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노반
- 감독
- 존 포드
- 제작년도
- 1963
- 출연
- 존 웨인, 리 마빈, 엘리자베스 알렌, 잭 와덴
일흔을 바라보던 존 포드는 존 웨인과 함께 영화사상 가장 정교한 실내 서부극이라 부를만한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를 찍은 뒤, 웨인을 < 말없는 사나이 >의 이니스프리를 닮은 또 다른 샹그릴라로 데리고 간다. 그곳은 ‘할레아칼로아’(Haleakaloa)라는 허구의 지명이 주어진 폴리네시아의 한 섬이다. 실제 촬영 장소는 하와이의 카우아이이며, 할레아칼로아는 하와이어로 ‘웃음과 사랑의 집’이라고 한다. 이니스프리보다 이상향에 더 가까운 이 아름다운 섬에서 존 웨인이 분한 ‘건즈(Guns) 도노반’은 한 때 전쟁 영웅이었지만, 지금은 몇 척의 배를 거느리고 ‘도노반의 산호초’라는 술집을 운영하며 풍요와 게으름을 만끽한다. 서부극 만들기를 직업적 책무로 여기던 전후의 포드가 이 외딴 섬에서의 촬영을 일종의 휴식으로 여겼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 도노반의 산호초 >는 정말로 휴식과도 같은 영화다. 사건에의 무관심이 많은 포드 영화들의 숨겨진 태도라고 해도, 또한 후기로 갈수록 그 태도가 점점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해도, <도노반의 산호초>보다 더 무관심할 수는 없다. 제거해야 할 악은 물론 공동체나 개인을 위기로 몰아넣는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거구의 폭력적인 사내가 이 ‘웃음과 사랑의 집’에서 할 일은 말 그대로 우스꽝스러운 소동과 사랑 외엔 없다. 계급과 성향이 다른 남녀의 결합이 주된 테마라는 점에서 이 영화를 포드의 드문 스크루볼 코미디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 말없는 사나이 >에서처럼 사랑의 성취를 위해 주인공이 애써야 할 일도 없다. 사소한 결핍과 결함들이 무기력과 지루함을 방지하는 유쾌한 오점이 되는 세상, 어떤 긴급한 행동도 요청되지 않는, 그러니 행동 대신 활동만 난무하는 세상. 포드 영화는 결국 이런 곳을 향해 긴 항해를 해왔을 것이다. 서부극 외엔 포드 영화의 상업적 잠재력을 미심쩍어하던 메이저 스튜디오가 이런 한가한 세계를 좋아하진 않았을 것이다. 1962년 7월, 포드가 이 영화의 촬영을 위해 하와이에 도착한 직후 파라마운트는 투자 보류 결정을 내린다. 포드는 철수하지 않고 자신이 제작하기로 마음먹는다. 결국 파라마운트는 배급만 맡고 ‘존 포드 프로덕션’이 제작 크레디트에 오른다. 누구의 간섭도 없는 한가롭고 아름다운 섬에서, 완성된 시나리오도 없이 촬영을 시작한 포드는 매일 밤 다음날 촬영 분량을 구상하는, 즉흥 연출에 가까운 작업을 시도했다. 고령의 포드가 ‘액션’을 외치고 나서야 아직 대사가 완성되지 않았음을 깨닫는 날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제작 환경은 이 영화의 느슨함, 불균질성 그리고 활력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개봉 직후 앤드루 새리스가 「빌리지 보이스」(1963. 8. 1.)에 기고한 평은 “<풀밭 위의 오찬>이 장 르누아르의 <폭풍우>이듯, < 도노반의 산호초 >는 존 포드의 <풀밭 위의 오찬>이다.”라는 흥미로운 문장으로 시작된다. 포드의 <도노반의 산호초>와 르누아르의 <풀밭 위의 오찬>이라는 영화,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폭풍우>라는 희곡은 공히 “노예술가의 평정심과 지혜의 궁극적 정수”라는 것이다. 새리스는 이 작품들에서 “(창작자의) 활달한 사적 비전이 유동하며 캐릭터들의 윤곽을 지워간다.”고 덧붙인다. 그런데 노예술가의 작품을 ‘평정심과 지혜’의 산물로 보는 건 너무 상투적인 단정이 아닐까. 오히려 만년의 포드라면, 실은 만년의 르누아르도 마찬가지이지만,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에서 아도르노의 논의를 빌려 베토벤의 후기작을 두고 말했던 “달관, 체념, 이해, 화해, 포용, 조화, 종합이 아닌 파국, 파열, 흠집, 모순”의 궤적, 그러니까 “죽음 앞에서 또 한 번의 혁명이며 창조적 몸부림”의 표현으로 보는 게 더 타당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도 충분한 것 같지는 않다. 돌이켜보면, 전부는 아니라 해도, 젊은 날의 포드 영화를 포함해 많은 포드 영화가 “파국, 파열, 흠집, 모순”의 표현이 아니었는가. 우리는 이미 < 굽이도는 증기선 >이나 < 젊은 날의 링컨 > 같은 포드의 1930년대 작품에서조차 소란과 난장의 디오니소스적 활력을 목격하지 않았는가. 또한 ‘영예의 시기’에 난데없이 튀어나온 낮도깨비 같은 영화 < 타바코 로드 >에서 속수무책의 파국과 파열의 소요를 만나지 않았는가. 포드의 마지막 작품이 더없이 엄격하고 운명론적인 <일곱 여인>이라는 사실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포드 세계의 여행자인 우리로선 아직은 어떤 부류의 단계론이나 양식화도 보류하고, 개별 작품을 하나의 독립된 전체로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것이다. #1 #2 #3 #4 #5 < 도노반의 산호초 >의 첫 장면도 < 말없는 사나이 >만큼이나 사랑스럽다. 배우 리 마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분한 ‘보츠(Boats) 길훌리’가 섬에 도착하는 첫 시퀀스를 좋아하지 않기 힘들 것이다. 할레아칼로아 연안을 지나는 해군 함정에서 갑판 청소를 하던 길훌리(중년이며 전쟁영웅인데도 여전히 사역을 하는 사병이다)는 선장이 섬에 정박하지 않을 거라고 낄낄거리며 심술궂게 말하자 같이 낄낄거리다 선장을 막대 걸레로 내려친 다음 경례까지 하고 바다로 뛰어든다.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멀리서 헤엄치며 일으키는 물보라만으로 섬사람들은 그가 길훌리임을 알아보고, 모두 항구에 몰려나와 춤추며 환영 퍼포먼스를 벌인다. 곧이어 도노반이 도착하고 예정된 주먹다짐을 시작한다.(#1~#5 ) 같은 날에 태어나 22년째 자신들의 생일만 되면 주먹다짐을 벌이는 전통을 이어온 전쟁 동료인 두 사내의 대결은 섬 최고의 이벤트이지만, < 말없는 사나이 >에서 폭발 직전까지 압축된 갈등의 유일한 해결책이자 대단원이었던 두 사내의 대결과는 다르게, 아무런 서사적 기능이 없는 그저 구경거리일 뿐이다. 마을의 정신적 지도자인 윌리엄 데드햄 박사가 치고받고 있던 두 사람을 꾸짖자 대결은 영화 초반에 끝나버린다. 그토록 인상적으로 등장한 리 마빈의 역할도 이후엔, 그의 팬이라면 섭섭한 일이지만, 코믹한 조연의 역할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리 마빈은 촬영장에 매일 술에 취해 나타났기 때문에, 포드가 그의 역할을 축소시켰을 가능성도 크다). 두 사내의 대결은 싱겁게 끝났지만, 이 섬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곧 보스톤의 부유한 상속녀 아멜리아가 길훌리에 이어 섬에 도착한다. 그녀의 임무는 이곳의 유일한 의사이며 원주민과 결혼한 것으로 알려진, 그녀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 윌리엄 데드햄 박사를 만나 유산 양도 동의를 받아내는 것이다. 여기엔 가족을 버리고 떠도는 미지의 아버지와 독립적인 여인으로 성장한 딸의 갈등과 화해라는 가족 멜로드라마의 오래된 테마가 있다. 또한 도시적이고 세련된 여성 아멜리아와 전근대적이고 마초적인 남성 건즈 도노반의 대립과 결합이라는 스크루볼 코미디적인 테마도 있다. 이 부녀(아멜리아-데드햄 박사)와 남녀(아멜리아-도노반)의 대립적 관계는 개인주의적이고 문명화된 동부와 공동체적이고 야성적인 서부의 갈등이라는 서부극 테마의 변주다. 무엇보다 이곳은 원주민, 일본인 하인과 중국인 상인과 노동자, 프랑스인 지사와 목사 및 간호사, 미국인 유지와 의사, 오스트레일리아 군인이 뒤섞인 인종 전시장이다. 인종주의는 특히 아멜리아와 배다른 혼혈 동생과의 대면이 낳을 수 있는 또 다른 테마다. 하지만 포드는 이 테마들을 다루는 데 많은 숏을 할애하진 않는다. 