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사
- 감독
- 고영남
- 제작년도
- 1975
- 출연
- 원영, 오경아, 방수일, 최삼, 최병철, 추석양, 조용수, 심상현, 유종근, 최재호, 권일수, 한명환, 장영환, 장근호, 박용팔, 조덕성, 김승남, 추봉, 최일, 박달, 이영호, 이백, 임성포, 황태수, 이경우, 장동빈, 김지혜, 바비 킴, 김석훈, 강민호, 장일식, 허장강, 최성
홍성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 < 혼자 사는 사람들 >의 제목과 영화 전반부를 보면서 나는 이 영화가 1인 가구가 많아진 시대의 외로움과 소통의 어려움을 다룬 영화라고 판단했다. 홍보에서도 ‘저마다 짊어진 1인분의 외로움’이라는 문구를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함께 하는 삶이나 진정한 소통을 강조하는 결론으로 향하게 될 것으로 어림짐작 했다. 그러나 나의 섣부른 추정은 들어맞지 않았다. 혼자 살기와 고독사가 주요 소재이긴 하나 이 영화가 보다 중점을 둔 질문과 답은 ‘우리는 어떻게 진실로 혼자 존재할 수 있는가’, ‘우리 사회는 각자의 실존을 감당할 환경을 조성하고 있는가’이다. 영화에서 주인공을 비롯한 거의 모든 인물이 혼자 살고, 혼자 일하고, 혼자 밥 먹고, 심지어는 혼자 죽는다. 그러나 영화는 혼자 무언가를 하는 것과 혼자 존재하는 것은 다르다고 말한다. 혼자가 편한 주인공 진아(공승연)는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타인과의 교류를 거부하며 벽을 친다. 그런 그에게 원치 않게 자꾸 말을 거는 이들이 생겨난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혼자가 된 아버지는 엄마 휴대폰으로 자꾸 전화를 걸어오고, 옆집 남자는 아파트 복도에서 담배를 피며 쓸데없이 말을 걸어온다. 게다가 1:1 교육을 맡게 된 신입사원 수진(정다은)은 사수인 진아에게 잘 보이기 위해 선물을 주고 밥까지 같이 먹으려 한다. 진아는 아이러니하게도 하루 종일 전혀 모르는 타인과 소통해야하는 카드회사 콜센터 직원이다. 그는 다양한 진상 고객들을 대응한다. 다짜고짜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는 사람들부터 사용내역을 하나하나 읽어달라는 사람, 시간여행에 필요한 카드 발급을 요청하는 사람까지. 매달 최고의 콜 수를 기록하는 우수사원 진아는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고 고객이 원하는 반응을 해주며 매뉴얼대로 고객의 요구를 ‘친절’하게 ‘처리’한다. 감정과 인격까지 모든 것이 평가되고 수치화되는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해선 감정을 가진 존재가 되어선 안 된다. 감정은 ‘나’로부터 분리되어있는 통제하고 관리해야할 대상이다. 그건 전화를 건 고객도 마찬가지다. 진아에게 전화기 너머의 상대방은 감정과 인격을 가진 존재라기보다는 처리해야할 ‘건수’에 불과하다. 존재는 상호적이다. 그들을 하나의 인간으로 여긴다면 진아 스스로의 존재도 지각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는 순간 고객들의 무례와 폭력이 진아를 상처 입힐 수 있다. 언어 또한 의미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무언가가 오고가고 소통을 하지만 그들은 서로의 말이 정말로 어떤 의미(혹은 의도)를 갖는지 관심을 갖거나 질문하지 않는다. 콜센터 직원들은 고객에게 수도 없이 ‘죄송하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으로부터도 거리를 두면서 진아는 아슬아슬하게 혼자의 일상을 버텨낸다. 그러나 옆집 남자가 집에서 혼자 죽은 지 일주일 만에 발견되면서 자기에게 말을 건 남자가 유령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엄마가 죽은 후에도 자기 삶을 누리며 살아가는 아버지에 화가 나고, 신입사원 수진이 그들의 노동에 질문을 던지며 진아의 일상에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특히 수진은 진아와 달리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도움을 적극적으로 요청하고,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죄송하다’고 해야 하는지 묻는다. 