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브
- 감독
- 이반 라이트만
- 제작년도
- 1993
- 출연
- 케빈 클라인, 시고니 위버, 벤 킹슬리, 올리버 스톤, 프랭크 란젤라, 빙 라메스
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인 구술사' 시리즈를 바탕으로, 자료가 없어 실체를 알기 어렵던 사건과 인물,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인의 입을 빌려 흥미진진하게 전달합니다. 과거의 사건은 때로,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어떤 것’처럼 이야기되곤 한다. 분명 그걸 그곳에 갖다놓은 누군가가 있고 또 그렇게 한 이유도 있을 테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냥 ‘그것이 거기에 있음’이 당연한 사실이 되어버리 듯, 역사적 사건에 대해 ‘그때는 그런 시대였으니까’라며 그 자체를 하나의 시대성으로 이야기하고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때가 딱 아시안게임, 올림픽 겹치면서, 비디오가 보급되고, 말 그대로 80년대 초반부터 컬러 방송은 있었지만, 시각문화적으로 정권에서 “국산 애니메이션 TV 시리즈를 만들어라!” 호돌이 캐릭터 만들고 그래서 완전히 애니메이션 영상이 그 이전에서 그다음으로 확! 업그레이드 되는, 예. 그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 이용배 , 2020, 79쪽 위 구술을 통해서도 충분히 1980년대 중후반의 한국 애니메이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과 같은 국제적인 행사를 앞두고 정부에서 한국의 문화를 세계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 없다. 하지만 저 말들 하나하나에는 또 다른 의문들을 달 수 있다. 정부는 ‘한국의 문화’ 중에서도 왜 ‘ 애니메이션 ’의 제작을 꾀했는가? 그 직전까지 애니메이션 제작에 대한 경험이 전무했던 방송국에서는 어떻게 저 ‘명령’을 받아들일 수 있었는가? 그런데 그에 대한 대답을 당시 MBC에서 애니메이션 연출PD를 담당했던 황선길 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1987년에 정부에서 KBS하고 MBC한테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라는 권유사항이 내려온 겁니다. 근데 KBS하고 MBC는 “우리 제작비 많이 그래서, 못 하겠다.” 전부 그냥 사양했죠. 방송국은 언론기관이니까, 못 하겠다면 못 하는 거죠, 뭐 어떡해. 나라에서 어쩔 수 없죠. 근데 정부에서는 “내년이 88올림픽 대회 아니냐. 그러니까 외국에서 관객들이 와 가지고, 호텔에 묵으면서 텔레비전을 틀면 맨 노랑 머리, 빨강 머리, 그 외국 애니메이션만 나오니까, 우리 애니메이션을 해서 보게 해야 되지 않느냐 .” 이런 권유사항이 내려온 거예요.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다가 KBS, MBC가 “그러면 한시적으로 출발하자. 내년 올림픽 때까지만 제작을 하고, 그리고 이제 끝! 안 하겠다.” 이렇게 한시적으로 출발을 한 겁니다. 그래서 갑자기 한국 TV 애니메이션이 시작이 된 거죠. 개인이 기획한 것이 아니죠. - 황선길, 2020, 76쪽 위 구술에서 정책결정자의 저 ‘한국을 찾은 외국 관광객이 호텔에서 TV로 외국 애니메이션을 보는’ 상황에 대한 상상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재미있다. 그는 평소 한국의 어린이들이 외국 애니메이션만을 보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가, 문득 국제 행사를 앞두고 외부자의 시선으로 한국의 텔레비젼 방송을 바라보며, ‘영화나 드라마, 쇼 프로그램은 자국에서 만들어 방영을 하는데 아이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은 모두 외국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한 국가의 문화산업에 있어 큰 분기점이 되는 사건은 그렇게 아주 사소한 상상력에서 시작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의문점도 생긴다. 미국이나 유럽의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그렇다 치더라도, 일본 애니메이션 시리즈들은 어떻게 국내에서 수입⋅방영이 가능했을까? 분명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998년부터였다. 그중에서도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1⋅2⋅3차 개방 대상에 포함되지 못하고, 2004년 4차 개방 대상에 들어가긴 했지만, 2년의 유예기간을 거쳐 2006년에서야 전면 개방 되었다.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오랫동안 수입⋅상영이 불가능했던 반면에, 왜 시리즈물은 그 이전부터도 가능했던 것일까? 안타깝게도 2020~2021년 진행한 ‘한국 애니메이션 종사자 구술채록’에 참여했던 45인의 구술에서 이에 대해 명확한 답을 준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몇 가지 그 이유를 유추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던져준 이들은 있다. 조금 지난하지만, 지금부터 하나하나 그들의 말을 추적해보고자 한다. 그들의 말이 주는 단서들 속에서 각자 그 이유를 재미있게 추리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사건의 실마리 1: <손오공의 대모험> KBS는 1970년 4월 16일부터 <손오공의 대모험>이라는 제목의 애니메이션을 아동 프로그램의 황금시간대인 6시 30분에 방영했다. 이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신문기사를 살펴보면, 일본의 ‘무시’ 프로덕션과 ‘후지’ 텔리비전방송회사가 공동제작한 30분짜리 39편의 어린이용 천연색 만화영화를 흑백으로 방영한다. 우리나라선 처음 일반에 공개되는 일제 필름. … 비록 고대 중국을 배경으로 했지만 등장인물 중 일본 인명이나 사물 명칭의 일본어 사용 등은 문제가 있을 듯. - 《경향신문》, 1970. 