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의 초상
- 감독
- 김기
- 제작년도
- 1979
- 출연
- 이낙훈, 한진희, 김영애, 이인옥, 최병철, 사미자, 안병경, 김남일, 신동욱, 황건, 김민규, 이승일, 오희찬, 이지산, 이예성, 서준영, 임성포, 장춘언, 김지영, 조학자, 양춘, 박예숙, 김대현, 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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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흐름의 무상함을 모든 사람이 말하고 있지만 유명을 달리한 친지를 다시 떠올려 생각할 때만큼 절실하지는 않을 것 같다. 나 자신 원고 청탁을 받고 나서야 그이가 내 곁을 떠난 지 벌써 5년이란 시간의 공백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이와의 첫 만남은 196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는 차태진 사장과 극동흥업이라는 영화제작사를 창업하고 전속감독 겸 전무이사라는 이름뿐인 직함을 유지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나는 주로 돈을 벌 수 있을 만한 작품을 주로 만들고 있었으며 예술성이 높은 문예물을 외부에서 감독을 초빙하여 만들고 있을 때였다. 그 당시 내가 알고 지내던 몇 친구 중에 군에 장교로 몸담고 있는 괴상한 청년이 하나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나를 찾아 회사로 왔을 때 복도에 걸린 스틸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을 발견한 듯 입에 침이 마르지 않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은 연기자가 있었다. 그 주인공이 바로 '' 이낙훈 '' 아형이다. 당시 그이는 한운사 선생 원작, 유현목 감독의 < 아낌없이 주련다 >에 출연 중이었다. 그이의 존재를 내게 알려준 그 청년장교는 군인의 신분에 걸맞지 않게 다방면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으며 문화예술 부문에도 전문가 이상의 혜안을 갖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의 말을 빌린다면 ' 이낙훈 이란 배우는 앞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연기자가 될 것이다'라고 단언하였다. 한 지붕 아래에서 작품을 함께 하고 있지는 않지만 작업을 같이 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러한 엄청난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부끄러웠으며 그 부끄러움은 커다란 관심으로 바뀌어 그이를 가까이 만나보게 되었다. 우리 두 사람을 급속도로 가깝게 만든 것은 같은 K고등학교 동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 당시만 해도 봉건주의적이고 보수주의적 사상이 팽배해 있던 시절이다. K고를 나와서 무엇이 할 일이 없어 연극쟁이나 탈렌트 또는 영화판에 몸을 담아야 하느냐고 주위의 멸시와 냉대를 받아야 했던 그런 세상이었다. 동병상련이라고나 할까 우리 두 사람은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이가 되었으며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발전하였다. 나이는 필자가 두 살이 위였고 학년으로는 그이가 나보다 하나 아래였다. 우리 두 사람은 직업상으로만 가까웠던 것이 아니라 가정적으로도 친형제 이상의 교분을 유지하며 상호 간의 집안 대소사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돈독한 관계를 지키는 사이가 되었다. 그 당시 우리 두 사람은 신혼초였고 우연히도 안사람들의 나이가 동갑내기여서 안사람들끼리의 교분은 우리 두 사람의 사이를 능가할 만큼 돈독하였다. 그러한 연유로 하여 그이가 신혼초에 함께 모시고 살던 홀어머니의 소천시에는 ''호상''이라는 중책(?)을 맡아 모든 제의를 주재하는 기회를 갖기도 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필자는 그이의 친가 쪽뿐만이 아니라 처가댁의 여러 친척분들과도 친족 이상의 관계를 맺고 왕래하는 사이가 되었었다. '' 이낙훈 '' 아형은 필자가 감독한 많은 작품에 출연해 주었다. 