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자
- 감독
- 조셉 페브니
- 제작년도
- 1952
- 출연
- 토니 커티스, 얀 스털링, 모나 프리맨
1. 이 연재에서 이야기한 적 있는 < 팔도사나이 >(1969)는 김두한이라는 한국 남성 대중문화의 강력한 형상만을 만들어낸 데 그치지 않았다. 종로의 주먹 김두한이 지역으로부터 올라온 도전자들에게 판판이 승리를 거두며 서울을 정점으로 한 전국토의 위계화라고 할만한 것을 이루어냈다면, 대동강, 무등산, 영도다리 출신임을 내세우며(이 노골적이고 단일한 지역적 상징물들은 일종의 지역의 인덱스화라고 할만한 것을 만들어냈다는 점을 지적해두자) 도전장을 내미는 팔도의 ‘쎈’ 사나이들 중에서도 단연 가장 막강한 대중적 소구력을 지녔던 것은 박노식이 분한 광주 용팔이일 것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박노식 은 한국영화에 처음으로 언어를 통한 지역적 질감이라는 것을 도입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의 초기 대표작 중 하나인 < 5인의 해병 >(1961)에서 시골 출신 병사역을 맡은 박노식은 이 캐릭터 ‘촌놈’이 전라도 사투리를 써야 잘 살 것 같다고 생각했다.(그는 전라도 순천 출신이다) 감독 김기덕은 그의 군대생활을 떠올리며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 영화의 성공은 방언 사용에 대한 한국영화의 금기를 깨트렸다. 1967년의 기념비적 국책영화 < 팔도강산 >에서 다시 한번 광주 사위로 전라도 사투리를 리드미컬하게 구사해냈던 박노식이 “나가 전라도 광주에서 올라온 용팔이인데 말시!”라는 일성과 함께 용팔이로 도착하고 있는 것은 거의 필연적으로 보인다. 곧 이 캐릭터는 <팔도사나이> 시리즈의 주역으로 발돋움한 데(< 돌아온 팔도사나이 >) 이어 ‘용팔이’ 시리즈 뿐만 아니라(< 남대문 출신 용팔이 > < 역전 출신 용팔이 > < 운전수 용팔이 > < 신입사원 용팔이 > < 방범대원 용팔이 > 등) 여타의 무수한 영화들에 진한 자취를 남겼다.(<맨발로 올라왔다> <맨주먹으로 올라왔다>) 1970년대 스스로 감독을 겸하기 시작한 박노식의 필모그래피를 채운 역할의 절반은 용팔이였다. 싸구려 액션영화들에서 종횡무진하고 있는 이 캐릭터를 보고 있으면, 용팔이야말로 이 시기 한국영화가 담아내었던 동시대성의 핵심 표상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너무 과장이 아니냐고? 아니 정말로 그렇다. 용팔이는 그 자체로 급격한 이촌향도와 확장일로의 도시가 요구하는 염가의 노동력의 구상화라고 해도 무방해보인다. 1970년대 도시 변두리와 읍내의 열악한 재개봉관을 채운 액션영화는 홍콩식 권격영화와 더불어 ‘김두한’과 용팔이가 채우고 있었다. 전자가 합작이든 위장합작이든 아시아 시장의 공통성(‘아시아’라는 말이 불러일으킬 혹시 모를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이 공통성은 소위 아시아적 ‘가치’와는 별 상관이 없다. 오히려 이 시장의 공통성이란 이 지역 일대의 산업화와 도시화가 마련해둔 계급적, 젠더적 공통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일종의 국제성에 어필하고자 한 것이었다면, 후자는 철저하게 내수용으로 기획되었다. 아마도 이 시장과 관객의 문제야말로 왜 유독 이 후자의 영화들이 그토록 지배 이데올로기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는가의 이유가 될 것이다. 이 영화들의 거의 대부분은 반공영화, 새마을영화 등 70년대 ‘우수영화’의 포맷을 기꺼이 빌려오고자 했다. 무엇보다 김두한과 용팔이가 횡행하는 소위 70년대 협객영화의 가장 큰 특징을 꼽자면 이들 모두가 과거를 청산하고 ‘새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를테면 <김두한 속 4부>에서 김두한이 그의 부하들에게 이제 폭력배의 시대는 갔고 새 시대가 왔으니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변할 때, 이것은 얼마나 유신(維新)의 이념에 근사하게 합치되는 것인가. 2. <돌아온 팔도사나이>는 용팔이가 과연 누구였는지, 무엇을 대변하는지, 그리고 이 존재의 열망과 취약함은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텍스트일 것이다. 