4. 16. 8면 기사 당연하게도(?) <손오공의 대모험> 방영은 여러 가지로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의 언론 보도를 보면 아이들의 동심이 ‘일본색’으로 물드는 것을 걱정하는 한편, 문공부가 한국영화제작자협회에서 추진 중이던 ‘일본영화감상회’는 허가해주지 않으면서, 정작 산하기관인 KBS에서는 버젓이 일본 애니메이션을 방영하고 있어, 문공부의 일본문화 규제 기준이 분명하지 않다는 점도 문제가 되었다. 또한 공영방송에서 일본(만화)영화를 아무렇지 않게 방영하게 되면, 이후 민간상업방송에서 각종 일본(만화)영화를 들여올 수 있게 되는 구실을 만들어준다는 것도 논란의 이유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국의 애니메이션 산업과 그 역사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느낄 것이다. <손오공의 대모험> 이전에도 분명 < 황금박쥐 >(야나기다 큐지로, 1968), <요괴인간>, < 마린보이(바다의 왕자 마린보이) >(토미노 요시유키, 1969) 같은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방영된 바 있는데, 위 기사는 이 작품을 ‘우리나라에서 처음 일반에 공개되는 일본 작품’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 이유는 아래의 기사에서 잘 설명되고 있다. TBC TV의 <황금박쥐>나 <요괴인간>, MBC TV의 <마린보이> 등은 완제품이 아니고 보세가공식의 한일합작이었지만 조심스럽게 일본 작품을 도입했던 케이스들. KBS는 민방이 이미 일본만화를 방영했다는 전례를 구실로 삼고, 또한 우리의 동화산업이 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서 비록 일본영화지만 저렴한 가격으로 건전한 영화를 도입하는 쪽이 어린이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니냐고 주장한다. -《동아일보》, 1970. 4. 22. 6면 기사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손오공의 대모험>은 중도 폐지되지 않고 39회차까지 방영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 작품이 일으킨 파장은 방송계에 한동안 영향을 미쳤다. TBC와 MBC는 미국의 애니메이션들(<우주철인 사이퍼>, <자니 게스트의 모험> 등)을 수입⋅방영했고, 심지어 < 우주소년 아톰 >(린 타로, 1963)을 미국 애니메이션 시리즈인 것처럼 소개하며 방영하기도 했다. *주1 KBS도 <손오공의 대모험>이 종영된 이후에는 프랑스의 인기 애니메이션 시리즈 < 틴틴의 대모험 >(스테판 베르나스코니, 1991)을 방영했다. *주2 하지만 논란이 있고 1년여의 시간이 지난 뒤에는 < 타이거 마스크 >(타미야 타케시, 1969), < 철인 28호 >(1963)와 같이 일본 애니메이션 회사로부터 하청(OEM)을 받은 작품들을 합작인양 은글슬쩍 방영하는 일이 다시 반복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TBC 방송국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타츠토코 거 < 독수리 5형제 >다, < 개구리 왕눈이 >다, 수입을 하는데 한국에서 수탁 가공(OEM)을 해서 한 그거를 이 회사에서 수입을 해왔다 해서 수입허가가 떨어져요. 제가 또 수입대행사가 된 거예요. … 애니메이션 영화를 갖다가 유니버설아트가 수입을 하는 것처럼 형식을 갖췄어요. 유니버설하고 상관도 없어요. 그런 서류만 만들어주면 되는 거예요. - 정병권 , 2020, 132쪽 <손오공의 대모험>이 불러일으킨 논란은, 당시 한국사회 내에 여전히 일본문화에 대한 반감이 있었고, 이를 의식한 정부 당국의 규제 또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방송사들은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한국에 준 하청 작업물들을 ‘합작’ 또는 ‘보세가공품’이라는 이름으로 편법 승인을 받아 방영할 수밖에 없었다. 어레레, 그렇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왜 이런 눈치 보이고 수고스러운 과정을 거쳐 가며 일본 애니메이션을 수입⋅방영하려 했을까? 이를 알기 위해 방영주체인 방송국 의 입장을 들어보자. <독수리 5형제(과학닌자대 갓챠맨)>(토리우미 히사유키, 1972~1979)의 국내 개봉 포스터(좌)와 <개구리 왕눈이>(사사가와 히로시, 1973)의 한 장면(우). 두 작품 모두 일본 타츠노코 프로덕션 작품으로 유니버설아트 프로덕션에서 하청을 맡아 작업했다. 사건의 실마리 2: KBS⋅MBC 1980년대 초 KBS에 입사하여 영화부에서 < 우주 해적 캡틴 하록 >(린 타로, 1978), < 딱따구리 >(사이드 마커스 등 5인, 1957), < 개구쟁이 스머프 >(레이 피터슨 등 4인, 1981) 등의 해외 애니메이션 더빙 연출과, < 떠돌이 까치 >(조봉남, 1987), < 달려라 하니 >(홍상만, 이학빈, 1988) 등의 녹음 연출을 담당했던 최수형 은 1970~80년대 국내 방송국에서 미국⋅일본 애니메이션을 주로 방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80년대 초중기, 이때는 일본만화영화가 굉장히 싸게 공급 이 됐었어요. (중략) 우리한테 거부감 없이, 전 세계에 거부감 없이 배급할 수 있는 만화가 뭐였냐면, 세계명작동화’가 원작인 만화애니메이션을 제작해서 많이 보급했는데. 우리도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압박을 받았던 분들이 아직 생존해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 분들은 기모노만 봐도 그때 트라우마 때문에 견디지 못하시고 텔레비전, 영화에 기모노가 나왔다 해서 전화하시는 분들도 계셨거든요. 이런 거를 꼭 내보내야 되느냐구. 그러니까 그런 애니메이션은 방송사에서 소개할 수가 없었죠. 그러니까 대부분 동화나 명작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을 많이 소개했었던 거 같구요. 미국과 일본의 컨텐츠가 많이 소개된 이유는 이 두 나라가 비즈니스 시스템이 참 잘돼 있어요 . 