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 핵 발전소
- 감독
- 야마카와 겐
- 제작년도
- 2002
- 출연
- 야쿠쇼 코지
거창한 의미 부여할 것 없다. < 극장판 체인소맨: 레제편 >(요시하라 타츠야, 2025, 이하 ‘체인소맨: 레제편’)은 소년만화 저변에 깔린 결핍을 건드리는 고자극 드라마다. 원작 만화의 저변에 깔린 온몸 비틀기 삐딱선과 달리 이번 극장판은 떡밥을 뿌리고 정직하게 회수하는 모범생의 면모를 선보인다고 해도 좋겠다. 다만 강렬하고 직관적인 이미지 자극을 곁들여서. 스핀오프처럼 다소 결이 다른 스페셜 이벤트 같은 에피소드였기에 가능했던 잠깐의 일탈, 쉼표, 한여름밤의 꿈 같은 에피소드였다. 마찬가지로 고자극의 작화와 눈알이 시려울 정도로 화려한 액션 시퀀스를 곁들여서. 요란하고 화려한, 사상 최대의 연애 싸움을 시각적으로 재구성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재밌지만, 시간의 풍화를 뛰어넘는 명작이라고 보긴 어려울 것이다. 어떤 지표와 분기로 작용할 만한 깊이를 보장하는지도 모르겠다. 지극히 취향 저격의 안전하고, 검증되고, 무난한 작품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러므로 이 범상한 애니메이션은 매우 사사로워질 자격을 획득했다. 너도 재밌고, 나도 재밌었다는 취향의 확인. 그리하여 의미를 찾아 헤매기보다는 즐거움의 안도감을 안기는 고백적인 작품이다. 영화를 향한 애니메이션, 순애의 재발견 2025년은 애니메이션의 강세가 확연한 한 해였다. 넓게 보면 영화산업의 (쇠퇴와는 결이 다른) 구조적 변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비단 한국 시장만의 흐름이 아니지만 한국 시장에서 더 도드라지는 것도 사실이다. < 주토피아 2 >(자레드 부시, 바이런 하워드, 2025)가 2025년 전체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건 기존의 관성을 비춰볼 때 당연하다. 가족 관객을 타겟으로 한 검증된 IP의 속편이, 완성도와 무관하게 더 큰 흥행을 거두는 건 늘 반복되는 공식이나 마찬가지다. 반면 <체인소맨: 레제편>을 향한 호감과 열기는 단순히 수치적인 흥행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흥행 면에선 <귀멸의 칼날> 등 재패니메이션과 같은 흐름으로 묶을 수도 있겠지만 작화를 통해 쾌감을 준다는 면을 제외하곤, <체인소맨>은 다른 입장에 서 있다. <체인소맨>이 이번 극장판 레제편에서 맑게 길어 올린 부분은 한동안 일본 만화에 번졌던 유행 같은 감각, 이른바 순애의 연장선에 있다. 후지모토 타츠키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단순한 소년만화의 극장판 확장이 아니다. 차라리 폭력의 세계에 던져진 두 괴물이 서로의 상처를 핥으며 나누는, 가장 기괴하고도 아름다운 ‘보이 미츠 걸(Boy Meets Girl)’의 변주다. 스크린에 펼쳐지는 이 세계는 언제나 젖어 있다.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 그리고 끊임없이 내리는 비의 눅눅함이 화면 너머로 전해진다. 덴지라는 인물은 태생적으로 결핍의 덩어리다. 그에게 욕망은 거창한 세계 구원이나 정의 구현이 아니라, 잼 바른 식빵이나 따뜻한 잠자리, 그리고 이성을 향한 원초적인 호기심 같은 것들에 머물러 있다. TV 시리즈가 덴지의 그 동물적인 감각과 혼돈을 거친 선으로 그려냈다면, 이번 <체인소맨: 레제편>은 그 혼돈 속에 싹튼 ‘첫사랑’이라는 감정을 포착하기 위해 카메라의 심도를 깊게 가져간다. <체인소맨: 레제편> 중 / 사진: IMDb , ⓒ 2025 M/CSMP ⓒTF/S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가 가진 특권 중 하나는 현실의 물리학을 무시하는 과장된 움직임, 흔히 데포르메라고 불리는 의도된 작화 붕괴다. 하지만 <체인소맨: 레제편>은 그 과장됨 속에 기묘한 리얼리티를 부여한다. MAPPA의 제작진은 인물의 미세한 표정 변화, 특히 레제의 얼굴에 스치는 홍조나 덴지의 당황한 눈동자 등 감정의 떨림을 집요하게 포착한다. 액션 시퀀스에서의 속도감은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타격의 무게감이 관객의 뼈까지 전해지는 듯하다. 태풍의 악마를 타고 도심을 질주하는 장면이나, 덴지와 레제가 공중에서 얽히며 싸우는 클라이맥스는 애니메이션이 도달할 수 있는 역동성의 극단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미묘한 리얼리티의 근간에는 원작자의 시점이 투영되어 있다고 믿는다. TV 오프닝에서부터 고백하고 있듯 후지모토 타즈키 작가의 실천에는 영화, 달리 표현하면 카메라의 위치과 프레임에 대한 고민이 동반되어 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체인소맨: 레제편> 역시, 아니 더욱 노골적인 방식으로 거의 모든 컷의 근간에 실사 영화에 대한 향수가 묻어 있다. 겪어보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첫사랑의 노스탤지어 노스탤지어는 영원히 그곳에 다다르지 못하는 것을 전제로 피어난다. 덴지와 레제가 맺어지지 못하는 것으로 애틋함의 감흥을 자아내는 것처럼, <체인소맨: 레제편>의 동력도 실사 영화에 대한 동경과 애정이 깔려 있다. 이것은 상하 혹은 우열의 관계가 아니다. 애니메이션은 실사 영화와 다르고 실사 영화가 될 수 없다. 그 구분을 전제로 하여 한없이 영화에 가깝게, 하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다르고자 할 때 여타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오리지널리티가 피어난다. <체인소맨: 레제편>의 오리지널리티는 노골적인 애정고백을 바탕으로 한 빽빽한 오마주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덴지와 레제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메타포인 이솝 우화의 ‘시골 쥐와 도시 쥐’ 이야기는 덴지와 레제, 두 하이브리드(인간과 악마의 융합체)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으로 치환된다. 