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어락
- 감독
- 이건희
- 제작년도
- 2018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1. 잘 알려진 대로 음악 애호가였던 롤랑 바르트는 피아노를 웬만하면 느리게 치는 편이었다. 언젠가 바르트는 우연히 라디오에서 흐르는, 하프시코디스트 블랑딘 베를레가 연주하는 바흐 파르티타 4번의 쿠랑트를 듣고는 너무 빠른 속주에 자신이 알던 그 곡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고 술회한다. 그러나 쿠랑트는 그 어원(courir, 달리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애당초 쾌활한 춤곡인 터, 실상 바르트의 기준점은 느린 자기 자신이었다. *주1 달리 말해 대개의 곡을 느긋하게 연주했던 바르트가 베를레를 특히 겨냥했다기보다는, 자신의 속도보다 훨씬 빠른 것이 이미 표준이 된 현대적 기준 자체가 못마땅했던 것이다. 한편 나는 이 불만을 발화하는 그의 위치가 퍽 재밌다. 그가 요구한 기준이 여타 프로페셔널 연주자의 ‘정통적인’ 해석이나 정련한 이론에 근거한 게 아니라 오로지 자의적인 경험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물론 그는 음악비평을 위시하여 악기 연주와 작곡까지 꾸준히 실행했지만 끝내 아마추어 음악가로서의 자신을 긍정했다는 점에서, 이 일화 속 바르트의 발언은 비평가의 무리한 지적과 외부인의 ‘미흡한’ 불만이 동시에 발휘된 경우처럼 느껴진다. 그는 괄호에 넣어 덧붙인다. “(이것은 음악 애호가의 자만이 아니라 진실입니다. 왜냐하면 애호가의 욕망은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 쿠랑트는 그 자체로 (분명 역사적 진실에 따라) 연주되었지만, 나를 위해 연주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2 말하자면 내게 비평 또한 “역사적 진실”에 대한 충실도를 떠나 “나를 위해 연주된” 것을 찾는 과정인 듯하다. 나는 바르트의 이 마음가짐이 내가 영화에 느끼는 불손한 태도와도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느꼈다. 사실 이미 정해진 원고 분량을 훌쩍 넘겼음에도 송고 후 며칠이 지나서 나는 이 글의 서두를 다시 쓰고 있는데, 이 코너의 기획을 오해했기 때문이다. 처음에 나는 비평(가)에 대한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이 지면에, 비평에 대해서도 비평가에 대해서도 쓰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피하고 싶은 주제였을까? 솔직히 내게 영화평론가로서의 자의식은 별로 없고, 더 솔직히 그럼에도 영화평론가로서의 무게감은 너무 크다. 하나에서 기인한, 거의 없는 것과 너무 큰 것이 내 안에서 이상한 대결을 벌이는 탓에 이걸 직접적인 글감으로 삼는 글쓰기가 다소 곤란했다. 물론 비평을 글쓰기에만 국한할 수 없는 시대다. 어떤 추천의 목록과 그 방식, 기획과 운영, 수입과 수출, 또한 동료를 모으는 일까지도 모름지기 비평가의 ‘활동’ 영역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허덕이지만, 이러한 수행을 시기와 맥락에 맞게 이어나가는 동시대의 탁월한 비평가들은 분명 여럿 있다. 다만 나는 앞서 언급한 사례에 공감한 바, 보다 소박한 의미에서 태도로서의 비평을 돌아보고 싶다. 결국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당연히 할 말이 있기 때문인데, 이때 중요한 것은 (바르트의 불평처럼) 납득할 수 없는 표준을 의심하고, 대상과 거의 무관한 나를 데려와서라도 나에게 효과적인 것을 찾는 일이다. 내 사유를 보편과 일반에 등재시키고픈 마음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능하다면) 당연한 소리는 덜하고, 의외의 얘기를 더하고 싶다. 연장선상에서 (이제는 왠지 자주 오용되는 것 같은) 정확하게 쓰라는 주문에 오기가 생기곤 하는데, 나는 평문이 정교해지는 데는 관심이 있지만 정확해질 의무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점에서 돌고 돌아 영화로 간다면, 오염 없는 적확성과 유의미의 강박을 동력 삼지 않는 영화들, 도리어 먼지나 얼룩을 묻히고도 별로 개의치 않는 이상한 욕구의 영화들에 대해 더 말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나는 대체로 이곳 저곳을 오가며 힐끗 엿보는 사람이다. 2. “우리가 어딘가 로부터 듣는 것이 듣기의 본질이라면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의 앞 에 있는 것을 )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3 사진의 존재론적 모호성을 설명하기 위해 청각과 시각의 차이를 논하는 스탠리 카벨은 듣기와 보기 행위에 있어 위치/방향의 문제를 지적한다. 우리는 분명 우리 앞에 있는 것을 본다. 문제는 우리가 앞에 놓인 것, 의 앞면까지 선택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우리 앞의 그(것)도 우리를 보고 있다면 눈을 마주칠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우리는 약간 초조한 심정이 될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곤충처럼 겹눈을 지니지 않은 탓에 앞에 있는 것’밖에’ 보지 못하고, 이에 더해 타자인 대상의 앞뒤 또한 결정할 수 없다. 우리가 우리의 앞에 있는 것을 볼 때, 우리 앞에 있는 것은 무엇을 보고 있나? 먼저 나는 어떤 뒷모습을 떠올렸다. 낭만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1818)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두 가지인데, 첫째로는 어느 비장하고 숭고한 뒷모습이고, 둘째로는 그 뒷모습을 비장하고 숭고하게끔 보이도록 만드는, 그의 앞에 펼쳐진 풍경이다. 그 풍경은 인물에게는 전경이겠지만 원근법에 의해 우리에게는 원경이다. 우리는 인물의 뒷모습과 더불어 그가 보고 있는 것까지 볼 수 있다. 