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선
- 감독
- 엽위신
- 제작년도
- 2007
- 출연
- 견자단, 고천락, 판빙빙, 예성, 석행우
거창한 의미 부여할 것 없다. < 극장판 체인소맨: 레제편 >(요시하라 타츠야, 2025, 이하 ‘체인소맨: 레제편’)은 소년만화 저변에 깔린 결핍을 건드리는 고자극 드라마다. 원작 만화의 저변에 깔린 온몸 비틀기 삐딱선과 달리 이번 극장판은 떡밥을 뿌리고 정직하게 회수하는 모범생의 면모를 선보인다고 해도 좋겠다. 다만 강렬하고 직관적인 이미지 자극을 곁들여서. 스핀오프처럼 다소 결이 다른 스페셜 이벤트 같은 에피소드였기에 가능했던 잠깐의 일탈, 쉼표, 한여름밤의 꿈 같은 에피소드였다. 마찬가지로 고자극의 작화와 눈알이 시려울 정도로 화려한 액션 시퀀스를 곁들여서. 요란하고 화려한, 사상 최대의 연애 싸움을 시각적으로 재구성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재밌지만, 시간의 풍화를 뛰어넘는 명작이라고 보긴 어려울 것이다. 어떤 지표와 분기로 작용할 만한 깊이를 보장하는지도 모르겠다. 지극히 취향 저격의 안전하고, 검증되고, 무난한 작품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러므로 이 범상한 애니메이션은 매우 사사로워질 자격을 획득했다. 너도 재밌고, 나도 재밌었다는 취향의 확인. 그리하여 의미를 찾아 헤매기보다는 즐거움의 안도감을 안기는 고백적인 작품이다. 영화를 향한 애니메이션, 순애의 재발견 2025년은 애니메이션의 강세가 확연한 한 해였다. 넓게 보면 영화산업의 (쇠퇴와는 결이 다른) 구조적 변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비단 한국 시장만의 흐름이 아니지만 한국 시장에서 더 도드라지는 것도 사실이다. < 주토피아 2 >(자레드 부시, 바이런 하워드, 2025)가 2025년 전체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건 기존의 관성을 비춰볼 때 당연하다. 가족 관객을 타겟으로 한 검증된 IP의 속편이, 완성도와 무관하게 더 큰 흥행을 거두는 건 늘 반복되는 공식이나 마찬가지다. 반면 <체인소맨: 레제편>을 향한 호감과 열기는 단순히 수치적인 흥행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흥행 면에선 <귀멸의 칼날> 등 재패니메이션과 같은 흐름으로 묶을 수도 있겠지만 작화를 통해 쾌감을 준다는 면을 제외하곤, <체인소맨>은 다른 입장에 서 있다. <체인소맨>이 이번 극장판 레제편에서 맑게 길어 올린 부분은 한동안 일본 만화에 번졌던 유행 같은 감각, 이른바 순애의 연장선에 있다. 후지모토 타츠키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단순한 소년만화의 극장판 확장이 아니다. 차라리 폭력의 세계에 던져진 두 괴물이 서로의 상처를 핥으며 나누는, 가장 기괴하고도 아름다운 ‘보이 미츠 걸(Boy Meets Girl)’의 변주다. 스크린에 펼쳐지는 이 세계는 언제나 젖어 있다.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 그리고 끊임없이 내리는 비의 눅눅함이 화면 너머로 전해진다. 덴지라는 인물은 태생적으로 결핍의 덩어리다. 그에게 욕망은 거창한 세계 구원이나 정의 구현이 아니라, 잼 바른 식빵이나 따뜻한 잠자리, 그리고 이성을 향한 원초적인 호기심 같은 것들에 머물러 있다. TV 시리즈가 덴지의 그 동물적인 감각과 혼돈을 거친 선으로 그려냈다면, 이번 <체인소맨: 레제편>은 그 혼돈 속에 싹튼 ‘첫사랑’이라는 감정을 포착하기 위해 카메라의 심도를 깊게 가져간다. <체인소맨: 레제편> 중 / 사진: IMDb , ⓒ 2025 M/CSMP ⓒTF/S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가 가진 특권 중 하나는 현실의 물리학을 무시하는 과장된 움직임, 흔히 데포르메라고 불리는 의도된 작화 붕괴다. 하지만 <체인소맨: 레제편>은 그 과장됨 속에 기묘한 리얼리티를 부여한다. MAPPA의 제작진은 인물의 미세한 표정 변화, 특히 레제의 얼굴에 스치는 홍조나 덴지의 당황한 눈동자 등 감정의 떨림을 집요하게 포착한다. 액션 시퀀스에서의 속도감은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타격의 무게감이 관객의 뼈까지 전해지는 듯하다. 태풍의 악마를 타고 도심을 질주하는 장면이나, 덴지와 레제가 공중에서 얽히며 싸우는 클라이맥스는 애니메이션이 도달할 수 있는 역동성의 극단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미묘한 리얼리티의 근간에는 원작자의 시점이 투영되어 있다고 믿는다. TV 오프닝에서부터 고백하고 있듯 후지모토 타즈키 작가의 실천에는 영화, 달리 표현하면 카메라의 위치과 프레임에 대한 고민이 동반되어 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체인소맨: 레제편> 역시, 아니 더욱 노골적인 방식으로 거의 모든 컷의 근간에 실사 영화에 대한 향수가 묻어 있다. 겪어보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첫사랑의 노스탤지어 노스탤지어는 영원히 그곳에 다다르지 못하는 것을 전제로 피어난다. 덴지와 레제가 맺어지지 못하는 것으로 애틋함의 감흥을 자아내는 것처럼, <체인소맨: 레제편>의 동력도 실사 영화에 대한 동경과 애정이 깔려 있다. 이것은 상하 혹은 우열의 관계가 아니다. 애니메이션은 실사 영화와 다르고 실사 영화가 될 수 없다. 그 구분을 전제로 하여 한없이 영화에 가깝게, 하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다르고자 할 때 여타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오리지널리티가 피어난다. <체인소맨: 레제편>의 오리지널리티는 노골적인 애정고백을 바탕으로 한 빽빽한 오마주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덴지와 레제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메타포인 이솝 우화의 ‘시골 쥐와 도시 쥐’ 이야기는 덴지와 레제, 두 하이브리드(인간과 악마의 융합체)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으로 치환된다. 