수진은 또한 매번 전화를 걸어 시간여행을 위한 카드를 발급받을 수 없냐고 묻는 고객에게 ‘어느 시점으로 그리고 왜 시간여행을 하려 하냐’는 질문을 던진다. 타자에 대한 호기심은 그 존재를 인정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나 자신과 타인의 존재를 상실하지 않은 수진은 고객 대응에 능숙해질 수 없다. 사수인 진아와 회사 모두에게서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한 수진은 결국 회사를 그만둔다. 진아는 혼자 있는 것이 편하고 그 상태를 극단적으로 선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진아가 혼자 있었던 적은 없다. 진아는 혼자 있으면서도 늘 다른 이들의 흔적을 옆에 둔다. 길을 걸으면서도 휴대폰 영상을 보고, 밥 먹을 때도 먹방을 틀어 놓고, 텔레비전 소리 없이는 잠들지도 못한다. 고독사한 옆집 남자가 남긴 재떨이 자국과 죽기 직전 CCTV에 기록된 엄마의 영상에도 계속 눈길을 준다. 이런 모습을 보면 진아는 오히려 혼자 있기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말로 어떤 소음도 없이 혼자 있게 되는 순간 자기의 감정과 상태를 대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진아는 수진이 그만둔 후 환영과 환청이 심해져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지만, 영화는 진아가 누군가의 도움을 받거나 사적인 특별한 관계를 맺는 대안으로 향하지 않는다. 진아는 수진에게 좀 더 신경써줬어야 했다고 타박하는 팀장(김해나)에게 팀장이 사수일 때 자신에게 대했던 태도를 그대로 수진에게 돌려줬을 뿐이라고 한다. 상처받고 손해 보는 일이 싫어 타인의 접근을 꺼리는 것은 진아만이 아니다. 그 조직의 체제와 감정노동의 속성이다. 진아는 의미 없는 공감과 반응을 그만두어야 할 때가 왔음을 깨닫는다. 진아는 사람들이 자신을 엄연한 한 존재로 인정하고 잘못한 일에 대해 진실로 사과하기를 바란다. 바림이 나 가족을 버렸다가 나이 들어서 집에 돌아온 무책임한 아버지와 감정을 배제해야한다고 몸소 가르친 팀장에게 감정과 인격을 가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진정한 응답을 요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과를 받아내는 것은 그녀가 거기 단독자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지각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진아는 역으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선 타자의 감정과 인격을 인정하는 것이 수반되어야함을 깨닫는다. 나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선 타인의 존재를 받아들여야 한다. 진아는 수진에게 전화를 걸어 사수로서, 같은 인간으로서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그리고 자신 역시 외로움을 타는 약한 존재이며 혼자 밥 먹고 혼자 지내는 것을 잘하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전화기 너머 목소리로만 들리던 수진이 그제야 화면에 역쇼트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 존재의 역쇼트야말로 이 영화가 목표했던 것이다. 서로가 감정과 인격을 가진 인간임을 인정하고 그들은 모두 당연히 상처받고 약할 수 있음을 수용하고 그럼으로써 각자의 존재를 대면하게 된다. 약함은 존재를 위한 조건이다. 홀로 존재하기 위해선 타인의 존재를 받아들여한다. 나만 이 세계에 존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진아는 자신의 존재와 끊임없이 거리두기하고 분리해 내면서 스스로가 외로움을 타는 유령처럼 되어버렸다. 그래서 옆집 남자의 유령과 대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상처받은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수진을 한 독립된 존재로 지각하며 그에게 사과한 후 진아는 처음으로 텔레비전이나 온라인 스트리밍 영상을 틀어놓지 않고 잠에 든다. 