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짓는 늙은이
- 감독
- 최하원
- 제작년도
- 1969
- 출연
- 황해, 윤정희, 남궁원, 허장강, 김정훈, 김희라, 김정옥, 최봉, 김소조, 전숙, 나정옥, 추석양, 손전, 김칠성, 송해, 박시명, 박순봉
<성벽을 뚫고>의 육군 하사로 시작 1미터 60센티미터도 안 되는 작달막한 키에 다부진 체격을 가진 황해(黃海)가 극장 화면에 처음 얼굴을 비친 것은 1949년 한형모 감독의 데뷔작 <성벽을 뚫고>(김보철프로덕션 제작)부터였다. 이 영화는 해방 후 일어난 여수·순천 사건을 배경으로, 육군 소위(이집길)인 처남과 공산주의자(권영팔)인 매부 사이에 벌어지는 이념의 갈등과 반목을 그린 것이다. 매부는 처남을 매수하려 하고, 처남은 매부를 설득하려 하지만 실패하자 서로 총을 겨눠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 황해는 이 작품에 조연급인 육군 하사 역으로 출연했다. 남북 분단이 가져온 동족상잔의 비애를 담은 최초의 영화였다. [사진] <성벽을 뚫고>(한형모, 1949)에서의 황해 이렇게 영화계에 나왔으나 황해는 한동안 후속 출연작을 내지 못했다. 6.25전쟁과 연극 때문이었다. 그를 다시 카메라 앞에 서게 한 것은 ‘뚱뚱이 양훈’과 겨룬 코미디 <청춘쌍곡선>(한형모, 1956)이었다. 이후 <나는 고발한다>(김묵, 1959)를 비롯한 <안개 낀 서귀포>(임한림, 1959), <햇빛 쏟아지는 벌판>, (정창화, 1960), <5인의 해병>(김기덕, 1961), <현상 붙은 사나이>(김묵, 1961), <두만강아 잘 있거라>(임권택, 1962), <폭력지대>(김묵, 1965), <쇠사슬을 끊어라>(이만희, 1971), <평양폭격대>(신상옥, 1971) 등 액션물과 <한많은 청춘>(권영순, 1958), <자장가>(하한수, 1958), <목포의 눈물>(하한수, 1958), <울지 마라 두 남매>(서석주, 1960), <울려고 내가 왔던가>(김화랑, 1960) 등 신파 멜로, <박서방>(강대진, 1960), <마부>(강대진, 1961) 등의 서민영화, <독짓는 늙은이>(최하원, 1969), <심봤다>(정진우, 1979) 등 문예영화에 출연했다. [사진] <자장가>(하한수, 1958)의 황해. 왼쪽은 배우 한미나(사진제공: 김종원) 황해가 <자장가> 유의 신파와 액션 연기에 강한 것은 일찍이 악극단 등에서 쌓은 15년 경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버라이어티 쇼적 재능과 과장된 표정연기는 영화에 출연하는 동안 차츰 탈색돼 69년 <독짓는 늙은이>를 계기로 내적 연소의 연기양태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인간단지>(이원세, 1975), <부초(浮草)>(이한욱, 1978)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신장의 한계 극복한 무대 경험 황해는 1920년 3월 6일 동해의 푸른 물을 끼고 뒤쪽으로는 외금강 줄기가 뻗어나간 강원도 고성군 장전읍 경동(京洞)에서 태어났다. 정어리 기름공장을 경영하는 전병근(全炳根)의 2남 1녀 중 둘째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큰 아들과 네 살 터울인 그에게 홍구(弘玖)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아버지는 아들을 서울 동대문 근처에 있는 큰 아버지 댁에 보내 주교(舟橋)국민학교를 다니게 했다. 졸업 후 경신중학교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3년제인 경성상공업 기계과에 들어갔다. 졸업(1936년) 후에는 미쓰비시(三菱)백화점 식료품 점원을 거쳐 중앙우체국 집배원으로 옮겼다. 하지만 집배원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래서 변두리 로 나설 때면 무료를 달래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어느새 동료들 사이에서 ‘노래하는 집배원’으로 통했다. 하지만 이 일도 오래가지 못했다. 고향으로 돌아가 형과 함께 아버지가 하는 정어리 가공 일을 도왔다. [사진] <독짓는 늙은이>(최하원, 1969)에서 황해와 윤정희 그런데 이 무렵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될 기회가 찾아왔다. 열여덟 살 되는 해 봄이었다. 서울의 성보(城寶)악극단이 전국순회 공연 중에 이 고장을 찾아온 것이다. 