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메
- 감독
- 핫산 엑타파나
- 제작년도
- 1999
- 출연
- 자릴 나자리, 라쉬드 아크바리, 마호무드 베흐라즈니아, 발리올라 베타, 마흐보베흐 칼릴리
한국영상자료원은 2006년 2월 2일,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를 오픈했다. 그리고 오늘 2026년 2월 2일. KMDb는 20주년을 맞이한다. 우리는 KMDb를 기획·구축하며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한참 고민했다. 누군가 ‘무비씨’라는 이름을 제안한 적이 있다는 것은 기억나고, 그러나 아무래도 어딘가를 따라 한 것 같지만 그 이상의 이름은 없다고 판단해 KMDb로 지었다. 그리고 한국영상자료원은 kmdb.or.kr 도메인을 구매했다. KMDb에는 20년간 생겼다 없어진 콘텐츠와 기능이 많다. 초기에는 사용자가 직접 정보를 입력하는 기능도 상당했으나 생각보다 양질의 정보가 들어오지 않았고 무엇보다 관리가 어려워 하나둘 폐기하기 시작했다. 애니메이션과 독립영화 전용 KMDb를 따로 만들었을 때도 있었다. 지금은 모두 통합된 상태에서 최대한 간결한 기능과 콘텐츠로 운영하는 중이다. KMDb를 준비하며 호기롭게 “풀 크레딧을 가지고 갑시다!”라는 (제안을 내가 한 것 같고 그래서) 고생문이 활짝 열린 정책을 시작하며 힘들기도 하고, 하지만 그로 인해 어디에도 없는 데이터를 보유하게 된 KMDb는 영화·영화인 DB 서비스뿐 아니라 VOD로 한국고전영화 스트리밍을 시작했고, 영화글로 다양한 필자의 글을 소개했으며 리스트와 컬렉션이 순차적으로 오픈해 지금에 이르렀다. 2006년 2월 1일. 오픈 전날 디지털정보화팀의 담당 세 명은 그제야 동명이인에 대한 이슈를 발견하는 사고를 친다. 비슷비슷한 나이의 정유미 배우가 하나가 아니고 무려 세 명이래! 라는 비명을 한밤중에 지르며 당시만 해도 30대 초반이었던 그들은 할 수 있는 데까지 인물을 분리하며 밤을 지새다 퇴근해 다음 날 오픈시켰다. 그리고 그 동명이인 이슈는 지금까지도 완전하지 않다. 완전할 수가 없다. IMDb도 어쩔 수 없다며 고개를 젓는 이슈를 KMDb 라고 별수 있겠는가. IMDb 매니저는 이름이 짧은 한국 인명으로 동명이인에 대한 고충이 더 심하겠다며 나를 위로했다. 성명이 “정유미”인 배우 3인에 대한 KMDb 영화인 정보 KMDb는 영화·영화인 데이터의 완벽함을 사수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며, 이제는 영화인이 자신의 필모를 증빙하기 위한 웹사이트로 그 공신력을 인정받고 있다.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그러다 보니 문득 KMDb에 쌓인 데이터가 어떤 모양새인지 궁금해졌다. 혹시 사용자들도 궁금해할까? KMDb 20주년 이벤트를 근사하게 할 수는 없겠지만, 데이터로 가득한 사이트의 20년 묵은 통계를 소개하는 것이 가장 어울리는 축하가 아닐까 생각했다. 별다른 코멘트 없이 지난 20년의 통계 10선을 소개한다. 1. KMDb에 등록된 한국영화(극·비극) 의 수: 50,787편 2. KMDb에 등록된 한국영화인 의 수: 83,279명 3. 가장 많이 접근된 영화인 페이지 정윤희(1위), 임권택(2위), 신성일(3위) / 사진: 전승열, 정기성 1위 | 정윤희 2위 | 임권택 3위 | 신성일 4위 | 김기영 5위 | 이상사 6위 | 김지미 7위 | 박노식 8위 | 김진규 9위 | 신상옥 10위 | 안성기 4. 작품 리스트(필모그라피) 가 가장 많은 영화인 1위 | 현동춘 | 편집 | 994편 2위 | 김희수 | 편집 | 863편 3위 | 최형래 | 음향효과 | 850편 4위 | 손인호 | 음향효과 | 793편 5위 | 김기범 | 배우 | 753편 6위 | 허장강 | 배우 | 687편 7위 | 임해림 | 배우 | 660편 8위 | 김재경 | 음향효과 | 657편 9위 | 윤일주 | 배우 | 650편 10위 | 최남현 | 배우 | 609편 5. 한 작품(장편영화)에 가장 많은 크레딧 을 올린 영화인 1위 | 노영석 | THE 자연인 (노영석, 2023) | 17개 공동 2위 | 박용철 | 싸이더:애,심 (박용철, 2019) | 16개 공동 2위 | 준오 | 휴게소 (준오, 2016) | 16개 ※ 노영석 감독은 <THE 자연인>에서 감독, 각본, 출연, 프로듀서, 촬영, 조명, 편집, 음악, 미술, 의상, 동시녹음, 사운드(음향), 시각효과, 색보정, 예고편, 포스터, 기타스탭(캘리그라피)을 담당함. 6. 