시골 쥐의 평온하지만 배고픈 삶과 도시 쥐의 풍요롭지만 위협받는 삶. 덴지는 언제나 도시 쥐의 삶 속에 던져져 있었으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시골 쥐의 안온함을 갈구해왔다. 레제는 그런 덴지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어디에 속하고 싶으냐고. 이것은 ‘자유’와 ‘통제’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공안 대마특이과라는 시스템(도시) 안에서 사육되는 덴지와, 그 시스템을 파괴하러 온 외부의 존재 레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진영에 서 있는 듯하지만 실상 누군가의 도구로 쓰인다는 점에서는 거울상처럼 닮아있다. 레제는 마키마의 안티테제로 만들어진 캐릭터답게 첫사랑의 이상향을 응축시켜 놓았다. 진정 비현실적인 부분이 있다면 악마로 변하는 이들의 능력이 아니라 소녀가 소년을 만나는 상황 그 자체라고 해도 좋겠다. 레제가 덴지에게 가르쳐주는 수영법, 카페에서 나누는 대화들은 그들이 ‘무기’가 아닌 평범한 ‘소년소녀’로 존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시간이다. 사진: IMDb( 1 , 2 ) 감독은 이 딜레마를 시각적으로 탁월하게 구현한다. 레제의 폭발은 화려한 불꽃놀이처럼 묘사되는데, 그녀의 머리가 폭탄으로 변하고 사지가 터져 나가는 그로테스크한 변신 장면은, 혐오스럽기보다는 일종의 해방감마저 준다. 화약(gunpowder)과 꽃(flower).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조합처럼, 레제는 치명적이지만 끝내 질 수밖에 없는 꽃이다. 덴지가 그녀에게 건네려 했던 꽃다발, 그리고 마지막 카페 씬에서 들리지 않는 종소리는 이 영화가 결국 ‘실패한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임을 상기시킨다. 체인소 역시 피를 뒤집어쓸 때 비로소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존재다. 억눌린 감정이 터져 나올 때의 카타르시스는 체인소의 소음과 겹쳐진다. 그들에게 사랑은 서로를 안아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부수고 태워버림으로써 완성되는 파괴적인 제의(祭儀)와 같다. 그리하여 이들이 빗어내는 시끄러운 소음, 불협화음은 불쾌감 이면에 애잔함을 베이스로 깔고 있다. 폭탄의 악마가 터뜨리는 굉음은 청각을 마비시킬 듯 몰아치지만, 역설적으로 이 영화가 가장 빛나는 순간은 폭발의 순간이 아니라, 폭발 직전의 고요함, 혹은 폭발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재(ash)의 정적에 있다. 태풍이 지나가고 당신의 뇌리와 망막에 남는 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던 덴지가 레제와 함께 학교 수영장에 잠입해 밤의 유영을 즐기는 시퀀스이리라 믿는다. 물의 질감, 달빛이 부서지는 수면, 서로의 몸짓을 훔쳐보는 시선은 액션 장르의 문법을 잠시 잊게 할 만큼 서정적인 이 장면에는 이뤄지지 못할 순수이기에 성립되는 아름다움이 있다. 마치 도화선에 불이 붙어 타들어가고 있는 줄도 모른 채, 그 불꽃의 반짝임이 예뻐서 넋을 잃고 바라보는 아이들의 위태로운 아름다움. 고백하자면 한동안 좋은 걸 그냥 좋다고 말하지 못했다. 의미를 찾아다니고 가치를 부여해야만 한다는 강박의 저주에 빠진 것 같았다. 때론 있지도 않은 의미를 찾느라 아는 척, 감동 받은 척, 거짓된 취향을 무장한 적도 있다. 어떤 척을 하는 걸 나쁘게 보지 않는다. 그건 갈망이자 방향이며 강렬한 에너지다. 스스로 정한 이상에 도달하려고 발버둥치는 사이 단련되는 부분도 있고, 때때론 그 과정과 행위 자체가 자신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종종 너무 멀리 와버려 지금 어디에 떠 있는지 위치를 확인하기 어려운 순간이 다가온다. <체인소맨: 레제편>은 그때 발견한 작은 등대 같은 작품이다. 직관적으로 재미있고, 익숙하고 빤해서 더 마음이 가는 쉼터. 재밌는 걸 그냥 재밌다고 말할 수 있는데도 적잖은 용기가 필요하다. 되돌아보니 우리는 모두 한때 덴지였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그저 눈앞의 다정함에 목을 맸던 시절.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한때 레제였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혀야만 내가 살 수 있었던, 거짓말로 진심을 감춰야 했던 시절. 굉음이 남긴 이명(耳鳴)은 꽤 오랫동안 귓가에 머물 것이다. 사진: IMDb 송경원(씨네21 편집장) l 영화 논문, 비평, 기자 글쓰기까지, 영화에 대한 서로 다른 리액션 사이에서 흔들리고 방황한지 15년. 이제야 영화 글쓰기가 나의 직업이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2023년 《 씨네21 》 편집장이 되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할 때, 밤하늘의 별자리를 찾듯 영화를 보고, 읽고, 쓴다. 2009년 《씨네21》 영화평론상 수상, 2011년부터 부일영화상, 부천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서울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심사위원 등 역임. 