역할의 크고 작음을 떠나 기꺼이 출연하여 직간접적으로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너무나 많은 세월이 흘러 하나하나 모두 연대별로 기억할 수는 없지만 < 늦어도 그날까지는 >, < 친정어머니 >, < 용사는 살아있다 >, < 결혼반지 >, < 원죄 >, < 동과 서 >, < 그대 이름은 >, < 섬마을 선생 > 등등이 주요 작품들이다. 그이는 참으로 만능의 연기자였다. 라디오 연기(성우)로 시작하여 연극, TV드라마 그리고 영화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른 매체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그 특성에 가장 잘 어울리는 연기를 개발하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이의 연기력이 얼마나 원숙하였는가 하는 것은 제1회 동아연극상 주연상 수상, 한국연극영화 최우수 연기상, TV부문 수상, TBC연기대상 주연상 수상, KBS연기대상 수상 등이 잘 대변해 주고 있다. 그이는 고교 재학시절부터 연극활동을 하였으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미학과에 진학하여서도 그의 연극 활동은 계속되었으며 미국의 MIAMI대학교에서 사학을 전공하면서도 연극에 대한 집념은 변함없이 이어졌다. 이와 같은 특별한 경력이 그로 하여금 원숙한 연기자로 성공할 수 있는 토양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이와 함께 한 작품 촬영중에 있었던 일화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 원죄 >라는 작품의 촬영중이었다. 주인공 역으로 연기와는 거리가 먼 신인 0군을 발탁하여 썼을 때의 일이다. 장면의 내용은 여름 장면이었고 촬영 시기는 한겨울이었으며 장소는 난방이 전혀 안된 세트장에서의 일이다. 살을 에이는 것 같은 추위 속에서 런닝셔츠만을 입은 상태로 촬영을 하는 장면이었다. 등장인물은 이낙훈 씨와 신인인 0군이었는데 0군의 연기가 너무 미숙하여 도저히 그대로 촬영할 수가 없었다. 리허설을 거듭하고 거듭해도 0군의 연기는 조금도 진전이 없었다. 모든 스탭들도 기다리기에 지쳤고 그날의 촬영을 포기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감독인 필자도 체념을 하고 현장을 떠나 대기실로 물러났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이낙훈 씨만은 포기하지 않고 현장에 남아 0군의 연기를 차근차근 지도하여 몇 시간 후에는 촬영을 할 수 있는 수준으로 이끌어갔다. 덕분에 이낙훈 씨는 심한 감기에 걸려 상당기간 고생을 했다. 연기자의 처지와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는 그이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생각된다. 그후 신인 0군은 그시대를 대표하는 주연급 스타로 성장하여 팬들의 사랑을 받는 존재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일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이는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후덕한 인품을 지닌 그런 사람이었다. 그이는 참으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다방면에 걸친 해박한 지식과 기지에 찬 유머 감각은 항상 주변의 사람들을 즐겁게 하였고 특히 그의 팔도 사투리는 그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달인의 경지에 있었다. 그와 함께 하는 술자리에서 기지에 찬 유머와 팔도사투리는 필자를 포복절도케 하여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한 단편이 되었다. 그이는 팝송에서 프로를 능가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북창동에 ''MEXICO''라는 조용하고 아늑하고 정겨운 살롱이 있었는데 우리 두 사람은 그곳 분위기가 너무 좋아 자주 찾곤 했었다. 