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사나이
- 감독
- 김수용
- 제작년도
- 1960
- 출연
- 장미, 이성섭, 김진, 정동일, 김경자, 염혜숙, 김정옥, 정철, 정재룡, 조현주, 김진규, 이민, 엄앵란, 허장강, 이빈화, 최은희, 남양일, 박경주, 한은진, 김미선, 전세권, 이기홍, 채훈, 유춘, 최성
[사진] 한국전쟁 중 미군 위문공연을 하러 온 마릴린 몬로와 함께 한 최은희 최은희는 좌우익의 분열이 본격화되기 전인 민족영화 건설기에 모처럼 얻은 수확이다. 1947년 청구영화사가 제작한 신경균 감독의 <새로운 맹서>에 발탁되면서 그녀의 파란만장한 여배우의 삶이 시작된다. 일제의 강제 징용에 끌려 나갔다가 해방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온 어촌 청년들이 마을 처녀들과 힘을 모아 황폐한 어촌을 재건해 나간다는 이 영화에서 그녀는 잘사는 집 외동딸 역을 맡아 애인 역인 최운봉과 그의 어머니 김연실 등과 함께 공연했다. 은막으로 이끈 순진한 얼굴 <노도(怒濤)>를 개작한 최금동 각본의 <새로운 맹서>는 46년 기획 단계부터 여주인공은 신인을 쓰기로 방침이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마땅한 후보 깜이 나타나지 않았다. 영화에 투자할 전주(錢主)의 마음이 변할지도 모를 지경에 이르렀을 때 회현동에 있는 영화사 사무실로 한 손님이 찾아왔다. 신경균 감독은 누군가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여기 주연 깜이 한 명 나타났으니 와서 보라고. 이 처녀가 바로 최은희(崔銀姬)였다. 감독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사람은 이 영화의 촬영을 맡은 카메라맨, 뒷날 그녀의 남편이 된 김학성이었다. 그의 눈에 비친 최은희는 ‘큰 키에 때 묻지 않은 촌스런 얼굴, 가꾸지 않은 엉성한 몸매에다 집안에만 있다가 배우가 되겠다고 뛰쳐나온 순진한 모습’이었다. (김학성, 「30년을 하루 같이(6) 원로 연예인의 수기」, 『일간스포츠』, 1978.3.20.) 그래서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좋게 본 감독과 작가의 의사에 따르기로 했다. 그녀가 영화사 사무실을 찾게 된 데는 이 무렵 토월회 연극무대에 함께 섰던 최운봉이 제 상대인 배역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 같다며 지원을 적극 권유했기 때문이다. 촬영에 들어가자 감독으로부터 오버 액션이라는 질책을 받았다. 아버지가 딸에게 준 돈이 애인의 서울 유학비에 쓰인 사실을 알고 꾸짖자 딸이 용서를 비는 장면이었다. 관객들이 없이 스태프들만 바라보는 가운데 정해진 프레임 안에서 해야 하는 연기는 허공에 뜬 것처럼 와 닿지 않았다 .(최은희, 『고백』 영화에 데뷔하다, 2007, 랜덤하우스 코리아, 46쪽) 그래서 연극 무대에서 연기를 하듯이 하다 보니 감정이 과장됐던 것이다. <새로운 맹서>는 제재(題材)와 내용이 과거 무성영화 <바다와 싸우는 사람>이나 <바다여 말하라>에 비하여 별다른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나, 이금룡, 최운봉, 김연실 등과 함께 신인 최은희가 열연했다. (「신영화평, ‘새로운 맹서’」, 『대동신문』, 1947.6.30.) 는 평을 들었다. 이 영화에 이어 캐스팅된 것이 수도청 경우회가 제작한 <밤의 태양>(1948, 박기채)이었다. 대규모 밀수단을 추적한 끝에 일망타진하는 경찰관의 이야기로, 김동원의 상대역이었다. 그런데 영화가 개봉되자 수도청 기자단으로부터 항의를 받았다. 언론인 전체의 명예를 훼손한 장면이 있으니 삭제해 줄 것과 사과를 요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사진] 최은희는 <마음의 고향>에서 젊은 미망인 역을 맡았으나 연기가 부족하다는 평을 받았다 세 번째 출연한 <마음의 고향>(윤용규, 1949)에서는 홍역을 앓다가 죽은 어린 아들의 49제를 지내려 절을 찾아온 젊은 미망인 역을 했다. 정적 연기가 요구되는 캐릭터 때문이었는지 주지 역(변기종)과 미망인 어머니 역할(석금성)에 비해 연기력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태우, 「조선영화의 발전, ‘마음의 고향’을 보고」, 『경향신문』, 1949.1.6.) 모두 6.25전쟁 이전의 출연작들이다. [사진] <젊은 그들>에서 남장 여인으로 분한 최은희 최은희의 연기 활동은 그로부터 5년 만인 1954년 신상옥 감독의 문화영화 <코리아>(1954)를 계기로 재개된다. 잇따라 신 감독의 <꿈>(1955)을 비롯한 <젊은 그들>(1955), <무영탑>(1957), <지옥화>(1958)에 주연으로 기용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한다. 영화의 절반을 차지하는 승려 조신의 꿈을 통해 애욕의 덧없음을 깨우치게 되는 이광수 원작의 〈꿈〉, 실각한 대원군의 복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열혈 청년들의 사투기 김동인 원작의 <젊은 그들>(1955), 불국사의 석가탑 건립에 얽힌 일화를 중심으로 엮은 현진건 원작 〈무영탑〉(1957)에서는 승려를 홀린 달례(꿈)와 정혼자가 있는 남장 여인(젊은 그들), 그리고 석공 아사달을 사랑한 구슬아기(무영탑) 등 다양한 역할을 해낸다. 그녀는 어느새 ‘신상옥의 전속배우’나 다름없는 부러운 존재가 되어 있었다. 고전미에 상응한 도발적 여성의 욕망 그러나 <지옥화>에서는 앞의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전후 아프레 걸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기지촌의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파는 양공주 쏘냐 역 최은희는 미군부대의 창고를 털어 내다 파는 일이 주업인 사내(김학)의 정부 노릇을 하면서도 그의 동생을 유혹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쏘냐는 동생과 도망가기 위해 정부 일당의 음모를 헌병대에 신고하지만 도망쳐 나온 정부의 칼에 찔려 죽고 사내도 총에 맞아 죽는다. <지옥화>에는 통속적인 겉모습과는 달리 6.25전쟁을 겪은 궁핍한 한국사회의 현실을 비판하는 작가의식이 담겨 있다. 깊게 파인 검은 드레스와 짙은 화장으로 빗나간 여성의 욕망을 표출하고 그동안 한복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농염한 몸매를 드러내면서 기존의 정적 이미지를 탈색시키는데 성공한다. [사진] <지옥화>에서 최은희는 형제를 동시에 유혹하는 악녀 쏘냐 역을 맡아 변신에 성공한다 이 작품을 전후하여 농촌을 무대로 한 김소동 감독의 <돈>과 김성민 감독의 액션 영화 <형제>(이상 1958)에 출연했으나 뚜렷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그러나 고아인 법대생이 부정한 방법으로 신분을 세탁, 변호사의 꿈을 이루게 되는 신상옥 감독의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과 <동심초>(1959)의 전쟁미망인 역할에 이르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특히 <동심초>의 경우 양장점을 경영하다가 사기꾼에 걸려 파산상태에 이르렀을 때 도움을 준 남자를 사랑하게 되지만 그에게 약혼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물러서는 미망인의 연기는 ‘최은희가 발산하는 고절(高節)한 미망인다운 애절감이 좋았다’는 호평을 받았다. 