『프로듀서』(2019), 『만화 웹툰 작가 평론선―이충호』(2021), 『마음의 일렁임은 우리 안에 머물고』(2021, 공저), 『얼룩이 번져 영화가 되었습니다』(2024) 등 집필.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우미관(1937) ", 서울역사아카이브 다시 만난 세계: 식민지 조선의 극장문화 이야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를 바탕으로 역사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와 행간 속에 숨겨진 욕망들을 재조명합니다. 한성의 상설 실내극장은 대한제국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출현하기 시작했으며 여러 극장이 어우러져 극장가를 형성하게 되었다. 1902년에 건립된 희대 는 여론의 추이에 따라 우여곡절을 겪던 와중에 폐관과 재개관을 반복하다가, 1908년부터는 원각사로 이름을 바꿔 운영되었다. 별도의 극장명 없이 활동사진을 영사해 왔던 동대문의 한성전기회사 창고 건물은 1907년부터 광무대 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는 종로대로를 축선으로 삼아 장안사, 단성사 , 연흥사 가 신설되었으며, 새문 밖에서는 프랑스인 마전(馬田, martin)이 운영한 마전활동사진관 이 영업을 개시했다. 다만, 이들 극장이 본격적인 영화 상설관으로 운영되지는 않았다. 영화가 간헐적으로 상영되기는 했지만 비중이 높다고 보기는 어려웠으며, 상영물은 대개 단편적인 활동사진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극장 프로그램에서 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전통연희와 가무, 신파극 등이었다. ‘활동사진관’이라는 명칭을 내세웠던 마전활동사진관 역시 명창들의 공연을 병행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원각사 극장 전경 본격적인 영화 상설관은 일본의 자본력이 동원되면서 출현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경술국치와 함께 한성이 경성으로 바뀌는 시기와 맞물려 일어난 변화였다. 1910년에는 경성고등연예관이 영업을 개시했고, 이후 황금관 , 대정관, 유락관, 제2대정관 이 개관하면서 새로운 극장가를 형성했다. 이상의 극장들은 핵심 소구 대상으로 상정했던 재조선 일본인의 거주지인 남촌 부근에 터를 잡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소수였던 일본인들만으로는 충분한 수익을 기대하기 어려웠기에 남촌의 극장들은 조선인들의 출입을 굳이 막을 이유가 없었고, 영화에 매혹된 조선인들 역시 새로운 사진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남촌의 극장을 드나들었다. 결과적으로 1910년대의 극장가는 종족 혼합적 공간 의 성격을 띠게 되었던 셈이다. 본디 극장은 입장료에 대한 지불능력만을 최소한의 문턱으로 삼는 곳이며, 수익을 보장해 줄 수만 있다면 어떠한 관객이라도 환영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곳이다. 다만, 경술국치 이후 식민지의 백성으로 전락한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에 대해 적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총칼을 앞세운 무단통치의 폭력 앞에서 그러한 반감이 대대적인 저항으로 표면화되지는 않았지만, 잠재된 불만은 종종 불온한 공기를 형성해내곤 했다. 그리고 일본인과 조선인이 뒤섞여 있던 극장은 종족적 적대감을 징후적으로 노출하는 장면도 종종 연출해냈다. 이구영 은 영화사가 이영일 과 진행한 구술 채록 과정에서 영화를 매개로 종족적 대결의식 이 촉발된 사례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 바 있다. (이구영) 그런데 거기서 사상적으로 충돌이 난 일이 한 번 있습니다.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걸 이제 내가 얘기할게요. 왜 그런고 하니, 유도하고 권투하고, 시합하는 단편영화가 있었어요. 그러면 이제 서상호가 무대에 서면, 서상호는 일본놈 편으로 무대에서 박수를 치라고 가르치고 관중들은 한국 사람이 절반이니까 와~ 소리가 나고 말이죠. 그래서 권투 시합에, 거기서 큰 혼란이 일어났었어요. 그냥. [일본놈 치고 때리고 난리 나다시피 하고, 그짝 나고 말이지.] 허허허, 이럴 때 아주 골아봐라 하고 그놈이 쫓아들어오고 말이지. 허허허. (중략) 그래 가지고는 [양자측이 있겠지만] 일본 놈은 그냥 나막신 신은 채로 구르고 몇번 구르고 한바탕 야단을 치는데, 한국 사람 심리가 그거예요. 우우 소리를, 그냥 반대로 한 거죠. 우우 했죠. 그러니까 이제 서상호는 일본 사람 편들었으니까. 무대 위에서라면 유도하는 아무개가 짜끄를 이겼단 말이야. 이렇게 소리지르면... 그러다가 이제 이기는 것이 좀 나와야 될 거 아닙니까. 이제 권투가? 그 때는 관중이 우뢰 같은 박수갈채가 나오는 데야... 흐흐흐. (이영일) 아하하하하. 그래 됐군요. (이구영) 그래서 그거 사상적으로 큰 문제가 벌어져서, 그게 중단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야단친 일이 있었어요. - 한국예술연구소 편,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 - 김성춘, 복혜숙, 이구영』 , 소도, 2003, 195쪽. 이구영은 영화 < 쌍옥루 >(1925)로 첫 영화를 발표한 이래 < 낙화유수 >(1927), < 승방비곡 >(1930) 등을 연출한 감독이었으며, 1920년대의 대표적 영화평론가로 활동한 바 있다. 또한 단성사 선전부장으로 재직한 이력도 갖추고 있었으므로 초창기 영화가의 분위기에 대해 풍부한 식견을 가진 인물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변사 서상호가 경성고등연예관에서 활동했던 시기에 대해 회고하면서 영화 상영이 종족 간의 패싸움으로 비화된 사건이 있었다고 밝혔다. 