데드햄 박사는 모든 면에서 존경받을만한 인물이니 부녀의 화해에는 별다른 장치가 필요하지 않고, 도노반과 아멜리아는 처음부터 매력적인 남녀로 설정되어 있어 이들의 결합도 시간문제다. 인종주의는 뒤에 말하겠지만 서사의 주제가 아니라 퍼포먼스의 주제로 다뤄진다. < 도노반의 산호초 >의 포드에게, 테마처럼 보이는 것들은 제재들이다. 서사적으로 탐구될 주제의식이 아니라 일종의 상황 혹은 조건에 가깝다. 유사 테마를 던져놓고 포드는 그 상황 아래 놓인 인물들과 유희한다. <도노반의 산호초>는 더도 덜도 아닌 영화적 놀이다. 그런데 놀고 있는 건 인물이 아니라 포드 자신이다. 우리를 매혹시키는 건 그 유희의 물리적 운동감과 활력이다. 아멜리아의 도착과 그에 이어지는 시퀀스들에서 보는 이를 사로잡는 것도 이런 것이다. #6 #7 #8 #9 #10 #11 아멜리아를 해안으로 무사히 안내하기 위해 도노반이 카누로 마중을 나오지만, 두 남녀는 모두 물에 빠진다. 그러자 원주민으로 보이는 선원들이 줄이어 바다로 뛰어든다. 그녀가 지갑이 바다 속에 빠졌다고 말하자 도노반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그도 곧바로 뛰어든다. 깔끔한 안내는 실패하고 두 남녀는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다. 이 시퀀스의 마지막은 바닷가에서 도노반의 손에 끌려가던 아멜리아의 엉덩방아와 작은 물보라다.(#6~#11) #12 #13 # 14 #15 #16 아멜리아를 태운 지프는 출발하자마자 엔진 폭발음을 내며 달린다. 폭발음은 데드햄 박사 집에 도착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그날 밤 폭풍우와 천둥 번개가 몰아친다. 문소리에 깨어 1층에 내려간 아멜리아는 집에 들어온 아이와 뒤따라온 도노반, 그리고 들이닥치는 비바람을 만난다. 아이를 비바람 부는 밤에 데리고 다닌다고 아멜리아가 도노반을 비난하자 도노반이 문을 박차고 나가고, 다시 거센 비바람이 실내로 몰아치며, 문을 닫던 아멜리아는 엉덩방아를 찧는다.(#12~16) 물보라, 엔진 폭발음, 폭풍우. 이 셋의 의미론적인 연관은 없다. 이들은 이야기와는 이질적인 영역의 잉여들이다. 굳이 찾자면 공통점이 없지 않은데, 그것은 낯선 여인과 접촉한 이 섬의 물리적 반응이라는 것이다. 아멜리아의 바닷물과의 접촉, 자동차와 접촉, 대기와의 접촉에 대한 반응이 각각 물보라, 엔진 폭발음, 폭풍우인 셈이다. 주민들은 환대하고 있지만 원시의 섬 할레아칼로아는 지금 대도시에서 온 방문자에게 심술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해석 없이도 이 장면들은 우리를 사로잡는데, 물보라가 다른 물보라를 불러내고, 엔진 폭발음이 물보라의 시각적 소란을 이어받으며, 폭풍우와 천둥 번개가 물보라와 폭발음에 대답하는 역동적 연쇄의 박력 때문이다. 아멜리아의 도착에 이어지는 일련의 시퀀스들에서 활동하는 건 어떤 서사적 기능도 없이 역동하는 이 잉여들이다. 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연쇄적 소란이 화면에 무의미의 활력과 리듬감을 빚어내는 것이다. 섬의 고장 난 소품들도 잉여들의 소란에 가세한다. 작동하지 않는 축음기, 6년째 고장인 슬롯머신은 소음을 뱉어낼 뿐이며, 뚫린 교회 지붕의 구멍으로 비가 쏟아져 예배자들을 적신다. 서사는 진전을 잊고 소음들이 제멋대로 떠들며 소란을 합주한다. 이곳은 그런 잉여들과 소음들의 축제다. #17 #18 #19 #20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축제가 우리를 홀린다 해도, 이런 영화적 놀이가 과연 칭송받고 존중받아 마땅한가. 왜 우리는 이야기를 잊고 활개 치는 잉여의 숏들에 종종 매혹되는가. 잉여의 숏으로 충분하다면 이야기는 왜 필요한가. 가능한 대답 하나는 이야기의 구속이야말로 잉여의 숏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이야기 안에 있으면서 이야기와 긴장하고 있지 않다면 잉여라고 불릴 이유도 없다. 위대한 숏이 심미적인 구도의 이미지이거나 이야기에 충실히 봉사하는 이미지가 아님은 물론이지만, 이야기로부터 독립적인 자기 완결적 이미지도 아닌, 이야기와 교섭하고 긴장하며 이야기를 넘어서려는 하나의 운동이다. 위대한 숏은 아무리 유희적으로 비치더라도 내재적이면서도 초월적이라는 역설의 구현이다. < 도노반의 산호초 >가 유독 유희적으로 보인다면, 포드가 어떤 영화에서보다 이야기를 느슨하고 허술하게 만들어 곳곳의 틈새들을 잉여들의 놀이터로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술집에서의 난투극처럼 쓸데없는 장면도 드물 것이다. 무슨 이유에선지 도노반의 술집에서 바텐더로 일하게 된 길훌리는 술 마시러 온 오스트레일리아 해군 하사관 셋을 경멸 투로 ‘수병(limey)’이라 부르며 내쫓으려 한다. 싸움이 붙으려는 찰나에 도노반이 뜯어말린다. “우린 전우였잖아”라는 도노반의 말에 수긍하고 웃으며 화해의 악수까지 나눈 뒤 ‘수병’은 뒤따라온 사병에게 “넌 저 양키 두 놈과 한패 먹어. 이제 3대3이지?”라며 사병의 얼굴을 갈긴다. 갑자기 싸움판이 벌어지자마자 길훌리는 수병이 아니라 도노반을 때려눕힌다. 몰려온 수병들까지 가세하지만 누가 누구와 싸우는지 알 수 없는 난장판이 벌어진다. 그 와중에도 도노반은 길훌리가 일어설 때마다 때려눕힌다. 클라이맥스는 그다음이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길훌리가 난데없이 슬롯머신에 동전을 넣자, 6년째 고장이던 기계가 동전을 폭포수처럼 뱉어낸다. (#17 ~ #20) 이치에 닿지 않고 어리석으며 유치하고 폭력적인 본능의 퍼포먼스가 벌어진 뒤 갑자기 축복이 쏟아진다. 슬롯머신의 동전 세례는 말 그대로 하늘의 축복이다. 이 돈으로 비로소 교회의 지붕을 고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섬에선 그리고 < 도노반의 산호초 >에선 모든 게 이런 식이다. 진지한 이야기가 다룰만한 심각한 문제란 존재하지 않고, 선의의 인간들은 게으른 시간을 누리며, 바다와 하늘과 사물들은 이유 없이 삐걱거리며 소음을 연주하고, 작은 구원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온다. 고장 난 사물, 심술궂은 대기의 변덕스러운 작동, 하지만 난데없이 되찾아지는 균형과 해결되는 갈등. <도노반의 산호초>가 장 르누아르의 <풀밭 위의 오찬>과 공유하는 게 있다면 인간의 서사를 오작동시키는 정령의 서사라는 점이다. 이건 존 포드의 전적으로 새로운 이야기인가. 그렇진 않을 것이다. 포드의 많은 서부극들은 이미 인간의 서사를 왜소하게 만드는 초월적 풍경의 서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21 또 다른 시퀀스 하나를 빠트리고 갈 수는 없다. 지붕이 수리되지 않은 교회에서 섬 주민들이 모여 성탄 미사를 시작한다. 프랑스인 지사가 내레이션을 시작하고 아이들과 몇몇 어른들이 이에 맞춰 기발한 퍼포먼스를 벌인다. “그리하여 아기 예수가 탄생한 다윗의 도시를 베들레헴이라 불렀다. 저 하늘의 별을 보라. 그때 동방에서 세 현자가 찾아왔다. 세 왕들은 선물을 들고 아기 예수 앞에 무릎 꿇고 경배했노라. 그중 한 명은...” 이때 섬의 원주민 경찰서장이 열대과일을 잔뜩 들고 등장한다. “폴리네시아 왕이었고...”(#21 ) #22 내레이션은 이렇게 이어진다. “중국의 황제도 왔으며...”. 이번에 지사의 비서이자 책사인 중국인 미스터 유가 찻주전자와 찻잔을 들고 등장한다. (#22 ) #23 “또 한 명은...” 이어지는 내레이션을 읽던 지사가 잠시 멈칫한다. “...또 한 명은 미국의 왕이었다.” 어이없게도 풀잎 면류관을 쓴 길훌리가 고장 난 축음기를 들고 등장한다. (#23) #24 이 순간 폭우가 쏟아진다. 모두 예상한 듯 우산을 꺼내 들지만 오스트레일리아 군인들과 ‘미국의 왕’ 길훌리는 물세례를 받는다.(#24 ) 이것이 이 영화에서 인종주의를 다루는 포드의 방식이다. 서사의 기술이 아니라 액자화된 퍼포먼스로 인종 간의 화해를 노래하기. 포드는 이야기꾼이 아니다. 그는 서사의 정교한 장치를 채택하지 않는다. 허구로서의 서사적 해결을 설득하는 대신 그는 인종주의를 다룬 하위 서사를 과장되고 날조된 퍼포먼스로 제시한다. 과장과 날조를 노골적으로 전시하는 이 우스꽝스러운 퍼포먼스에 영화에서 이야기의 지위, 인간의 서사를 다루는 포드의 중요한 태도가 담겨 있다. 그는 여전히 대지의 감독이다. (계속)
