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친구 부우!
- 감독
- 마크 테일러
켈리 레이차트는 가장 소박한 형식으로 동시대 미국인의 삶을 둘러싼 정치, 사회적인 맥락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 있으며, 지역의 고유한 풍광 속에서 삶을 버티다가 무뎌지고 바스러지는 인물의 현재를 세심하게 관찰한다. 그녀의 6번째 장편영화인 < 어떤 여자들 >(2016)은 전작을 관통했던 그만의 인장도 찾을 수 있지만, 이 영화가 스케치한 몬태나의 풍경과 여성들의 삶은 ‘오리건 3부작’보다 쓸쓸하고 스산하며 적막하다. 현재 직면한 문제들과 씨름하던 인물들이 이 영화에서 굳게 입을 다문 채 저 멀리로 시선을 던지거나 묵묵하게 계절을 견뎌가는 숲과 나무, 하늘과 구름이 더 이상 사람들의 삶에 포함되지 않으려는 것처럼 저 멀리 떨어져 존재한다. 그들은 이미 사라진 것들의 흔적으로 남거나 곧 사라질 것처럼 고요하고 삭막하다. 레이차트의 고유함은 로컬, 독립, 여성이라는 키워드로 요약될 수 있지만 그녀의 온화하고도 단호한 시선은 이러한 범주에 갇히지 않는다. ‘오리건 3부작’은 지역의 상황을 통해 미국의 동시대적 문제를 진단하는 통찰력을 지니고 있고, 독립적인 제작형태를 통해 미국인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맥락을 주류의 흐름과 다른 각도에서 접근한다. 그녀는 1960년대의 시대정신인 자유와 해방이라는 가치와 폭력에 대한 저항정신을 잃어버린 중년 남성이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찾는 것이 가능한지, 이미 사라진 세대를 복원하려는 노력이 가치 있는 것인지, 변화하는 세상에서도 온전하게 지켜질 사람 간의 예의가 존재하는지 탐색한다(< 올드 조이 >(2006)). 젊은 여성이 일자리를 찾아 알래스카로 이동하던 중 자동차가 고장 나고 그녀의 개가 사라지는 사건을 겪게 된다. 낯선 공간에 남겨진 그녀는 불안과 대면해야 하며 알래스카에서 맞이하게 될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웬디와 루시 >(2008)). 새로운 삶을 찾아 서부로 이동하는 개척민들이 길을 잃고 사막을 통과하게 된다. 황량하고 피폐한 노정에서 그들이 만난 인디언과 폭력적인 길잡이를 통해 서부라는 지형과 남성의 전유물이 된 서부극을 그녀만의 시선으로 탐구한다(< 믹의 지름길 >(2010)). 레이차트는 공간을 통과하는 행위에 주목함으로써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은밀하게 숨겨져 있거나 제한적인 관심사의 바깥에 버티고 선 삶의 풍경을 탐색하고 인물들의 노정을 통해 더 나은 삶의 가능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유하도록 제안한다. 특히 미국인의 꿈과 이상이 어떤 지점에서, 어떻게 좌절되는가라는 질문을 짊어진 여성들이 당면한 문제들은 미국이라는 국가로부터 비롯된 은근하고도 끈질긴 불안을 거쳐 악몽이 되어간다. 그녀의 인물들은 예기치 못한 순간, 낯선 곳에 머물러야 하고 목적지로 향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서 하루하루 버텨내야 한다. 우리는 사소해 보이지만 살기 위해 당장 필요한 것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인물과 마주하고 우회로조차 허용되지 않는 그들의 절박한 현실과 대면하게 된다. 그들이 당면한 삶의 조건은 영화 바깥의 우리와 동일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점점 줄어드는 돈, 일자리를 찾는 것, 먹을 것과 마실 물을 확보하는 것, 안전하게 잠들 장소, 부당한 합의금에 대한 소송처럼 실질적인 문제도 있다. 또 무자비하고 무분별한 자본의 횡포와 실용주의적 사고에 맞서 환경을 구하는 것, 신념과 실천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태도에 대한 질문, 9.11 테러-미국이 벌인 전쟁-2008년의 금융위기와 같은 부시 정권의 악행과 무능함의 폭로에 이른다. 레이차트는 미국인들을 위협하는 정치적 상황과 경제적 위기에 대한 비판을 이어가면서도 개인의 내밀한 삶을 작동시키는 동력을 꾸준히 모색한다. 그녀의 영화는 지역의 풍광 속에 새겨진 당대 삶의 구체적인 문제들과 더불어 세밀한 삶의 순간으로 인해 아름다움과 풍부함을 선사한다. 