서울 국도극장에서 개봉돼 연일 대성황을 이룬 이 영화는 신상옥프로덕션의 기반을 조성하는 데에 크게 이바지한다. [사진] <동심초>에서의 최은희와 김진규 김기영 감독의 <슬픈 목가>로 1960년대 신년 벽두를 연 최은희는 <동심초>의 변주라 할 수 있는 이 영화를 포함, <청춘의 윤리>(김화랑), <려인(麗人)>(이봉래), <돌아온 사나이>(김수용) 등 타사 영화 5편과 신상옥프로덕션 10주년 기념작 <이 생명 다 하도록>을 비롯한 〈로맨스 빠빠〉, 〈사랑의 역사〉, 〈백사부인〉(이상 신상옥 감독) 등 4편에 출연했다. 이 가운데 <이 생명 다 하도록>은 6,25 전쟁 때 참전했다가 척주마비로 하반신 불구가 된 남편(김진규)과 어린 딸을 돌봐야 하는 인고(忍苦)의 여인상을, <로맨스 빠빠>에서는 가부장적 질서와 해체의 경계를 넘나든 영악한 맏딸의 모습을 보여 관심을 끌었다. 이 시기에 그녀와 대적할 만한 여배우는 연배가 비슷한 황정순과 주증녀, 이민자 정도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별아 내 가슴에>(1958)의 히트 이후 기세가 오른 젊은 김지미였다고 할 수 있다. 최은희에게 신상옥이라는 배경이 있듯이, 김지미에게도 남편인 홍성기 감독이 있었다. 그래서 영화계에서는 그들의 판세를 ‘연기와 미모의 대결’로 받아들였다 .(「라이벌」, 『씨나리오문예』 4호, 40쪽, 1959, 12) 이 무렵 최은희는 연기 잘 하는 스타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40고개를 바라보아도 잔주름을 연기력으로 너끈히 카버하고 젊은 주역을 해내는 데보라 카처럼 연령적 육체적 조건을 극복하고 톱스타의 자리를 차지할 것’ (「‘배우동서(俳優東西)’ 데보라 카와 최은희」 , 『경향신문』, 1960.8.13.) 이란 전망을 갖게 했다. [사진] 흥행 신기록을 세운 <성춘향>의 한 장면. 오른쪽은 월매 역을 맡은 한은진 그런 점에서 1961년 시네마스코프 색채 대형화면 시대를 연 구정 대목 프로 <성춘향>(신상옥)은 이와 같은 세간의 평가와 전망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셈이었다. 더욱이 최은희는 역대 <춘향전> 영화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35세의 중년 춘향 역에 도전했다. 같은 시기에 경쟁한 21세인 <춘향전>(홍성기)의 김지미와는 무려 14년이라는 차이가 났다.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명우, 1935)의 문예봉이 19세에, 1955년 한국영화 중흥기의 <춘향전>(이규환, 1955)의 조미령이 27세에, 그리고 뒷날 <성춘향>(박태원)의 장미희가 21세에 춘향 역할을 맡은 것과는 대비되는 무리한 캐스팅이었다. 감당하기엔 어려운 배역이었으나 당시의 매스컴은 <성춘향>에 대해 성의 있는 고증과 색조, 허장강의 방자 역에 호의를 표명 (「예술과 기업의 대결, 매니큐어 반짝이는 두 편의 춘향전」, 『조선일보』, 1961.1.30.) 하면서도 최은희의 과년한 춘향 역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손에 바른 ‘반짝이는 매니큐어’만 지적했을 뿐이다. 이는 분장과 연기력으로 나이의 약점을 극복했다는 말이 된다. 결국 <성춘향>(명보극장)은 김지미 주연의 <춘향전>(국제, 국도극장)에 참패를 안겨주며 서울에서만 74일간 38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렇게 기업적 기반을 마련한 신상옥은 신필름을 확장하고 스튜디오 시스템을 갖춘 영화사로 키워 나갈 수 있는 계기로 삼는다. <성춘향>에 이어 최은희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상록수>, <연산군>(이상 신상옥), <서울의 지붕 밑>(이형표) 등 5편과 이만희와 유심평의 감독 데뷔작 <주마등>과 <군도(群盜)> 등 2편이 포함된 9편에 출연하였다. 여섯 살 소녀 옥희를 화자로 내세워 어머니와 사랑방에 세든 중년 남성과의 애틋한 사랑을 보인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의 여주인공은 <마음의 고향>(1949), <동심초>(1960)에 이은 미망인 소재의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다. 깨끗이 빗어 올린 쪽진 머리와 하얀 저고리, 절제된 미소, 조신한 동선(動線)으로 ‘동양적인 청결과 멜랑콜리한 분위기’ (「신영화, 담담하고 격조있는 가작,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한국일보』, 1961. 8.26.) 를 자아내며 인내와 수절이 미덕, 가부장 중심 사회의 단면을 애잔하게 보여 주었다. 그 반면에 <상록수>(원작 심훈)에서는 야학을 열어 문맹 퇴치에 나선 일본 식민지시대의 농촌 여성 채영신으로 변신해 역할의 확장을 꾀하였다. 이 시기야말로 최은희 연기 생애에 있어 절정기였다고 할 수 있다. [사진] 최은희 연기 인생의 절정기를 대표하는 영화 중 하나인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한 장면 〈산색시〉(박상호), <29세의 어머니>(이강원), <무정>(이강천) 등 외부 작품을 포함 12편에 캐스팅되면서 최다 출연 기록을 세운 62년은 <열녀문>과 <로맨스그레이>(1963, 이상 신상옥)로 자칫 굳어질 뻔한 ‘청상과부’의 이미지를 탈색시키는 효과를 거두게 했다. 그런 잔제는 <29세의 어머니>와 같은 캐릭터에 남아 있긴 했으나 <열녀문>의 경우처럼 양반집 과부 며느리(최은희)가 머슴(신영균)과 정분에 빠져 임신을 하거나, <로맨스그레이>에 나타나듯이 단란한 가정의 가장인 대학교수(김승호)를 유혹해 돈을 뜯어내는 꽃뱀 수준의 호스티스(최은희)로 전환, 지금까지와는 상반된 여성상을 그려 보였다. 특히 <로맨스그레이>에서 여주인공 민자의 입술 오른쪽 볼에 그려놓은 검은 점은 화류계 여성다움을 나타낸 차밍 포인트로 작용하였다. 이와 같은 캐릭터는 <지옥화>의 양공주 쏘냐와 함께 최은희 연기세계의 동적인 한 축을 형성하는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사진] <로맨스 그레이>에서 김승호와 한 장면 [사진] <민며느리>에서 최은희는 연출에 도전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후 <벙어리 삼룡>(1964, 신상옥)과 직접 메가폰을 잡은 <민며느리>(1965), 신상옥 감독의 옴니버스 사극 〈이조여인잔혹사〉(1969) 등에 출연하여 일부종사(一夫從事)라는 봉건주의적 인습에 희생 되는 여성의 틀을 유지한 채 <날개부인>(1965, 김수용),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1965, 임원식, 나봉한) 등에 출연, 밀수품 장사에 뛰어든 공무원(김진규)의 아내, 쇄국정책을 펼치는 대원군(김승호)의 섭정에 맞서 개혁·개방 정책을 추구하다가 죽음을 맞는 민비 역 등을 통해 연기의 폭을 넓혀 나갔다.