시골 쥐의 평온하지만 배고픈 삶과 도시 쥐의 풍요롭지만 위협받는 삶. 덴지는 언제나 도시 쥐의 삶 속에 던져져 있었으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시골 쥐의 안온함을 갈구해왔다. 레제는 그런 덴지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어디에 속하고 싶으냐고. 이것은 ‘자유’와 ‘통제’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공안 대마특이과라는 시스템(도시) 안에서 사육되는 덴지와, 그 시스템을 파괴하러 온 외부의 존재 레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진영에 서 있는 듯하지만 실상 누군가의 도구로 쓰인다는 점에서는 거울상처럼 닮아있다. 레제는 마키마의 안티테제로 만들어진 캐릭터답게 첫사랑의 이상향을 응축시켜 놓았다. 진정 비현실적인 부분이 있다면 악마로 변하는 이들의 능력이 아니라 소녀가 소년을 만나는 상황 그 자체라고 해도 좋겠다. 레제가 덴지에게 가르쳐주는 수영법, 카페에서 나누는 대화들은 그들이 ‘무기’가 아닌 평범한 ‘소년소녀’로 존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시간이다. 사진: IMDb( 1 , 2 ) 감독은 이 딜레마를 시각적으로 탁월하게 구현한다. 레제의 폭발은 화려한 불꽃놀이처럼 묘사되는데, 그녀의 머리가 폭탄으로 변하고 사지가 터져 나가는 그로테스크한 변신 장면은, 혐오스럽기보다는 일종의 해방감마저 준다. 화약(gunpowder)과 꽃(flower).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조합처럼, 레제는 치명적이지만 끝내 질 수밖에 없는 꽃이다. 덴지가 그녀에게 건네려 했던 꽃다발, 그리고 마지막 카페 씬에서 들리지 않는 종소리는 이 영화가 결국 ‘실패한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임을 상기시킨다. 체인소 역시 피를 뒤집어쓸 때 비로소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존재다. 억눌린 감정이 터져 나올 때의 카타르시스는 체인소의 소음과 겹쳐진다. 그들에게 사랑은 서로를 안아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부수고 태워버림으로써 완성되는 파괴적인 제의(祭儀)와 같다. 그리하여 이들이 빗어내는 시끄러운 소음, 불협화음은 불쾌감 이면에 애잔함을 베이스로 깔고 있다. 폭탄의 악마가 터뜨리는 굉음은 청각을 마비시킬 듯 몰아치지만, 역설적으로 이 영화가 가장 빛나는 순간은 폭발의 순간이 아니라, 폭발 직전의 고요함, 혹은 폭발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재(ash)의 정적에 있다. 태풍이 지나가고 당신의 뇌리와 망막에 남는 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던 덴지가 레제와 함께 학교 수영장에 잠입해 밤의 유영을 즐기는 시퀀스이리라 믿는다. 물의 질감, 달빛이 부서지는 수면, 서로의 몸짓을 훔쳐보는 시선은 액션 장르의 문법을 잠시 잊게 할 만큼 서정적인 이 장면에는 이뤄지지 못할 순수이기에 성립되는 아름다움이 있다. 마치 도화선에 불이 붙어 타들어가고 있는 줄도 모른 채, 그 불꽃의 반짝임이 예뻐서 넋을 잃고 바라보는 아이들의 위태로운 아름다움. 고백하자면 한동안 좋은 걸 그냥 좋다고 말하지 못했다. 의미를 찾아다니고 가치를 부여해야만 한다는 강박의 저주에 빠진 것 같았다. 때론 있지도 않은 의미를 찾느라 아는 척, 감동 받은 척, 거짓된 취향을 무장한 적도 있다. 어떤 척을 하는 걸 나쁘게 보지 않는다. 그건 갈망이자 방향이며 강렬한 에너지다. 스스로 정한 이상에 도달하려고 발버둥치는 사이 단련되는 부분도 있고, 때때론 그 과정과 행위 자체가 자신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종종 너무 멀리 와버려 지금 어디에 떠 있는지 위치를 확인하기 어려운 순간이 다가온다. <체인소맨: 레제편>은 그때 발견한 작은 등대 같은 작품이다. 직관적으로 재미있고, 익숙하고 빤해서 더 마음이 가는 쉼터. 재밌는 걸 그냥 재밌다고 말할 수 있는데도 적잖은 용기가 필요하다. 되돌아보니 우리는 모두 한때 덴지였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그저 눈앞의 다정함에 목을 맸던 시절.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한때 레제였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혀야만 내가 살 수 있었던, 거짓말로 진심을 감춰야 했던 시절. 굉음이 남긴 이명(耳鳴)은 꽤 오랫동안 귓가에 머물 것이다. 사진: IMDb 송경원(씨네21 편집장) l 영화 논문, 비평, 기자 글쓰기까지, 영화에 대한 서로 다른 리액션 사이에서 흔들리고 방황한지 15년. 이제야 영화 글쓰기가 나의 직업이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2023년 《 씨네21 》 편집장이 되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할 때, 밤하늘의 별자리를 찾듯 영화를 보고, 읽고, 쓴다. 2009년 《씨네21》 영화평론상 수상, 2011년부터 부일영화상, 부천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서울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심사위원 등 역임. 『프로듀서』(2019), 『만화 웹툰 작가 평론선―이충호』(2021), 『마음의 일렁임은 우리 안에 머물고』(2021, 공저), 『얼룩이 번져 영화가 되었습니다』(2024) 등 집필.