모든 레이어를 조감할 수 있는 감상자의 위치 덕에 주체적인 응시자가 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못지않게 우리는 (카벨이 “회화는 세계이다”라고 딱 잘라 말하듯 그 본연의 완결성이라는 속성에 더해) 인간의 시점이 지니는 일방향성이라는 강력한 한계에 도착하게 된다. 시선의 문제는 인식의 문제로 이어진다. 우리는 그의 얼굴을 영원히 볼 수 없다(=모른다).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Wanderer above the Sea of Fog>(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1818) 옆모습(profile)에 관해 떠올릴 수도 있다. 내게 옆모습이라는 개념은 주로 피아니스트의 무대를 상기시킨다. 일반적으로 오늘날의 리사이틀에서 연주자는 관객에게 측면을 보인다. 이 측면의 무대화는 (프란츠 리스트가 기원이라는 통상의 오해와 달리) 얀 라디슬라브 두세크가 최초로 시도한 것이었는데, 콘서트 피아니스트의 시초 격인 그가 연주의 기본 위치로 옆모습을 택한 이유는 그것이 연주자의 입체적인 윤곽을 과시하기에 가장 적절한 방향이었기 때문이다. 연주자는 손뿐만 아니라 신체 전부를 적재적소에 써야 이상적인 연주에 도달할 수 있다. 다채롭게 변모하는 표정과 흔들리는 상체는, 그러나 청중에게 ‘완전히’는 노출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절반의 획득/결핍이야말로 연주자를 향한 호기심을 배가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전혀 보이지 않고 잡을 수도 없는 음악의 기이한 위상을 상상하게 만든다. 연주자는 입퇴장 시에만 청중에게 인사할 뿐 음악을 만들 때는 우리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정면의 욕구는 해결되지 않는다. 물론 영화는 화면 분할이나 오버랩의 기술을, 무엇보다 몽타주의 기법을 터득한 매체라서 우리에게 그(들)의 얼굴을 짜잔, 보여줄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영화는 시야를 조각내는 기계인 카메라로 담은 세계이다(인간의 신체를 모방하며 발전해온 많은 기계장치가 그렇듯 그 기원적 조건을 인계받았을 뿐이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말대로 ‘겨우 오려낼 줄 아는 사물’을 통해 우리는 애당초 분절과 절삭을 거친 모습을 간신히 제공받을 따름인지라, 테크놀로지의 가능성을 무한한 역량으로 긍정하기에는 어쩐지 미진함이 남는다. (가령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열병의 방>(2015)처럼 공간의 삼면을 스크린으로 이용해 동일한 인물과 그 주변을 다양한 각도에서 동시에 바라보는 시도의 경우도 영사 과정을 사후적으로 활용한 것이며 이는 물론, 영화관에서 진행될 수 없는 작업이다. 결과적으로도 우리는 다면을 일체에 조망하지 못하고 각각의 화면을 띄엄띄엄 관람할 수밖에 없다.) <열병의 방>(아핏차퐁 위라세타쿤, 2015) 3. 앞에 있는 것을 본다는 감각이 유효하더라도 정면을 보지 않으면 어딘가 부족한 느낌은 영화를 볼 때 역시 우리를 자극한다. 일단 정면 쇼트가 없는 영화는 극히 드물다. 그러나 ‘부족한 정면’, 그로 인한 ‘마주침의 결여’를 도리어 영화가 핵심적인 동력으로 삼을 때 우리는 그 여집합을 풍족하게 껴안게 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엿보기의 영화들 .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식으로 존재(해야)할까? 가령 무언가를 바라보는 행위 자체를 엿보기와 동일시한다고 느껴질 정도로, 관음적 요소를 서사의 국면마다 개입시키는 < 괴인 >(이정홍, 2022)은 어떨까. <괴인>의 도입부에는 어두운 밤 중 두 남자가 어느 문앞에서 도어락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자꾸 비밀번호를 틀리는 그들은 이 집의 주인이 아닌 것 같다. 추후에 밝혀지지만 그들이 머문 곳은 개업을 앞둔 피아노 학원이고 두 남자는 그곳의 공사를 맡은 목수들이다. 기홍은 다음 날 공사를 마저 진행하기 위해, 고객인 원장의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학원을 간밤의 잠자리로 이용한다. <괴인>(이정홍, 2022) 중 기홍은 눈을 감기 위해 그곳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날 그는 예기치 못한 사태를 맞닥뜨린다(흥미롭게도 이 사실마저 얼마 지나서야 알게 된다). <괴인>은 주인과 침입자라는 대비된 설정을 반복해 제시하면서도 그 양분된 세계에 머무르기보다 인물들의 동선마다 회색지대를 깔아놓는데, 이 과정에서 엿보기의 충동을 여지없이 기입한다. 남의 집안을 훔쳐보기(그러다가 휴대폰을 떨어뜨려 한쪽이 까맣게 나간 액정 화면), 답사의 명목으로 공간을 힐끔거리며 관찰하기, 심지어 계절이 지난 어느 날 길을 걷다 우연히 스쳐지나가는 어떤 얼굴을 알아보는 것까지. 자유로운 시선이 아니라 어떤 낌새와 기미를 감지할 수 있을 만큼만 유유하게 바라보는 이 찰나의 행위는 인물들 사이에 완벽히 봉인되지 못하고 새어나가는(영화의 주요한 사태를 빌려 말하면 ‘누수되는’) 관계의 파열음을 누적시키며 끝까지 미스터리를 야기한다. 인물들은 편하게 대화하는 듯하지만 매번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가까운 친구 사이에서 나누는 메시지에도 의중이 애매한 뉘앙스가 오가고, 오랜만에 식구들과 시간을 보낼 때조차 개인이 발휘해야 할 의무가 마치 감시하듯 맴돈다. 보기는 봤지만 정확히 본 것이 아니라 확정할 수 없는 사태가 연속된다. <괴인>은 인물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 ‘모호한 확실함(혹은 그 역)’을 섣부르게 ‘묘사’하는 게 아니라 차라리 ‘일별’하기 때문에 성공적이다(그 점에서 하나가 기홍에게 구태여 다시 돌아와 자신이 자동차 지붕을 망가뜨린 “그 사람”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이 사건의 유일한 증거로 기능한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한편 화면상에서 시각적으로 거의 와해된 조건을 설정함으로써 도리어 관객에게 엿보기의 감각을 완전히 이양해버리는 사례도 있다. < 물안에서 >(홍상수, 2023)의 개봉 당시, 언론시사회에서조차 이 영화의 화질을 영사 사고로 착각해 관객이 문제를 제기한 해프닝도 있었고, 시종 흐릿한 화면을 두고 제목 그대로 수중의 느낌을 표현하려 한 것이냐는 농담 섞인 평이 돌기도 했다. 