참여 스태프 가 가장 많은 영화 <한산: 용의 출현>(1위) 1위 | 한산: 용의 출현 (김한민, 2022) | 1,665명 2위 | 백두산 (이해준, 김병서, 2019) | 1,612명 3위 | 안시성 (김광식, 2018) | 1,502명 4위 | 미스터 고 (김용화, 2013) | 1,492명 5위 | 신과 함께–죄와 벌 (김용화, 2017) | 1,487명 7. 상 을 가장 많이 받은 영화 1위 | 기생충 (봉준호, 2019) | 58회 2위 | 헤어질 결심 (박찬욱, 2022) | 45회 3위 | 추격자 (나홍진, 2007) | 41회 4위 | 올드보이 (박찬욱, 2003) | 40회 공동 5위 | 괴물 (봉준호, 2006) | 31회 공동 5위 | 벌새 (김보라, 2018) | 31회 ※ KMDb에서 관리하는 영화제·시상식에 한함 8. 리스트에서 본 영화로 가장 많이 체크된 작품 <올드보이>(1위), <괴물>(2위), <기생충>(3위) / 사진: 디씨어터 1위 | 올드보이 (박찬욱, 2003) | 2,581명 2위 | 괴물 (봉준호, 2006) | 2,355명 3위 | 기생충 (봉준호, 2019) | 2,178명 4위 | 살인의 추억 (봉준호, 2003) | 2,055명 5위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미야자키 하야오, 2001) | 1,672명 6위 | 아가씨 (박찬욱, 2016) | 1,648명 7위 | 공동경비구역 J.S.A. (박찬욱, 2000) | 1,574명 8위 | 마더 (봉준호, 2009) | 1,533명 9위 | 헤어질 결심 (박찬욱, 2022) | 1,515명 10위 | 8월의 크리스마스 (허진호, 1998) | 1,438명 ※ 박찬욱 감독 작품 4편, 봉준호 감독 작품 4편 9. 리스트에 본 영화 체크를 가장 많이 한 사용자 1위 | bo**** | 2,076편 2위 | ha**** | 1,865편 3위 | gs**** | 1,747편 4위 | ba**** | 1,696편 5위 | in**** | 1,636편 ※ ****는 ID의 글자 수와 일치하지 않음. 10. 가장 많은 조회수의 영화글 1위 | “ [시네필 안내서]서문: 시네필의 세계로 들어서고 싶은 당신에게 ” (영화천국 Vol.48) | 정성일 | 91,634회 사실 진정한 20주년 이벤트라면 올해 KMDb가 전면 개편된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득하지만 어찌 됐든 2026년 말 새로운 KMDb가 문을 열 것이다. 오랜 KMDb 관여자로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묻는다면, 20년이 지난 이젠 누구나 KMDb를 KMDb(b를 소문자)로 써주길 바란다는 것 정도. 소박한 바람으로 글을 마친다.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파울 클레, 1920) / 펜과 수채, 이스라엘 박물관, 예루살렘. 우리가 함께 이야기했던 파울 클레(Paul Klee)의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 그림을 기억해? 벤야민은 그의 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1940)에서 파울 클레의 이 그림을 보며 역사의 잔해 더미들을 마주해야 한다고 말했지. 날아오르려는 천사는 역사의 잔해 더미 앞에서 눈을 감지도, 날개를 접지도 못해. 폐허가 된 현재를 바라보고 있지. 과거의 것을 뒤로 한 채 앞으로 나아가지도, 그렇다고 과거로 되돌아가지도 못하는 진보라는 폭풍 앞에서 말이야. 우리는 산개해 있는 역사의 잔해 더미를 더듬는 영화를 보려 했고, 글을 읽으려 했고, 그러한 글을 쓰고자 해왔던 것 같아. 우리는 영화 앞에서 눈을 감을 수 없었지. 아마 늘 주변화된 것에 사로잡히고 마는 우리의 성정을 감히 벤야민과 천사에 이입해 왔던 것일지도 몰라. 사실 이렇게 글을 계속 쓰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어. 우리는 그저 늘 함께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동료를 필요로 해왔고, 그렇게 기꺼이 서로에게 동료의 자리를 내어주었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글을 찾아 헤매다 결국에는 스스로 읽고 싶은 글을 썼을 뿐이니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글을 끝내는 찾지 못했잖아. 