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티댄싱
- 감독
- 에밀 아돌리노
- 제작년도
- 1987
- 출연
- 제니퍼 그레이, 제리 오바치, 패트릭 스웨이즈, 신시아 로데스, 잭 웨스톤, 제인 브러커, 켈리 비솝, 로니 프라이스, 맥스 캔터, 찰스 호니 콜스, 닐 존스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위 사진 클릭 시 유튜브 인터뷰 영상으로 이동) 낙원상가와 함께 탄생한 극장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 256(서울 종로구 삼일대로 428)에 위치한 낙원상가는 1960년대 후반 서울시 도시 계획의 일환으로 지어졌다. 1969년 아파트와 상가가 공존하는 지상 15층 규모의 주상복합건물이 완공됐을 때 볼링장, 당구장, 다방, 캬바레 등 다양한 상가가 입점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허리우드 극장은 낙원상가 4층에서 영업을 시작했다. 개관 당시의 운영주체는 고 신상옥 감독의 영화사였던 신필름이었다. 낙원상가는 서울시 도시 계획으로 건축된 1세대 주상복합건물 중 하나로 1967년 10월 완공됐다. 지금도 남아있는 건물의 현판에는 ‘낙원삘딍’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당시 서울시는 종로구에 대규모 건물을 지을 만한 넓은 대지가 없다고 판단하여 4차선 도로 위에 지상 15층 규모의 건물을 올리는 독특한 건축 방식을 선택했다. 그 결과 낙원빌딩 1층은 주차장과 신호등, 건널목까지 있는 4차선 도로가 됐다. 이는 도로 관련법 체계가 완비되지 않았던 시절에 준공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며, 지금은 공공도로 위에 민간업체가 건축물을 짓는 일이 불가능하다. 지금까지 낙원빌딩의 지분을 소유한 법인이나 개인은 토지세가 아닌 도로 점용료를 내고 있다. 1970년대 말까지 낙원상가는 다양한 상가와 아파트가 공존하는 복합문화공간의 성격을 유지했지만, 1979년 탑골공원 정비 사업 이후 다수의 악기 점포들이 들어오면서 악기전문상가로 특화되기 시작했다. 2000년대 도심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한때 철거 위기에 놓이기도 했지만 건물의 상징성을 인정받아 2013년 서울 미래유산으로 등재됐다. 씨네필의 메카였던 때 1980년대 강남이 개발되기 이전까지 낙원상가는 서울시민들이 여가를 즐기기 위해 찾는 인기 명소였다. 영화 애호가들과 음악인들이 찾는 중심지로 호황을 누리던 허리우드 극장은 1980년대 강남 개발 사업이 시작되고 1990년대 멀티플렉스 극장이 생겨나면서 쇠퇴하기 시작한다. 1997년 기존 2000여석 규모의 개봉관을 레드, 블루, 그린 3개관으로 분리하며 시대의 변화를 적응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대형 극장의 몸집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허리우드 극장은 예술영화관 전용관에 장소를 임대하는 곳으로 공간의 성격을 바꾸기 시작했다. 2005년 4월 필름포럼과 서울아트시네마가 나란히 낙원상가로 자리를 옮기면서 허리우드 극장은 ‘시네필을 위한 전당’으로 재탄생하게 됐다. 서울아트시네마는 사단법인 한국시네마테크협의희가 위탁 운영하는 시네마테크 전용관이며, 2002년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문을 열었다가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영화사 이모션픽쳐스의 대관으로 운영됐던 필름포럼은 기존 허리우드 극장 3개관 중 2개관을 임차하며 각각 480석과 300석의 규모를 자랑하는 예술영화관이 됐다. 당시 기획·운영은 임재철 영화평론가가 맡았다. 필름포럼은 2008년 4월 이화여대 후문으로 이사했고, 서울아트시네마는 2015년 3월까지만 낙원상가 내에서 운영되다가 계약이 만료되어 인근 서울극장으로 위치를 옮겼다. 실버세대를 위한 영화문화의 공간으로 허리우드 극장 입구의 돼지국밥 골목 인사동 거리와 탑골공원에 인접한 허리우드 극장은 젊은 층과 외국인 관광객, 노인 인구에게 모두 접근성이 높다. 