한국영화의 전설로만 내려오는 1955년의 <춘향전>(이규환)에서 이몽룡 역을 맡아 불시에 ‘영화계의 귀공자’로 떠오르며 장안을 들썩이게 만들었던 이민은 1950년대 또 다른 흥행작 <자유부인>(한형모)과 홍성기의 멜로드라마를 통해 ‘미국화’된 한국 청년의 표상이 되었다. 한국전쟁 후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미국문화의 홍수 속에서 한국영화 또한 예외는 아니었으며 이는 영화의 스타일이나 배우들의 이미지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민은 특히 미국식 스타일과 미국문화를 전달하는 ‘스타’로 상징되었다. 그렇다면 할리우드 영화가 범람하던 1950년대, 한국영화의 성장 속에서 이민이 어떠한 과정으로 ‘미국’이라는 나라와 ‘미국문화’를 보여주는 스타 이미지를 획득하게 되었는지 구술 1) 과 작품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그림1) <춘향전>(이규환, 1955)의 홍보용 스틸, 이몽룡 역의 이민과 성춘향 역의 조미령 영화 스타 이민의 탄생 1921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난 이민(본명 이시중)은 영화 속 이미지를 통해 얻은 ‘귀공자’라는 호칭이 무색하리만치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삯바느질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어머니 앞에서 영화를 보고 싶다며 울며 보채던 어린 소년은 중학교에 입학한 후 대학진학을 위해 장기간의 계획을 세웠다. 일본의 상급학교 입학시험을 보기 위하여 “꼬박 3년 동안 광고 철판을 모아 팔아” 어렵게 여비를 마련한 그는 1940년 스무 살의 나이에 “무릎 기운 옷을 입은 거지꼴”을 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인도 들어가기 힘들다는 ‘명문’ 우라와(浦和)고등학교의 입학시험에 강원도 산골 청년이 합격한 ‘사건’은 급기야는 신문 기사화되어 조선의 유지들로부터 집 한 채 값에 버금가는 장학금을 지원 받기도 했다. 하지만 유학 생활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아버지의 숙환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한 지 1년도 채 못 되어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교 예과를 거쳐 당시 졸업 후 가장 전망이 좋다는 광산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할 무렵의 어느 날 길거리에서 강춘 감독의 눈에 띠면서 평탄할 줄만 알았던 미래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강춘 감독의 끈질긴 권유에 못 이겨 16밀리 영화인 <불멸의 밀사>(김영순, 1947)와 <연화>(강춘, 1949)에 출연하며 영화배우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한두 번의 외유로 그칠 줄 알았던 영화 일은 전쟁 때문에 지속되었다. 엘리트 출신이라는 배경 때문에 영화계의 그 누구보다 넓은 인맥을 가지고 있던 그는 한국전쟁 시기 피난지의 영화인들에게 직‧간접으로 도움을 주며 필연적으로 영화계와 인연을 맺어나갔다. 영화 현장에서 도움이 되었던 서울대 출신이라는 타이틀과 배경은 활동하는 내내 그가 맡은 배역과 스타 이미지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림2) <불멸의 밀사>(김영순, 1947) 신문광고 (그림 3) <연화>(강춘, 1949) 신문광고 한국전쟁 시기 그는 전장에서는 군영화 <화랑도>(강춘, 1951)의 주연을 맡았으며, 영화인들의 새로운 아지트가 되었던 피난지 대구에서는 환도 후 같이 작업을 하게 되는 전택이, 노경희 부부와 홍성기, 한형모 감독뿐만 아니라 평생 잊지 못할 가르침을 준 스승 이규환 감독을 만났다. <춘향전>(이규환, 1955)의 이몽룡 역을 맡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이때의 인연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구술에서 그는 전쟁시기의 경험으로 <화랑도>의 촬영을 맡은 이학순에게는 미군부대 PX를 통해 현상 재료를 조달한 것을, <춘향전>의 감독 이규환에게는 대구 은성다방에서 차 대접을 한 것을 에피소드로 풀어놓기도 했다. (그림4) <화랑도>(강춘, 1951)의 신문광고 전쟁 후 제작된 <춘향전>의 대구 촬영현장에서도 본의 아니게 인맥을 총동원해 현장에 도움을 주었다. 산 속에서 진행된 촬영현장에 조명기를 설치하기 위해 이민은 광산학과의 인맥을 동원해 인근의 달성광산에서 전신주 17개를 설치해 전기를 조달했다. 그는 자신이 아니었으면 촬영을 못했을 수도 있었던 이 일화에 대해 “망신은 당했지만 무사히 촬영을 마쳐 흥행으로까지 이어져 다행”인 일로 회고했다. 얼결에 발 디딘 당시의 한국영화계는 이렇듯 그가 배우뿐만 아니라 제작자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그림5) <춘향전>(이규환, 1955)의 경복궁 촬영 스틸, 방자 역의 전택이와 이도령 역의 이민 (그림6) 연출 중인 이규환 감독(가운데)과 전택이(좌), 유현목 조감독(우) 한편 춘향 역의 조미령을 비롯해 변사또 역의 이금룡, 방자 역의 전택이, 향단 역의 노경희 등 <춘향전>에 함께 출연한 대부분의 배우들은 식민지시기부터 영화와 무대에서 숙련된 연기를 보여준 노련한 연기자들이었다. 때문에 무대 경험도, 35밀리 영화 출연의 경험도 없던 그는 모든 역할의 대사를 철저하게 암기하고 극도로 긴장된 상태에서 촬영에 임했다. <춘향전>의 경험은 이후 카메라가 ‘타르르륵’ 돌아가면 극중의 인물이 될 수 있는 연기습관을 몸에 배게 하고, 영화와 연기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갖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춘향전>은 기존의 관중을 끌어들이던 무대극들을 쓰러뜨리고, “귀신이 붙었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기록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한국영화의 붐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이민 개인에게도 영화배우라는 정체성을 깨우치게 한 중요한 작품이 된 것이다. (그림 7) <춘향전>의 대구 촬영 현장 스틸, 이민(맨 뒷줄 왼쪽), 조미령, 석금성, 이금룡, 이규환 감독(위에서부터 셋째 줄 가운데)을 확인할 수 있는 사진이다. <춘향전>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1956년, 그는 또 한편의 성공작인 <자유부인>(한형모)에 출연했다. <춘향전>에 이은 <자유부인>의 흥행 성공, 무대예술의 쇠퇴 등에 힘입어 한국영화산업은 빠른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운명의 손>(1954)부터 할리우드 영화 스타일을 전면에 내세운 한형모 감독은 당대 한국사회의 세태를 풍자한 이야기에 할리우드 스타일을 매치해 ‘양화’와 경쟁할 수 있는 ‘방화’를 탄생시켰다. 당시 파격적인 신인의 기용(김정림)과 더불어 화제가 되었던 것은 바로 전 해 폭발적인 흥행으로 한국영화의 재건을 알렸던 <춘향전>에서 이몽룡으로 분했던 배우 이민을 주인공 김정림에 춤바람을 불어넣는 대학생 춘호 역으로 캐스팅 한 것이었다. (그림 8) <자유부인>(한형모, 1956)에서 주인공 오선영(김정림)에게 춘호(이민)가 춤을 가르치는 장면 유려한 춤 솜씨를 자랑하는 “이민이 아니면 안 될 영화”였다는 이야기는 “학생 시절 책으로 배운 춤과 전쟁 시기 대구의 미군부대와 공군 댄스홀에서 춤을 춰봤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춘향전>의 이몽룡으로 쌓아올린 이미지에 손상이 날 법 한데도 화려한 춤 실력을 뽐내며 유부녀를 유혹하는 건들건들한 바람둥이 청년의 역할을 맡은 것은 아마도 주연 배우보다 높게 책정된 출연료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는 새로운 역할에 대한 도전의식이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문화가 대중의 일상뿐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영향을 끼치고 있던 전쟁 후 한국사회의 모습을 다양한 캐릭터들을 통해 풍자한 <자유부인>에서 대학생 춘호는 특히나 미국문화의 영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은 젊은이를 상징하는 중요한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춘호 역에 이몽룡을 맡았던 이민이 캐스팅된 것에 세간의 비판과 비난도 뒤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연기 변신을 위해 과감한 선택을 했으며 결과적으로 <자유부인>의 춘호는 이민의 프로필에서 <춘향전>의 이몽룡과 더불어 가장 유명한 역할로 남게 되었다. 