악극단은 관객동원의 수단으로 공연 첫날 노래자랑대회를 열었는데, 홍구 청년도 참가했다. 그의 노래를 들은 한 여단원이 소질이 있으니 서울에 가서 가수의 길을 걸어보라고 권했다. 그녀가 바로 ‘성보의 간판스타’인 가수 신 카나리아였다. 이에 용기를 얻어 성보악극단의 연구생 모집광고를 보고 응모, 1천 2백여 명의 경쟁자 가운데 12명을 뽑는 성보악극단의 제1기생으로 선발되었다. 이렇게 들어간 극단에서 처음 출연하게 된 것이 신 카나리아 주연의 <춘풍일가>의 심부름꾼이었다. 그는 공연 때마다 객석에 나와 다른 배우들이 하는 동작이나 대사, 표정을 관찰하고, 화장술을 익혔다. 그런 열성 탓인지 그는 1년이 채 되지 않아 지방공연의 주연 배우로 발탁되었다. 지방공연은 밤차에서 새우잠을 자는 등 고달픈 일이었지만 무대에 서기만 하면 신명이 났다. 이렇게 시작한 연극이 1938년부터 4년 동안 10여 편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 신 카나리아의 부군인 김화랑이 제일악극단을 조직하자 성보악극단을 떠났다. 2차세계대전으로 해초 가루로 만든 빵이나 강냉이 죽으로 끼니를 때워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 그는 스물두 살이 될 때까지 제일악극단에 머물렀다. 그런데 계속 조여 오는 징용의 압력을 견디다 못해 결국 압록강을 건넜다. 중국 천진에 내리자 미리 와있던 신 카나리아, 박단마 등과 함께 손목인이 이끄는 신태양악극단에 입단했다. 백파진(白波進)이란 예명을 쓰기 시작한 것은 이때였다. [사진] <인간단지>(이원세, 1975)에서의 황해(사진제공: 김종원) 군예대원으로 아내와 평양까지 일본이 패망하자 일본군을 위한 위문공연을 했다는 이유로 잠시 수용소에 갇히기도 했으나 해방 이듬해인 1946년 6월 그는 간절히 기다리던 귀국선에 오르게 된다. 인천항에 내린 그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토록 그리던 황해 바다, 밟고 싶던 조국의 땅이 아닌가. 그는 “한국남자는 황해 바다처럼 넓고 거센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했던 한 광복군 노인의 충고를 떠올리며 예명을 다시 황해(黃海)로 바꾸었다. (황해, 「藝에 살다(13) 최초의 액션 스타(13)」, ≪일간스포츠≫, 1979년 11월 7일자) 이렇게 3년 만에 서울 돈암동 집으로 돌아오자 다시 신 카나리아 부부가 만든 새별악극단에 가담했다. 이 무렵 <자유만세>(1946)를 찍은 한형모(韓瀅模) 촬영기사가 만나자는 기별을 보내 왔다. 이번에 <성벽을 뚫고>라는 영화로 ‘입봉’하게 되었는데 출연해 달라는 것이었다. 황해는 이렇게 하고 싶었던 영화배우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영화에 출연하면서도 연극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새별악극단을 인수하고 전성기로 올려놓을 무렵 가수 백설희(白雪姬)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집안의 반대에 부딪치자 동거생활을 결행하였다. 그들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것은 살림을 꾸린지 15년 만인 1960년 서대문 밖 백련사(白蓮寺)에서였다. 그는 6.25전쟁을 겪으며 아내와 함께 군예대(軍藝隊)에 들어가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평양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사진] <부초>(이한욱, 1978)에서의 황해와 윤세라(오른쪽)(사진제공: 김종원) 배우로서는 불리한 작은 신장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승부욕으로 관객 앞에 다가선 ‘작은 거인’ 황해는 1965년 장동휘, 허장강과 함께 동인프로덕션을 설립, 파월장병의 용맹상을 그린 <맹호작전>(1965)을 제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2005년 2월 9일 슬하에 노래하는 배우 전영록을 남기고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1950년 4월 『문예(文藝)』 제9호에 발표된 황순원의 「독짓는 늙은이」는 「소나기」와 더불어 교과서에 실려 있는 작품이자,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대표적인 소설이다. 