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비도지정
- 감독
- 이인항
- 제작년도
- 1994
- 출연
- 양채니, 오흥국, 서소강, 오흥국, 양채니, 유송인, 고첩
1. 1970년대의 한국영화는 그 독특한 조증과 울증의 세계로 기억될 것이다. 이를테면 1974년 경이적인 흥행성공을 기록한 < 별들의 고향 >이 마련해낸 70년대의 여주인공 경아는 까르륵거리는 웃음과 흘러내리는 눈물로 기억된다. 혹은 < 바보들의 행진 >의 저 과도한 명랑과 내러티브 공간의 바깥으로 번져나오는 우울을 생각해보라. 프로파간다적 명랑성이라 할만한 대책없는 웃음과 영화 안에서는 거의 해명되지 않는 우울의 왕복. 이 감정의 기복은 너무 극심하고 빈번해서 한 편의 영화 내에서, 그러니까 컷과 컷의 연쇄 안에서 그 적소를 찾아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보인다.(물론, 검열의 문제가 있다. 우리는 몇몇 참혹한 사례들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다.) 1970년대 한국영화를 보는 데 있어 끊임없이 영화 바깥을 참조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 조울증의 영화들은 영화를 국가 시책의 방도로 삼고자 했던 정책자들의 과도한 개입과 이제 막 등장한 대중의 상상태와 시장의 요구에 부응하고자 한 장사치들의 욕망이 얼기설기 엮여진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그 중에서도 가장 낮은 위치에 놓여있던 액션영화는 어떠한가? 그러니까 도시 하위계급 남성들의 값싼 오락거리이자, 국가의 직접적인 치안의 대상이며(이런 영화들이 상영되던 장소는 가장 빈번한 경찰력의 검속 대상이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라), 때때로 통국가적 장르의 위용을 과시하며 장사꾼들의 주머니를 채워주었던 바로 그 장르 말이다. 2. 임권택의 1972년 영화 < 삼국대협 >은 액션 히어로의 트랜스내셔널한 교류의 역사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복합적인 동시에 가장 고립된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제목 그대로 이 영화에는 일본의 맹협(盲俠) 자토이치와 홍콩의 외팔이 독비도(獨臂刀), 한국의 의적 일지매가 모두 등장한다. 당시의 광고. “중국의 외팔이, 일본의 맹협, 한국의 일지매가 한꺼번에 나온다!” 이 광고 문구는 이 영화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간결하게 전달한다. 동어반복이지만, 다시 한 번 말하건데 자토이치와 독비도와 일지매를 한 자리에 모으는 것. <삼국대협>이 만들어지기 일년 전, <신자토이치 부셔라! 중국검>(일본 제목)=<독비도 대전 맹협>(홍콩 제목)이 < 외팔이와 맹협 >이라는 심플한 제목으로 한국에서 개봉해 인기를 끌었다. <자토이치> 시리즈의 22번째 작품이자 <독비도> 시리즈 중 하나로 카운트되는 이 일본-홍콩 합작영화는 아마도 1970년대 초 이 지역에서 만들어질 수 있었던 가장 대담한 기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자토이치와 독비도는 아시아를 석권하고 있던 당대의 액션 히어로들이었다. 1962년 제1작을 내놓은 이래 <자토이치> 시리즈는 1960년대 내내 일본 내에서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절대적인 인기를 구가하였다. 이 시리즈의 주요 수입처였던 홍콩의 쇼브라더스는 이 시리즈의 직접적인 영향하에서 자신들이 새롭게 전개해나갈 신파 무협영화의 기본틀을 완성하였다.(더 나아가서 말하자면 당시의 쇼브라더스 라이브러리에서 <자토이치> 시리즈를 컷 바이 컷으로 ‘사숙’한 신필름의 임원식과 최경옥은 자토이치-카츠 신타로의 맹인 검법을 응용, 여성 맹인 검사 이야기 < 맹수 >와 < 비연맹녀 >를 만들었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쇼브라더스는 <독비도>(한국 제목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를 통해 신파 무협영화를 성공적으로 안착시켰으며, 이로써 외팔이-왕우라는 자토이치-카츠 신타로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린 액션 히어로가 탄생하였다. 자토이치와 외팔이가 대결하는 <신자토이치 부셔라! 중국검>=<독비도 대전 맹협>은 < 에이리언 VS. 프레데터 > 같은 기획이다. 물론 훨씬 더 성공적인. 문제는 이 절대 강자들의 대결을 어떤 결말로 이끄는가이다. 즉, 누가 이기는가의 문제. <신자토이치 부셔라! 중국검>=<독비도 대전 맹협>은 이 문제를 각각의 자국 관객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적절한 방식으로 해결하였다. 일본 버전에서는 자토이치가 이기고, 홍콩 버전에서는 독비도가 이긴다. 다시, 1971년 <외팔이와 맹협>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 개봉했던 당시로 돌아가보자. 이 영화는 위장 일본영화가 아닌가라는 논란이 있었으나 일본-홍콩 합작 서류 사본을 제출함으로써 개봉될 수 있었다. 