처음으로 친구가 생길지 모른다고 생각한 소녀의 빛나는 눈동자, 사랑하는 개를 낯선 곳에 떼어놓을 수밖에 없던 웬디의 절망스런 손짓, 낯선 곳에서 만난 경비업체 직원이 건네준 꼬깃거리는 지폐, 깊은 밤 적막한 소도시를 유유히 활보하는 말의 우아하고도 힘찬 발걸음, 개척시대 학교 건물에서 떨어져 나온 사암 더미, 특별하거나 진지하지 않은 하루를 담은 편지, 목동을 따라 뛰어다니는 사냥개의 활기찬 모습은 일상 속에 감춰진 비범하고 고귀한 순간들이기 때문이다. 레이차트의 영화가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건네는 것은 겸허함과 친밀함을 바탕으로 한 관계의 풍요로움(< 올드 조이 >의 두 친구, < 웬디와 루시 >의 두 존재, < 믹의 지름길 >의 강직한 신념을 지닌 부부)도 있지만 한편으로 실패한 여정과 균열되는 관계(오랜 친구인 중년 남성들이 온천여행을 떠나지만 그들의 삶은 잃어버린 지난날에 대한 향수조차 허용되지 않을 만큼 불안정하고, 일자리를 찾아 알래스카로 가던 중 사랑하는 루시를 잃어버리고 깊은 절망과 두려움에 빠진 웬디는 유일한 이동수단인 차마저 잃게 된다. 믹과 인디언이라는 두 길잡이를 동원해서 신앙공동체를 세울 약속의 땅을 찾아가는 순례자 가족에게 닥친 공포와 두려움의 확산은 서부라는 공간이 배태한 이주와 정착이라는 근원적인 두려움을 바라본다. <어둠 속에서>(2013)는 환경을 위해 댐을 폭파시키려다 실패한 젊은 운동가들의 회의와 좌절을 통해 머릿속에서 생산되는 신념과 육체를 통해 실천되는 행위에 대해 질문한다. 하지만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은 희박하기만 하다.)에서 파생된 곤경도 존재한다. 무엇보다 풍경과 인물에 대해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는 레이차트의 완고한 태도가 중심에 놓여 있다. 그렇기에 그녀의 인물들은 타인과의 관계가 회복되거나 당면한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라는 불가능한 꿈에 대해 전력을 다해 거부한다. 불안과 절망을 이겨낼 수 없을지라도 삶은 이어질 것이며, 삭막한 여정에서 친밀한 존재와 교감하거나 이별할지 모르고, 그리하여 인간의 삶이 사막의 모래알갱이처럼 바람에 흩어져 흔적으로 남게 된다는 사실 앞에 그들은 솔직하고 겸허하다. 오랜 시간 묵묵히 존재하는 풍경과 대면한 인간의 유한성을 수용하고, 미완의 삶을 살고 있는 존재가 당도하고자 애쓰는 노정을 끈질기게 응시하는 레이차트의 카메라를 통해 동시대 서부의 풍광과 세밀한 삶의 기록이 조우한다. < 어떤 여자들 >은 네 여성의 이야기가 느슨하게 연결되기 때문에 그녀들이 어떤 삶을 꾸려나가고 어떤 태도로 살아가고 있는지, 타인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불화를 어떻게 대하는지, 서부라는 풍경이 그들을 어떻게 품고 있는지에 집중한다. < 믹의 지름길 >이 서부의 횡단기라면, 이 영화는 서부를 맴도는 인물이 그들을 에워싼 풍경을 응시하거나 회피하는 시선으로 건네받는 풍경과 역사에 대한 사색이다. 그런데 응시의 연결망이 너무 쓸쓸하고 음울해서 서부라는 풍경과 그 시대에 대한 종언처럼 느껴진다. 개척기 서부를 통과했던 이주민과 오랜 시간 땅의 주인이었던 인디언이 사라진 곳에 사암 덩어리나 황야를 달리는 철길, 드문드문 남아 있는 목장이 서부임을 드러낸다. 정착지를 향해 걷는 고된 행렬, 카우보이와 악당들이 허다하게 뿜어내던 총성, 달리는 말들의 격렬한 운동과 추격은 차갑고 어두운 겨울이라는 계절, 마을을 에워싼 산, 고립된 목장, 길게 뻗은 도로에 흡수된 것처럼 보인다. 레이차트는 퇴적물이 되어버린 서부, 이미 죽어버려 생동하는 힘이 사라진 서부를 사색하기 위해 풍경을 기억하고 자신의 삶으로 기입하는 자들(노인과 인디언 소녀), 풍경과 무관하게 살아가거나(리빙스턴에 거주하는 중년의 변호사와 법대생), 서부를 소유하려는 자(집을 지으려는 여성)를 등장시킨다. 그렇기에 <어떤 여자들>은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는 겨울의 황량한 풍경을 관찰함으로써 경관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모습을 응시하도록 인도한다. 그리고 풍경에 기입된 서부의 원초적인 기억과 사라진 존재들을 불러들인다. 어쩌면 이 영화는 인물들의 세밀한 표정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보다 잔뜩 흐린 하늘과 낮게 깔린 구름,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들, 바싹 말라버린 목초지, 멀리 보이는 눈 덮인 산이 주인공임을 증명하는 것 같다. 