이미 영화의 시작 전에 형님 호는 조직을 해산했고, 부하들에게 깡패의 세계에서 손을 씻고 성실하게 살아갈 것을 당부했다. 용팔이(박노식)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역시 한때 수중의 폭력을 즐겨 과시하였으나 이제 과거와 손을 끊고 새 사람이 되어 건실한 일꾼으로 살아가는 중이다. 짐꾼이 되어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고 있던 용팔이는 어느날 사업가로 성공한 옛 동료에게 아내 옥희(사미자)를 뺏긴다. 분노한 용팔이는 이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야겠다고 다짐한다. 돈에 혈안이 되어 우정까지 저버린 용팔이 앞에 호의 장성한 아들 철용이 나타나 결투를 신청한다. 용팔이는 이 결투로 자신의 잘못을 깊게 뉘우친다. 스토리만 놓고 보자면 이 영화는 돈 때문에 아내를 잃은 자가 한때 잘못된 길로 빠져들었으나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물론 이 과정이 심히 급작스러워서 그다지 설득력이 있지는 않지만) 개과천선하는 이야기로 보인다. 그런데 이 영화를 진정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이 인물이 자신의 무력을 과시하려고 할 때마다 그것이 매번 좌절된다는 데에 있다. 간단히 말해 용팔이가 주먹을 쓰려는 순간 그럴 수 없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때마다 형사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형사는 말 그대로 ‘불쑥’ 등장한다. 어느날 용팔이는 자신을 자처하는 가짜 용팔이를 만난다. 이 가짜에게 주먹을 들어 응징하려는 순간 홀연히 등장한 형사가 용팔이의 팔을 잡으며 말한다. “우리는 법치국가의 민주시민입니다. 억울한 일이 있으실 때는 법에 호소하면 정당한 판결을 내려줍니다.” 용팔이가 가짜 용팔이와 대치하고 있는 장소에서 거울을 통해서 마치 환영처럼 모습을 드러낸 형사는 다음 숏에서 용팔의 팔을 잡음으로써 이 상황에 개입한다. 이 형사의 등장은 거의 초현실적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그의 등장을 예고하는 어떤 단서도 앞의 장면에서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거울을 통한 이 맥락없는 등장은 이 형사를 전지적 존재로 보이게 만든다. 그는 보이지 않지만, 어디에나 있고, 어디서나 용팔이를 보고 있다. 형사의 말에 용팔이 박노식이 그 특유의 전라도 사투리로 다음과 같이 응답한다. “아이고 내가 공부를 좀 했으면 그 법인지 뭔지 알 거인데 말입니다잉 미치겠네라우, 아이구 요 새끼가 말입니다잉 남의 이름을 빌려서 용팔이 행세를 했는데 그것이 사기로 들어갑니까, 강도로 들어갑니꺼? 내가 참 대갈통이 나빠가지고.” 용팔이는 형사의 말대로 결국 주먹을 쓰지 않지만, 눈을 부라리며 자신의 머리를 툭툭 치는 박노식의 제스처는 희극적이면서 또 도발적이다. 이 제스처는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당신은 법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나는 머리가 나빠서 법에 대해 잘 모르겠소. 용팔이(와 더불어 도시 변두리와 읍내의 열악한 재개봉관을 채우고 있는 관객)에게 마련된 자리란 최대치로서 치안과 노골적인 국가 시책이 가닿는 것에 불과해 보인다. 순치(馴致)의 대상으로서 그는 법과 가까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이 존재는 법이 범/법을 지적하고 포획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법으로서 성립, 유지시킨다는 명제, ‘범죄의 식민화’(푸코)의 더할나위 없이 적합한 사례이다. 용팔이는 감옥을 들락날락한다. ‘성격적 결함’이 종종 그를 잘못된 길로 이끌지만, 그는 매순간 갱생의 의지를 불태운다. 무엇보다 ‘경찰’이 그를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한번 눈을 부라리며 머리를 툭툭치는 저 제스처로 돌아가보자. 이것이 도발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전적으로 박노식이 분출하는 과장되고 기묘한 에너지 때문이다. 