영화에 대해 말하는 글, ‘그’ 영화와 그 ‘영화’, 그리고 ‘영화’ 자체에 관해 말하는 글. 그러니까, 그러한 글은 어디에 있을까? 과거에 머물러 있는 질문을 되뇌면서, 이 끝없는 질문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할 때면 처음에는 한 글자도 쓸 수 없었다가 점점 질문에 대한 문장을 찾았지. 문장의 끝에서 비로소 그 영화는 우리의 것이 되었어. 글로써 완성되는 영화. 그럼 이건 우리가 앞서 이야기한 물음과는 상반되잖아. 결국 영화에 대해 말하는 글은 없고, 주변을 맴도는 글만 남아있게 되는 건 아닐까. 우리는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고, ‘그것’에 ‘대한’ 것만 말할 수밖에 없어. 그러니 우리는 어쩌면 비평의 흐름에서 아주 작은 귀퉁이의 잔해가 되겠지. 오늘날 한국에서의 비평은 주류와 비주류, 프로와 아마추어가 구분되어 있다기보다는 사실 모두가 비주류라는 조각으로 맞춰지지 않은 채(혹은 프로는 아마추어인 체하고, 아마추어는 짐짓 프로인 체하며) 서로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비평과 작품의 ‘쓰루패스’를 지향하는 《마테리알》, 서버와 리시버가 편지를 보내고 응답하는 ‘비평의 편지’, 《씨네21》이나 《필로》… 그들까지 우리가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서로에게 말을 걸어. 더는 비평의 독자를 상상하지 못하게 된 걸까? 우리가 비평과 한 발짝 떨어진 존재인지라 더욱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비밀스럽게 활동하는 우리로서는 이 상황이 퍽 만족스러워. 우리는 사라질 기회를 찾고 있어. 천사 앞에 놓일 잔해가 될 날을 기다리며. 우리가 사라지게 될 날은 매년 갱신하는 《 해파리 》의 도메인을 결제해야 하는 가을이 될까? 행방불명이 되자. 사라진 작가들처럼, 사라진 배우들처럼, 사라진 감독들처럼, 사라진 영화관들처럼, 사라진 필름들처럼. 그리고 신재인 처럼.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영화를 위해. (좌)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 중 (사진: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 KOBIS ) (우)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 중 (사진: "아카이브-역대상영작-KAFA 40주년 특별전", 전주국제영화제 ) 신재인 감독은 2000년대 초반 네 편의 영화를 만들었어. 단편영화 < 소세지 >(2000), <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 >(2001), <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 >(2002), 그리고 장편영화 < 신성일의 행방불명 >(2005)을 끝으로 사라져 버렸지. <김갑수의 운명>, <심은하의 잠적>, <어머니가 상했다>를 만들겠다고 했는데 말이야. 신재인은 『포도주』(2007)라는 책을 한 권 남기기도 했는데(사실 로맨스 소설을 꾸준히 쓰고 있는 듯 보이지만), 이 책은 그가 쓴 66개의 단편을 한 데 묶었고, 2000년에 대산문화재단 소설 부문에 당선되었으며, 세상에는 그로부터 7년이 지난 후에 출판의 형태로 공개됐어. 『포도주』의 단편 「남이 먹을 때1」과 「너의 진실1」은 영화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과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의 원전이기도 해. 단편의 화자는 모두 다른 듯 보이지만, 신재인 스스로가 ‘작가의 말’에서 화자는 “다중인격자”라고 말하기도 했던 것처럼, 한 사람의 목소리로 느껴지기도 해. 「리얼 드림1」에서 주인공 ‘나’는 꿈을 꿔. 그는 눈을 뜨자마자 꿈을 기록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꿈을 꾸는 시간은 더욱 길어져만 가. 꿈도, 어머니도 없는 그의 사적 시간은 줄어만 가고, 그는 결국 꿈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게 돼. 