또한 이 역할 이후 이민은 미국화된 한국 청년의 전형을 지속적으로 보여주며 자연스럽게 미국과 미국문화를 상징하고 동경하게끔 하는 스타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그림 9) <자유부인>의 댄스홀 장면의 현장 스틸, 뒷줄 가운데 이민, 아랫줄 왼쪽부터 김동원, 김정림, 한형모 감독, 한 사람 건너 노경희, 안나영. 이민은 구술을 통해 사진에서 보이는 크레인을 댄스홀 장면을 위해 제작했다고 증언했다. 미국영화의 공세와 영화 스타 시대의 도래 1950년대 할리우드영화를 비롯한 미국 대중문화의 공세는 한국영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게다가 전쟁 전에 비해 한국 내 개봉 시차가 줄어들고 시네마스코프 영화가 수입되기 시작하면서 미국영화의 인기는 더욱 더 높아져갔다. 여기에 미국에서 들어온 소비재 또한 미국영화의 인기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선망의 대상이자 열등감을 느끼게 하고, 언젠가는 이루어야 할 꿈으로 남아있는 미국적 생활양식과 소비는 미국영화에 등장하는 스타의 모방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모방은 원용진의 표현처럼 “영어로 말하기, 다방에서 커피 마시기, 할리우드 영화 보기 등은 단순히 언어, 물질,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을 넘어 자신을 드러내는 이름표 역할을 했” 2) 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모방을 가능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잡지였다고 말할 수 있다. “미국문화 열풍”으로 영화잡지뿐만 아니라 여성지에도 영화소개와 더불어 미국 여배우의 이미지, 사생활, 섹슈얼리티 등이 전시되고 상품화 되었다. 3) 이러한 모방 혹은 “이름표 역할”은 할리우드영화와 경쟁해야만 하는 한국영화에도 자연스럽게 적용되었다. 1950년대 제작 편수가 많지 않은 한국영화에서 배우를 스타로서 ‘추대’해주는 방식이 할리우드 스타의 모방이었고 이는 주로 잡지의 화보를 통해 이루어졌다. 당시 영화잡지에서 배우를 지칭하는 방식은 “한국의 ◯◯◯”였다.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김지미”, “한국의 잉그릿드 버그만=최은희”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이러한 모방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한국배우의 이미지를 상승시키는 데 있어서 유용했을 것이다. (그림10) 『스크린』 1957년 2월호의 표지모델을 장식한 최은희 (그림11) 『현대영화』 1958년 1월호의 표지모델을 장식한 조미령 한국영화가 할리우드영화와 차별화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흥행계의 재편으로 무대 출신의 스타 배우들이 급격히 영화로 이동한 것은 한국영화의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연기력과 스타성이 담보되는 배우들의 합류는 지방흥행업자들의 투자가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 한국영화 제작 상황에서 가장 큰 변수로 작용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1950년대 한국영화의 성장에서 중요하게 거론되는 ‘국산영화 면세 조치’가 영화를 흥행 시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매체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이에 수반되는 배우들의 유입이 없었다면 그와 같은 급속한 성장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춘향전>과 <자유부인>으로 한국영화가 흥행 경쟁력을 인정받은 1950년대 중후반은 바야흐로 배우가 흥행 시장에서 중요한 카드로 기능하는 ‘영화 스타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무대 출신의 배우들은 오랜 기간 축적된 경험과 숙련된 연기력을 바탕으로 영화에서 각자의 이미지에 맞는 연기 스타일을 빠른 속도로 구축해나갔다. 스타 이미지는 1950~1960년대 내내 겹치기 출연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한국영화산업 내 인적 규모에 대비해 대량의 영화가 제작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무대 출신이 아닌 영화로 데뷔한 배우들 역시 새로운 이미지를 찾아내는 것이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방법이었다. 연기 경험과 수련의 부족으로 이들은 시대물보다는 주로 현대물에서 활약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고전적인 이미지보다는 외형적인 세련됨을 강조하는 현대적인 이미지를 내세워야 했다. 대표적으로 김지미, 최지희, 김의향 등의 여성배우들은 아프레걸 이미지로, 남궁원, 윤일봉, 김석훈 등의 남성배우들은 수트 차림의 엘리트 이미지로 멜로드라마에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아직 다양한 장르 영화가 등장하기 전이었던 1950년대 중‧후반 흥행작을 내놓기 위한 고군분투의 과정이 그려지는 한국영화의 이면에는 이렇듯 배우들의 스타 이미지 찾기의 과정 또한 존재했다. (그림12) 잡지 『영화세계』 1956년 1월호에 실린 이민 화보. 왼쪽 페이지의 할리우드 스타들과 함께 실린 모습이 흥미롭다. 이러한 상황에서 배우 이민은 미국을 경험한 지식인 엘리트 혹은 미국문화의 수혜를 받은 젊은이의 이미지를 대변했다. <자유부인> 이후 이민이 출연한 다양한 영화들에서 그는 ‘트렌치코트’ 차림에 ‘중절모’를 쓰고 한 손에는 ‘카메라’를 든 ‘가장 최신식 스타일’을 한 도시적인 청년의 이미지를 전달했다. <애인>(1956), <실락원의 별>(1957)을 비롯한 1950년대 전성기 홍성기의 멜로드라마뿐만 아니라 <촌색씨>(박영환, 1958), <모정>(양주남, 1958), <남성 대 여성>(한형모, 1959), <비오는 날의 오후3시>(박종호, 1959),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신상옥, 1959), <돌아온 사나이>(김수용, 1960)에 이르기까지 그는 일관되게 미국화된 엘리트 남성 이미지로 관객에게 다가갔다. 전성기로 기록할 수 있는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작품목록을 살펴보면 외려 <춘향전>의 이몽룡이라는 역할이 생경해보일 정도로 그는 현대물에 최적화된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이민이 전달한 미국의 이미지 그 중에서도 <자유부인>의 춘호는 미국문화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당시 젊은 세대의 모습을 세밀하게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이민의 스타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이정표가 되었다. 블루종과 비니를 착용하고 사진기를 손에 든 춘호는 ‘굿모닝’과 ‘굿나잇’ 같은 인사말을 비롯해 ‘마담’, ‘익스큐즈 미’, ‘아이 러브 유’ 등 영어를 일상적으로 구사하고 서양음악에 맞춰 댄스를 추며 위스키를 즐긴다. 