진아는 드디어 홀로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관련글) 1. 소진과 이상한 기운 - <아워 바디>(2018), 2021.04.23. 2. 의심의 씨앗과 취약한 영웅들 - <도희야>(2013), 2021.05.21. 3. 여름밤 초록색 전구불빛이 가만히 당신을 응시할 때 - <남매의 여름밤>(2019), 2021.06.18. 4. 당신의 안녕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 <내가 죽던 날>(2019), 2021.07.16. 5. 피해와 가해의 알레고리 - <소리도 없이>(2019), 2021.08.13. 6. 돌봄의 정동 - <우리집>(2019), 2021.09.10. 7. 유년과 재난 - <벌새>(2018), 2021.10.22. 8. 목격의 시간 - <휴가>(2020), 2021.11.19. 9. 한평생 이야깃거리가 된 삶을 찢고 나온 웃음소리 -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2019), 2021.12.17. 10. 이름을 불러 닿는 시간 - <윤희에게>(2019), 2022.01.14. 11. '혼자'의 정동 - <혼자 사는 사람들>(2021), 2022.03.15. 12. 억압의 체제와 닫혀있는 여자들의 세계 - <궁녀>(2007), 2022.04.13. 13. 소원성취, 환상, 실재 사이의 어딘가에서 - <팬지와 담쟁이>(2000), 2022.05.18. 14. 몫과 값 그리고 경계물 - <82년생 김지영>(2019), 2022.06.24. 15. 실종의 감각과 징크스의 미학 - <오마주>(2022), 2022.07.21. 16. 레즈비언 편집술, 혹은 시계가 된 여자 - <연애소설>(2002), 2022.08.19. 17. 탐정-엄마의 각성하는 모성 - <비밀은 없다>(2016), 2022.09.16. 18. 시간과 정념의 지층을 찾아서 - <누에치던 방>(2018), 2022.11.04. 19. More or Less - <모어>(2021), 2022.12.09. 20. 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 <안나-감독판>(2022), 2023.01.09. 21. 우리에겐 따뜻한 국물과 유머가 필요하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2023.02.07. 22. 아직 끝나지 않은 - <미망인>(1955), 2023.03.10.
등록되지 못한 죽음, <아무도 모른다> 내가 본 첫 번째 고레에다 히로카즈(1962~)의 영화는 < 아무도 모른다 >(2004) 이다. 그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그를 ‘연구’하기로 했다. 그는 보기 드문 ‘자기 현장’의 지식인이다. 나는 오키나와 미군기지 반대 운동을 계기로 처음 일본을 방문했다가 충격을 받았고, 지구상에서 가장 독특한 근대를 실현한 국가가 일본이라고 생각했다. 늘 보던 일본 영화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의 석학, 도미야마 이치로는 일본을 일본이라고 쓰지 않는다. ‘일본’이라고 쓴다. 일본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 글의 제목에 들어간 ‘포스트 자본주의와 일본’은 H. D. 하루투니언과 마사오 미요시가 엮은 유명한 일본 입문서(?) 『포스트모더니즘과 일본』을 바꾼 것이다. ‘일본’만큼 역설적인 공간도 드물 것이다. 그만큼 인문학 텍스트로는 최고라는 뜻이다. <아무도 모른다>. 열두 살 소년부터 막내까지, 네 남매는 돌아오지 않을 엄마를 기다린다. 엄마는 큰아들에게 말한다. “엄마는 행복하면 안 되니?” 이 장면을 본 사람들은 “어쩌면 저럴 수가……” 이런 생각을 하기 전에 금방 고레에다의 카메라 속으로 빠져든다. 사회 구조나 부모를 비난하기 전에, 아이들만의 삶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이 영화에서 내가 좋아하는 장면은 모두 아이들의 생존 방식과 관련이 있다. 길거리에서 돈을 줍는 것, 몰래 음식을 얻어먹는 것. 모두 딱히 탈법도 불법도 아니지만, 영원히 그렇게 살 수도 없고 자주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아이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며 자판기의 거스름돈 창구에 손을 넣어본다. 