말하자면 참을 수 없는 화면의 흐릿함. (초반부 약간을 제외하고는) 끝까지 초점 없는 화면으로 일관하는 이 영화를 관습적인 언어로 규명하기에는 아직도 어려움이 따른다. 특히 영화를 보고 말하는 작업에서 거의 불가피한, 장면 내부에 배치된 시각적 요소들의 기술(記述)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난감할 수밖에 없다. <물안에서>(홍상수, 2023) 중 그러나 <물안에서>가 형상을 분명히 제시하지는 않는다고 영화를 지탱하는 모종의 조건들을 아예 유폐한 것 또한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제시된 것을 우리는 어떻게 본 걸까. 그냥 단순히 흐린 것을 깨끗하게 보는 드문 경험에 참여한 것일까(아니면 그 반대인 걸까)? 특기할 만한 지점 중 하나는 영화의 서사다. 홍상수 영화의 이야기를 쉽사리 정돈하는 일은 몹시 어려운데, <물안에서>는 시공간을 불확실하게 맞물려놓거나 복수의 구조를 경합시키는 시도가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서사를 파악하기가 어렵지는 않다. 한편 우리는 인물들의 얼굴과 표정, 자세와 제스처 등 비언어적 표현들을 소상하게 살필 수는 없는데, 대신에 우리는 이들의 (이마저도 종종 ‘불성실’하게 처리된) 목소리, 그리하여 서술되는 이야기를 건네받게 된다. 정면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 와중에 이들의 말은 계속되고, 심지어 관객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시시콜콜 얘기하는 그들은 우리에게 시각적 경험의 불확실성을 절감하게 만든다. 관객은 이 갑갑한 화면을 정면으로 (못) 보면서 이미지의 제한된 용법이 단일한 서사 안에서 문법을 형성해나가는 과정에 함께 놓인다. <물안에서>는 극영화에서 서사를 전달하기 위한 형식으로써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명쾌한) ‘화면’이 역할을 거부할 때, 이 불가결하다고 간주되는 요소의 찌그러진 상태 와중에도 기묘하게 지속되는 영화의 방향을 새롭게 일깨운다. 우리가 보는 것은 밝은가, 어두운가. 또렷한가, 흐릿한가. 움직이는가, 정지해 있는가. 짓물러진 화면은 이 판단을 진정 불가능하게 하는가? 그렇다면 영화는 성립하지 않는 걸까? 열화된 화면을 보는 내내 우리가 (물리적으로 정확히 볼 수 없다는 의미에서) 엿보고 있다는 감각이 피어오르는 한편, (못) 보기의 문제가 역설적으로 정말 본다는 것의 감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물안에서>는 듣기의 작업과도 연동하여 주장한다. 예컨대 남희가 새벽에 들었다던 “정신 차려!”라는 말은 어디서 들렸으며 누가 말했는지 전혀 밝혀지지 않는다. 이 잠수된 것 같은 화면에서 그 존재가 해소되지 않은 청각적 정보가 대사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다. < 도망친 여자 >(홍상수, 2019)에서 대사로는 대두되지만 그 모습은 제시되지 않는 ‘3층’이나 ‘위층’, ‘지하실’의 존재(부재)가 떠오르기도 한다. 종장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뒷모습을 보게 된다. 서론에 언급했던 회화와는 전혀 다른 시대와 맥락에 놓여 있음에도 몹시 완결된 인상을 전달하는 뒷모습이다. 역시나 그를 돌려세우고픈 마음이 일지만, 흐르는 물소리가 화면을 메울 때 우리는 이곳이 영화의 종착지임을 직감하게 된다. 그가 점점 멀어지고 우리는 여전히 그의 얼굴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일단 엿보지 않으면 보는 것은 시작도 할 수 없다. *** 주1. 다음의 논문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김주원, 「롤랑 바르트의 음악비평」, 『불어불문학연구』, 제136집, 2023, 144쪽. 주2. 롤랑 바르트, 변광배 옮김,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민음사, 2021), 전자책 377쪽. 주3. 스탠리 카벨, 이두희·박진희 옮김, 『눈에 비치는 세계』(이모션북스, 2014), 53쪽 이보라(영화평론가) l “나를 위해 연주된 것”을 찾겠다는 마음으로 일단은 쓴다. 씨네21 영화평론상,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비평공모 당선.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공저) 집필.
서보형 감독의 < 탈날 탈 >은 한 남자가 겪는 지각의 오류, 시스템의 오류, 그리고 존재의 오류를 통해서 기이함과 으스스함을 불러일으킨다. 10분 남짓한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는 이 작품은 어느 아파트에 혼자 사는 한 남자가 야심한 밤중에 겪는 불가사의한 일들을 다룬다. 남자는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지만, 그가 현관문 바깥을 내다봤을 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시 집 안으로 들어온 남자가 전등 스위치를 누르자 텔레비전이 켜지고, 텔레비전 리모컨의 버튼을 누르자 핸드폰에 문자 메시지가 뜨면서 현관문 도어락의 조작음이 들린다. 기이한 상황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남자가 도어락의 조작음을 듣고 현관문을 열면 잘못 배송된 소포가 놓여 있고, 그 소포를 들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현관문을 열면 소포를 받아야 할 이웃집 주민이 나타나고, 당황한 남자가 황급히 자기 집을 찾은 다음 현관문을 두드리면 묘령의 여자가 나타난다. 이 일련의 상황이 남자의 꿈속에서 벌어지는 일이건 남자의 집에 귀신이 들려 벌어지는 일이건 간에 이 작품 속 세계에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만큼은 틀림없어 보인다. 