척박한 풍경과 고된 인물의 삶을 드러내는 방식을 살펴보자. 이 영화의 인물들은 모두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미묘하게 어긋나거나 고립되어 있으며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친구라고는 말이나 개가 전부인, 삭막한 겨울을 보내는 인디언 소녀나 골칫덩어리 의뢰인을 설득하지 못하는 중년의 변호사, 대출금을 갚기 위해 왕복 8시간을 운전해야 하는 법대생, 고즈넉한 숲에 집을 짓기 위해 개척시대의 사암이 필요한 일 중독자의 겨울은 반복되는 노동과 고립된 생활, 소원에 대한 과도한 집착, 무기력함과 공허함, 빈곤에 대한 두려움과 피로에 잠식되어 있다. 변호사는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에 눈길을 돌리지 않는다. 그녀의 관심은 의뢰인의 무리한 요구로부터 벗어나는 것뿐이며, 잠이 부족한 법대생은 밤에만 등장하기 때문에 풍경(과 사람)으로부터 배제되고 고립된다. 숲속에 집을 지으려는 여성이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에도 그녀가 자연을 응시한다기보다 사이가 틀어진 사춘기 딸과 자신의 편이 되어주지 못하는 남편과의 단절이 강조된다. 조깅을 하거나 숲길을 걷고 집이 지어질 장소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그녀조차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집의 미래를 떠올릴 뿐, 현재 그녀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에겐 눈을 감고 있다. 그녀의 관심사는 오직 이웃 노인이 소유한 사암뿐이고, 본고장에서 나는 돌로 집을 짓겠다는 소원조차 소유와 과시, 약탈의 행위로 변질된다. 그녀는 노인이 애틋하게 집과 땅의 역사에 대해 회고할 때에도 그저 사암을 가져가라는 허락만 요구할 뿐 그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 기어이 사암을 싣고 가던 날, 노인이 집 안에서 물끄러미 바깥을 바라보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뭉클하면서도 절망적인 선언처럼 다가온다. 집의 형태를 갖춘 가족의 텐트/노인 홀로 사는 미완성의 집, 오랜 시간 녹지 않았을 눈이 더께로 앉은 산을 배경 삼아 서부의 무덤처럼 놓인 사암더미/여인의 텐트 근처에 차곡차곡 정리된 사암, 필요에 따른 거래/증여의 행위 끝에 마치 무덤에 갇힌 왕의 미라처럼 보이는 노인의 끈덕진 응시가 놓여 있다. 개척기의 서부, 마을이 처음 만들어질 때 교회보다 먼저 지어진 학교의 흔적만 남은 돌무더기가 치워진 곳은 노인이 거주한 지 50년 넘게 지켜온 터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레이차트의 카메라는 노인의 집을 멀리서 지켜보는데, 마치 개척기의 역사가 스며든 대지와 몬태나의 스산한 풍경이 노인의 응시와 더불어 사라질 것임을 알면서도 제자리를 지키는 예언자 같다. 비록 기억하고 응시하는 행위자가 사라질지언정 레이차트는 인물보다 먼저 시선을 거두지 않는 것만이, 그들의 사라짐까지 목도하는 것이 서부와 그곳에서 살았던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노인이 자신의 죽음과 서부의 소멸을 염려하는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 어떤 여자들 >에서 가장 서부와 닮아 있는 사람은 목장 소녀이다. 그녀는 미국이라는 국가보다 더 오랫동안 서부와 함께 살아온 존재이자 삶의 터전으로써의 서부와 능동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즉 목장, 말, 카우보이로 대표되는 서부를 공유하고 있으며 원주민인 선조들의 삶을 기억함으로 인해 온전히 풍경에 속해 있는 존재가 된다. 소녀는 우연히 학교법 강의에 참석하게 되고 법대생에게 각별한 감정을 느낀다. 마구간과 목장 숙소를 규칙적으로 오가면서 일하는 그녀의 단조로운 삶에 파장이 일기 시작하지만, 피로에 찌들고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봐 두려운 법대생은 인사도 없이 강의를 그만둔다. 소녀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리빙스턴으로 향하고 도시의 밤거리를 걸으면서 카우보이모자가 진열된 상점을 구경하고 식당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을 쳐다본다. 