누군가 잊고 간 동전을 기대하면서. 영화를 본 후 나도 그들처럼 해 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다가 서울에서 몇 달 만에 딱 한 번, 500원을 횡재한 적이 있다. 아무도 모른다 일본에서 자판기 다음으로 많은 시설이 편의점인 듯하다. 편의점에서 직원이 유통 기간이 임박한 혹은 살짝 지난 먹을거리를 소년에게 주는 장면도 좋다. 일본어에서는 유통 기간을 ‘상미기한(賞味期限)’이라고 한다. 팔기 적당한 상품은 아니지만, 맛을 ‘즐기는데’는 큰 무리는 없다는……. 편의점 직원은 좋은 일을 하면서도, 아이를 쫓아내듯 빨리 가라고 손짓한다. 2017년 여름밤, 나는 교토 대학 근처를 산책하고 있었다. 맛있는 빵과 케이크를 잔뜩 들고서. 일본은 온 나라(?)가 맛있는 빵집으로 넘쳐나지만, 관광과 전통의 도시 교토는 특히 더 그렇다. 신호등이 바뀌는 동안 횡단보도에 서 있다가, 나랑 어느 소년 단 둘만이 거리의 행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다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 소년이 <아무로 모른다>의 주인공 배우 야기라 유야와 똑같이 생겼던 것이다. (그는 이 영화로 칸 영화제 역사상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탔지만, 중간고사 때문에 시상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고 한다.) 횡단보도의 그 소년은 도시락을 네 개쯤 들고 서 있었다. 흰 러닝셔츠, 마른 몸, 땀에 젖은 머리카락. 그런데 일본에서는 드물게 그가 들고 있던 물건은 비닐봉지 없이 낱개 그대로였다. 소년은 두 손에 도시락을 탑처럼 쌓아 턱으로 받치고 있었다. 나는 편하게 넣어 들고 가라고 종이봉투를 주었다. 그 소년도 <아무도 모른다>의 가장처럼 편의점에서 팔다 남은 음식을 자정 즈음에 얻어가는 길이었을까. 그는 내게 고맙다는 듯, 고개를 여러 번 꾸벅이며 뛰어갔다. <아무도 모른다>는 1988년 동경에서 발생한 ‘버림받은 네 남매’ 사건을 소재로 삼아 만들어졌다.(영화와 실화의 내용은 다르다고 한다.) 엄마는 각기 다른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네 명의 아이들을 두고 또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난다. 큰아이를 제외한 세 아이는 출생 신고가 되어 있지 않아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발견되기 이전까지 6개월 동안 아무도 모르는 그들만의 삶을 살아낸다. 서류 한 장이 인생을 좌우하는 극도로 관료적인 일본 사회에서 등록되지 않은 어린이의 죽음은 당시 전국을 충격에 빠뜨렸다고 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비행기를 보여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소년이 죽은 여동생을 공항 부근에 묻고 돌아오는 장면에 대해 소설가 김연수는 이렇게 썼다. “누구에게나 이뤄지지 못한 약속의 땅에 사랑하는 사람을 묻는 일이 한 번쯤은 찾아오리라……. 사랑하는 사람을 묻을 땅을 파느라 더러워진 옷, 아니 얼룩진 옷……. 옷이야 갈아입으면 되지만, 얼룩진 마음은 기억에서 잊혀질지언정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는다.” (『씨네21』, 934호) 태풍이 지나가고 가족 영화가 아니라… 고레에다의 영화들 - < 어느 가족(좀도둑 가족) >, < 세 번째 살인 >, < 태풍이 지나가고 >, < 바닷마을 다이어리 >, <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 < 하나(花よりもなほ) >, < 공기인형 >, < 걸어도 걸어도 >, <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 < 원더풀 라이프 >... 다 좋았다. ‘가족 영화’가 따로 있을 리 없지만, <어느 가족>이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걸어도 걸어도>는 가족이란 ‘이다’가 아니라 ‘된다’임을 잘 보여준다. 그의 모든 작품이 내게 위로가 된다. 고레에다의 영화는 치열하지만 고요하다. 나만의 감상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영화에서 언제나 죽음의 그림자를 느낀다. 