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용열차
- 감독
- 서광제
- 제작년도
- 1938
- 출연
- 문예봉, 고바야시 주시로, 사사키 노부코, 독은기, 김한, 문동일, 김진암, 길영희, 박무명, 김초부, 이인순, 이채전, 왕평
지난 4월 8일 한국 최초의 여성영화감독으로 불리는 박남옥 (朴南玉) 감독이, 향년 94세의 나이로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별세했다. 그가 우리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7년 처음 열린 서울여성영화제를 통해서다. 그 때 한국영상자료원에 결말부 영상과 일부 사운드가 유실된 채로 네거티브 필름만 보관되어 있던 그의 연출작 < 미망인 >(1955)이 다시 빛을 보게 되었고, 이를 통해 그간 한국영화사 기록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박남옥을 시작으로 한 역사 속 여성영화인들의 활동상도 새롭게 조명되었다. 당시 이러한 작업을 주도한 여성영화인들은 사단법인 여성영화인모임을 결성하였고, 『여성영화인사전』(주진숙·장미희·변재란 외 지음, 도서출판 소도, 2001)과 다큐멘터리영화 < 아름다운 생존-여성영화인이 말하는 영화 >( 임순례 , 2001) 등의 결실도 맺게 된다. 박남옥 감독이 그 출발점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학생 박남옥 열렬한 영화 팬에서 영화계로 1923년 경북 하양에서 태어난 박남옥은 어려서부터 영화를 무척 사랑했고, 문학, 미술, 체육 등 다방면에 재능을 보이던 만능 소녀였다. 특히 운동 실력은 깜짝 놀랄 만한 수준인데, 당시 신문기사를 검색해 보면 1938, 39년 전조선육상선수권대회에서 투포환 부문의 우승자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처럼 타고난 체력은, 훗날 영화연출 현장에서 갓난아기를 둘러업은 채 레디 고를 부를 수 있는 원동력이었지 않았을까 싶은 대목이다. 신문기사 속 그의 이름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당시 각 대학의 입시합격자를 게재한 1940년 3월 27일자 『동아일보』의 ‘입시합격발표’란을 살펴보면, 박남옥은 이화여자전문학교의 합격생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가 인터뷰를 통해 언급한 해방 이전의 이력들이 정확하게 확인되는 셈이다. 박남옥은 일제 시기 조선영화의 최고 스타였던 김신재 의 열렬한 팬이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영화잡지인 『신영화』(1942년 11월호)에 나온 최인규 영화에 대한 기사 중 부인 김신재에 대한 언급을 읽고 팬이 되었다고 한다. 아마 < 집없는 천사 >(1941)에서 꽃파는 소녀 역을 맡은 김신재의 모습에 반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거의 매일 김신재에게 팬레터를 보내고 기사와 사진들은 모두 스크랩했다는 그의 증언은, 식민지 조선의 한 소녀가 영화에 열중하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어 무척 인상적이다. 사실 필자는 대학원 석사과정 중 <아름다운 생존>의 촬영으로 참가했는데, 이 때 박남옥 감독을 실제로 뵙고 말씀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는 소중한 기회가 있었다. 일제 말기 노골적인 국책영화들 사이에서 조선의 농촌 풍경을 담은 < 풍년가 >(1942, 방한준 )가 정말 아름다운 영화였고, 최인규 의 < 수업료 >(1940) <집없는 천사>가 얼마나 뛰어난 예술영화였는지 증언하시던 대목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여성감독이기 전에 식민지 영화문화를 향유하던 영화 팬이었고, 초창기 한국영화사의 산 증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박남옥이 본격적으로 영화 작업에 참여할 기회는 해방과 함께 찾아왔다. 친구의 남편인 윤용규 감독(그는 해방기의 대표작 < 마음의 고향 >(1949)을 감독하고 월북했다)의 소개로 조선영화건설본부 산하의 광희동 촬영소에 스태프로 입사한 것이다. 그 곳에서 드디어 꿈에 그리던 김신재를 만날 수 있었고 이후 말년까지 인생의 친구로 지내는 출발점이 된다. 