존 웨인이 돌아온다. 이번엔 황야를 떠돌던 서부사나이가 아니라 모종의 사연을 지닌 전직 복서이다. 어린 시절 고향을 떠나 미국에서 링의 강자로 군림하다 고향인 아일랜드의 이니스프리로 돌아온 것이다. 그는 이제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평생을 보내려 한다. 이 공동체는 그를 받아들일까. 존 포드의 서부극에서라면 공동체는 치명적인 위협 아래 놓여있고, 이 유능하고도 폭력적인 사내는 그 위협을 제거한 뒤 어쩔 수 없이 떠날 것이다. 그 자신도 공동체의 문명에 순응할 수 없는 잠재적 위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이니스프리라는 가상의 공동체에는 제거해야 할 위협이 없다. 사내는 “이니스프리는 언제나 내 마음속의 천국이었다.”고 말하는데 이곳은 정말 천국과도 같다. 테크니컬러로 촬영된 초록의 자연은 숨 막힐 듯 아름답고 마을은 한가로움과 선의로 가득하며 악인은 찾아볼 수 없다. 무대가 이처럼 샹그리라를 닮은 또 다른 존 포드 영화는 < 도노반의 산호초 >(1963) 외엔 없다. ‘말 없는 사나이’에게 주어진 유일한 숙제는 사랑하는 여인과의 완전한 결합이다. 둘은 결혼했지만 여인의 오빠는 지참금 지불을 거절하고, 여인은 지참금을 찾아오지 않는 한 동침할 수 없다고 버틴다. 하지만 결국 결합은 완수되고 정착은 성공한다. ‘아일랜드의 연풍’이라는 제목으로 더 많이 알려진 < 말 없는 사나이 >는 포드의 드문 낙천적 로맨스영화, 어쩌면 유일한 섹스영화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화사하고 명랑한 외피가 영화의 전부는 아니다. 이 영화의 완성은 존 포드의 오랜 숙원이었다. 1933년 「Saturday Evening Post」에 실린 모리스 월시(Maurice Walsh)의 단편 ‘초록의 쇄도 The Green Rushes’(초록은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색이다)를 읽은 포드는 이를 영화화하기로 마음먹고 1936년 원작 판권을 사들였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의 실현에는 15년이 더 걸렸다. 무엇보다 이 프로젝트의 성공 가능성을 믿는 제작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1944년, 포드는 < 역마차 >(1939) 이래 친구가 된 존 웨인,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1941)에서 인연을 맺은 모린 오하라와 이 영화를 함께 하기로 마음을 모았다. 하지만 리퍼블릭 픽처스의 프로듀서 허버트 예이츠는 “이런 멍청한 아일랜드 이야기로는 한 푼의 돈도 벌 수 없다”고 투자를 거절했다. 1940년대 후반에는 사정이 더 어려워졌다. 포드가 자신의 제작사 아르고시(Argosy)에서 찍은 < 도망자 >(1947)의 흥행실패로 빚더미에 올랐기 때문이다. 결국 포드는 웨인, 오하라와 서부극 한 편을 더 찍는다는 조건으로 리퍼블릭으로부터 어렵사리 < 말 없는 사나이 >의 제작 결정을 얻어냈다. 그 서부극이 바로 < 리오 그란데 >(1950)였다. “나는 이 무렵(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 <도망자>로 생긴 빚을 갚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 없는 사나이> 제작비를 마련하려고 일했다. 이 영화로도 돈을 잃겠지만 어쩔 수 없다.”라고 포드는 회고했다. 전후의 포드는 대개 이런 식이었다. 자신이 찍고 싶은 사적인 영화의 제작비 마련을 위해 서부극을 찍었고, 만들기만 하면 일정한 수입이 보장된 대중적 장르인 서부극(아마도 오늘날이라면 호러가 이러한 장르로 취급받고 있을 것이다)은 감독이라는 직업을 가진 그에게 주어진 ‘일’이었다.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던 1950년 10월 22일, 미국 감독협회에서 행한 포드의 유명한 연설의 첫마디 “내 이름은 존 포드요. 서부극을 만듭니다.”는 서부극에 대한 그의 자부심이나 애착의 표현이라기보다, 자신이 보잘것없는 영화를 만드는 하찮은 장인일 뿐이라는 자기비하의 수사였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걸작들이며 이미 이 연재에서 다룬 바 있는 < 도망자 >, < 웨건 마스터 >(1950), < 태양은 밝게 빛난다 >(1953) 등이 태어난다. < 말 없는 사나이 > 역시 포드가 자신이 사랑하는 자신의 영화에서 빼놓지 않고 언급하는 가장 사적인 영화 가운데 한 편이며, 그의 영화 세계가 온전히 드러난 포드적인, 너무나 포드적인 작품이다. 이 영화는 완성된 뒤에도 리퍼블릭 픽처스의 수장인 허버트 예이츠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러시 필름을 본 예이츠는 “온통 초록이구만”이라며 불평했다. 더구나 129분이라는 상영시간이 너무 길다는 이유로 120분 이하로 줄이라는 지시를 내렸다. 포드는 스튜디오 간부를 위한 시사회에서 129분의 < 말 없는 사나이 >를 상영하며, 정확히 120분이 지난 시점에 상영을 중단했다. 그리고 말했다. “자, 지금까지 장면 중에서 뺄 곳이 있으면 말해주시오.” 간부들은 말이 없었고 결국 원본 그대로 극장 상영이 결정되었다. 이 영화는 포드의 영화 중에서 가장 높은 흥행성적을 기록했고, 포드는 이 영화로 < 밀고자 >(1935) < 분노의 포도 >(1940)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1941)에 이어 네 번째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다. 1952년의 아카데미 영화제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연관된 흥미로운 점이 있다. 이 문제로 잠시 우회해보자. 감독상은 < 말 없는 사나이 >의 존 포드가 받았지만 작품상은 세실 드밀의 < 지상 최대의 쇼 The Greatest Show on Earth >에게, 남우주연상은 프레드 진네만의 서부극 < 하이 눈 High Noon >의 개리 쿠퍼에게 주어졌다. 이 해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하이 눈>이었다. 비평 진영을 대표하는 뉴욕비평가협회는 작품상과 감독상을 모두 <하이 눈>에 바쳤다. 양쪽에서 완전히 버림받은 것은 찰리 채플린의 가슴 저린 애가 < 라임라이트 >였다. 앤드루 새리스는 저서 「John Ford Movie Mystery」(1975)에서 “이 해의 포드는, 채플린만큼 무시당하진 않았지만, 지나간 시절의 진기한 골동품으로 취급당했다.”고 썼다. 눈길을 끄는 건, 위의 네 작품을 만든 사람들이 당시에 ‘공산주의자 척결’을 주창한 매카시즘과 연관된 날카롭고 복잡한 정치적 갈등 관계에 놓여있었다는 점이다. 갈등이라기보다 정치적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세실 드밀은 당시 할리우드에서 매카시즘을 주도한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앞서 언급한 1950년의 감독협회 모임에서 그는 당시 감독협회 회장이던 조셉 맨케비츠의 모호한 태도를 비난하는 긴 연설 끝에 ‘비미국적 un-American’ 영화인으로 빌리 와일더, 윌리엄 와일러와 함께 프레드 진네만을 지목했다. 자신을 서부극 감독으로 소개한 포드의 돌발 연설은 드밀의 발언 끝에 나온 것이다. 포드의 연설은 이렇게 이어졌다고 한다. “나는 드밀의 말에 동의하지 않소. 나는 그를 존경하오. 하지만 그가 싫소... 나는 맨케비츠도 드밀도 열렬한 공화당 지지자로 알고 있소. 지금 여기서 공산주의를 두고 우리끼리 싸우고 있는데, 내겐 그저 웃기는 일이오.” 그리고 2년 뒤 앞서 언급한 영화 네 편이 개봉된다. 존 웨인이 “내가 본 영화 중에 가장 비미국적인 영화”라고 비판한 < 하이 눈 >의 각본은 블랙리스트에 오른 작가 칼 포어먼(Carl Foreman)이 썼고 그는 1951년에 결국 영국으로 이주했다. 역시 블랙리스트에 올라있던 찰리 채플린이 1952년 10월, < 라임라이트 > 런던 개봉을 위해 퀸엘리자베스 호를 타고 가던 도중에 미국 당국으로부터 비자를 말소당해 사실상의 추방명령을 받은 사건은 유명하다. 한편 포드의 절친한 영화 동료이며 < 말 없는 사나이 >에서도 함께 작업한 존 웨인과 워드 본드는 블랙리스트를 적극 지지하는 극우파였다. 