그 그림자가 내 삶의 번잡스러움과 욕심, 고통을 잊게 한다. 삶이란 죽음이라는 영원하고도 편안한 잠(永眠)이 기다리는 행복한 시간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기대하지 않으면, 삶도 행복하지 않다. 죽음만이 희망이다. <좀도둑 가족(万引き家族)>의 우리 말 제목 <어느 가족>은 마음에 안 들 뿐만 아니라 아주 ‘틀린’ 번역이다. 이 영화는 가족 영화 중 하나라기보다는 <아무도 모른다>처럼 일본 사회를 그린다. 좀도둑질과 막노동, 연금으로 살아가는 일본인들의 모습이니, ‘좀도둑 가족’이 맞다. 2018년 칸 영화제에서 최고상에 해당하는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1997년 이마무라 쇼헤이의 < 우나기(うなぎ) > 이후 21년 만의 일이다. <좀도둑 가족>은 칸 외에도 유라시아 국제영화제, 뮌헨 국제영화제, 시드니 영화제, 멜버른 국제 영화제 등에서도 수상 혹은 후보에 올랐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것이다. 아마도 한국 사회라면, 감독은 한국 사회의 그 어떤 추악함을 그렸더라도 청와대에 초대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베 총리는 수상 소식에 침묵으로 일관하다가(못마땅해하다가) 뒤늦게 축하 전화를 하려 했으나, 감독은 아베의 축하를 거절했다(아베는 국제대회에서 자국을 빛낸 스포츠 스타나 예술가에게 축하 전화를 자주 해대는 정치인으로 유명하다). 아베에게 <좀도둑 가족>은 일본 사회의 그늘에 카메라를 들이댔을 뿐 아니라 천황제를 근간으로 한 전통적인 가족주의를 숭상하는 일본의 주류 정서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여겨졌으리라. 고레에다 또한 평소에 아베의 노선에 대해 ‘분명한 반대’ 입장을 표명해왔다. 어느 가족(좀도둑 가족) 나는 <좀도둑 가족>을 나의 선생님과 같이 보았고,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나누었다. 나 - 고레에다 영화는 거의 다 보았는데, 저는 그 가족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나, 가족이 없어서 외로운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다 지긋지긋. 사람도, 가족도 모두요. 선생님 - 어제 나는 일본에서 주변부 삶이 영화 화면에 담겨지는 거. 그것을 행하는 감독이 좋았다. 영화로는 아버지가 되는 법이 훨씬 좋지……. 영화는 가족 영화라기보다는……. 나 – 예... 그렇죠, 일본 주변부... 그 집 미술감독, 끝내주지 않아요? 쇼타(‘큰 아들’)가 두 번 버림받았다고 생각해도, 그것이 인생임을 받아들이라고 기도했어요. 물론, 제 자신에게 대한 다짐이죠. 선생님 - 오키이. 어제 영화 릴리 프랭키가 사는 마지막 집은 <아무도 모른다>에서 아이들만 사는 집이었던 같은데. 쇼타가 그러잖아. 자기가 잡힌 거 일부러 그런 거라고. 쥬리 때문에 잡힌 거잖아. 가족들이 떠나려고 했던 것도, 이해한다는 거지. 자기를 보호하고자 하면 다 잡힌다는 거…… 그런 삶을 사는 것은 다른 방식의 삶의 지혜와 방식을 배우는 것이지. 그런 면에서 감독이 이 시대를 보는 눈이 깊은 거지. 아시아라는 공간, 시간을 앞선 자본주의 일본은 어떤 사회인가. 나는 ‘멀고도 가까운 나라’라기보다 한국이 가장 모르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일본은 한국에 관심이 없고, 한국은 일본을 제대로 아는 게 없다. 내가 처음 일본을 방문했을 때 가장 놀랐던 일은 거리에 맘껏 나붙은 ‘共産黨’ 포스터였고, 두 번째가 자판기였다. 물론 일본 공산당은 망한 지 오래고, 재일교포와 오키나와 인들과 연대하기를 거부하고 자본가들에게 노동 고용을 부탁하러 다니는 ‘단체’다. '共産黨' 포스터와 자판기 자판기는 몇 미터 간격으로 있는 정도가 아니라 다닥다닥, 거리의 가로수보다 아니 인구보다 많은 것 같았다. 음료, 담배, 라면, 인스턴트 식품은 기본. 여고생이 입던 팬티 냄새가 사라지지 않도록 캔으로 봉인한 섹스 관련 상품을 파는 자판기도 있다. 일본은 ‘한때’ 전자 제품의 나라이기도 했지만 빵, 치즈, 잉어, 옷감, 디자인, 와인, 종이, 두부, 면(麵), 건축, 음악, 다신(多神), 화장품 그리고 세습, 서브 컬처의 나라이기도 하다. 나 역시 평범한 한국인으로서 일본에 대해 복잡한 감정이 있다. 