이 시기 박남옥은 돈암동의 예술인촌이라 불린 마을에 살았는데, 바로 이웃이 유명한 영화인들 즉 김신재와 최인규 부부, 김소영 과 무용가 조택원 커플, 문예봉 , 전창근 , 독은기 , 윤용규, 한형모 등이었다. ‘여성영화’ <미망인>의 완성과 의미 해방 직후 영화인들이 집결했던 광희동 촬영소에서 편집조수로 일하던 박남옥은 드디어 현장으로 나가게 된다. 바로 배우 최은희 의 데뷔작이기도 한 < 새로운 맹서 >(1947, 신경균 )에서 스크립터를 맡은 것이다. 하지만 여성으로서 당시 영화 현장에 정착하는 것은 쉽지 않았고, 결국 ‘딴따라 판’을 벗어나 정상적인 결혼을 바라는 부모의 강요로 귀향을 선택하게 된다. 영화에 대한 그의 열망이 너무나도 강했던 것일까. 한국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박남옥은 다시 영화계로 돌아갈 기회를 잡는다. 1953년 국방부 촬영대에 입대해 기록영화 작업에 참여했고, 극작가 이보라를 만나 결혼까지 이른다. 전쟁이 끝났고, 드디어 그는 자신의 영화에 착수한다. 박남옥의 데뷔작이자 유일한 작품인 <미망인>(1955)은 이보라가 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일단 언니에게 돈을 빌려 영화에 착수했다. 영화사 이름이 ‘자매영화사’인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개인적으로 친했던 이민자 를 주연으로 내세웠고, 스태프 역시 지인들로 꾸렸다. 촬영도 아예 저예산 제작의 기본이라 할 16미리 필름으로 시작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데뷔작에 착수하기까지도 힘들었지만, 영화 현장을 유지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고 한다. 촬영하는 날보다 제작비를 빌리러 다니는 날이 더 많았고, 돌도 지나지 않은 아기를 맡길 곳이 없어 포대기에 둘러업고 촬영 현장을 누볐다. 직접 편집을 하고 전창근 감독 등의 도움으로 겨우 녹음실을 구해 후반 작업을 마치는 등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영화를 개봉시켰다. “여성감독이 아니면 착안하기 어려운 ‘앵글’의 각도와 사건의 ‘템포’ ‘리듬’의 명쾌, 화면과 동작(연기) 등에 생활감정을 예리하게 융화”(『동아일보』 1955.2.27)했다는 개봉 직전 영화평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의 영화는 평단의 인정을 받았으나 안타깝게도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전후 여성들의 욕망을 과감하게 묘사한 그의 영화가 너무 앞서갔던 탓이었을까. 변재란 등의 영화학자들이 지적하듯이, <미망인>은 단지 최초의 여성감독의 영화로 수식되기보다 여성영화로서의 의미가 더 클 것이다. 박남옥감독 촬영 현장 박남옥 감독이 남긴 것 안타깝게도 박남옥은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못했고, 1960년 창간된 『씨네마 팬』의 편집장으로(그는 해방 전 대구의 신문사에서 기자생활을 하며 영화평을 쓰기도 했다) 영화 일을 이어나가다, 영화계를 떠나게 된다. 그의 이력이 말해주듯, 영화판에서 기회를 잡은 것이 해방 직후와 한국전쟁 시기 그리고 전후, 즉 한국 사회가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박남옥 이후 < 여판사 >(1962)의 홍은원 , < 민며느리 >(1965)로 연출에 데뷔한 배우 최은희, < 첫경험 >(1970)의 황혜미 , < 수렁에서 건진 내딸 >(1984)의 이미례 등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여성감독이 이어졌다. 이후 임순례 감독을 필두로 굳이 여성감독으로 부르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여성영화인들은 각 분야에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다. 그들이 박남옥에서 출발한 계보를 이룬다고 또 박남옥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성으로서 감독 데뷔의 기회를 잡기 위한 고군분투의 역사가 박남옥에서 출발했다는 사실, 그의 영화 인생이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큰 의미일 것이다. 김영희 편집기사와 박남옥 감독 본 글은 2017년 4월 『씨네21』호에 실린 '[추모] 김신재를 동경하던 '영화소녀' 영면에 들다'를 재수록한 것이다.