지각의 오류는 이 작품을 지탱하는 첫 번째 법칙이다. 우선 이 작품의 타이틀 시퀀스에 주목하자. 검정 화면 위로 영화의 제목이 서서히 등장하는 동안 외화면을 통해 단절적인 전자음이 들린다. 여기서 관객은 영화 제목 이외에는 아무런 시각적인 정보도 얻을 수 없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의 정체를 감지할 수 있는 청각적인 정보를 획득할 수 있다. 검정 화면은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지만, 외화면의 사운드는 무언가가 있음을 가리킨다. 이것은 한편으로 지시물이 지시 대상과 일치하지 않는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다른 한편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을 그린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영화 속에서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에 대응하는 사람의 부재, 도어락의 조작음에 대응하는 사람의 부재 또한 같은 논리가 적용된 경우로 볼 수 있다. 만약 관객인 우리가 이 작품에서 기이한 감각을 느낀다면 그것은 지시물의 불일치 또는 부재의 현존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편, 관객은 이 영화 속 주인공 남자가 감지하지 못하는 이상한 시선 한 가지를 획득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린다. 그것은 남자의 시선과 무관한 듯이 자유롭게 아파트 내부를 움직이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 통상적으로 극영화에서 샷-리버스 샷을 통해 관객이 특정 인물의 시선에 동기화될 수 있게 하는 것과 달리 이 작품의 일부 장면은 주인공 남자의 시선에서 벗어난 상태로 아파트 내부의 변화된 상황을 담는다. 만약 이 예외적인 장면이 주인공 남자의 시선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면, 이 작품 속에는 관객인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존재가 부지불식간에 영화 속 현실로 틈입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보이지 않으나 그 존재만큼은 분명하게 감지되는 어떤 유령적인 대상들은 시스템의 오류를 통해 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탈날 탈>에서 일상 속 대상들이 하나의 체계를 이루면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스위치, 리모컨, 도어락의 기능을 통해서 암시된다. 전등과 스위치, 텔레비전과 리모컨, 현관문과 도어락은 각각 하나의 사물과 그것의 작동을 제어하는 장치 간의 연결을 통해서 하나의 시스템을 구성한다. 흥미로운 것은 하나의 사물을 제어하는 장치들이 오작동을 일으킬 때 그 제어 장치들이 다른 사물과 연결된다는 점이다. 전등의 스위치가 텔레비전과 연결되고, 텔레비전 리모컨이 핸드폰과 연결되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것은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배치가 어그러지면서 나타나는 시스템의 오류라고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작품 속에서 오작동을 일으키는 제어 장치들이 본래 하나의 세계로 진입하는 관문의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의 리모컨은 저기 다른 곳에서 생산된 영상을 여기 이곳으로 전송하기 위한 창을 여는 역할을 하며, 도어락은 외부인이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여는 역할을 한다. 만약 이러한 제어 장치들이 오류를 일으킨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 대신 예측할 수 없는 다른 세계를 맞닥뜨린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 영화는 어떤 시스템을 구성하는 요소와 다른 시스템을 구성하는 요소가 서로 연결되면서 기존의 질서에서 벗어난 세계가 만들어지는 상황을 그린 것이다. 주인공 남자가 전등 스위치를 켰을 때 텔레비전 화면에 홈쇼핑 광고가 등장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어느 휴양지의 여행 상품을 판매하는 그 홈쇼핑 광고는 주인공 남자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의 시선으로 새어 들어오고, 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가 그 상품을 결제한 것처럼 만들어 놓는다. 이 장면은 주목 경제의 원리가 작동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대중들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여러 시청각적인 정보에 노출되어 상품을 구매하는 상황을 연상케 한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영화는 오늘날 대중들이 자신이 원치 않는 시스템에 포섭된 가운데 자율적인 감각과 의지를 모두 박탈당한 채 살아가는 상황을 우회적으로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 지각의 오류에 대한 묘사로 시작해 시스템의 오류에 대한 묘사를 거친 이 작품의 이야기는 존재의 오류를 통해 화룡점정을 찍는다. 이 작품의 으스스한 감각은 그것을 느끼는 주인공 남자가 자신을 둘러싼 상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에 발생한다. 영화 후반부에 남자 주인공은 자신이 어디에 있으며, 자신의 앞에 나타난 사람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스스로 질문을 던진다. 전자의 질문이 자아의 존재에 대한 인식론적인 오류에서 빚어지는 것이라면, 후자의 질문은 타자의 존재에 대한 인식론적인 오류에서 빚어지는 것이다. 