키스하는 모습을 들켜도 “그저 프렌드인 여성과 뭐 키스 좀 했다고 해서 뭐가 상관” 있느냐고 반문하고 상대가 유부녀일지라도 “사랑하는 건 제 자유”라고 저돌적으로 접근하는 춘호는 전쟁 후 가치관이 급속도로 변화하는 혼란한 시대 상황 속에서 감정에 솔직하고 전통적인 규범에 반항하는 청년의 일면을 보여주었다. 이와 같이 입체적으로 완성된 <자유부인>의 춘호는 이후 여러 영화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되어 이민의 스타 이미지를 만들어나갔다. (그림13) <자유부인>에서 춘호가 오선영의 사진을 찍어주는 장면 (그림14) <남성 대 여성>(한형모, 1959)의 한 장면. 이민은 극중에서 잡지사 편집장 역할을 맡았다. 트렌치코트와 중절모를 착용하고 카메라를 손에 든 이민의 이미지는 미국영화 스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춘호라는 캐릭터로 극단화된 ‘미국적인 연애 방식’은 이민의 스타 이미지에도 꾸준히 적용되어 ‘아프레 역할’을 대표하는 남성배우로 평가받았다. 이러한 이미지 캐스팅을 바탕으로 이민은 약혼자(<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나 아내(<돌아온 사나이>)의 굴곡진 과거를 고뇌의 과정 없이 ‘쿨’하게 인정하거나 하룻밤 연을 맺은 여성에게 명함을 건네며 웃으며 헤어지는 시대에 걸맞지 않은 이질적인 모습(<모정>)으로 그려졌다. 여성 캐릭터들이 규범에 얽혀 감정과 상황에서 극단의 상황에 왕왕 처하는 것에 비해 이민의 캐릭터들은 적극적으로 여성에게 구애(<촌색씨>, <비오는 날의 오후 세 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림15)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신상옥, 1959)에서 명철(이민)과 영숙(최은희)이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이민은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다. 또한 ‘미국행’을 앞두고 있는 춘호의 상황설정은 앞서 설명한 그의 이질적인 행동들을 설득하는 배경이 된다. ‘미국행’이라는 배경으로 인해 춘호라는 캐릭터는 변화하는 한국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비현실적인 상황의 드라마적 첨가나 갈등 국면의 요소로 활용된다. <자유부인> 이후 그가 맡은 역할들의 다양한 ‘미국행’은 배우 이민의 스타 이미지를 완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흥미로운 것은 ‘미국행’ 혹은 ‘미국에서의 귀환’은 <자유부인>뿐만 아니라 <촌색씨>나 <비오는 날의 오후3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극의 갈등 상황을 유발하거나 해결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사건의 내부에서 얽히고설키는 역할을 한다기보다는 관계에 파문을 일으키는 외부의 요소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즉 미국이라는 나라와 미국문화를 동경하고 선망하지만 우리의 내부로 온전히 수용할 수 없는 ‘양가적인 감정’ 4) 이 이민이 맡은 역할들을 통해 잘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비 오는 날의 오후 세 시>에서 그가 맡은 미국 교포 출신의 종군기자 헨리 장은 <자유부인>의 춘호와 더불어 1950년대 한국영화에서 이민이 보여주는 스타 이미지가 집대성되어 있는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림16) <비오는 날의 오후3시>(박종호, 1959)에서 이민은 미국 교포 출신의 종군기자 헨리 장 역할을 맡았다. 그는 극중에서 군복 차림에 사진기를 소지하고 지프차를 타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림17) 헨리 장은 사진을 찍으려 방문한 탑골공원에서 우연히 만난 수미(김지미)를 숙소 아래층에 있는 클럽에 데려와 밴드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스타 이민에게는 아이로니컬하게도 1950년대 말부터 한국영화산업의 규모가 성장하고 다양한 장르의 영화가 제작되면서 맡을 수 있는 역할이 오히려 한정되기 시작했다. 1959년까지만 해도 그가 가진 스타성으로 출연료와 작품 편수에 있어 톱스타로 분류되긴 했지만 다양한 배우들의 등장으로 경쟁력에서 뒤처지기 시작한 것이다. 고착된 이미지는 오히려 그에게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가 영화 제작에 직접 나선 배경이 되었을 것이라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영화제작은 실패로 돌아갔다. <흐르는 별>(김묵, 1958), <비오는 날의 오후3시>(박종호, 1959), <꿈이여 다시 한 번>(백호빈, 1959) 등을 연달아 제작한 그는 흥행과 운영의 실패로 2년 여 간 칩거 생활에 들어갔다. 이후 재기를 위해 다작을 하며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 나가는가 했지만 <춘향전>과 <자유부인>처럼 대중에게 그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작품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결국 그는 일본과 한국을 넘나들며 사업에 매진하며 영화에서 멀어졌고, 대중에게도 이민은 과거의 스타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1950년대 한국영화의 성장과정에서 보여준 모습들은 시대를 투영하는 이미지로 여전히 존재한다. 1) 공영민, 「이민 편」, 한국영상자료원 편, 『한국영화사 구술총서 02 :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1』, 이채, 2005 ; 이순진, 「이민 편」, 한국영상자료원 편, 『2011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 대구 경북 지역 영화사』, 한국영상자료원, 2011. 2) 원용진, 「한국 대중문화, 미국과 함께 혹은 따로」, 김덕호‧원용진, 『아메리카나이제이션: 해방 이후 한국에서의 미국화』, 푸른역사, 2008, 173쪽. 3) 강소연, 「1950년대 여성잡지에 표상된 미국문화와 여성담론」, 상허학회, 『1950년대 미디어와 미국표상』, 깊은샘, 2006, 116~117쪽 참조. 4) <비오는 날의 오후3시>가 갖는 미국에 대한 양가성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조영정, 「미국영화에 대한 양가적 태도 : <비오는 날의 오후 세시>를 중심으로」, 『매혹과 혼돈의 시대』, 도서출판소도, 2003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수용 감독은 자신이 영화 연출에 임하는 태도와 방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각본을 받으면 주어진 제작 일정과 예산 범위 내에서 등장인물들을 어떻게 운용하고, 영화의 도입부터 결말까지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설계한다. 그리고 밤에 잘 때마다 머릿 속에 구축해놓은 영화 한 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다’. 촬영을 한 부분은 찍은 장면대로, 아직 안 찍은 부분은 콘티대로 연결하면서 작품 전체를 몇 번이고 ‘보는’ 연습을 하다 보면 실제로 제작이 끝나는 시점에는 머릿 속에서 이미 여러 차례 ‘다 본’ 영화대로 완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어떻게 시청각 이미지로 구현하는가를 화두로 잡고 있다는 뜻이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영화는 연극이 아니고 라디오극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영화적으로 접근하는 화면들을 구축하여 정서와 이야기를 전달할 것인가를 꼼꼼하게 계산했다. 