따라서 서울아트시네마가 계약을 맺었던 2015년까지 예술영화를 즐기는 젊은 시네필이 방문하기에 어렵지 않은 곳이었다. 2009년 개관한 실버영화관 역시 노인 인구가 높은 인근 거리 일대와 시너지 효과를 내며 지속 가능한 매출을 올리고 있다. 2016년 8월에는 육의전 빌딩부터 낙원상가까지 이어지는 ‘송해길’이 만들어졌다. 낙원동에서 오래 활동했던 고 송해 선생의 이름을 딴 것이다. 낙원상가 입구에는 저렴한 가격을 자랑하는 돼지국밥 식당들이 줄지어 있어 이곳의 오랜 역사와 함께 하고 있다. 돼지국밥 골목 옆 낙원상가 입구 계단 현재 허리우드 극장은 ‘낙원악기상가’로 명칭을 변경한 건물 4층에서 임차 형태로 개별 극장에게 공간을 내주고 있다. 극장 앞에 위치한 광장은 허리우드 극장 시절부터 각종 공연 및 행사가 열렸던 공간이다. 현재는 노인들을 위한 쉼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작은 정원으로 인테리어를 바꿨다. 현재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허리우드 클래식-실버영화관’을 운영하는 ㈜추억을 파는 극장은 2009년 1월 이곳에 문을 열었다. 바로 옆에 자리한 낭만극장은 서울아트시네마가 떠난 자리에 2015년부터 영업을 시작했다. 필름포럼이 이사한 후 공연장으로 활용되던 기존 허리우드 극장의 상층, 낙원상가 5층에 해당하는 공간은 현재 ‘모두의 극장’이란 이름으로 추억의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곳으로 자리 잡았다. 허리우드 극장 입구의 정원 실버영화관을 운영하는 ㈜추억을 파는 극장에 소속된 직원의 90% 이상은 노년층이다. 오전, 오후 그리고 주 3일 로테이션으로 업무를 분담하고 있다. 사회적 기업으로 선정되어 고용노동부로부터 60대 이상 노년층을 채용하고 사회공헌 일자리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지원을 받고 있다. 실버영화관과 낭만극장 야외매표소 ※ 5층은 공연장인 "모두의 극장"으로 활용 중 인터뷰: 김은주 대표(추억을 파는 극장 대표, 헐리우드 클래식-실버영화관 운영) 실버영화관을 운영 중인 (주)추억을 파는 극장 김은주 대표 임수연 _낙원상가에 실버영화관과 낭만극장이 입주하게 된 계기를 설명해주세요. 김은주 _원래는 필름포럼과 서울아트시네마가 있었는데, 필름포럼이 먼저 이사를 한 뒤 그 자리에 제가 하는 ㈜추억을 파는 극장이 들어오게 됐어요. 서울아트시네마가 이사를 한 뒤에는 낭만극장이 입주했습니다. 현재는 ㈜추억을 파는 극장에서는 영화관을, 낭만극장에서는 영화관 1개관과 공연장을 운영합니다. 처음 극장을 대관하게 됐을 땐 젊은 사람을 대상으로 해야 하나,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해야 하나 고민이 있었어요. <더티 댄싱> <영웅본색> <미션> 이런 옛날 영화들을 상영을 해볼까 해서 왔는데, 사실 젊은 친구들이 많이 올 줄 알았는데 노인 관객들이 대거 오시는 거예요. 그때 그분들이 옛날 영화를 갈망하는 눈을 봤고, 그 눈을 제가 뿌리칠 수 없었어요. 여러 조건이 맞아 떨어져서 2009년 1월 실버영화관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임수연 _실버영화관과 낭만극장의 관계는 어떻게 되나요. 김은주 _낭만극장 대표님은 2013년 관객으로 처음 만났어요. 은행에서 오래 일을 하시고 퇴직한 직원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사업을 고민하시길래 실버영화관과 같은 결을 갖고 있는 극장을 운영해보시라고 제안드렸어요. 그래서 2015년 서울아트시네마가 떠난 자리에 낭만극장이 문을 열게 됐습니다. 실버영화관이 영화만 상영한다면, 낭만극장은 영화도 상영하고 공연도 합니다. 실버영화관은 7~80대를 대상으로 상영한다면, 낭만극장은 그보다는 젊은 영화들도 틀어요. 그래서 낭만극장에서는 도전해볼 만한 영화들도 틉니다. 저희가 히트했던 대작 위주로 진행한다면, 낭만극장은 ‘오드리 헵번’전, ‘존 웨인’전, ‘윌리엄 웰먼’ 특집전 같은 기획전 위주로 프로그램을 짭니다. 실버영화관(좌)과 낭만극장(우) 입구 임수연 _실버영화관의 상영 프로그램은 어떻게 결정되나요. 