인기 절정의 ‘외팔이 독비도’와 더불어 전광석화 같다는 소문만 무성했던 맹인 자토이치의 오리지날 검법을 드디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 영화의 흥행은 예상대로 성공적이었으며, 서울에서만 18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참고로 말하자면 이 순간에 확인된 ‘자토이치’의 흥행가능성은 한국에서 개봉될 수 없었던 이 일본영화의 판권을 사들이도록 만들었고, 곧 <자토이치>의 한국 버전 < 죽장검 >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돈방석에 앉을’ 거라고 예측됐던 이 영화는 그러나 흥행에 실패했으며, <자토이치>처럼 시리즈로 만들고자 했던 당초의 기획은 좌초되었다.) <외팔이와 맹협>에서 이루어진 자토이치와 독비도의 기념비적인 만남을 염두에 둔다면, 이로부터 촉발되어 여기에 한국산 히어로 일지매까지 가세한 <삼국대협>은 이로부터 한발 더 나아간 것이었다고까지 할 수 있으리라. 게다가 이들 앞에 공동의 적을 설정해둠으로써, 불필요한 우열 가르기를 지양하고 히어로들이 힘을 합쳐 적을 무찌른다는(이 적은 물론 악독한 일본인이다) 산뜻한 쾌감까지를 선사하고자 한다. 이 영화의 간략한 줄거리. 때는 임진왜란 직후인 조선중기. 조선의 검객 일지매는 일본이 빼앗아간 왕의 보검을 찾아서 일본으로 향한다. 일본에서 외팔이와 맹협을 만난 일지매는 이들과 힘의 우열을 가리다가, 결국 마지막에는 셋이 모두 힘을 합쳐 공통의 적이자 사원(私怨)의 대상인 악당 구로다와 대결한다. <삼국대협>이 진정 흥미로워지는 것은 이 영화가 자신의 줄거리에도, 그리고 이 줄거리가 전달하는 그 어떤 도상에도 전적으로 무관심하다는 데에 있다. 첫 번째, 이 영화는 일단 설정상 세 나라가 모두 개입된 동아시아 국제전으로 임진왜란을 불러오고 있지만, 이 설정은 다만 삼국의 캐릭터를 불러모으기 위한 장치에 불과해 보인다. 즉, 이 시대배경을 그럴듯하게 만들어줄 디테일도, 역사적 관점도 전혀, 부재한다. 두 번째, 명백히 당대의 인기있는 히어로들을 빌려오고 있지만 여기에는 자토이치-카츠 신타로도, 독비도-왕우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에 카츠 신타로를 그럴듯하게 흉내내기 위해 흰 눈자위를 희번뜩거리는 김희라와, 왕우를 흉내내서 머리를 하나로 틀어올리고 한쪽 팔을 옷소매에 숨긴 채 외팔이가 된 김기주를 볼 수 있을 뿐이다. 게다가 이 영화는 원본을 모방하는 데에 있어 그 어떤 심혈도 기울이지 않는다. 의상, 제스처, 무기 등 대부분의 디테일은 원본으로부터 어긋나 있다. 맹협은 장발이며(자토이치는 짧은 머리이다. 이 독특한 헤어스타일은 맹인 안마사인 자토이치가 사회적 약자라는 것을 드러내는 유력한 징표였다), 외팔이는 장검을 사용하는 데다가 검은 옷도 입고 있지 않다(검은 옷이 홍콩 무협영화에서 차지했던 의미와 부러진 칼이 <독비도>에서 가지고 있던 내러티브적-신체적 의미를 생각해보라!). 다시 말하자면 이 맹협은 자토이치를 흉내내고 있으나 자토이치는 아닌 말 그대로 (한국어 번역인) 맹협이며, 외팔이는 독비도를 흉내내고 있으나 독비도는 아닌 (마찬가지로 한국어 번역인) 외팔이일 뿐이다. 세 번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유일한 관심은 맹협과 외팔이와 일지매라는 세 인물의 등장에 있다. 정말로 그것이 유일한 관심인데, 왜냐하면 이들은 등장할 뿐 아무 것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종종 슬랩스틱 코미디와 같은 움직임을 연출하거나, 옷 바꿔입기와 같은 작은 소극들을 만들어낸다. 아무도 자신의 캐릭터에 대해 믿지 않으며, 그것이 만들어내는 이야기 또한 믿지 않는다. 그리고 가장 난감한 순간이 마지막에 온다. 세 히어로는 드디어 힘을 합쳐 구로다의 집에 쳐들어간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강력한 구로다의 일격에 세 명의 칼이 모두 잘려나가고, 흘러내리는 바지춤을 움켜쥔 채 도망다니는 이 우스꽝스러운, 거의 비루해 보이는 히어로들의 형상은 과연 무엇일까? 3. 정성일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여기에 대한 가장 적절한 묘사일 것이다. “우스꽝스러운 슬픔,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상황의 무의미. 내가 여기서 보는 것은 달리 말하기 힘든 우울증이다.” 1) <삼국대협>에 관한 가장 길고, 가장 정교한 분석일 이 글에서 정성일은 이 ‘우스꽝스러운 슬픔’을 임권택이라는 작가(무)의식 안에서(혹은 임권택을 통해 한국영화사의 부단한 계보를 형성시키고 하는 그의 의도 속에서) 발견해내고 있지만 아마도 이것은 임권택만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지지부진한 조울증이야말로 1970년대가 어떻게 전개되고 있었는가를 실감케 하는 것인지 모른다. 베트남전 특수를 거치며 한국은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대중사회로 진입해가고 있었으나 민족중흥을 외치는 독재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폐쇄적인 언설공간으로 이를 마름질하고자 하였다. 세계를 향한 열림은 마치 베트남전과 이 나라가 관계맺던 방식만큼 왜곡되어 있었다. <삼국대협>이라는 저 ‘빈곤한 이미지’야말로 이 순간 한국영화가 가닿은 가장 국제적이고, 가장 지엽적인 한 형상에 다름 아닐 것이다. *** 1) https://www.kmdb.or.kr/story/5/1338 (관련글) 1. 비행기의 시선, 무정한 시선 - 2021.04.30. 2. 