일본 유도선수와 서양 권투선수가 맞붙는 짧은 영화가 상영되었는데, 해설을 맡은 서상호는 일본 선수에 대한 응원을 유도했지만, 일본인 관객들의 호응과 달리 조선인 관객들은 야유를 보냈으며, 외려 서양 권투선수가 활약할 때 박수갈채를 보냈다는 것이다. 결국 일본인 관객들과 조선인 관객들은 서로 욕설을 주고받고 방석과 귤껍질을 서로 집어던지며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기에 이르렀다. 경관들도 함부로 끼어들지 못할 만큼 살풍경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는데, 이러한 모습은 종족 혼합적 극장의 분위기가 치안의 잠재적 불안요소로 지목될 수 있음을 보여 준 국면이었다. 한편, 영화가 극장의 핵심적 프로그램으로 부상하게 되면서 북촌의 극장가 역시 이러한 변화를 민감하게 받아들였는데, 1912년에는 우미관 이 건립되어 북촌의 영화상영관으로서 특권적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우미관이 조선인 관객을 독점 하기 위해 부단히 애써 왔다는 점이다. 특히 제2대정관의 노선 전환과 관련된 맥락은 우미관의 욕망을 들여다보기 위한 단초를 제공한다. 대정관 관주는 1914년 6월에 경성고등연예관을 매수한 후 제2대정관을 운영하기 시작하는데, 특이하게도 이곳은 남촌에 소재해 있었지만 조선인 관객들을 위한 전용관을 표방하면서 김덕경, 최병룡 을 비롯한 조선인 변사도 영입한 바 있다. 그러나 제2대정관은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일본인 전용관으로 노선 전환을 꾀한다. 아마도 입지조건상 조선인 관객들만을 유치하기에는 수익 창출이 어려웠던 사정이 개입되어 있으리라고 추정되는데, 김승구 는 이 과정에 우미관과 제2대정관의 ‘이면계약’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 바 있다. 즉, 우미관은 대정관이 조선인 전용관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매월 200원씩을 지불하기로 약속했다는 것이다. *주1 물론 이것은 북촌에 영화 상설관이 우미관 하나뿐이었을 때만 유효한 전략이었을 따름이다. 1918년에는 광무대 경영자 박승필 이 단성사를 인수한 후 영화를 본격적으로 상영하기 시작하면서 경쟁 체제가 성립되었다. 또한 1922년에 조선극장 이 건립되자 북촌 극장가의 경쟁 구도는 3파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결국 우미관은 점차 일류 상설관으로서의 지위를 양보하고 저가 입장료 정책을 펴며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모양새를 취했는데, 1920년대 이후부터는 단성사와 조선극장의 양강 구도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좌) 단성사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 단성사(1937) ", 서울역사아카이브) / (우) 조선극장 종족적 분할을 시도한 우미관과 제2대정관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종족이 혼재된 객석의 풍경은 종족 간의 돌발적 충돌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안정적인 운영을 방해하는 요소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식민지 조선의 극장들이 점차 종족공간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해나가게 되었다는 점은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보인다. 유선영은 조선인들이 주로 출입했던 극장들이 일본영화가 아닌 서양영화를 주로 상영했으며, 입장료도 저렴하게 책정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일본인 전용극장들과 뚜렷한 지역적, 민족적 분할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라 추정한 바 있다. 이와 같은 분할을 통해 조선인 극장은 식민치하에서 거의 유일하게 허용된 ‘ 종족의 공간 ’이자 ‘ 집합의 공간 ’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극장이 스펙타클적 쾌락의 소비공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동족 집단의 존재에 대한 확인을 통해 민족적 정체성을 위무받기 위한 공간 이었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주2 더 나아가 종족공간은 지정학적으로 분할 되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물론, 북촌 지역에 건립된 일본인 극장들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점차 북촌은 조선인들의 공간이며 남촌은 일본인들의 공간이라는 심상지리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백두산이 지적한 것처럼, 조선시대에 북촌과 남촌의 경계는 기존 거류민들의 기질이나 위치(청계천)를 기준으로 구분되었지만, 식민지배 이후 경제적이고 종족적인 경계구역으로 맥락화되는 경향이 현저해지게 되었다. 즉, 북촌 은 조선인의 종족적 공간이자 개발에서 낙후된 구도심 이라는 심상적 범주로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주3 이러한 변화는 치안당국의 통제를 용이하게 만든 요인이기도 했다. 