남자에게 잘못 배송된 택배 상자, 남자가 사는 집과 택배 상자의 주인이 사는 집의 위치가 바뀌는 상황, 남자의 집에서 나타나는 묘령의 여인 모두 남자가 속해 있는 현실의 시공간이 왜곡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런 서사적 장치들을 통해서 이 영화는 주인공 남자가 흡사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속 인물들처럼 입구는 있으나 출구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서성이고 있는 것처럼 묘사한다. 주인공 남자는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세계가 물샐틈없이 견고하고 안전하다고 믿었겠지만, 이미 그의 세계는 그가 통제할 수 없는 낯선 존재들이 장악한 상태였다. 관객인 우리는 이 모든 기이하고 으스스한 상황이 주인공 남자의 악몽이길 바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인공 남자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잠에서 깨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잠에서 깨어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잠을 자고 싶어도 잠을 자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진정한 공포는 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이 계속해서 유예되는 그 독특한 시공간적 구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유령이 지배하는 그 세계에서 인간은 잠을 잘 권리 그리고 꿈을 꿀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 *이 글에서 반복적으로 언급한 기이함과 으스스함은 마크 피셔의 책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구픽, 2019)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참고한 것임을 밝힌다. (관련글) 1. 우리는 달팽이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 <달팽이>(2020), 2022.04.21. 2. 나와 유령이 함께 하는 시간 - <탈날탈>(2018), 2022.05.31. 3. 타인의 그림자를 집어삼키는 법 - <햄스터 죽이기>(2021), 2022.06.29. 4. 얼굴 없는 영화, 등으로 말하는 영화 - <말투>(2020), 2022.07.27. 5. 사랑의 약속으로 하나가 되는 세계 - <우리의 낮과 밤>(2020), 2022.08.25. 6. 이 몸체의 주인을 찾습니다 - <매미>(2021), 2022.09.23. 7. 이것은 감자인가 아니면 고구마인가? - <감자>(2018), 2022.11.08. 8. 일상을 적시는 시간들 - <햇볕을 볼 시간>(2022), 2022.11.21. 9. 찢김의 고통을 극복할 날을 기다리며 - <자르고 붙이기>(2022), 2022.12.06.
1. …지돈 씨, 이 시대는 이상한 시기이고,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팽창하나 경련적인 변화의 물결의 시대입니다. 이와 같은 변화가 모순적 효과를 동시적으로 확대합니다. 빠르게 움직이는 변화의 시대가 권력관계의 잔인함을 지워내지는 않고, 오히려 다양한 방식들로 권력관계들을 강화하면서 내파의 지점으로 이끕니다… 1) 연재를 시작한지 반년 가까이 지났지만 우리가 만들 에세이 필름의 제작비는 한푼도 모이지 않았다. 투자자나 제작자 역시 나타나지 않았다. 게다가 연재 조회 수는 매회 마다 정확히 반토막이 났고 이렇게 계속 쪼개진다면 쿼크 입자 수준까지 내려갈 지경이었다, 라는 말로 JD가 지난 회를 시작한지 벌써 한 달 가까이 지났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조회 수가 반토막을 넘어 1/3토막이 났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지난 반년 동안 우리의 연재를 읽고 뭐라도 반응을 보여준 사람은 셋뿐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모두 영화평론가들이다. 임재철: 아니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었다는데 무슨 길을 잃었냐고. 내가 보기엔 한국 영화에 들어간 적도 없는데, 안 그래? (직접 들음) 유운성: 제가 문근영 배우를 좋아하긴 하죠, 하하. 집에 싸인도 있고… (전해 들음) 오진우: 연재된 글들을 보고 웃어본 적은 없지만 응원합니다 (인스타그램에서 봄) 세 분 평론가에게 마음 속 깊은 감사와 우정을 전한다. 영화라는 우정. 하지만 지금 JD와 내게 필요한 건 일반적인 우정이 아니다. 영화라는 우정을 가능하게 하는 우정이라고 할까? 그건 만들어진 영화를 통해서야 비로소 가능한 우정이고, 영화를 만드는데 필수적인 물적조건(=돈)과 뗄 수 없는 우정이다. 물론 모든 우정이 영화가 될 필요는 없다. 모든 영화가 우정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그냥 이렇게 말해야겠다. 영화라는 우정은 우정이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온라인 상영관을 통해 <초국지소지천황>을 봤다. 1971년, 감독 하라 마사토와 일군의 배우들은 [고지키]로 알려진 역사와 신화에 관한 오래된 책을 바탕으로 이 16mm 영화를 촬영했다. 하라는 당시 촬영을 끝내지 못했다. 그리고 1년 후, 그는 혼자 슈퍼8 카메라로 촬영을 재개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돌아보고, 신화는 외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물리적인 의미로는 촬영될 수 없지만, 영화 그 자체 혹은 영화 만들기 과정에 깃드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2) 몇 번의 재편집을 거쳐 현재의 형태로 만들어진 <초국지소지천황>은 완성되지 못한 16mm 푸티지와 촬영지에서 촬영지로 움직이는 1인칭 시점의 8mm 촬영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이미지들이 흘러가는 동안 하라는 마음 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두서없이 떠들고, 때로는 직접 노래를 하기도 한다. 