한국영상자료원은 2006년 2월 2일,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를 오픈했다. 그리고 오늘 2026년 2월 2일. KMDb는 20주년을 맞이한다. 우리는 KMDb를 기획·구축하며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한참 고민했다. 누군가 ‘무비씨’라는 이름을 제안한 적이 있다는 것은 기억나고, 그러나 아무래도 어딘가를 따라 한 것 같지만 그 이상의 이름은 없다고 판단해 KMDb로 지었다. 그리고 한국영상자료원은 kmdb.or.kr 도메인을 구매했다. KMDb에는 20년간 생겼다 없어진 콘텐츠와 기능이 많다. 초기에는 사용자가 직접 정보를 입력하는 기능도 상당했으나 생각보다 양질의 정보가 들어오지 않았고 무엇보다 관리가 어려워 하나둘 폐기하기 시작했다. 애니메이션과 독립영화 전용 KMDb를 따로 만들었을 때도 있었다. 지금은 모두 통합된 상태에서 최대한 간결한 기능과 콘텐츠로 운영하는 중이다. KMDb를 준비하며 호기롭게 “풀 크레딧을 가지고 갑시다!”라는 (제안을 내가 한 것 같고 그래서) 고생문이 활짝 열린 정책을 시작하며 힘들기도 하고, 하지만 그로 인해 어디에도 없는 데이터를 보유하게 된 KMDb는 영화·영화인 DB 서비스뿐 아니라 VOD로 한국고전영화 스트리밍을 시작했고, 영화글로 다양한 필자의 글을 소개했으며 리스트와 컬렉션이 순차적으로 오픈해 지금에 이르렀다. 2006년 2월 1일. 오픈 전날 디지털정보화팀의 담당 세 명은 그제야 동명이인에 대한 이슈를 발견하는 사고를 친다. 비슷비슷한 나이의 정유미 배우가 하나가 아니고 무려 세 명이래! 라는 비명을 한밤중에 지르며 당시만 해도 30대 초반이었던 그들은 할 수 있는 데까지 인물을 분리하며 밤을 지새다 퇴근해 다음 날 오픈시켰다. 그리고 그 동명이인 이슈는 지금까지도 완전하지 않다. 완전할 수가 없다. IMDb도 어쩔 수 없다며 고개를 젓는 이슈를 KMDb 라고 별수 있겠는가. IMDb 매니저는 이름이 짧은 한국 인명으로 동명이인에 대한 고충이 더 심하겠다며 나를 위로했다. 성명이 “정유미”인 배우 3인에 대한 KMDb 영화인 정보 KMDb는 영화·영화인 데이터의 완벽함을 사수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며, 이제는 영화인이 자신의 필모를 증빙하기 위한 웹사이트로 그 공신력을 인정받고 있다.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그러다 보니 문득 KMDb에 쌓인 데이터가 어떤 모양새인지 궁금해졌다. 혹시 사용자들도 궁금해할까? KMDb 20주년 이벤트를 근사하게 할 수는 없겠지만, 데이터로 가득한 사이트의 20년 묵은 통계를 소개하는 것이 가장 어울리는 축하가 아닐까 생각했다. 별다른 코멘트 없이 지난 20년의 통계 10선을 소개한다. 1. KMDb에 등록된 한국영화(극·비극) 의 수: 50,787편 2. KMDb에 등록된 한국영화인 의 수: 83,279명 3. 가장 많이 접근된 영화인 페이지 정윤희(1위), 임권택(2위), 신성일(3위) / 사진: 전승열, 정기성 1위 | 정윤희 2위 | 임권택 3위 | 신성일 4위 | 김기영 5위 | 이상사 6위 | 김지미 7위 | 박노식 8위 | 김진규 9위 | 신상옥 10위 | 안성기 4. 작품 리스트(필모그라피) 가 가장 많은 영화인 1위 | 현동춘 | 편집 | 994편 2위 | 김희수 | 편집 | 863편 3위 | 최형래 | 음향효과 | 850편 4위 | 손인호 | 음향효과 | 793편 5위 | 김기범 | 배우 | 753편 6위 | 허장강 | 배우 | 687편 7위 | 임해림 | 배우 | 660편 8위 | 김재경 | 음향효과 | 657편 9위 | 윤일주 | 배우 | 650편 10위 | 최남현 | 배우 | 609편 5. 한 작품(장편영화)에 가장 많은 크레딧 을 올린 영화인 1위 | 노영석 | THE 자연인 (노영석, 2023) | 17개 공동 2위 | 박용철 | 싸이더:애,심 (박용철, 2019) | 16개 공동 2위 | 준오 | 휴게소 (준오, 2016) | 16개 ※ 노영석 감독은 <THE 자연인>에서 감독, 각본, 출연, 프로듀서, 촬영, 조명, 편집, 음악, 미술, 의상, 동시녹음, 사운드(음향), 시각효과, 색보정, 예고편, 포스터, 기타스탭(캘리그라피)을 담당함. 6. 참여 스태프 가 가장 많은 영화 <한산: 용의 출현>(1위) 1위 | 한산: 용의 출현 (김한민, 2022) | 1,665명 2위 | 백두산 (이해준, 김병서, 2019) | 1,612명 3위 | 안시성 (김광식, 2018) | 1,502명 4위 | 미스터 고 (김용화, 2013) | 1,492명 5위 | 신과 함께–죄와 벌 (김용화, 2017) | 1,487명 7. 상 을 가장 많이 받은 영화 1위 | 기생충 (봉준호, 2019) | 58회 2위 | 헤어질 결심 (박찬욱, 2022) | 45회 3위 | 추격자 (나홍진, 2007) | 41회 4위 | 올드보이 (박찬욱, 2003) | 40회 공동 5위 | 괴물 (봉준호, 2006) | 31회 공동 5위 | 벌새 (김보라, 2018) | 31회 ※ KMDb에서 관리하는 영화제·시상식에 한함 8. 