액션영화의 한 기원, 안중근과 무협 - 2021.05.3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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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홍콩 쇼브라더스의 <대취협>(호금전)이 한국 시장에 처음 등장했을 때 이 새로운 ‘장르’ 영화가 이후 한국에 미칠 막강한 영향력을 예상했던 자는 거의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 이 낯선 장르영화는 당시 한국 영화시장의 강력한 흥행 장르인 마카로니 웨스턴 풍의 제목을 빌려서야 이 시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셀지오 레오네의 A Fistful of Dollars(1964)가 ‘황야의 무법자’로 개봉, 대히트를 기록하며 불붙기 시작한 이 이탈리안 웨스턴들의 제목은 거개가 원제와 상관없이 황야, 석양, 결투, 무법자를 선호하곤 했다). 그리고 이 영화 <대취협>=< 방랑의 결투 >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파상적 흥행기록’을 세웠다. 곧이어 쇼브라더스산 무협영화 세 편이 이 시장을 강타했다. 1968년 신필름이 수입한 <독비도>(장철, 한국 개봉제목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 <변성삼협>(장철, 한국 개봉제목 < 삼인의 협객 >), <금연자>(장철, 한국 개봉제목 < 심야의 결투 >)의 총 관객수는 무려 65만 명에 이르는 것이었다 이 중에서 단연 압권은 <독비도>였다. 홍콩영화 최초로 백만 달러의 수익을 거둬낸 이 영화는 1960년대 중반 ‘무협 신세기’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새로이 무협영화를 일신함으로써(모더나이제이션) 시장을 확대하고자 한(글로벌라이제이션) 쇼브라더스 ‘신파 무협영화’ 전략의 혁혁한 성과이자 1960, 70년대를 풍미한 한국의 수많은 신체상해 히어로의 액션활극이라고 할만한 것들에 강력한 영감의 기원이 되었다.(아마도 이 중 가장 ‘급진적’인 실천의 사례를 들자면 1969년에 발빠르게 만들어진 < 팔없는 검객 >(임원식)이 될 것이다. <독비도>의 내러티브를 고스란히 차용한 이 영화는 한쪽 팔이 아닌 양팔을 모두 잃고 입과 발가락으로 검을 휘두르는 주인공을 선보인다!) 또한 <독비도>의 외팔이 왕우는 한국 관객들을 열광시킨 최초의 홍콩 스타가 되었으며, 한국에서 홍콩영화가 차지하는 독특한 위상과 소비의 방식을 보여주는 첫 번째 이름이 되었다(그리고 알다시피 이 스타를 향한 열광은 홍콩영화의 장르 변천 속에서 이소룡, 성룡, 주윤발 등으로 이어질 터이다). 이 새로운 열광을 자국 내 영화로 흡수하고자 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게다. 게다가 당시 ‘중국검객영화’ 혹은 ‘검객활극’이라고 불려졌던 이 장르영화는 자국 시장을 넘어서는 가능성으로 충만한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 이 영화들은 어떤 계층, 어떤 젠더, 어떤 세대, 즉 도시의 젊은 하위계층 남성들에게 강력히 어필하는 것이자 이 지역 공통의 산업화 속에서 발생한 이 관객들은 국경을 넘어 이곳과 저곳에 모두 존재하고 있었다. 곧이어 어떤 한국영화들이 일시에 ‘검’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여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 쌍용검 >, < 비호 >, < 대검객 >, < 유랑의 검호 >, <신룡검객>, < 무정검 >, < 3인의 여겸객 >, < 괴도의 검 >, < 단장의 검 >, < 필살의 검 > < 팔도검객 >...... 리스트는 끝없이 이어진다. 임권택은 < 뢰검 >, < 월하의 검 >, < 비검 >, < 요검 >을 만들었다. 어떤 영화들은 단독으로 만들어졌고, 어떤 영화들은 홍콩 혹은 대만과 합작으로 만들어졌으며, 어떤 영화들은 한국 국적의 감독이나 배우를 빌미로 합작을 주장하였다. 어떤 영화들은 재편집과 한국어 더빙을 거쳐 합작영화라고 주장되었다. 이를테면 장철의 < 철수무정 >과 <십삼태보>(한국어 개봉제목 < 13인의 무사 >)는 한국어로 더빙되어 한국-홍콩 합작영화로 공개되었다. 당시 쇼브라더스 전속 감독이었던 정창화가 만든 < 아랑곡의 혈투 >는 그의 국적을 이유로 합작영화라고 소개되었다. 식자들은 근심과 탄식과 분노를 금치 못했다. 누군가는 “한결같이 잔혹성에 의한 쇼킹도”로 극장 가를 석권한 이 “국적도 고증도 없는 검객물”의 홍수를 한탄했으며, 누군가는 “관객들의 양식을 뒤집어 보게끔” 할만한 것이라고 아연실색했다. 누군가는 “한국 배우가 중국식 칼장난이나 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며 “우리의 얼을 모독하는 무의미한 상행위”에 불과하다고 분노하였다. 요컨대 이 영화들은 도저한 내셔널 시네마의 담론 내에서 긍정되기 쉽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너무 폭력적이라는 점에서 문제적이었다.(덧붙이자면 홍콩영화의 폭력성에 대한 이 식자들의 우환은 1990년대 초까지 줄기차게 반복될 터이다.) 1968년의 영화 <쌍용검>은 이 영화의 원작인 『정협지』까지를 포함하여 말하자면 ‘무협’이 어떻게 한국의 남성 하위문화에 기입되고 있는지, 한국영화에 도착한 트랜스내셔널한 실천의 양상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사례이다. 