김은주 _자신이 보고 싶은 영화를 종이에 써서 집어넣는 함이 있어요. 이를 토대로 저작권이 협의된 작품들을 추립니다. 아직은 이 시장의 저변이 확 넓어진 건 아니기 때문에 마니아성 영화보다는 대중적이고 보편적으로 노년층들이 좋아하는 <벤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유명한 작품들이 주로 언급됩니다. 임수연 _공간 인테리어 측면에서 어떤 부분을 신경 쓰고 있습니까. 김은주 _코로나 이전에 가장 심각했던 문제는 미세먼지였어요. 전 시대에 비해 폐렴으로 돌아가시는 노인들이 상당히 많아요. 그만큼 미세먼지에 굉장히 취약하다는 거죠. 실버영화관도 미세먼지 문제를 해결하고자 정원과 같은 극장을 만들려고 했어요. 노인을 위한 극장이라고 초라하고 허름할 것이라는 선입견에서 벗어나는 거죠. 영화뿐만 아니라 노인들의 삶의 질도 윤택하게 할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식물들로 장식된 4층 로비 벽면 임수연 _이곳을 찾는 노년 관객들의 성향은 어떤가요. 김은주 _눈을 뜨면 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게 되게 행복하신가 봐요. 부산에서 표를 끊어 올라오셔서 굳이 티켓까지 보여주시면서 “자리가 없으면 서서 볼 거다” 라고 하세요. 여기 오시는 분들은 극장 매표소에 있는 박스에 사식 넣듯 자꾸 초콜릿, 과자 같은 것을 집어넣으세요. 어떤 날은 집에서 재배했다면서 감자를 엄청 삶아갖고 오시고, 사과나 곶감을 보내시기도 해요. 일반 극장은 관객과 소통할 일이 없는데 저희는 관객과 쌍방향 소통을 상당히 많이 한다는 게 굉장히 독특하죠. 실버영화관 내부 코로나로 인해 격석으로 좌석을 앉을 수 있도록 했다 임수연 _실버영화관에서 일하는 직원 규모는 어느 정도 되나요. 김은주 _㈜추억을 파는 극장에는 30명의 직원이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그중 10% 미만이고 나머지는 다 노인 분들이에요. 병원도 가셔야 하고 스케줄이 많아요. 그래서 오전과 오후, 그리고 주 3일 로테이션으로 업무를 나누느라 많은 사람들이 근무를 하게 됐어요. 또 저희가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사회적 기업으로 선정됐어요. 고용노동부에서 60대 이상 경험자들이 현장에 파견 나가 일을 할 수 있게끔 돈을 주고 지원하는데, 그렇게 사회공헌 일자리로 일을 하시는 분들도 있죠. 임수연 _상영환경에 대해 설명을 해주신다면? 김은주 _아쉬운 건 필름으로 계속 상영을 하고 싶지만 전 세계적으로 필름이 공급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필름으로 영화를 틀지 못하는 게 아쉬워요. 다행인 건 필름의 거의 마지막 시대에 가장 좋은 필름으로 고전 명작을 많이 구입했어요. 만약 <사운드 오브 뮤직>을 상영한다면 저희가 갖고 있는 거의 원판에 가까운 필름으로 트는 게 가장 화질이 좋을 거예요. 필름비는 한편당 500만원, 번역과 통관까지 합치면 1000만원 이상 드는데 2004~2005년쯤 작품을 대거 구입했습니다. 실버영화관 영사실 내부와 영사기 임수연 _앞으로 이 공간이 사람들에게 계속 기억되기 위해서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요. 김은주 _예산 지원이 뒷받침돼야 하지 않을까요. 실버영화관이 멀티플렉스는 아니지만 멀티 플레이어로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와 함께 했던 영화 키드 세대가 지금은 노인 세대가 됐어요. 이분들이 좀더 품격 있는 노년을 맞게 하기 위해서는 문화가 친구가 돼서 항상 곁을 지켜줘야 해요. 어려운 것부터 가는 게 아니라 생활 속에서 즐겁게 시작할 수 있는 시도를 해 나가려고 해요. 극장이 사라지면 안 되기 때문에 영진위에서 다양한 예산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김종준 대표(낭만극장 운영) 낭만극장 김종준 대표 임수연 _대표님은 과거 허리우드 극장에 대한 추억이 있을 법한 세대입니다. 그 기억이 낭만극장을 운영하는데 영향을 미쳤나요. 김종준 _제가 62학번입니다. 