그리고 일본어나 영어에 능통한 인구도 우리나라에는 많이 있고 그러니까 비즈니스 하기에 참 편했던 환경이었고. - 최수형, 2020, 40쪽 구술자는 첫째로 일본만화영화의 수입 단가가 매우 저렴했다는 것, 둘째로 비즈니스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어 수입과 방영을 위한 절차들이 수월하게 이루어졌던 점 등을 이유로 꼽았다. 하지만 방송국이라면 뭐니뭐니 해도, 시청률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애니메이션도 수입하고 그랬는데, 수입을 해보면 미국 애니메이션도 있고, 유럽 애니메이션도 있는데. 틀면은, 시청률이 많은 차이가 나요 , 일본 애니메이션은. 왜냐? 미국하고 유럽 쪽엔 정서적인 차이가 있고, 근데 일본은 우리랑 가깝잖아요. 모든 게 가깝고, 스토리든 뭐든 가까우니까 일본 애니메이션이 시청률이 높은 거예요. 그래서 거의 7~80프로, 일본 애니메이션 수입을 하죠. 특히 유럽은 너무 루즈하고, 스토리도 쳐지고 그래서 별로 유럽은 안 하고. 유럽에도 이탈리아, 프랑스 있는데 애니메이션 제작 많이 하죠. 근데 거의 수입 안 하고, 미국 것, 디즈니 같은 건 좀 하고 그랬죠. - 황선길, 2020, 105쪽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굳이 내가 보고 있는 TV 애니메이션의 제작국가가 어딘지 누군가 알려주지 않아도 묘하게 미국이나 유럽의 애니메이션과 일본 애니메이션은 구분이 되었던 것 같다. 물론 <스누피Peanuts>(1965)의 캐릭터도 좋아하고, < 컴퓨터 형사 가제트Inspector Gadget >(데이브 콕스 등 5인, 1983)나 < 핑크팬더Pink Panther Show >(게리 치니퀴, 프리츠 프레렝, 1969)도 재미있게 봤으며, 일요일 아침에는 누가 깨우지 않아도 <디즈니 만화동산> 시간이 되면 자동적으로 눈이 번쩍 떠지고 그랬지만, 그럼에도 기억 속에서 재미있게 봤던 애니메이션들을 하나하나 곱씹어 보면 일본 애니메이션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을 실제로 수입하고 OEM 작업을 진행했던 애니메이션 회사 의 입장을 들어볼 차례가 된 것 같다. 1983년 MBC에서 방영된 < 독고탁 태양을 향해 던져라 >(박시옥, 1983/좌), 1987년 KBS에서 방영된 <떠돌이 까치>(우).두 작품 모두 대원동화에서 제작했다. 사건의 실마리 3: 대원동화 물론 애니메이션 종사자 구술을 진행하면서 일본 애니메이션이 어떻게 일본 대중문화개방 이전에도 수입과 방영이 가능했었는지를 물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음은 대원미디어의 부회장을 지낸 바 있는 안현동 과 구술 면담자의 대화이다. (면담자) 《슬램덩크》를 연재할 당시에는 일본만화 수입개방 전이었는데요, 어떻게 수입을 하게 되고 또 일본만화 개방 전이기 때문에 이름도 일본어 이름이 아니라 우리식 이름으로, ‘강백호’ 이렇게 바꿔서 출판을 하게 되었는데요. 그런 과정들은 생각이 나시나요? (구술자) … 한일문화개방이 아직 안 된 시점이라도 도에이 작품 같은 경우는 우리가 얼마든지 들여와서, 개방되기 전에는 규제나 이런 게 좀 따랐지만은 … (면담자) 일본문화가 개방되기 전인데 < 은하철도 999 >(린 타로, 1977)나 그런 애니메이션, (구술자) 그건 순전히 OEM만 제작을 갖다 한 거예요. 우리가 거기 제작이 돼서 관여할 수도 없고. 그다음에 우리가 여기에 권리를 주장할 수도 없는 거고. … 일본 대사관에서 연락이 온 거예요. 왜 연락이 왔냐면 우리가 수출을 하는 것도 좋지만은 이게 일본하고 이런 문제가 있는데. < 천년여왕 > (니시자와 노부타카, 1981)같은 경우는, 작품의 어떤 기본적인 컨셉이 여러 가지 일본하고, 우리가 해서는 안될 이런. … 그래서 우리를 조사를 하겠다 그래가지고. 우리가 대사관에 가서 설명을 했죠. 그 작화하고 다 갖고 가서. 우리가 여기에 권리가 하나도 없다. 우린 단지 수출, 가공해 가지고 다시 거기 갖고, 직원들 인건비 주고 이런 거지, 여기에 대해서 없다 전혀. … 이것도 누가 이제 계통에서는 ‘대원이 일본 앞잡이 아니야?’ 이렇게 돼서 그때 한번 곤욕을 치른 적이 있고 그렇죠. (면담자) 근데 당시 말씀하신 것처럼 반일 감정도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도 어쨌든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국산 애니메이션처럼 인식되는 방식으로 국내에서 방영이 계속되었잖아요. TV에서도 일본 애니메이션을 방영을 계속했었구요. 그게 가능했던 이유가 뭐였었나요? (구술자) 근데 원작이 너무 특이하고 재밌어요. 일본에 그 원작은 우리가 참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다가. < 드래곤볼 >이라든가, < 슬램 덩크 > 라든가, 뭐 < 원피스 > 이런 것들은 너무 작품들이, 아직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러다 보니까 이 작품을 방송을 한다던가 하게 되면은 시청률도 높고 이러니까, 이걸 뭐 안 할 수가 없고. 그런 상황이 돼 버리는 거죠. (면담자) 그럼 정부나 심의기관이나 이런 곳에서도, (구술자) 이걸 방송하는 데 큰 하자가 없고, 문화개방 안 돼도 이 작품이 들어와서 유익하고, 뭐 시청률도 높고 이러다 보니까 한 거지. 안 그러면 이게 문제가 되면은 컷이 됐겠죠. 근데 그러진 않았어요. - 안현동, 2020, 119~121쪽 이 대화 속에는 아주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일본문화개방 이전에 일본 애니메이션이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를 알고 싶어하는 면담자와, 이에 대해 정확한 답을 주지 않는 구술자 간의 숨막히는 줄다리기. 두 사람의 대화가 마치 쫓고 쫓기며, 제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사실 구술자는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에 대해 많은 이야기해주고 있다. 