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위한 도우미 도전!
- 제작년도
- 2009
똑바로 보자. 파국이 아니라 난국이다. < 기생충 >(봉준호, 2019)의 기택(송강호)과 충숙(장혜진) 가족은 지배계급에 제대로 손상을 입히지도 못하고 폐허의 잿더미에 올라서 미래를 볼 용기도 없다. 살지도 죽지도 못한 채, 다시 말하면 재현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상태로, 순간적으로 출현했던 계급의식을 계급상승 욕망과 부유층 선망으로 다시 환원하며 건축가 남궁현자의 집을 떠나지 못한다. 유령은 애도를 가능하게 하며 마침내 무엇이 끝났는지 역사로부터 어떤 유산을 물려받을지를 판단할 수 있게 한다. 파국은 과거를 파괴하는 폭력적 힘을 갖고 있지만 그를 통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기택은 햄릿의 아버지처럼 유령이 되지도 못하며, 이 모든 연극의 조종자를 노출시키고 완전한 파국을 이끌어 낼 저력도 없다. 결말에서 기택은 박사장(이선균)을 죽인 후 방공호에서 근세(박명훈)가 있던 자리를 문자 그대로 대신한다. 기택은 자기 가족들한테 ‘친절했던’ 박사장에 미안함을 느끼고, 근세처럼 고장 난 복도의 센서등을 자신의 몸으로 대신 켜고 끈다. 한편 장남 기우(최우식)는 아버지가 실패한 신분상승의 꿈을 꾼다. <기생충>의 난국을 응시해보자. 이 영화에서 각 계급이 처한 환경에 대한 묘사는 매우 디테일하다. 계급의 물질성을 드러내기 위해 온갖 '감각의 클로즈업'을 동원한다. 촉각, 후각, 시각, 운동감각 등 다채로운 감각을 동원해 부유층의 대저택과 다가구 반 지하 생활을 생생하게 시뮬레이션 한다. 햇빛과 비 같은 자연적 현상마저도 계급화된다. 햇빛이 안 들어오는 반 지하는 늘 축축해 빨래가 잘 마르지 않으며 수압이 낮아 변기에 역류현상이 일어나고 하룻밤 비에도 집이 물에 잠긴다. 하지만 큰 통창과 완벽한 배수시설을 갖춘 언덕 위의 대저택에서 비는 가족캠핑을 취소하게 만든 정도의 가벼운 방해꾼이자 다음날 미세먼지를 날려주고 상쾌한 공기를 안겨주는 고마운 자연현상이며 운치있는 풍경이 된다. 이러한 디테일 묘사는 부자와 빈자들의 생활세계에 대한 정확한 묘사로 승인되고, 관객들은 '맞아. 진짜 저렇지.'라고 존재하는 것을 승인하는 구조를 취한다. 이것은 기존의 것의 인정형식이다. 이러한 감각의 클로즈업은 계급화된 얼굴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사실 각 계급, 직업, 세대, 거주지역 등에 따른 특징들을 추출해 그 디테일을 적확하게 묘사해 내는 표현물은 최근 <피식대학> 같은 유튜브 기반의 코미디 프로그램들에서 유행하고 있는 특정 집단 시뮬레이션이 더 뛰어나다. <기생충>은 시뮬레이션을 넘어 오늘날 계급의식의 발현 계기를 목도하고, 그를 통해 누가 적대계급인지를 파악하며, 어떻게 적대계급을 무너트리거나 혹은 좌절하게 되는지 까지 가려 한다. 문제는 <기생충>이 그 목표지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난국에 빠졌다는 데 있다. 그 난국은 단순히 오늘날 계급구조가 극심한 양극화,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는 불안정한 새로운 계급의 출현, 생존게임에 가까운 경쟁사회, 지배계층에 대한 선망의식에만 있지는 않다. 사실 재현 그 자체의 난국도 있다. 봉준호 감독은 이미 계급의식의 출현과 혁명, 그리고 실패 및 대안에 대해 진지한 우화를 만든 적이 있다. 전작 < 설국열차 >에서 기후재난으로 빙하기에 접어든 지구에서 꼬리칸에 있던 잉여 취급받던 사람들은 영구엔진을 가진 기차에서 지배계층이 있는 앞 칸으로 직선적인 전진운동을 시도한다. 하지만 이미 이 움직임을 예측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기획하고 혁명 그 자체를 이용하는 시스템 내에서 '단순하고 뻔한' 전진운동의 계급혁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 난국을 돌파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존의 움직임을 멈추는 것이다. 