먼저 김광주의 『정협지』. 김광주가 대만 작가 위지문(尉遲文)의 동시기 소설 『검해고홍 劍海孤鴻』을 번안한 이 소설은 1961년 경향신문에 연재된 이래 이 신문의 지가를 올렸으며 1963년 신태양사에서 출판되어 당대의 베스트셀러로 자리잡았다. 소설가이자 루쉰의 한국어 번역자였던 김광주가 어떻게 무협소설을 번안해오고 있는지 그 구체적 경위까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무협 장르가 가지고 있는 대중적 파급력에 그 누구보다 민감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김광주는 1920년대 중후반 상하이 문예비평계의 주류에서 활동하였다. 이 시기 상하이는 지난 글에서 다뤘던 바, 무협이 대중문화의 자원으로서 등장한 바로 그 시공간이기도 하다. 쇼브라더스가 그러한 것처럼(이 영화사의 전신인 천일영화사는 1920년대 후반 무협영화를 양산했던 상하이의 주요 프로덕션 중 하나였다) 김광주 또한 이 시기 무협에 대한 대중의 열광, 그 매혹의 한 가운데를 통과해갔다. 즉, 그는 이 장르의 효용성을 그 누구보다도 실감했던 자이다. 『정협지』가 누린 인기를 염두에 둔다면 무협영화의 저 붐 속에서 이 텍스트가 재빨리 불려져 나온 것은 일견 당연해 보인다. 실제로 『정협지』의 영화화를 둘러싼 영화사들 간의 치열한 경합이 벌어졌다. 한국영화사의 이재명과 제일영화사의 홍성칠이 영화화 판권을 둘러싼 공방을 벌였는데, 한국의 김광주와 대만의 위지문, 한국 내 에이전트, 친우 등이 복잡하게 얽힌 이 공방은 흐지부지되었지만 그 와중에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제일영화사였다. 이 영화사는 홍콩의 옥련영화사와 손을 잡고 <쌍용검>과 또 한편의 김광주의 번안 무협소설 『비호』의 동명영화를 동시제작하였다. 이 영화들은 검술영화 열풍으로 달아오른 자국 시장 뿐 아니라 동남아 시장에도 예상대로 어필 가능하였다. 제일영화사는 1969년 한해에만 네 편의 합작 무협영화를 만들었으며, 이 해에 이 영화사의 수출액은 30만불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었다. 1968년의 전체 한국영화 수출액이 8만불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숫자의 크기가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는지 짐작 가능하리라.(1969년의 한 영화잡지 기사는 대종상에 올해의 수출상이 있다면 이 영화사가 받아야 할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 사례는 1970년대 횡행하게 될 한국과 홍콩과 대만과 여타 동남아시아 영세 영화제작자들의 합종연횡이라고 할만한 소위 ‘합작’의 계기들이 어떤 식으로 등장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 외화수입 쿼터라는 정책이 마련해놓은 구조, 정기적으로 가해지는 홍콩산 무협영화의 수입규제 하에서 자국 영화로 카운트될 수 있는 합작은 충분히 선호될 만한 것이었다. 종종 그것이 소위 ‘위장합작’의 형태였다고 하더라도. 어쨌건 이제 막 이런 영화들에 호응하는 관객집단이 발견되었으며, 변두리 싸구려 극장에서 환호하는 이들을 통해 무협은 한국 대중문화의 이디엄으로 화려하게 등극할 수 있었다. 무협이란 그리 오래된 단어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단어는 동아시아 근대의 산물이다. 무(武)에 협(俠)이라는 오래된 개념을 조합시킨 최초의 인물은 일본의 초기 모험소설가인 오시카와 슌로로 알려져 있다. 오시카와 슌로는 1903년 『무협의 일본』이라는 소설을 발표하였고, 『무협세계』라는 소년잡지를 만들었다. 이 열렬한 ‘군인칙유’의 신봉자는 무(武)와 이미 무를 포함하고 있는 협(俠)을 겹쳐놓음으로써 근대 일본의 무력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담아내고자 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일본 내에서 정착되지 못했으며, 일본의 중국인 유학생들에 의해 중국으로 전파되어간 이래 전술한 것처럼 1920년대 중반 상하이라는 장소에서 드디어 강력한 대중문화의 이디엄으로 기입되었다. 일본에서 이 단어는 1970년대 이전까지 거의 쓰이지 않았다. 왜 이 조어는 일본이 아닌 근대 중국에서 정착할 수 있었는가? 무가 말 그대로 무력을 뜻하는 것이라면, 협은 이보다 좀더 복잡한 정의를 필요로 한다. 이 오래된 개념은 한비자에 의해 가장 처음 정식화되었다. 그에 따르면 협(俠)은 무로써 禁(法)을 범하는 것이다(俠以武犯禁). 법가 한비자에게 이 개념은 두 가지 점에서 부정적인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협객이란 현존하는 법질서를 깨고 자신들만의 룰로 움직이는 도당의 무리이기 때문에 그렇다(『수호지』의 양산박을 떠올려보라). 이 개념에 의(義)를 개입시킴으로써 정치적 의제로 이동시켜온 것은 사마천이었다. 사마천은 「유협열전」에서 “무로써 법을 범하고 권위를 무시하지만 언신행과(言信行果)의 행동규범에 입각하여 약자와 액곤(厄困)한 자를 도와줌에 있어서는 자신의 생사를 돌보지 않는’ 자의 속성으로 이를 정의내림으로써 협을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개념으로 전화시키고자 했다.(『사기』) 그러나 유협의 유(游)와 자객의 객(客)이라는 명칭이 이미 보여주듯 시스템 바깥의 행위자들에 의한 시스템의 파괴라는 의미에서 여전히 협은 잠재적으로 위험한 개념이다. 