우리는 말이 필요 없을 만큼 유명한 이 소설을 읽었기 때문에 「독짓는 늙은이」를 영화화할 때에 몇 가지 어려움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 송영감의 독백으로 시작되는 십여 쪽에 불과한 소설의 길이에 따른 내용의 부재를 어떤 방식으로 채워나갈 것이며 아내가 떠난 후로부터 시작되어 송영감의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상황 묘사에 담긴 송영감의 심정을 어떻게 시각화할 것인가에 대한 부담감 등이다. 하지만 < 독짓는 늙은이 >( 최하원 , 1969)는 소설의 중요한 이야기를 중간에 배치하고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창작해서 액자구성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감독이 새롭게 해석한 부분과 이 이야기를 관통하는 감독의 관점을 강조한다. <독짓는 늙은이>는 양자로 보내졌던 당손( 김희라 )이 성인이 되어 집을 찾아온 장면부터 시작한다. 폐허가 된 집안을 둘러보다 가마를 발견한 당손은 그 안에서 생활하는 거지 떼 틈에 있는 송영감( 황해 )의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노인( 허장강 )의 이야기엔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 송영감과 옥수( 윤정희 )의 우연한 만남과 결혼, 당손을 낳고 살아가는 단란한 모습과 석현이 옥수를 찾아온 상황을 보태어놓는다. 다시 노인과 당손의 모습으로 돌아오면 가마 구석에 거지 행색의 엄마 옥수와 당손이 만나는 장면이 이어진다. 에필로그와 프롤로그는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당손의 애끓는 그리움과 어머니의 죄의식으로 얼룩진 삶을 한 장소로 불러 모음으로써 어떻게 모자간에 묻어둔 감정이 해소되는지 낱낱이 보여준다. 최하원은 흥미롭게도 원작에는 거의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인 옥수의 기구한 삶(이름도 생겼다)과 죄의식을 관객들에게 상세하게 제시한다. 그리고 망가져버린 자신의 삶을 구제할 유일한 길을 아들 당손에게서 찾도록 한다. 아들의 사모곡과 어머니의 모성애는 뒤늦게라도 해후한다.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스틸 한겨울 길을 걷다 발견한 옥수를 데려와 동상에 걸린 몸을 녹여주고 보살펴주는 장면은 옥수의 젊고 아름다운 육체와 아름다운 곡선을 지닌 독을 동일한 대상처럼 정성껏 대하는 송영감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원작에 없는 이러한 접근은 송영감의 욕망이 발현되는 장면을 묘사하는 방식과 옥수와 석현의 욕망이 직접적으로 표현되는 장면을 불과 물의 이미지로 대비시킨다. 카메라는 예순이 다 되도록 혼자 살아왔던 송영감이 옥수의 얼어붙은 몸을 녹이는 장면을 오래도록 보여준다. 눈덩이가 녹기 시작하자 옥수의 육체는 물기로 뒤덮이고, 송영감은 부끄러워하면서도 그녀의 아름다운 육신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카메라는 옥수의 다리, 상체와 송영감의 얼굴을 번갈이 보여줌으로써 흙을 주무르듯 옥수의 등을 매만지고 곡선을 빚어내듯 옥수의 종아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강조한다. 그리고 노인의 뜸막에서 타오르는 장작불이 인서트로 삽입된다. 견고하고도 아름다운 독을 만들던 송영감의 손길이 아름다운 육신을 향한 염원으로 전이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섬세하고 끈질기다.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스틸 게다가 눈이 녹아 만들어내는 물은 다음 숏의 냇가로 이어진다. 옥수의 고무신 냄새를 맡다가 민망한 내색을 하고, 옥수의 속바지를 펼쳐 보이고 냄새를 맡는 장면은 옥수의 육체에 온기를 불어넣던 그의 손짓보다 강렬한 욕망의 표시이다. 설원 곁을 흘러가는 냇물이나 옥수의 어깨에서 스르륵 녹아내리는 눈은 초록이 우거진 봄날의 냇가로 이어진다. 특히 옥수의 욕망이 냇가에서 발현되는 장면은 소설과 다른 <독짓는 늙은이>만의 고유한 표지가 된다. 옥수가 어린 당손( 김정훈 )이 냇가로 흘려보낸 꽃을 들고 냄새를 맡는 장면은 눈여겨볼만하다. 