60~70년대에는 영화를 관람하는 게 제일 좋은 취미였습니다. 데이트를 하거나 친구들을 만날 때도 영화 보는 게 제일 큰 행사였죠. 500원, 1000원이면 영화도 보고 불고기도 먹을 수 있었죠. 그때 기억 때문에 영화도 지금까지 좋아하는 거예요. 어느덧 저도 늙었으니까, 노인들의 행복을 위해 아지트를 만들고 외로움을 덜어드리고자 낭만극장을 열었습니다. 임수연 _실버영화관과 낭만극장의 프로그램은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김종준 _차이는 없어요. 코로나19 전에는 관객이 1500~2000명씩 왔어요. 한 극장에서 프로그램 한번 할 때 3~4일 정도 상영하거든요. 여기 오는 관객들은 오늘은 낭만극장에서, 내일은 실버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식으로 하다 보면 일주일에 영화를 4~5편 봐요. 그래서 시너지 효과가 좋아요. 내가 영화관에 가야 사는 것 같다고도 하시고요. 서대문의 청춘극장도 김은주 대표가 맡고 있는데, 거기까지 티켓 2000원으로 서울시로부터 위탁을 받아서 영화를 틀고 있습니다. 임수연 _낭만극장과 공연장을 함께 운영하고 계세요. 5층은 언제부터 공연장으로 만드신 건가요. 김종준 _2년 정도? 그 전에는 중국인들을 상대로 한 다른 공연팀이 있었는데 몇 천 명씩 와서 공연을 봤어요. 그러다 코로나 때문에 중국 관광객이 들어오지 못하니까 저희가 국내 공연을 하는 곳으로 만든 거예요. 예전에는 일주일에 2~3번씩 공연을 했어요. 낙원상가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악기상가가 있잖아요. 악기상들이 자기 고객들에게 공연을 할 수 있는 무대로 소개하면 저희가 대여를 해주기도 했죠. 지금은 극장 2개관이 각각 300석, 공연장이 400석, 총 1000석입니다. 5층 공연장 모두의 극장 내부 임수연 _낭만극장과 실버영화관이 공유하는 라운지를 꾸밀 때 특히 어떤 점에 신경 쓰셨나요. 김종준 _영화를 안 보시는 분들도 로비에 와서 즐기실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려고 했어요. 코로나 이전에는 식당에서 간단한 음료와 간식도 팔았어요. 공기 정화를 위해 공기청정기도 설치했습니다. 임수연 _낭만극장을 주로 찾는 관객들은 대체로 어떤 사람들인가요. 김종준 _가장 많은 건 80대에요. 제가 여기 처음 왔을 때는 70대였는데 그분들이 지금은 80대가 됐을 테니까요. 5~6년 전에는 90대 관객이 오면 신기해서 따로 모셨는데, 지금은 예사롭지 않은 일입니다. 가장 많은 건 80대, 그 다음이 70대, 그 다음이 90대라고 보시면 됩니다. 60대 관객이 가장 적습니다. 대체로 50년대부터 60년대 초, 고등학교 때부터 영화를 보시던 분들이 많습니다. 낭만극장 내부 임수연 _튼튼하게 지은 만큼 건물 자체는 앞으로도 보존될 수 있겠지만, 유구한 역사를 지닌 영화관이 계속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김종준 _60~70년대에는 영화를 많이 봤지만 80~90년대에는 야외에 나가서 골프도 치고 다른 여가활동을 많이 하게 됐어요. 앞으로 베이비부머 세대를 흡수하기 위해 공연장에서 베이비부머 연예인들이 공연을 많이 하게끔 하는 게 낭만극장의 숙제이자 목표에요. 추억의 명화를 트는 일은 70~80대가 80~90대가 되고 나면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베이비부머 세대를 끌어들여야 해요. 필자: 임수연(씨네21) 사진촬영: 최성열(씨네21) 인터뷰 일자: 2022년 4월 19일
1989년, 나는 그때 중학교 1학년이었다. 동급생 누군가가 요즘 제일 잘 나가는 비디오테이프를 공수해왔다면서 방과 후에 또 다른 누군가의 집으로 모이라고 했다. 그 영화는 에밀 아돌리노의 1987년 작 <더티 댄싱>이었다. 무슨 내용인지 전혀 모르고 그냥 보기 시작했다. 어둑어둑하던 좁은 방 안에서 영화를 본 그 100분의 시간이 굉장히 많은 것을 바꿔놓았던 것 같다. 열네 살의 나는 <더티 댄싱> 속 열일곱 살 프랜시스(‘베이비’라고 더 자주 불리는)와 다를 바 없었다. 