즉, 현존 법질서를 초과하는 폭력으로서 협에는 언제나 법정립적 폭력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제국의 패권적 질서를 위한 강력한 무력을 상정하는 일본이 아닌 반(半)식민지 중국에서 힘(武)을 통해 이 상황을 깰 수 있는 협에 대한 상상은 보다 적극적으로 개진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무협의 핵심 공간은 현실 세계의 법과 무관한 강호-무림의 세계이다. 이 상상적 세계란 1920년대 근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장이었던 중국에서 발견된 판타지 공간에 다름 아닌 것이다. 아마도 협이 내포하고 있는 어떠 시스템의 파괴, 폭력의 가능성이야말로 무협영화가 1960년대 홍콩에서 홍콩영화 최초의 영컬처로서 재등장하고, 나아가 한국과 같은 장소에서 이제 막 하나의 관객층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젊은 하위계층 남성들에게 그토록 어필할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또한 이 지점이야말로 이 영화들에 쏟아졌던 저 식자들의 우환의 진짜 이유인지도 모른다. 홍콩에서 무협영화는 그 장르적 후신으로 1970년대 초 맨몸의 싸우는 영화, 이후 ‘쿵푸영화’로 이름붙여질 영화로 옮겨갔다. 홍콩영화의 장르 변동과 민감하게 연루되어 있던 한국의 어떤 영화들은 검술영화에서 권격영화, 당시 용어로는 ‘태권도 영화’로 이름붙여질 장르로 넘어갔다. 이제 유신 시대 한국의 변두리 극장에서는 정책과 장사꾼들과 특정 관객들의 욕망이 단단하게 엉킨 채로 소위 위장합작의 복마전이 펼쳐질 터이다. 다음에는 여기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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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후반 일군의 조선인 영화인들이 상하이에서 그들의 영화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한국영화사에서 상해파 영화인이라고 명명될 정기탁 , 김일송(상하이 활동 당시 이름은 정일송), 이경손 , 전창근 등이 그들인데, 특히 그 중심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정기탁은 필모그래피만 보더라도 놀랍도록 정력적인 활동을 펼쳤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928년 상하이의 주요 영화사 중 하나였던 대중화백합(大中華百合影片公司)에서 연출한 <애국혼 愛國魂>을 통해 성공적으로 상하이 영화계에 데뷔했으며(이 영화에는 김일송이 주요 배역 중 하나를 맡고 있으고 전창근 또한 출연 및 각본에 참여하고 있다), 같은 해에만 < 삼웅탈미 三雄奪美>, < 화굴강도 火窟鋼刀>까지 세 편의 영화에 감독이자 출연자로 이름을 올렸다. 1929년에는 대중화백합에서 만든 9편의 영화에 감독 겸 배우로 관여하였고, 대중화백합을 포함한 영화사들의 트러스트로 이루어진 연화영화사(聯華影業公司)가 제작한 영화 <출로 出路>(1933)를 감독했으며, 1934년에 마찬가지로 연화에서 완성한 완령옥 주연의 < 상해여 잘 있거라 ! 再會吧, 上海!>를 끝으로 상하이 영화계를 떠났다.(이 시기 만들어진 영화 중 유일하게 필름이 남아있는 <상해여 잘 있거라!>는 영상자료원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정기탁은 1934년 조선으로 돌아왔으나 1937년에 죽었다.) 그런데 이 이름을 한국영화사 안에서 호명해오는 데에는 적잖은 난감함이 따라붙는 게 사실이다. 정기탁은 상하이 영화계의 주류에서 활동하였다. 1928년의 <애국혼>부터 1934년의 <상해여 잘 있거라!>까지 그의 필모그래피를 채우는 영화들은 이 영화들이 제작된 대중화백합이나 연화가 중국영화사에서 차지하는 주류적 위치만큼이나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의 상해영화사의 전형적인 조류와 일치하고 있다. 즉, 1928-1929년의 그의 영화들은 1920년대 후반 상하이라는 도시에서 형성된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장르영화의 모색과 함께 하고 있으며, 이후 연화에서 완성한 두 편의 영화 <출로>와 <상해여 잘 있거라>는 1930년대 좌익 멜로드라마들을 통해 ‘중국영화의 첫 번째 황금기’를 이끌었던 이 영화사의 전형적인 영화 패턴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실천들은 중국영화사의 한 장 속에 자리매김 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내셔널 시네마적 귀속이란, 그 네이션의 성립의 전후까지를 생각한다면 그 자체로 이미 얼마나 사후적인 것인가? 월경자들의 실천이 ‘경계’의 이쪽과 저쪽에서 형성되는 사후적 담론 내로 수렴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게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후적 귀속의 문제가 아니라 이 실천이 이루어졌던 바로 그 시간대 안에서 사유해본다면 어떨까? 