힘이 세고, 다혈질이며, 우직하면서 비굴하고, 때때로 우스꽝스러운 잔인함을 발산하는 박노식의 용팔이는 종종 체제순응적인 내러티브의 층위와 상관없이, 과시적인 제스처를 통해 가진 자와 배운자에 대한 은밀한 희롱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팔도사나이>에서 용팔이는 민족의식의 고취를 역설하는 ‘점잖은’ 역사 교수에게 억지로 바보춤을 추게 한다. 식자들에 대한 조롱에서 비롯되는 이 ‘난감한’ 활력이야말로 이후 박노식이 수행한 용팔이 캐릭터의 핵심 정서라고 할 만한 것이다. 한편으로 하층 계급 남성들의 노골적인 판타지를 고스란히 체현해내고 있는 이 캐릭터는 아직 그 어떤 정향적인 긍정성도 내포하지 않았지만(이를테면 1980년대의 ‘건강한’ 민중성에 관한 담론들과 용팔이 사이에는 아직 얼마나 먼 거리가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 배우고 못 가진 자의 분노를 우스꽝스럽게 분출시키며 지배담론과의 거리를 미묘하게 확보해나간다. 물론 치안의 대상이라는 저 근본적 취약함을 간직한 채 말이다. 요컨대, 도시로 이주한 저학력 남성 노동자들의 적절한 반영물로서 박노식 용팔이는 1970년대부터 발견되기 시작한 ‘민중’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단위에 미처 끼지 못한 선(先) ‘민중’적 존재, 혹은 잉여화된 바로 그 존재들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3. 1971년 박노식은 그의 첫 번째 연출작인 < 인간 사표를 써라 >를 찍었다.(일설에 의하면 이 영화는 폭력사건으로 유치장 출입이 잦았던 이 스타가 “이게 뭔가? 나는 왜 이렇게 사고를 저지르는가?” 대오각성(?)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1) )그로부터 박노식은 1976년의 <방범대원 용팔이>와 <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까지 5년 동안 무려 13편의 영화의 연출과 주연을 맡는 놀라운 창조성을 보여주었다.(참고로 그의 마지막 연출작은 미국 이민에서 돌아온 1983년의 영화 < 돌아온 용팔이 >이다.) 1970년대 한국영화에서 가장 ‘호화로운’ 파괴를 보여주는 이 영화들은 아마도 한국영화사 내에서 익스플로이테이션 영화의 독자적 계보를 찾을 때 첫 번째로 불려져나와야 할 목록들일 것이다. 악취미에 가까운 스타일의 과잉, 폭력과 섹스가 낳을 수 있는 극단적인 이미지들에 대한 열렬한 탐닉, 넘쳐나는 신체훼손과 넘실거리는 자기 과시. 박노식은 그 속에서 사연많은 킬러와 용팔이 사이를 오가며 거의 박노식 유니버스라고 할만한 것을 창조해내었다. 이 영화들은 박노식이라는 배우-감독의 유니크한 개성의 유감없는 발현이자, 무엇보다 이 영화들이 소구했던 바로 그 관객들의 취향, 소망, 판타지의 가장 적나라한 형상들이라는 점에서 더할나위 없이 흥미롭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이 중에서도 박노식이 잔학한 조총련계 야쿠자이자 도쿄로 건너간 촌뜨기 용팔이의 1인 2역을 맡고 있는 < 왜? >(1974)는 정말로 필견이다. 기회가 된다면, 꼭 보시라! 1) 오승욱, 「전라도 촌사나이의 야망과 몰락 박노식」, 『신동아』, 2011.4. (https://shindonga.donga.com/3/all/13/110248/3) (관련글) 1. 비행기의 시선, 무정한 시선 - 2021.04.30. 2. 액션영화의 한 기원, 안중근과 무협 - 2021.05.31. 3. '외팔이'의 도래, 1960년대 후반의 무협붐 - 2021.06.30. 4. 태권도 영화- 챠리 셀과 바비 김, 이국적 이름들의 행렬에 관하여 - 2021.07.23. 5. 이소룡적 신체 - 2021.08.24. 6. 김두한과 협객물, 유신 시대의 가장 안전한 쾌락 - 2021.10.01. 7. 브루스플로이테이션과 한국영화 - 2021.11.01. 8. 춤추는 괴수, 1967의 '트위스트' 용가리 - 2021.12.02. 9. 우리는 왜 그때... - 2021.12.24. 10. 용팔이, 1970년대의 과잉과 잉여 - 2022.02.24. 11. 1970년대식 섹스와 폭력, 여감방 영화와 <여수 407호> - 2022.03.22. 12. <삼국대협>, '트랜스내셔널한 어떤 고립에 대하여 - 2022.04.20. 13. '빈곤한 이미지'의 여행- <정도>/<당수태권도>와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 - 2022.05.30.