리스트에서 본 영화로 가장 많이 체크된 작품 <올드보이>(1위), <괴물>(2위), <기생충>(3위) / 사진: 디씨어터 1위 | 올드보이 (박찬욱, 2003) | 2,581명 2위 | 괴물 (봉준호, 2006) | 2,355명 3위 | 기생충 (봉준호, 2019) | 2,178명 4위 | 살인의 추억 (봉준호, 2003) | 2,055명 5위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미야자키 하야오, 2001) | 1,672명 6위 | 아가씨 (박찬욱, 2016) | 1,648명 7위 | 공동경비구역 J.S.A. (박찬욱, 2000) | 1,574명 8위 | 마더 (봉준호, 2009) | 1,533명 9위 | 헤어질 결심 (박찬욱, 2022) | 1,515명 10위 | 8월의 크리스마스 (허진호, 1998) | 1,438명 ※ 박찬욱 감독 작품 4편, 봉준호 감독 작품 4편 9. 리스트에 본 영화 체크를 가장 많이 한 사용자 1위 | bo**** | 2,076편 2위 | ha**** | 1,865편 3위 | gs**** | 1,747편 4위 | ba**** | 1,696편 5위 | in**** | 1,636편 ※ ****는 ID의 글자 수와 일치하지 않음. 10. 가장 많은 조회수의 영화글 1위 | “ [시네필 안내서]서문: 시네필의 세계로 들어서고 싶은 당신에게 ” (영화천국 Vol.48) | 정성일 | 91,634회 사실 진정한 20주년 이벤트라면 올해 KMDb가 전면 개편된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득하지만 어찌 됐든 2026년 말 새로운 KMDb가 문을 열 것이다. 오랜 KMDb 관여자로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묻는다면, 20년이 지난 이젠 누구나 KMDb를 KMDb(b를 소문자)로 써주길 바란다는 것 정도. 소박한 바람으로 글을 마친다.
조선극장 흥행광고 3호 중 일부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다시 만난 세계: 식민지 조선의 극장문화 이야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를 바탕으로 역사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와 행간 속에 숨겨진 욕망들을 재조명합니다. 조선극장 은 단성사 와 더불어 식민지기의 대표적인 조선인 극장으로 손꼽혔던 곳이다. 그러나 ‘경성의 일류 극장’이라는 명성이 무색할 만큼 조선극장은 유독 ‘스캔들’의 진원지로 호명될 때가 많았다. 객석에서 발생한 삐라 살포 사건이나 극장 주위에 진을 친 폭력단들의 범죄행위도 여러 차례 신문 지상에 오르내렸지만, 무엇보다 빈번했던 것은 극장 경영권을 둘러싼 내홍 에 얽힌 이야기들이었다. 실제로 조선극장의 운영 기록(1922~1936)을 살펴보면, 일시 휴관을 선언하고 극장 문을 닫는 일이 적지 않았는데 주된 원인은 경영권 분쟁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으며 극장이 재개관할 때는 대개 새로운 경영주의 취임 소식을 동반하곤 했다. [1] 이는 단성사가 경영주 박승필 의 수완과 카리스마에 힘입어 안정적인 경영 체계를 구축해 나갔던 것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사실 조선극장의 경영권 분쟁은 탄생 시점부터 어느 정도 예견되어 있던 사태였다. 동양생명보험회사 경성지부장으로 근무하던 일본인 시택근차랑(矢澤近次郞)은 얼마간의 자금을 모아 사업에 뛰어들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이때 지인을 통해 소개받은 사업 파트너가 바로 황원균이었다. 두 사람은 극장업을 시작해보기로 의기투합한 후 본격적인 절차에 착수했다. 시택근차랑이 자금을 대고, 황원균이 흥행장 건축허가를 비롯한 실무를 담당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니 실질적인 지배권은 시택근차랑에게 있었겠지만 문제는 서류상의 소유주가 황원균의 이름으로 명시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당연히 시택근차랑은 명의변경을 요구했고, 황원균은 영업 개시 전에 명의변경을 하면 신용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약속을 차일피일 미뤘다. 결국 두 사람의 갈등은 법정 공방으로 이어지기에 이른다. 이후 시택근차랑은 건물 소유권을 동경 건물회사에 판매한 후 조선극장에서 발을 뺐다. 다만 동경 건물회사는 조선극장의 흥행권, 즉 직접적인 운영에 관여하지는 않았고, 실질적인 운영 책임을 담당한 것은 ‘지배인’으로 취임한 조선인 흥행주들이었다. 점차 흥행권은 소유권과 별개의 권리처럼 유통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일정한 비용을 지불하고 조선극장의 흥행권을 양도했던 사례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2] 1926년에는 변사 김조성 이 새로운 흥행주로 취임하게 되었으나 극장 자금을 유용했다는 혐의를 받아 관원들과 갈등을 빚은 끝에 3개월 만에 물러나게 되었고, 차영호, 현철, 김영식, 이필우 , 이태진 등이 공동 혹은 개인 명의로 경영권을 승계했으나 대개는 1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만큼 1920년대 조선극장의 경영은 불안정했던 것이다. 심지어 1928년 8월에는 연이은 휴관사태 속에 위기의식을 느낀 관원들이 공동명의로 흥행주 역할을 맡아 1년간 경영을 이어나가기도 했을 정도였다. 