덕분에 촬영 현장을 신속하게 지휘했고, “사람을 지루하게 하는 건 참 싫다”는 본인의 말대로 그는 영화 속에서 불필요한 반복이나 서사 전개가 지연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리하여 김수용은 1958년 데뷔작 <공처가>부터 2000년에 개봉한 <침향>에 이르기까지 무려 109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그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꼽히는 이유는, 기념비적인 다작을 이룬 영화 장인일뿐만 아니라 영상예술로서의 영화에 대한 신념을 일관되게 견지한 영화 작가이기 때문이다. 1950년 서울사범학교 졸업 후, 김수용이 교단에 서자마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그는 9.28 수복 후에 징집되어 군에 입대한다. 전시에는 통역장교로 근무하고 휴전 후, 1954년에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에 배속된다. 근무지는 서울 중구 필동 남산에 위치한 적산가옥이었는데 편집실, 녹음실, 영사실 및 스튜디오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국방부 영화과 시설에서 군 영화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영화의 거의 모든 작업들이 이루어졌다. 전후 1950년대 중후반에는 민간 현상소나 편집실 등의 후반작업 시설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김수용은 이곳에서 영화인들의 작품 제작 현장을 눈여겨보면서 전반적인 영화 제작 과정을 터득한다. 그 무렵 정훈국 영화과는 종전의 군 뉴스 제작에서 한발 나아가 홍보 및 교육용 문화영화를 시도하였고, 김수용은 군 교육 문화영화 <잊지말자 6.25>(1955)를 감독하며 처음으로 영화 연출을 하게 된다. 이어서 <10분간 휴식>, <윤 중사의 수기>, <해뜨는 마을> 등의 군 영화들을 연출하였는데, <10분간 휴식>은 군인들이 행군 도중 휴식 시간에 나누는 이야기가 영화 속에서 장면화되었다가 현실로 돌아오는 구조로 만들었다. (사진 1)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 근무 당시, 가운데가 김수용 김수용은 <배뱅이굿>(양주남, 1957)의 조감독을 맡아 장편극영화 제작 현장에 참여하고, 군 영화들을 연출하면서 영화감독으로서의 소양을 쌓았다. <배뱅이굿>의 제작자였던 김보철이 이듬해 그에게 영화 <공처가> 연출을 의뢰한다. 그리하여 그는 정훈국 영화과 간부들의 배려 하에 근무시간 외의 시간에 촬영을 진행하여 장편극영화 감독으로 데뷔한다. (사진 2) <공처가>(김수용, 1958) 포스터. 이 작품은 김수용이 현역 군인 시절에 감독으로 데뷔한 작품이다. <공처가>는 장소팔, 김희갑, 구봉서, 백금녀 등의 당대 희극배우들이 주연을 맡은 코미디 드라마였고 관객의 반응을 얻는 데 성공한다. 때문에 “촬영소에 있는 김 대위”에게 연출 의뢰가 계속 들어왔고, 김수용은 <3인의 신부>(1959), <청춘배달>(1959)을 연출하여 그가 군 복무 시절에 감독한 작품들은 총 3편이다. (사진 3) <청춘배달>(김수용, 1959)을 관람하기 위해 명보극장에 모여든 관객 이후 군복을 벗고 본격적인 직업 영화감독의 세계에 들어선 김수용은 <애상>(1959)을 시작으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고,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에서 촬영을 담당했던 전조명과 장석준이 그의 작품들을 다수 촬영한다. 전조명은 <3인의 신부>(1959)의 촬영감독으로 데뷔하여 <혈맥>(1963), <굴비>(1963), <갯마을>(1965), <일요일의 손님들>(1973), <도시로 간 처녀>(1981) 등의 작품들을 촬영했고, 장석준은 <구혼결사대>(1959)를 시작으로 <버림받은 천사>(1960), <만선>(1967), <안개>(1967), <일본인>(1968), <봄봄>(1969), <토지>(1974) 등의 작품들을 촬영했다. (사진 4) 모파상의 소설 「 귀향 」 을 번안한 영화 <돌아온 사나이>(김수용, 1960)의 스틸사진. 주인공 박남우(배우 김진규)는 전쟁터에서 당한 부상 때문에 얼굴에 심한 화상 흉터가 있다. 영화 속에서 실감나는 화상 특수 분장으로 등장한다. 1962년에는 한양영화공사가 홍콩과 합작한 <손오공(원제 화염산(火焰山)>의 한국 측 감독을 맡아 홍콩에서 연출한다. 한국 배우 김희갑, 김지미, 조미령, 양훈, 최무룡, 양미희 등이 출연했다. 손오공 일행의 여정이 중화권에서는 익숙한 이야기로 해마다 영화화되었지만, 김수용은 한국 관객을 감안했을 때 캐릭터 및 설정 소개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직접 영화 도입부를 작성하여 추가 촬영했다고 한다. (사진 5) <손오공(원제 화염산 火焰山)>(김수용, 1962) 촬영현장. 김수용 감독(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손오공 역을 맡은 배우 김희갑(왼쪽에서 두 번째)에게 연기 지도를 하고 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서 <사춘기여 안녕>(1962), <청춘교실>(1963)과 같은 청춘물 등을 선보이고, 1963년에 그의 초기 대표작으로 꼽히는 <굴비>, <혈맥>을 연출한다. 두 작품은 각각 라디오극과 연극 원작으로 김수용은 이를 영화적으로 소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혈맥>은 원작 희곡이 방공호 토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을 영화적으로 장면화 하기 위해 판잣집으로 바꾸고, 서울역 근처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판자촌 오픈 세트를 짓고 촬영했다. 도시 빈민의 현실을 그리고 있지만 인물 각자의 개성을 활력있게 그려내어 극이 암울하거나 무겁게만 느껴지지 않도록 연출했다. 이 작품은 1963년 청룡영화상, 1964년 대종상 주연상 · 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사진 6) <혈맥>(김수용, 1963)에서 열연한 배우 김승호(왼쪽)와 조미령(오른쪽) 1965년 작 <갯마을>은 오영수의 단편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김수용은 바다에 운명을 맡기고 살아가는 어촌 마을의 이야기에서 한국적인 드라마를 발견하고, 여배우들의 개성 있는 연기를 발현해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시집 오자마자 남편이 바다에서 실종된 주인공 해순을 비롯하여, 마을 아낙네 대다수가 과부로 동병상련을 나누며 삶의 애환을 함께 한다. 이들이 해질녘 해변가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장면에는 영화음악가 정윤주가 제안한 국악인 김소희의 창이 깔린다. 이 소리와 여인들의 건강한 육체가 바다를 배경으로 아름답게 어우러져, 인물들이 고난을 견뎌가는 명랑함이 서정적으로 전해진다. (사진 7) <갯마을>(김수용, 1965) 중 해변가 망중한 시퀀스. 김수용이 연출한 연기 앙상블, 전조명 촬영 감독이 담아낸 유려한 미장센 그리고 김소희의 창이 어우러져 탄생한 명장면이다. <갯마을>은 관객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여 문예영화의 흥행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 되었고, 이후 수많은 문예영화들이 기획·제작되는 데에 영향을 끼쳤다. (사진 8) <갯마을> 출연진을 연기 지도 중인 김수용(왼쪽). 누워있는 이가 배우 이낙훈이고 오른쪽부터 배우 신영균, 고은아, 황정순 (사진 9) <갯마을>의 촬영감독인 전조명(왼쪽)과 김수용 “바다 냄새까지도 스크린에 담고자 했다”는 <갯마을> 이후 김수용은 바다를 테마로 한 작품 <만선>(1967), <물보라>(1980)를 연출했고, 이 작품들에 대한 애정을 표한 바 있다. <만선>은 천승세의 희곡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바다에 생계와 목숨을 걸고 분투하는 어촌민들을 그려냈다. 당대 최정예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여, 만선으로 돌아와도 선주(船主)로부터 제 몫을 받을 수 없는 어부들의 갈등과 바다에 자식을 잃은 가족의 비애와 사랑을 열연한다. (사진 10) <만선>(김수용, 1967)에서 만선의 기쁨을 누리는 어부들. 