1. 1970년대 변두리 극장을 선회하던 액션영화에 홍콩식 권격영화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협객물이라고 불렸던 이 영화들은 전지구적 유통망 속을 흘러가던 권격영화들의 한편에서 자국 관객들에 대한 강력한 어필로 70년대 한국의 액션영화 시장을 양분하였다. 이 ‘내수용’ 영화들이 지극히 흥미로워지는 것은 이 영화들이 그 어떤 장르영화보다도 명료하게 대한민국이라는 정치체를 구성하는 적대의 선을 말 그대로 물리적인 방식으로 반복 재현해내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실재하는 하나의 이름을 끌어옴으로써 가능해졌는데, 일찍이 독립전쟁을 수행한 ‘장군의 아들’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내걸었던 이 고유명은 1930년대 중반 식민지 조선인들의 상업거주 지역인 종로통의 ‘주먹’으로 부상한 이래 해방 정국의 백색 테러리스트로서 ‘빨갱이’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고, 1960년대 부정부패한 정치인들을 응징하는 정치 ‘협객’으로 명성을 떨쳤다. 이미 당신도 짐작하다시피, 이 이름은 김두한이다. 이 이름이 그토록 오랫동안 (적어도 200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한국 남성 대중문화의 강력한 원천으로 작동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반일과 반공으로 성립된 대한민국의 고유한 두 적을 탁월한 폭력으로 능히 제압해내는 그는 그럼으로써 이 국가가 소망하는 강력한 남성성을 온몸으로 체현해내고 있는 자라고 할만하다. 게다가 이 이야기에는 통한의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이곳의 아들들이 상상할 수 있었던 가장 이상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식민지 남성들이 겪어야 했던 저 강렬한 고아의식과 전후의 비루한 아버지의 형상들을 떠올린다면 거리의 고아 소년이 독립운동가 ‘장군’의 위대한 혈통을 잇는 자라는 것이 밝혀지는 이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는 얼마나 매혹적인 것인가. 1) 2. 이런 류의 영화들의 기억할만한 첫 시작은 1969년 1월에 개봉한 < 팔도 사나이 >로부터 비롯되었다. 이 영화가 만들어지던 당시 김두한은 막 정치판에서 자취를 감춘 직후였으나, 부정부패한 정치인들에게 똥물을 퍼부었던 정치 협객 김두한의 인기는 절정에 달해 있었고 이제 곧 그것은 한국 대중문화의 매력적인 자원이 될 터이다. 2) 비록 김두한이라는 실명은 피하고 있지만 <팔도 사나이>는 ‘김두한 스토리’의 첫 번째 버전이라고 할만하다. 고아인 어린 소년 호(虎)는 자신을 길러준 노인으로부터 실은 그의 아버지가 유명한 독립투사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어른이 된 호는 주먹으로 종로를 평정하고, 그런 그에게 평양 박달이부터 광주 용팔이까지 팔도의 사나이들이 차례로 도전장을 내민다. 호는 이 싸움에서 거듭 승리를 거두고, 도전자들은 그를 ‘형님’으로 모신다. 이제 조선 주먹을 대표하게 된 호는 종로를 넘보는 일본 야쿠자와 한판 승부를 벌인다. 