완결 없는 결말로 향해 가는 그의 이야기는 신재인의 영화와 같아. 신재인의 영화는 절대 문턱을 넘지 않아. 지점을 향해 나아갈 뿐, 그저 시도할 뿐이야. 2006년 신재인 감독의 <어머니가 상했다>(가제) 연출팀 모집 공고글 발췌 신재인의 영화는 체제에 속하지 않는 이방인의 등장으로 하여금 규범을 흔들어. 이방인은 체제의 안과 바깥,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메시아와 같은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해. 그의 세계에서 규범이란 죄의식과 위선, 성스러운 것과 천한 것, 그리고 신성모독으로 뒤틀린 정상성의 형태야. 그리고 이방인, 혹은 메시아는 뒤틀린 세상의 구원이 아니라 정상의 세계를 뒤흔드는 시도에 가까워. <신성일의 행방불명>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먹는 행위는 죄악이 돼. 보육원의 아이들은 아버지(신)가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음식을 보급받으면, 불이 켜짐과 동시에 흩어져 버리는 바퀴벌레처럼 재래식 화장실이나 침대 밑으로 숨어들어. 공중에서 재래식 화장실을 수직으로 내려다보며, 수평으로 움직이는 장면은 배설과 섭취를 등가로 만들어. 먹는 행위가 수치스러운 행동이 되는 보육원에서 남들보다 ‘뚱뚱한’ 성일( 조현식 )은 유일하게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천사를 만나. 성일은 이 뒤틀린 세계를 구원할 메시아일까? 보육원에는 바깥에서 들어온 이영애( 문슬예 )가 있어. 영애는 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유일한 아이야. 영애는 권사의 주방에 들어가 몰래 음식을 훔쳐 먹거나,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배고파”를 외치며 음식을 먹어. 아이들은 영애를 두려워하면서도, 배고픔을 참지 못해. 보육원의 규범은 점차 흔들리고, 마침내, 그곳을 통치하던 원장( 예수정 )이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영애를 교단에 올려 억지로 음식을 먹는 벌을 줄 때, 아이들이 반기를 들려고 하는 순간, 폭력의 문턱을 넘어가려는 바로 그 순간, 영화는 폭력을 중지하고, 보육원 안과 바깥의 경계를 만드는 철문 앞에 서 있는 성일의 쇼트로 이동해. 보육원 바깥에 있던 카메라는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상승’하여 문을 넘어 다시 성일을 쫓지. 흑백의 영화는 컬러로 전환되고, 보육원의 성일은 터미널에서 눈을 뜨게 돼. 성일은 행자와 같은 모습으로 모텔촌과 먹자골목을 돌아다니며,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먹고, 사는 사람들을 마주하게 되지. 신재인이 영화에서 흑백과 컬러를 사용하는 방식 또한 흥미로운데,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해. “흑백은 아름답기에 억압받는 보육원 장면은 흑백으로 아름답게, 해방 공간인 바깥세상은 현실적으로 추하게 담고 싶었다”라고. (상2) 흑백의 보육원 장면 (하2) 컬러의 바깥세상 아이들을 통치하던 원장이 벌을 받는 뒤집힌 보육원의 시간과 성일이 돌아다니는 시간은 이리저리 중첩돼. 성일은 보육원의 안과 밖, 모든 시간에 있어. 아이들이 교단 위의 원장에게 돌을 던지고 음식을 던질 때, 바깥의 쇼트와 교차되던 성일이 보육원 안에서 폭력을 막는 장면이 프리즈 되고, 반복되며, 영화는 영화적 장치를 통해 폭력의 물리적 접촉을 막아. 영화의 마지막, 성일이 원장과 그의 아들이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치킨을 뜯는 모습을 목격하고, 그들과 동석하게 됐을 때, 카메라는 그들에게 다가가지 않고 오히려 창의 바깥에서 점점 물러나지. 흥미로운 점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신의 시선을 은유하는 듯한 카메라의 움직임보다도, 보육원 건물에 높이 매달려 있는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하는 낡은 나팔형의 스피커라는 존재야. 신재인 영화에서 신을 위시하는 카메라는 신이 될 수 없어. 