정기탁이 대중화백합에서 출연작까지 포함하여 무려 12편의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는 1928-29년, 상하이라는 시공간은 특별히 흥미롭다. 1919년 9월 이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선포된 장소, 3.1운동과 5.4운동 이후 반제의 기치 아래 한중연대가 그 어느 때보다도 미만했었던 시간. 나아가 열강들의 조계지이자 1차대전 이후 이 지역 일대에서 가장 활발한 산업과 무역의 거점지로서 1925년의 5.30 운동에서 시작된 반제 계급투쟁으로서의 ‘혁명’의 열기가 뜨거웠던 장소, 1927년 국민당의 우경화와 장제스의 4.12 쿠데타로 이 ‘혁명’이 폭력적으로 좌절된 시간. 또한 1928년은 이후 이 지역 일대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대중문화적 자원으로 기능할 어떤 장르영화가 등장한 해이기도 하다. 이해 <불타는 홍련사 火燒紅蓮寺>(명성영화사)의 성공으로 불붙은 무협영화 붐은 거의 이상 현상이라고 할만한 사태를 불러일으켰으며, 관객들은 홀린듯 이 새로운 장르영화가 보여주는 운동과 시각적 쾌감에 사로잡혔다. 붐이 피크에 달한 1929년 한해에만 85편이 제작된 무협영화는 1928년에서 1931년 사이 무려 250여 편이 만들어졌다. 이 조류의 한복판을 통과해갔던 동시대인의 증언처럼 말 그대로 ‘미친 물결(狂濤)’가 같았던 이 흐름에서 자유로운 곳은 거의 없었으나 정기탁이 몸담고 있던 대중화백합역시 여기에 매우 적극적으로 호응하던 영화사였다. 1928년에서 29년까지 약 1년 반 동안 이 영화사에서 만들어진 30편의 영화 중 거의 절반이 무협영화였으며, 같은 기간 정기탁이 대중화백합에서 감독 혹은 배우로서 관여했던 11편의 영화 중 다수가 이 장르와 관련되어 있었다. 이 영화들에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해왔던 자들은 상하이와 남양 일대의 공장과 농장의 노동자들, ‘농공(農工) 군중’이라고 불려졌던 자들이었다. 말하자면 무협영화는 이제 막 형성된 대규모의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어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지역 최초의 액션영화였다. 1920년대 후반의 상하이, ‘농공 군중’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끌어모은 최초의 액션영화 장르로서의 무협영화, 이 장르와 연계되어 있는 조선인 망명자의 영화적 실천. 다시 한번 언급컨대, 이 점들을 잇는 첫 장면에 들어서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애국혼>이다. 상하이 영화계에서의 정기탁의 성공적인 안착을 가능하게 한 이 영화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의 거사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협영화 장르가 이 지역 일대에서, 나아가 화교 문화권과 상관없는 장소(이를테면 1960년대 후반 이후의 한국과 같은 지역을 상기해보자)에 끼친 광범위한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이 순간은 어떤 동아시아 액션영화의 원형이 당도한 기원의 시간이라고 할만하다. 그 첫머리에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라는 행위에 집중한 안중근 서사가 동시도착하고 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전통적인 문의 강조로부터 무로의 이동이 20세기 초 이 지역에서 사유되었던 근대적 국가 성립에의 열정과 이를 떠받치는 근대적 신체의 문제와 관련있다면(근대국가라는 새로운 질서를 상상하는 ‘상무(尙武)’) ‘법을 범하는 무’로서의 협은 반식민지 상태의 중국과 식민지 조선에서 상상되었던 아나키한 힘에의 열정과 관련있다. 동시에 수중의 폭력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자, 협객은 <애국혼>에서 국가 간 교전이라는 주권적 행위를 수행하는 자와 겹쳐진다. 먼저 안중근에 대해 말하자면, 중국에서 안중근은 1909년의 그의 거사 직후부터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었다. 일찍이 량치차오가 이 거사 직후 쓰여진 「추풍단등곡 秋風斷藤曲」(1909)에서 그를 형가와 예양에 비견한 이래, 그에 관한 시문과 평전이 꾸준히 등장했으며 1919년 5.4운동 시기에 안중근 의거를 소재로 다룬 극은 반제반봉건 투쟁의 중요한 수단으로서 중국 각지의 학생연합회에서 빈번히 상연되었던 레파토리 중 하나였다.(안중근의 서사는 1937년의 중일전쟁 발발 이후의 항일 선전대에서도 중요한 레파토리 중 하나였다.) 이 이름이 지닌 반제 항일의 아이콘적 지위를 생각한다면 정기탁이 대중화백합에서의 그의 첫 번째 영화 프로젝트로 안중근 스토리를 선택한 것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정기탁의 이 상하이에서의 첫 영화는 가히 성공적이라고 할만했다. “군사를 날줄로 삼고, 로맨스를 씨줄로 삼았으며, 의기 충만한 격앙감”이 있는 “고상한 스토리”로 소개된 <애국혼>은 근래 ‘국산영화’ 중 사상적으로 가장 충만한 영화(《申报》 1928.11.11.)라는 극찬을 이끌어냈다. 이 영화의 필름은 남아있지 않지만, 공개 당시 쓰여진 동명의 영희(影戲)소설 碧梧, 《爱國魂》(《電影月報》1928年 第7期). 이 자료는 영상자료원에 소장되어 있다. 