자본주의라는 영구엔진의 신화, 즉 시스템을 멈추고 아시아 소녀, 흑인 소년, 백곰으로 은유화된 소수자들은 탈출을 시도한다. 직선운동의 실패는 고전적인 진보서사의 몰락을 의미한다. <기생충>도 <설국열차>처럼 양극화 현상과 계층의 이동 사다리를 알레고리화 하기 위해 수직운동을 부각시킨다. 언덕 위의 부유한 단독주택과 저지대의 다가구 반지하 주택, 반지하 주택과 아예 보이지 않는 지하의 방공호, 실내외의 오르내리는 계단들, 하강하는 비, 산수경석은 모두 계급의 위계화와 계층이동을 알레고리화 한다. 여기에 수직으로 움직이는 카메라 운동(pedestal down)은 그러한 수직운동을 더 부각시킨다. <설국열차>가 전진운동에서 탈출해 체제 바꾸기의 희망을 엿보는 것으로 끝났다면, <기생충>은 계층이동을 시도하다 사다리에서 떨어져 더 깊은 곳으로 추락하는 비극을 제시한다. 그 비극의 심연까지 도달하는 과정에서 <기생충>은 계급재현의 곤란함을 자기 반영적으로 시각화하고 서사화한다. 기택(송강호) 가족은 몰락한 중산층으로 프레카리아트의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다양한 알바를 전전하며 안정된 직장 없이 살아간다. 영화 초반 그들은 전원 백수로 묘사된다. 그들의 유일한 자산은 가족 네트워크이다. 장남 기우(최우식)는 명문대생 친구 민혁(박서준)이 연결시켜준 고액 과외자리를 소개받고 학력을 위조해 IT 기업 CEO인 박사장의 딸 다혜(정지소)를 가르치게 된다. 기우는 박사장의 아내인 연교(조여정)의 의심을 받지만 수업참관 이후 신뢰를 얻고 동생 기정(박소담)을 아들 다송의 미술심리치료교사로 소개한다. 이후 기우와 기정은 계략을 세워 원래 근무하던 문광(이정은)과 윤기사(박근록)를 쫓아내고 아버지 기택과 어머니 충숙(장혜진)을 각각 운전기사와 가사도우미로 채용시킨다. 모두가 불안정한 생존게임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유사계급에 속한 이들을 가차 없이 사다리에서 밀어낸 기택(가족)은 당연하게도 계급의식을 가질 수 없다. 그런 기택이 마침내 계급의식을 갖게 된 것은 이성적 논리나 도덕률이 아닌 '냄새' 때문이다. 기택은 자기를 고용해주고 매너도 좋은 박사장에게 고마워한다. 심지어 같은 가장으로서 동일시를 한다. 그러나 근세가 다송의 생일 파티에 난입하고 박사장이 더러운 냄새가 난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자 기택은 즉각적으로 분노하고 그제야 계급의식을 갖게 된다. 그 "(지하철 타는 사람들의) 냄새"는 이전에 박사장이 기택에게서 유일하게 선을 넘어 오는 것이라고 했던 것으로 언어화되기 이전에 신체적으로 환기되는 즉각적인 혐오다. 기택은 근세와 구별 지으려 했지만, 박사장은 냄새로 그들을 같은 계급으로 묶는다. 그에 반응해 기택은 박사장을 적대적 계급으로 파악하고 그를 살해한다. <설국열차>의 '혁명을 위한 직선운동'처럼 <기생충>에 나온 수많은 계급적 상징과 알레고리는 체제 균열을 가져올 행동이나 사유를 촉발하지 못한다. 그것은 산수경석처럼 낡고 닳았기 때문이다. 직선적인 전진이나 수직운동과 구도는 이미 영화사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온 기호이고 지나치게 자명하다. 그것은 적극적인 의미독해를 요청하며 수많은 약호해독의 비평들을 양산해내지만 비판적 힘을 갖지 못한다. 오늘날의 '웰메이드'영화는 좁은 의미의 미스터리 장르가 아닐 때조차도 관객들의 문제해결을 기다리는 미스터리가 된다. 이것은 또한 비판이론과 비평이 처한 난국이다. 이론과 비평은 결코 죽지 않았으며 오히려 양과 접근성의 측면에서는 흥하고 있지만, 그것이 정보제공 혹은 연쇄적인 동어반복의 재승인과 서사풀이 이상의 기능을 하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어쩌면 ‘봉테일(봉준호+디테일)’이라는 별명을 가진 봉준호 감독이 정교하게 여러 기호들을 흩뿌려 계급의 의미작용을 설계하면 할수록 암호해독의 쾌락만 커질 뿐 그 비판적 힘은 더 약화된다. 