이 놀랍도록 전형적인 이야기는 한편으로 ‘김두한 스토리’의 원형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팔도’가 환기시키는 1960년대 후반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토’의 현현이라는 감각을 과시한다. ‘종로’의 주인 호가 도전을 받아들이고 굴복시키고 형제의 따뜻한 연을 맺는 일련의 과정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위계화를 완성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내부를 계서적 형제관계로 마름질한 그는 외부의 적 과 맞서 싸워 통쾌한 승리를 거둬낸다. 3. <팔도 사나이>는 10만 7천명의 관객동원을 기록하였다. 1967년 기록적인 관람률을 보여주었던 국책영화 < 팔도강산 >의 성공 여파로 우후죽순처럼 쏟아져나온 수많은 ‘팔도’ 영화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이 영화 이후 감독 김효천과 시나리오 작가 편거영은 각자의 방식대로 이 성공을 이어가고자 했다. 같은 해 < 속 팔도 사나이 >, < 돌아온 팔도 사나이 >의 각본/연출을 맡기 시작한 편거영은 < 한국 제일의 사나이 >(1970), < 원한의 팔도 사나이 >(1970), < 예비군 팔도 사나이 >(1971), < 바보같은 사나이 >(1971)를 만들었고, 김효천은 < 명동출신 >(1969), < 명동노신사 >(1970), < 명동백작 >(1970), < 명동에 흐르는 세월 >(1971), < 명동을 떠나면서 >(1973) 등의 ‘명동’ 시리즈를 만들었다. 이 영화들은 적을 규정함으로써 어떻게 정치공동체가 형성되는가를 가장 노골적인 방식으로 전시하고 있는 한국영화일 것이다. 이를테면 해방 직후를 배경으로 한 <명동노신사>는 남한 사회가 누구를 동지로 삼고 있으며, 누구를 적으로 하여 형성되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강룡(장동휘)과 덕팔은 해방 전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형제 같은’ 사이이다. 남조선노동당의 앞잡이가 된 덕팔은 강룡을 포섭하려고 하나 그의 완강한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강룡의 노모와 누이를 살해하고 빨치산이 되어 산에 들어간다. 한편 강룡이 과거 덕팔과 함께 모셨던 형님 덕진은 국방경비대 창설의 주역이다. 강룡은 덕진 형님을 찾아가 자신의 부하들로 특별부대를 편성, ‘공산비적’을 소탕하겠다는 비장한 결심을 밝힌다. 팔도에서 온 부하들을 이끈 강룡의 공비소탕전이 펼쳐진다. 부하들은 임무를 완수하고 장렬히 전사해간다. 홀로 살아남은 강룡이 이들을 추모한다. 이 이야기에는 두 개의 결절점이 있다. 첫 번째, 형제애의 수사로 강조되는 하나의 민족. 함께 일본에 대항했던 덕팔과 강룡은 ‘형제 같은’ 사이였다. 두 번째, 그러나 이 ‘형제’는 이데올로기의 이름으로 서로 총구를 겨눈다. 그리고 홀로 살아남은 전투의 증언자가 우리를 또 하나의 애도의 공동체로 초대한다. 요컨대, 이 영화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이 국가, 대한민국을 형성하기 위해서 누구의 피가 흘려졌는가? 3) 4. 김두한의 실명 사용은 그의 죽음 이후 가능해졌다. 그가 죽은 지 2년 후인 1974년 < 실록 김두한 >을 시작으로 < 협객 김두한 >(1974), < 김두한 속 3부 >(1975), < 김두한 속 4부 >(1975)까지 이어진 ‘김두한’ 시리즈는 신필름의 마지막 흥행작이기도 하였다. 김두한이라는 실명이 사용되고 실존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 시리즈는 동시기 일본 야쿠자영화의 주요 경향, 소위 ‘실록 노선’을 창조적으로 벤치마킹해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실록 노선’의 기념비적 시작을 알린 것은 1973년 정월에 개봉해서 일대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후카사쿠 긴지의 < 의리없는 전쟁 >(1973)이었다. 