독은기 (獨銀麒, 1910 ~ ? )는 출연작의 수에 비하여 전기적인 사실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배우다. 일제의 영화인 등록 당시 본명은 ‘김영식(金永植)’으로 1941년 현재 31세라고 밝힌 일이 있으나, 중학 시절 한 방에서 뒹굴던 친구 김성칠(1913~1951)은 그의 본명이 ‘김춘득(金春得)’이라고 적고 있다.(?역사 앞에서?, 창작과비평사, 1993) 대구 출신인 독은기는 1930년대 전반기 대구를 거점으로 했던 이규환의 영화 제작을 돕다가 < 그 후의 이도령 >(1936)을 통해 연기자로 데뷔했다. 이규환 은 < 바다야 말하라 >(1935)를 기획할 때 사재를 털어 제작비를 댔던 ‘김영식 소년’에게 토지 문서를 다시 찾아주고자 <그 후의 이도령>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김영식 소년’이 독은기와 동일인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김영식 소년’이 독은기 든 아니든, 독은기의 영화 인생에서 이규환 은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독은기의 출세작 역시 이규환이 연출한 < 나그네 >다. 이규환의 대표작이자 1930년대 후반 조선영화의 가작인 이 영화에서 그는 ‘복룡’(왕평 분) 가족을 비극으로 몰고 가는 ‘삼수’로 출연했다. 선 굵은 외모와 신인답지 않은 자연스러운 연기로 “성격적인 역에 꼭 맞는 타입”(남궁옥, ?조선영화의 최고봉 <나그네>를 보고?, ?매일신보?, 1937. 4. 25.)이라는 평을 들으며 토키 시대 주목할 만한 배우가 된 그는 성봉영화원의 두 번째 작품인 < 군용열차 >(1938)에도 출연한다. 독은기는 군용열차 기관사 ‘점용’(왕평 분)의 친구 ‘원진’을 맡았다. 기생인 애인의 몸값을 구하기 위해 스파이에게 군용열차의 정보를 누설하고, 그 죄책감 때문에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는 ‘원진’의 서사는 이 영화를 끌어가는 중요한 축이었다. 이후 성봉영화원을 흡수한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제작한 < 새 출발 >(1939)과 협동예술영화사가 제작한 < 창공(‘돌쇠’) >(1941)까지, 이규환과 독은기의 인연은 이어졌다. 그러나 1942년 민간영화사들을 통폐합한 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가 출범하면서 그들의 영화적 교유는 일단 중단된다. 법인 조영에 가입하지 않았던 이규환 은 만주영화협회에 조선영화부를 설립하려다 좌절하고 귀국 후 연극 단체에서 활동했으며, 전쟁 막바지에는 비행장에서 징용 생활을 했다. 반면, 법인 조영(朝映)의 연기부에 입사했던 독은기 는 < 젊은 모습 >(1943), < 조선해협 >(1943), < 병정님 >(1944), < 사랑과 맹세 >(1945) 등 여러 편의 선전영화에 출연하며 배우로서의 삶을 이어갔다. 그가 맡았던 <젊은 모습>의 ‘금의환향한 지원병’, <사랑과 맹세>의 ‘전사한 지원병’은 늠름한 자태로 식민지 조선의 ‘아우’들에게 전쟁에 나가라고 부추기는 역할이었다. 또 평범한 농촌 출신 지원병 야스모토 에이치(康本瑛一)로 분한 <병정님>에서는 가장 계몽적인 발화자로서 ‘병영은 군인의 가정’이니, 걱정 말고 입대하라고 권유했다. 법인 조영 시대 독은기는 배우로서 가장 활력적인 시기를 보냈지만, 그가 맡았던 배역들은 식민지 청년들이 왜 제국주의 전쟁에 동원되어야 하는지 추호의 의심도 허용하지 않는 ‘건강하고, 명랑한’, 평면적인 인물들이었다. 법인 조영에서의 활동은 해방 후 독은기 의 삶에 족쇄가 되었다. < 자유만세 >(1946)에서 민족을 배반하고 일제 경찰의 사찰주임이 된 ‘남부’로 출연했던 것처럼, 일제의 선전영화 속 긍정적인 인물은 한 순간에 ‘매국노’가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조선의 ‘아우’들이 우러르는 ‘형’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해방 후의 격동 속에서 그는 좌익 계열 영화인들의 조선영화동맹에 참여했다가 전향했지만, 남한에서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한국전쟁 중 월북하기까지 그는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가난과 병마에 시달린 것은 물론, 식민지 말기의 ‘친일’과 해방 직후 ‘좌익’ 경력으로 남한에서의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한편, 그를 영화로 이끌었던 이규환 은 해방 후 조선영화동맹에 대항해 조선영화감독구락부를 결성했고, < 민족의 새벽 >(1947), < 갈매기 >(1948) 등을 연출하면서 다음 세대 감독들을 길러냈다. 독은기는 그와 함께 할 수 없었다. 재기를 꿈꾸었던 <하얀 쪽배>가 전쟁으로 중단되고, 국군의 서울 수복을 앞두고 있었던 1950년 9월 26일 늦은 오후, 독은기 는 커다란 보따리를 짊어지고 역사학자 김성칠의 집을 마지막으로 찾았다. ‘친일’에서 ‘좌익’으로, ‘전향자’에서 ‘월북자’로, 불운한 시대 전향을 거듭해야 했던 배우 독은기의 뒷모습을 옛친구는 몇 줄의 일기로 남겼다. “나는 오늘 저녁 한 사람의 양심적인 예술가를 또 북으로 떠나보냄에 있어 그가 이 몇 해 동안 병고와 생활난과 고문의 위협에 허덕이었음을 생각하고 이 땅의 문화 정책이 너무 빈약함을 통탄하여 마지않는다.” / 글: 이화진 (한국영화사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