이미 <기생충>은 텍스트 내에서 비평을 초청하고 있으며 그 쾌락은 텍스트 가장자리의 안쪽을 끊임없이 맴돌도록 설계되어 있다. 봉준호 감독도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에는 “상징”이라는 말이 기우의 입을 통해 두 번 언급된다. 기우는 영화 초반 민혁에게서 할아버지가 수집하고 있다는 수석을 선물로 받고 말한다. “민혁아, 이거 진짜 상징적이다.” 클로즈업된 수석은 영화 전체를 은유화 하는 큰 힘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안이 이미 텅 비어 있고 믿음만으로 유지되는 물신(fetish)에 불과하다. 가부장제와 계층이동을 통한 계급상승은 여전히 힘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가능성을 잃은 오래다. 기우는 수석 선물을 받고 집 앞에서 노상방뇨를 하는 행인에 대적할 용기를 얻는다. 그 싸움은 슬로우모션으로 스펙터클하게 그려지지만 그래봤자 오줌을 뿌리는 순간일 뿐이며, 이미지의 스펙터클화는 기우를 더욱 우스꽝스럽게 만들 뿐이다. 수석은 자명하게 계층상승과 출세의 욕망 그리고 가부장의 힘을 ‘상징’한다. 기택을 원망하는 충숙이나 기정과 달리 기우는 장남으로서 자기가 앞으로 물려받을 가장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기택을 존중하고 보호하고자 한다. 하지만 대책 없는 기택처럼 그 수석은 텅 비어있는 기호다. 심지어 기우가 빗물에 잠긴 집에 돌아왔을 때 수석은 말 그대로 물에 뜬다. 기우는 수석이 자신을 따라온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텅 비어있기 때문에 가벼워 물에 떴을 뿐이다. 유기성과 총체성을 특징으로 하는 상징은 더 이상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그 의미의 무게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봉준호 감독이 시각적 기호와 의미가 유기적이고 총체적으로 꽉 짜여 있는 스타일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어쩌면 봉준호 감독은 <설국열차>와 <기생충>에서 반복했던 모티브, 상징, 알레고리를 통한 의미화(signification) 작업 자체에 회의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계급혁명이든 계급의식이든 문화재현의 정치학으로는 비판적인 무게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것이 정교하게 구체적 공간과 소품들을 통해 은유화 되고 시뮬레이션 될수록 오히려 모방과 복제의 과정을 거치며 온라인에 빠르게 퍼져나가는 ‘밈(meme)’이 될 가능성은 높아진다. 수석처럼 말이다. 한국에서 수석은 낡은 자명한 상징이지만 외국인들에게 수석은 미스터리하고 동양적이며 아름다운 소품으로, 수수께끼 같은 재밌는 밈이 된다. 한국인들은 소셜 미디어에서 외국인 관객에게 산수경석의 의미를 해석해 주며 문화적 우위도 가질 수 있다. <기생충>은 위에서 기술한 계급 재현의 곤란함을 모두 반영하고 의미화하면서도 물에 뜬 수석처럼 그 의미의 정치적 힘은 텅 비어 있다. 텅 빈 수석은 정치적 힘과는 전혀 상관없이 생산되는 관객의 암호해독 쾌락을 응시한다. <기생충>은 문화재현의 정치학의 아포리아를 수석에 이입시킨다. 재현을 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는 난국이다. 기우는 다송의 그림을 처음 볼 때 또 다시 "상징"을 언급한다. 기우는 벽에 걸린 다송의 그림을 보고 “진짜 상징적이다”라고 말한다. 기우는 기정을 미술교사로 데려오기 위해 다송의 그림 뒤에 해석할 많은 것이 있는 것처럼 과장한다. 