이순진 이 밝힌 바와 같이, 낙후된 북촌에 종족적 ‘게토’로서 조선인 극장가가 형성되었다는 점은 종족 간의 충돌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조건이었으며, 감시 역량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에도 좋은 조건이었다. *주4 다만, 극장 내에서 이루어진 종족 간의 갈등 상황이 어디까지나 극장의 울타리 안에서 봉합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던 것과 달리, 종족의 연대를 통해 결집된 에너지가 극장 바깥으로 확산 될 가능성은 훨씬 커지게 된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현 종로구 관철동에 위치했던 1937년 우미관 의 모습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우미관(1937) ", 서울역사아카이브) 둘째번 연주회를 열던 십이일 밤 우미관에는 일장 대풍파가 일어난 일이 있었는데, 그 사실을 들은즉 당일밤 아홉 시쯤 되어 무대에 섰던 이왕 다동 기생의 은희 아비가 품속에 있는 금시계를 잃어버린 소동 이 생기어 형사들은 필경 사람 많이 모인 중에서 못된 스리(소매치기)란 도적이 그리함인 줄 짐작하고 대활동을 개시하여 파하기 전에 틈틈이 나아가는 사람들을 일제히 신체 수색 을 한 바 마침내 시간이 다 되어 수백의 관객은 물결치듯 솟쳐 나아가자 준비하고 있던 형사들은 나아가는 사람마다 일일이 신체 검사를 할 때, 모든 관객들은 표 사가지고 구경왔다가 신체 검사를 당하는 것은 참으로 당치 못할 일이라 하고 호성을 지르고 풍파 를 일으키어 그대로 솟쳐 나아갔으므로 한참동안 그러한 혼란은 없었고 신체검사도 마치지 못하여서 매우 살풍경을 이루었다더라. - 한국영상자료원 편,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18-1920 』, 2009, 267쪽. 기사, “우미관의 소동”, 《매일신보》, 1919. 11. 14. 우미관에서 발생했던 경찰과 관객의 충돌은 종족공간의 파급력을 엿볼 수 있는 사례에 해당할 것이다. 금시계를 분실한 관객의 신고가 접수된 후 임석경관은 소매치기의 소행으로 짐작하고 증원을 요청했으며, 극장을 나가는 수백 명의 관객들에 대해 일일이 신체 수색을 시도하고자 했다. 그러나 관객들이 “표 사서 영화 보러 왔는데 신체검사가 가당키나 하냐”면서 강하게 항의하며 나가버리자 검사도 채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무척이나 살벌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관객들은 극장 안에서 행사된 공권력의 통제에 대해 공공연한 반감을 드러냈던 셈인데, 주목할 것은 이 사건이 3.1운동이 시작되었던 1919년 에 발생했다는 점이다. 전 조선 단위로 확대된 3.1운동의 여파가 남아 있던 경성에서 제국은 조심스러운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의 통제가 또 다른 저항운동의 도화선 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점차 종족공간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해 나가게 된 조선인 극장들은 중대한 소요사태가 예견될 때마다 치안 당국의 ‘일급 감시대상’으로 지목되기에 이른다. 그렇다고 해도 극장을 무조건 폐쇄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외려 제국은 극장이 영업을 중단하게 된다면 치안에 위협 요소가 될 수 있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나 아우구스또 보알이 지적했던 것처럼 극장은 사회적 불만이 대규모 대중투쟁으로 번져나가지 않도록 방지하는 감정의 배출구 역할을 담당한 곳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제국은 사회통제와 치안 유지를 위한 유력한 기구로 극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제국은 조선인 극장들의 영업을 허용하되, 종족의식에 기반한 폭발력을 적절히 제어 하는 기술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흥행장급흥행취체규칙”(1922)을 필두로 극장 취체규칙들이 본격적으로 입안되었던 것은 그 연장선에 놓인 조치였다. 3.1운동 이후 제국은 기존의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를 표방하게 되었던 바, 극장은 새로운 통제기술의 유효성을 확인하기 위한 유력한 시험대와도 같았다. *** 주1. 김승구, 「1910년대 경성 영화관들의 활동 양상」, 『한국문화』 53,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1. 주2. 유선영, 「극장구경과 활동사진 보기 : 충격의 근대 그리고 즐거움의 훈육」, 『역사비평』 64, 역사비평사, 2003. 주3. 백두산, 「1910년대 경성 북촌 조선인 극장가와 종족공간적 구성」, 『한국연극학』 63, 한국연극학회, 2017. 주4. 이순진, 『(조선인 극장)단성사: 1907-1939』, 한국영상자료원, 2011, 34쪽. 이광욱(극장문화사 연구자) l 읽고 생각하며, 말하고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과거의 기록을 뒤적이고 오늘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함께 미래를 고민한다.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조교수(동화 한국어문화학과), 한국영상자료원 객원연구원(『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 『드라마, 일상성의 미학』(2024) 공저, 「카프 연극대중화론의 전개와 송영 풍자극의 매체미학」(2018), 「도달한 임계점과 보존된 미래 – 발성영화의 정착과 경성 소재 조선인 극장의 연쇄 반응」(2021), 「표류하는 조선영화 : <임자 업는 나루배>에서 <정춘삼>으로 – 최초의 영화 판권 소송과 식민지 조선영화 시장의 추이」(2022) 집필.