옥수의 고무신/겨울/눈/송영감과 꽃/봄날/초록의 숲/옥수의 대비는 송영감의 욕망과 옥수가 욕망하는 대상을 대비시킴과 동시에 황혼녘의 송영감과 한창 젊은 나이인 옥수를 연상시킨다. 결정적인 장면은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거세게 내리는 날, 송영감이 자신을 가마로 밀어 넣는 악몽을 꾼 옥수의 눈에 비친 송영감의 시뻘건 얼굴이다. 물가에서 자신의 솔직한 욕망을 확인했던 옥수에게 불가에서 어른거리는 붉은 빛으로 물든 송영감의 얼굴은 욕망을 가로막는 불안이자 평생 불과 더불어 살아온 송영감의 삶 자체이기도 하다. 그녀는 그날 집을 뛰쳐나간다.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스틸 노인에게 불은 독을 완성시키는 존재이자 사경을 헤매던 옥수를 살려낸 존재이며 노인의 쇠락과 죽음을 지켜보는 유일한 존재이고 그의 육신을 삼켜버린 존재이다. 최하원은 옥수 곁에 나무들과 산, 거세게 흐르는 물길을 배치하고 송영감의 곁에는 늘 장작불이나 가마의 불길을 배치시킨다. 아홉 살 때 흙을 만진 이후로 가마 곁을 떠난 적이 없는 송영감의 삶은 척박한 땅의 기운과 부드럽게 짓이긴 흙으로 대표되기에 그가 가마 앞에 단정히 앉아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몸을 던진 장면은 애처롭지만 한편으론 송영감이 마지막으로 매달렸던 삶의 한 자락을 떠올리게 만든다. >> 독짓는 늙은이 고화질(HD) VOD 보러가기 <<
[사진] 김승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혈맥>의 한 장면 ● 연극으로 시작한 3대 독자 김승호는 1918년 7월 13일 강원도 철원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농사를 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윤택하여 어려움을 모른 채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다. 일설에는 그의 아버지가 승적을 가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본인은 이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양친께서 석왕사(釋王寺)에서 불교를 신봉하셨다” (『국제영화』 1959년 10월호) 고 말한 적이 있어 뜬소문만은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어릴 때 이 복덩이에게 붙여진 이름은 해수(海壽)였다. 그가 네 살이 되자 부모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서울로 이사했다. 종로 청진동에 정착한 뒤 복덕방과 전당포를 하며 사림을 꾸려 나갔으나 얼마 못가 숙박업으로 전환하였다. 해장국으로 유명한 청진옥 맞은편 서울관광호텔 옆 골목에 있었던 대흥여관이 바로 그 출발이었다. 그가 입학한 수송국민학교는 집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래서 공휴일에도 조무래기 친구들과 어울려 학교 운동장에 나가 놀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명문인 보성(普成)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수재들과의 경쟁이 벅차서였는지, 1년 만에 그만 두고 말았다. 그 대신 집 근처에 있는 우미관이나 낙원동의 조선극장, 수은동의 단성사 등 극장을 찾아다니며 연극과 영화 보기를 즐겨 했다. 그때 이미 ‘분바른 무대 인생’의 길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셈이다. 그는 스무 살 되던 해 봄 동양극장의 전속극단인 황금좌로 박진(朴珍)을 찾아갔다. 연출부장인 박진은 당돌하게 연극을 하게해 달라고 조르는 이 초면의 청년에게 대뜸 호떡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무슨 영문인지 잘 몰랐지만 그는 사실대로 잘 먹는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일부터 같이 고생을 하자”며 입단을 허용했다 .(김승호, 「나의 청춘과 예술의 편력」, 『국제영화』 1956년 3월호) 연구생 신분이었다. 그는 오래가지 않아 이 질문의 뜻을 알게 되었다. 공연지를 따라다니는 동안 정말 지겹도록 이 호떡을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연극인들은 호떡으로 끼니를 때우다시피 했다. 