기정 역시 인터넷에서 얻은 정보로 연교에게 다송의 그림이 정신분열과 트라우마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해석해 준다. 사실 다송의 그림은 어떠한 것도 상징하지 않는다. 그 그림은 다송이 밤에 목격한 근세를 그린 것이다. 기호 해독의 과장되고 과잉된 의미화는 타자의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린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기호가 더 이상 의미작용을 수행하지 못하거나 완전히 엉뚱한 것을 가리킬 때 더 이상 미끄러지지 않으며 가져다 쓸 수 있는 것은, 무게를 갖고 중력에 영향을 받으며 물리적으로 그곳에 존재하는 자연과 신체이다. 기정이 살해당했을 때에도 계급적 각성이 일어나지 않던 기택은 박사장이 근세에게 불결한 냄새가 난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자 곧 자신이 적대해야할 계급이 누구인지, 자신이 어떤 계급에 속하는지를 깨닫는다. 비판적 의식은 기호화하기 어려운 즉각적이고 물리적인 신체성을 통해서만 일어난다. 박사장의 태도는 근세의 신체와 기택의 신체를 구분할 수 없게 만들고 즉각적으로 계급 정체성과 집단성을 구성한다. 냄새가 유발하는 구분 없음은 언어적이고 의식적인 기호를 초과한다. 그리고 드디어 행동을 할 힘을 얻게 된다. 비, 돌, 냄새 같은 자연적인 것의 사용은 유사한 맥락에서 고려될 수 있다. 계급의식은 계단과 산수경석처럼 의미화 되자마자 즉자적으로 가벼워지고 '밈'화 되는 기호 이전의 원초적인 기호들, 즉 보다 자연적이고 감각적이고 신체적인 이미지 기호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처럼 영겨진다. 기우가 기택이 박사장을 죽이고 사라진 후 텅 빈 기호가 된 산수경석을 다시 산 속 시냇가, 즉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그런 이유다. 하지만 역으로 홍수나 냄새와 같은 자연적이고 신체적인 단위가 아니면 계급의식은 형성될 수 없다는 뜻이며, 이러한 자연화 된 기호화의 반복은 저소득층 혹은 가난한 자들을 문명과 대립되는 비체적 존재로 낙인을 찍는다. 냄새로 엮인 그들은 개별적 존재로 구분할 수 없다. 계급화된 얼굴의 자연화는 계급재현의 실패와 계급의식에 대한 냉소의 또 다른 얼굴이다. 재현 실패의 원인은 오히려 과잉될 정도로 스펙터클하고 세련된 스타일, 디테일을 시뮬레이션하기 위해 클로즈업된 감각들, 정합적이고 정교한 의미작용으로 인한 약호해독의 '쾌락' 그 자체의 몰두와 네트워크를 타고 빠르게 이동하는 정보화된 영화 이미지에 근거한다. 기택은 근세와의 계급적 친화성을 신체적으로 자각한 후 방공호에 기거했던 근세의 자리를 차지한다. 근세의 자리를 차지한 후에는 박사장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근세와 구분되지 않는 비체적 상태의 기택은 순응적인 근세의 의식을 받아들인다. 근세와 기택의 몸은 그 자체로 센서등을 대신 작동하며 자본에 복종하는 부품이자 모스부호를 보내는 몸-기호가 된다. 몸이 아니면 의미화가 불가능하다. 기우는 산수경석의 상징, 즉 가부장의 자리와 신분상승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언어와 가시화된 재현을 포기하고 얻은 센서등을 통한 몸-기호로 주고받는 그들의 대화는 생존 신호 정도에 국한되며 계급의식이나 체제균열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어떤 면에서 <기생충>은 오마주한 김기영 감독의 < 하녀 >(1960)와 봉준호 감독의 전작 <설국열차> 보다도 퇴행적이다. <하녀>에서 하녀 명숙(이은심)은 겉으로는 행복해 보이는 중산층 가족에 불길함을 불어넣고 그들이 얼마나 비도덕적이고 폭력적인 인간인지를 폭로하게 만들며 마지막까지도 그 불온함을 거두지 않는다. <설국열차>는 미미하지만 체제 바깥으로의 운동을 시도한다. 