이야기는 현실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었던 엄청나게 많은 기억들 속에서 일부만 골라낸 이야기를 영화라고 한다면, 미처 이야기가 되지 못한 나머지 기억들은 기록영상 컬렉션 곳곳에 심드렁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되는대로 늘어놓아 보겠습니다. 지난 12월 24일에 공개된 ‘ 미국 NA II 소장 노획영상 컬렉션 ’ 준비 과정 중의 이모저모를 소개할까 한다. 이 컬렉션은 지난 2022년 한국영상자료원이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에 의뢰하여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문서고 2관(National Archives II, 이하 NA II)에서 수집과 동시에 연구까지 진행했던 1930~40년대 미군 노획필름 37편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미국 육군 G-2 정보참모부가 적국 정보 수집의 일환으로 제2차 세계대전 말과 6.25 전쟁 당시에 노획한 영상들이다. NA II에서는 ‘해외 노획 기록물’을 묶은 기록군 242(RG 242)에 ‘정보참모부 영화필름’ 시리즈(242-MID)와 ‘정보참모부 일본 관련 영화필름’ 시리즈(242-MID-J)로 분류, 관리되고 있다. 이 필름들은 대부분 선전선동을 위해 제작됐던 것으로서, 일본, 이탈리아, 소련, 북한이 어떤 논리와 방법으로 자신들의 체제를 정당화하고 비인도적인 침략 또는 경쟁국에 대한 흑색선전을 포장했는지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아무리 ‘격동의 현대사’라는 점잖은 표현을 쓰더라도 이 시대가 폭력과 착취의 시대였고 ‘줄을 잘못 서면’ 생존이 위협을 받을 수도 있었던 야만의 시대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런 혼란 속에서 파시스트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체제의 역량을 기울여 선전영상을 만들고 자신들의 세계관을 학습시키고자 했다. 그것이 허구든 실존하는 것이든, 진실이든 거짓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대중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불안정한 시대의 힘 없는 개인에게, ‘믿음’은 합리성보다 중요한 덕목이었다. 그래서 노획영상은 태생이 복잡하다. < 황도일본 >(아오키 타이스케, 1940)은 명분 없는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천년 전의 신화집 『일본서기』와 『고사기』를 대전제로 하여 허구 위에 허구를 중첩한다. ‘신의 자손이 신의 명령을 이행한다’라는 신화적 명제를 사실로 포장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창조해낸 개념들의 쓰나미로 보는 이를 압도하고자 했다. 파시즘 우방국 이탈리아는 자신들만의 세계관으로 일제의 침략, 아니 ‘문명의 회복을 위한 전진’에 찬사를 보냈다. 소련은 이러한 ‘제국주의, 파시즘으로부터 인민을 해방시킨 구원자 스탈린’의 이미지를 구축하면서 러시아 공산당 중심의 새로운 착취구조를 유토피아적 현실로 포장했다. 북한은 스탈린의 권위를 김일성 권력의 정당성의 근거로 덧씌웠고, 소련의 ‘만들어진 유토피아’가 담긴 영상을 수입하여 한국어 웅변을 곁들여 북한 각 지역에 ‘영사 폭격’했다. ‘통일’, ‘해방’, ‘자유민주주의’, ‘평화애호’ 등의 인도적 개념어들은 ‘선의의 친구’ 이미지를 만드는 도구로 의도적으로 수없이 사용됐고,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인플레이션의 늪에 빠졌다. 이와 같이 선전영상들이 대중 대상의 최면효과를 위해 사용한 전략, 그리고 제작 주체가 의도하지 않았던 맥락까지 포함하여 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모든 기록영상이 그렇듯이 당장은 쓸모없어 보이는 정보까지도 샅샅이 훑고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한 작업의 결과를 컬렉션 페이지의 자료집 에 수록했다. 기록영상 컬렉션에서 TMI는 ‘Too Much Information’이 아니라 덕목이다. 특히 이번 컬렉션은 잡다하게 아는 것은 많지만 제대로 아는 것은 많지 않은 AI 들과 함께 준비했다. 이들은 STT(sound to text - 채록), OCR(광학문자인식), 이미지 분류(유사이미지 검색), 번역, 레퍼런스 찾기, 자유로운 대화상대 역할로 투입됐다. 필자는 미국 드라마 <하우스>에서 하우스가 화이트보드 앞에 부하 의사들을 앉혀 놓고 희귀병 추리의 단서를 모으듯, 수개월 동안 허당 AI들로부터 힌트를 뽑아내고 경쟁시켰다. *주1 기만의 전문가들이 만든 영상을 착각의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분석한 셈이다. 이렇게 채굴한 TMI 몇 가지를 부록으로 덧붙인다. 부록 1. <동양의 전투>( Battaglia D'Oriente ): 사상이 맞춤법을 지배한다. 이 영상 은 중일전쟁기 중 1938년 10월에 있었던 일본의 중국 광저우 진격 과정을 이탈리아 영화사(ISTITUTO NAZIONALE L.U.C.E)가 이탈리아어 해설을 곁들여 제작한 것이다. NA II 카탈로그에는 ‘1939년에 송출됐다(...was broadcast)’라고 적혀 있다. 이때는 추축국들이 삼국동맹을 체결한 1940년 9월 이전 시점이다. 하지만 1937년에 이미 이탈리아는 독일-일본의 대 소련 방어를 위한 ‘방공협정’에 참가한 상태였다. 그러니,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일본의 천황제 파시즘을 옹호하여 간접적으로 자국민들에게 파시즘의 정당성을 설파할 목적으로 이런 영상을 제작하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무솔리니의 관영선전영화제작소였던 ‘L.U.C.E(루체)’가 영상에 ‘L.V.C.E.’