일종의 로드무비이자 영화일기, 에세이 필름, 바르트가 말한 글쓰기-의지(scripturire)에 빗대자면 순전한 응시-의지로 이루어진 영화라고 할까. 뷰파인더를 바라보는 동시에 렌즈를 바라보는 하라는 말한다. “생각해 보면 나는 영화를 위해 희생한 과거도, 바칠 현재도 갖고 있지 않다.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모든 걸 갖고 있다.” 나도 20대 초반의 촉망 받는 영화 감독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텐데. 나는 마흔을 넘긴 서평가이지만 서평은 쓰지 않고, 영화를 만들겠다고 나섰지만 영화도 좋아하지 않는다(내가 쓴 [담배와 영화]라는 책의 부제는 ‘나는 어떻게 흡연을 멈추고 영화를 증오하게 되었나’다). 우정을 싫어하진 않지만 우정이라는 말을 남발하는 건 싫다(진정한 우정은 우정이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식의 고색창연한 로맨티시즘의 발로일 수 있다). 영화를 위해 희생한 과거도 바칠 현재도 갖고 있지 않으며 그건 우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라 마사토의 시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성능의 카메라와 편집 프로그램에 얼마든지 접근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고 느낀다(심지어 여기엔 ‘하지만’도 없다). 그리고 우리는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2. “얼굴에서, 얼굴에서! 얼굴은 얼간이들을 위해 만들어졌군!” 3) 얼굴은 보편적이 아니라고 들뢰즈는 말했어요, 라고 JD는 말했다. 그건 백인 그 자체이고, 그리스도이며, 유럽인이고, 에즈라 파운드가 뭔가 관능적인 인간이라 부른 것, 요컨대 평범한 색정광(érotomanie)이며,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보편적인 것의 얼굴, 한 마디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라는 거죠. 4) JD는 계속해서 말한다. -얼굴은 우리를 비인간성으로 이끄는 일종의 정치와도 같은 것, 따라서 인간이 운명을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은 얼굴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기표화와 주관화로 작동하는 기계이자, 인종차별주의 및 민족중심주의를 산출하고 강화시키며 얼굴의 선별에 이용되는 기계인 얼굴성이라는 추상적 기계로부터 도망치는 거라나 뭐라나… 5) 밤이었고, 우리는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KTX 066호 열차를 타고 있었다. 긴 하루였다. 정지돈과 박솔뫼, 그리고 나는 삼요소라는 이름의 서점에서 오후 1시부터 밤 9시까지 독자들과 함께 하는 세 개의 세션을 진행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박솔뫼가 예매한 기차는 15분 먼저 출발했고, 둘만 남아 작은 소리로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었다. 창작과 비평에 대해서, 문학과 사회에 대해서, 문학이라는 좁은 동네에 대해서, 자음과 모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고, 우리가 처한 상황과 그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 해야 하지만 하지 못한 것들, 그리고 절대 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우리는 최근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온라인 상영관을 통해 본 두 편의 영화, 하라 마사토의 <초국지소지천황>과 크리스 페티와 이안 싱클레어의 <런던 순환도로>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는데, <런던 순환도로>는 크리스 페티와 이안 싱클레어가 세계에서 가장 큰 바이패스인 M25 외곽순환도로에 관해 만든 작품으로 일종의 로드무비이자, 사회학적인 비평, 한 세기 전의 미래파 문학 속으로의 영화적인 여행이고,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두 인물 사이의 영화적 대화이다. 6) 두 영화는 여러모로 겹치는 부분이 많다. 일단 듀얼 스크린이라고 하나? 독립된 두 개의 화면이 동시에 흐르며 내레이션을 통해 진행된다는 것, 일종의 로드무비이자 영화에 대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는 부분 등이 그렇다. 물론 다른 점은 더 많다. 하나는 사회(학)적-비평적-대화-외부를 향하는 영화(<런던 순환도로>)고 다른 하나는 신화적-시적-독백-내부를 향하는 영화(<초국지소지천황>)라는 것. 그중에서도 내가 생각하는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하라는 카메라를 바라보지만 페티와 싱클레어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열이면 열 <초국지소지천황>을 더 예술적이라고 말할 거예요. -왜죠? -일종의 진정성일까요. <런던 순환도로>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학적인 일화들을 다양한 레퍼런스들을 통해 배열하고 보여주는데 그걸 하나로 묶어주는 건 런던 순환도로죠. 따라서 이건 나와 관계없는 이야기, 일종의 교양다큐 같은 걸로 받아들이게 되는 거예요. 반면 <초국지소지천황>의 모든 이미지와 이야기를 묶어주는 건 결국 하라 마사토라는 개인이에요. 실제로 감독은 카메라를 바라보며 시네마와 내 얼굴을 마주하겠다, 대적하겠다, 내 얼굴을 보여주겠다, 뭐 이런 다짐을 몇 차례 반복하잖아요. 그런 감독의 행위가, 정확히 말하면 그런 감독의 얼굴이 영화에 진정성을 주입하는 거죠. -저는 사실 그 부분이 싫더라고요. -진정성을 주입하는 부분이요? -카메라로 자기 얼굴을 찍는 부분이요. 