반면 <기생충>에서 봉준호 감독은 계급 상징과 알레고리가 더 이상 정치적 언어로서 작동하지 않는 재현의 난국을 회피하기 위해 하층계급을 자연화하며 생존만이 겨우 가능한 방공호로 추락시킨다. 의미의 무게를 만들고 물질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들은 몸으로 환원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계급의식은 개별 신체가 구분되지 않는 자연적이고 비체적인 상태가 되어서야 가능하고 그마저도 지속되지 못한다. <기생충>은 결국 계급화된 얼굴을 재현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설국열차>에서 '멈춤'이라는 다른 속도를 상상했던 것처럼, 수직 사다리를 흔들어 놓는, 전혀 다른 계급을 창안하고 호출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 영화는 공포영화이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 안소니와 아픈 아버지를 돌보는 딸 앤의 가슴 저미고도 절절한 얘기가 왜 공포냐고? 그건 바로 ‘관찰자’가 아니라 ‘주인공’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치매를 다룬 수많은 영화가 인물과 관객 사이에 투명유리창을 세워 놓고 인물의 고통을 관망하게 했다면 이 영화는 맹렬히 그 창을 깨부수고 관객을 화면 안으로 끌어당겨 그들의 모든 의식과 감각을 통째로 붙잡고 흔든다. 3인칭 시점의 1인칭화! 소재의 진부함은 결곡하고도 투철하게 인간을 이해하는 플로리안 젤러 감독의 전위적 시도로 온전히 극복되고도 남는다. 안소니(안소니 홉킨스 분)는 엔지니어로 자수성가하여 근사한 아파트에서 여유로운 노후를 보내는 80대 노인이다. 그의 낙은 자신을 보러 매일 들르는 딸 앤(올리비아 콜맨 분)을 기다리는 일이다. 마침내 딸이 왔다. 그런데 딸의 표정이 좋지 않다. 왜 도우미한테 험한 말을 했느냐고 자신을 추궁하듯 묻기에 그녀가 시계를 훔치려 해서 그랬다고 자못 양양하게 대꾸한다. 그러나 시계는 딸의 짐작대로 욕조 밑에 있다. 엇, 왜 이게 욕조 밑에 있지? 어찌됐든 찾았으니 됐고, 도우미 대신 딸이 옆에 있으니 만족스럽다. 그러나 그 날의 일은 가벼운 해프닝에 불과했다. 그의 상태가 그럭저럭 괜찮았던 날이었던 것이다. 딸은 계속해서 도우미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더니 급기야 자신은 런던을 떠나 프랑스로 가게 됐다고 말한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프랑스로 떠난다고? 그럼 나는? 갑자기 겁이 나기 시작한다. 이 와중에 둘째 딸은 왜 보이지 않는지 모르겠다. 본 지가 오래된 것 같은데 말이다. 다음 날은 갑자기 못 보던 남자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사위라고 답한다. 앤은 이혼했는데 사위는 무슨? 한 술 더 떠 이 집이 자신의 집이라고 말하는 낯선 남자. 잠시 후 장을 보러 나간 앤이 들어오는데, 아니다. 앤이 아니다. “아빠, 저예요. 저 앤이에요!”라는데 처음 보는 여자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이 집은 분명히 내 집인데 내 집이 아니라 하고 모르는 남자가 사위를 자처하며 앤마저 얼굴이 바뀌었다. 이건 현실이 아니다. 꿈일 것이다, 그래, 분명 꿈일 것이다. 안소니의 상태는 날이 갈수록 심각해진다. 아닌가? 혹시 안소니의 말이 다 사실인 건 아닐까? 안소니가 느끼는 감각은 분명 그의 감각이 맞을 텐데 그것을 어떻게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낯선 남자가 그의 뺨을 때려 그는 당황스러우면서도 아픔을 느꼈다. 그런데 그것이 오해이며 착각이라고 우리가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누군가의 기억의 오류와 소실이 망상이라고, 현재로 느껴지는 누군가의 과거가 단지 과거일 뿐이라고, 누군가에게 틀림없는 진실이 거짓투성이라고 우리가 규정할 근거가 대체 무어냔 말이다. 