결국 법대생을 찾게 되지만, 정작 그녀는 당혹스러워하며 노골적으로 불편함을 드러낸다. 자신을 기다리는 유일한 존재인 동물들에게로, 자신이 속한 서부로 돌아가던 길에 졸음을 이기지 못한 소녀의 차가 스르륵 미끄러지다가 마른 목초지에 멈춰 선다. 이 움직임은 중년의 변호사가 쇼핑몰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인디언들의 전통춤 공연과 대비를 이룬다. 원주민이었던 인디언들의 삶이 한낱 구경거리가 되면서 도시의 상품으로 전락했고, 그렇게라도 연명해야 하는 삶의 스산함은 쇼윈도에 진열된 모자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하지만 기념품이나 상징에 머물기를 거부하는 소녀는 야생의 삶에 대한 열망과 자신에게 충실하겠다는 의지를 아직 지니고 있기에 존귀하다. 어쩌면 생애 처음으로 도시를 찾았을지 모를 소녀의 방문은 실패한 여정이었어도 깊은 감동을 남긴다. 백인 가족의 단란한 식사를 보면서 미소를 짓거나 우아하고 당당한 자세로 말을 타고 활보하는 모습은 정성껏 말의 갈기를 매만지는 손길과 말과 동일한 리듬으로 움직이는 그녀의 발, 목초지를 가로지르는 생생함과 더불어 그녀의 존엄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레이차트는 오랜 시간 거주했던 선조들의 땅을 떠났다가 씁쓸한 감정을 지닌 채 돌아오는 소녀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그녀의 자동차가 갓길로 빠지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지만 다시 소녀의 얼굴로 시선을 돌리지 않는 것은 여행 이후 소녀의 변화 여부를 확인하는 것보다 중요한 사실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소녀는 아직도 단단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목장에는 그녀와 겨울을 함께 보내는 동물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 그녀의 의지로 말을 길들이거나 돌보는 행위가 그녀를 지탱할 것이며, 그녀를 품고 있는 서부 또한 소녀의 삶을 물끄러미 바라볼 것이기 때문이다. 레이차트는 우리에게 주어진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문제를 고심한다. 일상을 영위하는 표면 아래 숨어 있는 것 같지만, 먹고 마시고 잠을 청하거나 노동하는 매 순간 첨예하게 개입된 정치적 사안은 정착하지 못한 채 떠도는 과정에 놓인 인물들의 제스처와 표정, 불온한 시대에 잠시나마 온기를 더하는 숨결, 인물들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미국의 풍경들 속에 깊이 스며든다. 나아가 < 어떤 여자들 >은 서부의 지형과 지리적인 풍경에서 서부라는 역사와 영화적 기억을 덧대어놓는다. 그것은 서부와 이별했던 남자들, 사막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뒷모습, 사막을 달려 멀리 사라지는 기차와 같은 회고의 대상에 머물기를 거부한다. 위대한 풍경이 된 서부는 적막할지언정 그녀들의 삶을 지켜보고 있으며 사람들은 저마다의 서부를 되살리거나 망각한다. 하지만 사라짐에 대해 무심한 응시가 되었건, 끈질기게 나와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임을 알고 있는 시선이건 서부를 떠돌던 그녀들의 고단하고 피로한 삶을 향하고 있다. ‘개인의 경험과 삶의 감각이 지닌 힘을 믿으며, 작고 사소한 것들로부터 시작되는 삶의 가치를 탐색하는 것이 영화가 해야 하는 일’임을 실천하는 그녀의 영화가 아름답고도 위대한 것은 미완의 시간을 견디면서 목적지에 도달조차 하지 못한 인물들에게 고집스럽게 머물러 있는 그녀의 시선 때문이다. ‘어떤’ ‘여자들’이 살아내고 응시한 것은 정직하고 윤리적이며 풍경에 대해 겸손하고 솔직한 레이차트를 향하고 있으며 인물들이 머무는 공간에 깃든 과거와 현재를 대면하도록 인도한다. 그들이 사라진 존재들과 생성되는 것들에게 통감할 때 정치, 사회적 표명과 내밀한 감정이 일체를 이룬다.