가운데가 곰치 역을 맡은 배우 김승호 (사진 11) <만선>에서 임금 문제로 선주와 갈등하는 어부들. 맨 앞이 배우 김승호, 그 뒤로 허장강(왼쪽 세 번째)과 김칠성(왼쪽 다섯 번째) (사진 12) <만선>에서 폭풍우를 겪고 만신창이로 돌아온 배를 맞이하는 마을 사람들. 앞줄 오른쪽부터 배우 남정임, 주증녀, 김칠성 한편 <갯마을>과 같은 해에 개봉한 <저 하늘에도 슬픔이>는 1965년 최고 흥행작으로, 초등학생 이윤복이 쓴 일기인 『저 하늘에도 슬픔이: 11세 소년이 외치는 인간의 소리』(서울: 신태양사, 1964)를 영화화했다. 가난이라는 굴레에 쓰러지지 않고자 애쓰는 윤복이의 여정이 동요 따오기 선율과 함께 마음 아리면서도 담대하게 펼쳐진다. (사진 13) <저 하늘에도 슬픔이>(김수용, 1965)에서 윤복이네 식구가 사과로 끼니를 때우는 장면. 윤복의 아버지로 출연한 배우 장민호(가운데)는 이 영화의 제작자이기도 하다. 왼쪽부터 배우 정해정(순나 역), 김천만(윤복 역), 이지연(태순 역), 김용연(윤식 역) (사진 14) <저 하늘에도 슬픔이>에서 윤복(왼쪽)에게 일기가 책으로 출간된 사실을 알려주는 약사(오른쪽)로 출연한 최현민은 이 영화의 기획자이자 희곡 <만선>을 연출한 연극인이기도 하다. 한편 이 영화는 대만에서 <추상촌초심 秋霜寸草心>이라는 제목으로 상영되었다. 아역 배우들의 연기가 출충하고, 특히 배우 김천만(이윤복 역)은 이후 김수용이 연출한 <맨발의 영광>(1968)에서도 서울시립아동보호소 축구팀원으로 열연한다. (사진 15) <맨발의 영광>(김수용, 1968)에서 헝겊으로 만든 공을 가지고 맨발로 축구 연습을 하는 진호(왼쪽, 배우 김천만) 이외에도 김수용은 <사격장의 아이들>(1967), <가위 바위 보>(1976), <달려라 만석아>(1979) 등의 어린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다수 연출했다. 교단에 서자마자 전쟁이 발발하여 뜻하지 않게 학생들과 헤어졌던 기억을 갖고 있는 그는 항상 아이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품어왔고, 아역들이 촬영장에서 위축되지 않고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사진 16)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 아역 배우에게 연기 지도 중인 김수용(왼쪽)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은 휴전선 근처 군 사격장 인근 마을에서 포탄 파편을 주워 생계를 돕는 아이들을 통해 전후에도 지속되는 전쟁의 상처를 그려낸다. 이 영화는 기적 같은 행운이나 해결책 없이, 아이들이 겪고 있는 비극적인 현실을 냉정하게 제시하는 채로 끝나는데 바로 이 점이 작품을 울림 있게 한다. (사진 17)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의 한장면. 아이들이 행여 불발탈이면 폭발할지도 모르는 탄피를 안고 서로 차지하겠다고 뒹구는 장면들은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한다. (사진 18)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에서 영규(배우 송현규)는 불발탄이 터지는 바람에 머리를 다치고 고막이 터진다. 연기 경험이 없던 아역 송현규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호평을 받았고, 김수용은 이 작품으로 제5회 청룡영화상 감독상을 수상했다. 1966년 한국영화 흥행 1위 역시 김수용이 연출한 작품 <유정>이다. 서울 개봉 관객만 32만명을 돌파하여 전년도 자신이 세운 흥행 기록(<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 서울 개봉 관객 28만 돌파)을 갱신했다. 이광수 소설을 영화화한 <유정>은 일본 로케 촬영으로 북해도 설경을 담아낸 컬러 작품이고, 배우 남정임의 데뷔작이다. 김수용은 소수의 스타들에게만 작품이 집중되는 한국영화 제작 관행을 타파하고 연기자층을 넓히기 위해, 기성 배우들의 아성에 도전하는 신인 배우들을 육성하고자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그가 영화배우로 발굴한 남정임은 여배우 트로이카(남정임, 문희, 윤정희) 중 한 명으로 성장했고 한성, 이훈, 최난경, 주연, 김정철, 임지운 등이 당시 김수용이 주목한 신인 배우들이었다. 이후 강석우(<여수>(김수용, 1978) 주연), 금보라(<물보라>(김수용, 1980) 주연) 등이 그의 작품을 통해 배우로 데뷔하여 활발히 활동했다. (사진 19)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에서 배우 한성(왼쪽)과 배우 전계현(오른쪽). 한성은 이 작품에서 겹치기 출연을 하느라 바쁜 톱스타로 등장한다. (사진 20) <웃음소리>(김수용, 1978)에서 주인공 학자를 연기한 배우 남정임. 김수용 감독 작품으로 데뷔하고 은퇴한 배우 남정임의 마지막 영화 출연작이다. 1967년에는 김수용이 데뷔 9년차 감독으로서 이제껏 그의 연출작들에서 함께 일해 왔던 스태프들과 이상적인 호흡을 자랑하는 일종의 ‘드림팀’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팀워크를 바탕으로 만든 <만선>, <어느 여배우의 고백>, <산불>, <안개>, <사격장의 아이들>, <까치소리> 등은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는 수작으로 꼽힌다. (사진 21) <산불>(김수용, 1967) 촬영 현장을 지휘하는 김수용(가운데 흰 모자 쓴 사람). 그는 1977년에 이 작품을 컬러 영화로 스스로 리메이크 하기도 했다. (사진 22) <산불>(김수용, 1967)에서 열연하는 배우 신영균(왼쪽)과 도금봉(오른쪽). 차범석의 동명 희곡을 영화화했다. 한국전쟁으로 여인들만 남아있는 마을에 빨치산 규복이 숨어든다. 그를 둘러싼 여인들의 욕망과 파국을 통해 전쟁의 비극을 이야기한다. <어느 여배우의 고백>(1967)은 1960년대 한국영화계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대한 영화’이다. 주연 배우들이 실명으로 출연하고 당시 영화 제작 현장과 기자재들, 스태프들 그리고 이른바 ‘충무로 영화인들’의 문화와 실정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심지어 김수용 본인도 감독으로 출연한다. 왜냐하면 이 작품의 제작에 투자한 지방흥행사(<어느 여배우의 고백>에는 호남 흥행사가 제작자와 면담하는 장면도 있다)가 흥행 감독으로 유명한 김수용의 모습도 관객들이 스크린에서 보길 원한다며, 감독이 직접 출연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는 당대 관객들의 관심이 관람하는 영화 뿐만 아니라 이러한 영화를 ‘만드는 이’와 한국영화계로까지 확장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사진23)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에서 영화감독으로 출연하는 전창근 감독 (사진24)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 위의 컷 다음에 등장하는 영화 촬영 장면에서 김수용 본인(썬글라스를 쓴 사람)이 감독으로 출연한다. (사진25)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 촬영 현장에서 배우 김진규(왼쪽)와 김수용(오른쪽). 이 작품에서 김진규는 신인 배우 남정임을 지원하는 원로 배우로 출연한다. 한국 모더니즘 영화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안개>(김수용, 1967)는 한국영화의 혁신을 목표로 기획되었다고 한다(제작 김동수· 황혜미, 원작·각본 김승옥).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을 영화화한 <안개>는 입도선매 없는 자체 제작이었고, 제작자들의 간섭도 없었기 때문에 감독이 비교적 구애받는 바 없이 작품에 몰두할 수 있었다. 