그러나 김승호는 포기하지 않았다. 허기진 배를 참아가며 연극에 빠졌다. 선배들의 시중은 물론 단체의 잡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전원교향악>이란 연극을 공연할 때였다. 그는 평소에 하고 싶었던 장님 역할을 맡고 있는 선배에게 떡을 사다가 권하며 아첨을 떨었다. 선배는 이런 호의가 기특했는지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그런데 공연 시간을 앞두고 급히 먹은 떡이 체했는지 그만 자리에 눕고 말았다. 그에게 대역의 기회가 왔음은 물론이다. 그동안 선배의 연기를 보며 익힌 보람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번에는 정식으로 캐스팅되었다. 그 첫 작품이 홍해성 연출의 <임자 없는 자식들>이었다. 1938년 그의 나이 스물두 살 때였다. 그 뒤 <백진주>, <아들의 심판>과 같은 연극에도 출연했다. 그러나 집에서는 이런 ‘광대 짓’을 못 마땅히 여겼다. 부모가 얼마나 완고했는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들의 연극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이 무렵 동양극장 무대에 올려 크게 성공한 신파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1936, 임선규 작, 홍해성 연출)가 영화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극장주인 홍순언이 김승호를 주연인 황철의 친구 역으로 나오게 해주었다. 그런데 현상 기사가 실수하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황문평, 『인물로 본 연예사: 삶의 발자국 1』 ‘서민의 우상 명배우 김승호’ 도서출판 선. 1998, 334쪽) 그는 해방 후 변기종이 주도한 자유극장으로 옮겨 연기부장을 맡아 박상익, 송재로, 김신재 황정순 등과 함께 2년 여 동안 활약했다. 그 뒤 서월영, 유계선 등과 함께 극단 청탑(靑塔)을 창단하기도 했다. 김영수의 <민중전(閔中殿)>(1945)과 <망향>(1946), <선구자>(1946) 등이 이때 공연한 레퍼토리였다. [사진 ] <박서방>의 한 장면, 황정순은 오랫동안 김승호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였다 ● 특유의 발성법으로 연기력 과시 김승호는 누구보다도 화려하게 한 시대를 누빈 대기만성형의 배우였다. 그가 활동한 1958년부터 1968년까지의 10년간은 한국영화 전성기와 일치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동안 그가 이룬 업적은 명배우로서 부합될 만큼 큰 것이었다. 하지만 제작의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 1967년 처음 만든 <돌무지>의 흥행 성공과 제6회 대종상 최우수반공영화상 작품상 수상으로 받은 외화수입쿼터 보상에 힘입어 제작한 <영원한 모정>(원명 ‘머슴 칠복이’ 조긍하)이 실패한 뒤에도 부채를 안고 강행한 <7인의 밀사>(원제 사화산)가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는 고혈압에 시달리다가 1968년 12월1일 아침 자택에서 세수를 하다가 쓰러진 후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서른 살에 얻은 외아들(김희라)이 1년 뒤 <독짓는 늙은이>(1969, 최하원)로 영화배우의 꿈을 이룬 모습도 보지 못한 안타까운 51년의 짧은 생애였다. [사진 ] 영화 <돌무지>(1967)의 한 장면 [사진 ] 김승호의 장례식 장면 혀와 입술 사이에서 더듬듯이 굴려 내는 독특한 발성법과 안면을 수축시키며 만들어내는 표정 연기는 김승호 연기의 특징이었다. <박서방>, <마부>, <혈맥> 등의 경우처럼 탁월한 연기력으로 어려운 현실에도 순응하며 살아가는 서민의 정서와 애환을 적절히 녹여내는가 하면, <시집가는 날>, <인생차압>, <로맨스그레이> 등에서 볼 수 있었듯이 ‘능청스런 익살’ 연기로 관심을 끌었다. 반면에 한 가장이 화목한 가정을 깬 죄책감으로 고행의 길을 걸어간 <육체의 길>(1959, 조긍하)에서는 오버액션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연기는 단연 고진감래(苦盡甘來)의 서민 역할에서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