워드 본드는 매카시를 위한 파티를 개최한 적이 있고, 존 웨인은 극우파 상원의원 로버트 태프트의 지지자였으며 매카시즘 시대의 블랙리스트를 다룬 최근 영화 < 트럼보 >(2015)에서 묘사되듯 갖가지 선동활동에 앞장섰다. 극우파 배우들의 친구이자 후견인이면서도 드밀의 극우적 선동에 반기를 든 포드의 정치적 입장은 기묘했다. 그는 당시 대통령 트루만의 지지자였고 2차 대전 참전의 공훈을 인정받은 명예 해군 사령관이었다. 하지만 FBI는 포드를 ‘잠재적 공산주의자’로 분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농업노동자를 위한 존 스타인벡 위원회’ 같은 진보적 조직의 기부자였으며, 스페인 내전 당시 좌파를 후원했고, 사촌이 가입한 IRA에도 돈을 보냈으며 무엇보다 존 스타인벡의 ‘사회주의적 소설’ 「분노의 포도」를 영화로 만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 그는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작품성을 논외로 한다면, 1952년의 아카데미는 절충적 선택을, 비평 진영은 진보적 선택을 한 셈이다. 이 연재에서 몇 차례 언급했듯이 존 포드는 자신의 정치적 미학적 견해를 거의 밝히지 않는 과묵한 남자였다. 정치적 혼란의 와중에 그는 20년 가까이 마음에 품어온 < 말 없는 사나이 >를 드디어 완성했다. 이 영화는 스튜디오는 물론 포드 자신의 예상과도 다르게 관객의 환대를 받았고 그해 최고 흥행작 대열에 올랐다. 하지만 비평가들은 이 영화를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로 간주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거나 평가를 주저했다. 두 가지 쟁점이 <말 없는 사나이>에 대한 유보적 혹은 부정적 평가와 연관된다. 하나는 이 영화가 아일랜드의 마을을 이상화한 반면 진지한 탐구는 결여하고 있다고 보는 시각이다. 당대 주류언론의 리뷰어 뿐만 아니라 걸출한 비평가 마니 파버(Manny Farber)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에게 < 말 없는 사나이 >는 “싸구려 소설에서 유래한 종잇장처럼 얇은 캐릭터들”의 연애담이며 “감상 과잉의 풍경과 설교로 가득한 < 분노의 포도 >보다 나을 바 없는 구식 상업영화”로 비쳤다. 그의 비판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럴듯해 보이는 모든 시시한 수작들(hokums)이 아일랜드인을 유머러스하고 다정한 사람들로 보이게 만든다... 아일랜드와 아일랜드인들에 관한 이 현혹적이고 인상주의적인 탐구는 교란적이다.”(‘Parade Floats’, 「Farber on Film」) 이런 견해에 대한 최근의 반론 가운데 하나는 에세이스트 벤 슈워츠(Ben Schwartz)가 썼다. “(보안관 개리 쿠퍼가 배지를 던지고 마을을 떠나는) < 하이 눈 >이 끝나는 곳에서 < 말 없는 사나이 >가 시작된다... 이 영화는 블랙리스트 시대에 만들어진 가장 전복적인 영화 가운데 하나다. 미국을 견딜 수 없어 떠나고 다시 돌아오지 않으려는 남자의 이야기인 것이다... 존 웨인이 연기한 주인공 션 쏜튼처럼 포드 역시 폭력, 물질적 성공 그리고 아메리칸 드림의 예기치 않은 결과에서 벗어나려 했던 것이다.”(‘The Subversive St. Patrick’s Day Classic’ 「New Republic」 2013. 3. 16.) 다른 하나는 존 웨인이 모린 오하라의 엉덩이를 걷어찬 뒤 강제로 끌고 오는, 악명 높은 장면과 연관된다. 태그 갤러거가 “수백 년 동안 연극 무대의 관습 가운데 하나였던 엉덩이 차기 때문에 그토록 오래 욕먹은 감독이 있을까”라고 말할 정도로 이 장면은 영화에서 여성혐오 표현의 중요한 사례로 꼽혔으며, 지금도 IMDb에는 ‘misogyny’가 이 영화의 첫 연관검색어로 등장한다. 말하자면 < 말 없는 사나이 >는 반여성적 영화라는 것이다. 하지만 페미니즘 영화비평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숭배에서 강간까지」에서 몰리 해스켈은 정반대의 견해를 제시한다. “존 포드의 가장 사랑스러운 영화 가운데 하나인 < 말 없는 사나이 >의 분명한 주제”는 “결혼을 통해 이름과 함께 자신을 잃어버릴 것 같은 여성의 진짜 두려움”이다. 모린 오하라가 연기한 여주인공 메리 케이트가 가구와 지참금에 집착하는 이유는 “가구가 처녀 시절의 이름처럼 그녀의 인격의 일부이며, 돈은 그녀가 남편에게 완전히 의지해서 그에게 흡수되지 않도록 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침내 지참금을 얻어냈을 때 메리는 돈을 난로에 던진다. 남편이 돈의 의미를 이해했기 때문에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해스켈에게 <말 없는 사나이>는 존 포드의 가장 놀라운 페미니스트 영화이다. 여기선 두 쟁점에 대해 더 거론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이 엇갈리는 견해들이야말로 그의 소속 없는 정치성과 마찬가지로 존 포드의 영화가 지닌 정박될 수 없는 모호성과 복합성의 징표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말 없는 사나이 >를 볼 때마다 나는 무장해제당하는 느낌에 빠진다. 춥고 주렸던 오랜 항해 끝에 마침내 안식의 항구에 이른 느낌. 더 이상 닻을 올리고 싶지 않은 이 무력감에 가까운 행복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 비판적 평자들이 말하는 ‘당의정처럼’ 아름다운 풍경 그리고 선의와 유머의 사람들 때문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영화의 달콤함은 쓴맛을 감추는 당의가 아니다. 존 포드의 세계를 유랑해온 우리에게 그 달콤함은 이 세계의 심장에 도착했을지도 모른다는 모종의 성취감 혹은 안도감에 가까운 것 같다. 아일랜드의 한적한 시골 기차역. 한 사내가 기차에서 내린다. 말끔한 신사복을 입은 존 웨인. 군복 차림도 아니고 탄띠도 매지 않은 웨인이 도착하는 모습을 이전의 포드 영화(< 역마차 > < 데이 워 익스펜더블 > < 아파치 요새 > < 황색 리본의 여인 > < 리오 그란데 >)에선 본 적이 없다. 더구나 그는 지금 환하게 웃고 있다. 먼 길을 돌아 이제야 집에 돌아온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수군거린다. 저 거구의 낯선 사내가 왜 이곳에 온 걸까. 낚싯대도 카메라도 없이. 이들에겐 과도한 호기심 외엔 어떤 적의도 경계심도 없다. 존 웨인은 드디어 싸울 필요도 다시 떠날 필요가 없는 곳에 도착한 것이다. 첫 시퀀스만으로 겨룬다면 < 말 없는 사나이 >는 포드 영화 중에서 단연 최고다. 이니스프리로 가려는 낯선 사내 주위로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안내자를 자처하며 한바탕 수다를 벌인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목적지에 데려다주는 데는 관심이 없는 듯, 하고 싶은 말을 제멋대로 떠들고 웨인은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잠시 목적지를 잊어도 좋은 세계, 얼마간의 지체가 아무런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는 세계, 오히려 그 짧은 지체의 시간이야말로 평온과 웃음이 가득한 천국과도 같은 세계, 5년 뒤 < 라이징 오브 더 문 >(1957)의 두 번째 에피소드 ‘1분간 정차’에서 온전히 펼쳐질 그 소란스럽고도 사랑스런 세계. 황야에서 맹수처럼 싸워 승리하고도 행복할 수 없었던 사내가 그런 세계에 비로소 도착한 것이다. 이 세계는 어떤 곳인가. 그에게 주어진 이름은 션 쏜튼이며, 어릴 때 이 곳을 떠나 미국에서 살다가(나중에 밝혀지지만 권투 챔피언이었던 그는 시합에서 한 선수를 죽음에 이르게 했고 그 때문에 링을 그리고 미국을 떠났다) 몇 십 년 만에 고향에 정착하기 위해 돌아왔다는 배경 서사가 설명된다. 하지만 존 포드 영화를 오래 만나온 우리에게 존 웨인은 이 개별 서사에 갇힌 인물이 아니다. 