이를 김수용은 이제껏 쌓아온 영화연출 역량을 제약 없이 발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그리하여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실재와 환상, 현재와 과거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새로운 감각의 작품으로 연출했다. (사진26) <안개>(김수용, 1967)에서 기준(오른쪽, 배우 신성일)의 고향인 무진으로 가는 버스 안. 뒤쪽 엑스트라 중 모자 쓰고 담배 문 사람이 원작자인 소설가 김승옥이다. <안개>는 1967년 제14회 아시아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한국의 모더니즘 영화로 주목 받고, 관객의 호응도 얻었다. 일찍이 김수용은 <굴비>(1963)를 감독할 무렵부터 기존의 인습적인 한국영화 표현 방식에 회의를 느끼고, 이를 탈피하는 연출을 강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한 시도는 앞서 <갯마을>(1965)의 ‘시네포엠’적인 몽타주나 <까치소리>(1967)에서 의식의 흐름을 영상화한 장면들에서도 볼 수 있으며, 이후 김수용 특유의 영화적 개성으로 발전한다. <야행>(김수용, 1973년 제작·1977년 개봉)은 그가 “시간과 공간이 항상 유동적이고 주인공이 잘 흔들리고 있다.” 1) 는 점에서 <안개>와 비슷한 시나리오라고 회고한 작품이다. 프리즈 프레임을 통한 비약과 플래쉬백, 점프컷 등을 활용하여 주인공의 심상을 예상치 못한 방향과 템포로, 때로는 권태롭게 때로는 위트 있게 표현한다. <화려한 외출>(1977), <웃음소리>(1978)에서도 선형적인 시공간 구성을 탈피하고, 인물의 내면을 대사 없이 영상과 사운드만으로 직조하는 과감한 시도를 전개하기도 했다. (사진27) <야행>(김수용, 1977)에서 길 가던 행인이 던지는 추파를 거절하는 주인공 현주(배우 윤정희) <수전지대>(김수용, 1968)는 김수용의 조감독이었던 이원세 감독의 오리지널 시나리오(6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부문 입선작)를 영화화했다. 어릴 적 염전마을에서 자라난 이원세 감독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다. 문예영화를 다수 연출했던 김수용은 그의 조감독들에게 장차 감독이 되려면 문학적 감수성과 글쓰기에 대한 이해를 갖추고, 반드시 시나리오를 쓸 것을 당부했다. 그렇게 김수용의 조감독을 거쳐 데뷔한 감독들로는 조문진, 이원세, 김수형, 정지영, 장길수 등이 있다. (사진28) <수전지대>(김수용, 1968)에서 아낙네들이 소금을 훔치는 장면. 염전마을 사람들은 낮에는 소금밭에서 일하고, 밤이 되면 그 소금을 훔쳐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사진29) 동료 감독들과 야유회. 1960년대 후반, 왼쪽부터 이만희 감독, 김수용 감독, 김기덕 감독 1970년대에도 김수용은 소설을 원작으로 한 <토지>(1974), <극락조>(1975), <황토>(1975), <내일은 진실>(1975), <내 마음의 풍차>(1976), <발가락이 닮았다>(1976), <야행>(1977), <화려한 외출>(1977), <웃음소리>(1978), <망명의 늪>(1978), <사랑의 조건>(1979) 등을 연출하는 한편 70년대 초반에는 홍콩 영화제작사 쇼브라더스의 초청을 받아 홍콩에서 <와와후링 娃娃夫人>, <우중화 雨中花>를 연출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1970년대 초반 할리우드와 미국 영화들을 접하고 돌아온다. 그는 당시 홍콩, 미국 영화계를 방문하고 영화 자본 및 기술력 측면에서 동시대 한국영화계와의 격차를 절감했다고 한다. 70년대 한국영화 시장은 침체기에 접어들었고, 검열에 발목이 잡히는 작품들도 적지 않았다. 김수용이 연출한 <가위 바위 보>(1976)는 베트남에서 서울로 피난 온 아이들이 엄마를 잃고 고아가 되어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베트남 패망을 이유로 주인공이 베트남 국기를 든 모습이 검열 제재를 받는다. <망명의 늪>(김수용, 1978)은 “70년대라는 특수상황 속에서 그것도 영화라는 간섭 심한 장르를 통해서 위선적 지식인을 비판한 것은 감독이 아직 작가로서의 한 가닥 맥박이 뛰고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2) 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당시 군사문화에 익숙한 지식인을 통해 ‘인간의 양심을 묻는 영화’라는 이유로 상영 제재를 가한 당국의 권유로 인해 제작비만 보상 받고 창고 속에 묻혀있었다고 한다. 80년대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도시로 간 처녀>(김수용, 1981)는 버스안내양들의 열악한 근로환경과 비인간적인 처우 등을 다루었는데, 상영 중지 및 작품 수정, 재상영 등의 고초를 겪었다. 당시 영화평론가협회는 ‘<도시로 간 처녀>의 상영중지에 대한 우리의 주장’이라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영화 창작의 자유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삐에로와 국화>(김수용, 1982)는 영화 속 북한의 모습이 “너무 잘 그려졌다”는 이유로 용공 시비에 휘말려 당국으로부터 재촬영을 강요받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연이어 작품 연출에 제약을 받는 와중에, 그가 의도적으로 서정적인 작품을 선택하여 검열 제재를 피하고자 한 영화가 <만추>(김수용, 1981)이다. 이 작품은 주연을 맡은 배우 김혜자의 호연과 더불어 늦가을이라는 짧은 시간을 배경으로 정일성 촬영 감독의 수려한 화면이 더해져, 원작인 이만희 감독의 <만추>(1966)와 함께 수작으로 꼽힌다. 그러나 중광의 삶을 다룬 <허튼 소리>(김수용, 1986)가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 과정에서 10여개 장면이 잘려나갔고, 김수용은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영화계 은퇴를 선언했다. 대학에서 후진 양성에 매진하던 그는 동료 교수이자 극작가 차범석의 권유로 1995년 일본영화 <사랑의 묵시록>을 연출하여 10여년만에 감독으로 복귀하고, 1999년 김지헌 작가와 정일성 촬영 감독과 의기투합한 ‘K.J.K필름’이란 이름으로 제작한 <침향>을 연출했다. (사진30) <만추>(김수용,1981)의 해외용 포스터. 주연 배우 김혜자가 제2회 마닐라국제영화제(1983)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김수용 감독은 당대 관객에게 소구되거나 당대 영화정책에 따른 제작 환경이 요청하는 작품들 모두를 다양하게 만들었다. 데뷔작부터 두각을 보인 코미디영화를 시작으로 청춘영화, 사극영화, 멜로영화, 문예영화 등의 여러 장르를 연출했다. 그는 빈민촌의 고단한 인생살이부터 오픈카를 타고 등교하는 최상류층 대학생들의 청춘까지 다양한 소재와 이야기를 소화하는 폭넓은 스펙트럼의 영화연출력을 갖춘 감독이었다. 그는 철저한 사전 콘티 작업과 함께 “제작기간을 지연시키는 일은 하지 않았고, 밝고 빠른 템포의 즐거운 필름을 칼날같이 약속기한 내에 만들어내는 것을 특기로 삼았다.” 3) 이처럼 김수용은 제작자와 관객, 평단 모두를 만족시키는 영화감독으로서, 1960년대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가 사회적 약자인 어린이들을 다룬 작품들은 아동물로만 소통되지 않고, 전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아 한국 대중영화의 폭을 넓히는 데 일조했다. 또한 문학적 감수성을 스크린에 발현하여 문예영화의 부흥을 이끄는 한편 자신만의 직관과 개성을 담은 영상 표현을 시도하여 한국영화 화법에 새로운 결을 가져왔다. 김수용의 영화 세계가 선사하는 대담한 담대함, 그리고 특유의 리듬과 위트는 세월이 변해도 관객을 흔드는 영화적 감각, 영화적 체험이다. 1) 권용숙,「김수용」,『한국영화사 구술채록 연구 시리즈 <생애사>』, 2012, 한국영상자료원, 351쪽. 2) 영화평론가 정용탁,「79 문화회고 <6> 영화」,《동아일보》, 1979년 12월 27일. 3) 김수용,「연출기: <혈맥>과 나」, <혈맥> DVD 소책자,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블루키노, 2012, 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