한 남자( 신성일 )가 건물의 지붕을 서성이다 창문을 통해 건물 안으로 들어온다. 고요하게 텅 빈 건물 안에서 남자는 금고를 찾아 그 속의 서류를 꺼내어 살핀다. 그때 총을 든 또 다른 남자가 계단을 올라 그가 있는 곳으로 오고 있다. 둘은 결국 마주치고 비밀 서류가 든 가방을 차지하기 위한 추격과 결투가 시작된다. 추격과 결투의 장소는 계단이다. 그들은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붙잡히고 뒤엉키며 싸운다. 마침내 남자가 계단의 끝에서 문을 열지만, 불행히도 셔터가 내려져 있고, 쓰러져있던 또 다른 남자가 다시 그의 발목을 잡는다. 문과 셔터 사이, 그 비좁은 공간에서 둘의 질긴 몸싸움이 이어지고, 먼저 밖으로 나오는 데 성공한 남자(신성일)가 셔터를 내려 상대의 목을 짓누른다. 그의 목 아래에는 비밀 서류가 담긴 가방이 있고 그의 숨은 이내 끊어진다. 그런데 적을 제거한 남자는 의아하게도 가방을 그대로 둔 채 현장을 떠나버린다. 비로소 영화의 타이틀이 셔터 위로 뜬다. 영화가 시작한 지 13분이 지나가고 있다. 어딘지 기하학적으로 왜곡된 것처럼 보이는 공간, 인물들을 포착하는 카메라의 이상한 앵글, 대사 없이 진행되는 인물들의 집요한 행로, 화려한 액션이기보다는 피로하고 무거운 노동으로 느껴지는 대결의 공기, 대결이 벌어지는 계단 장면의 끈질긴 하강의 리듬, 그리고 목적의 완수를 눈앞에 두고 목표물을 버려버리는 남자의 선택. 처음 이 영화를 마주한 날, 나는 첫 시퀀스를 경험한 후, 마치 한 편의 영화 전체를 보고 난 것처럼 얼이 빠졌다. 서사와 관련된 어떠한 정보나 대사가 부재한 상태에서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텅 빈 공간에 던져진 육체적 충돌과 동선만으로 이토록 괴이한 정념을 자아내는 영화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 원점 >의 첫 시퀀스는 그렇게 느리게 휘몰아쳤다. 그 시퀀스를 보고 나니, 이후의 전개가 어떠하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시퀀스가 도입부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어 보이는 거리의 여자에게로 이행하고, 거기 도시의 밤공기가 한없이 쓸쓸하고 퇴폐적으로 젖어들며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세계를 이룰 때, 나는 이 영화가 과감하게 뚫고 나아갈 미지의 길들에 이미 홀린 상태였던 것 같다. 역시 그러했다. 쇠락한 어두운 건물에서 시작했던 영화는, 도시의 밤거리를 지나 놀랍게도 설악산의 겨울 산장으로 이동한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산업 스파이와 그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고용된 창녀가 가짜 부부행세를 하며 자연 속에서 중산층 부르주아 부부들 사이에 있다. 그곳은 도시와 대비되는 평화로운 자연이 아니라, 도시의 억압된 것들이 뒤틀려 요란하게 아우성치는 시공간처럼 보인다. 위태롭고 불길하면서도 향락적이다. 사람들 사이의 의심과 비밀과 위선, 여기 노골적으로 일렁이는 천박하고 성적인 공기, 설산의 위용과 절벽의 아찔함이 뒤섞이는 가운데, 불균질한 욕망과 죽음의 그림자가 서로 각축을 벌이며 기묘하게 생동하는 것이다. 그 세계의 끝에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사실이라고는 삶의 벼랑 끝에서 남자와 여자가 사랑에 빠진다는 것, 그 사랑이 비극으로 끝나리라는 점 정도다. 실제로 그러했다. 그런데 그 사실의 통속성을 압도하고도 남을만한 장면이 설악산에서의 마지막 시간에 등장한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설산을 가로지르며 도망치고 있는 중이다. 그때, 그들 앞에 산 위로 연결되는 가파른 계단이 나타나는데, 계단의 위와 아래 양쪽에는 남자를 노리는 사내들이 이미 서 있다. 피할 곳이 없다는 사실을 직감한 남자는 바지 벨트를 풀러 계단 손잡이에 걸고 손에 낀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벌이는 탐색과 벨트를 의지한 미끄러짐과 도약, 그리고 지쳐버린 맨몸만으로 성립된 마지막 액션 장면의 호흡은 건물에서의 첫 시퀀스를 떠오르게 한다. 계단에서 상대의 공격을 맨몸으로 질기게 견디는 남자의 시간을 카메라가 함께 버티고 있다는 인상이 반복되면서도 지독한 무력감의 공기를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계단이라는 수직적 세계의 특성상 카메라는 남자의 싸움을 수평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거나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다. 