대원동화는 1970년대 그 전신인 원 프로덕션 시절부터 일본의 영화회사 도에이(東映)와 전속계약을 맺고 하청을 맡았다. < 우주전함 야마토 >(마쓰모토 레이지, 1974), <우주 해적 캡틴 하록>, <은하철도 999>, <천년여왕> 같은 작품들이 그렇게 진행된 작품들인데,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게 OEM을 진행했던 작품들을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보세가공품’으로 국내에 허가를 받아 방영할 수 있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일본’과의 이해관계를 고려하는 동시에, 자신의 회사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을 이야기하려다 보니 지나치게 조심스러워져 이야기가 다소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점이 오히려 구술자가 질문의 내용과 자신이 하고 있는 답이 갖고 있는 의미를 아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구술자가 이야기하는 <천년여왕>은 1983년 1월부터 MBC에서 방영되던 중, 같은 해 3월 전체 42회차 중 10회를 방영한 후 돌연 개편을 핑계로 프로그램이 폐지되었다. 그 전후 사정은 다음과 같다. 방영되고 있는 어린이용 공상과학 만화영화가 대부분 일본에서 그곳 어린이들의 취향에 맞게 제작됐거나 심지어는 일본의 설화를 원전으로 삼은 것도 섞여 있는 사실이 밝혀졌다. MBC TV는 일본 동영동화주식회사가 제작, 동영주식회사를 통해 배급한 <은하철도 999>의 방영에 이어 같은 제작⋅배급망을 거친 <천년여왕>을 지난 1월 23일부터 매주 일요일 상오8시에 내보내고 있다. (중략) <천년여왕>은 MBC가 방영에 앞서 미 유니버설 작품이라고 밝혔었고 방송심의위원회도 그렇게 알고 있다. 방송심의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천년여왕> 심의 당시 유니버설 작품으로 돼있었다고 밝히고 “일본만화영화의 방영금지규정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일본극영화의 수입이 허락되지 않으며 한국영화에 일본 배우의 출연도 막고 있다. 그런데도 만화영화만은 예외인 듯 방송망을 타고 있는 것이다. - 《한국일보》, 1983. 3. 10. 12면 기사 MBC TV는 23일 어린이 대상의 공상과학만화영화 <천년여왕>을 도중하차 시켰다. MBC의 한 관계자는 이 만화영화가 일본의 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일본인에 의해 제작된 것이어서 어린이 교육 상 문제가 있다는 여론에 따라 이 프로를 도중에서 폐지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후략) - 《한국일보》, 1983년 3월 24일자 12면 기사 사실 《한국일보》의 기사 이전에 이 작품이 ‘일본 작품’이라는 데에 문제를 제기한 이는 시청자였다. *주3 하지만 이 글을 쓴 시청자는 일본 작품의 방영 자체를 비판하기보다는 일본의 만화영화가 방영되면서 일본식 표현을 번역함에 있어 미흡함이 있음을 꼬집고 있다. 그리고 위에 인용한 기사 속 방송심의위원도 ‘일본만화영화의 방영금지규정은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TV를 통해 많은 일본 작품들이 국내에 방영되고 있고 그 자체를 문제삼는 분위기는 아니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런데 왜 유독 <천년여왕>은 일본 대사관까지 그 문제를 조사하고 나설 정도로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일까? *주4 1982년에는 제2차 한일경제협정안을 놓고 양국이 조금이라도 더 좋은 조건을 득하기 위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 일본 교과서의 역사 왜곡 사실이 드러나며 1983년 초까지도 반일감정이 극에 달해 있었다. 구술자가 들었다는 ‘일본 앞잡이’라는 표현도 당시의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주5 다시 말해, 평소에는 일본만화영화를 가져와서 방영을 해도 눈치껏 잘 넘어가주던 방송심의위원회에서도 이렇게 외교적으로, 그리고 국민정서 상 일본문화에 대해 반감이 커지는 시기가 오면 갑작스레 방송 중단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애니메이션 하청⋅수입업자의 입장에서 사업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사업을 하나의 ‘산업’으로 키우는 것이 어려워진다. 이때 하나의 문화가 산업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국가 정책에 따라 규제가 뒤따르기는 하겠지만, 경제적으로 권익을 ‘보호’를 받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영화나 애니메이션과 같이 기업적 규모의 인력이 투여되어야 하는 문화의 경우 산업으로 인정받고 장려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일본대중문화개방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을 때, 애니메이션 제작⋅배급업자들이 바빠질 수밖에 없었다. 우선 당시 정부는 미래의 먹거리로 ‘소프트 산업’을 지목하며, 제재는 최소한으로 하면서 지원은 최대로 한다는 정책방향을 세우고, 국내 애니메이션 산업을 키우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애니메이션 종사자들도 구술을 통해 ‘실제로 김대중 정부 때 가장 많은 지원을 받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거기에 일본대중문화가 개방되면, 일본만화 및 그와 관련된 콘텐츠를 수입⋅배급하던 회사들 입장에서도 자신들의 사업을 양지화할 수 있었다. 특히나 이 시기 대부분의 한국 애니메이션 회사들이 자체적으로 작품을 제작함과 동시에 일본 콘텐츠에 대한 수입⋅배급을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에(이는 VCR이 국내 널리 보급되며, 일본 애니메이션을 비롯한 아동용 콘텐츠에 대한 수요가 급증한 것도 주요하게 작용했다), 여러 모로 회사의 규모를 키울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1980~90년대 대원동화에서 애니메이션 연출과 기획팀장으로 일했던 황정렬 은 1990년대 말, 일본대중문화개방과 관련한 자신의 경험을 아래와 같이 이야기했다. (구술자) 사실은 일본문화가 우리나라에 수입이 정식적으로, 공식적으로 돼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특히 대기업 같은 경우는 뭐 일본영화라든가 일본만화라든가 이런 분야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죠. 