상호텍스트적이거나 초텍스트적 존재로서 그는 미국을 떠나 아일랜드로 돌아온 것이라기보다, 서부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서부를 고유명사가 아니라 서부극이 창안한 장소로서의 보통명사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미국관객이 아닌 우리가 별다른 노력 없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이 특권이 우리를 미국관객보다 존 포드의 세상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이끌 것이다. 그러니 마니 파버의 비판론과 벤 슈워츠의 옹호론을 잊어도 좋을 것이다. 슈워츠의 한 문장은 고쳐 쓸 수 있겠다. < 하이 눈 >이 아니라 서부극이 끝나는 곳에서 < 말 없는 사나이 >는 시작한다. 말하자면 <말 없는 사나이>는 포스트 서부극이다. 서부극에는 독이 있다. 아무리 서부극을 사랑한다 해도 그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서부극은 ‘정당한’ 폭력과 제거의 서사다. 서부는 황야의 규칙 즉 더 강하고 유능한 폭력이 지배하는 곳이다. 공동체의 위협은 서부사나이의 정당한 폭력(주로 사적인)으로 제거된다. 어떤 예술 분야도 영화만큼 제거의 폭력을 애용하지는 않으며, 그 발원지에 서부극이 있다. 불가능한 공존, 불가피한 폭력과 제거라는 장르적 관습은 서부극의 율법이며 포드가 “내가 만들고 싶었던 것에 가장 가까운 영화이며, 가장 단순하고 순수한 서부극”이라고 말한 < 웨건 마스터 >(1950) 조차 넘어서지 않은 계율이다. 서부극의 독이 제거의 폭력이라는 장르적 관습 자체에 있는 건 아니다. 서부사나이는 폭력으로 악인을 제거한 뒤 공동체에 정착하지 않고 떠난다. 사적 폭력의 행사자인 자신 또한 공동체 문명의 위협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명의 축복은 그의 것이 아니며, 용감한 그에게 안식은 없다. 그는 자신의 총알이 악인을 꿰뚫은 다음 결국 자신에 이를 것임을 알고도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이 영웅적 결단의 비극적 정념이 서부극 관객을 사로잡는다. 서부극의 폭력은 대개 정의의 실현이라는 에토스 이면에 감춰진 자기 비극화의 파토스에 실려 있고, 이제 폭력은 설득이 아닌 정동(情動)의 문제가 된다. 정의로운 제거의 폭력이라는 장르의 계율이 위험해지는 건, 자기도취적 정념이 폭력의 동력원이 되는 이 지점에서다. 션 쏜튼이 떠나온 것은 바로 그 위험한 계율의 장소인 서부다. 그가 성난 얼굴로 서부와 전장을 누비던 존 웨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극 중의 쏜튼이 미국에서 활동하던 링은 서부를 지배하는 황야의 규칙을 양식화한 공간이다. 20세기 초까지도 권투는 상대방이 쓰러질 때까지 계속되는 야만적 스포츠였다. 더구나 링에서 쏜튼은 정당한 폭력으로 상대방을 죽였다. 그는 ‘정당한 살인자’라는 딜레마를 서부사나이와 공유한다. 그의 이력은 서부사나이의 이력의 알레고리다. 그러니 존 웨인의 션 쏜튼을 어떻게 황야를 떠나온 서부사나이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말 없는 사나이 >의 장소는 서부와 완전히 다른 곳인가. 쏜튼은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기묘하게도 여기서 말 경주와 결투를 요구받는다. 서부극의 가장 중요한 관습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관습이 실행되는 맥락은 완전히 다르다. 말 경주는 서부극에서의 목숨이 걸린 추격과 도피와 무관한 말 그대로 이 마을의 전통이 된 시합이고 축제이며, 쏜튼이 끝내 피하려 했던 메리의 오빠와의 결투는 제거가 아닐 합일에 이르는 경로다. 말하자면 <말 없는 사나이>는 서부극의 핵심적 관습을 끌어오면서 서부극과는 완전히 다른 지점, 제거가 아닌 공존에 이른다. 요컨대, 존 포드는 이니스프리라는 가상공간에서 서부극의 관습을 반복하며 그것을 공존의 제의로 역전시킴으로써 서부극의 독을 씻어낸다. 말 경주 들판과 사람들 결투 두 사내가 주먹다짐을 벌이는 결투 장면보다 그 제의성을 더 잘 보여줄 수는 없다. 나른한 평화만 가득하던 마을에 두 사내의 싸움이 예고되자, 마을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삽시간에 모여든다. 한가롭던 초록 들판을 싸움 구경꾼들의 행렬이 가득 메우고, 성직자들을 포함해 마을 사람 모두가 내기에 뛰어든다. 모두 이 폭력의 대결을 고대했던 것이다. 술집 주인이 말한다. “오늘이 이니스프리 최고의 날이군.” 한없이 이어질 듯한 결투가 끝난 뒤 두 사내는 어깨동무를 하고 메리에게 향한다. 폭력을 피할 수 없다면 혹은 그것에의 동경을 멈출 수 없다면, 유일한 출구는 폭력을 제의화하는 것이다. 모두가 폭력에 환호하는 데 어떤 제거도 발생하지 않는 제의, ‘정당한’ 에토스의 위장 없는 날 것 그대로의 파토스로서의 폭력, 그래서 도덕적이라기보다 차라리 윤리적이라고 부르고 싶은 폭력이 자신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제의. 이를 서부극의 살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쏜튼이 도착한 장소를 해독된 서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니스프리에는 더 많은 것이 있다. 한 장면을 빼놓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쏜튼은 어렵사리 구입한 옛집에 도착한다. 오래 비워져 있었을 그 집에 누군가 벽난로를 피워놓았고 청소 중이었는지 쓰레기를 모아두었다. 전 장면에서 우리는 쏜튼과 메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을 목격했으므로, 누가 그랬는지 쏜튼도 알고 이 영화를 보는 우리도 알 수 있다. 저녁의 잔광이 스며드는 창문을 바람이 세차게 흔들고 실내엔 약간의 긴장이 흐른다. 이때 이 영화에서 가장 괴이하고도 아름다운 장면이 이어진다. 쏜튼이 돌을 집어 들더니 괴성을 지르며 창문을 향해 던지고 유리창이 깨진다. 숨어있던 메리는 놀라 일어나더니 거울을 보고 비명을 지른 뒤 집 밖으로 달려나가려 한다. 쏜튼은 그녀를 잡아챈 뒤 격렬한 바람을 맞으며 입을 맞추고, 메리는 쏜튼의 뺨을 때리려 한다. 이 시퀀스는 논리적 연관이 없는 행위와 쇼트들의 연쇄로 이루어져 있다. 왜 쏜튼은 그토록 돌아오고 싶어 했던 옛집의 창문을 깨트리며 괴성을 지르는가. 숨어있는 메리를 불러내려 했다 해도 그는 왜 이런 난폭한 방법을 택하는가. 괴성과 유리창 깨지는 소리를 들었을 메리는 왜 거울을 본 다음에야 비명을 지르는가. 매우 로맨틱한 조우가 될 수도 있을 장면에서 바람은 왜 이토록 거칠게 두 남녀에게 몰아치는가. 하지만 이 장면을 다시 보면 이런 질문이 무의의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포드는 표면을 매끈하게 가다듬어 하나의 감정을 온전히 표현하는 감독이 아니다. 바람, 예기치 않은 괴성과 유리창 파열, 거울과 지체된 비명, 다시 바람, 흩날리는 스카프와 옷자락의 시청각적 이미지들의 숨 가쁜 연쇄 후에 격렬한 키스가 이뤄진다. 이 키스 장면의 감흥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 한 장면의 감흥은 그 장면의 미장센과 행동이 이전 쇼트들이 누적한 감정과 만나 표현된다. 온갖 이질적인 시청각적 이미지들의 연쇄야말로 보통의 경우라면 로맨틱한 입맞춤에 그쳤을 이 장면에, 태그 갤러거가 경탄한 “절정, 사랑, 이해, 공포, 고통, 모욕, 분노, 두려움, 수치와 같은 수많은 감정들”을 담아낸다. < 모감보 >(1953)의 클락 게이블과 그레이스 켈리의 키스 장면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장 단순한 장면에서조차 감정의 만화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것이 포드의 디테일이다. 옛집에서의 키스 시퀀스와 대구를 이루는 장면이 한참 뒤에 등장한다. 결혼은 했으나 지참금 문제로 아내에게 동침을 거부당하는 사내 쏜튼이 밭에서 일을 하고 있고, 그의 곁으로 메리가 조용히 다가온다. 메리에게 쏜튼은 말없이 작은 들꽃을 따 건네준다. 짧은 정적이 흐른다. 구애하고 키스하고 청혼하고 결혼했으나 아직 온전히 아내가 되지 않은 여인. 더 이상 소용없을 장미 꽃다발 대신 건네진 이 가녀린 들꽃에는 소란스런 격정과 흥분 이후의 슬픔, 우울, 간절함, 예의, 조심스러움이 사랑의 마음과 함께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답고 가슴 저린 장면이다. 포드의 영화를 이질적인 것들의 난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가 말 그대로의 축제 장면에서뿐만 아니라 이런 단순한 장면에서조차 감정의 종잡을 수 없는 소란을 빚어내기 때문이다. 해독된 서부인 이니스프리는 폭력적 제거의 행동 이미지를 대신하는, 긴 스펙트럼의 감정의 빛을 난반사하는 포드적 디테일의 카니발이기도 하다.(계속)