오히려 신은 낡고 기능하지 않는 버려진 모습을 하고 있지. 이러한 시점의 카메라는 신재인의 다른 영화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해. <소세지>는 남성, 여성, 아이로 구성되는 소위 ‘정상 가정’으로 보이는 구도를 유지해. ‘소세지’는 남성 성기의 직접적 대리물이 되고, 여자는 남자가 들고 있는 소세지를 핥을 때, 아이는 “나도 먹어보자”라고 말해. 재미있는 점은 여성-남성-아이의 구도가 계속 바뀌고 있음에도 삼각형 구도는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야. 이 같은 구도는 가부장을 환기하면서도, 남성의 소세지를 핥는 데 집중하던 여자가 아이가 재촉하니, 남성 성기와 가부장을 대리하는 소세지를 다른 길쭉한 야채들과 함께 싹둑싹둑 절단 내고, 소세지 야채볶음으로 만들어내는 코미디로 무너지지. 여자와 아이는 소세지 야채볶음을 맛있게 나눠 먹고, 카메라는 투샷에서 물러나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남성을 보여줘. 마치 르네 지라르가 ‘욕망의 삼각형 이론’에서 욕망은 욕망하는 대상과 욕망의 주체, 그리고 욕망을 모방하도록 하는 매개자가 있다고 했을 때, 영화는 욕망의 대상으로 보이던 남성을 결말부에 욕망으로부터 아예 배제해 버리는 거지. 그러니까 신재인 영화는 오히려 욕망의 매개자를 영화 바깥에 위치시키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면서, 세계의 질서와 규범을 계속해서 조롱하는 거야.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 중 (사진: "아카이브-역대상영작-KAFA 40주년 특별전", 전주국제영화제 ) 마찬가지로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에서는 주인 없는 시점 쇼트가 많이 등장하는데, 주인공 의사( 홍승환 )는 환자의 머리에 진실을 넣었고 그것을 깨끗하게 봉합했다고 말해. 이때 카메라는 환자의 머리에 자리 잡고 있어. 환자는 죽고, 법정에 선 남자는 천정에서 떨어지는 물을 바라봐. 떨어지는 물의 시점은 남자를 내려다보고, 영화는 법정과 교회의 연단, CCTV의 시점 쇼트를 제외하고는 의사의 시점을 제외한 인간의 시점으로 느껴질 만한 쇼트를 배치하지는 않아. 의사가 진실을 넣은 환자의 머리를 봉합하는 데 실패한 것처럼, 영화는 영화의 안과 바깥을 시점으로 연결해 봉합하는 데에도 의도적으로 실패하는 거지. 의사는 교회와 법원을 오가며 자신의 죄를 고하는데, 목사( 정인기 )와 판사( 권택기 ) 앞에서 물을 토해내며, 자신이 토해내는 진실에 잠겨 버려. 그리고 진실을 말하는 남자 앞의 모두는 도망을 가. 판사, 목사, 변호사, 소위 “‘사’짜”가 만들어내는 질서와 경건한 십자가 앞에서 진실은 마침내 물고문실로 연결되고, 영화를 보는 관객은 진실을 고해야 하는 그의 정신세계에 빠져 있다가 CCTV 화면을 통해 빠져나와. 이러한 주인 없는 시점과 그것의 물성은, 칸트의 정언명령과 같은 규칙이나 명령, 진실과 거짓, 그리고 성경의 인용이라는 언술로부터 순응주의적 진실을 전복해. 마치 신재인이 유명인의 고유명사를 쓰면서 실제 세계의 아우라, 숭고를 벗겨내는 방식을 전유하는 것처럼 말이야. (특히 재미있는 점은 ‘성일’이 영화감독 신성일과 영화평론가 정성일을 모두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고.)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에서도 세상에서 가장 비위가 좋은 사나이인 소년 준섭이 지우개나 배설물을 먹을 때, 그를 보여주는 부감 쇼트와 같은 방식은 영화 바깥의 타자를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지. 준섭은 이 영화에서 똥을 먹음으로써 사랑을 쟁취하고, 외계인의 우주선을 먹음으로써 인간을 구하며, 음식난으로부터 인류를 구하는 자폐적 상상력은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에서처럼 망가진 메시아의 형상으로 작동하는 거지. 신재인 영화는 일상적이고 동질적인, 즉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기능을 수행하는 영화 플롯과 규정적 한계의 바깥에서 규범을 소격화하여 불균질하게 연결함으로써 자아로 필연적으로 빠져버리는, 영화와 영화 바깥에 초월의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 같아. 