감독은 집요하고 밀도 높게 관객을 긴장시킨다. 당신이 느끼는 혼란이, 혼란의 반복으로 발생하는 자기 불신이, 마침내 그 무엇도 신뢰할 수 없게 되는 공포가 바로 안소니가 경험하는 그 자체라는 것을, 추체험할 수 없다고 여겼던 일을 핍진하게 우리 내부로 침투시키며 우리를 안소니화하는 데 성공시킨다. 그러나 밀어붙이기만 하는 게 아니다. 감독의 탁발한 연출은 속도의 조절과 적절한 밀당에 있다. 여백을 과감하게 이용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2012년 프랑스에서 초연해 연극으로 이미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자신이 쓴 연극을 직접 영화로 만들면서 감독은 영화를 한 편의 연극처럼 환원시키는 데 성공한다. 연극이 막으로 무대를 전환한다면, 영화에서는 인물 없이 다양한 공간을 천천히 훑는 기법으로 시공을 변환한다. 이 같은 기법으로 감독은 관객에게 어떤 시간을 제공하는데, 하나는 얼기설기 복잡해진 감정을 소강시켜 감정이 사유로 넘어갈 수 있는 여유를 주는 시간이다. 어느 시점에서 우리는 진실게임이 더 이상 소용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그것은 우리에게 응당 선이어야 할 것들이 안소니에게는 수많은 점으로 흩어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결과이다. 또한 그 선과 점이 굳이 같은지 다른지를 물을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아서이며, 지고한 사랑의 가치를 행위로써가 아닌 고작 인식 따위로 이해하려드는 우리 자신이 가소롭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시간은 미세하게 바뀐 집의 공간이 안소니의 심리변화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추측케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엄마가 보고 싶어!”하며 우는 마지막 장면에 가서야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더 이상 자신의 공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아버렸을 때 그는 아이가 되었다. 엄마가 보고 싶은 아이. 기억을 잃어가며 점점 낯설어지는 공간이 될지언정 집은 그에게 자궁이었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공간을 되찾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은 ‘시계’가 메타포가 되어 잃어버린 시간들을 붙잡고 싶어 하는 마음과도 꼭 닿아 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그의 집착은 상실감이 주는 고통의 깊이와 완벽히 정비례한다. 거개의 사람들은 치매가 암보다 더 두렵다고 말한다. 망각은 신의 선물이라고 하면서도 망각에 빠져드는 질병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절대 받고 싶지 않은 선물로 치부한다. 어쩌면 죽음은 그 자체로 무(無)가 되는 일일 수도 있는데, 명멸하는 자기 자신을 마주하는 일은 그 無와 대체 무엇이 다른 걸까. 육체는 쇠할지언정 영혼은 꺼트릴 수 없다는 마음이라면 그것은 부질없는 욕심이 아닐까? 좋다. 그것이 순수한 바람이든 욕심이든 나아가 탐욕이든 그것의 정체를 굳이 알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메시지를 사회적으로 확대해 치매환자를 대하는 시선의 변화를 촉구하고, 치매환자를 돌보는 가족의 고통을 헤아려 복지체계에서 이들을 포용해줄 것을 역설하면 되는 걸까. 그것으로 충분한 걸까. 인간에게 기억이란 시간 속에 존재를 새긴 결과물일 것이다. ‘살아 낸’ 시간의 결과물이다. 