1. < 스파이 브릿지 >에는 스파이가 없다. 정확히 말하면 스파이 활동이 없다. 첫 시퀀스에서 그림이 취미인 듯한 소련 스파이 루돌프 에이블(마크 라일런스)이 브루클린 다리를 그리면서 암호 쪽지를 전달받지만, 그 내용은 관객으로선 알 수 없다. 영화는 그의 이전 첩보활동에 대해서도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또 다른 주인공은 변호사 제임스 도노반(톰 행크스)인데 그의 변호사 활동도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치열한 법정공방 같은 건 아예 등장하지 않으며 우리가 볼 수 있는 그의 법정 발언은 헌법재판소에서의 마지막 변론뿐이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스파이와 변호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놓고 놀랍게도 그들의 본업을 거의 다루지 않는다.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별로 많은 관객이 보지 않은 건 이 선택의 의외성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더 놀라운 건 두 주인공의 심리도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형당할 위기에 놓인 에이블은 시종 태평스런 표정으로 아주 적게 말하고, 적국 스파이 변호라는 고약한 일을 떠맡은 도노반은 자주 말하지만 고뇌와 갈등을 전혀 드러내지 않으며 역시 약간 찡그린 듯 무표정으로 일관한다. 인상적인 장면 하나가 있다. 도노반은 CIA 국장으로부터 소련과의 스파이 맞교환 협상가 역할을 제안받는다. 정부가 개입하지 않은 조건이므로 그는 공식적인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없고, 협상 장소는 동서 장벽이 막 세워지기 시작한 혼란과 위험의 도시 베를린이다. 이건 목숨이 걸린 일이다. 국장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가요?”라고 묻자 도노반은 약간 찡그린 얼굴로 별 망설임 없이 “아니요”라고 대답한다. 앞서 소련 스파이 변호라는 불명예스러운 역할이 주어졌을 때에도 심드렁하게 수락했지만, 이 장면에서 도노반은 도대체 고민이라는 게 없는 인간처럼 보인다. 이 장면이, 옳은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감행하는 영웅적 캐릭터를 표현하고 있다고 말하는 건 충분하지 않다. 영화의 서두에서 우리가 본 건 능변의 보험전문 변호사였을 뿐이다. 보험전문 변호사에서 목숨을 건 영웅적 협상가로의 이행에 단 하나의 번민의 쇼트도 할애하지 않은 건 스티븐 스필버그의 결정이다. 영화는 고뇌 따위를 다루는 매체가 아니라는 듯 말이다. < 스파이 브릿지 >가 뭔가 다루는 게 있다면 그것은 협상이다. 영화의 3분의 2는 도노반의 협상 활동으로 채워져 있고, 그 활동은 결국 성공한다. 이 영화를 장르적인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면 협상의 영화라고 부르고 싶다. 협상은 말의 활동이다. 협상의 말은 (정보)전달이나 (감정)표현과 무관한, 무기로서의 말이다. 법정드라마에서도 많은 말이 쏟아지고 격돌하지만 법정의 말은 사건의 실체라는 기원을 벗어날 수 없고 법이라는 이름의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 협상의 말은 목표만 있을 뿐 기원 없는 말이고 규칙 밖의 말이며, 오직 말 자체의 활동성으로 상대방의 말과 겨루어 자신의 목표에 이르러야 한다. 이 점에서 협상의 말은 검과 동질적이다. 그러니 < 스파이 브릿지 >는 차라리 말의 활극이다. 스파이 활동도 법정 공방도 영웅의 고뇌도 삭제되고, 오직 말의 민첩함과 유연함과 강인함에 이야기의 대부분이 걸려있다면, 그런 영화를 말의 활극이라 부르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도노반은 오히려 말을 아껴 상대방의 말을 베야 할 때 비로소 입을 여는 말의 고수다. 대본을 쓴 코엔 형제는 대사만으로도 한 편의 활극을 완성할 수 있는 재능을 과시한다. 이런 영화야말로 진정한 토키영화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점을 과장해선 안 된다. 도노반의 말의 우월함은 그의 협상 성공이라는 결과로 인해 거슬러 추인되는 것이다. 그의 말은 강하지만 진정한 적을 만난 것 같지는 않다. 그의 상대들이 고수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의 말은 유연하고 민첩하며 너무도 상식적이어서 차라리 아름답지만 새롭거나 심오한 말은 아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말은 오히려 소련 스파이 에이블의 것이다. 에이블은 면회실에서 도노반에게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버지의 친구가 있었다. 아버지는 그를 눈여겨보라고 했다. 그를 지켜보았지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국경수비대가 우리 집에 쳐들어와서 부모를 때리고 아버지의 친구도 때렸다. 그런데 그는 맞고도 일어났다. 계속 때려도 또 일어났다. 그러니까 더 이상 때리지 않았다. 우리는 그를 일어서는 사람(standing man. 개봉판 자막에는 ‘오뚝이’)이라고 불렀다. 당신을 보면 그 사람이 생각난다.” 에이블이야말로 진정한 말의 고수다. 진술의 면에서만 보면 그의 말에는 아버지의 한 친구가 맷집과 배짱이 좋았다는 것 사실 외엔 없다. 거의 텅 빈 그의 말이 우리의 귀를 사로잡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와 ‘맞아도 계속 일어섰다’ 사이의 아득한 간격에 있다. 어떤 설명으로도 채울 수 없을 만큼 간격이 넓어 보이는데도 앞 문장은 단숨에 뒤 문장에 도달한다. 그냥 코엔 형제의 터치가 담긴 시적인 대사라고 말하면 그만이겠지만 나는 다르게 보고 싶다. 에이블의 말은 이 영화의 주제에 대한 자기 언급일 뿐만 아니라 간격의 문제와 연관된 이 영화의 형식에 대한 자기 언급으로도 느껴지기 때문이다. 2. 영화는 간격을 다루는 예술이다. 모든 예술이 자기 질료들의 간격을 다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카메라와 대상, 대상(인간, 사물, 풍경)들, 움직임들, 소리들 사이의 물리적 간격, 말들과 사건들 사이의 의미론적 간격, 그리고 쇼트들과 시퀀스들 사이의 시간적 간격, 다시 말해 거의 모든 국면에서 물리적, 의미론적, 시간적 간격이라는 문제가 출현하고 여기에 더해 그들 사이의 간격 다시 말해 간격들 사이의 간격이라는 문제가 가담한다. 영화가 사건과 심리를 충실히 묘사해야 한다는 고전적 계율에 따른다면 간격은 묘사의 효율성에 봉사해야 한다. 이때, 간격은 존재하지만 간격의 문제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스필버그의 21세기 영화는 고전적 계율을 더 이상 믿지 않는 데서 시작했다. 인물들은 갑자기 말수가 줄었고 움직임도 느리거나 단조로워졌다. 물론 전략적 난해함이나 의도된 모호성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 달리 말하면 서사의 경제성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는 여전히 ‘할리우드적인’ 작가다. 하지만 사건과 심리 묘사라는 계율을 의심하면서 그의 영화가 자기만의 간격을 갖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영화에서 간격의 문제를 남김없이 해명할 수 있는 언어는 없을 것이다. 