조선극장의 경영이 비교적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안봉호와 신용희 가 이태진으로부터 경영권을 인수한 1929년부터의 일이었는데, 안봉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경영권을 넘기고 손을 뗐기에 실질적으로 조선극장의 흥행권을 행사했던 인물은 지배인으로 취임한 신용희였다고 볼 수 있다. (좌) 조선극장의 모습 (사진: “ 조선극장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 조선극장 개관 관련 신문 광고 (사진: “ 개장피노 ”, 《동아일보》, 1922. 11. 7.) 한편 조선극장의 경영구조는 1931년부터 기존과 사뭇 다른 방식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1931년 7월에 창립한 조선흥행주식회사 는 흥행업에 포함된 제반 사업들을 모두 아우르는 데 목표를 두고 있었다. 즉, 제작, 배급, 상영의 수직적 통합 을 통해 최대한의 이익을 확보하려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조선극장은 개인 경영 방식을 벗어나 조선흥행주식회사의 직영관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조선흥행주식회사의 사장은 평양에서 고무공장을 운영하던 사업가 정완규가 맡았으며, 안봉호로부터 경영권을 인수한 정현국은 전무취체역을 담당했다. 그리고 신용희는 조선극장 지배인과 조선흥행주식회사 상무취체역을 겸임하게 되었다. 조선흥행주식회사의 창립과 직영관 제안은 조선극장 입장에서도 충분히 매력을 느낄 만한 사안이었다. 발성영화로의 전환 과정에 직면한 식민지 조선의 극장들은 기로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무성영화보다 과중한 필름 대여료를 지불해야 했고, 장비 설비에도 목돈을 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전면적인 발성영화 전환을 천명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위험을 감수해야 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점차 관객들의 취향이 무성영화를 ‘재래의 저급 취향’으로 낙인찍는 경향이 현저해지고 있던 상황에서 무조건 무성영화의 재탕 상영을 반복하기도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금 8만원을 들여 출범한 조선흥행주식회사는 든든한 뒷배 역할을 해 줄 수 있었으며, 실제로 조선극장은 라이벌 관계에 놓여 있던 단성사보다 적극적으로 발성영화 전환을 시도 하며 시장의 트렌드를 주도해 나갔다. 재계 공황의 영향으로 말 못 된 흥행계는 예년에 비하야 참경에 빠진 셈인데 더구나 영화계는 조금도 새로운 면목을 보여주지 않고 다만 재삼 상영한 영화를 최염가의 관람료로써 상설관의 수명을 연장시켜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형편이었으나 기신양행(紀新洋行) 겸 조선극장의 지배인 신용희(申鎔熙) 씨가 일본에 갔다 오고 일본 동화상사(東和商事) 사장이 구라파에서 돌아오는 길에 동화상사 조선지점장인 고윤묵(高潤黙) 씨와의 회견으로 기신양행 측에서는 순전한 『토-키-』 배급 , 동화상사 측에서는 구라파 특작 무성영화 로써 영화배급전이 개시될 모양인데 무성영화 측에서는 이미 명작을 계약하야 수입 중이라 하며 기신양행 측에서는 조선극장에 불일간 『토-키-』영사기계를 장치하여 일반의 목을 놀래일 예상 인데 실패한 기왕에 일본제의 『토-키-』영사기계와는 달라서 이번의 것은 순미국제를 사드려 임이 『파라마운트』 회사의 『모로코』를 위시하야 『명작 토-키-』를 계약하였으므로 조선극장에서는 가을에는 얼마동안 『토-키-』 전문으로 흥행- 『단성사』에서는 무성구라파영화로써 영화전이 개시될 모양이라 한다. 기신과 조극 측에서는 과연 완전한 토-키-를 보여줄 것이며 동화상사 측에서는 과연 구라파의 명작을 가지고 『토-키-』의 새 진영을 돌파할지 일반 영화『팬』의 흥미를 자아내고 있다 한다. - 기사, “금추 흥행계는 발성 무성 영화전 - 기신 측엔 토-키- 상사 측엔 무성”, 《조선일보》, 1931. 8. 25. - 한국영상자료원 편,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1 』, 1,114쪽. 1931년 가을 흥행 시즌 당시 단성사와 조선극장이 보여준 노선은 명확하게 엇갈렸다. 단성사가 명작 무성영화 전문관을 표방하며 유럽산 특작 영화들을 전면에 배치하려 한 반면, 조선극장은 기신양행과 손을 잡고 “순전한 토키”들로 프로그램을 채우고자 한 것이다. 주목할 것은 조선극장이 기왕의 일본제 발성영사기보다 훨씬 우수한 미국제 장비(RCA)를 전격적으로 사들였다는 점이다. 구매 시기를 고려할 때, 조선극장이 이처럼 공격적인 설비 투자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조선흥행주식회사의 자본력에 힘입은 바 컸다고 볼 수 있다. 조선극장과 달리 유럽산 특작 무성영화를 전면에 내세운 단성사의 모습 (자료 출처: 『大京城都市大觀』(朝鮮新聞社, 1937), 映畫常設館ノ部 / 사진: “ 단성사 ”, 서울역사아카이브, 서울역사박물관) 단성사와 조선극장의 상반된 행보는 여러모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싸움의 승패는 곧 발성영화 전환 문제에 있어 향후의 행보를 결정지을 만한 바로미터가 될 것이라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승부는 발성영화 전환이라는 과제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임을 각인 시키는 결과로 낙착되었다. 