일단, 그들은 한국인과 중국인을 무시한다. 백인에 대한 호감은 자발적 식민지급이다. 나는 영어도 일본어도 못 하지만 일본에서는 반드시 ‘느끼한 발음’으로 영어를 사용한다. 이를테면 “호토 워토(hot water)” 대신에 “할 워러, 프리즈”이런 식으로 말이다. 일본과 미국은 히로시마 원폭과 9․11 전까지, 전 세계에서 단 한 번도 자국이 전쟁터가 된 적이 없는 나라다. 덕분에 일본은 천 년 동안 아무런 파괴 없이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와 문화재를 보존할 수 있었다. 일본 역시 오리엔탈리즘의 대상에서 자유롭지 못했지만, 그들은 ‘셀프 오리엔탈리즘’으로 서양의 일본관을 상품화했다. 서양인들이 일본 문화에 느끼는 신비로움은 우리의 상상력을 초월한다.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한때 스시는 미국의 지식인 문화를 상징했다. 전통적인 국제정치학 교과서에는 ‘일본 편’이 따로 있(었)다. 외교 의전에서 일본은 공부가 필요한 사회다. 특별한 이해와 주의를 요한다. 예를 들어 대개의 언어, 특히 우리말에서 ‘고려해보겠습니다’는 대개 긍정적인 의미지만, 일본어에서 ‘절대 불가, 앱솔루트리 노’를 의미한다.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외국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본만의 문화가 있다는 얘기다. 파악되지 않는 타자? 롤랑 바르트는 <기호의 제국>을 썼다. 일본 사회는 기호(sign)만 있을 뿐 실제 말의 의미(이른바, ‘혼내’)를 알기 어려운 사회라는 뜻이다. 통념과 달리 일본은 류큐 왕조를 비롯한 수많은 다민족(nation), 다민족(ethnic) 국가, 다인종, ‘혼혈인’으로 이루어진 나라다. 근대 이후 강제 통합의 과정은 곧 내전을 의미했다. 홋카이도의 면적만 남한의 3분의 2를 넘는다. 고베나 오사카만 가도, 근대 초기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에 탈아입구(脫亞入歐,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으로)를 꿈꾸었고, 실현했다. 유럽 문화에 정통한 인문학자가 수두룩하다. 탈아입구를 실현한 정도가 아니라 일찍이 메이지 유신을 시작으로 해서 국민국가 체제를 완성, 세계 제패를 기획하고 미국, 중국과 전쟁을 치렀다. 작은 나라(‘倭’)가 아니다. 노벨상,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1950년대에 ‘성취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일본 문제’와 고레에다 히로카즈 하루투니언 같은 일군의 자본주의와 근대성 연구자들이 일본에 주목하는 것은, 일본이 공간적으로는 서구가 아니지만, 자본주의의 발전 속도(시간)는 서구를 앞지른 지역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세계 최고의 자본주의 국가이면서 아시아에 있다. 서구를 쫓으면서, 동시에 서구를 초과했다. 이 ‘모순’은 현재 일본 사회의 고통이기도 하고, 인류가 다음 세계를 사유하는 ‘자원’이 될지 모른다. 일본 자국의 문학, 인문학, 역사학은 역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데, 이들은 남을 침략하기 위해 자신을 연구했고 이미 ‘정상(頂上)국가’나 ‘정상(正常)국가’를 경험했다. 그래서 한국의 지식인처럼 식민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나라 만들기에 열중하기보다는 당장, 자국의 문제에 관심이 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문제에 관심이 없다. 모든 담론이 “ ~ 게 되어야 한다(should be)”다. 현재는 지나가고 있는데, 오지 않을 미래를 설계한다. 자본주의와 발전주의, 민주주의가 같은 말로 사용된다. (대표적으로 주민등록증을 대신한 스마트폰 사용이 그것이다). 일본은 ‘더는 성장할 수 없는 자본주의’, 금융 유통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사회의 징조들이 197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저출산, 자살, 우울증, 초고령화, 빈집 증가, 고실업, 프리터의 등장…… 힘든 일 기피 현상이 의대 진학 저조로 나타나서 일주일에 평균 1명의 임산부가 산부인과를 찾지 못해 사망한다. 