카메라가 남자의 싸움에 수평적으로 가까이 닿을 수 없다는 사실, 그러니까 이 싸움의 치열한 현재성은 남자 혼자만의 것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 결국 이 수직의 풍경에는 어쩔 수 없이 추락에 대한 무기력한 관망이 예견되어 있다는 사실이 (싸움의 승패와 상관없이) 이상하게도 서글픔을 안기는 것이다. 그 수직의 풍경 안에서 남자는 자신에게 돌진하는 육체들로부터 끝내 버텼으나, 어이없게도 저 멀리 아래에서 누군가가 쏜 총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영화는 다시 도시의 밤으로 돌아온다. 남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가 자신을 싫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다고 읊조리던 여자는 도입부에서 본 그 황폐한 어둠의 거리를 다시 서성인다. 설악산에서의 죽음이라는 극적인 사건을 통과했으나 도시의 그 무엇도 변한 것이 없다. 그저 한 남자가 공허하게 세계에서 사라졌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우리가 본 저 많은 사연과 미련들, 저 대담하고 절박한 동선과 충돌, 불쑥불쑥 고개를 들던 생의 감각은 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원점. 이토록 뼈저린 영화의 제목을 나는 알지 못한다.
* 이 글에는 < 나이트 크롤러 >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나이트 크롤러 >의 후반부에는 상황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장면이 한군데 있다. 심야의 격렬한 추격전 끝에 경찰들의 차가 전복되고 살인자의 차도 부서져 도로에 나뒹군다. 밤새 일어나는 말초적인 사건사고 현장을 촬영하여 방송국에 넘기고 돈을 버는 주인공 루(제이크 질렌할)와 그의 조수가 살인자의 자동차 곁으로 재빠르게 다가간다. 루가 먼저 다가가지만 그는 이내 몇 발짝 거리를 두고 멀어지면서 조수를 향해 어서 빨리 저 사람을 가까이에서 찍으라고 재촉한다. 하지만 조수가 다가가자마자 살인자는 총으로 그를 쏘아 살해하고는 차에서 내린다. 몇 발자국 앞에는 루가 카메라를 들고 그를 찍고 있다. 이때 그 납득되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 살인자는 몇 초간 루를 잠시 노려볼 뿐 발포하지 않고 뒤돌아선다. 그리고는 잠시 후 뒤 따라 오는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 사망한다. 왜 그런 것일까. 두 사람 사이에는 그 어느 관계도 없다. 주인공의 목숨이 부지되는 그 흔한 장면에서처럼 상대방의 총알이 떨어졌기 때문도 아니다. 살인자가 곧 이어질 경찰들과의 총격전을 위해 총알을 아껴야 한다고 찰나에 판단한 것이리라 추정하는 건 그의 냉철함을 너무 높게 평가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는 눈앞에 있는 루의 조수를 당장에 쏘아 죽인 사람이 아닌가. 그는 냉철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그는 왜 자신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는 루를 쏘지 않고 얌전히 뒤돌아섰는가. 이 장면의 의문스러운 불투명이 이 영화의 흥미로움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 나이트 크롤러 >는 루에 관한 영화다. 그는 심야의 유혈 낭자한 사건 사고들을 하이에나처럼 쫓아다니며 찍어서 방송국의 아침 뉴스 프로그램에 넘기고 돈을 챙긴다. 장물이나 훔쳐 팔던 중이었는데 우연히 사고 장면 촬영분이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이다. 그걸 두고 루는 사업을 시작했다고 꽤 근사하고 자부심 넘치게 표현한다. 우린 그의 과거를 전혀 모르거니와 그가 혼자 사는 반미치광이라는 사실 외에는 현재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거의 없다. 미치광이 루 역할을 맡아 열연한 배우 제이크 질렌할의 연기를 칭송하는 평가들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섬세한 연기를 선보였고 독창적인 캐릭터를 창조해 냈다. 다만 < 나이트 크롤러 >가 배우의 열연과 캐릭터의 완성 측면으로만 접근될 영화는 아닌 것 같다. 예컨대 <나이트 크롤러>는 같은 L.A.