당시 그곳에서는 ''코코부러더스''라는 이름으로 장우 씨와 박상규 씨가 라이브로 노래를 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갈 때마다 그이는 두 사람의 권유로 무대 앞에 나가 그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세 사람이 빚어내는 하모니의 앙상블은 그곳을 찾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으며 연속적인 앙콜을 유발하기도 했다. 참으로 아름답고 포근한 추억의 한편이라고 할 수 있다. 가정적으로나 개인 활동에 있어서 그이처럼 행복한 나날을 즐겼던 사람은 그리 흔치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할까. 그이에게는 오랜 동안 고통을 주었던 지병이 있었다. ''당뇨병''이 그것이다. 불치의 병이라는 ''당뇨병'' 평생을 함께 해야 한다는 ''당뇨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용하다고 이름난 의사는 다 찾아다녔고 병에 좋다는 처방을 다 써보았으며 효험이 있다는 민간요법을 찾아 전국의 방방곡곡을 누비다시피 했다, 병마를 이기고자 하는 그의 투병 모습은 옆에서 지켜 보기에는 너무나도 안타깝고 눈물겨운 것이었다. 그해의 추석 무렵으로 기억된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그의 부고가 내게 날아든 것이다, 아연실색한 필자는 곧바로 그의 영전으로 달려 갔다. 유족에게 들은 말에 의하면 간단한 검사를 받겠다고 제발로 걸어 들어간 사람이 눈깜짝할 사이에 의식을 잃고 손쓸 사이도 없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너무도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힌 노릇이다. 62세 한창 나이에 사랑하는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만큼 귀여운 딸 정화 양과 아들 상구 군을 남겨두고 이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등질 수 있단 말인가? 그이는 한 사람의 연기자이기데 앞서 종교적으로 신앙심이 두터운 가톨릭신자였다. 그이의 친가나 처가댁 모두가 독실한 신자 집안이다. 천주님께서도 너무나 무심하시지 어찌하여 이제 정말 뭘 좀 알고 일할 나이에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그이를 천주님 곁으로 불러간단 말입니까? 망연한 허탈감과 그동안 그이에게 너무나도 무심했던 나 자신에 대한 자책감으로 나는 회한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너무나도 큰 별을 잃은 것이다. 앞에서 나의 친구가 단언했듯이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커다란 연기자를 잃은 것이다. 중후하고 품위있는 그의 외모와 원숙한 연기력, 정답고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 포근하고 따뜻한 그의 마음씨 이 모두를 우리는 그이와 함께 잃은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이가 남기고 간 사랑하는 유족들은 그이를 잃은 슬픔을 극복하고 그이가 다 이루지 못한 유업을 잇기 위해 각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부인 최윤주 여사는 불우 이웃을 돕는 사회봉사로 눈코 뜰새없이 바쁘시고 딸 정화 양은 뉴욕대학에서 컴퓨터 아트를 전공하고 돌아와 아티스트로의 길을 다지고 있으며 아들 상구 군은 미국대학에 유학하여 연출을 전공하고 돌아와 현재는 단국대, 순천향대, 경인대, 한국사이버대학 등에서 후학지도를 하는 한편 한양대 박사 과정을 이수하느라고 여념이 없다고 한다. 이 자리를 빌어 이들 유족들에게 진심으로 따뜻한 위로의 말을 전하며 유명을 달리한 고인에게는 두 손 모아 명복을 빈다. 김기덕 (예술원회원) / 2003년 <프로필> 1936년 3월 27일 서울 출생 1998년 10월 7일 타계 1954년 경기고등학교 졸업 1956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미학과 2년 수료 후 도미 1961년 미국 마이애미 유니버시티 사학과 수료 1965년 김수용 감독의 < 갯마을 > 데뷔 <주요 경력> 탤렌트 협회회장, 제11대 국회의원,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 (주)범진흥업 대표이사 등 <수상 경력> 동아연극상, 한국연극영화 최우수연기상, 백상예술대상, 연기대상, 공로상, 특별상 제11회 한국방송프로듀서상 공로상수상 등 다수 수상 <주요 작품> 갯마을 , 용사는 살아있다 , 돌의 초상 , 돌종 , 목소리 , 연합전선 , 꽃네 , 동과 서 등
