을 때 권력과 힘에 저항하여 공동체를 지켜내는 필수 도구로 묘사된다. 앞에서 언급했듯 장르 영화는 기본적으로 가장 파괴적인 형태로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있고, 평론가 출신의 클레버 감독은 이런 장르의 관습과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다. 종종 이 영화를 설명하면서 ‘디스토피아적 웨스턴’이라는 수식어가 붙고, 유사한 장르 영화나 타란티노의 몇몇 영화들의 이름이 먼저 떠오르는 이유다. 그러나 <바쿠라우>는 물론 장르적 쾌감으로 가득한 장르 영화지만 오히려 장르의 전통과 관습을 최대한 활용하여 완성한 강력한 정치 영화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정치 영화는 부조리한 현실을 바탕으로 한다. 2019년 브라질의 남동부 리우데자네이루의 주지사는 범죄자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무장 요원과 스나이퍼들을 시내 빈민가에 은밀하게 배치하여 비판을 받았다. 2018년 10월 브라질 대통령으로 당선된, ‘남미의 트럼프’로 불리는 극우 정치인 자이루 보우소나루는 경찰이 더 많은 범죄자를 사살해야 한다면서 범죄자들을 재판 회부보다는 약식 처형(총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BBC의 보도에 따르면 브라질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한 시민들의 숫자는 2019년 한해에만 하루 평균 5명, 총 1,810명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쿠라우>가 담으려고 하는 건 동시대 브라질의 이러한 현실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현실을 은유적으로 담아내면서 비판을 멈추지 않는다. 영화의 시점을 ‘지금으로부터 몇 년 후’로 설정하여 ‘영화 속 현실이 곧 다가올 실제 현실과 별다를 게 없다’는 강한 경고의 메시지를 담아내는가 하면, 무능하고 부패한 지역 정치인 토니 주니어와 그의 사주를 받은 잔인한 백인 그룹을 통해 브라질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한다. 영화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잔혹한 복수극으로 영화를 끝낸 다음 마지막 엔드 크레딧이 올라가기 직전 검은 화면 위로 3줄로 된 자막이 뜨는데, 이런 문장이 쓰여 있다. “이 영화는 800개 이상의 일자리와 함께 국가와 문화, 산업의 정체성을 직간접적으로 창출했습니다.” 과거 국책영화에서나 볼 법한 이 낯선 문구는 건조하고 단정하게 씌여있지만 칸영화제가 개최되기 약 4개월 전에 열린 다보스 포럼에서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한 연설에 대한 감독의 답변이자 풍자이며 냉소의 표현이다. 그렇다고 <바쿠라우>가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프로파간다식의 정치영화는 아니다. 클레버와 줄리아노의 방식은 훨씬 정교하고 유희적이며 영화적이다. 그들은 정치적 메시지를 담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구축된 영화적 서사를 중심에 두고 다양한 장치를 통해 정치적 의미를 창조해낸다. 특히 클레버 감독은 과거의 시간이 축적되고 압축된 공간을 영화적 공간으로 활용하는 데 능하다. 장편 데뷔작 <네이버링 사운즈>는 감독의 고향인 헤시피의 한 중산층 동네를 배경으로 한다. 동네 건물의 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지주 프란치스코와 그의 조카 주앙을 중심에 두고 동네의 안전을 위해 사설 경비 업체가 들어오면서 생기는 마을의 미세한 변화를 담는다. 이 영화에서 쇠창살과 철제 대문, 감시 카메라와 사설 경비원 같은 현대적 안전장치들로 대표되는 기술적 모더니티는 이웃의 접근을 차단하고 중산층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한다. 물론 이 동네는 피로 물든 식민주의 역사의 산물이다. 폐허가 되어버린 과거의 공간, 피로 물든 폭포 속에 선 지주의 후예인 주앙의 모습, 그리고 역사적 피해자의 후손과 지주와의 직접 대면하는 장면은 감독이 담아내고 싶었던 정치적 의미를 극적으로 창조해낸다. <아쿠아리우스>의 핵심 공간인 주인공의 오래된 빌라도 마찬가지다. 음악 평론가 클라라는 지속적인 철거의 위협 속에서도 과거의 기억이 켜켜이 쌓여있는 집을 자본가에게 내주지 않기 위해 싸운다. 문화와 역사의 아이콘인 클라라의 고집과 싸움은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역사를 지키려는 저항과 투쟁의 몸짓인 셈이다. 영화는 유려하게 과거와 현재, 클라라의 집과 외부를 오가며 이 모든 걸 담아낸다. 클레버 감독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영화의 핵심이 되는 공간의 실제 과거 사진을 활용하여 자신의 영화적 의도를 더욱 명확하게 드러낸다. <네이버링 사운즈>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헤시피의 옛 지명 페르남부쿠에 살았던 당시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흑백사진을 연달아 보여주는 시퀀스로 시작하고, <아쿠아리우스>는 오버헤드숏으로 찍힌 해변 도시 헤시피의 과거의 모습 - 보아비아젱 해변의 모습과 오래된 차들로 가득한 길게 뻗은 거리, 거대한 고층 건물이 슬럼가를 대체하는 부감 쇼트의 흑백사진들을 연달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바쿠라우>에서는 마을의 작은 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있는 과거 사진들과 리더 카르멜리타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여준다. 특히 <바쿠라우>는 공간의 지리적인 면을 중요하게 다루는데, 우주의 인공위성에서 남미, 브라질, 바쿠라우로 하강하며 좁혀들어오는 오프닝숏은 로컬리티가 고스란히 담긴 공동체를 세계의 중심, 서사의 중심에 놓고자 하는 감독의 의도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네이버링 사운즈>에서 시작되어 <아쿠아리우스>를 경유한 다음 <바쿠라우>로 수렴된 클레버 멘돈사 필루와 줄리아노 도르넬레스의 세계는 시간이 축적된 영화적 공간을 통해 부조리한 현실과 함께 역사를 소환한 다음, 강력한 저항을 촉구한다. 이 세계는 영화적 전통과 관습, 현실의 로컬리티와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가 정교하게 뒤섞여 있으며, 무엇보다 변하지 않는 기존 부조리한 질서에 대한 저항만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믿음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뜻밖에도 이 세계는 1970년 브라질의 선배 감독 글라우버 로샤가 가졌던 영화산업의 모순과 산업 논리가 가진 위험성, 이를 극복해야 하는 영화제작자의 숙명에 대한 문제의식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계승하고 있으며, 코로나 시대가 영화산업과 영화에게 던지는 질문과도 그 맥이 닿아있다. 저항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리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항하지 않으면 세상은 어떤 답변도 알아서 내놓지 않는다. 따라서 장르 영화의 전통 속에서 저항과 투쟁으로 스스로를 구원하는 과정을 담아낸 <바쿠라우>는 다시 한번, ‘저항만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선언과도 같은 이 문장이 명제가 아니라 믿음이 되어야 하고, 우리의 삶은 그 믿음의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