로 표기되고 있는 것은 많이 이상하다. (좌) 도입부 #1 / (우) 도입부 #2 이에 대해 AI 하나가 오랜만에 실속 있는 의견을 주었다. 이탈리아 통일 이전부터 ‘로마’는 국민적 숭배의 대상이었다. 이탈리아 통일운동을 뜻하는 ‘리소르지멘토’는 ‘부흥, 부활’이라는 뜻이고, 그 지향점은 ‘위대한 로마’였다. 무솔리니는 로마의 이미지에 더욱 천착하여, ‘이전 시기의 부패한 로마’를 청산하고 고대 로마의 덕목과 정신을 이어받은 파시스트의 국가를 건설하는 ‘문명화 사명’론을 내세웠다. 그래서 이탈리아 파시즘은 철저하게 고대 로마의 신화적 상징을 사용하여 대중적 이미지를 조각했는데, *주2 이 영상 도입부의 독수리상, 고대 로마 묘비에 각인됐을 것만 같은 고전적 글씨체 같은 것들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 집착의 끝은 U 대신에 V를 사용한 것이다. 에트루리아 알파벳에서 유래한 고대 라틴어는 중세에 이르러 V가 U, V, W로 분화하기 전까지는 V만 존재했다. *주3 그래서 고대의 진정한 로마를 계승한 이탈리아 파시즘의 선봉, 국립영화제작소는 L.U.C.E.가 아니라 고귀한 L.V.C.E.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현대 세계의 문명과 질서를 대표하는 일본’에게 ‘기아와 혼란의 시대가 끝났다는 확신으로’ 중국인들이 환대하고 있다는 내레이션 내용은 도입부의 독수리상에 이어지는 도리이(とりい, 일본 신사 등의 관문)와 총칼의 도상으로 이미 예고됐다. 이탈리아인들은 파시즘의 사명을 잇는 일제의 ‘정의로운 전쟁’을 지지하고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는 메시지이다. 그런데, 내레이션 초반에 일본군 지휘관으로 언급되는 ‘왕의 동생 [치치부]’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발음은 [치치부]로 들리고, 다수의 AI가 동일하게 ‘principe(왕족) CCV’라고 채록했다. AI는 위와 같이 대답하면서 1번일 확률이 가장 높다고 했다. *주4 조사해 본 결과, 모두 틀렸지만, 이를 단서로 [치치부]가 쇼와 일왕의 동생 치치부노미야 야스히토임이 밝혀졌다. 그는 당시 현장 지휘관이 아니라 대본영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를 굳이 언급한 것은, 그가 난징대학살과 관련한 군 기강 문제를 지적했다든지, *주5 훗날 삼국동맹을 지지했던 점 *주6 등을 미뤄볼 때, 이탈리아 파시즘의 세계관에 부합하는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부록 2. <니혼뉴스 제7호>(日本ニュース 第7号): 초조함을 숨길 수 없었던 승전보 속 위치는? 기록영상에서 ‘지명’은 늘 골칫거리다. 근현대 지도에 적힌 지명은 지도마다 제각각이고, 서양에서 통용되던 지명, 타국에서 발음 들리는 대로 표기한 지명, 자국민들이 부르던 지명, 옛날 지명과 이명, (특히 공산주의 국가에서) 정치적 선전과 기념의 목적으로 툭하면 바꾸는 지명까지 모든 것이 뒤엉켜 있는 경우가 많다. < 니혼뉴스 제7호 >(1940)에서 지명 정보는 특히 중요하다. 이 영상은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일본의 관심이 온통 중국 국민당 정부의 보급선을 끊는 데에 집중됐던 1940년 여름의 뉴스릴이다.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중국 북부, 동부의 주요 도시와 기간시설들을 확보했던 개전 초기에는 전황을 낙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제스와 국민당이 내륙으로 이동하여 충칭정부를 세운 후부터 이 전쟁은 보급선을 확보하여 더 오래 버티는 쪽이 승리하는 구도로 전환됐다. 특히 일본군은 비현실적으로 전선이 길게 늘어선 데다가 철도, 도로망이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않은 내륙 지방까지의 보급에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 난처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후 1944년에 감행했던 대륙타통작전(1호 작전) 또한 이런 어려움 속에서 중국 내륙 및 남부까지의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둔 무리수였다. 반면, 중국은 동남부 해상으로부터의 보급로, 버마와 베트남으로부터의 육상 및 공중 보급로를 계속 뚫어내면서 장기 태세에 돌입했으니, 시간은 중국 편이었던 것이다. 그런 배경에서 이 뉴스릴은 줄곧 이러한 장제스 지원 루트, 즉 원장(援蔣)루트를 차단하기 위해 일본군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첫 번째 소식은 진해(鎮海)를 공격하여 해상 보급로를 차단했다는 내용을, ‘문제의 원장루트, 인도차이나 국경을 공격하다’라는 제목의 두 번째 소식은 베트남에서 출발하는 두 갈래의 원장루트에 관한 내용을, 마지막 소식은 어려움에 처한 일본이 이후 본격적으로 군국주의 체제로 돌입하고 군사적으로 폭주하는 도화선이 된 고노에 내각 출범 소식을 담고 있다. 그런데, 첫 번째 소식의 ‘진해’라는 곳은 어디였을까? 그 단서는 내레이션 중 [셋칸 루트]라고 발음되는 것의 정체를 찾는 데서 출발했다. 가동할 수 있는 모든 AI들은 이를 ‘석관 루트(石管ルート)’라고 채록했다. 그러나, 그런 보급로는 어떤 기록에서도 언급되지 않았고, AI는 그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변명을 늘어놓았다. 권위 있는 기관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AI의 억지 변명이 분명했다. 어처구니없게도 실마리는 현재 니혼뉴스의 일부를 소유하고 있는 ‘NHK 전쟁증언아카이브’ 중 <니혼뉴스 51호>의 스크립트 정보 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서 ‘셋칸 루트’는 ‘敵浙 루트’였다. AI는 ‘敵浙’을 ‘절강’으로 번역했고, 지도 검색 결과도 절강성 인근으로 나왔지만, 우리가 아는 절강성(浙江省)의 한자는 다르다. 