우리는 이런 조각나고 어긋난 것 같은, 주인공의 상상으로 치부될 법한 영화의 장면들이 산란함으로써 ‘진실’을 만들어간다고 생각해. 그래서 신재인이 『포도주』에서 말하듯 영화들은 모순 없는 매끄러운 이야기로서 영생하지 않고 언젠가 사라지게 되겠지. 그렇기에 그의 영화는 필멸하기에 거짓을 말하지 않는 것이고, 모든 장면은 진실로 향하게 되겠지. 신재인은 운동하는 진실을 포착해 불쑥 솟구쳐 오르도록 글과 영화로 만들어낸 것이고, 이렇게 만들어진 너머의 무언가는, 현실에 천착해야 하지만 현실에서의 도망침을 꿈꾸는 우리에게 닿으며 필연적으로 주변화되는 비평 작업으로 이어지는 것 같아. 그러므로 신재인 영화는 영화 속 세계 바깥에서도, 그저 쌓이고 잔해가 되어, 사라짐 후에도 우리 앞에 놓인 영화처럼 ‘새로운 천사’ 앞에 놓일 거야. 다시 돌아와, 벤야민에게 메시아는 과거를 들여다보되 지금의 시간에 사로잡히는 순간에 가능한 것이야. 메시아를 이야기하면서도, 메시아를 신격화하지 않는 벤야민처럼, 우리는 신재인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이미지로부터 질서를 위태롭게 만드는 모순적이고, 복합적이고, 복수적인 시간의 공존과 긴장을 경험해. *** 주1. 1) 배장수, " 장편 데뷔작으로 주목 받는 두 감독 '신재인·박성훈 '", 《경향신문》, 2006. 2. 16. 해파리(영화웹진) l www.haepari.net. 영화에 관한 글을 쓴다. 영화제 프로그램 노트 및 전시 도록을 쓰거나, 영화계 인력을 인터뷰하고, 독립상영회를 기획한다.
gore : 1. 뿔로 들이받다 2. (특히 폭행당한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짙은) 피, 선혈 (네이버 어학사전) 호러 영화엔 다양한 종류가 있다. 그중에서도 한 축을 축축하게 담당하고 있는 것이 신체변형, 피, 보통 인체 안에 들어있어야 할 것들의 (본의 아닌) 외출을 다룬 것들이다. 이들은 하나의 장르라기보다, 슬래셔, 스플래터, 좀비물, 오컬트 등의 다양한 장르에서 그 표현 수위가 정도를 넘어서는 일종의 현상이며. 이 현상들은 보통 ‘고어’라는 말의 테두리 안에 정리되곤 한다. 미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에서는 이 분야만 선호하는 마니아들이 생각보다 튼실한 층을 형성하는 편이고, 이런 장르를 패러디해 먹고사는 ‘트로마(TROMA)’같은 레이블이 존재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한국 사정은 다르다. 오래전부터 영화 필름 자르기를 냉면집 면 자르는 정도로 생각하고 아주 편안하게 편집 및 삭제를 해온 덕에, 국내에 개봉된 이쪽 장르의 영화는 거의 전무하고 비디오로 출시가 된다 해도 장르의 맛을 느낄 수 있는 핵심 고명들은 다 심의위원 본인들만 맛본 채 거세되어 출시되곤 했다. 그들에게 감독의 의도나 팬들의 성원은 삼돌이 빤쓰 갈아입는 소리에 다름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예술 수준’과 ‘국민 정서’를 수호하는 수호신들답게 한낱 영화 따위의 운명은 창조주의 의도와 너무 쉽게 달라지곤 했던 것이다. 무시무시한 신체변형, 금기, 악취미 등을 다룬 지옥 같은 비주얼로 유명한 많은 영화들이 고향에서 머나먼 한국 땅에 와서 당치도 않은 코미디로 둔갑하는 꼴은 흔하디흔한 일이었다. (작고하신 루치오 풀치 영감님이 한국에 출시된 본인의 영화를 봤다면 ‘쟘-비’ 가 되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셨을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그 어떤 장르보다 금기가 바로 핵심이 되는 호러 장르팬 들은 음지에서 활동했다. 지금은 ‘고자’를 유행어로 밀고 있는 평론가, 방송인 THE ‘사마천’ 허지웅 씨가 운영했던 ‘호러타임즈’가 유명했고 PC통신의 여러 동호회들이 적은 회원 수 임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필자는 나우누리의 ‘고블린’의 회원이었다.) 그러다 문득, 좁고 평화롭던 호러 커뮤니티가 (전보다는) 주목을 받게 되니, 세기말의 기운을 타고 흘러온 ‘엽기 열풍’ 탓이었다. 