' 김기 감독님..' 얼마 전에 만났는데도 오늘 또 다시 그리워지는 이름... 30여 년을 충무로 거리를 거의 매일 붙어 다니다시피 한 감독님, 매일 목욕하고, 식사하고, 술마시고 수없이 많은 작품을 디스커션하면서 그림자처럼 함께하던 충무로 시절... 그러나 많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추억을 되새기고 싶어 충무로를 이따금 찾는 감독님을 자주 만날 수 없어 송구스럽고 아쉬워서 그리워지고 넉넉한 그 웃음소리가 듣고 싶어 가슴이 뭉클해 질 때가 많다. 그만큼 충무로는 많이 변해가고 있다. 정도 세월 따라 많이 떠나갔고 낭만도 찾기 어려운 거리 충무로, 많은 영화인들이 젊음을 함께 해온 충무로는 이름만 그대로이지 지금은 삭막한 거리에 삭풍만이 흩고 지나간다. 한때 화려했고 아름다운 얼굴들과 마주치고 정이 넘쳐 흘렀고 꿈과 희망이 명멸했던 거리 충무로에 김기 감독이 발을 디딘 것은 1957년경이다. 1929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김기 감독은 흥남화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민족의 비극 6,25전란 당시 단신으로 월남한 실향민이다. 김기 감독은 피난지 부산에서 동아대학 이종인 박사의 소개로 영화감독 이봉래 를 만나게 됐고 이감독의 조감독 써드로 영화와 첫 인연을 맺게 된다. 단신 월남해 사고무친이였던 김기 감독은 그때부터 이봉래 감독을 스승으로 모시고 희망에 찬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온몸에서 피가 터질 것 같은 열정으로 김기 감독은 영화에 매달렸고 그때 그의 눈에서는 시퍼런 불길이 쏟아지는 듯 했다고 한다. 그런 김감독의 열의에 애정을 가졌던 이봉래 감독은 다음 작품에서는 그에게 기록을 맡겼다.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당시에 기록이란 직책은 조감독 퍼스트에 버금갈 만한 위치였으니까.. 그렇게 조감독으로 끗발을 날리면서 오직 이봉래 감독 한 분을 일편단심 영화의 스승으로 모시고 7년여를 영화 속에 인생을 건 김기 감독에게 마침내 데뷔할 기회가 온다. 김기 감독의 영화감독 데뷔는 1964년, 영화계와 가요계에 일대 지각변동을 가져온다. 김기 감독이 첫 연출한 극영화 ' 동백아가씨 '는 1964년도 흥앵기록에서 2위를 멀찍이 따돌리고 흥행 톱이라는 획기적인 기록을 세우면서 멜로영화의 거장이 되는 빛나는 앞길을 약속 받았다. 동시에 가요계에서는 거의 무명이었던 여가수 이미자 가 영화 '동백아가씨'의 주제가를 불러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오늘날 국민가수 이미자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이렇듯 한 명의 걸출한 영화감독과 국민가수를 떠오르게 한 ' 동백아가씨 '는 드라마작가 추식이 집필한 라디오 연속극이 원작이였다. 당시 영화 기획자였던 노헌조 는 라디오 드라마를 사들고 시나리오작가 윤석주 에게 시나리오를 맡겼고 감독으로 기대주였던 조감독 김기를 선택한 것이다. 영원한 스승 이봉래 감독도 김기 감독의 데뷔를 진심으로 축하해 줬다. 부산 다대포에서 ' 동백아가씨 '를 크랭크인 하는 날 이봉래 감독은 부산까지 내려와 김기 감독이 연출하는 현장을 지켜보면서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고 '김기! 잘해라!' 하며 격려를 보냈고 ' 고맙습니다, 선생님!' 얼마나 멋진 스승과 제자의 모습인가? 영화 속에서 '동백아가씨'주제가는 이미자 의 노래를 립 싱크해서 바의 마담이 된 엄앵란 이 불렀다.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대학생 신성일 이 학습자료(꽃과 식물채집) 조사차 섬마을에 들어왔다가 실족하게 되고 섬처녀 엄앵란의 아버지 김승호 가 그를 구출해주면서 엄앵란과 신성일의 사랑은 싹튼다. 신성일은 기약없이 서울로 떠나고 엄앵란은 임신한 배가 불러오자 아버지 김승호의 눈을 피해 신성일을 찿아 서울로 올라온다. 갈 곳 없던 엄앵란이 깡패두목 황해 를 만나 보호를 받으면서 애를 낳고 바의 인기 마담이 돼서도 신성일을 못잊어 '동백아가씨' 노래를 부르는데 마침 바에 온 신성일이 엄앵란을 보게되고 다시 둘의 사랑은 뜨겁게 불붙는데.. 깡패두목 황해의 순정적인 사랑이 얽혀드는 전형적인 멜로 영화다. 