최근에는 인생 자체를 리셋(reset)하는 자발적 실종인 ‘인간 증발’까지, 다른 사회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사회 현상이 있다. 일본의 계급 세습과 상상을 초월하는 경쟁주의, 학벌 사회는 의외로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이다. 북한은 정권 세습이지만, 일본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자민당 일당 독재는 전후 계속되고 있고 ‘가업’이란 이름의 계급 제도가 철저하다. TV 예능 프로그램에는 개그맨들이 어느 학교 출신인가가 병기된다. 오타쿠, 이지메, 히키코모리, 희망 난민(희망이 있지만 이룰 수 없어 고민하는 젊은이들), 하류지향(‘루저’를 적극적으로 선택한 학생들), 소비 주체로서의 자부심, 공부하는 이들에 대한 경멸, 수학(數學)과 수학(修學)을 구분하지 못하는 도쿄 대학 학생들, 부자 나라 일본의 극빈층 노인들, 고독사 연 2만 명, 젊은이들의 탈력(脫力, 온 힘을 빼고 아무것도 안 함), 혐한(嫌韓), 혐중(嫌中)……. 일본의 현재를 살펴보는 것은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고레에다가 소중한 혹은 윤리적인 예술가인 이유가 여기 있다. 자기 사회를 직면하고 고민을 담되, 그 상황이나 인물을 대상화하지 않고 껴안는다. 이것이 그의 영화가 지닌 소구력이며, 관객은 그가 재현하는 특정한 이미지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가 <좀도둑 가족>에서 가난한 일본인을 그렸다고 해서, 일본을 가난한 나라라고 생각하거나 일본에 대한 선입견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 영화가 아무리 다양해도 전 세계 관객들은 미국 영화에 대한 특정한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확실히 비교가 된다. 사족 - <좀도둑 가족>에서 두 명의 배우가 생각난다. 역시, 배우는 작품으로만 만난다. 안도 사쿠라를 ‘취조’하는 이케와키 치즈루는 더 이상 <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의 그 소녀가 아니었다. 그리고 내 눈썰미가 맞다면, 성 구매를 하는 남자 손님으로 잠깐 나왔던 배우는 < 종이 달 >의 ‘못된 녀석’ 이케마츠 소스케다. (좌)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우) 어느 가족(좀도둑 가족)의 이케와키 치즈루 (좌) 종이달, (우) 어느 가족(좀도둑 가족)의 이케마츠 소스케
표현주의적인 세트에서 시작하는 도입부부터 강렬하다. 주인공 이시목( 이예춘 )은 전시회를 찾았으나 작품은 하나도 없고 휑하다. 그런 가운데 어딘가에서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들려오는데, 그곳에 유일하게 걸려 있는 사별한 아내 애자( 도금 봉 )의 초상화에서 소리가 난 것이다. 의문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 그림의 얼굴은 마치 얼음 녹듯 녹아내린다(여기서 첫 번째 충격!). 이윽고 한 남자가 그를 차에 태워 어딘가로 데려간다. 바깥에는 마치 좀비처럼 몰려다니는 귀신들이 쫙 깔려 있어 달아날 수도 없다(여기서 두 번째 충격!). 그렇게 도착하자, 또 다른 낯선 남자가 등장해서는 “잘 오셨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하니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그러다 초상화의 주인공인 여자가 나타나고 두 번째 낯선 남자의 등에 칼을 꽂고 유유히 떠나간다. 시목은 그걸 침대 아래에 숨어 뛰어오르는 여자의 발만 본다. 사람이라고 하기엔 모든 동작이 이상하다. 그리고 고양이의 실루엣이 은은하게 비친다(여기서 세 번째 충격!). 맞다, 그녀는 고양이다. 고양이 귀신이다. 한국 장르 영화 팬들에게 이용민 감독의 < 살인 마 >(1965)는 단연 ‘발견’의 영화다. 이미 발견된 지가 오래되어 이런 표현을 덧붙이는 게 다소 민망하긴 하지만, 어쨌건 < 살인마 >는 많은 평자들이 ‘동양과 서양의 괴담이 뒤섞인 한국 공포영화의 초기 대표작’으로 수없이 얘기해왔다. 앞서 얘기한 도입부는 10분 동안 여러 인물이 등장하고, 공간 또한 쉴 새 없이 바뀌며 군더더기 없이 꽉 짜여 진행된다. 