병에 걸려 아파한 시간이나 그저 살아진 시간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 다시, 질문은 ‘어떻게 살 것인가’로 돌아온다. 삶의 본질적 질문은 결국 이 질문 하나로 수렴되듯. 이 영화로 치매를 경험한 덕분에 답을 찾는 것은 더 쉬워진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모습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이 기억해주기를 바랐던 것 그대로 그 존재를 기억해주는 것이다. 그것이 가는 자와 남은 자가 할 수 있는, 또 해야 할 전부가 아닐는지. <더 파더>는 2021 아카데미 시상식에 작품상,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각색상, 미술상, 편집상 등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고, 이 중 안소니 홉킨스 배우가 남우주연상을, 플로리안 젤러 감독이 각색상을 수상하였다.
사회복지학과 졸업을 앞둔 성희는 장애인 활동지원 아르바이트 활동 중 허리를 다치게 되고, 어떠한 산재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이용자로부터 해고당하게 된다. 학자금 대출, 생활비, 치료비 및 스페인 출국을 위한 자금 마련 등을 이유로 일을 그만둘 수 없었던 성희는 활동보조센터 담당자에게 산재 처리를 요구하지 않는 대신 일이 많지 않은 새로운 이용자 배정을 강력히 요구한다. 이후 하루 종일 의식 없이 누워만 있는 중증 장애인을 새 이용자로 배정받은 성희는 별 일 없이 업무시간을 채울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부풀지만, 성희의 형식적인 업무 수행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용자의 아들 현목과 갈등에 놓인다. 다른 일자리에서 비해서 비교적 높은 시급을 받고 있지만, 고용 불안정과 이용자의 부당한 업무지시에서 한 치도 자유로울 수 없는 장애인 활동지원사와 장애인 수급비와 활동지원 서비스를 받고 있지만 보통의 삶을 살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장애인 가족의 빈곤과 결핍. 이들의 갈등을 전면에 내세운 < 에듀케이션 >( 김덕중 , 2019)은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복지 현실을 고발하는 영화로만 정의하기에는 여러 함의들이 내포되어 있다. 걷기 어려울 정도로 허리를 심하게 다쳤음에도 일을 쉴 수 없는 성희에게 장애인 활동지원사는 대학 졸업을 위한 실습 시간을 채워야하는 아르바이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성희가 직업의식이나 장애인 운동에 관한 사명감 없이 오로지 졸업을 위한 수단 겸 시급 높은 생계 수단으로만 활동지원 노동을 생각한다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성희에게 깊은 정서적 유대와 감정 노동을 원하는 현목과 이를 거부하는 성희 이 둘 중 누가 더 잘못했다고 명확히 판단하고 결론 내릴 수 있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불협화음을 내다가 기어코 파열로 끝나는 <에듀케이션> 인물들은 신체적·정신적 한계로 인해 자유의지대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없는 현목 엄마를 제외하곤 자신의 입장만 앞세우는 경향이 크다. 가령 활동지원사의 시급이 다른 직종보다 높다는 이유로 가사노동과 친밀감을 요구하는 현목에게 성희는 “(활동지원사가) 가사도우미, 파출부는 아니다.” 