그리고 실질적으로 국내에서 일본애니메이션이나 일본만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회사는 사실 대원이 거의 유일했었어요. 70년대 말부터 대원 같은 경우는 애니메이션 OEM을 시작하면서 일본의 애니메이션 제작사라든가 그 제작사하고 연계된 캐릭터 사업을 하는 회사라든가 ‘반다이’ 같은 회사들, 그런 회사들하고 계속 지속적으로 비즈니스 관계를 형성해왔었기 때문에 사실 대기업이 아무리 뭐 해외지사가 있고 정보 수집 능력이 크다고 하더라도 애니메이션 분야에 있어서는 대원을 따라갈 국내 기업은 없었다고 봐요. (중략) 문화개방을 풀려면 제일 먼저 부딪쳐서 해결해야 될 부분이 공무원들이었거든요. 그래서 문화관광부 담당 공무원들 만나서 설득하는 작업을 저하고 회장님하고 같이 했었는데, (면담자) 그러면 정책이 나오고 나서 대원은 ‘대중문화 개방 됐으니까 수입하자’가 아니라 좀 더 발빠르게 ‘수입해야 하니까 정책을 만들자’ 이렇게, (구술자) 그렇죠. 현실적으로 일본문화가 이미 우리나라에 많이 들어와 있고 청소년들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일본만화라든가 애니메이션을 공유하고 있는 상태인데, 그것을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막는다는 게 무슨 시효가 있겠느냐, 차라리 개방을 해서 (사이) 양지로 끌어올려가지고 정말 정서적으로 저해가 되는 것들은 법으로 막고 다음에 그 수입을 자유롭게 해야 우리나라의 캐릭터 시장이라든가 애니메이션도 경쟁력이 생겨서 나중에는 오히려 우리가 수출할 수 있는 게 아니냐, 그런 논리로 계속 설득을 했죠. - 황정렬, 2020, 120~122쪽 <드래곤볼>, <슬램덩크>, < 달의 요정 세일러문 >(사토 쥰이치, 1992), < 포켓몬스터 >(유야마 쿠니하코, 1997)는 모두 대원동화(현재 대원미디어)에서 수입⋅배급한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지금까지도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자, 여기까지가 ‘한국 애니메이션 구술채록연구’를 진행하면서 ‘일본 애니메이션’이 국내 TV에서 방영될 수 있는 이유에 대해 구술자들에게 들었던 단서들이다(그리고 이보다 많은 단서들을 한국영상자료원 2층 영상도서관에 비치된 ‘한국 애니메이션 구술채록연구시리즈’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코난은 “진실은 언제나 하나”라고 외치지만, 사실 역사를 연구하는 과정은 진실의 뚜렷한 실체를 들여다 보는 것보다는 그 실체가 드리운 그림자를 보며 원래의 실체가 어떻게 생겼던 것일지를 추리하는 일에 가깝다. 일본 애니메이션이 국내에 방영될 수 있는 이유는 어쩌면 ‘그냥’이라든가, ‘심의기관에서 굳이 막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서’ 같은 허무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한국 애니메이션의 제작 기반 마련이 정책결정자의 작은 상상력에서 시작될 수 있었던 것처럼 구술채록문을 보며 추리와 상상을 쌓아가다 보면 또 다른 출발점이 보일지도 모르니, 다들 시도해보자! ※ 인용된 구술채록문들 김성희⋅이은솔, 『한국 애니메이션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22권: 안현동』, 한국영상자료원, 2021. 나호원⋅임정연, 『한국 애니메이션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28권: 이용배』, 한국영상자료원, 2021. 배수경⋅남기웅⋅박현선, 『한국 애니메이션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35권: 정병권』, 한국영상자료원, 2021. 박경진⋅현찬양⋅공영민, 『한국 애니메이션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42권: 최수형』, 한국영상자료원, 2021. 장유진⋅김은하⋅한솔, 『한국 애니메이션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44권: 황선길』, 한국영상자료원, 2021. 맹우영, 『한국 애니메이션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45권: 황정렬』, 한국영상자료원, 2021. *** 주1. “KBS 명화극장에 액션 사극물 <코사크>”, 《조선일보》 1970. 9. 20. 8면 기사. 이 기사에서는 <우주소년 아톰>을 미국 NBC-TV의 인기 프로그램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주2. “[하일라이트] TBC TV 예그린뮤지컬 <재미있는 세상>, KBS TV 어린이 만화영화 <틴틴의 모험>”, 《경향신문》, 1971. 1. 20. 8면 기사. 주3. “[민성-독자가 만드는 조선일보]일서 수입한 TV만화 용어까지 그대로 방영”, 《조선일보》 1983. 2. 12. 8면 기사. 주4. 사실 <천년여왕>의 방영 중단을 놓고, 일본 대사관이 이를 문제 삼아 조사를 했다는 구술자의 말은 조금 의구심이 남는다. 물론 도에이에서 직접적으로 한국 정부에 문제 제기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일본 대사관을 통해 항의를 하고, 이를 일본 대사관이 대원동화에 전달할 수는 있겠지만, 일본 대사관에서 어떠한 권한을 가지고 국내 기업을 조사했는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이는 시간이 지나며 구술자의 기억이 왜곡되어 관련 기관을 잘못 말한 것이거나, 실제로는 ‘조사’가 아닌 흔히 ‘초치’라고 표현하는 외교 상 강력한 항의를 받는 수준의 대처를 과장하여 표현한 것일 수 있다. 주5.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관계를 놓고 보면 어쩔 수 없는 것이겠으나, 사실 ‘한국 애니메이션 종사자 구술채록연구’를 진행하며, 일본 애니메이션의 하청을 주로 담당했던 구술자들이 들었던 비난으로 ‘친일’과 함께 자주 언급했던 표현 중 하나이다. 별개의 이야기지만, 미국의 애니메이션 하청을 주로 맡았던 구술자들이 자신의 작업을 바라보는 태도를 이들과 비교해보는 것도 ‘애니메이션 종사자 구술’을 흥미롭게 볼 수 있는 지점 중 하나이다.