낯선 남자의 차에 엉겁결에 올라탄 주인공의 두려움에 이입되어 그야말로 정신없이 휩쓸려간다. 그 속도감과 박력이 어마어마하다. 이후 시목은 화가로부터 애자의 초상화를 받게 되는데, 그 초상화를 집에 가져온 이후부터 집에 괴이한 일이 연달아 발생한다. 오래전 죽은 애자가 나타나 아이들을 잡아가고, 어머니 허 씨( 정애란 )에게는 고양이의 혼이 씌어 이상한 행동을 한다. 심지어 재혼한 아내 혜숙( 이빈화 )은 애자의 혼령에게 처절하게 죽임을 당한다. 초상화가 이 모든 사건의 화근이라고 생각하고 없애버리려고 할 때쯤, 화가의 일기를 통해 아내와 애자와 자신의 가족에게 벌어진 비극의 전모를 알게 된다. 한국영화감독협회가 기획하고 영화평론가 김종원 이 대표 필자로 참여하여 국학자료원에서 펴낸 『한국영화감독사전』에서 이용민 감독은 “일본대학 예술과 영화부를 졸업한, 촬영감독 출신의 영화감독으로서 1960년대를 대표하는 공포영화 감독”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그 스타일에 대해서는 “토속적 소재를 바탕으로 해서 정통적 공포영화를 연출했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제주도의 풍물을 촬영한 다큐멘터리 < 제주도 풍토기 >(1946)로 영화 작업을 시작했고 최은희 , 김승호 , 김진규 , 구봉서 , 김희갑 등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총출동한 코미디영화 < 맹진사댁 경사 >(1962)로 큰 흥행을 거두기도 했지만,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공포영화였다. 액션 영화 하면 정창화 감독을 떠올리듯 공포영화 하면 이용민 감독이었다. 사람의 피를 마시는 악의 꽃을 이용해 한을 푼다는 < 악의 꽃 >(1961)을 비롯해 시네마스코프의 미장센이 돋보이는 < 지옥문 >(1962), 무려 결혼 첫날 밤 아내의 기이한 행동에 남편이 심장마비에 걸려 죽는 < 무덤에서 나온 신랑 >(1963), 이예춘 과 도금봉 이 다시 만난 < 목 없는 미녀 >(1966) 등 제목만으로도 그 필모그래피는 으스스하다. 일본에서도 그 실력을 인정받았던 촬영의 대가 이용민 감독은 바로 이 공포영화 장르에서 다양한 카메라 워크와 특수촬영 등 발군의 실력을 과시했다. 무엇보다 영화 내적으로도 < 살인마 >는 소복을 입은 전통적 ‘여귀’가 등장하는 가운데 ‘흡혈’과 같은 외래적인 요소를 녹여낸 하이브리드한 솜씨가 눈에 띈다. 제작된 시대를 감안하면, 억지스럽다기보다 오히려 세련되게 느껴진다. 드라큘라가 십자가를 무서워하듯 염주를 무서워하여 불교에 의해 퇴치된다는 설정도 독특하다. 또한 시어머니에게 고양이가 ‘빙의’하여 손자들의 얼굴을 혀로 핥을 때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다. 게다가 거기에는 고부 갈등과 처첩 갈등이 한데 엮여 있고, 김기영 감독의 < 하녀 >(1960)를 떠올리게 하는 부르주아 가정 내부의 뒤틀린 욕망까지 숨어 있다. 『근대성의 유령들-판타스틱 한국영화』를 쓴 김소영 교수에 따르면, 1960년대 공포영화의 주 관객층이 ‘시어머니의 인가를 받아 외출을 시도한 동네 아주머니 부대’였다는 사실에 입각해, < 살인마 >의 경우 압도적으로 여성 관객이 많았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또한 『월하의 여곡성-여귀로 읽는 한국 공포영화사』에서 백문임 교수는 “희생자인 며느리가 생전에는 조신하고 얌전했다가, 원귀가 된 이후에는 가공할만한 욕망을 전면적으로 드러내는 괴물이 된다”며 “< 살인마 >는 평화로운 가정의 안주인인 ‘(본)처’라는 존재를 더 이상 순응적인 존재로 그리지 않음으로써 가족에 대한 기존 관념을 와해시킨다”고 쓰고 있다. 더불어 “가장 충격적인 설정은 바로 40대의 시어머니가 자기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감히’ 발현할 뿐만 아니라, 외간 남자와의 애정 행각을 은폐하기 위해 며느리를 살해한다는 점”이라고도 덧붙인다. 어쩌면 장르를 초월해 당대 가장 도발적인 영화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복해서 볼 때마다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처럼 < 살인마 >는 형식과 내용 양면에서 한국 장르영화사(史)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