이듬해인 1932년 4월에 단성사와 우미관은 발성영사기를 구매하고 토키의 상영 비중을 늘려나가며 뚜렷한 노선 변화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1932년 7월에 지난 1년간의 사업 융창을 자축하는 의미의 기념 상영회를 열었을 만큼 조선극장과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렇기에 1932년 10월에 조선극장 지배인 신용희가 일방적인 해고 통보를 받은 것 은 굉장히 갑작스러운 조치처럼 여겨질 만한 일이었다. 조선흥행주식회사 측은 신용희가 배임 행위를 저질렀다고 지목하면서 지배인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종용했는데, 신용희가 격렬하게 반발함에 따라 조선극장은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이나 일시 휴관 사태에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당시 신문기사를 통해 보도된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인생안내』 계약이 발단 / 정(鄭), 신(申) 양파로 대립 / 지배인은 건물 소유자와 악수 / 알력의 전말 내용 조선극장은 소화 四년 九월에 건물 소유자인 부내 황금정(黃金町) 二정목 五十九번지 동경건물주식회사(東京建物株式會社)와 임차계약(賃借契約)을 안봉호(安奉鎬) 씨가 체결하고 보증금(保證金) 六천 五백원을 내게 되었는데 그 후 소화 五년 七월에 정현국(鄭鉉國) 씨가 一만원을 내고 영업권리권(營業權利權)을 양수(讓受)하여 주식회사로 조직 후 조선흥행주식회사(朝鮮興行株式會社)를 조직한 나머지 정완규(鄭完圭) 씨가 사장(社長) 으로 취임하고 신용희(申鎔熙) 씨는 지배인(支配人) 으로 취임하여 정씨는 금전에 관한 일절 책임을 지고 신씨는 영업에 책임을 맡아 이래 경영을 하여 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날로 업적을 나타내어 작년에는 二, 三천원의 순이익까지 보게 되어 주주들 간에 상당한 배당까지 하게 되었다. 지난번에 인생안내(人生案內)라는 영화를 상영하려고 영화배급소와 계약 체결을 할 당시 조선극장 간부의 승낙 없이 자기 개인으로 약 四백원에 계약을 하여 가지고 극장 간부와는 五할 배당을 하자는 조건을 제출하였는바 이에 극장 간부 측에서는 동 극장에 지배인의 지위에 잇는 사람으로 당연히 극장을 대표하여 계약을 체결할 것인데 불구하고 개인의 계약이라는 것은 배신 행동이라 하야 지난달 중순경에 신씨에게 해임장을 발송 하게 되었다. 이에 분개한 신(申)씨는 극장 건물 계약관계자인 목미(木尾) 씨에게 그 사실을 말하게 되자 전기 목미 씨는 신씨를 지지(支持)하는 터이라 결국은 정씨 일파와 신씨 일파 사이에 분쟁을 일으키게 되어 페관의 운명에까지 이른 것 이라고 한다. 관객을 위하야 애석한 일 - 사장 정완규 씨 담(談) 금번 분규사건에 대하여 사장 정완규(鄭完圭)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조선에서 몇 개 안 되는 흥행계에 극장 간부들의 분쟁으로 휴관까지 하게 된 것은 조선흥행계를 위하야 일반 사회 각 방면 인사에게 진실로 미안하기 끝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 간부는 어떠한 일이 있든지 양보를 하고 원만 해결을 지으려 합니다. 극장세만 하야도 九월에 七백 五十원 하든 것을 十월에 八백원을 내라고 하야도 아모 이의도 업시 그대로 다 지불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회사 규정에 의하야 부정한 행동이 있는 지배인 하나를 처치하엿다고 극장 계약자가 흥행을 못하게 하는 것은 너무나 횡포한 일 이 아닌가 합니다. 지난번에 처분한 신 지배인에 대하여도 처분을 관대하게 하기 위하야 九백원이라는 퇴직금까지 보내었습니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목미(木尾) 씨가 극장을 사용치 못하게 한다는 것은 신씨와 어떠한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일반대중을 위하여 너무나 애석한 일입니다. 장래를 위하야 해결에 노력 - 지배인 신용희 씨 담(談) 일찍이 동 극장의 지배인으로 있던 신용희(申鎔熙) 씨는 말하되 금번에 소위 배임행동이라고 하는 것은 지난번 인생안내(人生案內)를 계약하였을 당시에 四백원을 내 돈을 내어 계약을 하였다는 것이나 그것은 당시 간부들이 너무나 사진값이 비싸다고 계약하기를 주저하므로 만약 다른 극장에서 계약이나 하여 사진값이나 오르면 더욱 극장에 손해가 될 듯하기에 내가 먼저 계약을 한 것 입니다. 