그때까지 내가 TV ‘주말의 명화’에서, 혹은 부모님이 가끔 극장에서 보여주었던 ‘감동 대작’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격렬한 에너지와 성적 흥분을 처음으로, 지직거리는 화질의 비디오테이프로부터 느꼈던 것 같다. 그 감정이 너무 낯설고 격렬해서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었다(댄스 영화에서 그때에 비견할 충격을 느낀 건 이후 고등학교 때 피카디리 극장에서 봤던 바즈 루어만의 <댄싱 히어로> 정도를 꼽을 수 있겠다). 1963년 여름, 베이비는 가족들과 함께 호화로운 산장에서 여름휴가를 보낸다. 나이 많은 어른들 위주의 레크리에이션 프로그램에 억지로 참여하다가, 우연히 밤중에 외딴 별채에서 펼쳐지는 댄스파티를 목격하고 그에 매료된다. 산장에서 일하는 청춘남녀가 모여든 이 파티장의 주인공은, 리조트의 춤 선생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댄서 자니와 페니 듀오다. 베이비는 페니가 여름 방학 동안 산장에서 일하던 예일대 학생 로비와의 관계 때문에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고, 낙태 수술 비용 때문에 난감해한다는 것까지 알게 된다. 베이비는 의사인 아빠에게 선의의 거짓말을 하며 돈을 빌려 페니에게 건네고, 그가 수술을 무사히 마칠 때까지 자니의 댄스 파트너 역을 대신 하기로 한다. 춤을 한 번도 배워본 적 없던 순진한 소녀 베이비가 자니와 함께 하루 종일 춤 연습을 하면서 사랑에 빠지는 건 시간 문제였다. 성인이 되어서, <더티 댄싱>을 몇 번 더 봤다(가장 최근의 시청 경험은 영화가 왓챠에 올라왔을 때다). 어린 시절에는 순전히 ‘나쁜 소년’과의 로맨스를 꿈꾸는 하이틴 로맨스 영화처럼 받았들였지만, 좀더 성장하고 시대적 배경에 대한 지식이 쌓였을 때 다시 본 <더티 댄싱>은 또 달랐다. 일단 산장 주인은 아르바이트생을 두 종류로 나눠서 고용했다. 예일대 및 하버드대 학생들은 접객 웨이터로 일하고, 여름에 이곳을 찾는 부유한 가족들에게 ‘미래의 예비 사위’처럼 선보이면서 그 가족의 ‘딸들’을 즐겁게 해줘야 한다는 임무가 제시된다. 반대로 나머지 오락 담당 직원들(자니는 이쪽에 속했다)은 그 ‘딸들’에게 절대로 손가락 하나도 터치하면 안 된다고 금지당한다. 넘보지 못할 나무라는 것이다. 섹스에도, 심지어 휴가 기분을 내기 위한 가벼운 수작질에도 계급의 공고한 벽은 일상적으로 작동한다. 과연 이곳에 놀러온 사람들과 이곳에서 일하는 이들 사이의 교류가 가능할까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그라인딩이라든가 더티 댄싱은 하층 계급이 지하실에서 추고, 위층의 부유층은 가족들과 폭스트롯을 추지요.”(<무비: 우리가 사랑한 영화들> 중 ‘더티 댄싱’ 편) 그런데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화학 작용이 일어난다. 얌전한 ‘아빠딸’ 베이비가 직원들 중 최고의 인기남인 자니에게 매혹되면서 그 교류가 시작된 것이다. 자니의 육체의 압도적 매력 때문에, 베이비는 지금껏 이런 게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욕망의 세계로 곧장 이끌려 들어가버린 것이다. 책으로도, 그리고 가족들이 속한 안온한 세계 인근에서도 접한 적 없던 색정적인 에너지. 물론 그 에너지가 가슴 아픈 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 <더티 댄싱>이 1987년 미국에서 개봉했을 당시 ‘낙태’라는 주요 설정 때문에 광고주였던 여드름 연고 회사 측에서 난색을 표했던 것처럼, 원치 않는 임신을 수술로 중단하려 한다는 설정이 비교적 가까운 과거인 1980년대에조차 ‘대중’ 영화에서 등장하긴 쉽지 않았다(하물며 <더티 댄싱>의 배경은 1963년 1) 이다). 하지만 각본가 엘리노어 버그스틴은 그 설정을 삭제하거나 돌려 말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대중적인 영화일수록 도덕에 관련된 문제를 겁내지 않고 다뤄야 한다고 봐요. 그 영화가 관객의 생각을 바꿀 수 있으니까요.”