지금으로선 진부한 스토리보드지만 1960년대 당시로선 손수건을 몇 개씩 적셨던 장안의 화제작이었다. ' 동백아가씨 '로 화려하게 데뷔한 김기 감독은 1965년 '여자가 고개를 넘을 때 '를 연출하면서 멜로 감독의 위치를 확고히 해놓고 세 번째 영화로 공군영화 ' 성난 독수리 '를 연출했다. 멜로 영화에서 갑자기 군사영화로 장르를 옮긴 것은 '동백아가씨'의 제작자 노헌조 의 친구였던 공군장교가 많은 소재를 제공하면서 공군영화제작을 요청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같은 해에 ' 첫사랑 ' 1967년에 ' 독거미 ' ' 남매 ' 1968년에 ' 연상의 여인 '에서 내가 시나리오에 참여한다. 소설가 곽학송 의 시나리오에 윤색으로 가담하면서 난 김기 감독과 바늘과 실처럼 30여년 가까이 소중고 행복한 인연을 이어온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에 한성영화사 정진모 사장이 제작한 '장마루촌의 이발사 '에 김기 감독과 내가 동승했다. '장마루촌의 이발사'가 제작되면서 참으로 희한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다. 내 친구 중에 도봉산 암자에 은거한 도사 한사람이 있었다. 김기 감독과 정진모 사장이 부인을 동반하고 나의 안내를 받아 유난히 더운 여름날 도사를 찾아간 것이다. 무더운 한여름 산행으로 땀에 훔뻑 젖은 우리 일행은 암자 앞에서 시원한 사이다를 마시고 있을 때 도사가 나타나서 대뜸 나를 가르키며 한다는 말이 '야, 너 왠 거지하고 같이 다니냐?' '거지라니? 임마! 한국영화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실 사장님을 거지라니?' 정진모 사장은 육척 거구에다 한여름에도 신사복에 중절모를 쓰고 다니는 신사이며 명동 주먹왕 이화룡 의 왼팔이었다. 한주먹에 내 친구 도사는 사망할 수도 있었다. 점을 보기는커녕 일촉즉발 험악한 사태를 김감독과 내가 기적적으로 진정시킨 건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뒤 도사의 말이 씨가 됐는지 '장마루촌의 이발사'는 그때 연일 계속된 한일협정 반대 데모로 인해 흥행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장마루촌의 이발사는 ' 연출력이 뛰어난 작품으로 평단의 찬사를 받았고 이에 탄력을 받은 김기 감독은 그 다음해에는 무려 7편을 연출하는 괴력을 발휘한다. ' 설녀 ' ' 초심 ' ' 목메여 불러봐도 ' ' 가슴에 맺힌 눈물 ' ' 울지도 못합니다 ' ' 한발은 지옥에 ' ' 용호7협 '등 다양한 작품들 일곱 편을 맹렬히 연출해 낸 것이다. 연이어 1970년에 ' 천사여 옷을 입어라 ' ' 울고간 여인 ' '' 일등사장 ' ' 돌아온 남아 ' ' ' 사랑에 목숨걸고 ' 등 5편을 연출하면서 김기 감독은 전성기를 구가한다. 1971년에는 ' 욕망의 사나이 ' ' 두남자 ' 1972년 ' 토요일 오후 '' 어머님전상서 ' ' 내실 사모님 ' 그리고 1973년 ' 어머니의 영광 '을 연출하고 김기감독은 자신의 인생에서 두 번째 행운의 전환기를 맞게 된다. ' 동백아가씨 '로 감독 데뷔를 한 것이 첫 번째 행운의 시동을 건 전환기라면 1973년 ' 여로 '를 제작과 감독을 겸한 것이 두 번째 행운의 신호탄이었다. ' 여로 '의 흥행은 가히 천문학적 인파를 동원했고 김기 감독은 마침내 황금마차를 탄다. 김기 감독이 감독 데뷔작이 라디오 드라마였고 그의 첫 번째 감독 겸 제작한 작품은 TV연속 드라마였다. TV 연속극으로 인기가 폭발했던 '여로'를 TV가 없어서 보지 못해 목이 탔던 사람들이 '여로'가 영화로 만들어져 극장에서 개봉이 되자 극장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말았다. 연속극에서 천정부지로 주가를 올렸던 인기스타 태현실과 장욱제가 영화에서도 그대로 출연해서 웃기고 울리자 관객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연속극으로 '여로'는 일년여 긴 시간을 웃기고 울렸다면 영화 '여로'는 단 두 시간 안에 울리고 웃기고 다해버리자 그 인기가 어땠는지 짐작이 간다.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전국의 흥행업자들이 ' 여로 '속편을 만들어 달라고 돈을 바리바리 싸들고 올라와 턱바치게 졸라댔다. 물론 김기 감독은 '여로'속편도 제작감독을 겸해서 발표했다. '여로'속편도 전편 못지 않게 대박을 터트렸다. 이때가 김기 감독의 영화인생 황금기의 시작이었다. 김기 감독의 잘다져진 연출력은 재력과 함께 빛을 더하면서 제작 겸업에서 떠나 연출에만 전념해서 수십 편의 명작들을 감독해 낸다.