의 밤을 배경으로 했던 한 편의 액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마이클 만의 < 콜래트럴 >이다. 의외로 <콜래트럴>의 빈센트(톰 크루즈)와 <나이트 크롤러>의 루는 여러 유사성을 공유하고 있다. 물론 빈센트가 L.A.라는 거대 도시에 무지한 이방인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두 인물이 이 도시의 밤을 밤새 헤매고 다닌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들의 활동 시간은 전적으로 밤의 시간이다. L.A.의 밤이라는 배경을 <콜래트럴> 이후에 이렇게 실제적으로 차갑고 적막하며 정신질환적인 정서로 그려낸 영화는 흔치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콜래트럴>의 빈센트, <나이트 크롤러>의 루 두 인물 사이의 더 흥미로운 유사성은 이들이 완벽하게 흥정의 달인이며 요설가라는 점이고 그것이 종종 그들의 내재된 광기를 번뜩이게 한다는 점이다. 흥정은 대개 자부심으로 가득한 요설에 의해 그들 쪽으로 유리하게 성사된다. 빈센트가 흑인 재즈 뮤지션을 살해할 때 그가 펼치는 내기의 흥정(빈센트는 자신이 내는 재즈에 관한 문제를 맞히면 살려주겠다고 흑인 뮤지션을 꼬드긴다)은 루가 사람들을 상대할 때마다 발휘하는 그 비열한 사업수완으로서의 흥정과 요설을 떠올리게 한다. 사실상 루는 조수가 총에 맞아 죽도록 고의적으로 일을 꾸민 것인데, 그 이유가 바로 ‘자신이 가르쳐 준 흥정의 기술로 도리어 자신에게 (급료를 올려 달라는) 흥정을 걸어 왔다’는 점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둘 다 각자의 사업 때문에 밤을 헤매고 있는 것이지만 그 사업의 형태가 사실은 둘 다 청부업이라는 점이다. 빈센트는 살인 청부업을 하고 루는 촬영 청부업을 한다. 다르게 표현할 때 둘의 사업의 연관성은 더 확실해진다. 둘의 사업은 어원적으로는 같은 일이다. 빈센트는 밤새 사람들을 쏘고(shoot) 다니고 루는 밤새 사람들을 찍고(shoot) 다닌다(그리고 이 어원의 동일성은 우리가 제기한 후반부의 그 의문스러운 장면에서 정확히 어떤 효과를 발휘하고 만다). 빈센트가 지나간 자리에는 루가 오게 되어 있다. 이들이 바로 잔인한 도시의 밤을 완성하는 부패한 가상의 짝패일 것이다. 그런데 결정적인 차이가 한 가지 있다. 결국 빈센트는 L.A.의 지하철 안에서 쓸쓸하게 싸늘한 시체로 죽어 갔고 그는 밝고 따뜻한 햇볕을 다시는 보지 못했다. 반면에 루는 수사관의 엄포에도 끄떡하지 않았고 이야기를 거짓으로 꿰맞췄으며 밝은 대낮에 제 발로 경찰서를 나와 사업을 번창시킨다. 하지만 이 차이는 귀결의 차이에 해당할 뿐이다. 두 인물의 다른 귀결은 왜 일어나게 된 것인가 재차 물을 때 다음과 같은 점이 핵심이 될 것이다. 자신의 세계와 대상에 대한 지배력 혹은 통제력을 지닌 것인가 그렇지 못한 것인가. 빈센트는 상실했으나 루는 성취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빈센트의 사업은 맥스라는 운전기사를 지배하고 통제하지 못하는 순간부터 균열을 맞는다. 루는 완전히 반대된다. 조수가 반기를 일으키자 그 즉시 살인을 꾸민다. 루는 처음에 어떠한 지배력도 통제력도 지닌 바 없었지만 그것을 무섭게 성취해간다. 그런데 어떻게 성취해갔느냐가 정작 중요하다. 그가 다루는 세계와 대상 즉 사건사고의 현장에 대한 연출력을 총동원하면서다. 의외로 < 나이트 크롤러 >의 서사적 핵심은 루는 얼마나 본질적으로 사악하고 끔찍한 괴물인가 하는 것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루는 어떻게 현장에서의 조작적인 연출력을 증대해 가는가에 있다. 그 연출력 증대의 궤적을 따라 그의 악함은 저절로 강조되는 것이다. 이 연출력에의 강조야말로 이 영화의 흥미로운 지점이다. 루가 사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 그가 발휘할 수 있는 최선의 연출력이란 기껏해야 사소한 거짓말에 불과하다. 현장의 경찰들이 윽박지를 때 그는 자신의 촬영이 허가받은 것이라고 거짓말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화의 초반부에 루가 젊은 부부의 집에 잠입해 들어갔을 때를 보자. 그는 벌써 대담해진다. 부부가 경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루는 냉장고의 외관에 붙어 있는 사진들의 배열을, 시청자가 상상적 서사를 알아서 일으키도록, 보기 좋게 조작한다. 현장의 사물을 연출하는 것이다. 동시에 집 마당에 서 있는 부부를 적절한 극적 앵글로 포착하기도 한다. 