전후 일본을 야쿠자들의 피비린내나는 살육의 항쟁사로 그려내고 있는 이 시리즈가 격렬한 정치적 저항의 시기였던 일본 68이 좌절된 1970년대 일본 사회의 절망과 조응하는 것이었다면, 김두한의 ‘실록’ 시리즈 역시 마찬가지로 한국의 유신과 긴급조치의 시대에 그야말로 적절하게 조응하는 것이었다. 이 시리즈를 기획했던 자의 말처럼, 이 반일(<실록 김두한> <협객 김두한>)과 반공(<<김두한 속 3부>, <김두한 속 4부>)의 물리적 행위자는 “인정사정없이 줘패는” 행위를 통해 “분풀이 할 데 없는” 대중들을 “대리만족 시켜”주었다. 국가적 요구를 반영하는 이 폭력의 전시야말로 아마도 유신시대에 향유가능했던 가장 안전한 쾌락이었을 것이다. *** 1) 물론 반공에 비해서 반일이란 대한민국의 성립과정이 보여주고 있는 바 어느 정도 애매모호한 것일 수밖에 없다. 김두한의 이력 속에서 보자면 그는 1943년 조직된 총독부 협력단체인 반도의용정신대의 주도자였다. 이 단체는 당시 조선총독부의 고등계 형사로 재직중이었던 장명원에 의해 ‘불량청년’들을 규합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위원회는 이 단체의 설립 및 활동에 근거하여 장명원을 기소하지만 이 기소는 반도의용정신대가 ‘표면상 왜 정책에 협력하는 것같이 보이’나 불량청년들을 ‘감화지도하여 선량한 청년을 육성’하였다는 이유로 유예된다. 당시 김두한은 대표적인 극우 테러리스트로 강력한 힘을 행사하고 있었다. 2) 1966년 삼성의 사카린 밀수 사건과 국회의 미온적 대처에 대한 항의로 벌어진 김두한의 국회오물투척사건으로 내각이 총사퇴하고 김두한 자신은 제명론이 비등한 가운데 자진 사퇴, 국회의장 모욕죄와 공무집행방해죄로 구속되었다. 1967년 총선에서 ‘서민층에 호소력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신민당 공천(수원)으로 선거에 나온 그는 “북괴에는 농촌까지 전기가 들어와 있는데 우리 농촌은 헐벗고 있다”는 요지의 연설이 문제가 되어 반공법 위반으로 다시 구속된다. 김두한은 그해 11월 보석으로 출감된 이후 정치계에서 은퇴하였다. 3) 강룡과 덕팔의 이야기는 김두한의 실제 스토리로부터 비롯되었다. 1947년 김두한은 죽마고우 정진용을 그가 좌익 행동대장이라는 이유로 린치, 살해하였다. 이 사건으로 김두한은 미군정에 의해 사형을 언도 받았으나, 1948년 대한민국 건국과 함께 이승만에게 특별사면 받았다. (관련글) 1. 비행기의 시선, 무정한 시선 - 2021.04.30. 2. 액션영화의 한 기원, 안중근과 무협 - 2021.05.31. 3. '외팔이'의 도래, 1960년대 후반의 무협붐 - 2021.06.30. 4. 태권도 영화- 챠리 셀과 바비 김, 이국적 이름들의 행렬에 관하여 - 2021.07.23. 5. 이소룡적 신체 - 2021.08.24. 6. 김두한과 협객물, 유신 시대의 가장 안전한 쾌락 - 2021.10.01. 7. 브루스플로이테이션과 한국영화 - 2021.11.01. 8. 춤추는 괴수, 1967의 '트위스트' 용가리 - 2021.12.02. 9. 우리는 왜 그때... - 2021.12.24. 10. 용팔이, 1970년대의 과잉과 잉여 - 2022.02.24. 11. 1970년대식 섹스와 폭력, 여감방 영화와 <여수 407호> - 2022.03.22. 12. <삼국대협>, '트랜스내셔널한 어떤 고립에 대하여 - 2022.04.20. 13. '빈곤한 이미지'의 여행- <정도>/<당수태권도>와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 - 2022.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