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 어렵게 명작들을 골라낸다면 우선 1978년에 언어의 마술사라는 드라마작가 김수현 이 소설로 발표한 '상처'를 김기 감독이 영화로 주옥처럼 빚어낸 것이다. 김자옥 과 이영하 가 주연을 한 ' 상처 '는 국도극장에서 개봉되어 다시 한번 관객들의 사랑을 받는다. 탈렌트였던 이영하는 '상처'에서 은막의 스타로 첫데뷔를 힌다. 그리고 탈렌트였던 원미경 이 영화배우로 데뷔한 첫작품이 김기 감독이 연출해서 대박을 터트린 ' 청춘의 덫 '(1979년)이었다. '청춘의 덫' 역시 김수현이 TV드라마로 발표하면서 인기 절정을 향해 달리던 중 방송심의위에서 방송중단 선고를 받은 작품이였다. 인기 드라마였으나 중도하차한 드라마라서 중반 이후부터는 이야기가 뭉텅 없었다. 김기 감독과 나는 '청춘의 덫'의 하체 만들기에 돌입했고 거의 몇 달을 목욕탕에 들어 앉아 땀을 빼가며 디스커션을 했다. 영화 ' 청춘의 덫 '에서 가난한 한진희는 회사원인 유지인 의 도움으로 대학을 졸업했으나 한진희 는 출세욕에 불타 유지인을 버리고 회장의 딸 원미경 유혹한다. 배신당한 유지인은 복수심을 이기지 못하고 회장의 큰아들에게 접근해서 한진희를 잘라버리려고 계략을 꾸민다. 여가서부터 드라마에 하체가 없는 거였다. 나는 시나리오에서 하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진희는 유지인의 계략을 간파하고 우여곡절 끝에 유지인을 선제공격키로 하고 유지인을 살해한뒤 시체를 유기한다. 그리고 돌아오던 한진희는 흥분한 나머지 차의 핸들을 잘못 꺽어 차가 천길 벼랑으로 굴러 사고사를 당한다. 며칠 후 한진희의 무덤에 목례를 하고 떠나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유지인이였다. '청춘의 덫'도 극장개봉에서 대박을 터트려 제작회사를 돈방석에 올려 놓는다. 실향민인 김기 감독은 남북 문제를 심층 있게 다뤄낸 문제작 ' 남과북 '를 1984년 연출해서 비상한 관심을 끌어 모았고 여세를 몰아 1985년에는 문예작품 ' 화녀촌 '을 만들어 예술작품을 만드는 감독의 대열에 당당히 합류한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연출한 극영화가 51편 군홍보영화 걸작들이 30여편 모두 80여편의 영화를 연출하고 마지막 작품으로 이광수 원작 ' 유정 '을 만들고 조용히 충무로에서 비켜난다. 김기 감독 그의 인생 사전에 '실례'란 단어는 찿기 어렵다. 좀처럼 남한테 실례를 하지 않는 영화감독 김기. 그를 처음 사귀기는 좀 어렵다는 사람이 있다.그러나 한번 알게 되면 영원불멸의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다정다감한 충무로의 신사이다.단언할 수 있는 것은 김기 감독을 좋아하지 않는 영화인은 없다. 그만큼 그는 인간관계의 폭이 넓다.그중에도 이미 고인이 된 김응천 감독, 그리고 설태호 감독, 조문진 감독, 문여송 감독과도 교분이 두터웠고 시나리오작가로는 내가 김기 감독의 곁을 가장 많이 지키지 않았나 싶다. 많이 변했고 많이 좋아졌고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화려했던 충무로 시절, 주인의 한사람이었던 김기 감독이 이젠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고 비켜섰지만, 언제나처럼 건강한 모습으로 충무로에 자주 보이시기를 소망한다. 문상훈(시나리오 작가) / 2003년 <프로필> 1929년 2월 15일 함흥 출생 흥남화학전문학교 졸업 1964년 < 동백 아가씨 >로 데뷔 <작품 연보> 1964 동백아가씨 1965 여자가 고개를 넘을 때 / 성난 독수리 1966 첫사랑 1967 독거미 / 남매 1968 연상의 여인 / 장마루촌의 이발사 1969 설녀 / 초심 / 목메어 불러봐도 / 가슴에 맺힌 눈물 울지도 못합니다 / 한발은 지옥에 / 용호칠협 1970 천사여 옷을 입어라 / 울고 간 여인 / 일등사장 / 돌아온 남아 사랑에 목숨걸고 1971 욕망의 사나이 / 두 남자 1972 토요일 오후 / 어머니 전상서 / 내실사모님 1973 어머니의 영광 / 여로 / 배뱅이 1974 속 여로 / 가버린 사랑 / 설야 1975 형사 배삼룡 / 반수반인 1976 졸업생 1977 별삼형제 / 병사와 아가씨들 1978 상처 1979 돌의 초상 / 청춘의 덫 1980 여자이기 때문에 / 마지막 밀애 1981 겨울에 내리는 봄비 1982 유혹 / 겨울사냥 1983 약속한 여자 1984 남과 북 / 도시에서 우는 매미 1985 초야에 타는 강 / 화녀촌 1987 유정 외 80 작품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