“쿵딱 똑뚜르르 똑뚝딱... 쿵딱 똑뚜르르 똑뚝딱...” 뜨개질 바늘 부딪히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루핑 되면서 끝없이 뜨개질을 이어가는 단편애니메이션 <마지막 뜨개질 The Last Knit>(로라 네우본넨, 2005)은 최근 생기고 있는 지역중독센터의 주요 정신치료대상이 되기 시작한 ‘인터넷, 모바일 게임 중독’이나 ‘웹툰 중독’처럼 반복되는 지루함에도 불구하고 벗어나기 힘든 말초적 감각의 즐거움으로 채워진 중독과 같이, 갇힌 시야로 인해 한 가지 일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미궁(迷宮)과 같은 병적인 ‘집착’에 관해 다루고 있다. 필자는 이번 추천 애니메이션에 ‘집착으로 쌓인 내공’이라는 주제로 화두를 풀어가려고 한다. 2006년 일본 도쿄아니메페어 출장으로 신주쿠역을 출발해 도쿄역에서 환승, 역사를 막 벗어나려고 할 때였다. 당연히 우리나라와는 기후, 환경, 그리고 지하철에서 풍기는 독특한 냄새 등 생활문화가 여러 가지로 다를 것이라고 짐작을 한 여행이었지만, 서울역을 중심으로 여러 전철역의 선로 옆 도심과의 경계를 위해 위협적으로 세워진 철조망, 콘크리트 방음벽, 오랜 세월 달리는 철마의 분진으로 바닥과 벽들이 온통 빨간색으로 물든 철도변의 모습과는 달리 동경 전철역과 선로주변은 경계석을 제외하고는 철조망이나 방음벽을 볼 수 없었다. 때문에 수없이 지나가는 전철의 소음 속에도 고양, 일산 신도시의 고급 주택가처럼 깔끔하고 멋 부린 주택들이 올망졸망 늘어서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난밤 일본어 회화책에서 얄팍하게 배운 감탄사를 조용히 내뱉는다. “스고이...!” 전철은 이제 서서히 속도를 더하는데 “아뿔사!” 한 수 더한 ‘깔끔한’ 상황에 열린 입을 다물기가 쉽지 않았다. 아담한 2층집 계단의 난간 손잡이가 스텐레스 봉으로 설치되어 있었는데, 마침 그날은 일요일 아침이라 집주인이 바깥 청소를 시작한 모양이다. 주인장은 스텐레스 손잡이에 광택제를 뿌리고 헝겊으로 빡빡 문지르기 시작한다. 3월 하순의 아침햇살과 동경 시내 풍경이 집주인이 닦아낸 거울 같은 손잡이에 영롱하게 교차되면서 반사 굴절된다. 필자에게는 넋 나가는 충격이었지만 일본 전철선로 옆집 아저씨에게는 지극히 정상적인 상황으로 보였다. 이는 일본 전철역 주변 사람들만의 ‘청결’에 대한 집착으로 봐야 하는가. 아니면 습도 높은 섬나라 민족의 위생강박관념에 의해 오랫동안 진화된 변종 염색체의 고착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일본 사람들의 청결과 위생의 집착에 관한 또다른 에피소드가 있는데, 2005년 히로시마페스티벌로 가져간 PISAF(부천국제학생애니메이션페스티벌) 홍보물 박스를 버리려고 휴지통을 찾았지만 행사장이나 시내 어디에서도 찾지 못해 결국 한국으로 되가져온 방증만으로도 그 순위를 마땅히 세계 1위에 올릴 수 있다. 이러한 데는 일본의 지역적 기후, 풍토 등 환경적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겠지만 만화와 애니메이션분야에서는 이렇게 깔끔한 민족성이 오히려 긍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 배경이 된 것으로 판단한다. 그래서 16세기 우키요에(浮世繪) 이후 명작 만화와 애니메이션들이 일본에서 많이 나오는 나름대로의 연유가 되는가보다. 문화와 예술작품에 관해서도 이러한 집착과 내공의 함수는 비례한다. 그래서 잔인하게도, 경주 토함산의 석굴암에 대해 우리 민족의 고유 창작품으로서 평가하고 찬사를 보내기에는 찰흙이 아닌 거친 화강암을 수없이 두들겨야만 형태의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물리적 속성의 모순을 풀지 않고는 그 찬사에 대한 설득력이 부족하여 부득불 공염불에 지나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엿판처럼 질긴 화강석에 망치질을 해보지 않은 여러 미학자들과 평론가들은 우리나라의 천재 석공이 단번에 두들긴 정질에 유아독존 석굴암이 탄생했다고들 감히 평가하고 있다. 그러면 이제 추천 애니메이션을 이야기 해보자. 1987년 도쿄 판타스틱 영화제에 특별 초대되었던 이색 옴니버스 애니메이션 < 미궁물어 迷宮物語 >는 평단으로부터 아낌없는 극찬을 받았고 일련의 비디오물들 보다는 월등하게 탁월한 작품의 완성도 때문에 2년 뒤인 1989년 극장에서 다시 개봉하였다. 또한 이 작품은 현재 거장이 된 린타로, 가와지리 요시아키, 오토모 가츠히로 3명의 감독들이 미궁(迷宮)이란 이름에 걸맞게 마유무라 타쿠(眉村卓) 동명 원작소설의 난해한 이야기를 감독별로 작가적 감성과 색채를 진하게 녹여서 풀어내고 있어 감독들의 발자취와 축적되어가는 작업의 내공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오프닝작 <라비린스 라비린토스 ラビリンス ラビリントス>의 린타로(りんたろう) 감독은 < 우주해적 캡틴 하록 >(1978) < 은하철도 999 >(1979) < 안녕 은하철도 999 >(1981) < 환마대전 >(1983) < 카무이의 검 >(1985) <불새-봉황편>(1986) < 메트로폴리스 >(2001)를 통해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린타로 감독의 이전의 스타일과는 많은 차이를 느낄 수 있는 이 작품은 ‘라비린스 라비린토스=미궁, 미로’라는 작품제목과 같이 몽환적인 상상력으로 옴니버스 전체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줄거리는 데이브 맥킨의 몽환적 작품 < 미러 마스크 >(2005)의 설정처럼 서커스 극장의 환상으로 시작하는데, 여자아이 사치와 고양이 치치로네가 이상한 피에로를 쫓아 환상의 미로를 지나 이제 막을 올린 서커스 극장 속으로 들어간다. 작품 후반부의 미궁 같은 골목길에서 3D CG처럼 재현된 모호한 공간지각에 대한 상상력은 가히 대단하다. 두 번째 작품은 < 요수도시 >(1987) < 마계도시 신주쿠 >(1988) < 수병위인풍첩 獸兵衛忍風帖; 무사쥬베이 >(1993)으로 유명한 카와지리 요시아키(川尻義昭)의 <달리는 남자 走の男>다. 이 작품은 감독의 분위기가 강하게 드러나는 그림체와 연출 등이 이후의 명작들을 낳게 한 초기 작품으로 충분히 가늠된다. 1등에 대한 집착이 강한 카레이서 ‘잭 휴’가 생명을 담보로 레이싱을 펼쳐 경쟁 카레이서들을 물리치고 1등을 하지만 자동차와 함께 그도 결국 산화해간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린타로나 오토모 가츠히로 감독에 비해 3D 공간감과 구조적인 상상력이 다소 아쉬웠다. 