을 통해 면모를 확인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위국(魏國)의 정치가 등박문(縢溥文)은 여국(黎國)의 간신 여용(黎庸)을 매수하여 이 나라를 침탈하고자 한다. 어느날 이들의 음모를 알게 된 샤딩춘(夏鼎醇)이 안영진(晏永鎭)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영진은 등박문을 암살하기 위해 그에게 폭탄을 던지나 실패하고 등박문의 수하에 의해 횃불로 불태워져 죽임을 당한다. 한편 영진의 아들 안중권(晏仲權)은 누이동생을 괴롭히는 위국 병사를 때려죽이고 도망치던 중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다. 몰래 상하이로 건너간 중권은 그곳에서 ‘중국인 혁명가’ 주한룽(朱漢龍)을 만나 의기투합하고 한룽의 누이동생 아이란(愛蘭)과 사랑에 빠진다. 중권과 한룽은 서울로 잠입하여 거사를 치루려고 하나, 호텔에서 등박문을 향해 겨눈 중권의 총구는 빗나가고 만다. 중권과 한룽, 샤딩춘과 박재명은 다시 등박문의 암살계획을 세우지만, 여관 하인의 밀고로 들이닥친 위국 병사들에 의해 중권은 체포되고 샤딩춘은 죽음을 맞는다. 하인의 회개로 힘을 합쳐 중권을 감옥에서 구출해내는 한룽과 박재명. 그 와중에 하인은 죽지만 중권은 무사히 탈출한다. 중권, 한룽, 박재명은 두만강을 건너 장일성(張一成)의 집에 몸을 의탁하고 여기에 중권의 동생 옥실 또한 합류한다. 뒤따라온 위국 군대와의 전투에서 장일성이 죽고 자신의 어린 아들을 중권에게 부탁한다. 남은 자들은 홍콩으로 떠나 류동샤(劉冬夏)의 집에서 후일을 도모하고, 와중에 옥실과 한룽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한편 중권을 그리워하던 아이란은 그리움으로 병들어 죽는다. 두만강 근처의 의용군에 합류한 중권, 한룽, 재명, 옥실. 어느날 적의 상황을 정탐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 한룽과 재명이 위군 병사에게 체포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재명은 그 자리에서 즉결처분으로 목숨을 잃고, 고문으로 양쪽 눈을 잃은 한룽은 중권에 의해 구출된다. 류동샤로부터 등박문이 하얼빈에 도착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중권은 한룽에게 옥실을 부탁하고, 홀몸으로 하얼빈으로 떠난다. 드디어 등박문의 저격은 성공하고, 체포된 중권은 늠름한 모습으로 사형당한다. 등박문(縢溥文), 여용(黎庸), 안중권(晏仲權) 등 한자음의 종족성을 통해 희자(戲字)를 만들어내고 있는 이 고유명사들로 이루어진 세계의 이야기는 1920년대 상하이라는 장소에서 가능했던, 피식민지인과 반(半)식민지인이 항일과 구국이라는 공통의 가치로 어떻게 연대할 수 있는가에 관한 가장 강렬한 상상태를 보여준다. 한국 혁명가와 중국 혁명가는 거듭되는 전투와 체포, 탈출, 다시 전투를 통해 피를 나누고, 급기야 한국 혁명가가 중국 혁명가에게 자신의 동생을 부탁할 때 실제로 ‘형제’가 된다. <애국혼>은 스토리만 놓고 보자면 일단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라는 사건을 제외하고는 안중근의 실제 이야기와 그다지 상관없어 보인다. 정기탁은 안중근 스토리를 제재로 삼았지만 그의 전기영화를 만들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이 이야기를 오직 암살 시도, 실패, 탈출, 추적, 전투로 이루어진 활극영화로서 다루었다. 이 이야기가 지극히 흥미로워지는 것은 영화가 시작되는 저 순간이 어떤 전사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국혼>은 명백히 한국영화의 기원적 장면이라고 할만한 것을 반복하고 있다. 이 순간 정기탁이 염두에 두었던 것은 분명 1927년 조선영화 최대의 히트작 < 아리랑 >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리랑>을 염두에 놓고 보자면, <애국혼>은 마치 <아리랑> 이후, 혹은 <아리랑>의 저 출구 없는 결말 너머를 상상하는 소망처럼 보인다. <아리랑>의 영진처럼 <애국혼>의 중권 역시 여동생을 폭행하려는 자를 때려죽인다. 그러나 영진이 일본 순사에게 묶여 고개를 넘어가며 그저 아리랑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면 일본 ‘군인’을 때려죽인 중권은 국경을 넘어 상하이로 건너간다. <애국혼>이 반복하고 있는 <아리랑>의 이 장면은 왜 그토록 강렬한 것인가? 이 장면이 보여주는 바는 세 가지이다. 먼저 ‘그’는 자신의 수중의 폭력을 행사할 수 있을만큼의 힘을 소유하고 있다.(낫을 들어 죽인다) 둘째, 그러나 그 폭력이 발현되는 순간 그는 법에 포박당한다.(순사에게 잡혀간다) 셋째, 이 법은 당연한 말이지만 식민지 권력이 이곳에 강제한 것이다. 조선이라는 내부가 아닌 상하이라는 외부의 장소로 탈주한 <애국혼>은 바로 이 장면을 반복하면서 사적 폭력을 공적 폭력으로 옮겨온다. 즉 결투는 이제 전투로 옮겨갈 것이다. 식민과 수난의 땅으로서의 조선과 주권과 주권의 교전이 일어나는 장소로의 중국 혹은 상하이. 동시에 <애국혼>의 시작 지점이 구축해놓은 등박문을 죽이려다가 죽임을 당한 아버지 안영진의 죽음이라는 사건(이것은 안중근의 전기적 사실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은 등박문 암살이라는 중권의 행위를 극적으로 만들어주는 동시에 아버지의 복수라는 사적인 원념과 나라를 구한다는 공적인 가치를 일체화시키는(게다가 이 아버지 스스로가 ‘구국’을 위해 일어섰다가 죽임을 당한 자임을 상기해보라) 한편 이 영화를 동시기의 유행장르, 무협영화의 장르적 특성으로 밀어넣는다. 