컬트니 키치니 평생 만날 일 없던 말들에 사람들은 큰 호기심을 가졌고, 그땐 호러 영화 커뮤니티에서 주최하는 상영회에도 새로 유입되는 관람객이 심심찮게 있었다. (최근에는 홍대 인근의 카페를 빌려 비정기적으로 개최되는 ‘시네마 지옥’이라는 상영회가 아주 몹쓸 영화들을 틀며 근근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오프닝 타이틀 그런 와중에 소문이 하나 돌기 시작했다. 사지절단류 호러의 기원전이자 고어라는 말이 부서진 마네킹으로 풀이되는 살육의 불모지 대한민국에, 제대로 된 난도질 영화가 등장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게 < 씨어터 > 였다. < 싱글즈 >로 유명한 권칠인 감독이 기획하고 지금은 뭘 하는지 도통 알 길이 없는 박재범 감독이 연출한 < 씨어터 >는 아주 단순명쾌한 영화다. 영화 < 스크림 >의 특별 상영이 있던 밤, 나름대로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캐릭터를 가지고 극장에 모여든다. 깡패, 창녀, 고딩 커플, 벤처 기업 청년 CEO 등... 이렇게 쓰면 많은 것 같지만 그래 봐야 13명이다. 하여간 이 13명이 극장주의 살육게임에 캐릭터가 되어 하나하나 잔혹하게 살해된다는 이야기다. 영화 속에서 죽게 될 면면의 인물들 이야기라고 할 것도 없는 설정이다. 이건 그냥 람베르토 바바의 < 데몬스 >에서 가져온 것이다. 감독은 이야기를 길게 풀 생각 없이, 논리나 현실에 단절된 상황을 설정하고 시원하게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 준비를 하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잔혹함에 굶주려 있는 관객들을(혹은 자신을) 위해 마구 달려줘도 좋을 텐데 그러지도 못한다. 이 영화는 박재범 감독이 사비를 털어 만든 초저예산 영화기 때문이다. 하여, 살해 장면은 맛있는 것을 아껴먹듯이 야금야금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 빈 부분을 감독이 긴박감 있는 추격씬과 러브스토리 그리고 끝내주는 반전으로 채워주면 좋았겠지만 그는 개그대잔치를 선택했다. 돈이 안 들기 때문이었을 게다. 물론 공포와 웃음은 그 무엇보다 밀접한 관계를 맺었지만, 관객 중 가장 험악한 인상을 가진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 알고 보니 보람 재활원에서 탈출한 정신지체 장애인이라 영구 흉내를 내며 응애응애 해버리면 나도 슬프고 배우도 슬프고 장애인 인권도 슬픈... 그런 일이지만, 어쨌든 이 영화엔 쌍팔년대 유머가 넘실댄다. (만약 당신의 기억 속에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막 떠온 회를 깡패와 업소 여성이 극장 로비에서 쭈그려 앉아 맛있게 먹는 장면이 있다면, 100% < 씨어터 >를 본 것이다.) 극장 로비에서 회 먹기(좌측) / 험악한 인상의 사내가 정신지체 장애인이라는 것이 드러난 후 구구단을 필사적으로 외는 장면(우측) 그렇다고 살해 장면까지 어처구니없다는 얘긴 아니다. 영화에는 다양한 살해방법이 보인다. 깨진 형광등으로 입에 박아넣기, 동상 손가락에 눈 쑤셔 넣기, 죽은 척하는 소녀 발목 썰기(이에 이은 목 톱질!). 내장 꺼내 줄넘기하기 등등 아껴먹는다고는 하지만 적지 않은 수의 노골적인 살해 시퀀스가 영화를 수놓고 있다. 그 강도는 2000년 이전, 이후에 나온 모든 공포 영화를 통틀어도 대적할 영화가 없을 정도다. 한국 공포 영화는 언제나 ‘한’의 정서였다. 귀신이 나오거나, 아니면 한이 맺힌 인간이 괴물화 되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 씨어터 >는 한국 공포영화사의 밖에 덩그러니 혼자 떨어져 나온 것처럼 그렇게 존재했다. 당시 ‘이상한 것’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이 증폭되면서 많은 (당시의) ‘이상한 영화’들이 주목을 받았다. < 대학로에서 매춘하다가 토막 살해당한 여고생 아직 대학로에 있다 >나 <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 같은 영화들이 제작되고 혹은 개봉하면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준 시기였다. 그중에서도 <씨어터>는 가장 막가는 시도였다. 그 증거로 이 영화는 개봉도 못 했다. 감독은 애초에 개봉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처럼 찍고, 한국 최초(일 것으로 생각된다)의 인터넷 개봉을 시도한다. 