하드고어한 하이프리얼 해부학적 묘사와 유려한 동작, 스토리에 몰입감을 점증해가는 매끄러운 전환을 특징으로 하는 카와지리 요시아키 감독의 ‘옥의 티’로 슬쩍 넘기고 싶다. 세 번째 작품은 한번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인상 깊게 기억하는 < 아키라 >(1988)와, <노인Z>(1991)의 감독 겸 만화원작자로서, 혹은 < 메모리즈 >(1995)에서 히치콕의 오마주로 22분 18초 동안의 롱 테이크로 연출된 <대포의 거리>와 < 스팀보이 >(2005)의 감독으로 잘 알려진 오토모 가츠히로(おおともかつひろ)의 데뷔작 <공사중지 명령 工事中止命令>이다. 필립 글래스의 ‘자푸라 강 Japura River’처럼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단조로운 반복음이 좌우, 앞뒤에서 소리의 정위감(Sound localization)으로 울리면서 정글이 있는 아로아나 공화국의 444프로젝트 공사장 이정표에서 3인칭 시점을 슬로우 아웃으로 멈추면서 작품은 시작된다. 줄거리는 444프로젝트를 중지하기 위해 주인공을 파견하지만 오직 로봇으로만 작업되고 있는 거대한 공사현장의 책임자 로봇은 오히려 파견된 주인공을 감금하고 공사를 계속해서 진행시키려 한다는 내용으로 자연파괴와 기계적인 현실에 갇힌 현대 사회의 인간모습을 풍자하고 있다. 오토모 가츠히로의 모든 작품이 그러하듯 이 작품 역시 세밀한 자연생태와 인공구조물, 그리고 설계도까지 가미되어야만 정확한 움직임이 구현될 수 있는 다양한 기계류에 대한 복잡한 상상력과 세세한 묘사력은 ‘감독’이라는 호칭에 앞서 실로 ‘기계와 구조 컨셉의 달인’이라는 표현이 적절하겠다. < 미궁물어 >가 개봉된 후 오랜 경험과 수련으로 쌓인 일본 만화애니메이션 업계의 내공이 수많은 명작들을 남겼음은 더할 나위가 없지만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995년에 개봉한 3편의 중편(그녀의 추억;彼女の想いで, 모리모토 코지 감독 / 최취병기;最臭兵器, 오카무라 텐사이 감독 / 대포도시:大砲の街, 오토모 가츠히로 감독)으로 구성된 114분의 또 다른 옴니버스 애니메이션 < 메모리즈 メモリ?ズ >는 완성도와 밀도에서 <미궁물어>의 신선, 난해함을 실사영화보다 더 사실적인 치밀함과 회화적인 묘사에 블랙유머의 여유까지 더해서 업데이트한 일본 중편애니메이션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영화관객 수로 법석을 피운 알폰소 쿠아론의 < 그래비티 >(2013)나 크리스토퍼 놀란의 < 인터스텔라 >(2014)는 <메모리즈>의 ‘그녀의 추억’과 ‘최취병기’의 오마주가 아닐까, 라고 치부하고 싶다. 박수근 화백의 ‘낙엽 떨어진 나무’를 팩션과 언어의 향연으로 풀어낸 ‘나목’이 박완서 작가의 공력을 쌓아올린 등단작이 되었듯이 섬세한 감성과 오랜 기간의 수련에서 체득한 내공이 작품에 배어난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이 시대를 창작하는 젊은 작가들에게 난해하면서도 복잡한 상상력으로 어우러진, 풀기 어려운 방정식 같은 작품 < 미궁물어 >를 감히 추천한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내친김에 < 메모리즈 >까지 보시고... 바흐의 ‘평균율 1권 1번 프렐류드’에서 반복되는 피아노 음이나 필립 그래스의 ‘라비린토스, ‘해변의 아인슈타인 Einstein on the Beach’과 와크티(Uakti)가 연주한 ‘자푸라 강’, ‘아마존 강 Amazon River’의 난해하지만 형이상학적 감성의 신비로움과 환상을 자아내는 단조로운 반복음이 창조해낸 음율의 감미로움을 최면술로 즐기는 사람들은, 오늘처럼 겨울을 더해가는 진눈깨비가 내릴 때, 브람스 4번 교향곡과 스파클링 와인 모스까토 큰 한잔으로 이 계절을 즐겨야 하는 예술가의 사명감을 당연히 수행하듯 소위 엘리트예술은 아는 만큼 보이고 이해하는 만큼 들릴 수밖에 없다. 뵈프 브로기뇽을 배불리 먹지 말고, 맛있게 먹어야 하는 것처럼.
연일 이어지는 불볕더위에 바깥 온도는 38도를 웃돌고 있다. 요즘 같이 잔인한 무더위, 작열하는 폭염에는 올림픽 시청이나 영화 관람이 더위 날리기로 제격이다. 연일 밤을 새운 응원에 승전보를 접하기도 하지만, 몇몇 종목의 불만스런 판정은 마뜩잖은 새벽잠에 불편함을 더한다. 그래도 스웨덴의 전설적인 사격 영웅 오스카 스완이 1920년 앤트워프올림픽에서 72세의 나이로 은메달을 목에 걸며 역대 최고령 메달리스트가 된 꿈같은 기록들이나, 영화 속 환상을 실시간 현실로 만들어준 대니 보일 감독( 슬럼독 밀리어네어 , 2009 아카데미 감독상) 연출의 스펙터클한 개막식은 올림픽의 흥미를 더해주는 번외 다큐멘터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더위 날리기 1순위는 무엇보다도 냉방시설 잘된 영화관에서 시원한 콜라 한 잔과 고소한 팝콘을 먹으면서 영화 관람을 즐김에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틀전날 밤 고1 아들놈과 친구들에게 에어콘 바람이 차가우니 웃옷도 한 벌 챙기라면서 심야시간의 < 다크 나이트 라이즈 >를 함께 보고 왔다. 7월 24일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의 집계에 따르면, <배트맨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24일 하루에만 27만 275명의 관객을 동원해 누적 관객 3,003,061명을 기록했다. 이는 19일 개봉 이후 6일만의 기록으로 2012년 개봉영화사상 최단 기간 300만 명 관객 돌파의 기록이다(< 어벤져스 >는 10일 만에 최단 300만 관객 돌파). 한편, 한국 멜로 영화사상 최대(410만 관객) 동원 기록을 세운 올 상반기 화제작 < 건축학 개론 >은 90년대 감성에 바람을 일으키면서 ‘마이클 런스 투 록` 등 국내에서 관련 음반들이 줄이어 발매되고 있다. 아울러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되었네’라는 제목으로 귀에 익숙한 그리스 가수 아그네스 발차의 노래가 흐르는 < 시라노 연애조작단 > 등 승률이 꽤 높은 명필름의 주력은 특수효과를 애니메이션기법으로 처리하는 메이저급 할리우드 영화와는 달리 탄탄한 스토리와 기획에 기반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음악과 캐릭터를 비롯한 몇 가지의 중요한 다른 조건들도 포함됨은 물론이다. 