그래도 이 과정에서 저장성과 장시성 지역을 잇는 철도인 저간선(浙赣铁路)이 이 시기에 이미 있었다는 것과, 저장성과 장시성의 약칭으로 쓰이는 글자가 저(浙), 간(贛)이라는 점을 발견했다. 그리고 지도에서 현재의 저간선 경로로부터 해안 쪽으로 탐색해 나가다가 ‘진해(鎮海)’의 현재 표기일 가능성이 높은 ‘전하이 구(镇海区)’를 발견했다. 이렇게 돌고 돌아, 저간 루트로 이어지는 저장성-푸젠성 해안의 보급 거점 위치가 확인됐다. 그런데, 앞선 전쟁증언아카이브의 <니혼뉴스 제7호> 스크립트에는 왜 이 정보가 없었을까? 해당 아카이브를 포함해 이 영상에 대해 현재 알려져 있는 모든 정보 에서 첫 번째 소식은 충칭으로 진격하던 일본군의 ‘사스(沙市) 공략 입성’ 내용이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 소식은 < 니혼뉴스 제3호 >의 세 번째 소식을 다시 한번 수록한 것이다. 3호 영상으로 공개했던 내용을 그대로 7호에 다시 수록했던 이유는 무엇인지 현재로서 알 길은 없다. 어쨌든 7호 영상으로 공개된 모든 판본 중에서 NA II 판본만이 유일하게 ‘진해 공격’ 소식을 담고 있고, 알 수 없는 이유로 ‘사스 입성’ 소식으로 교체됐다는 것은 분명하다. 부록 3. 일본인 여행 기록, 언제 촬영했을까? 왜 다른 선전영상들과 함께 노획됐는지 알 수 없는 영상이 있다. 이 영상 은 한 일본인 가족이 도쿄, 카마쿠라, 에노시마까지 여행한 하루 일정의 기록이 담겼고 음향은 없다. 유용한 정보가 아니라고 생각되더라도 미리 판단할 수는 없다. 이 가족이 여행한 시점이 언제인지 밝히고자 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NA II 카탈로그에는 ‘1937 ?’이라고 기재되어 있고, 근거는 밝히지 않고 있다. 화면의 내용을 근거로 좁혀 갈 수밖에 없다. 우선, 부채질을 하고 있으니 여름 즈음이다. 여행 전에 베티 미용실(ベティ美容室)에서 머리를 하는데, 간판 정보로 보아 매월 정기휴일인 17일, 27일은 아니다. 영업시간 정보를 보니 아침 8시 이후이다. 이어 도쿄 메이지신궁 외원의 성덕기념회화관(聖徳記念絵画館)을 방문하는데, 관동 대지진 이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면 1937년부터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사이 기간인 듯하다. 센소지(淺草寺) 본당 계단을 내려와 바나나 파는 곳을 지나친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바나나의 일본 수입이 중지됐다는 일본어 위키의 정보를 신뢰한다면 1939년 9월 이전이지만, 참고로만 받아들이기로 한다. 아사쿠사 마츠야 백화점(1931년 건립) 옥상에 있는 유원지를 가로지르는 케이블카가 보이고, 그 앞 스미다(隅田)강에 수상버스가 지나간다. AI는 이런 것들이 1930~1940년대 유행했다고 하면서도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좀 더 결정적인 근거는 우에노 동물원 장면이었는데, 수컷임이 분명한 기린 한 마리가 서성이고 있다. 우에노 동물원이 1982년에 발간한 『 우에노 동물원 100년사 』에는 암수 두 마리의 기린을 1933년 8월 21일부터 사육하기 시작했고, 1937년 7월 11일에 첫 새끼가 태어났다고 적혀 있다. 만일, 이 장면에서 수컷만 있는 이유가 암컷의 출산 때문이라면, 이 영상이 대략 1937년 여름의 것이라고 추정할 수도 있다. 이 책에 따르면 기린들의 이름이 ‘기린’과 ‘지라프’였는데, 이 책의 사진에는 ‘지라프’라고 적힌 팻말만 보이지만 ‘라벨에 기린과 지라프가 함께 적혀 있다’라는 설명이 달렸다. 영상 속에는 ‘기린’이라고 적힌 팻말이 걸려 있는 것을 보니 수컷의 이름이었던 것 같다. (좌) 영상 속 장면 / (우) 책 속 사진 결국 이런저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영상의 촬영 시점은 1937년 이후부터 1940년대 초 사이의 여름 정도의 범위로 좁히는 것이 최선이었다. 내심, 귀여운 기린 새끼가 태어난 날이었길 바라지만 말이다. 이미 글이 길어졌으므로 다른 TMI들이 궁금하다면 컬렉션 페이지 에서 자료집을 다운로드 받아 훑어보기 바란다. 사실상 국가가 정한 ‘전연령 관람 불가 등급’이라고 할 수 있는 공산권 국가 제작 영상(‘특수자료’)들에 대해서는 정보만 안내하고 VOD로 공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공산주의자의 영상에도 TMI는 있게 마련이고, 이런 정보들을 최대한 안내하고자 노력했다. 못 미덥지만 함께 수고했던 AI들에게도 감사를 전하고 싶다. *주7 *** 주1. 물론 필자가 하우스 같은 천재는 아니기에 다소 고통스런 공부가 수반되어야 했지만 말이다. 주2. 최병진, 짐바르도 마르타, 「이탈리아 파시즘 시기 선전물의 쟁점과 어법: 무솔리니의 도상을 중심으로」. 『유럽문화예술학논집』 11호(2), 21~39쪽. 문준영, 「파시즘의 로마 이미지와 로마관, 로마성(Romanità)―그 기원과 변천」. 『역사비평』 139호, 366~400쪽. Coluzzi, Paolo, “The significance of typography in the linguistic landscape during the Fascist period in Italy (1922–1943)”, Forum for Linguistic Studies 5(3):1885, 2023. 주3. “ Latin alphabet ”,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주 4. prompt engineering 효율 측면에서 ‘천황’이라고 언급했다. 명칭은 명칭일 뿐이다. 주5. “ 【独自】秩父宮、軍紀の乱れ懸念…日中戦争初期の書簡見つかる ”, 《요미우리신문》, 2020. 11. 15. 주6. “ 秩父宮雍仁親王 ”, 일본어 위키피디아 주7. 글에는 어쩌다 보니 claude의 프롬프트 화면만 나왔지만, 다양한 AI들과 그 기술이 적용된 툴들이 함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