식으로 맞서는 설정이 몇 번 등장하는데 상시 업무 외 업무를 강요받는 활동지원사의 열악한 노동 환경 및 고용 불안정을 생각하면 크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는 아직 정서적 돌봄과 지지가 필요한 미성년자 현목의 요청을 단호히 거절하는 성희가 야박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용자(혹은 이용자 가족)와 활동지원사간의 과도한 친밀감과 그로 인해 형성된 공고한 관계는 활동지원 노동 현장에서 주요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왔고, 오히려 활동지원서비스를 이용하는 장애인의 자기 결정권과 자립을 방해한다는 의견 또한 제기되고 있다. 1) 그렇다고 성희와 같은 활동지원사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려드는 중증 장애인과 그(녀)의 가족들의 태도가 잘못되었다고 무조건 근절할 수도 없는 형국이다. 필요 이상으로 타인의 일상에 끼어들고 싶지 않는 활동지원사 성희와 그녀에게 정서적 유대와 친밀감을 간절히 원하는 장애인 이용자 가족 현목. 허나 <에듀케이션> 속 성희와 현목의 갈등은 두 개인의 갈등 혹은 장애인 활동지원사와 장애인 이용자 (가족) 간의 문제를 넘어 현 장애인 활동지원서비스 제도만으로는 장애인(가족)의 자립과 사회 활동 참여 증진이 어려운 현실과 맞물린다. 몸이 아픈 와중에도 밤낮없이 일해서 겨우 최저생계비를 면할 정도의 수입으로 먹고 살아야하는 성희는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청년 도시 노동자의 비애를 대변한다. 보다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지만, 시험 준비를 포기한 이후 스페인 이주를 꿈꾸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성희의 일상은 답답함과 무기력함이 가득하다. 하지만 막연하게라도 자신의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성희와 달리 중증 장애인의 보호자라는 이유로 많은 활동에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는 현목의 상황은 더욱 참담하다. 자기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놓인 현목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고는 있지만 자기 몸 하나 건사하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 성희와 자칫 잘못하면 엄마는 물론 스스로에게까지 위협을 가할 수 있는 현목의 관계는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데 실패한 성희와 현목은 우려했던 대로 파국을 맞는다. 영화 <에듀케이션>은 장애인 활동지원 사업의 문제점을 전면으로 제기하기보다 복지 정책에서 완전히 소외된 청년 간의 갈등에 더 집중하는 태도를 보인다. 자기 자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로 규정하고 이기적인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기 바쁜 성희와 자신의 미숙한 언행을 돌아볼 여력조차 갖지 못하고 주저앉아버리는 현목. 승패 없이 서로에게 자괴감과 모멸감만 남기는 이들의 다툼은 얼렁뚱땅 넘어가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각자의 불행을 이유로 자신의 입장만 내세울 뿐 정작 타인에 대해서는 몰이해로 일관했던 성희와 현목의 갈등을 극대화시키면서 엔딩 이후의 이야기를 궁금하게 한다. 과연 영화가 보여준 엔딩은 절망과 분노 밖에 남지 않은 혼돈의 끝인가 아니면 미약하게나마 새로운 내일을 기약하는 희망의 시작으로 볼 수 있을까? 스포일러가 될 까봐 더 이상 언급할 수 없지만, 단언컨대 올해 가장 주목할 만한 문제적 엔딩이다. 1) <‘활동보조 갈등’을 바라보는 3인 3색 시각들>, 에이블뉴스, 2013.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