영화를 완성하는 요소는 여럿이지만 그중에서도 비중이 큰 3가지만을 꼽는다면 스토리, 캐릭터, 음악이라고 할 수 있겠다. 2012년 시카프 행사를 방문한 픽사의 이민형 TD는 인문학에 관심 갖길 제안하면서, 영화의 중요한 조건으로 캐릭터와 스토리를 꼽았다. “<메리다와 마법의 숲>의 경우에도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데는 1년 반이 걸렸지만 스토리와 캐릭터를 만드는 프리프로덕션 단계에 5년을 공들였고, 공대 출신 기술 담당 임원들도 예술과 인문학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는 게 바로 픽사의 큰 힘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이번 추천 애니메이션은 이러한 영화의 구성요소 중에서 < 다크 나이트 라이즈 >의 몽상적 스토리 이상의 몽환적인 스토리와 < 어벤져스 >에 결코 뒤지지 않는 감각적인 비주얼, < 시라노 연애조작단 >이나 < 건축학 개론 >에서 흐르는 복숭아 같이 향긋한 음악, 그리고 또 다른 재료들을 잘 배합해서 시적 일루전이라는 특별메뉴로 조리해낸 데이브 맥킨(Dave McKean)의 < 미러마스크(MirrorMask) >이다. 꿈같이 공상적이고 만화 같은 상상력이 풍부한 영화로는 팀 버튼의 < 피위의 대모험 >도 만만치 않은 작품이지만 만화적 요소에 애니메이션기법이 강하게 혼재한 데이브 맥킨의 <미러마스크>가 영상자료원의 추천애니메이션이라는 지정된 조건에는 좀 더 적격이라고 판단한다. 팀 버튼 감독의 만화 같이 황당한 설정의 실사영화들은 < 슈퍼맨 > 같이 만화주인공이 등장하는 ‘만화영화’나 애니메이션기법이 쓰인 ‘애니메이션영화’에 대해 용어상의 혼용과 학술적 개념의 혼란을 가지게 하지만 < 미러마스크 >는 이러한 만화와 영화 그리고 애니메이션의 복합적인 개념을 담고 있어, 심화된 만화와 영화, 애니메이션에 대한 새롭고 발전된 시도로 평가할 만하다. 특히, 이번 작품이 묘한 매력으로 끌리게 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몽환적 이미지로 풀어가는 컬트 성격이 강한 비주얼들이다. 그래서 <미러마스크>를 리뷰하기에 앞서 데이브 맥킨에 대한 일러스트레이션작가로서의 필모그래피를 소개함이 다소 어둡고 무게감 있는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듯하다. 데이브 맥킨은 영국의 버크셔 예술디자인대학에서 디자인, 일러스트레이션, 영화를 전공했다. 25년 전인 1987년, 찰떡궁합인 글 작가 닐 게이먼(Neil Gaiman)과 함께 『폭력 사건들』과 『흑란』(1988)을 발표하면서 만화계에 데뷔했다. 이 두 작품은 1989년 유별난 작가 그랜트 모리슨의 시나리오에 그림 작가로 발표한『배트맨, 아크함 수용소(Batman, Arkham Asylum)』와 더불어 만화의 전형적인 틀을 깨는 창의적 만화 장치를 적용시켜 다수의 수상과 함께 국제적인 명성을 안았다. 1989년 이후에는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그림을 그린 그래픽노블『새장들(Cages)』(1993)을 출판했는데, 이 책으로 알프 아트 판테라 하비상을 수상하게 된다. 다른 주요 작품으로는 『코랄린』(2003), 『벽 속에 늑대가 있어』(2005), 『금붕어 2마리와 아빠를 바꾼 날』(2006) 등 책의 속지를 펼쳐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독특하고 파격적인 만화책과 그림책들이 여럿 있다. 데이브 맥킨 | 배트맨, 아크함 수용소 | 샌드맨의 `모르페우스` 초상 | Dreaming 코랄린 | 벽 속에 늑대가 있어 | 금붕어 2마리와 아빠를 바꾼 날 이와 같은 데이브 맥킨의 그림이 특별히 가지는, 현실과 꿈을 오가는 시공간적 레이어에 놓인 회화, 사진, 오브제, 캘리그라피, 컴퓨터그래픽 등의 중첩 이미지들은 주세페 아르침볼도의 정물화에서 느껴지는 유머스런 일루전으로부터 모리츠 C. 에셔의 패턴이 재현하는 메타패턴의 이미지들에 바흐의 푸가 C-샤프 마이너가 절묘히 배합되어 시적 환영의 메타모포시스를 제공함으로서 퇴색하는 벽과 바닥과 천정의 티끌에서도 어렵지 않게 생성되는 신기한 환영들처럼 독자나 관객 스스로가 시적 연상을 통해 감성 넘치는 스토리를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주세페 아르침볼도: 채소 기르는 사람 | 모리츠 C. 에셔: 패턴 이미지 데이브 맥킨 감독의 첫 장편 < 미러마스크 >는 글 작가 닐 게이먼의 『미러마스크』를 초안으로 2005년 짐 헨슨 스튜디오에서 만든 영화다. 간단한 줄거리는 가족 서커스단인 주인공 헬레나와 부모님의 떠돌이 생활의 지겨움에 대한 사춘기의 갈등과 해소에 관한 내용이다. 헬레나와 그녀의 어머니가 심하게 다툰 후 갑자기 어머니가 병으로 수술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모두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면서 지루한 일상에 대한 반항, 사춘기의 도발적 방황, 부모님과의 갈등 등 트라우마 유형의 스트레스를 현실과 혼돈되는 꿈속에서 몽환적으로 풀어나간다. 감독은 헬레나의 병든 어머니를 상징하는 백색여왕의 병을 고쳐줄 미러 마스크를 찾아 얽힌 실타래를 풀듯 이야기를 엮어가는 과정에서 데이브 맥킨 특유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독특한 이미지와 철학적 관념이 흐르는 스타일리시한 반투명 메타모포시스 기법을 중첩시켜 감성 넘치는 101분 상영시간의 인상 깊은 장편애니메이션영화를 완성했다. 그러나 묘사가 섬세하고 스토리라인의 조리가 분명한 팀 버튼 감독의 몰입감 강한 미국스타일 작품들에 비해 호불호 엘리트 예술가로서 또는 회화작가로서 데이브 맥킨이 표현하기 좋아하는 지나치게 복잡한 철학적, 관념적 유럽식 예술품격을 녹인 『배트맨, 아크함 수용소(Batman Arkham Asylum)』그래픽 노블에서 칸(패널) 사이에 놓인 스토리 완급에 대한 긴장감을 독자들 스스로가 유지하기를 요구하듯이, < 미러마스크 >의 스토리텔링에 대한 집중력과 인내 역시 온전히 관객의 몫으로 돌리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관객의 호흡을 무시하는 형이상학적 지루함을 못내 답답하고 씁쓸한 옥의 티라고 조롱하고 싶다. -혼자 너무 잘 났어!- 혹자는 그러시겠지 “이게 도대체 만화야? 영화야?” 필자는 이렇게 반문하고 싶다. “글쎄, 요새 영화들은 도대체 애니메이션이야? 영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