현재는 사라진 도메인인 www.theater2000.co.kr 이라는 웹 사이트에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이 외의 공식적인 상영은 2000년 제4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있었을 뿐이다. 이후 암암리에 호러 영화 동호회에서 상영이 되었고, 2001년 비디오로 출시되었다. 잔혹한 장면들. 그러나 이 글에서 묘사된 많은 장면들은 비디오판에 아예 없거나 편집되어 있다.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비디오판 < 씨어터 >를 다시 보았다. 예상했던 바지만, 영화가 집중했던 부분은 모두다 날아가 버린 채, 썰렁한 개그만이 남아있었다. 개그연구가가 아니라면 굳이 이 영화를 ‘비디오’로 다시 볼 필요는 없어 보인다. 찾아본 바에 의하면, 무려 ‘20분’. ‘20분’이 잘려나갔다. 20분이면 하나의 생명이 잉태될 수 있는 시간이며 어쩌면 사랑에 빠질 수도 있는 시간이고 그것이 어떤 ‘이야기’라면 아예 다른 것이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씨어터>는 한국 영화사에 ‘한국 고어 영화의 시작’, 이른 이정표로서 우뚝 서 있고 싶었지만, 오히려 그 스스로 더 잔혹한 것은 한국의 영화 제작환경, 그리고 영화를 개똥만도 못하게 보고 있던 당시 검열기관의 무지함과 잔혹성을 보여주는 ‘현실 고어’의 한 장면으로 남게 되었다. 이후 박재범 감독이 <씨어터 2.0>을 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만 관람했고 1편에 비해 영 못 미친다는 평만 볼 수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조지 A.로메로는 <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으로 ‘좀비’를 탄생시키며 그 안에 매카시즘을 비유했고, 다리오 아르젠토는 < 서스피리아 >등을 통해 ‘공포’가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을 증명해 냈으며 루치오 풀치는 다양한 잔혹 영화를 통해 사지절단류 영화만이 가질 수 있는 쾌감의 영역을 튼실하게 구축해냈다. 우리는 과거서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한국에서 공포영화는 안 돼’라는 이야기를 듣고 살았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이, 변변한 공포영화 한 번 나와 본 적이 거의 없다.(아주 가끔 좋은 공포 영화들이 나오고 있기는 하다. 분류가 애매하긴 하지만 < 독 >이나 < 불신지옥 >, < 기담 > 등이 좋은 예이다. 그러나 한국에 이러한 ‘장르’가 있다고 말하기엔 민망한 숫자이다.) 호러영화의 팬으로서, 언제쯤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멋진 스플래터(혹은 슬래셔) 영화를 볼 수 있을까? 피가 튀고 뼈가 보이며 내장이 흩날리는 그런 멋진 광경을 말이다. 유행이 너무 지나서 이제는 기대하지 말아야 할까나. ‘그래도 언젠간’이라는 마음으로, 그런 똘끼를 지닌 박재범의 후예가 나타나길 기대해 마지않는 것이다. 박동빈의 어제와 오늘 P.S : 이 영화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한 사람, ‘마징가’를 연기한 배우는 ‘ 박동빈 ’이다. 아침드라마 <사랑했나봐>에서 입에서 주스를 흘리는 장면으로 유명해진 바로 그 배우다. 세월이 얼마나 무서운지... 또한 미아리에서 근무하는 업소여성으로 등장하는 ‘장경희’씨는 2003년 SBS 공채 개그맨으로 데뷔해 개그우먼과 ‘미녀 삼총사’라는 걸그룹(일단 여자 셋이니)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애니메이션 성우에 힘쓰고 있다. 매점 주인으로 나오는 서범석씨는 뮤지컬계에서 한몫하시는 분 같고... 어찌돼도 소식을 들을 수 없는 것은 감독 박재범 뿐이니 답답할 노릇이다. 언젠가는 꼭! < 씨어터 >의 무삭제판이 공개되길 바란다. 박동빈 장경희 노진원 감독 박재범 각본 박재범 개봉극장 www.theater2000.co.kr (온라인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