다만 한 편의 영화에 등장하는 특징적 간격들의 일부를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 스파이 브릿지 >에서 간격의 문제가 특별한 문제로 등장하는 것은 영화의 가장 중요한 무대인 ‘브릿지’가 이쪽과 저쪽, 우리와 그들, 아(我)와 타(他)의 물리적 정치적 정신적 간격의 연결과 분리가 동시에 이뤄지는 장소, 그러니까 간격의 장소라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있고 건널 수 없는 다리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스파이 브릿지>는 스파이의 영화가 아니라 브릿지의 영화다. 앞서 에이블의 대사에서 두 문장 사이의 의미론적 간격을 언급했다. 이 간격은 다른 간격들과 연쇄되거나 간섭하거나 충돌하며 < 스파이 브릿지 >라는 영화의 속도와 톤과 표정을 만들어나간다. 에이블의 육체적 움직임은 그의 대사에 담긴 의미론적 간격과 연관된 모종의 간격을 빚어낸다. 지하철에서 FBI 요원들이 에이블을 미행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요원들은 민첩하게 에이블을 뒤쫓지만 어느 순간 에이블이 시야에서 사라진다. 다음 장면에서 알 수 있는 건 요원들이 너무 빨라 느린 에이블을 앞질러 버린 것이다. 지하철로 황급히 다시 돌아가려는 요원들 앞으로 에이블이 느긋하게 걸어온다. 그다음 장면. 요원들은 다급한 동작으로 에이블의 방을 급습한다.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도주한 것으로 생각되는 순간, 에이블이 화장실에서 팬티 바람으로 눈을 껌벅이며 태연하게 걸어 나온다. 두 장면은 느림이 빠름을 제압한다는 식의 그럴듯한 수사와는 전혀 무관하다. 일반적인 영화의 미행과 추격에서 도망자와 추격자 사이의 물리적 거리는 임시적이다. 그 거리는 좁혀져 사라지거나(체포의 완수), 넓어져 사라지거나(도주의 완수) 둘 중의 하나다. 어느 쪽도 물리적 간격은 사라지기 위해 한시적으로 설정된 것이다. 에이블과 FBI 요원들의 경우는 어떤가. 요원들은 그와의 물리적 거리를 좁히기 위해 부산을 떤다. 반면, 에이블은 그 거리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결과는 두 장면에서 모두 민망한 조우다. 물리적 거리가 좁혀져 사라졌는데, 추격자의 승리가 아니라 민망한 조우가 남는 것이다. 에이블은 요원들과 같은 물리적 거리의 평면 위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 평면 위에서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또한 체포된 뒤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회유와 사형의 위협에도 아무 말 하지 않는 사람, 그러니까 에이블이야말로 ‘일어서는 사람’이다. 추격자는 물리적 거리를 제로로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도망자(로 간주된 사내)와의 또 다른 층위의 거리는 전혀 좁혀지지 않는다. 다리를 건넜는데, 건널 수 없는 또 다른 다리가 있는 것이다. 상대적인 의미에서 초월적 간격 혹은 정신적 간격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후자의 간격을 영화에서 제시되지 않은 심리적 동기로 설명하려 드는 건, FBI 요원들의 소동만큼 헛된 일이다. 스필버그는 이 간격을 해명하지 않고 다른 속도, 다른 간격의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운 조우로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순간을 진정한 영화적 유머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 3. < 스파이 브릿지 >에는 또 다른 간격의 작동이 있다. 에이블의 초월적 간격을 알아차리는 유일한 인물은 도노반이다. 그런데 두 사내는 첫 대면에서 마주 본 뒤 다시 마주 보지 않는다. 여기에 시선의 간격이라는 문제가 있다. <스파이 브릿지>에서 마주 본다는 것은 대결을 뜻한다. 두 인물이 마주 볼 때, 그들은 말의 승부를 벌이며 카메라는 관습적인 쇼트-리버스쇼트를 택한다. 도노반이 벌이는 여러 인물들과의 말 대결은 모두 이런 방식으로 찍혀 있다. 하지만 에이블과 도노반은 교도소 면회실에서 처음 만나 마주 보고 대결과도 같은 첫 대화를 나누지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 마주 보지 않는다. 이건 스필버그가 이 영화를 만들 때 스스로 정한 규칙 같다. 두 사내만은 최초의 만남 외엔 시선을 교환하지 않는, 다시 말해 쇼트-리버스쇼트로 잡을 필요가 없는 위치에 있도록 할 것.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두 인물이 마주 볼 때, 상대방은 대개 제거의 대상이거나 합일의 대상이다. 어느 쪽이든 둘 사이의 거리는 이미 삭제되어 있거나 곧 삭제된다. < 스파이 브릿지 >에서 두 사내가 마주 보지 않도록 한 선택의 효과는 비상하다. 사건을 다루지 않고 내면을 다루지 않는 이 영화에서 유일한 감정적 교류가 두 사내 사이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첫 만남 뒤로 두 사람은 특별한 대화도 시선 교환도 하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시선을 던지지 않는다는 부정적 선택을 통해 그와의 감정적 유대가 표현된다는 역설적인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달리 말해 쇼트-리버스쇼트가 아니라 시선 교환 없는, 그러니까 시선의 간격이 유지되는 투쇼트로 우정이 표현되는 것이다. 도노반이 에이블을 정면으로 보지 않는 것, 즉 간격의 시선을 선택한 것은 에이블의 초월적 간격에 대한 존중의 표현이라고도 말할 수도 있다. < 스파이 브릿지 >에서 두 인물의 시선의 간격이 사라지는 건 마지막에 이르러서다. ‘스파이 브릿지’의 경계를 건너 마침내 소련 쪽으로 넘어간 저쪽의 에이블과 이쪽의 도노반이 차폐물을 사이에 두고 멀리 나누는 짧은 시선 교환의 순간이다. 스치듯 지나가는 이 두 번째이자 마지막 마주 보기가 감동적인 것은, 시선의 간격이 마침내 사라졌을 때 그들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물리적 정치적 간격이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서로 염려하며 다시 마주 보는 순간 이 영화에서의 카메라 워크의 규칙상 그들은 다시 적이 된 것이다. 물리적 간격, 정신적 간격, 시선의 간격이 각기 다른 층위에서 교차하며 작동하는 이런 장면들은 영화의 간격들을 조율하는 스필버그의 비상한 능력을 보여준다. 아마도 시선의 간격이라는 문제가 이 영화를 보는 우리의 감각 어딘가에 새겨져 있지 않았다면 협상이 끝난 뒤 귀국행 비행기에서 자신의 초상화를 바라보는 도노반의 놀라움의 표정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초상화는 에이블이 남긴 선물이다. 거기에는 얼굴은 약간 비스듬하지만 시선은 정면을 향하는 도노반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첫 장면에서 우리는 에이블이 거울을 세워놓고 자화상을 그리던 장면을 기억한다. 그 자화상에도 에이블의 얼굴이 같은 방식으로 그려져 있었다. 전자는 후자를 연상시키고 두 그림의 이미지는 겹쳐진다. 도노반이 자신의 초상화를 볼 때, 그는 자신을 보고 있지만 동시에 에이블을 본다. 그림 속 자신의 시선과 화가 에이블의 시선은 에이블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마주했을 것이기 때문이다.(어쩌면 정면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마지막에 그려졌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 마주 보기조차 최후의 순간에야 이루어졌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림 속 도노반의 시선은 동시에 에이블의 시선이기도 하다. 