코로나19가 유행한 이후 나는 내가 얼굴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화에 나오는 얼굴만 그런 게 아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 상점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 거울에 비친 내 얼굴. 얼굴이 발산하는 정보가 너무 많아 종종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말 그대로 TMI. 언젠가부터 길을 걷고 마트에 가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일상적인 행위들이 훨씬 수월해졌는데, 그건 물론 마스크 때문이다. 얼굴, 얼마나 소름끼치는가. 들뢰즈는 말한다. 자연스럽게도 얼굴은 모공들, 평평한 부분들, 뿌연 부분들, 빛나는 부분들, 하얀 부분들, 구멍들을 가진 달의 풍경이다. 얼굴을 비인간화하기 위해 그것을 클로즈업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커다란 판(gros plan)이며, 자연스럽게 비인간적이며, 괴물적인 복면이다. 7) 영화의 일반적 얼굴은 바로 제국주의의 얼굴이며, 자본주의에 의해 집요하게 그리고 참을성 있게 구축된 세계적 질서의 얼굴이지 않은가? 8) -그래서 우리 연재가 자본주의가 구축한 세계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완벽하게 정교한 얼굴 가면을 계속해서 바꾸어 쓰는 요원들이 등장하는 < 미션 임파서블 >에서 시작했던 거군요. 소름… 그러므로 비약하면, JD가 말했다. 우리의 에세이 필름은 영원히 지금 여기서 씌어져야 합니다. 기록, 확인, 재현, 묘사의 조작이 아니라 언어학자들이 수행동사라고 부르는 것, 정확히 말해 발화하는 행위 외에 어떤 언표도 가지지 아니하는 그런 진귀한 언술적인 형태. 삶은 영화를 모방할 뿐이며, 그리고 이 영화 자체도 기호들의 짜임, 상실되고 무한히 지연된 모방일 뿐입니다. 이른바 포스트-얼굴Post-Ulgul!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천천히 눈이 감겼다. 강연 준비를 하느라 밤을 꼴딱 샌 탓이다. 우리 열차는 곧 광명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내리실 때는 잊으신 물건이 없는지 확인하시고…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안내 방송을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부디 우리의 영화에도 광명(光明)이 있기를, 가능하면 우리의 삶에도, 지저스 크라이스트… 3. …지돈 씨, 저는 오늘 계획을 세웠습니다. 근본적인 계획입니다. 돈을 벌겠습니다. 아주 많이. 예술, 세계, 미래 다 좋지만 일단 돈부터 벌겠습니다. 돈을 벌면 세트부터 짓겠습니다. 촬영 들어가는 날에는 저는 감독 의자에 앉아 있을게요. 햇살이 워낙 좋으니까요. 지돈 씨는 그냥 계단만 올라오시면 됩니다… 9) JD가 어느 글에서 쓴 것처럼 나는 불확신의 픽션을 가진 사람, 약간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며, 뭔가를 이루겠다는 욕심이나 기분 같은 게 없어서 주도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다만 어쩌다보니 무언가를 하고 있는, 말하자면 세상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구원이든 종말이든 그저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이제는 아니다. 내가 무릎을 꿇었던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스스로의 운명을 조종하고 얼굴로부터 도망갈 수 있도록. 그게 가능하다면 말이지만… 박솔뫼와 정지돈과 내가 대전의 삼요소에서 진행한 세션 중 하나는 독자들과 함께 즉석에서 소설을 쓰는 것이었다. 3명의 작가와 9명의 오프라인 참가자 그리고 10명 남짓한 온라인 참가자가 함께 ‘대전만세!’라는 제목의 소설을 썼다. 대전에 관한 소설을 써달라는 대전관광공사의 의뢰를 받고 대전에 도착한 금정연이 원고료가 든 서류가방을 들고 영화를 보러 대전아트시네마에 갔다가 엉뚱한 사건에 휘말리면서 홍콩과 마카오, 런던과 대천 해수욕장을 오가며 벌어지는 환상적인 이야기인데,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극장 앞자리에 앉아 있던 양조위가 금정연에게 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다. “도망가자.” 그러니까 가능하다면 그런 방식으로 도망가면 좋겠다는 말이다… 우리가 얻는 가장 단순한 아이디어 중 하나는 누군가 울고 있을 때 얻게 되는 아이디어다, 라고 존 케이지는 썼다. 뒤샹은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는 울고 있었다. 몇 년 후 같은 도시의 같은 지역에서, 거의 같은 이유로, 라우셴버그는 울고 있었다. 11) 그래서 얻게 된 아이디어가 무엇인지 존 케이지는 쓰지 않는다. 존 케이지가 늘 그렇듯이. 나도 울고 있었다. 집이었고 평범한 저녁이었다. 아이를 목욕시키고 옷을 입히려는데 커튼 뒤에 숨어서 나오질 않았다. 우리 아가가 없어졌네, 어디 갔지, 엉엉. 내가 우는 시늉을 하자 아이가 얼굴을 내밀고 물었다. 아빠 우는 거야? 응, 우는 거야. 그 모습을 유심히 보던 아이가 말했다. 내가 여기에 숨을 테니까 아빠 울어. 알겠다고 하고 계속 우는 시늉을 하는데 어디선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커튼 튀에 숨어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지, 왜 우는 거지’… -우리 아이가 없어져서 울고 있었지. 약간 뻘쭘한 기분으로 내가 말했다. -나는 이빨이 튼튼한 아기 상어 포크레인인데. -이빨이 튼튼한 아기 상어 포크레인이구나. 이빨이 튼튼한 아기 상어 포크레인 어디 있어? -여기 숨어 있어. -거기 있었구나! 이빨이 튼튼한 아기 상어 포크레인, 이리 와서 옷 입자. 