(<무비: 우리가 사랑한 영화들> 중 ‘더티 댄싱’ 편) <더티 댄싱>은 춤을 못 추던 소녀가 사랑의 힘으로 춤을 매우 잘 추게 되는 이야기, 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이상주의자였던 소녀가 현실에서 어떤 한계선들을 맞닥뜨리고 자기 방식대로 그것에 맞서며 넘어서는 이야기기도 하다. 극 중에서 가장 슬픈 대사 중의 하나는 베이비가 “아빠를 실망시켜서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아빠도 저를 실망시켰어요”라고 울면서 선언하는 장면이다. 이는 페니의 임신과 낙태에 관여하게 된 베이비가 그로 인해 다정한 가부장이었던 아버지의 편견과 맞닥뜨렸고, 가부장의 세계에 머물 것인지 자니의 세계를 변호할 것인지의 갈림길에서 가부장의 규범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공개적인 선택을 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영화에서 언급되는 또 다른 한계선은 베이비 자신의 편견에서 비롯된다. 베이비의 언니 리사는 외모 치장에 신경을 많이 쓰고 부모님이 정해주는 결혼에 거부감이 없는 사람이다. 아빠가 산장 주인에게 베이비를 두고 “세상을 바꿀 아이”라고 소개하는 초반 장면에서, 베이비는 정치에 관심 많은 책벌레인 자신에 대해, 언니 같은 또래 여자들과는 다른 자신에 대해 살짝 자부심을 갖고 있음을 숨기지 못한다(아빠의 소개말을 들은 산장 주인이 리사를 향해 “아가씨는 뭘 할 거지?”라고 묻자 베이비는 “언니는 세상을 장식할 거예요”라고 대꾸하고 그 순간 리사의 얼굴은 살짝 굳는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될수록, 자니의 세계에 들어서고, 지금까지 접한 적 없던 이들과 교류하고, 가끔은 거짓말과 불법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몸에 대한, 삶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면서 베이비의 시각은 크게 달라진다. 언니 리사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진다. 은연중에 자신보다 어리석다고 생각하던 리사의 성정을 다정한 공감과 따뜻한 연민으로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언니가 건네는 위로를 거절하지 않고 그 어깨에 기대는 변화를 보인다. 넷플릭스에서 <무비: 우리가 사랑한 영화들> 시즌 1이 공개됐을 때 주저없이 ‘더티댄싱’ 편부터 시청했다. 두 명의 여성, 각본가와 프로듀서가 의기투합하여 (멱살 잡고) 완성시킨 이 영화는 할리우드에서 잔뼈 굵은 거물로부터 “돈 낭비 하지 말고 필름 태워버리쇼”라는 평을 받았지만, 일반 관객 1000명을 대상으로 연 시사회에서 “모두가 발을 구르며 환호를 질러대는 격렬한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개봉 직후부터 무려 “19주 동안 박스오피스를 지배했고, 그때까지 나왔던 미국 독립영화 중 최대의 흥행 수익을 만든 영화”가 되었다. 제작 과정에서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춤과 음악과 사랑과 성장에 대한 “백만불짜리 제목”의 이 영화에 대한 애정과 믿음만으로, 초저예산의 한계를 뚫고 완성해낸 제작진 모두 그 유명한 주제가처럼 ‘내 인생의 최고의 순간’((I've Had) The Time Of My Life)을 만끽했음을 알려준다. <더티 댄싱>을 본 이들이라면, 이 50분가량의 다큐멘터리도 꼭 관람하시길 간곡하게 권한다. 대중영화가 성취하는 멋진 지점, 의식적으로 만들어낸 것은 아닐지라도 대중들이 원하는 어떤 간지러운 지점과 딱 맞아떨어졌을 때 폭발하는 시대정신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다. *** 1) 여기서 아니 에르노의 짧은 책 <사건>(윤석헌 옮김, 민음사 펴냄)이 떠오른다. 1963년 여름 미국에서 베이비가 산장에 도착하고 페니가 원치 않는 임신 때문에 괴로워할 때, 불과 몇 달 뒤인 10월 프랑스에선 대학생 아니 에르노가 불법인 임신 중절 수술을 받기 위해 울음을 참으면서 여기저기 수소문하는 굴욕적인 기억이 세세하게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