지금 도노반은 그림이라는 매체를 통해 또한 에이블이 아닌 그림 속 자신의 시선을 통해, 그러니까 이중적 매개를 통해서야 비로소 에이블과 마주 보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영화에서 아무렇지 않게 수시로 등장해온 합일의(정확히 말하면 합일처럼 보인) 마주 보기가 실은 이토록 어려운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라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타인을 마주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철학적이면서 가장 영화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영화가 찍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마주 보는 시선이기 때문이다. 쇼트-리버스쇼트는 이 무능력을 위장하는 기법일 뿐이다. 스필버그는 간격들 앞에서 지금 영화의 능력과 한계를 숙고하고 있다. 영화가 건널 수 없는 다리를 숙고하며 그는 또 다른 간격들을 등장시킨다. 4. 에이블의 자화상과 도노반의 초상화를 다시 떠올려보자. 두 그림의 구도는 같다. 그런데 두 얼굴은 왜 정면이 아닌가. 이 질문은 시선의 간격과 연관되어 있다. 에이블이 자화상을 그리는 첫 장면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거울과 캔버스가 나란히 놓여 있고 그는 캔버스의 정면에 가까운 각도로 앉아 있다. 모든 자화상이 이런 방식으로 그려지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이 구도는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 구도에서는 거울과 얼굴 정면 사이에 약간의 각도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보이는 대로 그리려 할 때 화가는 결코 자기 얼굴의 정면을 그릴 수 없다는 뜻이다. 초상화 속 에이블은 고개를 약간 돌린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정면과 비스듬함, 그사이에는 작아 보이지만 결코 제거될 수 없는 각도 차이 혹은 간격이 있다. 도노반의 초상에 대해서도 비슷한 성격의 물리적 조건으로 설명할 수 있다. 에이블은 도노반의 얼굴을 첫 대면 이후로는 정면으로 본 적이 없다. 시선의 격차 속에서만 그들은 만났다. 도노반의 얼굴은 에이블에게 늘 비스듬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적어도 이 영화의 서사 내부에서 에이블은 자신의 얼굴도 도노반의 얼굴도 정면을 그릴 수 없다. 정면의 불가능성, 그 제거될 수 없는 간격이 두 초상에 미묘한 애조와 무력감의 기운을 빚어낸다. 처음엔 알아차리기 힘들었던, 영화적 재현의 한계와 은유적으로 연관된 이 간격은 뒤에 다른 장면들을 통해 상기된다. < 스파이 브릿지 >에는 두 주인공의 시점 쇼트가 아주 적고, 시점 쇼트와 반응 쇼트의 매치는 거의 없다. 두 인물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시점 쇼트는 있지만, 도노반이 말의 대결을 벌일 때를 제외하면 두 사내가 대상을 유심히 바라보고 반응하는 장면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이 촬영 방식은 앞서 말한 대로 심리 묘사를 파기한 스필버그의 선택이지만, 서사 내적으로는 두 주인공이 운명처럼 맡겨진 ‘할 일’ 외엔 현실에 무심한 인물, 마치 서부사나이처럼 초월적 태도를 지닌 인물로 보이도록 만든다. 하지만 예외적인 장면들이 있다. 하나는 앞서 말한 도노반의 초상화와 놀라움의 표정의 매치다. 이 장면의 특별함에 대해선 이미 언급한 대로다. 나머지 두 장면은 똑같은 구도로 찍혀있다. 하나는 도노반이 전철로 베를린의 동서 경계를 지날 때 보게 되는, 동독 청년들이 장벽을 넘어가려다 일부가 경비대의 총에 맞아 죽는 장면이다. 다른 하나는 협상에 성공하고 돌아온 도노반이 전철로 출근할 때 담벼락을 넘어가려는 빈민가 10대들의 장면이다. 두 장면에는 모두 도노반의 놀라움의 표정이라는 반응 쇼트가 뒤따른다. 두 장면을 두고 전자가 국제적 이념 갈등의 현장, 후자가 국내적 계급 갈등의 현장이며 도노반이 두 현실의 동일성 혹은 연관성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하는 건 초점이 빗나간 것이다. 두 장면은 이야기 전개에 불필요한 전적인 잉여다. 없어도 되는 장면에, 스필버그는 왜 굳이 다른 장면들에선 전혀 사용하지 않았던 응시-반응의 매치컷을 예외적으로 사용한 걸까. 여기서 우리가 봐야 할 것은 굳이 보지 않아도 이미 알려져 있는 현실의 문제 자체가 아니라, 그 현실을 보는 방식이다. 우리는 도노반이 ‘충격적 현실’을 그 충격이 관객에게 생생하게 전달될 수 있는 현장 속에서가 아니라 열차 안에서 목격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여기엔 두 층위의 간격, 혹은 건널 수 없는 두 다리가 있다. 첫째는 도노반의 시선과 두 장면의 현실 사이엔 지상과 전철의 다른 높이, 그리고 유리창이라는 이중의 물리적 간격이 있다. 도노반은 이중의 물리적 간격을 통해서만 현실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 물리적 간격이 안전한 이쪽과 위험한 저쪽이라는 구도를 보장한다. 이 구도는 두 장면의 이중의 물리적 간격을 관객과 영화를 존재론적으로 격리하면서 연결하는 스크린의 은유로 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 두 번째, 두 번의 목격-충격이 이야기 전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 즉 서사 내부에서 목격-충격의 경험이 발생 즉시 소멸한다는 것은, 두 장면과 이야기 사이에 메워질 수 없는 의미론적 간격이 있음을 뜻한다. 이 간격은 정확히 극장 안과 밖의 간격에 대한 은유다. 영화는 현실을 보고, 관객은 영화로 현실을 본다는 말은 거짓이다. 정면으로, 존재론적 격리 없이, 본 경험의 즉각적 무화 가능성 없이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 스파이 브릿지 >를 보고 모종의 현실을 본 것처럼 말해선 안 된다고, 스필버그는 지금 우리에게 집요하고도 간절하게 청하고 있다. 5.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있고 건널 수 없는 다리가 있다. 스파이는 천신만고 끝에 다리를 건넜지만, 어떻게 해도 건너지지 않는 다리가 있다. 알랭 레네의 <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에는 “그들이 다리를 건너자, 그때 유령들이 다가왔다”는 문장이 인용된다. 그 다리는, 건넜지만 유령 없이 건너편에 이를 수 없는 다리, 목적지에 결코 온전히 이를 수 없는 다리, 달리 말해 결코 건널 수 없는 다리다. 그러므로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이다. 자화상에서 정면과 비스듬한 얼굴의 제거될 수 없는 각도 차이, 목격자와 목격되는 현실 사이의 이중의 물리적 간격, 목격-충격이라는 장면과 이야기 사이의 의미론적 간격은 나와 영화와 현실 사이에 놓인 건널 수 없는 다리들이다. 이 다리들은 두 사내의 시선의 간격, ‘나’와 가장 친밀한 ‘당신’ 사이에도 놓여 있는 건널 수 없는 최초의 다리의 변주들이다. < 스파이 브릿지 >는 그 다리들을 중첩시키며 자신이 다른 무엇도 아닌 영화일 뿐이라고 고집스럽게 반복한다. 물론 < 스파이 브릿지 >가 그 자체로는 새롭지 않은 이 간격들의 발견을 새삼스레 외치고 있는 건 아니다. 스필버그는 늘 그래 왔듯 실재했던 현실의 사건을 오밀조밀한 영화 서사로 들려주려는 이야기꾼의 자세를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그는 그 다층적 간격들을 경유하지 않고는 현실을 영화로 옮겨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다짐하는 것 같다. 나지막해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놓칠 수도 있는 그 다짐은 그러나 무척 강인하기도 해서 영화의 한계지점까지 울려 퍼진다. 이런 ‘할리우드 영화’를 2015년에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