여하간 사실에 잘잘못은 어찌 되었든지 조선극장의 장래를 위하여 원만히 해결을 짓는 것이 좋을 듯하기에 해임장을 받고서도 정씨(鄭氏)를 방문하고 무조건으로 잘못하였다고 사과까지 하고 앞으로 사업을 계속하자고 하였으나 끝끝내 거절을 하므로 나는 부득이 극장 계약관계자 목미(木尾) 씨에게 그 사유를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목미(木尾) 씨의 방침은 사리를 모르는 회사 당국과는 계약은 하고 싶지 않다고 하며 회사라는 명칭을 떠나 개인으로 계약을 하고 싶다고 하는 중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목미(木尾) 씨는 나를 신임하느니만큼 내가 빠지어 다른 사람과는 계약을 하고 싶지 않다고 하는 중인데 현 간부 측에서는 나를 배척하니 앞으로 어찌될지 조선흥행계의 장래를 위하여 적지 아니한 걱정입니다 운운. - 기사, “『토키』영화의 전당 조선극장의 분규 - 휴관한 지 일개월에 아모 해결 업서”, 《매일신보》, 1932. 11. 28. - 한국영상자료원 편,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2 』, 1,382-1,383면. 사건의 발단은 한 편의 수입영화 계약을 둘러싼 이견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소비에트 영화 <인생안내>(니콜라이 에크, 1931)의 흥행가치에 주목한 신용희는 간부들이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개인 명의로 필름을 선구매했으며, 회사에는 추후에 수익금을 배분하리라고 통고했다. 그는 다른 극장과 경쟁이 붙어 필름 대여료가 폭등할까 우려했기에 불가피한 조치를 한 것이라 항변했지만,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이것이 엄연한 배임 행위라고 보았던 것이다. 다만 <인생안내>가 신용희의 기대처럼 수익 창출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회 부랑자 청소년들이 철도 노동자로 재탄생하여 사회주의 건설에 기여한다는 이야기를 담아낸 <인생안내>는 ‘노력영웅’의 숭고한 희생을 조명하는 데 초점을 맞췄을 뿐, 계급투쟁을 전면적으로 다룬 작품이라 하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신용희는 <인생안내>가 무난하게 검열을 통과할 것이라 보았고, 상영을 앞두고 주요 일간지에 특별광고를 커다랗게 게재했을 만큼 자신감을 보였다. [3] 그러나 <인생안내>는 개봉 다음 날 “사정에 의하야 중지”하게 되었다는 공지만을 남긴 채 사라져 버린다. [4] 필름 검열은 통과했지만, 조선극장에서 자체 제작한 선전문이 문제시되어 압수됨에 따라 상영 불허 처분이 사후적으로 내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5] (좌) 조극 흥행광고 3호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우) <인생안내> 포스터 및 스틸 (사진: “Putyovka v zhizn( 1 , 2 )”, IMDb) 그러나 상영이 중지되었다고 해도 <인생안내>는 신용희가 개인 명의로 구입한 필름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조선극장 측의 손해가 아주 컸다고는 보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도 조선흥행주식회사는 굳이 이 문제를 끄집어내어 신용희를 몰아내고자 했다. 아마도 이는 신용희의 개인 행동을 용인하게 된다면 장차 무척이나 불리한 선례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흥행주식회사는 극장업뿐 아니라 배급업에도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었기에, 신용희가 정상적인 배급 절차를 건너뛴 채 임의로 이익을 분배하게 되면 회사 측의 이익을 결정적으로 침해할 우려가 있었다. 그러므로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위험의 싹을 미연에 잘라 버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조선흥행주식회사가 신용희를 쉽게 몰아낼 수 없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조선극장에 대해 완전한 장악력을 갖고 있다고 보기 어려웠다. 조선극장의 흥행권에 대해서는 일정한 처분 권한이 있었을지 몰라도, 최종적인 결정권은 어디까지나 건물 소유주인 동경 건물회사 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해임장을 받은 신용희는 동경 건물회사 측 대리인을 맡았던 일본인 목미호지조(木尾虎之助)를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했고, 평소 신용희의 사업 수완을 신뢰했던 동경 건물회사는 즉각 극장 문을 닫으며 조선흥행주식회사를 압박했다. 동경 건물회사는 양자 간에 원만한 합의를 이루도록 종용했지만 신용희와 정완규의 협상은 끝내 결렬되었고, 조선극장은 조선흥행주식회사와 결별하는 길을 택한다. 조선흥행주식회사의 투자가 주로 발성영화 상영 환경을 마련하는 데 집중되었으므로, 새롭게 설비된 장비들의 소유권 또한 조선흥행주식회사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2년 12월에 조선흥행주식회사는 단성사와 새로운 계약을 맺고 조선극장에 설비되어 있던 발성영사 상영 장비를 철거해 단성사로 옮겼다 . 단성사는 1932년 4월에 일제 발성영사기를 도입했지만, 음향이 희미하고 잡음이 많았기에 장비 개선에 관심을 갖고 있던 중이었다. 