그러자 아이가 말했다. -나는 엄청 빠른 소방차 뽀로론데? -아, 엄청 빠른 소방차 뽀로로구나…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 다 그런 것처럼 우리 아이 역시 변신의 귀재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쓰레기를 줍거나(청소차) 호스로 불을 끄는 시늉을 하거나(소방차) 폴짝 폴짝 뛰면서 개굴개굴 울거나(개구리) 인상을 쓴 채 거실을 빠른 속도로 빙글빙글 돌며(돛새치 혹은 중장비차) 논다. 그렇담, 나는 생각했다. 나도 이것저것 따지고 재며 생각할 것 없이 그냥 감독이 되면 되는 거 아닌가? 로지 브라이도티는 [변신: 되기의 유물론을 향해]에서 이렇게 말한다. 요점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즉 고전적 양태로 존재하기Being보다 오히려 결국에 우리가 돌연변이, 변화, 변형을 어떻게 재현하고 무엇이 되기를 원하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또는 로리 앤더슨이 현명하게 말했듯, 요즘에는 분위기moods가 존재의 방식modes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그것은 변화를 창출하고 즐기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분명한 이점이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불안감의 원천입니다. 12) 4. …마지막으로 르네 도말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를 한 번 더 인용하겠습니다. 주려고 하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손에 무언가 넣으려고 한다. 손에 무언가 넣으려고 하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무언가가 되려고 욕망한다. 무언가가 되려고 욕망하면 그때부터 우리는 살게 된다. 13) 지돈 씨,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나는 홍상수의 영화들을 보기 시작했다. 홍상수가 내가 되고 싶은 감독의 이상형에 가까웠기 때문은 아니고, 때마침 개봉을 앞둔 홍상수의 신작 제목이 < 당신 얼굴 앞에서 >였기 때문이다. -우연은 중요하죠. 저희 어머니는 정의당의 이정미 대선 경선후보를 지지하는데, 저희 어머니 성함도 이정미거든요. -고마워요 지돈 씨, 언제나 적절한 예를 들어주시네요… 우연은 또 있다. 로지 브라이도티의 책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발견했던 것이다. 오늘날 세계에서 유일한 상수 는 변화지만, 그것은 단순한 과정도 아니고 단선적인 과정도 아니다… 14) -근데 정말 브라이도티 말이 맞더라고요. -뭐가요, 상수는 변한다고요? -네, 그리고 그건 단순한 과정도 아니고 단선적인 과정도 아니던데요. 내가 마지막으로 본 홍상수 영화는 < 자유의 언덕 >과 <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였는데, 그때 나는 홍상수 영화의 반복되는 어떤 정서, 느낌, 분위기에 조금은 질려 있었던 것 같다. 이를테면 김민희와 정재영이 함께 술을 마시는 장면 같은 것. 그런데 지금은… -먼저 < 풀잎들 > 넷플릭스에 있어서 봤는데, 완전 트위터를 영화로 옮겨 놓은 것 같더라고요. 카페가 트위터고 각각의 테이블마다 멘션을 주고 받는 사람들이 있는데, 구석에 앉은 김민희가 사람들이 하는 말들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일방적으로 혼자 비계인용 달고, 그러다 갓생 사는 동생 커플 만나서 괜히 화내고, 다시 돌아와서 밤 늦게까지 떠들고 있는 사람들이랑 멘션을 섞고 결국 트친 되고… -그게 그런 내용이었어요? -그리고 < 도망친 여자 >도 봤는데 처음엔 경기도 외곽의 빌라에 사는 지인의 집을 방문하고 북촌에 있는 아는 언니 집을 방문하는데 두 집의 분위기가 너무 달라서 ‘구해줘! 홈즈’ 극장판 같은 건가? 아니면 각각의 집을 방문한 한국 남자들에 대한 일종의 생태학? 그런데 마지막에 들른 극장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나고 영화를 보는 장면을 보면서 깨달았죠. 아, 이건 씨네필들을 풍자하는 영화구나. 김민희=도망친 여자=씨네필이구나. -네??? -지돈 씨, 생각해보세요. 첫 번째로 방문한 경기도 빌라에서 김민희는 CCTV를 통해 이웃집 여자를 만나는 지인을 훔쳐봅니다. 두 번째로 방문한 북촌의 빌라에서는 도어락 모니터를 통해 스토킹하는 시인을 훔쳐보고요. 세 번째로 방문한 극장에서 일하는 대학 친구를 우연히 만나고, 한때 김민희의 연인이었으나 지금은 대학 친구의 남편이 된 작가를 마주치고 찝찝한 이야기를 나눈 후에 도망치듯 극장에 들어가 영화를 보잖아요. 모르시겠어요? -(대체 무슨 소린지)??? -그렇지만 제일 좋았던 건 < 클레어의 카메라 >였는데요, 저는 그것이 우리가 만들려고 하는 영화에 어떤 힌트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 1) [변신: 되기의 유물론을 향해](로지 브라이도티, 김은주 옮김, 꿈꾼문고, 2020) 13쪽 2) 제13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홈페이지의 영화 소개 참고 3) <누벨 바그>(장 뤽 고다르, 1990) 4) [천 개의 고원](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김재인 옮김, 새물결, 2001) 338쪽 참고 5) [영화 속의 얼굴](자크 오몽, 김호영 옮김, 마음산책, 2006) 307쪽 참고 6) 제13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홈페이지의 영화 소개 참고 7)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앞의 책, 362쪽 8) 자크 오몽, 앞의 책, 308쪽 9) <기생충>(봉준호, 2019) 중에서 기우의 편지를 변형함 10)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정지돈, 문학동네, 2021) 43쪽 참고 11) [사일런스](존 케이지, 나현영 옮김, 오픈하우스, 2014) 131쪽 12) [변신: 되기의 유물론을 향해](로지 브라이도티, 김은주 옮김, 꿈꾼문고, 2020) 15쪽 13) [마운트 아날로그](르네 도말, 오종은, 이모션북스, 2014) 14) 변신 495쪽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