이어지는 다음 사건에서는 차량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남자의 시체를 차 쪽으로 일부러 끌어와 더 참혹한 이미지 구도를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이제 그의 연출의 영역은 단지 소도구의 배치가 아니라 효과적인 프레이밍으로 확장된다. 이즈음 루는 방송국 뉴스 담당자에게 자신이 “프레이밍에 신경을 쓰고 있다”며 그로써 오히려 안팎의 경계를 허물고 시청자들의 시선을 화면에 더 오래 잡아끌 수 있을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루의 연출력은 끔찍할 정도로 과감해진다. 가령 도시 외곽 부유층 백인 저택에서의 일가족 살해 사건이 일어났을 때 루는 인명을 구하려 들기는커녕 현장성 포착이라는 미명하에 죽어 가는 사람들을 방치하고 카메라를 돌린다. 일종의 사건의 방치라는 간접적이지만 치명적인 연출법을 행하기 시작한다. 도주하는 범인들을 일부러 신고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이어서는 더 과감한 연출법이 가해진다. 살인범들이 있는 곳을 경찰에 알려 총격전을 유도하고 미리 기다리다 그것을 찍는 것이다. 간접적인 방치가 아니라 직접적인 유도의 기술이 유용되는 셈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질문했던 장면이야말로 루의 연출력이 최고조에 달한 장면이다. 왜인가. 이 장면은 사건 이후의 순간도 아니고, 사건에의 방치도 아니며, 유도도 아니다. 루, 자신이 몸소 나서서 살인하는 장면을 적극적으로 연출하고 포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의 이 악랄한 연출력을 가장 반기는 것은 역시 루와 거래하는 텔레비전 뉴스 책임자 니나(르네 루소)다. 자신들이 일을 더 잘할 수 있도록 루가 영감을 주는 것 같다며 니나는 결국 감동하여 말한다. 그때 자신들의 일이란 더 자극적이고 더 참혹한 이미지로 가득한 방송, 그녀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목이 잘린 여인이 소리치며 달리는 것”과 같은 이미지의 완성이다. 따라서 우리가 질문했던 장면에 이르러 우린 이렇게 답할 수 있다. 왜 상대는 그때 루에게 총을 쏘지 않은 것인가. 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쏘지 못하는 것이다. 루의 카메라가 상대방의 총보다 더 과격하고 힘이 세며 상위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상황을 만들어 낸 루의 연출력이 상대의 살의보다 더 강력하고 악랄하기 때문이다. 더 센 짐승 앞에서 물러나는 약한 짐승처럼 상대는 돌아선다. 루가 카메라를 든 자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마치 총을 들고 겨누고 있는 것처럼 상대에게 맞서고 있다. 따라서 물러서지도 않고 도망갈 기색도 없다. 마치 그의 손에 들린 카메라로 상대방을 제압하거나 죽일 수도 있으리라는 당당한 표정을 지으면서. 물론 카메라가 당장에 눈앞의 상대를 쓰러뜨리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루의 카메라가 상대방의 총보다 훨씬 더 센 것이다. 총이 카메라를 물리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카메라를 든 자가 총을 든 자를 존재론적으로 제압하고 있는 상황. 이것이 두 악한이 마주하여 일으키는 이 장면의 흥미로움이다. 우리는 총을 쏘는 것과 카메라로 찍는 것이 하나의 단어(shoot)로 계열화될 수 있음을 미리 지적했다. 사람을 쏘고 다니는 남자와 사람을 찍고 다니는 남자가 이 순간 격돌하였을 때, 이 영화에서라면 가치의 면모에 있어서 동일하게 악한 두 인물이 격돌하였을 때, 쏘는 자는 찍는 자에게 결코 대항하지 못한다. 루의 찍는 행위가 연출이라는 전체에 직접적으로 해당한다면 상대의 쏘는 행위란 루의 그 연출 계획안에 들어 있는 일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순간 카메라와 총 사이에 놓인 악의 완력 관계는, 이 영화에서 루가 행하는 카메라의 악이 얼마나 만연해 있는 잔혹함인지 역설하고 있다. 어느 날 아무런 정보도 예고도 없이 그저 좀 대강 보아도 되는 스릴러이겠거니 하고 보게 된 < 나이트 크롤러 >에서 문득 내가 접한 매혹의 지점들이 바로 이상의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