계약 체결 직후 단성사는 최신의 미제 RCA 상영기를 장만했다는 점을 대대적으로 광고하며 모리스 슈발리에 주연의 발성영화 < 오늘 밤에는 사랑해 주세요(Love Me Tonight) >(로우벤 마물리안, 1932)를 상영하게 되었다. <오늘 밤에는 사랑해 주세요> 포스터 및 스틸 (사진: “Love Me Tonight( 좌 , 우 )”, IMDb) 창졸간에 장비를 잃은 상황에서 신용희는 새롭게 영사기를 장만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때 시간을 벌어 주었던 것이 바로 극장 대관업 이었다. 1932년 12월에는 새롭게 창단한 명일극장과 문외극단이 조선극장에서 연달아 연극을 올리게 되는데, 이는 극장을 마냥 닫아둘 수만은 없었던 흥행주의 입장과, 명망 있는 큰 무대에 서기 원했던 신생극단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신용희는 1929년에 지배인으로 취임한 직후부터 자체 레뷰단을 조직하여 공연을 올리고, 극단들에 무대를 대여해 주며 조선극장의 운영난을 타개해 나갔던 전력이 있었다. 영화 상영에 위기가 닥쳤을 때, 대관업을 적절히 병행하며 융통성을 발휘하는 데 능했던 그의 경영 노하우가 또 한 번 발휘된 순간이었다. 조선흥행주식회사와 신용희의 갈등은 연예사업 종사자 간에 일어난 단순한 알력관계를 넘어 여러 흥미로운 논점들을 수면 위로 밀어 올린 사건이었다.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영화의 제작, 배급뿐만 아니라 상영까지 포괄 가능한 회사를 목표로 삼았으며, 이는 영화산업의 수직적 통합 을 염두에 둔 행보였다. 그러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던 신용희 해고사태가 함의하듯 경영권 (조선인) 과 소유권 (일본인) 이 분리된 식민지 극장의 특수성 은 이러한 통합을 불가능하게 한 구조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신용희를 비롯한 조선인 극장의 경영자들이 발성영화 전환에 따른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방안으로서 대관업을 십분 활용 해 왔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즉, 1930년대 초반의 발성영화 전환기에 연극 흥행은 프로그램 운영의 윤활유 역할을 담당했으며, 극장업자들이 최소한의 자율성이나마 확보할 수 있도록 통로를 열어 주었던 것이다. *** [1] 이승희, 「조선극장의 스캔들과 극장의 정치경제학」, 『대동문화연구』 72,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0. [2] 1929년에는 안봉호가 이태진으로부터 6,500원에 경영권을 인수했으며, 1930년에는 정현국이 안봉호로부터 1만원에 경영권을 인수하였다. [3] 조선극장 특별광고, 《동아일보》, 1932. 9. 1., 2면. [4] 조선극장 광고, 《동아일보》, 1932. 9. 3., 6면. [5] 이 선전문은 전량 압수당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오늘날 전해지는 “조극 흥행광고 3호”가 <인생안내> 특별편으로 구성되었으며, 9월 1일자로 발간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것이 바로 문제가 된 선전문일 것이라 추정해 볼 수 있다.(대한민국역사박물관, 『자료로 보는 일제강점기 극장문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20, 196쪽.) “조극 흥행광고 3호”는 <인생안내>의 예술성과 제작진의 우수성을 상찬하는 내용으로 서두를 꾸몄는데, 불온성을 지적할 만한 내용이 크게 눈에 띄지는 않는다. 영화 줄거리에 대한 소개 역시 신문에 게재된 개요보다 약간 더 상세할 뿐 큰 차이가 없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인생안내>에 삽입된 노래들의 가사를 옮겨놓았던 부분이다. <인생안내>를 “젊은 노서아”의 太息이자 熱로 소개하면서 ‘권로가’, ‘유랑의 노래’, ‘철도사역’의 가사가 나열되고 있는데, “무로가 영원히 매장되도록” “진흙 속에 영원히 무너버리고저 한다”라는 선언이나, “ᄯᅡᆼ을 긁지만 말고 / 정말로 파 업흐라”라는 구호, “낡은 세계를 ᄲᅮ리채 / 단연히 잘나낼 것은 이 손이다” 등의 구절은 시각에 따라 직접적인 선동으로 해석될 만한 내용들이었다. 이광욱(극장문화사 연구자) l 읽고 생각하며, 말하고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과거의 기록을 뒤적이고 오늘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함께 미래를 고민한다.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조교수(동화 한국어문화학과), 한국영상자료원 객원연구원(『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 『드라마, 일상성의 미학』(2024) 공저, 「카프 연극대중화론의 전개와 송영 풍자극의 매체미학」(2018), 「도달한 임계점과 보존된 미래 – 발성영화의 정착과 경성 소재 조선인 극장의 연쇄 반응」(2021), 「표류하는 조선영화 : <임자 업는 나루배>에서 <정춘삼>으로 – 최초의 영화 판권 소송과 식민지 조선영화 시장의 추이」(2022) 집필.