무협 장르의 내러티브적 핵심은 젊은 남자(혹은 여자)가 행하는 복수에 있다. 그 혹은 그녀는 스승, 아버지, 주군의 원한을 갚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다. 복수는 행위의 근본적 추동 요인이다. 그런데 복수는 최선의 경우라 하더라도 (종종 이들은 충과 효라는 이 세계의 ‘보편적’ 윤리를 끌어들이지만) 개인의 개인에 대한 응징, 사적 폭력의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애국혼>은 항일과 구국이라는 대의를 아버지의 복수라는 사적 원념과 일치시킴으로써 한편으로 흥행 장르의 규약을 공유하면서 이를 넘어서고자 한다. 안중근의 실제 이야기로부터 영감 정도를 받아 자유로운 각색이 구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중권이 의용군에 합류한 이후 등박문의 암살에 성공한다는 사실에 부합하는 설정을 고수하고 있는 지점은 새삼 의미심장해 보인다. 이 설정은 중권의 행위가 도당적 행위가 아닌 군사적 행위임을 역설하는 것으로 보인다. “군사를 날줄로 삼고, 로맨스를 씨줄로 삼았”다는 이 영화의 평가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 영화는 이 순간 군사영화, 다시 말해 전쟁영화이다. <애국혼>은 아버지의 복수를 행하는 아들이라는 무협영화와 구국의 항전이라는 전쟁영화를 겹쳐놓음으로써 식민지/반식민지의 경험 위에서 형성된 동아시아 액션영화의 하나의 원형적 틀을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야말로 이제 막 시작된 무협영화의 컨벤션과 전쟁영화를 뒤섞고 있는 <애국혼>을 좀더 적극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지점이 아닐까? <애국혼>은 안중근이라는 실제 인물의 표상, 반제와 항일이라는 반(半)식민지 중국과 식민지 한국의 공통적 이념 하에 협과 의리에 기반한 복수 서사를 전개해나간다. 그럼으로 이 반제 ‘액션영화’에는 무림 혹은 강호라는 판타지 공간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근대 국제 정치의 교전/전쟁의 문제와 혁명 혹은 반란의 상상인 ‘협’의 문제가 교직된 <애국혼>은 소위 동아시아 액션영화의 대표 장르로서의 ‘무협영화’를 통해 3.1운동과 5.4 운동 후의 한중연대의 정치적 움직임과 계급투쟁으로서의 5.30 운동과 동아시아적 액션이라는 문화적 과제가 어떻게 교직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투명한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애국혼>이 절반쯤 기대고 있던 무협영화는 1931년 이후 적어도 상하이의 주류 영화 산업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국민당 정부는 상하이를 비롯해 전국적 규모로 이 장르의 제작을 전면 금지하였다. 이후 중국 본토에서 거의 상영될 수 없었던 무협영화의 제2차 붐이라고 할만한 것은 1960년대 중반 홍콩에서, 정확히 첫번째의 붐을 이끌고 목격했던 자들에 의해 가능해졌다. 1920년대 말 무협영화붐의 중요 에이전시였던 천일(天一)영화사의 후신인 쇼브라더스는 1965년 <강호기협 江湖奇俠>(서증굉)을 시작으로 ‘무협신세기’를 선언하며 이 장르를 ‘모던’하게 환골탈태시키고자 하였다. 쇼브라더스의 기획은 호금전의 <대취협 大醉俠>(1966)과 홍콩 영화 최초의 백만달러(홍콩달러)의 수익을 거둬들인 장철의 <독비도 獨臂刀>(1967)로 성공적으로 안착하였다. 그리고 알다시피 이 영화들은 이제 남한으로 구획된 대한민국의 영화시장에 적극적으로 어필한 최초의 무협영화가 되었으며, 이후 이곳의 남성 하위문화에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는 대중문화의 자원으로 기입되었다. 다음 시간에는 바로 이 기입의 순간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 글의 내용 일부는 필자의 「협(俠)과 액션, 동아시아 액션영화의 역사적 기원 - 정기탁의 〈애국혼〉과 상하이 무협영화」(홍지영 공저)를 가필 수정한 것임을 밝힌다.) (관련글) 1. 비행기의 시선, 무정한 시선 - 2021.04.30. 2. 액션영화의 한 기원, 안중근과 무협 - 2021.05.31. 3. '외팔이'의 도래, 1960년대 후반의 무협붐 - 2021.06.30. 4. 태권도 영화- 챠리 셀과 바비 김, 이국적 이름들의 행렬에 관하여 - 2021.07.23. 5. 이소룡적 신체 - 2021.08.24. 6. 김두한과 협객물, 유신 시대의 가장 안전한 쾌락 - 2021.10.01. 7. 브루스플로이테이션과 한국영화 - 2021.11.01. 8. 춤추는 괴수, 1967의 '트위스트' 용가리 - 2021.12.02. 9. 우리는 왜 그때... - 2021.12.24. 10. 용팔이, 1970년대의 과잉과 잉여 - 2022.02.24. 11. 1970년대식 섹스와 폭력, 여감방 영화와 <여수 407호> - 2022.03.22. 12. <삼국대협>, '트랜스내셔널한 어떤 고립에 대하여 - 2022.04.20. 13. '빈곤한 이미지'의 여행- <정도>/<당수태권도>와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 - 2022.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